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타임머신이라도 탄 듯, 추억 속 음악은 아련했던 그 시절로 우리를 주유하게 한다. 지난날 삶의 변곡점을 만든 노래가 있는가 하면, 중년에 접어들어 새롭게 전환점이 된 노래도 있다. 오선지에 찍힌 음표처럼, 희로애락의 하모니를 이루며 우리네 인생 변주곡을 채운 그때 그 노래들을 다시 소환해본다.
도움말 김동률 서강대학교 교수 참고 도서 ‘인생, 한 곡’
70년대의 좌절 속 청춘의 마음을 불태웠던 노래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by ‘고래사냥’(송창식)
퇴폐와 자학이 넘치던 1970년대. ‘고래사냥’은 대학가의 절망과 희망을 도도하게 포착하며 청년 지식인들을 끊임없이 선동했다. 계엄령, 긴급조치에 억눌린 젊음에게 서둘러 고래사냥을 떠나라는 절규 아닌 절규였던 셈이다. 안개 같던 시절을 지나 어느덧 인생의 가을.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고,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지만 떠나야 한다. 동해 바다로 완행열차를 타고 떠나야 할 때다. 그렇게 ‘고래사냥’은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를 잡으러 떠나라고 우리를 충동한다.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by ‘돌아와요 부산항에’(조용필)
“빠빠빠빰 빠빠빰 빠빠빰 빠 빠빠빰” 중장년이라면 누구나 귀에 익숙할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전주다. 반주나 마이크가 없어도 어묵 국물에 숟가락 서너 개 걸쳐놓고 목 터지게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닐까 싶다. 지금이야 자타 공인 최고의 가수이지만 오랜 무명 시절을 보낸 그에게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가왕 조용필의 이름을 전적으로 드높여준 노래다. 1970년대 말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각종 단합대회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단골곡이 됐다. 대학 엠티에서도 직장 회식에서도 흥이 최고조에 달할 때쯤이면 함께 열창하던 노래였다.
중년 이후 다시 들으면 가슴 먹먹해지는 노래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by ‘서른 즈음에’(김광석)
서른을 많이 넘기지 않은 사람은 노랫말이 주는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다. 그리고 서른을 훌쩍 넘긴 사람은 노래가 주는 슬프고도 시린 마음에 잠을 뒤척인다. 치기 어린 사랑 투정이라 짐작했을 그 가사가 얼마나 가슴을 치는지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 서른 즈음에 우리는 무엇을 했을까.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사랑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떠났고 살아남은 우리는 그의 노래처럼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다.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by ‘낭만에 대하여’(최백호)
‘낭만에 대하여’의 모티브가 된 통학길 완행열차에서 최백호는 첫사랑 그 소녀를 만났다. 그녀의 이름은 박경희, 최백호는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이름을 밝혀도 좋으리라 말한다. 더구나 그녀는 자신이 최백호의 첫사랑인지조차 모를 테니까. 그렇게 낭만은 아득하고 추억마저 긴긴 세월 속에 야위어갔다. 젊은 시절에는 곡의 깊고 유창한 슬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열병처럼 지나온 젊은 날 추억의 장소로 회귀하는 노래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by ‘광화문 연가’(이문세)
‘광화문 연가’를 들으면 종로서적이 떠오르고 무교동의 음악감상실 르네상스가 펼쳐진다. 당시 광화문은 청춘들이 몰려다니던 거리였다. 경기고를 비롯해 서울고, 창덕여고, 진명여고, 숙명여고, 이화여고, 배제고, 경기여고 등 명문고교가 즐비했다. 입시학원, 고고장, 나이트클럽, 음악감상실, 분식집, 빵집이 넘쳤고 거리는 데이트를 즐기는 청춘들로 가득했다. 특히 양식집 ‘이딸리아노’는 연예인이나 당대 명망가들이 드나드는 장안의 명소였다. 서울고와 이화여고 중간에 자리했는데, 이곳에서 고등학생 때 언약하고 결혼까지 한 사람도 꽤 있단다. 어느덧 세월 따라 그 시절 청춘들은 떠났고 노랫말처럼 언덕 밑 정동길엔 감리교회만이 버티고 있다.
“골목길 접어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by ‘골목길’(김현식)
그렇게 시작되는 ‘골목길’은 묘한 상상과 함께 사내들의 술자리에서, 대학생 동아리 모임에서, 회식 후 늦은 밤 귀갓길에서 가만히 터져 나왔다. 노랫말처럼 그 시절 신촌의 골목길에 접어들 때면 가슴이 뛰곤 했다. 곳곳에는 숨겨진 술집과 만화방, 장미여관, 은하수여관이 있었다. 곡에 등장하는 신촌 골목길들은 이른바 1980년대 낭만 히피들의 ‘나와바리’였다. ‘골목길’의 탄생에는 신촌블루스가 있다. 1986년 신촌의 카페 ‘레드 제플린’에서 엄인호, 이정선, 김현식, 한영애가 결성한 록 밴드다. 그 시절 ‘레드 제플린’은 ‘러시’와 함께 낭만 히피들의 아지트였다. 엄동설한 골목길 곳곳 카페에 몰려든 젊음들은 벽난로 가득 활활 타는 통나무 장작을 바라보며 떠나가는 청춘을 노래했다.
서울로 상경한 공순이 공돌이들의 삶을 위무했던 노래
"돌담길 돌아가며 또 한 번 보고 징검다리 건너갈 때 뒤돌아보고” by ‘물레방아 도는데’(나훈아)
‘물레방아 도는데’의 노랫말에는 고향을 떠나온 이의 애끓는 마음이 담겨 있다. 가난해서 떠나왔지만,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낙엽이 쌓이고 흰 눈이 내려도 미싱을 잡아야 했던, 이른바 수많은 공순이의 정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산업의 시대정신이 담겨 있는 이 노래는 국민가요라 불릴 만큼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물레방아 도는데’는 공순이, 공돌이란 이름으로 사라져간 이 땅의 노동자들을 위한 헌정곡과 다름없다.
“우리네 청춘이 저물고 저물도록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by ‘사계’(노래를 찾는 사람들)
‘사계’는 여성 보컬과 건반의 경쾌한 연주와는 대조적으로 여공들의 쳇바퀴 도는 듯한 단조롭고 신산한 삶을 노래한다. 그 발랄함 속에 숨은 페이소스에, 경쾌한 리듬의 노래를 들으면서도 깊고 무거운 슬픔에 잠기게 된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는 이른바 혁명의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수시로 아픈 일이 많았다. 노동현장에서 젊은 학출(學出)들은 노동자들과 연대했지만, 때론 일류 대학생과 공돌이, 공순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적잖은 상처를 주고받았다.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가족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이 땅의 누나, 여동생들이 흘린 회한과 고독이 ‘사계’에 녹아 있다.
우리 시대 중장년은 어떤 음악을 어떻게 즐기고 있을까?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나만의 주크박스를 플레이하는 요즘이지만, 그렇다고 듣는 음악까지 가볍게 치부할 순 없다. 여전히 중장년의 귓가엔 그 시절 울림과 설렘을 안긴 묵직한 감성의 음악들이 흘러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50대 이상 남녀 42명 대상 온라인 서베이 진행
음악은 나의 일상 ,혼자일 때 들으면 더 좋더라!
얼마나 음악을 듣느냐는 질문에 ‘항상 듣는다’(38.1%)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다. 과반수가 주 5회 이상, 대부분은 주 3회 이상 일상에서 음악을 즐기는 모습. 스마트폰이나 소형 기기의 발달로 음악 감상이 수월해진 덕분인 듯하다. 중장년은 주로 ‘혼자일 때’(40.5%)나 ‘스트레스 풀 때’(38.1%), 위로가 필요하거나 어떤 추억이 떠오를 때(33.3%) 음악을 가까이했다.
나에게 힘이 되어준 노래 가사는?
♪ “그대는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새로움을 잃어 버렸죠. 그대 힘든 얘기들 모두 그대여 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 버리고” - ‘걱정 말아요 그대’
♪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있을까, 어느 곳에 어떤 얼굴로 서 있을까” - ‘나이 서른에 우린’
♪ “When I'm feeling sad I simply remember my favorite things and then I don't feel so bad”(언젠가 내가 슬플 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간단하게 기억해내면 그땐 난 슬프지 않지) - ‘My Favorite Things’
♪ “먼 훗날에 돌아온다면 변함없이 다정하리라” - ‘미련’
♪ “Let it be”(순리에 맡겨라) - ‘Let It Be’
8090 발라드 들으면 기분 전환!
주로 듣는 음악 장르는 발라드, 팝송, 트로트 순으로 나타났다. 최근 트로트 열풍 속 한때는 주류였던 중장년 세대이지만, 그보다는 발라드나 팝송 등 감성적인 멜로디와 가사를 담은 음악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과반수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음악을 선호하고, 최신 음악을 즐기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런 음악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로는 ‘기분 전환’(47.6%)을 꼽았다.
그 시절 가장 좋아했던 노래는?
♪ ‘하얀나비’(김정호) ♪‘돌아와요 부산항에’(조용필) ♪‘추억만들기’(김현식) ♪‘목마와 숙녀’(박인희) ♪‘그날이 오면’(노찾사) ♪‘서른 즈음에’(김광석) ♪‘너를 위해’(임재범) ♪‘낭만에 대하여’(최백호) ♪‘사랑하기 때문에’(유재하) ♪ ‘For the Peace of All Mankind’(알버트 하몬드) ♪ ‘Billie Jean’(마이클 잭슨) ♪‘Non Ho L'eta’(질리오라 칭게티) ♪‘Almaz’(랜디 클리포드)
스마트폰 하나면 언제 어디서든 플레이!
세월이 변한 만큼 중장년의 음악 감상 방식도 더욱 캐주얼해졌다. 대부분이 스마트폰 앱이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실시간으로 좋아하는 음악을 맘껏 듣고 있었다. 실제 음악 앨범을 구입하기보다는 인터넷 다운로드를 이용하는 이가 과반수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알았다. 인간이란 본시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도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외쳤다. “참 좋은 울음터다, 이곳에서 한바탕 울고 싶구나!”
‘열하일기’에 나오는 한 대목, 그 유명한 ‘호곡장’(好哭場, 울기 좋은 곳)이다. 건륭 황제 축하 사절단으로 따라가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광활한 요동벌판을 마주하면서 전율하듯 탄성을 터뜨리자 일행 중 한 명이 “이렇게 훤하게 터진 곳에서 별안간 통곡을 생각하다니, 무슨 말씀이신가?” 하고 묻는다. 이에 연암이 말한다.
“사람들은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 중에서 오직 슬플 때만 우는 줄 아는데 기쁨이 넘쳐도 울고, 노여움이 차올라도 울고, 즐거움과 사랑에 사무쳐도 울고, 욕심이 가득해도 울게 된다네. 왜 그런 줄 아는가? 가슴이 답답하고 꽉 막힐 땐 소리 내는 것만큼 좋은 게 없거든. 통곡이란 우레와 같아 지극한 감정에서 터져 나오고 그 소리는 사리에 절실할 테니 울음이나 웃음이나 뭐가 다르겠는가.”
열흘 내내 걸어도 지평선만 보이는 끝없는 평원 앞에서 인간이란 한낱 고독한 존재일 뿐임을 깨닫기라도 한 것일까. 요동벌판을 바라보며 울음터를 연상한 이 기막힌 역설의 아포리즘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며 흠모와 질투를 유발하고 있다.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삶
연암은 조선시대 최고의 작가였다. 문장이 단단하고 빈틈이 없다는 예찬이 자자하다. 사마천과 장자와 소동파를 종횡무진 넘나들며 솜씨 좋은 기술로 독자들을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며 노니는 그를 셰익스피어, 괴테에 못지않은 대문호로 봐야 한다는 학자들도 있다. 연암 스스로도, 자신의 문장에 장점은 없지만 세상 물정을 표현해내는 재주만큼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낫다고 슬쩍 자랑을 한다. 또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은 글이 맺고 끊음 없이 너저분하고 길기만 하다면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묻곤 했다.
홍대용 박제가와 함께 북학파로 불리고 ‘호질’, ‘양반전’, ‘허생전’ 등의 한문소설을 쓴 연암은 높은 학문적 식견은 물론이고 유머의 천재로도 명성이 높았다. 그의 웃음과 해학에는 언제나 날카로운 비판과 풍자가 가득했다. 특히 ‘열하일기’는 그만의 철학적 사유와 해학, 익살의 표현을 풍부하게 담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1737년 한양에서 태어난 박지원의 집안은 명문세가였지만 그가 자랄 때의 살림은 30냥짜리 집 한 채와 작은 밭뙈기밖에 없을 정도로 곤궁했다. 하지만 검소한 삶을 자부심으로 여기며 살았다. 조선 지식인의 틀에서 벗어나려 무던히도 애썼던 연암은 젊은 시절 출세의 길을 일찌감치 단념했다. 영조와 정조 두 임금이 주목할 만큼 실력이 빼어났으나 과거시험을 보러 가면 백지 답안을 내놓거나 그림을 그려 넣는 등의 기행을 저지르곤 했다. 혹자는 예민했던 영조가 조선 임금에 대한 폄하의 글이 들어 있던 청나라의 역사책 명기집략(明紀輯略)을 읽거나 소지한 사람들을 다 잡아들이는 것을 본 뒤 그가 벼슬길을 접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연암은 이후 아무런 직업도 없이 지내며 중년을 맞이한다. 이를테면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삶이었다.
조선의 베스트셀러 ‘열하일기’
8촌 형의 제안을 받고 청나라 황제 생일 축하 사절단을 따라 북경엘 간 건 1780년. 그의 나이 마흔네 살 때였다. 그런데 북경에 도착했을 때 청의 황제가 열하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다시 700리를 가야 하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고난의 시간이었지만 연암에게는 일생에서 가장 큰 경험을 하게 해준 행운(?)의 날들이었다. 한양에서 열하까지 왕복 약 2400㎞(6000여 리)나 되는 긴 여정을 끝내고 돌아온 연암은
3년여에 걸쳐 불후의 명작 ‘열하일기’를 쓴다. 소위 선진문화의 보고라 일컬어지는 이 기행문은 당대의 베스트셀러라 불릴 만큼 인기였다.
청나라에 대한 기록은 매우 상세했다. 연암은 감명 깊게 본 코끼리와 벽돌과 수레 등이 청나라의 힘이라고 생각했고 조선에 부족한 것들을 지적하면서 그 원인이 무능한 사대부들에게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앞다퉈 읽었다. 출간도 되기 전에 필사본이 나돌 정도로 연암의 글은 막강한 위력을 떨쳤다. 하지만 정조는 그의 글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유분방한 문체가 유교적 질서를 흐트러뜨린다고 생각했다. 급기야 연암의 문체를 흉내 낸 공문서까지 올라오자 경박하고 잡된 책이 많이 나온 데서 말미암은 것이라 경고하며 그 주범으로 ‘열하일기’를 지목한다. 이후 연암은 반성문까지 썼고 그의 책은 100여 년간 금서가 됐다.
연암은 ‘열하일기’를 쓰고 난 후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지만 여전히 가난했다. 때때로 끼니 걱정을 했고 지인에게 돈을 빌려 달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결국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구했지만 그래봐야 나이 오십에 미관말직을 얻어 15년간 일했을 뿐이다. 짧은 공직생활이었음에도 연암이 현감을 맡았던 고을의 백성들은 그를 오랫동안 그리워했다고 한다.
자신을 소소(笑笑) 선생이라 불러 달라 했던 연암. 그의 웃음소리를 듣고 귀신도 놀라 도망갔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그는 유쾌하고 호방했다. 문체가 순정하지 않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금서로 묶여 있었던 ‘열하일기’에서 당대에는 불온하게 보였을 그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본다.
그가 생애 처음 압록강을 건너며 “그대, 길을 아는가?”라고 물었다던 질문은 “그대, 길을 잃었는가?”로 바뀌었고 연암은 서화담의 일화를 빌려 답을 마무리한다.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그는 1805년 68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영화 포스터의 멘트와 스틸 컷이 기대를 하게 했다. 일기예보에서는 연일 내리는 장맛비와 열대야가 더해져 습한 더위가 이어지겠다고 말한다. 고온다습한 8월 한여름, 머릿속 복잡하게 엉킨 일들을 그저 우두커니 방치하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 않다. 문득 122분짜리 프랑스 코미디 영화가 눈에 들어왔다.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기분을 좀 가볍게 해줄까 하며 VOD 버튼을 눌렀다. 수영장을 배경으로 울퉁불퉁한 몸매의 남자들이 수영복 차림으로 서 있는 포스터를 보니 여름을 위한 영화 같다. 편안하게 앉아 아무 생각 없이 웃음을 터뜨릴 준비를 했다.
감독은 질 를르슈. 영화배우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공동 연출한 영화 ‘세라비, 이것이 인생’은 보고 싶은 영화다.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은 그가 단독으로 각본과 연출을 맡아 만든 작품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 기욤 카네는 얼마 전에 보았던 영화 '논-픽션'에서도 봤는데 연달아 그의 연기를 감상하게 됐다.
경제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모습. 직장에서 밀려나고 가족들에게도 외면당하는 남자들이 어느 날 뭉친다. 수중발레팀 모집 공고에 신청하면서 오합지졸의 중년 남성들이 감히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대회에 도전하며 겪는 이야기다. 배우들의 망가진 모습이 압권이다. 그 모습이 당사자처럼 느껴지는 것은 배우들의 높은 연기력 때문이 아닐런지. 그렇게 또 다른 어벤저스가 시작된다.
마땅한 일자리도 커리어도 없는 남자들이 모여 수중발레라는 스포츠에 도전해 허우적거리는 모습은 생각만큼 안쓰럽지 않다. 물론 미숙하고 실수투성이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웃음이 터지곤 했다. 종종 아릿한 마음으로 응원을 하게 되는 건 그들이 최선을 다하며 진지했기 때문이다. 도전 속에서 차츰 심리적 안정을 찾고 단단한 마음 근육이 생겨나는 모습은 기쁨과 감동으로 이어진다.
일반인으로서는 결코 쉽지 않아 보이는 수중발레에 도전한 어리숙한 이 남자들은 훈련하고 충돌하면서 문제를 해결해나간다. 그리고 결국 높은 산을 넘어선다. 평범한 영웅들이 전하는 재미에 소소한 위로까지 얻는다.
훈련 중에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찰지게 등짝을 후려치며 거칠게 야단을 치는 열혈 코치 아만다가 나올 때마다 빵빵 웃었다. 그게 통쾌함 때문인지 대리만족 때문인지 정말 상황이 재미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웃기니까 무조건 좋다. 게다가 지치지 않고 훈련하는 그들의 어리바리한 모습은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간간이 왜 저러지 하는 장면이 있긴 하지만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저 재미있는 영화로만 봐야지 하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가끔씩 나타나는 웃음 포인트, 그리고 나도 모르게 응원하다가도 과연 어떤 결말일지 미리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다. 물론 모두들 예상하는 결과일 수는 있다. 함께 호흡을 맞추고 옥신각신하며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그린 영화다. 거기에 가족 간의 사랑, 부부간 위기극복의 모습도 빠지지 않는다.
만만찮은 과정을 거치고 인생의 낙오자들이 어벤저스로 거듭나며 들판에서 일몰을 함께 바라보는 모습은 정말 멋진 엔딩이다. 기분 좋게 뭉클하다. 혼자서 조용히 박수를 보냈다. 고단한 세상, 그 누구의 삶이든 모두 해피하기를 바라는 요즘의 내 마음이 너무 티 나나?
● Exhibition
◇빅 아이즈
일정 9월 27일까지 장소 마이아트뮤지엄
큰 눈의 어린아이 그림으로 이름을 알린 미국 여성 화가 마거릿 킨의 아시아 최초 회고전이다. 팀 버튼의 동명 영화로 알려진 ‘빅 아이즈’ 시리즈를 비롯해 긴 얼굴의 여인 등 다양한 화풍의 원작 13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의 작품을 총망라해, ‘빅 아이즈와 키치’, ‘이름을 되찾은 화가’, ‘킨의 현재와 그 영향력’ 등 작가의 삶의 변화에 따라 5부로 구성했다. 전시기간 중에는 도슨트 운영과 함께 키즈 아틀리에와 시즌 이벤트 등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도 제공한다.
◇낯선 전쟁
일정 9월 20일까지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계기로 마련된 대규모 기획전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상처를 극복하고, 전쟁과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등 전 지구적 재난 속에서 미술을 통한 치유와 평화의 비전을 제시한다. 전시는 ‘낯선 전쟁의 기억’, ‘전쟁과 함께 살다’ 등 4부로 나눴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길에서 제작된 작품부터 시리아 난민을 그린 동시대 작품까지 폭넓게 다룬다. 드로잉, 회화, 영상, 뉴미디어, 퍼포먼스 등 장르를 넘어 전쟁을 소재로 한 국내외 작가 50여 명의 작품 250여 점을 감상할 수 있다.
◇2020 서울사진축제
일정 8월 16일까지 장소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올해로 11회를 맞이한 ‘2020 서울사진축제’다. 이번에는 ‘카메라당 전성시대’, ‘보고싶어서’ 2개 전시로 구성했다. 한국 사진사 연속 기획전인 ‘카메라당 전성시대’(부제 ‘작가의 탄생과 공모전 연대기’)는 공모전 제도를 중심으로 1910년부터 1980년대 초까지 한국 사진사를 조망한다. 주제 기획전 ‘보고싶어서’는 일상을 주제로 한 가족사진, 풍경사진 등을 통해 사진 본래의 의미를 짚어본다. 사회적 거리 두기 상황인 만큼, SNS를 통해 ‘작가×비평가의 만남’, ‘작가 소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퀘이 형제: 도미토리움으로의 초대展
일정 10월 4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세계적인 애니메이터인 스티븐 퀘이와 티모시 퀘이 쌍둥이 형제의 작품세계를 다각도로 조명한다. 형제 특유의 괴기스럽고도 동화적인 분위기를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확대경, 일러스트레이션, 초기 드로잉 등 100여 점이 전시된다. 특히 뉴욕 현대미술관에 선보인 바 있는 ‘도미토리움’은 형제의 예술세계와 철학을 함축하는 애니메이션 세트 작품으로 기대를 모은다. 이번 전시에서는 퍼핏 애니메이션(인형을 움직여 촬영하는 기법이나 작품)이라는 매체를 통해 생동감 넘치는 초현실적 경험을 선사할 예정이다.
● Stage
◇더 모먼트
일정 9월 6일까지 장소 대학로 유니플렉스 2관 연출 표상아 출연 박시원, 유성재, 강정우 등
각자의 사정으로 깊은 산골 산장을 찾게 된 세 남자가 하나의 노트를 단서로 얽히고설킨 비밀과 사건을 풀어간다. 코믹, 판타지, 멜로, 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른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과거와 소통하고 미래와 만나는 판타지 요소로 극의 흥미를 더한다. 긴장감 넘치는 세 인물의 감정이 피아노, 바이올린 라이브 연주를 통해 생생하고 드라마틱하게 전달된다.
◇렌트
일정 8월 23일까지 장소 디큐브아트센터 연출 이재은 출연 오종혁, 아이비, 김호영 등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을 현대화한 작품으로, 뉴욕 이스트 빌리지에 모여 사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꿈과 열정을 그린다. 한국 공연 20주년을 맞아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협력 연출가인 앤디 세뇨르 주니어가 함께 무대를 완성했다.
◇베르테르
일정 8월 28일~11월 1일 장소 광림아트센터 BBCH홀 연출 조광화 출연 엄기준, 유연석, 규현 등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원작으로 한 대한민국 대표 창작 뮤지컬. ‘베르테르’와 ‘롯데’ 두 주인공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현악기 중심의 오케스트라 선율과 어우러져 애틋한 감성을 증폭시킨다.
● Movie
◇오케이 마담
개봉 8월 예정 장르 코미디, 액션 감독 이철하 출연 엄정화, 박성웅, 이상윤, 배정남 등
생애 첫 해외여행에서 비행기 납치 사건에 휘말린 중년 부부의 좌충우돌 구출 작전이 펼쳐진다. 아내 ‘미영’ 역을 위해 수개월 동안 액션을 연마한 엄정화의 연기 변신이 기대를 모은다. 남편 ‘석환’ 역으로 출연하는 박성웅은 그간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과 대비되는 익살스러운 연기로 반전 매력을 선사한다. 스크린 첫 악역에 도전하는 이상윤 역시 테러리스트 리철승 역을 소화하며 고난도 액션을 펼칠 예정이다. ‘검사외전’, ‘신세계’ 등을 작업했던 충무로 흥행 제작진의 합류로 작품의 완성도를 더했다.
◇큐리오사
개봉 8월 6일 장르 드라마, 멜로 감독 루 주네 출연 노에미 메를랑, 니엘스 슈나이더 등
19세기 파리 시인 피에르와 그의 연인 마리가 주고받은 편지와 시, 사진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 ‘여성의 성적인 자유’라는 주제를 관능적인 미장센과 감각적인 음악을 통해 고혹적으로 표현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개봉 8월 5일 장르 범죄, 액션 감독 홍원찬 출연 황정민, 이정재, 박정민, 최희서 등
마지막 청부살인 미션에 나선 암살자와 그를 쫓는 무자비한 추격자의 치열한 사투를 그린다. 배우들의 맨몸 액션부터 태국 현지를 배경으로 한 시가전까지 박진감 넘치는 시퀀스를 선보인다.
● Book
◇50부터는 물건은 뺄셈 마음은 덧셈 ()이노우에 가즈코 저 ·센시오
50대를 살거나, 살아갈 이들에게 일상의 변화를 통해 풍요로운 삶을 가꾸는 비결을 제안한다. 저자는 나이가 들수록 물건이나 관계에 대한 집착은 버리고 오직 자신을 위한 시간과 감정을 더하라 말한다. 50대부터는 절대 사지 말아야 할 물건 리스트, 집안일 줄이기, 내가 좋아하는 일 찾기 등 실질적인 방법들을 상세히 설명한다.
◇죽음을 배우는 시간 (김현아 저·창비)
중년 이후 고민해야 할 노화와 죽음의 의미부터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법까지 ‘죽음 공부’의 전반을 다룬다. 주체적으로 준비하는 죽음의 중요성과 그 매뉴얼을 구체적으로 정리했다.
◇세로토닌 (미셸 우엘벡 저·문학동네)
지독한 권태와 무력감에 ‘자발적 실종자’가 되기로 결심한 중년 남성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을 소재로 행복의 조건을 탐구하고 현대인의 고독과 우울을 묘사한다.
◇진짜 캠핑 요리 (이미경 저·상상출판)
조리 도구나 음식 솜씨가 부족해도 캠핑의 낭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레시피를 소개한다. 구이, 전골, 디저트 등 다양한 캠핑 요리 비법과 더불어 캠핑 짐 꾸리기 노하우 등을 일러준다.
최근 대한민국 가요계는 그야말로 ‘트로트가 대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년 주류에서 벗어나 트로트 가수를 꿈꾸는 젊은 세대도 대폭 늘었다. 이러한 열풍 속, 트로트의 지난 100년을 더듬어보고, 앞으로의 100년을 그리는 이가 있다. 바로 가수 주현미다. 올해로 데뷔 35년 차, 그녀는 현재의 명성에 머무르지 않고 트로트의 명맥을 다지기 위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 일환으로 일궈낸 첫 에세이 ‘추억으로 가는 당신’의 저자로 대중 앞에 선 주현미를 만나봤다.
“트로트 붐의 과실만을 노리며 몰려드는 사람들과 달리,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을 조용히 묵묵하게 해내고 있는 가수.” ‘추억으로 가는 당신’ 서두 추천사에서 김영식 KBS 가요무대 PD가 쓴 표현이다. 그의 말대로 주현미는 눈앞의 이익이 아닌, 사명감을 안고 이번 책을 엮었다.
“책이 나오니 기분이 참 묘해요. 첫 음반이 나왔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요? 많이 설레고 신기하네요.(웃음) 그런데 에세이를 냈다고 하니 흔히 가수로서 제 삶에 대해 썼으리라 생각하더군요.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닌데 말이죠. 개인사보다는 우리가 사랑했던 가요들의 역사에 대해 담고자 했어요. 유행가는 그 시대의 상황과 서민들의 애환을 투영하는 거울과 같죠. 그 뒷이야기를 알면 노래에 더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물론 곡마다 얽힌 제 경험과 추억도 곁들였지만, 그것이 주는 아니었죠.”
이렇게 책이 나오기까지는 2018년부터 운영해온 유튜브 채널 ‘주현미TV’가 밑거름이 됐다. 사실 ‘주현미TV’가 탄생하게 된 배경 역시 책 출간 계기와 다르지 않았다. 대중을 비롯한 가요계 후배들이 노랫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부르길 바라는 마음, 또 시대를 거치며 변형된 가요의 원곡들을 복원해 자료로 남기고자 하는 뜻이 컸다.
“가령 ‘사의 찬미’를 찾아서 들어보면, 수많은 가수가 불렀지만 윤심덕의 원곡을 그대로 따라 부른 이는 없어요. 무엇이 원곡인지, 어디가 어떻게 바뀐 건지 알기 어려워졌죠. 문제는 대부분 우리 가요가 이런 상황 속에서 불리고 있다는 거예요. 지금이라도 정리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미래 세대가 원형을 찾아 거슬러 올라갈 때 너무나 힘들잖아요. 그렇다면 내가 그 중간 역할을 해야겠다 싶었죠. 재작년부터 저희 밴드마스터인 이반석 음악감독의 도움으로 유튜브를 통해 매주 한 곡씩 옛 노래를 기록해나가고 있어요.”
취미까지 되어버린 트로트 사랑
현재 ‘주현미TV’가 선보인 곡은 130여 곡. 그중 50곡에 대한 이야기가 이번 책에 담겼다. 책에는 주현미의 목소리로 녹음한 노래를 들을 수 있도록 곡마다 QR코드가 첨부됐다. 애당초 작업을 결심하고 추려낸 옛 노래는 1000여 곡에 달했단다. 목표량을 채우려면 앞으로 근 10년은 바라봐야 하는 오랜 작업이지만, 이만큼 해온 것도 다행이라며 뿌듯해하는 그녀다. 그도 그럴 것이, 매주 한 곡에 5분 남짓한 영상이지만 이를 위한 노력은 시공을 넘나들고 있다.
“대부분의 자료가 ‘~라고 전해진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식으로 돼 있고, 서로 다른 내용인 경우가 많아 정확한 근거를 파악하기 어려웠어요. 아무래도 기록물로 남기는 자료라 팩트 체크를 하는 데 가장 공을 들이고 있죠. 수십 년 전 이야기부터 책이나 음반 등 온갖 자료를 총동원하고 있어요. 얼마 전에는 과거 ‘SP’라 했던 돌판 음반을 갖고 계신 일본 팬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어요. 그렇게 정리한 곡은 제 스타일로 부르지 않고 최대한 담백하고 깔끔하게 불러 원곡을 되살리는 데 집중했죠.”
얼마 전 10만 구독자(실버버튼)를 돌파한 ‘주현미TV’. 혹자는 수익이나 홍보 목적으로 개설된 소속사 유튜브 채널이라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주현미TV’는 현재 그녀의 사비를 통해 제작할뿐더러, 오히려 수익은 마이너스나 다름없다고. 혹여 영상이 인기를 끌더라도 저작권이 있는 곡들이기에 이윤으로 이어지긴 어려운 구조란다. 그럼에도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었던 건 트로트를 향한 진심, 그리고 후배와 팬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였다.
“어쩌면 이렇게까지 힘든 작업인 줄 몰랐기 때문에 겁 없이 시작했던 것 같아요.(웃음) 물론 힘들고 수익이 안 난다고 해서 그만둘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술도 안 마시고, 특별히 사치도 안 하니까, 이걸 내 용돈으로 하는 취미라 여기려고요. 또 35년간 팬들 사랑 덕분에 행복했고 돈도 벌 수 있었는데, 이 일이 그에 보답하는 방법 중 하나라 생각합니다.”
결코 가벼운 무대와 노래는 없다
다른 세대보다 특히 중장년층이라면 이번 책을 통해 공감할 부분이 많을 것이다. 주현미는 책에서 “옛 노래가 많은 공감을 얻는 것은 그 시절을 직접 겪었거나 그 아픔을 간직한 채 노래를 부르시던 우리 부모님이 기억나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그녀에게도 그런 옛 노래가 있는지 묻자 최희준의 ‘하숙생’이라 답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줄곧 하숙생을 흥얼거리셨는데, 그때는 그 가사가 무슨 얘긴가 했어요.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지금 와서 불러보니 참 위안이 되고 삶의 내공이 느껴지는 가사더군요. 아버지는 어떤 심정으로 이 노래를 부르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아버지도 지금의 내가 느끼는 허무함과 슬픔을 경험하셨을까 싶었죠. 시간을 뛰어넘어 노래가 이어준 감정 덕분에 그 시절의 아버지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어요.”
아마 이러한 감정 또한 나이를 먹고 삶이 숙성되는 과정을 통해 얻게 된 산물일 테다. 어느덧 예순, 그녀는 현재의 시점을 자신의 노래 ‘가을과 겨울 사이’에 빗대 표현했다. 그리고 인생의 봄이었던 시절에 불렀던 ‘비 내리는 영동교’, ‘짝사랑’ 등도 인생이 무르익으니 노랫말이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한다고 고백했다. 그래서일까? 예전의 낭랑한 목소리도 듣기 좋지만, 깊이가 더해진 주현미의 노래에 더 큰 위로를 받고, 자꾸 귀를 기울이게 된다.
“아무리 작은 무대에 서도 여전히 긴장이 되고 떨려요. 노래를 부를 때, 나에겐 아무런 추억거리가 없는 가사라 해도, 듣는 이는 어떤 깊은 사연을 떠올릴 수 있잖아요. 때문에 곡 하나하나를 절대 가볍게 해석할 수 없고 편하게 부를 수 없는 거죠. 대중이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함께하는 친구 같은 가수로 오랫동안 무대에 서고 싶습니다. ‘찔레꽃’을 부른 백난아 선생님은 타계하시기 직전 앨범에 이런 글을 남기셨어요. ‘아직도 사랑이 많고 아직도 열정이 많습니다. 아직도 그리움이 많고 아직도 할 일이 많습니다. 팬들이 있고 무대가 있는 한, 이 생명 다할 때까지 노래할 것입니다.’ 저 역시 같은 마음으로 오늘도 노래하겠습니다.”
중년의 팬들과 함께 나누고픈 책들 by 주현미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 (김경민 저)
‘님의 침묵’, ‘그집 앞’ 등 한국 명시 중 독자들이 쉽게 공감할 50편의 작품을 통해 이별로 인한 상실과 상처를 다독이고 치유한다. 국어교사 출신인 저자는 내가 누구인지 헤맬 때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도 괜찮다’며 따뜻한 위로를 전한다.
정본 백석 소설·수필 (백석 저)
백석 연구의 권위자인 고형진 고려대 교수가 공들여 엮은 책이다. ‘해빈수첩’, ‘당나귀’, ‘닭을 채인 이야기’ 등 백석이 남긴 네 편의 소설과 열두 편의 수필을 정본으로 정리했다. 친절한 낱말 풀이와 해설이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읽기만 하면 내 것이 되는 1페이지 한국사 365 (심용환 저)
한국사의 주요 장면 365개를 매일 1페이지씩 읽으며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다. 연대기순으로 보는 일반 역사서와 달리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사건, 인물, 장소, 유적·유물, 문화, 학문·철학, 명문장 등 7개 분야로 구성했다.
이기는 몸(이동환 저)
우리 몸의 시스템을 제대로 알고 바이러스와 질병, 노화로부터 ‘이기는 몸’을 만드는 방법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몸속 미시세계에서 출발해, 뇌, 심장, 폐, 간 등 주요 기관을 비롯해 먹고 자고 숨 쉬고 움직이는 섭생까지 폭넓게 다룬다.
살면서 내 삶을 바꾸고 싶다고 느끼는 순간, 필요한 것은 돈이나 인맥이 아니라 용기다. 이 말에 따르면, 소설 속 주인공 스트릭랜드는 큰 용기를 낸 사람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용기는 현상에 대한 평가일 뿐 자신에 대한 에고가 지나치게 강한 사람이다.
화자를 제외한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극단적이다. 이는 작품을 쓰던 시기의 사회적 배경이 작용한다. 전쟁에 지쳐 사람들이 ‘순수와 영혼’의 세계에 대한 동경, 예술 등에 목말라 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고갱을 모델로 한 이 작품을 쓰기 위해 타히티를 직접 방문했고, 그의 여인이었던 원주민을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 고갱의 삶과 닮은 부분도 있지만, 사실이 아닌 내용도 많다. 이 때문에 예술적 이상인 ‘달’을 지향하기 위해 세속적 가치인 ‘6펜스’의 현실을 포기한 미술가 스트릭랜드의 인생 후반전 이야기가 좀 더 가슴에 와 닿는다.
보통 사람들은 ‘포기할 수 있는 것’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트릭랜드와 같은 선택을 쉽게 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대리만족이 되는 이야기들이 있다. 스트릭랜드가 삶의 변화를 위해 용기를 냈던 나이는 40대. 현재 사회 환경 기준으로 보면 60대 정도가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선택을 아래와 같이 고백한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 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꿈을 접고 살아온 사람들은 스트릭랜드의 말에 적극 공감할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젊어서 읽어도 되고 나이가 든 후에도 음미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더 늦기 전에 잠자는 나를 깨워보는 건 어떨까!
▶ 책 읽은 소감: 문체가 간결하고 명쾌하다는 점이 가장 눈에 띈다. 회화체 위주의 글이 대단히 매끄럽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극단적인 캐릭터이지만, 작위적이지 않은 사건 전개로 이야기에 대한 몰입도가 높았다. 살면서 잊었던 ‘달’을 인식할 기회를 줬으며, 나의 잃어버린 길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인간의 참된 가치는 ‘얼마나 사랑을 받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사랑을 베풀었는지’에 따라 판단된다는 ‘관계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 평점: 4.08 (5점 만점)
▶ 논제
- 작가는 천재 예술가의 이기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삶을 통해 세속사회의 속물성과 위선을 풍자합니다. 고갱이 이 소설의 주인공인 만큼 일정 부분 사실인 이야기도 있습니다. 주인공의 뛰어난 예술성으로 이기적이고 반사회적인 삶이 신화로 기록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pp.10~11)
- 작품 해설은 ‘달과 6펜스’에 대해 “한 중년의 사내가 달빛 세계의 마력에 끌려 6펜스의 세계를 탈출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달’은 ‘상상의 세계 또는 광적인 열정’, ‘영혼과 관능의 세계’, ‘본원적 감성의 삶에 대한 지향’을, ‘6펜스’는 영국의 가장 낮은 단위의 은화로 ‘돈과 물질의 세계’, ‘천박한 세속적 가치’, ‘사람을 문명과 인습에 묶어두는 견고한 타성적 욕망’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달’은 무엇인가요? (p.310)
- 이 소설에는 화자인 ‘나’를 제외하고 대표적으로 5명의 캐릭터가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평범한 삶을 버리고 화가가 되는 ‘스트릭랜드’, 남편과 갑자기 이별하게 되는 스트릭랜드 부인 ‘에이미’, 천재를 알아보는 눈은 가졌지만,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는 ‘스트로브’, 남편을 버리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사랑한 끝에 결국 최후를 맞는 ‘블랑시’, 병으로 죽어가는 스트릭랜드를 끝까지 지킨 타히티의 원주민 처녀 ‘아타’입니다. 이들은 모두 꿈과 본능의 세계 추구, 혹은 물질과 세속의 세계 추구라는 상징성을 지닙니다. 다시 말하면 각자 자신만의 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요, 자신의 본능에 충실했다는 측면에서 순서를 정한다면, 여러분이 생각하는 순위는 어떻게 되나요?
- 저자는 여성 혐오증 성향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p.318) 해설자는 이에 대해, 저자는 소설에서 남성 중심 사회의 유형화된 여성상을 혐오한 것이고, 남성 중심주의를 무반성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여성에 대한 냉소, 남성이 가진 여성 혐오증에 대한 객관적 묘사를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소설에서 화자가 “교양 있는 여자들은 몰취미한 남자들과 결혼한다”, “똑똑한 남자는 교양 있는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도서명: 달과 6펜스
- 지은이: 서머싯 몸
- 번역: 송무
- 출판사: 민음사
# 친구에게 (이해인 저 · 샘터사)
이해인 수녀가 친구들에게 바치는 수많은 사랑의 헌사를 모아 어른을 위한 그림책으로 역었다. 친구의 의미, 이상적인 우정의 모습, 우정을 가꾸는 데 필요한 마음가짐 등을 사색하게 한다.
# 데이터 프라이버시 (니혼게이자이신문 데이터경제취재반 · 머스트리드북)
넘쳐나는 데이터가 미치는 영향을 심층 분석함으로써 개인의 디지털 자산 권리 보호와 데이터 윤리에 관해 성찰하게 한다. 글로벌 사례 등을 통해 데이터 경제의 최신 동향을 짚어준다.
# 나무 이야기 (케빈 홉스 외 공저 · 한즈미디어)
원예전문가가 소개하는 인류의 삶을 바꾼 100가지 나무 이야기. 지구의 역사와 함께한 나무부터 현재 우리 주변에서 자생하는 나무들까지, 아름다운 세밀화와 더불어 다채롭게 다루고 있다.
# 내 인생을 완성하는 것들 (라이언 패트릭 핸리 저 · 위즈덤하우스)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자본주의 경쟁사회를 사는 이들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애덤 스미스의 인생철학을 담은 ‘도적감정론’ 속 키워드를 통해 좋은 삶과 행복의 원리를 찾아간다.
# 허영만의 주식 타짜 (허영만 저 · 가디언)
허영만 화백인 직접 만난 주식 고수 7명의 수십 년 투자 노하우를 집약해 재미있는 만화로 쉽게 풀어냈다. 누구든 주식으로 수익을 낼 수 있는 확실하고 안정적인 성공 방법을 제시한다.
# 그렇게 중년이 된다 (무레 요코 저 · 탐나는책)
저마다의 방법으로 중년과 갱년기를 맞이한 여성들의 에세이 25편을 모았다. 피할 수 없는 중년의 징후들을 유쾌하면서도 진중하게 블랙코미디처럼 그리며 잔잔한 웃음과 위로를 건넨다.
# 휴머니멀 (김현기 저 · 포르체)
‘휴머니멀’은 ‘휴먼’과 ‘애니멀’의 합성어로, 공존과 멸종의 기로에서 인간과 동물이 더불어 사는 삶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인간이 동물, 생명, 환경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고심해볼 기회다.
방탄소년단의 빌보드 입성, ‘사랑의 불시착’ 등 드라마의 세계적 성공과 K방역 선전 등이 새로운 한류를 일으키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그에 따라 우리 것,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살아나고 있는 요즘이다. 생활한복의 대명사인 ‘돌실나이’ 김남희(53) 대표는 시원시원하고 호탕한 모습으로 기자를 마주하며 최근 우리 문화에 대한 해외의 호의적 반응에 발맞추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우리 문화를 지키겠다는 사명감으로 뛰어들어 27년을 버틴, 그리고 마침내 온몸으로 피워낸 돌실나이와 김 대표의 역사와 생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생활한복의 대명사인 돌실나이의 인사동점 매장에서 김남희 대표와 인터뷰를 하기 전, 그녀가 직원들과 격의 없이 얘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느낌을 전하자 김 대표가 웃으며 “대표라는 생각 별로 안 하고 살아요”라고 말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돌실나이의 역사와 함께해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팀장들은 모두 근속 연수가 20년을 넘었고, 30여 개 매장 직원들도 10년 이상 일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혼자 했겠어요. 이 황무지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라도 소박한 문화를 일구자
김 대표가 황무지라고 표현한 것처럼, 돌실나이는 ‘강한 자가 오래 가는 게 아니라 오래 가는 자가 강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회사다. 그 시작은 오래전, 김 대표의 대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복이 일상생활에서 입는 옷이어야지 화려하고 아름다운 예식용으로만 정착되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저는 의상학과 전공을 살려서 우리 옷 일꾼으로 나라에 기여하는 일을 하고 싶었죠.”
김 대표는 의상학과를 다니며 ‘우리입거리연구회’를 만들었다. 한복에 대해 제대로 알기 위해 ‘규합총서’ 같은 고서를 뒤지며 원료 염색하는 법을 익히고 실제로 만들었다. 그 일을 다섯 명이 시작했는데 끝까지 남아준 사람이 정경아 씨였다.
“그래서 경아와 돌실나이를 만들어 3년을 같이했죠. 회사 이름은, 함께 한 마을에 간 게 계기가 돼서 지었어요. 전남 곡성에 있는 석곡마을인데, 거기서 나는 삼베 이름이 돌실나이였죠. 다 사라져가는 문화가 그 마을에 남아서 이어지고 있었어요. 누군가는 해야 할 일, 저런 일을 하자고 마음먹게 되었죠. 보이지 않는 곳에서라도 소박한 문화를 이끌어가는 일 말이죠.”
이상은 높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끝까지 뜻이 맞은 두 사람이 시작한 돌실나이였지만 예상대로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환경오염을 하지 않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 싶어서 소색 의류를 만들자고 했어요. 소색은 염색하지 않은 흰색과는 다른 본디의 색을 이르는 말이에요. 예를 들어 광목색이 대표적이죠. 그런데 한 시즌 제품을 만들고 나니 이걸로 먹고살 순 없겠다고 판단하게 됐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염색을 조금만 하자.(웃음) 환경을 오염하지 않는 자연 염색이나 소소한 파스텔 계통의 연한 색을 쓰자고 했죠. 그렇게 점점 먹고살려다 보니 강한 색을 쓰게 되고 화학섬유도 쓰게 되고 변질되어 갔어요.(웃음) 월세도 내야 하고 직원도 생기고 물건도 만들어야 하고 재고회전율, 영업이익율도 신경 써야 했으니까요.”
이상은 높았지만 현실은 거칠었다. 김 대표의 ‘타협’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수단이었다. 그런데 극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IMF 금융위기가 도움의 손길이 되었다.
“사실 생활한복은 IMF 덕분에 큰 종목이에요. 1996년 12월에 우리 옷 입기 발족식을 문체부에서 했어요. 한 달에 한 번씩 한복 입고 출근하는 걸 공무원들이 솔선수범하자는 거였죠. 그런데 특별한 행사 또는 결혼식할 때 입어보는 한복을 매번 입기는 불편하잖아요? 그러다 보니 공무원 사회도 생활한복에 눈을 돌리게 됐죠. 그리고 1997년 IMF가 터지면서 ‘우리 것은 좋은 것이야’라는 인식과 함께 한복 붐이 일었어요. 매일 대리점 내달라는 전화가 올 정도였죠. 생활한복 브랜드가 눈만 뜨면 생겼는데 그해 2000개 가까운 브랜드가 생겼어요.”
포기하고 싶었던 숱한 시간 이겨내다
생활한복 업체들이 갑자기 난립하면서 민감한 사안이 생겼다. 바로 카피 문제였다.
“저희는 연구개발 비용을 많이 쓰면서 공을 들여 한복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다른 데서 저희 걸 베낀 제품을 팔더군요. 그런데 유행이라는 게 폭풍처럼 왔다가 거품처럼 꺼지잖아요? 3년 차 되니까 그 사람들은 돈 챙겨서 떠나더라고요.”
한탕주의가 망친 시장은 냉정하고 무서웠다. 상당수의 저품질 생활한복이 소비자에게 큰 실망감을 남겼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한복의 생활화라는 순수한 뜻을 갖고 시작한 다른 문화 단체들이 하나씩 파산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그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재고를 사주고 하면서 돌실나이도 역경에 처했다.
“제일 무서운 것은 소비자들의 인식에 ‘생활한복은 천박한 것이야’라는 생각이 박힌 거였어요. 한철 장사를 한 사람들이 팔다 남긴 재고들이 한 2~3년 시장에 계속 돌더라고요. 볼 때마다 창피했어요.”
김 대표는 생활한복이 싸구려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생활한복의 고급화를 위해 ‘아회’라는 브랜드를 만들었고, 해외 패션쇼와 박람회 활동을 추진했다. 론칭할 때는 꽤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아회 한복을 입고 상견례하는 게 유행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4년가량 추진한 아회는 결국 정리했다.
“열심히 했는데, 잘 안 맞았어요. 고가 의류는 성공하는 비법이 있더라고요. 비싼 옷을 소비하는 이들의 마인드와 문화에 대한 어울림이 있어야 했는데, 제가 못 어울리겠는 거예요. 결국 내 정서에 맞는 일을 해야지 싶어서 담백한 생활한복 본연의 가치에 집중하며 돌실나이 이미지를 업그레이드하기로 했죠.”
앞만 보고 달려온 시간
그 시점에 또 다른 시련이 닥쳤다. 사업이 갑자기 커졌다가 줄어들면서 감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람을 뽑는 일보다 줄이는 일이 열 배 더 힘들어요. 퇴사 예정자 중에 출근하다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고요. 30대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죠. 한때는 화보 촬영할 돈이 없어서 마네킹에 옷을 입히고 인화해서 매장에 붙이고… 별짓 다 했죠.(웃음)”
지금이야 겨우 웃으며 할 수 있는 얘기이지만 김 대표의 심신에 깊이 새겨진 씁쓸한 흔적들이다. 그 때문일까. 그녀는 2016년부터 2018년까지 3년 동안 아파서 꼭 해야 할 일 외엔 못했다고 한다. 갱년기 같은 증상들을 겪었다. 수면장애 때문에 항상 졸렸고 저체온증에 시달렸으며 악몽도 꿨다. 생활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동시에 팀장급 직원들이 개인 사정들이 생겨 휴직에 들어가면서 회사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래도 작년부터 하는 일이 원활해졌어요. 내가 덜 아프게 됐고 휴직 들어갔던 책임자급 직원들이 다 돌아왔어요. 자리가 하나하나 채워지고 연말연초 계획도 끝내고 나니 일주일에 두 번 점심시간 운동도 가능해졌어요. ‘아, 나 이제 이렇게 살 수 있나봐’ 했는데 딱 2주밖에 못했어요. 코로나 터지면서 도루묵.(웃음) 내 인생에 뭘 노냐, 그냥 일해야지.(웃음)”
왜 이렇게 미련한지 자신도 이해 못해
들으면 들을수록 김 대표와 돌실나이의 역사는 거친 현실에서 계속 깨지면서 앞으로 전진한 역사처럼 보였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생활한복 브랜드이지만 이렇게 상처가 가득 새겨져 있음을 아는 이 누가 있을까.
“주어진 내 밥그릇이란 없는 듯해요. ‘너희는 자리 잡았잖아’라는 말을 많이 듣는데 그렇지 않거든요. 회사가 부동산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번 건 다 연구개발에 투자하거나 회사에 있고. 저는 통장관리도 해본 적 없어요. 재무관리실에서 다 하고 월급만 받아요. ‘시즌 기획을 잘못했다, 고객들에게 외면받았다’ 하는 일이 두세 번만 일어나도 회사가 휘청이기에 실상 굉장히 피가 말라요. 하루하루 생존하기 위해서.”
한 번 잘하기도 어려운데 계속 잘하기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어제까지 잘했어도 한 번 실수하면 소비자는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지키는 사업은 그렇게 냉정한 자본주의의 현실을 극복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많았죠.(웃음) 그래도 그냥 가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첫사랑과 결혼했고, ‘이렇게 살아야겠다’ 생각한 삶을 지금까지 살고 있고, 초등학교 때 친구들도 아직 만나고 있는 걸 보면 한 번 관계를 맺으면 끝까지 가는 사람인가봐요. 돌실나이도 그래요. ‘계속 가보자, 잘하든 못하든 그 자리에 있자’ 하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왜 이런 미련한 생각을 하며 사는지 저 스스로도 이해가 안 가요. 그런 DNA가 있나보죠.”
한 해에 600~700개 새로운 아이템 제작
김 대표에게 의상학과는 재수하기 싫어서 점수에 맞춰 들어간 학과였다. 그런 그녀가 27년 동안 계속 한복만 만들게 된 것은 이 나라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라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제가 돈으로는 안 움직이거든요. ‘그럼 내가 사는 힘이 뭘까?’ 생각해보니 스스로 정한 사명감일 듯해요. 나를 그 안에 가둬놓고 살고 있었다는 걸 중년이 돼서 깨달았죠. 한심하고 답답한 부분도 있긴 한데, 그 묵직한 무게감으로 여기까지 온 거죠. 무언가를 만지고 그리는 창의적인 일이 제 적성에 맞아요. 계속 변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버릇과 완벽주의가 옷 만드는 일에 적용이 돼서 오늘의 돌실나이가 있게 된 셈이죠.”
그녀의 말처럼 돌실나이의 옷 디자인은 매번 바뀐다. 철저한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다. 김 대표는 차라리 새로운 걸 하는 게 낫다고 웃으며 말했다.
“25년간 둥근 깃을 변형하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세요? 조금 다르면 ‘똑같다’고 하고, 많이 다르게 하면 ‘어색하다’고 하는 그 사이에서요.(웃음) 대신 똑같은 옷은 안 만들기에 회전속도가 빨라요. 2016년에는 1년에 1000여 개의 새 아이템을 만들었고 지금은 좀 줄어서 600~700개의 아이템을 제작하고 있어요. 계속 신상품을 내놓고 회전율과 품종 관리도 철저히 합니다. 물론 100% 자체 개발이고요. 외부 사람이 보면 ‘이 정도 매출이 나오는 회사가 개발비를 이렇게나 써?’ 하며 놀라요.”
떳떳하고 당당하게 우리 문화 만들어가겠다
마침 정부가 우리의 한복 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나섰다. 지난해부터 문체부와 교육부, 한복센터는 협업 아래 한복 교복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맞춤형 한복을 학생들에게 교복으로 보급하는 사업을 본격화한 것이다.
돌실나이는 2019년 한복의 전통과 멋을 살리면서도 학생들이 부담 없이 입을 수 있도록 실용화한 교복을 디자인해 ‘한복 교복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총 30여 가지의, 학생들이 스타일링하기 좋은 디자인으로 개발된 교복은 한복 특유의 곡선미와 세련된 색감은 물론 활동성까지 최대한 살렸다. 올해부터 20여 곳의 전국 학교 학생들이 돌실나이가 제작한 교복을 입게 된다.
김 대표는 최근 한복업계가 침체되고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한복이라는 장르를 유행 이상의 가치로 만들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요즘 고민이다.
“우리의 자존심으로 당당하게 한복을 지켜내고 싶어요. 그러려면 매출도 키우고 해외에도 눈을 돌려 한류문화에서 한복이 뒤처지지 않게끔 해야겠죠.”
돌실나이는 다양한 문화운동도 기획하고 있다. 인사동점 3층에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체험하고 강습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시험 삼아 운영하고 있는데 반응이 좋다. 그녀는 돌실나이가 소비자들과 함께하는 문화운동을 하면서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기업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밝혔다.
“구차하게 살지 않을래요. 자존심도 끝까지 지킬 거고요. 그리고 ‘버젓한 한복 브랜드가 일반 의류 브랜드와 대등하게 겨룰 수 있으니 젊은이들이여, 한복에 뜻을 가지고 오라, 도전하라’고 말할 수 있는 롤 모델이 되고자 합니다.”
우리의 한복을 자랑스럽고 번듯한 브랜드로 꼭 키우고 말겠다는 그녀의 말에서 자기중심을 잃지 않는 내밀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냉철해 보이지만 따뜻한 뚝심으로 걸어가는 김남희 대표. 그녀의 손끝에서 우아함과 실용성이 함께 닿게 될 우리 옷 문화의 미래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