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인 줄 알고 샀는데 짝퉁임을 확인했을 때의 기분이랄까.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작품이며 그 감독이 유명한 코폴라 패밀리의 일원이라는 정보만 믿고 기대에 차서 본 영화인데 보고 난 후 조금 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글쎄 칸이 보는 관점과 필자의 시각이 달라서일까? 소피아 코폴라가 칸을 설득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필자를 설득하는데 미흡했던 것은 분명하다.
영화 은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부에 있던 가톨릭 여자 기숙학교 판즈워즈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룬다. 치열한 전쟁 한복판에 있는 학교는 사람들이 대부분 떠나버리고 교장과 여교사 그리고 다섯 명의 학생만 남아 있다. 나무들이 잘 관리된 너른 정원과 중세풍의 우아한 흰색 건물은 이곳이 전쟁 중임을 잊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워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그 적막한 공간에 한 남성이 침입한다.
학생 에이미(우나 로렌스)는 늘 하던 대로 버섯을 따러 정원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다리 부상을 입고 군대를 이탈한 북군 병사 존(콜린 파렐)을 발견한다. 그는 교장 마사(니콜 키드먼)의 지휘로 안으로 옮겨지고, 적군이지만 기독교적 박애 정신으로 치료받는다. 물론 그 적군은 미남으로 설정되어 있으니 여자로만 구성된 집단에서 당연히 주목받고 여자들 간에 미묘한 긴장감이 조성된다.
그중에서 두드러진 관계는 많은 사연을 지닌듯한 여교사 에드위나(커스틴 던스트)와 선천적인 팜므파탈의 끼를 지닌 조숙한 학생 알리시아(엘르 패닝) 사이에서 벌어진다. 알리시아는 노골적으로 유혹하고 에드위나는 자기를 사랑한다는 존의 고백에 흔들린다. 마사는 마사대로 존에 대한 호감을 숨기지 않는다. 영화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존은 그들과 모두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그런 상황을 즐긴다.
치료에 대한 보답으로 정원을 돌보며 이곳의 일원이 되어가던 존은 어느 날 애정행각이 발단되어 운명이 한순간에 뒤바뀐다. 에드위나가 자신을 사랑한다던 존이 알리시아와 침대 위에 있는 모습을 보게 되고 변명하려던 존을 밀치자 계단에서 구르며 정신을 잃는다. 상처가 터진 모습을 본 마사는 다리를 절단하지 않으면 썩어들어 간다며 그가 기절한 사이 존의 다리를 잘라낸다.
지루하게 흘러가던 영화가 이 지점부터 스릴러로 변신한다. 깨어나 다리가 잘린 것을 알게 된 존은 괴물로 변하고 격분한 남자와 일곱 여자의 대결로 치닫는다. 그래도 미련이 남은 에드위나는 미친 듯이 날뛰는 존에게 다가가 사랑을 나누고 나머지 여자들은 그를 죽이기 위한 음모를 꾸민다. 그를 처음 발견했던 에이미가 독버섯을 따오고 마지막 만찬이 차려진다.
자, 여기까지 스토리는 매우 흥미진진하지만, 영화의 초점이 불분명하여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 여자들 중 여교사 에드위나만이 어느 정도 심리와 욕망이 드러나 있을 뿐 마사와 알리시아의 심리는 불확실하고 행동의 개연성도 부족한 채 그저 예쁨만 있다. 더구나 존은 내면이 없이 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자아가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니 전반부는 지루하고 후반부는 맥 빠진 스릴러가 되고 말았다.
원작이 그러한가 하여 관람 후 검색해 보니 원작과 많이 달라져 있고, 1971년도에 만들어진 영화와도 관점이 다른 것을 알게 되었다. 원작에 있던 흑인 하녀도 빠져 있고, 무엇보다도 1인칭 시점으로 처럼 등장인물이 각기 다른 시각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인물의 깊이를 창조했던 원작과 달리 밋밋한 3인칭 시점으로 스토리를 끌고 가기에 바쁘다 보니 생긴 허점들이었다.
굳이 소피아 감독 입장에서 변명하자면 아름다운 화면과 스타일을 중시하는 감독의 취향 때문으로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왔던 1971년 영화와 달리 소피아가 여성적 관점을 취하고 있다는 것도 이 영화가 정적인 흐름을 형성한 이유일 것이다. 다만 칸이 이런 여성적 정물화를 선호한다고 본다면 수상을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끝까지 남는 의문은 마사가 존의 다리를 자른 것이 정말 의학적 필요에서일까? 질투심에서일까?
한 학기가 끝나고 또 한 학기가 시작되면 학생들에게 받는 것이 있다.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잘하는 것은 무엇이고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지? 앞으로 5년 뒤 10년 뒤 나의 모습은 어떠한지를 쓰는 ‘이력서 및 자기소개서’다. 집에서 통학 거리는 얼마나 되며 어려움이나 건의 사항은 무엇인지도 쓰고, 장래 희망이 무엇인지도 쓰게 한다.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는 학생의 현재 상황이나 장래 진로를 상담할 때 꼭 필요한 자료다. 또 학생들을 빨리 알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학생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면 그만큼 학생과의 소통이 원활해진다. 사실 대부분의 교수들이 겪는 일이지만 한 학기에 만나는 아이들만 줄잡아 100명에서 150명 정도가 되니 이름을 다 외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강의 과목에 따라 반이 바뀌는 경우도 있어 매 학기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보고 그 학생만의 특징을 생각하고 얼굴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받아 읽다가 의외로 놀란 부분이 있다. 이력서 양식에서 필수 항목으로 들어가는 것이 있는데 바로 보호자가 누구인지 쓰는 칸이다. 처음엔 별 의미 없이 몇 장을 넘기며 읽었는데, 읽을수록 보호자를 ‘어머니’라고 쓴 학생들이 많았다. 그래서 대략 통계를 내어보니 약 절반 정도가 보호자를 어머니라고 썼다. 처음에는 ‘아빠가 없는 학생인가?’ 했다. 그런데 거의 절반이나 그러해서 개별 상담을 하면서 물어봤다. 놀랍게도 아빠가 없어서 그렇게 쓴 것이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어머니라고 쓰는 학생들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보호자를 ‘어머니’로 쓰고 있다는 사실이 필자를 놀라게 했다. 필자도 과거에 많은 이력서를 써봤지만 보호자는 늘 ‘아버지’였다. 어머니라고 쓸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요즘 학생들은 어머니를 보호자로 쓰는 데 전혀 어색함이 없어 보였다. 전통적인 가족 구조에서는 아버지가 늘 집안의 기둥이었고 가정을 대표하는 분이었다. 한 가정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권위적이었고 집안을 책임지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아버지에 대한 위상이 지금은 바뀌어버린 것이다.
물론 보호자가 아버지이든 어머니이든 상관이 없다. 꼭 아버지만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법도 없다. 하지만 그 흔들림 없던 위상이 달라진 이유는 뭘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이러한 현상은 아버지에 대한 권위가 옛날 같지 않다는 의미다. 농업을 하며 살던 시대에서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정보통신 시대가 되면서 대가족이 무너지고 핵가족으로 변하는 사회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농사를 짓던 시절에는 온 가족의 손이 필요했고 생산과 소비에 대한 절대 권한을 아버지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농업에 의지하는 시대도 아니고 자녀들도 도시로 나가 더 많은 수입을 올리는 것이 가능해졌다. 당연히 아버지라는 절대적인 권한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양성평등의 사회 현상이 남녀에 대한 위상을 동등하게 만드는 원인도 있다. 남존여비 사상은 박물관으로 들어간 지 오래다. 이제는 재산상속도 아들딸이 동등하다. 맏이가 더 많은 재산을 물려받는 시대는 지났다. 또한 호주도 아버지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어머니도 될 수 있다. 아버지의 성이 아닌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와 자녀 간의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도 문제다.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와 많은 대화를 하고 옛날처럼 아버지의 권위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보호자 칸에서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누구를 쓰느냐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버지들의 위상이 떨어진 것은 아닌지 씁쓸하기도 하다. 자식들과의 소통이 필요한 시절이다. 필자도 궁금해졌다. 과연 필자의 아들딸들은 학교에서 이력서를 쓸 때 보호자로 누구를 쓰는지.
어렸을 때 일입니다. 참 만화가 좋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아무래도 더 부연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이를테면 슬픈 이야기인데도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위다(Ouida)의 소설 를 동화책으로 ‘읽었’는데, 얼마 뒤에 만화로 다시 ‘보았’습니다. 감동은 다르지 않았는데 동화를 읽으면서 잔잔하게 스미던 안쓰러움이 만화에서는 거의 ‘쿵!’ 하는 소리를 내는 저린 아픔으로 지녀졌습니다. 지금도 저는 알루아가 넬로를 만나지 못하던 때의 모습이 뚜렷하게 기억됩니다. 다른 칸보다 조금 더 커다란 네모 칸 안에 꽉 차게 그려진 커다란 눈 하나, 그리고 그 눈에서 떨어지는 그만큼 커다란 눈물방울, 그리고 그 옆의 이른바 홈통(만화의 칸과 칸 사이)을 지나 다른 작은 칸에 그려진 ‘흑!’ 하는 말풍선, 그리고 다시 홈통 옆으로 길게 내려진 직사각형 칸에 가득 채워 그려진 알루아의 뒤돌아선 모습에다 그녀의 흔들리는 머리카락과 내딛는 발의 움직임…. 이 그림(이미지) 탓이겠죠. 저는 사춘기 내내 아름다운 소녀란 ‘눈이 큰 아이, 그 큰 눈에서 그 눈만큼 커다란 눈물을 뚝뚝 짓는 계집아이’였습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재미있었다고 한 표현은 ‘실감나게 즐겼다’고 해야 더 적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만화는 이야기책보다 훨씬 저를 마구 흔들어놓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만화를 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옛날에는 요즘처럼 만화방이 없다거나 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만화를 읽는 것은 ‘못된 짓’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대체로 그러셨습니다. 그분들에게 만화란 아이들이 읽는 것, 꽤 자라면 벗어나야 할 잠깐 동안의 과정에서만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하물며 소설도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못 읽게 하셨던 시절이니 글이 아닌 ‘그림 나부랭이’를 책이라고 들고 있는 모습을 보시면서 진정으로 속이 상하셨을 것이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 흘러 세상 또한 그만큼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사람살이를 글(문자, 또는 책)을 통해 만나고 알아야 한다는 당위가 이전처럼 권위를 갖지 못합니다. 그림(이미지라고 통칭할 수 있을 텐데)은 이제 옛날에 책이 지녔던 권위를 넘어서 스스로 홀로이지 않은 채 글도 소리도 색깔도 움직임조차 아우르면서 사람의 삶과 생각과 인식과 경험과 기억과 행동을 결정하여 마침내 삶을 되짓는 절대적인 자리에 올라서 있습니다. 영상문화의 현실을 우리는 생생하게 경험합니다. 그렇다고 문자의 퇴색이나 책의 소멸을 예상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제 생각을 펼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요.
다만 저는 만화라고 일컫는 문화를 잠깐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렇다고 만화의 기원론이나 발전사, 의미나 가치를 기술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알지도 못하거니와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왜 옛날 어른들께서 만화에 대한 ‘불신’을 지니고 계셨었는지,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른이 되어, 또는 나이 먹은 사람이 되어, 만화문화에 대한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는지를 다듬어보고 싶을 뿐입니다.
모든 갈등의 처음 모습이 그렇듯이 저는 이 대목에서 ‘익숙함’과 ‘낯섦’ 간의 긴장을 유념하고 싶습니다. ‘글의 문화’에 익숙해 있으면 ‘이미지의 문화’에 대한 낯섦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낯섦에 대한 감추어진 판단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낯선 것은 ‘천박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그것에 적응할 수 없을 때면 그 낯선 것을 아예 ‘못된 것’으로 치부해야 자신의 무능이 정당화된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들 합니다.
그렇다면 ‘글에서 이미지로의 전환’이라고 할 만화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지닌 낯섦은 어떤 것인지요. 우선 글은 글 안에 담긴 이야기를 독자 스스로 이미지화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미지는 그 몫을 없앱니다. 직접적이니까요. 그래서 소설이 영화화되면 많은 경우 그 소설의 독자는 자신이 지녔던 이미지의 왜곡, 변형, 나아가 파괴를 경험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만화로 그려진 경우는 그런 일이 덜합니다만 이미 있는 이야기를 만화로 다듬으면 이러한 경험이 일고, 그것은 만화를 결과적으로 낯설어 천박하게 여기는 바탕이 되곤 합니다. 물론 시각적 이미지로 재구성한 이야기의 생동성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요.
다음으로 글은 어떤 격한 계기들도 글 안에서 다룹니다. 읽는 사람은 글의 흐름을 따라가며 그 굴곡을 겪습니다. 그런데 만화는 글의 문법과는 다른 만화만의 문법을 가집니다. 칸, 홈통, 말풍선 등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만화적 문법은 ‘잔잔’하지 않습니다. 칸과 칸의 단절과 그 단절을 비약하면서 이어지는 연속, 거기에다 충분히 서술적이지 않은 말풍선의 개입 등은 철저하게 ‘소용돌이’입니다. 그러므로 칸의 단절과 연속을 좇기 위해서는 글의 문법과는 다른 의식의 움직임을 내가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소용돌이를 견뎌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은 그 소용돌이가 만화의 만화다움입니다.
게다가 만화는 인물을 포함해 어떤 사물도 만화의 틀 안에 들어서면 그것 자체의 속성을 과장하여 드러냅니다. 일상적으로 내가 사물에 대해 가졌던 이미지가 철저하게 변형됩니다. 캐릭터의 출현은 이러합니다. 때로 그것은 괴기스럽기조차 합니다. 비약하는 상상력이 아니면 따라갈 수 없는 비현실성이 현실성을 지니고 의젓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면서 그 캐릭터는 이야기를 흐르게 하기보다 끊임없이 자기 안에 담습니다. 자기에게 귀착했다 다시 흐르도록 합니다. 그래서 만화는 글에 익숙한 자리에서 보면 ‘말도 되지 않는’ 모습으로 ‘읽혀’ 경박하기 그지없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만화는 그렇게 세상을 새롭게 ‘보도록’ 이미지를 재구성하여 다른 세상, 우리가 간과했던 삶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결국 만화를 즐기지 못하는 것은 칸의 단절과 연속을 빚는 홈통을 메꾸지 못하는 상상력의 빈곤, 그리고 말풍선의 여운에 메아리치지 못하는 유연하지 못한 경화된 사유 등이 그 까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만화도 여러 장르가 있습니다. 이야기 만화(comic strip)도 있고 한 칸, 또는 네 칸 등의 정형화된 이미지 만화(cartoon)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바야흐로 우리 삶 속에서 이야기와 이미지를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새로운 문화가 펼쳐지고 있는데 이를 간과한다는 것은 게으른 삶이라고 지탄받기에 꼭 알맞습니다. 그렇다면 ‘만화를 못 읽는 늙은이’가 되기보다 ‘만화도 읽는 노인’으로 살면서 자신이 여전히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유연한 사고를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실증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만화는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지극히 실용적인 잣대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만화도 좋은 만화가 있고 못된 만화가 있습니다. 세상살이가 그러니까요. 그래서 그것을 분별하기 위해 혹 좋은 만화를 추천해주면 어떻겠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대한 제 대답은 분명합니다. 필독도서목록을 만드는 일은 금서목록을 만드는 일과 구조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더구나 어른들 앞에선데요.
아무튼 저는 만화를 즐깁니다. 글 읽기보다 ‘재미’있으니까요. 만화적으로 과장한다면 ‘만화를 읽으면 늙지 않으니까’요.
필자는 유달리 더위를 타는 사람이다. 몸속에도 열이 많은지 한겨울에도 냉동실 얼음 칸에 얼음을 가득 채워야 마음이 놓일 정도다. 마시는 물도 미지근한 물이 몸에 좋다는데 필자는 꼭 얼음처럼 차가운 물을 마시니 주변에서 걱정해주기도 한다. 체온이 1도 오르고 내리는 데 따라 몸에 적신호가 켜지기도 한다는데 그렇게 차가운 물을 마셔대냐고 충고를 하는 것이다. 그래도 필자는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운 물을 마신다. 또 조금만 기온이 올라가면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필자만 허덕거리고 부채질을 해댄다. 그래서 “너 갱년긴가보다” 하는 말도 듣는데 갱년기가 아니라 이제는 노년기에 접어든 나이이니 그 증상은 아닐 듯하다.
어떤 분은 필자가 부럽다고 한다. 젊으니까 더운 거라며 본인은 항상 추워서 고민이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 입장에서 더위는 웬수다. 남보다 더위를 많이 타서 안 좋은 점은 여러 가지다. 단체로 여행을 갈 때 대부분의 여자들은 따뜻한 환경을 선호한다. 추운 겨울에야 뜨끈한 방이 좋지만 봄가을에도 다들 따뜻한 잠자리를 선호한다. 필자는 마룻바닥 베란다 쪽에 바싹 붙어서 잔 적도 있다. 도무지 후끈한 실내 공기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에어컨 좀 켜자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다들 따뜻한 게 좋다는데 필자 혼자 덥다고 그러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그저 부채질을 해대며 참는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모임에서 강화도 탐방 나들이가 있었다. 전철 5호선 송정역에서 내려 3000번 버스를 타고 1시간 20분쯤 가면 강화도에 도착한다고 했다. 12시에 송정역에 모여 강화도로 가서 서너 시간 유적지를 걸어서 둘러본다는데 땡볕이 내리쬐는 날씨를 필자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 5시에 있는 식사시간에 맞춰 참석하기로 했다.
혼자 3시간여를 전철과 버스를 타고 가니 어디 먼 여행이라도 떠나는 것처럼 설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송정역에서 갈아탄 3000번 버스는 요금이 2400원이었다. 뒤편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제 버스에서 1시간 반 정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버스 안이 너무 더웠다. 옆자리의 아주머니도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좌석 위쪽에 있는 에어컨이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필자만 더운 건 아니었나보다. 날씨가 이렇게 무더운 날 승차비를 2400원이나 받는 버스가 이렇게 더워도 되는 건지 급기야 화가 나기 시작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기사분에게 에어컨 좀 세게 틀어달라고 말할까 말까 고민만 했다. 속 시원하게 부탁하면 좋으련만 그러지도 못 하는 성격에 큰 소리도 못 내고 덥다고 혼잣말을 하며 30여 분간 분을 참고만 있었다.
요즘은 자가용 줄이기 목적으로 대중교통 이용이 보편화됐다. 자가용을 타는 것보다 전철이나 버스가 냉난방이 아주 잘 되어 있어 많이들 이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버스는 관광지로 가는 차인데도 불구하고 승객을 더위에 지치게 했다. 분통이 터졌다. 목적지에 도착려면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승객들은 부채질을 해대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있으니 이상하기도 했다.
드디어 필자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사님께 가서 좌석이 너무 더우니 에어컨 좀 켜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기사분이 “켰는데요?” 했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만지니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시원한 공기가 뿜어져 나왔다. 역시 말하길 잘했다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부글부글 끓을 필요 없이 진즉에 좋은 말로 부탁하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다.
필자에게 찜통더위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다. 많은 승객 앞을 지나 앞자리의 운전석까지 부탁하러 가는 일이 부끄러워 망설였지만 역시 소통이 중요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용기 내어 한마디하고 시원하게 목적지까지 잘 다녀왔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최학 소설가께서 故김용덕 교수님께 쓴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김 교수님.
참으로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40년 가까운 세월을 흘려보내면서, 더러 예전 초등학교 시절의 방학숙제를 떠올리듯 가끔 교수님을 생각하긴 했지만 ‘인사’는 엄두조차 내질 못했습니다. 그곳에서 잘 계시겠지요? 이런 치렛말은 모두 생략하겠습니다. 교수님은 이미 ‘그곳’, ‘계시다’ 등등의 언어들과도 전혀 무관하실 테니 말입니다. 따라서 제 인사는 단지 저 혼자의 회억이고, 제 자신에게 들려주는 독백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1980년의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그 전해, 한국일보사가 우리나라 사상 초유인 1000만원의 원고료를 내걸고 장편소설을 공모한 일이 있었지요. 대상은 기성작가와 신인을 망라하는 것이었습니다. 1973년 모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에 발을 들여놓고 있던 저는 그 몇 년 사이 작품 발표의 지면조차 제대로 얻지 못한 채 낙백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지요. 그런 때에 광고를 보곤 결심을 했습니다. 좋다, 다시 공개 경쟁에 나서보자. 무명 신인작가의 설움을 씻을 호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당시 서울의 한 조그만 잡지사에 근무하고 있던 저는 동료 직원들의 양해를 얻어 반년 넘게 소설쓰기에 매달렸습니다. 신촌의 와우아파트라고 아시죠? 어느 날 한 동(棟)이 와르르 무너져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아파트. 제가 그 아파트의 단칸방 하나를 얻어 살고 있었습니다. 돌이 갓 지난 딸애가 엉금엉금 제게로 기어오면 발로 아이를 밀어내면서 원고 칸을 메워나갔지요. 그렇게 완성한 작품이 홍경래의 난을 소재로 한 장편 역사소설 이었습니다.
운 좋게 그 소설이 당선되었습니다. 신문 한 면 가득히 심사평, 당선소감, 인터뷰 등 저에 관한 기사가 실린 다음 날부터 세상이 달라지더군요. 작품을 들고 가도 거들떠보지 않던 문학지 편집자들이 먼저 연락을 해서 작품을 달라지 않나, 미리 장편 출판을 계약하자면서 출판사 사장들이 번갈아 찾아오질 않나(교수님 생전에는 문자메시지 같은 것도 없어서 모르시겠지만, 요즘은 이런 문장 뒤에는 꼭 ‘ㅎㅎ’ 혹은 ‘ㅋㅋ’ 같은 이상한 부호를 붙인답니다. 옛사람들이 쓰던 ‘가가(呵呵)’와 흡사합니다).
아무튼 저는 그 덕에 화곡동에 마흔두 평짜리 단독주택을 마련했으며 전업작가의 길로 나선다고 출판사도 때려치웠습니다.
매일 이 신문에 연재되고 있던 그 해, 교수님으로부터 뜻밖의 엽서를 받았습니다. 좋은 역사소설거리가 있어서 작가에게 주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교수님의 존함은 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저는 놀라움과 반가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화신백화점 옆에 있던 ‘종로다방’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교수님을 뵈었습니다. 단아한 모습에 말씀도 적으셨지요. 뒤늦게 셈해보건대, 그때 교수님은 쉰을 갓 넘긴 연세였고 저는 겨우 서른에 올라선 철부지였습니다. 온전히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그때 주신 말씀의 대강은, 여러 해 동안 ‘기축옥사(己丑獄事)’에 관한 연구를 해봤는데 연구를 할수록 여기에 숨겨진 이야기가 많음을 알게 되었다,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이 이야기를 논문으로는 생동감 있게 독자에게 전할 수가 없다, 누군가 역사에 관심 있는 작가가 이를 소설로 형상화해주면 좋겠다, 그러면서 관련 저술이 든 노란 봉투를 제게 넘겨주셨지요. ‘역사가는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없지만, 작가는 위대한 역사가가 될 수 있다’는 말을 인용하시며 저를 부추겨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날 선선히 제가 그 일을 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던 것도, 저 또한 이전부터 이 사건에 소설가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589년 전주에서 정여립이 반란을 꾀한다는 고변이 있었고 이로써 수백 명이 희생을 당한 옥사의 실상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그동안 논란이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서 송익필 등의 음모론을 실증적으로 제기한 최초의 현대 역사가가 바로 교수님임은 누구도 부인치 못합니다.
서경덕, 이황, 기대승, 이이, 조식 같은 선학(先學)은 물론 정철, 유성룡, 이발, 김성일, 이산해, 김장생, 조헌, 허엽, 허봉, 김우옹, 성혼 등 조선 중기의 내로라하는 명사들이 죄 이 사건에 관련돼 있었기에 이를 소설화하는 일은 곧 우리 역사소설의 한 정점을 긋는 일이며 그 작업은 지난하고 시간이 많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저는 당시에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하여 교수님께 약속을 드리고서도 저는 쉬 작업에 들 준비를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딴짓거리를 하며 세월을 허비하는 중에도 그 약속은 무슨 채무인 양 제 심중에 남아 무게를 더해갔던 것도 사실입니다. 10년이 더 지나서였습니다. 홀연 교수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뒤늦게 사실을 안 저는 장례에도 참석치 못한 죄스러움에 한동안 몸을 떨었습니다. 돌아가시기 두 해 전쯤이었던가요? 교수님은 또 한 번 제게 서신을 주셨지요. 대전에 내려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잘 지내느냐? 그런 안부의 글이었지만 저는 마치 질책하시는 것만 같아 답장조차 드리지 못했습니다.
15년 전쯤 됩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여겨 방학을 맞아 안동 지례마을에 들어갔습니다. 산골 한옥 뒷방에 들앉아 한 주일 꼬박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 500여 장을 만들었는데 다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한 달 후, 읽어보곤 주저 없이 지워버렸기 때문입니다. 2005년 교환교수로 중국 남경에 가 있는 동안은 전초작업이라 여기며 화담 서경덕에 관한 장편소설 한 편을 완성했습니다.
교수님, 종로다방에서 만났던 그 새파란 작가가 어느새 교수님보다 더 긴 세월을 대학 교단에 있다가 재작년 정년을 맞았습니다. 그러곤 소설을 쓰겠다고 충청도 연산 산골에 임시 거처도 하나 마련했습니다. 첫해를 어영부영 보낸 뒤, 올봄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지난 주말 1300장을 넘겼습니다. 2500장은 돼야 마무리가 될 듯합니다. 일단 이야기를 주재하는 동안은 퇴계, 율곡 같은 이도 사료를 근거로 제 의도껏 주물러볼 요량입니다. 제가 이미 율곡 죽은 나이보다 17년을 더 살고 있기에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1584년에서 1589년, 이 과거 5년의 시간에 몰입돼 있는 요즘의 나날이 제겐 경이입니다. 제 거처에서 5분만 걸어 나가면 김장생이 걸었던 길을 만나고, 차로 10분만 나가면 정여립이 머물렀던 절간 마당에 섭니다. 아, 그래서 누군가가 저로 하여금 이맘때 이곳에 있게 했구나 싶은 생각마저 들 때가 많습니다. 명랑하게 들려오는 매미소리, 새소리도 제겐 16세기 말의 것이 됩니다.
성패는 뒷전으로 돌리겠습니다. 내년 봄날, 상하 두 권짜리 소설책을 존경하는 김용덕 교수님 묘소에 놓을 수 있다면, 종로다방에서 드렸던 제 약속을 지키는 것이 된다고 여기겠습니다.
최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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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경북 경산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 졸업.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 등단. 1979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역사소설 ‘서북풍’ 당선. 1981년~현재 우송대 교수. 고려대문인회 회장 역임. 현재 한중백주문화교류협회 회장. 저서로 창작집 ·, 장편소설 ·, 산문집 ·· 등.
이 영화의 볼거리는 크게 곱게 늙은 여배우 다이안 레인, 프랑스의 아름다운 풍광, 여행길에서 남편 아닌 남자에게 느낀 40여 시간의 미묘한 이성적 감정 등이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은 영화 로 유명한 감독이다. 그의 딸도 2017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코폴라 감독의 아내 엘레노어 코폴라가 80세에 만든 첫 장편 상업영화다. 일단 코폴라라는 이름만으로 믿고 볼 만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80세의 나이에서 오는 솔직함이랄까, 남편이 아닌 남자와 40시간 동안의 자동차 여행은 엘레노어 코폴라의 실화였는데, 감추기 어려운 감정들을 오히려 남편이 도와줘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다.
영화에서 앤(다이안 레인 분)은 남편(알렉 볼드윈 분)과 전세 비행기로 칸에서 부다페스트로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앤이 귀가 아파 도저히 비행기를 탈 수 없다고 하자 남편의 사업 동료인 자크(아르노 비아르 분)가 자기 차로 파리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제의한다. 7시간이면 갈 수 있는 길을 자크는 군데군데 들르며 시간을 지체한다. 앤은 빨리 파리로 가자며 재촉하면서도 자크의 낭만적인 매력에 점차 빠져든다. 자크는 앤에게 파리는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 있다며 능청을 떤다. 남편은 바람기 많은 프랑스 남자를 조심하라고 조언한다. 자크는 여행 중에 틈틈이 늑대로 변할 소지가 있었지만, 파리까지 앤을 잘 데리고 간다. 그리고 마지막 키스. 파리에 도착하면서 영화는 끝나지만, 앤은 자크와의 재회를 암시하는 여운을 남긴다. 자크는 앤에게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요?” 하고 묻는다. 특별히 불행하지도 않지만, 행복하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남편과 살 만큼 산 유부녀의 틈새를 노린 질문이다. 일부일처제의 지루함을 찌른 바람둥이 프랑스 남자의 수작이다.
또 하나의 볼거리는 영화제로 유명한 칸에서부터 프랑스 남동부를 영화로 돌아보는 것이다. 실제로 관광으로는 가기 어려운 곳이다. 평화로운 농촌 풍경의 액상 프로방스, 로마의 유적 가르 수도교, 프랑스 제3의 도시 리옹과 뤼미에르 박물관, 그리고 유명한 포도주와 음식들이 등장한다. 스토리상으로는 안 넣어도 되는데 감독이 의도적으로 프랑스의 풍광을 담으려고 여기저기 들른 것으로 보인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다이안 레인의 매력이다. 1965년생으로 170cm의 늘씬한 여배우다. 우아하면서도 그윽한 미소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한때 청소년들의 우상이었던 소피 마르소처럼 책받침 미녀로 유명했다지만, 오십 고개를 넘다 보니 많이 늙기는 했다. 그러나 곱게 잘 늙었다.
주사(酒邪)는 ‘술을 마신 뒤에 나쁜 버릇으로 하는 언행’을 말한다. 생전의 아버지는 주사가 심했다. 언행에 더해 고압적이고 폭력적이었다. 그 당시는 필자가 사춘기라서 그런 주사를 참지 못하고 욱하곤 했다. 그 결과는 가출이었다. 한창 감정이 예민했던 고등학생 때 무려 4차례나 가출을 했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맨손으로 상경해 서울에서 장사를 하며 자리를 잡았다. 한때는 우리가 살던 용산 지역의 돈은 우리가 다 쓸어 담는다는 소리도 들었다. 복잡한 재래시장에서 주류 대리점을 열고 주류 배달 화물차를 무려 58대나 운행했으니 어지간한 기업이었다. 그렇게 집안을 부유하게 일으키는 과정에서 아버지는 엄청난 스트레스가 있었을 것이다. 전쟁 후의 사정이 어디든 그랬듯 먹고사는 것은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경쟁에서 지면 문 닫는 것이고 이겨야만 살아남았다. 돈이 모이는 곳이 조용할 리 없다. 동네 폭력배부터 경찰, 경쟁업체, 상인조합, 거래처 등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세상은 전쟁터이고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남자는 강해야 한다며 복싱, 유도, 태권도, 합기도 등 격투기를 배워 반드시 초단 이상까지 따라고 가르쳤다.
아버지는 무서운 것이 없었다. 나름대로 맨땅에 헤딩해서 성공했다는 자부심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쭐하고 으스대는 면이 강했다. 경찰 출신으로 당시로서는 큰 키인 185cm 장신에 힘도 세서 당할 사람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 말릴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인 면도 있었다. 특히 술에 취해 주사를 부리면 동네 사람들이 다 불안해했다. 집에 있는 우리 어린 형제들은 더 공포스러웠다. 아버지가 만취한 날은 밖에서의 주사 소문이 먼저 들려왔다. 집에 들어오셨을 때는 우리 형제들을 이유 없이 나무라셨다. 우리는 자는 척하기도 했고 장롱 속에 숨어 아버지의 주사가 어서 잦아들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면 집안 분위기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잘못이 있으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겠지만, 술이 올라 벌게진 얼굴로 아무 잘못도 없는 우리들에게 큰 소리로 마구 호통을 치니 그런 주사를 점점 참기 어려웠다. 기껏 하는 반발이 가출이었다.
다른 형제들은 잘 참는데 필자는 아버지의 주사를 볼 때마다 분노 조절이 안 되었다. 욱하는 마음으로 가출했으니 돈이 있을 리 없었다. 당장 하루 세끼 먹는 것이 문제라 배를 곯아야 했다. 어쩌다 친구들 집에서 신세를 지기도 했지만, 그 집 부모님들이 눈치 채면 더 이상 신세를 질 수도 없었다. 하루에 호떡 하나로 허기를 달랜 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여러 자식 중 하나가 가출했다고 생각했는지 크게 상심하지도 않았다. 어떤 때는 가출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면 필자만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대판 시끄럽게 하고 나면 아버지는 숙취로 만사 제쳐두고 고생하셨다. 그러니 집 나간 자식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아버지”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 결혼을 일찍 한 것도 일단 집에서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면 아버지의 주사를 더 이상 안 봐도 될 것 같았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도 아버지의 주사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아버지의 주사는 두고두고 트라우마로 남았다. 술로 벌게진 얼굴과 되지도 않는 논조의 큰 목소리가 바로 트라우마다. 그래서 지금도 술집에 갔을 때 옆자리 사람들 목소리가 커지면 당시의 생각이 나서 나와버린다. 당구장에 갔을 때 취객들이 들어와 당구를 치면서 너무 시끄럽게 굴면 게임을 하다가도 나온다. 주인에게 자제시키라는 주문을 해보기도 했지만, 손님 떨어질까봐 대답만 하고 모른 체한다. 늦은 시각 전철 안에서도 취객이 너무 떠들면 다른 칸으로 이동한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주사를 봐온 필자는 술을 마시면 곧바로 조용히 잔다. 술김에 자녀들이 귀엽다며 무슨 얘기를 해봐야 주사가 되기 쉽다. 평소에 맨정신으로 할 말을 왜 술에 취해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물론 술이 오르면 기분이 좋고 흥도 오른다. 그럴 때 조심해야 한다. 어느 날 술이 취해 귀가하면서 전철을 타고 오다가 스마트폰 SNS를 하고 있는 필자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술이 취한 상태에서는 실수하기 쉽다. 그 기분에 SNS를 하는 것은 주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손주를 보러 갈 때마다 아들 집 근처에서 한잔하고 갔다. 손주가 아직 어려서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좀 더 크면 기억할 테니 자제해야 할 일이다.
우리 형제 중 동생이 바로 아버지의 주사를 닮았다. 평소에는 말도 없고 얌전하다가도 술만 취하면 알 수 없는 넋두리에 목소리가 커진다. 더 큰 문제는 술에 취해서 한 행동이 그다음 날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무라면 “술은 취하려고 마신다”며 큰일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 필자가 “술은 즐기기 위해서 마시는 것이고, 어느 정도 취하면 술 마시는 속도를 조절하든지 그만 마셔야 한다”고 말해주면 그런 사람과는 술 마실 맛이 안 난다는 한다. 자기는 술김에 속마음 풀기 위해 술을 마시는데 안 취하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은 계산적인 것 같아 같이 마시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는 것이다.
한번은 둘이 술을 마시다가 형님에게로 갔다. 이미 많이 취했지만 좀 더 마시겠다며 간 술집에서 동생이 마구 큰 소리로 욕설을 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깨져버렸다. 마침 민감한 문제로 어색해하던 형제들 사이가 그날 일로 인해 아예 끊어져버렸다. 동생에게 실수에 대해 형님에게 사과하라고 하자 사과는 했다. 그러나 정작 형님은 사무적으로 사과를 받아들였을 뿐 섭섭한 마음을 풀지 않았다. 술 취해서 한 행동에 대해 너그러운 사회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분명히 있다.
술 좋아하는 우리 집안에 술은 필요악이다. 술을 끊어야겠다는 생각은 없다. 아버지도 돌아가실 때까지 술을 드셨다. 그러니 필자도 술을 오래오래 즐길 것이다. 그러나 필자로 인해 다른 사람이 트라우마가 생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은 늘 한다.
영화가 굳이 심각해야 할 이유는 없다. 한 시간 반을 영화에 투자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적지 않다. 사상이나 이념같이 불필요하게 무거운 지적 허세도 있지만, 우울한 마음을 위로하는 경쾌한 코미디도 있고, 말초 감정을 자극하는 쾌락도 있다. 심지어는 요즘 문화 트렌드에 맞춘 실용적인 영화도 등장한다. 예컨대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을 위한 여행 가이드 영화, 먹는 걸 즐기는 이를 위한 먹방 영화.
모처럼 영화 시사회에 초대되어 남편과 함께 참석했다. 의외로 남편이 순순히 따라나선 데는 주연인 다이안 레인의 힘이 컸다. 어떻게 늙어가나 보자는 핑계로 동행했다. 여행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필자는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파리로 가는 길이라니. 이제는 오래되어 낡은 흑백 사진처럼 빛바랜 에펠탑이나, 샹젤리제 거리의 개선문 정도가 떠오르는 20년 전의 기억을 안고 시사회장에 들어섰다.
왕성한 홍보가 없어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스크린이 몇 안 되는 작은 영화였다. 다만 코폴라 가문의 영화라는 브랜드가 박혀 있어 짝퉁은 아닐 것이라는 믿음은 있었다. 를 만들어 할리우드의 자존심이 된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 가문의 딸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이미 상당한 필모그라피를 쓰고 있으나 엘레노어 코폴라 감독은 낯설다. 그녀는 프랜시스 코폴라 아내로 이 작품이 데뷔작이란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영화 제작자인 남편 마이클(알렉 볼드윈)을 따라 칸에 온 앤(다이안 레인)이 갑작스러운 귀의 통증으로 다음 행선지인 프라하로 떠나지 못하고 남편과 떨어져 마이클의 동료인 프랑스 남자 자크(아르노 비야르)의 안내를 받아 파리로 직접 간다는 자전적 이야기다. 그런데 하루면 도착할 길을 40시간이나 걸려 가게 된 것은 전적으로 대책 없이 낭만적인 프랑스 남자 덕분이다.
대부분의 낭만적 로드무비가 그렇듯이 이 영화도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양한 명승지의 풍광이 있고, 곳곳마다 풍성한 음식이 있으며, 맥락은 없지만 적절한 로맨스가 조미료처럼 들어 있다. 게다가 미국 여자와 프랑스 남자라니! 캐릭터도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창의적이지는 않지만, 이미 익숙하고 우아한 미감의 엔틱 가구처럼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안락의자인 셈이다.
별다른 스토리가 없다 보니 프라하로 떠난 일밖에 모르는 남편은 줄곧 전화에다 대고 “프랑스 남자 조심해!”만 되뇌고 있고, 도덕적인 미국 여자는 “파리로 곧장 가요.”라는 대사만 읊고, 느글느글한 프랑스 남자는 “파리는 어디 안 가요.” 하며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간혹 풀밭에서 피크닉 기분을 내며 세잔의 ‘풀밭 위의 식사’ 장면을 패러디 한다든가 하는 재치는 보이지만, 대체로 익숙한 기시감의 연속이다.
이야기의 빈곤을 느낀 감독이 끼워 넣은 장면들은 맥락이 분명치 않아 조화를 깨뜨린다. 예컨대 우연히 엿들은 전화 통화에서 돈에 쪼들리는 자크의 상황을 드러내는 장면은 그의 허세를 과장하려는 의도겠지만 뜬금없고, 서로 어두웠던 과거를 이야기하며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내용은 작위적이다. 아무리 프랑스라 해도 동료의 아내에게 필요 이상으로 들이대는 것은 지나치지 않은가!
그러나 코폴라 사단의 도움 때문인지 영화는 더 이상 일탈 없이 적절하게 마무리된다. 80대에 접어든 엘레노어의 데뷔작치곤 박수를 보낼만하다. 홍보의 필요로 그랬겠지만, 주연급으로 소개된 알렉 볼드윈은 사실 카메오라 해도 할 말 없는 정도로 5분 뒤 화면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그러면 어떠랴 한 시간 반 동안 프랑스 관광과 음식 구경 푸짐하게 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동대문 DDP에서 루이비통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6월 8일부터 8월 27일까지 무료 전시다. 그런데 명품 브랜드라고 유난히 유난을 떤다. 전시회 관람을 하려면 인터넷으로 사전 예약을 해야 한다. 현장에서 신청을 할 수도 있으나 주말에는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입장할 수 있다. 평일은 사람이 없는 편이라 현장 신청도 별 문제가 없다. 가방은 보관소에 맡기고 들어가야 하며 사진촬영도 가능하다. 보기 나름이겠지만, 전시품이 많은 편이라 한 시간가량은 잡아야 한다. 파리 루이비통 박물관에 있던 전시품들을 실어온 모양이다. 나무 포장박스를 스탠드로 하여 그 위에 전시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루이비통은 서울에서 3초마다 볼 수 있다 하여 ‘3초 백’으로도 유명한 브랜드다. 의류, 시계, 향수, 가방을 생산 판매한다. 원래는 가방으로 출발한 회사다. 관람객들은 대부분 루이비통 가방을 동경하는 젊은 여성들이다. 그러나 핸드백 종류는 많지 않다. 이번 테마가 ‘비행하라, 항해하라, 여행하라’이어어서 그런지 여행용 대형 트렁크가 많다. 혹시 루이 비통 가방 하나 살 수 있을까 해서 간 사람들은 실망한다. 마지막 전시실에 매장이 있긴 한데 루이비통에 관한 책, 향수, 액세서리 종류 정도만 판다. 단체 여행할 때 여행사에서 공짜로 나눠주는 네임택이 25만원, 작은 수첩도 25만원이다. 가죽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란다. 연필 두 자루에 25만원이라 해서 좀 의아해했더니 연필 겉을 가죽으로 둥글게 둘러쌌다고 설명한다. 비싸다는 반응을 보이면 루이비통 전시회에 올 자격이 없어 보일지 몰라 고개만 끄덕였다.
전시장에는 1906년 여행용 트렁크부터 전시되어 있다. 그 당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흔히 보던 평범한 사각의 트렁크다. 그런데 루이비통이 유명해진 것은 명품으로 정성껏 제대로 만들었기 때문이란다. 프랑스에서 온 장인이 가죽을 직접 다루는 모습도 보여준다. 가방의 용도는 내용물을 보호하는 것이라 견고해야 하고 운반도 해야 하니 가볍게 만들어야 한다. 루이비통은 그 목적에 잘 맞춰 만들어진 덕분에 오늘날 명품의 반열에 올랐다.
원래 루이비통은 산골 소년이었다. 목수 아버지 밑에서 어깨너머로 목수 일을 배웠다. 그러다가 산골에서 일생을 보내기는 싫어 집을 나와 파리까지 걸어서 한 달 만에 도착한다. 파리에서 가방가게에 취직을 한 그는 가방 가게에서 가방을 파는 일뿐 아니라 여행을 떠나는 부유층의 짐을 대신 싸주는 일도 했다고 한다. 루이비통은 수납 정리에도 소질이 있어서 나폴레옹 3세의 황실에까지 스카우트되어 간다. 그가 33세 되던 해 황실의 외제니 황후가 파리에서 가방가게를 해보라며 지원해준다. 그 무렵 기차, 배, 비행기, 자동차 등으로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여행객들이 많아진다. 여행 가방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루이비통의 가방 가게도 날개를 단다.
이번 루이비통 전시관에 나온 제품들은 주로 여행용 가방이다. 핸드백을 연상하면 안 된다. 의상이 구겨지지 않게 옷걸이까지 있는 트렁크, 화장품과 화장 도구들이 깨지지 않고 흔들리지 않게 수납 칸을 만들어놓은 가방도 있다. 음악가들에게는 악기를 담을 수 있는 가방을 맞춤제작해주기도 한단다. 막상 보면 별것도 아닌데 명품이라며 열광하는 이유가 뭔지 보러 갔다. 갖다 오니 루이비통 가방의 역사만 기억에 남는다.
발트 여행에 배낭 하나만 메고 온 사람은 필자 한 사람뿐이다. 여행 짐 싸는 것은 프로라고 자부할 수 있다. 평소 메고 다니던 배낭에 옷가지 몇 개와 세면도구만 추가해서 넣으면 된다. 배낭의 구조가 여러 가지를 나눠 넣을 수 있게 되어 있어 편리하다.
여자 혼자 미국을 종단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에서 보니 장거리 여행에서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버리라고 했다. 책 한 권까지도 읽은 페이지는 찢어버릴 정도로 짐을 최소화하는 장면이 있었다.
동행한 사람들은 모두 손으로 끄는 가방을 한두 개 더 가지고 왔다. 그래서 비행기를 탈 때 그 짐을 부쳐야 했다. 비행기 안 수화물 칸에 부치는 짐에는 배터리가 들어 있으면 안 된다. 그런데도 스마트폰 등 배터리 용도가 많아 여분의 배터리를 넣어오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수화물을 부치고 나서 정밀검사 때 배터리가 검색되면 짐을 풀어 배터리는 빼서 휴대용 가방에 넣어서 가져가야 한다. 때문에 단체 출국 체크인 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또 그렇게 부치는 짐이 분실되거나 다른 도시로 가는 사고가 종종 일어난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여행은 엉망이 된다. 그래서 필자는 부치는 짐은 아예 안 가지고 간다.
사람들은 여행지에서 패션쇼를 하듯 한다. 여성들이 그렇다. 일단 가방을 풀고 나면 바로 옷부터 갈아입는다. 호텔 체크인을 하고 레스토랑에 식사하러 가면 벌써 새로운 옷들로 갈아입고 나타난다.
6박8일간의 여행인데 필자의 작은 배낭 안에서 매일 갈아입을 옷이 나왔다. 반팔, 긴팔이 다 나왔다. 사람들이 희한하게 생각했다. 필자는 여행용 옷은 구겨지지 않는 기능성 옷들로 준비한다. 돌돌 말아 배낭에 넣으면 부피도 별로 차지하지 않는다. 컬러도 백색, 흑색, 붉은색으로 준비하면 매일 옷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말 등은 한 번 신고 버릴 만한 낡은 것들을 가지고 간다. 그러니 짐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번 여행에서는 짐을 더 간소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정장 드레스 코드라면 일반 넥타이보다 나비넥타이가 부피도 적고 분위기도 다르다. 모자도 부피를 차지하지 않으니 한 가지만 쓰기보다는 한 개쯤 더 갖고 가도 될 만하다. 상의 재킷은 주머니가 많은 옷이 좋다. 카메라, 여권 등 중요 소지품을 넣고 다니면 잃어버리지 않는다. 요즘 옷은 주머니가 없는 경우가 많아 주머니가 많이 달린 조끼를 입기도 하는데 주머니가 많은 재킷이면 둘의 용도를 충족한다.
비행기를 탈 때는 생수를 버리고 가야 한다. 이때 물만 마시고 빈 페트병은 그냥 가지고 다니면 아주 유용하다. 식사할 때 물을 보충해두면 따로 생수를 사는 데 필요한 잔돈을 만들 필요가 없다.
귀국 비행기에서는 필자가 부칠 짐이 없는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오버차지당할 짐들을 나눠 구제받을 수 있었다. 귀국할 때는 쇼핑해놓은 것들이 많아 1인당 제한 무게인 20kg을 넘기 쉽다. 필자는 여행지에서는 아무것도 사지 않는 것을 신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