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트레킹 때문에 네팔이라는 나라에 처음 갔다. 네팔은 한반도의 약 70% 정도 면적이며 인구는 대략 3000만 명이다. 인도, 중국, 부탄, 방글라데시에 둘러싸여 있는 내륙 국가다. 1인당 GDP가 2011년 기준으로 835달러에 불과한 빈국이기도 하다. 한국에 약 5만 명의 네팔 근로자가 와 있으며 한 해에 1만여 명이 입국을 대기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경쟁률이 8대 1이나 되어 한국행도 쉽지 않다고 했다. 전 인구의 90%가 농업에 종사한다. 종교는 대부분 힌두교를 믿는다. 세계 10대 고봉 가운데 8개를 보유한 산악 국가라 등산을 좋아하는 한국인이 2017년 기준 약 5000명이나 다녀갔다고 한다. 트레킹 비수기인 지금도 오가는 사람들이 온통 한국 사람이다.
이번 히말라야 트레킹 프로그램에는 네팔 시내 관광도 있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찍고 3일간 하산한 후에 포카라 시와 수도 카트만두 시내를 관광했다. 포카라 시는 그나마 좀 나았으나 카트만두 시내는 그야말로 먼지구덩이 속 같았다. 1월이 건기라서 더 그랬겠지만 마치 밀가루 같은 흙이 비산하며 먼지를 일으켰다. 서울도 미세먼지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카트만두는 마스크 없이는 돌아다니지 못할 정도였다. 서울은 먼지를 쓸어내는 살수차가 다녀서 깨끗한 편이다. 그러나 카트만두는 엉망이다. 2015년 7.8도의 강진이 지나간 후 도시도 많이 파손되어 있었다. 세계문화유산들도 거의 절반이 이때 파괴되어 복구 중이다.
네팔이 행복지수 세계 3위 국가라는 사실이 내 관심을 끌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현지 가이드는 한국에서 10년간 일하면서 한국과 네팔을 비교해봤다고 했다. 네팔 사람들은 욕심이 없다고 했다. 너무 열심히 일하는 한국 사람들에 비해 네팔 사람들은 얘기하는 것을 좋아해서 일의 능률이 안 오른다고 덧붙였다. 우리 일행은 산촌의 한 학교에 컴퓨터 12대를 기증했다. 50년 역사에 컴퓨터 구경은 처음이라고 했다. 시장과 내외빈이 많이 참석했다. 그런데 공연을 포함한 축사가 무려 3시간 동안 이어졌다. 현지 가이드는 5분이면 충분할 축사를 각자 20~30분씩이나 하는 현장 사례를 들어 네팔인을 설명했다. 네팔 사람들은 순박한 편이다. 한국에 5만 명이나 와 있는데도 큰 문제 없이 조용히 일하고 있어서 우리가 잘 몰랐던 것이다.
카트만두에서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박타푸르를 방문했다. 사원 및 여러 유적들이 있는데 이곳도 지진으로 파손되어 복구 중이었다. 좁은 골목에는 오토바이와 트랙터가 복잡하게 오가서 정신이 없었다. 시내 몇 곳을 더 다녔는데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것이 모두 사원이었다. 네팔인들이 이마 한가운데 그리는 빨간 점은 ‘제3의 눈’이라 한다. 부처님이 보고 있다는 의미라 했다. 누구나 그렇게 신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티베트 난민촌을 돌아보고 중국이 무자비하게 티베트를 공격한 역사로 볼 때 네팔도 중국의 눈치를 많이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네팔도 중국이 공격할 수 있는 것이다. 인도도 이웃 대국이라 눈치를 본단다. 오일 등의 공산품을 인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르카’라는 네팔 용병은 용감하기로 유명하다. 시내에서 구르카 용병들이 사용하는 칼을 파는 가게가 많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구르카다’라는 서양 작가의 소개 글과 함께 구르카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이들 용병들이 해외에서 번 돈으로 히말라야의 계곡에 여러 개의 다리를 만들어 기증했다는 표석도 붙어 있다.
네팔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왕정국가였다. 지금은 민주공화국이다. 반군이 10년간 산에 숨어 살며 내전을 일으키기도 했다. 워낙 고산이 많아 호랑이, 곰 등 맹수가 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산속에 숨어 살던 반군들 덕분에 맹수가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히말라야 눈이 녹은 물은 당연히 1급수라 생각하고 마시고 싶었으나 풍토병이 우려되니 마시지 말라고 했다. 수력발전으로 전기를 만들고 있지만 전력 사정이 열악하다. 숙박업소인 롯지에서 휴대폰 충전료로 2000원 정도를 받고 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