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듣기 딱 좋은 계절이다. 떨어지는 낙엽과 옷깃을 여미게 하는 바람은 감수성을 자극한다.
괜스레 천천히 걷게 되고, 먼 곳을 바라보게 된다. 한참 주위를 바라보고 있으면 익숙한 한 곡조를 흥얼거리기 마련이다. 이렇게 친숙한 노랫가락은 애쓰지 않아도 술술 나오는 것 같은데, 정작 노래 한 곡 듣는 것은 왜 이리 어려운지 모르겠다. 요즘 음악 듣는 법은 복잡하다. 음악을 파일로 휴대폰에 넣으면 들을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아는데, 이젠 그 방법도 아니란다.
그 흔했던 레코드점은 2015년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귀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LP가 테이프가 되고, CD에서 MP3로 듣는 미디어가 변화하는 것은 받아들일 만했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녹음하거나 재생하는 기술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하지만 최근의 변화는 당황스럽다. 언제부터인가 레코드점은 귀한 장소가 되더니, 서점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그나마 애써 그곳을 찾아간다 하더라도 어쩐 일인지 신곡 CD 찾기가 쉽지 않다. 가수들이 이제 온라인에서 음원 판매에만 힘쓸 뿐 CD와 같은 미디어의 대량 제작은 꺼리기 때문이다. 지금 CD는 소수 열성 팬들의 차지다.
50대 동안(童顔) 가수로 불리는 이승환씨는 얼마 전 방송을 통해 “이제 음악은 소유하는 것에서 소비하는 것으로 변모했다”고 정의 내렸다. 한 장 한 장 앨범을 사 모으고, 앨범 하나하나마다 의미를 부여하던 것은 안타깝게도 이젠 옛날 추억이 되어 버렸다는 선언이다. 미래 기술에 매달리는 기술자도, 판매에 목맨 장사치의 이야기가 아닌, 한때 LP 레코드와 CD로 수익을 얻던 현직 가수의 이런 이야기는 무게감이 다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하자면 요즘 음악 시장 ‘소비’의 축은 스트리밍이라는 기술이다. 주변에서 가장 쉽게 보는 유사 기술은 ‘TV 다시보기’ 기술이다. 이는 마치 커다란 도서관에서 음악이나 영화를 TV나 스마트폰으로 꺼내보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LP나 CD와 같은 별도의 미디어를 소유할 필요 없이, 돈을 지불한 회사에서 통신망을 통해 필요할 때마다 재생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전용 앱을 통해 스마트폰에서 재생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PC를 오디오와 연결하는 경우도 있다.
소유에서 소비로
중년들은 이런 음악의 ‘무소유 시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시대적 변화에 대해 前 편집장이자, 오디오 평론가로 활동 중인 오승영씨는 이렇게 조언한다.
“음악을 파일로 재생하는 방식은 관련업계에 종사하거나 스스로 관심을 갖고 다루어 온 경우가 아니라면 많이 낯설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 현상이 음악재생산업의 큰 축이 되어 움직인다는 것은 분명한 현실입니다. 관심을 갖고 크고 작은 재생 기기와 시스템을 접하려는 활동은 중요합니다. 현상 자체를 무시하면 스스로가 주류에서 멀어진 시각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기존의 LP가 그랬듯이 CD재생 시스템도 주류의 자리를 넘겨줄 뿐, 별도의 노선을 통해 생존을 하게 될 것으로 예상되기에 병행하는 것도 바람직합니다.”
인켈과 태광, 삼성에서 엔지니어로 활동하다 이제는 오디오 팟캐스트를 운영 중인 윤종민 소장은 제조사들의 적극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시니어들에게 음악을 듣는 과정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최근 만들어지고 있는 제품들의 인터페이스, 즉 조작방법이 지나치게 복잡하고 젊은이들에게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입니다. 제조사들이 먼저 이러한 장벽을 제거한다면, 보다 쉽게 시니어들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음반에서 음원으로
하지만 윤 소장도 시니어들의 변화와 디지털 환경에 대한 적응을 촉구한다.
“평생 갖고 있는 음반만 고집하겠다면 기존 시스템만으로 충분하겠지만, 그래도 새로운 미디어로의 전환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갖고 있는 음반을 디지털화한다면 좀 더 편안한 음악감상과 소유 두 가지 모두를 효율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앞서 설명한 ‘도서관’을 나만의 도서관으로 만들어 집 안으로 끌어들이자는 이야기다. 요즘 유행하는 NAS(개인용 파일서버)가 이런 식이다. 일반인이 NAS를 구축하려면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일단 구축해 놓으면 인터넷이 연결된 곳 어디서든 꺼내 들을 수 있다.
아날로그 미디어의 디지털로의 ‘복각’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영구적인 보존이다.
가 실시한 오디오점 만족도 조사에서 수년간 1위를 지켜냈던 금강전자 고태환 대표는 보존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잘 보존된 앨범 한 장은 미술품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화재 등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음악을 장기적으로 보존하기 위해서는 디지털화는 중요합니다. 다만 진동에너지가 전기에너지로 변환되는 소리를 오롯이 담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장비가 필요합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그렇다면 앞으로의 음악감상은 어떤 모습일까? 오승영 평론가는 앞으로의 음악감상에 대해 이런 예상을 밝힌다.
“음악감상이라는 고유의 취미성은 대중화와 고급화가 동시에 진행될 거라 봅니다. 소프트웨어와 그 서비스 시스템, 재생 하드웨어 등이 결합된 음악 재생품질의 향상은 음악을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기기들과 폭넓은 사용환경에서 청취할 수 있게 할 것으로 보입니다. 자동차나 지하철에서도 고음질을 손실 없이 감상하고 있습니다. 오디오 마니아들은 네트워크와 컴퓨터에 대한 공부를 강화해야 하겠지만, 오디오 마니아에 대해 스노비즘(속물근성)을 들이대던 대중적 시선도 스트리밍의 음질적 차이에 대한 자각을 통해 경계심이 완화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음원 전용 재생기기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거실의 오디오 시장까지 넘보고 있다. 그중 눈에 띄는 주자는 아스텔앤컨이다. 아스텔앤컨은 한때 MP3로 명성을 높였던 아이리버의 고급제품 라인이다. 이들은 고음질 음원재생기기 시장에서 독보적 지위를 얻은 상태로, 최근에 신제품을 출시하면서 하이파이(고음질 오디오) 오디오 시장 진출을 선언했다. 아이리버 제품기획담당 안지현 과장은 음악감상의 미래를 이렇게 예상한다.
“네트워크 기반의 음악감상이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향후에는 이보다 더 발전해서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IOT(사물인터넷)와 연계되어 지금보다 더 편리하게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사용자의 음악 패턴을 특정 알고리즘으로 파악해서 그날의 날씨 등과 연계한 음악을 조명이 켜지면서 들려주는 방법 등 실생활과 더 가까워질 것이라 봅니다.”
그리고 다시 음악감상실로
그래도 음악듣기가 어렵다면 기존의 방식을 따르면 된다.
물론 집에 뱅앤올룹슨이나 매킨토시와 같은 좋은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면 그대로 감상하면 되지만, 여의치 않다면 음악감상실이 대안이다. 음악감상실은 최근 들어 되레 늘어나는 추세다. 음악감상실은 양평이나 파주, 성북동 등 중년들이 자주 찾는 지역을 중심으로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는데, 오디오 마니아들이 본격적으로 전업하는 경우도 많다. 아이리버도 이태원에 그룹 청취실과 루프탑 라운지 등을 갖춘 4층 규모의 음악감상 공간 스트라디움을 최근 오픈했는데, 유명 평론가나 큐레이터들의 해설을 통해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국민 DJ로 사랑받았던 황인용씨가 개설한 파주 헤이리의 카메라타는 클래식 음악감상실로 유명하다.
“젊은 분들도 오시긴 하지만 아무래도 중년층이 많이 찾는 편입니다. 좋은 음질로 클래식을 감상하고자 하는 분들이 찾아 주십니다” 라고 관계자는 이야기한다. 역시 중년은 음악감상실에 익숙한 세대인 것이다.
요즘의 대중가요는 4분을 넘기는 게 거의 없다. 지루한 것을 못 참는 세대에게는 4분도 길다며 3분 10초 내외로 상품을 내놓는다. 작품이 아니다. 그러고는 음원의 순위를 고가에 거래하는 일들이 폭로되기도 한다.
커다란 스피커 앞에 자세를 고쳐 앉고, 음반 속지의 해설을 꼼꼼하게 읽던 세대 입장에선 혼란스러울 수 있다. 지금의 기술적 진보가, 아버지 사랑방의 독수리표 전축보다 나은 소리를 들려준다는 보장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의 음악듣기는 달라졌고, 그 변화는 진보에 대한 욕망의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이런 세상에서 더 나아진 음악감상을, 변화된 환경을 조금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보는 것은 어떨까?
LP 레코드를 디지털로 복각하는 방법
LP 레코드를 복각하는 것은 용도에 따라 그 방법이 다양하다. 전문적인 음질을 보장받고자 한다면 큰 비용의 지출을 각오해야 하지만, 기록을 위해 남기는 용도라면 낮은 가격으로도 가능하다.
1. 디지털 변환장치를 기존 오디오 시스템에 연결하는 방법
LP의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로 변환해 주는 ADC를 구매해서, 기존 오디오의 LP나 프리엠프에 연결하는 방법이다. ADC는 Analog-Digital Converter의 약자로 말 그대로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 신호로 변환해 주는 장치다. 고가의 턴테이블과 고성능의 ADC가 만나면 CD에 버금가는 소리를 들려주기도 한다. 오디오 마니아들이 선호하는 방식이며, 대부분의 경우 기존 오디오 시스템에 적용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2. 복각 전문 업체에 맡기는 방법
LP 복각으로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여러 업체를 찾을 수 있다. 개인적인 기념 앨범이나 복각하고자 하는 앨범이 몇 장 되지 않을 때 추천한다. 시중에 4~5개 업체가 활동 중이며, 앨범 한 장 복각 가격은 5만원 내외.
3. USB 턴테이블을 구매해 활용하는 방법
직접 USB를 꼽아 MP3와 같은 컴퓨터용 파일을 만들어 주는 장치들이 시중에 많이 등장했다. 다만 대부분의 장비들이 전문적인 오디오 장비가 아니라, 아이디어 상품 수준이어서 음질이나 만듦새가 조악한 경우가 많다. 저가의 바늘(카트리지)은 LP 레코드를 망가뜨리기도 한다. 대신 기존 오디오와의 연결 없이 자체적으로 복각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4. PC 사운드카드를 사용하는 방법
PC의 사운드카드를 활용한 방식. 사운드카드의 입력단자에 LP의 신호를 입력해 PC 프로그램을 활용하면 MP3 파일 등을 제작할 수 있다. 수년 전 디지털 오디오의 저렴한 대안으로 선호되었으나, 최근에는 효용이 떨어진다고 평가된다.
국내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 현황
국내 음원 스트리밍 시장은 통신사를 중심으로 성장해 왔다. 각 통신사의 멤버십 서비스는 데이터 요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에 이용자들의 선호도가 높은 편. 이밖에도 애플과 삼성이 자사 기기에 갖춘 어플을 통해 음악 서비스를 하고 있으며, 국내 포털에서 애플 뮤직으로 검색하면 등장하는 사이트는 아이폰 제조사 애플과는 무관하다.
1. 멜론 www.melon.com, SK텔레콤 사용자는 스트리밍 무제한.
2. 벅스 www.bugs.co.kr, SK텔레콤 사용자는 스트리밍 무제한.
3. 지니 www.genie.co.kr, KT올레 사용자는 스트리밍 무제한.
4. 엠넷 www.mnet.com, LGU+사용자는 스트리밍 무제한.
5. 네이버뮤직 music.naver.com, PC 사용자에게 유리.
6. 그루버스 www.soribada.com, 고음질 MQS 스트리밍 서비스.
왕년의 챔피언 친구 강칠과 종구가 과거의 오해를 풀어나가는 데 필요한 한 마디 ‘미안해’. 까칠한 여배우 서정을 10년째 짝사랑해온 매니저 태영의 용기 있는 한 마디 ‘사랑해’. 자신의 딸을 죽인 범인의 딸 은유와 마주해야 했던 형사 명환이 서로의 상처를 감싸 안으며 건넨 한 마디 ‘고마워’. 평범하지만 값진 세 마디를 통해 얻게 된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담아낸 영화 의 전윤수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Interview. 의 전윤수 감독
이번 작품의 연출을 맡게 된 계기와 메시지가 궁금합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갈등의 연속이고 그것이 인생의 본질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여정 속에서 행복과 좌절을 느끼며 살지요. 저에게 지난 몇 해는 즐거운 일보다는 힘든 일이 많았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기대 위로받고 치유하기를 원합니다. 영화 가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따뜻하게 안아주고 포근하게 안겨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라는 말을 주고받을 때 느껴지는 행복감과 충만감을 우리 영화를 통해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왕년의 챔피언 친구 에피소드를 그려내는 데 모티브로 삼은 이야기가 있다면.
몇 해 전 왕년의 복싱스타 박종팔과 친구 이효필의 다큐멘터리를 본 적 있습니다. 서로 친한 친구 사이지만 승부에 있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그것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화해하지 못한 채 헤어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보고 착안해 만든 에피소드입니다. 승부욕으로 인해 멀어진 두 사람이 말년에 병원의 같은 병실에서 만나게 된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상상해 보다가 떠올랐고, 두 사람이 못다 이룬 승부를 위해 시합을 벌인다면 어떤 상황과 감정들이 유발될까 궁금했습니다. 갈등과 용서와 화해를 통해 우정의 회복을 영화에 담으면서 인생은 아름답다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두 중년배우 김영철과 이계인의 호흡은 어땠나요?
두 분은 청년시절부터 탤런트 공채로 방송활동을 한 베테랑 연기자이지만, 막상 지금껏 서로 맞붙는 배역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계인 선생님의 눈 속에 숨겨진 순박함과 김영철 선생님의 눈 속에 담긴 정서가 묘한 앙상블을 이루어 저와 스태프들은 정말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두 분이 웃옷을 벗은 채 글러브로 서로를 강타할 때 혹시 모를 부상에 대한 걱정도 했지만 두 분 모두 인생 최고의 희열을 느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관객들도 두 분의 연기를 통해 현장에서 느꼈던 가슴 뭉클한 감정을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영화를 통해 배우 이계인의 재발견이 회자되길 바라고 연출자에게 깊은 감동과 아직은 도달하기 힘든 디테일한 인생의 단면들을 발견하게 해주신 김영철 선생님께 존경의 뜻을 표하고 싶습니다.
다른 배우들과 관련된 에피소드도 궁금한데요.
다른 배우들의 호흡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지진희씨는 영화 속에서 혼자 연기하거나 아역배우들과 연기하는 장면이 많았습니다.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 희망을 만나게 되는 형사 역할로 범인의 딸로 등장하는 아역배우 곽지혜와의 호흡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배우들은 서로간의 감정과 호흡으로 배역을 교감하며 연기를 하는데 사실, 주요 상대 배역이 아역 배우일 때 현장에서 캐릭터의 감정을 꾸준히 유지하기는 어렵습니다. 스텝들도 조마조마하게 아역 연기자의 연기를 지켜봐야 하구요. 아이들은 집중력을 오랫동안 유지하기가 힘들기 때문이죠. 촬영 중반쯤 곽지혜 양의 눈물 고백 연기가 있던 날은 가장 중요한 장면이라 모두 긴장하고 있었고 지진희씨의 감정을 유지시키기 위해 스텝들 역시 매우 예민하게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 세트장은 마치 마법에 빠진 듯 했습니다. 곽지혜양의 연기가 세트장의 모든 스텝들을 울게 한 겁니다. 모니터를 보는 감독 역시 마치 뭔가에 홀린 듯 곽지혜의 연기에 빠져들었고 등 뒤에서는 조용히 흐느끼는 스텝들의 훌쩍임도 들리더군요. 마치 마법을 경험한 것처럼 모든 스텝들이 영화 속 배우들의 감정에 빠져 쉽게 나오지 못한 겁니다. 지진희씨는 촬영 후 곽지혜양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그저 네 눈빛에 리액션만 해도 온 몸이 짜릿짜릿했다면서 진심으로 고마워하더군요. 핑클이 한창 활동 중일 때 김성균씨는 성유리씨의 팬이었다고 합니다. 세월이 흘러 에서 로맨스 연기를 펼치게 된 것이죠. 그래서인지 두 사람의 장면에 진심이 담겨있었어요. 관객들에게도 그 마음이 전달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평소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 이 세 마디를 잘 표현하시는 편인가요?
저는 표현을 하지 않고 그 감정을 안에 담아두는 데 익숙해 때로는 차갑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부끄럼이 많아서입니다. 표현하는 용기가 절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감정을 세련되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게 아직 서툽니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처럼 소중한 사람들을 끝까지 지켜나가려면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를 실천해야겠다고 느꼈고 이 영화가 나를 조금 더 성장시키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에게 추천하시나요?
마음을 고백하고 싶은 순간이 있지만, 막상 가까운 사람일수록 말을 꺼내기란 쉽지 않죠. 고백하고 위로받고 소통하고 치유 받고 싶은 모든 사람에게 영화 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고백의 순간 생각지도 못한 마법의 순간과 기적이 찾아온다는 것을 우리 영화를 통해 같이 경험했으면 합니다.
△ 전윤수 감독
, 의 조연출. 제25회 황금촬영상 신인감독상 수상.
, , 등 연출.
남자의 계절 가을. 서늘한 바람이 부는 날엔 홀로 고독을 휘어 감고 앉아 위스키 한 잔을 즐겨보는 것 어떤가. 그렇다면 여심을 자극하는 아기자기한 레스토랑보다는 투박하지만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레스토랑이 제격이겠다. 남심을 사로잡는 뉴 아메리칸 다이닝 ‘보타이드버틀러’를 소개한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나비넥타이를 한 집사’라는 뜻의 ‘보타이드버틀러(Bowtie de Butler)’는 빈티지하면서도 중후한 인테리어가 돋보인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체스판 무늬 바닥부터 벽에 걸려 있는 흑백 사진, 바 테이블 옆에서 나오는 무성영화까지 레스토랑 곳곳에서 묻어나는 흑백의 조화가 아날로그적인 향수를 자극한다. 화려함보다는 무게감이 느껴지는 보타이드버틀러만의 분위기는 20대 여성 고객 위주의 맛집과는 차별화된 이곳만의 매력이다. 실제 레스토랑을 찾는 고객도 40대 이상의 중년 남성들이 많다고 한다.
인테리어 분위기는 남성 취향이지만, 음식 맛에서는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할 만한 다양한 메뉴가 준비돼 있다. 보타이드버틀러는 1980년대 뉴욕에 이주민들이 몰리며 여러 나라의 식재료와 레시피가 어우러지며 탄생한 뉴 ‘아메리칸 다이닝’을 선보인다. 혼자 가볍게 식사와 와인을 즐기러 오는 중년 남성부터 기념일을 맞이한 커플, 가족 모임이나 회식을 하기 위해 찾아오는 고객까지 누가 오더라도 나름의 멋과 맛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이다.
무채색 배경이 주를 이루는 보타이드버틀러에서 가장 색감이 두드러지는 것은 키친과 마주한 에머럴드색 소파다. 소파 바로 위의 빈티지한 창문과 함께 어우러져 오픈된 주방에 활력과 빛을 더한다. 보타이드버틀러의 윤영기 총괄셰프는 신선한 제철 식재료를 엄선하여 최선을 다한 정찬을 선보이고 있다. 그는 “보통 고객들이 오시면 여러 메뉴를 시켜서 나누어 먹곤 하죠. 다양한 음식 맛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좋지만 한 가지 음식에 대해 온전히 다 느끼긴 어렵기 때문에 늘 아쉬워요. 한 분이 오셔서 한 가지 음식을 드시더라도 충분히 풍미를 느끼고 든든하게 식사를 하실 수 있도록 정성스럽게 준비하고 있어요”라며 접시 위에 놓인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며 즐겨볼 것을 조언했다.
보타이드버틀러는 다양한 코스와 단품 메뉴, 주류를 제공한다. 런치 코스는 3만 9000원이고, 총 4가지로 구성된 디너 코스는 메뉴에 따라 4만 5000원, 6만 3000원, 8만 9000원, 10만원이다. 스파클링, 레드, 화이트 등 수십 여 가지 와인은 물론, 간단하게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는 튜브형 와인도 판매하고 있다. 싱글몰트 위스키, 버번 위스키, 블렌디드 위스키 등 다양한 위스키와 코냑, 보드카, 데킬라 등도 즐길 수 있어 도수가 높은 주류를 선호하는 이들에겐 안성맞춤이다.
주소 서울 강남구 청담동 84-20
영업 시간 12:00~15:00, 18:00~22:00 /일요일 휴무
예약 및 문의 02-3443-6643, www.bowtiedebutler.com
주차 유료 발레 서비스(3000원)
홍역과 태풍으로 두 아들을 잃은 큰댁 최막이는 대를 잇기 위해 작은댁 김춘희를 집안에 들이게 된다. 본처와 후처, 이보다 더 얄궂은 인연이 또 있을까? 그러나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이제는 마지막을 함께할 유일한 동반자가 된 두 사람. 영화 는 모녀처럼 자매처럼 때론 친구처럼 지내온 두 할머니의 아름다운 동행을 그린 영화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가 영화로 탄생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또, 제작 과정의 어려움은 없었는지요.
영화를 연출한 박혁지 감독은 2009년에 모 방송사의 휴먼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만난 두 할머니가 가슴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친해지려야 친해질 수 없는 두 여자가, 남편이 죽었는데도 왜 굳이 한 지붕 아래 같이 살고 있을까?” 그래서 2011년 겨울 두 할머니를 다시 찾아뵙고 촬영을 시작했습니다. 사실 외딴 시골에 사는 어르신들의 일상은 지극히 평범하고, 두 분 모두 연로하셔서 촬영 기간의 대부분은 ‘기다림’의 시간이었죠. 그날그날 두 할머니의 일정을 파악하고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직관적인 판단을 믿으면서 촬영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꼬박 2년 만에 촬영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하 )와 두 작품의 프로듀서로서 두 영화를 비교한다면?
의 부부와 의 두 할머니는 사뭇 다른 관계입니다. 의 부부는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76년을 함께 했지만, 의 두 여자는 한 남자의 두 아내로 46년을 함께 살았죠. 절대로 사랑할 수 없는 사이입니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관계’ 속에서 살고 있죠. ‘가족, 친구, 동료, 이웃 등, 나는 이들과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김춘희, 최막이 할머니의 삶을 지켜보면서 깨달은 인생의 교훈이 있다면?
시대가 그러하여 맺어진 두 여자의 얄궂은 인연은 대단히 일방적이고 심지어 폭력적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두 여자는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우며 서로를 오롯이 지켜냈죠.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대답을 춘희, 막이 할머니는 두 분이 함께한 시간으로 대신 말하고 있습니다.
노년의 삶을 주제로 한 영화가 세대를 초월하는 사랑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노인은 모두 ‘선생(先生)님’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살아온 분들이죠. 험난한 질곡의 역사를 거쳐 온 이 땅의 ‘선생님’들의 삶에는 우리가 갖지 못한 인생에 대한 혜안이 있습니다. 하루하루 팍팍하기만 한 이 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순수함과 맑은 정신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중년 관객들이 보면 더 감동하게 될까요?
본처와 후처에 대한 영화이지만, 등장인물의 대부분이 시골에 홀로 사는 평범한 할머니들입니다. 그래서 특히 시골에서 나서 자란 대부분의 중년 관객들은 고향과 부모님에 대한 진한 향수와 추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춘희, 막이 할머니들처럼 본처와 후처가 함께 사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죠. 가족이나 이웃에 이런 기억을 가진 분들이라면, 오히려 이 영화가 불편하지 않고 훨씬 더 감동적으로 다가갈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분들도 부부가 함께 또는 자녀들과 함께한다면 두 할머니의 인생을 통해서 큰 선물을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 한경수 프로듀서
아거스필름 대표, 한국독립PD협회 글로벌전략위원장
다큐멘터리 영화 , , 프로듀서
시중에 나도는 ‘혼자 사는 법’에 관한 어느 자기계발서는 무려 마흔여섯 가지의 과제를 제안한다. 목차가 온통 ‘~하기’로 빽빽하다. 하긴, 목록대로 하겠다고 마음먹는 것만으로 혼자 살기는 이미 성공적일지 모른다. 마흔여섯 개를 외우느라 지루할 틈이 없을 테니까.
나는 그 방대한 과제를 일찌감치 포기하고 말았다. 광야를 내달리는 초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히, 책의 저자도 그랬으리라 짐작한다. 만약 다 해냈다면 책 따위 쓰는 대신 가부좌를 틀고 하늘로 훨훨 올라갔을 것이다. 숙제를 내팽개친 패배감으로 뒤돌아서서 툴툴거리는 게 아니다. 마흔여섯 가지를 빠짐없이 해내기에는 우리 삶이 너무나 빡빡하다.
평생 독신을 고수하면서 ‘혼자 살기’에 나름대로 노하우를 간직한 나는 딱 세 가지를 추천한다. 그 정도라면 삶이 제법 풍성해질 테고, 그 정도라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지 않을까.
글 김유준 프리랜서 dongbackproject@gmail.com
첫 번째
:
말 걸기
“거기 어떻게 올라갔니?”
영국 런던에 갔을 때다. 처음 그곳을 찾은 사람답게 버킹엄궁전으로 갔다. 왜 있잖은가. 파리에 갔다면 루브르박물관을 봐야 하고, 베이징에 갔다면 자금성에 들러야 한다는 식의 이른바 ‘촌놈 관광 리스트’. 버킹엄궁전의 근위병 교대식은 리스트 중에서도 맨 꼭대기에 자리 잡은 필수 코스. 그곳을 놓칠 수는 없었다.
나 같은 촌놈은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날따라 관광객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덩치 큰 서양인들 틈바구니에서 교대식을 구경하겠답시고 까치발을 들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린 결과, 좋은 곳을 발견했다. 2m 조금 넘는 장벽이었다. 그 위라면 멀리까지 훤히 보일 터였다. 가벼운 몸으로 두 손을 짚고 풀쩍 뛰어 벽 위에 걸터앉았다. 또래의 금발 여성이 말을 건 것은 그때였다. 어떻게 올라갔느냐고. 내 자리가 탐났던 모양이다.
이쯤에서 고백해야겠다. 두 가지다. 첫째, 영어를 아주 잘하지는 못한다. 회화 쪽은 특히 시원찮아서 대답하기가 수월치 않았다. 가녀린 여성에게 “점프!”라고 말할 수도 없고…. 둘째, 현실은 영화가 아니었다. 머리카락만 금발이지 메릴린 먼로나 니콜 키드먼 같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긴 말 할 것 없이 손을 내밀었다. “원한다면 내 손을 잡아” 하면서. 금발 여성은 한 손으로 햇살을 가리며 잠깐 생각하더니 곧 손을 잡았다. 손에 힘을 줘 끌었고, 금발의 그녀가 금방 딸려 올라왔다. 곁에 앉고는 미소 지으며 고맙다고 했다. 촌놈 리스트 ‘대화’ 편의 1번 질문을 던질 차례였다.
“어디서 왔니?”
금발은 스웨덴에서 왔다고 했다. 어릴 때 죽어라 외운 그곳, 수도 스톡홀름에서. 다시 말하건대 매릴린 먼로는 아니었다. 다만, 처음 본 남자 손을 잡은 게 쑥스러웠는지 얼굴을 살짝 붉히는 게 꽤 귀여웠다(이 말을 할지 말지 고민하다가 결국 털어놓으면 북유럽 여성답게 몸매가…).
남한에서 왔고 이름은 무엇이고 하며 주절거렸더니 금발은 ‘잉그리드’라고 이름을 밝혔다. 찬스를 놓칠쏘냐. 촌놈답게 물었다. “버그만? 잉그리드 버그만?” 잉그리드가 많이 웃었다. 그러면서 성은 요한손이라고, 영어식으로 조핸슨이라 불러도 좋다고 했다.
‘그 인연으로 금발의 잉그리드와 동서양을 넘나들며 불꽃같은 사랑을 나누다가 사랑하였으므로 헤어졌네라…’고 하면 거짓말일 게 뻔하고, 이실직고하면 꽤 오랫동안 이메일을 나눴다. 아무리 못해도 1주일에 한 번은 쓰거나 읽은 것 같다. 손꼽아 보니 5년을 그랬다.
편지가 끊긴 것은 순전히 내 탓이었다. 검은 머리 여성에 사로잡혀 금발을 잠시 잊었고, 그 틈에 왕래가 뚝 끊겨 버렸다. 돌이켜보면, 좋은 추억은 잉그리드의 한마디 말에서 비롯됐다. 어떻게 올라갔는지 물어주지 않았다면 나의 5년은 훨씬 초라하고 삭막했을 것이다. 잉그리드 또한 “어디서 왔느냐”는 나의 물음을 반겼으리라 믿는다. 장문의 영어 편지를 꼬박꼬박 보내온 것을 보면. 아, 참 좋았다. 편지를 읽을 때, 편지를 쓸 때. 읽을 때마다 반가웠고 쓸 때마다 흥분됐다. 그녀의 말 한마디가 나에게 그토록 좋은 추억을 만들어준 것이다.
지금 혼자 산다면, 그래서 삶이 건조하다면 산책 도중에, 여행 도중에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를 권한다. 가볍게 툭 던진 한마디가 삶을 한결 싱그럽게 만들지도 모른다. 비밀을 밝히면, 낯선 사람과 시답잖은 대화 몇 마디 나눈 것만으로 우리네 삶은 이미 풍성해져 있다.
물론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 먼저 소재가 있어야 한다. 생뚱맞은 말을 마구잡이로 던질 수는 없는 노릇. 상황과 형편에 맞지 않는 뚱딴지급 의문문은 상대의 눈을 동그랗게 뜨게 할 뿐 미소 짓게 만들지는 못한다. 구체적 방법까지 일일이 설명하기에는 지면이 모자란데, 어쨌든 제법 신중하고 현명해야 한다.
혹시 “뭐라는 거야?” 하면서 별 싱거운 사람 다 봤다는 식으로 무시할지도 모른다. 경험에 비춰보면 열에 한 번은 그럴 것이다. 겁낼 것은 없다. 별 쌀쌀맞은 사람 다 봤다는 식으로 역시 무시하면 된다. 언제 또 볼 거라고….
두 번째
:
취미 살리기
주위에 변변한 취미 하나 없는 이가 뜻밖에 많은 데 종종 놀란다.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술 마시기”라고 답하는 사람도 놀랍기는 마찬가지. 술 마시기는 취미가 아니다. 숨어 있는 명주를 찾아 방방곡곡 훑는 수준이 아니라면, 주위 사람들과 어울려 술 마시는 것은 생활일 뿐이다. “사람이 좋아 마신다”는 정도로는 취미라고 이름 붙이기가 민망하다는 뜻이다.
취미에는 나름대로 철학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뭔가를 좋아한다면 왜 좋은지 A4 용지 댓 장 안팎으로 늘어놓을 정도는 돼야 한다. 그쯤은 돼야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내 친구는 야구를 좋아한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관중석에서 비를 흠뻑 맞으면서도 박수를 치며 선수들을 응원해서 방송 카메라에 잡혔을 정도다. 친구는 말한다. 야구는 팬에게 꿈과 희망을 줘야 한다고. 그러므로 승패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고.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꿈과 희망은커녕 몹쓸 인생관을 강요할 뿐이라고. 자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야구는 최선을 다할 뿐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는 야구라고. 현실에서 그러기는 쉽지 않으니 그래서 야구를 사랑한다고. 나는 친구의 야구관이 멋지다고 생각한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듣고 인생이 바뀌었다는 사람도 알고 있다. 그 전까지는 클래식에 일자무식이었다고 한다.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인지 ‘지고이네르바이젠의 사라사테’인지도 몰랐다니 더 할 말 필요가 없다. 그러다가 우연히 ‘봄의 제전’을 들은 뒤로, 꼼꼼히 관련 서적까지 쓸 정도가 됐다. 몇 권 팔리지는 않았지만 어디 그게 중요한가. 공교롭게도 그 남자는 나와 동년배에다가 홀로 지내는 삶의 방식까지 같은데, 그 모습이 결코 측은하지 않다.
함께 술을 마시고 그네 집에서 하룻밤 머물렀다가 아침에 들려오는 모차르트 음악 소리에 눈을 뜨면서 그만 탄성을 낮게 내지르고 말았다. 멋지네! 친구가 따라 주는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좋은 게 없는데 뭐 어쩌라고? 그럴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인생관을 먼저 둘러볼 일이다. 자신이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 면밀히 돌아보다 보면 어울리는 뭔가가 손에 잡힐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게 취미가 되고, 그게 인생을 바꿀지도 모른다.
세 번째
:
동아리 만들기
취미가 생겼다면 동아리 만들기도 생각해봄직하다. 나는 앞서 말한 야구 좋아하는 친구의 동아리에 몸담고 있다. 열심히 참석하는 회원은 모두 여덟. 응원하는 팀이 똑같다. 모두 잠실야구장 3루 관중석에서 만났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살아가는 형태는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의사고, 어떤 이는 월급쟁이다. 방송 외주 제작 스튜디오에서 프로듀서로 일하는 후배도 있다. 이 친구가 아주 걸물이다. 덕분에 프로야구 선수들과 술자리를 함께 한 적도 있다. 지금도 내게는 그 추억이 작지 않은 자랑거리다.
동아리 들기에 가장 쉬운 방법은 인터넷 뒤지기. 내키지 않는 분들도 많을 줄로 안다. 생면부지 사람들 앞에 나서기는 아무래도 쉽지 않다. 나부터 그랬다. 낯가림이 심한 편이거니와 겁도 많아서 함부로 마우스를 놀리지 못했다. 어린애들 노는 판에 괜히 끼어드는 것 아닌가 싶고, 혹시나 못된 사람들 만나면 어쩌나 싶고….
우리 동아리 만드는 데 결정적인 몫을 했던 프로듀서 후배의 충고는 귀담아 들을 만하다.
“직접 나서면 됩니다. 동아리 만드는 게 어렵다면 어렵지만, 쉽다면 또 쉽거든요. 가장 힘든 것은 사람 모으기겠지요. 취미도 맞아야 하고 시간대도 맞아야 하고 생각도 맞아야 하고…. 우선, 두세 명쯤으로 시작한다고 생각하면 그나마 수월하지 않을까요? 큰 욕심 내지 말라는 거지요. 그렇게 만나다 보면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모양새가 갖춰집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겠다는 의지입니다. 하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동지들이 뭉치게 돼 있습니다.”
동아리가 생기면 뭐가 좋을까? 하나마나한 대답이겠지만 정답은 ‘여러 가지로 좋다’이다.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같은 것에 대해서 갑론을박할 수 있는 자리가 어디 흔하겠는가. 건전한 취미가 사람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은 당연하다.
마지막으로, 어느 책에서 읽은 ‘친구 사귀는 데 필요한 자세’를 덧붙이면 이렇다.
일일이 따지지 말라. 이 말 저 말 옮기지 말라. 사생결단 내지 말라. 예스, 하고 받아 들여라. 육체 접촉을 자주 하라. 팔팔하게 움직여라. 구구한 변명 늘어놓지 마라. 10%는 베풀면서 살아라….
참고가 됐으려나 모르겠다. 어찌 보면 성인군자가 되라는 말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동네 바보처럼 굴어라 싶기도 해서….
“지켜줘서 고맙습니다. 당신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2002년 6월 29일 월드컵 3,4위의 열기로 뜨거웠던 그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청춘을 바친 이들이 있다. 바로 ‘제2연평해전’에서 대한민국을 지켜낸 참수리 357호 27명의 용사들이다.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고마움을 표하고자 한 영화 의 김학순 감독, 진심과 열정을 담아 진한 감동을 선사한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Q.연평해전 당시, 무엇을 하고 계셨나요?
광화문에서 월드컵 응원하는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어요. 그날 그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몰랐어요. 세상은 온통 월드컵 분위기였으니까요. 방송에서 ‘제2연평해전’에 대해 잠깐 언급이 있었던 것 같은데 반복적으로 이어지진 않더군요. 언론에서 크게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월드컵 축제에 비해 조용히 지나간 것 같습니다.
Q.이 사건을 영화로 다루고자 마음먹은 때는 언제인가요?
‘제2연평해전’의 중요성을 인지하게 된 것은 2008년쯤이었는데 지인과의 대화 중 ‘제2연평해전’이 언급됐고, 그것에 대해 더 찾아보게 되면서 당시의 상황과 생존 대원들, 그리고 유가족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가장 슬펐던 것은 자식과 남편을 잃은 유가족들의 아픔이었어요. 그것은 남북이 분단된 이 땅에서 벌어진 현실이고, 그들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보통 이웃이었습니다.
Q.이렇게 오랜 기간(7년)에 걸쳐 제작하게 될 것을 예상하셨나요?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지만, 쉽게 제작할 수 있으리라는 것 역시 예상하지 않았어요. 제 힘으로는 극복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죠. 영화제작비 마련, 군의 도움 등 갈 길이 멀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씩 해결해나가기로 했어요.
대한민국 크라우드 펀딩 사상 최고 금액이 모였습니다. 사건을 모르는 어린 학생들까지 후원했다고 하던데요.
어린 학생들이 무슨 마음으로 이 영화에 후원을 하겠다고 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그들은 자기가 태어난 땅, 자신이 속한 사회를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죠.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에는 아직 우리가 남북으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과 나라를 지키겠다는 마음, 나라를 위해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과 고마움, 그러한 것들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Q.그런 아이들에게 우리 중장년들이 전해줄 수 있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글로벌 시대이기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불의와 정의, 전쟁과 평화, 헐벗음과 부유함 등에 대한 소식들을 어린 학생들이 과거의 기성세대보다 훨씬 많이 그리고 자주 접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러한 학생들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죠. 다른 한쪽에서는 아직도 반목과 대립, 몰이해 등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의심과 부정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사는 이 땅의 소중함과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열망, 그것을 지키다가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잘 간직하는 것입니다. 즉, 그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려면 살아남은 이들이 그들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겠죠. 이를 통해 자라나는 아이들은 굳이 애국이라는 말을 거론하지 않아도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이 땅의 소중함을 알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싹트게 되는 것입니다.
Q.리얼리티에 가장 공을 들였다고 하셨는데, 어떤 노력이 숨어 있을까요?
리얼리티를 살린다는 것은 현장감 있는 장면을 만들어 낸다는 뜻입니다. 현장감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총을 쏘고 뛰어다니고 폭탄이 터지는 것은 보이는 현장감입니다. 전쟁의 공포와 두려움을 표현해내는 것은 보이지 않는 내면입니다. 그것이 장면에 담겨야 진정한 현장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사실 통속적인 전투 장면은 마치 처럼 겉으로 드러난 현장감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여러 전투영화를 보면 그 당시 군인들의 두려움과 고민이 많이 보입니다. 그들은 ‘람보’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즉, 파편을 맞고 쓰러질 때의 감정을 표현하더라도 일반적으로 다른 영화에서 그렇게 하더라가 아니라 그 배우 자신이 정말 그 상황에서 파편을 맞았다고 가정했을 때 느끼는 감정과 행동을 요구했던 것이죠.
Q.연평해전, 천안함 사건, 세월호 사건 등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건들이 있죠. 영화인으로서의 사명감, 소명의식 등은 어떻게 발현될 수 있을까요?
글을 쓰는 사람은 글로 표현하고, 정치인은 사건을 잘 수습하고 더 나은 국가와 사회를 만들려고 애를 쓰죠. 영화인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은 영화를 통해 표현해내는 것입니다. 즉, 그 역사적 현실을 피부로 느끼고 사회에 무언가를 기여하기 위해 그들이 가진 재능을 영화적 표현에 투입하는 것입니다.
을 통해 발전적이고, 긍정적인 사회를 위해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봤어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닌 진정한 나라 사랑을 어떻게 영화로 표현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생각했던 것 같아요. 거기엔 용기도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얘기를 하면 ‘구태의연하다’, ‘이념적이다’라고 오해하거나 딱딱한 이야기들을 꺼내기 십상이거든요. 그러나 제가 믿고 있는 힘은 기본과 원칙에 충실하자, 근본을 잊지 말자, 그리고 모든 생각과 판단의 근거는 상식과 보편성에 의거하자입니다. 거기엔 이념도 편견도 개입해선 안 된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에서도 이러한 찬반과 호불호는 나타날 수 있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말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했어요. 그것은 ‘정치도 이념도 아닌 바로 인간의 이야기를 하자’였죠. 남북이 갈라진 현실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슬퍼할 수밖에 없고 인간이기 때문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보자 한 것이 영화 입니다.
영화 '연평해전' 장르 휴먼 감동 실화 감독 김학순 주연 김무열, 진구, 이현우 개봉 2015년 6월 11일 제작 ㈜로제타 시네마 배급 NEW
그룹사운드 ‘겨울나무’가 있다. 아니, 있었다. 어림 40년 전이다. 밴드를 그룹사운드로, 보컬을 싱어로, 기타리스트를 기타맨으로, 콘서트를 리사이틀로 부르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4인조 그룹을 결성했다. 나는 기타를 치며 싱어로 활동했다. 비틀스는 당시에도 전설이 되어 있었고, ‘딥퍼플’과 ‘시시알’, ‘박스탑스’, ‘산타나’ 등이 빚어낸 선율이 지구촌을 뒤덮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1974년 겨울 고향인 작은 읍내에서 처음 공연을 했다. 그러나 이를 기억하는 사람은 세상에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만들어낸 선율은 누군가의 가슴에 아직 남아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럼 영화 ‘즐거운 인생’의 줄거리보다 훨씬 오래된 이야기를 펼쳐보겠다.
어깨너머로 배운 ‘슬픈 악기’ 기타
어릴 적, 기타는 슬픈 악기였다. 어른들은 기타로 뽕짝조의 옛노래를 뜯었다. 나도 기타를 배우고 싶었다. 어깨너머로 보고 있다가 음 자리를 짚어 흉내를 내자 마을의 (다리가 아파 늘 휠체어를 타고 다니던) 아픈 형이 한번 배워보라 했다. 주법도 익히지 않고 바로 ‘생일 없는 소년’과 ‘애수의 소야곡’을 따라서 쳤다. 디마이너(Dm)의 슬픈 곡들이었다. 국민학교 졸업 무렵에 몇 곡을 익혔다.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기타를 튕기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내 기타 실력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이내 알았다. 팝송 열풍이 불어왔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기타 소리를 들으니 기타는 더 이상 슬픈 악기가 아니었다. 특히 전자기타에서 뿜어 나오는 다양한 음색은 나를 다른 세계로 끌고 갔다.
중학교에 들어간 후로는 기타를 치지 않았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다시 기타를 쥐었다. 잊고 있던 기타를 다시 껴안게 된 연유가 있었다. 문학의 밤이 열린 어느 가을날이었다. 저마다 한껏 말[言]에 멋을 부린 시를 낭송했다. 계속 듣다 보니 지루했다. 1부가 끝나고 초청손님으로 한 남학생이 나오더니 들고 온 기타를 튕기며 글렌 캠벨의 ‘타임’을 불렀다. 모두 ‘타임’ 속으로 우아하게 빨려 들어갔다. 문학은 개뿔이었다. 한순간에 팝송이 장내를 압도했다. 나는 순간 다시 기타 치며 노래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곧바로 기타교습소에 등록했다. 비로소 디마이너(Dm)의 ‘슬픈 기타’에서 벗어나 다양한 리듬과 코드를 익혔다. 3개월 정도 학원에서 배운 뒤에는 홀로 음악책을 뒤적이며 노래를 찾았다. 나는 작곡하며 노래도 하는 싱어송라이터를 꿈꿨다.
4인조 그룹사운드 탄생의 전말
대학 입시에 예상대로 낙방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책은 손에 잡히지 않았고 사는 게 시시해 보였다. 그때 집에서 튕겼던 기타소리가 울 밖으로 넘어갔고, 자연 음악 친구가 생겼다. 우리는 자주 만나 기타를 치며 듀엣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 친구는 드럼도 잘 두드렸다. 어느 날 친구가 (혹 내가 먼저 말했는지도 모르지만) 그룹사운드를 해보자고 했다. 서로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여름 끝자락에서 또 한 명의 음악 친구가 나타났다. 그는 읍내 고등학교 밴드부 출신으로 채보(採譜) 능력이 출중했다. 레코드 음반에서 나오는 노래를 오선지에 그대로 옮겨 우리 앞에 내밀었다. 우리는 비틀스처럼 멤버를 기타(퍼스트, 세컨드)와 베이스, 드럼으로 구성하기로 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상상 속에서 살았다. 장발 단속에 걸릴지라도 머리를 결사적으로 기르고, 공연 막판에는 ‘딥퍼플’처럼 드럼과 기타를 부숴버리자며 낄낄댔다. 그룹사운드 이름은 ‘겨울나무’로 정했다. 그러면서 겨울에만 나타나 공연을 하고 홀연 사라지는 신비의 그룹이 되자고 했다. 또 삭풍이 부는 벌판에서도 봄꿈을 장만하는 겨울나무처럼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자고 했다.
첫 공연은 연말쯤 하기로 했다. 꿈은 부풀어 올랐지만 현실은 막막했다. 우선 퍼스트를 맡을 만한 기타맨이 있어야 했다. 나는 싱어였으니 당연히 세컨드 기타를 치며 노래해야 했다. 또 퍼스트를 감당하기에는 내 실력이 턱없이 부족함을 알고 있었다. 퍼스트 기타는 아무나 맡을 수 없었다. 간주 또는 후주에 애드리브(즉흥연주)를 구사할 수 있어야 했다.
우리는 기타맨을 널리 구했다. 하지만 기타도 귀한 시절이었으니 기타맨이 나타날 리 없었다. 그러다 누군가 희소식을 전했다.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는 기타맨이 고향에 내려와 어슬렁거린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하늘이 내려준 인물이었다. 우리는 기타맨을 찾아 나섰다. 그의 집은 멀었다. 전주에서 버스로 한 시간쯤 가야 했다. 들녘에 우람하게 정미소가 서 있었고, 기타맨은 그 집 아들이었다. 우리 얘기를 들은 그는 기타는 만지지만 무대에 설 만한 실력이 아니라고 했다. 자신의 형이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한 것이지 자신은 아니라고 했다. 그 겸손이 더 맘에 들었고, 그가 기타맨임을 의심치 않았다. 그 집에서 한 밤을 자며 밤새 설득했다. 그렇게 퍼스트 기타맨을 얻었다. 4인조 그룹사운드가 결성되었다.
1974년 12월 첫 리사이틀
하지만 사람은 있는데 연주할 악기가 없었다. 자신의 악기는 자신이 구해야 했다. 기타맨은 형 것을 빌려 쓰기로 했지만 나는 전자기타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만그만한 살림에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전자기타는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전자기타를 찾아 읍내를 뒤졌지만 헛수고였다. 공연 날짜는 다가오지만 정작 악기가 없으니 가슴이 타들어갔다. 누가 전자기타를 빌려준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달려갔을 것이다.
그런 어느 날 전자기타를 집에 ‘모셔놓고 있는’ 선배가 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선배의 집은 읍내에서 20리쯤 떨어져 있었다. 초겨울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을 지나 묻고 물어서 그 집을 찾아갔다. 선배는 집에 없었다. 대뜸 이 집에 기타가 있느냐고 물었다. 선배의 아버지는 날 한참 노려보더니 외양간을 가리켰다. 외양간을 살피니 정말 전자기타가 있었다.
그러나 목이 부러진 채 소 여물통 옆에 나뒹굴고 있었다. 아마도 일은 하지 않고 기타나 튕기는 자식이 꼴 보기 싫어 아버지가 부숴 버렸을 것이다. 갈 때는 몰랐는데 읍내로 돌아오는 길이 무지 멀었다. 들녘에서는 삭풍이 불어왔다. 그리고 하늘에서 눈이 왔다. 눈물이 났다.
1974년 성탄절 즈음에 우리는 읍내 우체국 앞 예식장을 빌려 공연을 했다. 예식장 입구에 현수막을 걸었다. ‘그룹사운드 겨울나무 리사이틀’이 펄럭였다. 하지만 무대 위는 초라했다. 전자기타를 구하지 못한 나는 통기타를 멨고, 역시 베이스기타를 구하지 못한 친구는 색소폰을 들고 무대에 섰다. 나는 통기타로 코드를 짚으며 ‘Have ever seen the rain’, ‘Beautiful brown eyes’,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 등 10여 곡을 불렀다. 전자음에 맞춰 미친 듯이 노래하고 싶었는데, 그날 공연은 너무도 촌스러웠다. 베이스가 없으니 고음이 공중으로 떠다니고 음악은 거칠고 소란스러웠다. 그래도 그룹사운드 공연을 처음 본 읍내 젊은이들은 곡이 끝날 때마다 환호했다. 처음으로 하객 아닌 관객을 맞아들인 예식장 주인아저씨도 박수를 쳤다. 그렇게 7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첫 공연을 마쳤다.
나는 전기 대학 시험을 치르지 않고 후기 대학에 응시했다. 나만 아니라 첫 번째 음악 친구도 후기 대학에 입학했다. 나는 서울, 그는 이리(익산)에서 대학에 다녔다. 그리고 이듬해 우리는 다시 모여 연습을 했다. ‘겨울나무’가 되었다. 공연장소로 읍내 극장을 빌렸다. 원래 멤버에 색소폰과 클라리넷이 추가되었다. 겨울나무 공연 소식은 별 볼일 없는 읍내의 심심한 겨울철에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요즘 말로 ‘빅 이벤트’였다. 연습 장소로 자원봉사자들이 몰려들었다. 서로 포스터를 붙이고 공연 티켓을 팔겠다고 나섰다. 젊은 사람들이 한데 모이니 별별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함께 포스터를 붙이겠다고 나간 남녀 한 쌍은 훗날 열애 끝에 결혼을 했다. 그러자 여러 말들이 나왔다.
“포스터를 역 앞에 붙이랬더니 으슥한 하천에는 왜 갔을까. 포스터는 안 붙이고 서로 입술만 붙였고만.”
그해 ‘겨울나무 리사이틀’은 극장 좌석이 거의 찰 정도로 관객들이 많았다. 서울에서 빌려온 악기와 장비는 제법 섬세하고 육중했다. 우리는 열심히 연주하고 노래했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무수한 얘깃거리가 많지만 당시 일은 이쯤에서 줄인다. 그 후 겨울나무 공연은 멤버가 바뀌면서 여러 해 동안 이어졌다.
‘겨울나무’ 싱어로서의 자존심
군대에 가고 취직을 하며 우리는 흩어졌다. 그러나 겨울이면 겨울나무가 됐던 그 시절을 어찌 잊을 것인가. 어쩌다 멤버들이 만나면 음악 얘기로 술자리가 길어졌다. 우리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유료 공연을 해본 적이 없고 또 음반을 낸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음악적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우리가 계속 음악을 했으면 오늘날 조용필이나 전인권은 없었을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서로의 음악성을 치켜세워주며 언젠가는 꼭 제대로 공연을 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겨울나무를 세상에 알리자고 다짐했다. 헤어지면서는 꼭 이런 말을 했다.
“겨울나무 리사이틀 한번 해야지. 각자 집에서 연습하자고. 그날을 위해서.”
그러나 모진 세월은 우리를 떼어 놓았다. 다들 바쁘게 살았다. 그런데 우리는 뜻밖에, 어쩌면 극적으로 지난해 다시 모였다. 지금도 왕성하게 음악활동을 하고 있는 후배(겨울나무 2기 출신)가 자신들의 동호회 공연에 우리를 초청했기 때문이었다. 2014년 10월 ‘비바앙상블 콘서트’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우리는 후배의 지하 연습실에 모였다. 기타맨(김홍선)만은 전주에서 올라오지 못했다. 주유소를 운영하는 녀석은 정말 가고 싶지만 마누라가 ‘허락’하지 않아 합류가 어렵다고 했다. 약속하면 늘 늦는 또 한 녀석은 연습 날만은 총알처럼 달려왔다. 우리는 술을 한 잔 걸치고 연습을 시작했다. 베이스 소리가 가슴을 쳤다. 그 옛날 광경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저 아래에서 무엇인가 복받쳐 올라왔다.
‘노래들은 그대로 있는데, 우리는 이렇게 흘러왔구나.’
이곡 저곡을 연습하다 사랑과 평화의 ‘어머님의 자장가’와 전인권이 부른 ‘사랑한 후에’ 두 곡을 부르기로 했다. ‘사랑한 후에’는 음이 높았다. 원곡대로 씨마이너(Cm)로 부르면 높은 음이 (‘라’ 음보다 반음 높은) Bb까지 올라갔다. 멤버들이 무리라며 키를 내리자고 했지만 내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반(半)음에 목숨 거는 것이 싱어 아닌가. 세월이 흘렀어도, 세상이 변했어도 나는 겨울나무의 싱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음이 나왔다.
40년 만에, 환갑에 올라선 무대
마침내 공연 날이 밝았다. 나는 아내가 골라준 선글라스를 끼고, 소주 한 병 하고도 넉 잔을 마시고 무대에 올랐다. 술은 두려움을 쫓고 고음을 지르는 데 도움을 줬다. 그렇다고 너무 마시면 아예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과거에는 소주 한 병이면 적당했지만 요즘 소주는 도수가 약해서 반 병쯤 더 마셔야 했다. ‘사랑한 후에’는 첫 음을 제대로 질러야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었다. 멤버들 모두 잔뜩 긴장한 채 나를 봤다. 나는 씩 한번 웃어주고 내질렀다.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 편에~’
우리는 해냈다. 600여 명의 관객들이 환호를 보내주었다. 그 속에는 아내도 있었다. 그렇게 별렀던 겨울나무 공연을 실로 40년 만에, 그리고 환갑에야 할 수 있었다. 그럼 겨울나무 멤버를 소개하겠다. 드럼 은희문(익산LED산업단지개발 대표), 건반 김동원(BCP경영기술컨설팅연구소 대표), 알토색소폰 노희천(비바색소폰앙상블 단장), 그리고 싱어 김택근이다. 베이스는 따로 초빙한 정종호 씨가 맡았다. 그리고 우리가 살던 고향은, 아니 우리 그룹사운드의 활동 무대는 정읍시 신태인읍이었다. 한때 4만 명에 육박하던 고향 신태인은 속절없이 쇠락하여 이제 인구가 만 명도 되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도 겨울나무가 되고 싶다. 그리고 초청공연이 아닌 우리만의 리사이틀을 꿈꾸고 있다. 그리고 꼭 공연 말미에 기타와 드럼을 부수고 싶다. 우리는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
그룹사운드 ‘겨울나무’가 있었다. 아니 지금도 있다.
△김택근(金澤根) 언론인·시인
언론인 김택근 필자는 1954년에 태어나 전북 정읍시 신태인읍에서 자랐고 동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3년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경향신문 문화부장, 종합편집장, 경향닷컴 사장,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2010년 출간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의 대표 집필자로 알려져 있다. 저서로는 ,
산문집 , 동화집 등이 있다.
글 영화평론가 윤성은
나이가 들수록 행복에 가장 필수적인 것은 돈이나 명예가 아닌 건강임을 깨닫게 된다. 본인이 아플 때 느끼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들, 특히 가족 구성원이 큰 병에 걸렸을 때 감당해야 하는 슬픔과 스트레스의 강도 또한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억세다. 2015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줄리안 무어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긴 는 쉰이라는 젊은 나이에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은 한 여인과 그녀의 가족에 관한 영화다. 찰나에 더러워질 수도, 깨질 수도 있는 투명한 유리 같은 행복을 지키기 위한 앨리스와 가족들의 노력이 펼쳐진다.
앨리스는 콜롬비아 대학의 교수로서 많은 업적을 쌓아온 학자이자 사랑받는 아내였고, 세 아이를 둔 훌륭한 어머니였다. 몇몇 단어들이 잘 떠오르지 않는 것으로 시작된 그녀의 증세는 청천벽력처럼 희귀성 알츠하이머라는 진단으로 이어진다. 급속도로 악화되는 이 병의 증세는 그녀 자신과 주변인들에게 두려움과 서글픔 그 자체다. 언어와 인지 능력을 잃어가고, 행동 장애를 보이면서 샛별처럼 빛나던 앨리스의 눈빛도 흐릿해져 간다.
그러나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영화는 이런 고통을 감당하고 겪어내는 앨리스가 여전히 ‘그녀’라고 말한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8mm 필름처럼 빛이 바랬어도 여전히 생생하게 떠오르는 유년 시절의 기억들이 있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자신을 끝까지 돌봐주는 가족들이 있다. 그것은 앨리스의 인생의 일부였고 여전히 그녀를 그녀로 남아 있도록 만들어주는 실체들이다. 루게릭 병을 앓고 있었던 故 리처드 글랫저 감독은 이처럼 비극 속에 희망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영화를 남기고 영면했다. 그 진정성으로부터 나온 긴 감동의 여운이 오랫동안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일정 4월 30일 개봉
장르 드라마
감독 리처드 글랫저, 워시 웨스트모어랜드
출연 줄리안 무어, 알렉 볼드윈, 크리스틴 스튜어트, 케이트 보스워스 등
배급 그린나래미디어(주)
글 영화평론가 윤성은
2015년 아카데미 시상식 최고의 화제작은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촬영상 등을 포함해 무려 9개 부문의 후보에 오른 이었다. 이미 골든 글로브를 비롯한 60여 개의 시상식에서 133개의 트로피를 거머쥔 만큼 작품의 완성도 면에 있어서는 거의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작품이다.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멕시코 출신 감독이라는 평가가 무색하지 않을 만큼, 알레한드로 G. 이냐리투는 , , 에 이어 또 한 편의 천재적 감각이 번뜩이는 작품을 내놓았다. 재치 있는 대사와 시츄에이션 코미디(sitcom)가 연신 웃음보를 자극하는 이 영화는 코미디 장르와 거리가 멀었던 감독에 대한 선입견까지 완전히 깨뜨린다.
주인공 ‘리건 톰슨’은 한 때 슈퍼히어로물인 ‘버드맨’ 시리즈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액션 배우였지만 지금은 낡은 극장 건물에서 연극을 준비하는 신세다. 돈도, 명성도 바닥이 난 육순의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이 연극을 통해 다시 ‘버드맨’처럼 멋지게 날아오르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연기자이자 예술가로서 인정받아야만 한다는 강박과 불안이 점점 더 리건을 옥죄어 오는 가운데, 프리뷰 공연 전날 대체된 배우는 연신 사고를 쳐대고, 저명한 비평가는 그의 면전에 독설을 퍼붓는다. 게다가 시커먼 버드맨 복장을 한 리건의 또 다른 자아는 계속 그를 맴돌며 속삭인다. “우리 그때 좋았잖아! 넌 버드맨이야.” 라고.
나이를 먹을수록 더 뚜렷이 떠오르는 그 ‘잘 나가던 시기’를 시쳇말로 ‘리즈 시절’이라고 한다.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져 퇴물이 됐다고 느낄 때, 리즈 시절의 기억은 우리에게 적잖은 기쁨과 위로가 된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추억을 적당히 즐기면서 현재의 나를 성장시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은 이런 질문에 대한 성실하고 긍정적인 답안지와도 같은 영화다. 인생의 두 번째, 세 번째 리즈 시절을 꿈꾸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일정: 2015. 03. 05 개봉
장르: 코미디, 드라마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출연: 마이클 키튼, 에드워드 노튼, 엠마 스톤, 나오미 왓츠 등
배급: 20세기폭스 코리아
1970년대를 풍미했던 ‘쎄시봉’ 가수, 라디오 장기 DJ, 예능 프로그램에 감초 게스트, 그리고 독보적인 소재를 활용하는 화가로도 이름을 떨치고 있는 조영남. 올해 칠순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여전히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조영남과의 인터뷰는 그가 지금까지 어떻게 현역으로 살아갈 수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자유의 상징과도 같은 그의 사고는 거침없었다. 하지만 그 거침없음으로 인해 수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수십 년 동안 만들어진 수많은 대중의 호불호 속에서도 그가 지켜 가고자 하는 삶의 중심은 무엇일까?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짧고 굵다. 무뚝뚝하고 툭툭 던지는 듯한 조영남의 화법은 마치 묵직한 못을 박은 것처럼 문제의 핵심을 꿰뚫고 답을 던진다.
“재밌게 사는 방법에는 낚시, 바둑, 골프, 등산…. 그중 하나 골라서 하면 되는데 돈 안 드는 걸로는 그림 같은 게 있지. 딴 것들은 돈이 드니까 추천하기가 거북하네. 그런데 낚시하고 똑같아. 뭐든 낚싯줄 드리우듯이 시작하면 하게 되는 거지. 일단 경험을 해봐. 무조건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도 그림 시작할 때는 아마추어로 시작했지. 그런데 이걸 계속 30년 넘게 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프로 대접을 받더라고. 저절로 프로가 됐어.”
인생 후반전에 들어와 화가로서 이름을 세운 조영남. 그에게 인생 후반전을 즐겁게 살기 위해서 길을 선택하는 방법에 대해 물어봤을 때의 대답이다.
뿔테 안경 너머로 익살스러운 웃음과 함께 늙지 않는 청춘을 실제로 마주하니 더 진솔했다.
“무조건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고 일단 해보라”
화가가 된 그에게 그림이 좋다 나쁘다의 평가 기준이 있느냐고 물어봤을 때, 돌아온 대답도 조영남다웠다.
“내가 그리고 싶은 거 그리는데 남이 뭘 보고 느끼겠어. 그런 건 모르고. 낚시나 바둑 같은 것보다 그림 그릴 때가 단순히 좋을 뿐이야. 그래서 하는 거지.”
그러나 대화를 더 진행하니 단순히 좋아서는 아니었다. 조영남이 화투를 통해 미술을 선택한 이유는 미술만의 특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음악은 내가 노래 잘하는 사람과 똑같이 하면 금방 인정받잖아? 그런데 내가 피카소와 똑같이 그리면 미술계에서 실력이 없다는 굴욕적인 평가를 받아. 음악과 미술은 그런 차이지.
그런데 화투를 아무도 안 그렸었더라고. 내가 그걸 알고서 처음 화투 그림을 시작한 거지. 딱지도 그린 사람이 없었어. 딱지가 우리에게 익숙한 추억의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이걸 소재로 그림을 그린 사람이 없더라고. 그래서 2년 전부터 그리고 있어. 미술은 100% 자유야. 화투를 그려도 되고 딱지를 그려도 되고 하다가 말아도 되고. 그런데 음악은 까다롭잖아. 음정, 박자를 맞춰야 하잖아. 내게 음악과 미술은 정반대야.”
그는 치열하고 골똘하게 연구해 독자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이 미술이라며 미술과 음악을 포함한 예술은 모순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현실에 닿는 그림을 담아내고 있다.
징징 짜면 죄(罪)라는 생각
우리는 동창들을 만나면 “그 친구보다는 내가 괜찮았는데 잘 안 됐어” 식의 추억 이야기를 곧잘 하게 된다. 조영남에게 열등감을 느껴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봤다. 그리고 그에게는 정말 안 어울리는 질문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내가 열등감 있게 보여? 나는 아무것도 없었어. 내가 얼마나 무감각한 남자냐 하면 어렸을 때 가난했잖아? 가난도 실감을 못 하는 정도였어. 어렸을 적에 가난했다고 한숨 푹푹 쉬는 친구들 있잖아. 난 학교 가는데 하늘이 노랄 때가 있었거든? 그럴 때는 ‘아! 내가 굶었구나’ 생각하고 친구들 접선해서 얻어먹으면서 견디고 그랬지. ‘가난하다’, ‘불행하다’, 그런 느낌을 안 가졌었어. 그러려니 싶었던 거지.”
조영남은 자신의 낙천적인 면모가 피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부모님 양쪽으로부터 받은 긍정의 피다. 혹시 그런 천성이 그가 젊게 사는 비법이 아닐까. 그는 세대 갈등을 느껴본 적 전혀 없다고 한다. 그런 그가 나이를 먹었다는 걸 어쩔 수 없이 느끼는 순간이 있었다.
“이 나이 돼서 늘 아침에 일어나면 어제보다 몸이 더 불편하잖아. 그러면 ‘늙었구나’ 하고 생각하지. 하지만 한탄하지는 않아. 나보다 불행한 사람들이 태반이잖아. 내가 징징 짜면 안 되지. 그러면 죄 받는다고 생각해.”
그는 현재 딸과 함께 사는 중이다. 딸의 나이도 20대 중반. 딸의 결혼에 관한 생각을 물어봤다.
“그건 자기가 하는 거지 내가 하는 게 아니지. 나는 딸이 뭘 하든지 찬성하고, 간섭 안 해.”
딸과 함께 수다를 떠는 거로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그에게 문자를 보내도 외면당하는 요즘 아버지 세대에 대한 조언을 물어봤더니 손사래를 쳤다.
“자식 문제에 대해서 이렇고 저렇고 할 주제가 아니야. 두 번 이혼했는걸. 해선 안 되는 거로 생각해. 현대인들이 문제를 푸는 걸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냐. 안 돼서 안 하는 거지.”
“주된 관심사는 이성”
‘조영남’이라고 하면 스캔들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래서 요즘 이성에 대한 관심은 어떤지 물어봤다. 그러자 인터뷰를 진행하던 중 가장 빠르고 굳건한 목소리의 대답이 즉시 돌아왔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 내 제일 주된 관심사지.”
조영남 하면 다들 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의 활력이 나이를 가리지 않기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인다. 그런데 그런 반응에는 일말의 부러움이 섞여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왜 철딱서니 없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나한테 데려와 봐. 누가 철이 있는지 없는지 알게 해줄게. 나처럼 철딱서니 없으면 여자들이 좋아하는데.” (웃음)
솔직히 생각해보자. 요즘 사람들은 인생관을 세워도 그 인생관대로 삶을 잘 운영하지 못한다. 자신의 삶을 주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는 조영남에게 철이 없다고 말하는 것에는 어폐가 담겨 있는 게 아닐까?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관대로 잘 안 되는 이유가 있어. 돈 쓰기를 싫어하니까. 손 안 대고 코 풀려고 하는데 되겠어? 그게 큰 원인이지. 그리고 사람들이 잔머리를 너무 써. 너나 할 것 없이. 그게 걸림돌이야. 그러다 보니 솔직하게 이야기를 못하지. 그런데 내가 그걸 솔직하게 말하니까 철딱서니 없다 하지. 진실을 얘기하니까. 진실은 항상 거북살스럽거든.”
진실을 직시하기 어렵다는 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진실의 표현에 대한 수위 조절 또한 참 어려운 일이다. 그 물음에 그 또한 선선히 어렵다고 동의했다.
자신에 대한 반감에 투덜대지 않는 이유
조영남이 자주 가는 본인만의 아지트가 있을까? 그는 그런 곳이 없다고 말했다. 심지어 그 좋아하는 술도 줄였다고 한다.
“난 독주가 좋아. 그런데 나이가 드니 술도 안 들어가. 맛도 없고, 흥도 안 나고.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에게 술이 들어갈 때 마음껏 먹어둬라, 나중에 후회한다. 그렇게 얘기하고 싶어. 클럽도 한 번 가봤는데, 정말 재미가 없더라고. 젊었을 때 갔어야지. 뭐든 할 수 있을 때 해야 해.”
조영남의 삶의 궤적을 보면 다른 것들은 열정이 보이는 게 많은데 유독 돈을 버는 일에는 크게 애정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돈 버는 직업은 아니잖아. 그래서 내 이름으로 해서 망한 적도 없고. 그런 걸 하면 죄 짓는 거라 생각해. 나는 신이 노래만 불러도 먹고 살게끔 해줬는데, 다른 걸로 먹고 살려고 하는 건 신의 뜻에 어긋나고, 나 자신에게도 어긋난다고 생각해.”
확고한 신념이 있어 보이는 모습이지만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연예인이다.
“꼼꼼하다기보다는 와이즈(Wise)하다는 표현이 더 맞는 거 같아. 나는 현명하려고 무지하게 노력했고 나름 성공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어.”
그는 유명인으로서 사람들이 자기를 몰라볼 때가 가장 섭섭할 것이라고 밝혔다.
“내가 유명하니까 나에 대한 몰이해도 나오는 거로 생각해. 그래서 나에 대한 반감에 대해 투덜거리지 않아. 사람들이 날 모르는 척할 수도 있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세상 사람 전부가 다 날 좋아할 수는 없으니까. 다만 오늘 같은 인터뷰를 통해 조영남이란 사람에 대해 알 수 있겠지. 해서 지금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거고.”
“없어지는 걸 생각 중…생텍쥐페리처럼”
그는 영화 ‘버킷리스트’를 좋아해서 네 번이나 봤다고 말했다.
“보면서, 난 어떤 버킷리스트가 있을까…. 한 가지가 딱 생각났어. 내가 손목시계를 좋아해. 그래서 제네바에 가서 손목시계를 3박 4일 보고 오는 걸로 버킷리스트를 정했지. 그런데 그걸 하고 나니까 너무 싱거워. 너무 싱거워서 뭐 다른 건 없을까 생각했는데…. 지금도 없어.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했더라고.”
자신이 욕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하고 싶은 걸 다한 상태였다는 걸 깨달은, 억수로 운이 좋은 남자, 조영남의 정체다.
“없어지는 걸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생텍쥐페리가 비행기를 몰고 구름 속으로 사라졌잖아. 그게 늘 부러워서 흉내 내려고 했는데 비행기를 배우려면 학원에 다녀야 하고 귀찮아. 그러니 버킷리스트가 없을 수밖에 없지.”
최근 그의 화투 그림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것 같아 인터뷰 막바지에 넌지시 가격이 많이 올라갔느냐고 물어봤다.
“굉장히 비싸졌지.”
그리고 바로 무심하게 툭 던진다.
“아, 그런데 그게 뭐 팔려야지.”
쎄시봉 큰형님으로 알려진 조영남은 이전까지 쎄시봉 콘서트와 별개로 개인 활동을 했지만 올해는 쎄시봉 전국투어 콘서트에 합류한다. 이번 콘서트에서는 영화 쎄시봉 OST에 등장한 신곡 백일몽 라이브 버전을 최초로 공개 할 예정이다.
다음은 2015 쎄시봉 친구들 콘서트 상반기 일정이다.
4월 4일 일산 고양어울림누리 어울림극장
4월 11일 수원 경기도문화의전당 대극장
4월 12일 전주 전주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
4월 18일 부산 벡스코 오디토리움
4월 25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 hall D
5월 9일 대구 경북대학교 대강당
5월 23일 인천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