“저는 주인공이었던 적도, 멜로 연기를 한 적도 없어요.” 켜켜이 쌓은 필모그래피로 대중의 사랑을 받은 베테랑 배우 윤유선(54)의 고백이다. 주연을 맡은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아쉬움이나 후회를 느끼지 않는다.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며 일터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고, 오랜 시간 변함없이 연기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하기 때문이다. 주어진 삶을 긍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윤유선은 사실 그만의 ‘행복한 인생’ 속 주인공이다.
일곱 살 때 영화 ‘만나야 할 사람’으로 데뷔한 윤유선은 48년간 ‘배우’라는 명함을 달고 있다. 배우로서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가장 고민이 많았던 때는 아역에서 성인 배우로 넘어가던 시기였다. 보통의 배우들처럼 당시 윤유선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역할은 무엇인지, 어떤 연기를 잘 소화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20대 때 이런 일도 겪었다. 윤유선은 미니시리즈 주인공으로 발탁됐는데, 맡은 역할은 패션 디자이너였다. 그런데 대본 리딩을 마친 후 다른 배우로 캐스팅이 교체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제작진은 윤유선이 역할을 소화하기에 통통하다고 생각했고, 교체를 강행했다.
윤유선은 한동안 힘들었지만, 금세 긍정적인 사고회로를 돌렸다. “그 배우가 그 역할을 정말 잘 소화했고, 나보다 훨씬 잘 어울렸다. 그리고 저도 혹독한 관리를 못 한 부분을 인정하기 때문에 후회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라고 그는 말했다. 더불어 48년의 롱런 비결에 대해 “욕심이 많지 않았던 게 비결이라면 비결인 것 같다”고 겸손한 발언을 했다.
“물론 욕심을 내서 일을 더 열심히 했으면 지금보다 더 잘 됐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저는 온 힘을 쏟지 않아서 지치지 않았고, 즐기면서 일한 덕분에 지금까지 배우로 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인지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연기하는 게 재밌어요. 일을 오래 하는데 재미를 느끼기란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저는 지금 이렇게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 감사함을 많이 느껴요. 그리고 저는 세상에 완벽한 건 없다고 생각해요. 완벽을 기대하면서 살면 너무 힘들죠. 여러분도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면서 웃으며 살면 좋겠습니다! 저는 아침에 날씨가 맑고 상쾌하기만 해도 기분이 좋더라고요. 하하.”
흑백 영화에서 OTT까지
“제가 아역 배우였을 때는 영화 촬영을 지금처럼 필름이 아닌 테이프로 하던 시절이었어요. 당연히 흑백 영화였고, 후시녹음(촬영이 끝나고 주로 성우가 대사를 녹음)을 했죠.” 예쁜 아이였던 윤유선은 이모의 권유로 연기를 시작했다. 아역 배우 시절의 촬영 환경을 묻자 과거의 추억을 신나서 쏟아놓는다. 거의 50년, 변화무쌍한 일터를 변함없이 지킨 베테랑 배우는 격세지감을 느낀다.
윤유선은 특히 2000년대, 2010년대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대중에게 인지도를 높였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MBC ‘궁’,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SBS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를 꼽았다. 그는 자신만의 작품 선택 기준이 있었는데, 출연작을 돌아보니 저절로 이해가 된다.
“일단 개연성 없는 막장은 싫어해요. 그리고 어두운 범죄 스릴러 작품도 피하는 편이에요. 개인적인 성향상 잘 만든 작품이라 하더라도 너무 어둡고 잔인하면 시청 후 며칠은 기분이 안 좋더라고요. 저처럼 대중예술 작품에 영향을 받는 분들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죠. 그래서 가능하면 밝고 스토리가 탄탄한 작품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최근 공개돼 화제를 모으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사냥개들’은 그동안의 작품과 결이 조금 달라 보인다. ‘사냥개들’은 사채업의 세계에 휘말린 두 청년이 거대한 악의 세력에 맞서 목숨 걸고 싸우는 이야기를 그린다. 윤유선은 “범죄물이라기보다는 액션물에 가깝고, 주인공들의 서사가 순수한 점이 좋았다”고 말했다.
더불어 배우 우도환과의 인연으로 ‘사냥개들’ 출연이 성사됐다. OCN ‘구해줘’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는 우도환은 ‘사냥개들’에서 엄마 역할을 꼭 윤유선이 해줬으면 좋겠다고 제작진에게 요청했단다. 이렇게 해서 윤유선은 ‘사냥개들’로 OTT 드라마에 진출하게 됐다. 극 중 그가 연기한 김건우(우도환 역)의 어머니는 가난한 삶 속에 아들을 키운 인물로, 아들이 악의 무리와 싸우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다.
“사전 제작 드라마이고, 또 감독님께서 영화감독이셨기 때문에 촬영 당시 영화를 찍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감독님께서 특히 내추럴한 모습을 원하셔서 화장을 전혀 안 하기도 했어요. 가난한 역할을 이전에도 연기했지만, 이렇게까지 화장을 안 한 적은 처음이에요. 어쨌거나 저한테도 새로운 모습에 도전한 작품이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저보다 도환이가 그 추운 겨울에 액션 신을 찍느라 고생을 정말 많이 했죠. 나이는 어리지만 친구 같기도 하고, 저보다 큰 어른 같기도 하고, 배울 점이 정말 많은 사람이에요.”
국민 엄마 그리고 진짜 남매 엄마
윤유선에게는 ‘국민 엄마’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주연 제안이 안 들어오자 그는 하나의 돌파구로 엄마 연기를 맡기 시작했다. 20대 중반의 이른 나이부터였으니 엄마 연기 경력만 30년이 넘었다. 주지훈, 최우식, 이종석, 김고은 등이 아들과 딸로 그를 거쳐갔다. 열두 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 이진욱과 모자(母子) 호흡을 펼친 적도 있다. 윤유선은 “결혼을 하고 진짜 엄마가 된 후 연기를 하면서 공감이 많이 된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 JTBC ‘맏이’에서 엄마 연기를 한 것이 기억에 남아요.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헌신하고 희생하는 어머니였는데, 그런 연기를 할 수 있어서 좋았죠. MBC ‘짝패’에서는 이기적이고 나쁜 엄마였는데, 공감되는 포인트가 있더라고요. 사실 엄마도 사람인데 좋을 때도 있지만 실수할 때도 있고, 화를 낼 때도 있잖아요. 그래서 대부분의 엄마 역할을 연기하면서 공감되는 지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렇다면 윤유선은 실제로 어떤 엄마일까. 그는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윤유선은 “애들이 벌써 성인이다. 육아를 거의 끝내놓고 보니 아이들한테 더 잘 해줄걸, 좀 더 시간을 보낼걸 하는 아쉬움이 든다. 바쁘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많이 못 봐줬다”고 말했다. 오히려 자상한 성격의 남편이 아이들과 더 잘 놀아주고 육아를 열심히 해줬다면서 고마움을 표했다.
윤유선의 남편은 이성호 판사로, 두 사람은 2001년 결혼했다. 윤유선과 이성호 판사는 만난 지 100일이 안 돼 결혼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화제를 모았다. 윤유선은 “남편이 계속 자기가 나와 결혼해준 거라고 말한다”면서 “까다로울 때도, 허당스러울 때도 있는 저를 케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더라”라고 말했다.
“제 남편의 가장 큰 장점은 이타적인 사람이라는 거예요. 인내심이 많고 배려를 엄청 많이 해줘요. 직업을 생각하면 딱딱할 것 같은 이미지가 있는데, 굉장히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사람이에요. 아이들한테도 엄청 좋은 아빠이기도 하고요. 이렇게 남편과 아이들과 화목한 일상을 보낼 수 있어 소중하고 감사합니다.”
나이 듦 두려움 없어
윤유선은 2017년 11년 만에 연극 ‘그와 그녀의 목요일’에 출연했고, 그때부터 연극 무대에 꾸준히 오르고 있다. 그는 연극의 매력에 대해 “아이들도 다 컸고, 무대로 돌아가고 싶었다. 무대의 장점은 한 작품을 오래 연습하고 고민한다는 점인 것 같다. 매체 연기만 하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으니까 다양한 연기를 해보는 거다. 한 장르만 고집하는 것은 편식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특히 윤유선은 2020년부터 연극 ‘친정 엄마와 2박 3일’로 무대를 해왔다. 엄마 역의 강부자가 직접 출연을 요청해 함께하고 있다. 1977년 TBC 드라마 ‘청실홍실’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오랜 인연을 이어온 케미스트리를 무대에서 자랑하고 있다. 사실 윤유선은 강부자 외에도 선배 배우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김영옥과도 각별한 사이다.
“강부자 선생님은 진짜 열정이 대단하신 분이에요. 똑같은 대사인데 무대에 설 때마다 다 다른 느낌이 들어요. 선배님과 연기하는 모든 순간이 제게는 감동이에요. 김영옥 선생님은 정말 지혜로우신 분이에요. 일과 가정, 삶의 밸런스가 좋아서 본받을 점이 많습니다. 또 매번 진심으로 애정을 담아 조언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을 느껴요.”
윤유선은 앞으로도 연기 생활을 이어가며 선배 배우들을 닮아가고 싶다. 그는 “예전에 ‘바람은 불어도’(1995년)라는 드라마를 할 때도 ‘지팡이 짚을 때까지 연기할 거야’라고 말했었다. 이제는 농담이 아니고 진심이다. 연기가 더 재밌어졌으니까”라고 말했다. 아역에서 성인 배우, 중년 배우로 성장의 시간을 보낸 윤유선은 새롭게 시작될 미래도 기대하고 있다.
“가끔 동안이라고 봐주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사실 저는 열심히 늙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배우로서 늙는 게 두렵지 않아요. 나이에 맞는 역할과 연기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50대 중반은 엄마로서, 여자로서, 성숙한 어른으로서 고민이 많은 시기 같아요. 그 나이의 고민을 보여줄 수 있는 역할을 연기할 기회가 오면 좋겠죠. 그리고 연기 잘하는 배우를 넘어 인간적으로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가 선생님들한테 사랑받은 만큼 후배들한테 돌려주는 것이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울고 싶을 땐 마음껏 우세요. 눈물은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치유의 물’입니다.”
하루하루 살다 보면, 울고 싶은 순간들이 생긴다. 그러나 나이를 먹을수록 눈물을 흘린다는 게 부끄러워지기 마련이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독자층인 중년은 더욱 그렇겠다는 생각이 든다. 직장에서는 부서를 이끄는 팀장이며, 가장인 경우가 많은 그들.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고 눈물을 삼킬 때가 많을 터다. 그런 그들이 반가워할 공간이 있다. 바로 ‘T.T존’이라는 곳이다.
특이한 이름의 T.T존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예상이 어렵다면, 걸그룹 트와이스의 노래 ‘TT’를 떠올리면 되겠다. ‘TT’는 눈물을 의미하며, T.T존은 마음껏 울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T.T존은 전국에 딱 하나 있다. 경기도 화성시 정신건강복지센터 안에 위치한다.
도대체 어떤 곳이길래 사람이 눈물을 흘릴 수 있게 할까? T.T존이 선택한 방법은 ‘영상 시청’이다. 방문자에게 맞춤형 동영상을 제공해 울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정말 영상을 보고 있노라면 눈물이 주르륵 흐를까? 눈물이 부끄러운 이 시대에 그곳에서는 왜 마음껏 울라고 말할까? 여러 가지 궁금증을 가득 안고 T.T존을 방문했다.
50분간 영상 시청…나도 모르게 눈물
T.T존 이용 방법은 이렇다. 사전에 방문 예약을 하고, 정해진 시간에 찾아가면 된다. T.T존을 찾아간 날, 취재를 위해서지만 기자도 체험을 신청한 터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처음 이곳을 찾을 경우, ‘너무 우울해 보이지는 않을까?’, ‘용기 낸 것이 잘한 일일까?’ 등의 걱정이 들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걱정과 두려움은 금세 가라앉는다. T.T존이 있는 화성시 정신건강복지센터의 문을 활짝 열면, 상담사 선생님이 반갑게 맞아주기 때문이다.
T.T존 내부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상담사 선생님과 얘기를 나눈다. 내담자가 어떤 고민 또는 스트레스를 안고 있는지, T.T존에서 무엇을 치유 받고 싶은지 등을 상담사가 듣는 시간이다. 이와 함께 T.T존 사전 질문지도 작성한다. 질문지는 쉽고 간단하다. T.T존은 어떻게 알고 왔는지, 눈물에 대한 평소 생각은 어떤지 등에 관해 묻는다.
사전 과정을 마친 후, 마침내 T.T존에 입성했다. 입장과 동시에 슬리퍼로 갈아 신으니 진짜 방(룸)에 들어온 듯이 편안하다. 조금 전까지 사무실 공간에 있었는데, 순간 이동한 느낌이다. 제일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텔레비전과 그 앞에 놓인 소파다. 누워도 될 정도의 크기이며, 그 위에 놓인 곰돌이 인형도 시선을 붙잡는다. 담요, 쿠션과 함께 필수품인 티슈도 준비되어 있다.
곳곳을 둘러보니 세심한 손길이 눈길을 끈다. 방음벽으로 되어 있는 것은 물론 감정을 추스르는 데 도움을 주는 세면대도 한편에 마련돼 있다. 여기서 포인트는 심리적 동요가 커질 상황을 대비해 깨지지 않는 거울을 걸어 놨다는 점이다. 전원 케이블 또한 최대한 보이지 않게 했으며, 응급 상황이 생기면 구급차를 바로 호출할 수 있는 비상벨도 설치해 놓았다.
시청 영상은 내담자의 상황과 연령에 따라 달라진다. 대학생, 신혼부부, 중년 남성 또는 여성, 노인 등으로 구분돼 있고, 맞춤형 영상을 제공한다. 러닝 타임은 50분 정도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기자로 T.T존을 방문한 기자는 ‘중년 남성을 위한 영상’을 시청했다. 홍보용으로 제작된 영상으로, 러닝 타임은 10분 정도였다. 실제로는 기자가 시청한 10분 정도의 영상을 4~5편 보는 방식이라고 했다. 모든 영상은 저작권 허락을 거쳐 사용되고 있다.
T.T존 담당자가 안내를 마치고 나가자, 불이 꺼졌다.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다. 평소 눈물이 많은 기자는 ‘일부러 울지는 말자. 정말 슬프면 울자’고 다짐하며 영상 시청에 몰두했다. 그래서 영상을 다 본 후에는 눈물이 나왔냐고? 결과부터 말하면,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감정이 많이 벅차올랐다. 아무래도 풀 영상이 아닌 짧은 영상을 시청한 것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또 다른 이유는 맞춤형 영상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자는 30대의 미혼으로, 중년 남성의 이야기에 100% 공감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시간적 여유가 있어 중년 남성을 위한 영상을 시청한 후 신혼부부를 위한 영상도 시청했는데, 동년배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공감 되는 부분이 많았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맞는 연령대의 영상을 쭉 본다면 눈물이 충분히 흐를 수 있겠다.
눈물 치료에 대해 아시나요?
T.T존에서 영상 시청을 마친 후에는 다시 상담사와 이야기를 한다. 영상 치료로 해소된 부분이 있는지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데, 상담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주기적으로 T.T존을 방문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사후 설문지도 작성한다. T.T존 이용 후기, 눈물 치료의 효과 등에 관해 묻는다.
또한 T.T존 이용자에게는 심신을 평온하게 도와주는 온열 안대, 도라지차 티백 등을 제공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있는데, 일명 ‘눈물 리트머스지’다. 평상시 하품을 해서 나오는 눈물, 양파·마늘 등 자극을 받았을 때 반응하는 눈물, 정서적인 이유로 인한 눈물 등, 감정에 따라 리트머스지에 색이 다르게 나타난다고. 더욱이 맛도 다르다고 하는데, 슬플 때 흐르는 눈물은 산성 성분이 많은 신맛, 분노로 인한 눈물은 염류가 많은 짠맛이 난다고 한다.
T.T존은 이처럼 ‘눈물’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마음을 괴롭히는 문제들을 눈물로 치료할 수 있다고 믿는다. 웃음 치료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눈물 치료는 들어본 적이 없어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알고 보면 눈물의 효과는 생각보다 대단하며, 의학적으로 입증된 자료도 많다. 외과전문의 이병욱 박사는 “눈물이 병든 마음과 몸을 치유하는 효과가 크다는 것을 임상 경험을 통해 알게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T.T존은 2019년 문을 열었다. 시민정책제안사업 당시 한 시민이 “중년 남성도 마음껏 울고 싶다”면서 울음방을 제안한 것이 채택됐다. 화성시 정신건강복지센터의 임하나 팀장은 “나이가 들수록 우는 게 창피하다고 생각하고, 운다고 해결되는 건 없다고 생각한다. 이곳을 찾는 중장년분들도 처음에는 그런 경향을 보인다”면서 “어린 애들이 혼나면 울지 않나. 그러고 나면 풍선에서 바람 빠지듯이 감정적으로 올라왔던 것들이 해소되는 부분이 있다. 눈물이 가진 힘이다. 그래서 T.T존은 ‘울고 싶을 땐 울어라’라는 메시지를 담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T.T존은 철저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만들어졌다. 해외 선진 사례를 견학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아워하우스(OUR HOUSE)’라는 곳을 방문했다. 스스로를 슬픔지원센터(Grief Support Center)라고 소개하는 곳이며, 사람들이 슬픔을 나누면서 해소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일본에는 루이카츠라는 민간단체가 있다. 단체의 사람들은 함께 모여서 눈물을 흘리는 시간을 주기적으로 갖는다. 또한 일본 도쿄의 미쓰이 가든 요쓰야 호텔(Mitsui Garden Yotsuya hotel)에는 20~40대 여성이 마음껏 울 수 있는 ‘울음방’이 있다. 최루성 영화와 만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특별한 호텔 룸이다. 이 호텔의 축소판이 T.T존이라고 할 수 있다.
T.T존 이용자는 월 20명~30명 정도다. 중년 남성이 원했던 곳인 만큼, 실제로도 40대~50대의 이용률이 높다고 한다. 지난해 이용자 추이를 보면, 성별은 여성 69%, 남성 31%로 집계됐다. 연령별로 보면 40대가 24%, 50대가 12%로 가장 많이 방문했다. 즉, T.T존 이용자 1순위는 중년의 여성이라는 사실도 도출할 수 있다.
통상적으로 중년 남성은 직장과 경제적 문제 등의 스트레스를, 중년 여성은 갱년기와 가정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가졌다. 임하나 팀장은 “여기 동탄 신도시는 외부에서 유입된 사람이 많은 동네다. 서울에서 거주하다가 집값으로 인해서 여기까지 내려오신 분들이 많다”면서 “더욱이 중년 남성분들은 투자로 인한 손실, 퇴직 압박 등의 이유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많이 호소한다”고 말했다.
또한 임 팀장은 “자살율이 제일 높은 연령층도 40·50대의 남성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중년 남성의 이용률이 가장 낮다. 직장에서 일하는 시간에 T.T존이 운영되기 때문에 시간적 제약을 받는 것이다. 비교적 시간이 여유로운 중년 여성분들이 많이 찾는 이유다”면서 안타까움을 표했다.
종합해 보면, T.T존이 만들어진 이유도 중년 남성 때문이고, 가장 필요해 보이는 세대도 중년 남성이다. 마음껏 울고 싶은 중년 남성이 있다면, 하루 쯤 나를 위해 시간을 내어 T.T존을 방문할 것을 추천한다. 마음에 응어리가 조금이나마 해소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편, T.T존 맞은편에는 ‘메모리존’이라는 곳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이들을 위한 공간이다. 애도의 공간인 이곳은 향초의 향기로 가득하다. 하늘에 있는 그들에게 편지를 쓸 수 있는 공간도 따로 마련되어 있으며, 너무 큰 슬픔에 갖고 있을 수는 없지만 버릴 수는 없는 소중한 유품도 보관 가능하다. 매달 한 번씩 자살 유가족 모임도 갖는다.
이용 방법 : 예약 및 문의→시설 이용→사후 관리→평가
대상 : 화성시민 누구나(중학생 이상)
주소 : 경기도 화성시 동탄대로 8길 36
운영 시간 : 평일 09:00~18:00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그건 말이지, 마치 이런 것과 같아. 냉장고에 먹을 만한 게 없는 것과 먹을 게 아무것도 없는 것의 차이. 무슨 말이냐 하면 남편이나 아내가 있는데도(애인이라고 해도 좋고) 마음이 허전한 것과 혼자 살기 때문에, 옆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공허한 것의 차이란 말이야. 전자는 냉장고 안에 먹고 싶은 게 없는 거고, 후자는 냉장고가 완전히 텅 비어 배고플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말이지.”
남편과 사별 후 혼자 산 지 15년. 늘 배고픈 사람처럼 항상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이제는 지겹기조차 한 나에게 역시나 혼자 사는 친구가 해준 말이다. “너와 나는 냉장고가 비어 있는 사람들”이라면서. 그러니 남편이, 연인이 옆에 있어도 외롭다든가, 한술 더 떠 차라리 혼자 있는 게 낫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냉장고가 그득한데도 딱히 먹고 싶은 음식이 없어서, 입에 맞는 식재료가 없어서 짜증이 난다는 말이지?”라고 응수해주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럴듯한 비유처럼 들린다. 냉장고가 완전히 텅 비어 있을 때와 먹을 만한 것, 내 입에 맞는 것이 없을 때의 차이란 차원이 다른 비교이지 않나. 아예 비교가 불가하거나. 그래서 냉장고가 텅 빈 사람들은 먹을 것 자체를 찾아 허덕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환상 속에서나마 가슴속에 어떤 남자, 어떤 여자를 들여놓게 된다고. 그 친구 말이 그렇게 막연히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으로 허기진 마음을 달래는 것은 당연히 무죄이고, 냉장고는 차 있지만 먹고 싶은 게 없어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소위 바람을 피우는 사람은 유죄란다.
그러면서 친구가 덧붙였다. 늘 배가 고프니까 먹을 수 없는 것조차 먹을 것인 줄 알고 간혹 마음에 품는 경우도 있다고.
품지 말아야 할 사람을 품은 나
1년 전 나는 과거 결혼할 뻔한 옛 연인을 만났다. SNS를 통해 내가 그 사람을 찾았다. 문득 궁금했고 그 궁금함이 꼭 한 번은 만나보고 싶은 조바심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만난 것이다. 듣기에 따라선 얼마나 로맨틱한가. 아내와 이혼 후 젊은 시절 자신을 짝사랑하던 여성과 재혼한 운 좋은 50대 남자 이야기를 어느 잡지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 남자는 적극적으로 그 운명의 여인을 찾아 나섰다고. 20년 전 자기를 좋아해주었다는 인연만으로 용기를 낸 남자. 그 여자가 여전히 자신을 좋아하는지 궁금했고, 좋아한다 해도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다면(응당 꾸렸을 테고) 아무 의미 없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무작정 찾아보고 싶었고, 무모한 짓이란 생각을 하면서도 그렇게 했더니 기적이 일어난 것이라고. 발을 들여놓았을 때 요단강이 갈라졌던 것처럼, 기대감을 가지고 찾아 나섰을 때 기적 또한 찾아온 것이다. 어떤 연유인지 그 여자는 결혼하지 않은 채 혼자 살고 있었고, 비록 재혼이지만 가슴 설레던 풋풋한 시절 짝사랑하던 남자가 거짓말처럼 눈앞에 나타나 청혼을 해왔으니 ‘Why not?’, 그 청혼을 덥석 받아들여 두 사람은 지금 알콩달콩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런 기적을 바란 것은 아니다. 그저 한 번 보고 싶었고, 인터넷 세상이니 큰 어려움 없이 만날 수 있었던 것뿐이다. 그는 물론 기혼남이었다. 나를 기다리며 결혼하지 않은 기적은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럼에도 내 마음은 설렜다.
32년 만이었다. 내가 결혼하던 해가 그와 헤어진 해이니. 결혼의 인연은 따로 있다지만, 그렇다고 작정하고 ‘연애 따로, 결혼 따로’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따로 인연이지 않았냐고 한다면 할 말 없지만.
나는 결혼하기 3년 전 여행지에서 그를 만났다. 대학 졸업 전에 친구 세 명과 함께 간 2박 3일의 늦가을 강릉 여행이었다. 셋 다 남자 친구가 없었기에 여행지에서 근사한 일이 생겼으면 하는 20대다운 기대와 설렘으로 떠난 여행. 그런데 그 바람대로 여행지에서 대학 졸업반 남학생 세 명을 만난 것이다. 군대 다녀온 복학생들이어서 나이는 우리보다 많았지만, 그래서 더 의지가 되고 든든한 면도 있었다. 그중에서 그와 내가 커플로 맺어졌다. ‘커플 탄생’이라고 했지만 여행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일상으로 돌아온 후 그에게서 연락이 왔고 이후 둘이 사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3년을 만났다. 그리고 내가 결혼했다. 앞서 말했듯이 그가 아닌 다른 남자와. 그도 물론 결혼했다. 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내가 다른 남자(15년 전 세상 떠난 남편)와 결혼을 하게 된 사연은 이렇다. 그 남자는 직장 동료였다. 의상학과를 나온 나는 졸업 후 곧바로 취업이 되었고, 같은 해 입사 동기로 남편을 만났다.
당시 호황기를 타고 야근하는 일이 잦았는데, 마침 집이 같은 방향이라 늦은 밤 퇴근길에 나를 집에 바래다주고 가는 것이 죽은 남편의 또 다른 일상이 되었다. 물론 나는 여행지에서 만난 연인이 있었지만 일이 바쁘던 그 무렵에는 자주 만나지 못했다. 그 틈을 타고 ‘오피스 와이프’라는 말처럼 그가 ‘오피스 연인’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30년을 뛰어넘어 찾아온 설렘
업무상 실수가 발생한 것은 입사 후 3년을 넘긴 직후였다. 내가 오더를 내는 과정에서 숫자를 잘못 기입하는 바람에 문책당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마침 그도 같은 부서에 근무하고 있었기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내 상황을 알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가 기사도 정신을 발휘해 그 위기에서 나를 구해주었다. 나 대신 징계를 당할 각오를 하고 자신이 실수한 것으로 상부에 보고한 것인데, 그 과정에서 다른 직원들은 모르게 하느라 애를 쓰는 모습이 내게는 더 감동적이었다. 그 일로 그와 나 사이엔 비밀이 생기게 되었다.
하늘이 도왔을까, 다행히 징계는 면했고 이후 그와 나는 급격히 가까워졌다. 단순히 고마운 마음을 넘어 나는 그를 깊이 신뢰하게 되었고, 그 틈을 타서 그는 내게 사랑을 고백해왔다. 내가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한 고백이니 그로서는 모험이자 용기가 필요했을 터. 인연이 되려고 그랬을까. 나는 그의 고백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그 결과 3년을 사귀던 애인을 배신하게 된 것이다. 물론 결혼을 약속하고 사귄 것은 아니었지만 연애의 배신도 배신이었다. 나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을 수밖에. 내 마음은 이미 직장 동료에게 기울어져 있었으니.
날벼락을 맞은 건 당시 나의 연인. 그러니까 남편이 죽고 32년 만에 만난 지금 이 사람. 한 가지 현실적 변명을 하자면 그 사람과 나는 동성동본이었다. 당시 동성동본은 결혼을 해서는 안 되는 때였다. 사귀고 있을 때는 의식하지 않으려고 서로 애를 쓰던 장애물이 헤어지려고 하니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어 수면에 떠올랐다. 저절로 떠오른 게 아니라 내 쪽에서 일부러 밀어 올렸다는 표현이 옳다. 그와 결혼하지 않기 위해서. 지금은 세상에 없는 오피스 연인과 결혼하기 위해서.
나는 물론 옛 연인을 좋아했다. 여행지에서 만났기 때문일까, 그와 함께 있으면 흥겹고 재미있었다. 고된 업무의 스트레스를 날리고 일상의 지루함과 피로를 풀어주는 청량제 같은 사람이었다. 틀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내 기질에도 잘 맞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오피스 연인을 선택했으니, 업무의 위기에서 나를 구해준 일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그랬던 그를 남편과 사별한 후 다시 만난 것이다. 우리는 서로 많이 설레었다.
냉장고가 꽉 찬 사람
만남이 1년으로 이어지면서 친구의 ‘냉장고론’을 떠올린다. 그는 유부남, 나는 사별녀. 한때 아무리 사랑했다 해도 우리의 현주소는 이러하며, 그의 냉장고는 채워져 있고 나의 냉장고는 텅 비어 있다. 그에게 나는 별 의미가 아니지만 내게 그는 큰 의미다. 아내가 있는 그는 재미로, 호기심으로 나를 만나는 거겠지만, 혼자인 내게는 그가 차지하는 공간이 점점 커지고 있다. 여기서 그만 끝내야 한다. 윤리적으로 비난받는 것이 두려운 것보다 내가 더는 버틸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 것이 두렵다.
재혼을 생각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뿐 아니라 혼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재혼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두기 마련이다. 재혼까지는 아니라 해도 친구로 지낼 정도의 누군가를 사귀기를 원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만남 쪽으로 내 마음이 자꾸만 쏠린다는 것이다. 나의 냉장고는 늘 비어 있으니 지금 이 사람으로 채우고 싶은 강박적 생각을 끊지 못하고 있다.
사실 나는 지인으로부터 곧 누군가를 소개받기로 되어 있다. 소개를 받는다고 맺어진다는 보장은 없지만, 이 사람으로 인해 다른 사람을 소개조차 받고 싶지 않은 게 문제다. 아무 실속도 없고, 실속은커녕 결국 가슴앓이로 끝날 관계, 나만 상처받게 될 인연임을 잘 알면서도.
그는 아내가 있는 사람이다. 시들하든 무심하든 그는 자신의 냉장고를 채우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결코 자신의 냉장고를 비우지 않을 것이며, 꽉 채워진 그 상태 그대로 나를 만나려고 할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로 질주하는 내 마음을 어찌할까. 이대로 그에게 사로잡혀 그의 노리갯감이 되는 것은 아닐까. 아니,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좀 그러면 어떤가.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단기적으로는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후회를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자신이 하지 않은 행동에 대해 더 많이 후회하는 것이 사람이라지? 죽음 앞에서라면 더더욱. 삶의 마지막에는 한 것보다 하지 않은 것에 회한이 든다지 않나. 어느 책에서 읽은 대로, ‘죽을 만큼 마음껏 사랑해볼걸’, ‘조금만 더 일찍 용서할걸’, ‘걱정은 내려놓고 행복을 만끽할걸’, ‘마음을 열고 포용할걸’, ‘한 번뿐인 인생, 열정적으로 살아볼걸’, ‘아등바등 말고 여유를 가지고 살걸’, ‘있는 그대로에 감사하면서 살걸’ 등 말이다.
그도 그랬을까? 지난달 죽은 그도 하지 않은 그 무엇을 후회했을까? 무엇보다 우리의 사랑에 솔직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을까?
오늘도 그의 묘지에 다녀왔다. 그는 수목장을 했기 때문에 반나절 공원을 산책하듯, 바람을 쐬듯 발걸음을 하게 된다. 그의 나무는 아직 어린 묘목이다. 가녀린 묘목 밑에서 다 큰 성인이 의지하여 잠자고 있다. 나무 밑에 묻혀 있다 해도 그의 육신이 곧장 나무를 키우는 자양분이 될 수는 없다. 그의 육신의 재는 나무 상자에 담겨 땅속에 있으니 그 육신이 상자와 함께 시나브로 흙이 되어 나무를 키우는 것은 멀고도 먼 훗날의 일일 것이다.
묘목 앞에 나붓이 꿇어앉아 그에게 말을 건넨다.
“당신,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했는지 모르죠? 알았다고 해도 당신과 나를 죽음이 곧장 갈라놓았을 테지만…. 이제 이렇게 나무 아래 쉬고 있는 당신이나마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되어 나는 차라리 지금이 행복하네요.”
단 석 달을 사랑하고 죽을 때까지 그리워한다면 그 사랑은 너무 밑지는 장사 아닌가? 어떤 사랑이든 진실했다면 가슴에, 영혼에 아름다운 상흔을 남긴다는 점에서 모든 사랑은 남는 장사라고들 하지만.
유부남과의 동거 6개월
나는 아내 있는 남자와 6개월을 살았다. 그 사실을 몰랐으니 속아 산 것이다. 나는 그와 결혼한 것으로 착각하며 살았다. 나는 그의 아내로, 그는 나의 남편으로 그렇게 부부처럼 살았다. 투병 중이었으니 결혼식은 할 형편이 못 된다 해도 혼인신고라도 하자는 말조차 못 들은 척할 때 낌새를 느꼈어야 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는데야 어쩌랴. 한 1년 몸을 보양한 후에 결혼식을 올리든가 혼인신고를 하자는 남편(이 아닌 내연남)을 몰아붙일 수는 없지 않나. 나로서는 불안함과 서운함이 없지 않았으나, 내 곁에 그가 있다는 사실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있을까 하고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마흔 살이었던 그는 국토 남단 이름도 모를 섬에 아내와 일곱 살짜리 딸 하나를 둔 한 집안의 가장이자 섬과 가까운 뭍의 초등학교 교사였다. 섬에서 나고 자랐고, 섬 반경 내에서 직업을 구했고, 인근 섬 여자와 결혼한 사람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따분함,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권태감이 봄철 아지랑이처럼 사철 피어오르는 삶이었을 것이다. 눈앞이 확 열리는 뭔가가 찾아오지 않는 한, 고만고만하게 살다 고만고만하게 생을 마칠 운명이었을 그에게 숨통은 뜻밖에도 암과 함께 트였다.
그가 폐암에 걸린 것이다. 다른 암도 아니고 폐암이라니! 그것도 공기 청정한 어촌에서 폐암이라니, 그야말로 ‘운명의 암’이라 할 수밖에. 허파에 바람 들듯 병은 그를 서울로 데려왔다. ‘서울 큰 병원’에 입원을 한 것이다. 본격적인 암 치료가 시작되었고, 수술 후 나는 간병인으로 처음 그를 만났다. 환자와 간병인, 환자와 간호사만큼은 아니라 해도 로맨틱한 구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남편, 아니 내연남은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하기야 상대의 환심을 사지 못하는 사기꾼이 있으랴. 결혼 사기극을 벌이는 판에 여자 마음 홀리는 것쯤이야.
버젓이 살아 있는 아내와 딸을 3년 전 배가 뒤집히는 사고로 죽었다고 말하면서,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결국 암에 걸린 것 같다며 내게 동정과 연민을 끌어낸 사람. 퇴원을 해도 아무도 없는 섬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며, 나만 좋다면 학교를 옮기거나, 그게 여의치 않다면 다른 일을 하면서 함께 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던 열아홉 살에 보육원에서 함께 자란 동갑내기 남자와 동거하다, 1년도 못 살고 헤어진 후 20년 가까이 혼자 지내고 있었다.
퇴원 후에도 학교를 옮기거나 다른 직장을 구하는 일은 차일피일 미뤄지고, 나의 단칸방이 신혼방이 되었고 나의 간병 수입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런데 어떻게 6개월이 넘도록 그의 아내가 한 번도 병원을 오거나 그를 찾는 일이 없었을까? 아무리 먼 곳에 산다고 해도. 나중에 들으니 그의 아내는 시어머니 병 수발로 꼼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였다고 한다. 아무리 그렇다고 암 수술을 하는 남편을 어떻게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해도 의아하다. 그 무렵 부부 사이에 석연치 않은 일이 있었던 건 분명한데, 그것이 무엇인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여하간 서울로 올라간 남편과 그간 전화 통화만 하다 6개월이 지나 만나고 보니 나라는 여자가 떡하니 옆에 있었으니 그 아내의 충격은 또 얼마나 컸으랴.
고백도 못 한 연인의 죽음
그 길로 그는 내 곁을 떠났다. 아내의 치마꼬리를 잡고 다시 섬으로 돌아갔다. 그나마 암에 걸렸으니 망정이지 어떤 아내가 그런 황당한 상황을 그냥 넘어갈 수 있었으랴. 죽었던 남편이 살아온 셈 치겠다며 크게 봐준 것 같았다. 암이 그를 두 번 살렸다.
그럼 나는? 그 여자에게 머리끄덩이 안 잡힌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억울하고 황당하기야 그의 아내 못지않았지만, 그 남자와 사는 동안 소소한 빚도 생겨 억지로라도 마음을 수습하고 생계를 위해 다시 일을 나가야 했다.
다니던 병원에 이미 소문이 돌아 일자리를 옮길 생각에 마지막으로 인사하러 갔는데, 그 남자가 떠난 침상에 다른 환자가 누워 있었다. 차트를 보니 52세였다. 운명의 내 사랑이, 석달 만에 나를 떠난 사랑이 그렇게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간암 환자였다. 내 눈에도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나를 본 담당 간호사가 일손이 부족하다며 어지간하면 병원에 그냥 있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못 이기는 척 주저앉았지만 전의 일이 트라우마가 되어 필요한 접촉 외에는 거리를 두고 지냈다. 공교롭게도 그 또한 찾아오는 가족이 아무도 없다는 것에 더욱 경계심을 갖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내게 ‘마지막 부탁’을 해왔다. 마지막 부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후 그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기 때문인데, 거꾸로 우리 사이는 그 일을 계기로 급격히 가까워졌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는 20년 동안 만나지 못한 딸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고 했다.
그의 구술을 내가 받아쓰는 형식의 편지였다. 신혼 때부터 삐걱대던 아내와 이혼한 후 세 살이던 딸을 혼자 키우던 어느 날, 퇴근해 돌아와 보니 아내가 딸을 데려갔더라고. 작정하고 데려갔으니 연락이 닿지 않아 애가 탔지만,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어 엄마가 키우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며 이 악물고 포기했다고. 하지만 양육비라도 보내주려고 간간이 수소문을 했지만 도통 불통이었고, 그는 그대로 해외 취업을 나간 사이 애 엄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혼한 아내가 죽은 것은 딸을 데리고 간 지 얼마 안 돼서였고, 그 길로 딸은 해외로 입양되었다고 했다. 아빠가 버젓이 있는데 어떻게 일이 그렇게 되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이라고. 그는 그대로 사정이 있었는 데다 그 모든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된 터라, 현재 딸과의 재회를 위해 입양기관을 통해 절차를 밟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의 병이 깊어지고 있어 딸을 못 본 채 세상을 떠날 것에 대비해 편지를 써두고 싶다고 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가까워졌다. 기운이 달려 몇 차례 편지를 나눠 쓰는 사이, 내 쪽에서 급격히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보육원 출신인 내 처지와 그의 딸이 겹쳐졌고, 평생 외로움과 벗 삼고 살아온 나와 그가 한마음이 된 듯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기에 내게 거리낌 없이 다가오지 못했고, 그것이 그를 향한 내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딸에게 주는 그의 편지와 마음은 얼굴도 모르는 내 부모의 것인 것만 같아 나는 그를 통해 부성을 느꼈다. 그가 딸을 얼마나 사랑했으며, 얼마나 그리워했으며, 얼마나 미안해했는지 절절한 그의 마음을 한자 한자 써 내려가면서 나는 그의 딸이 되어 그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는 마지막 석 달을 나로 인해 행복했고, 나는 그의 곁을 지켜주었다. 그는 결국 딸을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벌 받을 각오로 말하건대 나는 내심 안도했다. 그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었고 그와 나의 사랑이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물론 편지를 간직하고 있고, 그를 대신해 그의 딸과의 접촉을 이제 시도하려고 한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택시라는 공간은 참 묘하다. 내 앞에 멈춰 선 택시에 오르는 순간 택시 운전사와 잠시 잠깐이나마 인연의 호흡을 함께해야 한다는 점에서. 대화를 나누든 안 나누든 서로의 에너지가 엉기고, 그 긴장을 털어내기 위해 일부러 생각에 빠져들거나 짐짓 딴청을 하기도 하지만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내내 운전사의 존재가 의식되어 도무지 편하지가 않다. 그렇다고 내 쪽에서 먼저 말을 걸지는 않는다. 차라리 그쪽에서 말을 걸어주면 편할 것 같지만 그 말이라는 것이 도통 내게는 관심도 없는 주제이기 일쑤라 여전히 고역이다. 그래서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하는 게 뱃속 편하다. 어지간해서는 내가 택시를 타지 않는 이유다. 몸 좀 편하자고 마음은 좌불안석이니. 비싼 돈까지 내고서 말이다.
유난한 예민함이라고? 그쯤되면 병이라고? 택시를 모는 사람은 그게 직업인지라 승객에 대해 시시콜콜 관심을 갖진 않을 거라고? 승객의 인상이 아주 험상궂어서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것 같은 불안감이나 늦은 밤 취객에게 시달림을 받지 않는 한. 물론 섹시하고 야한 여성이 탔을 때 슬쩍 성적 호기심이 동하기도 할 테지만. 여하튼 그런 좀 별난 경우가 아니고서야 승객에게 무슨 그리 관심이 있겠냐고? 혹 말을 시키더라도 대꾸를 안 하면 그쪽에서도 알아서 입을 다물 텐데 뭐가 걱정이냐고? 이런 나를 두고 친구들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운전사 거슬려 택시 못 탄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며 놀린다.
1년 만에 탄 택시, 인연이 기가 막혀
그날도 그랬다. 평소처럼 그날 또한 택시를 탈 불가피한 이유 같은 건 없었다. 벚꽃에 취해 발을 접지르기 전까지는. 봄바람 안온한 지난해 4월 중순, 벚꽃이 만개할 무렵이었다. 딱 1년 전 일이다. 어디 멀리 따로 꽃 구경을 갈 필요는 없었다. 온 천지가 벚꽃이었으니까. 집 앞, 동네 산책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만족스러웠으니. 땅에 시선 둘 짬 없이 고개를 온통 쳐들고 다니는 시기가 1년 중 꽃철과 단풍철이 아닌가.
아뿔사! 동네 벚꽃길에 이런 턱이 있었나. 도저히 ‘턱이 있을 턱이 없는 곳’에서 발목을 삐끗했다. 발등이 커브를 그리듯 휘어지며 시큰한 느낌과 동시에 눈앞이 아득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평지와 겨우 3cm 정도 차이 나는, 보통 계단의 10분의 1도 안 되는 단차를 가진 곳에서 발목을 접지른 것이다. 어이없고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거짓말처럼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으니. 그 위치 그대로 퍼질러 앉아 발목만 하릴없이 주물러야 할 상황인데, 이번에도 또 거짓말처럼 택시 한 대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어디 다치셨어요? 병원이나 댁에 모셔다드릴까요?”
조수석 창문을 내리면서 나이가 꽤나 들어 보이는 운전기사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큰 소리로 물었다. 요즘 택시에는 고령 운전자가 많다더니.
‘이게 무슨 경우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영화를 찍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 이런 경우도 있나? 지나가는 택시가 먼저 나서다니….’
운신을 전혀 못 하는 처지에서 반갑기도 했지만 반사적으로 긴장과 의심이 올라왔다. 평소 택시 타기 싫어하는 이유와는 차원이 다른. 아무리 60줄에 든 여자라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다친 자리 1m 전쯤에서 승객을 내려주고 출발하려던 찰나 주저앉아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이고, 혹시나 운이 좋아 승객일 수 있을까 하여 친절을 겸해 물어본 것일 뿐이었다니, 특별히 수상한 상황도 아니었다.
“네… 그럼, 요 앞 정형외과로 저를 좀 데려다주시겠어요? 제가 발목을 다쳐 꼼짝을 할 수가 없네요. 짧은 거리지만 부탁드립니다.”
실로 1년 만에 타는 택시다. 봄볕 화사한 정오 무렵이었고, 병원은 코앞이다. 무슨 흉한 일이 있을까 싶었다. 차창 밖으로 말을 붙일 때 본 운전사의 인상도 온화하고 곱상하다. 말투도 배운 사람 분위기다. 얼굴 보고 마음까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안심이 된다.
사별 아내 못 잊어 잡은 운전대
그 사이 발목 아래부터 발등이 자색고구마 색을 띠면서 소복하게 부어올랐다. 통증보다 겉의 상태가 더 겁이 났다. 기사는 나를 배려해 병원 입구에 바투 택시를 세웠지만 나는 도무지 일어나 걸을 수가 없었다. 운전대를 잡은 채 돌아보던 기사가 지체 없이 사이드 브레이크를 끌어올리더니 운전석에서 내려 돌아와 나를 부축했다. 황공스럽도록 고마웠다. 병원 로비 원무과 앞 빈자리에 나를 앉혀주고는 고맙다는 인사도 듣는 둥 마는 둥 황급히 자리를 뜨나 싶더니 5분쯤 지나 다시 나타나는 게 아닌가. 아마도 안전한 곳에 주차를 해놓고 급히 다시 돌아온 듯싶었다.
그가 없었다면 접수도, 진료도, 처치 후 다시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반나절을 내 옆에 있어 주었다. 나는 돈벌이를공친 그의 시간을 걱정하면서도, 생전 처음 본 사람이 옆에 붙어 있는 어색함과 황당함에 어쩌지 못하면서도, 과분한 신세를 졌다며 이제 그만 가보시라고 하지는 못했다. 병원에서도 그를 나의 보호자로 알고는 그에게 이런저런 지시와 주의사항을 전하고 있었으니.
그와 나의 만남은 그런 기연으로 시작되었다. 영화에서나 있음직한 일이 내게 일어날 줄이야. 그가 택시를 몬 경력이라야 1년 남짓. 4년 전 별안간 사별한 아내를 이렇게도 못 잊고 저렇게도 못 잊어서 마음 대신 운전대를 잡았단다. 택시를 몰면 싫어도 이리저리 쏘다니게 되고, 손님을 태우고 긴장하는 사이 피곤으로 지친 몸 그대로 쓰러져 자다 보면 아내 없는 일상에 다시 적응할 수 있을까 하고.
그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꽤 규모가 큰 건축회사의 임원을 지내다 정년 퇴임을 했다. 생활의 여유가 생기자 이제야 오붓하게 부부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으려니 했는데, 퇴임한 지 3년 만에 아내가 위암 판정을 받았다. 그러고는 허망하게도 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오직 남편과 자식밖에 모르는 여자였다며, 그 헌신적인 뒷바라지 덕분에 본인도 슬하의 1남 1녀도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었다며, 내 앞에서도 서슴없이 아내를 그리워하고 아내에게 미안해했다. 워낙 규모 있게 살림을 꾸려온 사람이라 노후자금도 부족하지 않게 비축되어 있었고, ‘삼식이’ 대열은 완전히 남의 일일 뿐 부부 금슬도 유달리 좋았다고.
이제 우리 함께 달릴까요?
“그러면 뭐하나요? 결정적으로 건강이 두 사람을 갈라놓았는 걸요.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자기를 죽이고 살아서 병이 났지 싶어요. 자기 주장은 고사하고 너무나 헌신적인 사람이었으니까요. 세월이 4년 남짓 흘렀지만 아직도 아내의 빈자리가 커서 하루 일을 마쳐도 집에 들어가기 두렵곤 했지요. 그때 마침 발을 다친 당신이 눈에 띄었고 내친김에 병원까지 동행했던 거지요. 당신은 먼저 간 아내와 많이 닮았어요. 죽은 사람과 비교되니 기분이 별로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단아한 분위기에 조신한 행동거지, 나이까지 비슷하니 내게는 마치 아내가 환생한 것만 같네요.”
몇 차례 더 나를 태워 병원을 오가며 만난 지 석 달쯤 되었을 무렵, 이런 말을 하면서 겸연쩍게 그러나 만족스레 웃는 그를 보며 나도 빙그레 웃음 지었다. 그 말이 나에 대한 고백이자 청혼처럼 들렸다면 괜히 오버하는 것일까.
“아내 연배의 여성을 태우거나 거리에서 지나치듯 볼 때면 가라앉았던 슬픔이 다시금 올라와 마음이 힘들어지곤 했더랬지요. 그런 내게 신이 선물을 주신 거지요. 그날 아내와 닮은 당신을 만나게 해주셨으니까요. 몇 년이나 끙끙대며 자기를 잊지 못하는 내가 딱하고 안쓰러워서 아내가 당신을 보내줬는지도 모르죠.”
이쯤 되면 오버가 아니지 않나? 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첫 만남 이후 한결같이 내 곁을 지키고 있는 것만 봐도. 접지른 발은 이미 다 나았건만 여전히 내 발이 되어주고 있으니. 영업용 택시에서 자가용 승용차로 갈아탔다는 차이만 있을 뿐.
참, 그러고 보니 내 이야기를 전혀 안 했네. ‘택시를 기피하는 여자’라는 것 말고는. 나도 그와 같은 사별자다. 나는 50세에 남편을 간암으로 보냈다. 그러곤 두 아들을 결혼시키고 얼추 십 몇 년을 혼자 지냈다. 사업을 하던 남편이 남기고 간 돈이 좀 있어서 생활이 그다지 쪼들리진 않는다. 하지만 평생 살림만 한 터라 딱히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성격도 내성적이라 대부분 집에서 책을 보며 소일한다. 이따금 로맨스 소설을 읽을 때가 있지만, 내가 택시를 매개로 한 ‘황혼 로맨스’의 주인공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친구들은 ‘택시 대박’이라는 둥, ‘택시 내숭’이라는 둥 나를 놀린다. 친구들이 보기에도 뒤늦게 찾아온 나의 사랑이 좋아 보인다는 뜻이겠지.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며칠 전 글 수업 시간에 우연히 나온 40년 전 내 친구 이야기, 그 사연을 풀어보려 한다. 나는 2018년 경영하던 사업체의 대표 자리에서 물러난 후, 회사에 묶여 있을 때 하지 못했던 일을 해보고 싶어 3년 전부터 글쓰기를 하고 있다. 일대일 나눔이라 나와 지도 선생 둘 다 내밀한 속내를 드러낼 수 있어서 글과 함께 지나온 삶을 돌아보는 유용한 시간이 되고 있다.
글 선생의 지론은 글은 발가벗고 써야 한다는 것이고, 혼자 벗기 민망할 거라며 본인도 가차없이 벗어 보이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글을 쓰기 위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관계가 되었다.
죽음에 대한 글을 쓰기로 한 날, 부모 등 윗대가 아닌 나와 동년배, 구체적으로 친구의 죽음을 경험한 일이 있냐고 글 선생이 물었을 때 나는 그 친구를 떠올렸다. 그 친구의 서글프고 황망한 죽음에 대해, 아니 죽음보다 더 아리고 허망한 두 번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40년 전의 친구를 떠올리는 것은 순전히 나의 상념 속 일이지만, 여리고 섬세한 성정을 가졌던 친구의 내면만큼은 사실로 기억된다. 철인(哲人)처럼 고뇌했고 시인처럼 노래했던 친구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는지는 모르지만 누구보다 진실했으며, 거기에 더해 유약한 운명의 냄새를 풍겼다. 결과적인 소리지만 성격 속에 이미 예고된 불행을 배태하고 있었다고 할지…. 그렇게 그 친구를 추억하며 기억의 묵은 빗장을 열자 형체 없이 피어오르는 안개처럼 40년 전의 상념이 뒤엉켜 떠올랐다.
40년 전 갑작스런 친구의 죽음
그 친구와 나는 서울대 철학과 동창. 지금도 그렇지만 75세인 내가, 그리고 그 친구가, 우리 과 동기들 모두가 철학과를 택했을 당시는 세상살이에 어눌하고 현실 감각이 둔하고 무엇보다 부모를 실망시키기로 작정한 불효의 표상으로 여겨지던 때였다. 철학과를 나와 무슨 밥벌이를 어떻게 할 것이며, 부모 봉양은 고사하고 처자식이나 제대로 먹여 살릴 수 있을지가 세상 사람들의 우려이자 반대의 이유였던 때였다.
그러한 우려 속에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전공을 살려 살지 못했다. 졸업 후 변리사 자격시험 공부에 바로 돌입했던 것이다. 그렇게 ‘철학과 출신 변리사’란 꼬리표를 달고 우여곡절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전공과는 무관한 영역에서 삶의 기반을 닦았고, 순탄하게 장래가 풀려 지금까지 무난한 삶을 살고 있다.
내가 변리사 시험 준비를 하는 동안 그 친구는 전공을 살려 서양 철학의 본산지인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는 국제 통화도 여의치 않았고 기반을 닦느라 서로 정신없이 달리던 때라, 가족이 아닌 한 외국으로 간 친구와는 자연히 연락이 뜸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처럼 그 길로 소식이 안 왔으면 차라리 잘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서로 잊고 지낸다 한들 그 또한 감사한 일이었겠지만….
그로부터 약 10년 후 나는 친구의 관을 메고 친구의 고향인 충청도 어느 산자락을 오르게 된다. 친구를 지상에서 영원히 작별하기 위해. 학창 시절 모습만을 기억할 뿐인 내겐 30대 중반에 주검으로 돌아온 친구와의 만남은 당혹스러웠다. 또한 가혹했다. 땅에 묻은 후엔 시신을 담고 있던 관을 제거한 후 깨서(파관) 불에 태우든가 없애버리던 그 지역 풍습으로 인해 친구의 관은 얇고도 위태로웠다. 관을 걸머쥔 손에 시신의 차가움이 닿는 듯했고, 관을 뚫고 친구의 손이 불쑥 나와 그간 격조했다며 내게 악수라도 청할 것처럼 차가움 더한 온기가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졸업과 동시에 바로 외국으로 갔기 때문에 동기생 중 ‘내가 아무개와 각별한 사이였다’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운구 대열에 낄 줄이야. 살아 있을 때의 인연보다 죽은 후의 인연이 더 깊게 다가왔다.
친구는 밤에 자다 죽었다고 했다. 옆에는 한 여인이 함께 자고 있었고. 친구의 죽음이 그 여인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30대 중반의 신체 건강하고 정신 멀쩡한 남자라면 아내든 애인이든 이성과 동침한 것이 특별한 일이라고 할 수도 없을 테고. 다만 35년 남짓 살다 간 친구의 짧은 생에서 두 여인과 인연이 있었고, 친구는 두 번째 여인 곁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것만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의 전부다.
아이 딸린 이혼녀와 결혼 그리고 이혼
친구는 독일 유학 시절 같은 한국 유학생과 결혼했다. 유학생끼리의 만남이란 별 특별할 것도 없는, 이국에서는 가장 무난한 인연이었으리라. 아내가 된 여자의 전공은 독문학이었다고 들었다. 철학도와 독문학도의 결합이란 이지적 커플 탄생에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 선망과 부러움의 대상이었을 것도 같고. 둘은 대화가 잘 통했을 것이며, 샤프하면서도 여성에 버금갈 감수성과 섬세함을 갖춘 내 친구는 다정다감한 남편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아무나 선뜻 내릴 수 없는 선택을 내릴 수 있었을 테고. 상대 여성은 아이 딸린 이혼녀였으니까. 몇 살인지는 들은 바 없지만 이혼 후 딸 하나를 데리고 독일로 유학 갈 정도면 그 시대로선 당찬 부류에 속한 여성이었을 테지. 독립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고 거리낌 없이 앞날을 열어가는 페미니스트. 문학 전공자이긴 해도 그 여자는 외향적이며 진취적 성향이지 않았을까? 한 번의 실수는 용납해도 두 번은 허용하지 않는. 자기 운명을 스스로 책임지는 여성에게 두 번의 실수는 실패와 다름없을 테니까. 원래 성격은 그렇지 않았다 해도 이혼의 약점을 커버하기 위해 스스로를 그렇게 몰아갔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내 친구는? 내 친구는 스마트한 엘리트지만 내향적 성격을 가진 사색가. 본인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요구를 묵묵히 수용하고 들어주는 타입이다. 친구도 그 사이 변했을 수 있지만, 친구의 아내에 대해서는 전혀 몰라도 친구에 대해서는 절반쯤 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둘이 상반된 성격으로(순전히 나의 추측이라 할지라도) 마치 보색관계처럼 튀면서도 개성 있는 조화를 이뤄 잘살았다면야 성격 다른 남녀가 오히려 잘산다는 경험치를 보여줬을 테지만, 둘은 7년 정도를 함께 살다 헤어지고 말았다. 친구의 아내로서는 두 번째 이혼이었고, 내 친구는 첫 이혼이었다. 그렇게 각자 이혼 경력만 쌓은 짧은 인연 속에서 이혼 사유는 알 수 없었다. 내 친구라서가 아니라 이혼 후 친구의 아내보다 친구가 더 좌절하고 헤맸을 것 같다. 친구로서는 이혼 경험이 처음이니까. 갈라선 이후 각자는 공부를 마쳤고, 친구의 전처는 학위를 딴 후 한국의 어느 지방 대학 독문과 교수로 재직하다 은퇴했다는 소식을 바람결에 들었다. 세 번째 결혼을 했는지는 들은 바 없고.
아이 딸린 여인 곁에서 영원히 잠들다
내 친구는 어찌 되었을까. 친구의 옆에서 함께 잔 여자는 누구였을까. 이혼녀였다던가, 사별녀였다던가, 그 여자 또한 아이가 딸려 있었다. 함께 공부하거나 일로 만난 사이는 아닌 것 같고, 그야말로 오가다 만난 사이라는 것을 장례 때 들었다. 둘은 동거를 했던 것 같다. 결혼으로 상처를 받았으니 내 친구 쪽에서 선뜻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을 것 같지만, 혼인신고를 하고 안 하고가 중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 이목이나 형식이 중요했다면 또다시 그런 만남은 갖지 않았을 테니까.
35년이란 짧은 생애에 두 여자가 있었지만 세상 떠나는 날에 두 여자는 그림자조차 없었다. 나의 추측, 나의 상상력으로는 그 친구의 허망한 죽음에 두 여자의 관여와 영향이 가장 컸을 것 같음에도. 섬세한 내면과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친구인 만큼 이혼은 충격적이었을 것이며, 그 여파로 뒤이어 만난 인연이 안정적이고 안온하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두 여자 모두 지난 결혼이나 과거의 인연으로 자녀가 있었고, 결혼 상대자의 그런 평범하지 않은 상황을 받아들인 친구의 모질지 못한 성정이(모질지 못하다는 말을 이런 상황에도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혼자 져야 할 삶의 고뇌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반적 기준에서 다소 빗겨난 관계가 지속적인 부담이나 족쇄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해도, 그럴수록 그 친구 쪽으로 하중이 쏠렸을 것이다. 불균형하게 출발한 결혼과 관계가 자신을 먼저 챙기거나 이기적이지 못한 내 친구의 삶에서 에너지를 빼앗고 삶의 의욕을 갉아먹었을지 모른다는 뜻이다.
이런 것들이 내 마음을 어지럽히고 친구의 죽음을 안타까이 돌아보게 하지만, 이 모든 것 또한 부질없는 상념인지 모른다. 무엇보다 나는 학창 시절 이후 그 친구와 깊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어쩌다 내가 운구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친구와 매우 가까운 사이라거나 다른 누구보다 친구의 삶을 속속들이 아는 것처럼 굴 이유도 없다.
75세가 된 지금, 내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이에 부모도 형제도선배도 아닌 동년배로서 가장 먼저 떠나보낸 이가 그 친구라는 사실이 그저 각별하게 다가올 뿐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작금의 노포 열풍은 박찬일(58) 셰프의 솜씨 덕을 톡톡히 봤다. 오랜 식당 나이 든 주인의 변치 않는 손놀림을 세상에 퍼 올린 지난 10년 사이, 노포는 낡은 식당에서 맛과 문화의 정수로 변모했다. 이제 노포의 매력을 깨달은 사람들은 그가 짓는 글을 안내서 삼는다. 오래된 것은 훌륭하고, 훌륭하기에 오래됐다고 믿는 음식 기행문에는 사람 냄새가 짙다.
박찬일 셰프는 글 쓰는 요리사다. 글의 중심부에는 오래된 것에 대한 애정이 자리한다. 10년이라는 긴 시간을 노포를 취재하고 기록하는 일에 썼다.
박찬일의 화법은 담백하되 긴 여운을 남긴다. 해장국 한 그릇이면 역사에 참여할 수 있다고 추켜세운다.(‘해장국은 역사의 음식이다. 우리는 청진옥 해장국 한 그릇을 먹으면서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더 이상 어떤 평이 필요한가.’ -책 ‘내가 백년식당에서 배운 것들’ 중) 서서갈비에 대해선 드럼통이 K-고깃집 테이블이 된 과거와 ‘커뮤니티 테이블’이라는 최신 개념의 원형이라는 현재를 한데 묶는다.(‘최대 여섯 팀이 이 드럼통을 놓고 화덕에 고기를 구웠다. (중략) 고기가 섞이기도 하고, 먼저 익으면 다른 손님들에게 고기를 밀어주기도 했다. (중략) 그야말로 요즘 유행한다는 ‘커뮤니티 테이블’의 진정한 원형인 셈이다.’ -책 ‘내가 백년식당에서 배운 것들’ 중)
노포(老鋪)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없다. 원래 잘 쓰지 않는 단어였고, 선구자나 다름없는 그 역시 같은 한자 언어권인 일본에서 넘어온 단어가 아닐까 추측하는 정도다. 다만 그가 노포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결같다. 오래됐기에 훌륭한 가게다. 뒤집어도 참이다. 훌륭하기에 오래될 수 있었을 것이므로. 또한 존경받아야 할 곳이다. 노포의 ‘노’에는 ‘오래되다’는 뜻도 있지만 ‘존경한다’는 뜻도 있으니까.
오래돼서 훌륭한, 훌륭해서 오래간
당연하게도 노포의 매력은 음식이다. 음식이 맛있어야 식당이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식당은 내부가 세련됐어도 맛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마련이다. 반면 오랜 식당에는 정서와 추억이 벽면을 가득 채운 낙서처럼 남아 있다. 게다가 팝스타 마돈나가 스테이크를 썰던 레스토랑,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술 한잔하던 카페라면? 그런 식당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애당초 그의 취재는 중년의 흥미로부터 시작됐다. ‘부모님과 함께 갔던 식당 중 아직 남아 있는 곳을 글로 정리해보자.’ 부원면옥이나 하동관이 그랬다. 오래된 식당이 문 닫기 전에 글로 남겨야겠다는 결심이 굳어졌고, 취재는 10년 넘도록 이어졌다. 거절당해도 몇 번이고 찾아가 인터뷰를 청하고, 지인을 총동원하곤 했다. 책 ‘백년식당’, ‘노포의 장사법’, ‘내가 백년식당에서 배운 것들’ 등은 이렇듯 어렵사리 세상에 등장했다.
그는 노포 예찬론자지만 노포가 곧 선(善)이라 말하지 않는다. 주인이 지나치게 이윤을 추구해서는 안 되며, 겸손해야 하고, 식당이 깨끗해야 한다. 취재를 위해 찾았다가 그냥 나온 적도 많다. 노포 찾아 삼만 리, 전국을 누비다 보니 공통점이 추려졌다.
“책에 적어둔 그대로예요. 일단 음식이 맛있죠. 주인은 자신이 파는 음식을 매일 먹어요. 주인이 직접 일하는 거죠. 직원은 사장 못지않게 오래 일합니다. 노포는 단골손님의 경력도 오래됐어요. 그 덕분에 처음 방문한 손님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암호 같은 주문법이 있습니다. 또 단순한 원칙을 오래도록 지켜오고, 거래처를 잘 바꾸지 않는 것도 공통점이죠. 하나 더, 정확한 개업 햇수를 잘 모릅니다. 식당 일을 천하고 힘든 것으로 생각했고, 노포에 대한 인식도 부족했으니까요.”
평양냉면 식당 우래옥의 김지억 전(前) 전무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처음 일할 때 아는 이라도 오면 숨었어. 여관, 술집, 밥집 하는 이, 어디 사람 취급했나.” 2000년대 이후 미식을 즐기는 문화가 일상이 되고, 주방장은 ‘셰프님’이라 불리며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지만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식당은 불안정한 일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의 좌우 충돌, 전쟁과 민주혁명, 산업화 등의 굴곡을 거친 이들은 장사처럼 불안정한 일을 자식에게 맡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일은 고돼도 벌이는 좋았기 때문에, 대학 나와 펜대 굴리는 직업을 갖도록 자식을 뒷바라지했다. 마침 부는 재개발 바람 타고 가게를 허물어버리기도 했다. 이어나갈 의지가 있었음에도 가업을 잃은 안타까운 사연은 제하더라도, 그렇게 없어진 노포가 많았다. 그 때문에 ‘백년식당’이 보통명사처럼 쓰이지만 실제로 100년 된 식당은 없다. 그나마 1950년 전에 지어진, ‘반백년식당’은 전국에 10곳이 채 안 된다.
오래된 것의 가치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은 얼마 전 일이다. 재건축을 위해 30년도 안 된 아파트를 때려 부수고, 보유한 땅이나 건물이 역사적 보존 가치를 인정받으면 싫어한다. 소유자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다. 이런 실정을 고려할 때, 30년가량이면 노포라 부를 만하다.
기꺼이 음식을 기록하는 일
다행인 점은, 느리지만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2010년대를 휩쓴 레트로 열풍을 타고 노포는 ‘힙’하고 멋진 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다. 정부나 지역사회에서도 이를 보존하기 위한 제도적 뒷받침을 모색했다. 노포가 돈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발 빠르게 움직인 ‘사업가’들도 왕왕 있다. 오래된 가게를 사들여 상호와 내부를 그대로 둔 채로 영업하거나, ‘옥’이나 ‘집’으로 끝나는 세 글자 가게명을 달고 내부를 그럴듯한 노포처럼 꾸며 프랜차이즈화하는 경우가 해당된다. 주인의 친부 이름과 생년을 따와 ‘찬일집, since 1965’라고 적힌 간판을 내거는 경우는 귀여운 수준이다.
박찬일 셰프는 이 모든 관심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하는 마음이 든다고 했다. 노포에 대한 관심이 한 철 유행처럼 지나가 버릴까 걱정되기 때문. 가짜 노포가 등장하면서 지나치게 상업화되고, 그러다 전통적인 원칙을 고수하며 양심적으로 운영하던 노포가 초심을 잃어버리면 어떡하나 걱정된다고. 실제로 그의 기준에 들었으나 제하게 된 식당이 몇몇 있다. 노포를 아끼고, 노포가 더 많은 사회를 꿈꾸는 그로서는 지나친 상업화가 걱정될 수밖에 없다.
당분간은 계획이 없지만 취재를 멈추진 않을 것이다. 오랜 이야기를 듣고 잘 다듬어 세상에 내는 작업 말이다. 노포에서 내어주는 곰탕 한 그릇, 이를 가져다주는 여든 먹은 종업원이 곧 역사이자 문화재다. 예술 분야의 장인은 문화재로 지정해 기술이 대물림되게끔 하는데 유독 음식에서는 그런 인식이 덜했다. 박찬일이 보는 노포는 하나하나가 박물관이고 문화재라, 세대교체가 되기 전에 기록해야겠다는 다급함이 있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진정으로 아끼는 마음이 고된 작업을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언젠가는 없어진 노포를 취재하고 싶어요. 망해서 가게를 접은 식당의 주인, 그곳에서 일했던 직원들을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거죠. 식당이 남아 있는 곳은 사람이 죽어도 공간이 남아 있으니 덜해요. 하지만 가게조차 없는 곳들은 사람이 죽고 나면 세상에서 영영 사라져버리죠.”
노포를 취재하다 보면 안타까운 일이 이뿐이겠는가. 폭력적이었던 종로 피맛골 재개발 과정, 결국 원래 자리에서 쫓겨나고 만 을지OB베어가 그렇다. 그는 한 건물주가 ‘우리도 화장실 좀 가자’고 써서 붙인 쪽지를 기억한다. 개발을 찬성하는 쪽의 입장을 이해한다. 스스로 ‘낭만적인 사람’이라 자조하지만서도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싹 갈아엎는 재개발 대신 불편한 점을 보완하고 보존했더라면 더 큰 경제적 이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유수의 오랜 도시들은 차도 못 다니는 좁고 울퉁불퉁한 골목 경관을 보러 오는 관광객들로 많은 돈을 벌고 있다. 우리나라만 해도 요즘 관광 오는 외국인들, 노포에서 국밥 먹으면서 엄청나게 좋아하더라는 설명을 그가 덧붙였다.
노인을 위한 나라, 시민의 자부심이 되다
오랜 식당은 무엇보다 시민의 정서적 공공 자산일 수밖에 없다. 똑같은 노포라도, 식당에는 이발소나 기름가게보다 내밀한 구석이 있다. 그의 말마따나 ‘음식과 술이라는 촉촉하고 진한 매개체로 정서를 주고받으며 오래 머무르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 보기에 불편한 것도, 삶의 흔적이 쌓였음을 알고 나면 소중해진다. 서울 연남동 서서갈비에서는 처음 찾은 20대 손님도, 몇십 년 단골손님도 ‘불편하게’ 서서 고기를 굽는다. 누구도 이를 지적하지 않는다. 멋있다고 생각할 뿐.
40년, 50년 넘도록 오래 일한 직원은 그 의미를 더한다. 박찬일 셰프는 노포가 곧 ‘노인을 위한 나라’라고 말한다. 노인이 찾아가기에 노포가 있고, 노포가 있기에 노인도 있다고 생각해서다. 추억이 깃든 식당에서 식사하고, 공간을 온전히 즐기는 모습은 언제 봐도 멋있단다.
“외국 영화를 보면 50년 된 단골이 늘 앉던 자리에 앉죠. 그러면 머리가 하얗게 센 종업원은 묻지도 않고 알아서 메뉴를 내와요. 무얼 먹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는 거죠. 멋있지 않나요?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식당이 곧 노포예요. 사장과 손님이 함께 늙어간 거죠. 이런 곳은 직원도 오래 일해요. 힘은 떨어져도 기술이 좋아서 노련하죠. 단골손님 각각의 사연을 다 기억하다 보니 이야기도 곧잘 받아주고요. 단골 매출이 좋을 수밖에 없어요.”
노포는 초고령화 사회를 앞둔 요즘, 모범적인 노인 노동 사례이자 연구 대상이다. 그가 찾은 노포들은 일할 능력이 되면 ‘갈 데까지 가보는’ 종신 고용을 고수한다. 직원이 평생을 일하며 원칙을 고수한 덕분에 가게는 한결같은 맛으로 손님을 잃지 않는다. 청진옥, 우래옥, 조선옥 같은 곳이 일찍이 해왔던 방식이다. 노동자를 임금 지급 대상과 효율로만 보는 기존의 경제 논리를 뒤집는 격이다. 여기에 박찬일 셰프는 노인이 정서적으로도 무언가를 얻게 된다고 설명한다.
“최근에 우래옥의 김지억 전 전무님과 냉면을 먹었어요. 거기 직원이 오랜만에 뵙게 돼서 좋다고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선물을 주더군요. 여든 훌쩍 넘은 단골손님이 ‘전무님이 여길 다 나오셨냐’며 반가워서 손을 덥석 잡는 일도 있었죠. 나도 나이 들어 저런 뭉클함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박찬일 셰프는 조선옥의 김진영 사장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그분이 저한테 그러더군요. ‘박 씨 아저씨(박중규 조선옥 주방장)가 그냥 계속해서 일을 나왔으면 해요. 그분이 영영 안 나온다고 생각하니까, 그게 너무 싫어.’” 박중규 옹은 올해로 여든넷, 입사 65년 차 주방장이다. 김 사장이 국민학교 시절부터 봐왔던 ‘아저씨’는 단순한 직원이 아니다. 이런 장면을 마주할 때면 박 셰프 말마따나 ‘마음속 울대와 현이 찌르르 울려’ 감동한다. 효율만을 따져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비효율의 끝, 노포가 노포로 남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남편의 장례식에 그 여자가 왔다. 경황이 없던 터라 옆에 있던 친구가 “혹시 저 여자 아니냐?”며 귀엣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상주에게 인사를 건네기는 고사하고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안개처럼 스며들어 소리 없이 조문을 하고는 그림자처럼 홀연히 자리를 떴으니. 나중에 부의금을 챙길 때도 그 여자 것은 없었다. 철저히 존재를 감춘다는 것이 오히려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고 할지. 다녀간 걸 알고 나니 부의금을 내지 않은 이유가 짐작되면서, 꽁꽁 감춘다고 감춘 것이 티를 낸 꼴이라 피식 웃음이 났다.
남편 장례식에 그 여자의 등장이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딱히 나쁠 것도 없었다. 이제 와서 좋다 나쁘다 할 게 뭔가. 이미 남편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두 여자의 심리적 줄다리기도 남편의 사망으로 맥없이 끝이 나버렸으니. 한쪽 줄은 남편과의 내연 관계인 그 여자가, 다른 쪽 줄은 아내인 내가 잡고 있던 줄다리기.
간호사와 환자로 만나 결혼
위암 판정을 받은 남편은 꼬박 1년을 투병한 후 세상을 떠났다. 47세였다. 평소 소화가 잘 안 되고 속이 더부룩한 증상이 잦아 소화제로 버티다 못해 위내시경 검사를 받았고, 결과는 암이었다. 남편은 크게 충격을 받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암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라 치료는 하되 아울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의사의 말에도 “사람은 언젠가 죽게 마련이니까요” 하는 말로 대꾸했을 뿐이었다. 문학청년, 아니 문학장년다운 말이었다고 할지.
감정적 동요를 거의 보이지 않는 그를 보며 ‘이이가 이 정도로 담대한 사람이었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아니면 도저히 믿기지 않아 실감을 못 하는 건가?’ 하고 놀란 건 되레 나였다. 아니면 본인이 진단받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내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의연함을 가장하는 건가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남편의 암 진단 후에도 나는 계속 일을 해야 했다. 그렇지 않겠나. 현실은 더 힘들어졌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야속했던 건 남편이 아니라 오히려 나였던 것 같다. 결혼 전부터 해오던 일을 결혼 후 아이 출산하고 산후조리 때 잠깐 쉬었을 뿐 20년 넘게 해오면서, 막말로 죽을 날 받아놓은 남편이건만 그때조차 옆에 있어 주질 못했으니. 남편을 떠나보낸 지금, 만약 옆에 있어 주느라 생활비에 치료비도 감당하지 못했다면 그나마 1년 투병도 채우지 못했을 수도 있다며 나 자신을 위로하는 것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나는 간호사다. 30대 초반에 일을 시작해 경력 따라 연륜 따라 52세인 지금은 중간급 병원의 수간호사로 근무 중이다. 남편은 나의 환자였다.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로맨틱한 설정의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간호사와 환자 관계에서 부부가 된 경우였다. 우리 부부의 결혼 생활은 로맨틱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무난했다고는 말할 수 있다. 그 무난함을 지탱해준 것은 두말할 여지 없이 내가 가지고 오는 일정한 수입이었고. 결혼 후 지금까지 돈을 벌어본 적 없는 남편이 묵묵히 가사와 살림을 꾸려온 것도 우리 결혼의 무난함에 일조했음을 물론 인정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남녀의 전통적 역할을 바꾼, 바깥일하는 아내 집안일하는 남편 구도의 가정이었던 것이다.
다만 남편은 나 말고 다른 여자를 또 하나의 아내처럼 의지하며 지냈고, 나는 그런 두 사람 관계를 묵인한 채 결국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정리되는 것을 보아야 했다. 그렇다. 무난했다는 말은 거짓말이고, 처음부터 결코 무난할 수 없었던 결혼 생활이었음을 인정한다. 애초 우리의 결혼은 세 사람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문학폐인 단짝이 내연녀로
그해 추석 명절 연휴 마지막날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밤늦게 병원에 온 30대 후반의 남자. 그날 나는 야간 근무 중이었다. 미혼인 데다 뒤늦게 간호학을 전공한 나이 많은 새내기 간호사였던 나는 명절마다 당직이나 야간 근무에 배정됐다. 가정을 가진 선배 간호사들을 대신해 당연한 양보라고 생각했기에 딱히 불만도 없었다. 명절이라 봤자 갈 곳도 없었기에 더욱.
오빠 집에 갈 수도 있었지만 부모님이 안 계신 친정은 이미 친정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이 연이어 돌아가신 지 2년, 3년 정도밖에 안 되었던 때라 명절에 간다고 해도 눈치나 푸대접을 받지는 않았겠지만, 오빠는 몰라도 별로 반가워하지 않을 올케 앞에 나타나고 싶지 않았다. 교회에 다녔던 우리 집은 차례도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차례 핑계를 대고 찾아갈 명분도 없었다. 세상 아래 피붙이라곤 오빠와 나 남매뿐이었지만, 부모님이 살아 계셨을 때도 그다지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으니 부모님이 떠나신 마당에 새삼 가까이 지내지도 않았다.
이래저래 명절 근무는 갈 곳 없는 나를 편하게 해주었다. 연휴에는 환자가 많을 때도 있고 아주 없을 때도 있다. 그야말로 환자 마음. 그해 추석 명절은 환자가 없는 편에 속했다. 밤 11시경 응급처치를 받은 그 남자, 미래의 내 남편은 장염에 걸렸던 것이다. 그는 다음 날 정식으로 치료를 받고 며칠 입원하는 정도로 회복되었는데, 그 며칠 사이에 그와 나는 상당히 가까워져서 1년 만에 결혼을 했다. 내 나이 40을 넘긴 때였다.
내가 남편 내연녀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결혼 후 5년 만이었다. 두 사람은 대학교 때부터 알던 사이. 연인 중 한쪽이 결혼을 하자 둘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 채 결혼하지 않은 여자 쪽이 내연녀로 자리를 옮겨 앉은 것이었다. 내 입장에서 남편은 애인이 있는 남자, 그 관계를 정리하지 않은 채 결혼한 남자였던 것이다. 둘은 왜 결혼하지 않았을까. 이유는 단순했다. 남편의 무능력 탓이었다. 돈 벌 재주가 없었던 사람, 어쩌면 돈 벌 생각이 없었던 사람이니 두 사람은 결혼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그렇게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 쪽에서도 돈 벌 능력이 없었을 테고.
두 사람은 작가 지망생이었다. 둘 다 대학 문예창작과를 다니던 중에 어느 문학 단체에서 만났다고 했다. 세월이 흘러갔지만 두 사람 모두 글은 써지지 않았고, 그럴수록 서로 간의 연민과 공감대가 깊어갔을 것이다. 고시폐인, 공시폐인 등 폐인증후군 중에서 이른바 ‘문학폐인’이 되어가고 있을 무렵, 경제력 있는 내가 남편 눈에 띄었고 남편은 운 좋게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던 것이다. 물론 그는 결혼과 동시에 그 여자와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뜻대로 안 됐을 뿐. 나는 병원 일로 정신없다 보니 남편의 정서적 빈자리는 풋풋할 때부터 알고 지내던 그 여자가 메워주었을 것이다.
남편의 죽음으로 관계 정리
만약 남편이 자기 일이 있었다면, 규칙적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이 있었다면 결혼과 함께 그 여자와 멀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편은 그러지 못했다. 마흔 살이 넘으면서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커졌고, 그럴수록 그 여자와의 유대는 더 깊어졌을 것이다. 그 여자로선 어차피 결혼 상대가 없을 바에야 남편만큼 편한 사람이 또 있으랴. 내가 번 돈이 그 여자한테로 쏠쏠이 넘어갔을 걸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 때가 있지만 그 또한 다 지나간 일이다.
둘 사이를 알게 된 것은 소설을 쓴답시고 두 사람이 주고받은 인터넷 메시지를 통해서였다. 어느 날 내가 퇴근하기 직전까지 둘이 속닥거리다가 미처 컴퓨터를 끄지 못한 상태에서 들켜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병원에 있는 낮 시간 동안 두 사람은 SNS나 전화로 늘 교류해왔던 것인데, 핑곗거리로도 얼마나 좋은가. 글에 관한 대화 중이었다고. 자기들 스스로도 단지 글 이야기를 하는 거라며 관계를 합리화했을 테고. 돌이켜보면 남편이 그 오랜 세월 묵묵히 살림을 맡아 꾸려준 것도 내가 출근한 사이에 가지는 그 여자와의 밀회 덕이었으리라.
내가 알게 된 이상 두 사람의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정리되었다.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내 쪽에서 그 여자를 만나 헤어져달라고 말한 것도 정리에 대한 경고의 몸짓은 되었을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이혼하지 않는 이상 어쩔 것인가. 남편을 믿을 수밖에. 그러나 내 쪽에서 다시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말이 더 맞다. 그랬다. 나는 묵인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3년 후 남편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내가 두 사람의 관계를 안 후에도 두 사람이 계속 만났는지, 아니면 관계를 정리했는지 나는 모른다.
남편이 떠난 지금 남편과의 추억을 그 여자와 나눠 가진다고 해서 억울할 것도 없다. 다만 추억의 부피로나 깊이로나 나보다 그 여자의 것이 훨씬 두껍고 깊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를 쓰라리게 한다. 그의 아내는 내가 아니라 그 여자이고 내 인생은 두 사람을 먹여 살리느라 흘러간 게 아닐까 하는 자학적 망상에 빠져들 때도 있지만, 어쨌든 세 사람의 인연은 이걸로 끝이 나게 됐으니….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2023년 키덜트의 시대가 오고 있다. 키덜트(Kidult)는 아이(Kid)와 어른(Adult)의 합성어로 아이와 같은 감성과 취향을 가진 어른을 뜻한다. 100세 시대가 도래하면서 중년의 키덜트가 늘어나고 있다. 사회와 문화 전반에서 주류로 떠오른 중년 키덜트의 파급력과 그 이유를 짚어봤다.
김난도 서울대학교 교수는 저서 ‘트렌드 코리아 2023’에서 ‘네버랜드 신드롬’을 언급했다. 네버랜드는 피터팬과 친구들이 늙지 않고 영원히 아이의 모습으로 사는 곳이다. 책에서는 우리 사회에서 나이 들기를 거부하는 피터팬이 많아지는 트렌드를 ‘네버랜드 신드롬’이라고 표현했다. 쉽게 말하면 대한민국 전체가 더 이상 나이 들고 싶어 하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다.
네버랜드 신드롬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첫 번째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리턴(Return) 유형이다. 배우 한소희가 착용해 3000원짜리 공주 세트가 돌풍을 일으킨 것, 포켓몬 빵 품절 대란 등을 이 유형의 예로 들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키덜트는 리턴 유형에 속한다.
네버랜드 신드롬의 두 번째 유형은 스테이(Stay)로, 나이 듦을 거부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 유형의 사람은 동안 외모를 유지하는 것을 넘어 승진을 마다하면서까지 현 상태에 머물고자 한다. 세 번째로는 아이들처럼 쉽고 재밌고 명랑하게 노는 것을 좋아하는 플레이(Play) 유형이 있다.
고령화 시대와 키덜트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키덜트 시장 규모는 2014년 5000억 원 수준에서 지난해 1조 6000억 원으로 확대됐다. 향후 최대 11조 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키덜트는 비단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시장을 주름잡은 주력 세력이다.
키덜트가 급부상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근본적인 이유는 전 세계가 빠르게 늙어간다는 데 있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면서 사회가 유년화되고 있다. ‘이 나이 때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식의 사회적 나이 개념이 흐려지고 있다.
키덜트는 어린 시절 가지고 놀았던 추억의 장난감, 만화책, 만화영화 등을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소비하는 현상을 보인다. 그런 키덜트를 향한 시선은 몇 년 전만 해도 부정적이었다. 유치한 취향을 가진 철없는 어른으로 봤다.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스스로 어른임을 인정하지 않은 채 타인에게 의존하고 싶어 하는 ‘피터팬 증후군’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키덜트를 향한 시선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어른은 이래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의 장막이 걷히자 개인의 취향을 존중해주는 시대가 됐다. 이로 인해 자신의 취향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키덜트가 늘어났고, 소비 시장 또한 커졌다. 자녀와 함께 취미 생활을 즐기는 키덜트 부모도 많아졌다. 드론, 무선조종 자동차, 레고 등을 가족이 함께 즐기며 유대감을 쌓는다.
키덜트가 급증한 두 번째 원인으로 미래 불안감이 거론된다. 키덜트는 불안한 미래와 힘든 현실로 인해 어린 시절 행복했던 추억에 젖으며 위안을 얻고자 하는 심리가 작용한 것이라고 본다. 여기에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실내 활동이 증가하면서 장난감 시장이 크게 성장했다.
트랜스포머 시리즈로 유명한 장난감 회사 해즈브로는 2019년 47억 2000만 달러에서 지난해 64억 2000만 달러로 순수입이 증가했다. 동기간 바비 인형 회사 마텔의 순매출은 45억 달러에서 54억 6000만 달러로 늘었다.
문화 발전과 중장년 키덜트의 성장
현재 시장을 주름잡는 키덜트의 중심에는 중장년층이 있다. 그 이유는 뭘까. 스타워즈, 포켓몬 등을 보유한 장난감 회사 재즈웨어스의 제러미 파다워 최고브랜드책임자는 CNBC에서 “1970~80년대에 영화와 TV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한 장난감이 크게 유행하면서 이 시기에 팬덤을 경험한 세대가 현재 30~40대에 접어들었다. 이 사람들이 키덜트의 시작이 됐다”라고 말했다.
현재 상영 중인 극장판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이노우에 다케히코 감독)가 흥행하는 것을 봐도 중장년층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개봉 2주 만에 누적 관객 100만 명을 돌파했다. 새해 첫 100만 영화다. 1990년대 만화 ‘슬램덩크’를 즐겨 본 중장년층이 오래 간직한 팬심을 드러냈다고 풀이할 수 있다.
유튜브 채널 ‘오덕사’(오리엔탈 덕후 사관학교)를 운영 중인 라이너는 게임에 주목해 말했다. 그는 “중장년층을 1980년대생이라고 생각한다. 1980년대생은 게임에 익숙한 세대다. 게임을 하기 위한 용도로 컴퓨터를 구매할 정도였다”면서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어도 게임을 취미로 이어가는 것이다. 중장년층은 나이를 아주 많이 먹어도 게임을 계속할 것이다”라고 생각을 전했다.
종합하면, 세상은 나이 들어가는데 사람들은 젊어지고 있다. 나이보다 젊게 사는 것이 미덕인 시대가 됐다. 앞으로 키덜트는 더욱 많아질 것이며, 개인과 사회에 순기능으로 작용할 것이다. 개인에게는 어린 시절의 향수로 심리적 안정감을 얻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창구가 된다. 시장 및 사회는 키덜트로 인해 활기와 역동성을 잃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오덕사’ 교장 선생님, 라이너
“중장년 키덜트여,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영화평론가로 유명한 유튜버 라이너는 채널 ‘오덕사’(오리엔탈 덕후 사관학교)에서 교장 선생님을 맡고 있다. 오덕사는 만화·애니메이션·게임을 심도 있게 분석해 소개하는 채널이다. 채널의 주요 연령층은 30·40대다.
“10·20대부터 40대 중반까지, 오덕사 구독자분들의 연령층은 다양합니다. 그중 30·40대가 제일 많은데요. 중장년층은 아무래도 추억의 만화, 애니메이션 콘텐츠를 좋아하시더라고요. ‘기생수’, ‘에반게리온’을 소개했을 때 반응이 특히 뜨거웠죠.”
스스로 키덜트라고 말하는 라이너.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고 싶어서 만든 채널이 바로 오덕사다. 라이너는 어렸을 때부터 비범했다. 만화방, 비디오방을 전전하는 것을 넘어 해적판 비디오를 구하러 용산을 찾아가곤 했다고. “친구들은 전혀 모르는 세계를 알고 있었다”고 덧붙이며 웃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게임도 좋아했고, 영화와 소설도 굉장히 많이 봤어요. 문화 전반에 관심이 많았죠. 김구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문화의 힘이 되게 중요하다고 믿거든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물론 과학기술이겠지만, 그 이상으로 문화와 예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의 문화생활은 라이너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만화 또는 애니메이션 중 그의 인생작은 무엇일까. 라이너는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의 극장판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를 꼽았다. 마크로스는 거대한 우주선인데, 지구가 멸망하면서 마크로스에 탄 사람들이 마지막 인류가 된다. 그들은 외계인 젠크라디와 싸움을 벌인다.
“외계인 젠크라디에게는 한 가지 약점이 있었어요. 바로 문화를 가지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인류는 머리를 쓰죠. 마크로스 안에 당대의 아이돌 가수 린 민메이가 있었는데, 우주 콘서트를 펼치죠. 음악을 듣고 젠크라디들은 붕괴됩니다. 거기서 ‘컬처 쇼크’(문화 충격)라는 말이 처음 나왔어요. 제 영화 유튜브 채널 이름도 ‘라이너의 컬쳐 쇼크’죠. 1980년대에 그런 스토리가 나왔다니, 정말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덕사에서 다루는 콘텐츠 중 게임의 비중은 적지만, 라이너는 여전히 게임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슬픈 이야기가 있다”고 털어놓았다. 어렸을 때는 수중에 돈이 없어서 게임을 즐기지 못했는데, 현재는 시간이 없어서 게임을 못 한다고. “게임을 하고 싶은 마음은 커서 게임 패키지를 삽니다. 그런데 시간이 없으니 상상으로만 게임을 하고 진열장에 넣어두죠. 그렇게 쌓인 게임이 한가득이에요.”
라이너는 키덜트인 자신의 취미 활동에 대한 장점을 늘어놓았다.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은 특별한 장비 없이도 할 수 있는 경제적인 취미 활동이다. 또 누구를 상처 입히거나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에 건전한 취미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키덜트로 살 것이라는 라이너는 동년배 중장년층에게 자신처럼 ‘덕후’가 될 것을 추천했다.
“중장년층에게 애니메이션을 즐겨 본다고 해서, 게임을 좋아한다고 해서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나쁜 짓 하는 게 아니잖아요. 어렸을 때나 하던 유치한 것을 즐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숨은 명작이 많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죠.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취미 활동을 당당하게 즐기면서 ‘원더풀’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2023년 새해가 밝았다. 나이를 한 살 더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게 된 것이 내 경우는 50세 이후였던 것 같다. 올해부터 우리나라도 법적으로 ‘만 나이’를 적용한다고 하니 한 살을 되돌린 느낌이다. 기분이 나쁘지 않다. 한 살이 어딘가. 그러니까 서양처럼 우리도 이제는 태어났을 때 0살로 시작하는 것이다.
토끼띠인 나는 올해 생일에 환갑을 맞는다. 한 바퀴 돌아 다시 태어났다고 쳐서 0살이라 우겨도 또래 친구들은 함께 웃어주며 공감하리라. 시집 못 간 노처녀가 한해 한해 더할 때마다 속이 타들어가듯이(요즘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초조하고 심란하기는 여전할 테지), 이혼 후 ‘돌싱’ 10년 차인 나도 이제는 막차를 탄 느낌이 확연하다. 60세, 재혼이든 그저 친구 사이든 남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올해 마지막으로 삼겠다는 뜻인데, 이미 너무 늦었나? 솔직히 50대가 끝나는 작년을 기점으로 했지만 나 스스로 1년 더 연장하는 것이다. 더구나 올해부터는 공식적으로 만 나이가 적용된다지 않나. 이렇게 연장, 연장하면서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을 달래는 걸 테지.
사랑에는 연령도, 국경도 없다지만 그건 그런 사랑을 성취한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령에서 걸리고, 국경은 아예 넘어볼 생각도 못 한다. 그렇다고 이혼 후 적극적으로 상대를 찾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먹고사느라 바빴고, 이미 성인이지만 그래도 엄마 마음에 두 아들을 심리적으로 건사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이혼을 하고 나니 아이들에게 더 마음이 쓰이고, 집착까지는 아니라 해도 안쓰럽고 미안해서 그저 마음뿐이지만 그 마음뿐인 마음을 더 쏟게 된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건 막연한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만나면 좋고 못 만나면 하는 수 없고. 그런데 이런 말은 하나마나다. 만남을 위한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이기에. 로또에 당첨되려면 우선 매주 로또를 사야 할 게 아닌가.
내 나이 60, 이성을 만날 수 있을까?
나보다 두 살 많은 이혼 선배 언니는 기한을 정해놓고 남자 찾는 일에 열심이고 부지런했다. 주변에 소개를 부탁하고, 모임에 나가서도 적당한 사람이 없나 둘러보는 등 적극적이었다. 내가 올해까지만 남자를 찾아보겠다고 한 것도 실은 그 언니의 말을 흉내 낸 것이다. 그러니까 그 언니는 만 60세까지 열심히 찾고, 그래도 안 되면 포기하고 혼자 살겠다고 한 것이다. 이혼한 지 30년 된 그 언니는 말했다. 혼자 밥 먹으면서 혼자 늙어가는 것, 너무 쓸쓸할 것 같다고. 결혼은 안 해도 함께 밥 먹고 편안한 차림으로 밤마실도 가고, 그러다 온기 비치는 카페에서 차도 마시고 그런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누구는 그런 사람이 있으면 싫은가? 혼자 사는 사람 백이면 백, 다 그런 사람을 원한다고 할 테지. 하지만 그 언니는 나와 달리 적극적으로 찾지 않았던가. 60세에 소개팅을 하기까지 했으니. 결과는 이번에는 혹시나 했는데 이번에도 역시나였지만. 그렇게 해서 그 언니는 본인이 말한 대로 결연히 ‘연애계’를 떠났고, 지금은 동성 친구들 속에서 다양한 취미생활로 삶의 활력을 찾으려고 노력 중이다.
아무런 시도도 노력도 없이 올해 60세가 된 나는 포기하고 말고도 없다. 포기란 노력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세 가지 카드 중 하나니까. 노력해서 성취하거나, 노력했지만 실패하거나, 노력한 후에 포기하거나. 이런 세 가지 카드 말이다.
떠난 사랑에 10년째 가슴앓이하는 나
서론이 너무 길었다. 이런 사설을 늘어놓으려던 건 아닌데. 실은 내게는 짝사랑 상대가 있다. 사랑 중에 가장 안전하고, 돈도 안 들고, 헤어질 염려가 없는 게 짝사랑이라고 하듯이 내 사랑도 그렇다. 엄밀히는 짝사랑이 아니지만. 그러니까 이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딱 3개월을 만난 사람.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유부남을 만났다고 손가락질해도 하는 수 없다. 그러곤 10년을 가슴앓이 중이다. 아니 앞으로 30년을 가슴앓이할지도 모른다. 고작 3개월 만나고 30년 가슴을 앓는 사랑. 그 고통이면 유부남을 만난 대가를 충분히 치르는 것 아닐까.
그는 나보다 열두 살 많은 띠동갑이었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 오히려 좋았다. 열두 살보다 더 많았다면 더 좋았을 만큼. 왜냐하면 나는 그에게서 아버지를 찾았으니까.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임에도 왠지 그는 아버지를 닮은 것 같았다. 마냥 푸근하고 의지가 됐다. 물론 이혼한 직후라 쓰라린 상처를 위로받고 기대고 싶은 마음이 커서 더 그랬을 것이다. 그가 유부남이란 게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끌렸던 것도 그에게서 아버지를 발견하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다. 지금이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심리적·정서적으로 거의 독립적인 삶을 살고 있으니까.
다섯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었다. 아버지는 선비풍에 우울 기질이 있는 이른바 문학청년이었다고 한다. 학창 시절의 멜랑콜리함이 생활 전선에서는 치명적으로 작용하여 적성과는 무관하게 선택한 금융 계통의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했고, 설상가상 불명예스러운 일로 사표를 쓴 후 우울증을 앓았다고 했다. 지금 같으면 정신과 치료라도 받을 수 있었겠지만 그때는 그럴 상황도 아니었고, 어머니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욕실에서 목을 매어 돌아가셨다. 미처 손 써볼 겨를도 없었던 순식간의 일이었다고.
5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와 단둘이 남게 된 나는 어머니보다 아버지가 늘 그리웠다. 아주 어릴 때라 기억에 아예 없으면 부재만을 느꼈을 테지만, 다섯 살 무렵이면 어렴풋이 기억나는 나이였다. 그렇게 형체 없는 그리움에 아버지 있는 친구들에 대한 부러움이 버무려져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처가 허한 속을 휘젓곤 했다.
이혼한 남편은 차갑고 냉담한 사람이었다. 내가 부성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빈자리를 채워주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리를 두고 나를 대했다. 때로는 조종을 했다. 사랑을 거래하고 조건을 걸면서 늘 나를 목마르게 했고, 안달나게 했고, 외롭게 했다. 결혼한 지 10년 지났을 무렵부터 외도를 하기 시작하더니, 한 여자를 꾸준히 만나는 것도 아니고 이 여자 저 여자를 바꿔가며 습관적으로 바람을 피웠다. 부부랄 것도 없이 어느 새 우리는 남남이 되어 있었고, 작은애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각자의 길을 택해 떠났다. 그는 지금도 어느 여자의 치마폭에 감겨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환상을 쫓는 사랑
나는 그렇게 늘 쓸쓸했다. 전 남편을 통해서 아버지의 그림자를 붙잡고 싶었지만 말 그대로 그림자처럼 스러져버렸고, 그러고는 그 남자를 만난 것이다. 그는 따뜻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이었다. 사랑이 고픈 내게 사랑을 선물로 주러 온 사람 같았다.
이혼 후 내가 찾은 일은 출판 기획이었다. 대학 졸업 후 결혼 전까지 출판사 일을 잠깐 했을 뿐인데, 단절된 경력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 취직할 수 있었다. 규모도 꽤 되는 곳이었다. 언론 계통의 출판을 의뢰하러 온 그를 그렇게 만났다. 책이 나온 날 자축 겸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며 그가 식사 대접을 제안했고, 그 후 우리는 가까워졌다. 그날부터 3개월 동안 우리는 거의 매일 만났다. 언론사에 근무했던 터라 비교적 자유로이 시간을 낼 수 있는 그에 비해 나는 붙박이로 일해야 했기 때문에 더 자주 만나지 못해 안달이 난 쪽은 처음엔 그였다. 만나는 동안 이제 그만 관계를 끝내야 하지 않겠냐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가 두어 차례 꺼냈을 때 들은 척도 하지 않았을 정도로 그는 내게 푹 빠져 있었다.
그러던 그가 정확히 석 달 만에 관계를 정리하자고 했다. 만나는 내내 그만 만나야지, 그만 멈춰 서야지 하고 늘 생각해왔다면서. 그가 멈추면 멈추는 것인가? 내가 멈추자고 했을 때는 아예 브레이크가 없는 듯이 질주하더니. 가는 데까지 가보자고 했던 게 누구였던가. 결혼도 남자가 하자고 해야 성사된다더니, 만났다 헤어지는 주도권도 남자가 쥐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매달리지도 않았지만 매달려봤자라는 것을 모를 나이가 아니었다. 알았다고 하고, 그러자고 하는 것으로 우리 관계는 끝났다. 그나마 자존심을 그렇게라도 지킬 수 있었던 것이 그와 나의 관계에서 내가 추스를 수 있는 전부였다. 그는 내 눈앞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그때부터 내 마음에서 짝사랑이란 형태로 10년째 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10년간 끌어오고 있는 그에 대한 사랑은 환상이라는 것을. 그는 나에게 상처 준 남편을 대신하고, 목마른 아버지의 사랑을 대신하기 위해 내가 만들어낸 남자라는 것을. 올해 나는 그 남자를 마음에서 지워버리려고 한다. 60세 이후 새로운 10년을 또 그렇게 보내서는 안 될 것이기에. 하지만 자신은 없다. 혹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할 것이다. 그 나이에 그런 짝사랑이나마 마음에 품고 사는 것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데, 때로는 행복하기조차 할 텐데 왜 굳이 지우려 하냐고. 정말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비참한 여자인가. 아니면 그의 아내가 죽기를 빌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그의 옆자리가 비면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그건 환상도 아니고 망상일 테지만.
※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