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아들을 둔 김성경(45), 자신감 하나는 국가대표급이다. 이것이 오늘의 대체 불가능한 방송인 김성경을 만든 원천이 되었고 그녀는 현재 아나운서가 아닌 방송인으로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한 남자가 리드해줄 때 성적 판타지가 충족될 것 같다는 그녀는 이제야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글 이봉규 시사평론가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김성경과는 TV조선의 이란 프로그램에서 3년 이상 같이 방송을 하다 보니 너무 친해져서 오누이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막말로 성경이가 홀딱 벗고 덤벼들어도 아무 감흥이 없을 것 같다. 남자 친구가 생기면 곧바로 나에게 보고할 정도다. 지금은 특별한 사이의 남자친구는 없고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보고 있는 중이란다.
에서 잡힌 강한 여자 캐릭터 때문에 손해가 막심하다고 투덜댄다. 어찌하다 보니 강하고 드센 여자가 되어버렸고, 남자들이 자기를 어려워해서 잘 달라붙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덩치가 큰데(173cm) 캐릭터까지 강하게 잡혀서 속상하다는 자기 진단이다. 실제로 그 이유로 인해 고민하다가 일시적으로 에서 하차했던 적도 있다(나중에 다시 복귀했지만).
본인은 강한 여자 캐릭터가 부담스럽겠지만 이봉규가 분석하기에는 김성경이 오히려 그 덕을 봤다. 그 덕에 아나운서가 아닌 방송인으로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고, 최근에는 영화 주인공까지 맡아 촬영에 들어갔다. 이 영화에서 김성경 역할은 드세고 강한 성격의 하숙집 주인으로, 최성국과 부부로 나온다. 만약 지금까지 김성경이 연약하고 고상한 여자처럼 억지로 꾸며왔으면 영화 주인공으로 캐스팅될 일도 없고(실제로 감독이 을 보고 김성경을 여자 주인공으로 점찍었다고 털어놨다), 방송인으로서 지금 같은 확고한 입지의 김성경은 없었을 것이다. 자기가 친언니인 김성령처럼 미스코리아(진) 출신의 엄청난 미인도 아니면서 복에 겨워 투덜댄다.
아마 남자들이 못나서 김성경을 잘 다루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봉규의 심야데이트’를 위해 인터뷰하는 날 김성경은 “내가 아무리 강한 척해도 그걸 좋게 귀엽게 봐주는 남자가 드물다”고 털어놓는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자기를 무섭게 여긴다는 것이다. 또박또박 자기주장을 펼치면 강하고 드센 여자로 보고 부담스러워 도망간다는 푸념이다. “남자들의 자격지심이냐?”라고 나에게 쏘아붙인다. 그녀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한량 이봉규도 김성경을 가끔 무섭게 느낄 때가 있으니까 얌전하고 젠틀한 남자들은 김성경 앞에 서면 주눅이 들어 도망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돈 많은 남자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다”고 김성경은 진단한다. 돈이 많으면 자격지심 같은 것은 없을 테고 뭔지 모르게 당당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강한 여자에게 오히려 매력을 느낄 수도 있겠다. 실제로 언니 두 명 다 돈 많은 남자들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간접적인 영향도 받았을 것이다. 둘째 언니인 톱스타 김성령의 남편은 부산에서 알아주는 준재벌급의 사업가이고, 첫째 언니의 남편은 대형 종합병원 부원장이라 돈 걱정 안 하면서 아주 잘살고 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형부 둘 다 언니들에게 꼼짝 못하고 산다고 하니 김성경은 “돈 많은 남자들이 자격지심 같은 것은 없고 오히려 마음이 여유로울 것 같다”는 판단을 할 수도 있겠다.
‘성적 판타지(sexual fantasy)’를 물으니 아이러니하게도 남자가 자기를 벽에 강하게 밀치고 키스 세례를 퍼붓기를 원한다고 하니 어쩌면 강한 여자의 콤플렉스일지도 모른다.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한 남자가 리드해주길 원하는 것일까? 고전 영화 에서 율 브린너가 데보라 카를 강하게 리드했듯 그런 판타지를 꿈꾼다고 말하는 김성경의 눈빛이 간절하다. 영화 에서 데보라 카는 정숙하고 우아한 영국 여인이다. 김성경도 데보라 카에 자신을 대입시키고 싶은 마음일까? 하여간 영화에서 데보라 카는 다소 거칠고 자기밖에 모르는 왕(율 브린너)과 사사건건 충돌하지만 그러는 사이 왕에게 묘한 애정을 느낀다.
참고로 이봉규가 보기에는 세 자매 중 첫째 언니가 영화의 여주인공 데보라 카와 가장 닮았다. 그리고 세 자매 중 첫째 언니가 가장 매력적으로 생겼다. 그다음이 성령이고 성경이 인물로는 제일 처진다. 물론 이봉규(나름 고수)의 판단이지만 김성경은 자기가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내가 미스코리아 대회에 안 나간 것은 언니가 진으로 뽑혔기 때문에 더 이상 할 것이 없어서”라고 큰소리친다. 자신감 하나는 국가대표급이다. 이것이 오늘의 대체 불가능한 방송인 김성경을 만든 원천일 것이다.
김성경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각별한 사랑으로 자신감 넘치게 살아왔다. 지금도 어머니는 성경이를 세 딸 중에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예쁜 언니들보다 자기 할 말 거침없이 다 해대면서 강한 여자로 방송하고 강연 다니는 막내딸이 자랑스럽다. 어머니는 종갓집의 둘째 며느리로서 내리 딸을 두 명 낳고 셋째는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고 시집에서도 은근 압박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마침 태몽도 좋아서 아들인 줄 확신했는데 또 딸이 태어나니까 아빠는 실망해서 담배만 뻐끔뻐끔 피우고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때 어머니는 “열 아들 부럽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했다. 어머니의 기도가 현실로 이루어졌으니 대견스러움을 넘어 자랑스러워할 만도 하다. 어머니는 성경이 태어나고 세 번 놀랐다고 한다. 당연히 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딸이 나와서 놀랐고, 진통도 없이 쑥 순산해서 놀랐고, 구정 날에 태어나서 놀랐다고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족들을 놀라게 했으니 강한 캐릭터를 가진 것도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강한 여자인 그녀의 인생이 늘 씩씩하고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이혼의 아픔도 겪었고 혼자 힘으로 아들 키우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에서도 밝혔듯이 이혼 이유가 남편의 외도 때문이었으니 그 아픔이 남다를 수 있다. 짓궂은 멤버들의 이혼에 관한 질문 공세에 김성경은 쿨하게 대답했다. “10여 년도 더 된 이야기다”라며 “처음에는 성격 차이였다”면서 “하지만 주변에서 ‘여자가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해줬고, 결국 확인했다”고 방송에서 털어놨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이상하게 크게 화가 나지 않았고 그냥 쿨하게 보내줬다”고 한다. 그녀는 한술 더 떠서 “내가 먹고살려고 이런 이야기까지 해야 하나 싶어 방송 중에 울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강한 여자인 그녀도 이혼의 아픔과 혼자 아들을 키워온 자신의 인생 스토리에 눈물이 저절로 나올 법하다. 다행히 아들이 잘 자라주었다. 지금 뉴욕대(NYU)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고 있다. 아들이 대학을 가니까 홀가분해진 느낌이라고 말한다. “예전에는 지성과 미모를 숨기고 살았는데 이제 아들도 잘 키웠으니까 스스로 자신이 자랑스럽다”고 금방 분위기가 뜬다. 이게 김성경의 캐릭터이고 그녀만의 독특한 매력 포인트다.
그녀가 자랑할 만도 한 것이 아들은 남의 나라 말로 그 어려운 공부를 하면서도 엄마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레코드 가게에서 알바하려고 인터뷰 신청을 해두었단다(지금쯤이면 일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미국 유학의 경험이 있지만 첫 학기 때는 학업 스케줄을 따라가기가 보통 어렵지 않다. 첫 학기부터 알바를 하려고 마음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효심이고 아들 또한 엄마를 닮아서 자신감이 넘친다고 봐야 한다.
아들은 그녀에게 “엄마 왜 결혼 안 해? 앞으로는 내 생각 말고 엄마 행복만 생각하고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해!”라고 입버릇처럼 주문을 한다니 대견스럽다. 그녀 생일에 아들에게 온 카톡을 읽으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 글을 쓰는 데 참고만 하겠다고 내 카톡으로 전달해달라고 부탁해서 겨우 받아냈다. 그녀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지면에 그대로 옮긴다. 나중에 분명 강한 여자 김성경에게 야단을 맞을 게 뻔하지만 절친 오빠인 이봉규만 보기 아까워서 소개한다.
엄마 생일축하해요! 너무나도 감사하고 지금까지 계속 나를 믿고 이해해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다 엄마 덕분이에요. 엄마 때문에 더 노력하고 더 열심히 하고… 저한테 그럴 수 있는 힘이랑 Motivation을 주셔서 너무나도 감사해요! 제가 힘들 때도 있고 엄마도 힘들 때도 있겠지만 둘 다 서로를 사랑하고 도와주는 우리 모자 사이, 전 이런 게 있는 게 너무나도 기쁘고 감사해요. 이런 엄마를 가질 수 있게 해주신 할머니 할아버지도 감사하고, 하늘에 계신 아빠도 너무 감사해요. 제가 지금 곁에 있지 못하는 게 너무나도 안타깝지만 저의 마음과 생각은 바로 거기에 있어요. 엄마가 저한테 힘을 주시는 것처럼 저도 엄마한테 힘이 됐으면 좋겠어요. 생일 축하해요, 사랑해요~~~
대학교 1학년의 아직 어린 나이인데 참 대견스럽다. 그 아들의 바람대로 앞으로 강한 여자 김성경을 벽에 화끈하게 밀치고 키스 세례를 퍼부을 멋진 남자가 나타나길 고대해본다. 그때는 이 오라비가 그놈의 발바닥을 사정없이 다디미 방망이로 후려칠 것 같다.
그녀 아들의 바람대로 앞으로 강한 여자 김성경을 벽에 화끈하게 밀치고 키스 세례를 퍼부을 멋진 남자가 나타나길 고대해본다. 그때는 이 오라비가 그놈의 발바닥을 사정없이 다디미 방망이로 후려칠 것 같다.
싱글 남녀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지난 8월 말부터 매주 금요일 모여 난타 연습과 스포츠 댄스를 배운다. 강남시니어플라자 대표 싱글 모임인 회원 중 8명. 11월 말에 있을 플라자 내 교육 프로그램 발표회에서 난타 공연을 할 예정이다. 싱글들의 모임이라 그럴까? 생기가 넘친다. 왠지 모를 자연스러움에 나이까지 잊게 만든다. 그렇지만 속내는 알 수 없다. 탐색을 하고 있는지, 정말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지 말이다. 격 있는 싱글들이 모인 김에 솔직하게 물어보기로 했다. 당신들의 속내, 지금 연애가 하고 싶습니까?
난타와 댄스스포츠를 가르치는 이복자씨 속사정
난타 소모임의 반장격인 이복자씨를 제일 먼저 만나 살아온 얘기를 들어봤다. 초등교사로 은퇴한 이복자씨는 부유한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 한국무용을 공부했고 초등학교 교사로 지내면서도 무용학교 입시 안무가로 젊은 시절 제법 잘나갔다. 스포츠 댄서로서도 한 획을 그었다고 자부하는 이복자씨. 그랬던 그녀는 재작년 황혼이혼을 했다. 작년 9월부터는 싱글의 몸으로 봄빛클럽 회원이 됐다. 지금은 나름의 재능을 살려 회원들에게 난타와 댄스스포츠를 가르친다.
이복자 황혼이혼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였어요. 남편의 술버릇 때문이었죠. 젊을 때는 교사라서 못하고, 아들 결혼식에 빈자리를 만들기 싫었습니다. 결국 이혼했어요. 아들이 결혼하고 나서 호주로 떠났는데 제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혼자 있다 보니 외로웠어요. 자존심상 주위에 혼자된 사실을 알리고 싶지도 않고요. 그러다가 봄빛클럽을 알게 됐습니다. 법적으로 혼자라는 것을 증명하고 상담도 받은 뒤 회원이 되면 싱글들끼리 만날 수 있는 곳이라고 들었어요. 건전하고 나 또한 싱글이니까 마음놓고 얘기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봄빛클럽 안에 최근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지만 말 그대로 탐색 중이다. 그녀에게는 분명한 것 하나가 있다.
이복자 남자 경제력은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가지고 있는 것과 연금으로도 두 명 충분히 살 수 있거든요. 마음이 맞고 편한 상대를 만나고 싶어요. 사실 제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그분에게 당신이 편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뭐 어때요? 여자라도 마음에 들면 말하는 게 맞죠. 말 못할 이유가 없잖아요(웃음)?
하나, 둘 회원들이 모이고 왁자하게 웃음꽃이 폈다
난타 모임은 발표회를 위해 급조된 모임이다. 이곳에 모인 회원들은 공연이 끝난 뒤에도 매주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사진 촬영을 위해 테이블 주위에 회원들이 오순도순 모였다. 봄빛클럽 단장이었던 이활주씨와 난타를 가르치는 이복자씨, 이영조·최연서·현정원·김순섬씨. 그리고 이복자씨의 댄스스포츠 파트너인 박노용씨도 나오지 않은 회원을 대신에 자리를 채웠다. 이날 모인 사람 중 유일하게 가정이 있는 남자다.
본격적으로 싱글 남녀와 대화를 열다
싱글이신데 젊었을 때와 지금 이성을 만나는 느낌은 어떻게 다른가요?
이영조젊을 때는 좀 화끈하잖아요. 그런데 나이든 사람들의 만남은 하루하루 만나면서 즐거운 상태를 유지하는 거죠. 서로가 함께 있으면서 취미를 공유하고 같이 모이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봐요.
이복자 모여서 떠들면서 스트레스도 날리고 외로움도 해소하는 거죠.
최연서 젊었을 때의 연애는 쓰나미 같은 것이고, 지금의 연애는 밀물 같아요. 이 나이에는 쓰나미처럼 사랑할 수 없어요.
Q.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요?
최연서 우리 생각은 시시때때로 바뀌어야 맞잖아요? 다른 사람 보면 또 바뀌고 그래야죠. 우린 싱글이니까요. 어떻게 사람이 같은 사람만 좋아할 수가 있어요(웃음)?
이복자 취미활동을 하다 보면 마음이 맞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고 그러다가 개인적으로 만남을 갖는 사람들도 생기지 않을까요?
Q. 주로 어디서 만나시나요?
이영조사람이 그리울 때 저는 주로 저희 집으로 오라고 합니다. 집에 볼 만한 영화도 많고, 노래방 기계도 있어요. 그런데 전부 다 모여 먹고 마시다 보면 같이 영화 보고, 노래 부를 사람이 없더라고요. 다음에 영화 볼 때는 몇 사람만 와서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때 갑자기 최연서씨가 이영조씨와 이복자씨가 함께 영화 을 봤다는 얘기를 꺼낸다. 야한 장면이 나오는데 둘이 괜찮았냐며 소녀처럼 묻는다.
이복자 문제는 그런 거를 같이 봐도 아무 감각이 없었다는 거 아냐? 이제 완전히 고목이 됐나봐. 지금 연서씨가 얘기하니까 그런 게 있었나보다 하지. 이제는 그런 장면을 봐도 감정이 막 생기고 그런 게 없더라고요.
Q.댄스스포츠 같은 거 하다 보면 찌릿한 느낌 없나요?
최연서 그럴 만한 사람을 만나면 그렇겠죠. 그런데 친구 사이로 생각하는데다가 배우는 데 집중해서 그런지 잘 몰라요, 그런 거.
이복자 지금은 댄스스포츠를 배우고들 있으니까 배우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라도 더 배워서 안 잃어버리려고 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잘하나 못하나 그거에만 신경을 쓰지 남녀라는 느낌이 없어요.
이영조 지금 자꾸 내용을 그런 쪽으로 몰고 가는 거 아닌가요?
수줍어서인지 즐거워서인지 다들 박장대소한다. 격조 있는 싱글들이 만났으니 뭔가 있을 거 같다고 느꼈다.
이활주 우리가 만나봐야 한 달에 번개까지 해서 한두 번 만나요. 좀 얘기하다가 식사하고 노래방 가고, 끝나면 집에 가기 바쁘니까 따로 시간 내서 한잔 더, 혹은 차라도 한잔 이런 걸 못 해요. 지금 그것을 파악하는 중이지요. 그래도 처음보다는 서로를 많이 알게 됐어요.
Q.솔직히 말해보셔요, 다들 연애는 하고 싶으세요?
최연서 좋은 친구는 만들고 싶죠.
김순섬 마음 통하는 친구가 있으면 좋겠어요.
Q. 얘기가 잘 통할 때 연애가 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으신가요?
이영조 희망사항이죠. 문제는 생각하는 이성이 없는 건 아니에요. 솔직히 말해서 이곳에서 혹시 남녀가 불이 붙으면 이 모임에 나올까요(웃음)? 관둡니다. 그건 분명해요.
이복자 자기들끼리 만나야 하니까.
이영조 맞아요. 남들과 어울리지 않고 둘이 만나니까 안 나오더라고요.
Q. 혹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면 헤어졌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김순섬 다시 들어오지는 않겠지. 자존심이 있는데 헤어졌다고 들어오나?
이활주 사실 예를 들어 “나 누구하고 만난다”고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존심이고 뭐고 없어요. 시치미 떼고 다시 오면 오는 거죠. 아무도 모르니까요. 그리고 모임 회원 중 많게는 몇 사람 혹은 한두 사람은 서로 신상 탐색을 위해 밖에서 만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Q. 이 모임은 싱글 모임인데 다른 모임과 차이가 있다면 얘기해주세요.
이복자 제 친구들 중에는 싱글이 많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친구들하고 모임을 하다가도 시간이 되면 바삐 집으로 가요. 남편 밥 챙겨주러요. 집안일이 그렇게 딱 걸리더라고요. 그런데 우리 같은 싱글들은 집에 빨리 가야 하는 부담이 없어서 좋아요. 여기는 싱글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위화감은 없어요.
Q. 싱글 모임을 하면서 좋은 점이 있다면요?
김순섬 다른 내 친구들은 싱글이 아니니까 내가 만나고 싶을 때 못 만나요. 그런데 여기는 내가 전화하면 만날 수 있어요. 요즘 다른 친구들한테 자랑해요. 너희들 없어도 요새 나는 잘 놀고 있다고요(웃음).
Q. 같이 갔던 장소 중에 좋았거나 기억에 남는 곳이 있었나요?
현정원 춘천 갔을 때도 재밌었고, 대하도 먹으러 갔었어요. 11월에는 충남 태안에 천리포수목원으로 2박 3일 계획하고 있어요. 봄빛클럽에서 희망하는 사람들만 갑니다.
솔직하지 못한 싱글 남녀들의 머뭇거림에 이날 객원 멤버로 참여한 무용실 원장 박노용씨가 한마디한다.
박노용 너무 생각이 깊어요. 만나는 거 자체는 흥미롭고 좋은데 열지 못하는 거죠. 가정이 있는 제가 느끼기에도 몇 가지 장단점이 느껴집니다. 자유로운 모습을 보니 한편으로 좋아 보이기도 하네요. 각자에게 주는 감정이 참 세밀합니다. 그런데 젊음이 떠나서 그런가 들이대는 게 부족해요(웃음).
이활주 그 말이 맞을 거예요. 다른 사람 눈치를 보게 돼요. 가족의 눈 등 일단 다른 사람들의 눈이요. 좋아하는 상대의 좋은 점을 발견하고 알아가면서 좋은 감정을 만들 수도 있으련만.
최연서 자신에게도 신중해야 하고 남들도 생각해야 하고 젊었을 때랑은 다를 수밖에 없죠.
이복자 나이 들어보니 감정은 뒷전이고 이성적으로 이것저것 가리게 되니까 빨리 뭐가 안 이뤄지는 거죠.
박노용 남녀 간의 사랑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따뜻한 친구는 얻을 수 있잖아요. 그래서 이런 싱글 모임이 좋은 거 같아요.
최연서 누군가 말하기를, 이성 친구는 딱 보고 1분 내로 결정하라더군요. 단 지성과 양심 중에 양심 쪽을 택하라고 하더군요. 나이 많은 사람과 젊은 사람은 만남이 달라요.
시니어 싱글 남녀. 이들도 결국은 진짜 사랑을 만나고 싶고, 지금까지의 삶을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젊은 사람들처럼 사랑을 표현하고 내세울 수 없다. 삶에 대한 책임감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보다 클 수밖에 없다. 바로 이 마음이 시니어들이 사랑을 생각하는 방식이 아닐까.
‘The Duchess’는 공작부인을 뜻한다. 이 영화의 원제는 영국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휘트브래드상’을 수상한 아만다 포멘이 쓴 베스트셀러 소설 이다. 18세기 영국 실화라고 해서 더 화제가 되었다.
감독은 영국의 사울 딥이다. 주연에는 공작부인 조지아나 역에 키이라 나이틀리, 데본셔 공작 역에 랄프 파인즈가 나온다. 무대는 18세기 영국의 상류사회다. 17세의 소녀 조지아나는 최고의 부와 권력을 가진 대본셔 공작과 결혼하면서 공작부인이 되고 미모와 지성, 패션으로 사교계의 여왕이 된다. 뭇 남성들은 화려한 그녀를 흠모한다. 그러나 남편 데본셔 공작은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며 조지아나의 속을 썩인다. 하녀와의 외도로 낳은 딸을 데려다 키우기도 한다. 심지어 조지아나가 믿고 있던 친구 베스와 외도하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딸에 이어 아들까지 낳았지만 희망이 안 보였다.
남편의 사랑에 굶주린 조지아나는 젊고 야망 있는 젊은이 찰스 그레이와 사랑에 빠진다. 결국 그의 아이까지 낳는다. 세기의 스캔들 감이다. 그러나 대본셔 공작은 이혼하지 않고 조지아나에게 돌아오라고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찰스의 앞날을 망가뜨리고 아이들과도 떼어놓겠다고 말한다. 결국 체면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조지아나는 사랑을 택하지만 아이들이 보내온 편지에 마음이 돌아선다. 그리고 남편과 같이 살다가 죽었다. 찰스 그레이는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원했던 대로 영국의 수상이 된다.
조지아나는 실존 인물이다. 비운의 황태자비 다이애나의 4대 선조가 조지아나란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다른 남자와 스캔들을 만든 두 사람의 운명이 묘하게 비슷하다. 이 영화가 볼 만한 것은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지만, 18세기 영국의 상류사회 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가발을 쓰고 스카프를 목에 둘렀다. 27벌의 화려한 의상을 입고 등장한 키이라 나이틀리는 귀부인의 강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상류사회의 파티도 재미있다. 이들의 파티는 배우자 외에 다른 이성과 춤을 출 수 있는 기회다. 그래서 모두들 즐거워하고 재미있어 한다. 조지아나 같은 아름다운 공작부인과 춤을 추거나 얘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이슈가 된다. 그녀에게 자기 아이까지 잉태시켰던 찰스 그레이는 사랑에 모든 것을 거는 듯했지만 결국은 야망을 택한다.
주 촬영지는 데본셔 공작의 전원저택인 체스워드(Chatsworth House)로, 키이라 나이틀리가 출연한 을 찍었던 장소라고 한다. 현재 데본셔 가의 후손들이 살고 있고 300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저택 전체가 개방되어 있단다. 하루에 6000명의 관광객들이 출입할 수 있고 집 안에서 보유하고 있는 렘브란트 작품 등 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유물들을 관람할 수 있다고 한다. 런던에 가면 유명 관광지보다 이런 곳을 찾아 이 영화를 떠올리며 둘러봐도 좋을 듯하다.
저출산과 수명연장, 베이비부머의 은퇴로 초고속 고령화가 진행 중인 대한민국. 그중에서도 베이비붐 세대의 대거 은퇴는 한국 사회만의 특수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특단의 대책과 인식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 9월 27일 서울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열린 창조경제연구회(KCERN) 제29회 정기포럼 ‘고령화와 4차 산업혁명’에 참여한 각계 분야 패널들의 조언을 담아봤다.
첫 주자로 나선 이남식 계원예술대학교 총장은 ‘고령화 위기 진단’이라는 주제를 발표하며 이번 포럼이 지니는 의미를 강조했다. 이 총장은 “디자인 분야에 있는 사람은 사용자(실제 고객)와의 공감을 중요시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시니어가 어떤 환경에 처해 있고,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맞는 정책을 펼쳐나가야 할 것”이라며 “실질적이면서 훨씬 더 폼 나고 위엄 있게 노후를 디자인할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에 공감하고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토론함으로써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시니어 분야의 리더십을 발휘해 인류사회에 기여할 수 있길 바란다”고 희망했다.
이번 포럼의 주최 측인 창조경제연구회의 이민화 이사장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 이사장은 “지구온난화보다 더 심각한 것이 고령화”라고 언급하며 “속도는 빠르게, 질은 나쁘게 늙어가는 게 한국의 문제”라고 화두를 던졌다. 그는 KSM(KCERN Silver Model)을 제시해 고령화 현상 및 정책을 분석하며, 고령화 문제는 4차 산업혁명이 선행돼야 해결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어 “공유경제와 긱(Gig) 이코노미의 등장도 눈여겨봐야 한다. 긱은 일종의 소규모 밴드로 인력 매칭 직업의 종말과 프리에이전트의 등장을 의미한다”며 “미국의 긱 플랫폼, 일본의 클라우드웍스 등 사례를 참고해 한국도 시니어 프리랜서와 사내 기업가 양성에 관심을 쏟아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그는 끝으로 “초고령화 국가가 되기까지 10년 남았다. 만약 고령화가 선행된다면 4차 산업혁명으로 가는 에너지가 없을 것이다. O2O(Online to Offline)제도와 기술혁신 등으로 4차산업 완수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두 발표자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김일섭 aSSIT 총장의 진행으로 패널 토론이 시작됐다. 가장 먼저 운을 뗀 강시우 창업진흥원 원장은 “현실적으로 재취업이 어려운 은퇴자들은 대개 치킨집이나 편의점 등의 창업에 도전한다. 창업 경쟁이 과열되면 성공할 확률이 낮은데, 그보다는 기술창업 쪽으로 관심을 갖는 것이 개인과 사회에 이롭다”고 제안했다. 그는 “현재 전국에 시니어창업기술센터가 23곳, 여기에 투입된 기업만 430여 개다. 이곳에서 중·장년들이 기술을 습득하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해 사업으로 이어지도록 지원하고 있다. 예산은 정부 보조금과 크라우드 펀딩을 활용해 마련한다. 이러한 시스템은 시니어가 경제활동에 기여하고 일자리 창출에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충분히 고려할 만하다”고 말했다.
소기업의 창업지원을 돕고 있는 박광회 르호봇 대표는 “시니어 세대와 주니어 세대의 협력을 통해 청년과 고령자 취업 문제를 함께 해결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협업 모델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은 멘토 모델이다. 은퇴자가 가지고 있는 경험을 청년 세대와 공유하고, 서로의 강점을 인정하고 배워나가는 등 세대 간 융합의 노력이 필요하다”며 “민간의 지혜와 집단의 지성이 존중되는 형태로 그들을 돕기 위한 정책이 만들어지길 바란다”고 설명했다.
이삼식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저출산고령화대책 기획단 단장은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며 은퇴자와 청년 세대 간 일자리 경쟁을 고려해야 할 시점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 단장은 “그동안 노인은 부양의 대상으로만 생각했지만, 고령화 사회에서는 경제의 주체가 돼야 한다.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고령자의 노동력을 저평가하는 연령 차별주의가 사라져야 하며, 시니어 스스로도 일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노후의 경제력 문제뿐만 아니라 건강하고 유익한 삶에 대한 고민도 빼놓지 않았다. 노호성 웰니스IT협회&협동조합 부회장은 ‘맞춤형 행복 플레이팅 서비스’ 시장을 개척하고자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노 부회장은 “시니어 인력 활용에 대해 논의할 때 그들의 건강과 체력은 기본”이라며 “시니어의 체력을 측정하는 기준은 젊은 세대와 차별화해야 한다. 가령 윗몸일으키기나 달리기 등은 그들의 신체 능력을 평가하는 지표가 될 수 없다. 자립적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능력이 기준이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신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시니어의 건강을 증진할 수 있는 제도와 서비스를 찾고 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구분해 각자의 형편에 맞게 노후를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종재 이투데이 대표 겸 한국SR전략연구소 소장은 고령화 문제를 바라보는 언론인의 관점을 언급했다. 이 대표는 “저출산 고령화 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지만, 컨트롤타워가 분명하지 않아 두루뭉술한 이야기만 오갈 뿐”이라며 “고령화 문제를 종합적으로 바라보고 책임감 있게 해결해나갈 주체가 필요하다. 연구소나 언론 등 객체의 역할도 뒷받침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보람찬 노후를 위해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액티브 시니어가 많다. 그런 이들을 위해 언론인으로서 해야 할 일들은 무엇인지, 사회의 큰 흐름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들이 있을지 함께 고민해나갈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신연식 감독의 4편의 옴니버스 식 영화이다. 2015 전주 국제영화제 출품작이다. 주연에 이영란, 전지윤, 다솜, 정준원, 소이, 스티븐 연, 신민철, 이광훈, 이유미 등이 나오는데 전부 무명 신인들이라 신선하다. 프랑스 영화처럼 두 번 이상 봐야 이해가 좀 되는 영화이다.
떠나야할 시간(A time to leave)
네 딸을 둔 어머니는 말기 암으로 스스로 안락사를 선택한다. 그리고 네 명의 다 큰 딸들을 불러 모아 함께하는 마지막 삼 일 간의 시간을 갖는다. 젊은 딸들은 여전히 현실의 벽에 갇혀 티격태격하며 어머니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한다. 어머니는 행복이 그렇게 모여 오순도순 사는 것인데 그러지 못했다며 더 이상 여한이 없다고 한다. 어머니는 3일째 되던 날 안락사 전문가들을 불러 딸 들 앞에서 편안히 죽는다. 이미 재산도 변호사를 시켜 분배해 놓은 상태이다. 가족이 모두 동의하고 말기 암이므로 그렇게 죽어도 법적으로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생각해 보게 하는 영화이다.
맥주집 아가씨(A lady at the bar)
긴 머리가 치렁치렁한 아름다운 맥주 집 아르바이트 아가씨가 있다. 거기 온 남자 손님들은 저마다 찝쩍거려 본다. 어떤 남자는 애 둘 낳고 휴가철이면 가족끼리 여행이나 다니는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여자는 평범한 삶이 그리 쉬운 게 아니란다. 한 지적장애인은 자신이 외모만 다르지 진지한 사람이라고 애소한다. 아가씨는 맥주집에서 아르바이트 하며 끝나면 또 학원으로 달려가는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 중이라 남자 만날 처지가 아니라며 무시한다. 사람마다 처지가 다르다. 편하게 술이나 마시는 수컷들은 아름다운 아르바이트 아가씨를 쉽게 보는 경향이 있다. 너무 쌀쌀하면 손님 떨어질 일이고 받아주자니 한이 없는 일이다.
남은 시간(A remaining time)
서로 사랑하는 두 젊은 남녀가 있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점쟁이는 그들에게 연인의 시간이 100일 밖에 남지 않았다고 전한다. 100일 후에 둘 다 죽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남은 100일을 보낼까? 남자는 둘이 100일간 후회 없는 삶을 살자며 같이 죽자고 한다. 그러나 여자는 굵고 짧게 살기 싫다며 시간을 연장하자고 한다. 결국 일 년에 이틀을 보며 50년 동안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 정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나라면 다른 점쟁이에게도 가서 확인을 했을 것이다.
프랑스 영화처럼(Like a French film)
4편의 옴니버스 중 제목으로 택한 테마이다.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 빈 구석이 많은 착한 남자이다. 그녀는 그때그때 감정대로 하며 산다. 그녀가 새벽 시간이라도 오라면 가고, 갔는데 졸린다며 다음에 연락하자면 무거운 발길을 돌리기도 한다. 다른 남자랑 만취하고는 늦은 시간에 이 남자에게 전화해서 돈 3만원을 갖고 오라기도 한다. 그 3만원을 어디에 썼는지 궁금하다. 끝내 모른다. 이 여자는 다른 남자에게는 지성을 들이며 이 남자에게는 제 마음대로 한다. 남자는 어망에 걸린 고기처럼 편한 친구사이이다. 여자들이 보기에는 이 여자는 본능적으로 남자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해준다. 프랑스영화는 여러 가지 복선이 깔려, 보고나서도 도대체 아리송했던 적이 많다.
이번 달부터 새롭게 진행하는 ‘이봉규의 心冶데이트’는 시사평론가 이봉규가 공인들을 만나 술 한 잔 기울이며 편하게 만나 은밀한 속내를 풀어내는 코너입니다. 꾸밈없고 날카로운 ‘돌직구’를 던져 차마 예상치 못했던 야들야들한 답변을 끌어내는 사심이 묻어나는 ‘술술토크’를 열었습니다. 글 이봉규 시사평론가
윤영미(57) 아나운서와는 방송을 같이 한 적도 여러 번 있고 방송국 대기실에서 자주 마주치고 대화도 많이 나눴기에 편한 상대임에도 가 마련한 ‘이봉규의 심야데이트’의 인터뷰를 위한 만남은 설랬다. 그녀는 1962년생으로 여자로서 밝히고 싶지 않을 정도로 꽤 나이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와 몇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며 너스레를 떨 정도로 당당하다. 오죽하면 ‘여자 김구라’로 불린다고 스스로 털어 놓는다. 요즘 아무리 김구라가 인기가 좋다고는 하지만 ‘여자 김구라’로 불리고 싶을까? 일반적인 여성 방송인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변태거나 ‘또라이’는 절대 아니고 지나치게 발랄하고 순수하고 다소 엉뚱스러운 여인이다.
윤영미 아나운서와 서울 서초구 잠원동의 닭갈비집에서 만났다. 그녀는 강원도 홍천 출신으로 춘천에서 1년간 기숙사 생활(성심여자대학교 국문과)을 했고 춘천 MBC에서 다년간 공채 아나운서로 활동했었기 때문에 닭갈비를 좋아할 것으로 믿고 필자가 그리로 정했다. “닭갈비집으로 인터뷰 장소를 잡는 이봉규의 센스에 깜짝 놀랐다”고 말하면서 “역시 이봉규는 한량!”이라고 평가한다.
한량인 내가 타이밍을 놓칠 리가 없다. 바로 분위기를 업~ 시키려 둘은 막걸리 잔을 단번에 비워 버렸다. 그녀의 주량은 상당히 센 편이다. 맥주는 싱거워서 한도 끝도 없이 들어가서 소맥을 즐긴다고 허풍쟁이 남자들처럼 주량 자랑이다. 술 먹다가 취해서 화장실 갔다가 자리를 못 찾아 한참을 헤매거나 필름이 끊긴 적도 여러 번 있다고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대학 시절 명동의 유명한 나이트클럽인 ‘마이하우스’를 휩쓸었단다. 낮 2시부터 디스코텍을 다닐 정도로 세칭 ‘날라리’였다고 허풍을 떤다. “맥주는 5000cc까지는 아무 반응도 없다”는 말이 끝나자마자 필자는 맥주를 따로 더 시켰다.
그녀가 막걸리보다는 맥주를 더 좋아하는 것으로 판단했고 혹시 막걸리를 먹어서 매우 취하면 인터뷰에 지장이 있을 것 같다는 불안감도 살짝 작용했기에 필자는 막걸리를 마시고 그녀에게는 맥주를 권했다. 술병이 한 병 두 병 비워 지고 취기가 서서히 올랐기에 과감한 질문을 던졌다.
“가끔 바람피우고 싶은 생각이 들곤 합니까?”라는 돌발 질문에 “멋진 뇌색남(뇌가 섹시한 남자)을 보면 연애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라고 솔직하게 말하면서 “그러나 남편 아닌 다른 사람과 섹스는 못할 것 같아요”라고 대답한다. 정신적인 바람을 피우고는 싶지만 몸을 섞는 육체적 바람은 찜찜하다는 것인가? 알쏭달쏭하다.
그녀는 “지난 10년간 이혼 생각도 여러 번 했었지만 막상 이혼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고 한다. “막상 이혼을 하고 나면 다른 남자와 잘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다시 말해 대안이 없어서 그냥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취기에 솔직하게 털어놓아서 그렇지 결혼 20년차 이상 대부분의 중년 여성들은 이런 생각을 수없이 하면서도 어쩔 수 없어서 그냥 사는지도 모를 일이다. 결혼하고 몇십 년이 지났고 아이들도 다 컸고 갱년기에 심리적인 흔들림도 생기기 마련이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오히려 남에게는 남편밖에 모르는 현모양처로 이혼 생각은 전혀 해 본 적도 없다고 내숭을 떠는 여성들이 속으로는 곪아 터질 대로 터져서 남모르게 골프코치나 수영코치하고 바람피우거나 산악회에 가입해서 헌팅을 위해 이산저산 떠돌고 다닐지도 모른다.
“한번쯤 일탈은 설렐 것 같아요, 삶의 동기 부여도 될 것 같기도 하구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볼은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랐다. 상상만으로도 짜릿함을 느끼는 그녀의 표정은 실제로는 제대로 일탈을 해 본 적이 없다는 고백처럼 들렸다. 일탈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 아쉬움을 그녀는 시인 문정희의 어록으로 대신한다. “죽으면 썩을 몸을 칭칭 감고 다녔다.” 이 말을 듣고 금방 이해가 갔다.
남편이라는 존재는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라고 그녀는 문정희 시인의 구절을 인용한다. 그러면서 문정희의 ‘남편’이라는 시에서 제일 좋아하는 구절을 낭독한다.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 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구절이 그녀의 마음과 똑같아서 미치도록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일탈을 꿈꾸다가도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도 먼 남자인 남편의 존재 때문에 삭이고 사는 것이 우리네 중년 여인들의 삶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새삼 배운다.
35세에 만난 남편 황능준씨는 지난 20년의 결혼생활 동안 사업 실패, 전업주부 생활, 목회자로의 전향 등 때문에 아내 윤영미에게 생활비를 제대로 주지 못했다고 한 방송에서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는 과거 남의 말만 듣고 주식에 투자했다가 실패하며 본의 아니게 아내를 ‘생계형 방송인’으로 만들었다고 고백했다.
그런 남편하고 살면서 속도 하도 많이 썩어서 지긋지긋할 법도 하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또 다른 방송에서는 “저는 속아서 결혼한 것 같다. 울분이 항상 쌓여 있어서 돌덩이(가슴에)가 있는 기분이다”라고 토로하면서 “결혼 전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서 사회사업을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적어도 내가 호강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며 “그런데 남편이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3년 정도 살았다. 당시 얼마 되지 않던 내 아나운서 월급으로만 먹고 살았다”고 하니 요즘의 그녀가 얼마나 씩씩해 보이고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웬수’ 같은 남편이지만 시인 문정희의 ‘남편’에 나오는 구절처럼 여기고 새기면서 살고 있을 것 같다. 놀랍게도 그녀의 첫 섹스 파트너는 35세 때 지금의 ‘웬수’ 같은 남편이었다. 그러니 그럴 법도 하다.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느낌이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2차로 장소를 옮기자는 필자의 제안에 그녀는 흔쾌히 따라 나섰다. 바로 옆에 필자가 자주 가는 라이브 바 ‘그루브’에선 스스럼없이 대화가 더 깊숙하게 진행되었다.
그녀의 첫 키스는 마치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주인공 소녀 같이 초등학교 때 홍천 계곡에서 환상처럼 이루어졌다고 한다. 상대는 당시 홍천초등학교 전교회장. 40여 년이 훌쩍 지나갔어도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멍하다고 말한다. “첫 키스 상대인 그때 그 사람이 그립습니까?”라고 묻자 “지나간 사랑은 기억일 뿐”이고 “여자는 한 남자를 두 번 사랑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윤영미 어록이 쏟아진다. 풋고추 같은 사랑이었고 가슴 아픈 첫 사랑은 따로 있었다고 그녀는 고백한다.
그녀의 대학 시절 강원대학교 건축과에 다니던 테리우스 같은 꽃미남을 ‘꼬시기’ 위해 그녀는 적극적으로 행동했었다. 성심여대에 다니던 윤영미는 강원대 앞 카페에서 우연히 본 테리우스를 만나기 위해 강원대 도서관으로 매일 출근했다. 혹시나 도서관에 그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교회 친구가 테리우스와 강원대 같은 과(건축학)의 선후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친구에게 부탁해서 극적으로 상봉하였다. 영화 의 ‘윤영미편’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드디어 그와 사귀게 되었는데 으레 첫사랑이 그렇듯 오래가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 스토리는 마치 영화와도 같았다. 그 후 세월이 한참 흘러 중년이 된 나이에 그를 우연히 마주쳤는데 딱 봐도 행색이 안 좋아 보일 정도로 예전의 꽃미남 테리우스는 온데간데없어서 슬펐다고 한다. 아련히 애틋했던 첫사랑은 그렇게 완전히 그녀의 맘속에서 비로소 지워지고 말았다.
그 후 웬수 같은 남편은 그녀에게는 중년의 테리우스같이 멋져 보였을 것 같다. 실제 그녀의 남편 황능준씨는 훈남의 외모를 자랑한다. 그녀는 남편의 첫인상이 ‘푸른 초장’ 같았다고 회고한다. 속을 전혀 썩일 것 같지 않고 순수한 남자일 것 같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살아 보니 속도 많이 썩었고 산전수전 겪다 보니 지금은 전우애로 똘똘 뭉쳐 그런대로 봐 줄 만하다고 은근 자랑이다.
그녀는 “남편이란 존재는 처음에는 연인이고 그 다음은 웬수처럼 느껴지다가 세월이 가면서 친구가 되어간다. 앞으로 다가올 노년에는 아마 인생의 간호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든다”고 정의한다. 남편에 대한 평가와 감정이 인터뷰를 시작할 때와 인터뷰가 끝나 갈 무렵과는 사뭇 다르다. 솔직하고 쿨~한 윤영미의 복잡한 마음일까? 아니면 우리네 중년 여인들이 그렇게 복잡하게 느끼는 것이 남편이란 존재일까?
한량인 이봉규는 아직 더 여인들의 심리를 배워야 할 것 같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윤영미는 멋들어지게 노래를 뽑았다. “삶의 후회는 없고, 최선을 다하고 안 되면 금방 포기한다”는 그녀의 가치관이 노래에 묻어 나온다.
“현경 교수를 인터뷰하시겠습니까?”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순간 멍해졌다. 그녀는 유명인사다. 세계인을 상대로 여성과 환경, 평화를 말한다. 이념의 장벽을 쌓지 않는 종교학자로 180년 역사의 미국 유니언신학대학(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the City of New York, UTS) 아시아계 최초의 여성 종신교수이기도 하다. 고로 1년의 반 이상은 미국 뉴욕에 있으니 지금이 아니면 인터뷰가 어렵다는 뜻이었다. 현경(玄鏡·60). 인생을 두고 영광스러운 자리가 전화 한 통화로 시작됐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대답은 예스! 그렇게 세기의 지성을 만났다. 운명처럼 말이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무슨 일이…
현경 교수를 처음 만난 장소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 주민센터였다. 부암동은 서울 중심에 있지만 고즈넉할 뿐만 아니라 70년대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녀를 만난 지난 6월 30일은 고즈넉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풍악대가 동네를 돌아다니며 풍악을 울리고, 화선지에 먹으로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가 주민센터 앞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이날은 부암동 신축 건물과 관련해 건설업체 예지학과 주민 사이에 경관 훼손 및 조망권 침해와 관련한 공청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무엇보다 신축 건물이 세워진 곳은 현경 교수 집 바로 옆이었다.
“우리 집 위치가 부암동의 자궁이고 바람골이에요. 이렇게 모든 기운을 막는 건물을 지을 거라고는 상상 못했습니다. 이 집의 기운이 매우 좋아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여성학자나 예술가에게 유산으로 이곳을 작업 공간을 남기고 싶었어요. 부암동의 흐름을 완전히 끊는 명백한 ‘건축 테러’라고 생각해요.”
미국에서 주로 생활하는 현경 교수는 공사 진행상황에 대해 잘 몰랐다고 한다. 여름방학에 집에 돌아왔다가 사태에 직면하게 된 것. 방학 동안에도 강연활동에, 신학자로서 설교, 설법하는 시간도 모자란데 이날만큼은 부암동 주민으로서 분주하게 뛰어야만 했다.
일반인은 이해 못 할 ‘기독교불자’
그녀의 이력을 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기독교불자’라는 말이다. 평범한 지식으로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물과 기름 같은 종교를 합친 말이 특이했다. 일반적인 사고로 이해할 수 없는 경지라 조심스럽기까지 했다.
“난 기독교불자예요. 기독교신학자이고 목사 안수과정을 다 끝냈어요. 불교 법사도 받았죠. 이제 나는 종교의 틀과 이름을 벗어난 거 같아요. 교회에서 설교 할 때는 기독교신학자로, 불교 수양회를 할 때는 불교 법사로서 얘기하죠.”
기독교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편하지 않을 것 같다며 우려 섞인 얘기를 건넸더니 그건 그들의 문제일 뿐이라고 답했다.
“사실 진보적인 교회도 내 입장을 받아드리기 어렵죠. 내가 불교 법사가 됐으니까요. 그런데 종교 간의 대화는 열린 기독교에서 얼마든지 받아드릴 수 있어요. 21세기는 종교의 틀을 벗어나야한다고 생각해요. 종교가 아니고 영성입니다. 여성운동 관점에서 보면 현대의 모든 고등 종교는 가부장적입니다. 종교에서 지혜와 전통은 배우고 가부장적인 고루한 전통은 이제 버려야 해요. 그래야 종교도 진화가 되죠. 종교가 강물이라면 강 밑에 도도히 흐르는 지하수가 영성이라고 생각해요.”
현경 교수는 현재 종신교수로 있는 미국 뉴욕 유니언신학대학에서 '아시아여성 해방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에서 아시아 여성의 영성문제를 제기하고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위주 신학을 비판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여성의 시선에서 종교와 사회를 바라보고 활동하며 자신 있는 여성의 삶을 말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녀의 종교 철학에는 ‘여신’이라는 표현이 쓰인다.
“나는 ‘여신’이라는 존재 혹은 기호를 만들어서 여성의 내적 지혜 혹은 신성에 관해 설명합니다. 여성이 너무 낮게 살지 말고 스스로 여신으로 살자는 의미죠, 여자들이 자기를 찾고 싶은데 뭔가 좀 당당하면 “나쁜 여자다”, “마녀가 좋다” 혹은 “공주다”, “아줌마다”라 말하면서 세상이 단정 지어 버리잖아요. 그런데 우린 다 여신이에요. 가장 깊은 신성과 우주가 우리 안에 들어와 있어요. 뭐 유치하게 남자와 동등함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잖아요, 30대는 조금 힘들어요. 그런데 40대가 되면 조금 바라보는 시선이며 생각이 나아지죠. 그런 면에서 나는 여자가 40, 50대가 굉장히 예쁜 거 같아요. 60대도 예쁘잖아요?“
여성으로서 환경과 평화를 이야기하다
현경 교수는 종교학자, 교수라는 직업 이외에 여성으로서 환경과 평화에 대한 문제에 대해 실천하고 움직이는 사람이다. 우선 그녀가 말하는 에코페미니즘, 환경 여성해방운동은 무엇인가.
“환경과 자연해방, 환경의 문제와 여성문제가 근본적으로 철학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보는 거죠. 자연해방과 여성해방이 같이 가야 한다는 거죠. 에코페미니즘은 1974년 프랑스의 여성 철학자 프랑스와즈 드본느(Francoise d’Eaubonne·1920~2005)가 만들어낸 말이에요. 환경운동과 여성운동을 합쳐서 만든 말이에요. 나는 ‘살림이스트’란 말을 만들었어요. ‘살림살이’라는 뜻도 있고 자신과 타인, 지구를 살리는 일도 ‘살림’입니다. 내 안의 신성을 돌보고 내 이웃, 사회, 지구 전체 등 주변의 생명체들을 돌보는 게 바로 ‘살림’이죠. 공격과 충돌이 아니라, 상생과 대화를 믿는 게 바로 ‘살림이스트’, 한살림운동이나 여성 환경운동연대가 다 에코페미니스트고 살림이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름과 겨울방학 때 현경 교수는 주로 여성· 환경· 평화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많은 일을 한다. “2015년에는 전 세계 노벨평화상 받은 여성평화운동가 30명과 함께 평양에서 경의선 육로를 통해 한국으로 걸어왔던 ‘위민크로스 DMZ(Women Cross DMZ)’ 걷기행사를 했어요. 그 전에는 달라이 라마(達賴喇嘛), 아크비숍 데스몬드 투투(Archbishop Desmond Tutu) 등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과 20년 동안 전 세계 분쟁지역을 다니면서 평화의 다리를 놓는 일을 했어요. 멕시코의 치아파스, 북아일랜드, 캄보디아, 남한과 북한,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등 여러 분쟁지역을 다니면서 어떻게 하면 서로 평화를 만들 수 있을까 같이 나누는 일을 주로 했어요.”
편견을 이겨내는 삶
이렇게 활달하고 시원하고 생각을 표출하는데 스스럼없는 현경 교수지만 많은 편견을 이겨내고 살았다. 1989년부터 7년간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할 당시 그녀의 교수실에는 전 세계를 돌면서 수집한 여신상이 방 한가득 꾸미고 있었다. 그 방에서 학생들과 쌓은 추억을 되살리며 황홀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도 종교적 입장이나 반제도적 성향으로 비춰졌던 자신의 행동 때문에 학교와 마찰은 피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현경 교수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버텼다.
“세 가지 방법이 있어요. 첫째, 완전히 깎으면서 도가 트는 방법. 두 번째, 아예 안 깎고 내 멋대로 사는 방법, 그리고 세 번째는 그냥 욕먹어가면서 적당히 사는 거예요. 대신 욕먹을 때 상처받지 말아야죠. 그냥 저들은 나를 오해할 권리가 있고 나는 해명할 의무가 없다고 말이에요. 그냥 그들의 생각이고 나는 내 생각이고 이렇게 생각하면 편해요.”
모든 게 좋아 보이는 뉴욕 생활도 사실은 만만치는 않다고 했다.
“아무래도 뉴욕의 백인 학교에서 교수를 한다는 건 인종차별주의라든가 백인들의 문화적인 제국주의와 부딪히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든지 잘 싸워가면서 살아가는 거죠. 자기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맷집이 키우는 거라고 생각해요. 맞게 되면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 맞는 거구나. 단 상처 받지는 말아야죠, 그렇다고 매를 맞지 않기 위해서 내 말을 안 할 수 없잖아요? 내 목소리를 내면서 매를 안 맞으면 제일 좋겠지만, 매를 맞게 되면 기꺼이 맞고 또 확 풀고 살아요.”
현경 교수가 처음으로 사람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영성과 종교적 관념을 얘기하는 그녀와는 또 다른 이미지였다. 이에 현경 교수는 “당연히! 안 그러면 어떻게 살아남았겠냐”며 교수가 되고 박사가 되는데 수석으로 들어가 수석으로 나왔기에 맷집도 필요했고 패기도 필요했다고 말했다.
한국애서 현경은 ‘빡’세게 살아야 했다
그녀의 경력을 보면 그 누가 봐도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았네’라고 생각할 것이다. 수학의 전 과정을 수석으로 들어가 마쳤다는 그녀가 좀 얄밉게도 느껴졌다.
“난 공부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원래의 꿈은 예술가였다. 미술이건 무용이건 연극이건. 그런데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어요. 매번 꼴찌만 했는데 생존 때문에 공부 열심히 했죠. 학교도 못 가게 생겼더라고요. 그래서 하루에 4시간만 자고 공부했어요. 전액장학금 받으려고. 그래서 내가 중학교 때부터 박사학위 받을 때까지 학비를 한 번도 내 본 적이 없게 된 거예요. 대학을 들어가선 학생운동을 만났고 그땐 그럴 수밖에 없던 시절이니까. 인문계열로 들어가서 하고 싶은 공부 다 하고 3학년 때 신학전공하고, 철학를 부전공했으니 철학적 신학을 공부한 거죠.”
뉴욕에서의 삶, 교수, 학자 그리고 탱고
그래도 종신교수로서의 삶은 행복하다. 죽을 때까지 가르칠 수 있고 세계에서 모인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자체만으로도 좋다.
“제가 가르치는 것이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 아침의 불교 명상, 신비주의와 현명의 영성, 에코 페미니즘과 지구 영성, 종교와 평화 등입니다. 내 과목이 재미있는 것은 내가 그냥 교수가 아니더라도 일생동안 그 분야에 관련한 책을 보면서 살고 싶어요. 근데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가르치면서 그걸로 돈을 버니까 너무 괜찮은 거죠. 그리고 뉴욕에서 저는 끊임없이 공부해요. 미술사를 공부하고, 문학 클럽에 들어가서 한 달에 한 번씩 세계고전을 계속 읽고 아르헨티나의 탱고를 배워요. 너무 예뻐요, 정기적으로 배우러 다녀요. 내가 즐겁자고 하는 거죠.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갔을 때 완전히 반해서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늙은 여자가 추기에 딱 예쁜 춤이 탱고인 거 같아요. 젊은 여자들은 잘 이해 못할 거 같아요.”
뉴욕의 삶이 너무 빡빡해 보였다. 쉼 없이 가르치고 공부하고 또 뭔가를 배우는 바쁜 삶의 연속 같았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정말 열심히 일하죠. 새벽에 일어나서 명상하고 학생들 가르치고요 그런데 금요일 오후부터는 모든 걸 닫아요. 인터넷도 안 해요. 그리고 주로 자연에서 시간을 보내요. 등산을 한다든지, 운동은 한다든지, 바다에 간다든지 일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자연 속에서 많이 쉬려고 해요.”
‘졸혼’ 그녀, 몇 살이 됐건 연애하고 살아야지
현경 교수의 결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무척이나 사랑했던 사람과 결혼해 10년을 살았고 이혼이 아닌 ‘졸혼(卒婚)을 했다.
“서울대 학생이었는데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하던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에 대해 표현하라면 그 당시에는 예수와, 체 게바라, 안드레아 보첼리를 섞어 흔든 사람이었다고 말해요. 7년 동안 연애를 하고 결혼했고 10년을 살았어요. 학생운동을 하다가 둘 다 납치되고 고문당했는데 저와 남편은 심리적으로 굉장한 트라우마를 받았고, 나는 그 경험으로 완전히 전사가 돼 나왔어요. 고문 없는 세상, 독재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남편은 그러지 못 했어요 그러면서 남편은 강성인 사회운동가에서 말도 못하게 보수적인 기독교 목사가 됐어요. 많이 사랑하지만 도저히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 결혼한 지 10년 만에 정리를 했죠. 아이도 낳을 수 없었어요. 서로 조율이 안 되는 상황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어요, 나는 이렇게 기도를 해요. 내가 그 사람을 열여덟 살에 만났는데 어린 시절 내 영혼과 내 모든 것을 다 바쳤던 애인이자, 친구이자 동지였던 그런 사람이랑 젊은 여성이 할 수 있는 가장 열렬한 연애를 했던 거 같아요. 첫사랑이었어요. 그래서 결혼할 수 있게 해줬던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이후 결혼을 졸업했어요. ‘졸혼’을 했어요. 결혼은 인생에 있어서 한 번으로 족한 거 같아요. 세계는 넓고 남자는 많다. 그래서 세계의 아름다운 남자들과 연애를 하면서 살았죠.”
문득 30대 때 현경 교수가 궁금해졌다. 여전사로 느껴지고 혼자 인생을 짊어진 것 같은 느낌이지만 쉽지 않은 삶은 아니었을까?
“그 나이 때 이 세상 욕은 다 먹고 살았어요. 마녀다, 이단이다 온갖 얘기 다 듣고 살았죠. 이혼했기 때문에 이혼녀 주홍글씨도 달고, 이혼했으면 불행해야 하고 어디 구석에 숨어서 죄인처럼 살아야 하는데 불행하지도 않고 더 예뻐지고 연애하고 결혼도 안하고 말이죠. 많은 사람들이 칼을 던졌어요. 그런데 자기가 행복한 사람은 ‘칼’을 안 던지고 잘하고 있다고 말해 줬고, 무척 부러워했어요, 자기가 불행한 사람은 나를 너무 미워했죠. 온갖 욕을 하면서. 결국은 맷집을 기르는 수밖에 없죠(웃음).
저는 이제 0살입니다. 120까지 살 거예요
아직도 현경 교수에 대해 어렵게 느낄지 모를 독자에게 한 말씀 부탁했다. 그녀가 아무리 괴짜 같아도 우리 독자들과 동시대를 살아 온 친구이자 연인이지 않은가.
“나는 지난 60년을 나한테 가장 진실한 것이 무엇인가, 그 목소리를 따라서 파란만장하게 살아왔어요. 산전수전, 공중전, 핵전쟁까지 겪었어요. 한국에서 60이 돼서 환갑이 된다는 것은 육십갑자가 끝나는 거잖아요? 근데 나는 전생이 끝난 사람입니다. 이제부터 살아야 하는 60년은 제 삶이 컴퓨터 프로그램이라면 완전히 새롭게 리셋 했어요. ‘0세’이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삶은 치유자, 치유적 예술가 그리고 영적 안내자로 살아가고 싶어요. 여태까지 그걸 준비하는 과정이었죠. 지난 3~4년 동안 독일에서 자아초월심리학을 배웠고 행할 수 있는 자격도 얻었어요. 이제 더 많은 시간을 종교, 영성, 예술, 사회운동, 치유, 이런 걸 다 종합해서 내 내면의 문제와 사회변혁이 분리되지 않는 예술 그리고 영성이 분리되지 않는 개인적인 치유와 사회적인 치유가 분지되지 않는 그런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싶습니다. 그 에너지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하면서 앞으로 60년을 살고 싶어요. 하늘이 허락하는 한 120세까지 살고 싶어요.”
그녀와의 시간은 어려우면서도 낭만적이었다. 사실 ‘어디서부터 어떻게’라는 생각에 조급했고 이 방대한 얘기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고민했다. 사실 그녀와 한 이야기는 인터뷰에 써놓은 것보다 더 오묘하고 깊다. 인터뷰라기보다 돈 주고도 못 사는 가르침의 시간이었다. 가을로 접어든 뉴욕의 어딘가에서 멋진 남자와 탱고를 추고 있는 그녀를 생각하며…
표도로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1821~81)는 러시아 모스크바 근교 빈민구제병원 관사에서 7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3세 때 기숙학교에 다녔고 이후 상트 페테르부르크 공병사관학교를 다녔고, 16세 때 어머니가 사망하였으며, 18세 때 폭군이나 다름없었던 아버지는 농노들에 의해서 살해당했다.
1847년 28세 때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페트라셰프시키 집에서 매주 한번씩 모이는 문학모임에 참가하여 문학 철학 정치 등 광범위한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벌이다 비밀서클조직 가담 죄로 체포되고 조사를 마치고 4달 후 총살을 받기 위해 처형장에 끌려나왔다. 그러나 황제의 특명으로 목숨만은 건졌으나 시베리아 옴스크로 유배되어 4년 동안 강제노역을 당하게 되는데, 니콜라이 1세가 국가전복 기도를 방지하려는 차원에서 기획된 사건으로 추정된다.
그는 석방된 후 4년간 국경수비대 사병으로 일했고, 이 무렵 하급관리의 미망인 「마리아 드미트리 예브나이사예바」를 만나 결혼하였으나 그녀와는 폐결핵으로 사별하고, 그 후 대학생 「아폴리나리야 수슬로바」를 만나 사랑에 빠져 함께 유럽여행과 룰렛 도박 등을 즐기지만 수슬로바와 헤어진 후 돈이 필요한 나머지 악덕출판업자를 만나 불공정계약(1개월에 소설 1권을 못쓸 경우 모든 판권을 넘긴다)을 체결하였다가, 계약을 지키기 위해 20세의 속기타이프 ‘안나 스니트키나’를 고용하게 되는데 곧 정이 들어 부부가 된다. 그는 ‘안나’의 헌신적 내조에 힘입어 죽을 때까지 큰 정신적 위안을 받는데, 소설 속의 ‘소냐’는 부인 ‘안나’를 닮았다.
도스토옙스키는 보잘 것 없는 외모에 36세 무렵부터 간질병을 앓았고 도박의 광이기도 하였다. 친형 미하일이 창간한 월간지 「브레미아(Vremya) 시대」의 전속 작가로써 글을 쓰면서 법정사건을 탐색해나가다가, 살인을 하고도 뉘우침이 없고 오히려 성취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감방에서 문학 정치 종교 등에 관심을 보인 시인 「라스네르」라는 범죄자에 주목한다. 그는 시베리아 유배생활 속에서 이 범죄자로부터 영감을 받아 「죄와 벌」을 구상하게 되었다 한다.
소냐의 선(善)을 통해 라스콜리니코프의 악(惡)을 회개하게 만들다
「죄와 벌」은 1866년, 도스토옙스키의 나이 45세에 쓰여졌다. 소설의 주인공 「지온 로마노비치 라스콜리니코프」는 가정교사 일을 하는 젊은이였으나 그 일을 그만두고 집안에 머무르면서 무료함으로 미칠 것 같은 느낌을 받고 한 주점에서 술을 마시다 비관적 성격의 '마르멜라도프' 라는 사람을 만난다. 그는 관리였으나 해고된 후 지인에게 고용되어 일을 하나 월급을 털어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의 딸 '소냐' 는 스스로 창녀가 되어 집안 생계를 꾸려간다. 라스콜리니코프가 그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허름한 사글세방에서 부인 카테리나는 폐병을 앓고 있었다. 마르멜라도프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월급을 어디에 썼느냐’며 처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욕설을 퍼붓는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그 집을 나와 생각에 잠긴다. 전부터 수전노에다 인간적으로 형편없는 돈 많은 전당포 노파 ‘알료나 이바노브나’를 죽이고 그 재산으로 좋은 일에 쓰자는 생각을 해왔는데 이를 실행에 옮기기로 한 것이다. 돈만 밝히는 그녀는 돈이 많아도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돈을 모았고, 리자베타라는 동생이 있는데 착하지만 순하고 겁 많은 그녀를 하인 부리듯 부려먹으면서도 유언서에는 동생의 몫이 없었다. 세상에 해만 까치고 도움될 일이 없는 악독한 노파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리자베타가 집을 비운 사이 전당포를 찾아가 물건을 저당 잡히는 척하며 노파가 방심하는 사이 도끼로 노파를 죽인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때 리자베타가 들어오며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되자 함께 살해해버린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나 그 후 웬일인지 열병에 시달린다. 한편, 어머니가 보낸 편지에서 동생 '두냐'가 돈 많은 관리(표트르 페트로비치 루진)에게 시집가게 되었다는 글을 읽고 격분한다. 얼마 후 그 루진이 라스콜리니코프를 찾아오는데 돈 많은걸 이용해서 가난한 처자를 묶어두려는 속셈으로 판단하여 싸늘하게 대하자 화를 내며 떠나간다. 루진과의 약혼을 위해 페테르부르크를 찾은 어머니와 두냐는 열병을 앓는 라스콜리니코프를 간호하고, 라스콜리니코프와 루진의 다툼을 알고서 화해시키려고 같은 자리에 모이게 한다. 하지만 둘은 화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루진은 마치 결혼을 적선이라도 하듯이 거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를 보인다. 이에 어머니와 두냐도 화를 내고 그를 쫓아버린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라고 여겼지만 엉뚱하게도 루진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또 다른 일을 벌인다.
이후 라스콜리니코프는 이상한 행동을 하며 자기 범행을 농담식으로 수사중인 사람들에게 떠벌린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가 잠시 미쳤을 뿐이라 여기며 수사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포르피리라는 영리한 예심판사는 그를 의심하고 집요하게 수사를 한다. 사건은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엉뚱한 사람이 체포되어 조사를 당하고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를 자백한다. 그럼에도 포르피리는 집요하게 라스콜리니코프를 의심하며 그를 떠보고, 라스콜리니코프는 아닌 체 하지만 불안한 마음에 휩싸인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길거리를 배회하다가 어떤 사람이 마차에 치이는 광경을 목격하고 다가가보니 예전 주점에서 만난 마르멜라도프라는 사실을 알고 황급히 집으로 데려다주지만 그는 숨을 거둔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이 가진 돈을 모두 그의 장례비용으로 내놓는데, 그 후 마르멜라도프의 딸 '소냐' 가 찾아와 아버지의 죽음으로 집안에 닥친 불행에 도움을 준 라스콜리니코프의 은혜에 감사하며, 추도식을 할 것이니 찾아와달라고 부탁을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라스콜리니코프의 불안은 점점 심해지고 그러던 어느 날 죽은 마르멜라도프의 장녀이자 창녀인 '소냐' 를 찾아간다.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녀에게 동정심을 품는다. 그러면서 창녀인 그녀가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것을 알고 어떻게 저런 고귀한 품성을 지닐 수 있는지 의심하면서 이런저런 악한 말로 그녀를 괴롭힌다. 무신론자인 그는 소냐의 신앙마저 괴롭히는데 그녀는 그의 이해할 수 없는 공격에 괴로워하지만 올곧은 마음은 오히려 라스콜리니코프를 괴롭게 한다. 그러다 그는 소냐에게 자신이 노파와 리자베타를 죽인 사실을 고백한다. 리자베타와 친했던 소냐는 충격을 받으며 그를 원망하면서도 죄인 라스콜리니코프를 위해 기도를 하고 그를 위해서라면 어디든 따라 가겠다고 말하지만 그는 거절한다.
포르피리의 수사는 집요해서 드디어 혐의를 굳히고 최후의 협박을 한다. "이미 진상이 파악됐으니 2일안에 당신을 체포하겠다. 그전에 마음의 준비를 하라"라는 내용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때가 됐음을 알고 정리를 한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결국 소냐에게 향하고, 자신의 죄를 알게 된 소냐에게 자수하러 간다고 말을 한다. 소냐는 죄를 씻기 위해서라도 빨리 자수를 해야 하며, 자신은 그를 위해 어디든 따라가겠다는 이야기를 한다. 결국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자수를 하고, 포르피리는 그를 위해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는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여러 사람이 도와줘서 매우 유리한 재판을 받고 8년이라는 형벌로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고 소냐는 그를 따라간다.
「죄와 벌」은 인간의 신념을 심판하고 있다 '
흔히들 『죄와 벌』은 인간의 죄의식을 탐구한 소설이라는 말들을 한다. 그리고 선과 악의 2분법으로 소설의 모든 내용을 재단하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죄의식을 탐구한 소설이라기보다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죄가 아닌가를 묻는 인간의 신념을 생각하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살인을 하고도 죄의식을 갖지 않는 신념,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졌고 종교적 신념이 강하지만 가정형편상 창녀생활을 통해 삶을 꾸려가는 소냐의 신념, 두냐의 약혼자였던 루진이 돈의 위력을 앞세워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신념, 마르멜라도프의 추도식이 끝난 후 만찬을 여는 처 카테리나의 과시욕에 대한 신념, 장발장의 죄를 밝히기 위해 추적을 멈추지 안했던 자베르 경감처럼 라스콜리니코프의 죄를 의심하고 끝까지 수사를 한 포르피리의 신념 등이 그것이다.
누구나 나름대로 옳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간다. 신념을 갖지 못했다면 ‘남이 시장 가는데 시장갈 일이 없으면서 장바구니 매고 시장을 가는 인생’을 사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도 나름대로 자기 신념을 따라 시간적 공간적 상황에 맞춰 살아간다. 도스토옙스키에게 비밀서클조직 가담을 한 죄를 씌워 시베리아 유배를 보낸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신념이나 도스토옙스키가 수많은 좌절 방황 속에서도 「죄와 벌」을 완성시킨 신념 등도 같은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올바른 신념을 가진 것인지 아니면 상대적으로 올바른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인지 그것을 판단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수많은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의 대립, 기독교과 이슬람 종교 등의 대립,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신대륙 인디언들에 대한 몰살 등은 물론이고, 같은 나라에서도 종교 정치 경제 과학 문화 학문 환경 지역 체육 학교 등 갈등의 모순, 그리고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떠드는 종교적 믿음을 빙자한 협박 등도 같은 것이다.
올바른 것과 상대적으로 올바른 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절대적 올바른 것을 알면 그 신념에 따라 살아가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것을 모르면 상대적 올바름이 절대의 것이나 되는 것처럼 잘못된 신념을 갖게 되어 그 눈 밖의 존재는 있어서는 아니 되는 존재로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빨간색 안경을 끼고 보면 세상이 온통 빨갛게 보이고 파란색 안경을 끼고 보면 세상이 온통 파랗게 보이는데, 절대 올바름을 모르면 지금까지 인류가 생각하고 살아왔던 것처럼 미래도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실 「죄와 벌」에서는 라스콜리니코프가 2명의 살인을 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동안 인류는 자신의 생각(사고, 사상, 종교, 신념, 이념 등)만 옳다고 생각한 나머지 수많은 사람을 집단적으로 학살해왔고 지금도 그것을 멈추지 않고 지금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평소 빨간색 안경이나 파란색 안경이나 노란색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지금까지 인류가 살아온 삶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지만, 색채와 형태가 없는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이나 만물이 있는 그대로 보인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 보면 만물이 없어서는 아니 되는 존재가 되고 색채와 형태를 가진 눈으로 보면 만물은 편 가름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것을 천성(天性)과 지성(地性)의 시각으로 설명을 한다. 지성이나 지성을 닮은 사고는 색채와 형태를 갖기 때문에 상대성을 가져 편 가름을 할 수 밖에 없고 천성이나 천성을 닮은 사고는 색채와 형태가 없기 때문에 절대성을 가져 편 가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인성(人性)이나 인성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인성교육을 시킬 것인지 정확하게 성찰할 수 있는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을 찾기 어렵다. 천성과 지성의 차이를 모르고 인성을 가르치면 또 다른 색채와 형태로 편 가름하는 사람 또는 편 가름하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에 불과하다. 인성교육은 사람이 사람다운 인생을 살아가도록 만드는데 있다. 그렇게 교육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죄와 벌」을 통해 교훈을 얻었으면 한다.
밤새 내리던 비가 개었다. 잠에서 깨어 밖을 보니 하늘은 맑고 해가 중천에 떠 있다. 부모님은 일찍부터 들에 나가셨는지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책 보자기를 들고 학교로 냅다. 동 뛰었다. 동네 입구를 막 빠져나가는데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선범아! 어디 가니?” 논에서 줄을 지어 모내기하던 사람 중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다. “예, 학교 가요.” “오늘 일요일인데 무슨 학교에 가니?” 그랬다. 오늘이 일요일인데 늦잠을 자다가 보니 깜박 잊고 학교가 늦었다고 생각에 빠른 발걸음을 하고 있었다.
필자는 전북 정읍군 신태인읍 신용리 장교부락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농사라야 논 1,200평 정도, 밭이 300평 정도밖에 되지 않은 가난한 집안이었다. 소득이 변변치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웰빙 식품이라고 할 수 있는 시래기밥, 콩나물밥, 무밥, 꽁보리밥 등으로 식사하거나 고구마, 감자 등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영화에서 통구이 굽는 장면을 보고 고기를 실컷 먹어보았으면 하는 마음을 갖기도 하였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아버지는 서울에서 기반을 잡겠다며 올라갔다. 이후 남겨진 농사는 어머니의 몫이었다. 장남이었던 필자도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농사일을 거들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150여 평 되는 하천가 논은 품을 사지 않고 어머니와 필자가 직접 모내기를 하곤 하였는데, 중학생의 눈으로 보기에 넓기만 하였다. 다리에 행정을 두르고 모를 심는다고 엎드리면 허리가 너무 아팠고, 행정을 두른 다리에 수많은 거머리가 달려드는데 묶은 끈 사이를 파고들었다. 거머리를 때어보면 피가 한 대롱 맺혀 있는데, 이내 피는 종아리를 타고 줄줄 흐른다. 물린 곳은 여간 가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나는 앞으로 절대 농사는 짓고 살지 않겠다’고 되네 곤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돌연 서울에 올라간 아버지가 흑석동 성모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으셨다는 연락이 왔다. 아버지는 당시 동작동국립묘지에 다녔던 넷째 숙부 집에서 숙식하면서 고무신 노점상을 하였는데, 장사를 마치고 나면 반겨줄 사람도 없고 해서 강술을 많이 마시다 보니 위가 약해져 복막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 병원비가 28만 원(7년 후 공무원에 들어가 받은 첫 월급이 2만 원 수준)이나 되었는데, 필자 집에 그 많은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형제들을 포함하여 마을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돈을 빌리려고 하였으나 누구도 도움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의 형제는 6남 2녀였고 아버지의 둘째 형님은 80여 마지기(16,000평)나 되는 농사를 지었는데도 고개를 돌렸다. 부득이 어머니는 친정으로 눈을 돌려 4자매 중 가장 친근감이 있는 셋째 이모님 댁을 찾아가 하소연했고, 이모부님으로부터 3푼 이자로 돈을 빌려 병원비를 지급하였다. 그 돈은 필자가 공무원을 하면서까지 갚아야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수명이 너무 짧았다. 아버지는 수술받은 이후 건강을 회복하는 듯했으나 그후 7년여 기간 이름 모를 병으로 고생하시다 1984년 54세의 나이로 저세상으로 갔고, 어머니도 그후 5~6년 동안 당뇨병으로 고생하다 합병증이 악화하여 2000년 67세의 나이로 죽었다.
부모가 모두 신병으로 오랫동안 병석에 있었으나 가진 재산이 없어 치료 하나 제대로 받지 못하고 돌아간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부모 이야기만 나오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필자는 부모를 잃고 고아 신세가 되었으나 이후 차츰 재정상태가 나아졌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4남 2녀의 장남으로서 돌아간 부모를 대신하여 동생들을 뒤치다꺼리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런 처지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대학 같은 건 생각도 못 하고 고된 농사일만 계속했다.
그러나 지난한 고통에 돌파구가 생겼다. 하루는 집에 사촌 형이 찾아와 “공무원시험 보기 위해 응시원서를 접수하러 간다”며 “너 시험 한번 보지 않을래” 하고 물어온 것이었다. 그 소리가 너무 반가워 따라가 함께 원서를 내고 시험을 봤다. 그리고 운 좋게 필자만 합격하고 형은 낙방하였다. 사촌 형은 3년 후 필자가 서울 관악노동사무소에 근무할 때 가리봉동 한일합섬 부근에서 자취하였는데, 그때 함께 생활하며 필자가 수학을 가르쳐준 이후 서울시 공무원에 합격하였다.
공무원으로서 첫 발령은 노동청(현 고용노동부)으로 났다. 시골에 사는 필자로서는 사실 그곳이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 또한 당시 시골에서 동사무소나 우체국에서 근무하려면 돈을 써야 하는데 필자가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였다는 말에 20만 원을 벌었다느니 50만 원 벌었다느니 하는 소리가 나왔다.
시험에 합격한 이후 어디 가도 자연스럽게 필자의 이야기가 화두에 올랐는데, 우연히 옆에서 필자의 이야기를 들은 처음 보는 노인장 한 사람이 “참 좋은 직장에 취직이 되었네”하고 말하였다. 그 말에 노인장에게 “할아버지 노동청에 대하여 잘 아셔요. 왜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고 하는 거예요”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남을 도와주려면 자기 돈을 써서 도와주어야 하는데 그곳에서 봉급을 받으면서 남을 도와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오히려 반문하였다. 그 말에 감명을 받아 공직 생활을 퇴직할 때까지 이를 새기고 일했다.
노동청에서의 첫 근무지는 부산 동래온천장에 있는 한독직업훈련원(발령일 74년 11월 11일)이었다. 한독직업훈련원은 진학을 못 하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정부가 무료 직업훈련을 시키고 취업을 시켜주는 곳이었다. 그런데 같이 근무하던 선배 한 사람이 지방 관서에 근무하다가 훈련원으로 발령을 받은 것에 대하여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중에 필자가 지 방관서 발령을 받은 이후 그 사정을 알게 되었는데 당시 공직사회는 급여 수준이 낮아서인지 알 수 없으나 금품 수수가 일상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가욋돈이 없는 곳에 발령받으면 좌천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상납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가진 재산도 없고, 다른 사람처럼 상납이나 술대접도 잘 못 하고, 배경도 없었던 필자는 공직 생활하는 동안 그만큼 마음고생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고향마저 전라여서 그 고통은 더 컸다.
필자는 한독직업련원에서 일하다 지방 관서로 이동했다. 지방관서에서는 주로 산재보험 징수 및 보상 업무를 담당하였고, 25세가 되던 해부터 대부분 근로감독관으로 근무하였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노사분규가 많이 발생하였는데, 6.29선언 이후 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그때 분규는 너무도 거칠어 근로감독관들이 분규 현장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경험이나 지식이
짦았음에도 책임감 때문인지, 젊은 혈기 때문인지 분규 사업장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양쪽 이야기를 듣고 완화해보려고 노력하였고 뜻밖에 성과도 많았다.
그때 느꼈던 것은 사용자의 말을 들으면 사용자의 말이 옳고 근로자의 말을 들으면 근로자의 말이 옳다는 것이었다. 분규를 해소하려면 누가 잘못했는지 짚어내고 잘못한 쪽이여금 고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나중에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이러한 갈등은 노사분규 현장만이 아니라 정치ㆍ경제ㆍ과학ㆍ문화ㆍ예술 등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음을 알았다.
필자의 공직 생활은 경제개발과 민주화라는 엄청난 국가적 정치적 변환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국가적으로 보면 78ㆍ87ㆍ97ㆍ2008년 등 10년 터울로 변화했다. 우선 1978년 이후 YH사건, 부마항쟁, 박정희 대통령 서거, 5.18광주민화운동이 연달아 발생하다. 87년에는 6.29선언 이후 공권력 약화에 따라 노사분규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97년에는 대통령 출마자 세 사람이 각서를 쓰고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고 구조조정을 하는 과정에서 150만~200만 명의 근로자가 실직하는 대량실업사태가 발생하였다. 그 후 2007년이 되면 다시 미국에서 리먼 브러더스 사건이 터지고 그 파장이 세계 경제에 미치면서 한국도 2008년에 또다시 대량실업 사태가 발생하였다. 41년 7개월이라는 근무 기간 9명의 대통령(정부)이 바뀌고, 그때마다 추구하는 노선이 다르고 정책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사건, 사고가 터질 때마다 여기 맞춰 일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힘든 삶이었다.
공직 생활을 하기 이전부터 느꼈던 아버지 형제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의 상식에 맞지 않는 모습과 공직 생활 동안 직장에서의 편견, 편향, 편애, 편파 등의 모순, 노사관계를 지도할 때 느꼈던 무력감,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과 그 무렵에 읽었던 책 등의 영향으로 필자는 정신세계 공부에 심취하였다. 1984년 무렵부터 서울 시내 큰 서점에서 종교, 사상, 철학, 역사, 역학 등 잡다한 서적을 사 닥치는 대로 읽었고, 다양한 단체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책을 읽고 명상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항상 생각한 것은 ‘진리라면 무엇을 공부하든 반드시 일맥상통한 것 즉 보편 당성이 있는 것이 있을 터인데 그것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러던 차 성철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을 듣고 그 의미를 알기 위해 스님들이 쓴 화두 관련 책을 집중으로 읽고 명상을 거듭하다 성(性)에 대한 의미를 깨닫고 비로소 세상에 대한 모든 의문을 풀어낼 수 있었다.
94년에 그것을 정리하여 ‘진과 사(眞과 邪)’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그러나 ‘세계에는 수많은 석학이 있고 평생 몸을 받친 종교인들도 많은데 필자가 아는 것을 왜 그들은 깨닫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혹시 허상이나 망상을 본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어 다시 20여 년 동안 깨달은 내용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노사지도에 적용해보고, 한국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관찰해보고, 직장 생활에 활용해보고, 각종 고전 등도 다시 읽다. 그 결과 필자의 깨달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2015년 천성(天性)과 지성(地性)의 원리로써 풀어낸 ‘새로운 경세학을 말하다’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논어 위정편 제4장에 오십유오이지우학(吾十有五而志于學) 삽십이입(三十而立)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 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 칠십이종심소욕(七十而從心所欲) 불유구(不踰矩)라고 하였는데 필자도 이순의 나이이다. 황하의 신이 바다를 보고 할 말을 잊는다고 하는데 고용노동부라는 우물을 벗어나 넓은 세계를 알기 위하여 20여 년 전에 했던 방황을 다시 하고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하기 위하여 태어났는지, 어떻게 살아야 올바로 살아가는지를 모르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필자의 깨달음을 전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는 허벅지’(바다출판사)는 일본의 여성 수필가, 소설가인 다나베 세이코 (田邊聖子)라는 사람이 쓴 책이다. 1928년생이니 89세 고령이다. 남녀의 습성과 차이에 대해 집요한 통찰력을 보이며 폭 넓은 지성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내는 데 뛰어난 솜씨를 보이는 작가라고 한다. 1971년부터 90년까지 20년간 ‘주간 문춘(週刊 文春)’에 고정적으로 에세이를 올렸다고 한다,
‘여자는 허벅지’는 1977년까지 쓴 에세이 중에서 본문 에세이 중의 하나인데 얼핏 포르노 영화 제목처럼 들리지만 실제 내용은 그렇게 야하지는 않다. 이 책은 저자가 남자와 둘이 술 마시며 대화하는 형식을 취했는데 남자들 얘기가 많다. 그래서 여성 독자 팬들이 많은 모양이다. 대화 남 에게 “처음 여자를 알게 되었을 때 가장 깜짝 놀랐던 게 뭐냐”고 물어서 얻어낸 답이 “여자의 허벅지가 이렇게 굵은 것이구나. 처음엔 깜짝 놀랐습니다. 굵고 하얗더라고요”라는 얘기가 나온다. 이 남자는 간을 상해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간호원들의 스커트를 볼 수 있어서 좋다며 너스레를 떤다.
요즘엔 심각하고 진지한 책보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에 손이 간다. 그렇다고 너무 가벼운 내용의 책은 읽고 나면 남는 게 없거나 아까운 시간만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책 표지 디자인도 좀 야해 보이며 가벼운 음담패설 수준으로 유쾌하게 썼기 때문에 품격도 있고 재미있다.
사춘기 때 남자들은 여자에 대해 호기심이 많다. 이슬만 먹고 사는 줄 안다. 그러나 이 책은 필자가 본 책 중에 가장 솔직하게 여자들의 이면을 노출했다. 사실 여자를 제대로 알고 나면 별 거 아니라는 것이다.
여자들이 목욕탕에 갔을 때 하는 이야기와 처녀, 현역, 노인 여자가 목욕탕에서 보이는 습성 등 남자들이 궁금해 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들어 있다.
남자들에 대한 여자들의 생각도 솔직하게 풀었다. 저자가 태평양전쟁을 겪은 사람이라 남자들이란 전쟁에 나가서 목숨을 바치는 존재로 속물인 여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남녀가 유별하던 시절이었으니 제복을 입은 남학생의 손길만 스쳐도 자궁 밑이 빠지는 느낌이었단다.
남녀의 차이에 대해서도 얘기한 것이 많다. 먼 길 가기 전에 미리 화장실에 들렀어야 했는데 길은 막히고 차 안에서 실례할 수도 없어 곤욕을 치렀다는 얘기도 솔직하게 한다. 결국 집에 도착해서 화장실에 가서 해결했을 때의 그 기분을 얘기했다. 그걸 들은 남자는 그 기분을 남자들이 일을 끝냈을 때의 기분이라고 했다. 결혼식과 결혼 생활은 여자에게는 연극의 한 과정인데 남자들은 실리만 찾더라며 남녀는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남자들은 나이가 들으면 어느 정도 배가 나오고 머리숱도 적어져야 보기도 좋고 신뢰가 간다고 했다. 젊은 사람이 늙은 사람 흉내를 내는 것과 달리 노인이 젊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뱃살을 빼야겠다며 운동하는 사람을 보면 안쓰럽다고 했다.
대부분은 가모카라는 남자의 입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아저씨”라고 부르지만 당시 47세 일본 평균의 남자란다. 저자 또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년 남자이니 양기가 입으로 올라 야한 얘기를 솔직담백하게 하는 남자로 나온다. 음담패설 에세이를 쓰는 작가이니 못할 얘기도 없을 것이다. 매일 같이 술을 마신단다. 에세이를 연재하는 사람이니 글감을 찾기 위해서라도 그런 자리가 필요할 것이다.
남자의 3대 쇼크는 사춘기 때 성기 주변에 나는 털, 그리고 노안, 갱년기 때 성기 주변의 털이 하얀 색인 걸 보고 쇼크를 받는다고 썼다. 반면에 여자의 3대 쇼크는 남자가 생각하기에 초경, 첫 경험, 출산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저자는 성에 대한 지식을 처음 접했을 때, 결혼 생활, 늙음이라고 했다.
‘주간 문춘’에서 일부러 남자들이 알고 싶은 여자의 속 이야기를 쓰라고 주문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여자의 초경, 여자의 성욕, 여자들의 핸드백 속에는 뭐가 들었을까 등에 관한 얘기들이 그렇다.
일본이 전쟁을 얼마나 준비했는지 ‘낳아라, 번식하라“는 구호까지 붙이며 인구 수를 늘렸다는 얘기도 있다.
재일교포가 많이 사는 오사카(大阪)에 살아서인지 조선 남자들에 대한 이미지도 좋다고 썼다. 마늘과 기름 냄새, 강한 소주 냄새, 역동적인 발음의 조선 말 등이 매력이라는 것이다. 겉으로 예의바르고 소심한 일본인들에 비하면 훨씬 남자다운 것이다.
남자들의 속마음도 대화 남을 통해 털어 놓았다. 빚 대신 딸을 받아 맘대로 하는 상상, 공주를 납치해 요리하는 상상, 옛날 귀족들처럼 여자가 서른을 넘기면 침소를 다른 여자에게 넘겨준다는 관습 등을 알려준다. 일본인들의 잔인함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