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시대가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된 지금, 이제 50대는 청년과 다름없는 역할을 하는 세대가 되어가고 있다. 서울시 50플러스재단은 그 이름대로 서울 시민 50세부터 64세까지인 50플러스 세대의 삶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재단이다. 2016년에 설립된 이후 재취업, 일자리, 교육, 정책 개발 등의 사업을 꾸준히 펼치고 있는 50플러스재단은 지난해 10월 김영대 전 국회의원을 대표이사로 임명해 향후 3년 동안의 사업 전개를 시작했다. 무엇보다 일자리가 최대 화두가 된 시대, 김영대 대표이사를 만나 50플러스 세대의 일과 삶에 대한 대안을 들어봤다.
새해 이슈는 일자리다.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이 기존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고, 그 조짐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예로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반발로 편의점과 프랜차이즈 등 단순 서비스직 업계에서는 사람을 쓰지 않는 대신 자동화 설비, 로봇 도입이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시니어가 은퇴 후 직업으로 많이 선택하는 택시 업계도 마찬가지다. 최근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카풀 논란 또한 자율주행차가 도입될 미래의 택시 산업과 연결되는 사전적 갈등이다. 이처럼 청년뿐만 아니라 모든 세대의 일자리가 4차 산업혁명으로 줄어들면서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되리라는 점은 자명하다. 50플러스 세대는 노인 세대도 청년 세대도 아니어서 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서울시에 거주하는 모든 50플러스 세대가 생산적이고 준비된 노후를 맞이할 수 있도록 각 방면에서 지원하는 것이 재단의 존재 이유입니다. 사실 생계형 일자리를 연계해주는 곳은 이미 많습니다. 고용노동부나 보건복지부 등에서 이러한 일들을 하고 있죠. 그래서 재단은 인생 후반 새로운 일의 유형으로 ‘사회공헌일자리’를 발굴하고 확산하고자 합니다. 보통 ‘앙코르커리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지속적인 수입뿐만 아니라 개인적 보람, 사회적 가치 모두를 만족하는 활동, 일거리, 일자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50플러스 세대를 위한 일자리 해법
시니어에게 일자리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수명이 늘어나고 부양 의무가 계속되면서 현역으로 일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자리 마련을 위한 노력은 정부와 지자체 차원에서 정무적 책임을 갖고 이뤄지고 있다. 서울시도 50플러스재단을 발족해 시대적 화두에 동참했고, 최근 김영대 대표이사가 임명되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김 대표는 민주노총 부위원장 출신으로 시민사회단체, 국회의원, 중소기업 CEO 등의 경력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남북경제협력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임명에서부터 50플러스재단의 방향성에 대한 큰 그림이 느껴졌다.
“재취업, 일자리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하십니다. 이제는 많은 분이 칠십까지 노동할 수 있는 충분한 여력이 되는데, 그중에는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분들도 있죠. 그런 부분에 우리가 좀 더 노력해서 저소득, 취약 계층의 50플러스 세대를 케어하는 노력을 보강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김 대표는 50플러스재단이 시니어 취약 계층에 대한 해법을 마련하는 데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우리나라의 고령자 빈곤율은 OECD 가운데 최고 수준으로, 66~75세 노인의 상대적 빈곤율은 42.7%, 76세 이상 노인의 빈곤율은 60.2%에 달한다. 고령화 속도도 가장 빨라서, 높은 노인 빈곤율과 고령화의 쌍끌이 현상은 젊은 세대의 경제적 부담을 더 가중시키는 상황을 불러오고 있다. 시니어의 일자리 확보가 본인 스스로에게나 사회적으로나 중요한 화두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새로운 틈새시장 공략해나갈 것
일자리를 찾아내는 것도 문제이지만 중장년 일자리와 시니어를 매치시키는 것도 만만찮다. 현장에 가면 정책과 현장의 차이가 크다는 의견이 많다.
“실제 50대 이후의 직업 훈련, 생계를 위한 일자리 알선 등은 고용노동부나 보건복지부에서 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노동의 가치를 살려 저소득 취약 소외 계층, 그리고 일하고 싶은 분들을 잘 안내해야겠죠. 또한 서비스직, 문화관광, 기타 영업 마케팅 쪽으로 자기 전공을 살릴 수 있도록, 구력과 경험 많은 분을 매칭하고 관련 프로그램과 직업들을 만들고자 합니다.”
김 대표는 최근의 일자리 대책이 세대 융합 일자리의 기치를 내걸고 있지만 모범적인 사례를 찾아내기 어려운 현실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만큼 그런 사례를 만들려는 노력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창업과 관련해서는 당사자가 충분히 고민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창업하는 분들 중에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말 순식간에 돈을 까먹습니다. 조사해보니 창업자 10명 중 6~7명이 그렇게 된다고 합니다. 저는 그 수를 줄여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려면 창업을 철저히 준비하게 해야 하고, 창업자 수도 줄여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진입장벽을 높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업을 하겠다고 하면 사전에 꼼꼼히 문제점들을 짚어보고 실행 전에 미리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프로그램을 재단에서 올해 개발해볼 생각이에요.”
시니어가 대거 투자를 했다가 실패하면 엄청난 손실뿐만 아니라 자신감도 잃어서 순식간에 나이 들어버린다는 얘기는 우리 주변에서 자주 들려온다. 청년 때는 아래로 떨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회복 탄력성이 있지만 나이 들면 어렵다. 따라서 선경험을 해보고 안 맞으면 빨리 정리하는 게 도움이 된다. 설명을 들으며 김 대표가 말하는 “조사, 증명과 함께 새로운 길을 제안하는 방향”이라는 게 어떤 모양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외국인 관광객 수를 보면 일본의 성장세를 우리나라가 못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건 관광 서비스하고도 맞물려 있어요. 관광 서비스 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들 중에 50플러스 세대가 할 수 있는 새로운 길들이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관광 가이드, 문화관광 해설사, 외국인들을 안내할 수 있는 문화재 해설사 역할 등이 있겠죠.”
은퇴자를 위한 귀촌 일자리 창출
김 대표가 생각하는 대안 중에는 귀농·귀촌도 있다. 귀농·귀촌이라고 하면 무조건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우선 농촌에 가서 생활한다는 개념으로 접근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연금으로 생활하는 걸로 하고 귀촌을 하면 생기는 일자리가 있다. 수확기에는 일당 받는 일자리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유통, 택배를 도와주는 일도 있다. 그리고 지방에 가면 축제가 많은데 축제에 활용될 인력으로 50플러스 세대가 가장 적합하다는 말을 듣는다고 한다.
“농촌에서 농사를 지어 먹고살려고 하면 힘들어서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귀농한다고 부부가 함께 갔다가 몇 달 후 아내 혼자만 올라오는 일도 있고요. 차라리 가벼운 마음으로 일정 시간 귀촌해서 살아보는 것도 좋아요. 예를 들어 일주일 중 월화수목은 도시에, 금토일은 귀촌을 하는 거죠. 경험을 쌓고 그 속에서 익숙해지면 정착하는 걸로 계획을 세우게 해 너무 부담을 갖고 가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그런 분들을 모아 집단으로 공유주택을 만들면 자연스럽게 귀농·귀촌과 일자리 문제 해결이 함께 이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남북경제협력, 돌파구 될 수 있어
김 대표의 이력에서 눈에 띄는 것이 남북경제협력 부분이다. 현재 남과 북 사이에는 많은 과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분야가 경제협력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남북경제협력 전문가인 김 대표가 50플러스재단 대표로 임명된 것은 남북 간의 경제, 일자리 문제를 위한 장기적인 포석은 아닐까.
“사실 정년에 걸려 배출되는 50플러스 세대가 많잖아요. 서울만 해도 교통공단, 시설관리공단, 교사, 금융인 등등 꽤 많은데 이분들이 제2인생을 설계하는 데 나름대로 기여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50플러스 세대가 가서 할 수 있는 일들이 꽤 있습니다.”
김 대표는 남북 간 교류가 진행되면 당장 철도에 대한 시설관리 점검에 들어가야 하는데 개선, 보수 부분에서 나름대로 시장이 꽤 크게 열릴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50플러스 세대의 인력들은 기능직이 많다. 북측의 도로 보수, 여러 가지 인프라 조성 등의 기간산업에서 발생하는 일자리는 50플러스 세대 기능직에게 참여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50플러스재단이 중추 역할을 수행하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건강하다면 계속 일할 것
“저 역시 50플러스 세대로서 민주화와 산업화를 경험하며 치열하게 살아온 대한민국 50플러스 세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책은 실제 경험해본 사람이 시민들의 피부에 느껴지도록 설계해야 힘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50플러스재단에서 최근 공을 들이고 있는 기획이 두 가지 있다. 우선 서울시에서 운영하고 있는 ‘50플러스보람일자리’다. 은퇴한 50플러스 세대가 학교, 마을, 복지시설 등에서 자신들의 사회적 경험과 전문성을 살린 사회공헌활동을 하며 인생 2막의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돕는 사업이다. 2015년 6개 사업 총 442명의 규모로 시작해 지난해는 총 31개 사업에 2236명이 참여하는 등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리고 신중년 커리어 프로젝트 ‘굿잡5060’이 있다. 현대자동차그룹, 고용노동부, ㈜상상우리가 재단과 함께 풀어가는 사업으로 2018년부터 2022년까지 5년간 5060세대 1000명에게 전문 교육을 제공한 후 사회적기업 취업률 50%를 목표로 하는 장기 계획이다.
“저도 칠십 세까지는 일할 계획이 있고 그 이후에는 건강이 어찌될지 모르겠지만 건강할 때까지는 일을 계속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일하던 사람이 집에서 쉬는 것도 익숙하지 않고, 엄청난 여유가 있어서 여행만 다니며 살 조건도 못 돼요. 그래서 칠십까지는 일하고 이후에는 사회봉사형 일자리, 공헌형 일자리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여하고 싶습니다.”
김 대표는 인터뷰 내내 담백한 목소리로 불필요한 부분 없이 실제를 말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현장의 목소리를 읽고, 통찰력과 정책으로 다듬어진 김 대표 자신이 무엇보다도 50플러스 세대인 만큼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
조용했던 뜨개질 방이 술렁거렸다. 이제부터 다른 것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안 하던 것을 하다니. 잠시나마 당황했다. 손녀뻘로 보이는 어린 선생님이 알록달록 형형색색 끈을 펼쳐보였다. 막상 눈앞에 놓아둔 것을 보니 새록새록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엄마랑 할머니랑 도란도란 앉아서 우리네 옛 매듭을 엮어 만들던 모습이 기억 저편에서 샘솟았다. 전통매듭과 함께 소녀시대로 돌아간 송파시니어클럽의 술술맵시단을 찾아갔다.
전통매듭이 뭐길래?
“작은 선생님, 이리 좀 오셔봐요. 나 길을 잃어버렸어. 요놈 가져다가 넘기지? 하나는 잘 넘어왔는데 하나가 영 안 되네.”
어딘가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책상에 바짝 앉아 ‘오벌가락지매듭’을 만들고 있던 한미자 씨였다. 매듭이 제 길을 찾아 잘 가나 싶었는데 결국 헤매고 말았다며 최현숙 선생을 불러 세운다. 바늘을 사용하지 않고 손을 이용해 끈과 끈이 오가다 보면 소박한 아름다움이 우러나는 전통매듭이 된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송파시니어클럽에는 60대 후반부터 80대까지 8명의 여성 시니어가 모여 매듭을 배우느라 열기가 가득하다. 작년 8월부터 시작했으니 1월이면 전통매듭을 만난 지도 5개월째다. 기초 매듭에서부터 섬세한 작업을 해나가는 시니어의 모습이 꽤나 진지하다. 젊은이들처럼 손이 빠른 것은 아니지만 세월의 노련함이 묻어난다. 나아가 예술성과 함께 상품 가치가 있는 작품을 만들어 시니어 취미를 넘은 수익활동 영역으로까지 가능성을 넓히는 중이다.
전통매듭을 시니어와 함께 해보겠다며 송파시니어클럽에 노크를 한 이들은 30대가 주축인 문화예술사업단 술술공작소다. 술술공작소 강순주 대표는 ‘과연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배우고자 하는 시니어의 자세가 남달라 새삼 놀랐다.
“기초적인 매듭부터 하나하나 지어나가면서 완벽하게 상품으로 만드는 과정까지가 수업입니다. 저희가 매번 와서 가르쳐드릴 수는 없어 하루는 교육하고 그다음 시간은 숙제로 내드린 것을 해오게 합니다.”
매듭을 배우기 위해 시니어 학생들이 교실 안 책상 앞에 자연스럽게 둘러앉은 것처럼 보이지만 좌석 배치에는 나름의 공식이 있다. 기본매듭을 배우는 단계와 만들어진 매듭을 적당한 색상으로 배합하는 단계, 마지막으로 끈을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단계로 나눠서 일사분란하게 구성원들끼리 호흡을 맞춘다.
술술맵시단, 젊은이와 전통을 공감하다
전통매듭이라는 분야를 어떤 사람들과 어떻게 나누고 보급할까 고민했다고 강순주 대표는 말했다.
“다른 지역의 시니어 관련 기관에도 가봤습니다. 마침 송파시니어클럽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반응해주셨어요. 이곳에서 뜨개질하는 시니어분들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전통매듭을 하는 시니어는 송파시니어클럽의 사업단 중 하나인 한코한코손뜨개사업단 소속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주방용 아크릴 수세미 상품을 만들어 수익사업을 해왔다.
“뜨개질도 하는데 전통매듭을 만들어보시라고 제안을 드린 것이죠. 아무래도 손뜨개를 하는 분들이니까 잘하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흥미로운 점은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배웠다거나, 집에서 만드는 것을 봤던 경험이 있다고 말하는 80대 시니어가 적지 않았다고. 30대 젊은 강사가 전통매듭을 가르치기 위해 왔다가 시니어에게 옛 추억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오히려 더 많은 감동을 받는 시간이라고 한다.
“지금 만들고 계신 것이 연봉매듭이에요. 왕의 곤룡포를 비롯해서 한복이 쓰이는 단추매듭이죠. 한 어르신이 옛날에는 시집가기 전에 옷감 자투리를 말아서 단추를 해가지고 가는 것이 혼수품이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자주 만들어 쓰던 매듭이라고 합니다. 어느 날 매듭이 생각 안 나면 어른들이 그러셨대요. 내가 이제 갈 때가 됐구나.(웃음)”
세대 간 소통 부재의 세상에서 이렇게 어우러지기도 쉽지 않을 텐데 서로 상부상조하는 세대 공감 프로젝트로 보였다. 5개월쯤 함께 활동한 후 이들을 대표하는 이름도 신중한 고민을 거쳐 내놓았다. 바로 술술맵시단. ‘매듭을 만드는 시니어 모임’이라는 뜻이다.
“아직은 시작 단계잖아요. 설명해드려도 모르는 게 있다 하시면 옆에서 말씀드리고 또 말씀드립니다. 지금은 선생님이 없을 때도 작업을 꽤 잘하십니다. 앞으로의 바람이라면 이분들이 정식으로 자격증을 따고 더 나아가 또래 시니어는 물론 다양한 분들을 대상으로 우리의 전통매듭을 가르쳤으면 하는 겁니다.”
새로운 것 가르쳐줘서 고마워요
작고 아담한 작업물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고요한 시간이 흐른다. 그러나 눈과 손은 예리하게 반응하며 정성을 기울인다.
뜨개질을 오래도록 해왔던 이희자 씨는 “전통매듭이 생소한 분야라 두려움도 있었지만 만들면서 가치 있는 것을 누군가에게 팔 수 있다는 자부심이 생겼다”고 했다. 수업 초반 ‘오벌가락지매듭’으로 고생하던 한미자 씨는 “어린 시절 할머니와 어머니가 만들던 모습만 봤는데 젊은 선생님에게 배우게 됐다”며 좋아했다. 술술맵시단 고령자 중 한 명인 김정애 씨는 “손을 많이 쓰는 게 치매 예방에 좋다고 들었다”면서 “특히 지역 행사 때 어린아이들한테 매듭 만드는 법을 가르쳐줬는데 보람 있었다”고 만족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80대인 김을용 씨는 “너무 못 따라가고 민폐일까봐 고민을 했는데 여기 모인 분들과 선생님이 친절하게 가르쳐주시고 말동무도 해주셔서 만나는 시간이 늘 기다려진다”고 했다.
“나이 든 사람에게 누가 이렇게 다가와 새로운 걸 가르쳐줍니까.” 술술맵시단 시니어가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다. 느리고 서툴지만 섬세함과 정교함을 높여가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진지하게 매듭을 알아가는 중이다. 오늘도 내일도 하루하루 성장해가는 술술맵시단의 멋진 미래를 기대한다.
mini interview 술술공작소 강순주 대표
클래식 소녀 국악을 만나 전통예술을 깨치다
“추계예대에서 클래식 작곡을 전공했습니다.”
전통매듭을 가르친다는 말에 나이 지긋한 사람을 상상했는데 만나고 보니 35세의 클래식 전공자였다.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총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여러 교수들과도 격 없이 지냈다는 강순주 대표에게 국악과 교수들은 “클래식 작곡 전공자가 국악을 하면 더 가치 있지 않겠냐”며 조언했다. 그때의 강한 끌림으로 졸업과 함께 락음국악단(예술나눔청년사업단)에 들어가 3년 여 활동했다. 뜻 맞는 음악 친구들과는 전통예술단 ‘호연(浩演)’을 만들어 11년째 활동 중이다.
“예술 분야는 사회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요. 지원금이 없으면 예술 단체는 힘들거든요. 지금까지 사회적으로 큰 일들이 많았잖아요. 지원도 걱정이 되고 자립 방법을 찾아보자 했는데 국악기에 달린 매듭술이 눈에 들어왔어요.”
악기는 애지중지 닦고 조율하면서 매듭술은 악기 처음 샀을 때 있던 것을 그대로 달고 있어 꼬질꼬질해졌다. ‘매듭술 만드는 곳 어디 없나?’ 하다가 공방을 찾아갔다.
“공방 선생님한테 제 전공부터 시작해서 왜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말씀드렸어요. 상황을 들으시고는 제대로 배워보라고 하셨어요. 사범증을 따고 나니 뭔가 더 해보고 싶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술술공작소다. 작년 3월에는 서울대학교 스타트업센터 예술 분야 업체로 선정돼 입주했다. 다양한 축제에 전통매듭으로 참여하다 보니 협업이 가능한 동반 집단이 있으면 좋을 듯싶어 다양한 계층을 만났다.
“다문화가정 여성들도 가르쳐보고 보호관찰소 여학생들도 만나봤어요. 꼼꼼하고 실력은 좋은데 약속을 잘 지키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시니어에게는 다가가기가 조심스러웠어요.”
전통이나 매듭을 생각하면 시니어를 떠올리게 되니 진부하게 보이면 어쩌나 걱정됐단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궁합이 꽤 괜찮았다. 그 시대를 살지 않으면 모를 얘기, 특히 매듭과 관련한 추억을 들려주시는 시니어 덕이 컸다. 최근엔 조금씩 수익도 내고 있다. 작년 11월에는 송파시니어클럽 술술맵시단과 작업했던 작품이 면세점에서 판매됐다. 올해는 좀 더 열심히 뛰어서 우리 전통을 시니어와 함께 알릴 계획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통 스토리를 담은 음악극도 훗날 제작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면서 음악가로서 포부도 밝혔다.
“우리 것을 만들자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전통매듭이 자리를 잡고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로 원활하게 돌아가면 음악과도 어우러질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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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스마트폰 보기는 이미 일상적인 문화가 되었다. 그런 풍경을 볼 때마다 이제 새로운 문화에 발맞추어 의미가 퇴색한 ‘경로석’보다 차라리 ‘스마트폰 안 보는 자리’로 바꾸는 것은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해 보곤 한다. 요즘 사람들이 스마트폰에만 열중하자 지하철 창문 위쪽의 광고란이 텅 비어 버렸다. 그러자 틈새를 노린 새로운 광고 수법이 등장했다.
한 아줌마가 재빠른 솜씨로 출입문 옆에 광고지를 붙이고 지나간다. 제목은 ‘떼인 돈 받아줍니다!’ 밑에는 ‘밀린 이자까지’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좀 있으니 허름한 행색의 청년이 바람같이 지나가며 그 옆에 또 다른 광고지를 붙인다. 이번 제목은 ‘월수익 300 보장! 하루 6시간 나이 불문’이란다. 이른바 ‘광고지 돌리기’에서 진화한 새로운 일자리다. 어느새 그 자리에는 서너 개의 광고지가 지저분하게 붙게 되었다.
그런데 10분이나 지났을까. 유니폼 비슷한 걸 착용한 아줌마가 나타나 무자비하게 광고지를 뜯더니 횡 하고 사라진다. 아마도 지하철에 고용된 비정규직 미화원일 것이다. 그 광경 속에서 잠시 ‘밥벌이’로서의 일에 대해 생각했다. 광고지를 붙이는 일도 사소하지만, 나름대로 일이고 그것을 떼어내는 비정규직도 버젓한 일이다. 두 개의 절실한 일자리가 충돌하여 순간 일의 의미가 ‘무’로 환원하는 희한한 경험이었다.
현재 온 나라가 일자리 문제로 홍역을 앓고 있다.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으로 아르바이트 자리 구하기도 바늘구멍이 되었다. 최근 정부가 일자리 부족을 메우려고 길거리 쓰레기 줍기 같은 단기 일자리라도 만드는 것을 보며 자업자득이지만,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은 둘째 치고 거시적인 시각으로 보면 일의 개념이나 형태가 이미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IT 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초연결사회’가 되어가고,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고 있다. 일의 형태도 이미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서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끼리의 일자리 경쟁은 의미가 없다.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어 가는 현실에서 시간의 제약은 무의미하고, 휴양지에서 노트북만 있으면 업무를 볼 수 있는 환경에서 공간은 무제한이다. 그러니 같은 시간, 한 공간에서 근무하는 정규직은 사실 20세기 산업사회의 유물인 셈이다.
아마도 더 큰 문제는 AI라는 괴물의 출현일 것이다. 인공지능의 출현으로 인간의 일자리가 얼마나 더 소멸할지는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말끔한 정장으로 안락한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정규직이 더는 안전지대가 아니다. 어쩌면 AI가 모든 일을 주도하고 인간은 부스러기 같은 일자리에 만족해야 할지 모른다. 수백 년 전 영국에서 양털 깎는 기계에 반항하던 노동자들처럼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수천 년 전 그리스에서 시시포스가 준 교훈처럼 인간은 본디 무의미한 일을 형벌로 받아들였는데 이제는 무의미해도 연명을 위해 일을 해야 할지 모른다. 정부가 시행하는 쓰레기 줍기 아르바이트가 가치 있으려면 사전에 쓰레기 버리는 아르바이트도 가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2018년이 저물어가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 중 하나는 전방위적인 국방 개혁이다. 북한과의 관계가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들어서고 있는 현재, 군대의 활용 또한 과거와는 다른 의미를 가져야 한다. 그 속에서 국가보훈산업 또한 어떤 모습이 될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국가보훈과 사회발전을 위한 남다른 사명감으로 1994년 ㈜상훈유통을 창업한 후 24년 동안 지속성장을 실현하며 선진유통 전문기업으로 발전시킨 이현옥 회장이 올해 팔순을 맞았다. 지난 20여 년에 걸친 보훈산업의 산증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그를 만나 기업의 성공 스토리와 경영 철학에 대한 소신을 들어봤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는 ‘창업’일 것이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 러시가 걷잡을 수 없이 가속화되고, 일자리 부족으로 인한 청년층의 취업 실패가 누적되면서 모든 세대가 너도나도 창업에 뛰어들고 있다. 그러나 창업 후 3년 이상 존속하는 기업의 수는 매우 적다. 또한 현상 유지 수준을 넘어 지속성장을 이루는 기업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러한 현실에서 1994년 상훈유통을 창업해 고용 창출과 국가 세수 증대에 기여하며 24년 동안 꾸준한 성장을 실현한 이현옥 회장은 자신의 업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39년에 태어나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보내고 인생 말년에 이르러 거대한 전환기의 기업 오너로서 사회적 역할을 다하고 있는 그는 창업을 생각하는 많은 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무모한 도전, 과감한 결단
“창업하기 전까지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에서 20여 년간 재직하며 국가 유공자들에 대한 지원 사업을 추진했는데, 정부의 보훈복지 예산과 사회적 관심 부족 등으로 애로사항이 많았습니다. 특히 다수의 국가 유공자가 정부 복지지원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현실이 늘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이분들을 위해 개인적으로라도 무언가 도움을 드릴 만한 일을 할 수 없을까 고민하던 중 마침 기회가 주어져 KT&G 연관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이 회장은 사업 초기에는 자본이 부족해 살고 있던 아파트까지 처분했다고 한다. 무모한 도전이라고 모두가 말렸다. 그러나 이 회장은 보훈공단에서 관련 사업을 추진하며 쌓은 경험과 노하우, 신뢰기반 등을 감안할 때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실패할지라도 국가와 사회를 위한 뜻 있는 결단이었던 만큼 큰 후회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것이 현재의 강소기업 상훈유통이라는 보답으로 드러난 셈이다.
20여 년간 보훈단체에서 공직생활을 한 이 회장은 상훈유통을 세울 때 국가보훈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정하고 일을 진행했다. 상훈유통은 SOFA (Status of Forces Agreement) 면세품 양도 양수 사업, 한국인삼공사 정관장 홍삼 제품 및 홍삼 음료 판매 사업 등을 갖고 있으며 상훈영농조합법인을 운영하는 기업이다.
전문가를 넘어 멀티 플레이어가 되라
이 회장은 창업에 뛰어드는 사람들에게 ‘멀티 플레이어’가 되라고 조언한다. 전문가 역량만으로는 기업을 이끌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기업이란 본질적으로 수익 창출을 위한 조직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아마도 수익을 창출하는 일, 즉 돈을 버는 일일 것입니다. 경영자는 이 어려운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야만 하는 사람입니다. 일반 직장인이라면 자신이 맡은 일 한 가지만 잘해도 조직에서 인정받고 성공할 수 있지만 기업을 이끄는 경영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남다른 비즈니스 감각과 리더십, 통찰력, 판단력을 지녀야 함은 물론 생산, 영업, 관리, 고객업무 등 기업 활동의 전 분야를 폭넓게 알고 이끌어갈 수 있는 역량을 갖추지 못하면 성공을 거두기 어렵습니다.”
그는 기업이 발전할 수 있는 비결이란 “결국 고객이 필요로 하는 좋은 제품을 편리한 시스템을 통해 적정 가격에 공급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신뢰’라는 가치덕목 또한 강조했다. 기업이 고객들에게 우수한 제품과 서비스를 지속적, 안정적으로 공급할 것이라는 신뢰감을 심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기본 중의 기본에 대한 이야기들이지만 이 기본을 지키는 게 어려운 세상이다. 특히 보훈산업이라는 보수적인 분야에서 이러한 기본 가치들은 다른 산업보다 더 강조되고 지켜져야 한다.
돌발적인 외부 위기를 이겨내는 맷집
물론 상훈유통을 경영하면서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관리 가능한 내부 요인보다는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오는 치명적인 외부 요인이 기업의 미래를 위태롭게 만든다. 현재 세계 경제는 미국과 중국이 벌이는 무역전쟁의 장기화로 그야말로 시계 제로의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러한 돌발 상황을 견뎌낼 수 있는 맷집이야말로 기업의 역량을 종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아닐까. 이 회장이 그 어려운 길을 돌파한 것 또한 군인 정신을 연상하게 하는 맷집이었다. 베트남전에서 하사로 참전했던 그의 경력도 무관치 않아 보였다.
“창업 후 1990년대 말 외환위기와 2000년대 후반 글로벌 금융위기, 그리고 관련 정책과 제도 등의 변화로 몇 차례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기업이 외부 환경 변화로 어려움을 겪을 때 이를 어떠한 노력과 방법을 통해 타개, 극복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관건입니다. 제 경우에는 그때마다 고객과 직원들, 평소 성원해주신 주변 분들을 생각하며 이들에게만큼은 절대 실망을 주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그리고 이분들의 기대와 성원에 반드시 보답해야 한다는 각오로 어려움을 참고 이겨냈습니다.”
군 관련 사업을 하는 만큼 정치적 부침에 따른 위기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몇 해 전에는 비즈니스와 관련해 모 기관에서 불거진 사건 때문에 자택 압수수색을 받기도 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조사관들 때문에 가족들이 놀랐음은 당연했다. 그러나 놀란 것은 조사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집안 살림이 너무 검소했고 조사를 거듭해도 문제가 발견되지 않아서 조사관들이 오히려 당황했던 것이다.
기업은 내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
온갖 어려움들을 견뎌내며 아직 현역으로 상훈유통을 진두지휘하는 이 회장은 무조건 기업 규모를 크게 키우는 일은 지양한다고 밝혔다. 이는 미래 상훈유통의 청사진이기도 하다.
“대기업이기보다는 오히려 강소기업, 또는 내실 있는 중견기업이 더 좋은 점이 많습니다. 특히 저는 상훈유통이 일본이나 유럽 기업들처럼 후세에까지 기업의 전통과 문화가 길이 이어지는 장인기업, 장수기업이 되길 원합니다. 그래서 무리한 욕심을 경계, 절제하면서 내실경영, 안정경영 위주의 경영전략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 회장이 바라는 상훈유통의 미래는 내실과 안정 기반을 갖춘 수성(守成)의 역사다. 사업 프로세스의 지속적 혁신, 전문 인재의 양성, 시장 및 고객다각화 등 가진 것을 전제로 차분하게 길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그의 생각은 사회를 향한 기여로도 이어지고 있다.
나눔을 통해 더불어 느끼는 행복
상훈유통의 시작이 국가 유공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세워진 만큼, 이 회장은 그동안 사회공헌 활동에 적극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 120억 원이 넘는 금액을 사회에 내놓은 이 회장은 자신의 막대한 기부활동에 대해 분명한 논리를 밝혔다.
“혹자는 기업의 사회적 기여 역할에 대해 ‘결과적 기여’, 즉 기업이 지속적인 사업으로 고용과 세수 증대 등에 기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에 더해 ‘의도적 기여’ 역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과적 기여만으로는 그 파급 효과가 느리고 수혜 범위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회장은 사회 각계에 대한 자신의 꾸준한 기부는 특별히 좋은 일을 한다기보다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라 생각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기업은 개인의 소유가 아닙니다. 기업이 추구해 달성하는 수익은 결국 사회로부터 창출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눔과 상생의 철학으로 사업 수익의 일정 부분을 사회로 환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이를 어떤 방식으로 어느 분야에 환원할 것인가는 기업인들 각자가 판단할 몫입니다. 제 경우에는 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국가 유공자분들께 도움을 드리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고 이 분야의 지원활동을 꾸준히 실천해왔습니다.”
인재 놓치지 말 것
그는 팔순의 나이이지만 회사의 미래를 위한 성장동력을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최근 이 회장이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은 사내 인재 양성이다. 이를 위해 상훈유통은 ‘공익 가치를 창출하는 선진유통 전문기업’이라는 비전을 정립했다. 회사의 미래를 이끌어갈 차세대 인재는 이 비전에 기준해 선정되고 육성될 예정이다. 또한 미래 인재의 육성과 함께 회사 초창기에 입사해 아직까지 근무하는 장기근속 직원들에 대한 감사도 잊지 않았다.
평소 충효사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회장은 가족애와 효의 모범을 보인직원들에게 특별휴가와 가족여행 전액을 지원하는 등 효 사상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또 신의를 중시해 한 번 인연을 맺은 사람과는 끝까지 교류를 이어간다. 일자리가 없는 사람에게는 알맞은 직장을 소개해주고, 결혼을 못한 사람에게 중매를 서고, 고충이 많은 사람 이야기에 귀를 내어주는 등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선뜻 나서서 기어이 해줘야만 마음이 편안해진다. 천성적으로 정이 참 많은 사람이다.
주변에서는 이 회장이 아무도 모르게 사람들을 도와주고 한결같은 자세로 보훈정신을 되새기고 받들어온 CEO라고 입을 모은다.
팔순의 나이에도 검은 머리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이 회장은 칠순에 골프를 시작할 정도로 그야말로 만년 청춘이다.
“바빠봐, 바쁘다 보면 늙을 시간도 없어요. 가는데 순서없고 빈손으로 다 가는거지. 일을 계속해야 늙지 않아요.”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올곧은 마인드가 우리 독자들에도 훈훈한 미담이 되길 바라면서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이 회장께 올해가 가기 전에 뜨끈한 생태찌개 한 그릇 대접하고 싶다.
‘딱 1년만 있다 돌아가자’ 하고 한국에 들어왔다. 타국에서의 시절이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체념도 희망도 아닌 시간들이 안간힘을 쓰며 흘러갔고 20대 네팔 청년은 어느새 40대 중반이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토끼 같은 아이들도 태어났다. 섬유공장 30여 만 원 월급으로 시작해 인도·네팔 요리전문점 ‘두르가’를 7호점이나 연 네팔인 비노드 쿤워(Binod Kunwor·45), 이제는 귀화해 ‘서민수’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 주한 네팔인협회장을 거쳐 국제부위원으로 지내는 그의 하루는 너무도 바빠, 인터뷰하러 간 날 하마터면 바람맞을 뻔했다.
오후 2시 ‘두르가’ 종로 1호점에서 그를 기다린 지 30분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만나기 전 미리 문자메시지도 보냈는데 무슨 일인가 해서 전화를 했더니 병원이라고 했다. 30여 분 뒤 그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네팔에서 일하러 온 사람이 뇌출혈로 쓰러졌다고 해서 급하게 병원엘 다녀오느라 인터뷰가 있는 걸 그만 까맣게 잊었네요. 돈 벌러 왔다가 다치면 의사소통도 안 되고 병원비도 없어 딱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제가 주한 네팔인협회 일을 보고 있는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네팔인들이 4만 명가량 되다 보니 일도 많이 생기고, 그래서 늘 바쁩니다.”
인도·네팔 요리전문점을 7개나 운영하는 대표라 점포 일로만 바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국에서 지내는 네팔인들에게 일이 생기면 통역도 해주고 모금활동을 통해 물질적 도움을 주는 등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느라 더 눈코 뜰 새 없었다.
미지의 나라에서 묶여버린 발
그가 한국에 온 것은 1992년, 스무 살 때였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이 전부였다. 당시에는 북한이 자원이 풍부한 나라로 더 많이 소개됐는데, 남한과 북한이 한민족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경제적 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한국에 와서야 알았다.
“법대에 다니고 있었는데 좀 따분한 나날들이었어요. 그 무렵 동네에서 알고 지내는 형이 한국에 갔다 왔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저도 네팔을 떠나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일본에 갈까 한국에 갈까 고민하다가 한국행 비행기를 탔어요.”
네팔에서 그의 집은 꽤 유복한 편. 어느 날 한국에 가겠다고 차비 좀 달라고 하자 아버지는 “가려면 네 힘으로 가라”며 꿈쩍도 안 했다. 계속 고집을 피우자 부모님은 결국 100만 원을 내놓았다. 현재 가치로 따지면 꽤 큰돈이었다. 제 앞가림 알아서 잘하는 자식이라 믿고 지원해준 돈이었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 그는 난감한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처음엔 염색공장에서 일했어요. 한 달 일하고 손에 쥐는 돈이 30만 원 남짓밖에 안 됐는데 그 돈마저 떼이기 일쑤였죠. 요즘은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대우가 좋아졌지만 그때만 해도 노동 환경이 정말 열악했어요. 차별도 심했고 피해를 입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죠. 딱 1년만 일하고 돌아가자 하고 왔는데, 한 푼도 모으질 못한 거예요. 월급을 떼이면 직장을 옮기고 거기서 또 월급을 떼이는 일이 반복됐으니까요.”
인도·네팔 요리전문점 대표가 되다
그 후 1년만 더 있어보자 한 것이 귀화까지 하게 됐다. IMF, 금융위기를 차례로 겪으며 경제적 활동이 순조롭지 못했지만 그의 도전 욕구는 오히려 불타올랐다.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태어났다. 가장으로서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했기에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국면 전환의 기회를 엿봤다. 사정이 조금씩 나아진 건 한국과 네팔을 오가며 무역업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동대문에서 옷, 가방, 모자 등을 떼어다 네팔에 팔았어요. 돈을 모아 식료품점도 열었죠. 그때 동남아 바이어들과 자주 만났는데 그분들이 한국에 오면 갈 만한 식당이 전혀 없었어요. 특히 인도 사람들은 고기를 안 먹는 사람이 많아 식사 대접이라도 하려면 곤란했죠. 그러다 문득 한국 사람들도 카레 음식을 좋아하니 인도 음식점을 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네팔 사람이니까 네팔 음식도 곁들여 선보이면서요. 인도 음식은 향신료를 좀 더 쓸 뿐 네팔 음식과 거의 비슷해서 복잡할 건 없었어요.”
그는 판단이 서면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사람이었다. 사업 계획을 세우자마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다. 그렇게 해서 2006년 서울 종각역 근처에 1호점을 연 인도·네팔 요리전문점 ‘두르가(Durga, 힌두 여신 가운데 가장 숭배받는 여신)’는 현재 7개 점포나 된다. 물론 그동안 부침(浮沈)이 없었던 건 아니다.
“‘두르가’를 오픈할 때 자신감 하나로 덤볐어요. 처음에는 손님이 없어서 힘들었죠. 월세 400만 원에 주방장과 직원들 월급 주느라 허리가 휘었어요. 그러자 동업자가 겁이 났는지 슬금슬금 손을 빼더군요. 이대로 혼자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고심하고 있을 때 언론에 저희 음식점이 소개됐어요. 며칠 뒤 전화통에 불이 나더군요. 기사를 본 손님들이 몰려오고 매상이 쑥쑥 올라갔죠. 그렇게 1년간 입소문을 타면서 비로소 안착할 수 있었어요.”
두르가 주방장은 모두 네팔인이다. 인도·네팔 요리를 맛보고 싶어 하는 손님들에게 제대로 된 요리를 제공하려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그의 점포는 물론 한국의 네팔 요리점에 그가 소개한 주방장이 100여 명이나 된다. 알게 모르게 네팔인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해온 셈이다. 한국에 와서 이만큼 성공했으면 유연자적하듯 살 만도 한데 그는 여전히 바쁘다. 아내는 그래서 불만이 한가득이다. 좀 천천히 살라는 의미에서 남편에게 서(俆) 씨 성까지 지어줬건만 소용이 없었다.
“아내가 어느 날 밖으로만 돌아다니는 저를 보고 ‘너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 안 했어’ 하더라고요. 아이들과 아내에게는 미안하죠. 좀 쉬면서 일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만 그게 잘 안 되네요. 제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거든요.”
이 정도면 일 중독자가 분명하다. 일을 벌이는 데도 거침이 없다. 요즘은 한국과 네팔 양국에 도움이 되는 사업을 구상 중이라면서, 이미 네팔에서 수력발전 사업을 추진해 곧 공사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모노레일 사업, 심지어 해외송금 관련 금융 사업까지 그의 머릿속은 일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네팔 정부 고위층도 한국에 오면 꼭 그를 찾는다고 한다. 서민수 씨만큼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다문화 가정 아이들에 대한 차별, 속상하다
한국에 온 지 5년째 되던 해에 그는 아내 이지형 씨를 만났다. 이웃으로 지냈는데, 함께 밥 먹고 대화하다가 정이 들어버렸다. 그가 먼저 프러포즈를 했다. 처가의 반대가 심했지만 무사히 결혼에 골인했다. 네팔 부모님도 섭섭해하긴 했어도 큰 반대는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성공을 이룬 건 아내 덕이 크다. 한국 문화에 어두워 곤란한 일이 생길 때마다 해결사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그가 일을 벌이면 아내가 쫓아다니며 궂은 업무를 도맡아 하는 식이었다. 2005년도에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 귀화도 결정했다. 아들딸에게 부족한 부모가 되지 않으려 두 사람은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런데 경제적 여유도 생기고 30여 년간 살며 적응도 되어 한국에서의 생활이 별 문제 없을 줄 알았는데, 그는 요즘 꽤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
“귀화를 해도 다문화 가정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심한 것 같습니다. 우리야 상관없지만 아이들은 어린 마음에 상처가 큰 모양입니다. 아들이 고등학교에 다니는데 힘들어하더군요. 아이 입장에서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 사람인데 생김새가 다르다고 외국인 취급하니까 억울하고 이해가 안 되는 거죠. 지금 학교에서 겪는 일들을 앞으로 직장에서도 겪을 테고, 또 결혼할 때도 분명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부모로서 자식의 험난한 인생 여정이 예상되는데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답답하네요.”
그는 경제적 어려움까지 겪는 다문화 가정 아이들은 더 심한 상처를 받고 있다며 속상한 마음을 내비쳤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구나’ 하면서 상심할 때도 있다고 했다. 그도 가끔은 “그럼 그렇지, 네가 네팔인이지 무슨 한국인이냐?” 하는 소리를 듣는데 아이들이 그런 말을 들으면 정체성 혼란은 물론 감당하기 힘들 것이라 말했다.
“대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들을 2~3년간 유학 보내볼까 합니다. 좀 더 큰 세상에서 살면서 마음이 열리길 바라면서요. 내가 바뀌지 않으면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아이가 빨리 알게 되면 좋겠습니다.”
그에게도 차별로 인한 번민의 시절이 있었을 터. 아들의 상처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그의, 아비의 눈은 순간 한없이 깊어졌다.
요즘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이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막상 4차 산업혁명이라고 하면 너무 멀게 느껴진다. 4차 산업혁명의 주창자 클라우스 슈밥은 자신의 책 에서 4차 산업혁명을 ‘3차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 바이오산업, 물리학 등 3개 분야의 융합된 기술들이 경제체제와 사회구조를 급격히 변화시키는 기술혁명’이라고 정의하였다. 당장 이 말만 들어서는 무슨 얘기인지 와닿는 사람이 그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먼 얘기가 아니다. 4차 산업혁명은 당장 우리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 얘가 최근 사회적 논란이 된 카카오의 카풀 사업 진출이다. 카카오는 4차 산업혁명의 총아인 ICT기술을 활용한 카풀 앱을 통해 출퇴근 시간 택시를 구하지 못하는 직장인들의 어려움을 해소해주는 택시 보완재 역할을 할 것이라 주장한다. 반면 택시업계에서는 카카오 카풀이 기존 택시업 종사자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택시 대체재라며 반발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발전은 분명 생산성과 효율성을 제고하여 인간의 여러 수고로움을 크게 덜어줄 것이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의 발전이 장밋빛 미래인가는 좀 더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다. 카카오의 카풀 사업 건처럼 이전 수많은 사람들이 담당하던 업무를 인공지능(AI), 로봇 등이 수행하게 되어 더 이상 많은 인력이 필요하지 않게 되고 있다. 따라서 단순 직무 종사 근로자의 경우 자신들의 일자리를 잃을 가능성이 높다. 정부의 ‘4차 산업혁명에 따른 인력수요 전망’에 따르면 지난 2월 기준 청년실업률은 9.8%이며, 청년 체감실업률은 22.8%에 달한다고 한다. 그리고 2030년까지 172만여 명의 고용변화가 예상된다고 한다.
4차 산업혁명은 기술의 발달에 따른 편의를 주겠지만 동시에 가뜩이나 고용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나라에 고통을 가중시킬 위험이 있다. 이러한 대전환에 대비하여 우리 사회 전 분야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인적자본을 육성하기 위한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 정부와 교육·훈련기관에서도 교육제도 개편 및 재교육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을 드라이빙할 수 있는 고숙련 인력의 수요는 오히려 확대될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은 고숙련 인력 육성 지원을 통해 4차 산업혁명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먼저, 미래 유망 분야인 로봇, 바이오화학 등 신사업 분야의 자격 종목을 적극 발굴하고 있다. 오는 12월부터 3D프린터운용기능사 등 5개 종목을 대상으로 수시검정 시험을 시행할 예정이며, 내년 1월에는 로봇기구개발기사, 바이오화학제품제조산업기사 등 12개 종목을 신설하여 시행을 앞두고 있다.
또한, 2016년 7월 개발이 완료된 국가직무능력표준(NCS) 기반 과정평가형 자격을 도입하여 국가기술자격의 현장성을 강화하고 있다. 올해 5년차를 맞는 과정평가형 자격은 특성화고, 전문대학, 폴리텍 등 직업훈련교육기관에서 교육훈련을 이수하고 내·외부평가를 거쳐 자격을 취득하는 제도이다. 올해 부산권역에서는 56개 기관 39개 종목 3092명이 교육훈련에 참여하고 있으며 매년 참여자 수가 확대되고 있다.
시대의 변혁기에 사람들은 불안해한다. 불안한 사람들은 안정적인 것만 찾는다. 최근 시니어들은 공인중개사에 열중하여 공인중개사 시험에는 전국 33만 명이 응시했다고 한다. 청년층은 공무원에 몰두하여 공무원 시험은 기본 경쟁률이 100대 1을 넘는다. 그러나 이런 편중 현상이 국가적으로 과연 옳다고 여길 수 있을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앞서 말했듯 4차 산업혁명은 단순 직무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공인중개사와 공무원의 역할 또한 4차 산업혁명의 흐름에서 어떻게 변화될지는 아무도 장담 못할 부분이다. 우리가 스마트폰을 쓰게 된지는 아직 10년이 채 안 됐지만 이미 스마트폰은 우리 생활의 많은 것을 바꿔버리지 않았는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했다. 4차 산업혁명의 고도화는 분명 우리에게 위기이자 기회이다.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기 위해 기존의 것에 안주하기보다는 新국가기술자격을 통해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연일 일자리 정책에 대한 뉴스가 쏟아진다. ‘58년 개띠’로 대표되는 ‘700만 베이비붐 세대’까지 은퇴 후 유입되면서 취업 시장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경쟁이 심해졌다는 것은 당사자들에겐 더욱 일자리가 필요해졌다는 뜻.
정년 후 20~30년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시니어 입장에선 단 한 번의 실패도 극복하기 어렵기에, 제2직업에 대한 선택과 도전이 매우 중요한 일이 됐다. 그렇다면 어떻게 준비하고 선택하는 게 좋을까? 중장년 일자리와 관련해 대표적 전문가로 손꼽히는 김대중(金大重·51) 노사발전재단 중장년일자리본부 본부장을 만나 물었다.
김대중 본부장은 퇴직자나 재직자의 전직(轉職)지원 분야에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국내에서 몇 안 되는 전문가 중 한 명이다. 많은 정부부처에서 운영 중인 공공부문 전직지원 프로그램은 대부분 그가 개발한 모델을 원형으로 만들어졌다. 그런 그가 중장년일자리사업 총괄 본부장으로 돌아왔다. 순환보직으로 4년 만의 귀환이다.
수요 늘었지만 기관 규모는 제자리
과거와 변화가 느껴지느냐는 질문에 김 본부장은 “시장이 확대된 것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중장년 일자리 지원 사업에 나선 기관이나 지자체도 많이 늘었죠. 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장년 일자리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서비스의 성격이 개인별 맞춤 서비스보다는 단체를 대상으로 한 획일적인 교육이나 취업 알선에 국한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일자리 정책 하면 우리는 흔히 두 가지를 떠올린다. 바로 교육훈련과 취업 정보다. 구직경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기술을 알려주고, 교육훈련을 마치면 갈 만한 일자리를 알려주는 방식. 하지만 김 본부장은 이런 단편적인 접근은 전직자들이 재취업 일자리에서 1년 버티기도 힘들게 한다고 단언한다.
“지금 40대 이상의 중장년들은 적성과 무관하게 전공을 선택하고, 전공과 무관하게 직장을 고른 사람이 많아요. 다시 말하면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잘할 수 있는 게 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라는 뜻입니다. 젊을 땐 학습능력도 있고, 시행착오를 이겨낼 힘도 있으니까 버틸 수 있지만, 중장년이 되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방황할 수 있는 1~2년의 여유도 없어요. 개개인에게 맞지도 않는 교육과 알선은 오히려 인생 후반부 역시 그분들을 그릇된 길로 안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맞춤형 서비스가 중요합니다.”
내가 원하는 일 뭔지 알아야
그래서 그가 최근 심혈을 기울인 일이 9월 11일 진행된 ‘신중년 인생3모작 박람회’다. 단순히 구직정보만 나열해 즉흥적인 취업을 유도하기보다는 중장년들이 재취업과 재취업 후의 인생 설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내하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중장년 입장에선 자신이 원하는 일자리의 조건들이 정해져 있어요. 본인 진로에 대한 계획 없이 근무 지역이나 급여 등의 조건만 챙기면 전직에 실패하게 돼요. 또 엉뚱한 교육을 받느라 시간만 낭비하기도 하죠. 이런 시행착오를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었습니다.”
그가 중장년 일자리와 관련해 주목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구인의 주체인 기업이다. 중장년 구직자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꿔주고 싶다는 것.
“나이가 많으면 열정이 없다, 급여 수준이 높다, 고집이 세다는 선입견이 커요. 기업들이 중장년을 고용하지 않으려는 이유죠. 사실은 그렇지 않은 분들이 훨씬 많은데 말입니다. 이러한 선입견을 깨기 위해 임원 대상 간담회나 채용 담당자를 대상으로 한 설명회 등을 늘려나가고 싶습니다.”
중장년이 청년 일자리를 침범한다는 인식도 개선해야 할 부분. 그는 “중장년은 자식(청년) 보살피고 고령의 부모를 모셔야 하는 가정의 기둥이기 때문에 조건 없는 희생을 요구해선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되레 전통적으로 중장년이 해왔던 일자리에 청년들이 진출하는 것이 가정까지도 해체시킬 수 있는 더 큰 문제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인생의 2모작, 3모작을 원하는 중장년들은 어떻게 대비하면 좋을까?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뭔지 파악하는 것이 첫 번째”라고 강조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게 되면 열의가 생겨 스스로 공부하고 자기계발에 나서기도 합니다. 또 조건보다는 일에 초점을 맞춰 접근하면 구직자가 능동적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모르더라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많은 구직자가 그러니까요. 전국에 있는 저희 노사발전재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에는 이런 분들을 위한 전문 컨설턴트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분들과 상담하다 보면 진짜 내가 원하는 제2직업을 찾을 수 있습니다.”
현재 한국 농업·농촌에 대해, 이동필(李桐弼·63)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간단하게 ‘전환기’라고 명명했다. 자신의 고향이자 농업 현장인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농부로 일하면서 느낀 솔직한 속내였다. 그러나 그는 전환기 속에서 맡은 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책임을 지고자 한다. 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후 스스로 돌아보는 ‘마음공부’ 뜨락에 씨앗을 뿌리고 일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 게 그 증거다. 농촌경제연구원에서 장관을 거쳐 귀향한 후 농부의 삶을 살아가는 그에게서 한국 농업과 농촌이 직면하게 된 현재와 미래의 활로에 대해 물어봤다.
경상북도 의성군은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마늘로 친숙한 도시다. 그리고 지난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서 특별하게 유명해진 지역이기도 하다. 전 국민의 관심을 모았던 컬링 종목의 스타들이 모두 의성 출신이라는 점 때문이다. 의성은 컬링 종목의 스타들을 꾸준히 배출하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 컬링의 수도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아낌없는 지원도 이루어지고 있다.
30년 뒤면 사라질 수도 있는 도시
그러나 이처럼 사람들에게 알려진 의성의 대외 이미지와는 달리,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걱정이 많았다. 그는 인터뷰를 하던 중 서산대사의 시를 읊었다. ‘환향’이라는 제목의 시다.
삼십 년 만에 고향에 돌아오니
사람은 죽고 집은 부서지고
마을은 황폐화됐는데
청산은 말이 없고 봄 하늘은 지는데
어디서 두견새 우는 소리만
들리는구나
그야말로 막막하다.
“이게 내 심정이에요.”
그의 먹먹한 기분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이었다. 그가 장관 퇴임 후 한 명의 농부가 되어 귀향한 의성군은 2016년 ‘중앙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에 따르면, 30년 뒤 사라질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러한 현실을 체감하고 있었다.
“고령화, 양극화, 그리고 예전 같은 공동체가 스러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죠. 연구소나 중앙부처에 있을 때는 망원경으로 세상을 봤지만 현장에서는 현미경 보듯 보이지요.”
장관, 농부가 되다
이 전 장관은 뼛속까지 농업인이다. 그의 경력을 보면 바로 드러나는 사실이다. 농촌지도자였던 아버지를 둔 그는 영남대학교 축산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와 미국 미주리주립대학교에서 농업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서 30여 년 넘게 근무하면서 농촌의 현실과 문제를 연구하고 대안을 내놓는 일을 했으며 2013년에는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으로 입각해 역대 최장수인 3년 6개월의 시간을 지냈다. 그리고 2016년 9월 5일 퇴임한 다음 날 고향으로 돌아와 2500평(8264㎡)의 땅을 관리하는 농부가 되었다.
“요즘은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동물들 밥 먹이는 일로 하루를 시작해요. 온몸이 타박상과 상처투성이예요.(웃음) 며칠 전에는 경운기 사고가 나서 갈비뼈가 부러졌어요. 도처에 해야 할 일이죠. 옛날 방식으로 농사를 하면 힘만 들고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했어요.”
귀향할 때 나름 세운 ‘일이삼사 원칙’이 있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하루 두어 차례 텃밭을 돌보고, 삼시 세끼 어머니와 밥을 먹고, 사람들이 찾아오면 말동무가 된다’는 것이었다. 3년간 보리·콩·팥·참깨·마늘·양파·옥수수 등 온갖 농사를 다 지어봤다.
그 과정에서 사모님은 반대 안 했느냐고 묻자 퇴직한 그날 밤에 어찌 내려가느냐며 딱 하루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로는 함께 고생하면서 도와주고 있다 한다.
“가끔 외롭고 답답할 때가 있는데 아내가 그걸 풀어줘요. 신세를 많이 지고 있죠.”
남는 농산물을 판매하는 수고로움은 모두 아내 이정숙 여사가 맡아서 하고 있다. 노모를 돌보고 남편 수발하고 농사일까지 거들며 집안 곳곳을 돌보는 1인 다역을 하고 있는 만큼 이 전 장관은 이런 아내를 인생 최고의 반려자라고 손꼽았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먼저 오래된 집을 손보면서 마당에 5평(16.5㎡)짜리 사랑채를 지어 사원재(思源齋)라 이름 붙였다. 농사일하며 이곳에서 책을 읽고 손님을 맞는다. 사원재라는 말은 조상과 부모, 그간 살아오며 도움을 줬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의리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는 또 40년이 다 된 부친의 생가 마당 한가운데에 작은 정자를 세우고 애일당(愛日堂)이라 이름 지었다. 노모가 황반변성 때문에 눈이 불편하신데 남은 날 하루하루 즐겁게 사셨으면 좋겠다는 뜻을 새겨 넣었다. 이 또한 안빈낙도(安貧樂道)가 아니겠는지.
‘故鄕創生’에 몰두하다
하지만 눈앞의 일을 두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종일 흙에 파묻혀 있다 들어오면 너무나 피곤해 바로 쓰러져 자는 현실. 그는 자신의 현재를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 중 농가에 비유했다.
“이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 게 세상 근본 이치란 주장을 했어요. 그런 주장을 갖고 등나라를 갔죠. 그 나라 임금이 너희들의 주장은 뭐냐 물어보니 첫째는 근면 검소해야 한다, 둘째로는 왕과 왕비도 직접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대답했어요. 왕이 그 말을 듣고는 첫 번째는 공감할 수 있는데 두 번째는 못하겠다며 거절했죠.(웃음) 이 사람들은 농업인들과 함께 일만 열심히 하다 보니 자기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못했어요. 당시 유가들은, 실천보다 말로 사는 사람들이니까 자신들의 주장을 다 책으로 만들었죠. 나도 이렇게 농사일만 하다가는 정작 농촌의 살길에 대해 글을 써보겠다는 생각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마는 게 아닌가 걱정돼요.(웃음) 이제 좀 바꿔야겠어요.”
그렇다고 그가 다시 정치의 세계로 돌아올 것이라는 얘기인가 하면, 전혀 아니다. 이번 지방선거 때도 얘기들이 있었지만 그는 손사래를 쳤다.
“밖에 나가면 말이 많아 거의 두문불출하고 있어요. 무슨 운동을 하거나 당을 같이 해보자며 찾아오는 이도 있지만, 차나 한잔 먹고 가라며 돌려보내요. 한 눈 팔지 않고 텃밭 일구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평생의 과업인 희망찬 농업, 활기찬 농촌을 만드는 생각을 하기에도 바쁩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집에는 신문도 TV도 없었고 라디오 하나만 틀어놓고 있었다. 외부 활동이라면 가끔씩 강의를 나가는 정도다. 요즘 그의 주된 관심사는 ‘지방소멸과 고향창생’, ‘청년창업과 귀농귀촌’ 그리고 ‘농협의 역할’ 등이다. ‘늙고 지친 고향을 어떻게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화두와 관련한 고민거리인 것이다.
극장 하나 없는 곳, 젊은이들에게 와서 살라 말할 수 있나
“지역발전이라 하면 흔히 돈 버는 얘기만 하는데, 그에 못지 않게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너그러운 마음과 역량을 갖춘 인재양성, 그리고 생활환경 및 복지 서비스의 질적 개선도 중요하다고 봐요. 의성만 해도 극장 하나 없어요. 그런데 말로만 여기 와서 살라고 권유할 순 없죠.”
사실 농업·농촌 발전을 위해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많은 예산과 인력을 동원해 노력을 하고 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전 장관은 지역활성화를 위해 일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앙정부는 지방 분권과 지원체제 정비를 하고 지방에 도전할 기회를 준 후에 결과에 책임지도록 해야 해요. 지역의 특성과 농가를 유형별로 구분하여 맞춤형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자원의 효율성을 높이는 길이거든요. 또한 조건불리지역 직불제도를 개선하여 개발 여건이 불리한 지역에 대해 지원을 차등화할 필요가 있어요.”
그는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의 조속한 시행과 함께 고향기부금제를 도입할 것을 적극 주문했다.
“무역이득공유제의 대안으로 매년 1000억 원씩 10년간 모으는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을 조성하기로 했는데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어요. 당시 한중 FTA 협약 비준을 전제로 여야가 합의한 약속입니다.”
아울러 지방의 역할을 강화하고 주민과 민간 부문의 참여를 촉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농촌에 젊은 사람들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스마트팜이나 공동경영체 등을 통해 고부가가치 있는 농산물을 생산하고 가공, 유통, 체험관광 등과 결합한 6차산업으로 매력적인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농교류를 하고 귀농·귀촌을 통해 외부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책임있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지역 스스로 자기들의 문제와 가능성, 부존자원을 기초로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농가 유형별 육성정책 완성해야
이는 그가 장관 시절에 핵심적으로 추진한 과제 중에서 못 다 이룬 숙원과도 관계가 깊다.
“농정의 새 틀을 짜고 싶었어요. 농업·농촌을 둘러 싼 대내외 여건이 다 바뀌어버린 지금은 그 변화에 걸맞게 정책 프레임도 달라져야 한다고 봤죠. 그중 하나가 농업경영체를 등록하고 이에 기초하여 농가 유형별 육성정책을 추진하는 일이었어요.”
그는 경영주가 65세 미만이면서 소득이 연 5000만 원 이상인 농가는 규모 있는 농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장기저리 융자와 컨설팅, 경영안정대책 등 맞춤형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후계자가 없는 영세고령농가는 농업 경영에서 은퇴를 유도하여 사회안전망으로 커버하고, 나머지 중간 규모 농가는 가공, 유통, 관광 등을 결합한 6차산업화를 통해 추가적인 소득원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농가를 한데 묶어놓고 획일적인 정책을 추진하니 돈은 돈대로 쓰고 손에 잡히는 효과를 못 볼 수밖에요. 이웃인 성주는 참외 하나만 갖고도 잘살아요. 참외 주산지로서 품목이 특화되어 전후방 관련 산업이 발달하고 6차산업으로 수급까지 안정되니 가능한 거죠. 이처럼 지역 및 농가 유형별 육성정책을 완성해야 했는데, 끝장을 못 보고 나온 게 아쉬워요.”
지역의 농업·농촌 관련 사업이 중앙정부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니 천편일률적으로 획일화해 특성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도 같은 문제다. 농촌 중심 활성화 사업을 보면 지역 여건이나 부존자원에 대한 고려없이 주민 의사나 참여도 이뤄지지 않는 상태에서 건물이나 지어놓고 활용을 못해 심지어 전기세도 안 나온다는 얘기를 듣는다는 것이다.
“지역이라는 공간 정책 위에 산업 정책을, 그 위에 사람을 대상으로 한 복지정책이 이루어져야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는데 제각기 따로 놀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사후관리는 안 되고 지자체는 책임 안 지려 하고…. 지역이 정책을 좀 더 주도하고 책임지도록 추진체계를 보강해야 해요.”
어쩌면 농협이 대안이 될 수도
그는 1·2·3차산업을 융복합해 농가에 높은 부가가치를 제공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6차산업을 주창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시아 몬순기후대의 영세소농이란 구조적 특징 때문이다. 여름에 고온다습한 기후 때문에 논농사에 특화하다 보니 계절별 유휴인력이 발생하게 되고, 유휴노동력을 생산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농외소득원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 것이다. 농업생산이란 1차산업과 가공이란 2차산업, 그리고 유통 및 관광서비스 등의 3차산업을 결합한 6차산업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그렇지만 현실은 생각처럼 간단치 않았다. 그는 지난해 수확한 팥 서 말과 양파 100kg을 팔 곳이 없었던 것이다. “콩 750kg은 다행히 인근 농협에 판매하였으나 시중보다 낮은 가격으로 넘겼어요. 오죽하면 농민들이 농협에 바라는 소망이 수확한 농산물을 제값 받고 팔아달라는 것이겠어요. 농사짓는 것도 힘들지만 판매하는 것은 더 어렵습디다.”
정부는 농협 개혁을 통해 경제사업을 활성화하려고 애쓰고 있으나 아직도 체감하는 성과는 얻지 못하고, 대부분의 사업장들도 적자 신세를 면치 못하는 실정이다. 더구나 농업인의 고령화로 준조합원 수가 늘어나면서 신용사업에 매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은 농협 회원 중 농사를 짓지 않는 준조합원이 정조합원보다 30% 정도 많고, 농협 계통 매장의 농산물 책임판매율이 50%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농협이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2014년부터 개혁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농협은 정조합원이 준조합원보다 훨씬 더 많은데도 농산물 책임판매율은 25%에 불과해 농민들로부터 돈장사만 한다고 비판받는 거예요.”
그는 오랜 연구생활과 장관으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감 없이 농협 유통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아울러 고령화로 인한 지방소멸 시대에 있어서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농협의 새로운 역할을 제시했다.
“농협이 지역 단위의 6차산업을 주도해야 한다고 봐요. 경제사업의 수지개선을 위해서는 경영 능력을 향상하고 규모화, 전문화해야 합니다. 인근 지역과 품목을 생산하는 농협과의 통합 또는 사업을 연계하거나 연합사업단을 운영할 수도 있겠지요.”
어째서 농협일까? 그는 지금처럼 개별 농가가 따로따로 로컬푸드니 직거래니 하는 식으로 장사를 하면 비용절감을 고사하고 소비자 신뢰를 얻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표준화, 규격화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개별 농가가 하기 힘든 그 작업을 농협이 해줬으면 하는 의견이다.
“고령화 사회에서 농협은 농기계를 구비하고 영세농들의 영농을 대행할 수도 있습니다. 농촌지역의 교육, 의료, 복지 등 서비스 전달 체계로서 농협의 새로운 역할도 생각해볼 수 있겠죠. 그것이 농협이 살길이에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농협이 대체 뭐하는 곳이냐는 정체성 논란이 심화될 겁니다. 농협이 당면한 현안을 극복하고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주민들의 걱정을 덜어줄 수 있도록 스스로 혁신하고 노력해야 해요.”
귀농·귀촌, 국가 정책으로 시행해야
이 전 장관은 요즘 세상이 시끄럽다는데 다 잊고 산다고 했다. 해야 할 일이 많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깨끗한 자연환경 속에서 씨 뿌리고 가꾸는 즐거움이 여간 아니라고 한다. 농업과 농촌에서 미래의 꿈을 키우는 젊은이들은 물론 은퇴 후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려는 사람들에게도 보람을 느끼는 새로운 삶이 가능함을 농촌이 가르쳐준다고 말했다. 지역의 균형발전은 물론 개개인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귀농·귀촌 정책은 어느 한 부처가 아니라 여러 부처가 협력해 국가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의 농촌은 흡사 요양병원과 비슷해요. 우리 집 왼쪽으로 있는 집 세 채는 빈집이고, 오른쪽의 두 채는 독거노인이 살고 있어요. 소멸위험 지역에서 벗어나는 길은 외지 인구를 유입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러려면 이사비 몇 푼 보태주는 게 자랑이 아니라 이주자들이 필요한 것을 도와줘야죠. 여기서 태어나 20여 년 살았고, 지금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저도 적응이 쉽지 않은데 낯설고 물선 객지로 이사와서 얼마나 답답한 게 많겠어요? 지역을 찾아 온 외지인을 축복으로 여기고 따스하게 배려하는 너그러운 이웃이 있어야 이곳에 눌러 살고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답니다.”
그는 귀농·귀촌 통계확립과 관련 정책의 정비, 농촌지역에 대해 1가구 2주택에 추가적인 감세를 포함한 제도정비등과 함께 주민들의 귀농·귀촌자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제는 청복(淸福)을 위해 노력할 때
오로지 고향의 발전과 활기찬 농촌을 위한 생각에 둘러싸인 그에게서 못다한 책임감과 꺼지지 않은 열정이 보였다. 해야 할 일과 책임이 없다면 그렇게 힘들게 생활할 리가 없다. 그에게 견딤의 비법을 물었더니 정약용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산 정약용은 복을 열복(熱福)과 청복(淸福)으로 나눴어요. 열복은 출세해 권세를 누리는 것이고, 청복은 청빈한 삶을 통해 욕심과 번뇌를 지움으로써 얻는 복이죠. 다산은 열복보다는 청복을 얻기가 훨씬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제 인생을 돌아보면, 이미 열복은 과분하게 누린 셈이죠. 이제 마음을 내려놓고 이웃과 더불어 즐겁게 사는 복이 남았습니다.”
청복을 누려보겠다고 다짐했다는 말에서 그가 유독 마음가짐을 강조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아직 풀어야 할 평생의 숙제, 희망찬 농업과 활기찬 농촌을 통해 국민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도전이 있다. 도전은 사람에게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만들어준다. 그래서 마음의 가치를 알게 된 그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만들어내는 위대한 변화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향창생은 우리들 마음의 재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살아갈 지역의 미래를 위해, 무언가 하고 싶다는 주민들의 염원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 활력은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랑 참 염치없다야.”
영화 ‘소공녀’ 속 부잣집에 시집간 선배가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주인공 미소를 여러 날 재워주고 결국 한 말이다. 미소는 집이 없다. 그러나 담배와 한 잔의 위스키를 무척 사랑한다. 자기만큼 가난한 남자친구 한솔은 물론이고.
서울시50플러스 서부캠퍼스에서 영화 ‘소공녀(Microhabitat)’를 보았다. 좋은 영화를 무료로 볼 수 있는 공간이 많아져서 반갑다.
동화책과 같은 영화 제목 옆에 있는 ‘Microhabitat’를 영어 사전에서 찾아봤다. 미소(微小, 즉 미생물, 곤충 등)의 서식에 적합한 곳이란다. 아이러니하게도 음(音)이 주인공 ‘미소’와 같았다. 화면 속 그녀의 웃는 얼굴(미소)과는 대조적으로 청년 주거문제의 어려움을 고스란히 나타내는 영화다.
주인공은 가사도우미 일을 하며 돈을 번다. 담뱃값도, 위스키 가격도 훌쩍 오르자 월세로 살던 집을 나와 큰 캐리어를 들고 대학 밴드 친구, 선후배 집 등을 찾아다닌다.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잘나가는 친구는 미소를 만나는 점심시간 틈을 타 스스로 수액을 꽂아 맞으며 피로를 풀 정도로 과로에 시달리고 있다. 결혼해 시부모와 좁은 공간에서 살면서도 미소를 따뜻하게 맞이해 준 친구는 꿈을 잃은 채 지겨운 하루하루를 버티며 산다. 결혼 8개월 만에 아내가 떠나버린 울보 남자 후배는 월급 190만 원 중에 매달 아파트 대출금으로 100만 원씩 이자와 원금을 갚아야 한다. 그것도 무려 20년간. 선배의 집도 찾아간다. 아주 늙은 총각인 아들에게 미소가 찾아오자 어떻게든 엮어보려고 온갖 노력을 하는 노부부의 모습이 짠하다.
전고운 감독은 관객에게 여러 질문을 한꺼번에 쏟아낸다. 청년 주거문제,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과 거리가 먼 직장인의 과로, 자신의 꿈과 정체성은 접어둔 젊은 전업주부의 삶, 대출 때문에 짐이 되어버린 집, 신혼 이혼 문제, 노총각의 애환, 학자금대출을 갚느라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는 미소의 남자 친구까지.
분명 우리나라는 나름 경제대국인데, 배고파 굶는 사람보다 영양 과잉으로 다이어트 고민과 성인병을 걱정하는 사람이 더 많은 세상인데, 등장인물들은 한결같이 우울하다. 집이 있으나 없으나, 부자이거나 가난하거나. 대한민국은 왜 이렇게 우울한 사람이 많을까? 답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50플러스서부캠퍼스에서 영화를 보고 나면 자유롭게 ‘의견 나누기’ 시간이 있다. “숙식이 제공되는 일자리도 많은걸요.” “미소의 처지에 술, 담배를 꼭 해야 하나요?” 관객의 대부분이 시니어들이라 미소의 상황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시험지 정답 같은 말들을 쏟아낸다. 나도 마이크를 잡아보았다. “사람의 결은 모두 다릅니다. 그래도 주인공이 몸을 팔거나, 자살을 시도하지 않습니다. 자기 삶에서 좋아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것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삶입니다.”
영화를 함께 본 몇 명의 젊은이에게 공개적으로 물어보았다. 어른인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우리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들어주세요.” 답은 간단해 보이면서도 또 어렵다. 그래도 영화를 보고 세대를 뛰어넘는 이러한 대화가 그 첫걸음이리라 믿는다.
음악과 자유를 사랑하고, 청소와 요리를 잘하는 여자,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마음 따뜻한 여자, 한약을 먹지 않으면 머리가 하얗게 세는 병을 가진 여자, 키가 커서 더 슬픈 여자, 남의 집을 방문할 때 달걀 한 판을 사들고 가는 여자. 그런 미소가 힘내기를 응원한다.
농어촌 지역의 빈집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것은 고령화와 인구감소 등과 직결되어 있다. 농어촌 주택이 노후화 되면서 매매나 임대가 되지 않아 이로 인한 쓰레기 무단 방치, 화재, 범죄 등의 위험에 노출되어 농어촌 환경문제와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전국 빈집현황 중 농어촌 읍·면 지역의 빈집은 읍 지역 14만 1000호, 면 지역 27만 3000호 등 총 41만 4000호로 집계됐다. 한국국토정보공사는 ‘대한민국 2050년 미래 항해 보고서’에서 2050년 전국 빈집 수는 300만 호를 넘어설 것이고, 전체 10채 가운데 1채가 빈집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 국회입법조사처 ‘빈집 현황과 정비를 위한 정책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토지 이용 효율성 저해와 쓰레기 무단 투기 등 주변 생활환경 악화, 범죄·탈선을 유발하는 우범지대로 전락하게 될 가능성과 화재 위험성 등 때문에 빈집을 사회적인 문제로 꼽았다.
이렇게 관리의 부재로 생긴 문제가 커져가고 있어 정부나 지자체의 대책마련과 효과적 정책실행이 시급한 실정이다. 특히 빈집 문제가 심각한 곳으로 제주도를 꼽을 수 있는데, 2016년 기준 제주지역 빈집은 2만 1469호인데 2015년보다 16.2% 늘어났고 전체 주택의 10.4%에 해당한다. 제주특별자치도관광협회 통계에 따르면 연간 1500만 명으로 상징되는 관광객이 밀려들고 있고, 제주도는 관광사업을 바탕으로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제주에는 양질의 숙박시설이 부족하기에 좀 더 발전적이고 효율적인 관광휴양산업을 위해서는 확실한 솔루션이 필요한 시점에 직면하였다.
빈집 활용한 지역 경제 활성화
이러한 현실 속에서 빈집을 새로운 시장으로 개척해나가면서 부가가치와 일자리까지 창출하여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는 업체가 있어 화제다. 바로 한국형 주택공유 서비스를 제시한 협동조합덤하우스 이사장과 SU그룹㈜ 대표이사인 이태희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이태희 대표는 2016년 8월에 제주시 일주동로에 협동조합 법인 덤하우스를 설립, 국내 최초로 빈집에 공유경제 체제를 도입하여 관광지 숙박난 문제를 해결하였고, 빈집과 청년일자리를 동시에 해결한 혁신적인 주택공유 서비스로 이용객들에게 엄청난 호응을 얻고 있다.
덤하우스는 집주인이 상시 관리할 수 없는 빈집을 상호 연결하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덤하우스에서 빈집을 임차하거나 매입하여 리모델링 후 새로운 숙박공간으로 제공하는 방식이다. 덤하우스는 1998년도의 IMF 관리체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일어난 실천운동, 이른바 ‘아나바다 운동’을 뛰어넘은 ‘온 국민 고쳐 쓰기 운동’을 전개하며 국민적인 관심을 받은 바 있는 이태희 대표가 2014년 특허출원한 브랜드다.
덤하우스는 이 대표가 전개한 ‘온 국민 고쳐 쓰기 운동’과 추구하는 가치가 일맥상통한 브랜드로서 지역 특성을 그대로 살려 빈집을 재발견하는 과정을 갖추면서 초가집, 판잣집 등의 우리 고유의 모습을 지키고 갖춘 이른바 ‘빈집을 재탄생시키는 구조’라 할 수 있다.
이태희 대표는 “초가뿐만 아니라 판잣집도 우리 고유 집인데 갈수록 사라져가고 있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무조건 철거할 것이 아니라 살릴 수 있는 주택은 살려서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빈방’이 아니라 ‘빈집’의 재발견
자신의 주거지 일부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는 숙박공유 서비스 에어비엔비는 숙박 제공자와 이용자의 사생활이 노출되는 구조이지만 덤하우스는 ‘빈방’이 아니라 ‘빈집’을 대여하여 무인시스템으로 출입이 자유롭고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며 사생활 침해를 받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덤하우스의 소유주는 토지와 건축물의 실 소유로 인한 부가가치를 얻을 수 있고, 내 땅과 내 집을 내 맘대로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은 덤하우스만의 특화된 면이라 할 수 있다.
이태희 대표는 “전국의 빈집을 지역별 특성을 살려 복원하고 각 지역을 찾는 다양한 방문객의 숙소뿐 아니라 체험공간으로 활용함으로써, 빈집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해소가 되고, 빈집 소유주에게는 수익을 발생하게 한다. 더 나아가 지역경제의 활성화로 새로운 일자리 창출과 지역문화를 홍보하는 것이 협동조합덤하우스 설립 목적”이라고 밝혔다.
결국, 빈집 소유주에게 안정적인 임대수익을 보장하고, 운영자는 필요한 시설을 완비해 이곳을 찾는 이용객에게 합리적인 가격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유지 및 관리는 전문 업체가 맡고, 지역주민에게는 현장관리 일자리를 제공하기에 덤하우스는 지역경제발전에 큰 기여를 한다는 설명이다. 그 외에 청정의 땅 제주에서 동화 같은 집을 짓고 안정된 고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덤하우스의 신축마을 사업규모는 현재 제주민속마을 총 13동, 제주민속마을풍차상가 총 6동, 신전과동화두모마을 총 8동, 풍차와동화 총 6동, 신전과동화금악마을 총 10동이 진행 중이다.
덤하우스는 집을 빌려주는 임차인 입장에서는 집이 관리 되어 좋고, 집을 빌리는 이용객 입장에서는 저렴한 가격에 집 전체를 빌릴 수 있어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더군다나 숙박기간 내 1가구 1차량 무상지원과 커피·음료 무제한 무료제공은 물론 여러 가지 오락시설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이러한 덤하우스를 이용하여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는 게스트 또는 호스트 자격으로 협동조합에 가입하고 협동조합의 조합원이 되어야 한다. 일단 조합원이 되면 조합이 추진하는 모든 사업에 참여할 수 있으며 조합이 운영하는 시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투명성 높이며 조합원의 안전장치 마련
이 대표는 “덤하우스의 사업방식은 사업지 활용 토지 확보가 완료되어 있기에 투자방식과 수익구조는 기존 모델과 근본적으로 다르고 메리트가 있다”고 전한다. 보통 부동산투자의 일환으로 집을 두 채 이상 보유하거나 수익형 부동산을 보유하게 되는 경우 실제 사용빈도는 낮고 수익 또한 운영사의 운영능력에 따라 천차만별이라 부도내고 방치되기가 다반사다. 무엇보다 공급과잉으로 언제 분양될지 알 수 없이 장기간 방치되어 있는 미분양주택은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태희 대표는 “덤하우스로 활용하면 이렇게 불안하게 소유하고 있는 주택들도 수익형 주택으로 바꾸어 분양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며 “세계 100여 개국의 수백 개 모델하우스 중 본인이 주택을 선정하고 토지와 건축물을 구입하면 연 숙박률 50%에도 10%의 수익을 얻는 덤하우스의 주인이 되는 구조”임을 강조했다.
협동조합덤하우스의 사업방식은 첫째, 협동조합 분양은 일반 분양보다 대략 20% 저렴하다. 조합이 시행사 업무를 맡기 때문에 토지매입에 대한 대출이자와 건설사 마진, 마케팅 비용과 같은 각종 부대비용을 줄일 수 있어 일반 분양보다 15~20% 정도 가격이 저렴하다. 둘째, 투명성을 높이며 조합원의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지역주택조합 사업은 사업지로 활용할 토지 매입이 관건인데 이를 100% 확보하기가 쉽지 않은 단점이 있다. 하지만 “협동조합덤하우스는 이미 사업지로 활용할 토지를 사전에 확보했기에 사업에 지장이 있거나 추가로 비용이 발생하는 일이 없다”고 이 대표는 밝혔다. 마지막으로 덤하우스에 참여하려 해도 소유하고 있는 빈집이 없는 경우에는 덤하우스가 기획하고 설계, 시공하는 여러 테마하우스를 분양받아 덤하우스에 등록하는 방법이 있다.
SU그룹㈜ 부동산 주요사업인 11개 마을의 제주세계민속마을은 9만 5000㎡ 규모의 신축 덤하우스다. 상상과 고대의 세계마을이 조성된 1차 마을 사업으로, 파키스탄 레드씨 그룹에게 투자의향서를 발송하였고 결국 MOU를 체결, 진행하면서 마침내 2018년 4월 제주세계민속마을 건설공사 프로젝트에 2억 달러 계약을 성사시켰다고 한다. 또 중동국가의 요청으로 세계민속마을 2차 10개 마을의 사업을 추진하면서 사우디 3억 달러 세계마을 사업 투자유치를 목표로 매진하고 있다.
이 대표는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에 초가와 기와집이 혼재하는 마을을 완공하고, 한경면 두모리에는 신전과동화라는 동화 속 마을이 진행 중이며, 한림읍 금악리에는 풍차마을이 시작되었고 이후 콜로세움인제주, 피라마드마을, 기차마을, 만리장성, 아라비안나이트 등의 콘셉트도 추후 덤하우스로 등록될 예정이다”고 밝혔다.
아울러, 이태희 대표는 “올해 제주도에 ‘빈집 숙소’를 30호까지 늘리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제주도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덤하우스를 확대하여 조합원들이 전국 어느 지역을 가든 편리하게 해당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계획을 내비쳤다.
올해 제주도에 ‘빈집 숙소’를 30호까지 늘리는 목표
마을 특화사업을 구축하여 경제적 부가가치와 일자리 창출을 도모하고 이를 통해 지역경제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이태희 대표는 그 일환으로 지역별 청년이장제도를 도입해 청년들이 운영, 관리하는 덤하우스 설립을 지원하고, 지역특산품을 비롯한 다양한 관광상품을 개발하여 지역 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하는가 하면, 관광정보지 ‘하하코리아’의 지역별 신문 발행으로 정확한 지역 정보를 제공한다.
또 지자체로 하여금 덤하우스를 관리하는 청년들에게 기본급여로 청년실업수당을 지원받게 하는 것은 물론, 덤하우스의 운영으로 발생되는 수입은 조합의 배당금을 제외하고 청년들이 자체적으로 관리하도록 하는 등 지역발전을 위하여 다양한 방안을 계획 준비 중에 있다.
협동조합덤하우스 이태희 대표는 “공공의 이익과 협동조합 조합원의 권익을 위해 양심적인 삶을 살아왔고 한국형 공유경제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데 앞장서고 있지만 정부나 지자체가 덤하우스 사업 이해부족에서 오는 편견과 배척을 통한 여러 가지 제도적 불리함이 무척 힘들다”며 “정부와 지자체의 인식 개선과 적절한 정책적 지원이 필요함”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