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겨울, 미국에 사는 아들과 딸을 만나러 갔다. 우연한 기회에 미국 유학을 마친 아이들이 그곳에 터 잡아 산 지 10년이 흘렀지만 사는 것 보러 미국에 갈 시간이 없었다. 직장생활에 매어 있던 몸이라 불가피하게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야 꿈에도 그리워하던 아이들을 만나러 갔다. 출발하던 날 인천공항은 겨울비가 왔는데 비행기는 멋진 구름바다 위를 날았다. 창밖의 하늘은 그야말로 판타스틱했다.
국내 항공이 아닌 유나이티드 항공을 이용하면서 내심 걱정을 많이 했다. 많은 외국인 사이에 끼어 앉아 불편하지는 않을까 하는 막연한 걱정은 언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도 예전과는 다르게 한국인 탑승객도 꽤 많았다. 게다가 영어와 한국어로 한 번씩 해주는 기내 안내 멘트는 불편했던 마음을 조금씩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기내식으로 불고기와 치킨, 따뜻하고 통통한 샌드위치 한 조각을 먹었다. 후식으로 제공되는 커피 한 잔을 들고 느긋하게 창문을 통해 구름바다를 내려다봤다. 저 구름바다 밑에서 수많은 사람이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콜로라도에 정착해 10여 년째 살고 있는 아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까? 창밖 구름바다를 보며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비행기를 탄 지 11시간 만에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해 미국 국내 항공으로 환승, 2시간을 더 날아갔다. 어느새 하나 둘, 불빛을 밝히는 덴버 공항이 시야로 들어왔다.
여행의 피로감이 한꺼번에 밀려와 곤한 첫날 밤을 보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눈 폭탄이 세상을 휩쓸고 지나갔다. 덴버가 춥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리는 광경은 난생 처음 보는 듯했다. 온 식구가 마당으로 나와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계속 쏟아지는 눈을 다 처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을 맞으며 마냥 신이 난 손자 녀석과 함께 눈사람도 만들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한낮이 되자 햇살 아래 그토록 많은 눈이 요술처럼 녹아버렸다.
덴버에서의 첫 휴일, 아이들은 로키마운틴으로 스키를 타러 가자고 했다. 스키 세트 일체는 미리 준비돼 있었다. 오래전 용평스키장에서 아이들에게 처음 스키를 가르쳐줬더니 하루 전날 저녁부터 너무도 자연스럽게 스키와 스노보드를 손질하던 모습이 기억났다.
덴버에서 스키장으로 출발할 때 말갛던 하늘이 갈수록 흐려지더니 출발한 지 한 시간이 지나자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콜로라도는 해발 약 1600m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 공기가 맑고 하늘도 파랗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 로키마운틴이 가까워올수록 더 많은 눈이 내렸지만 스키장을 향하는 차량 행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천신만고 끝에 스키장에 도착해 하염없이 쏟아지는 함박눈을 맞으며 스키 장비를 착용하고 곤돌라에 올랐다. 끝없이 올라가는 곤돌라에서 내려다본 로키마운틴의 스키장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미끄러지듯 슬로프를 내달리는 사람들의 행렬이 마치 동화 속 나라의 모습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가족 단위로 행복하게 스키장을 누비고 있던 그날은 마침 성탄절이었다.
스키장 정상에 도착해 곤돌라에서 내리니 눈발이 더욱 거세졌다. 아름다운 설경과 광활한 급경사 슬로프. 로키마운틴의 스키장 풍경에 매료되고 말았다.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생긴 나무 위에 소복이 내려앉은 눈송이는 때때로 불어오는 산바람에 후드득 떨어졌다. 몇 번의 워밍업을 마친 후 드디어 슬로프에 섰다. 스키를 타지 않은 지 몇 년이나 됐으니 처음 타는 사람처럼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여러 차례 연습을 한 끝에 그린코스로 향했다. 그린코스는 기초 코스를 막 끝낸 다음 가는 중급 코스인데, 생각보다 경사가 가팔랐다. 처음엔 온몸에 잔뜩 힘을 주고 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손자 녀석은 옆에서 보드를 타면서 할아버지를 격려했다. 이 멋진 곳에서 아내와 아들, 딸네 가족 등 온 가족이 함께 즐긴 스키와 보드.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밀려왔다.
돌아오는 길에 글렌우드 스프링스 노천온천에 들렀다. 하얗게 눈이 덮인 산을 바라보며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세상의 온갖 피곤함과 번잡스러움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날의 멋진 설경은 두고두고 마음에서 그리움처럼 피어오르곤 한다.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 네 쪼고만 발자국을 눈이 자꾸 내려 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국을 찾아 나서면 일 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윤동주 시인의 ‘눈 오는 지도(地圖)’의 한 대목이다. 누구든 눈이 내리는 겨울엔 추억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그리움에 가슴앓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 때문에 설레는 연인들도 있다. 내게도 아련한 추억이 있다. 어린 시절, 시골에는 정말 눈이 많이 왔다. 어려서 더 그렇게 보였겠지만 눈이 왔다 하면 무릎, 가슴 높이까지 쌓이는 게 다반사였다. 눈길을 내야 이웃집에도 다닐 수 있었고, 야외활동은 어느 정도 눈이 녹아야 했다. 시골 마을은 온통 눈으로 덮인 세상이 되고, 크리스마스트리 장식 같은 소나무는 계속 내리는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가지를 늘어뜨려 눈을 털어내곤 했다. 대부분 그렇듯 시골 마을이라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눈 내린 하얀 지붕 굴뚝 위로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감나무의 언 홍시에도 흰 털모자가 씌워져 있었다. 아이들은 눈밭을 뒹굴며 눈싸움을 하느라 옷이 젖는 줄도 몰랐고 해질녘까지 망아지처럼 뛰어다녔다. 그러다 손이 시려우면 개구쟁이들은 근처에서 짚단 몇 개를 가져와 모닥불을 피우고 언 몸을 녹이곤 했다. 젖은 옷 말리느라 불 가까이 다가갔다가 그만 바지를 태워 먹고는 ‘앗! 뜨거워!’ 하며 날뛰던 적도 여러 번이었다. 엄마한테 혼날까봐 구멍 난 바지를 고구마 통가리 뒤에 꼭꼭 숨겨놓고 며칠 끙끙 앓다가 이내 발각되어 혼쭐이 나기도 했다.
장독대의 크고 작은 항아리 위에 시루떡처럼 흰 눈이 덮이면 참새떼들이 먹이를 찾아 이 집 저 집 울타리를 몰려다니며 시끄럽게 굴었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우리 집 뒤뜰 처마 밑엔 소에게 먹일 쌀겨가 담긴 드럼통이 항상 놓여 있었다. 참새들이 울타리로 몰려오는 것은 이 쌀겨 때문이었다. 수시로 드럼통으로 날아와 마음껏 만찬을 즐기고 갔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미리 드럼통 뚜껑을 열고 지지대에 긴 새끼줄을 붙들어 매어놓고 참새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고는 참새가 울타리를 벗어나 쌀겨 드럼통으로 들어가는 바로 그때 새끼줄을 잡아당겼다. 드럼통 뚜껑이 ‘덜컹!’ 하고 닫히는 순간 잽싼 놈들은 재빨리 빠져나가지만 두세 마리는 갇힌 채 ‘후다닥!’ 날갯짓을 한다. 그렇게 어린 팔뚝이 들어갈 만큼 뚜껑을 열고 갇힌 참새를 한 마리씩 꺼내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러한 행운은 눈이 많이 내려야 가능했다. 들판 위에 눈이 덮여 먹을 것이 없어야 참새들이 인가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지금도 가끔 시골집이 그립다. 함박눈이 내려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이던 집, 그 위로 참새, 토끼, 족제비, 너구리 발자국이 다 찍혀 누가 왔다 갔는지 알 수 있었던 집, 부모님과 어린 형제들이 평화롭게 잠들던 초가집, 지금은 재개발로 흔적조차 없는 내 마음속 초가집. 나이 들수록 그 집에 가고만 싶다.
요즘은 겨울에도 눈을 보기가 쉽지 않지만, 내가 어렸던 시절에는 지금의 겨울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몹시 춥고 눈도 많이 왔다. 그때는 함박눈이 탐스럽게 내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온 세상이 하얗게 덮여 있곤 했다. 그 시절엔 눈 내리는 정경만 봐도 기분이 좋았다. 나이 든 지금도 눈 내리는 날엔,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어린 시절의 교회당
어린 시절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될 때쯤이면 실없이 바깥을 자주 내다봤다. 크리스마스이브에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주기를 바라면서. 크리스마스에 함박눈이 내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멋졌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교회당에 모여, 새벽 송 돌기 위한 준비를 하느라 시끌벅적했다. 그 웃음소리가 그립다. 골목을 돌며 새벽 송을 할 때 함박눈이라도 내리면 모두들 얼마나 좋아했던지! 교회당 오빠들, 언니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웃음꽃을 피웠던 그 시간들이 그립다.
겨울이면 얼어붙었던 한강
그 시절에는 겨울 날씨가 너무 추워 한강물이 두껍게 얼어붙곤 했다. 수북하게 덮여 있는 눈을 헤치고 보면 두꺼운 유리 같은 얼음이 보였다. 겨울이면 한강변에서 살던 사람들은 이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도 타고, 썰매도 타고, 미끄럼도 탔다. 다양한 놀이도 없던 때라 한강 얼음판 위에서 하루 종일 노는 아이가 많았다. 한강변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도 그랬다.
작은오빠가 중학교 때는 스케이트를 탔지만, 초등학교 때는 썰매를 만들어서 친구들과 타고 놀았다. 나보다 세 살이 더 많은 작은오빠는 미끄럼도 태워주고, 썰매도 태워줬다. 미끄럼을 탈 때는 앞에서 끌어줬고, 썰매를 탈 때는 뒤에서 밀어줬다. 그러다가 얼음이 ‘쩌엉!’ 하는 소리를 내며 금이 갈 때가 있다. 어린 나는 두려움에 그만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다리가 풀리고 오금이 저려 걸을 수가 없었다. 엉덩방아도 부지기수로 찧었다.
작은오빠는 그럴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워 바지에 붙은 눈을 털어주며 괜찮다고 달래곤 했다. 그 시절 나는 작은오빠가 든든하고 마냥 좋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작은오빠도 그때는 어린 나이였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작은오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눈 오는 날의 친구들
옛날엔 눈이 오면 함박눈이 쏟아지기도 했고 눈보라도 매서웠다. 걸을 때 발이 푹푹 빠질 만큼 폭설이 내리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학교 가는 먼 길이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친구들과 함께 가면 덜 지루하고 거리도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등하굣길에는 늘 친구들이 함께 어울려 걸었다.
학교도 멀고, 교회도 멀고, 친구네 집도 여기 하나, 저기 하나, 뚝뚝 떨어져 있는 마을에서 친구들과 만나 흰 눈을 밟으며 놀이를 했다. 때로는 발자국을 차례로 찍어 코스모스 꽃도 만들고 국화꽃도 그렸다. 장갑이 젖는 줄도 모르고 눈싸움을 하다가 손이 시리면 호호 불어가면서 마냥 즐겁기만 했다. 그 친구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는지! 눈 오는 날이면 어릴 적 친구들이 더 보고 싶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있는 12월에는 소중한 인연들과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하곤 한다. 꼭 생일처럼 축하할 일이 없더라도 한 해 동안 즐거웠던 추억이나 고마웠던 마음을 담아 카드 한 장 선물해보면 어떨까? 시중에서도 다양한 카드를 사서 쓸 수 있지만, 정성을 더해 직접 만들어준다면 더욱 뜻깊은 선물이 될 것이다. 수채화와 캘리그라피를 응용해 카드는 물론 다양한 소품 제작 방법까지 알려주는 ‘오늘부터 수채화&캘리그라피’를 책방에서 만나봤다.
참고 도서 ‘오늘부터 수채화&캘리그라피’(고은정 저) 자료 제공 즐거운家
입문자도 쉽게 따라 하는 친절한 기초 가이드
수채화나 캘리그라피를 배워본 적 없더라도 책의 안내대로 차근차근 해나간다면 마음에 드는 작품을 완성할 수 있다. 이 책은 작업에 필요한 도구의 종류와 구입 요령, 그러데이션 등 기본적인 수채화 기법을 다양한 이미지와 더불어 상세하게 설명한다. 기초 단계라 해서 무조건 단순한 기법만 보여주는 건 아니다. 소금, 알코올, 마스킹액 등 일반적으로 쓰이는 물감과 붓 외의 소재로도 표현할 수 있는 쉽고 독특한 방법들을 소개한다.
빠짐없이 꼼꼼하게 보여주는 채색 순서도
레시피, 취미 안내서 등을 보고 순서대로 따라 하다 보면 간혹 중간 과정이 생략되거나 이미지 없이 글로만 묘사돼 있어 헷갈리는 경우가 있다. 수채화는 유화(또는 아크릴화)와 다르게 덧칠을 했을 때 본래의 색을 표현하기 어려워 수정이 쉽지 않다. 따라서 물감을 칠할 때의 순서도 중요하다. 무작정 칠했다가는 원하는 그림을 완성하지 못할 수도 있다. 저자는 채색 순서를 최대한 촘촘하게 단계를 나눠 순서에 따른 이미지와 함께 설명한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감성 소품 만들기
수채화와 캘리그라피를 응용해 다양한 일상 소품을 만드는 방법도 보여준다. 무늬가 없는 책갈피, 편지봉투, 연필꽂이, 머그잔 등에 자기만의 감성을 담은 그림과 글씨를 새겨넣는다. 조금 만족스럽지 않아도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만의 소품이라는 데 의미를 두자. 단, 여분이 없는 재료에 작업을 할 때는 아무래도 주의가 필요하다. 미리 스케치북 등에 도안을 그려보고 충분히 연습해보길 권한다.
책에서 발견하는 또 다른 즐거움
#plus 1
‘글씨만 예쁘게 쓰면 되겠지’ 하기 쉽지만, 막상 캘리그라피에 도전해보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붓이나 붓펜 등의 사용이 익숙지 않고, 글자 간 균형과 조화를 맞추는 게 생각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초보자라면 전문가의 글자를 보고 똑같이 베껴 쓰는 연습이 도움된다. 책에 실린 한글과 영문 캘리그라피 연습장을 활용하면 이러한 과정을 익힐 수 있다.
#plus 2
수채화를 하다 보면 색칠보다 스케치가 더 어렵게 느껴질 때가 있다. 채색은 눈에 보이는 물감을 칠하면 그대로 나타나지만, 밑그림은 보는 대로 형태를 표현하는 게 쉽지 않다. 다행히 책에 나온 수채화들은 부록에 실린 도안을 이용해 그대로 스케치해볼 수 있다. 도안 뒷면에 먹지를 놓거나 연필로 전체를 칠한 후 수채화 종이를 위에 얹어 따라 그리면 된다.
#plus 3
책에도 꼼꼼하게 설명이 돼 있지만 아무래도 붓놀림이나 물감의 농도 등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저자가 운영하는 유튜브(369star) 채널에 올라온 다양한 수채화, 캘리그라피 강좌를 보면 사진으로는 부족했던 부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책에는 소개되지 않은 활용법들도 있으니 새로운 디자인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방문해도 좋겠다.
이름 그대로 ‘땅 한가운데’에 바다가 있다는 의미를 지닌 지중해. 그중에서도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한가운데 라임스톤 보석이 박힌 것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나라가 있으니 바로 ‘몰타(Malta)’다. 코발트빛과 에메랄드빛의 바다에 풍덩 빠져 있다가 고개를 들면 부드러운 라임스톤의 세계가 펼쳐진다. 복잡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미니멀리즘의 미학! 지중해는 수없이 들어본 이름이지만 몰타는 생소하다. 고작해야 제주도의 6분의 1 크기, 인구도 45만 명밖에 안 되는 나라. 이 작은 섬나라에 발을 딛는 순간, “이곳을 모른 채 살았다면 참으로 억울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표 섬인 몰타와 고조, 아프리카와 가장 가까운 어촌 마을 마샬슬록까지, 지중해의 진수를 만나고 싶다면 몰타로 떠나보자.
164년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독특한 역사
시칠리아 섬에서 100km 떨어진 곳에 고요히 앉은 몰타는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사이에 떠있는 탓에 영어를 공용어로 쓰게 될 줄은 생각 못했던 것 같다. 1800년부터 무려 164년 동안이나 영국의 지배를 받다가 1964년에 독립한 몰타에는 정치·문화적으로 영국의 전통과 시스템이 많이 남아 있다.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공용어로 쓰기 때문에 여행할 때 어려움이 없으며, 한국의 어학 연수생들이 많이 찾는 나라이기도 하다. ‘월드워Z’나 ‘왕좌의 게임’ 촬영지로도 유명한 몰타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이 나라만 찾는 여행자보다는 튀니지, 모로코, 알제리 등 북아프리카 국가들을 여행할 때 거처 가는 사람들에게, 평화로운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
몰타의 국민 96%는 가톨릭 신자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 성당을 쉽게 볼 수 있다. 현지인들의 여유로움 가득한 미소는 여행자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에 충분하다. 몰타가 바다 한가운데 고립되어 있는 탓일까? 국민들이 보수적 성향이 강하며 가족 간 유대도 끈끈해 이혼율이 낮다고 한다. 치안과 위생도 잘되어 있다. 정직하고 깨끗한 국민성은 유럽 내에서도 손꼽을 정도다. 복지도 확실해서 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볼 수 없다. 눈만 마주쳐도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는 사람들. 노부부가 벤치에 나란히 앉아 해가 지는 쪽을 말없이 바라보는 평화로운 모습은 몰타가 어떤 나라인지를 말해주는 듯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제목의 영화도 있지만 몰타는 이 세상에 노인을 위한 나라도 있으니 한번 와서 살아보지 않겠냐고 말을 건네는 듯하다.
중세로 떠나는 시간여행, 발레타와 음디나
몰타의 수도이자 7000년 역사를 지닌 요새도시 발레타는 세계에서 가장 밀집된 역사지구인 동시에 유럽에서 가장 작은 크기의 수도다. 도시 전체는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몰타’라는 국가명은 6개 섬 중 대표 섬인 몰타에서 따왔다. 몰타는 수도 발레타가 있는 가장 큰 섬 몰타와 고조 섬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고, 나머지 섬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다. 발레타는 행정과 비즈니스의 중심지로 언제나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성 요한 대성당과 몰타 기사단장 궁전, 국립고고학박물관이 유명하다. 아름다운 건축물들 사이에선 아방가르드 예술에서부터 전통적인 교회 연회에 이르기까지 연일 다양한 이벤트가 펼쳐진다. 아기자기한 가게들과 보석가게들, 로맨틱한 카페와 레스토랑은 여행자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옛 수도인 음디나는 중세시대의 건물이 많이 남아 있어 노블시티(novel city)로 불리는데, 오늘날에는 몰타의 최고 부유층이 사는 곳으로 유명하다. 중세와 바로크시대의 건축물이 독특하게 조화를 이루는 골목길들은 작은 자동차가 겨우 지나갈 만큼 좁다. 이런 도시 구조는 적들이 쏜 화살이 멀리 날아가지 못하게 하고 말도 빨리 달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세상 어느 것 하나에도 이유 없는 것이 없다. 밤이면 정적에 가까울 만큼 조용하고 절제된 분위기를 풍겨 ‘침묵의 도시’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고즈넉한 휴식을 취하기에 더없이 좋다.
블루와 라임스톤이 조화된 미니멀리즘 도시
몰타는 크게 두 가지 색깔로 표현할 수 있다. 하나는 블루와 에메랄드빛 바다이며, 또 하나는 구시가지를 기억나게 하는 부드러운 라임스톤색이다. 두 가지 컬러로 세상을 보여주는 몰타는 단조롭다기보다 정갈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훼손되지 않은 자연의 미로 가득한 고조 섬에 비해 몰타 섬은 좀 더 현대적이라고 말하지만 인공미 가득한 세상에서 온 여행자의 눈엔 고조 섬도 몰타 섬도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크리스마스가 임박한 몰타의 풍경. 산타클로스 인형이 건물에 대롱대롱 매달려 벽을 타고 올라가고 있다. 그 모습만으로도 이 나라 국민들이 얼마나 낙천적인지를 알겠다. 매순간 숨이 막힐 정도로 진지하고 투쟁적인 나라에서 온 여행자는 벽에 매달린 산타클로스 인형을 보며 삶이 매사 그렇게 진지하고 투쟁적일 필요가 있는 건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몰타의 과거 흔적이 남아 있는 고조 섬
고조 섬은 ‘칼립소의 섬’으로도 불린다. ‘칼립소’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요정인데, 오디세우스가 아름다운 그녀와 함께 7년을 머물렀던 동굴이 고조 섬 북쪽에 있다 한다. 몰타 섬에서 40분이면 닿는 고조 섬. 그곳으로 가는 페리 안에서 만난 아이들의 쾌활한 웃음은 여행자의 피로를 한방에 날려버릴 만큼 맑고 눈부셨다. 그 순간 여행자의 나라에 사는 아이들의 그늘지고 지친 표정이 떠올라 한없이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고조선이라는 이름을 연상시키는 고조 섬에는 이름과 어울리게도(어울리는) 선사시대 유적지 간티야 거석사원이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7세기 고조 섬의 주도(主都)였던 빅토리아 요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작은 성당과 성채(城砦), 아기자기한 카페와 와이너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은 몰타 섬과는 또 다른 정취를 느끼게 한다. 고조 섬 북쪽에 있는 간티야 거석사원은 기원전 3600년에서 3000년경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영국의 스톤헨지보다 100년이나 앞선 것이라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가 얼마나 강대국 우선으로 순위를 매기며 살고 세계 곳곳에 있는지 깨닫게 됐다. 그동안 원조로 알려진 것이 사실은 원조가 아니었다. 알고 보면 역사가 더 깊고 가치 있는 진짜들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몰타도 그중 하나다.
현지인들의 삶의 향기가 느껴지는 마샤슬록 어촌 마을
몰타 최대의 어촌 마을 마샤슬록은 15~16세기에 터키군과 나폴리군이 격전을 벌인 곳이라한다. 알록달록한 무지갯빛의 몰타 전통 배 ‘루츠(Luzz)’가 코발트빛 바다 위에 떠 있는 모습을 보면 마치 예쁜 그림엽서를 보는 듯하다. 건물 사이의 네모난 틈새로 보이는 바다가 액자 속 그림처럼 아름답다. 이곳에서는 매주 일요일에 최대 수산시장인 선데이마켓이 열린다. 앤티크 상품을 파는 벼룩시장도 인기다. 마을 풍경을 바라보며 고조 섬 사람들이 만든 와인에 취해본다. 떠나기 하루 전날에는 아쉬운 마음이 들어 부둣가로 나갔다. 몇 시간이나 우두커니 앉아 사람들이 낚시그물을 걷어 올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러다가 문득 드는 생각. ‘저들은 원래 어부이지 않았는가? 이곳이 지중해의 아름다운 섬이어서 그렇게 보이는 걸까? 이 나라 어부들의 모습에서는 삶의 고단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구나.’ 그러면서 다시 바다로 눈길을 돌린다. 바다 속이 훤히 보일 만큼 맑게 출렁이는 바다가 어느새 여행자의 마음을 보석처럼 반짝이게 한다.
Travel Tip
몰타로 가는 직항은 없다. 보통 두바이를 경유해서 가는데 중간에 키프로스를 경유하기도 한다. 이때 대기시간은 대략 한 시간이다.
또 다른 느낌의 에너지였다. 붓이 물 안에서 살랑, 찰랑. 물 묻은 붓이 물감을 만나면 생각에 잠긴다. 종이에 색 스밀 곳을 물색한다. 한 번, 두 번 종이 위에 붓이 오가면 색과 색이 만나고 교차한다. 파고, 풀고. 수백, 수천 번 고민의 흔적에 마침표를 찍으면 삶의 향기 드리운 수채화 한 점이 생명을 얻는다. 수채화 그리는 일상을 살아가는 김재열 교수의 제자 모임 ‘수연회’를 찾아갔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각자의 시선으로 색감 물들이는 이들에게는 잔잔한 어울림과 따뜻함이 있었다.
수채화를 그리는 모임 ‘수연회’
“2004년쯤 수채화교실의 인터넷 카페를 만들려고 보니 대표할 이름이 없는 거예요. 마침 그때 KBS2 드라마 ‘겨울연가’ 인기가 일본에서 대단했어요. 일본에 있는 친구가 드라마 촬영 장소를 그려서 책을 만들자고 해서 강원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릴 때였습니다. 그래서 ‘수채화연가’라고 이름을 지었고 지금의 수연회가 됐습니다. ‘수채화를 사랑하는 모임’. 자연스럽게 예쁜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지난 9월 말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가온갤러리에서 열린 ‘2018 한·일 수연회 아카데미전’에서 밝은 얼굴의 김재열 교수를 만났다. 홍익대학교에서 건축미술을 전공하고 1980년대 이름을 날렸던 주식회사 보루네오가구 임원으로 정년퇴임한 김재열 교수. 현재 홍익대학교 문화예술 평생교육원을 비롯해 다양한 예술교육 현장에서 제자를 양성하고 있다. 제자들이 그림 그리는 것에만 멈추지 않는다. 그들의 솜씨를 세상에 알리고 보여주기 위해 매년 이렇게 전시회를 열고 있다. 32년 전 업무차 만났던 일본인 친구 우에노 히로시(上野 博) 첼시아트아카데미 대표는 평생을 함께하는 그림 친구로 꾸준히 교류 중이다. 전시장 안에는 김재열 교수와 제자 45명, 우에노 대표와 제자 18명의 연합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한·일 양국 두 스승과 제자들의 교류 전시회는 올해로 7회째로 수채화 총 64점이 전시됐다. 내년에는 일본에서 한·일 연합 전시를 할 예정이다. ‘나의 즐거움’이라는 주제로 치러진 이번 전시회에서는 양국 제자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일상을 엿볼 수 있었다.
달리던 도시인, 느린 삶에 눈뜨다
수연회에 모인 사람들은 직업군도 나이도 다양하다. 30대부터 80대까지 전·현직 교사, 퇴직 공직자, 주부, 작가, 제빵 경영인 등이 수채화를 그리기 위해 모였다.
“선긋기부터 시작합니다. 그림을 잘 모르던 사람도 함께 그리다 보면 실력이 늘어요. 퇴직한 분들도 오십니다. 그림 한 번 그려본 적 없는 분도 있고요. 다들 용기내서 들어오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매력이 있어서 수채화 속에서 이들은 낭만을 즐기는 것일까?
“수채화가 다시 사람들 마음속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여행을 하더라도 관광지에서 사진만 찍고 끝내지 않아요. 느리게 여행하고 대상을 천천히 봅니다. 사진이 아니라 그림으로 남겨오면 더 좋잖아요. 그게 바로 ‘어반스케치(urban sketch)’, 즉 스케치 활동을 하며 도시기행을 하는 것이죠.”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인생을 담는 작업이기에 시니어들에게 더 없이 다 필요하다고 김재열 교수는 말했다.
“시니어가 ‘고희연’ 같은 잔치 대신 전시회를 열었으면 합니다. 작년에 파킨슨병으로 더는 그림을 못 그리는 회원 한 분이 금혼식과 함께 전시회를 했어요. 도록을 만들면서 옛 사진도 넣어 만들었더니 좋아하더군요. 특히 전시회 도록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저도 장담 못해요. 언제 아플지 모르잖아요. 그림과 기록은 남잖아요. 잔치 대신 전시회! 이런 캠페인을 벌이고 싶은 게 제 마음입니다.”
화실에서 만난 수연회 사람들
김재열 교수의 화실에서는 매주 금요일에 5명의 제자들이 모여 그림을 그린다. 전시회에서 그림 관람을 하고 방문한 화실에는 수연회원 4명이 모여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전시장에 인상적인 바게트 그림을 출품한 제과점 사장 조화익 씨,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박진주 씨, 극작가 진윤영 씨, 13년째 김재열 교수를 사사하고 있다는 주부 이경자 씨가 넓은 테이블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올해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3년째라는 조화익 씨는 서울 인사동과 안국동 근처에서 20년 넘게 제과점을 하면서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고 한다. 그분들이 그림을 그려주면 받기도 했는데 그때 그림을 그리겠다는 꿈을 조금씩 키워왔다. 마음속에 떨어져 있던 겨자씨가 어느새 자라 나무가 된 것이다.
“젊었을 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있었지만 제과제빵 기술자로 일하느라 그림 그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올해 제가 일흔여덟 살인데 지금이 내 인생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시기인 것 같아요.”
박진주(37) 씨는 홈스쿨로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면서 필라테스 사업을 하고 있다. ‘세월의 향기’라는 작품으로 2017 인천미술대전에서 특선을 한 박진주씨는 마무리가 있어서 수채화가 매력적이라고 했다.
“유화는 계속 덧칠할 수 있어서 끊임없이 수정할 수 있어요. 끝이 없죠. 그런데 수채화는 끝이 있어요. 상쾌하고 맑아서 좋아요. 색감도 좋고요. ‘세월의 향기’라는 작품을 1년 8개월 동안 그렸어요. 그림을 그리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냥 덮고 가고 그랬는데 결국 해낸 거죠. 동기부여가 됐어요. 처음에는 이게 뭐냐 했는데 정말 열심히 그림을 팠어요. 수채화를 파고 푼다는 말로 표현하는데 저는 풀지는 못하고 파기만 합니다. 교수님은 물로 물감 농도 조절해서 풀면서 그리시는데 저는 아직 멀었죠.”
이경자 씨는 20년 동안 그림을 그렸고 지금까지 상도 많이 받았다. 5년 정도 소묘를 하다가 수채화를 배우기 위해 김재열 교수를 만났다. 이창포를 그리기 위해 밑그림을 그리고 있던 그녀는 마침 화실에 쌓아두었던 그림을 정리하다가 그림 한 점을 꺼내 보여줬다
“10년 넘게 묵혀놓았던 그림이에요. 2007년도 세계평화미술대전에서 특선을 받은 건데 제목은 ‘역주’입니다. 그때는 역동적인 그림만 그렸어요.”
꽃그림만 그릴 줄 알았는데 다양한 모델을 찾기 위해 이것저것 많이 찾아본다는 이경자 씨.
“SNS에 가수 손담비가 동묘구제시장에서 옷을 사 입고 포즈를 취한 걸 봤는데 멋지더라고요. 드로잉하면 되겠다 싶어서 팔로잉하고 사진 캡처도 했습니다.”
진윤영 씨는 수채화를 그린 지 2년 됐다. 가끔 호랑이나 사자 그림을 그려 SNS에 올렸는데 사납거나 용맹스러워 보이지 않아 그림도 주인을 닮는구나 생각했다고. 그는 지인이 그려 달라던 강아지 두 마리 그림을 보여줬다. 맹수가 아니라 그런지 둥글둥글 귀여운 강아지 모습을 꽤 잘 그렸다.
“교수님이 제 연극작품을 좋아해서 때마다 많은 분을 모시고 공연을 보러 오셨어요. 그림에 관심이 있다 했더니 화실로 당장 오라고 하셨어요. 처음부터 무조건 그렸습니다. 아직 부족하지만 그림 그리는 시간이 좋습니다.”
mini interview
운명 같은 그림, 제자들과 나눕니다 수연회 지도교수 김재열
재능에 칭찬을 더한 삶을 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방학숙제로 냈던 그림이 교실 뒤에 붙은 게 계기였죠.”
형이랑 같이 그려 방학숙제로 냈던 그림이 우수작에 뽑혔다. 그때부터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김 교수는 입소문이 날 정도로 미술 영재로 성장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미화부장을 줄곧 맡았다고 했다. 경상북도 의성 출신인 김재열 교수는 산업인재 육성에 힘을 기울이던 시절 대구공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공고라 대학 진학이 멀어지나 싶었는데 때마침 미술반이 생겼다. 고교시절에도 경북 도내에 미술과 관련한 상은 다 휩쓸었다. 그림이 좋았지만 예술을 하면 어렵게 살게 될 것이라는 주위 사람들의 우려도 있었다.
“그때 홍익대학교 건축미술과가 있다며 한 선배가 얘기해줬어요. 그림에 디자인도 배울 수 있다면서요.”
홍대에서 열렸던 미술 실기대회 입선 경력도 있고 그림에 자신 있었던 김 교수는 무리없이 미대 명문인 홍익대학교에 입학했다.
“건축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즐겁게 생활했습니다. ROTC 장교로 군에 있을 때도요. 사단 내에서 크리스마스트리 대회에서 1등을 해서 휴가도 나가고 진급도 빨랐죠. 군 제대 후에 보루네오가구에 입사하면서 인천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대규모 가구공장이 인천에 있었거든요.”
그리고 이때 평생의 그림 친구인 우에노 씨를 만났다.
첫 만남부터 평생 친구를 알아보다
“우에노 선생이 우리 가구공장에 견학을 왔어요. 1986년, 32년 전에요. 우에노 씨는 공장장이면서 디자이너였습니다. 저는 회사의 디자인개발 소장이었고요. 그때 제가 불고기 쌈밥을 좋아해서 식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한국의 쌈 먹는 방법을 설명해줬습니다. 만났던 첫날 언젠가 함께 미술 전시를 하자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16년 만에 그 약속을 서로 지켰죠.”
그림 공부를 하고 싶었던 우에노 씨는 51세에 회사를 관두고 다음해 영국 첼시로 유학을 떠났다.
“우에노 씨가 영국에서 유학할 때 저도 그를 만나기 위해 영국에 갔습니다. 그때 같이 도시를 다니면서 스케치도 하고 말이죠. 1년 3개월 유학생활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간 우에노 씨는 책도 내고 수채화를 가르치는 미술 아카데미를 개원했습니다. 저는 아직 회사에서 일할 때였습니다. 저도 정년퇴임하고 나서 그림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화실도 만들고 본격적으로 교류하고 말이지요. 우리는 서로에게 꼭 필요한 멘토입니다.”
드로잉북과 함께 떠나는 여행
취재를 마칠 즈음 꼭 보여줄 게 있다면서 노트를 꺼내 들고 방에서 나왔다. 여행하면서 그린 그림과 비행기 티켓, 글귀 등이 담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드로잉북이었다.
“기내에서 와인을 자주 사 마시는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입니다. 먹고 자고 관광만 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느낌은 담았으면 합니다.”
그는 기내 사무장이 준 감사편지도 잊지 않고 드로잉북에 붙여놓았다. 더 보고 싶어 방으로 따라 들어가니 크고 작은 드로잉북이 한가득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제자들과 함께하실 생각이냐고 물었다.
“즐거우니까 싫어질 때까지? 죽을 때까지 붓 들고 있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 라이프@이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소개하고 싶은 동창회, 동호회 등이 있다면 bravo@etoday.co.kr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발틱 3국 중 ‘라트비아’가 한국인들에게 낯설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국내 대중 가수, 심수봉이 불렀던 ‘백만 송이 장미’라는 번안곡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노래의 원곡은 라트비아의 가수가 불렀다. 특히 이 노래 가사에는 ‘특별한 사연’이 담겨 있다. 그루지아의 한 화가가 프랑스 가수를 흠모해 바친, ‘서글픈’ 백만 송이 장미. 라트비아 수도인 ‘리가’에 두 번째 방문하는데도 그 유행가 선율이 계속 머릿속에 감돈다.
두 번째 만남이 더 행복한 ‘리가’
필자는 현재 4개월 여행의 막바지에서 핀란드에 와 있다. 가을이 짙은 핀란드 경치를 바라보면서 ‘최고의 행복’을 느끼고 있다. 여행을 하면서 많은 나라, 도시를 만났다. 기억나는 곳들이 많지만 그중 한 곳이 라트비아 리가다.
러시아 프스코프에서 버스를 타고 에스토니아 국경을 넘어 라트비아 리가로 향했다. 4년 전 늦가을, 잠시 발만 딛고 떠나버렸던 리가. 어떻게 변했을까? 시외버스터미널 바로 앞에 있는 중앙시장 건물이 반갑다.
다우가바(Daugava) 강 제방 위에 열 지어 서 있는, 다섯 개의 거대한 홀 모양의 건물. 현재는 시장 건물이지만 원래는 독일이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공격할 목적으로 지은 체펠린 비행선 격납고였다. 전쟁이 끝난 후 리가로 그대로 옮겨져 현재는 활황을 누리는 재래시장 건물이 됐다. 잠시 눈인사로 대신하고 여행자들의 ‘숙제’와 같은 숙소 찾기에 나선다. 그런데 4년 전의 버스터미널이 아니다. 여행 안내소가 생겼고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친절한 여행 안내원이 있다.
올드 타운까지는 멀지 않은 거리이지만 길이 울퉁불퉁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시내버스 타고 숙소로 갈까?”라고 물었더니 ‘고작 7분 거리’라면서 걸어가란다. 터미널에서 올드 타운으로 들어서는 골목길이 제법 정돈되어 캐리어를 끄는 데 크게 힘들진 않다.
저렴한 가격의 숙소 또한 훌륭하다. 낡은 건물이지만 에스컬레이터가 있어 무거운 짐 옮기는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실내도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깔끔하고 조식 제공에 오이와 자른 레몬을 넣은 음료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
한껏 편한 마음으로 어슬렁어슬렁 올드 타운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도심의 거리는 화려하고 활발하다. 관광 인파로 넘실대는 골목의 카페에서는 라이브 음악이 흘러나와 흥을 돋운다. 같은 장소를 두 번 방문하는 일은 생각보다 좋다. 기억을 더듬는 것도 좋고, 못 본 곳들을 재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4년이란, 충분히 도심을 변하게 할 수 있는 시간 같다.
‘백만 송이 장미’로 더 친숙하게 다가온 나라
제정 러시아 시대에 ‘리가’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에 이어 제3의 도시로 불릴 정도로 활황을 누렸다. 러시아에서 발원한, 리가의 젖줄인 다우가바 강은 수로로 이용하기에 좋은 요새였다. 당시 리가는 ‘동유럽의 파리’, ‘동유럽의 라스베이거스’라 불렸다. 동유럽에서는 최고로 유흥산업이 발달했던 도시. 한국인에게는 ‘백만 송이 장미’라는 노래로 알려진 나라.
‘백만 송이 장미’라는 노래는 라트비아 작곡가 라이몬즈 파울스가 만들고, 라트비아 여가수 아이야 쿠클레가 처음 불렀다. 이 노래를 알린 사람은 러시아 여가수인 알라 푸가체바다. 노래 가사는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의 시다.
한 화가가 살았네/홀로 살고 있었지/그는 꽃을 사랑하는 여배우를 사랑했다네/그래서 자신의 집을 팔고, 자신의 그림과 피를 팔아/그 돈으로 바다도 덮을 만큼 장미꽃을 샀다네/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붉은 장미…
이 시는 그루지아(현 조지아)의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가 프랑스 출신 여배우에게 사랑에 빠졌던 일화를 바탕으로 쓴 것. 한 가난하고 외로운 무명화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살고 있는 고장에 유명하고 아름다운 여배우가 순회 공연차 오게 된다. 그녀를 흠모하던 화가는 단 하루밖에 없는 그 기회를 이용해 특별한 방식의 사랑 고백을 계획한다. 여배우가 묵고 있는 호텔 광장에 장미를 가득 뿌려놓겠다는 것. 자신의 모든 재산을 처분해 장미 백만 송이를 산 그는 그녀가 창을 통해 볼 수 있는 모든 곳에 장식했다. 이 노래는 동유럽 일원에서는 흔히 들을 수 있는, 길거리 음악의 대명사가 됐다.
구시가 골목 즐기기
긴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골목길. 자꾸만 길을 잃게 만들면서 블랙헤드 길드 광장 앞으로 안내를 한다. 이 광장은 리가의 랜드마크로 건물에 금박이 박혀 있어 금세 눈길을 끌어당긴다. 예전 상인들의 숙소와 연회장이었던 건물. 눈길을 끄는 천문시계에는 처음 주문한 길드가 시계공의 눈알을 빼버렸다는 전설이 흐른다. 너무 아름답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동유럽의 흔한 전설 중 하나다.
그것보다 이 건물의 특징은 블랙헤드다. 금박 건물에 이들의 수호성인인 성 마우리티우스가 새겨져 있다. 그는 북아프리카 흑인 출신의 로마 전사였다. 그래서 블랙헤드라는 건물명으로 지칭된 것. 이 전당은 제2차 세계대전 때 건물의 80%가 파괴되었는데 라트비아가 재건축(2001년)했다.
현재 박물관과 관광안내소가 함께 있다. 길드 앞에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 조형물은 1510년, 리가의 길드 회원들이 커다란 전나무를 세워놓고 각양각색의 화려한 장식을 해 밤새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자리에 있다. 작은 트리 조형물. 왠지 억지스럽다. 그보다 광장 뒤쪽에 있는 성 피터 성당의 뾰족한 첨탑이 눈길을 끈다.
1209년에 건설된 이 성당은 1666년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가 현재는 1941년의 모습 그대로다. 이 성당은 시대에 따라 가톨릭 성당, 루터 교회, 그리고 박물관 등으로 여러 차례 기능이 바뀌었다. 종교와 상관없이 이 성당을 찾는 이유는 첨탑(123m)으로 올라 시내를 조망하기 위해서다. 탑 위까지 걷지 않고 리프트를 이용할 수 있다.
구시가지의 붉은 가옥과 강, 좁은 골목길, 그리고 사람들을 구경한다. 특히 반가운 것은 한국의 유명 기업 상호가 새겨진 멋진 고층 건물이다. 성당 뒤쪽으로는 독일 형제 작가인 그림 형제의 유명한 동화 ‘브레멘 음악대’에 나오는 동물들의 동상이 있다.
이외에도 독일인들이 이 땅에 와서 처음으로 지은 돔 성당도 여러 번 만난다. 이 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6768개의 파이프를 가진 오르간. 제작(1884년)될 당시만 해도 이 파이프 오르간은 세계에서 가장 컸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에서 네 번째 크기가 됐다.
스웨덴 문과 아르누보 건축
그 어떤 곳보다 필자의 관심을 끈 곳은 스웨덴 병사와 리가 아가씨의 사랑 이야기가 흐르는 스웨덴 문 주변이다. 누군가의 설명을 듣지 않으면 눈여겨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아치형 문.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 애달파서일까? 좁은 골목길에서 풍겨나오는 향취가 남다르다.
케케묵은 연륜이 고스란히 남은 건물 모퉁이의 작은 카페들. 올드 타운의 화려하고 시끌벅적함과는 미세하게 색깔을 달리한다. 카페를 장식하고 있는 화단에 오후의 햇살이 스며들 때면 커피향이 그립다. 스웨덴 문을 지나면서 만나는 리가 성은 1330년, 리보니아 기사단의 기지로 강변 옆에 건설되었다.
리가의 구시가지를 빠져 나와 동쪽으로 가면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진다. 1935년에 세워진 자유의 기념물 옆 공원의 작은 개울에서는 보트를 빌려 탈 수 있다. 또 울창한 나무숲 사이로 화약탑(1621년)과 리가에서 가장 큰 러시아 정교회의 모습도 보인다. 라트비아의 시인이자 사회운동가인 라이니스의 동상도 만날 수 있다.
리가 여행의 숨겨진 보석은 신시가지 거리의 아르누보 건축물이다. 리가의 아르누보 건축 설계는 미하일 에이젠슈타인이 했다. 1899~1914년에 조성된 이 건물은 요즘 들어 많은 관광객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필자는 그가 남긴 화려한 건축 양식보다는 그의 아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흔적을 찾고 싶었다. 당시 세르게이는 러시아권의 유명한 영화감독이었지만 그 흔한 동상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의 흑백영화는 무성시대의 찰리 채플린을 무색케 할 정도다.
Travel Data
교통편 발틱 3국은 버스 편이 용이하다. 탈린이나 리투아니아에서 리가 행 버스를 타면 된다. 교통정보 대부분 걸어 다녀도 된다. 시내 교통카드는 편의점에서 판매한다.
맛집 퓨전 레스토랑이 많다. 구시가지 쪽에는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를 해서 음식값이 비싸다. 반면 동쪽 호텔 뒤쪽으로 가면 저렴하면서도 맛 좋은 음식점이 즐비하다.
숙박 고급 호텔을 비롯해 아파트, B&B, 호스텔 등 다양하다. 고급 호텔은 가격이 비싸지만 도미토리룸은 1인당 2만~3만 원 선에 이용 가능하다.
대표 술 리가 블랙 발삼(Riga Black Balsam)은 러시아의 여황제 예카테리나의 병을 낫게 한 술로 유명해졌다. 그 외 리가는 러시아 사람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라 보드카가 많다. 라트비아 최고의 맥주는 알다리스(aldaris)다.
시차 한국보다 7시간 느리다.
날씨 리가의 기온은 전형적으로 14°C에서 23°C. 5월부터 9월 중순까지는 날씨가 온화해서 여행하기 좋다. 그러나 11월부터는 급격하게 온도가 떨어지고 일교차가 커서 두터운 겨울옷이 필수다.
오전 9시, 가양5종합사회복지관 지하 1층 팬지배움방. 영어를 배우기 위해 모인 시니어 중에서 유독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한 여인, 바로 김정숙 씨다.
노트 대신 이면지를 엮어 만든 연습장에 꼼꼼히 수업 내용을 받아 적는다. 선생님 질문에 큰 소리로 대답도 척척 하며 수업을 즐기는 모습. 대학생 손녀보다 영어를 잘하는 것 같다며 자신감을 드러내는 그이지만, 처음엔 ‘ABC’부터 시작했단다. 60년 넘게 영어를 몰랐어도 사는 데 지장은 없었지만, 영어를 알고 난 뒤 세상이 더 즐거워졌다는 김 씨다.
“5~6년 전에 남편이 아파서 집에 누워 있었어요. 낮에는 간호 도우미가 와서 봐주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으려니 그 시간이 참 무료하더라고요. 평생교육 시대라고 하는데, 나도 뭔가를 배워야겠다 싶었죠. 학창 시절에는 아버지가 위암을 앓으셔서 철없이 공부 욕심을 낼 수가 없었거든요. 그때 못 배워 아쉬웠던 마음도 채울 겸 영어 공부를 시작하게 됐죠.”
처음 도전했을 때, 젊은 강사가 가르치는 수업을 듣고 실망만 하고 돌아왔다. 시니어의 눈높이에 맞춘 강의가 아니었기 때문. 다행히 그 후 현재의 선생님(박미령 강사)을 만났고, 한 걸음 한 걸음 영어를 배워온 지도 벌써 5년이 넘었다. 수업시간 외에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카카오톡으로 선생님에게 질문하는데, 늘 친절히 대답해주는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영어를 배워나갈 수 있었다.
“나이 들어 공부하려니 간단한 것도 자꾸 잊어버리게 돼요. 그때마다 선생님이 괜찮다며 이해해주시고, 반복해서 가르쳐주셔서 고마웠죠. 요즘에는 길거리를 다녀도 곳곳에 영어가 널려 있잖아요. 가게 이름, 음식 메뉴 등등. 이런 것들을 하나씩 읽을 수 있고 그 뜻을 알게 되니 일상이 더 즐거워졌어요. 완벽히는 몰라도 딸이랑 같이 자막 없는 미국 드라마도 볼 수 있고요. 아직 해외에 나가 실력 발휘를 해보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가서 멋지게 영어를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해요.”
지금보다 더 실력이 늘면 외국인 친구에게 편지도 써보고, 자신처럼 영어를 몰랐던 사람들에게 도움도 주고 싶다고 한다. 김 씨에게 언제쯤 영어를 마스터할 수 있겠느냐 묻자 손사래를 치며 소박한 바람을 드러냈다.
“나에게 마스터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죠.(웃음) 어디까지나 ‘앎’의 과정 아닐까요? 내 체력이 뒷받침되는 한 무한대로, 최선을 다해야 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그 끝은 없지만, 하나라도 했으니 여기까지 왔잖아요. 저도 육십 넘어 시작했어요. 너무 늦었다고 도전을 망설이지 마세요. I can do it, You can do it!”
Q&A로 보는 '시니어 외국어 배우기'
도움말 박미령 등촌ㆍ가양종합사회복지관 시니어 영어회화 강사(본지 동년기자 3기)
Q. 시니어 영어 수업에 찾아오는 분들의 목표와 목적은 무엇인가요?
A. 대개 해외여행 가서 의사소통하기 위해 배우려 합니다. 학창 시절 배우지 못한 한을 풀려고 오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아예 처음 배우는 분들만 있는 건 아녜요. 언어는 습관인데, 한때 영어를 열심히 배웠어도 그동안 일하고, 아이들 키우느라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다시 처음부터 공부하면서 영어 세포를 되살리시곤 하죠.
Q. 수업은 주로 어떻게 진행되나요?
문법보다는 회화 위주이기 때문에, 먼저 입에서 익숙해지게끔 반복해서 말하도록 하고 있어요. ‘thank you’처럼 간단하고 쉬운 것부터 시작해서, ‘thank you very much’ 이렇게 부사나 형용사 등을 하나씩 더해가죠. 나이 드신 분들은 한국식 영어 발음이 배어 있는 경우가 많아 잘못된 발음도 교정해드리고요. 영어 간판이나 뉴스나 TV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일상 영어도 알려드리면 참 좋아하십니다.
Q. 일반 학생들과 시니어들을 가르칠 때 차이점이 있다면요?
젊은 사람들은 살짝 자극을 주면 더 하려고 하지만, 시니어들은 오히려 그런 자극에 마음을 다칠 수 있어요. 열심히 배우려고 왔다가 의기소침해지기 일쑤죠. 그래서 최대한 편안하게 배울 수 있도록 해드리는 편이에요. 가끔 지각하거나 숙제를 못했다고 미안스러워서 수업시간에 안 오시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결석하셔도 괜찮다. 지각하면서도 오시는 건 더 훌륭한 거다”라고 말씀드리고, 숙제도 부담되니 최대한 적게 드리려고 해요.
Q. 늦깎이 학생들은 어떤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나요?
젊은이들처럼 ‘공부가 하기 싫어서’ 포기하는 분들은 거의 없어요. 다만, 연세가 있는 분들은 갑자기 편찮으시거나 건강상의 이유로 수업을 중단하시죠. 또, 자꾸 강의실 문만 나서면 까먹는다고 걱정하시는데 “제가 반복해서 가르쳐 드릴 거다. 그러면 크리스마스 때는 꼭 하실 수 있다”라고 응원해드리곤 해요. 젊은 사람도 영어는 계속하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려요. 하루 하나씩이라도 꾸준히 한다는 생각으로 공부하시는 게 좋습니다.
Q. 시니어에게 추천하는 공부 방법은 무엇인가요?
10분씩만 공부하시라 권하고 싶어요. 공부하다가 재미있어서 더 하고 싶어도 절대로 더 하시지 말고, 10분 하시고 나면 책을 덮으세요. 대신 매일 하셔야 해요. 일주일에 1시간 몰아서 하는 것보다, 매일 10분씩 하는 게 영어 실력을 늘리는 데 효과적입니다. 드라마들 많이 보시잖아요. 잠깐 광고하는 틈에 10분 공부하셔요. 좀 더 하고 싶으시면 EBS 영어 방송을 보는 것도 추천해요. 유아부터 초등, 중등, 성인 등 단계별 프로그램이 잘 돼 있어요. 스마트폰에 익숙한 분이라면 팟캐스트 무료 영어 강의도 보시면 좋아요. 그중에서는 ‘일빵빵 입에 달고 사는 기초영어’를 권합니다. 영어 초급 단계의 분들에게 도움 되는 내용이 많습니다.
액션, 공포, 애니메이션 등 몇 장르 영화는 극도의 피로감으로 보는 게 두려울 지경이다. 반면에 시대극, 서부극, 뮤지컬, 전기 영화는 시사회 초대를 마다하지 않는다. 최근 관심 갖고 본 다큐멘터리 알렉산드라 딘의 ‘밤쉘(Bombshell: The Hedy Lamarr Story, 2017)’과 스티븐 노무라 쉬블의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RYUICHI SAKAMOTO: CODA, 2017)’는 추억을 떠올리며 공부하는 자세로 보았다.
국내 영화 팬들이 류이치 사카모토를 알게 된 작품은 ‘마지막 황제’(1987)일 것이다. 편협한 일본 장교로 출연해 무척 의아하게 여겼는데 이름난 작곡가, 영화음악가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콧수염마저 얄밉게 보였던 그는 “왜 일본이 그토록 삭막한 만주 땅을 얻으려 했는지 모르겠다”라며 소신 인터뷰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1983)에서도 장도를 휘두르는 일본 장교로 출연한 바 있는데, 군더더기 없는 몸매에 강파른 얼굴 덕분이 아닌가 싶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와 오시마 나기사가 영화 음악 작곡과 연기를 다 요구했다니, 영화적 얼굴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류이치 사카모토의 영화 음악 덕분에 심취했던 작품을 열거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영화 팬이라면 기본적으로 본 영화들일 테니. 그중에서도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는 영화음악 작곡가로서의 사카모토를 잘 정리해주고 있다. 특히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에서 주인공이 광막한 설원 저 너머로부터 한 발 한 발 힘겹게 걸어와 관객 앞에 설 때까지 흐르던 음악은 압권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다.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에서 사막 아지랑이 속에 한 점이 나타나고 점점 커진 그 점이 알리 족장임을 알게 되는, 너무도 유명한 롱 테이크 장면에의 헌정이다. 이는 ‘평원의 무법자’(1973)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등장하는 장면만큼이나 근사하고 감동적이다.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에서 류이치 사카모토는 당시 암으로 투병 중이었지만, 너무도 좋아하고 존경하는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츠 이냐리투의 제안이라서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작곡을 마다할 수 없었다고 밝힌다.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는 2012년, 인후암 판정을 받고 모든 활동을 중단했던 류이치 사카모토가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음악 작업으로 활동을 재개한 전후 5년여를 기록한다. 후쿠시마 지진과 쓰나미에 살아남은 망가진 피아노를 연주하고, 핵발전소 재가동 반대 시위에 참석해 발언하고, 암 판정 당시 심경을 고백하고, 숲과 남극 등을 다니며 소리를 채집하여 젊은 시절부터 함께 했던 컴퓨터와 피아노로 작곡하는 모습이 젊은 시절 활동 영상과 영화 출연 장면 등을 곁들여 소개된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영화에 나오는 음악과 바흐의 코랄전주곡 같은 느낌의 음악, 약해지지 않고 울림이 오래가는 음을 찾고 있다는 등, 그가 현재 추구하는 음악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전한다.
9·11 테러 당시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그가 찍은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의 사진을 보면 사진작가로서의 재능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검버섯 가득한 얼굴과 백발에 표범 가죽 문양 안경을 쓴 그가 곱게 깎은 연필을 들고 오선지에 음표를 그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또 오로지 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지구 이 끝에서 저 끝을 방문하는 집념을 보노라면, 세상에서 가장 고매한 직업은 예술 창작뿐이구나, 눈물이 날 지경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인물 다큐멘터리도 그 인물에 얼마나 매료되었는가, 존경하는가에 따라 감상 진폭이 달라진다.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는 감독 후샤오시엔, 오시마 나기사, 알프리드 히치콕, 데이비드 린치 등의 다큐멘터리와 더불어 영화 세상에 사는 행복을 만끽하게 해준다.
미지의 것에 대한 호기심이야말로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가장 큰 동기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처음 타보는 국적기. 처음 보는 ‘그을린 피부’의 여 승무원. 영상과 인쇄 자료를 살피며 상상해보는 시뮬레이션의 시간들…. 에티오피아까지 가는 15시간의 비행시간이 지겹기는커녕 설렘으로 가득한 이유다. 많은 이에게 이름조차 낯선 에티오피아는 수백만 년 전 유인원 루시(lucy)가 직립보행을 시작했던 나라이며, 모세가 신으로부터 받았다는 십계명 돌판이 보관돼 있는 나라다. 시바 여왕에서 시작된 고대 왕국의 찬란한 영화를 이어받았으며, 어떤 나라보다 앞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나라이기도 하다.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단 한 번도 식민지였던 적이 없는 나라이자 고유 문자를 가진 나라, 에티오피아로 떠나보자.
아디스아바바에서 시작되는 여행 루트
여행은 크게 북부 유적지 여행과 남부 커피농장 여행으로 나눠진다.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시작해 고대의 ‘악숨’, 중세의 ‘랄리벨라’, 근세의 ‘곤다르’로의 여행은 국내선으로 이동하면서 볼 수 있도록 잘 짜여 있다. 악숨에서 비행기를 타고 남쪽으로 400km 가면 있는 랄리벨라에는 불교의 아잔타나 엘로라 석굴에 비견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거대한 암굴 교회군이 있다.
주변이 온통 이슬람인 환경 속에서 에티오피아가 기독교를 지켜내기엔 어려움이 많았으리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슬람이 위세를 떨치던 12세기에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온 랄리벨라 왕은 이곳을 제2의 예루살렘으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무슬림의 눈에 띄지 않는, 위험을 최소화한 11개의 암굴 교회를 지었다. 23년에 걸쳐 지어졌다는 이들 교회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저히 인간의 힘과 기술로 만들었다고 보기 힘들 만큼 불가사의해서 ‘천사가 함께 만든 교회’로 불린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전국에서 랄리벨라의 암굴 교회로 순례자들이 찾아드는데, 이들이 일제히 초를 켜고 기도하는 장면은 가히 장관이라 한다.
이르가체페로 가는 커피 로드
이르가체페로 가는 길은 시원하게 쭉 뻗은 도로여서 가슴이 탁 트인다. 시다모주 이르가체페에 도착해 질퍽한 황톳길을 따라 2km쯤 걸어 들어가니 커피농장이 나왔다. 커피 수확은 1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라 볼 수 없었지만 농장 안에서 만난 사람들의 밝은 미소만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커피 빛깔의 향기를 지닌 천사들이 사는 곳이 바로 이르가체페였다. 비가 내려 질퍽대는 황톳길을 자기 몸무게보다 더 무거운 바나나와 열매를 등에 진 소녀들이 맨발로 걸어간다. 다 떨어진 옷이 조금도 남루하지 않게 느껴진 것은 어디서도 만나지 못할 햇살 같은 웃음 때문이었다.
‘분나 마프라트’라고 불리는 독특한 커피 의식
에티오피아 여행이 지닌 최고의 매력은 ‘분나 마프라트(Bunna Maffrate)’라 불리는 독특한 커피 세리머니다. ‘커피(coffee)’라는 말부터가 에티오피아의 지역명인 ‘카파(kaffa)’에서 왔으며, 에티오피아말로 커피를 뜻하는 ‘분나(bunna)’라는 말에서 ‘원두(bean)’가 나왔다 할 정도이니 이곳을 왜 커피의 기원이라 부르는가에 대해선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에티오피아인들에게 커피는 단순한 음료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생존을 위한 귀한 식량인 동시에 신께 올리는 신성한 경배의 수단인 것이다. 이 의식을 제대로 하려면 한 시간 넘게 걸리는데 먼저 향을 피워 몸을 정결히 한 후 원두를 프라이팬에 볶는다. 그런 다음 절구에 넣고 찧어서 낸 가루를 ‘제베나(jebena)’라는 목이 긴 주전자에 넣고 끓여서 ‘시니(cini’)라 불리는 작은 잔에 따라 마신다. 보통 세 잔을 마시는 것이 기본이며 팝콘이 같이 제공되기도 한다. 누군가 에티오피아에서 맛보는 커피 맛을 ‘천국의 맛’이라 했는데, 어딜 가든 맛있고 다양한 커피를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커피 마니아에게 에티오피아는 천국 같은 여행지임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