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까지 12시간. 리스본까지 다시 2시간 반. 살던 도시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갈 때 가장 궁금한 것은 언제나 ‘돌아올 때의 나’였다. 알파마 지구의 예약된 숙소로 가는 차 안에서 내다본 차창 밖의 리스본은 어둠이 내려 인적조차 뜸했고 꾸미지 않은 벽에선 ‘낡은 도시’의 냄새가 났다. 생각해보면 살면서 그곳에 가기 딱 좋은 날씨에 딱 맞는 상황, 딱 좋은 사람이 있는 경우란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오직 나를 북돋운 건 단 하나 “갈까? 가자!”라는 두 단어였다.
이쯤 되면 (내 책 제목처럼) ‘여행에 미쳤다’는 표현이 과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디테일이 살아 있는 도시
유럽의 서쪽 끝, 스페인 옆에 붙어 있는 이 작은 나라는 일반적으로 스페인에 왔다가 잠시 스쳐 지나거나 건너뛰기 일쑤다. 그러나 몇 년 전, 세계적으로 히트한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주인공 제레미 아이언스(그레고리우스)가 자아를 찾아 충동적으로 찾아 나선 리스본의 아름다움은, 언젠가는 제대로 다시 가보고 싶다던 리스본행을 결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유럽이지만 유럽이 아닌 느낌. 겉멋이라고는 없는 소박한 사람들과 인고의 세월을 겪어낸 초연함은 나로 하여금 이 빈티지한 도시에 빠져들게 했다. 바스쿠 다 가마와 엔리케 왕의 대항해 시대에 세계 최대 제국을 거느리는 영광을 누렸던 이 나라는 서서히 쇠락을 거듭하다가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다시 한 번 크나큰 재앙을 겪게 된다.
리스본 인구의 3분의 1이 죽고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는 절망 속에서 1934년부터 이어진 살라자르 독재정권은 순박한 사람들을 괴롭혔으나 마침내 1974년 무혈 카네이션 혁명(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배경)으로 끝을 맺게 된다. 갖은 풍랑을 겪어낸 이들의 표정엔 평온함이 서려 있다.
붉은 테라코타 지붕과 아줄레주 벽화
골목 가득 울려 퍼지는 파두 선율과 포트와인까지 눈과 귀와 입이 호강하는 곳. 아랍 문명이 이베리아 반도에 전해준 가장 아름다운 흔적인 푸른 아줄레주 타일과 위트 넘치는 그라피티 벽화들,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로 대표되는 파두 음악과 에그타르트, 포트와인에 이르기까지 볼거리, 들을거리, 먹거리가 넘쳐나는 리스본이야말로 눈과 귀와 코가 다 만족스러운 곳이다. 심지어 밟고 다니는 보도블록조차 아름답다. 갖가지 색의 석회석을 일일이 손으로 쪼개어 문양을 만든 칼사다 포르투게사는 오랜 시간에 걸쳐 마모되면서 석양 무렵이면 눈부신 황금빛으로 빛난다. 돌이켜보니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코파카바나 해변이나 마카오의 세나두 광장에서도 비슷한 것을 본 듯하다. 한때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이유다. 이렇게 여행은 어쩔 수 없이 세계사에 대한 이해를 가져다준다.
리스본의 상징 노란색 트램
리스본에는 툭툭에서 페리까지 다양한 교통수단을 경험하는 재미가 있다. 일곱 개의 언덕으로 되어 있는 리스본을 구석구석 걸으며 탐험하는 즐거움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지만 리스본의 상징인 28번 트램을 타보지 않으면 이곳을 제대로 여행했다 할 수 없다. 언제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 28번 트램은 마치 콧대 높은 여인 같다. 한참을 기다리게 하고, 인내심 없는 사람들은 돌아서게 한다. 그래도 북적이는 트램에 올라 얼굴이라도 닿을 듯 건물 안 사람을 스쳐갈 때의 스릴은 이곳이 아니면 경험하기 힘들다. 리스본에서 가장 높은 상 조르제 성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 테주 강과 알파마 지구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에서 점심을 먹는다. 골목골목 걷는 재미로 가득한 알파마 지구는 아치와 계단, 목재 발코니, 사람들이 사는 모습 하나하나까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과거로의 여행을 선물해준다.
도시 전체가 살아 있는 박물관
대항해 시대의 영광이 남아 있는 벨렝 탑과 제로니무스 수도원, 해양박물관이 있는 벨렝 지구와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무덤이 있는 내셔널 판테온은 결코 빼놓아선 안 될 곳이다. 웅장한 돔으로 된 내셔널 판테온에 들어서니 높은 천장 가득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파두가 가슴을 파고든다. 국민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가 포르투갈의 눈물이라 칭한 테주(타호) 강은 거친 대서양과 이어져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더없이 좋은 사색의 장소다. 페리로 20분이면 닿을 수 있는 반대편 카샬랴스 지역에서 벌거벗은 듯 온몸을 드러내고 있는 리스본의 전경을 감상해보자.
코메르시우 광장을 울리던 선율과 포트와인
리스보아. 매혹적인 항구. 이름마저도 이토록 사랑스런 도시를 떠나야 하다니 울적해진다. 리스본의 샹젤리제라 불리는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마지막으로 이곳 특산물 바칼라우(대구)를 먹으며 첼리스트의 선율에 센티해진다. 자세히 볼수록, 가만히 볼수록 매혹적인 리스본. 와인과 브랜디를 섞어 만들어 달짝지근하지만 알코올 도수가 높은 포트와인은 두어 잔만 마셔도 취기가 돈다. 젊은 시절 최고의 영광을 누리고 이젠 늙고 나이 들었지만, 세상의 풍랑을 주름에 간직한 채 성형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지닌 이 도시가 전해주는 묵직한 푸근함에 안겨버린 날들을 오랫동안 그리워할 것이다. 숙소로 가는 길에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이 잠시 쉬던 상 페드루 드 알칸다라 전망대 벤치에 앉아 책 속의 한 구절을 떠올려본다.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자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어느 곳을 간다고 할 때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간다는 것이다.”
히말라야 트레킹 때문에 네팔이라는 나라에 처음 갔다. 네팔은 한반도의 약 70% 정도 면적이며 인구는 대략 3000만 명이다. 인도, 중국, 부탄, 방글라데시에 둘러싸여 있는 내륙 국가다. 1인당 GDP가 2011년 기준으로 835달러에 불과한 빈국이기도 하다. 한국에 약 5만 명의 네팔 근로자가 와 있으며 한 해에 1만여 명이 입국을 대기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경쟁률이 8대 1이나 되어 한국행도 쉽지 않다고 했다. 전 인구의 90%가 농업에 종사한다. 종교는 대부분 힌두교를 믿는다. 세계 10대 고봉 가운데 8개를 보유한 산악 국가라 등산을 좋아하는 한국인이 2017년 기준 약 5000명이나 다녀갔다고 한다. 트레킹 비수기인 지금도 오가는 사람들이 온통 한국 사람이다.
이번 히말라야 트레킹 프로그램에는 네팔 시내 관광도 있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찍고 3일간 하산한 후에 포카라 시와 수도 카트만두 시내를 관광했다. 포카라 시는 그나마 좀 나았으나 카트만두 시내는 그야말로 먼지구덩이 속 같았다. 1월이 건기라서 더 그랬겠지만 마치 밀가루 같은 흙이 비산하며 먼지를 일으켰다. 서울도 미세먼지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카트만두는 마스크 없이는 돌아다니지 못할 정도였다. 서울은 먼지를 쓸어내는 살수차가 다녀서 깨끗한 편이다. 그러나 카트만두는 엉망이다. 2015년 7.8도의 강진이 지나간 후 도시도 많이 파손되어 있었다. 세계문화유산들도 거의 절반이 이때 파괴되어 복구 중이다.
네팔이 행복지수 세계 3위 국가라는 사실이 내 관심을 끌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현지 가이드는 한국에서 10년간 일하면서 한국과 네팔을 비교해봤다고 했다. 네팔 사람들은 욕심이 없다고 했다. 너무 열심히 일하는 한국 사람들에 비해 네팔 사람들은 얘기하는 것을 좋아해서 일의 능률이 안 오른다고 덧붙였다. 우리 일행은 산촌의 한 학교에 컴퓨터 12대를 기증했다. 50년 역사에 컴퓨터 구경은 처음이라고 했다. 시장과 내외빈이 많이 참석했다. 그런데 공연을 포함한 축사가 무려 3시간 동안 이어졌다. 현지 가이드는 5분이면 충분할 축사를 각자 20~30분씩이나 하는 현장 사례를 들어 네팔인을 설명했다. 네팔 사람들은 순박한 편이다. 한국에 5만 명이나 와 있는데도 큰 문제 없이 조용히 일하고 있어서 우리가 잘 몰랐던 것이다.
카트만두에서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박타푸르를 방문했다. 사원 및 여러 유적들이 있는데 이곳도 지진으로 파손되어 복구 중이었다. 좁은 골목에는 오토바이와 트랙터가 복잡하게 오가서 정신이 없었다. 시내 몇 곳을 더 다녔는데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것이 모두 사원이었다. 네팔인들이 이마 한가운데 그리는 빨간 점은 ‘제3의 눈’이라 한다. 부처님이 보고 있다는 의미라 했다. 누구나 그렇게 신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티베트 난민촌을 돌아보고 중국이 무자비하게 티베트를 공격한 역사로 볼 때 네팔도 중국의 눈치를 많이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네팔도 중국이 공격할 수 있는 것이다. 인도도 이웃 대국이라 눈치를 본단다. 오일 등의 공산품을 인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르카’라는 네팔 용병은 용감하기로 유명하다. 시내에서 구르카 용병들이 사용하는 칼을 파는 가게가 많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구르카다’라는 서양 작가의 소개 글과 함께 구르카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이들 용병들이 해외에서 번 돈으로 히말라야의 계곡에 여러 개의 다리를 만들어 기증했다는 표석도 붙어 있다.
네팔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왕정국가였다. 지금은 민주공화국이다. 반군이 10년간 산에 숨어 살며 내전을 일으키기도 했다. 워낙 고산이 많아 호랑이, 곰 등 맹수가 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산속에 숨어 살던 반군들 덕분에 맹수가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히말라야 눈이 녹은 물은 당연히 1급수라 생각하고 마시고 싶었으나 풍토병이 우려되니 마시지 말라고 했다. 수력발전으로 전기를 만들고 있지만 전력 사정이 열악하다. 숙박업소인 롯지에서 휴대폰 충전료로 2000원 정도를 받고 있을 정도다.
스마트폰이 주는 편리함과 유용함도 있지만, 신종 스마트폰 범죄나 분실 우려 등의 골칫거리도 생겨났다. 특히 스미싱 문자 등으로 인한 피해는 스마트폰 활용도와 무관하게 위험에 노출될 수 있어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누구나 알아두면 안전한 스마트 서비스를 소개한다.
바이러스와 스미싱은 막아주고 메모리와 배터리는 절약하는 ‘알약M’
스마트폰 활용도가 높을수록 부족한 것이 바로 저장 공간(메모리)이다. 최근에는 유튜브 등을 통해 영상을 보거나 오피스 앱으로 문서 작업을 하는 경우도 많아 배터리 역시 부족하다. 컴퓨터 사용자라면 들어봤을 백신 프로그램의 애플리케이션 버전인 ‘알약M’을 사용하면 스마트폰 바이러스와 스미싱 방지는 물론 메모리와 배터리 절약까지 한 번에 해결해준다. ‘실시간 감시’ 기능을 켜놓으면 앱을 열지 않아도 안전한 모바일 환경을 유지할 수 있다. 바이러스 검사, 배터리 최적화, 저장 공간 청소, 메신저 파일 정리 등이 앱 화면에서 아이콘 터치 한 번으로 손쉽게 이뤄져 초보자라도 어려움이 없다. 앱을 열었을 때 평소 초록색이던 화면이 빨간색으로 변하거나, 작은 ‘!’(느낌표) 아이콘이 보인다면 스마트폰 환경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 그렇다고 당황해하지 말자. 이 역시 원터치로 빠르게 해결 가능하다. 왼쪽 상단 메뉴에서는 안전한 와이파이와 앱 검색·관리, 앱 잠금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잃어버린 스마트폰 어떻게 찾을까? ‘구글 휴대전화 찾기’& ‘아이클라우드 아이폰 찾기’
스마트폰은 기기의 가격도 만만치 않지만 연락처, 사진, 공인인증서 등 주요 개인 정보를 담고 있어 분실할 경우 위험과 불편이 따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잃어버렸을 때 당장 전화부터 걸어보곤 통화가 되지 않으면 불안해한다. 이럴 경우 안드로이드 사용자라면 ‘구글’(www.google.com)의 ‘휴대전화 찾기’를, 아이폰 사용자라면 ‘아이클라우드’(www.icloud.com)의 ‘아이폰 찾기’를 이용할 수 있다. 구글은 기기를 분실한 지점을 구글 지도에 표시해 대략적인 위치 정보를 알려준다(GPS가 켜져 있는 경우에 한함). 분실 지점에 근접했다면 ‘벨소리 울리기’ 메뉴를 눌러보자. 최대 음량으로 5분간 벨소리가 울려 스마트폰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소리를 듣고 찾아낼 수 있다. 아이클라우드의 경우 구글과 비슷한 소리 알림 기능인 ‘사운드 재생’ 메뉴와 함께 통화 및 긴급 상황 버튼 이외의 기능을 비활성화 하는 ‘분실 모드’ 서비스를 제공한다.
전화권유판매 스팸, 한 번에 거절하는 ‘두낫콜’
계속 걸려오는 지긋지긋한 스팸전화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두낫콜’을 이용해보자.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제공하는 전화권유판매 수신거부의사등록 시스템으로 손쉽게 전화권유판매 스팸전화를 차단하도록 도와준다. 두낫콜 홈페이지 (www.donotcall .go.kr)에 접속 후 ‘소비자’ 메뉴를 누르고 본인 휴대전화 번호로 수신거부등록 절차를 거치면 무작위로 걸려오는 판매 목적 전화를 한 번에 거부할 수 있다.
중고 스마트폰 제대로 사려면? 가격은 물론 출처까지 꼼꼼하게 확인
중고 스마트폰을 사려는 이들은 아마 ‘가격’ 부담 때문일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격 기준으로만 제품을 결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먼저 합리적인 가격대로 책정됐는지 알려면 제품의 품질과 성능에 따른 등급을 가늠해볼 필요가 있다. 크게 100만~120만 원대의 고급형(프리미엄), 60만 원 안팎의 중급형(미드레인지), 40만 원대 이하의 보급형(로우엔드)으로 구분된다. 가급적 고급형에서 고르되 출시 시점이 4년 이내의 제품이라야 장기적으로 사용하는 데 무리가 없다. 성능과 디자인 등에 따라 중고 폰을 골랐다면 분실·도난 폰이 아닌지 출처를 확인해보는 것이 좋다. 네이버 통신요금 정보포털 ‘스마트초이스’(www.smartchoice.or.kr)를 통해 조회가 가능하다(스마트 라이프 메뉴→단말기 식별번호(IMEI)검색→분실·도난 조회).
안전한 일상을 위한 앱 서비스
•경찰청 사이버캅 인터넷 사기 등에 연관된 번호로 전화나 문자가 오면 화면을 통해 알려준다. 신규 스미싱 수법 경보령 등 사이버 범죄 피해 예방을 위한 알림을 푸시로 받아볼 수 있다.
•더치트 사기 피해 정보 공유 모바일 상 판매자의 연락처, 계좌정보, 아이디 등을 검색해 금융사기를 방지한다. 피해 발생 시 대응 방법 및 범죄자 검거 소식 등도 안내한다.
•안전디딤돌 정부 대표 재난 안전 포털 앱으로 재난 발생 시 일상에서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지진, 해일, 태풍 등 재난 유형별 국민행동요령은 데이터가 원활하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든 확인 가능하다.
•안전 신문고 행정안전부에서 운영하는 앱으로 일상에서 일어나는 안전 위험요인을 국민들이 쉽게 신고하고 처리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서비스다. 교통, 시설, 생활 등 전 분야의 신고가 가능하며, 접수된 내용은 국민신문고와 연계해 처리된다.
소청도를 출발한 ‘코리아킹’은 불과 10여분 남짓 달려 대청도 선진포항의 선착장에 닿았다. 멀리서 봐도 아담하고 각양각색 지붕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선착장에는 미리 연락을 받고 여행사에서 버스 한 대를 대기시켜놓고 있었다. 아직은 저녁 먹을 시간이 어중간하여 일단 해안을 돌면서 일몰구경하기로 했다. 대청도 선진포항은 고려에 이어 조선시대부터 중국 상선의 이동이 많았던 지역이다. 중국 선원들은 항해하다가 쉬어갈 곳을 찾던 중 이곳이 정박하기에 적합하다고 하여 여장을 풀곤 했다. 또한 선진포항은 일제 강점기 포경회사의 기지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1918년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고래잡이는 1944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농여해변
대청도는 주민들의 90%이상이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섬 일주 해안도로를 따라 아름다운 해변과 절경들이 이어져 있는 곳이 대청이다. 버스를 타고 얼마를 지나 해안선에 도착했다. 썰물이 시작되었는지 바다가운데 모래언덕이 드러나 있었다. 썰물에 드러난 모래언덕을 ‘풀등’이라고 했다. 드러난 풀등을 구경하면서 농여해변을 걸었다. d이곳은 일몰이 아름다운 해변이다. 고운모래가 사각사각 밟히는 느낌이 좋았다. 한참을 걷다보니 기이한 모양의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가운데 구멍이 뚫어진 형상을 하였는데, 고목바위라고 했다. 바위에 새겨진 결은 보통 가로무늬 결인데, 이 바위에는 유독 세로로 결이 나 있었다. 지구의 나이를 46억년 정도로 친다면 고목바위의 나이가 20억년정도 되었다고 한다. 수십억 년 전에 바닷 속에 퇴적물들이 쌓였다가 지진이나 융기현상에 의해 생성되었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고목바위가 서 있는 곳도 깊은 바다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물결무늬는 바닷물이 하루에 두 번씩 밀물과 썰물현상으로 생긴 ‘연흔’이다. 바위에 있는 ‘연흔’을 ‘화석연흔’이라고 하고 바닥에 있는 가로연흔을 현재 생존하는 ‘현생연흔’이라고 하여 지질학적 가치가 큰 해변으로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고목바위 앞에서 인증 샷을 남기고 걸음을 재촉했다. 농여해변을 지나 미아동 해변까지 걷다 보니 어느덧 어둠이 장막처럼 내려오기 시작했다. 일몰이 가장 예쁘다는 ‘농여해변’이었지만 해무로 인해 일몰을 볼 수는 없었다.
바닷가 모래사장을 걸으면서 절경이 이어진 해변을 구경하다보니 배도 고프고 피로가 몰려왔다. 우리가 저녁을 먹기 위해 도착한 음식점에서는 이미 근사한 상차림이 준비되어 있었다. 특‘히 싱싱한 홍어회와 소라, 그리고 갑오징어 요리가 한상 가득 채워졌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독점하던 고래잡이는 1930년대 이후 쇠퇴하고, 지금은 홍어, 우럭, 광어, 농어 등이 대청앞바다에서 많이 잡힌다. 그중에서도 홍어가 많이 잡히는데, 홍어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흑산도와 목포를 떠올리지만 사실은 홍어의 70%가량이 대청도에서 잡힌다고 했다. 여기서 잡힌 홍어는 흑산도와 목포 쪽으로 내려가 가공되어 팔린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삭힌 홍어가 아닌 싱싱한 홍어를 회로 썰어냈다.
사실 삭힌 홍어에 길들여진 입맛이었기에 처음에는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먹다보니 입안에 착착 감기는 맛이 별미였다. 특히 마지막에 신 김치를 숭덩숭덩 썰어 넣고 끓여낸 홍어애탕은 시원하면서도 감칠맛이 있어 한층 입맛을 돋우었다. 반주를 곁들인 저녁을 잘 먹고 숙소로 향했다. 오랜만에 만난 선, 후배 동문 간에 정겨운 얘기가 끝없이 이어졌다. 특히 2년 후에 닥칠 개교 100주년 행사에 대한 토론이 진지하게 논의 되었다. 요즘 북핵폐기와 관련하여 남북 간의 화해무드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핫이슈인 서해5도는 백령도를 포함하여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대연평도, 소연평도) 그리고 강화도 위쪽으로 우도라는 섬을 일컫는다. 서해5도는 1953년도 정전협정 당시 육상의 DMZ는 합의 설정이 되었지만 해상은 그렇지를 못했다. 6.25전쟁당시 치열한 전투 끝에 확보한 서해5도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UN사령부에서 일방적으로 그은 선이 NLL이다. 한반도의 화약고처럼 언제든지 무력충돌이 일어날 수 있는 지역이 바로 이지역인 셈이다. 근래의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같은 사건이 바로 이지역에서 일어났다.
경이로운 모래사막
다음 날, 아침을 먹고 다시 투어에 나섰다. 버스를 타고 옥죽동 해안사구로 향했다.
한국의 ‘사하라 사막’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옥죽동 해안사구는 오랜세월 모래가 바람에 날려 이동하면서 거대한 모래산을 이루었다. 옥죽동 해안사구는 계절에 따라 형태가 변화하는 활동성 해안 사구이다. 푹푹 빠지면서 모래산을 오르다 보면 실물크기의 낙타가 나타난다. 우리나라에 사막은 없지만 고비사막이나 사하라 사막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흥미로운 경관을 목격할 수가 있었다.
버스를 타고 다시 이동하여 모래울 해변에 도착했다. 모래울 해변의 풍경은 병풍처럼 둘러싸인 적송군락과 더불어 더욱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대청도에는 삼서 트레킹이 있다. ‘삼각산’으로부터 ‘서풍받이’로 이어지는 트레킹 코스라 앞 글자를 따서 ‘삼서’ 트레킹이라고 부른다. 대청도에서 제일 높은 삼각산은 높이 343m로 인천광역시에 가장 높은 계양산(354m)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삼각산-기름항아리-마당바위-서풍받이-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코스의 총 길이는 약 7km 정도이며 소요시간은 대략 2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우리는 시간 관계상 삼각산 트레킹은 생략하고 서풍받이 트레킹만 하기로 결정했다. 서풍받이 트레킹이 시작되는 광난두정자각에서 단체로 인증 샷을 남기고 트레킹을 시작했다. 풍경을 보며 걷다 보니 어느새 숨은 차오르고 다리는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대청도는 작은 섬치고는 지형이 꽤나 울퉁불퉁하고 높은 편이다. 하늘전망대까지의 여정은 평소에 운동을 안 한 사람이라면 조금 힘들 수도 있다. 힘들게 헉헉거리며 하늘전망대에 도착하니 시원한 바람이 몸의 열기를 식혀 준다. 전망대 앞바다에는 대갑죽도가 있다. 모양은 사람이 입을 벌린 옆모습과 흡사하다. 하늘을 향해 어민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모습인
대갑죽도는 주민의 90%가 어민인 이곳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섬이라고 한다. 얼마나 걸었을까, 짧은 트레킹 코스의 반환점이자 대청도 최고의 경관을 자랑한다는 조각바위언덕 전망대에 도착했다. 전망대를 기준으로 오른쪽엔 서풍받이, 왼쪽엔 조각바위 언덕의 정상, 뒤로는 넓은 갈대밭과 둑바위 해안으로 이어지는 아담한 길이 있다. 잠시 땀을 닦고 숨을 골랐다. 어제 저녁에 못 다먹은 홍어회와 소주로 정상주를 한 잔씩 돌렸다. 시원한 해풍에 정상주 한 잔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더구나 최고의 경관을 바라보면서 먹는 싱싱한 홍어회는 우리 모두를 황홀감에 물들게 했다. 시간을 보니 ‘코리아킹’이 일행을 태우러 올 시간이 불과 1시간여밖에 남지를 않았다. 부지런히 하산을 했다. 선진포항 전망 좋은 음식점에서 성게 칼국수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나니 몸은 노곤하고 늘어졌지만 시간에 쫓겨 부지런히 항구로 내려왔다. 어느덧, 1박2일의 트레킹이 끝나가고 있었다. 비록 짧은 시간으로 소청도와 대청도의 모든 것을 보고 느낄 수는 없었지만 시간에 비해 많은 것을 보고 간다. 이 멋진 풍경들이 당분간은 잔상으로 남을 것이다.
지금까지 어떻게 하면 내 재산을 후대에 잘 이양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봤다. 이번에는 돈을 어마어마하게 벌어놓은 세계 부호들이 준비하는 인생 마무리에 대해 풀어볼까 한다. 세상 돈 많기로 소문난 부자들 미담 대부분 역시 돈. 똑똑하게 굴려놓은 재산을 내 자손뿐만 아니라 사회 모두가 쓸 수 있도록 물려주는 부자 이야기를 한 번 들여다보자.
죽기 얼마 전 유언장 다시 쓴 리처드 커즌스 회장
작년 12월 31일. 호주 시드니 근교에서 관광용 수상 비행기가 추락해 조종사 포함 6명이 전원 사망했다. 비행기에 타고 있던 이들은 세계 최대 식음료 출장 서비스 업체 영국 컴퍼스 그룹의 리처드 커즌스(58) 회장 일가족이었다. 두 아들은 물론 커즌스의 약혼녀, 약혼녀의 딸까지 한날한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기업 회생 전문가였던 커즌스. 그는 생전 기울어가는 회사들을 살리고 고용 안정을 이끌어내던 탁월한 전문 경영인으로 평가받아왔다. 사고 후 잊히는가 싶었던 커즌스 회장의 이야기가 8월 말 해외토픽을 타고 날아들었다. 그가 남긴 유산 4100만 파운드(약 600억 원)가 영국에 근거지를 둔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에 기부됐다는 소식이었다. 당초 커즌스는 두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기로 했다. 그러나 죽기 1년 전 혹시 두 아들과 자신이 모두 죽게 될 경우 재산 대부분을 옥스팜에 기부하겠다는 ‘공동비극조항’을 유언장에 삽입했던 것. 사고만 없었더라면 훗날 두 아들이 받을 유산이었다. 그렇다면 왜 커즌스는 옥스팜을 굳이 지목했을까? 한국에도 지부가 있는 옥스팜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활동하는 국제구호기구다. 그러나 2011년 아이티 대지진 이후 구호 현장에서 벌어진 옥스팜 활동가의 성 매수 파문으로 도덕적 치명타는 물론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이로써 7000여 명의 정기후원자가 집단 탈퇴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뜻하지 않았던 고인의 유언 덕에 기적적으로 구호 중단 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 유언에 따른 커즌스 회장의 기부 소식과 함께 옥스팜 이름이 거론되면서 스캔들 때문에 잠시 잊었던 구호의 중요성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린 것은 아니었을까.
내 재산은 미래를 위한 것이다
작년 7월 미국 CNBC의 에미 마틴 기자가 CNBC 인터넷 판에 쓴 ‘자식에게 유산을 남기지 않기로 한 7명의 억만장자’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흥미로운 통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녀의 68%가 상속을 기대하고 있는 반면 부모는 40%만이 자식에게 유산 상속 용의가 있다고 했던 것.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와 투자 왕으로 불리는 워런 버핏이 재산을 후손에게 물려주지 않기로 선언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들은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것에 대해 우려섞인 말을 했다. 게이츠는 “부모가 남긴 돈을 자식들이 온전하게 지킬 수 없을 뿐더러 그들의 인생을 제대로 걸을 수 없게 한다”고 했다. 버핏 또한 1986년 경제전문지 ‘포춘’과의 인터뷰에서 “자식들이 무엇이든 할 수 있게 충분한 돈을 남기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기 싫을 정도의 유산을 남기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게이츠 부부는 2011년 영국 ‘데일리메일’을 통해 “재산 810억 달러 중 자녀 3명에게 각각 소량의 돈을 상속할 것”이라고 했다. 버핏 또한 3명의 자녀에게 각각 20억 달러만 남겨줄 계획이라고. ‘포브스’에 따르면 버핏의 개인 재산은 올해 기준 840억 달러다. 게이츠 부부는 2000년 ‘빌앤멜린다게이츠재단’을 설립해 개발도상국 사람들이 질병과 가난, 굶주림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아낌없는 투자를 하고 있다. 이후 버핏도 막대한 재산을 빌앤멜린다게이츠재단과 죽은 부인의 이름을 딴 ‘수잔톰슨버핏재단’ 등 5개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올해 기부액만도 34억 달러다.
유산을 자식에게 남기지 않겠다는 또 다른 이가 있다.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크다. 2015년 첫딸 맥스가 태어났을 때, 그와 아내 프리실라 저커버그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페이스북에 공개했다. 딸이 살아갈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이기를 원하기에 재산의 99%를 기부하겠다고 말이다. 딸만을 위한 세상이 아닌 모든 미래세대를 위한 준비를 하고 싶다는 것이 이 젊은 부호 부부의 생각이었다.
영국의 인기 셰프 고든 램지 또한 순순히 남매들에게 재산을 남기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4남매는 각자 일을 해서 교통비와 전화사용료를 낸다고. 단, 남매들이 각자 자립할 때 아파트 보증금의 25%는 줄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레스토랑에서 자녀들이 밥 먹는 일도 흔하지 않은 일이고 여행할 때 일등석에 태우는 일도 결코 없다고 영국 신문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를 통해 알린 바 있다. 이외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과 ‘캐츠’의 유명 작곡가인 앤드류 로이드 웨버 또한 2008년 영국 일간지 ‘미러’와의 인터뷰에서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했다. 대신 그가 벌어들인 돈을 극장에 투자하고 음악가를 돕는 데 쓰고 싶다고 했다. 영화 ‘스타워즈’의 조지 루카스 감독, 영국 가수 스팅 또한 상속 대신 기부를 선택한 인물로 꼽힌다.
알리바바 창업주 마윈 회장의 은퇴 계획
중국 IT업계 거물이자 세계적인 유통 사이트 ‘알리바바’ 창업주인 마윈(馬雲·54) 회장이 내년 9월 10일 은퇴하겠다고 발표했다. 마윈의 쉰다섯 살 생일이자 친구 17명과 함께 중국 항저우의 작은 아파트에서 알리바바를 창업한 지 20년이 되는 날이다. 연매출 41조 원, 지난해만 3300명이 훨씬 넘는 일자리를 창출해낸 마윈은 종종 은퇴에 관한 얘기를 해왔다. 구체적인 날짜와 시기를 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은퇴와 맞물려 그가 꺼낸 카드는 교육을 기반으로 한 자선사업이다. 최근 알리바바가 공식 웨이보에 공개한 마윈의 새 명함에는 ‘회장’이라는 직함 대신 그 자리에 ‘교사’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중국 저장성 ‘항저우 사나이’라는 문구와 함께 ‘알리바바 탈빈곤펀드 주석’, ‘마윈 공익펀드 창업자’, ‘농촌교사대변인’ 등 자선사업 관련 약력이 눈에 띈다. 마윈은 이미 2014년도부터 마윈재단을 설립해 농촌의 교육 환경 개선과 자선사업에 불을 지피고 있다. 평소 롤모델을 빌 게이츠라고 말해왔던 마윈이기에 자선사업과 관련한 은퇴 계획에 귀추가 주목되는 것이다. 2017년 기준 ‘포브스’가 집계한 마윈의 재산은 43조 원에 달한다.
한국 부자들은 어떻습니까?
상속이 기부로 이어지는 사례 혹은 은퇴 후 재단을 설립해 자선사업가로 변신한 사례는 흔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가 발간한 ‘2018 한국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상속과 승계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사회 환원에 대한 고민이 전년에 비해 높아졌다고 한다. 상속과 관련해 ‘재산의 일부 또는 전부를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의견은 지난해 1.5%에서 8.7%로 7.2%포인트 증가했다. 금융자산 50억 원 이상 보유자는 사회 환원 의향이 17.4%에 달했다. 자식이 아닌 사회를 위한 기부에 자산가들의 관심이 부쩍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기부금액은 OECD 회원국 36개국 가운데 23위다. 자산가들의 사회공헌 활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만큼 한국에서도 기부왕이 나왔으면 한다.
뉴스에서 이웃 나라 일본의 지진 소식이 심각하다. 홋카이도 지방에 지진이 나서 산사태가 일어나고, 건물이 무너지고, 정전도 되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꽤 많은 우리나라 관광객도 항공편이 중단돼 발이 묶여있다고 한다.
유명 온천 관광지인 노보리베츠에서 어떤 기자가 아나운서와 통화로 그곳 상황을 알려주고 있었다. 귀에 익은 노보리베츠 온천지나 삿포로라는 지명을 들으니 언젠가 삼총사 친구들과 떠났던 홋카이도 여행이 떠올랐다. 우리가 즐겁게 여행했던 곳에서 이런 재해가 발생하다니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노보리베츠는 온천도 좋지만 여기저기 유황 냄새를 풍기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로 지옥을 연상시키는 계곡이 매우 인상 깊었다. 마침 우리가 여행 갔던 그 시기에만 볼 수 있다는 도깨비 축제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많은 관광객이 빙 둘러앉은 야트막한 무대를 향해 인근 언덕부터 세찬 불꽃놀이를 펼치며 내려오던 도깨비 군단의 퍼포먼스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곳곳에 커다란 방망이를 든 도깨비 모형과 양쪽으로 즐비한 상점이 아기자기한 볼거리를 주는 재미있는 동네였다.
트라피스치누 성당이 있는 수도원은 무사할까? 걱정이 되었다. 아름답고 유서 깊은 건물과 수녀들이 만든 빵과 잼을 맛볼 수 있어 기억에 남은 곳이다. 피해가 크다는 삿포로와 오타루 운하가 있는 지역도 잊을 수 없는 예쁜 추억이 있다. 예전에는 큰 무역이 이루어지던 운하였다는데 지금은 조금 넓은 개천 정도여서 실망했지만, 양옆으로 창고로 사용했다는 붉은 벽돌 가게가 역사를 말해주듯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어 의미가 컸다.
오타루 운하를 지나 오르골가게가 골목으로 가는 길은 새로 만들어진 것처럼 산뜻하고 깔끔한 가게가 연이어 있었다. 예쁜 가게들을 구경하며 가다가 우리는 가게 앞 길가에 나와 초콜릿 조각이 담긴 은쟁반을 든 미소년을 만났다. 맛보라며 내미는 손이 예뻐 하나씩 먹어 보고는 그 가게에 들어가 초콜릿 한 봉지씩을 샀다. 맛있어서라기보다는 소년의 미소에 홀리듯 샀다며 우리끼리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울린다는 시계탑의 은은한 오르골 소리를 듣는 것도 즐거웠고, 가게 안 풍경에 놀라기도 했다. 이 세상 오르골은 다 모여 있는 듯 다양한 오르골이 진열되어 있었다.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한 것부터 소품 하나하나까지 정성 들여 아름답고 신기한 모습이었다. 흠이라면 가격이 비싸서 마음에 드는 걸 살 수 없었다는 점이다.
결국 손녀를 위해 태엽을 감으면 디즈니랜드의 주제곡이 아름답게 흘러나오는 인형 오르골을 하나 골랐다. 오르골을 받고 기뻐하는 손녀를 본 게 엊그제 같은데, 멋진 추억으로 가득한 홋카이도에 이런 재난이 생겨 가슴이 아프다. 하루빨리 지진의 피해에서 벗어나 다시 관광 명소로 주목받길 바란다.
카자흐스탄이 수도를 아스타나로 옮기기 전 수도는 알마티(1929~1997)였다. 지금도 카자흐스탄의 최대 도시로 손꼽히는 알마티는 카자흐스탄어로 ‘사과’를 의미하는 알마(Alma)와 ‘아버지’를 뜻하는 아타(Ata)가 합쳐진 말로 ‘사과의 아버지’라는 뜻을 지닌다. 예전에는 사과나무가 많아 개울에 사과가 둥둥 떠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도심에는 울창한 나무들이 가옥을 에둘러 싸고 있어 마치 심산을 연상케 한다. 여기에 ‘아시아의 알프스’라 불릴 정도로 멋진 ‘톈산’이 있다. 고개만 들리면 도심 어디에서나 시원한 만년설을 볼 수 있는 곳. 한여름, 한낮의 강렬한 햇살도 비껴간다.
알마티는 나무들 천국
필자는 6월 말, 4개월의 동유럽 여행을 시작했다. 4년 만에 또 길 위에 서 있다. 첫 여행지는 카자흐스탄 남동부에 위치한 알마티(Almaty). 이곳은 단지 러시아를 가기 위한 스톱오버를 활용한 기점지다. 여행 시작부터 행운이 따른다. 출발 하루 전, 후배에게 현지민보다 알마티를 더 잘 아는 한인을 소개받는다. 그녀는 이 나라에서 25년을 살았고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매스컴에 무수히 소개된 유명인. 생판 모르는 나라, 도시에서 의지할 곳이 생겨서인지 사르르 긴장감이 떨어진다. 단 한 번도 누리지 못한 ‘호사’이니 얼마나 좋은가? 알마티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 안에서 만난, 카자흐인 여학생의 도움을 받는다. 카자흐스탄의 수도 ‘아스타나’에 살고 있다는 여학생은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녀의 가족들은 이미 공항에 마중 나와 있었다.
멋진 고리키 바르크(중앙공원) 공원 안에는 스타디움과 호수를 비롯해 테니스 코트, 동물원, 야외수영장, 카페 등 다양한 놀이 시설들이 들어서 있어 볼 만했다. 판필로프 28인 공원은 더 매력적이다. 이 공원에는 이슬람 국가에서는 보기 드문 ‘젠코브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 있다. (구)소련 시대에 폐쇄됐다가 1995년, 러시아 정교회로 반환된 후 1997년부터 다시 성당의 위치를 찾은 곳. 못 하나 사용하지 않았어도 1904년의 대지진을 견뎌냈다. 이 성당은 세계 8대 목조 건축물로 꼽힌다. 또 이 공원에는 제2차 세계대전 순국용사를 위한 ‘꺼지지 않는 불꽃’과 ‘28인의 청동조각상’이 흩어져 있어 소련의 잔재를 느끼게 한다. 옛 러시아의 건축 양식으로 만든 ‘카자흐 민속 악기 박물관’도 눈길을 끈다. 그런데 울창한 숲을 자랑하는 이 도시는 아이러니하게도 공기가 매우 탁하다. 눈으로 볼 때만 싱그러울 뿐 대기가 탁한 이유는 자동차들이 내뿜는 매연 때문이다. 아무리 나무가 많다 해도 매연을 흡수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1960~70년대의 우리나라도 이런 환경이었을까?
알마티의 알프스 톈산의 심블락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주요 여행지는 일레 알라타우 국립공원(Ile-Alatau National Park)이다. 언어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알마티에서 한국어를 전공하고 한국 교환학생으로 있었다는 20대 여성과 동행한다. 알마티에서 남쪽으로 약 25km 정도 떨어진 메데우(카작어로 Medeu, 러시아어로 Medeo) 빙상장까지 택시로 이동한다. 해발 약 1500m에 위치한 메데우에 가까워지자 도심에서는 못 느꼈던 바람과 공기가 싱그럽다. 부자들이 산다는 전원주택 단지들도 모습을 드러낸다. 택시가 멈추는 곳, 눈앞으로 만년설이 펼쳐진다. 한여름에도 녹지 않은 채로 눈이 남아 있어 ‘카자흐스탄의 알프스’라 불리는 톈산 산맥(天山山脈, Tian Shan)이다. 중국의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자치구에서 키르기스까지 뻗어 있는 길이 2000km, 넓이 400km의 매우 긴 산맥. 톈산의 최고봉이 포베다(7439m) 산이니 그 높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알마티는 칸텡그리(Kan Tengri, 6995m) 산맥의 일부다. 산 이름은 몽골어에서 나왔는데 칸(Kan, Khan 또는 Han)은 ‘왕’이라는 뜻이고 ‘텡그리(Tangri)’는 ‘영혼’을 의미. 즉 ‘영혼의 왕’이라는 뜻을 지녔다. 현지인들은 ‘피의 산’이라는 의미로 ‘칸투(Kan Too)’라 부르기도 한다. 해가 질 때면 산의 북벽이 붉은색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행자들 대부분은 메데우에서 곤돌라를 타고 심블락(카작어로 Shymbulak, 러시아어로 침블락Chimbulak) 스키장까지 올라 만년설을 보고 내려온다. 메데우에서 스키장까지는 약 4.5km. 곤돌라 안의 발아래로 메데우 댐과 세계 최고 높이에 있는 빙상 경기장이 보인다. 2011년 동계 아시안게임, 2012년 반디 세계 챔피언십, 201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가 개최된 곳이다.
질료니 바자르에서 만난 고려인들
심블락에서 다시 시내로 돌아와 국립박물관, 공화당 거리 등을 욕심 없이 둘러보고 찾은 곳은 질료니 바자르(Zelyony Bazar)다. 질료니는 러시아어로 ‘초록’을 의미한다. 과거에 야채와 과일을 주로 판매하는 시장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채소 코너에서는 필자와 똑같은 얼굴을 한 아주머니와 맞닥뜨린다. 먼 타국에서 만나는 똑같은 얼굴. 파장을 준비하는 그녀는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 고려인이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정육부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말 그림이 그려진 정육 코너에는 순대를 닮은 소시지가 많다. 다양한 치즈와 젓갈류 등을 구경하면서 도착한 반찬가게. 그곳에 고려인 상인들이 여럿 있다. 얼굴은 분명 한국인인데 러시아말을 구사하는 고려인 2세 혹은 3세들. 두어 명은 몇 마디 한국말을 구사한다. “아바이가 했던 말인데 난 모르오”라며 무뚝뚝한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할머니. 손맛을 인정받았는지 얼굴색 전혀 다른 사람들이 고려인 할머니가 만든 김치를 잔뜩 사들고 떠난다.
사실 알마티에서는 한국인으로 보이는 모습을 한 사람들을 아주 많이 만나게 된다. 카자흐스탄은 130여 개의 민족이 살고 있는 나라다. 분명코 칭기즈칸의 정치적인 영향이 현재로 이어진 것일 게다. 고려인들은 이 도시의 소수민족. 알마티에는 한국인이 약 700명 정도 살고 있으며 이동 인구까지 포함하면 1000명가량 된다고 한다. 동족이라는 본능 때문이었을까? 고려인들을 만나니 눈물이 팽그르르 돌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어쨌든 필자는 현재 러시아 여행 중이다. 두 번째 방문한 러시아. 다음 호에는 이 매력적인 나라에 대한 소식을 길 위에서 전하리라.
Travel Data
찾아가는 방법 아시아나 항공이 직항(매주 화, 금)한다. 또 카자흐스탄 항공사인 에어 아스타나(월, 목)가 있다. 편도 6시간 이상이다.
현지 교통 알마티에는 버스, 트램, 지하철의 대중교통 수단이 있지만 대부분 택시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택시 표시가 없어도 길에서 손을 들으면 어김없이 차가 서는데 운전사와 교통비를 흥정해야 한다. 필수적으로 알고 가야 할 ‘어플’이 얀덱스 택시(Yandex. Taxi)다. 가격이 표시되니 전 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리는 택시 운전자의 바가지 상흔을 피할 수 있다. 러시아 권역에서는 거의 통용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자.
음식 정보 주민들 대다수가 이슬람권이어서 돼지고기는 거의 안 먹는다. 양고기와 말고기 등을 주로 먹는다. 꼬치구이인 샤슬릭, 수블리카가 대표 메뉴이고 그 외 스프, 메밀밥, 소고기 구이 등등이 맛있다.
언어 정보 카자흐스탄어가 있지만 대부분 러시아어가 통용된다. 영어 소통이 매우 어렵다.
치안 정보 길에서 경찰들을 거의 볼 수 없다. 그만큼 치안이 안전하다.
날씨 정보 4계절이지만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다. 여름에는 30℃를 웃돌 정도로 덥다. 그러나 기온 차가 크니 걸칠 옷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귀촌이라 하면 도시의 삶을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가 안빈낙도의 생활을 즐기는 과정을 떠올린다. 제2인생을 위한 새 출발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령화 사회의 선배라 할 수 있는 이웃 나라 일본은 어떨까? 일본에서는 최근 다거점생활(多拠点生活) 혹은 다거점라이프(多拠点ライフ)가 새로운 귀촌 형태로 주목받고 있다. 단어의 의미 그대로 생활의 거점을 여러 곳 만든다는 의미다. 또 다른 생활의 터전을 만든다는 면에서, 그저 자연을 벗 삼아 쉬는 것이 주목적인 별장의 개념과는 다르다. 이 이면에는 어쩔 수 없는 일본인의 속사정과 특유의 합리성이 돋보인다.
일본에서 시도되고 있는 다거점생활의 면면을 살펴보면 우리가 갖고 있는 귀촌이란 개념에 디지털 유목민, 즉 통신기술의 발전으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할 수 있다는 사고가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아도 되니 굳이 생활의 터전으로 도쿄와 같은 거대 도시를 고집할 필요가 있냐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온 것이 다거점생활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살고 있던 거주지 외 농촌 등지에 또 다른 집(거점)을 마련하는 것이다. 단순히 집을 마련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 거점에서 생산활동이나 인간적 교류를 통해 또 다른 생활의 기반을 만드는 것을 추구한다. 그리고 여기에 또 한 가지 개념이 더해지는 계기가 발생했다. 바로 2011년 3월, 일본을 뒤흔들어놓은 동일본 대지진이다.
지진 공포가 가져온 대피처의 필요성
평생을 한곳에서 살아온 지역 주민들은 대지진 후 삶의 터전을 잃고 가설 마을에서 어렵게 생활하거나 타 지방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새로운 곳에서 정착의 어려움을 겪는 모습은 일본인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했다. 그것은 언제든 자신도 재난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신속하게 몸을 옮길 수 있는 피난처의 필요성 등에 대한 고민이었다.
‘다거점생활 추천’의 저자이자 일본에서 다거점생활의 선구자로 손꼽히는 언론인 사사키 토시나오(佐々木俊尚)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거점생활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동일본 대지진 후 생활의 또 다른 거점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고, 운전해서 갈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카루이자와(軽井沢)를 선택하게 됐다”며 “동일본 대지진 이후 방사능을 피해 서쪽으로 가는 사람이 늘었다. 도시민이 지방으로 이주하는 ‘I턴’의 기반이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사사키 토시나오는 후쿠이(福井) 지방에도 거점을 마련해 세 곳의 집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동시에 두 가지 삶, 인생에 활력 줘
‘언아더(another) 거점을 만드는 방법’을 출간한 Think Future의 편집장 사토 하야오(佐藤 駿)는 SNS를 통해 “기존 일본의 이주(귀촌)는 도쿄 생활에 지쳐 지방으로 돌아가는 현역 이후의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다”고 말하고, “재해 대국이라는 현실적 문제로 인해 또 다른 생활거점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고, 이를 실행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동시에 여러 곳에 거점을 마련하는 삶은 어떨까. 사사키 토시나오는 다거점생활이 다양한 장점이 있다고 설명한다. 먼저 도시와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도시생활을 겸하는 삶이기 때문에 일이나 사업적 관계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장점을 꼽는다. 농촌에서 인간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에 평소 만나기 쉽지 않았던 농부나 어부 같은 사람들과도 인맥을 형성할 수 있다. 짜여진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도 장점이다. 거점마다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 게획을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이동시간은 심기일전의 계기가 된다. 그는 어딘가 떠나고 싶을 때 많은 짐이 필요 없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았다.
물론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교통비가 비싸 경제적 부담이 따르고, 두 집, 세 집 살림을 하는 셈이니 세간을 마련하는 데 초기 비용이 든다. 또 일정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낭패를 겪기도 한다.
또 다른 다거점생활자들은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삶을 동시에 살 수 있음을 장점으로 꼽는다. 주말마다 농촌 사람으로 변신해 지역 활동에 참여할 수도 있고, 자신의 재능이나 기술로 마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다거점생활의 보람 중 하나다. 또 자신이 운영하던 사업체의 또 다른 지점을 개설하듯, 일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도 검토해볼 수 있다. 기존의 삶과 터전을 유지하면서 또 다른 거점을 개척할 때 얻을 수 있는 장점들이다.
지자체에선 외지인 유치 방안으로 활용
지난 7월 21일과 22일, 일본 야마나시(山梨) 현 고슈(甲州) 시에서 흥미로운 행사가 열렸다. 다거점라이프 필드워크 프로그램이라는 다소 생소한 이름의 행사다. 이 행사는 지역 단체가 다거점생활에 관심 있는 도시민을 초대해 시골생활의 매력과 생활 수단으로 지역에서 생산 가능한 수공예품의 제작 방법 등을 알려주기 위해 진행됐다.
이런 행사는 고슈 시뿐만 아니라 일본 내 여러 지자체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개최되고 있는데, 다거점생활을 활용해 도시민의 유입을 유치하기 위한 지방 정부의 속내가 엿보인다. 유명 관광지가 아닌 지자체들이 도시민의 유입을 유도하기 위해 정기적인 방문을 꾀하는 것이다.
도시민의 이주를 유치하는 데만 매달리고 있는 국내의 귀촌 정책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도시민 유치를 거주인구 증가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생활인구 증가에 집중할지 양국 간의 관점의 차이가 드러난다. 무조건 이주만을 강요하는 국내의 도시민 농촌유치 사업에 시사하는 바가 큰 대목이다.
액션, 공포, 애니메이션 등 몇 장르 영화는 극도의 피로감으로 보는 게 두려울 지경이다. 반면에 시대극, 서부극, 뮤지컬, 전기 영화는 시사회 초대를 마다하지 않는다. 최근 관심 갖고 본 다큐멘터리 알렉산드라 딘의 ‘밤쉘(Bombshell: The Hedy Lamarr Story, 2017)’과 스티븐 노무라 쉬블의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RYUICHI SAKAMOTO: CODA, 2017)’는 추억을 떠올리며 공부하는 자세로 보았다.
국내 영화 팬들이 류이치 사카모토를 알게 된 작품은 ‘마지막 황제’(1987)일 것이다. 편협한 일본 장교로 출연해 무척 의아하게 여겼는데 이름난 작곡가, 영화음악가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콧수염마저 얄밉게 보였던 그는 “왜 일본이 그토록 삭막한 만주 땅을 얻으려 했는지 모르겠다”라며 소신 인터뷰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1983)에서도 장도를 휘두르는 일본 장교로 출연한 바 있는데, 군더더기 없는 몸매에 강파른 얼굴 덕분이 아닌가 싶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와 오시마 나기사가 영화 음악 작곡과 연기를 다 요구했다니, 영화적 얼굴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류이치 사카모토의 영화 음악 덕분에 심취했던 작품을 열거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영화 팬이라면 기본적으로 본 영화들일 테니. 그중에서도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는 영화음악 작곡가로서의 사카모토를 잘 정리해주고 있다. 특히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에서 주인공이 광막한 설원 저 너머로부터 한 발 한 발 힘겹게 걸어와 관객 앞에 설 때까지 흐르던 음악은 압권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다.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에서 사막 아지랑이 속에 한 점이 나타나고 점점 커진 그 점이 알리 족장임을 알게 되는, 너무도 유명한 롱 테이크 장면에의 헌정이다. 이는 ‘평원의 무법자’(1973)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등장하는 장면만큼이나 근사하고 감동적이다.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에서 류이치 사카모토는 당시 암으로 투병 중이었지만, 너무도 좋아하고 존경하는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츠 이냐리투의 제안이라서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작곡을 마다할 수 없었다고 밝힌다.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는 2012년, 인후암 판정을 받고 모든 활동을 중단했던 류이치 사카모토가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음악 작업으로 활동을 재개한 전후 5년여를 기록한다. 후쿠시마 지진과 쓰나미에 살아남은 망가진 피아노를 연주하고, 핵발전소 재가동 반대 시위에 참석해 발언하고, 암 판정 당시 심경을 고백하고, 숲과 남극 등을 다니며 소리를 채집하여 젊은 시절부터 함께 했던 컴퓨터와 피아노로 작곡하는 모습이 젊은 시절 활동 영상과 영화 출연 장면 등을 곁들여 소개된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영화에 나오는 음악과 바흐의 코랄전주곡 같은 느낌의 음악, 약해지지 않고 울림이 오래가는 음을 찾고 있다는 등, 그가 현재 추구하는 음악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전한다.
9·11 테러 당시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그가 찍은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의 사진을 보면 사진작가로서의 재능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검버섯 가득한 얼굴과 백발에 표범 가죽 문양 안경을 쓴 그가 곱게 깎은 연필을 들고 오선지에 음표를 그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또 오로지 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지구 이 끝에서 저 끝을 방문하는 집념을 보노라면, 세상에서 가장 고매한 직업은 예술 창작뿐이구나, 눈물이 날 지경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인물 다큐멘터리도 그 인물에 얼마나 매료되었는가, 존경하는가에 따라 감상 진폭이 달라진다.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는 감독 후샤오시엔, 오시마 나기사, 알프리드 히치콕, 데이비드 린치 등의 다큐멘터리와 더불어 영화 세상에 사는 행복을 만끽하게 해준다.
로마인들의 휴양지에는 몇 가지 특색이 있다. 목욕을 좋아해 자연 용출장이 있는 곳에 휴양지를 만들었다. 목욕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어김없이 볼거리, 즐길거리도 만들었다. 연극이나 스포츠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극장과 원형 경기장도 만들었다. 로마인들의 대표적인 휴양지 중 한 곳은 터키의 파묵칼레다. 고대 도시, 히에라폴리스의 부서진 유적 위에 만들어진 온천 수영장에서의 물놀이는 클레오파트라도 부럽지 않다.
거대한 흰 석회암 언덕이 있는 작은 마을
터키 여행을 할 때 파묵칼레(Pamukkale)를 여행 코스에 넣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파묵칼레에 대한 홍보 영상물을 한 번이라도 봤다면 그곳에서 발산되는 매력을 저버릴 수 없다. 터키 여행 10일 정도 지날 즈음 파묵칼레로 간다. 고국에서 여행 온 후배들을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날짜를 정하고, 같은 숙소를 따로 예약하면 된다.
후배들보다 좀 더 일찍 여행을 왔기에 여유 부리며 터키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대부분의 터키 여행자들은 카파도키아에서 안탈리아로 이동해 파묵칼레로 이동하지만 카시~페티예~달얀에서 시간을 더 보냈다. 무계획 여행은 이래서 좋다. 달얀에서 파묵칼레까지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 비해 12배나 영토가 큰 터키이기에 긴 이동거리도 당연지사처럼 생각하게 된다. 달얀에서 승합차처럼 작은 돌무시를 타고 페티예로 나와 오토가르(터미널)에서 파묵칼레로 가는 버스표를 구입한다. 분명히 파묵칼레로 가는 표를 구입했는데 데니즐리(Denizli)가 종점이다. 돌무시로 바꿔 타고 10km를 더 가야 파묵칼레다. 통일성 없는 터키의 교통법은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35℃ 온천수가 변화시킨 석회암 덩어리
파묵칼레는 아주 작은 동네다. 게스트하우스 앞으로 거대한 ‘설산’처럼 보이는 석회암 덩어리가 불쑥 솟아 있다. 편안한 차림으로 마을의 석회암 언덕으로 오른다. 사방팔방 온통 흰빛이다. 파묵칼레는 터키어로 ‘목화의 성’이라는 뜻이다. 온천수가 빚어낸 석회암 덩어리를 빗대어 붙인 지명. 석회 성분을 다량 함유한 35℃ 온천수가 수 세기 동안 바위를 타고 흐르면서 표면을 탄산칼슘 결정체로 뒤덮은 것이다. 석회암 언덕은 보기와 달리 미끄럽지 않다. 따뜻한 물이 흐르고 용액의 흐름을 보여주는 ‘층리’가 사방으로 펼쳐진다. 이 석회 언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여러 차례 그 색이 변한다. 녹은 석회암이 물결 모양을 만들었다. 마치 다랑이논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수십 개의 서멀 풀(thermal pools)의 물줄기는 청옥빛이다. 종유석 등은 없지만 딱 석회동굴이 노출되어 있는 형상이다. 서멀 풀은 1988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입욕은 불가하고 맨발로는 들어갈 수 있다. 그럼에도 한여름에는 수영복 입은 여행자들이 부지기수다.
석회 언덕 정상에 오르면 또 한 번 깜짝 놀란다. 부서진 문화 유적들이 무수하게 흩어져 있고 박물관도 있다. 이곳은 고대 페르가몬(Pergamon) 왕국이 기원이다. 기원전 130년경, 로마인들이 정복해 ‘성스러운 도시(히에라폴리스)’라고 불렀다. 그리스어 ‘히에로스’는 신성함을 뜻한다. 히에라폴리스는 로마에 이어 비잔틴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번성했다.
고대 로마의 히에라폴리스 유적지
‘파묵칼레’라는 지명은 11세기 후반 셀주크투르크족의 룸셀주크 왕조의 지배를 받으면서 만들어졌다. 이후 1354년, 이 지방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되었다가 1887년, 독일 고고학자 카를프만이 발견해 복원했다. 로마시대의 원형 극장, 신전, 공동묘지, 온천욕장 등 귀중한 문화 유적이 남아 있다. 특히 최대 1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원형 극장은 현재 봐도 어마어마한 규모다.
또 증기가 발생하는 단층 위에는 아폴로신전이 세워져 있고 세베루스(Severus) 시대에 만들어진 극장도 있다. 1200기의 무덤이 남아 있는 거대한 공동묘지도 있다. 서아시아에서 가장 큰 공동묘지 유적 중 하나인 이곳에는 지금도 수많은 석관 뚜껑이 열려 있거나 파손된 채 여기저기 널려 있다. 이 석관들은 치료와 휴양을 위해 몰려들었던 병자들의 무덤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곳 또한 고대 도시 유적으로 198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클레오파트라 온천 수영장에서 물놀이
흩어진 문화 유적지와 박물관을 관람하고 클레오파트라 온천 수영장으로 들어간다. 폐허가 된 유적지에 온천물을 담아 언덕 위에 온천 수영장을 만들었다. 수영장엔 나무들을 심어 그리스, 로마식으로 만들었다. 간이 탈의실도 있고 식당도 있다. 물 온도는 35℃로 생각보다 높다. 물속에는 그리스, 로마시대 때의 대리석 기둥이 그대로 잠겨 있어 발밑이 평평하지 않다. 얕은 곳도 있지만 키를 훌쩍 넘는 곳도 있다.
이 온천수는 류머티즘, 피부병, 심장병 등에 효과가 있다고 전해져 그리스, 로마,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많은 사람이 몰려왔다. 특히 로마시대에는 여러 황제와 고관들이 이곳을 찾았다. 테르메라고 하는 온천욕장은 온욕실·냉욕실은 물론 스팀으로 사우나를 할 수 있는 방, 대규모 운동 시설, 호텔과 같은 귀빈실, 완벽한 배수로와 환기 장치까지 갖추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이곳으로 와 물을 가져갔는데, 이 물은 양모를 씻고 염색하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
어쨌든 고대, 로마시대 때부터 있던 온천장에서 즐기는 온천욕. 수심이 깊은 곳에서 수영도 하고 밧줄에 매달리기도 하고 물도 먹기도 하면서 두어 시간 놀고 나니 몸이 가뿐해졌다. 클레오파트라도 방문했다고 하니 아무리 바빠도 온천욕은 필히 해야 한다. 파묵칼레는 사실 이게 전부다. 단 이틀 동안 후배들과 함께하고 아쉬운 작별을 한다. 헤어지는 날, 후배는 싸갖고 온 햇반과 깻잎을 건네준다. “선배. 정말 힘들고 외로울 때 이거 먹어. 그러면 아픔이 싹 가신대.” 아끼고 아껴뒀다가 힘들었을 때 꺼내 먹으면서 파묵칼레의 기억을 어찌 떠올리지 않았겠는가? 여행이란 단지 풍치만 보는 게 절대 아니라는 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내 기억 속의 파묵칼레는 그래서 더 좋다.
Travel Data
찾아가는 방법 인천에서 이스탄불까지 직항이 있다. 이스탄불에서 데니즐리까지 항공으로는 1시간 10분 소요된다. 버스 등 대중교통으로는 10시간가량 걸린다. 데니즐리 터미널에서 파묵칼레행 미니버스가 운행된다. 이스탄불 ~ 카파도키아 ~ 안탈리아 ~ 파묵칼레 순으로 대부분 여행 코스를 짠다.
음식 정보 파묵칼레는 한국인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 한국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제법 있다.
숙박 정보 파묵칼레 마을은 크지 않다. 대부분 가정집을 개조한 게스트하우스가 많다. 가격은 조식을 포함해 2~3만 원대다. 대부분 수영장도 갖추고 있다.
날씨 정보 터키는 지중해성 기후다. 생각보다 햇살이 따갑다. 4월부터 기온이 풀리고 곧 뜨거워진다. 봄옷을 준비하면 된다. 아침과 저녁은 일교차가 크므로 겉옷을 하나 준비하는 게 좋다.
물가와 화폐 정보 터키 화폐는 터키 리라(Turk Lirasi)다. 물가는 한국보다 싸다.
시니어 여행 포인트 파묵칼레 인근에는 또 다른 온천 명승지가 있다. 제2의 파묵칼레로 불리는 카클르크(카크리크) 동굴은 최근에 발견된 종유동굴인데, 광천수가 뿜어져 나온다. 파묵칼레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려면 여행사를 통해 표를 구입해야 한다. 여행사가 두어 곳 있는데 가격 차이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