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등을 통해 우리 사회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통찰을 담아냈던 송호근(宋虎根·61)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사회학자로 저명한 그가 이번에는 소설가로서 대중과 만났다. 논문이나 칼럼이 아닌 소설을 통해 송 교수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성과 지혜를 를 통해 나누고자 한다.
송호근 교수의 첫 소설 는 지난해 말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할 무렵부터 두 달여에 걸쳐 쓴 작품이다. 그는 조선 후기의 무신이자 외교관이었던 신헌(申櫶, 1810~1884)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신헌은 봉건과 근대 사이에 선 경계인이자, 강화도조약을 협상하며 제국의 도래를 내다봤던 선각자로 그려진다. 신헌이 살던 19세기의 모습과 진영논리가 대치하는 21세기 우리 사회의 모습은 송 교수의 머릿속에서 자연스레 오버랩됐다.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신헌이 쓴 가 바탕이 된 소설인데, 당시와 현재 우리의 처지가 많이 닮았더라고요. 미국과 중국의 함대가 맞붙고, 사드 배치 문제가 뜨거운 이슈가 되었는데 내부 싸움에 여념이 없는 현실을 보며 느낀 답답함을 소설의 언어로 표현했어요. 소설이라는 새로운 작법이 낯설긴 했지만,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도전하게 됐죠.”
감성의 바다에서 건진 위로
그렇다면 왜 소설이라는 장르를 택한 것일까? 평소 그가 쓰던 사회과학서나 논문 등으로 보여주는 게 더 편리하지 않았을까? 이에 그는 ‘감동’의 유무 때문이라고 했다.
“최근 일어난 사태들을 가지고 논리로만 표현하면 별 감동이 없어요. 140년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할 거냐, 이 시대에 신헌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 이렇게 규범적으로만 끝나버리죠. 논리만으로는 화해하기 어려운 감정이 있거든요. 사회과학이 다루는 이성보다는, 소설의 언어와 감성이 사람들을 움직일 때가 있죠. 지식의 공유가 아닌 그런 지혜를 나누고 싶었어요.”
사실 그에게 소설은 낯선 장르가 아니다. 대학 시절 문학평론을 쓰며 가까이했고 여전히 소설을 통해 삶의 실마리를 찾곤 한다.
“학창 시절에는 줄곧 문학만 봤어요. 현실에 불만이 많아서 그랬던 거 같아요. 현실을 뛰어넘는 방법은 종교와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젊을 때이니 종교에 빠지긴 어렵고, 사랑은 가능하긴 하고. 어쨌든 그 두 가지를 리허설해볼 수 있는 방법은 문학밖에 없었으니까요. 문학의 세계가 워낙 넓잖아요. 그 감성의 바다를 유영하면서 살아가는 원칙을 건지거나 신념과 조우하기도 하는 거죠. 소설에는 대개 영웅보다는 요즘 말로 루저(loser)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에게 나를 투영하면서 세상을 들여다보기도 했고요. 문학은 내가 사회과학을 하는 힘이자 문제의식의 창고를 마련해주는 존재로 늘 함께했죠.”
감성의 바다에 흠뻑 젖어 지내던 시절을 지나, 사회학자로서 현실을 바라보고 분석하는 동안 그는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는 가뭄의 단비처럼 촉촉하게 송 교수의 마음을 적셔주었다.
“논리는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해요. 어떤 논리를 완결해놓아도 조그만 한 부분에 불과하니까. 그걸 학문이라고 말하죠. 학문은 곧 인식론인데, 그건 이미 루트나 패러다임이 정해져 있어요. 그러니 뭘 해도 배고프죠. 집을 지을 때 뼈대가 학문이라면, 그 집을 어린이집으로 지을지 귀신의 집으로 지을지 정체성을 부여하는 건 문학이에요. 산을 볼 때도 문학이나 예술은 색깔도 모양도 다르게 보는데, 사회과학은 그냥 ‘산’이거든요. 그게 리얼리티이고, 그것을 포착하고 분석하는 데 익숙해져 있죠. 말하자면 메마른 지식인 셈인데, 지식은 위로가 되질 않더라고요. 이번 소설을 쓰면서는 그런 허기를 달랠 수 있었어요.”
경계인의 고독, 공(共)으로 채워야
소설을 읽다 보면 이따금 작가의 모습이 투영된 인물을 발견하게 된다. 에서 자신의 모습을 이입한 인물이 있냐고 묻자, 그는 단번에 “신헌 그 자체”라고 대답했다. 작가와 주인공, 두 사람의 연결고리는 무엇일까?
“경계인이라는 점이 같아요. 신헌은 문과 무를 겸한 유장인데, 중세와 근대가 마주치고, 유교와 천주교가 공존하는 경계에 서 있던 인물이죠. 나 역시 과거와 미래, 내부와 외부를 오가며 시세와 처지를 엿보고 있잖아요. 최근 일어난 사건들만 봐도 지식이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어요. 학자는 선택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결정은 정치인이 하는 거죠. 그저 경계인으로서 담벼락만 걷고 있을 뿐이에요. 양쪽을 흘깃흘깃 쳐다보고 고민하고, 계속 가슴속에서 갈등하고. 그런 모습이 신헌에게 투사된 거죠.”
베이비붐 세대의 맏형뻘인 그는 또 다른 경계에 서 있다. 바로 세대 간의 경계다. 아버지 세대를 봉양하고 아들 세대를 부양하는 끼인 세대로서 그는 불만과 설움보다는 자책과 인정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베이비부머는 세대와 권력의 경계에서 밀려나고 있죠. 그 설움이 대단할 거예요. 물론 우리도 한때는 내 아버지 세대를 밀어냈죠. 그러나 베이비붐 세대가 유독 예민한 것은 그 짐이 증폭된 세대이기 때문이에요. 흔히 경제성장의 주역이라고들 하잖아요. GNP(국민총생산)만 해도 1970년대와 현재가 100배 이상 뛰었으니까요. 그만큼 경제적 부담, 양육의 부담, 효도의 부담 등이 증폭된 거예요. 또 부모 세대에게 받은 게 없으니 자식 세대에게 그 한을 많이 풀었죠. 지금의 혼수문화도 돌이켜보면 다 우리 세대가 만들어놓은 거예요. 그런데 이제는 그 덫에 우리가 걸려들어버렸죠. 그러니 다 큰 자식 껴안고 살 수밖에요.”
송 교수가 베이비붐 세대의 삶을 그린 라는 책 제목처럼, 세대의 경계에 선 그들은 소리내 울 수조차 없는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상황일수록 나 자신만이 아닌 ‘공(共)’의 개념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세대는 평생 사(私)를 위해 살았거든요. 나의 가족, 나의 직장 이게 세계관의 전부예요. 공적인 자산? 그건 내가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왔죠. 그러나 서양의 경우를 보면 ‘사’가 너무 힘들다 보니 ‘공’으로 돌리는 방법을 찾거든요. 그게 바로 복지죠. 아주 작은 일이라도 좋아요. 아이들 등하굣길을 돕거나 동네 청소를 하거나 구청에 작은 사랑방을 얻어 주니어 멘토링을 한다거나. 그래야 세대 간 조화를 이루고, 일종의 소득 자원도 창출할 수 있다고 봐요.”
그 언젠가 어느 경계에서 또다시
로 시작한 대화는 자연스레 우리 사회에 대한 고찰로 이어졌다. 소설가로 마주했던 그는 어느 순간 다시 사회학자의 모습으로, 그렇게 학문과 문학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었다. 혹시 이번 기회에 소설가의 길로 접어드는 것은 아닌지 슬쩍 질문을 던지자 역시 경계인다운(?) 대답을 내놓았다.
“갑자기 소설가로 등단했다기보다는 예전부터 갖고 있던 것 중 하나를 드러낸 것에 불과해요. 앞으로는 뭘 할지 모르는 거죠. 희곡이나 시나리오를 쓸 수도 있고. 소재도 생각해놓은 것은 많아요. 다만 어느 순간에 절박한 무언가와 만나서 터져 나올 때, 그때 잠시 논리 밖으로 외출하게 되겠죠. 탄핵처럼… 아마 또 그런 계기가 있지 않겠어요? 암울하잖아요.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나. 또 그 속에서 생기는 딜레마. 논리로 풀 수 없는 세상과의 부딪침. 그런 게 터져 나오는 거죠. 뭐, 그렇게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어요. 돼도 안 돼도 그만인 거고요.”
인간과 인간이 만나 기품 있는 가정을 꾸리는 것은 어떤 예술보다 아름답고 귀한 일이다. 부부가 나누는 대화나 작은 감정표현에서도 우리는 기품을 느낀다. 괴테도 “결혼생활은 모든 문화의 시작이며 정상(頂上)이다. 그것은 난폭한 자를 온화하게 하고, 교양이 높은 사람에게 있어서 그 온정을 증명하는 최상의 기회다”라고 말했다. 이혼은 절대로 용납 못해 졸혼으로 사는 사람도 있고, 이혼했지만 다시 만나 사는 부부도 있다. 부부란 참 신기한 관계인 것이다. 여기 부부의 삶을 기품 있게 잘 이어온, 나이가 들어도 아직 끌어안고 잔다는 이강추(82) 성정수(77) 부부가 있다. 이강추씨는 극구 고사해서 아내 성정수씨만 만났다. 사진 변용도 동년기자
50년이 다 되도록 금실 좋은 부부로 잘 살 수 있었던 비결은?
처음부터 좋은 금실은 아니었고요. 초기에는 힘겨루기도 했지요. 그랬더니 나만 힘든 거예요. 남편은 끄떡도 않는데…. “문제가 뭐지?” 하며 공부를 했고 대화 방법을 알아갔어요. 차츰 서로의 강점과 취약점을 알게 되었죠. 그것도 구체적으로요. 그 점을 늘 염두에 두고 갈등이 있어도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되도록 애썼지요. 주로 내가 먼저요. 그러면 남편도 어느새 스르르 풀렸고.
두 분 성격은 어떻게 다른가요?
남편은 흔히 말하는 모범생으로, 세상의 소금 같은 형이죠. 성실 근면하고 규범과 원칙을 중시해요. 그만큼 책임감은 높지만 새콤달콤 시원한 맛은 없어요. 무덤덤한 편입니다. 반면 나는 열정적이고 상황 적응력과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이 뛰어나요. 인간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며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을 보면 그냥 못 지나가요. 사람들과 나누어야 할 일들이 많아 늘 분주하죠.
같이 있는 시간이 많을 텐데 싸우지 않나요?
서로의 시간을 존중합니다. 각각 자기 할 일, 즉 컴퓨터, 독서, 글쓰기에 몰두하면서 두세 시간씩 보내기도 합니다. 마주하는 시간에는 교회활동이나 사회문제 등 각자가 보고 들은 것을 서로에게 얘기해주며 소감과 의견을 나눠요. 얘깃거리가 많아 싸울 시간이 별로 없어요.
자식농사 잘된 것, 누구의 공입니까?
우리 부부의 공동 합작입니다. 서로의 좋은 점을 닮았으면 했고, 서로가 완충지대 역할을 했어요.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는 모습은 남편의 영향이지만, 진로에 어려움이 있을 때 아들이 원하는 길을 과감하게 허용, 해결이 되도록 도운 것은 나의 자녀교육 방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봐요. 아들 둘이 남편에게서는 볼 수 없는 재주를 가지고 있어요. 남편은 날 닮았다 하면서 늘 부러워하는 편이죠. 큰아들은 글로, 둘째는 음악으로 표현하는 재주가 있답니다.
50년씩이나 끌어안고 살 수 있는 진짜 힘은 무엇일까요?
남편이 소록도 병원 근무 기회가 주어졌을 때, 천주교 신자로서 교회활동뿐 아니라 남편의 직장 일에도 관심을 갖고 비서로 수렴청정(?)까지 했어요. 문제가 생기면 늘 같이 의논하고 해답을 찾았죠.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 만나면 대화를 하다 보니 얘깃거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어요.
가정일은 손실과 실패가 있어도 탓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편이에요. 우리는 ME부부(Marriage Encounter, 부부일치운동) 회원으로서 ‘결정은 부부가 함께’를 실천해왔어요. 매일 밤 부부의 기도를 합니다.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못 살 때나 잘 살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게 하라.” 성당에서 혼인할 때 한 서약 내용을 읊조리죠. 천주교의 신앙생활이 부부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그래도 남편이 미울 때가 있죠?
순간적으로 목소리를 높일 때죠. 대개 가치지향적 문제에 견해가 엇갈릴 때예요. 그러나 그런 상황은 잠깐이고, 서로 팽팽히 맞서다가 우리와 직접 관계가 있는 문제가 아니므로 감정이 오래가지는 않아요.
남편이 미울 때는 어떻게 해결하나요?
나도 약점, 잘못한 것 있는데 ‘저 사람만 탓할 수 있나’ 양심에 호소하고, 마음을 내려놓으면 미운 감정이 눈 녹듯 녹습니다(웃음).
배우자에 대한 측은지심은 언제 생기나요?
장례미사에서 떠나는 이를 보거나 내가 건강이 좋지 않을 때죠. 먼저 세상을 뜰 것 같은 생각이 들 때 혼자 남아 있을 남편이 걱정되고, 그 외로움이 헤아려져 측은한 마음이 들어요.
이혼을 생각한 적 있나요?
신혼 때였어요. 남편은 평소에도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지만 자신이 불리하다고 생각하면 아예 입을 닫아버려요. 내 말이 공격적이면 더 심해져요. 불통이 되는 거죠. 결혼 초에는 이렇게 말이 안 통해서 평생 어떻게 사나? 순간 이혼이란 말이 떠올랐어요. 고심 끝에 인간관계 공부를 시작했어요. 부부관계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조화를 이루어가는 것이더군요. 상담 공부를 하면서 직장, 교도소 등 인성교육 집단지도를 하러 다니게 되었어요. 부부관계의 유지는 사랑뿐 아니라 신뢰와 존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나의 부족한 점을 잘 견뎌주고 헤아려주는 남편을 보면 겸손해지더군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편에게 고마운 점은?
성당에 가는 발걸음이 한결같아요. 매일 새벽미사에 다니고 성당에 일이 생기면 언제라도 달려갑니다. 남편은 노(No)~ 하는 법이 없어요. 우리 부부는 서로 의논이 잘되는 편이에요. “그렇지, 옳지” 하면서 추임새로 긍정적인 응대를 해주고 내 요청을 웬만하면 다 들어줍니다.
시장에 장보러 같이 가고 병원, 약국도 같이 가요. 영화도 자주 보고요. 영화는 내가 좋아하는 취미생활인데 내가 좋아한다고 함께 봐주다가 이제는 남편이 더 좋아하는 취미가 되었어요.
남편은 나이가 팔순이 넘도록 매일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출근합니다. 또 어떤 일이 있어도 국이 있는 아침밥을 먹어야 하는 남편의 밥상 차리기가 쉽지는 않아요, 남편은 특히 보건복지부 국장 시절에 발생한 사건 때문에 고통을 겪을 때 큰 힘이 되어주었다며 고마워했어요. 그렇게 고마워하니 저도 고마운 마음입니다.
증조할아버님 때부터 우리 집은 장남 집안이 되었다. 증조할아버님은 본래 차남인데, 형님이 큰댁에 양자로 가는 바람에 졸지에 장남이 되었다. 그런데, 할아버님도 증조할아버님과 똑같이 형님이 큰댁에 양자로 가게 되어 장남이 되고 말았다. 시아버님은 5형제의 장남이고, 남편도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거기다가 아들은 외아들이다. 이렇게 해서 5대째 장남인 집안이 되었다.
종부의 자리
시아버님의 형제들과 그분들에게서 태어난 자손들까지 모두들 우리 집으로 다 모인다. 시집와보니 처음에는, 기본이 27명이었다. 사촌 시동생들이 차츰 결혼들을 하고 아이들을 낳으니 숫자가 늘기 시작했다. 증조할아버님이 장남이 되어서 부모님의 제사를 지내다가 할아버님이 물려받고, 또 시아버님이 물려받았는데, 일찍 돌아가셔서 남편이 물려받고 내리내리 하다보니까 우리는 8분의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처음에는, 제사와 명절이 돌아 올 때면 두 달 전부터 걱정되고, 끝나고 나면 한 달씩 앓아누웠다. 막내로 자라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있다가 얼떨결에 종부가 되어버린 필자는 종부의 자리가 겁이 났다. 종부의 자리는 아무나 앉는 자리가 아닌데, 자격도 없이 덜컥 앉아버렸으니, 몸 고생과 마음고생이 자심하다. 작은 종부자리도 이렇게 어려운데, 대종가집의 종부는 얼마나 어려울까! 가늠조차 안 된다.
2대에 걸친 개혁 단행
새 할머님도 어머님도 모두, 2대에 걸쳐서 집안을 위해 획기적인 개혁을 단행하셨다.
새할머님은 제사를 하나로 통합 하셨고, 어머님은 제사를 아예 없애고, 시아버님의 묘를 ‘아내의 권한’으로 폐장 하셨다.
할머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할아버님이 재혼을 하는 바람에 새 할머님이 계시는데, 그 제사를 평생 모두 받들었다. 돌아가실 때는, 후손들을 위해서 ‘바쁜 세상에 젊은 사람들이 일해야지, 어떻게 제삿날 일일이 다 모일 수 있겠느냐, 시대에 맞게 고쳐가면서 살아야 한다’시며 제사를 모두 모아 합쳐서 할아버님 제삿날에 합동으로, 일 년에 딱 한번만 제사 받들라고 유언하셨다.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개혁이었다. 그 덕분에 손부인 필자가 좀 편해졌다.
어머님도 돌아가시기 몇 년 전, 윤달을 택해서 남편의 묘를 ‘폐장’ 하셨다. 그리고는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성당에 납골을 하라’고 하셨다. 어머님은 천주교 신자이시다. 시누이들도 모두 천주교 신자인데, 어머님의 납골 관리는 딸들에게 맡기셨고, 고향에 있는 산소들은 맏아들인 우리에게 맡겨졌다. 전부터 우리가 관리해 오던 것이니 당연한 일이다.
또, 몇 년 전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쯤에는, 제사를 아예 없앴다. 작은 아버님이 돌아가신 분도 있고 하니까, 각각들 개인적으로 집에서 제사를 따로 지내고, 우리 집에서 모두 모이는 건 이제 그만 하자고 하셨다. 우리에게도 윗대 조부모님들 제사는 집에서 지내지 말고, 그 대신 성묘 가서 간단하게 지내라고 평소에 늘 말씀하셨다. 그래서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로는 제사도 폐하고, 조상 묘가 있는 남편 고향에, 일 년에 두 번, 한식 때와 추석 때에 성묘만 다녀온다.
개혁에 대한 갈등
이제는 우리 차례다. 새 할머님이나 어머님처럼, 세상 떠나기 전에 집안의 마지막 남은 폐단을, 개혁하고 떠나야 할 사명이 남편과 내게 있다. 그것은 남은 조상들의 묘를 윤달마다 하나씩 폐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가 요즘 갈등하는 문제가 바로 ‘조상의 산소 폐장’이다.
조상의 묘를 폐장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집안의 어른들이 동의해 주어야 하고, 형제들과 사촌들의 동의도 있어야 한다. 동의라는 것이 본시 한 사람의 동의도 얻어내기가 어려운 것인데, 여러 사람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일이니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풍수지리를 공부한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동기감응’이라는 말이다. 조상과의 동기감응으로 인한 ‘후손 발복’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화장’을 하면 ‘동기감응’은 없다.‘무해무득’ 즉,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뜻이니 ‘후손 발복’ 자체를 바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납골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흙으로 돌아가도록 놔 주어야 한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을 붙잡고, 후손에게 물려줄 산천을 훼손하는 일은 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어머님도 조상들의 산소 폐장을 유언하셨고, 필자도 어머님과 같은 생각이다. 그런데, 2017년에 윤달이 온다. 어떻게 해야 하나? 다만, 지금은 시기적으로 너무 이른 것 같아서 남편과 필자가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폐장은 언제고간에 꼭 해야 할 일이다. 산은 가까이서 보면 잘 모른다. 멀리서 바라봐야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 고속도로를 지나다 보면, 아름다운 산천이 군데군데 후벼 파헤쳐져 흉측하기 이루 말 할 수가 없다. 무분별한 개발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산을 깎아서 모두 산소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이 땅이 자꾸만 훼손되고 자원이 고갈되어가고 있다. 이러다가는 산천이 모두 산소로 뒤덮이고 말 것만 같다. 후손에게 물려 줄 것이 없다는 건 후손의 미래가 어려워진다는 것과 같다. 이 땅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남겨져야 한다. 죽은 사람은 깨끗이 퇴장하는 것이 아름답지 않을까 생각한다. 후손들은 조상의 훌륭한 일들을 기억하고, 배워서 훌륭한 조상들의 행실을 본받고, 또 다음세대에 알리고 가르치고 하는 일들을 이어가면서 한 집안의 전통과 문화를 만들어 가면 족하다고 본다.
필자에게 신의 은총과 의를 가르쳐준 두 친구가 있다. A는 원수처럼 좋지 않은 관계에서 필자에게 용서의 의미를 일깨워 주었고 B는 절친한 친구였는데 의를 가르쳐준 은인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 둘은 직장 친구이다.
A는 앙숙이었다. 필자와 그는 회사에서 업무 시간이면 사사건건 논쟁을 벌여 상종을 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 미웠다. 그런 그가 정년퇴직하고나서 헤어진 지도 10년이 넘은 나의 아들 혼사에 축의금을 보내고는 이제 다정한 사이가 되었다. 그와의 문제는 신의 은총으로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천주교 신자로서 영세받는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죄로부터 사함을 받는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 그를 기념으로 용서해 주기로 했더니 어느 순간부터 오히려 필자가 그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원망과 원한은 필자의 생각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B는 입사 동기였는데 간 쓸개 다 빼주는 친한 친구였다. 우리는 바둑을 좋아해 더욱 돈독해진 것 같다. 나이는 필자보다 두 살 아래였지만 그가 경력입사였던 통에 직위는 필자보다 한 직급 위였다.
둘은 성격도 정 반대였지만 장단이 잘 맞았다. 그는 필자와 달리 온화한 성격이나 자신이 원하는 것은 어떻게 하든 다 깔끔하게 처리하는 그 기술이 참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두 사람만의 은어를 만들어 큰 소리로 허심탄회하게 상사나 동료들 욕도 하면서 함께 가끔 스트레스도 풀기도 하였다.
조직이 바뀌어 그는 타 부서로 전출을 가게 되었으나 우리는 서로 만나 식사도 함께하고 예전처럼 즐겁게 지내는 관계였다. 그가 인도 뭄바이지점으로 발령나서 해외근무를 할 때는 가끔 그의 개인적인 협조 요청을 포함하여 본사의 지원 사항 같은 것을 그가 원하면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한 번은 그가 중역으로 진급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고 우리가 존경하던 상사였던 부사장에게 그의 진급 품의서를 필자가 받아 결재올려 그가 진급하도록 내조하였던 적도 있다.
그런데 결정적인 위기가 있었다. 당시 필자의 총괄중역이었던 전무가 당시 부서장을 맡고 있던 필자에게 그 친구가 중역으로 진급하면 자리가 없어 진급이 어려운데 만일 필자의 부서 담당 중역으로 오게 하면 어떨지를 물어왔다. 만일 원하지 않는다면 승인하지 않겠다는 뜻도 비추었다. 그러나 친구가 잘되면 서로 윈윈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동의하여 그가 진급하여 우리 부서의 담당 중역으로 오게 되었다.
문제는 그가 상사로 오는 순간부터 그의 말과 행동은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마치 부서장으로 일해온 필자의 업적과 실적을 비방해야 자신의 위치가 확고해지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 같았다.
그 정도는 참고 지낼 수 있었다. 더욱 필자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당시 필자의 총괄중역이었던 사람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사연이 있었던 본부장과 서로 말을 맞추어 20년간을 한 우물을 파온 필자를 부서장 직에서 해임하고 전혀 문외한 이었던 인물을 스카우트하여 부서장에 보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영화나 연극에서 일어날 수만 있던 일이 현실에서 일어났다. 아, 역시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더니 그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무작정 하기휴가를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떠났는데 경남 진주시 남강 근처에서 래프팅을 하기 전에 시간이 나서 인근 명소를 찾다보니 고 성철스님의 생가가 있었다. 그가 생전에 남긴 유물과 글들을 스치듯이 보고 지나치는 동안 유독 이상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 세상에서 나에게 가장 못된 짓을 한 악인은 나의 은인이다.” 말도 안 되는 그야말로 헛소리처럼 느껴졌다. 혹시 잘못 봤나 싶어 가던 발길을 돌려 다시 보았는데 역시 그런 의미였다. 하지만 곱씹어 되새겨 보니 과연 그랬다. 필자가 그 친구로 인하여 세상살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제대로 옳게 한 수 배우게 되었던 것이니 그가 바로 은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한 섭섭한 행위보다 그를 이해하는 측면에서 생각을 해보았다.
본부장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자신이 위험한 상황이었을 터인데 그도 직장생활하다 보니 불가피 했을 것이다. 필자에게도 단점이 있고 일하면서 많은 하자가 있었을 터이니 보기에 따라 부정적인 측면을 보면 그렇게 동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 친구를 이해하고 나니 그가 세상 일이 이렇게 돌아갈 수도 있음을 깨우쳐 준 은인이 되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절대 깨우칠 수 없는 세상살이의 법칙이 존재할 수도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 은인이었다.
불화살이 쏟아지듯 뙤약볕이 내리쬐는 7월의 풀밭.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질식할 듯한 폭염 속에서 저 홀로 화사한 선홍색 꽃을 피우는 야생 난초가 있습니다. 자신을 집어삼킬 듯 이글거리는 태양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맞서기에는 힘이 부친 듯, 온몸을 비틀어 마지막 한 방울의 색소까지 짜내어 보는 이를 한눈에 사로잡기에 충분히 매혹적인 꽃다발을 선사합니다. 그리고 소리쳐 외칩니다. ‘나는 이름 없는 잡초가 아니라 7월의 야생화, 타래난초’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산으로 들로 우리 꽃을 찾아다니는 이들 중에 야생화의 아름다움에 빠지게 된 계기로 타래난초와의 만남을 꼽는 이가 여럿 있을 만큼 첫인상이 강렬한 야생 난초입니다.
그런데 첫눈에 사람을 사로잡는 타래난초의 매력은 동서의 구분이 없나 봅니다. “나는 지중해를 굽어보는 넓고 기름진 평원에서 이 꽃을 찾았다. 털이 난 늘씬한 자태, 솜털이 보송보송한 줄기에는 꽃들이 나선형으로 줄기를 잡았다. 꽃부리가 하나하나 열리는 품이 마치 항성의 궤도에 키스를 하는 듯하다.” 프랑스의 식물학자 이브 파칼레(Yves Paccalet)는 란 책에서 타래난초류의 하나인 스피란테스 스피랄리스(Spiranthes spiralis)를 처음 만났을 때의 감동을 전하면서 ‘님프의 하얀 젖가슴보다 더 아름다운 난’이라고 극찬합니다.
타래난초의 또 다른 매력은 국내 100여 종의 야생 난초 가운데 보춘화·옥잠난초와 더불어 자생지나 개체 수가 가장 많은 3대 난초로 꼽힌다는 점입니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높고 깊은 오지의 자생지를 굳이 찾아가지 않더라도 누구나 조금만 관심을 쏟으면 주변에서 만나 그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는 보편성이 참으로 마음에 듭니다.
6월에서 8월 사이 양지바른 풀밭이나 묘지 근처 잔디밭 등지에서 10~40cm의 꽃대가 올라와 길이 4~6mm의 꽃이 이삭 형태로 다닥다닥 달리는데, 이때 꽃이 배열된 형태가 꽈배기처럼 나선형이어서 타래난초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수십 개의 꽃이 한쪽 방향으로 연이어 달릴 경우 길고 가는 꽃대가 한쪽으로 쏠려 쓰러질 위험이 크기 때문에 나선형 꽃차례를 택했다는 게 식물학자들의 설명입니다. 그 결과 ‘똬리를 틀 듯 비비 꼬이다’라는 뜻의 ‘타래’라는 우리말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지요. 때문에, 처음 보는 순간 ‘예쁘다. 근데 이름이 뭐지?’ 하고 묻고서 ‘타래난초’라는 대답을 들으면 ‘아! 그럴듯하네’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꽃이 바로 타래난초입니다. 꽃 색은 대체로 붉은색이지만 옅은 분홍색 등으로 다소간의 변이가 있기도 하며, 흰색의 꽃은 아예 흰타래난초라고 따로 불립니다.
Where is it?
앞서 설명했듯 전국이 자생지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야생화가 그렇듯 한번 알아보기 시작하면 여기저기서 흔히 만날 수 있는데 첫 대면이 어렵다. 타래난초 또한 초보자에겐 굉장히 귀하게 여겨지는 야생화다. 때문에 비교적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을 찾아가는 것도 방법이다. 수도권 인근에서 알려진 자생지 중 하나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천주교 소화묘원의 잔디밭이다. 인천 무의도 등산로 주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충북 괴산의 이만봉 아래 ‘분지제’ 제방은 흰타래난초의 자생지로 알려졌다.
그녀에게 인터뷰 요청을 하자 어머니 생각을 하며 3일 동안 고심하며 쓴 A4용지 4장 분량의 원고를 보내왔다. 어머니에 대한 내용이었다. 영락없는 조선시대 어머니의 모습이다. 한 남자를 위해 헌신하는 아내, 시부모님께 효도하는 며느리, 그리고 자애로운 어머니. 그래서 안영의 어머니는 신사임당을 닮았다. 이 글은 안 씨가 보낸 글을 바탕으로 했는데, 기자와의 인터뷰도 더해졌다.
그녀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밤, 어머니의 숨소리가 더 거칠어진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아침이 되자 철없는 그녀와 자매들은 동구 밖으로 은행을 주우러 갔다. 동구 밖 여러 그루의 은행나무에선 비바람 부는 날이면 은행이 후드득 떨어져 온 동네 사람들이 은행을 줍겠다고 모여들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모두 나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은행을 줍고 있었다. 그 속에 섞여 언니들과 신나게 주운 은행을 한 소쿠리에 채워 돌아오니, 어머니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곧 사랑채에 계시던 할아버지도 모셔오고, 온 가족이 어머니 주위에 둘러앉았다. 숨이 가빠 어쩔 줄 모르던 어머니는 막내인 그녀와 눈을 맞추며 안쓰러워 하셨다. 그렇게 어머니와 작별을 했다. 전쟁 통에 아버지를 보낸 지 5년 만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따라가셨다. 그때 그녀의 나이 16세, 여고 1학년이었다.
◇“모두들 어머니를 보살이라고 불렀어요.”
“한학자였던 할아버지에겐 방문객이 정말 많았어요. 그때마다 모든 상차림은 어머니가 맡았죠. 손님뿐만이 아니었어요. 서울에 있을 때도 늘 고향 친척이 함께 묵었고 광주, 전주에 있을 때도 사촌 형제들이 함께 와서 학교를 다녔으니 언제나 대가족이었죠. 어떤 경우에도 자기를 희생하며 모든 사람에게 친절을 베푼 어머니를 친척들은 ‘보살’이라고 불렀어요.”
어머니의 음식 솜씨와 바느질 솜씨 그리고 바른 품행은 시부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의 시부모(안씨의 조부모)는 존중과 사랑으로 며느리를 지극히 아꼈다. 시아버지는 훗날 며느리의 병상이 깊어지자 온갖 한약을 지어다 손수 약탕관에 달이며 정성을 다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 사랑을 받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안씨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집에 오는 손님을 잘 대접해야 한다며 예절을 가르치고 바삐 움직이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시부모의 입장에서는 흐뭇한 미소가 일어나는 건은 당연지사였다.
그러나 안씨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가부장적인 남편이었다. 막내인 안씨를 끔찍하게 귀여워했지만, 어머니를 생각하면 아버지가 밉다는 안씨다. 아버지는 해방 후 군정 당시 중앙청 인사행정처 총무과장, 전라남도 도청 지방 행정 인사처장, 전주 도청 상공 국장, 초대 전주시장 등을 해 전근을 수도 없이 했다. 때문에 공직자들은 물론 이름 있는 예술인들, 안씨 종친들까지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손님들이 오시면 어머니가 음식을 하셨어요. 손님들은 이 산골 벽지에 어찌 이토록 격식 있는 음식이 나오느냐고 놀란 적도 많아요. 큰 손님이 올 때면 아버지는 기생들도 데려다 가야금을 켜게 하셨는데, 어머니는 그때마다 불평 한마디 없이 온갖 음식을 만들어 밥상을 차리셨어요. 어머니의 그 인내와 음식 솜씨는 제가 평생 살아도 따라가지 못하겠더라고요.”
◇6·25, 아버지를 잃고
할아버지는 꿈자리가 사납다고 했다. 공산군이 집을 차지하고 피난 간 아버지가 어디 숨었냐며 안씨 자매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얼마 후의 일이다. 그 고약한 꿈자리가 맞는지 확인하기 하기 위해 칠순이 넘은 할아버지는 괴나리봇짐을 등에 지고 50리를 걸었다. 한달음에 달려간 피난처에 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동행했던 오빠가 어제 저녁 아버지가 붙잡혀 갔다면서 벌벌 떨고 있더란다. 마침 동네 아주머니로부터 산을 넘어오다가 시체를 여러 구 봤다는 제보를 받고 할아버지는 오빠를 데리고 산자락을 뒤졌다. 아버지의 몸은 차가웠다. 7월 25일, 전쟁이 난 지 꼭 한 달 만에 아버지는 그렇게 공산군에게 총살당했다.
“할아버지는 오빠와 둘이 아버지의 피 묻은 옷을 그대로 산자락에 묻었다고 해요. 그 사실을 어머니에게만 알리고, 어머니는 오랫동안 감추셨어요. 우리들이 놀랄까 봐 울지도 못하고 슬픔을 삼키셨겠죠. 그때 제 나이 11살, 초등학교 5학년이었어요.”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했다. 방마다 들어와 있던 공산당 무리도 나갔다. 정부는 동사무소 단위로 공안 위원을 뽑아 공산군 색출에 나섰다. 안씨의 오빠는 공안위원으로 뽑혀 공산군에게 복수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복수의 칼날이 시퍼렇게 서 있기는커녕 회의에 참석하는 아들에게 말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도량이 넓은 어머니였다.
“동네 사람들이 공산군과 합세해 우리에게 모질게 굴었지만 복수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셨어요. 혹여 오빠 말 한마디로 양민증을 못 얻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말이죠. 당시에는 위원 중 한 사람만 거부해도 양민증을 받을 수 없었는데, 그 양민증이 없으면 아무데도 못 가거든요.”
◇신앙과 가족 그리고 문학
“사춘기 소녀 시절 부모가 안 계신다는 상실감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어요. 할아버지께서는 걱정이 되셨는지 편지로 항상 ‘바르게 크거라’라고 말씀해 주시곤 했죠. 그래서 매일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형식의 일기를 쓰면서 고독을 달랬어요. 그리고 부모님 이름에 누가 될까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 준 것은 문학과 가족, 그리고 신앙이었다. 여고 시절 성당에서 울려오는 종소리에 이끌려 들어간 성당 안. 그 성당 한가운데 맨발로 팔 벌려 서 있는 성모상에서 버선발로 달려와 그녀를 반겨주는 어머니의 모습을 봤다고 했다.
“그 이후에 대학을 졸업하고 천주교에 입교해 하느님을 아버지로,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고 의지하며 마음의 안정을 얻었어요.”
때로는 헛헛한 마음을 채워주지 못할 때 신앙의 힘으로 버텨낸 그녀였다. 그녀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어머니지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할아버지라고 했다. 그녀의 소녀 시절 인성 교육에 올바른 길잡이가 돼 주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부모 없이 커가는 손녀에게 펜을 들어 편지를 썼다. 어머니의 베푸는 삶과 할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은 그녀가 문학소녀로 바르게 성장하는 초석이 됐다.
“제가 25세 때 황순원 선생님께서 등단 추천을 할지 말지 고민을 하셨어요. 그러시더니 집에 가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봐야겠다고 하시더군요. 정말로 저희 할아버지가 계신 광양 집에 오시더니 할아버지의 선비 정신에 매료되셨는지 흔쾌히 추천을 해주시더라고요.”
그 계기로 문학계에 등단한 지 올해로 50년, 천주교에 입교한 지도 50년이다. 등단 이후 수많은 수필과 소설 등의 글을 써 왔다. 특히, 그녀의 장편소설 에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모습이 담겨져있다. 신사임당을 닮은 어머니 말이다. 효도만 잘 가르쳐도 더불어 잘 사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녀다. 그런 확신을 펼쳐 보고자 효도로 극진한 신사임당 가정을 택했다고 한다.
#천년 역사의 중심에 선 한옥마을
전주라는 이름을 갖게 된 지 천년이 훌쩍 넘는다. 신라시대 때인 757년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그 오랜 세월 속에 녹아든 역사의 무게는 가히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의 깊이를 지닌다. 후백제의 마지막 수도이자, 조선왕조를 꽃피운 발상지로 역사의 중심이 되어온 도시다. 그게 다가 아니다. 현재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음식창의도시이자 판소리의 본고장으로, 또 가장 한국적인 전통문화를 담고 있는 도시로 세계에 이름을 알리고 있다. 전주라는 이름의 화려한 역사는 지금도 진행 중이기에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그 중심에 한옥마을이 자리한다. 700여 채의 한옥이 도심 한복판에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 한옥촌이 형성된 것은 불과 10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 자긍심의 표출로서 지금의 한옥마을을 이루게 된 것이다. 1905년 일본이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한 이후 전주에도 일본인들이 대거 들어왔다. 처음에는 전주성 바깥쪽 전주천변에 거주했으나, 성곽이 강제 철거되고 성 안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렇게 세력을 확장하며 일본인들이 전주 최대의 상권을 차지하고 만다. 이에 대한 반발로 1930년을 전후해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전통가옥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점점 늘어나는 일본식 건물에 맞서 뜨거운 민족의식이 작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전주한옥마을은 조선왕조의 뿌리이면서 암울한 시대를 헤쳐 나가려는 저항의 상징으로도 여겨진다.
#역사의 향기를 따라 거닐다
한옥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오목대에 오를 것을 권하고 싶다. 이곳에 올라야 한옥마을 풍경과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천천히 올라도 10분이면 충분히 오를 만큼 나지막하다. 언덕바지 중턱에 설치된 조망대에 서면 기와지붕과 처마 곡선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오목대는 이성계가 남원 황산에서 왜구를 정벌하고 개선하는 길에 종친들과 전승 축하잔치를 벌인 곳이다. 그 자리에서 유방이 불렀다던 대풍가를 읊어 자신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뜻을 넌지시 나타냈다고 한다. 훗날 조선왕조를 개국하고 이곳에 정자를 지어 오목대라 이름 붙였다. 정자 앞에는 고종황제의 친필 비석과 비각도 함께 세워져 있다. 태조께서 잠시 머물렀던 곳이라는 뜻의 ‘태조고황제주필유지’라는 비문을 보고 있자니 묘한 기분이 든다. 한 왕조의 막을 내리는 황제가 그 나라의 문을 열었던 선조의 머문 자리에 글귀를 새기는 심정은 어땠을까.
오목대에서 내려와 태조로를 따라 400미터 정도 가면 두 마리의 사자가 기다린다. 경기전 정문 앞에 있는 하마비(下馬碑)이다. 이곳을 지날 때는 계급의 높고 낮음과 신분의 귀천을 떠나 누구라도 말에서 내려야 하며, 잡인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특히 이곳의 하마비는 한 쌍의 사자가 판석을 받치고 있고, 그 위에 비를 세워놓았다. 여느 하마비와는 다른 모습이다. 조선왕조를 건국한 왕의 어진(왕의 초상화)을 봉안한 곳이기에 수문장으로서 하마비의 위용이 남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경기전에는 또 하나의 숨겨진 비밀이 있다. 바로 거북이 그것. 정전 중앙에 ‘丁(정)’자형으로 돌출된 배향 공간이 있다. 그 돌출된 지붕의 측면에 거북 두 마리가 붙어 있다. 경기전을 지은 목공이 화마를 피하고 조선이 영원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한 쌍의 거북을 붙여놓았다고 전해진다. 사실 이 거북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지 않다. 거북을 찾아보는 것도 작은 재미다. 경기전에는 태조의 어진을 모신 본전 외에도 전주 이씨 시조 이한공의 위패를 모신 조경묘, 조선의 여러 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 예종의 탯줄을 묻은 태실, 어진박물관 등이 함께 자리한다. 어진박물관에는 태조의 어진을 비롯해 세종, 영조, 정조, 고종, 순종 임금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다. 가까이서 왕의 얼굴을 마주하는 즐거움을 누려볼 기회다.
경기전과 마주 보고 있는 전동성당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성당 중 하나다. 호남지역 서양 건축물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것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의 웅장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픈 역사도 함께 한다. 천주교의 첫 순교자가 나온 장소가 여기다. 많은 천주교 신자가 참수당한 자리에, 순교자들의 피로 물든 성벽의 돌들을 가져다 주춧돌로 사용했다고 한다. 지하에서 성당을 떠받치고 있는 돌에는 얼마나 많은 사연이 스며들었을까. ‘한국 최초의 순교터’라는 비석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전동성당에서 동쪽으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고려 때 쌓은 성문이 우뚝 서 있다. 풍남문이다. 옛 전주부성의 남쪽 문으로 네 곳의 성문 가운데 유일하게 보존되고 있는 보물이다.
#맛에 반하고, 멋에 빠지다
이쯤 되면 슬슬 허기가 느껴질 법도 하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자. 한국을 대표하는 맛의 고장답게 맛있는 음식이 수두룩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주비빔밥을 비롯해 콩나물국밥, 오모가리탕, 전주백반, 한정식까지 무엇을 먹어도 후회는 없다. 풍성한 음식은 물론 훈훈한 인심까지 더해져 여행자의 오감을 만족시켜준다. 오모가리는 뚝배기의 전주 사투리다. 크고 작은 오모가리에 끓여낸 매운탕이 바로 오모가리탕. 얼큰하고 깊은 맛이 일품이다. ‘전주막걸리집’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막걸리 주전자가 추가될 때마다 특별 안주가 코스로 따라오는 전주만의 특별한 문화를 경험해 보는 것도 좋겠다. 전주 음식에는 특별함이 있다. 가장 한국적인 도시에서 맛보는 가장 한국적인 음식, 그 맛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면, 다시 거닐어 보자. 오목대에서 경기전으로 이어지는 태조로를 걸어왔다면, 이제 한옥마을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은행로를 걸어볼 차례다. 수령 600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버티고 선 은행나무 길. 한가로이 거니는 발길 따라 맑은 물소리가 들려온다. 화강석으로 조성된 조그마한 실개천이 길 옆으로 흐르고 있어서다. 물길 따라 곳곳에 정자와 작은 연못, 물레방아 등이 조성되어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도 좋다. 전통문화가 묻어나는 공간과 세련되게 꾸며진 공간이 오밀조밀하게 어우러져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골목 구석구석 숨어 있는 다양한 전시관, 박물관, 체험관도 재미를 더한다.
한옥마을이 국제슬로시티로 지정되면서 관광객이 부쩍 늘었다. 이와 함께 상업시설이 그만큼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게스트하우스와 음식점, 카페 등이 들어서며 고즈넉한 분위기를 잃어가는 것 같아 안타까운 부분도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한옥카페에 앉아 우리 문화를 즐기는 외국인의 모습에 뿌듯한 마음도 든다. 한옥과 어우러진 커피향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지지만은 않다. 골목을 따라 더 깊숙이 들어가면 또 다른 세상을 만난다. 번잡한 도심의 풍경에 익숙해져 잊
혀가던 곳. 좁은 골목 사이사이
스며든 세월의 향기가 옛 정취를 고이 간직한 채 기다린다. 반가운 마음에 돌담 너머 누군가의 살림집 마당을 염치도 없이 훔쳐보게 된다. 골목길에서 느끼는 감정은 연령대마다 다를 것이다. 골목을 가로막고 실컷 뛰놀던 시절이 있을 테고, 지친 마음으로 지나쳤을 때도 있을 테니 말이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억들에 마음이 즐겁다.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한 골목길,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걸음마다 조심스럽다. 행여 추억이 달아날까. 더 느린 걸음으로 남모를 향수에 젖어든다. 처마 밑으로 저녁밥 짓는 냄새가 풍겨오면 다시 오목대로 가자. 석양에 익어가는 한옥마을 풍경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짙어가는 노을 아래 하루 동안 지났던 길들이 오버랩 돼 쌓여간다. 걸어온 인생의 길처럼. 천년의 향기를 품고 있는 전주한옥마을. 참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아직도 돌아볼 곳이 많아 아쉬움이 남는다. ‘비둘기 집’이란 노래를 불렀던 마지막 황손을 만나러 ‘승광재’도 들러야 하고, 문학의 향기를 좇아 ‘최명희 문학관’과 ‘책방거리’도 가야 하니 말이다. 그렇다고 서두르지 말자. 하루로 모자라면 하룻밤 머물러도 좋고, 다음에 다시 찾아와도 좋다. 느린 걸음으로 느긋하게 걸어야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곳이니까.
서울시는 19일 오후 2시부터 은평구 서울혁신파크 내 정원에서베이비붐 세대를 포함한 은퇴 예정자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공동체 행사를 연다.
행사 1부에선 사회 각 분야에서 제2의 인생을 설계하고 있는 ‘선배’ 은퇴자들과만날 수 있고 2부에서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소속 한철호 신부의 ‘배우자는 내 마음을 알랑가’ 특강을 들을 수 있다.
사전등록은 홈페이지(www.seoulsenior.or.kr)에서 하면 되며, 서울에 사는 50세이상 시민이면 누구나 무료로 참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