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대 규모 5.8 지진에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수백 차례의 여진은 지금도 진행 중이며 우리나라도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전문가들의 전망이 우리를 여전히 불안하게 하고 있다. 때맞춰 9월 30일부터 10월 6일까지 동작구 서울소방재난본부 보라매안전체험관에서 2016 안전체험이 열렸다.
사람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10월 4일 10시 서울소방재난본부 김종섭 행정주임 소방관의 안내로 실내 체험 실습에 참여했다. 이날의 체험 행사는 화재시 대피와 소화기·풍수해·지진체험 등을 주제로 했다. 각 코스마다 시청각 교육과 체험 실습이 진행됐으며 무엇보다 인명 안전에 최우선 목적을 두고 훈련 방법이 확 바뀌었다.
실감난 지진대피 체험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별로 관심이 없었던 지진대피 체험이 특히 인상 깊었다. 지진 동영상을 시청하고 대피 훈련을 거쳐 사후 수습 가정까지 체험했다. “지진이야!” 하고 구호를 외친 뒤 머리를 보호하면서 탁자 밑으로 대피했다. 지진을 가상한 흔들림은 언론을 통해 느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실제 상황이 발생하면 제대로 대피할 수 있을지 많은 염려가 됐다.
소화기 체험도 이전과 크게 달라졌다. 이전에는 소화기를 들고 불난 곳으로 달려가는 훈련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번 체험에서는 정전으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상태에서 벽을 더듬으면서 대피하는 요령을 배웠다. 비상상황이 실제처럼 느껴지는 훈련이었다.
김 소방관은 “벽면 쪽 손을 이용해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따라가면 출구를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화재 현장에서는 자세를 최대한 낮춰야 한다. 연기는 위로 올라가기 때문에 바닥에서 30~60센티미터 정도에는 맑은 공기가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또 소화기는 인화물 밑 부분에 분사해야 소화 효과가 있다.
태풍, 안전벨트, 지하철 화재 관련 체험
태풍은 재해 예보에 귀를 잘 기울이고 대비하면 극복할 수 있다. 시속 30킬로미터의 태풍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태풍은 위험한 곳에서 멀리 떨어져서 피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버스사고 시 안전벨트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배웠다. 급커브, 급브레이크의 위험성을 체감할 수 있어서 효과적이었다. 만약 벨트를 착용하지 않았다면 공중부양했을 것이다.
지하철 화재 때는 골든타임 확보가 매우 중요하다. 화재 현장에서 2~3분 이내에 탈출해야 한다. 먼저 다른 칸으로 신속히 대피한 뒤 1층 출구로 나가야 한다. 불가능할 경우에는 철로를 이용해 1~2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역으로 탈출해야 한다. 하지만 이 방법은 매우 위험하므로 최후의 방법으로 선택해야 한다.
일반인들도 많이 참여해야
안전체험은 학생들이 체험학습의 일환으로 단체로 참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제는 일반인들의 참여 방법도 강구해봐야 한다. 특히 거동이 불편한 시니어들은 재난시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더 많으므로 대피요령에 대한 교육이 더 절실해 보인다. 즐기면서 익힐 수 있는 안전체험을 마련해주신 서울소방재난본부와 친절과 성의를 다해 안전체험을 즐겁게 이끌어준 김종섭 소방관과 직원에게 감사드린다.
영화감독 꿈꾸던 소녀 음악PD가 되다
인터뷰 이태문 일본 통신원 gounsege@gmail.com
작은 체구에 단단한 관록을 풍기면서 함박웃음으로 맞이해 준 ㈜콘코르디아(CONCORDIA)의 대표 겸 음악 프로듀서 곤도 유키코(近藤由紀子, 67)는 이시카와현(石川縣) 나나오시(七尾市) 출신.
육군비행학교를 나와 육군항공대 조종사로 태평양 전쟁 때 동남아시아와 인도양에서 전투를 치르고, 오키나와에서 특공대로 소집돼 죽음의 출격을 앞둔 상황에서 1945년 8월 15일 패전을 맞이한 부친, 그리고 평범한 주부였던 모친 사이에서 유키코는 1949년 1월에 태어났다. 바로 이른바 일본의 전후 베이비붐 세대를 뜻하는 단카이(團塊) 세대인 셈이다.
“철들 무렵 늘 영화관에 있었다. 당시 나나오시에는 오락물 혹은 엔터테인먼트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엄마 세대는 전쟁의 아픈 기억과 상처받은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영화였는데, 엄마를 따라 서양 영화를 비롯해 일본 영화 등 모든 장르의 작품을 봤다. 그러다가 혼자서 ‘할머니를 찾으러 왔다’며 영화관에 들어가 작품에 푹 빠져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울러 영화와 관련된 음악도 열심히 들으면서 막연하게나마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키웠다.”
청운의 뜻을 품고 와세다 대학으로
영화감독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더 큰 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되고자 유키코는 도쿄(東京)의 와세다(早稻田) 대학 제1 문학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막 올라온 소녀의 눈에는 모든 게 신기하고 낯설기만 했다. 이웃사촌처럼 터놓고 지냈던 나나오시의 생활과는 완전히 다른 별세계(別世界)에 크고 작은 문화충격도 받았지만 영화 때문에 싹튼 꿈을 위해 뭐든지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노력했다.
“아는 친지도 없고 인맥도 없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기로 처음부터 하나씩 쌓아 나가야 했다. 신기하게도 주위 분들이 많이 도와 주셨다. 시골에서 올라온 순진한 소녀가 열심히 뭔가를 잡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예쁘게 봐 준 것 같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TV방송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는데, 학생 신분으로 일본 엔카(演歌)계의 최고봉인 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거물급 여배우 나카무라 타마오(中村玉緖) 등의 도우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직접 옆에서 지켜보면서 영화계에 대한 동경심도 더욱 강해졌지만 한편으로는 남성 중심의 폐쇄적인 영화계 풍토에서는 여성의 입지가 정말 좁다는 현실도 깨닫게 됐다고 한다.
대학 나와 첫 직장은 ‘이와나미 홀’
유키코는 대학 졸업 후 프랑스에서 영화를 배운 다카노 에츠코(高野悅子, 1929년생. 영화운동가, 영화 프로듀서, 방송작가 및 연출가 등)가 운영하는 ‘이와나미(岩波) 홀’에 입사한다. 당시 이와나미 홀은 232석의 작은 극장이었지만,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을 비롯해 유명 사진가 등 당대를 대표하는 문화 예술인들이 드나드는 사랑방 역할도 했다.
“다카노는 ‘마음’과 ‘신념’으로 일했다. 진짜는 언젠가 반드시 세상의 빛을 받으며, 평가받을 것이라는 진지한 자세를 그때 배웠고, 이것이 나의 출발점이 됐다.”
이와나미 홀에서 2년간 근무 후 그녀는 일을 포기한다. 결혼으로 두 아이가 생겼으며, 무엇을 하든 하나에만 집중해 모든 힘을 기울이는 그녀는 망설임 없이 육아를 선택해 엄마의 길을 걷는다.
음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두 아이의 엄마로서 아낌없는 사랑으로 육아를 마친 유키코는 49세 때 아티스트 프로듀서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물론 전업주부로서 살림을 꾸리는 틈틈이 시나리오 작가를 공부하고, 드라마 기획서도 쓰는 등 조금씩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녀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가코 다카시(加古隆, 1947년생)가 음악을 담당했던 NHK 특별 다큐멘터리 에 감동하여 2000년 스페셜 콘서트를 기획해 도쿄, 오사카(大阪), 가나자와(金澤), 후쿠시마(福島) 등을 돌며 전석 매진의 흥행을 거두었다. 2003년에는 히비야(日比谷) 공원 야외음악당에서 개최한 에도(江戸) 400주년 기념 오프닝 이벤트 등도 꾸미는 등 늦깎이 프로듀서의 열정과 실력이 조금씩 평가받기 시작했다.
“20세기 전쟁 때문에 돌아가신 분들의 레퀴엠으로 콘서트를 열어 21세까지 이어지지 못한 그들의 넋을 제대로 위로하는 진혼곡(鎭魂曲)을 들려주고서 21세기 평화와 생명의 시대로 힘차게 나아가자는 뜻을 담으려고 했다. 기획서를 쓰고 2년 동안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뜻을 함께하는 분들을 모았고 스폰서를 찾으려고 동분서주했다. 그 고생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눈물과 박수로 다시 한번 음악의 힘을 느꼈으며, 큰 보람과 함께 정말 값진 보물을 얻은 기분이었다.”
한국과 인연도 깊어
2015년 1월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아 양국의 젊은 성악가 2명이 함께 기념 공연을 펼친 바 있다. ‘한국판 폴 포츠’로 불리는 팝페라 가수 휘진(권휘진)과 일본인 테너 가수 고하시 고헤이(古橋鄕平)가 도쿄 지요다구(千代田区)의 기요이(紀尾井) 홀에서 ‘같이 울리는 순간’이라는 주제로 듀엣으로 화합과 희망의 선율을 선보이는 감동적인 무대를 꾸몄다.
물론 곤도 유키코가 기획한 공연이었다. 그녀는 가수 휘진에 앞서 2004년 9월부터 R&B 남성듀오 ‘소리(SoRi)’, 그리고 2007년 솔로로 전향한 가수 케니(홍기현) 등을 일본에 데뷔시키는 등 꾸준히 실력 있는 한국 아티스트를 찾아내 적극 소개해 왔다.
휘진이 동일본 대지진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음악의 힘으로 미래를 믿는 마음을 심어주기 위해 피해 지역을 수차례 찾아가 자선 콘서트를 펼쳤듯이 케니도 2007년 9월 미얀마 민주화 시위를 취재하다 총에 맞아 사망한 사진기자 나가이 겐지(長井健司)에게 바치는 곡 ‘눈물-세계 어디선가 이 순간’을 발표해 수익금의 일부를 캄보디아 빈민을 돕고 있는 민간단체 등에 기부했다. 부제 ‘흐르는 눈물을 미래의 아이들 빛으로 바꾸기 위해’가 붙은 이 노래는 곤도 유키코가 직접 노랫말을 썼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요즘 세계의 움직임이 정치적으로 위험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위기감이 든다. 일본은 수많은 젊은이의 희생 위에 패전을 맞이했고, 그 뒤를 이어 태어난 우리 단카이 세대는 평화 속에 살아올 수 있었던 걸 감사하면서 계속 평화를 지켜가야 하는 사명이 있다. 두 번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려 미래로 이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이 바로 내가 할 일이고, 한일관계도 마찬가지로 문화 교류를 통해 서로 뜻을 나누고 마음을 함께하는 자리가 계속 이어져야 한다.”
원점에서 소통을 다시 생각
2003년 54세의 나이로 자신의 뜻을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해 음악·예술 기획사 콘코르디아(CONCORDIA)를 설립한 곤도 유키코는 평화와 소통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음악·예술 문화는 평화의 사절이며, 사람들 마음을 비추는 밝은 빛이라고 믿는다. 앞으로도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을 응시하면서 마음에 와 닿는 감동을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다. 음악과 예술을 통해 국경, 민족, 언어의 벽을 뛰어넘어 상호 소통과 연대감으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길 바랄 뿐이다.”
2015년 5월 회사 창업 12주년을 맞이해 프로듀서 이름으로 결혼 전 이름인 후지하시 유키코(藤橋由紀子)를 내걸고 원점에서 다시 활동을 재개할 것을 선언한 그녀는 “신으로부터 목숨을 받아 태어난 이상 죽을 때까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건 인간의 도리이다. 또한 일하면서 만나는 수많은 인연을 통해 교류를 넓혀가면서 그 만남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국경을 넘어 서로 돕고 힘을 합치는 것, 바로 이것이 소통이고 문화의 시작이다”며 시종 웃음을 잃지 않았다.
우리가 일본에 도착해서 전학서류를 전부 내서 학급배정을 받은 것은 3학기 때였다. 우리에게는 2학기 까지는 있었는데 3학기라니... 암튼 그렇다 하니 그대로 따르면 되는 일이라 특별히 힘든 일도 아니라 그러려니 했다.
큰 애는 4학년 2반이었고 작은 애는 2학년 1반이었다. 큰 애 담임은 부끄러움 반에 걱정 반으로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어쩔 줄 모르는 남자 총각 선생님이었다. 외국 학생이란 것에 언어도 전연 모른다는 사실에 근심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작은 아이 담임은 당돌하고도 똑부러지게 뭔가를 바로바로 알아채는 여자 선생님이었다. 교장 선생님께 인사를 마치고 나오자 방과 후라, 비어 있는 교실에 우리를 데리고 가서 내일 가져올 물건과 학교에서 생활하면서의 필요한 준비물들을 여자 선생님께서 설명해 주었다. 4학년 담임은 한 곁에 앉아 수줍음으로 말은 한마디도 없이 여자선생님께서 설명하는 걸 듣고만 있었다.
일어는 모르지만 그 표정이나 비슷비슷한 발음으로 된 단어들이 귀에 그렇게 낯설지는 않았다. 물론 젊은 아가씨 통역 자를 데리고 갔었지만 내가 전부 알아듣고 대답을 잘하자 사무실에 가 봐야겠다며 도중에 가 버렸다. 참고서, 노트, 교과서, 급식에 사용할 손수건, 연필, 연필통, 가방, 지진훈련용 모자, 교모... 정말 열심히 설명해 줬다. 나는 알아들은 것들은 우리말로 잘 모르는 것들은 그대로 일본어 발음대로 적었다. 내 눈치가 좀 모르겠다고 느껴지면 다시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여 선생님은 친절했고 정확해서 마음에 딱 들었는데, 계속 ‘말도 못하고 쓸 줄도 모르니 어떡하나? 아이 불상도 해라’ 만 중얼거리고 있는 4학년 담임은 내겐 큰 걱정이 되었다.
학교에서 나오면서 선생님께서 준비해 오라는 물건들을 하나씩 사기 시작했다. 급식용 손수건은 하루걸러 빨아 와야 하니까 한사람 앞에 세 개씩 만들어 오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사각 손수건 정 가운데에 고무줄을 달아 오라 했다. 왜 그러느냐 했더니 손목에 손수건 고무줄을 끼우고 식사를 하면서 흘리면 입을 닦기 편하게 이름을 꼭 새겨서 만들어 오라는 것이었다. 정말 요령 있게 정확한 일본인들의 습관이 이렇게 몸에 배는 구나 싶었다. 모든 물건에는 이름을 꼭 써야 한다고 당부를 했다. 설명하는 선생님의 표정과 얘기가 아주 알아듣기 쉬웠고 재미있었다. 교과서나 손수건, 고무, 노트, 준비... 같은 말들은 대강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으로 어쩌면 금방 일본어는 배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우리는 중간에 길을 잃어 헤매기도 했지만 둘째가 길을 찾아 모든 것들을 잘 사가지고 왔다. 외국에 가면 며칠을 집 주변을 길을 익혀야 하므로 걸을 수 있는 정도로 셋이 손잡고 돌아다닌다. 학교가 있는 방향은 가 본 적이 없어서 물건을 사느라 정신이 팔려 그만 가게만 돌아보면서 상가가 있는 길 끝까지 가버린 것이었다. 다 사고 집으로 가려 하자 여기가 어딜까? 가 된 것이었다. 자꾸만 같은 길을 몇 번을 돌았다. 긴장해서 한쪽으로만 가 보자고 정해서 걸어 내려갔다. 우리가 한 번 걸었던 곳이 드디어 나왔던 것이다. 꼬마가 내가 확인하고 올 테니 형이랑 엄마는 짐 들고 있으니까 여기서 기다리라고 의견을 내 놓는다. 알았다 하자 뛰어 갔는데 안 온다. 약간 걱정 하고 있을 때 ‘맞아~’ 하며 신이 나서 다시 뛰어 오는 걸 보고 안심했었다. 우리 맨션 옆이 동해대학이 있는데 밤에 보니 빨간 안테나가 세워져 있었다. 우리 집은 이제 절대로 못 찾는 일이란 없어진 거였다. 저녁을 먹고 각자 자기 가방을 챙기는데 나는 준비물들을 확인하며 도왔다. 내일 부터는 학교에 다닌다는 생각을 하며 80몀 정도의 아이들이 있는 콩나물 반이었는데 30명도 채 안 되는 교실에서 공부를 한다니... 아이들도 나도 약간 흥분되는 저녁이었다.
이태문 일본 통신원 gounsege@gmail.com
◇ 몸에게 묻는 것이 건강관리의 기본
마에다 비바리(前田美波里·영화배우, 1948년 가나가와 현 출생)
더위를 모르고 여름을 무척 좋아하는 마에다 비바리는 이전 주목받았던 화장품 광고 이래 5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젊고 탄력 있는 몸매와 촉촉한 피부를 유지하고 있다.
“언제 어떤 역할이 올지 모르기 때문에 어떤 동작도 소화할 수 있도록 늘 몸을 다듬어 놓는데, 피아노의 조율과 마찬가지이다. 여배우로서 건강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여진다는 걸 항상 의식해 몸 만들기에 신경을 써 왔다. 무대에서는 모든 각도에서 사람들이 보기 때문에 어디서 보더라도 좋게끔 해 두고 싶다. 나아가 반듯한 몸에는 제대로 된 정신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몸을 만들고 있는데, 특별한 것은 하고 있지 않다. 해야 할 것만 하고 있을 뿐이다.”
특별한 것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매일 습관처럼 하는 노력은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 이상 정성을 기울인다고 하겠다.
“아침에 눈 뜨면 먼저 전신 ‘임파(淋巴) 체조’를 10분, 그 뒤로 온천물을 데워 한 잔 마시는 게 일과이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신문을 읽고, 아침을 먹는다. 주로 채소 샐러드에 빵과 삶은 달걀 한 개. 그리고 머그컵에 커피를 붓고 코코넛 오일을 우유를 넣어 카페오레로 마신다. 달달한 과자를 군것질로 곁들여. 몸을 깨우는 데는 아침 식사가 중요하다.”
비 바리는 작년 가을 비 오는 날 비탈길에서 미끄러져 어깨를 골절했다. 그때 뼈가 붙자마자 재개한 ‘에고스큐(egoscue) 체조’가 빠른 회복에 크게 도움이 됐다.
“시작한 지 4년 반쯤 되는데, 아침 식사 후 30~40분 에고스큐 체조를 반드시 한다. 근육을 자극하고 단련해 똑바로 움직이고, 몸의 비틀림을 바로잡는 운동이다. 몇 년 전부터는 되도록 차를 이용하지 않고 걷는 생활을 하고 있으며, 1주일에 한 번 수중에어로빅도 하는데 물의 저항이 몸에 좋다. 내부근육도 단련되고, 달랑거리는 팔의 살도 금방 없어지고…”
울퉁불퉁 근육질의 여성스럽지 않은 몸은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기계를 이용한 트레이닝은 하지 않는다. 어떤 운동이 몸의 어느 부분에 효과가 있고, 어떤 결과를 가져다 주는지 이미 파악하고 있다.
“오랫동안 여러 가지 운동을 하면서 연구해 왔는데, 이게 나의 재산이다. 허리가 아프다는 연기자나 스태프가 있으면 내가 가르쳐 주고, 나 자신도 한 달에 한번 에고스큐 선생님과 상의해 새로운 메뉴를 지도 받는다.”
운동 이외에 아름다움과 건강 유지에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건강보조 식품과 효소, 온천물 등을 함께 일하는 동료 배우와 친구들이 추천한 게 많은데, 괜찮다고 생각 들면 먹어 보고 자신에게 맞으면 받아들여왔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라는 것은 없다. 수십 년 계속 먹어온 건강보조 식품도 무대 공연으로 피곤할 때는 좀 많이 먹는다든지 그날그날의 몸 상태에 맞게 양을 조절한다. 그렇다고 건강보조 식품에 의지하는 삶은 싫다. 자신의 건강은 자신이 지키는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손발이 찬 체질이라 몸이 차가워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는데, 에어컨은 되도록 쓰지 않고 여름에도 샤워만 하는 게 아니라 탕에 들어가 여유 있게 기분전환을 한다.”
욕탕에는 수소 거품이 발생하는 걸 넣어서 수소를 흡입하고, 수소수 물로 머리를 감고, 목욕탕에서 나와서는 바디오일을 바르고 침실은 향수를 뿌리기도 한다. 바닐라, 망고 등을 좋아하는데, 맘이 차분히 가라앉고 잠도 잘 온다.
“자기 몸에 물어보고, 좋다고 생각하는 걸 계속 해 가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본다.”
◇ 어떤 명의도, 명약도 수면 부족에는 진다
유카와 레이코 (湯川れい子·음악평론가·작사가, 1936년 도쿄 출생)
지난 1월 80번째 생일을 맞이한 유카와 레이코는 지금도 아티스트 취재로 국내외를 돌고 있으며, 집필활동 외에도 합창단의 멤버로서 노래하는 등 “지금이 내 인생 중 가장 바쁠지도 모르겠다”며 팔순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바른 자세와 환한 웃음을 잃지 않는다.
음악가를 양성하는 ‘스쿨 오브 뮤직 전문학교’의 명예 교장이기도 한 그녀는 삿포로, 센다이, 도쿄, 나고야, 오사카, 후쿠오카에 있는 학교를 돌며 졸업식과 입학식에 6번 참석해 인사를 했다.
“연설은 내가 1년간 일을 제대로 했는지 안 했는지를 실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살아 있는 음악정보를 말하는 거야말로 젊은 학생들의 마음에 스며들지, 과거의 추억담을 얘기하면 전혀 울림이 없다. 그래서 내년에도 학생들 마음에 와 닿는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올 한 해도 더욱 열심히 해야지 하고 생각한다.”
올해 아티스트 취재로 호주와 영국에도 갔다 왔으며, 개인적으로는 한 달에 한 번 4인조 코러스 그룹 ‘스완시스터즈’의 연습에 본인이 단장을 맡고 있는 가스펠 그룹 ‘도쿄여자합창단’의 단원으로서 동일본 대지진 부흥 자선콘서트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음악평론가와 작사가 이외에도 라디오 DJ를 하거나 젊은 사람들을 응원하고 노래하면서 환경과 평화와 관련된 문화활동도 소화하는 등 한마디로 사방팔방 종횡무진 대활약중이다.
“샐러드도 상추만으로는 질리고, 여러 가지 채소가 들어 있으면 맛있듯이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여러 가지 일을 하면 다채롭고 풍부한 삶이 더 즐겁다고 생각한다. 또 늘 앉아서 하는 일의 피로가 노래함으로써 풀리고 위안을 받는다. 자신의 몸과 마음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
21살 때 급성복막염 수술을 받을 때 수혈로 인해 C형 간염에 감염. 병명을 알게 된 것은 1989년 53세 때이다. 하지만, 감염이 판명되었지만 치료약이 개발되지 않아서 의사는 C형 감염 환자의 87%가 간경화에서 간암이 된다며 아무도 도와줄 수 없으니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으니 의사는 술 마시지 말고, 과로하지 말고 적당한 운동을 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충분히 잠을 자라며 어떤 명의도 명약도 수면 부족을 이기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수면이 부족하면 면역력도 저항력도 떨어진다. 그 뒤로 하루에 적어도 8시간은 잠을 자도록 하고 있다. 사실 60대 중반에 건강진단을 받고서 췌장암과 간암이 발견됐었다. 의사는 더 크면 위험하니 수술하자고 했지만 안 했다. 불안은 있었지만, 나이 들수록 어딘가 나쁜 곳이 나오게 되는 법인데, 나는 병과 싸우는 게 아니라 면역력을 높여 병과 공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뒤로 더욱 수면과 식사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결국 규칙적이고 바른 생활이 몸을 지켜준다고 믿게 됐다.”
공연 취재와 지방 강연회 등으로 바쁘더라도 전날 1박 하는 식으로 7~8시간의 수면을 확보하고 있다는 유카와는 “잠이 안 오거나 도중에 깰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눈을 감고 어쨌든 자는 상태를 유지한다. 안 자더라도 누운 상태만으로도 수면 중의 3분의 1 정도 체력이 회복이 된다고 하니까. 생각하기 시작하면 뇌가 쉬지 못하니까 잠이 안 올 때는 침대 위에서 호흡법을 한다. 단전 아래 3㎝ 정도 떨어진 곳을 의식해 코로 숨을 쉬고 천천히 길게 입으로 내뱉으면 잡념이 없어지고 뇌가 빈 상태로 되는데 그대로 자연스럽게 잠이 든다”며 “해외로 나갈 때도 마찬가지다” 고 밝혔다.
“식사를 하면 위장이 움직이고 몸이 활동 모드에 들어가기 때문에 비행기 안에서는 거의 안 먹는다. 탑승하기 전에 와인 한 잔 마신 후 호흡법을 하면서 마냥 수면을 취한다. 그러면 긴 장거리 비행에도 피로가 안 쌓이고, 시차도 없다.”
60세쯤부터 부교감 신경을 자극해 면역력을 높이는 호흡법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데, 잠이 오지 않을 때뿐만 아니라 전철 안 혹은 책상 앞, 자기 전에도 꼭 한다.
“수면과 호흡법 덕분에 암이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크지 않고 있다. 호흡법은 언제 어디서든지 누구나 할 수 있다. 요즘에는 등골과 관절 등을 움직여 뼈에 적당한 부하를 거는 ‘뼈 호흡 체조’를 한 달에 한 번꼴로 도장에 다니며 지도를 받고 있다. 뼈를 강화해 주고 비틀림을 고쳐주고 대사를 촉진해 준다.”
연예계가 남성 중심의 경쟁 사회라 싫은 일도 많고 낙담하는 경우도 있는데, 고민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오늘 일은 오늘로, 싫은 것들을 내일로 가져가지 않는 게 중요하다. 침대 위에서 호흡에 집중해 푹 자고 나면, 다음 날 기분 좋게 눈 뜨면 그럼 오늘도 파이팅! 하는 힘도 생기고, 문제 해결의 실마리도 떠오른다.
“끙끙거리고 우울할 때는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다. 낙담하는 감정은 좌뇌로 거기에 음악의 템포를 부여하면 자동적으로 우뇌가 우선이 되면서 좌뇌의 고민을 잊을 수 있다. 걷는 것도 스트레스 해소가 되니까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리듬에 맞춰 걸으면 그 효과는 몇 배 커질 것이다.”
몸과 마음의 젊음은 음식이 정한다
◇ 우에키 모모코
(植木もも子·관리영양사·국제중국의사·국제중국의약요리관리사, 1953년생)
젊고 똑똑하고 즐겁고 건강하게, 이것이 삶의 주제라고 말하는 우에키 모모코는 서양의 영양학과 동양의 한방학 모두를 섭렵한 전문가로. “늙지 않기 위해서는 식생활을 고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강조한다. 실제로 자신이 스트레스에 약한 체질을 알고 평소의 식사습관을 고치고 건강을 되찾았다고 한다.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체질이 있어서, 생활습관에 개인 차이가 생긴다. 나이 들수록 그 차이는 커지기 때문에 자신의 몸과 마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동양의 한방의학에서는 인간의 몸은 기(氣), 혈(血), 수(水) 세 가지 요소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데, 나이 먹으면 그 균형이 깨지기 쉽고, 몸의 이상이 생기는 원인이 된다. 이 상태로 두면 몸의 노화가 빨라지기 때문에 방심은 금물이다. 기는 영양과 피, 수분을 몸 구석구석에 옮겨준다. 생명 활동을 행하는 에너지, 기가 부족하면 체력이 떨어져 제대로 보충하는 게 중요하다.”
건강의 근본이 되는 기를 보완하는 식재료는 닭고기, 고등어, 양배추, 산마, 꿀 등. 체력은 물론 기력이 저하됐을 때 추천할 만하다.
“적당한 운동도 필요하다. 몸을 움직임으로써 피의 흐름이 좋아지고, 또한 운동으로 땀을 흘리면 체내에 쌓인 여분의 수분과 노폐물이 배출될 수 있다. 덥다고 냉방기를 틀어놓은 실내에서만 지내면 물의 순환이 나빠지며 발이 붓고 관절통 등의 증상도 나타난다. 여름에도 샤워만이 아니라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가 적절히 땀을 흘리고, 음료수와 음식도 따뜻한 걸 권하고 싶다. 기, 혈 수가 잘 돌도록 하는 생활을 계속해 나가면 몸도 마음도 활기차고, 더위도 먹지 않는다.”
조선은 1883년 미국 공사 푸트(Lucius H. Foote)가 조선에 부임한 데 대한 답례사절로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했다. 그런데 정사(正使) 민영익(閔泳翊)은 미국 체스터(Arthur Chester) 대통령에게 큰절을 하여 미국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지만, 국서를 전하면서 양국의 우호, 교역 문제를 논의했다.
이후 조선정부에 대한 중국의 압력이 더욱 심해지면서 조선은 대외적으로 독립을 천명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미국에 외교사절 파견을 검토한다. 알렌의 일기에 의하면 “미국이 조선에 왜 이토록 무관심하냐?”고 고종이 묻자 알렌은 “공관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고종은 1887년 7월 박정양을 미국 주재 공사로, 알렌을 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한 뒤 한 달여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출발하게 한다.
처음에는 중국이 박정양을 특명전권 공사 임명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영국이 이번 행차가 조선의 독립을 시위하기 위한 것이라고 중국에 알리면서 사태가 꼬이기 시작한다. 원세개(袁世凱)가 박정양의 출발을 방해하자 겁을 먹은 박정양은 출발을 위해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 두 번이나 나타나지 않았다. 이들은 알렌의 주선으로 그 해 말 미국 상선을 타고 인천에서 비밀리에 출발한다. 출발 직전 이들을 체포하려 중국함선이 나타났으나 배에 미국 국기가 걸린 것을 보고 그대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조선은 중국에게 우리 외교사에 굴욕적인 약속을 한다. 소위 영약삼단(另約三端)이다. 그 내용은 ①주재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공사를 만나 그의 안내로 주재국 외무성에 간다 ②조선공사는 회의나 연회석상에서 청국공사의 아래 자리에 앉는다 ③조선공사는 중대 사건이 있을 때 청국공사와 미리 협의한다 등이다.
영약삼단은 조선이 추구한 독립국 지위를 완전히 망가트리는 것이다. 제1 조항은 외교관례에도 어긋난다. 외교관이 주재국 외교부에 신임장을 제정한 후 비로소 ‘공식’ 업무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정양이 워싱턴에 도착하자 중국 공사 장음환(張蔭桓)이 찾아와 자기의 안내를 받으라고 했다. 알렌은 중국 공사관을 먼저 방문하면 이것은 조선의 독립을 확고히 하려는 목적이 실패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고종이 이 사실을 알면 박정양을 참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1888년 1월 12일 아침 알렌은 중국 측의 방해를 우려하여 평소보다 일찍 박정양 일행을 깨워 국무부로 갔다. 다행히 중국인은 보이지 않았다. 클리블랜드(Stephen Grover Cleveland)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 이로써 중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선의 독립을 확고히 하려는 사절단의 임무는 ‘성공적’이었다고 알렌은 자평한다.
박정양 일행은 1888년 1월 1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팰리스(Palace) 호텔로 갔다. 그리곤 ‘작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10여 명의 일행이 들어가기에는 너무 작은 방이었다. 그런데 이 방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일행은 놀라고도 두려워 몸을 떨었고 외국 땅에서 자기들을 괴롭히려 찾아온 지진이라고 소리쳤다. 알렌은 엘리베이터가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설명했으나 이후 이들은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항상 계단으로만 다녔다.
그 다음이 더 문제였다.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워싱턴에 도착한 박정양 일행은 백악관에서 미국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면서 큰절을 올리려 한 것이다. 이보다 5년 전인 1883년, 보빙사 민영익 일행이 체스터 대통령에게 큰절을 올렸다. 조선 ‘외교관’들은 미국 대통령이 중국 황제와 같이 용포를 입거나 아니면 최소한 다른 관리들과는 다른 옷을 입고 의자에 폼 잡으며 앉아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접견실에 들어가니 이 같은 대통령은 보이지 않았다. 박정양은 평민적이며 수수한 옷차림을 한 클리블랜드 대통령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어쩔 줄 모르고 있는 박정양에게 (아마도 알렌이) “이분이 대통령이요”라고 말하자 그는 절을 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 관리들이 사절단의 절을 막았다. 미국 대통령이 큰절을 받고 매우 당황하여 화제가 되었다는 글도 있는데, 이건 1883년의 사건을 말한 것이다. 절을 올리지 못한 박정양은 크게 당황하여 횡설수설이었다고 한다.
박정양 일행은 곧 워싱턴 정가에 화려하게 등장한다. 위트니(William C, Whitney) 해군장관 부인이 베푼 리셉션에서 어깨와 목이 드러난 야회복(décolleté) 차림으로 춤추는 여자들을 보고는 벗은 여자들을 쳐다보아도 괜찮으냐면서 ‘미국 기생’들에게 호기심을 보였다. 알렌이 이들은 기생이 아니고 저명한 사회인사의 부인이나 딸들이라고 설명했다. 공사는 ‘이게 무슨 일인가, 옷을 입지도 않은 여자들을 여러 사람들 앞에 내세운단 말인가’라고 의아해했다. 일행 중 한 사람은 “떨고 있는 여자들에게 두루마기를 벗어 감싸주면 훨씬 따뜻할 텐데”라고 중얼거렸다 한다.
벗은 여인들로부터의 충격에서 깨어난 박정양은 이 여인들과 말을 나누어도 좋으냐고 물었다. 그렇게 해도 된다고 하자 다가오는 여인들과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한 남부 출신 여성은 박정양에게 아름다운 여자들을 보기 위해서는 남부를 여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조선공사는 근엄한 태도로 남부에는 미희들이 가득 차 있을 것이라고 응대했다. 대통령과의 만남에서는 허둥대던 공사는 미인들과는 대화에서는 아무런 실수도 없었다.
그 뒤 최악의 사건이 터졌다. 시가(cigar, 여송연) 밀수 사건이었다. 알렌은 서울에서 여행 준비를 할 때 일행이 필요 이상의 짐을 갖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한국인들에게 필요한 물건으로 추측하고 샌프란시스코 세관에서 비합법적 물건은 없다고 서명했다. 그런데 6개월 후 뉴욕 헤럴드지에 밀수 기사가 터진 것이다. 박정양은, 알렌에 의하면, ‘가장 비굴하면서 비참한 모습으로’ 사실을 고백했다.
그는 외교관의 면세 특권을 이용하여 세 상자의 면세 여송연을 가져와 필라델피아에서 몰래 팔았다는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한 수행원의 실수로 돌려 수습되었다. 여송연 사건으로 워싱턴에서 조선의 위신은 추락하고 원래 알렌이 고종에게 약속한 월가에서 차관을 얻는 것도 성사될 수 없었다 한다.
박정양은 워싱턴 공사관을 1888년 11월 대리공사 이완용에게 넘기고 12월 19일 일본 요코하마(橫浜)에 도착했다. 그러나 영약삼단을 지키지 않았다고 화가 난 원세개의 문책이 두려워 동경 공사관에서 머물다가 다음 해 5월 서울에 왔다. 원세개는 중국황제와 조선왕의 명령을 위반한 죄인으로 그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1889년 8월 한직으로 좌천되는 선에서 마무리된다.
△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ㆍ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
조국의 역사가 안겨다 준 수많은 비극이 있다. 그 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한 독립 투사와 여인의 사랑 이야기가 애절한 감동으로 다가와 그 여인이 옥중에서 쓴 수기 내용을 우선 써 내려가본다.
“박열을 처음 사랑하던 그 순간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도 박열의 식민지 조선 독립운동에 휘말리게 될지 모른다고…. 아무리 독립운동이 나의 사상에 반하는 것일지라도 나는 박열을 사랑했다. 사랑받고 있는 것은 타인이 아니다. 사랑하는 타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다. 즉, 그것은 자아의 확대라 할 수 있다. 나는 박열을 사랑했고 박열은 조선을 사랑했다. 그래서 조선을 사랑했고 조선 독립을 위해 나섰다. 박열의 동지들에게 말해 두고자 한다. 이 사건이 우습게 보인다면 우리를 비웃어 달라고. 다음 재판관들에게 말해 두고자 한다. 모든 것은 권력이 만들어낸 허위이고 가식이다. 부디 우리를 함께 단두대에 세워달라! 나는 박과 함께 죽을 것이다. 박열과 함께라면 죽음도 오히려 만족스럽게 여길 수 있다. 그리고 박열에게 말해 두고자 한다. 설령 재판관의 선고가 우리 두 사람을 나눠 놓는다 해도 나는 결코 당신을 혼자 죽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박열, 그는 1902년부터 1974년의 생애로 마감을 한 독립투사로 본명은 박준식이다. 경상북도 문경군에서 태어나 15세에 서울로 올라와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로 전학하여 재학 중에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퇴학당한다. 1919년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일본에서는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했고, 조선 최초 아나키즘 사상단체를 만들어 일본제국 왕을 폭탄으로 제거하려는 등 온몸으로 반제국주의 항일운동을 펼친 인물이다.
1920년 1월에는 일본에 있는 조선인 고학생들과 동경 조선고학생동우회를 결성해 조직활동을 시작했다. 박 열은 불령사(不逞社)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다가, 그 해 관동 대지진 이후 일본인 연인인 가네코후미코( 金子文子)와 함께 1923년 10월에 일본 왕자 히로히토의 혼례식 때 암살을 기도한 죄로 체포되었다고 한다. 박 열과 가네코후미코는 1926년 사형 선고를 받았다. 두 사람은 곧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지만 박 열은 젊은 청년시절 22년 2개월간의 기나긴 옥살이를 마치고 1945년 10월 아키다 감옥에서 미군에 의해 석방되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에는 일본에서 우익 교포 단체인 재일조선인거류민단을 조직하고 단장을 맡았다. 1947년 10월 민단 정기대회에서 이승만 계열의 남한단독정부수립 노선을 지지했고,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의 초청으로 1949년 영구 귀국했다가 6.25 한국전쟁 발발 당시 납북되었다. 북한에서도 군대 축소 및 국제 중립국화 등에 노력을 기울였고 1974년 서거하여 그 유해는 평양 애국열사 능에 묻혀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 장이 추서되었다고 한다.
1926년 박 열과 옥중부부가 된 가네코 후미코, 그녀는 조선을 사랑한 일본여인이다. 요코하마에서 사생아로 출생한 그녀는 가난한 가정환경과 성적학대로 불우하게 살아왔다. 제국주의 일본의 모순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군국주의에 반감을 가져온 자유여성으로 23살의 짧은 삶을 살았다. 젊은 시절 약7년 동안 조선 부강 땅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살아왔고 1919년 에는 부강에서 횃불 만세운동을 목격한 바가 있다. 그녀는 도쿄시내의 작은 오뎅 집에서 일하면서 조선유학생들과 교류하였고, 우연히 한 조선잡지에 실린 박 열의 자작시를 읽고 강한 감동과 함께 그를 흠모하게 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곧 사상공감에 이르렀고, 민족적 차이를 넘어 계급적 동지로서 뜻을 같이하고 항일활동을 함께 펼치면서 자연스럽게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히로히토 암살을 기도한 후 체포되었고 서로 다른 감옥에 수감되었다. 옥중 부부가 된1926년 불과 몇 달 후 그녀는 결국 감옥에서 목을 메어 자살인지 타살인지 미스테리한 의문사로 생애를 마감했다고 한다. 죽은 후에는 일본 내에 그녀의 시신을 거둬줄 사람이 없어서 옥중에서 결혼서류를 작성하고 박씨 집안의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박 열의 형은 그녀의 유골을 인수하여 남편의 고향인 문경, 박 열 의사 기념관의 옆에 안장시켜 놓았다고 했다.
우리 조국의 사랑뿐만 아니라 투철했던 한 독립투사와 일본인 가네코의 끈질긴 사랑이 잔잔하게 가슴에 울려온다. 서로가 원수의 국적이었지만 남녀의 사랑으로 함께한 굳은 의지가 죽음도 불사했다. 한 독립투사는 조국을 위해서 앞장섰지만 일본인 여성을 사랑하게 되고 아내로 두었던 것이 오히려 해가 된 것이었을까? 무서운 권력 앞에 처절히 죽어가며 한 남성을 사랑하는 어느 여인의 절규가 애절하기만 하다. 박 열의 업적과 가네코의 항일운동의 업적은 현재 남 북한 양쪽뿐만이 아니라 고향인 문경에서 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두 남녀의 시신은 남과 북으로 서로 떨어져 있어 더욱 깊은 아픔 으로 남는다. 필자에게는 지금도 의사 박 열은 가네코의 기일이 되면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고 하는 말이 애달프게 다가온다. 가네코 후미코 그녀의 자서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라도 구입해 봐야 할 것만 같다.
[출처] “한 독립투사의 사랑이야기”|작성자 로즈와이
도사 되는 법?
무림의 비급은 인연 있는 자의 것이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누구나 가질 수 없어 비급이라 했던가
어언 나이 70을 넘었다
고령사회에서 평균연령 100세 이상을 산다고 하는데 우리도 피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하루가 다르게 빠르고, 계속해서, 새롭게 변하는 IT 세상에서 알파고 아이들과 어울려 살아가려면 앞장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뒤따라가기도 버겁고, 쳐지면 짐이 되어 걸림돌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난날에는 명절이다 하면 시끌벅적 건너 뛴 시간 이어주는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요즘은 “안녕 하세요” 인사만 끝나면 각자 스마트 폰 하나씩 들고 어느 구석 찾아 벽에 기대 카톡, 게임, 페북에 열중하며 혼자서 웃고 찡그리고 즐겨서 명절이어도 고향이 조용하다는 쓴웃음 소리도 있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귀엽고, 궁금한 게 많으신 조부모님께서 말을 붙여보지만 눈길 한번 없이 입으로만 단답식 대답에 부모가 꾸지람도 해 보지만 소용없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아 내 자신이 바뀌어보자 생각하고 IT를 배워보기로 했다.
우선 컴퓨터를 배워 메일이라도 보내봐야겠다는 소박한 생각에 시작한 컴퓨터.
시작은 켜고, 끄고, ID 만들고 독수리 타법이었다.
친구들에게 짧으나마 10행 미만의 글 하나 보내는데 한나절
그런데 격려의 답장이 오고
곧 이어 전화가 와 컴퓨터 배우길 참 잘 했다며 별 다섯짜리 도장을 찍어준다느니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신났다.
뭔가 하나 시작 했는데 주위에서 그게 잘 한 짓이라니 너무 신났다.
문장이 늘어나고 답장이 여러 곳에서 오는데도 글 쓰는 시간은 좀체 줄지 않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엉덩이 진물 날 정도로 앉아 보내고 또 보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조선일보와 유어스테이지 (주)시니어 파트너즈에서 강사과정 안내문을 컴퓨터로 받아보니 새삼 신기했고 그 위력을 알 것 같았다
강사과정을 공부하며 아쉬웠던 부분은 파워포인트 강의안을 만들어야하는데 그런 실력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만들려니 그때마다 부탁하는 것이 너무 미안하고 나의 부족함이 싫어 새삼 컴퓨터를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는데 2015년 도심권 이모작센터에서 SNS기초반이 있다는 광고를 컴퓨터로 접하고 등록해 가보니 베이비부머 수강생이 많아 정말 놀랬다
시작이란 이제까지 해보질 않던 것을 하는 것이니 두근거리는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나처럼 아랫사람에게 지시하면 척척 되던 시절을 겪은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한 울타리에 모아놓은 모습이었다.
켜고, 끄기부터 시작해 자판을 외우라는 숙제가 떨어졌고 독수리 타법을 생소한 10손가락 운지법으로 고치는데 집에 와서도 계속 연습하다보니 이젠 독수리 타법으로는 오히려 불편해지며 점차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애국가, 명시 등을 치며 어느 시점에서 행을 바꾸고, 여백의 아름다움을,
글자체의 종류와 적용 사례, 내용에 따라 한 장에 들어가는 글자 크기, 배열 그리고 속도를 익혀갔다
노트북을 하나 사 지참하고 교육을 받다보니 손에 익숙해져 슬슬 넘어가는 손놀림만으로도 신기했다
3개월 후 시험에서 1/2 합격선에 들어 심화반에 들어갔다
문제는 스마트폰이었다
컴퓨터와 함께 스마트 폰 교육이 병행되었는데 컴퓨터보다 어려운 게 스마트 폰이란 걸 처음 알았다
그러나
스마트 폰만 제대로 알면 컴퓨터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페이스 북, 트위터, 밴드로 영역을 넓히다보니 재미있어 하나하나 신기함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블로그, 카페, 동영상을 배우며 숙제는 간단했다
단 한줄, 한 컷도 좋으니 매일 올리라는 것이었다.
남들은 매일이라는 이게 쉽질 않았나보다
나는 무슨 일이든 남보다 빠르질 못 해 오죽하면 별명이 “느림보”일까.
그렇지만 느리기는 해도 꾸준함은 있기에 하루도 빠짐없이 올리길 해
3개월 후 1/2 탈락자 명단에서 빠져 전문가반으로 올라갔다.
구글의 여러 기능, 스프레드시트, 모두, 마인드맵, 음악 동영상 시간과 분위기에 맞는 것 골라 넣기, 유튜브 옮겨 자르고, 붙여 필요 부분만 사용하는 법 등을 신나게 배웠다
무엇보다 강사로서 PPT 배우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가장 백미는
누구나 팀을 이뤄, 새로 공부하시는 분들 기초반에서 선생님 보조강사 하는 것이었다.
그때 보조강사는 물론이고 누군가를 가르쳐봐야 가르치기 위해서도 자신이 배운 걸 제대로 익힐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수료를 위한 마지막 시험은
자신의 스프레드시트 만들어 자신의 전문분야 동영상 15분 이상 6개 만들어 그 주소를 넣을 것
SNS 관련 모임 6번 개최한 기록 만들어 넣을 것
타 SNS 관련 모임 6번 참석해 자신이 타 모임에서 기여, 보조한 기록 만들어 넣을 것 등을 스프레드시트 지정 란에 채우고 클릭 한 번으로 바로 열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니 거짓말도 못하는 것이었다.
강사다보니 내 강의 장면을 누군가 동영상 찍어주질 않으면 안 되는데 미리 알았으면 틈틈이 준비했으련만 발등에 불이 떨어져 약 한 달을 만사제치고 그 일에 매달려도 쉽지 않았는데 다행히 강의가 곳곳에 있어 첫 번째는 채울 수 있었다
SNS관련 모임 6번과 타 SNS관련 모임 참석은 동기생들과 짜고 서로 모임 주선하고 참여해 주는 것으로 하렸다가 선생님께 들켜 자신의 집 구역을 설정하고 그곳에서 모임 하라니 지역이 각각이라 동기들도 가고 오기가 버거워 잘 되질 않았고 나 자신도 멀리까지 찾아가 참석해 줄 형편이 되질 않아 애를 먹다 미완성인체 겨우 턱걸이로 수료증을 받고나니 어느새 1년이 지났다
평생 써먹을 걸 배웠는데 얼마나 큰 성과인가
스마트 폰이 내 손 안에 착 달라붙은 기분이다
바로 IT 비급은 내가 차지한 것이었다.
요즘 중학생 학습 방법은
한 반을 1팀 5~6명, 4~6팀에게 다음 시간 수업할 내용을 팀별로 나눠주고 각 팀별로 주제 만들어 PPT 만들어 발표하게 해 시험, 발표 각각 50%씩 반영 성적을 낸다고 한다.
효과는 팀웍의 중요성과 협동의 가치를 자연히 익히게 하며, 있을 수 있는 지진 한 친구를 어떻게, 각기 다른 능력의 조화여부, IT는 물론 회전식 역할분담까지 하다보면 자연히 인성을 익히고 학습을 놀이형태를 빌려 재미로 승화시키는 것이라 한다.
중학생들 IT 능력은 뛰어나다
노트북, 스마트 폰은 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장난감에 불과하다
우리와 실력인지도 모르고 일상에서 즐기며 놀이로 자유자재 다루는 그들과는 게임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사실 버겁다
IT 도사되는 비급을 열어보니
“IT 지름길은 없다
꾸준히 만지며 실패하고 익히는 길만 있을 뿐이다“
라고 쓰여 있었다.
23년 전 필자 가족은 가까운 친지들과 사이판, 괌으로 3박 4일 휴가를 갔다. 모처럼의 해외여행이라 세 가족은 모두 웃고 떠들며 매 순간을 만끽했다. 그렇게 꿈 같은 3박 4일이 끝나고 마지막 날 비행기를 타기 위해 시간에 맞춰 괌 국제공항으로 나갔다.
그런데 즐겁던 여행은 그때부터 배배 꼬이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연발한 것이다. 두 집 아빠들은 직장 때문에 반드시 한국으로 가야 했다. 다행히 다른 비행기 편이 있어 두 아빠와 한 가족은 먼저 떠났다. 그러나 필자 가족 모두와 다른 한 가족 일부는 덩그러니 남게 됐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필자 일행은 괌에서 하루를 더 자게 됐다.
다행히 항공사가 호텔 방을 제공했다. 그래서 필자 일행은 별 불만 없이 호텔로 들어가 각자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필자도 샤워기를 틀어 공항에서 대기로 생긴 피로를 풀었다. 그런데 한참 샤워하고 있던 그때였다. 갑자기 샤워기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몸도 기우뚱거렸다. ‘쾅’하는 기분 나쁜 소리도 들렸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 밖으로 나가려는데 몸이 휘청거려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
남편이 소리 질렀다. “다들 엎드려! 바닥에! 책상 밑으로 들어가! 지진이다. 지진!” 머리털 나고 처음 겪는 지진이었다. 알몸으로 후다닥 바닥에 엎드렸다. 엎드리자마자 TV가 ‘탕’하며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벽에 붙은 액자도 납량영화의 한 장면처럼 혼자서 ‘부르릉’ 소리를 냈다. 엎드렸는데도 몸은 계속 이리저리 굴렀다. 이제 죽었구나 생각하며 눈을 감은 채 작은 아이만 찾아댔다. 지진으로 정전이 됐는지 호텔 방은 전기가 다 나가 완전히 암흑천지로 변해 버렸다. 그렇게 공포의 시간이 1~2분가량 지났을까? 남편은 다시 소리쳤다. “다들 밖으로 나가!”
헐레벌떡 일어나 공포심에 계속 떨리는 손으로 옷을 대강 걸치고 작은아이 손을 꽉 붙잡고는 엘리베이터 앞으로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작동이 멈췄다. 다시 비상구 계단을 찾은 뒤 계단을 통해 단숨에 1층 로비로 내달렸다. 9층에서 1층까지 1분이나 걸렸을까? 말 그대로 초특급 스피드였다. 삶을 향한 투쟁으로 상기된 얼굴과 헐떡거리는 숨소리였지만 모두가 살아서 다시 상봉했다.
이미 로비는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로 아수라장이었다. 알몸인 채 아랫도리만 손으로 가리고 있는 구레나룻이 수북한 중동계 사람, 젖을 물리다 내려왔는지 앞가슴을 풀어헤친 채 아기를 안고 있는 백인 아낙네 등 그야말로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아우성을 지르고 있었다. 지진이 지나간 후 곧 커다란 해일이 닥칠 거라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일념에 남편은 전화로 택시를 찾았다. 다행히 한 택시기사가 연결돼 공항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공항 가는 길은 난장판이었다. 배가 뒤집혀 육지로 올라와 있었고 땅이 갈라져 차량이 처박혀 있었다. 필자 가족은 이런 아비규환 속을 뚫고 공항에 도착했지만 헛수고였다. 이미 공항도 닫혀 있었다.
필자 가족은 할 수 없이 공항 문 앞 처마가 있는 쪽에 구해 온 비닐을 깔고 앉았다. 공항이 다시 정상화되면 언제라도 떠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이들이 죄다 살아남기 위해 자기 나라말로 지껄여대는 바람에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여기선 못 있겠다 싶어 남편을 호텔 찾으러 보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다시 하룻밤 묵을 곳을 찾았다.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낡디낡은 숙소였으나 가장 안전하다는 내륙에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물론 이곳에서도 한숨도 못 잤다. 지진 공포 때문에.
다음 날 괌 당국은 청천벽력 같은 사실을 공지했다. “하루 더 묵어야 한다”는 것. 당국은 대신 고급 일본호텔로 필자 가족을 안내했다. 그곳은 모든 물품이 지진을 대비해 붙박이로 튼튼하게 붙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하고 안전한 호텔이라도 몸이 둥둥 떠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느낌은 떨칠 수가 없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사고가 가져다준 트라우마였다.
그렇게 삶과 죽음의 갈림길 속에서 이틀 밤을 새운 뒤 다음 날 드디어 고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필자 가족은 기내에서도 속이 울렁거렸다. 죽음의 문턱이 그렇게 후유증을 남겨 줬으나 공항에서 마중 나온 다른 가족들과 만나선 오열이 아닌, 한 줄기 눈물만 흘렸다. 기다린 그들의 아픔도 알기 때문이다. 5박 6일 유난히 길었던 ‘죽음 체험 여행’. 다시는 외국여행 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며 머리 숙여 신에게 깊이 감사했다.
그리스는 아름다운 곳이 많은 나라다. 아테네 거리에서는 여신이 금방 환생한 듯한 아리따운 여성들이 활보한다. 특히 그리스 여행의 백미는 ‘섬’ 여행이다. 200개의 유인도 중에서도 국내에 가장 많이 알려진 곳은 ‘산토리니’다. 그곳뿐 아니라 꼭 가봐야 할 곳은 ‘메테오라 수도원’이다.
그 아름답고 멋진 풍경은 시댁 어른들과 함께 떠난다 해도 모든 스트레스를 다 감싸 안아줄 것이다.
글·사진 이신화(on the camino의 저자, www.sinhwada.com)
화산섬 보트 투어는 유용한 패키지
TV 프로그램 에 소개되면서 광고 시너지 효과를 톡톡히 본 곳이 그리스다. 그리스의 수많은 여행지 중에서도 한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산토리니(Santorini) 섬이다. 특히 한국 사람들의 신혼여행지로 큰 인기를 누리지만 이 섬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어느 누구하고 동행하더라도 상관없다. 단언컨대 ‘묵은 시름’이 많은 사람들이 동행해도 그 아름다운 풍치에 반해 스트레스를 다 녹여줄 것이다.
산토리니는 에게해 남쪽 그리스령 키클라데스 제도(Kykladhes Is.) 남쪽 끝에 있다. 아테네에서 235㎞ 떨어져 있으며 중심 마을인 피라(Fira)를 포함해 13개의 마을이 있다. 보통 사람들이 산토리니라고 부르지만 정식 명칭은 티라(Thira) 섬. 티라는 크레타 문명과 미케네 문명의 중간에 위치해서 두 문명과 교류하며 발전했던 키클라데스 문명의 중심지였다. 기원전 1500년경, 이곳에서 대규모 화산폭발이 일어났고 이후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다. 1956년에도 화산폭발로 피라와 이아(Oia) 마을이 파괴된 적이 있다. 한때는 원형 섬이었는데 초승달 모양으로 변했고 잘려나간 절벽 위에 하얀 집들이 들어섰다.
산토리니의 중심 도시는 피라다. 하지만 여행이란 ‘첫인상’이 참으로 중요하다. 피라 마을이 산토리니의 중심지라 해도 섬 끝의 이아 마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움이 뒤떨어진다. 이럴 때는 먼저 ‘화산섬 보트 투어(Volcano Tour)’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부분 마을 여행사에서 티켓을 판매하는데 1일 코스를 이용하면 된다. 아티니오스 신항구나 피론(Firon) 구항구에서 배에 오르게 된다. 배는 가장 먼저 산토리니 서쪽에 있는 네아 카메니(Nea Kameni)와 팔레아 카메니를 간다. 나무 하나 없는 허허벌판의 척박한 화산섬의 돌멩이에는 아직도 지열이 남아 있다. 그다음 코스는 바닷속에서 용출되는 온천수에서 수영을 즐기는 것이다. 40도가 넘는 고온이다. 이어서 유인도인 티라시아(Thirasia) 섬에 다다른다. 배가 없으면 접근할 수 없는 작은 섬이지만 천혜의 매력을 갖춘 곳이다. 이 마을에서는 맛있는 해산물 요리를 먹거나 마을까지 올라서 멋진 전경 사진을 찍으면 된다. 이때 당나귀(동키)를 타보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다. 화산섬 보트는 이아 마을을 잇는 항구에서 내릴 사람에게 선택권을 준다. 대신 저녁 8시에는 셔틀버스가 운행되고 있어서 숙소로 이동하는 데 전혀 부담이 없다.
온통 캘린더 사진을 만들 수 있는 곳, 이아(Oia) 마을
이아 마을을 산토리니 첫 마을로 보게 된다면 ‘아, 정말 산토리니에 오길 잘했군’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어느 곳에서나 내 몸을 조금만 움직여서 셔터를 누르면 캘린더 사진이 된다. 깎아지른 절벽 위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하얀색 집들. 미로처럼 나있는 좁은 길목에 피어난, 화사한 부겐빌레아 꽃이 눈 시리다. 앙증맞고 귀여운 숍들이 열지어 이어지는 곳. 지붕이 파란 곳은 그리스 정교회의 돔 지붕뿐이다. 하얀 교회의 파란색 돔과 에게해의 푸른 물빛이 어우러진 풍경에 넋을 잃는다. 발길은 내내 하늘을 날아다니는 듯하다.
그나저나 이 섬의 건물들은 왜 하얀색일까? 건물 색채에 대한 사람들의 설명은 제각각이다. 외세에 대한 저항의 의미가 있다는 얘기가 많다. 그리스가 외세에 점령당했을 때 국기 좌상단의 십자가 색을 따 외벽을 하얗게 칠했고, 파랑 바탕색으로 창틀을 장식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산토리니를 빛나게 하는 곳은 이아 마을이고 석양시간이 되면 굴라스 성채 쪽으로 몰려드는 인파로 인산인해가 된다.
이아 마을을 먼저 보고 난 후 피라 마을을 찾아보자. 피라 마을은 산토리니의 명동 격으로 테오토코플루(Theotokopoulou) 광장이 중심이다. 골목을 구경하거나 교회나 수도원, 고고학 박물관 등을 보면 된다. 또 절벽 아래 항구까지 566개의 지그재그 계단 길이 놓여 있는데 당나귀나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내릴 수 있다. 또 피라에서 10분 거리에 이메로비글리(Imerovigli) 마을이 있다. 산토리니에서 유일하게 언덕 위에 지어진 성채 마을로 스카로스(Skaros) 성까지 걸어보자.
렌터카를 이용한다면 동쪽 해변의 블랙, 레드, 화이트 비치를 따라 해안 드라이브를 즐겨보자. 블랙 비치라고 불리는 ‘카마리(Kamari)’는 해변 길이가 1㎞가 넘는 산토리니 대표 해변으로, 별칭처럼 온통 검은빛의 모래가 깔려 있다. 카마리 비치 인근에는 고대 티라 유적지가 있는데 메사 보우노 봉우리(369m) 꼭대기까지 트레킹하면 된다. 또 페리사(Perissa) 해변 근처에는 워터파크가 있다. 피라의 남단 아크로티리(Akrotiri)에는 선사 유적지가 있다. 에게해에서 발견된 선사시대 유적지 가운데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는 붉은 퇴적층이 침식되면서 만들어진 레드 비치와 화이트 비치가 있다.
기암 위에 세워진 수도원 6곳 메테오라(Meteora)
그리스 여행 중에서 메테오라를 빼놓는다면 여행의 재미 하나를 잃어버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테오라는 그리스어로 ‘공중에 떠 있다’라는 뜻으로 ‘하늘의 기둥(columns of the sky)’이라고 불리는 지역이다. 유네스코는 이곳의 기묘한 자연경관과 경이로운 종교 건축물의 가치를 인정해 1988년 세계복합유산으로 지정했다. 칼람바카(Kalambaka) 마을에 도착하면 우선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마을 뒤로 거대한 암산이 산봉우리처럼 연이어진다. 400m 이상의 바위 봉우리들은 테살리아(Thessalia) 평원에 있는 페네아스(Peneas) 계곡과 칼람바카라는 작은 도시를 에워싸고 있다. 이 봉우리들은 약 6000년 전, 강에서 원추형으로 나타났다가 지진 활동으로 변형되면서 생긴 것으로 조사되었다. 메테오라의 기암들은 사암과 역암이 강물에 의해 침식되어 생겨난 거대한 암산이다. 그것보다 더 강렬한 것은 기암 위에 지어진 수도원이다.
그나저나 어떻게 기암 봉우리에 건물을 지었을까? 이곳은 11세기부터 수도사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정치가 상당히 불안했던 14세기에 테살리아의 수도원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봉우리 위에 건축된 것이다. 성 아타나시우스가 최초로 수도원을 세웠다고 한다. 전성기인 16세기에는 20여 개의 수도원이 있었다. 현재는 수도원 5곳과 수녀원 1곳이 남아 있는데, 2차 세계대전때 파손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최초로 창건되고 가장 큰 대메테오라 수도원, 바를라암 수도원, 암벽에 붙어 있는 모습인 로사노 수도원, 성 니콜라스 아나파우사스 수도원, 가장 올라가기 힘든 트리니티 수도원(007시리즈 의 로케이션), 성 스테파노 수녀원 등이다. 현재 수도원에는 수사와 수녀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관광객들의 방문이 제한된 범위에서 허용된다.
바위의 평균 높이는 300m, 가장 높은 것은 550m나 된다. 좁은 바위 꼭대기에 아찔하게 서 있는가 하면, 절벽 옆에 붙어 있는 형상이기도 하다. 분명코 바위 위에서 수도원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아 저곳으로 훨훨 날아보고 싶다’고 말이다.
Travel Tip!
항공편 한국에서 그리스 직항편은 없다. 프랑크푸르트, 파리, 로마, 이스탄불, 두바이 등을 경유해 아테네로 들어가면 된다. 많은 이들이 터키 여행과 함께 그리스를 선택한다. 터키항공을 이용해 이스탄불을 거쳐 그리스 아테네로 들어간다. 인천~이스탄불 구간은 주 11회, 이스탄불~아테네 구간은 주 42회 운항한다.
음식정보 그리스의 일반 식당인 타베르나(Taverna)가 있다. 전통 음식으로는 수블라키(Souvlaki), 게미스타(Gemista), 무사카(Moussaka), 기로스(Gyro, 기로, 자이로, 지로스라고도 함) 등을 꼽는다. 수블라키는 흔한 꼬치구이라 말할 수 있다. 게미스타는 피망 등 야채에 고기와 밥을 넣어 만든 것으로 동양인 입맛에 잘 맞는다. 무사카는 야채와 고기를 볶아 화이트소스를 뿌려서 구운 것. 기로스는 피타 빵(Pita bread)에 바삭하게 구워진 고기를 잘라 넣고 소스, 야채를 넣어 케밥처럼 만든 요리다. 또 슈퍼 등지에서 간단하게 사 먹을 수 있는 돌마데스(Dolmades), 혹은 돌마스(Dolmas)가 있다. 일명 ‘포도잎 꼬마 쌈밥’으로 간단하게 요기하기에 좋다.
전통 술 그리스의 국민 술이라 일컬어지는 우조(Ouzo)와 메탁사(Metaxa)가 있다. 2006년부터 오직 그리스에서 생산되는 ‘우조’는 40도 이상의 독한 술로 미틸리니에서는 해마다 축제를 연다. 포도+아네스씨+각종 허브로 만든 이 술은 문어요리를 안주 삼아 함께 마신다.
숙박정보 트립어드바이저(www.tripadvisor.co.kr) 사이트에서 순위를 확인하면 숙박 전문 인터넷 사이트로 연계가 가능하다. 가족 인원수가 많다면 메테오라에서 캠핑장을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통화정보 유로 사용
사용 전압 표준 전압 220V, 50㎐를 사용
인터넷 정보 대부분의 식당이나 숙소에서 인터넷이 잘된다.
치안정보 그리스는 비교적 치안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지하철역 등에서는 날치기나 소매치기 등을 유의해야 한다.
기타 여행지 미코노스, 델로스, 낙소스 섬을 비롯해 희랍인 조르바의 배경이 되었던 크레타 섬 여행도 해봄직하다. 그 외 델피, 테살로니키, 올림피아, 칼라마타, 코린토스, 티바스 등 갈 곳은 너무나 많다. 아테네 시내와 수니온 곶 여행도 좋다.
일본 통신원 이태문 gounsege@gmail.com
시는 울림이어야 하고, 잠언 혹은 금언은 공감을 얻어야만 시대를 뛰어넘어 빛나는 법이다. 수많은 위인과 명인들이 저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철학을 담은 명언을 남겼지만, 시바타 도요(柴田トヨ) 할머니의 이 한마디 ‘나도 괴로운 일 많았지만 살아 있어 좋았다’는 참으로 깊은 울림이며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영원히 빛날 것이다.
1911년 6월 26일 일본 도치기현 도치기시에서 쌀가게를 하는 부유한 가정의 외동딸로 태어난 할머니는 시와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았다. 10세 무렵 아버지의 가산 탕진으로 집안 형편이 안 좋아져 학교를 갑자기 그만두었고, 이후 전통 여관과 요리점에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면서 더부살이를 했다. 그런 와중에 20대에는 결혼과 이혼의 아픔까지 겪었다. 그리고 33세에 평생을 함께할 요리사 시바타 에이키치를 만나 재혼해 외아들을 낳았다. 그 후 재봉일 등 부업을 해가며 알뜰살뜰 그리고 정직하게 생계를 꾸렸고, 1992년 남편과 사별한 후에는 우쓰노미야(宇都宮)시에서 20년 가까이 홀로 생활했다.
이처럼 글 쓰는 일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이 살아오던 할머니는 허리가 아파 취미였던 일본 전통무용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돼 크게 낙담했고, 그런 모습을 본 60세를 넘긴 외아들의 권유로 92세 때 처음 시를 쓰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산케이신문’ 1면 최상단에 위치한 ‘아침의 시’ 코너의 단골 투고자였으며, 일본의 대표적인 시인 신가와 가즈에(新川和江)는 그녀의 시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던 가운데 2009년 10월, 99세의 나이에 자신의 장례비용으로 모아둔 100만 엔을 털어 첫 시집 를 자비 출판했다. 그 후 아스카신샤(飛鳥新社)가 내용을 추가하고 양장판으로 재출판해 2012년 8월 시점에 160만 부를 돌파하는 초베스트셀러가 됐다.
할머니는 일본의 유명 샹송 가수 구보 도아코(久保東亞子)가 대표 시 ‘약해지지 마’에 곡을 붙여 노래한 것이 계기가 되어 NHK 라디오 제1방송 에 출연해 “많은 사람들의 애정을 받아 지금의 내가 있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2010년 12월 31일에는 NHK TV의 휴먼 다큐멘터리 이 특별 방영됐으며, 2011년 9월엔 만 100세를 맞이한 기념으로 두 번째 시집 (아스카신샤)가 출판됐다. 그해 10월 10일 NHK TV에서 가 방송돼 많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특히 그해 3월 11일에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 일본 열도가 큰 충격과 상처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여서 온갖 풍상을 다 이겨내고 삶에 대한 긍정적 생명력이 녹아들어 있는 할머니의 시는 든든한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시바타 할머니는 2013년 1월 20일 0시 50분께 우쓰노미야시 자택 부근에 있는 사설 요양원에서 향년 101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외아들은 “어머니께서 정말 평화롭게 고통 없이 가셨다”며 “100세 때까지 계속 시를 쓰셨고 원기는 있으셨지만, 지난 반년간은 걸을 때 부축을 받아야 했다”고 전했다. 할머니가 숨진 그해 늦깎이 시인의 인생을 그린 영화 가 제작돼 개봉됐다. 국내에서는 세상을 등지기 직전 가 번역 출판됐으며, 대만과 미국 등 해외에서도 속속 번역본이 소개돼 한 시대 국경과 이념을 초월한 인류의 희망 전도사로 자리 잡았다.
92세에 시작해 100세까지 시와 함께하며, 지난 100년간의 삶을 잔잔하게 들려준 할머니는 초고령사회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당당하게 맞서 스스로의 길을 새롭게 일구어나갔다는 의미에서 더욱 가치가 있다. 향기로운 결실을 맺은 인생의 황금기가 100세이며, 뒤늦게 발견한 자신의 재능을 활짝 꽃피운 것도 바로 100세였다.
독자들은 세계 최고령 시인이자 인생의 선배인 시바타 할머니를 통해 삶의 지혜를 배우고, 용기의 메시지를 통해 저마다의 삶을 추스르는 힘을 얻는다. 그것은 할머니 시인의 오래 묵어 우러난 인생철학이자 삶의 구수한 맛일 것이다.
비록 할머니는 이 세상을 떠나 저 하늘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지만, 아직도 이렇게 우리들에게 속삭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