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52년 경남 합천군 초계면의 한 시골 마을 방앗간 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아들만 여섯인 아들 부자 집이다. 원래 어머니는 아들만 일곱을 나으셨는데 첫 째는 돌도 못 넘기고 잃었다고 한다. 그 후 집안의 귀한 첫 아들로 태어난 나는 태어난 후 사흘 동안 눈을 뜨지 않아 부모님의 애를 태웠고, 어릴 때 비행기만 떠도 놀라서 경기가 드는 아이였다고 한다.
우리형제들은 모두 호적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일 년 씩 어리게 되어있다. 돌까지 살아남으면 호적에 올려주었다. 아마 첫째를 돌전에 잃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 덕분에 나는 퇴직 시 명퇴금을 1년 치나 더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고향 마을에서 한집 사이를 두고 결혼을 하셨는데 그 중간 집에 사시는 분이 중매를 하셨다고 한다. 우리 부모님은 동네에서 잉꼬부부로 소문난 금슬이 좋으신 분이셨다. 아버님은 엄격하시고 강직한 분이셨다. 반면 어머님은 따뜻하고 정이 많으신 분이셨다. 아들들을 한없이 칭찬하고 격려하시고 보듬어 주신분이다. 우리 형제들은 우리집안의 유일한 여자 분인 어머님을 무척 좋아했다. 지금도 우리 형제들은 돌아가신 지가 15년이 지났지만 모이면 어머니 애기를 자주하고 다섯째는 대기업의 임원이지만 술 한 잔 되면 보고 싶다고 울곤 한다.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은 지극하셨다. 손자들이 많았기에 우리는 돌만 지나면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잤다. 할아버지는 손자들 이불을 덮어주시고 음식도 챙겨주셨다. 손자들에 대한 자랑과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친구 분들이 오실 때면 언제나 불러 인사를 시키셨다. 우리형제들은 그 당시 초등학교에서 형제들 모두가 급장을 다 하던 때라 자랑이 대단하셨다. 내가 나중에 취직이 되어 첫 월급을 새 돈으로 할아버지께 용돈을 드렸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그 돈을 보관하고 계셨던 분이다.
우리 할머니는 연약하신 분이지만 우리 형제들은 모두 할머니 등에 업혀 자랐다. 낳아주신 분은 어머니이고 키워주신 분은 할머니이다. 할머니 등은 손자들의 코 때가 지워지는 날이 없었다. 서울에서 방학 때 내려가면 맨발로 뛰어 나오시던 분이다. 나는 첫 손자로서 조부모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고 자랐다.
우리 집의 가훈은 우애(友愛)이다. 할아버지는 손자들에게 어릴 때 귀가 닿도록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셨다. ‘조선팔도 다 다녀도 형제같이 화합할까’ 할아버지께서 항상 우리에게 하시던 말씀이다. 우리 형제들은 이 말씀을 어머님 돌아가신 15주기 때 고향 우리 집 정원에 비석으로 새겼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모범생 이었다. 한 학년에 두 반인 작은 시골 학교였지만 나는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6년간 급장을 했고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부모님도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소먹이기, 풀베기, 나무하기 등 집안일도 잘 도와드렸고 어머니가 가지 오이 등을 장에 갖다 팔아야 할 때는 리어카에 실어다 드리는 착한 아들이었다.
나는 1968년 무장공비 김신조가 청와대 담을 넘어 공격하던 해 서울 경기상업고등학교로 유학을 왔다. 경기상고는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하지만 우수한 아이들이 많았다. 청운중학교와 같은 교정이어서 청운 중학교 출신도 많았다. 고향 초계중학교에서는 서울로 두 명이 유학을 왔는데, 친구는 배제고등학교를 가고 난 경기상고에 입학했다. 친구는 고모 집에서 다니고 나는 삼촌 집에서 다녔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나는 은행원이 되었고 친구는 고대의대를 나와 강릉의 유명한 외과의사가 되었다.
경기상고는 일제 강점기에는 경기도립상업고등학교로 도상이라 불렸던 학교로 일제 때부터 훌륭한 선배들이 많았다. 당시 정·재계에는 태완선 총리, 김종희 한국화약 회장님 등을 비롯한 분들이 포진해계셨고 특히 금융권에는 임원들이 많았다.
내가 경기상고를 선택한 것도 유연이다. 아버지와 서울에 올라와 어떤 학교를 가야할지 고심할 때 삼촌 이웃에 양정고등학교 선생님으로 퇴직한 분이 계셨는데, 이분이 도상을 추천해주셨다. 아버님은 대구상고를 나와 제일은행에 취직한 고향의 내 친구 형으로부터 ‘은행에 취직을 하니 당장 선생님의 월급보다 많더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아들을 은행에 취직시키고 싶어 하셨다. 양정고 퇴직 선생님은 상고 중에는 도상이 최고라며 당장 도상을 추천해 연희동에서 청운동까지 버스를 갈아타면서 먼 길을 삼년을 다녔다.
상고에서 은행에 취직하는 것은 인문계학교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과 같았다. 매년 어느 은행에 몇 명이 합격했는지 통계를 내고 홍보하던 때였다. 우리학교는 한 학년이 7개 반으로 6개 반이 취직반이고 마지막 7반이 진학 반이었다. 취업반은 은행 취직을 위한 전략을 세워 공부했다.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은 한국은행, 산업은행, 외환은행 순으로 가고 다음 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은행 등을 갔다. 나는 신설된 한국신탁은행을 지원 했다. 신설된 은행이 향후 전망이 나을 거라고 선생님이 추천해 주셨다. 그해 경쟁률이 높아 우리학교에서는 나를 포함해 두 명 만이 합격했다. 대졸 중견 30명, 상고 졸 초급 60명을 모집했는데, 대졸 중견은 서울 대 출신이 반이 넘고, 나머지는 연대, 고대 등 대부분 명문대 출신이 전부였다. 71년 당시는 지금처럼 삼성, 현대, 엘지 같은 대기업이 성장하기 이전 이어서 공무원, 한전, 은행 등으로 인재들이 몰리던 시기였다.
그 당시 은행의 대우는 좋았다. 복지제도가 좋고 각종 수당이 수시로 나왔다. 그러나 입행을 하고나니 아무래도 대학을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야간 학부에 시험을 봐 합격했다. 그러나 말단 직원이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는 것이 어려워 포기하고 다시 이듬해 야간 전문대학인 서대문에 위치한 국제대학을 지원 해 입학했다. 이 학교는 야간만 있는 대학으로 저녁 6시에 수업을 시작해 그 당시 인기가 있었다. 나는 경영학과에 입학했는데 정원이 30명으로 우수한 인재가 많았다. 한국은행, 산업은행 등 상고출신이 많았다. 적은 인원의 대학이지만 그 당시 매년 사법, 행정고시, 공인 회계사 등의 합격자들을 배출했던 시기이다. 내 친구도 산업은행에 다니면서 공인회계사 전국 수석 합격했다.
그때는 그야 말로 주경야독을 했던 시기이다. 은행의 업무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동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만 했다. 상사들의 눈치도 봐야 했다. 저녁은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라면으로 때우기가 일수였다. 4년을 그렇게 생활하니 위장병이 생길 것 같았다. 토요일도 근무하던 때라 일요일은 도서관에서 공부해야했다. 그래서 나의 이 시기는 다른 애들처럼 취미생활을 하거나 연애를 할 틈이 없었다.
그 당시 나에게는 큰 짐이 있었다. 둘째 동생이 서울로 올라와 중대 앞에서 자취를 하면서 같이 공부했다. 얼마 후에는 막내를 제외한 세 명의 동생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와 동생들과 힘든 시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학비와 쌀을 올려 보내주시지만 아들들이 공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기에 나는 힘을 보텔 수밖에 없었다. 나는 75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12월에 군에 입대를 했다. 나 혼자 만의 일이라면 대학 2학년 정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오는 것이 좋겠지만 동생들을 남겨놓고 입대할 수가 없어 4학년을 마치고 친구들이 다 제대를 할 즈음 입대를 해야만 했다. 내가 입대를 해도 은행은 본봉의 월급이 나오는 때라 그 돈으로 동생들은 학교를 다녔다. 지금도 이야기 한다. 동생들이 형의 월급을 받으려 은행에 갔던 시절을…
둘째 동생은 중앙대 법대에 나왔다. 졸업 후 삼성생명에 입사해 항상 전국에서 일등의 업적을 내는 유능한 직원이 되었다. 신한생명 초기에 스카우트되어 신한그룹 최연소 임원이 되어 부사장 까지 승진해 8년이나 임원생활을 하고 지금도 퇴직해서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 때 동양중학교 학생으로 다니던 다섯째 동생은 한양대 경영학과를 나와 지금은 롯데 칠성의 임원으로 재직 중이다. 필리핀 펩시콜라 사장을 5년 동안 역임했고 우리 동생 중 아직도 떠오르는 별이다. 나머지 두 동생도 대구에서 사업을 잘하고 있다. 힘든 시기를 넘겨 좋은 결과가 있어 보람은 있는 일이었다.
79년 제대를 앞두고 아버지의 권유로 첫선을 보았다. 휴가 중 서울의 작은 다방에서 맞선을 보았는데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결혼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평생의 배필을 선택 했는지 신기하다. 서로의 가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부모님께서 미리 선을 봐 합격점을 준 상태라 하지만 개인적으로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내는 면장님의 둘째 딸이라 자라면서 큰 힘든 일은 해본 적 없이 곱게 자란 규수였다. 그 당시 나는 장남으로서 결혼 후에도 동생들을 데리고 있어야 할 형편이어서 아내를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대학에서 나를 따르는 여자도 있었고, 은행에서 자취집에까지 찾아온 여자도 있었지만 결혼을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다.
79년 6월 제대를 하고 11월에 결혼을 했다. 아버지는 내가 장남이라 전통혼례식을 올리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신부 집에서 아내는 족두리를 쓰고, 난 사모관대를 쓰고 혼례를 올렸다. 동네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멍석을 펴놓고 상위에는 살아있는 닭이 퍼덕 거렸다. 첫날밤은 신부 집에서 보내기로 하는데, 그 날 밤 신랑을 짓궂게 장난을 거는 사람 들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어 나와 아내는 저녁에 해인사로 피신하는 신혼여행을 떠났다. 밤중에 택시를 타고 해인사로 향하던 신혼 여행길에 노루가 튀어 나와 놀라던 추억이 새롭다.
내가 아내를 단한번의 선을 보고 선택한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내 일생의 가장 잘 한 선택이었다. 아내는 검소하고 강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지금 형제들이 성공하여 화목하게 잘 지내는 것은 대부분 아내의 공로인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후회스런 일을 꼽으라면 신혼초기 아내가 힘들 때 너무 도와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동생들 뒷바라지에 아이들 키우기 힘들 때 연탄불 한번 갈아준 적이 없고, 아이들 한번 제대로 봐준 적이 없다. 아내는 밤중에 아이가 깨어 울면 남편 잠 못 자 직장생활에 지장을 줄 까봐 아이를 다른 방으로 대려나가 밤새 혼자 방을 새우곤 했다. 아내는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고 오직 나를 위해 정성을 쏟은 그런 여자였다. 그 당시에는 왜 그리 철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은행에 입행해 퇴직을 하기까지 만 38년을 다녔다. 지나고 보니 나는 직장 운은 좋았고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은행이란 직장은 안정되고 복지가 훌륭하고 좋은 직장이었다. 아이들 대학까지 등록금을 주고 집을 마련하도록 사원주택 아파트를 주고, 월급날 하루도 늦은 적이 없고 지점장 시절 억대가 넘는 연봉에 퇴직금도 적지 않은 직장이다. 재직 시에도 지점장 명함이면 누구나 신뢰하고 인정을 해주는 곳이다.
나는 초년 시절부터 성실했고 열심히 노력했다. 언제나 상사의 인정을 받았고 지점에서 언제나 대부계 같은 요직을 담당했다. 자기계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주경야독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88년에는 해외 OJT연수를 미국 시애틀 은행으로 다녀왔다. 그 후 은행의 중요 부서인 종합기획부에 과장으로 근무하고, 카드 사업부, 개인금융부 등에서 차장으로 근무했다. 1998년 지점장으로 나갈 때 까지 황금기의 시절을 보냈다.
카드사업부에 근무할 때는 해외여행의 기회가 많았다. 일본 JCB카드사, 미국 비자사, 마스터 카드사, 유럽 유로페이 등 카드사를 매년 연수를 다니면서 여행할 수 있었다. 특히 시애틀 연수 후 미주, 유럽, 하와이, 동남아, 핀란드, 스페인, 지중해 해협 등 유럽 전역을 장기간 여행한 경험은 좋은 기회였다.
은행 승진도 남보다 늦지 않게 진급했다. 지점장 진급은 아이러니컬하게도 IMF 덕분에 빨랐다. 선배들이 명퇴를 하고 서울은행, 제일은 행이 매스컴에서 회자될 때 오히려 해택을 보았던 셈이다. 하나은행과의 합병 시에도 많은 직원이 퇴직을 했지만 그때도 살아남아 십년이 넘도록 지점장 생활을 하고 임금피크제 까지 일 년을 하고 퇴직할 수 있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은행원의 천수를 다한 셈이다.
지점장 생활은 10년 동안 시흥남, 관양동, 수원, 서빙고, 부천, 성남 등 6개 점포를 거쳤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점포는 처음으로 부임한 석수역 앞에 위치한 시흥남지점 이다. 첫 지점장 발령을 받고 휴일 혼자 점포를 찾아가 어떤 전략을 구사할 것인가 많이 고심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내는 많은 걱정을 했다. 사교성도 없는 고지식한 사람이 점포영업을 잘 할 수 있을 까 걱정을 많이 해, 지점장으로 승진을 했는데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은 듯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지점 실적이 부진하여 평가에 하위 성적을 받으면 명퇴의 우선대상자가 되어 퇴사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예상외로 난 지점장으로서의 점포경영을 십년이상 훌륭히 잘 수행했다. 내가 부임한 점포는 전임 점포장이 실적 부진으로 불명예 퇴진한 곳이 많았지만 나는 훌륭히 점포를 잘 부활시켰다. 나는 점포 경영의 핵심은 직원들의 관리와 경영 전략에 있다고 믿는다. 점포장의 철학과 의사결정이 중요하다. 그 핵심은 사람의 관리에 있다고 확신한다.
2009년 1월 은행을 퇴직했다. 재직 시에 시간이 없어 못했던 골프를 학교친구들이나 동생들과 같이할 수 있어 좋았다. 5월에는 홀인원을 하는 행운도 누렸다.
양재천과 대공원을 몇 년을 걸으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퇴직 1년 전에 과천어울림 남성합창단에 입단했다. 매주 화요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연습해서 매년 연말에 시민회관에서 정기공연을 한다. 벌써 정기 공연을 일곱 번을 넘겼다. 7년이 지난 셈이다. 단원이 30명이 넘어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친구를 많이 알게 되었다. 플루트는 퇴직 후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아들결혼식 때 연주하고 퇴직직원 모임 등에서도 연주했다. 지금은 동호회를 만들어 매주 목요일 부림동 문회센터에서 연습하고 레슨도 받는다.
퇴직 후 5년을 쉬고 나니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2014년 새로운 준비를 해보기로 결심을 했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유통관리사를 3개월 동안 과천도서관에 다니면서 공부해 합격을 했다. 그리고 경영지도사 공부를 시작해 지난해 1차 시험에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준비 중이다. 그리고 이듬해 3월 호서대글로벌창업대학원에 입학해 이제 졸업을 위해 논문 준비 중이다
2014년에는 건국대학교 미래지식교육원에서 시니어플래너 과정을 공부하고 같이 공부한 동료들 5명이 KSP교육협동조합을 만들고 나는 이사장직을 맡았다.
다음해는 도심권이모작센터의 열린강사에 선정되어 평생 처음 강사로서 강의를 3차례 해보았다.
2015년에는 KDB 시니어브리지 아카데미 과정을 공부하고 시니어블로거협회에 참여하게 되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머니투데이 방송에 시니어 악기배우기라는 주제로 방송에도 출연했다. KBS 시니어토크쇼 ‘황금연못’의 패널로도 출연하고 한겨레신문 시니어통신에 기고도 했다. 2016년 3월에는 공무원연금공단 미래설계교육 여가 주거부문 강사로 선정되었다. 매달 2회 제주, 설악산, 수안보, 천안 등에서 퇴직을 앞둔 공무원들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대학원 동문들과는 석사 박사과정을 마친 24명의 동문들이 참여해 컨설팅프렌즈라는 컨설팅회사를 창업했다. 졸업을 하면 이 멤버들과 할 일이 많아질 것 같다.
퇴직 후 만 7년의 세월이 지났다.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의 속도는 더 빨라지는 것 같다. 내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조금은 알 것 같고, 인생이란 직접 경험해보아야만 알게 되는 것이 많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지금부터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가치 있는 일들을 하고 싶다. 아내와 내가 건강하고 아들과 딸은 독립하여 제 몫을 잘하고 있다. 손녀의 재롱이 귀엽고 한 때 어려웠던 시절을 보냈던 동생들과 할아버지의 가훈처럼 화목하게 지낸다. 이러한 가족 간의 사랑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주변의 사람들도 돌아보고 작은 재능이지만 나누는 삶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 믿는다.
이태문 일본 통신원 gounsege@gmail.com
◇ 몸에게 묻는 것이 건강관리의 기본
마에다 비바리(前田美波里·영화배우, 1948년 가나가와 현 출생)
더위를 모르고 여름을 무척 좋아하는 마에다 비바리는 이전 주목받았던 화장품 광고 이래 5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젊고 탄력 있는 몸매와 촉촉한 피부를 유지하고 있다.
“언제 어떤 역할이 올지 모르기 때문에 어떤 동작도 소화할 수 있도록 늘 몸을 다듬어 놓는데, 피아노의 조율과 마찬가지이다. 여배우로서 건강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여진다는 걸 항상 의식해 몸 만들기에 신경을 써 왔다. 무대에서는 모든 각도에서 사람들이 보기 때문에 어디서 보더라도 좋게끔 해 두고 싶다. 나아가 반듯한 몸에는 제대로 된 정신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몸을 만들고 있는데, 특별한 것은 하고 있지 않다. 해야 할 것만 하고 있을 뿐이다.”
특별한 것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매일 습관처럼 하는 노력은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 이상 정성을 기울인다고 하겠다.
“아침에 눈 뜨면 먼저 전신 ‘임파(淋巴) 체조’를 10분, 그 뒤로 온천물을 데워 한 잔 마시는 게 일과이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신문을 읽고, 아침을 먹는다. 주로 채소 샐러드에 빵과 삶은 달걀 한 개. 그리고 머그컵에 커피를 붓고 코코넛 오일을 우유를 넣어 카페오레로 마신다. 달달한 과자를 군것질로 곁들여. 몸을 깨우는 데는 아침 식사가 중요하다.”
비 바리는 작년 가을 비 오는 날 비탈길에서 미끄러져 어깨를 골절했다. 그때 뼈가 붙자마자 재개한 ‘에고스큐(egoscue) 체조’가 빠른 회복에 크게 도움이 됐다.
“시작한 지 4년 반쯤 되는데, 아침 식사 후 30~40분 에고스큐 체조를 반드시 한다. 근육을 자극하고 단련해 똑바로 움직이고, 몸의 비틀림을 바로잡는 운동이다. 몇 년 전부터는 되도록 차를 이용하지 않고 걷는 생활을 하고 있으며, 1주일에 한 번 수중에어로빅도 하는데 물의 저항이 몸에 좋다. 내부근육도 단련되고, 달랑거리는 팔의 살도 금방 없어지고…”
울퉁불퉁 근육질의 여성스럽지 않은 몸은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기계를 이용한 트레이닝은 하지 않는다. 어떤 운동이 몸의 어느 부분에 효과가 있고, 어떤 결과를 가져다 주는지 이미 파악하고 있다.
“오랫동안 여러 가지 운동을 하면서 연구해 왔는데, 이게 나의 재산이다. 허리가 아프다는 연기자나 스태프가 있으면 내가 가르쳐 주고, 나 자신도 한 달에 한번 에고스큐 선생님과 상의해 새로운 메뉴를 지도 받는다.”
운동 이외에 아름다움과 건강 유지에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건강보조 식품과 효소, 온천물 등을 함께 일하는 동료 배우와 친구들이 추천한 게 많은데, 괜찮다고 생각 들면 먹어 보고 자신에게 맞으면 받아들여왔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라는 것은 없다. 수십 년 계속 먹어온 건강보조 식품도 무대 공연으로 피곤할 때는 좀 많이 먹는다든지 그날그날의 몸 상태에 맞게 양을 조절한다. 그렇다고 건강보조 식품에 의지하는 삶은 싫다. 자신의 건강은 자신이 지키는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손발이 찬 체질이라 몸이 차가워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는데, 에어컨은 되도록 쓰지 않고 여름에도 샤워만 하는 게 아니라 탕에 들어가 여유 있게 기분전환을 한다.”
욕탕에는 수소 거품이 발생하는 걸 넣어서 수소를 흡입하고, 수소수 물로 머리를 감고, 목욕탕에서 나와서는 바디오일을 바르고 침실은 향수를 뿌리기도 한다. 바닐라, 망고 등을 좋아하는데, 맘이 차분히 가라앉고 잠도 잘 온다.
“자기 몸에 물어보고, 좋다고 생각하는 걸 계속 해 가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본다.”
◇ 어떤 명의도, 명약도 수면 부족에는 진다
유카와 레이코 (湯川れい子·음악평론가·작사가, 1936년 도쿄 출생)
지난 1월 80번째 생일을 맞이한 유카와 레이코는 지금도 아티스트 취재로 국내외를 돌고 있으며, 집필활동 외에도 합창단의 멤버로서 노래하는 등 “지금이 내 인생 중 가장 바쁠지도 모르겠다”며 팔순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바른 자세와 환한 웃음을 잃지 않는다.
음악가를 양성하는 ‘스쿨 오브 뮤직 전문학교’의 명예 교장이기도 한 그녀는 삿포로, 센다이, 도쿄, 나고야, 오사카, 후쿠오카에 있는 학교를 돌며 졸업식과 입학식에 6번 참석해 인사를 했다.
“연설은 내가 1년간 일을 제대로 했는지 안 했는지를 실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살아 있는 음악정보를 말하는 거야말로 젊은 학생들의 마음에 스며들지, 과거의 추억담을 얘기하면 전혀 울림이 없다. 그래서 내년에도 학생들 마음에 와 닿는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올 한 해도 더욱 열심히 해야지 하고 생각한다.”
올해 아티스트 취재로 호주와 영국에도 갔다 왔으며, 개인적으로는 한 달에 한 번 4인조 코러스 그룹 ‘스완시스터즈’의 연습에 본인이 단장을 맡고 있는 가스펠 그룹 ‘도쿄여자합창단’의 단원으로서 동일본 대지진 부흥 자선콘서트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음악평론가와 작사가 이외에도 라디오 DJ를 하거나 젊은 사람들을 응원하고 노래하면서 환경과 평화와 관련된 문화활동도 소화하는 등 한마디로 사방팔방 종횡무진 대활약중이다.
“샐러드도 상추만으로는 질리고, 여러 가지 채소가 들어 있으면 맛있듯이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여러 가지 일을 하면 다채롭고 풍부한 삶이 더 즐겁다고 생각한다. 또 늘 앉아서 하는 일의 피로가 노래함으로써 풀리고 위안을 받는다. 자신의 몸과 마음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
21살 때 급성복막염 수술을 받을 때 수혈로 인해 C형 간염에 감염. 병명을 알게 된 것은 1989년 53세 때이다. 하지만, 감염이 판명되었지만 치료약이 개발되지 않아서 의사는 C형 감염 환자의 87%가 간경화에서 간암이 된다며 아무도 도와줄 수 없으니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으니 의사는 술 마시지 말고, 과로하지 말고 적당한 운동을 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충분히 잠을 자라며 어떤 명의도 명약도 수면 부족을 이기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수면이 부족하면 면역력도 저항력도 떨어진다. 그 뒤로 하루에 적어도 8시간은 잠을 자도록 하고 있다. 사실 60대 중반에 건강진단을 받고서 췌장암과 간암이 발견됐었다. 의사는 더 크면 위험하니 수술하자고 했지만 안 했다. 불안은 있었지만, 나이 들수록 어딘가 나쁜 곳이 나오게 되는 법인데, 나는 병과 싸우는 게 아니라 면역력을 높여 병과 공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뒤로 더욱 수면과 식사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결국 규칙적이고 바른 생활이 몸을 지켜준다고 믿게 됐다.”
공연 취재와 지방 강연회 등으로 바쁘더라도 전날 1박 하는 식으로 7~8시간의 수면을 확보하고 있다는 유카와는 “잠이 안 오거나 도중에 깰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눈을 감고 어쨌든 자는 상태를 유지한다. 안 자더라도 누운 상태만으로도 수면 중의 3분의 1 정도 체력이 회복이 된다고 하니까. 생각하기 시작하면 뇌가 쉬지 못하니까 잠이 안 올 때는 침대 위에서 호흡법을 한다. 단전 아래 3㎝ 정도 떨어진 곳을 의식해 코로 숨을 쉬고 천천히 길게 입으로 내뱉으면 잡념이 없어지고 뇌가 빈 상태로 되는데 그대로 자연스럽게 잠이 든다”며 “해외로 나갈 때도 마찬가지다” 고 밝혔다.
“식사를 하면 위장이 움직이고 몸이 활동 모드에 들어가기 때문에 비행기 안에서는 거의 안 먹는다. 탑승하기 전에 와인 한 잔 마신 후 호흡법을 하면서 마냥 수면을 취한다. 그러면 긴 장거리 비행에도 피로가 안 쌓이고, 시차도 없다.”
60세쯤부터 부교감 신경을 자극해 면역력을 높이는 호흡법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데, 잠이 오지 않을 때뿐만 아니라 전철 안 혹은 책상 앞, 자기 전에도 꼭 한다.
“수면과 호흡법 덕분에 암이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크지 않고 있다. 호흡법은 언제 어디서든지 누구나 할 수 있다. 요즘에는 등골과 관절 등을 움직여 뼈에 적당한 부하를 거는 ‘뼈 호흡 체조’를 한 달에 한 번꼴로 도장에 다니며 지도를 받고 있다. 뼈를 강화해 주고 비틀림을 고쳐주고 대사를 촉진해 준다.”
연예계가 남성 중심의 경쟁 사회라 싫은 일도 많고 낙담하는 경우도 있는데, 고민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오늘 일은 오늘로, 싫은 것들을 내일로 가져가지 않는 게 중요하다. 침대 위에서 호흡에 집중해 푹 자고 나면, 다음 날 기분 좋게 눈 뜨면 그럼 오늘도 파이팅! 하는 힘도 생기고, 문제 해결의 실마리도 떠오른다.
“끙끙거리고 우울할 때는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다. 낙담하는 감정은 좌뇌로 거기에 음악의 템포를 부여하면 자동적으로 우뇌가 우선이 되면서 좌뇌의 고민을 잊을 수 있다. 걷는 것도 스트레스 해소가 되니까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리듬에 맞춰 걸으면 그 효과는 몇 배 커질 것이다.”
몸과 마음의 젊음은 음식이 정한다
◇ 우에키 모모코
(植木もも子·관리영양사·국제중국의사·국제중국의약요리관리사, 1953년생)
젊고 똑똑하고 즐겁고 건강하게, 이것이 삶의 주제라고 말하는 우에키 모모코는 서양의 영양학과 동양의 한방학 모두를 섭렵한 전문가로. “늙지 않기 위해서는 식생활을 고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강조한다. 실제로 자신이 스트레스에 약한 체질을 알고 평소의 식사습관을 고치고 건강을 되찾았다고 한다.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체질이 있어서, 생활습관에 개인 차이가 생긴다. 나이 들수록 그 차이는 커지기 때문에 자신의 몸과 마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동양의 한방의학에서는 인간의 몸은 기(氣), 혈(血), 수(水) 세 가지 요소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데, 나이 먹으면 그 균형이 깨지기 쉽고, 몸의 이상이 생기는 원인이 된다. 이 상태로 두면 몸의 노화가 빨라지기 때문에 방심은 금물이다. 기는 영양과 피, 수분을 몸 구석구석에 옮겨준다. 생명 활동을 행하는 에너지, 기가 부족하면 체력이 떨어져 제대로 보충하는 게 중요하다.”
건강의 근본이 되는 기를 보완하는 식재료는 닭고기, 고등어, 양배추, 산마, 꿀 등. 체력은 물론 기력이 저하됐을 때 추천할 만하다.
“적당한 운동도 필요하다. 몸을 움직임으로써 피의 흐름이 좋아지고, 또한 운동으로 땀을 흘리면 체내에 쌓인 여분의 수분과 노폐물이 배출될 수 있다. 덥다고 냉방기를 틀어놓은 실내에서만 지내면 물의 순환이 나빠지며 발이 붓고 관절통 등의 증상도 나타난다. 여름에도 샤워만이 아니라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가 적절히 땀을 흘리고, 음료수와 음식도 따뜻한 걸 권하고 싶다. 기, 혈 수가 잘 돌도록 하는 생활을 계속해 나가면 몸도 마음도 활기차고, 더위도 먹지 않는다.”
◇ 생애 마지막 순간에 만난 나의 첫사랑, 연극
치매 환자가 모여 사는 요양병원을 배경으로 황혼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이윤택 연출의 신작이다. 결혼의 아픔이 있는 한 여인과 그런 그녀를 자신의 첫사랑이라고 우기는 한 남자가 결국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서로를 첫사랑으로 여기게 된다는 독특한 설정이 흥미롭다. 포스터 속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두 주인공의 모습이 극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치매’라는 주제를 ‘황혼 연애’라는 상황을 더해 유머러스하면서도 애잔하게 그려냈다.
공연 연극 일정 7월 7~24일 장소 게릴라극장
연출 이윤택 출연 김미숙, 김철영, 서미우, 양승일, 안윤철 등
◇ 이해랑 연극상 수상자 9人, 한 무대에 오르다, 연극
배우 겸 연출가 이해랑(1916~1989) 선생의 탄생 100주년과 셰익스피어(1564~1616) 타계 40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이다. 역대 이해랑 연극상 수상자인 권성덕, 전무송, 박정자, 손숙, 정동환, 김성녀, 유인촌, 윤석화, 손봉숙 등이 출연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가장 긴 희곡으로 꼽히는 은 주인공이 대거 필요하지만, 이번 공연은 9명의 배우가 일인다역은 물론, 성별을 넘나드는 배역을 소화한다.
공연 연극 일정 7월 12일~8월 7일 장소 국립극장 해오름
연출 손진책 출연 권성덕, 전무송, 박정자, 손숙, 정동환, 김성녀 등
◇ 손자와 함께 오즈의 판타지 세계로, 뮤지컬
‘8 to 80 위키드 법칙’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8세 어린이부터 80세 노년층까지 폭넓게 사랑받는 뮤지컬이다. 동화 를 모티프로 원작과는 다른 기발한 에피소드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무대 전체가 초록빛으로 변하는가 하면, 연기를 내뿜는 용이 나타나는 등 ‘오즈’라는 판타지 세계를 신비롭게 표현했다. 50여 차례나 무대가 바뀌는 중에도 단 한 번도 암전되는 장면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공연 뮤지컬 일정 7월 12일~8월 28일 장소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연출 리사 리구일로 출연 차지연, 박혜나, 정선아, 아이비, 민우혁, 남경주 등
은 무용가 겸 명상 수행자 홍신자가 1993년에 낸 동명 에세이의 개정판이다. 당시 70만 부 이상 팔리면서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고 일본과 중국 등에도 번역되는 등 수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아방가르드 무용가로 잘 알려진 홍신자는 뉴욕에서 활동하던 중 돌연 인도로 떠나 수행했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 무용·예술 전반에 걸쳐 다양한 활동을 해온 그녀는 71세 때인 2001년 독일인 베르너 사세 교수와 결혼했다. 끊임없이 갈등하며 진정한 자유를 찾아가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다시 을 펴낸 계기
이 책을 펴내기 전 저는 이미 예술가로, 명상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제 남다른 삶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이들을 위해 이 책을 다시 펴내자고 여러 출판사에서 제안이 오기도 했고요. 요즘 시대는 물질적으로 아주 풍요로워지고, 또 시대적 상황도 개인의 생활도 매우 자유로워졌지만, 아직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찾을 자유를 얻지 못한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많은 이들에게 이 책에 담긴 내 삶의 경험들이 도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유를 위한 변명’이라는 제목의 의미
자유는 이미 우리 안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자유란 좀 더 내면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면 만날 수 있는, 우리 생명과도 같은, 공기와도 같은 것들이지요. 그러나 아주 멀리 있다고 착각하고 그것을 찾으려고 방황하며 온갖 만행(萬行)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것이 다 변명이 아닐 수 없지요.
23년 전 책을 낸 이후 삶의 변화
그때는 진솔하게 그때 떠오르는 이야기들을 그대로 써 나갔을 뿐입니다. 사실대로 썼던 것이니, 지금이라고 다르게 쓸 수가 없지요. 다만 제가 그 책을 썼을 때만 해도 지금보다 젊었습니다. 젊음은 좀 더 역동적이고, 야망과 불안한 미래에 대한 의심과 혼란으로 뒤엉켜 앞만 보고 달려가는 시기이기에, 무언가를 놓친 것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그 이후의 이야기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20~30대 시절과 비교해, 현재의 삶에서 누리는 자유
나이가 들수록 비우는 연습을 많이 하게 됩니다. 나누고 용서하고 정리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어제보다 오늘이 더 중요하고 내일보다도 오늘이 더 중요하게 됩니다. 즉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가 됩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젊음은 앞만 보고 질주하는 시기이고, 무언가를 축적하는 시기입니다. 젊은 시절에 비해, 지금은 이 풍요로운 ‘지금의 시간’을 누릴 자유가 늘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도에서 지내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냈는데,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죽음은 ‘무(無)’입니다. 우리는 점점 무가 되기까지 가벼워지고, 작아집니다. 죽음이란 것을 우리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기에 막연한 두려움을 품고 있지만, 사실 새털처럼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면 무슨 두려움이 남아 있겠습니까?
자유를 갈망하지만, 어려워하는 중·장년을 위한 조언
많은 침묵을 가지세요. 우리는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침묵을 통하여 우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찾을 수 있습니다. 그 해답을 찾으면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지요. 고요한 침묵이 아닌 시끄러운 소리들, 책이나 남의 말을 빌려 쉽게 자유를 찾으려 한다면 더 늦어지거나 영원히 못 만날 수도 있습니다.
>>홍신자
현재 , , 등 국제무대에서 솔로공연을 하면서 인문학 콘서트, 힐링 캠프 등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 등이 있다.
레코드판에는 욕심이 많았으나 오디오 기기에는 욕심을 부릴 형편이 못 되어 결혼 후 얼마간은 야외휴대용 전축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당시 국산 중에서는 가장 낫다는 ‘별표 전축’을 구입했다. 이것을 들여놓은 날은 마치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필자가 이 별표 전축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뉴욕대학교 폴리테크닉대(Polytechnic Institute of New York)의 방문교수로서 1985년에 미국으로 건너갈 때였다. 이때쯤은 전축도 상당히 낡았고 또 아들 넷을 동반하자니 짐이 많아 도저히 이것까지 가져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뉴저지에 얻은 셋집에서 모처럼 음악이 없는 삶을 살던 어느 날, 뉴욕의 5번가를 따라 한인상점들이 많은 지역을 걷고 있는데 ‘Fisher Audio Sale!’이라는 광고가 필자의 눈을 때렸다. 당시까지 필자는 외제 오디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지만 지도교수이셨던 C교수께서 항상 자랑하시던 것이 바로 ‘Fisher 오디오’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점포에 들어가 보니 물론 교수님 댁 것과 같은 고급 모델은 아니었지만 성능이나 모양도 그럴듯하고 가격도 큰 무리 없이 살 수 있는 정도여서 그 자리에서 바로 구입했다. 이 오디오는 귀국 후에도 친구들이 ‘서린 카페’라고 부르던 필자의 서린아파트 거실을 차지하고 가족들은 물론 놀러오는 친구들에게 많은 음악을 선사하였다.
1990년 초, D건설에 근무하던 친구 K군이 동대문운동장 옆 민자 지하주차장 건설 현상공모를 위한 기본계획 수립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다행히 이 작품이 당선되자 그 친구는 음악을 좋아하는 필자가 제대로 된 오디오 하나 없는 것이 늘 아쉬웠다며 돈 대신 오디오를 한 세트 기증하고 싶다고 제안하였다. 당시 필자는 전설적인 DJ 최동욱씨와 몇 번 방송을 같이 한 적이 있어서 상의해보니 영국의 B사 제품을 추천하며 용산 전자상가에 있던 ‘태양오디오’라는 B사 대리점을 소개해 주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B사 오디오보다 기기별로 특성이 있는 컴포넌트들을 모아서 꾸며보라고 권하였다. 그래서 프리앰프 분리형 Audio Innovation 진공관앰프, Thorens 턴테이블, Sony CD플레이어, Teac 카세트데크, Elac 스피커 등 최고급은 아니지만 매우 실용적인 컴포넌트로 구성된 본격적인 오디오 시스템을 처음으로 가질 수 있게 되었다. Fisher를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이 오디오로 인하여 ‘서린 카페’의 격은 한층 더 높아졌으며 친구들도 더 자주 찾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용인으로 이사 온 후인 2000년대 중반까지도 가끔씩은 친구들을 불러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시곤 하였다. 최근에는 이 오디오를 쓰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그 대신 수년 전에 구입한 Teac 소형 올인원 오디오로 종종 음악을 듣기도 하지만, 이 오디오는 LP나 카세트테이프의 음악을 CD에 녹음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옛날에 좋아하던 LP음악을 차에서 들을 수 있도록 CD에 녹음하는 경우가 더 많다.
필자와 매우 가까운 친구인 (재)월드뮤직센터의 강선대 이사장은 필자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음악 수집광으로, LP나 CD만 해도 필자의 10배 정도인 수 만장을 가지고 있다. 또 음악을 비롯한 각종 문화예술 관련 책자, 외국의 각종 민속악기 등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다. 그는 특히 세계 각국의 민속음악에 많은 지식과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여러 잡지에 글을 쓰기도 했다.
필자는 명지대 교양학부에 ‘세계의 민속음악’이라는 과목을 개설하고 그를 겸임교수로 초빙하도록 하였다. 이 강좌는 수년간 인기리에 운영되었다. 우리들은 현재 소장하고 있는 자료들을 토대로 전 세계 음악자료의 체계적인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위한 아카이브와 국내외 음악 관련 학술 연구 지원 및 세계음악의 대중적 보급을 위한 세계음악문화연구소 등의 설립을 추진해 나가는 한편, 다문화사회로 진입한 우리나라에서 서로 다른 문화가 공존하고 나눔과 소통을 도모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서는 법인을 설립할 필요가 있음을 공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2009년 7월, 강 이사장을 중심으로 필자와 몇몇 사람이 모여 월드뮤직센터 설립 준비위원회를 발족하였다. 그리고 약수동에 사무실을 얻어 소장품을 옮겨온 후 정리를 시작하였고, 2011년에는 국내외 월드뮤직 전문가 및 활동단체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후 2012년 11월에는 (재)월드뮤직센터를 정식으로 설립하였고 세계 음악학회와 공동으로 “다문화 사회와 음악: 글로벌 현황과 우리의 실천적 과제”라는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2013년에는 아카이브 구축을 시작하였고, 북촌우리음악축제를 후원하기도 했다.
2014년 3월에는 국민대 김희선 교수를 소장으로 세계음악문화연구소를 설립했고, 4월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 여러 단체의 후원을 받아 Asia Society와 공동으로 ‘뉴욕 한국음악 페스티벌:산조와 판소리’(New York Korean Music Festival: Sanjo and Pansori)를 주최하였다.
또 9월부터 11월까지는 매주 월요일 오후 3시부터 90분간씩 국민대학교 명원민속관(한규설 대감댁)에서 강 이사장, 음악평론가 황우창, 세계음악학회장 박미경 등의 강의로 월드뮤직 가깝게 듣기 시민강좌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비엔날레로 개최되는 아시아 월드뮤직 어워드를 제정하여 제 1회 수상자로 세계적인 첼리스트 요요마와 그가 이끄는 실크로드 앙상블을 선정하고 10월 27일 13시 30분에 예술의전당 푸치니 홀에서 시상식을 가졌다. 그 다음 날은 관계자들과 더불어 그들의 공연을 만끽하기도 하였다.
장진 감독의 영화 을 원작으로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내레이션이라는 형식을 더한 작품이다.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복역 중 15년 만에 특별 귀휴 대상자로 선정돼 처음 아들의 얼굴을 보기 위해 찾아간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렸다. 아버지와 아들의 애틋한 감정을 담아낸 다양한 음악 레퍼토리로 눈과 귀가 즐거운 연극을 관람할 수 있다. 작품 속 아들과 같은 또래의 아들을 둔 아버지, 정태영 연출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연출을 맡게 된 계기
10년 전 장진 감독의 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따뜻한 이야기에 감동했고, 무대에서 표현하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정용석 프로듀서가 이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면 어떻겠냐고 제안해 흔쾌히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무대 위에서 관객과 따뜻한 이야기를 함께할 생각에 설렙니다.
무대를 연출하며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업
영화 시나리오를 무대 언어로 바꾸는 작업이 우선되었고, 15년 만에 만난 아들과 아버지가 함께하는 하루 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부자간의 정과 사랑을 어떻게 형상화할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연극이지만 음악적 요소를 도입하여 노래와 인물들의 테마를 만들어 정서의 흐름을 이어지게 했습니다.
연극 속 아들의 나이와 비슷한 고등학생 아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부자의 경험이 작품에 반영된 부분이 있는지
연습하는 동안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들에게 먼저 말을 걸고, 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 노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들과의 경험을 반영하기보다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장년 관객이 보았을 때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장면(또는 대사)은?
아버지 강식이 15년 만에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만나는 장면, 또 얼굴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아들과 만나는 장면.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숨이 가빠옵니다. 오늘날 아버지라는 대부분의 존재가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바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많은 아버지가 가족과의 소통이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그 아버지는 아버지이기 이전에 아들이죠. 누군가의 아들로서, 아버지로서 이 연극의 많은 장면이 관객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에는 좋은 대사가 많지만, “난 오늘 이 집에 온 손님입니다. 오늘 난 아들에게 손님이랍니다. 왔다 가는 인사하고 안부를 나누고 그러다가 인사를 하고 가야 하는 손님입니다. 안녕. 잘 지냈니? 잘 지내라. 다음에 행여 기회가 된다면 또 보자. 안녕”이라는 대사가 현시대의 많은 아버지가 공감할 수 있는 대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에게 추천하는지
모든 아들, 아버지. 이 시대 모든 가족 구성원에게 추천합니다.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지, 나의 존재가 무엇이었는지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더불어 바쁜 사회생활 속에 살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정태영 연출
연극 , 뮤지컬 외 다수 연출.
7년에 걸쳐 200여 일 동안 15개 나라, 111개 도시를 여행한 부녀의 이야기를 담은 . 아빠와 딸은 낯선 여행지에서 동고동락하며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서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소소하고 꾸밈없는 그들의 여행기 속에는 진한 가족의 사랑이 담겨 있다. 여행이후 가장 든든한 동지가 생겼다고 말하는 부녀, 이규선ㆍ슬기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딸ㆍ아빠와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된 계기
(아빠) 딸이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아빠, 배낭여행 가려고 하는데 어디가 좋을까?”라고 물었다. 나는 무심히 “인도가 좋다던데”라고 했는데, 옆에서 들은 아내가 “인도 위험하지 않을까? 당신도 같이 갔다 오지”라고 해서 둘의 여행이 시작됐다. 처음 특별한 목표는 없었다. 단지 딸의 보호자로 다녀오자는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떠났다.
(딸) 방학 마다 홀로 장기 여행을 다녔다. 인도로 여행지가 선정되자 엄마는 걱정이 되었는지 아빠와 함께 가는 건 어떠냐고 물어보셨고, 은퇴 후의 아빠가 조금은 심심해 보여서 아빠에게 여행을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여행을 하며 힘들었던 점
(아빠) 멋모르고 따라나선 여행이라 특별히 준비단계에서 힘든 점은 없었다. 배낭을 꾸리는데 정말 신기하고 신이 났다. 그러나 인도는 여행초보가 감당하기에는 처음 며칠간은 거의 공포수준이었다. 또한 품안의 자식인 줄로만 알았던 딸이 “이거는 이렇게 해라, 이거는 하지 마라”라는 등 잔소리로 배신(?)을 때리는 바람에 놀라움과 함께 섧기도 했다. 그때만큼 한국에 있는 아내가 보고픈 적은 없었다. 처음엔 여행 끝나고 집에 가서 복수(?)를 단단히 하리라 하고 그냥 참았는데 나중에는 방어 차원에서 가끔 대들기도 했다.
(딸) 배낭여행을 처음 떠나는 아빠를 친구와 함께 간다고 착각(?)하고 비행기표 구입 30분, 배낭 꾸리기 한 시간, 그리고 여행 책 한 권을 사서 가방에 넣고는 여행 준비를 끝냈다. 초반에는 하루에 열 번, 아니 그 이상을 싸웠다. 한 번은 길거리에서 소리를 지르고 우는 사태도 벌어졌지만, 믿을 사람은 그 넓은 곳에 아빠와 나뿐이었다. 긴급한 상황에 서로 의지하느라 자연스럽게 동지애로 똘똘 뭉쳐졌다. 싸우는 건 어쩔 수 없다. 싸우면서 친해졌다.
여행을 하며 서로에게서 발견한 점
(아빠) 딸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집 밖에서 본 딸의 모습은 거의 문화적 충격 그 자체였다. 얘가 언제 이렇게 커 버렸지, 이런 면도 있었구나, 저런 강단도 있었네, 나의 유전자에 저런 면도 있다니 무척 신기하기도 했다. 훌쩍 커 버린 모습에 대견하면서도 언제까지 품 안의 자식이 아니라는 생각에 슬프기도 했다.
(딸) 내가 아는 아빠는 ‘아빠와 가장’이라는 책임의 가방을 메고 있는 남자였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아빠는 내게 ‘이규선’이라는 한 사람으로 다가왔다. ‘이규선’은 꿈과 희망, 열정으로 가득 찬 멋진 남자이자, 내가 아끼는 한 사람이다.
다시 여행하고 싶은 곳
(아빠) 인도다. 처음은 늘 아쉬움과 그리움이 배가된다. 그땐 너무 몰랐기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다시 간다면, 보이고 느껴지는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싶다. 피하지 않고 정말 즐기고 싶다. 물론 그때도 딸이 옆에 있다면 좋겠다. 더 많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헤치고, 슬기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딸) 아빠와 함께 한 처음 여행지, 인도다. 아빠와 늘 이야기 한다. 다음에 가면 카메라 하나만 메고 가보자고. 바닥에 깔린 똥도 신나게 즈려 밟아보자고.
여행 후 서로에게 생긴 변화,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빠) 여행을 갔다 온 후 아빠와 딸이라는 수직적 관계에서 이젠 거의 동지애를 느끼는 친구가 되었다. 대화거리도 풍부해졌고, 딸이 무엇을 하던 “자신의 의지대로 올바른 길로 가고 있구나”라는 보다 확실한 믿음도 가지게 되었다.
(딸) 내가 무엇을 하든 믿어줄 든든한 동지가 생겼다.
딸/아빠와 여행을 계획하는 이들에게
(아빠) 시간은 흐르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무조건 떠나라고 말하고 싶다. 자신의 분신인 자식과의 여행은 부모를 행복한 추억 부자로 만들어 줄 것이다.
(딸)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끼는 사람과 친해질 기회다. 가능하면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은 곳으로 떠나자. 우리에겐 인도의 열차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히말라야 산장이 그런 곳이었다.
부녀가 함께 계획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아빠) 첫 번째 책은 딸아이의 생일에 맞춰서 냈는데, 두 번째는 나의 생일이 있는 올해 6월에 나올 예정이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슬기의 “아빠 여행 같이 갈래?”라는 말이 떨어지면 “내 새끼에게 여행이 필요한 무언가가 생겼구나”라고 단박 눈치채고 “콜”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딸) 6월에는 엄마와 배낭여행을 떠난다. 가능하다면 그다음 여행은 엄마·아빠와 함께 떠나고 싶다. 두 분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모습을 사진과 글로 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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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이규선 30년간 다닌 은행에서 퇴직 후, 시골에서 자연인으로 살고 있는 ‘딸 바보’.
딸 이슬기 삼성맨을 그만두고, 놀이·공연·강연을 기획하는 액션건축가로 활동하는 ‘추억 부자’.
뉴욕에 사는 사람들은 맨해튼에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웬만해서는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기 어렵다는 말을 흔히 한다. 고층 빌딩이 빼곡한 맨해튼은 아주 삭막해 보이지만 어디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곳이기 때문이다. 뉴요커들은 브로드웨이 뮤지컬극장, 카네기홀, 링컨센터, 메트로폴리탄이나 현대미술관(MoMA)과 같은 세계적인 명소보다 외지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작은 문화공간에 오히려 더 애착을 가지곤 한다. 포장마차의 음식과 광장에서 열리는 즉석 이벤트를 즐기고 창고 같은 갤러리에서 개최되는 무명작가의 전시회와 소극장 공연을 나만의 세계로 받아들인다.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책 문화다. 아마존의 위세와 임대료 폭등으로 세계 최대 서적 체인인 반스앤노블(Barnes & Noble)마저 미국 내 점포를 800여 개에서 600여 개로 줄일 정도로 서점들이 타격을 받고 있지만 맨해튼에서는 여전히 진한 책 향기를 맡을 수 있다. 42번가에 위치한 뉴욕공공도서관은 세계 5대 도서관으로 뉴요커의 자랑거리다. 구텐베르크 성서 초판본,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을 알린 첫 번째 편지, 토머스 제퍼슨의 독립선언문 초고 등과 같은 역사적 귀중품을 포함해 5100만 점의 서적과 마이크로필름 등을 소장한 이 도서관은 수많은 국내외 관광객으로 늘 붐빈다.
독립서점의 산역사, 스트랜드·알거시
뉴욕시에 있는 10개의 반스앤노블 매장은 서점이라기보다는 지역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뉴요커들은 이 서점에 들러 단순히 책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만사를 잊고 책에 파묻혀 시간을 보내고 학생들은 함께 모여 온종일 공부를 하는 장소로 활용하기도 한다.
다양하면서도 전통 있는 독립서점들도 뉴요커들이 애호하는 문화공간이다. 서울 청계천과 부산 보수동의 헌책방 거리가 쇠퇴하듯 유니언 스퀘어 인근의 서점거리(Book Row)도 번창했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쇠락해 버렸지만 곳곳에 흩어져 있는 100여 개 독립서점은 뉴요커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센트럴파크와 접해 있는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의 건너편에 위치한 앨버타인 서점은 미국에서 가장 다양한 불문학 서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고, 스타킹스 서점은 페미니즘 서적을 전문으로 취급하면서 관련 인사들의 아지트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요리사와 미식가들의 모임터가 된 요리 서적 전문 서점인 보니슬로트닉, 여행서 전문서점인 아이들와일드, 미스터리 서적 전문서점인 미스터리어스, 문학 서적 전문서점인 맥널리잭슨 그리고 일본 서적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북오프 등과 같은 서점도 뉴요커들이 아끼는 곳이다. 기증받은 책과 소장품을 커피와 와인을 곁들여 판매하면서 얻은 수익금으로는 홈리스와 에이즈환자를 지원하는 하우징웍스 북스토어카페는 감동이 함께하는 공간이다.
고서적 수집가들이 신뢰하는 고서적 전문서점도 주목을 받고 있다. 희귀본과 수집용 서적을 선별해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서적 애호가들에게 공급해주고 있는 미국고서적상협회(ABAA)의 회원사는 220여 개. 이 가운데 40여 개사가 맨해튼을 중심으로 활약하면서 큰 거래를 성사시키고 있다.
이 가운데서도 뉴요커들이 손꼽는 대표적인 서점은 세계 최대 규모의 중고서점인 스트랜드(Strand Book Store)와 1925년 뉴욕 최초로 개점한 알거시(Argosy Bookstore). 스트랜드서점은 48개에 달했던 책방들이 사라진 서점거리에 홀로 덩그러니 남아 89년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2월 타계한 의 저자 움베르토 에코가 생전에 ‘미국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곳’이라고 예찬을 하면서 이제는 세계적인 명소로 인정을 받고 있다.
이 서점의 휘트니 휴 마케팅 담당 이사는 “소장한 서적만 250만 권으로 서가의 총길이가 18마일(29㎞)에 이른다”고 설명했다. 물론 자로 재어 본 것은 아니고 책 두께를 감안할 때 그런 계산이 나온다는 뜻이다. 수만달러를 호가하는 희귀본에서 1달러 미만의 헌책까지 망라하여 독서 애호가와 수집가들이 마음껏 책을 고를 수 있는 것이 이 서점만의 생존비법이다. 해외에도 널리 알려지면서 책을 좋아하는 세계인들의 탐방코스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3층에 위치한 희귀본 및 수집용 서적 코너에서는 한인 2세 김현영(미국명 Jane Jaiswal)씨가 전문가로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 영어강사로도 일한 경험이 있는 김현영씨는 우리말이 능숙한 데다 섬세하고 친절해 한인 방문객에게는 더없이 좋은 안내자다.
그가 가장 먼저 자랑스럽게 소개한 책은 1885년 발간된 제임스 조이스의 . 2권으로 된 딜럭스 하드커버 초판본은 1000달러 수준이지만 야수파의 거장인 앙리 마티스가 직접 그린 삽화가 삽입된 희귀본은 4만5000달러(약 5000만원)를 호가한다. 오래된 종교서적과 컬러 삽화가 곁들어진 조류서적 등 3만달러 안팎의 희귀서적도 잇달아 선보였다. 1793년에 3권으로 발간된 아담 스미스의 은 경제학자들이 탐낼 만한 책이라 눈길이 갔다. 가격은 2000달러 수준.
수집 목적은 투자 보다 취미가 우선
김현영씨는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유형의 서적을 상태가 좋은 초판본으로 구입하는 것이 책 수집의 기본”이라고 말했다. 투자 목적으로 수집을 했다가 실망을 하는 사례가 적지 않으니 좋아하는 책을 즐기면서 소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그의 조언이다. 그가 추천하는 권장 서적은 영국 유명배우이자 작가인 이안 맥켈런이 2014년에 발간한 법정소설 . 판매 가격은 20달러 내외에 불과하지만 작가의 이력과 소설의 내용 및 제본 상태 등을 감안했을 때 소장할 가치가 있다는 의미다.
“희귀본을 수집할 때는 미국고서적상협회와 같은 공신력 있는 기관이 인증하는 서점이나 전문가를 통해야 낭패를 보지 않는다”고 그는 강조했다. 값비싼 희귀본의 경우 서적의 주제와 내용, 발간 시기와 지역 등에 따라 200여 분야로 분류되고 그 분야 전문가의 감정 없이는 정상적인 거래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3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는 이 서점은 고객과 서적 관리 노하우가 차곡차곡 축적되면서 규모도 광화문의 교보문고를 능가할 정도로 커지고 있다.
센트럴파크 인근 파크 애비뉴 59가의 부자동네에서 위치한 알거시 서점도 비싼 임대료를 거뜬히 견뎌내면서 3대째 가업이 이어지고 있다. 코헨 가문의 세 딸 주디스, 나오미, 아디나와 주디스의 아들 벤저민이 함께 끌어가는 이 서점은 뉴요커들로부터 친근감과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어 웬만한 역경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미국과 세계 고서적상협회, 그리고 고서적감정협회 등 각종 서적 관련 단체의 창립을 주도하여 서적 역사의 산증인으로도 존경을 받고 있다. 지하 1층, 지상 6층의 서점에는 미국 관련 고서적, 과학과 의료분야 역사서적, 각종 초판 서적 등이 빈틈없이 차 있고 이스트강 건너 브루클린의 창고도 비좁을 정도로 다양한 서적을 구비하고 있다. 산수(傘壽· 80세)를 이미 넘긴 맏딸 주디스 라우리 공동대표는 “두 동생과 아들과 함께 서점 일을 하는 것이 마냥 즐겁다”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나 자신이 태어난 연도, 지역이나 동·식물 등과 관련된 서적을 수집하다 보면 흥미와 전문성이 함께 높아진다”고 서적 수집 원리를 알려줬다.
한국인 고객들의 발길도 줄이어
족히 칠순은 된 듯한 막내 딸 아디나 코헨 공동대표는 “감동적인 소설과 세계를 변화시킨 서적, 그리고 위인의 서명이 담긴 서적을 접하다보면 자신도 그 세계의 일원이 된다”면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세계를 선물하는 것보다 모든 세계를 담고 있는 책을 선물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라고 조언했다. 연말에는 많은 고객들이 소중한 선물을 알거시 서점에서 고르곤 한다. 아디다 코헨 대표는 아름다운 화집과 사진집을 선물용이나 소장용으로 권장하고 있다.
알거시는 고객의 수집 성향을 세세히 파악하여 관련 서적이 입수되면 바로 연락하는 체제를 갖추어 고객의 만족도를 높여 나가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한국의 고객들도 정기적으로 알거시를 찾고 있다. 한국 고객들은 교육적인 아동서적에 관심이 많은 것이 특징이라고 코헨 공동대표는 덧붙였다.
세계에서 거래된 가장 비싼 책은 빌 게이츠 회장이 1994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낙찰 받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업 노트로, 발명품을 구상한 라는 필사본이다. 중 한 권인 72쪽 짜리 를 손에 넣기 위해 지불한 돈은 3080만달러. 지금의 시세로는 4920만달러(약 570억원)를 호가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열렬한 팬인 빌 게이츠는 시대를 앞서간 위대한 천재의 예술적인 스케치와 과학적인 아이디어가 담긴 메모를 보면서 많은 영감을 받고 있다고 미국 방송사 CBS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책을 통해 세계 최고의 부자 빌 게이츠는 그 가격보다 훨씬 더 높은 가치를 얻고 있는 것이다. 책 속에 길이 있고 그 길은 무한한 가치로 이어지는 탄탄대로다.
경력 35년 이상의 신인 밴드가 데뷔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 같지만 어찌 됐든 사실이다. 이 경력 넘치는 밴드는 컨트리음악의 한 장르인 블루그래스(Bluegrass) 음악 밴드인 ‘실버그래스’. 나 와 같은 이름난 경연은 아니지만, 당당히 오디션을 통해 경쟁을 물리치고 정식 데뷔를 할 기회를 잡았다. 이 실버그래스의 다섯 멤버인 김구(金口·60), 김원섭(金元燮·60), 이웅일(李雄逸·60), 임영란(林永蘭·55), 장광천(張光天·56) 시니어 뮤지션을 만나봤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노년반격(老年反擊)’. 시니어 입장에선 좀 언짢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다소 발칙하기도 한, 아니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픈 의욕을 불러일으킬 것 같은 이름의 행사가 얼마 전 열렸다. 노년반격은 아마추어 시니어 음악인을 발굴해 육성하기 위한 행사로, 전국 55세 이상의 시니어를 대상으로 진행됐다. 서울 우리마포복지관과 글로벌 제약사 한국에자이가 공동 주최하고 신노년연합과 한국음악발전소, 한국음악실연자연합회가 공동 후원했는데, 1차 사전 심사를 거쳐 7팀이 2차 오디션에 올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렇게 발탁돼 데뷔의 기회를 얻은 두 팀 중 한 팀이 바로 실버그래스다. 실버그래스의 데뷔곡 ‘첫 번째 가출’의 녹음 현장에서 이들을 만났다.
낯설지만 친숙한 블루그래스
이들이 사랑하는 블루그래스 음악은 18세기 무렵 미국 애팔래치아에 정착한 영국 이주민들의 전통음악이 토대가 됐다고 알려져 있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 등에서 온 발라드나 무곡을 기반으로 현악단의 음악과 북미 민속음악이 결합되며 형식을 갖추기 시작했다. 명칭은 빌 먼로가 이끌었던 밴드 ‘빌 먼로 앤드 히즈 블루 그래스 보이즈(Bill Monroe & His Blue Grass Boys)’에서 유래했으며 이들이 활동한 1950년대 후반부터 생겨났다고 한다. 대부분 곡이 피들(바이올린의 일종), 벤조, 만돌린, 어쿠스틱 기타, 더블베이스 등으로 구성된 밴드에 의해 연주된다.
실버그래스 역시 이런 블루그래스 밴드의 구성을 따르고 있다. 멤버 중 김구씨가 만돌린을, 김원섭씨는 콘트라베이스, 이웅일씨와 장광천씨는 어쿠스틱 기타, 임영란씨는 벤조를 담당한다. 다른 블루그래스 밴드와 마찬가지로 모든 멤버가 악기 연주와 노래에 참여한다.
한국인에게 블루그래스란 음악은 단어부터 생소하지만, 일단 대표적인 한두 곡을 들어보면 어떤 음악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노래 중 하나는 1976년 조영남에 의해 발표된 ‘내고향 충청도’다. 올리비아 뉴튼존이 발표한 ‘Banks Of The Ohio’를 번안한 이 곡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가사 내용이나 멜로디 구성 등으로 인해 전형적인 블루그래스로 평가받는다. 이 곡 이외에도 다양한 블루그래스 음악이 번안되어 1970년대 이후 한국인들에게 사랑받아왔다.
동호회 덕분에 의기투합
하지만 한국에서 정식으로 블루그래스란 음악의 저변이 확대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동호인들은 1981년 의정부 장호원 캠프장에서 ‘한국 블루그래스 협회’를 창립한 것을 ‘역사적 사건’으로 꼽는다. 이때 실버그래스의 멤버이자 오랜 친구 사이이기도 한 이웅일, 김구씨도 그 현장에 있었다.
실버그래스는 2006년 개설된 포털사이트 ‘다음’ 카페 ‘한국 블루그래스 음악 클럽(cafe.daum.net/KBMA)’의 회원들로 구성됐다. 물론 이들 중 상당수는 그때 의정부 모임의 출신들이기도 하다.
사실 실버그래스의 노년반격 출전 계기는 이랬다. 오디션 공고를 본 클럽 운영자가 참가 제한자격인 만 55세 이상인 회원 중 적당한 멤버들에게 추천을 한 것. 그렇게 의기투합하여 준비 없이 경연에 나서게 됐다.
이웅일씨는 그래도 큰 문제는 없었다고 했다.
“사실 대부분 멤버가 클럽 설립 초창기 때부터 함께한 멤버이기도 하고, 여러 무대위에서 함께 즉석 공연을 많이 했던 사이라 화음을 맞추는 데는 문제없었습니다. 또 워낙에 블루그래스 음악이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특징이 있기도 하고요. 덕분에 오디션에서도 긴장하지 않고 연주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이웅일씨는 1970년대 말 라디오 방송에서 블루그래스 음악을 접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음악을 시작하게 됐다고 했다. 벤조를 배우게 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고.
“그 후 일 때문에 사우디에 1년간 있었던 적이 있는데, 그곳에선 외국으로 송금하는 것이 자유롭더라고요. 그래서 국내에선 구하지 못했던 블루그래스 악보들을 영국이나 호주의 서점을 통해서 사 모았어요. 그렇게 확보한 악보들을 동호인들과 공유하기도 했고요. 아마 국내 보급된 악보 중 상당수는 저를 통한 것일 겁니다.(웃음)”
인력개발 분야 연구원인 이웅일씨의 ‘절친’ 김구씨는 20대 후반부터 귀금속 관련 일을 해 온 사업가. 실버그래스 안에서는 만돌린을 담당하고 있다.
“만돌린을 시작하게 된 것은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해서였어요.(웃음) 아무래도 기타나 벤조보다 인기가 없었거든요. 가볍기도 하고, 독특한 음색 때문에 지금은 매력에 빠져 있습니다. 만돌린은 배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악기지만, 바이올린과 유사한 음역의 소리가 마음을 치유해 주는 힘이 있는 것이 특징이지요.”
김구씨는 서울 약수동 자신의 매장 인근에 지하 연습실을 만들어놓고, 음악연습뿐만 아니라 지역 어르신들을 초대해 봉사활동 차원에서 무료로 기타와 우쿨렐레 강습을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각기 다른 악기마다의 매력이 원동력
김원섭씨 역시 ‘이 바닥’에서 꽤 오랜 이력의 소유자다. 블루그래스 클럽에는 음악적 뿌리가 같은 요들음악을 하다 전향한 이들이 많은데, 김원섭씨 역시 그런 사례다. 대학 시절 ‘한국 바젤 요들 클럽’을 통해 음악을 시작해, 지금까지 식지 않는 음악에 대한 열정을 자랑하는 블루그래스 애호가 중 한 명이다.
사실 노년반격에는 솔로로 지원해 최종 예선까지 올랐다가 콘트라베이스가 부족한 실버그래스에 합류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고 합류하게 됐다.
“콘트라베이스를 시작한 건 10년 정도 됐는데, 각각의 다른 악기들 소리를 감싸안으며 조화롭게 만드는 것이 매력이죠. 음악은 어깨너머로 배우는 것보다는 정식으로 익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대학생에게 레슨을 받았고, 노래에도 관심이 많아 성악을 개인지도 받기도 했습니다. 음악은 자기관리를 할 수 있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해줘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나갈 겁니다.”
실버그래스의 홍일점인 임영란씨는 얼마 전까지 숙명여자대학원에서 음악치료를 가르쳤던 음악 전문가. 그 역시 요들을 거쳐 블루그래스를 즐기게 되었는데, 특히 벤조 특유의 음색에 빠져 본격적으로 악기 연주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피아노와 기타는 조금씩 다룰 줄 알았지만, 본격적으로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벤조가 처음이었어요. 처음 시작할 땐 음악이 아닌 소음에 가족들의 볼멘소리도 있었지만, 50대 여성이 겪는 변화를 음악으로 극복할 테니 감수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그때부터는 잘 협조해 주더라고요. 딸은 클래식 기타 전공자이고 남편도 취미로 악기를 연주하고 있으니 어렵지 않았습니다.”
훤칠한 체형에 카우보이모자가 인상적인 장광천씨는 현재 부천에서 활동 중인 교회 전도사다.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한 강좌에 참석했던 것이 음악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다. 당시 강단에 서 있던 이는 1970년대 유명했던 블루그래스 마니아인 요들 전도사 김흥철씨. 그때만 해도 이렇게 오랫동안 음악을 하게 될지는 몰랐다고 했다.
“블루그래스 가스펠을 부르며 교회 내에서 활동을 계속했었죠. 군부대 방문이나 봉사활동 등 한 해에 70~80회 정도 공연도 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의 뿌리는 대부분 이 블루그래스 음악에서 왔다고 추측돼요. 실제로 미국에는 블루그래스 찬송 음반도 많고요. 그래서 저도 블루그래스 가스펠 앨범을 준비 중이고, 곧 선보일 예정입니다.”
시니어들의 ‘희망’ 됐으면
물론 이들의 활동은 오디션 입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지난달 27일에 그들의 데뷔곡 ‘첫 번째 가출’이 공개됐다. 전형적인 블루그래스 곡의 형태를 띠는 이 노래는 노년반격의 프로듀서인 가수 이한철이 작곡했고, 작사는 멤버 중 김원섭씨의 가사 초안을 뼈대로 다른 멤버들이 살을 붙였다.
가사 내용은 시니어들의 어린 시절 추억을 그대로 담고 있다. 강냉이 장수를 보고 사달라고 조르다 부모님께 혼이 나 가출을 한 주인공이 결국 아버지에게 ‘아프지 않은’ 매를 맞는다는 내용이다. 멤버들은 노래를 작사하는 과정이 서로의 추억담을 꺼내놓는 작업 같지 않은 작업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30년 넘게 각자의 음악을 해 온 이들이지만, 정식 데뷔는 처음인지라 모든 과정이 새롭고 떨릴 수밖에 없다.
실버그래스 멤버들은 “노년반격을 통해 많은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어 기쁘고 설렙니다. 어릴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우리의 노래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시니어에게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기회를 통해 블루그래스 음악이 보급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우리를 통해 많은 시니어들이 음악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기를 기대합니다”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실버그래스 밴드 구성은 즉흥적인 면이 있었지만, 앞으로 오랜 기간 활동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관객들 앞에 많이 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라며, “나이가 많아도 두려움을 가질 필요 없고, 우리도 늦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습니다”라고 전했다.
이들은 5월부터 노년반격을 통해 함께 합격한 부산 출신의 시니어 그룹 ‘바야흐로’와 함께 콘서트를 갖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펼칠 예정이다.
세계적인 팝 그룹 아바(ABBA)의 히트곡 22곡을 엮어 만든 뮤지컬 . 1999년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첫 무대를 올린 후 미국, 독일, 프랑스 등 49개 프로덕션, 440개 주요 도시에서 60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만났다. 한국에서는 2004년 초연 이후 1200회 공연, 150만 관객을 돌파하며 중년 여성들의 호응을 얻은 작품이다. 2004년 조연출을 시작으로 12년 동안 해오며, 이번 공연의 국내 협력 연출을 맡은 이재은 연출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맘마미아 연출을 맡게 된 계기
2004년부터 조연출을 시작으로 12년 동안 해온 작품이에요.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엔 연출을 맡게 됐죠. 즐겁고 신나는 무대 연출로 주목받아온 뮤지컬이지만, 이번에는 드라마적인 요소를 더 살리려고 노력했어요.
지금까지의 공연과 비교한다면?
국내 뮤지컬 중에 중·장년 배우들이 주인공을 맡고 극 전체를 이끌어가는 작품이 드물죠. 배우 최정원(도나 역)·이경미(로지 역)·성기윤(샘 역)씨 같은 경우에는 2004년 공연에는 30대였지만, 이번 공연에는 실제 맡은 배역과 가까운 연령대가 됐어요. 그러면서 역할에 대한 이해도도 더 높아지고 풍부한 감정을 연기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탄탄하게 작품을 이끌어 갈 수 있는 배우들과 12년 동안 함께 해온 제작팀의 내공이 더해졌으니 가장 완성도 높은 공연이 되지 않을까요? 그게 이번 공연의 강점이라 생각해요.
중년 배우들의 열정을 확인하는 순간
연륜이 있는 배우일수록 열정이 훨씬 높다고 생각해요. 다른 뮤지컬에 비해 중·장년 배우가 많은 편인데, 젊은 친구들과는 다른 열의를 느낄 수 있어요. 단순히 열심히 하는 젊은이들의 패기 이런 것과는 다른 노련미가 느껴지죠. 실제로도 공연을 위해 준비도 많이 하고요.
중·장년 관객이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장면
1막에 타냐와 로지가 도나의 침실에 마주앉아 “우리도 젊었었지. 그때는 그랬었지”하며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어요. 주인공들의 대화처럼 중·장년 관객도 저마다 추억할 수 있는 것들이 많잖아요. 함께 끄덕끄덕하며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거예요. 2막에는 엄마가 시집가는 딸을 위해 드레스를 입혀주는 장면이 있는데 그 부분도 엄마와 딸들에겐 인상 깊죠. 그 외에도 도나(엄마)와 소피(딸)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기 때문에 모녀가 함께 보면 가슴 뭉클한 장면이 많아요.
아바(ABBA)의 음악으로 채우는 작품, 가장 반응이 뜨거운 노래는?
단연 ‘The winner takes it all’이 아닐까 생각해요. 20년 만에 첫사랑을 만난 도나가 “너를 보고 엄청나게 설레었지만, 그동안 난 정말 괜찮았어. 괜찮았어. 괜찮았어…”라고 해가며 참고 참다가 결국 “그런데 있잖아. 나 너무 힘들었어”라며 솔직하게 감정을 털어놓는 장면에서 나오는 노래죠. 애써 감정을 숨기는 도나의 모습이 안타깝고 슬퍼요. 그런 감정선을 따라가다가 도나의 노래를 들으면 감동은 배가되죠. 실제로도 많은 관객이 꼽는 명장면이기도 하고요.
어떤 이들에게 추천하는지
모녀가 와도 좋고, 친구끼리 와도 좋지만 특히 갱년기를 겪는 어머니들이 오셨으면 해요. 도나가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즐기는 모습을 보고 “지금도 늦지 않았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나이야. 나도 이렇게 나이 들었지만 좀 더 젊게 살아볼까? 새로운 것을 시작할까?”하는 자신감을 얻어갈 수 있을 거예요. 어쩌면 첫사랑이 생각날지도 모르겠어요.
공연 뮤지컬
일정 6월 4일까지
장소 샤롯데씨어터
연출 폴 게링턴/국내 협력 연출 이재은
출연 최정원, 신영숙, 전수경, 이경미, 홍지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