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2023년 새해가 밝았다. 나이를 한 살 더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게 된 것이 내 경우는 50세 이후였던 것 같다. 올해부터 우리나라도 법적으로 ‘만 나이’를 적용한다고 하니 한 살을 되돌린 느낌이다. 기분이 나쁘지 않다. 한 살이 어딘가. 그러니까 서양처럼 우리도 이제는 태어났을 때 0살로 시작하는 것이다.
토끼띠인 나는 올해 생일에 환갑을 맞는다. 한 바퀴 돌아 다시 태어났다고 쳐서 0살이라 우겨도 또래 친구들은 함께 웃어주며 공감하리라. 시집 못 간 노처녀가 한해 한해 더할 때마다 속이 타들어가듯이(요즘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초조하고 심란하기는 여전할 테지), 이혼 후 ‘돌싱’ 10년 차인 나도 이제는 막차를 탄 느낌이 확연하다. 60세, 재혼이든 그저 친구 사이든 남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올해 마지막으로 삼겠다는 뜻인데, 이미 너무 늦었나? 솔직히 50대가 끝나는 작년을 기점으로 했지만 나 스스로 1년 더 연장하는 것이다. 더구나 올해부터는 공식적으로 만 나이가 적용된다지 않나. 이렇게 연장, 연장하면서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을 달래는 걸 테지.
사랑에는 연령도, 국경도 없다지만 그건 그런 사랑을 성취한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령에서 걸리고, 국경은 아예 넘어볼 생각도 못 한다. 그렇다고 이혼 후 적극적으로 상대를 찾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먹고사느라 바빴고, 이미 성인이지만 그래도 엄마 마음에 두 아들을 심리적으로 건사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이혼을 하고 나니 아이들에게 더 마음이 쓰이고, 집착까지는 아니라 해도 안쓰럽고 미안해서 그저 마음뿐이지만 그 마음뿐인 마음을 더 쏟게 된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건 막연한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만나면 좋고 못 만나면 하는 수 없고. 그런데 이런 말은 하나마나다. 만남을 위한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이기에. 로또에 당첨되려면 우선 매주 로또를 사야 할 게 아닌가.
내 나이 60, 이성을 만날 수 있을까?
나보다 두 살 많은 이혼 선배 언니는 기한을 정해놓고 남자 찾는 일에 열심이고 부지런했다. 주변에 소개를 부탁하고, 모임에 나가서도 적당한 사람이 없나 둘러보는 등 적극적이었다. 내가 올해까지만 남자를 찾아보겠다고 한 것도 실은 그 언니의 말을 흉내 낸 것이다. 그러니까 그 언니는 만 60세까지 열심히 찾고, 그래도 안 되면 포기하고 혼자 살겠다고 한 것이다. 이혼한 지 30년 된 그 언니는 말했다. 혼자 밥 먹으면서 혼자 늙어가는 것, 너무 쓸쓸할 것 같다고. 결혼은 안 해도 함께 밥 먹고 편안한 차림으로 밤마실도 가고, 그러다 온기 비치는 카페에서 차도 마시고 그런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누구는 그런 사람이 있으면 싫은가? 혼자 사는 사람 백이면 백, 다 그런 사람을 원한다고 할 테지. 하지만 그 언니는 나와 달리 적극적으로 찾지 않았던가. 60세에 소개팅을 하기까지 했으니. 결과는 이번에는 혹시나 했는데 이번에도 역시나였지만. 그렇게 해서 그 언니는 본인이 말한 대로 결연히 ‘연애계’를 떠났고, 지금은 동성 친구들 속에서 다양한 취미생활로 삶의 활력을 찾으려고 노력 중이다.
아무런 시도도 노력도 없이 올해 60세가 된 나는 포기하고 말고도 없다. 포기란 노력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세 가지 카드 중 하나니까. 노력해서 성취하거나, 노력했지만 실패하거나, 노력한 후에 포기하거나. 이런 세 가지 카드 말이다.
떠난 사랑에 10년째 가슴앓이하는 나
서론이 너무 길었다. 이런 사설을 늘어놓으려던 건 아닌데. 실은 내게는 짝사랑 상대가 있다. 사랑 중에 가장 안전하고, 돈도 안 들고, 헤어질 염려가 없는 게 짝사랑이라고 하듯이 내 사랑도 그렇다. 엄밀히는 짝사랑이 아니지만. 그러니까 이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딱 3개월을 만난 사람.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유부남을 만났다고 손가락질해도 하는 수 없다. 그러곤 10년을 가슴앓이 중이다. 아니 앞으로 30년을 가슴앓이할지도 모른다. 고작 3개월 만나고 30년 가슴을 앓는 사랑. 그 고통이면 유부남을 만난 대가를 충분히 치르는 것 아닐까.
그는 나보다 열두 살 많은 띠동갑이었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 오히려 좋았다. 열두 살보다 더 많았다면 더 좋았을 만큼. 왜냐하면 나는 그에게서 아버지를 찾았으니까.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임에도 왠지 그는 아버지를 닮은 것 같았다. 마냥 푸근하고 의지가 됐다. 물론 이혼한 직후라 쓰라린 상처를 위로받고 기대고 싶은 마음이 커서 더 그랬을 것이다. 그가 유부남이란 게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끌렸던 것도 그에게서 아버지를 발견하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다. 지금이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심리적·정서적으로 거의 독립적인 삶을 살고 있으니까.
다섯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었다. 아버지는 선비풍에 우울 기질이 있는 이른바 문학청년이었다고 한다. 학창 시절의 멜랑콜리함이 생활 전선에서는 치명적으로 작용하여 적성과는 무관하게 선택한 금융 계통의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했고, 설상가상 불명예스러운 일로 사표를 쓴 후 우울증을 앓았다고 했다. 지금 같으면 정신과 치료라도 받을 수 있었겠지만 그때는 그럴 상황도 아니었고, 어머니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욕실에서 목을 매어 돌아가셨다. 미처 손 써볼 겨를도 없었던 순식간의 일이었다고.
5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와 단둘이 남게 된 나는 어머니보다 아버지가 늘 그리웠다. 아주 어릴 때라 기억에 아예 없으면 부재만을 느꼈을 테지만, 다섯 살 무렵이면 어렴풋이 기억나는 나이였다. 그렇게 형체 없는 그리움에 아버지 있는 친구들에 대한 부러움이 버무려져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처가 허한 속을 휘젓곤 했다.
이혼한 남편은 차갑고 냉담한 사람이었다. 내가 부성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빈자리를 채워주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리를 두고 나를 대했다. 때로는 조종을 했다. 사랑을 거래하고 조건을 걸면서 늘 나를 목마르게 했고, 안달나게 했고, 외롭게 했다. 결혼한 지 10년 지났을 무렵부터 외도를 하기 시작하더니, 한 여자를 꾸준히 만나는 것도 아니고 이 여자 저 여자를 바꿔가며 습관적으로 바람을 피웠다. 부부랄 것도 없이 어느 새 우리는 남남이 되어 있었고, 작은애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각자의 길을 택해 떠났다. 그는 지금도 어느 여자의 치마폭에 감겨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환상을 쫓는 사랑
나는 그렇게 늘 쓸쓸했다. 전 남편을 통해서 아버지의 그림자를 붙잡고 싶었지만 말 그대로 그림자처럼 스러져버렸고, 그러고는 그 남자를 만난 것이다. 그는 따뜻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이었다. 사랑이 고픈 내게 사랑을 선물로 주러 온 사람 같았다.
이혼 후 내가 찾은 일은 출판 기획이었다. 대학 졸업 후 결혼 전까지 출판사 일을 잠깐 했을 뿐인데, 단절된 경력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 취직할 수 있었다. 규모도 꽤 되는 곳이었다. 언론 계통의 출판을 의뢰하러 온 그를 그렇게 만났다. 책이 나온 날 자축 겸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며 그가 식사 대접을 제안했고, 그 후 우리는 가까워졌다. 그날부터 3개월 동안 우리는 거의 매일 만났다. 언론사에 근무했던 터라 비교적 자유로이 시간을 낼 수 있는 그에 비해 나는 붙박이로 일해야 했기 때문에 더 자주 만나지 못해 안달이 난 쪽은 처음엔 그였다. 만나는 동안 이제 그만 관계를 끝내야 하지 않겠냐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가 두어 차례 꺼냈을 때 들은 척도 하지 않았을 정도로 그는 내게 푹 빠져 있었다.
그러던 그가 정확히 석 달 만에 관계를 정리하자고 했다. 만나는 내내 그만 만나야지, 그만 멈춰 서야지 하고 늘 생각해왔다면서. 그가 멈추면 멈추는 것인가? 내가 멈추자고 했을 때는 아예 브레이크가 없는 듯이 질주하더니. 가는 데까지 가보자고 했던 게 누구였던가. 결혼도 남자가 하자고 해야 성사된다더니, 만났다 헤어지는 주도권도 남자가 쥐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매달리지도 않았지만 매달려봤자라는 것을 모를 나이가 아니었다. 알았다고 하고, 그러자고 하는 것으로 우리 관계는 끝났다. 그나마 자존심을 그렇게라도 지킬 수 있었던 것이 그와 나의 관계에서 내가 추스를 수 있는 전부였다. 그는 내 눈앞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그때부터 내 마음에서 짝사랑이란 형태로 10년째 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10년간 끌어오고 있는 그에 대한 사랑은 환상이라는 것을. 그는 나에게 상처 준 남편을 대신하고, 목마른 아버지의 사랑을 대신하기 위해 내가 만들어낸 남자라는 것을. 올해 나는 그 남자를 마음에서 지워버리려고 한다. 60세 이후 새로운 10년을 또 그렇게 보내서는 안 될 것이기에. 하지만 자신은 없다. 혹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할 것이다. 그 나이에 그런 짝사랑이나마 마음에 품고 사는 것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데, 때로는 행복하기조차 할 텐데 왜 굳이 지우려 하냐고. 정말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비참한 여자인가. 아니면 그의 아내가 죽기를 빌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그의 옆자리가 비면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그건 환상도 아니고 망상일 테지만.
※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