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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그 뉴스, 그 사람]“서울올림픽의 의미는 6·25만큼 중요”
- 1988년 서울올림픽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김운용(金雲龍·85) 전 IOC(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이다. 정치인과 관료, 경제인이 올림픽 조직위원회를 거쳐 갔지만 유치 준비부터 폐막까지 전 과정에 참여한 이는 김 전 부위원장이 유일하다. 김 전 부위원장은 서울올림픽을 광복 이후 ‘6·25전쟁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의미를 돌이켜본다면 지금은 저절로 된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은 일이 많다. 나는 서울올림픽을 광복 이후 역사에서 6·25전쟁에 비견할 만큼 중요한 사건으로 본다. 무엇보다 축 늘어져 있던 한국 국민이 ‘우리는 할 수 있다, 해 냈다’고 느끼면서 의식을 개혁하게 됐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 근대사에 남긴 의미는 단순한 왕정복고가 아니라 국민적인 의식을 개혁했다는 데 있다. 서울올림픽의 모토가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였다. 세계무대에서 정말 약소국이었던 대한민국이 문화국가로서 세계 속에 들어가게 됐다. 서울올림픽이 최초로 기획된 것은 언제인가 얘기를 하려면 먼저 1978년 제49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유치한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청와대 경호실장을 지낸 박종규 씨와 함께 유치한 대회였다. 멕시코에서 선수단 숙식을 하루 10달러에 제공해 주겠다고 큰소리쳤다. 급해진 나는 하루 5달러면 된다고 ‘뻥’을 쳤고 결과적으로 대회를 잘 치르게 됐다. 사격대회 다음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약간 허황된 건의를 했다. 박 대통령이 검토해보라고 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당시에는 정부가 올림픽 유치를 결정하지 않았는데 국민체육심의위원회라는 게 있었다. 정부에서 국무총리, 문교부 장관, 서울시장 등이 참석했고 나도 세계태권도연맹 총재로서 참석했다. 대부분 올림픽 유치가 경제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반대했다. 박종규 씨가 “유치에 직을 걸자”고 주장하면 김택수(전 IOC위원) 씨는 “내가 왜 그만두느냐, 당신이나 그만둬” 하면서 대립했다. 그러다가 더 이상 뭘 해보기도 전에 10·26사태가 터졌다. 세상이 뒤집혔으니 (올림픽 유치계획도) 그렇게 스톱이 됐다. 다시 정부가 유치방안을 결정한 계기는 무엇인가 직후에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여러모로 어려울 때 이규호 문교부 장관이 나라를 끌어올리기 위해 올림픽을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렇게 얼떨결에 신청했다. 지금 생각하면 열악했다. 얼마 전에 전 전 대통령을 만났더니 그때는 IOC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다고 하더라. 돈도 참 없었다고 했다. 한국인 국제심판도 없고 국제회의에서 한국인이 나밖에 없을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좌우지간 우리나라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었다. 나고야가 우세했는데 어떻게 역전했나 나고야는 승리를 과신했다. IOC총회를 맞는 자세나 준비는 부실했다. 나고야의 전시실에는 여성 홍보요원 두 명에 사진 몇 장이 전시돼 있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서울이 올림픽 유치에 얼마나 열정을 쏟고 있는지 보여줬다. 일본은 나고야가 중심이었지만 우리는 거국적으로 나섰다. 서울과 나고야가 아니라 한국과 나고야가 경쟁하는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없었다. 개최지 발표 순간 “쎄울, 꼬레아” 소리에 꿈인가 생시인가 했다. 멍해졌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 볼 때 가장 아쉬움이 남는 순간은 2001년 총회에서 유색인종 최초로 IOC위원장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것이 못내 아쉽고, 2005년 5월 구속된 상태에서 불명예스럽게 IOC위원을 사퇴한 것도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그나마 2008년 복권이 돼서 다시 활동할 수 있게 됐고, 2005년 유엔인권위원회 연례보고서에서 ‘김운용씨가 한국 정치인들에 의해 2003년 실시된 2010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실패의 희생양이 된 양심수’라고 기록한 것을 위안으로 삼고 있다. 최근 활발히 힘을 쏟고 있는 일이 있는지 집필 활동과 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많은 대학에서 강연 요청이 온다. 현업에서 내가 이룰 수 있는 일은 많이 이뤘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경험하고 배웠던 것들을 후배들에게 유산으로 남기려고 한다. 만나게 해달라면 연결해주고 얘길 해달라면 해주겠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무조건 돕겠다. 이름을 빌려달라면 빌려주고 뛰어 달라면 뛴다. 한국에서 IOC위원 50명과 아무 때나 통화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나밖에 없다. 아직 운동도 하고 있다. 헬스장에서 웨이트 트레이닝도 하고 필라테스도 한다.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하고 싶은 일이 있나 어렸을때부터 피아노를 무척 열심히 쳤다. 서울 삼선교 인근에 사시던 신재덕 이화여대 교수로부터 배웠다. 1947년 당시 레슨비가 한달에 200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만일 내게 다시 젊음이 주어진다면 피아니스트가 꼭 돼보고 싶다. 연세대 재학시절 내가 피아노를 가장 잘 쳤다. 대학 1학년때는 전교 음악회에서 독주도 했다. 쇼팽의 음악을 곧잘 연주했다. ‘즉흥환상곡’을 가장 좋아했다. 쇼팽의 음악에는 연인에 대한 로맨스와 조국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6·25가 발발하면서 공부도, 음악도 그만둬야 했다. 외교관으로 주미 대사를 하면서 국제법 학자이자 피아니스트를 해보고 싶다.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 ◆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은? 1986년 IOC 위원으로 선출된 것을 비롯해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 국제경기연맹회장, 월드게임 창설회장, IOC TV·라디오 분과위원장, IOC 집행위원, IOC 부위원장 등을 맡아 국내외 체육계에서 맹활약했다. 유색인종 최초로 IOC 위원장 선거에 도전하기도 했다. 88서울올림픽 유치를 비롯해 2002년 한·일 월드컵과 2002부산아시안게임 등 대한민국이 주요 국제대회의 국내 유치하는 과정은 대부분 김 전 부위원장의 손을 거쳤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개·폐회식에서는 남북한 공동입장을 성사시켰다. 그는 태권도 세계화의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1971년 대한태권도협회장 취임 이후 국기원을 건립하고 세계태권도연맹(WTF)을 창설했다. 태권도가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돼 ‘효자종목’ 역할을 하게 된 것도 김 전 부위원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국가적으로는 대통령특사 국제교류대사를 맡은 바 있으며 16대 국회에서는 통일외교통상위원으로 활약했다. 현재는 일본 게이오대학 법학부 방문교수, 미국아메리칸대학교 명예총장, 조선대 석좌교수 등을 맡아 후진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1989년부터는 아호인 윤곡(允谷)을 따 국내 최대 여성 스포츠 시상식인 윤곡여성체육대상을 시행해 왔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부인 박동숙씨와 슬하에 1남2녀를 두고 있다. ◇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 약력 1931년 대구 출생(연세대 정치외교학과 학·석사, 美메리빌大 법학박사) 1961년 내각수반 비서관·국방장관 보좌관 1963년 주미대사관·주UN대표부·주영대사관 참사관 1971년 대한태권도협회 회장·대한체육회 이사 1972년 국기원 건립, 국기원 이사장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 창설총재 1985년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및 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원회 부위원장 1986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1986년 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GAISF) 회장 1988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TV 분과위원장 1990년 대통령특사(헝가리,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1992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 1993년 대한체육회(KSC) 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 1996년 외무부 국제체육교류 대사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 2009년 현재 아메리칸스포츠대학교 명예총장, 조선대학교 석좌교수, 대한체육회(KOC) 고문, 대한태권도협회 명예회장
- 2015-09-11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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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어머니]“어머니를 속여 죄송합니다”
- 나른한 봄볕 아래 어머니를 생각하는 조창화(趙昌化·78) 대한언론인회 고문을 만나 담소를 나눴다. 그는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어머니의 값진 추억을 생생하게 그렸다. 흡사 계절마다 살아 돌아오는 장미꽃의 슬픈 아름다움처럼, 어머니의 모습은 그렇게 조 고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기자 teinny@etoday.co.kr “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오직 1남 2녀 세 자식을 위해 헌신하셨죠. 그중에서도 아들인 제게 몰두하셨어요. 그래서 저에게 어머니는 늘 애틋하고 각별한 존재죠. 이렇게 다시 회고하니 늘 혼자였던 어머니 모습에 목이 멥니다.” 조창화 대한언론인회 고문은 어머니 박신행(朴信行) 씨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 없다며 가슴 아파했다. 어머니와 가족의 삶을 풀어내는 그의 목소리에는 그리움과 아쉬움이 보태졌다. 그는 자신이 일곱살이었을 때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 나이 마흔을 훌쩍 넘어 낳은 아들이었던 그는 1945년 초, 어머니의 손에 끌려 서른 시간이 넘는 기차 여행 끝에 평안남도 평원군 한천이라는 작은 포구에 닿았다. 그곳은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그 좋은 재산 다 놔두고 몸만 나왔으니 어떻게 하나”라는 어머니의 푸념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는 그곳에서 한천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일제 치하였던지라 다마고(계란) 잇고(1개), 니고(2개)를 먼저 배워야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일본 학교를 다니다 온 두 누이로부터 개인 교습을 받곤 했다. 해방이 된 그 해 8월 하순의 어느 날, 그는 아버지 조이선(趙利善) 씨와 함께 100여 리 떨어진 평양에 간 적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으로 갔는데 연단에서 키 큰 남자 한 명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저 사람이 바로 김일성이다”라고 했다. 마치 불길한 전조 같은 기억이었다. 함경도로, 서울로, 그리고 부산으로 소학교 1학년이 끝날 무렵 그의 가족은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함경남도 신고산이란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 땅과 과수원, 광산 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신고산 인민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아침마다 소년단 행진곡을 부르며 대열을 갖추어 등교할 때는 신바람이 났다. 그러나 역사의 비극이 그에게 드리우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상한 사람들에게 끌려 나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후 아버지와 어머니가 안변 감옥에 갇혀 있다는 전갈이 왔다. 죄목은 ‘유산 계급’. 공산당의 ‘숙청’ 작업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 사건이 있고 나서 소년 조창화는 학급 위원 자리에서 내쫓기고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게 됐다. 부당한 처사들 속에서 학교에 나가는 둥 마는 둥 집에서 지내야 했던 그에게 아버지 소식을 갖고 왔다는 한 남자가 “어머니, 아버지는 안변 감옥을 탈출해 이미 월남을 했고, 나는 너희 3남매를 남쪽으로 데려가기 위해 왔다”면서 아버지의 편지를 내밀었다. 3남매는 1948년 8월의 어느 날, 부모님을 만나기 위한 2박 3일 동안의 월남 행군을 시작했다. 행군은 주로 밤에 이루어졌다. 고생 끝에 도착한 동두천에서 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서울에서 아버지의 권유로 공옥소학교라는 사립학교 4학년에 편입했다. 남대문시장 근처, 지금의 상동교회 뒤에 자리 잡은 이 학교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한 반씩밖에 없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소학교였다. 고된 경험 끝에 부모님과 함께하게 됐다는 것에서 그는 겨우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가혹한 운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지 2주 남짓 지났을 시점인 1950년 7월 13일, 그의 나이 12세 때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서울이 온통 인민군으로 뒤덮인 날, 그는 아버지를 모신 영구차에 탄 채 무악재를 넘어 꾸역꾸역 밀려오는 인민군을 헤치고 홍제동으로 향했다. 묘지였던 그곳에서 5일장으로 장사를 치렀다. 그리고 그 후 석 달 동안 방공호에서 살아야 했다. 얼마나 지난 다음일까? 어느 날 국군이 서울로 들어왔고, 그해 12월 하순에 그의 가족들은 다시 짐을 꾸려 부산으로 가는 피난 열차를 탔다. 무려 6일 동안의 거북걸음 끝에 부산역에 도착한 것이 12월 26일 즈음, 어머니와 2녀 1남의 3남매는 사고무친(四顧無親)한 부산역 한 귀퉁이에서 고달픈 피난살이를 시작했다. 홀어머니 슬픔 헤아리지 못한 불효자 “그때 어머니는 겨울 털모자를 팔고, 그 돈으로 쌀을 사고…. 그런데 뭔가를 팔려고 해도 살 사람은 별로 없고…. 그 와중에 아버지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이나 아버지의 빈자리를 제가 헤아려 본 적이 있는가 하면…. 그런 기억들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엄청 울 수밖에 없었죠.” 부산에서 학교를 다닌다는 건 상상조차 못했다. 학교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동네 아이들과 사귀던 그는 미군 부대에 들어가 미군의 구두를 닦아주는 ‘슈샤인 보이’를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요즘의 우리들은 꽁트에서나 볼 수 있는 ‘기브 미 쪼꼬렛’이라는 어설픈 영어 뒤에 숨어 있는 건 시대가 만들어낸 고통이고 절박한 생존의 기술이었다. 조 고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슈샤인 보이’를 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어머니는 “이대로 뒀다가는 애가 큰일나겠다” 싶었다. 더군다나 애지중지 키운 집안의 단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어머니가 그를 미군 부대 대신 데려간 곳은 문래동 대선소주공장의 한 귀퉁이였다. 그곳은 미국인들에게 학교를 빼앗긴 성남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노천 수업을 받는 곳이었다. 이리하여 그의 인생에서 네 번째 초등학교가 시작된다. 졸업이 예정된 6학년 말까지는 한 달 정도 남았을 뿐이었고 다른 아이들은 연합고사를 준비한다고 야단법석인 가운데 그는 친구들의 노트와 책을 빌려 보기에 바빴다. 비록 졸업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으나 달포 뒤에 성남초등학교 졸업증명서를 받을 수 있었다. 이로써 초등학교 4개를 거친 그의 남행만리(南行萬里)는 부산을 마지막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의대에 안 가 죄송합니다” 1953년, 이제 여드름꽃이 피는 나이가 되는 조 고문은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는 대열에 끼여 서울에 올라왔다. 서울고등학교 3학년으로 입학한 그는 당장 다가온 대학 입시 준비로 24시간이 모자랐다. “제가 있던 3학년 4반 담임인 육인수(故육영수 여사의 오라버니) 선생님을 만난 어머니는 ‘창화는 무조건 서울대학교 의대에 가야 하니까 그리 지도해 달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의과가 싫어 정치학과에 서류를 제출했고 어머니와 육 선생은 제가 당연히 의대에 넣은 것으로 알고 있었죠.” 서울대 정치학과에 합격한 그는 마치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서울 등지의 대표 준재들이 모인 형세를 이루는 정치학과 내에 함경도 대표로 자리 잡았다. 1961년에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 대한일보 기자로 들어가 국회, 청와대 출입을 시작했다. 1973년, KBS 정치부 차장으로 이직하면서 언론인으로서의 그의 삶은 보다 탄탄해진다. “제가 KBS 부산방송 총국장이었던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나이 53세일 때 아버지와 사별하고, 이후 35년이란 세월을 우리 남매 세 명을 위해 개가하지 않고 홀로 살다가 88세에 세상을 떠나셨죠. 어머니는 아버지와 삶을 같이한 시간보다 홀로 산 시간이 더 길었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카리스마 있는 여장부로 기억했다. 그의 기억 속의 어머니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라면 막일도 거르지 않았고 늘 당당했다. 나이 들어 출석하는 노인회관에서는 화투도 잘 치고 보스 노릇도 곧잘 했다. 그는 어머니를 인정이 많고 시대를 앞서 갔다고 평했다. 지고는 못사는 성격에 일본어와 중국어도 유창했던 것도 어머니다운 점이었다. 어머니 묘지에 대동강 모래를 뿌리다 어머니가 그리울 때는 언제일까. “다들 비슷하겠지만,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는 어려울 때, 힘들 때죠. 어머니는 언제나 제 편이셨으니까요. 어떤 일이 있어도, 영원한 제 편이니까요.” 어머니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땠을지는 미뤄 짐작이 간다. 어머니는 그에게 무한한 사랑을 아낌없이 베풀었다. 하지만 그 사랑에 그는 변변하게 보답 못한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저는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날 집에서 전화가 왔는데, 태풍 때문에 비행기가 못 뜨더군요. 그래서 비행기로 못 움직이고, 새마을호를 겨우 타서 6시간 걸려서 집에 도착했죠. 그날 아침에 어머니가 ‘애비는 어디 있냐’고 물으시며 ‘화장실에 좀 가자, 씻고 싶다’고 하셨답니다. 가시면서 저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의 삶을 묵묵히 보여준 것뿐이지만, 그 모습 자체가 그에게는 80세가 다 된 지금까지 ‘정신적 울림’으로 남아 있었다. “청와대 출입 시절 잊지 못할 일이 한 가지 있지요. 1972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적십자회담 취재단으로 들어가 대동강을 산보하고 그 강변에서 모래를 채취할 수 있는 큰 행운을 얻었어요. 그래서 1985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의 고향 대동강의 모래를 뿌려드릴 수 있었죠.” 여기까지 말한 그는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아버지 묘가 없어진 기억이 나서다. “사실 아버지 묘지를 잃어버렸어요. 부산 피난살이에서 돌아와보니까 홍제동의 묘지 자리를 불도저로 확 밀어버렸더군요.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아버지 영정만 가지고 합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어머니 유골을 파서 화장을 했어요. 그리고 용인공원묘지에 가로 60cm, 세로 40cm 사이즈의 와합, 즉 눕히는 비석으로 바꿨어요.” 비석에는 배천(白川) 조 씨 가족묘라고 쓰여 있고 뒤에는 사용 수칙을 적었다. ‘여기는 배천 조씨 묘지다, 화장을 해서 묻는다, 직계비속들은 만약 꽉 차면 맨 위부터 그대로 파서 거기에 다시 사용해라.’ 용인공원묘지가 상당히 큰데 그렇게 한 건 그가 처음이다. “한 40구는 들어갈 것 같아요. 내가 죽고, 한 5대까지는 걱정하지 않을 것 같네요.(웃음)” 그는 어렵게 묘지개혁을 했다며 어머니 같은 여장부라면 좋아하실 일이라고 평했다. 그가 요즘 즐겨 말하는 ‘첫째는 남한테 피해 주지 말자이고, 둘째는 정리정돈’이란 말 또한 어머니에게서 배운 습관이다. “요즘 이제 일곱살인 우리 손녀에게 할아버지가 뭐라 말했냐고 집적대면 ‘남 폐 끼치지 마라, 정리정돈이요’하고 냉큼 대답하죠. 그 재미에 삽니다.” 조 고문은 인터뷰 내내 진중하고 묵직하게 어머니 이야기를 하다 손녀 얘기가 나오자 금방 함박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를 향한 추모의 정은 이제 유일한 손녀에 대한 짝사랑이 되어 삶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에게 손녀는 그의 어머니가 주신 축복의 선물이 아니었을까.
- 2015-06-03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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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 이 아침] “우리나라, 지금 대체 어디로 가고 있나?”
- 2012년 18대 대통령선거에서 가장 큰 화두는 복지 문제였다. 당시 대선 후보들이 나왔던 TV토론에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다고 말했었고, 박근혜 대통령은 증세 없는 복지가 가능하다고 반박했었다. 그때만 해도 이후 3년여의 세월이 흘러 ‘증세 없는 복지’가 한국에서 가장 뜨거운 말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난무했던 ‘증세 없는 복지’라는 말이 가진 허점을 일찌감치 꿰뚫은 이가 이미 있었다. 전 건설교통부 장관이며 건전재정포럼을 만들어 이끌어 가고 있는 최종찬(崔鍾璨·65) 대표가 바로 그 사람이다. 건전재정포럼 주간회의를 하고 있는 그의 아침을 들여다봤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기자 teinny@etoday.co.kr 최종찬 대표가 건전재정포럼 설립에 참여한 것은 대선을 코앞에 둔 2012년 가을이었다. “당시 대통령 선거가 양쪽이 서로 복지 공약 많이 하면서 경쟁하는 모양새였어요. 그래서 그 양상을 본 재정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아니 대체 나라를 어디로 가게 만들려고 복지 얘기만 하는가’ 해서 경종을 울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건전재정포럼이 만들어질 수 있었어요. 그때 발기인을 보면 아무래도 재정 쪽에 몸담았던 공무원 출신들이나 장,차관들, 그리고 언론계 출신들이 많았죠.” 최 대표를 인터뷰한 건전재정포럼 회의 장소에서는 안병우 전 국무조정실장,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 장준봉 전 경향신문 사장, 고광철 전 한국경제 편집국장, 허승호 신문협회 사무총장, 이계민 전 한국경제신문 사장, KDI 박진 교수, 김원식 한국재정학회장 등등 쟁쟁한 사람들이 참석하고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실무 경제에 있어 LG경제연구원, 현대경제연구원에서조차도 정보를 참고한다는 건전재정포럼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박근혜 정부 지난 2년간 재정정책 평가 및 향후 대응방향에 대한 주제 회의 안건이었다. “나라 걱정하는 열정이 남들 못지 않잖아요. 새벽에 나와서 이러는데, 이게 무슨 대통령 앞에서 국무회의하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말하자면 국무회의 못지않게 진지하잖아요. 그런데 이분들이 무슨 내가 재정정책 만든다고 누가 물어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자진해서 걱정하는 이런 분들이 많거든요. 누가 귀담아 듣지도 않는데, 이걸 어떻게 제대로 전달할까, 말귀를 알아듣게 할까, 어떻게 보면 이런 분들이 많고, 어떻게 보면 이게 국가의 자원이고 힘이죠. 이런 분들이 있어서 이 사회가 지탱이 되는 거지요.” 한국 사회를 향한 거침없는 쓴소리를 모으니 ‘부족한 복지재원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라는 발제였다. 토론을 통해 박 대통령 공약 검증과 복지 어떤 모양으로 갈 것 인지, 법인세 ·부가가치세 ·소득세 등 증세를 어떻게 해야 하나를 짚어보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나라 걱정에 쓴소리 쏟아내는 건전재정포럼의 현장 이처럼 운영위원들의 의견을 아울러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를 고심하는 최 대표는 서울대를 나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1971년 행정고시에 합격하면서 공직에 발을 들인 그는 이후 경제기획원, 제1대 기획예산처 차관 등을 거치며 경제통으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국민의 정부에서 건설교통부 차관,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을 맡은 후 참여정부에서 초대 건설교통부 장관으로 지내면서 참여정부의 각종 부동산 정책을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이후 2008년에 치러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낙선한 그는 같은 해 저서 을 펴냈다. “평생 공직생활을 하다 보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 사회가 골고루 잘 살 수 있느냐’는 생각이 계속 있습니다. 그래서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가 골고루 잘 살 수 있는 시스템 개혁을 하는 데 일조를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공허한 것보다 구체적인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날 하는 총론이나 ‘막연히 열심히 일해라’라는 말이 아니라 열심히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정치가들은 말로만 대의를 찾는가? 최 대표는 우리 사회를 보면 시스템이나 현실과 안 맞는 것들이 많다고 지적했다. 사회를 향한 최 대표의 시선은 정치에 대한 관심을 지울 수 없게 만들었고, 수많은 문제점들을 발견하게 만들었다. “정치가들은 지역 균형도 말만 할 게 아니라, 중대선거구 같은 제도를 도입하면 지금보다는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요. 만날 지역균형 하자고 말로만 떠들지 말고, 구체적으로 제도를 개선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호남에서도 새누리당이 당선될 수 있고 대구에서도 민주당 국회의원이 나올 수 있고….” ‘국회의원들이 왜 자기 지역에 다리 놓는 문제에만 신경 쓰고 있을까’에 대해, 최 대표는 현재의 소선거구제도가 문제라고 설명했다. 만약에 전국 비례 대표로 한다면 우리 동네 다리 놓는 문제는 국회의원들이 안 할 거 아니냐는 반문이다. 정치가들이 말로는 대의를 생각한다고 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늘 어물쩍 비켜가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논리가 없는 현재의 교육감 제도, 고쳐야 한다 국민들이 골고루 인간답게 사는 길을 찾는 데 작은 힘이 되고 싶다는 그의 인생 후반부에서 불합리한 것들이 눈에 들어와 사회시스템 전반적인 공부를 하고 있다. 그중에 최 대표의 직설은 교육 부분도 건드리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교육자치와 지방자치를 엄격하게 분리해놨단 말이죠. 여기에도 상당히 많은 문제가 있어요. 지자체장은 무상급식에 대해 ‘내가 공약한 것도 아니고 내가 왜 돈을 대느냐’라며 관심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들여다보니까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같은 교육자치제도를 갖고 있는 나라는 거의 없어요.” 최 대표는 교육감이 정치적으로 무소속이라는 것이 논리가 없는 제도라고 질타했다. “교육감은 당적을 갖는 것이 안 좋다, 이거잖아요. 그런데 어느 나라고 교육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대통령 아니에요? 대통령은 정치인이죠. 그리고 교육부 장관은 현직 국회의원이잖아요. 교육감은 교육부에서 정한 것의 일부를 집행하는 입장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위에 있는 두 사람이 다 정치인이에요. 서울시 교육은 서울시 교육감이 다 하는 게 아니라 예산은 서울시 교육위원회, 조례는 서울시 의회 교육 분과에서 정해요. 다 정치인들로 구성됩니다. 아, 그럼 정책을 결정하는 이들이 온통 정치인인데, 정작 교육감은 당적이 있으면 안 된다니 이게 무슨 논리예요.” 예를 들어 현재 강원도는 교육감은 전교조 출신 야당 성향이고 도의회 교육위원들은 다 새누리당 계열이다. 교육감은 혼자 야권 출신인데, 대통령, 교육부 장관, 강원도의회, 전부 다 여권인 상황에서 어떻게 당해내느냐는 반문이다. 교육 시스템에 가장 밀접한 영향을 받는 학부모들조차도 자식들 교육은 중요하다면서 이러한 모순적인 교육감 시스템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상황에 분노한 최 대표는 그에 관한 칼럼을 쓰고 난생 처음으로 지난해 1월에 가두시위도 했었다. 시니어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사회를 바꾼다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한 의미있는 일을 찾아 거침없이 피력하던 최 대표는 그래도 세상이 좋은 방향으로 바뀌고 있는 부분을 높이 평가했다. “뭐 요란스럽게 신문, 언론에 안 나서 그렇지 요즘 제가 볼 때는 우리 사회와 나라를 걱정하고 봉사하는 게 과거에 비해 많아졌어요. 제가 여러 군데 참여도 해봤는데, 우리 건전재정포험, 또 시니어 어치브먼트(Senior Achievement : SA)라든지 제가 공동대표로 있는 선진사회만들기연대, 돌아가신 남덕우 총리, 지금은 이승윤 총리가 하시는 선진화포럼 등, 그런 곳들을 보면 오시는 분들이 다 옛날에 상당한 사회적 역할을 하던 분들이에요. 그런 분들이 뭘 바라고 아침부터 토론하고 그러겠어요. 우리 사회에 나름대로 기여하려는 의지가 참 많아요.” 최 대표는 건강한 시니어들이 과거에 비해서 많아졌고, 경제적으로도 능력 있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이뤄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파악했다. 요즘은 60대 전후로 은퇴해도 향후 20~30년은 더 사회적으로 활동하게 된 세상이다. 시니어의 힘이 강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 공익을 위해 애쓰는 대한민국 멘토가 많아지는 현상에 긍정적 의견이다. 의미 찾는 일에 미래를 만들며 살고 싶다 성공적인 포럼 운영과 인생 후반전을 드라이빙하고 있는 최 대표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최 대표는 생애설계를 하면서, 하고 싶었는데 아쉬운 일이 있었을까? “딱히 없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를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보람 있는 일을 해야겠다 싶어요. 옛날처럼 밤새워 일할 순 없지만 만날 놀 수도 없으니까. 그 의미 있는 일이라면, 역시 우리 국민들이 골고루 잘 살 수 있게 만드는 쪽에 내 경험이나 능력을 살려서 재능기부 비슷한 걸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 2015-04-21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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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즐겁다
- 그의 인생에 가장 의미 있는 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꼭 어느 한 권이 내 인생을 좌우할 만큼 의미가 깊다고 이야기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읽어온 어느 것 하나 나에게 의미가 없던 책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가 읽어온 수많은 책은 그의 삶 곳곳에서 한껏 발효되어 인생의 참맛을 더해주고 있었다. 박병원 회장은 평소 지인들에게 책을 선물하며 인생의 풍요로움을 나누고 있다. 재경부 국장 시절인 2003년부터 지금까지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한 책만 1만 여권.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많이 선물한 책은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의 이다. 우리를 가슴 뛰게 하는 책 재경부 차관, 청와대 경제수석, 전국은행연합회 회장을 임해온 그에게 경제 흐름이나 피케티 등에 대한 책 이야기를 기대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런 책들은 중년을 가슴 뛰게 만드는 책이 아니라 한다. 나이가 들었다고 심오한 책을 읽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가볍게 읽고 즐거운 여가를 꿈꾸게 하는 책이 더 유익하다는 것이다. “우리 중장년들은 그동안 열심히 일하고 경쟁하며 살아온 세대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다 성공하고,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아니죠. 그런 잣대에만 연연하면 삶이 불행하고, 인생을 즐기기 어려워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인생을 즐기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돈이나 일에 대한 책이 아니라 음악, 미술, 여행, 자연 등 실제 여가 생활을 즐기는 데 실용적인 책들이 필요하죠. 그런 책 중 하나가 바로 입니다. 주말이면 등산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데, 힘들게 산을 오르면서도 자신을 둘러싼 나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이는 드물죠. 등산로 주변에 있는 꽃, 나무들과 대화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남은 인생을 지냈을 때 엄청난 차이를 불러옵니다. 꽃과 나무를 모른다는 것은 이 세상을 반만 알고 가는 것과 마찬가지라 생각해요.” 자연의 민낯이 선사하는 값진 선물 그는 거대한 캘리포니아 분지를 가로질러 샌프란시스코 바다로 향하던 중 대자연이 선물한 기적과도 같은 풍경을 잊지 못한다. 붉게 물들어 가는 석양과 온 천지에 가득한 오렌지 꽃향기. 자연의 아름다움이 주는 그 거대한 울림을 온몸으로 만끽하기 위해 차 문을 박차고 나갔다. 정말로 행복했고, 감사한 일이었다. “치밀하게 계획을 짜서 간다 한들 그런 광경을 볼 수는 없을 거예요. 큰 행운이죠. 어쩌면 세상은 이러한 행운들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몰라요. 형편이 좋으면 알프스 고원지대 트레킹을 하면서 대자연을 즐길 수도 있겠지만, 국내에도 근사한 풍경은 얼마든지 있어요. 눈 내리는 겨울 바다가 돈을 달라고 하지 않잖아요. 우린 그저 감탄하고 즐거워하고 행복해할 줄 알면 되는 거예요.” 어느 분야의 책도 한 권만 봐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그는 테이블 위에 ‘전 세계 500대 드라이브 코스’, ‘죽기 전에 먹어봐야 할 500대 음식’,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성스러운 장소 500곳’ 등 백과사전처럼 묵직한 책들을 소개했다. “이런 책들을 읽으면 세상은 넓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아서 마음이 바빠져요. 다양한 책들을 읽고 얻은 지식을 잘 정리하면 ‘어디를 가면 어느 드라이브 코스를 타고 어떤 명소를 들러 무엇을 먹어야지’하면서 곳곳에 펼쳐진 즐거움을 일망타진할 수 있죠. 이 세상은 말이오. 아는 만큼 보이는 거랍니다. 가요만 아는 사람은 가요가 주는 즐거움만 알아요. 하지만 클래식과 국악을 아는 사람은 그만큼 삶의 즐거움이 배가 되죠. 아는 것이 많을수록 인생의 즐거움도 많아지고, 그만큼 행복의 범위도 점점 넓어져요.” 중년의 ‘로망’ 즐거운 인생의 시작 15년 전, 암스테르담 고흐 미술관에서 고흐의 그림을 본 그는 ‘죽기 전에 아몬드 나무는 꼭 보겠노라’고 결심했다. 하지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상에서 그런 낭만은 점점 잊혀가고 있었다.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고흐 전에서 그는 아몬드 나무를 다시 만났다. “그때 다시 아몬드 나무를 꼭 봐야겠다고 다짐했어요. 하루는 캘리포니아에서 농장을 소유하고 있는 친구가 아몬드농장을 샀다고 연락이 왔어요. 정말 뛸 듯이 기뻤죠.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부탁을 했어요. ‘아몬드 나무 꽃이 절정으로 피고 딱 하루가 지났다 싶을 때 나에게 전화를 달라’고요. 싱싱하게 막 피어오른 꽃을 보는 것도 좋지만, 꽃이 질 무렵의 낙화를 참 좋아해요. 연락을 받고 아몬드농장으로 가는데, 때마침 비가 오고 바람이 불더라고요. ‘이때다’싶었죠. 그렇게 15년 만에 아몬드 나무를, 그것도 비바람의 손길로 바닥에 아름답게 촘촘히 떨어진 아몬드 꽃을 보게 된 거예요. 그때의 벅찬 감동은 잊을 수 없어요.” 그는 무언가를 이뤄냈노라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스쳐 지나갔을 고흐의 그림을 보고 실제로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마음, 그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흔히 함박웃음, 함박눈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함박나무꽃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라요. 함박나무꽃은 말이죠. 내가 볼 때 이 세상 꽃 중에 가장 예쁜 꽃이에요. 아주 소담스럽고 하얀 꽃이 피는데, 그 꽃송이 안을 보면 ‘신이라는 존재가 있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워요.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도 함박꽃을 한 번 봐야지’라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즐거운 인생의 시작이죠.”
- 2015-03-05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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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 맛집] 시(詩), 그림(畵) 그리고 이야기(談) ‘시·화·담’
- 전통 한정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시ㆍ화ㆍ담의 메뉴들은 마치 한 편의 시처럼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유명 도예가의 작품에 담긴 음식은 식용 꽃과 야생화로 장식되어 오감을 자극하고, 계절마다 제철 최상의 식재료로 차려진 자연음식은 사계절의 정취를 만끽하기에 충분하다. 갤러리를 연상시키는 세련된 건물 외관과 갤러리를 옮겨놓은 듯한 품격 있는 인테리어는 격조 있는 음식 문화를 즐기는 이들에게 안성맞춤이다. 한 점의 예술 작품을 보고, 읽고, 맛보다 “내 생애 최고의 만찬이다.”, “음식이 아니라 예술 작품을 보는 듯하다.” 시·화·담을 다녀간 국빈급 외국인, 정·재계 인사 등 VIP 고객들의 찬사다.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 기념 국빈 만찬을 담당했던 시ㆍ화ㆍ담은 청와대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만찬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국내 레스토랑 최초 세계 최고급 럭셔리 호텔·레스토랑 연합 릴레샤또(Relais&Chateaux)의 멤버이기도 하다. 시·화·담은 럭셔리 콘셉트의 파인다이닝 이태원점과 레스토랑 인사동점이 있다. 이태원점은 모두 예약제로, 특별한 혜택과 예우를 받을 수 있는 멤버십 제도를 운영한다. 점심 메뉴인 ‘한 줄의 시(11만원)’을 비롯해 ‘그림 한 폭(16만 5000원)’ ‘즐거운 이야기(27만 5000원)’ ‘미식가들의 만찬(38만 5000원)’ 등 10~18개의 메뉴로 구성된 코스 요리를 선택할 수 있다. 모든 음식은 조선시대 골동사발을 비롯해 유명 도예가들의 최고급 작품에 담긴다. 건강 주전부리 메뉴는 도자기 위에 슈거파우더 아트로 원하는 사진이나 글을 표현해주는 독특한 서비스가 함께 제공된다. 라운지에서는 Hans J. Wegner의 미들센츄리 오리지널 작품 가구들과 로비엔 이인진, 이헌정, 한애규 등 현대 도예작가들의 설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찾아가는 길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경리단길 방향으로 100m지나 알제리대사관 옆에 위치해 있다. 내비게이션으로는 ‘알제리대사관’, ‘필리핀대사관’ 또는 ‘이태원동 5-5’로 입력하면 편리하다. 시·화·담 이태원점은 예약제로만 운영되며 전화 또는 인터넷으로 신청이 가능하다.
- 2015-03-05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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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이래 최대 규모 용산역세권사업이 재개된다면…
- 새누리당이 서울시장 후보로 정몽준 의원을 선출하면서 지난해 좌초된 용산역세권 사업(용산국제업무지구 사업)이 다시 부동산 시장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이 사업은 코레일과 사업시행자인 드림허브프로젝트금융투자회사(PFV) 사이의 갈등이 커지며 사업발표 7년여만인 지난해 1조5600억원의 손실을 남기고 좌초됐다. 용산역세권 사업은 용산철도정비창과 서부이촌동 일대를 개발해 업무·상업·주거시설 등을 조성하는 것으로 전체 사업규모가 30조원에 달해 단군 이래 최대 개발사업으로 불렸다. 이런 와중에 정몽준 의원이 다시 선거 공약으로 용산역세권 사업 카드를 꺼내들면서 회생 가능성에 부동산 시장 시선이 쏠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여전하다. 일단 박원순 현 서울시장은 용산개발에 부정적인 입장이다. 박 시장은 최근 라디오 인터뷰에서 "7년 동안 악몽 속에 살았던 용산 주민들이 다시 고통이 반복되는 걸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서부이촌동은 맞춤형으로 개발하겠다"라고 강조했다. 박 시장이 재선한다면 사업 재개 가능성의 거의 제로가 가깝다는 의미다. 특히 사업지 땅 주인인 코레일을 지시ㆍ감독하는 국토교통부가 시큰둥한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공공(코레일)과 민간(롯데관광개발 등) 사업자간 갈등으로 이미 코레일이 토지 회수에 나서는 등 사업 전면 백지화 수순을 밟고 있는 만큼 다시 재추진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다. 더욱이 7년간 사업이 지지부진하면서 사업자간 갈등의 골이 깊어져 현 상태로는 본궤도에 오를 가능성이 거의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실제로 사업자간 용산 사업을 둘러싼 관련 소송이 최소 4∼5년 이상은 걸릴 것으로 예측되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서부이촌동 주민들도 재산권 피해 등을 이유로 소송전에 가세할 것으로 보인다. 익명을 요구한 부동산 한 전문가는 "용산 개발은 코레일, 민간업체, 외국자본 등이 모두 결합된 대형 프로젝트"라며 "어느 후보가 시장이 되느냐에 따라 용산 개발에 대한 희망은 심어줄 수 있겠지만 사업 추진 자체가 쉽게 흘러가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수십조원이 이르는 사업인 만큼 청와대 등 정부의 입장이 명확해지지 않으면 이사업을 다시 재개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라며 "(시장선거 변수에 따라)앞으로 회생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이 커질수도 있으나, 정부를 비롯해 서울시, 공공, 민간, 지역주민 등 이해 당사자간의 대타협이 나오지 않은 한 실질적인 사업 재개가 어려울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 2014-05-14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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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고] 장병선씨 별세 - 박상훈씨 모친상
- ▲장병선씨 별세, 박상훈(아시아화이버 부장)ㆍ진아ㆍ수현씨 모친상, 허승재(청와대 행정관)ㆍ강동성(미국 거주)씨 장모상=13일 오전 삼성서울병원, 발인 15일 오전, 02-3410-6901
- 2014-05-14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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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의도 14배 군 유휴지 매각…일부 예산 국방부로 사용
- 정부가 서울 여의도 면적(290만㎡)의 14배에 달하는 군 소유 유휴지를 민간에 팔기로 했다. 매각 자금 일부는 첨단 무기 구입 등으로 점점 늘어나는 국방비 마련에 사용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2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 이런 내용의 ‘2014~2018년 국가재정운용전략’을 논의했다. 이날 정부는 국정과제, 경제 혁신 3개년 계획 등을 시행할 실탄이 부족한 상황에서 최대한 허리띠를 졸라매고 민간 투자를 이끌어내는 데 초점을 맞춘 16개 재정 개혁 추진 과제를 설정했다. 박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경우 국방부가 재정 개혁을 통해 절감한 금액만큼 재무부가 예산을 추가 지원하는 매칭 펀드 방식을 통해 국방 효율화와 방위력 개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고 한다”면서 “우리도 이런 방식의 도입을 검토할 필요가 있겠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우선 국방비에 쓰기 위해 현재 군사시설 지역으로 묶여 있는 군 유휴지 3988만㎡ 중 일부의 용도를 변경해 민간에 매각하기로 했다. 땅값이 비싼 알짜 부지인 도심지 주변 유휴지는 2017년까지 모두 매각하고 사유지 주변의 자투리 부지는 인근 땅 주인에게 우선적으로 팔아 개발, 투자를 활성화하기로 했다. 아울러 산업단지에 대한 용도 규제를 풀어 기업 투자를 유도하기로 했다. 현재 산업단지 안에는 마트, 문화·체육·교육·복지 시설 등이 공장과 함께 들어설 수 없는데 앞으로 공장과 각종 편의 시설이 같이 입주할 수 있는 새로운 ‘복합용도구역’을 만들기로 했다. 4대강 사업 등으로 많은 예산이 투입됐던 사회간접자본(SOC) 분야의 경우 꼭 필요한 공사는 시행하되 예산을 줄이기로 했다. 교통이 혼잡한 2차선 도로를 4차선으로 확장하는 대신 가변식 3차선 도로로 넓히는 방안이 대표적이다. 복지 분야는 여러 부처에서 따로 시행하는 유사·중복 사업을 통폐합하고 보완이 가능한 사업은 연계하기로 했다. 초등돌봄교실(오후 5시 종료)은 교육부, 지역아동센터(최대 밤 10시)는 보건복지부, 방과 후 아카데미는 여성가족부 등으로 나뉘어 있는 아이 돌봄 서비스를 연계해 맞벌이 부부 등이 최대 밤 10시까지 아이 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하기로 했다. 정부는 2017년까지 국가채무를 국내총생산(GDP)의 35% 미만으로 관리하고 당초 계획대로 임기 내에 재정수지 균형을 달성하기로 했다. 올해부터 예산을 편성할 때 각 부처가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려면 기존 사업을 줄이거나 재원 조달 방안을 마련하도록 하는 페이고 원칙도 적용한다.
- 2014-05-02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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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부터 자연취락지구에 요양병원 허용
- 10월부터 주로 농어촌에 지정되는 자연취락지구에도 요양병원이 들어설 수 있게 된다. 국토교통부는 16일 청와대의 '규제개혁 신문고'를 통해 제기된 건의사항들을 검토한 결과 이 같은 내용을 포함한 일부 건의를 수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국토부에 따르면 규제개혁 신문고에는 요양병원을 개설하려고 건물을 건축했는데 자연취락지구로 지정돼 개설이 가로막혔으니 이를 완화해달라는 건의가 올라왔다. 자연취락지구는 대부분 농어촌 지역에 주민의 집단적 생활근거지 등으로 이용되는 취락(마을)을 정비하기 위해 지정하는 지구다. 현재 병원이나 치과, 한방병원, 종합병원 등 병원급 의료기관 중 유일하게 요양병원만 자연취락지구 내 들어설 수 없도록 돼 있다. 국토부는 이에 따라 10월까지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 시행령을 개정해 지방자치단체가 조례로 정해 자연취락지구에 요양병원도 입지할 수 있도록 하기로 했다. 요양병원은 노인성질환자나 만성질환자, 수술 후 회복 중인 사람 등이 입원하는 병원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자연취락지구에 요양병원의 입지를 허용하면 농어촌 지역 주민들의 의료복지가 향상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토부는 또 8월까지 주택공급에 관한 규칙도 개정해 장애인이나 65세 이상 노인을 가족으로 둔 아파트 청약 당첨자가 희망할 경우 아파트 1층을 우선 배정해주기로 했다. 지금은 당첨자 본인이 장애인이나 노인이어야만 1층을 우선 배정해줬는데 그 가족으로까지 확대하기로 한 것이다.
- 2014-04-16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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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계청, 국민행복 83개 지표 6월에 공표한다
- 국민 개개인이 얼마나 행복한지 측정할 수 있는새로운 지표가 오는 6월 공개된다. 30일 통계청이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정의당 박원석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통계청은 국민행복지수 생산에 필요한 83개 지표 값을 온라인에 공개할 예정이다. 다만, 소비자물가지수(CPI)처럼 통계청이 개별 지표를 조합한 종합지수(composite index) 형태로는 발표하지 않는다. 사용자가 직접 지표에 가중치를 부여해 통계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지표는 총 12개 영역의 83종으로 구성된다. 물질 영역에선 소득·소비, 고용·임금, 복지, 주거 등이 포함된다. 비(非) 물질적 영역에는 주관적 웰빙, 건강, 가족·공동체, 문화·여가, 시민참여, 안전, 환경 등이 들어간다. 83종 가운데 재정취약가구, 근로시간, 저임금근로자비율, 개인부담 의료비 비중, 연소득 대비 주택가격비율, 암 생존율, 소득계층별 의료 미충족률, 대졸 취업률, 문화여가 지출 비율, 하수도 보급률의 지역별 격차 등 10개는 이번에 통계청이 새롭게 생산하는 항목이다. 이번 발표는 통계청은 지난해 4월 청와대 업무보고에서 ‘국민행복지수’를 개발하겠다고 밝힌 것에서 대폭 후퇴한 것이다. 이는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박근혜정부의 슬로건인 ‘국민행복’을 의식한 코드 맞추기라는 비판이 쏟아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실제 박근혜 대통령의 싱크탱크로 알려진 국가미래연구원(미래연)이 지난해 9월자체적으로 산출한 국민행복지수는 야권을 중심으로 많은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당시 미래연은 국민행복지수가 노무현정부(2003년 2분기∼2008년 1분기·평균 104.94) 때보다 이명박정부(2008년 2분기∼2013년 1분기·평균 107.68) 때 더 높았고,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한 지난해 1분기는 113.03으로 최고치였다고 밝혔다. 전문가들도 지난해 12월 통계청이 주최한 ‘국민 삶의 질 측정의 현황과 추진방향’ 토론회에서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우려를 표시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수가 나빠도 문제, 좋아도 문제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남상호 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통계청의 시안에 주관적 지표가너무 많아 결과가 불안정(non-stable)해질 수 있다”고 평가했다. 통계청은 국민행복지수 대신 삶의 질 지표만 공개하기로 한 결정이 국제적 추세를 따른 것이라고 설명한다. 통계청 관계자는 “삶의 질 지표를 개발하는 스티글리츠 위원회는 사용자의 철학적 관점에 따라 다양한 측정을 할 수 있도록 데이터를 제공하라고 권고한다”면서 “다른 나라에서도 국가 통계청이 행복종합지수를 만드는 경우는 없다”고 말했다. 통계청은 83종 지표 중 3회 이상 측정값이 존재하는 기대수명, 지니계수, 평균 여가시간 등 66종부터 온라인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다. 2013년 처음 생산된 지역사회 소속감, 정치관심, 시민적 덕목 등 7종과 새로 개발하는 10종은 차차 공개할 계획이다.
- 2014-03-31 16: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