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 전성기에 누렸던 최고의 영웅담이나 에피소드. 이상우 한국추리작가협회 이사장의 과거 그때의 시간을 되돌려본 그 시절, 우리 때는 이것까지도 해봤어. 나도 그랬어, 그랬지!! 공감을 불러일으킬 추억 속 이야기를 꺼내보는 마당입니다.
“태어나 하고 싶은 건 다 해봤다. 여한이 없다.” 80 평생을 산 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상우(84)가 그중 한 사람이다. 한국추리작가협회 이사장, 한국증권신문 회장인 그는 우리나라 스포츠신문의 산 역사로 창간하는 것마다 족족 대박을 터뜨려 ‘스포츠신문 업계의 미다스의 손’으로 불린다. 또한 50년간 역사 및 추리소설을 무려 400권이나 내고, 지금도 일주일에 7개 매체에 기고하는 왕성한 필력의 작가다. 에두를 것 없이 범상치 않은 그의 인생 속으로 직진해보자.
신문사 사장 된 신문팔이 소년 가장
“저와 신문의 인연은 대학 2학년 때인 1958년, 영남일보 견습기자에서 시작됩니다. 1964년 대구일보 최연소 편집부장에 이어 2년 후 한국일보사로 옮겨 또다시 최연소 편집국장(31세)이 되면서 한국일보사가 발행하던 ‘일간스포츠’를 만나게 됩니다.”
이상우는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경향신문 등을 섭렵하며 사장, 회장, 창업자 등 국내 최장수 언론인으로 자리매김했다. 패션 전문 프랑스 잡지 ‘엘르’의 한국 지사 대표로,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추계예술대학의 교수로, ‘세종대왕 이도’를 비롯, 추리소설 ‘악녀 두 번 살다’로만 50만 부가 팔린 잘나가는 소설가로 승승장구했다. 한글 가로쓰기체 신문(스포츠서울이 효시), 활판을 없앤 전산화 신문(소년한국일보가 최초) 시대도 그에 의해 열렸다.
1938년 경남 산청 출신으로 6남매 중 다섯째인 그의 10대는 전쟁 후의 피폐로 얼룩졌다. 6.25전쟁 때 전사한 형에 이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단칸방에는 자리보전한 할머니와 6명의 가족들. 며칠을 꼬박 굶고 어머니와 밥을 구걸하러 다녔지만 몇 숟가락 얻지도 못하던 때였다. 부친이 살아 계실 때도 구두닦이와 신문팔이로 가족의 생계를 도와야 했다.
이 무렵의 ‘웃픈’ 에피소드가 있다. 단칸방 주인집 남자가 영남일보 윤전기 기사였는데 퇴근할 때 신문을 10부 정도 몰래 빼와서는 돈을 나눠 갖자며 그더러 팔아오라고 했다. 다 못 팔 때도 있고, 비가 와서 신문이 젖을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신문 값을 그에게 물어내게 했다. 갑질 아닌 갑질로 횡포를 부리던 그 남자를 영남일보 기자가 되고 나서 윤전실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뒤가 켕겼는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긴 후였다.
“양공주 구두를 닦을 때가 제일 좋았죠. 뾰족구두인데다 면적이 적어서 구두약도 덜 들고 팁도 후했으니까요. 신문은 제가 잘 못 팔았어요. 배급소 앞에서 제 또래 소년들이 줄을 서 있다가 신문이 나오기 무섭게 받아가지고는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야 했지요. 번화가에 먼저 도착해야 한 장이라도 더 파니까요. 근데 저는 신문 연재소설을 읽고 나서야 팔았으니 늘 꼴찌였죠. 김대중 대통령도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그가 영어 학원을 다녔는데, 당시 자칭 국보 양주동 선생이 가르쳤다. 학원비가 있을 턱이 있나. 등록증을 재주껏 위조했다.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는 인식처럼 배움 도둑질도 같은 맥락으로 넘어가던 시절이었다. 양주동 선생은 훗날 한국일보 초청 좌담회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구두통에 교복을 쑤셔 넣고 다녔다. “아버지가 학교를 못 다니게 해서 중학생이 된 걸 숨겨야 했지요. 임종 머리맡에서 처음 말씀드리자 ‘하는 수 없는 일이지’ 하며 체념하셨어요. 그때부터 떳떳이 교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지식인으로 좌우익의 사상을 넘나들다 결국 목숨을 잃게 된 그의 형으로 인해 ‘머리에 먹물이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선친의 한 맺힌 신조였다. 실의에 빠져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더 이상 그의 앞길에 장애가 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가난이 발목을 잡았다.
“고등학교 원서 접수 마감일이었어요. 진학을 포기한 제게 교장 선생님이 무조건 원서를 넣으라고 채근하셨지요. 마감 1시간을 남겨놓고 어디 갈 데가 있어야죠. 길 건너에 대구상고가 있어서 거기다 넣었죠. 뜬금없는 상업고등학교 이력이 그래서 생긴 겁니다. 대학은 영남대 전신인 청구대를 나왔고, 전공은 국문학입니다. 당시 대학신문사 기자를 하면서 생계와 학비를 동시에 해결했지요.”
필화 사건 옥살이, 추리작가 변신 기회로
소설가 이상우는 1961년 대구일보에 ‘신 임꺽정 전’ 연재를 시작으로 지속적인 문단 활동을 이어오며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0매를 쓴 적도 있을 만큼 다작하는 작가다. 서울신문 편집부장으로 24시간이 부족하던 때에도 7개 신문사에 소설을 썼다. 연재가 여러 개다 보니 엇갈려 보내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하필 추리작가가 된 계기는 뭘까.
“대구일보 시절 제가 단 기사 제목이 5.16 쿠데타 세력의 보안법에 걸렸어요. 그때 화폐개혁이 있었는데 바뀐 화폐정책이 지방 말단까지 원활히 유통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방지대’라는 제목을 붙였더니 그게 꼬투리가 잡힌 거죠. ‘이방지대라니, 대한민국에 이방이 있다니, 김일성 나라가 있다는 뜻이냐?’며 억지를 부리면서 사형 구형까지 들먹였어요.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40일 동안 살인, 강도 등 잡범들과 한 방에 구금되어 있었지요. 3평 방에 21명이 수감되어 있었는데 때는 7월 말, 얼마나 더웠던지 내 땀, 네 땀이 뒤섞일 지경이었죠. 제가 신문기자라는 걸 알고는 사형수였던 감방 두목이 재미난 이야기를 하라는 거예요. 2인자 지위를 보장해주겠다면서. 신참인 제가 서열 2위가 되면서 변기통 옆에서 안 자기, 동료 수감자의 부채질 받기, 담배 먼저 빨기 등의 특혜가 주어졌지요. 주로 흉악범들이다 보니 탐정, 범죄 이야기를 좋아하는 거예요. 날이면 날마다 머리를 쥐어짜다 보니 출감 후엔 어느덧 추리소설 작가가 되어 있더라고요. 그때 100개 스토리를 창작했으니 작가의 토양이 수감 중에 빚어진 거죠.”
데카메론과 천일야화가 따로 없었다. 서울신문 시절, 바이엘약품사의 광고 모델이 되어 매스컴을 주름잡기도 했는데, 그 또한 추리소설 작가였기에 발탁될 수 있었다. 작품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골을 싸매다 바이엘사의 진통제를 먹고는 머릿속이 맑아져 글이 술술 풀린다는 콘셉트였으니. 당시 바이엘사는 각 나라마다 추리소설 작가를 광고 모델로 기용했는데 한국에서는 김성종을 제치고 이상우가 뽑힌 것이다.
스포츠신문 미다스의 손, 대박의 비결은?
“일간스포츠는 고우영의 만화삼국지, 김성종의 추리소설 연재 등으로 판매 부수를 올렸지요. 스포츠서울은 우리나라 최초의 순한글 가로쓰기가 판매에 주효했어요. 한겨레신문이 최초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그 공로로 2019년 한글날에 대통령 포상을 받았으니 제가 시작한 게 맞는 거죠. 가로쓰기 한글 신문이 나오자 젊은 세대가 열광했지요. 창간 첫날 90만 부가 팔리는 쾌거를 이뤘어요.”
그는 이때가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1985년, 스포츠서울을 만들 때 말이다. “전두환 때 프로야구가 생기면서 다른 신문과 달리 그 소식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스포츠 특성상 순간 포착을 위해 기존 1, 2명에 불과하던 사진기자를 15명까지 투입하여 읽는 신문에서 ‘보는 신문’으로 탈바꿈시켰죠. 컬러 지면으로 혁신을 이룬 것도 짜릿했습니다.”
컬러화 작업은 스포츠신문의 효시인 일본에서 배워갔을 정도였다. 1999년 국민일보로 영입된 후 만든 ‘스포츠투데이’는 창간 6개월 만에 고지를 탈환했다. 스포츠신문 5개 중에서 4개를 창간하거나 운영하면서 족족 대박을 터트렸다.
“IMF 직후라 실업자가 쏟아져 나올 때였죠. 스포츠투데이에 구직 정보를 총망라해 실었습니다. 좁고 긴 판형으로 바꾸고 제본을 시도한 것도 매출과 직결되었지요. 창간 기념으로 현대자동차 100대가 걸린 퀴즈를 100일간 냈습니다. 매일 자동차 한 대가 경품으로 나가니 신문이 팔릴 수밖에요.”
이어 2000년 ‘파이낸셜뉴스’를 창간한 후 다음 행보는 2001년 경향신문. 이번에는 사주가 되기로 하고 140억 원의 자본금과 250명의 임직원과 함께 경향미디어그룹을 꾸리고 회장직에 앉았다. 그의 나이 60세 때였다. 스포츠 기사를 포함한 종합일간지 ‘굿데이신문’이 탄생했다. 창간 기념으로 비행기를 경품으로 걸고 ‘대물’, ’쩐의 전쟁‘ 등 연재만화의 인기로 예의 순탄한 경영이 이어졌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고르바초프가 찾아와 모스크바에도 스포츠신문을 만들어달라고 제안했을 정도니. 그러나 악재의 그림자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스며들었다.
“2004년 무렵 무가지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신문이 안 팔리는 거예요. 우리도 무가지로 돌리고 광고비로 운영할 수도 있었지만 문제는 가판 보증금 50억 원을 돌려줄 방법이 없었던 거죠. 제가 만드는 신문은 무조건 팔린다는 인식 덕에 전국의 신문 가판대와 계약이 되어 있었는데 무가지 때문에 신문이 안 팔리니, 그 돈을 물어주고 나서야 무가지로 변신을 해도 할 거 아닙니까. 그때부터 광고도 안 들어오고 자금난에 봉착했던 거지요. 얼마 안 가 무가지는 인터넷 신문에 밀려 역시 쓴맛을 보게 되었지요.”
자본금 문제로 4년간 재판을 끌면서 법정 구속될 위기까지 간 후 무죄로 풀려났지만 300억 원에 달하는 전 재산을 잃었다. 70이 가까운 나이였다.
스물한 살 연하 아내 아침상 차리며 화가를 꿈꾸는 홈즈 아빠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서울신문이 철퇴를 맞자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설암을 앓던 아내의 간호를 위해 안방을 중환자실로 꾸몄다. 대형 병원 설비와 환자 침상을 집 안에 들이고 10년간 아내를 간병했다.
“먹지도 못하고 말도 할 수 없어서 필담을 주고받았는데 잠깐 외출할 때면 두려움에 젖은 애절한 눈빛으로 내 허리춤을 붙들곤 했지요. 그 사람 보내고 63세이던 2002년에 재혼했는데 제가 차린 신문사가 1년 만에 망했으니 저는 지금 아내 덕에 먹고삽니다.”
평생 4시간 수면을 고수해온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아내의 아침상을 차리고 애완견과 산책한 후 글을 쓴다. 스물한 살 연하인 그의 아내 권경희는 심리상담가이자 추리소설 작가다. 서로는 추리소설 응모전 심사위원과 당선자로 만났다. 애완견의 이름은 홈즈. 추리소설 작가 부부답게 ‘셜록 홈스’에서 따왔다. 하고 싶은 거 다 했다면서도 한 가지를 더 이루고 싶단다. 어릴 때 꿈인 화가가 되는 것이라고. 신문 발행인으로, 소설가로, 대학교수로, 화가로, 그는 일생이 참 좋은 시절이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환상이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환상, 사랑 자체에 대한 환상, 환상 없이는 애초 사랑이 설 자리가 없는 거지. 사랑이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사랑이 갖는 그 환상성 때문 아닐까? 거기에 착각의 고명을 올리면 한 그릇 사랑으로 손색이 없겠지.”
“그럼 넌 사랑해봤니? 네 식으로 말하자면 환상해봤니? 어째 네 말이 체념적으로 들리네.”
“…….”
친구와의 대화가 여기서 중단됐다. 환상을 발설하는 순간 은빛 날개가 잿빛으로 추락할 수 있기 때문에. 남루하고 추레한 본색이 드러나면 내 삶의 발판도 흔들리니까. 그에 대한 나의 환상이 지워질세라 지금도 그의 실체에 조바심 나는 덧칠을 수시로 해댄다. 평범한 청동상에 찬란한 도금을 입히듯. 그의 실체라니?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는 내게 더없이 따뜻하고 섬세한 사람 아니었나. 단지 어느 날 그가 차갑게 돌아섰고, 그럼에도 그를 잊을 수 없는 나의 고통의 간격을 환상으로 메우고 있을 뿐….
그와 나는 공중파 라디오 시사교양 프로그램 진행자와 출연자로 만났다. 직업 특성상 대중에게 알려져 있는 나를 만난다는 것이 그에게 약간의 설렘을 주지 않았을까. 물론 방송에 출연할 정도면 그 또한 알려진 사람이라고 해야 할 테지만. 그렇게 내가 다소 우위에서 우리의 만남이 시작되었지만 1년 후 나는 그에게 차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가 내 인생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그는 홀연히 떠났다. 이후 나는 7년째 ‘환상 중’이다.
내과의사인 그를 의학 정보 코너에 초대하고 일주일 후, 그는 방송 출연료로 내게 밥을 사고 싶다고 했다. 출연자들로부터 그런 식으로 식사 대접을 받는 건 종종 있는 일이라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일로든, 개인적 호감으로든 친분과 인연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자리였음에도 첫 만남부터 그와 나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이미 좋아진 관계에서 왜 우리가 서로 좋아하게 되었나를 분석할 필요는 없다.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찾는 거라면 몰라도. 어느새 그는 나에게 완벽한 남자, 나는 그에게 완벽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적어도 우리 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어떤 젊은 여자가 신랑감을 부모에게 소개하는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란다. 키 크고 인물 좋고 직업 좋은데,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엉망인 치열, 왜 여태 교정하지 않았냐고 여자의 부모가 물었다. 당황한 쪽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고. 1년 넘게 교제하면서도 남자친구의 치열이 심하게 고르지 못하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상대의 약점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약점조차 장점으로 보이게 하는.
그처럼 내게 혹은 그에게 남이 보기엔 약점이 있었다 할지라도 우리 또한 의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관계를 타인에게 노출한 적이 없었으니. 우린 그냥 자석의 S극과 N극처럼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겼다. 그도 돌싱 나도 돌싱, 게다가 50대 중반. 세상에 대해 너그럽고 둥근 시선을 가질 만한 때라는 보편적 공감대도 견고했다.
“지금까지 어디 있었니? 어디 있다가 지금 나타난 거야.” 세 번째 잠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속삭였다. 섹스 뒤의 후희처럼 그의 언어는 나른하고 황홀했다. 내 환상의 그물코는 그렇게 꿰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는 수시로 꽃이나 향수, 책 등을 선물했고, 치료에 대한 답례로 환자에게 받은 자잘한 명품 소품들도 자신이 갖지 않고 내게 건넸다.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도 내가 사는 동네 편의점에서 라면이나 과자 따위를 손수 사들고 오기도 하고, 새벽에 불쑥 내 집 앞에 서 있기도 했다. 마치 밤새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지치고 간절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봐야 그날 병원 일을 안정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면서. 한마디로 그는 자상하면서도 멜랑콜리했다. 유약하고 섬세했다. 내 안의 보호본능을 불러일으켰다. 내 모든 것을 내어줄 태세로 나는 감동했다. 환상과 착각의 그물이 빠른 속도로 짜여져갔다.
“헤어진 아내는 남편하고 자식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어. 착했지만 답답했지.”
돌이켜보면 눈치 챌 순간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스테이크의 마블링처럼 그의 맘짓, 말짓 사이사이에 그의 성격적 단면이 비쳤으니. 그게 이혼 사유가 될 수 있을까. 중년의 한국 남자가 그만한 일로 아내와 이혼을 한다? 남편과 자식밖에 모르는 그의 아내가 먼저 이혼을 요구했을 리는 없으니. 나도 이혼을 했지만 남편은 도박중독에 빠진 데다 재활 의지도 없었으니까. 적어도 그 정도 사유는 돼야 이혼까지 간다는 게 통념 아닌가.
머지않아 내게도 잔인한 순서가 닥쳤다.
“우리 이제 그만 끝내자. 언젠가는 이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어. 당신과 가까워질수록 그만 만나야 한다는 조급함이 맥박처럼 뛰었지.”
당신은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냐고 속삭일 때는 언제고, 처음부터 헤어질 궁리를 하고 있었다는 말은 또 뭔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내가 무슨 유부남의 내연녀도 아니고. 황당했다.
그렇게 나는 한 칼에 ‘정리’를 당했다. 나는 그에게 한갓 전리품에 불과했을까. 내가 뭘 잘못했냐고, 나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고치겠다며 붙잡고 매달릴 새도 없었다. 이후로 그는 전화와 문자, 이메일 등 일체의 연락 수단을 차단해버렸으니까. 계절이 변해 옷을 갈아입듯이 그의 변심과 이별 통보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불가항력적이었다.
우리 사이에는 조건의 장애도, 심리적 장애도 없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었다. 어쩌면 그 무장애가 장애였을까. 싫증과 권태의 요소였을까. 그는 나와의 관계에서 짜릿함을 추구했던 걸까. 한 여자에게 정착하지 못하는 방랑벽이 있었던 걸까. 한마디로 바람둥이였을까. 그의 아내도 나처럼 일방적인 이별 통보의 뒤통수를 맞은 걸까. 생각의 꼬리를 물어봤자 놀이터에서 신명나게 놀던 두 아이 중 하나가 ‘난 그만 집에 갈래’ 하고 폴짝 뛰어갈 때처럼, 홀연히 떠난 아이가 그였고 망연히 남겨진 아이는 나였다.
간신히 마음을 수습하고 일상을 꾸리며 방황을 환상으로 박제해 가슴에 들어앉힌 것이 어언 7년째. 오늘도 나는 환상의 도금이 행여 벗겨질세라 나의 지난 사랑을 가슴팍에 보듬는다. 나의 사랑이 허상은 아니었다는 주문을 외우며. 나는 비로소 그를 완전히 소유하게 되었다. 그에 대한, 사랑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않는 한 나는 그를 완전히 소유할 수 있다. 오늘도 내 사랑의 제단에는 환상과 착각의 향이 피어오른다.
“제덕아 사랑해. 제덕이 파이팅.” 지난 26일 김제덕을 키운 친할머니 신이남 씨(86)가 손자에게 보내는 힘찬 응원의 메시지가 전파를 탔다. 안동MBC와 인터뷰에서 손자에게 어떤 말을 해 주고 싶느냐는 질문에 신 씨는 “제덕아, 개밥 주러 가자”고 말했다. 다섯 살배기 손자와 함께 강아지에게 밥을 줬던 추억 덕분이다.
“코리아 파이팅!” 도쿄 유메노시마 양궁장을 뒤흔든 함성의 주인공, 열일곱살 김제덕은 할머니의 응원에 힘입어 올림픽 2관왕에 올랐다. 지난 1일 귀국한 뒤 JTBC와 인터뷰에서 그는 “올림픽 준비하느라 자주 찾아뵙지 못했는데, 할머니 목에 금메달을 걸어드리고 돌아가신 할아버지 산소에 인사드리러 가고 싶다”며 애정을 드러냈다.
6세 때부터 할머니 손에 자란 손자는 할머니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2016년 SBS 예능 프로그램 ‘영재발굴단’에 출연한 초등학교 6학년 김제덕은 “올림픽 국가대표가 돼 할머니 목에 금메달을 걸어드리는 게 꿈”이라고 말할 정도다.
조부모 손에 자라 성공한 아이들로 ‘미스터트롯’ 정동원을 빼놓을 수 없다. 2019년 말 KBS ‘인간극장’에 출연한 정동원은 폐암 진단을 받은 할아버지를 위해 가수로 성공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정동원의 할아버지는 TV조선 ‘내일은 미스터트롯’에 정동원이 참가하던 중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노래를 가르쳐 주고 가수의 꿈을 응원해 준 할아버지 덕분에 손자는 아이돌 못지 않은 인기 트로트 가수가 됐다.
조부모 육아의 좋은 예는 서양에도 있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가 도맡아 키우다시피 한 빌 게이츠, 복잡한 가정사로 하와이 외갓집에서 자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등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조부모 손에 자란 아이들 중에 크게 성공한 사례가 많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양육법에 특별한 비법이 있는 걸까.
무한한 사랑과 지지, 손주 정신 건강에는 백신
전문가들은 조부모 육아가 아이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선물한다고 말한다. ‘양육유형이 아동의 문제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석사논문을 작성한 최복경은 결론에서 “부모 중심의 육아보다 조부모가 함께 양육하는 형태가 더욱 유리하다”고 적었다.
어린이집 원장을 지냈던 최복경은 실제로 2~5세 영유아 원생 36명에 대한 ‘행동 관찰일지’를 두 달간 작성했다. 맞벌이 부부의 아이들이 조부모의 보살핌 유무에 따라 기본 생활습관, 의사 소통, 사회정서 발달 면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관찰했다.
결과는 조부모 육아의 완승. 생활습관과 의사 소통, 사회정서 발달 모두 조부모 손에서 자란 아이들이 우위를 보였다. 최 원장은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조부모 육아와 맞벌이 부모 육아는 정서적 안정감 때문에 차이가 난다고 설명했다. 그는 “양육 경험이 있는 조부모로부터 아이들이 보살핌을 받으면, 일하는 아이의 부모들을 안정시키는 효과도 있어 아이가 세상에 대해 신뢰감을 쌓는 데 큰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해외 연구 사례도 존재한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글렌 H 엘더 교수 연구진은 조부모와 함께 자란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학교 성적이 우수하고, 성인이 된 뒤에도 성취감이 높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연구진은 조부모와 자주 만나고, 조부모가 자신의 인생에 중요하다고 말한 아이들이 외부 환경과 관계 없이, 자신의 학습능력을 최대로 발휘했다고 평가했다. 조부모와 손주가 가까이 살고, 자주 만날수록 아이의 성적과 성취도가 높다는 얘기다.
미국 브리검영대학교 연구진은 10대까지 조부모와 친밀한 아이들이 친사회행동(봉사와 기부 등 보상을 바라지 않고 사회를 이롭게 하는 행동) 성향이 높다고 밝혔다. 아이들은 조부모가 손주에게 용돈을 주는 것보다 실용적인 기술을 가르쳐 주거나 용기를 북돋아 주는 일로 조부모에게 친밀함을 느꼈다.
조부모 양육이 아이들을 과체중이나 비만으로 만들 확률이 높다는 지적도 있다. 미국과 중국, 영국, 일본 등 8개 국가의 논문 23편을 비교 분석한 중국 상하이 대학교의 안 루오펭 교수는 “조부모에게 지금 세대에게는 오히려 풍요에 따른 과식과 비만이 문제임을 알려 줄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진이 꼽은 문제점은 조부모의 ‘지나친’ 너그러움이다. 그러나 조부모의 너그러움은 손주들에게 정신적 안정감의 기반이 됐다. 조부모가 너그러움의 정도만 조절한다면 손주의 몸과 마음에 좋은 영향만 미칠 수 있다는 뜻이다.
최근 과도한 스트레스 등으로 정신 건강을 위협받는 일이 잦아지는 점을 생각한다면, 조부모의 무한한 사랑은 손주에게 ‘정신 건강 백신’으로 작용할 것이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조부모 육아가 주목받고 있고,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2023년부터 식품을 ‘팔아도 되는’ 유통기한이 ‘먹어도 되는’ 소비기한으로 바뀐다. 그동안 소비자들은 유통기한이 지났다는 이유로 식품 상태와 상관없이 버리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이번 개정으로 버리는 음식이 줄어 음식물 쓰레기 양도 줄어들 전망이다.
소비기한이란 보관 조건을 준수할 경우 소비자가 먹어도 이상이 없다고 판단하는 기한이다. 제품 제조일로부터 소비자에게 유통·판매를 허용하는 기간이 아닌 소비자가 식품을 보관만 잘한다면 먹어도 안전에 이상이 없다고 판단하는 기한을 표시한다.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는 24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식품 등의 표시·광고에 관한 법률, 화장품법을 비롯해 6개의 소관 법률 개정안이 통과됐다고 밝혔다. 개정된 식품 등 표시·광고법에 따르면 2023년 1월 1일부터 식품 유통기한 표시제가 소비기한 표시제로 변경된다. 다만 우유는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라 2026년 수입 관세가 폐지되는 점 등을 고려해 8년 이내에 도입할 계획이다.
소비기한은 원료·제조방법·포장법·보관조건 등을 고려해 맨눈 검사, 미생물 측정 등의 실험을 통해 설정한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소비기한 도입으로 품질 변질 시점이 10일일 경우, 안전기한이 ‘6~7일’에서 ‘8~9일’로 늘어난다고 밝혔다. 식품업계는 소비기한 도입 시 두부·우유의 유통기간이 14일→17일, 액상 커피는 77일→88일, 빵류는 3일→4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식약처는 "제도 시행에 앞서 소비기한에 대한 충분한 인식과 공감대 형성을 위해 대국민 홍보를 강화하고, 유통 온도에 취약한 식품은 안전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관리를 강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치솟은 ‘밥상 물가’가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집밥 수요 증가, 조류인플루엔자(AI) 발생 등이 주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에 시니어들이 밥상을 차리는데도 차질을 빚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농수산물 유통정보에 따르면 7월 21일 기준 소매시장에서 달걀 가격은 한 판에 7481원으로 지난해 같은 달 5177원에 비해 44.5% 올랐다. 깐마늘은 1kg당 1만1918원으로 같은 기간보다 48.6% 올랐다. 사과는 10개당 평균 3만4029원으로 지난해 7월 2만6638원보다 27.7% 올랐다.
참외와 쇠고기, 돼지고기, 고춧가루 가격도 큰 폭으로 오르고 있다. 7월 21일 기준 고춧가루 가격은 1kg당 4만129원으로 지난해 같은 달 2만6113원보다 53.6% 올랐다.
이에 국내 엥겔지수도 21년 만에 최고치로 치솟았다. ‘엥겔지수(Engel’s coefficient)’는 가계 소비지출에서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중을 나타낸다. 보통 엥겔지수는 국민 소득이 높아질수록 하락한다. 소득이 늘어날수록 음식보다는 문화·여가 생활에 적극적으로 지갑을 여는 경향이 있어서다.
그러나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올 1분기 가계의 국내 소비 지출액 중 식료품과 비(非)주류음료 지출이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1분기 엥겔지수는 13.3%였는데, 지난해 4분기보다 0.1%포인트 상승했다. 분기 기준으로는 2000년 2분기 13.5% 다음으로 가장 높았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올여름 작황 부진이 예상되는 품목의 비축을 늘리고 계약재배 물량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우선 높은 온도와 강한 햇볕에 민감한 영향을 받는 고랭지 배추 1만톤(t)과 무 2000톤을 수매해 비축한다. 사과는 계약재배 물량은 지난해 7000톤의 두 배인 1만4000톤을 확보하기로 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선제적 물가 안정’을 강조했다. 홍 부총리는 19일 기재부 간부회의에서 “연간 2% 내의 물가 안정을 이루는 것도 필요하지만, 당장 추석을 대비해 농축수산물 가격 안정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으리으리한 웨딩홀과 값비싼 예물까지 자녀의 완벽한 하루를 위해 정신없이 준비하다 보면 결혼의 진정한 의미가 등한시될 때가 있다. 반면 이곳의 예식은 소박하지만 늘 한결같고 경건하다. 가난 때문에 결혼식을 미뤄야 했던 아픔을 교훈 삼아 주머니 사정이 어려운 이들에게 무료 예식을 올려준다. 그 철학은 50여 년째 현재진행형이다. 누군가에게는 유명 호텔보다 더 근사하고 특별한 추억으로 기억되는 이곳, 경상남도 마산의 ‘신신예식장’을 찾았다.
“자, 여기 보세요. 찍습니다. 김치, 참치, 꽁치~” 늦지 않게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식장으로 들어섰을 땐 이미 ‘찰칵’ 하는 셔터음이 울린 뒤였다. 백낙삼(90) 사장이 들고 있는 카메라 맞은편에는 나이 지긋해 보이는 부부가 어색하게 서 있다. 최필순(80) 이사는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신부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이날은 이광현(78)·박숙자(74) 부부의 리마인드 웨딩이 있는 날이다. 순백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신부는 아이처럼 “가자”며 신랑을 재촉했다. 신부가 옷을 갈아입으러 간 동안, 신랑에게 이곳을 찾은 사연을 물었다.
“6년 전 오늘, 아내가 사고를 당했어요. 뇌를 다쳐서 6개월 동안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다가 기적적으로 일어났죠. 올해가 결혼 50주년이기도 하고, 오늘이 다시 태어난 날이잖아요. 그래서 겸사겸사 기념하려고 서울에서 예약하고 왔어요. 기분이 참 묘하네요.”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부터 보통의 식장은 아니구나 싶었다. 삼색 페인트가 칠해진 건물 외벽과 ‘완전 무료’라고 큼직하게 적힌 간판이 그 비범한(?) 분위기를 증명해주는 듯했다. 내부로 입장하면 1960년대로 돌아간 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웨딩홀은 드라마 세트장이 아닌 그 시절의 잔상이다. 백낙삼·최필순 부부는 1967년부터 이곳에서 예식을 올리고 있다. 직원에게 들어가는 수고비 70만 원을 제외하고 예식에 드는 비용을 받지 않는다. 그렇게 백년가약을 맺어준 부부만 1만4000쌍이다.
거리의 사진가에서 예식장 사장으로
“삼국사기는 들어봤어도 ‘신신사기’는 처음이지요? 허허.” 식을 마치고 몇 시간 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백 사장은 한숨 돌리기도 전에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식업을 시작한 계기를 묻자 대답 대신 두꺼운 사진 앨범을 꺼내왔다. 겉표지에 ‘신신사기’란 글자가 한자로 적혀 있었다. 이곳의 50년 역사를 모아둔 그의 보물 1호다. 낡은 종이를 넘기며 그는 90년 인생을 회고했다.
젊은 시절 백 사장은 교육자를 꿈꾼 포부 가득한 청년이었다. 마산에서 서울까지 올라와 밥을 굶주리면서도 중앙대학교 교육학과에 진학해 여섯 학기를 다녔을 정도로 학구열이 높았다. 주머니 사정이 어려웠지만, 자동차 정비소부터 공장까지 허드렛일을 하며 밤낮없이 교육 사업을 준비했다. 그러나 정부의 검열로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한 채 무산됐다.
그는 좌절할 틈도 없이 밥벌이를 찾아 나섰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한강에서 보트 타고 뱃놀이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보트장에 놀러 온 이들을 상대로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거리 사진가로 일을 시작했다. 먹고살 만큼의 돈이 모였을 때쯤, 서른한 살 노총각이 돼 있었다.
“고향 사람들이 나보고 몽달귀신 되겠다고 난리가 난 거야. 그래서 중매를 해줬어요. 지금의 아내가 나왔지. 아내한테 ‘내가 가진 건 이 몸뚱이 하나뿐이다. 고생 많이 해야 될 거다. 그래도 고생 안 하게 최선을 다해보겠다’ 말했어요. 그 한마디 믿고 시집을 온 거예요.”
가난한 부부의 예식장은 작은 초가집 마당이었다. 축가는 새들의 노랫소리로 대신했다. 백 사장은 아무려나 행복했지만, 식을 올린 후 아내와 생이별하는 아픔을 맞아야 했다. 있는 집이라고는 열세 명의 식구가 생활하는 작은 단칸방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들고 뛰어다니며 악착같이 돈을 모은 그는 1년 만에 아내와 함께 살 셋방을 마련하고, 뒤이어 3·15의거기념탑 뒷골목에 세워진 건물을 매입했다.
“이 건물에 무얼 할까 하다가 나처럼 돈이 없어서 결혼 못 하고 애만 태우는 사람들 결혼시켜줘야겠다 생각했어요. 돈은 사진값만 받아도 충분했지.”
1만4000쌍의 웃음과 눈물이 깃들다
1967년 6월 문을 연 신신예식장은 얼마 되지 않아 요즘 말로 ‘핫플레이스’가 됐다.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손님이 물밀 듯 밀려왔다. 사진값 6000원만 내고 예식을 올릴 수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한창 잘될 때는 하루에 17쌍씩 식을 올려줄 정도였다. 그간 수많은 이들이 거쳐간 만큼 다양한 사연이 예식장을 채웠다.
“11시 30분에 식을 예약한 신랑이 미용사에게 신부 패물을 전해달라 부탁했는데, 나중에 보니 신부는 받은 게 없다는 거예요. 내가 다른 주례를 보는 사이 미용사가 도둑으로 몰려서 파출소 가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알고 보니 11시 신부 것인 줄 착각하고 잘못 건네준 거였죠. 이 일로 부부끼리 의형제를 맺었다고 하더라고요. 참 재미있는 인연이지요.”
유쾌한 에피소드만큼 뭉클한 기억도 많다. 자신이 식의 주인공인지도 모르고 멍하니 서 있는 아픈 신랑의 주례를 봐준 적도 있고, 6년 전 가출한 큰딸이 둘째 딸 결혼 전날 기적적으로 돌아와 자매의 결혼식을 한날한시에 올려준 적도 있다. 그러나 가난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백 사장이 잊을 수 없는 손님은 따로 있다.
“사진 값을 안 내고 도망간 부부가 있었어요. 당시에는 휴대폰 번호 대신 주소를 적었던 때라 집을 찾아갔어요. 그런데 집에는 아픈 사람이 누워 있고, 너무 어렵게 살고 있는 거야. 차마 돈을 받을 수가 없어서 쌀 한 말 사주고 돌아왔어요. 도울 수 있어 그저 행복했지요. 지금도 이렇게 좋은 직업이 세상에 또 있겠나 싶어요. 내가 그동안 행복했던 일을 죽 적어봤는데, 행복하다는 말만 백스물일곱 개가 나와.”
그 따뜻한 인심 덕분일까. 어느 날부터 ‘신신예식장에서 결혼하면 잘산다’는 소문이 돌며 장사는 더 번창했다. 백수 생활을 하던 큰아들이 식을 올린 뒤 직장을 구하자, 여섯 남매가 줄줄이 이곳에서 결혼을 했을 정도다. 그 소문은 최근까지도 이어지는 듯했다.
“작년에 부산에서 전화가 왔어요. 1977년에 선생님 은덕으로 겨우 결혼식을 올렸는데, 이제는 부자가 됐다며 사례를 하겠다는 거예요. 아내가 그 얘기를 듣더니 보이스피싱이라는 거야.(웃음) 괜히 겁이 나서 밤에 자다가 ATM기기 가서 돈을 빼왔어요. 그리고 자고 일어났는데 휴대폰에서 띵 소리가 나대. 100만 원이 들어와 있더라고. 고마워서 가족사진, 리마인드 웨딩, 영정사진까지 다 찍어줄 테니까 언제든 오라고 했지요.”
100세까지 즐겁게, 성실하게, 보람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어느 추억의 장소를 회고하는 것 같지만, 신신예식장은 오늘날도 여전히 씩씩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성기 시절만큼은 아니지만 예약 문의도 꾸준히 들어온다. 2014년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에 등장한 후로는 젊은 사람들도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그 덕에 두 사람은 요즘 유행하는 웨딩 트렌드까지 공부하느라 바쁘다. 인터뷰를 하던 날에도 연구(?)는 계속됐다. 어느새 백 사장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최 이사는 앨범을 펼쳐 보이며 열띤 설명을 했다.
“옛날에는 부케가 이렇게 길었어. 바닥까지 왔다고. 그러다 조금씩 길이가 줄어들면서 짧아졌지. 드레스도 얼마 전까지 치렁치렁 뭐가 많이 달린 게 유행이었는데, 지금은 액세서리랑 큐빅을 거의 안 붙여. 아주 옛날에 유행했던 게 다시 돌아오더라고. 여보, 이 사진 괜찮지 않나. 우리도 젊은 신랑 신부 오거든 이렇게 찍어주자.”
나이가 나이인 만큼 힘이 들 법도 한데, 두 사람의 열정은 젊은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사무실 벽 한쪽에 붙여둔 생활신조가 젊게 사는 비결인 듯했다. ‘생활은 즐겁게, 임무는 성실하게, 인생은 보람되게.’ 그래도 이제는 노후를 즐길 때도 되지 않았나 싶어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100살까지는 일하고 싶어요. 앞으로 10년! 그다음에는 자식, 손주가 대대로 이어나갔으면 좋겠어요. 은퇴하면 이 장부를 배낭에 넣어 메고 아내와 전국 일주를 하면서 예식장에 와주었던 손님들을 만날 겁니다. 그 얘기를 하면, 다들 우리 집에 꼭 오래요. 다 보러 가야지요.”
맞잡은 손 놓지 말고, 서로 깊이 이해하고, 꽃길 따라 함께 걸어가야 한다. 50년 동안 백 사장의 주례사에 빠지지 않은 단골 멘트다. 이 덕담을 한평생 지켜온 부부가 있을까. 잠시 의심했지만 그 주인공이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초가집 앞마당에서 두 손 맞잡은 순간부터 수많은 이들의 앞길에 꽃을 수놓아준 오늘까지 두 사람이 걸어온 인생 여정이 그 자체로 ‘꽃길’이었다.
무더위가 찾아오면 덥고 습해 잠을 설치기도 하고, 쉽게 체력이 떨어져 보양식을 찾는 시니어들이 많아진다. 특히 복날이 가까워오면 대부분 삼계탕을 찾아서인지 닭 가격이 오를 정도다.
영양 결핍이 주된 건강 문제 중 하나였던 과거에는 잘 먹는 것이 최선의 건강관리법이었다. 영양 결핍과 거리가 멀어진 지금도 상대적으로 체내 단백질이 부족한 시니어들은 고단백, 고지방의 든든한 음식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보양식은 일반 가정식보다 요리하기가 번거롭고,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는 단점이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런 보양식도 간편식으로 만들어져 나와 누구나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다. 가까운 편의점에서 구할 수 있다는 것도 큰 매력이다.
편의점들이 오는 11일, 초복을 앞두고 보양식 상품을 속속 출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시니어들이 보양식 재료를 구입해 손질하고, 요리하는 시간을 대폭 단축시켜 줘 편리성을 크게 높여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쉽게 잦아들지 않고 있는 가운데, 식당에서 음식을 사먹기보다 집에서 안전하게 보양식을 즐기고 싶은 시니어들의 니즈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코로나19로 편의점 보양식 매출은 상승했다. 이마트24가 초복과 중복이 포함된 지난해 7월 닭, 전복 등 보양 상품 매출을 확인한 결과 전월(6월)보다 8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9년 7월에 전월보다 39% 증가한 것과 비교하면 코로나19였던 지난해 2배 이상 증가율을 기록한 셈이다.
보양식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CU는 고기듬뿍 보양하오리 도시락을 내놓았다. 열량 547kcal, 나트륨 597mg으로 식약처에서 제시한 한국인 영양소 섭취 기준인 1끼 기준 열량 800kcal 이하, 나트륨 1000mg 미만에 맞춰 '건강'에 집중했다. 초계곤약면과 불고기곤약면도 출시 예정이다. 열량과 당지수는 낮고 포만감은 높은 곤약과 함께 초계, 불고기 토핑으로 식감을 살렸다.
추가로 비대면 선물이 가능한 한우, 장어, 랍스터 등 프리미엄 보양식과 싱글족들을 위한 간편 보양식 총 30여 종을 선보인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만나기 어려운 가족과 지인들에게 쉽게 마음을 전할 수 있도록 복날 선물세트를 구성했다. 1등급 한우구이 세트부터 민물장어, 항공 직송 활 랍스터, 노화도 활 전복세트, 만인산 금산인삼 등 총 12종이다.
CU의 멤버십 앱인 ‘포켓CU’를 통해 주문하거나 전국 CU 점포에 비치된 주문서를 작성하면 고객이 신청한 배송지로 무료 배송된다.
세븐일레븐은 롯데중앙연구소, 식품영양전문가 한영실 교수 맞춤식품 연구소와 협업해 ‘통째로 닭다리국수’를 내놓는다. 큼지막한 국내산 닭다리가 통째로 들어간 보양 간편식이다.
닭 뼈와 다양한 야채를 넣고 푹 우려내 진하고 깊은 맛의 육수를 구현했으며, 쫄깃한 면을 함께 담아 든든함을 더했다. 특히 면이 퍼지는 현상과 유통 과정 중 흐르는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육수를 젤라틴 형태로 고형화해 개발했다. 물을 넣고 전자레인지에 돌리기만 하면 간편하게 닭다리국수를 즐길 수 있다.
이마트24는 ‘복날엔 민물장어덮밥’을 시즌 한정 상품으로 출시한다. 삼계탕과 함께 복날 대표 보양식으로 꼽히는 민물장어 한 마리를 잘라 덮밥으로 구성한 프리미엄 도시락이다.
이 외에도 ‘동원 양반 수라 통다리 삼계탕·통다리 닭곰탕’ 등 2종을 절반 가격인 각 3900원에 판매하고, 대표 보양식 닭을 활용한 상품인 ‘CJ햇반 치킨커리 덮밥’, ‘팔도 꼬꼬면 왕컵’, ‘꼬꼬면 봉지5입’, ‘태경 마늘볶음탕컵’ 등 1+1행사를 실시한다.
GS25는 프리미엄 보양 도시락 ‘통민물장어구이덮밥’을 올 6일 출시한다고 밝혔다. 이번 신제품은 간편 보양식 선호 트렌드가 반영된 보양 도시락 상품이다.
GS25는 표고버섯 밥 위에 특제 간장 양념을 발라 구워낸 민물 장어 한 마리를 통째로 올리고, 장어 풍미를 한껏 돋궈줄 깻잎·초생강·생고추냉이 등을 부메뉴로 구성해 ‘통민물장어구이덮밥’을 완성했다. 출시를 기념해 1000개 물량을 더팝 앱을 통해 예약 구매 시 30% 할인 혜택을 제공하는 선착순 행사가 진행된다.
문지원 GS리테일 도시락 MD는 “코로나19와 무더위에 지친 국민의 기력 충전을 돕고자 이번 보양식 상품과 행사를 선보인다”며 “간편 보양식을 선호하는 최근 트렌드를 반영해 시니어들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보양 도시락과 가정식 대체 식품을 핵심 상품으로 구성했다”고 말했다.
삶과 죽음이 한끝 차이이듯 ‘웰다잉’을 위해서는 ‘웰빙’이 선행되어야 한다. 시니어의 웰빙은 대부분 거처가 좌우한다. 노후에 어떤 형태의 돌봄을 받고, 어디에 머무는지에 따라 삶의 질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집 또는 병원, 두 가지 선택지가 전부였지만, 평안한 삶의 마무리를 고민하는 ‘웰엔딩’에 관심이 늘면서 ‘실버타운’이 제3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실버타운 입주를 고민 중인 이들을 위해 실버타운의 이모저모를 살펴봤다.
‘인생은 육십부터’라는 말이 더 이상 농담이 아닌 시대다. 의료 기술이 발달하고 기대 수명이 늘어나면서 과거엔 10여 년, 길어야 20년 정도로 여겨지던 노후의 정의가 30~40년 가까이 늘어났다. 직장에서 몸담은 시간보다 노후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진 만큼 질 좋은 서비스와 시설로 눈을 돌리는 시니어가 늘고 있다. 30여 년간 ‘열일’ 한 대가로 얻은 경제력이 있으니,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누리고 싶은 것은 인간이라면 당연한 심리다.
실버타운은 이 같은 액티브 시니어의 수요를 만족시켜주며 최근 몇 년간 노후의 또 다른 보금자리로 각광받고 있다. 실버산업 전문가 이한세 초고령사회미래연구원 위원장은 “20여 년 전의 60대와 지금의 60대는 다르다. 옛날에는 60대만 돼도 ‘인생 다 살았다’고 했지만 지금은 노후를 편안하고 활기차게 보내려는 시니어가 많다. 또 과거에는 실버타운 입주 보증금이 강남 아파트 한 채를 팔아야 충당할 수 있는 정도였는데, 20년 사이 보증금은 크게 오르지 않은 반면 집값은 10배 가까이 오르면서 진입장벽이 낮아졌다”며 “이런 사회적 변화 속에 실버타운의 선호도가 높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분위기”라고 말했다.
실버타운 언제, 어디로 가야 하나
한마디로 오늘날 ‘액티브 시니어’라 불리는 이들은 실버타운에 입주할 경제력을 갖췄으며, 노후를 즐길 시간도 충분하다. 문제는 언제, 어떤 실버타운에 들어가느냐다. 포털 사이트에서 ‘실버타운’을 검색하면 각종 노인주거복지시설이 쏟아져 나와 정확한 정보를 추리기 어렵다. 또 노후가 길어진 만큼 어느 연령대에 입주해야 하는지도 새로운 고민거리다. 적절한 시기에 실버타운에 입주하기 위해서는 먼저 노인주거복지시설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노인복지법 제32조에 따르면 노인주거복지시설은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는 어르신들이 공동으로 생활하는 곳’을 말하며, 성격에 따라 양로시설과 노인공동생활가정, 노인복지주택으로 구분한다. 양로시설은 크게 무료 및 실비, 유료로 나눌 수 있는데, 무료 및 실비 양로시설은 65세 이상 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 등 취약계층을 위해 마련된 곳이다.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금을 바탕으로 운영하기 때문에 기초적인 서비스 외에 기타 부대시설을 유치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반면 유료 양로시설은 60세 이상이라면 누구나 입주 가능하다. 대개 경제력 있는 시니어를 대상으로 운영해 입소자로부터 비용을 전부 수납하며, 그 특성상 여가 시설, 취미 프로그램, 의료 서비스 등이 특화돼 있다. 비유하자면 유료 양로시설은 시설이 뛰어난 5성급 호텔, 무료 및 실비 양로시설은 비용이 합리적인 게스트하우스와 비슷한 개념이다. 이 같은 노인주거복지시설 가운데 고급형 노인복지주택과 소수의 유료 양로시설을 합한 개념을 통상적으로 실버타운이라 부른다. 즉 실버타운은 60세 이상이라면 누구나 입주 가능하다.
그렇다면 노후 어느 시기에 입주하는 것이 일반적일까. 서울시니어스타워 관계자는 “실버타운 초창기에는 60~65세에 입주하는 분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고령화 시대가 되면서 70대 중반에서 80대에 오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개 가사노동을 할 체력이 되지 않거나 크고 작은 돌봄을 받고 싶을 때 이곳을 찾으신다”라며 “그러나 열에 아홉은 ‘더 일찍 들어올걸’ 하며 후회하신다. 나이가 들수록 동호회나 취미 프로그램, 행사 등을 즐기기에 육체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실버타운의 각종 시설을 알차게 이용하기 위해서는 조건에 부합하는 연령이 되었을 때 바로 입주하는 것을 권장한다”라고 말했다.
[TIP] 실버타운 입주 시 고려해야 할 4가지
비용 ▶ 가장 먼저 자신이 충당할 수 있는 입주 보증금과 월 생활비를 고려해야 한다. 입주 보증금은 대개 2억~9억 원, 월 생활비는 100만~200만 원 선이다. 같은 실버타운도 평수에 따라 금액이 달라지니, 싱글이라면 가장 많은 세대를 차지하는 평수를 기준으로 고려하는 것이 좋다.
위치 ▶ 실버타운은 위치에 따라 도시형, 근교형, 전원형으로 나눌 수 있다. 위치는 개인의 선호도나 자녀의 거주지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 좋다. 다만 수도권 내에 있는 실버타운은 땅값에 따라 입주 보증금도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병원 ▶ 복용 중인 약이 있거나 만성 질환을 앓고 있는 시니어는 대형병원이 가까운 실버타운이 좋다. 또 ‘너싱홈’(실버타운과 요양원의 성격이 결합된 형태)이나 ‘데이케어센터’(주간보호시설) 시스템을 함께 운영하는 곳도 있으니, 각 실버타운에서 제공하는 의료 서비스를 꼼꼼히 살피는 것이 좋다.
여가 ▶노후의 질은 여가가 좌우한다. 후보별로 각 절기별 행사와 교육 프로그램, 취미 활동, 커뮤니티 센터 등을 알아본 다음 알맞은 곳을 택한다. 단 해당 서비스가 실제로 이행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체육관은 있지만 트레이너의 관리가 허술하고, 동호회가 존재하지만 참여하는 사람이 없으면 ‘보여주기 식’일 가능성이 높다. 프로그램의 활성화 정도를 함께 고려한다.
피해 줄었지만 상담 꼼꼼해야
알맞은 실버타운을 골랐다면 다음은 입주 상담이다. 실버타운 입주에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드는 만큼 충분한 상담으로 머물 곳을 신중히 선정해야 한다. 특히 입주 보증금 반환 방식을 세밀하게 살펴 만일의 상황에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
최근에는 입주 보증금 관련 피해가 문제시되고 있지 않지만, 수년 전 일부 실버타운이 분양 저조, 사업비 부족 등의 이유로 입주민에게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아 몇 차례 논란을 빚은 바 있다. 대표적으로 경기도 용인시 A실버타운은 서비스 불이행, 일방적인 관리비 인상, 보증금 미지급 등 사업자의 독단적인 운영으로 구설수에 오르다 2017년 시설폐쇄명령을 받았다. 경기도 성남시 B실버타운은 2016년 무리하게 사업 분야를 키워나가면서 부도가 발생해 입주민들이 수십억 원에 달하는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노인복지법 시행규칙은 사업자가 입주 보증금의 50% 이상을 돌려주는 보증보험에 가입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전세권이나 근저당권 설정으로 보호하는 경우 예외 조항이 적용돼 보증보험에 가입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문제는 전세권 및 근저당권 설정으로 보호받을 경우 건물이 경매로 넘어갈 때까지 대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피해를 막기 위한 장치에도 한계가 있지만, 전문가들은 과거에 비해 제도에 다각적인 보완이 이뤄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강대빈 전국노인주거복지시설협회 부회장은 “요즘은 시공자나 금융권에서도 사업성을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어 과거와 같은 큰 피해 이슈는 없지만, 운영의 건전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문제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소비자 차원에서도 대비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입주하려는 실버타운이 운영상 문제가 없고 건실한지 분별하기 위해서는 사업자의 전문성과 사회적 신용도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파악하기 어려울 땐 식사 체험을 하며 입주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궁금한 사항을 물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최종 계약을 할 때는 보증금 반환 보장 방안과 지급 방법이 구체적으로 기재돼 있는지 꼼꼼하게 읽어봐야 한다. 이 위원장은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가 잘 갖춰져 있는 것이 중요하다. 시설만 강조하는 곳보다 시니어에 대한 직원들의 진정성이 돋보이는 곳이 좋다”라고 강조했다.
“인생의 보너스 같아”…공동체서 찾는 활력
실버타운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결심한 입주자들의 실제 후기는 어떨까. 대부분 비용에 상응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만족도가 높은 편이다. 특히 여성 입주자들은 식사 준비를 비롯한 가사노동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을 큰 장점으로 꼽는다. 50여 년 운영하던 약국을 닫고 서울시니어스 고창타워에 나란히 입주한 조명자(77)·조미자(73)·조경희(65) 자매는 “모든 게 만족스럽지만 무엇보다 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 세 자매에게 꿈만 같은 일”이라며 “함께 식사를 하고 웃음꽃을 피우다 보면 이곳에 오길 잘했단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남편과 함께 서울시니어스 강서타워에 입주한 정태분(78) 씨도 “정성과 영양 가득한 식사와 청소 서비스는 그동안 고생한 인생의 보너스 같아 매일이 행복하다”라고 말했다.
실버타운 내 각종 취미 프로그램도 즐거움을 더하는 요인 중 하나다. 서울시니어스 고창타워에 3년 간 거주한 배순애(72) 씨는 “매일 아침에 일어나 조깅을 한다. 코스도 다양하고 산책로도 여러 개다. 10년째 취미로 하는 색소폰을 무대에서 뽐낼 수 있는 기회가 있고, 동호회 활동도 활발히 이뤄져 심심할 틈이 없다”며 “최근에는 코로나19로 모임이 잠정 중단됐지만 남편과 주변 관광지를 돌며 나들이 다니는 것이 또 다른 즐거움이다”라고 말했다.
다양한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각종 해프닝도 공동체 생활에서만 겪을 수 있는 쏠쏠한 재미다. 특히 은퇴 후 외로움을 느끼는 시니어에게 실버타운은 또 다른 만남의 장이다.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 이성 간 건강한 교류를 맺는 이들도 있고, 사회복지사 직원과 입주자가 서로 엄마, 아들이라 부르며 모자지간처럼 지내는 경우도 있다. 김숙응 숙명여대 실버비즈니스학과 주임교수는 “같은 실버타운에 입주한 시니어는 서로 라이프스타일이 비슷하고 빈부 격차가 크지 않기 때문에 비슷한 공감대로 친밀도를 쌓기 쉽다”며 “동호회, 문화 프로그램 등으로 형성해나가는 사회적 관계는 노후의 또 다른 활력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나에게 맞는 실버타운은 어디?
전국 40여 곳의 실버타운을 직접 방문해본 이한세 초고령사회미래연구원 위원장이 추천한 실버타운을 세 곳을 소개한다. ✽비용은 1인 기준
TYPE A | 액티브한 도시형 ▶ 서울 ‘더클래식500’
‘소셜 리더를 위한 실버 하우스’라는 슬로건에 알맞게 최상급 복지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하우스 키핑, 퍼스널 컨시어즈, 발레파킹 등 호텔식 서비스와 건국대학교병원 교수진으로 구성된 전문의 및 전담 관리팀이 개인별 맞춤 건강관리 서비스를 제공한다. 스파, 피트니스, 골프연습장, 수영장 등 여가 시설과 각종 문화 행사도 다양하게 마련돼 있다. 입주자 중 은퇴 후에도 강연, 컨설팅 등 도시 내에서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는 액티브 시니어가 많다.
입주 보증금 9억 원 월 생활비 213만 원(식비 26만 원) 문의 02-2218-6000
TYPE B | 편리한 근교형 ▶ 인천 ‘마리스텔라’
성모요양병원, 인천국제성모병원을 가까이에 끼고 있어 응급 시 신속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또 단지 내 일반 상가와 푸드 코트 등이 있어 식사의 선택지가 다양하고, 젊은 사람과 어린이 등 외부인의 방문이 잦아 고립감이 덜하다. 천주교 인천교구가 운영하는 곳으로, 1층 성당에서 매일 미사가 진행되어 종교 생활을 할 수 있다. 도시의 편리함과 근교의 호젓함을 모두 느끼고 싶은 시니어에게 알맞다.
입주 보증금 2억4000만~4억 원 월 생활비 142만~196만 원 문의 032-280-1500
TYPE C | 정다운 전원형 ▶ 김제 ‘부영실버아파트’
전국 실버타운 가운데 보증금이 가장 저렴한 편에 속하지만, 중가 실버타운 수준의 합리적인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인근에 노인대학과 게이트볼장, 요양병원, 노인종합복지관이 들어서 있어 주변 시설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고, 식사는 복지관 식당에서 저렴하게 해결 가능하다. 여름에 다 같이 모여 문 열어놓고 비빔밥을 해 먹고, 단체로 여행을 떠나는 등 입주민 간 교류가 잦으며 정겨운 분위기다.
입주 보증금 2000만~4000만 원 월 생활비 없음 문의 063-545-0343
경북 성주군 대가면에 있는 참외 농장. 푸릇푸릇한 잎사귀 사이엔 샛노란 참외가 가득 숨어 있다. 참외 농사는 한 번 심어 늦겨울부터 늦여름까지 연속 수확이 가능해 어떤 작물보다 안정된 수익을 올릴 수 있어 성주로 내려왔다는 50대 부부. 수확한 참외를 선별하느라 눈코 뜰 새 없는 4월에 부부를 만났다.
30년을 서울에서 살아온 서울 남자, 서울 여자인 곽창신, 박미영 부부는 귀농을 결심한 후 두 아들을 데리고 전국 곳곳을 찾아 헤맸다. 남편 곽창신 씨는 ‘6시 내 고향’, ‘나는 자연인이다’, ‘인간극장’ 등을 시청하며 시골에서의 삶을 동경해왔다고 한다.
다니던 직장에 희망퇴직을 신청하고 약 6개월의 준비 기간에 이들 부부는 곽창신 씨의 고향인 강원도에서 충청도, 경상도까지 귀농할 곳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귀농지를 찾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한겨울에도 수확되는 딸기로 유명세를 얻고 있는 충청도 제천에서 얼음딸기를 생산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제천을 몇 번이나 방문해 그 지역 농부들을 만나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경쟁자가 오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며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 농부들에게 결국 두 손 들고 좌절하기도 했다.
귀농귀촌지원센터를 통해 몇 군데 문을 두드린 끝에 마침내 2017년 1월 성주참외로 유명한 경상북도 성주로 귀농, 참외 농사를 짓는 농부가 됐다. 귀농은 2017년이었지만 참외를 첫 수확한 것은 2018년 3월. 첫 실습치고는 큰 착오 없이 성주참외를 수확해 네이버 스마트스토어를 통해 직거래를 시작했다.
남편 곽창신 씨가 주로 참외 농사를 도맡아 하고 있다면 아내 박미영 씨는 농사를 거드는 것은 물론, 직판매를 위한 사이트 및 블로그 운영으로 판매 채널 다양화에 힘쓰고 있다. 서울에서 책 편집 디자이너로 일해왔던 만큼, ‘호호네성주참외’는 참외 농사를 기록하는 것뿐만 아니라 귀농 생활 체험 정리 등 다양한 콘텐츠가 소개된 알짜배기 귀농 블로그로 손꼽히고 있다.
올해 귀농 생활 5년 차. 지난 4년간 겪은 고생을 말로 하자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이라는 부부는 귀농을 결심했던 그 즈음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짓는다.
아직 귀농인의 성공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도시에서의 삶을 시골로 모종한 후 조심스럽게 뿌리 내리고 있는 곽창신, 박미영 부부의 귀농 체험을 브라보가 귀알못(귀농귀촌에 관심은 많지만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주제별로 묶어본다.
Q 왜 귀농을 결심했을까요?
A 다니던 직장이 발전소였어요. 하루 24시간 운행되는 곳이라 3교대로 근무하는데 밤 근무가 되면 꼴딱 밤을 새서 일해야 했어요. 아이들 얼굴을 볼 수 없는 생활의 연속이었죠. 같은 공간에서 살고만 있을 뿐이지 아이들과 밥 한 끼 편하게 먹을 수도 없고 학교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었어요.
불현듯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던 참에 회사에서 희망퇴직 신청을 받는다는 공지가 떴어요. 오랜 고민 끝에 아내에게 귀농하고 싶다는 속마음을 털어놓았죠. 흔히 아내와 함께 온 가족이 귀농하면 반은 성공한 것이란 말이 있어요. 행복하게도 아내의 동의를 얻게 됐고, 이런 점에서 정말 아내에게 감사한 마음이죠.
Q 내려오길 참 잘했다, 이런 생각이 드는 지점은 뭘까요?
A 저희 부부가 자주 이야기하는데… 매일 아침 우리 가족 4명이 같이 밥을 먹어요. 저는 이 시간이 너무 행복하고 좋아요. 참 우습죠? 쉬운 일처럼 보이는 이걸 직장생활 할 때는 할 수가 없었거든요. 저녁에는 같이 텔레비전 보면서 깔깔거리고 웃기도 하고… 소소한 일상이 너무 행복해요. 귀농하면서 예전에 누리지 못했던 일상의 행복을 보상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물론 모든 것을 내가 판단하고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는 점도 있지만요.(웃음)
Q 경북 성주로 꼭 집어서 귀농한 이유는?
A 제가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라, 귀농을 결심한 후 준비하면서 귀농한 선배들의 조언도 듣고 인터넷 강의도 듣고 귀농귀촌지원센터에 등록해 교육도 듣고 상담도 받았죠. 전 전원생활을 즐기며 부업으로 농사를 짓는 귀촌이 아니라, 아직 한참 키워야 하는 어린 두 아들이 있기 때문에 경제적 생활이 가능한 특화작물 쪽으로 열심히 알아봤어요.
이때 참외가 눈에 띄더라고요. 비닐하우스 생산을 하면서 일 년에 수확을 몇 차례 한다고 하니 수익성도 높을 것 같았고요. 참외 하면 성주참외가 특화돼 있는 상태라 경북 성주에 관심을 갖고 지원센터에 상담을 요청했죠. 그렇게 성주를 여러 번 방문해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간 다른 지역에서 폐쇄적으로 이야기도 잘 안 해줬던 것과 달리 개방적으로 따뜻하게 맞아주시더라고요. 최종적으로 성주로 귀농을 결심하기 전에 아이들까지 데리고 4~5번은 왔던 것 같아요. 농장에서 참외 체험도 해보고요.
Q 귀농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뭘까요?
A 마을 주민들과 잘 어울리려면 제가 먼저 도움이 많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준비하면서 용접도 배우고 기계 수리도 배우고. 그런데 제가 내려와서 정착한 마을이 집성촌이에요. 오랜 시간 동안 거의 친족들이 모여 사는 곳에 불쑥 이방인이 참외 농사 짓겠다고 내려온 것이니 친해지기가 쉽지 않았죠. 그나마 두 아들이 마을에서 뛰놀고 그러는 게 좋아 보였던 마을 주민들도 계셔서 이야기를 나누게 됐지만.
저희는 시골 생활이라고 강아지도 키우고 닭도 키우고 그렇게 시작했는데 마을 주민들은 워낙 그런 생활이 일상이잖아요. 그래서 이제 그런 생활이 지겨워서 닭도 안 키우시고 그러세요. 근데 갑자기 마을에서 새벽에 닭이 울어대니까 좀 뭐라고 하셨죠. 웃픈 이야기죠?
정말 어려웠던 건 참외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땅이 필요한데 땅을 구매하기가 어려웠죠. 현재까지 저희는 땅을 구입하지 못했어요. 이제야 농지 구매를 위해 저금리로 대출해주는 농업인에 선정돼 3억 원을 대출받게 됐어요. 이 자금으로 참외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밭을 알아볼 예정이에요.
물론 밭을 구매하는 게 또 어려움이 있죠. 이런 시골에서의 논이나 밭 거래는 주위의 아는 사람들끼리 알음알음 거래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희가 귀농한 지 이제 5년 차지만 아직도 주민분들에게 이런 거래를 귀동냥 듣기에는 친밀도가 아무래도 떨어지니까… 부동산 중개인을 통해 조금 비싸더라도 구매할 수밖에 없어요. 근데 또 이렇게 조금 비싼 금액으로 거래하면 그 땅에 관심을 갖고 있던 마을 주민이 뭐라 하세요. 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거죠. 그래도 어떻게 하겠어요. 열심히 농사지으며 소통하고 관계 맺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죠. 결국 진심을 다해서 대하다 보면 시간이 해결해주겠죠.
Q 거주지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어떻게 하였나요?
A 저는 4인 가족이 당장 생활을 해야 하는 상태라 농지보다 거주지를 먼저 장만했어요. 답답한 아파트에서 살다 보니 마당 있는 단독주택에서 아이들이 맘껏 뛰어 놀게 하고 싶었죠. 옆에 밭을 포함해 411평에 건평은 29평 정도 되는 단독주택을 직접 지었습니다. 귀농귀촌지원센터에 가면 농가주택 전용으로 지을 수 있는 기본 평면도까지 업로드돼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생활의 터전이 되는 농지 확보부터 한 후 주거지를 해결하라고 권하고 싶어요. 요즘에는 주거 공간에 관해서 각 지방자치 정부마다 빈집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어요. 시골의 빈집을 리모델링해서 1년간 살아보고 귀농을 준비할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이에요.
집주인은 돈을 들이지 않고 집을 리모델링해서 좋고, 귀농을 꿈꾸는 도시인들은 첫 1년을 테스트 기간으로 삼아 적은 월 임대료로 살아볼 수 있어서 좋고, 일석이조죠.
Q 농사일이힘들지는 않았나요?
A 모든 농사는 힘들죠. 농사가 처음이니까 교육이란 교육은 다 참가했어요. 강소농 교육, 농민사관학교, 현장실습, 심화교육… 다 쫓아다녔죠. 아내는 사이버농업인 e비즈니스 교육까지, 2017년과 2018년은 교육의 해였습니다. 그러면서 2018년 3월에 참외 첫 수확을 하게 된 겁니다. 그때까지는 아직 자신이 없어서 공판장에는 출하를 못 했고, 밭에서 키우던 소소한 채소들과 참외까지 네이버 스마트스토어나 가족과 친지, 친구들에게 직판매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제 이름으로 공판장에 첫 출하한 게 2018년 4월이었어요.
참외 농사짓는 걸 처음 해본 거잖아요. 모종판에 참외씨 넣고 또 모판에 호박씨 넣고 접목하고 수정시키고, 참외순이 자라면 순 자르기, 참외순과 호박줄기 접붙이기, 자꾸 성장해서 참외 성장을 가로막는 호박잎 떼어주기 등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참외는 열대작물이라 겨울에는 보온성 좋은 부직포로 이불도 덮어줘야 해요. 또 물을 대는 방법이나 비료 쓰는 법 같은 것도 터득해야 해요.
매일 마을 어른들에게 혼도 나면서 배웠어요. 모종을 키워서 본밭에 심어 3개월 정도 되면 수확하는 거죠. 그리고 농부는 부지런해야 한다고 하잖아요. 그 말이 정말 맞아요. 특히 참외는 새벽에 따야 해요. 새벽 시간에 못 따서 기온이 올라갈 때 따면 참외의 아삭한 맛이 덜하고 물러져요. 아침 11시면 경매가 시작되거든요. 그때까지 오늘 출하량을 맞춰야 하니까 성주 분들은 새벽부터 참외 따느라 부지런하게 움직이죠. 저희 같은 경우는 아이들 학교를 보내야 해서 이게 참 힘들었어요. 참외 따랴, 아이들 학교 보내랴.
Q 참외 농사로 매출액이 얼마나 되나요?
A 비닐하우스 1동당 연간 매출액이 1000만 원 정도 나온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론 농사짓는 사람의 노하우에 따라서 위아래로 20% 정도는 왔다 갔다 하죠. 비닐하우스 10동이 있다면 연간 매출액 1억 정도죠. 그래서 성주에는 억대 농부들이 많아요. 물론 자신 소유의 밭에 비닐하우스 시설을 갖췄을 때 이야기고… 이 시설을 임대해서 하는 저희 같은 경우에는 비용이 더 들어가겠죠. 자가 소유라고 하면 기본 경비를 매출액의 30~40% 잡으면 될 것 같아요. 제일 비중을 많이 차지하는 것이 비료입니다. 땅의 토양을 좋게 해야 상품 가치도 높아지고 당도도 높아지죠. 성주군 농업기술센터에서 미생물을 배양해 토양을 좋게 하는 것들도 지원하고, 토양을 좋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씁니다.
무엇보다 성주의 토양이 다른 곳보다 미네랄 함유치가 높다고 해요. 그리고 가야산이 있어서 바람을 막아주고 눈이 잘 안 오고, 다른 곳보다 일조량이 많다는 점 등이 참외 재배에 장점이라고 들었습니다.
Q 성주를 대표하는 귀농인에 선정됐던데 어떤 점이 어필됐을까요?
A (취재에 동행한 성주군 귀농귀촌지원센터의 담당 이태일 계장이 보충 설명을 곁들였다)
박미영 씨의 꾸준한 SNS 활동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단지 농사짓는 것만 올리시는 게 아니라 농촌 생활을 꾸준히 업로드하면서 많은 분들의 관심을 받고 계셨는데, 이게 저희 센터가 할 일을 직접 해주신 거죠.
경험자로서 생생하고 유익하게 말이죠. 어린 자녀와 함께 귀농하셔서 자녀들도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고요. 성주를 대표하는 귀농인에 선정되셔서 저금리로 융자를 받게 됐으니 앞으로 참외 농사를 더 늘리실 수 있을 겁니다.
Q 가장 큰 문제는 농지 확보겠네요?
A 그렇죠. 현지 분들이 귀농인 때문에 땅값 올라간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세요. 근데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농사를 짓기 위해 귀농을 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귀촌을 통해 현지 주민들과 교류하면서 인맥을 쌓고 직거래 등의 포장 판매 부분에서 뭔가 경제활동을 할 수도 있어요. 꼭 농사짓는 것만이 농촌에서의 경제적 활동은 아니라고 봐요.
농사 힘들어요. 어느 정도 연세 들어서 오시는 분은 차라리 현지에서 생산된 참외를 직접 구매해 소포장 판매를 통해 수익 창출을 하는 부분도 고려했으면 해요. 특히 온라인 판매 등 관련 기능이 뛰어나다거나 마케팅 분야에서 일했던 분이라면 판매 채널 다양화에 훨씬 도움이 될 수 있거든요.
Q 귀농 혹은 귀촌을 원하는 분들은 어떻게 도움을 받으면 될까요?
A 일단 귀농귀촌지원센터를 방문해 귀농하고 싶다고 상담을 요청하면 어떻게 해서든 연결해주세요. 그리고 어떤 혜택이 있는지 상세히 설명해주시죠. 요즘은 1년짜리 현장실습 교육도 받을 수 있는데, 센터에서 농사 잘 짓는 멘토를 연결해 멘토멘티 프로젝트에 넣어주기도 합니다.
멘토에게 월 30만~40만 원, 멘티에게는 월 80만 원의 훈련 참가비를 줘요. 하루 8시간 농사를 배우는 거죠. 5개월 정도 배울 수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더 자세한 내용은 지원센터에 상담해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Q 귀농귀촌을 원하는 이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뭘까요?
A 어렵네요, 하나만 꼽기가요. 그런데 제가 살면서 느낀 게 하나 있어요. 서울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결국 농촌 마을도 사람이 모여 사는 거잖아요.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저희가 처음 이사 왔을 때 저희 집에 인터넷 설치가 안 됐어요.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죠. 아니, 저 높은 가야산 꼭대기에서도 인터넷이 되는데 제가 이사한 성주의 읍내 권역에 인터넷을 설치할 수 없다고 하니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죠.
그래서 도시에 살 때처럼 군에 민원 넣고, 심지어 청와대에도 민원 넣었어요. 그런데 공무원은 원칙만 읊으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어느 날 저희 옆집에 이사 왔는데 이 사람은 그 지역에 인맥이 있던 사람이에요. 이 사람 집에는 그 다음 날 인터넷을 바로 설치해주더라고요.
또 한 가지 꼽자면 요즘 소확행이라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정말 귀농은 소확행을 실천하는 거예요. ‘없으면 없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그냥 가족끼리 행복하게 살자.’
정신없이 빠르게 변해가는 도시에서 ‘느리지만 차근차근’ 그렇게 인생을 음미하며 살아갈 수는 없잖아요. 귀농해서 비로소 우리 가족은 ‘느리지만 차근차근’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성주군 귀농인들 연간 수입과 비용
귀농 A 사례(농지 임대의 경우)
선택 작목: 참외, 평균 투자비: 2억 원(주택 구입 포함), 연간 운영비: 3000만 원(1년), 평균 수입: 8000만 원(1년)
귀농 B 사례(농지 구입의 경우)
선택 작목: 참외, 평균 투자비: 5억 원 (농지·주택 구입 포함), 연간 운영비: 1억 원(1년), 평균 수입: 3억 원(1년)
귀농 C 사례(농지 구입의 경우)
선택 작목: 상추, 평균 투자비: 1억 5000만 원, 연간 운영비: 400만 원(1년), 평균 수입: 4500만 원(1년)
조산사 엄순자(68, 청주 엄조산원) 원장은 40년 경력의 베테랑이다. 그간 받아낸 신생아 수가 자그마치 7000여 명에 달한다. 이 바닥에서 그녀를 능가할 고수가 드물다. 세상은 요상하게 돌아가 인명을 경시하는 풍조까지 만연하지만, 출산만큼은 훼손될 수 없는 성역이다. 만약 자비로운 신이 존재한다면 신생아가 출현하는 순간엔 친히 출장을 나와 참견하고 싶어 할 테다. 세상에 태어나는 새 생명은 여하튼 무탈해야 하며, 사랑을 받아야 하며, 축복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고귀한 출산을 조력하는 조산사란 신성한 직업이다.
엄순자 원장이 조산사로 일하기 시작한 건 20대 중반부터다. 아기를 받는 일에 딱히 매력을 느껴 선택한 직업은 아니었다지. 간호대학을 졸업했으니 간호사로 취업하는 게 순서였으나 그녀는 조산사를 택했다. 환자들을 상대하는 간호사보다 산모들을 돕는 조산사 일이 한결 수월할 것 같아 택한 길이었다. 그게 평생의 외길이 될 줄은 몰랐더란다. 또 조산사 일에 그토록 빠르고 깊게 심취하게 될 줄도 몰랐다. 생명의 출산에 간여하며 신비감과 경이로움, 그리고 보람과 성취감으로 자족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일종의 열광적인 몰입을 했던 모양이다.
처음 한동안 그녀는 산부인과 병원에 취직해 조산사 일을 했다. 경험과 실력을 키운 수련기였다. 그러다 28세에 독립해 조산원을 개업했으며 이후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조산원은 청주시의 구시가지 대로변에 있다. 번듯한 4층 건물이다. 1991년에 부지를 사들여 지은 집이다. 출산율이 높았던 과거에 누린 조산원의 성업(盛業)을 증명하는 건물이다. 예전엔 조산원이 많았다. 그러나 출산율이 떨어지면서 하나둘 사라져 이제는 눈을 씻고 찾아도 도무지 볼 수 없다. 산부인과 수의 격감과 마찬가지로 조산원의 퇴출이 가속됐던 거다. 대한조산협회의 통계에 따르면 현재 전국에 16개소의 조산원이 남았을 뿐이다. 엄조산원은 충청 지역에 남은 유일한 조산원이다.
“산모를 가장 많이 받았던 건 1980년대였다. 한 달에 평균 40여 건, 최대 62건을 받기도 했다. 하루에 7명의 아기를 받아낸 진기록도 있다. 그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줄어도 너무 줄었다. 월 2, 3건의 일이 있을 뿐이니까. 많아야 5건이더라. 그러나 이 나이에 여전히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게다가 과거와 다르게 여유시간이 충분한 덕분에 산악자전거를 즐길 수 있어 너무 좋다. 예전엔 휴일도 밤낮도 없이 24시간을 대기 상태로 지냈거든.”
분만은 ‘피와의 전쟁’
조산원 내부를 볼까. 약간의 의료기기들이 보이는 진료실과 둥근 욕조를 설치한 수중분만실, 소파가 놓인 상담실, 그리고 여러 개의 정갈한 방으로 이루어졌다. 진료실만 아니라면 일반 가정집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구색이라 편안하고 따사롭다. 그러나 수천 명의 산모들이 이곳에서 격심한 산통을 치르며 출산했을 걸 생각하자니 마치 태풍이 훑고 지난 자리를 바라보는 것처럼 애잔하다. 무참한 진통을 거쳐 마침내 기쁜 순산을 한 산모들의 눈물과 희열이 서린 공간이라는 점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다.
“내과나 외과 의사는 한 사람의 치유를 도모하지만 조산사가 돕는 건 두 생명이다. 산모와 아기, 두 생명을 동시에 조력한다는 점에서 조산사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한결 엄중하다고 느낀다. 귀한 일을 한다는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베테랑 조산사는 초심자와 어떻게 다른가?
“분만은 한마디로 ‘피와의 전쟁’이다. 분만 과정에서 가장 위험한 게 산모의 과도한 출혈이다. 노련한 조산사는 이 출혈을 최소화할 줄 안다. 산모의 상태를 미리 정확하게 판단하고 상황을 예측, 한 템포 빠르게 대처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출혈이 전혀 없는 출산도 가능한가?
“출혈은 회음부 열상(裂傷)이나 태반이 떨어진 자리에서 야기된다. 그런데 드물게나마 분만 직후 피 한 방울 안 흘리는 산모들이 있다. 이걸 우리는 ‘자연출산의 꽃’이라 부른다. 이런 출산을 볼 때면 나는 대단한 기쁨을 느낀다. 조산사의 기량과 산모의 훌륭한 의지가 합세해 만들어내는 작품이기 때문이지.”
출혈이 심해 위급한 경우엔 어떤 조처를 하지?
“완전한 자연출산을 추구하는 조산원은 산부인과 병원과 달라 의료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지 않다. 의료 시스템에 의지하는 분만은 자연출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출혈이 너무 심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수축제를 주사해 응급조치를 하거나 연계된 산부인과 병원으로 이송한다.”
감당하기 어려운 돌발 상황은 없었나?
“유능한 조산사는 산모의 배만 보고도 태아의 체중을 정확히 알아내거나 출산일을 오차 없이 예측한다. 이처럼 숙달된 기능을 발휘하기에 돌연한 사고가 발생할 수 없는 거다. 게다가 조산원에 오기 전에 산모들은 산부인과에서 초음파 검사 등으로 충분한 사전 점검을 한다. 따라서 애초에 문제 발생의 소지가 없다. 매우 드문 경우지만, 산모나 태아의 상태가 아주 좋지 않을 때엔 아예 받지 않는다.”
신조차 실수를 한다지? 가령 당신의 실수로 발생한 사고는 없었는지, 그걸 묻는 거다.
“그런 사고가 났다면 지금까지 어떻게 문을 열고 있겠나?(웃음) 전반적인 상태가 좋은 산모들이 조산원을 찾아오고, 상태가 위험해 제왕절개 등이 필요한 산모들은 산부인과로 간다. 조산원에선 사고 가능성 자체가 거의 없다는 얘기다.”
일체의 난폭한 분만을 배제해
조산원은 산부인과와 달리 전적으로 자연출산을 한다. 그게 자연에서 왔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나그네인 인간의 생태에 알맞아서다. 자연출산이란 가정에서 분만을 했던 그 옛날의 출산 관습을 본으로 삼는 방식이다. 옛적의 마을엔 아기를 잘 받는 할머니들이 하나쯤은 흔히 있었다. 고대부터 존재한 ‘산파’가 쪼르르 달려와 출산을 돕기도 했다. 그러다 산부인과 병원의 출현과 활갯짓으로 풍속이 싹 바뀌었다. 대체로 1970년대부터 대부분의 산모들이 산부인과 의사의 기술과 의료 시스템에 출산을 맡기기 시작했다. 엄순자 원장은 이와 같은 풍습의 정착에 애석함을 느낀다. 자연출산으로 회귀하는 게 섭리에 맞다고 본다.
“여러 나라의 조산사들이 모이는 국제학술세미나에 참석해보면, 선진국에선 병원에서의 출산보다 자연출산을 선호하고 지원하는 경향이 뚜렷한 걸 알겠더군. 그러나 우리나라는 다르다. 이미 오래전부터 임산부의 99%가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낳았으며, 지금도 99%가 그렇게 한다.”
산부인과 출산을 선호하는 이유는?
“갖가지 의료 장비와 약물이 완비돼 더 안전하다고들 본다. 촉진제 주사나 무통 주사로, 또는 마취를 통해 한결 편한 분만이 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거다. ‘하다 하다 안 되면 까짓 것 제왕절개로 낳지 뭐! 괜히 조산원에서 생고생할 게 뭐야?’ 다들 그런 생각을 한다. 조산원보다 저렴한 비용도 고려하는 것 같고.”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는 판단은 합리적인 것 같다. 아닌가?
“안전하기는 조산원도 사실상 마찬가지다. 조산원과 산부인과의 가장 다른 점은 조산원은 응급상황 외에는 약물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지. 무통 주사나 촉진제가 산모와 아기의 건강에 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조산원에선 흡입분만도 하지 않는다. 일체의 난폭한 분만을 배제한다. 이러한 특장이 자연출산의 미덕이며, 산모는 물론 아기의 인권과 건강한 심신을 보장하는 방법이다. 자연출산의 이러한 지향에 대한 공부와 이해, 철학이 있는 산모들이 조산원을 찾아오는 것이고.”
산모들이 심적 부담을 크게 느끼는 ‘굴욕 3종 세트’라는 게 있더라.
“면도를 통한 사전 제모, 관장, 내진, 이 세 가지에 산모들은 심한 수치심과 두려움을 느낀다. 조산원에선 이것들을 하지 않는다. 분만 직전 미리 회음부를 절개해두는 행위도 하지 않는다.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로 가장 자연스러운 출산을 구사하는 거다.”
아기가 나오자마자 번호표를 매단 바구니에 담아 신생아실로 옮기는 산부인과의 방식은 이해하기 어렵다.
“조산원에선 산모와 신생아를 떼어놓지 않는다. 캥거루 케어라고, 분만 직후 아기를 엄마의 배 위에 밀착시켜 스스로 젖꼭지를 찾게 하고, 긴 스킨십을 하게 해준다. 이 과정에는 아빠도 적극적으로 참여시킨다. 이와 같은 가족적 유대 맺기는 출산의 전 과정을 통해 지속되고 강화된다. 산모와 아빠가 함께 물에 들어가 출산하는 수중분만을 통해 이 유대감은 극에 달한다. 수중분만을 하는 케이스는 많지 않지만.”
요즘은 산부인과에서도 ‘자연주의 출산’을 표방한다.
“일부 병원에서 그리하지만 여차하면 용이한 분만을 위해 관행적인 의료 시스템을 바로 동원하는 걸로 알고 있다. 조산원의 자연출산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진통이 격하게 오더라도 호흡법으로 고통을 줄여주며, 끊임없이 기다린다. 병원에서처럼 서두르지 않는다는 거!”
그녀는 아기 낳기를 충분히 뜸들이고서야 제대로 밥이 익는 일에다 빗댄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기. 이게 건강한 출산의 비결이란다.
“산모의 안전과 건강은 물론, 이상적인 상황에서 아기가 나올 수 있도록 차분히 기다려줄 줄 알아야 건강한 출산이 가능하다. 이 기다림의 과정에서 실로 신비한 경험도 했다. 가령 역아(逆兒, 거꾸로 자리 잡은 태아)의 경우 산부인과에선 제왕절개 수술을 하게 마련이지만, 나는 역아가 스스로 바른 자리를 잡을 때까지 기다려준다. 한번은 무려 6일간 기다리자 드디어 태아가 자세를 바로잡더라. 참으로 경이로웠다.”
산모도 조산사도 꾹꾹 눌러 견디는 기다림이 있고서야 신생의 환한 아침이 온다. 아프고 서러워도 기다릴 줄 알아야 사랑이라 했던가. ‘전쟁’에 가깝다는 출산의 압박감을 기다림으로 완화해 이윽고 평화로운 지평에 도달하는 이치. 이 기다림의 묘미야말로 삶의 전반적인 문제를 처리하는 비결이기도 하다.
“이거 아나? 뱃속의 아기는 천재라는 거!”
정말로?
“산부인과에선 산모의 골반이 좁아 아기의 머리가 빠져나오지 못할 경우엔 별수 없이 제왕절개 수술을 한다. 그러나 내 경험에 따르면, 시간은 많이 걸리지만 아기가 결국은 자력으로 빠져나오더라. 좁은 골반의 폭에 맞춰 아기 스스로 제 머리통을 길쭉하게 늘려 무사히 빠져나오는 거다. 그러곤 바로 머리 모양이 원상회복된다. 이게 천재가 아니고선 가능치 않은 일이라는 얘기다.(웃음)”
어떤 상황에서도 순산을 거두는 당신도 보통이 아니다.(웃음)
“때로 과한 칭찬을 듣곤 했다. ‘원장님에게서 후광이 비쳤어요. 신의 손길을 느꼈어요.’ 이런 얘기를 들을 때면 가슴이 벅차게 뛰더라. 그러나 난관을 견뎌내고 무탈한 출산을 하는 산모보다 내가 더 낫다고 할 수 없다. 아기 역시 위대하다.”
그녀는 자기의 조력으로 2대에 걸쳐 출산을 한 이들을 잊지 못한다. 차후 3대로 이어지는 출산을 돕고 싶다지. 한 20년은 기다려야 이룰 수 있는 꿈이다. 야생처럼 당당한 자연출산의 조력에 도가 튼 사람의 꿈이 이렇게 야무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