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연말연시에 할 일도 많고 바빠지겠지만, 크리스마스 생각을 하면 어린 시절의 추억에 가슴이 촉촉해지고 그리운 마음이 차오른다.
필자는 딸만 셋인 집의 맏딸이다. 아버지는 딸 셋을 큰 사랑으로 키워주셨다. 그런데 집안의 장남으로 딸만 두었다는 게 좀 문제가 되기도 했나보다. 당시만 해도 남아 선호사상이 만연했을 때라 엄마는 아들을 낳지 못한 설움을 톡톡히 받으셨다고 한다. 작은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을 아버지에게 양자로 주겠다는 제의까지 할 정도로 엄마에게 아들 없는 압박이 심했는데 아버지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시고 딸만으로도 행복하다며 엄마를 보호해주셨다. 그래서 사촌 동생이 필자의 친동생이 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아버지는 세 딸에게 무엇이든 다 해주려고 노력하셨다. 낭만적인 성격의 아버지 덕분에 우리는 어릴 때부터 크리스마스에 대한 환상을 갖고 예쁜 상상력을 키울 수 있었다. 딱히 종교가 있으신 건 아니었지만 어린 세 딸의 손을 잡고 시내 교회로 종소리 들으러 가는 걸 즐기셨으며 동화책도 많이 읽어주셨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크리스마스에는 루돌프 사슴이 끄는 썰매를 타고 산타 할아버지가 오셔서 착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준다’는 상투적인 이야기도 그땐 얼마나 근사했는지 착한 아이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했다.
필자가 대여섯 살 되었을 무렵의 어느 크리스마스 날, 아버지는 산타 할아버지가 머리맡에 걸어둔 양말 속에 선물을 주고 가신다며 양말을 걸어놓으라고 창문에 길게 줄을 매달아주셨다. 두 살 터울이었던 두 동생보다 더 큰 선물을 받겠다며 아버지의 큰 양말을 찾았지만, 필자가 원하는 선물이 들어갈 만한 양말은 없었다. 동생들은 양말을 걸었지만, 필자는 엄마의 흰 버선을 빨래집게로 집어 걸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크게 웃으시며 잘했다고 칭찬해주셨다. 욕심 부린 마음을 꾸짖지 않고 웃음으로 대해준 아버지의 환한 모습이 무척 그립다.
크리스마스 날, 필자는 잠에서 깨어 줄에 매단 버선부터 확인했다. 그 속에는 12가지 색 크레용이 들어 있었다. 뛸 듯이 기뻐했던 당시의 기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아쉽게도 그다음 해부터는 산타 할아버지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줄 선물을 몰래 감춰놓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모른 척 동생들에게는 말하지 않고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즐겼다. 선물은 다양했고 양말에 넣을 수 없는 선물은 머리맡에 두셨는데 맛있는 과자와 사탕 통이었다.
당시에는 미제 물건들이 많았다. 초콜릿과 ‘참스’라는 미제 사탕은 우리가 정말 좋아하던 선물이었다. ‘참스’ 캔디는 둥근 통 위쪽 알루미늄 뚜껑을 고리를 잡아당겨 열게 되어 있었다.
고리를 잡아당기면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달콤한 사탕 향기가 퍼져 나왔다. 미제 사탕이 없어질 무렵 해태제과에서 비슷한 제품을 만들었다. 디자인도 똑같고 뚜껑 여는 방식도 같았지만 ‘치익’ 하며 퍼지던 달콤한 향도 없었고 맛도 달랐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꼭 사탕 맛이 달랐다기보다는 아버지가 사주시던 추억의 사탕이 아니라서 그렇게 느꼈다는 생각이 든다.
교직에 계셨던 아버지에게는 크리스마스 때마다 카드가 많이 왔다. 모양도 다양하고 그림도 멋졌던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며 동화처럼 예쁜 세상을 상상했고 환상적인 미래를 꿈꾸며 자랐다. 우리 자매들에게 세상을 아름다운 눈으로 바라보라고 가르치셨던 아버지는 5년 전 하늘나라로 가셨다. 필자도 이제는 손녀 손자의 선물을 고르는 나이가 되었다. 아버지와의 예쁜 추억처럼 손녀 손자에게도 필자가 훗날 그리움의 존재로 기억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따뜻한 희망을 품어본다.
사람은 언제 행복함을 느낄까? 행복은 아는 것보다 느끼는 것이 우선인 것 같다. 필자가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처음 경험한 것은 결혼하고 약 8년이 지났을 무렵이다. 아내가 성당에서 영세를 받고 다음 해인 1989년 필자가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영세를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영세는 절대자인 신으로부터 과거의 모든 죄에 대해 사함을 받는 것이다. 필자는 이날 큰 은총을 받았다. 살면서 수없이 많은 죄를 짓고 허물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고 하니 어찌 행복하지 않았겠는가.
더욱이 아내와 함께 종교를 갖게 되어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부부로서 영세 이후의 대화는 이전보다 훨씬 더 편안해졌고 소통도 잘됐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장남과 8남매의 막내딸이었던 필자와 아내는 가정문제로 대화를 하면 항상 평행선을 달리며 입장 차이를 쉽게 좁히지 못했다. 그러던 우리 부부가 신앙생활을 한 뒤로 평행선이 만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아니 그보다도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주일마다 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외식을 하는 생활이 우리 가정에 새로운 문화를 가능하게 해준 전기가 되었기에 더욱 행복한 크리스마스로 기억되는 것 같다.
또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 영세를 받았기에 필자도 마치 새롭게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필자의 생활은 이런저런 혼돈의 블랙홀 속에 빠져 있었다. 경제적,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 풍조 속에서 방황도 많이 했다. 그러나 아내와 함께 종교생활을 하면서 정신적 가치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더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물질적 충족보다는 정신적으로 풍요로울 때 비로소 평화롭고 충만해짐을 알게 됐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1989년 크리스마스가 유난히 행복한 날로 기억되는 것은 영세라는 축복 말고도 필자의 삶에서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아내가 우울증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아들 둘을 낳고 나서 몹시 지쳐 있던 아내는 성당을 다니면서부터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다. 당시 필자는 아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심각한 가정의 위기까지 느꼈다. 결혼 후 어려운 살림을 하면서 휴일도 없이 장남의 맏며느리로서 오랫동안 강행군을 해왔던 아내였기에 그 고충이 십분 이해됐다. 미안한 마음에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일찍 퇴근해 아이들을 돌보면서 아내가 자신만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성당에 다니도록 했는데 그 후 아내의 얼굴에 미소가 다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도 신이 은총을 베풀어주신 것이 분명해 보인다. 물론 아내의 미소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성당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레지오 활동, 성지순례 등이 있는 날이면 필자가 두 아들을 돌봤다. 아내의 활동이 많아질수록 필자의 자유로운 생활이 제약받았지만 그래도 아내의 미소를 보면 행복했다.
두 번째는 영세를 받는 날 필자가 신으로부터 은총을 받고 철천지원수 같은 직장 동료를 용서해주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신념과 종교적 신념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인간의 신념은 강한 것 같아도 어느 한순간에 쉽게 무너지기도 한다. 그러나 종교적 신념은 순교자처럼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정도로 강력한 것이라 생각한다. 필자는 영세를 받는 날, 하느님에게 원수와 같던 동료를 용서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때부터 동료가 회의 때나 모임에서 필자를 향해 공격을 해도 대응을 안 했고 그를 용서해달라고 하느님께 빌었다. 그리고 동료의 장점을 생각해보려 애쓰고 동료가 없는 곳에서 칭찬을 시작했더니 어느 날부터 행동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럼으로써 필자는 한 사람을 다시 얻게 되었다. 하느님과의 약속을 이행했더니 은총을 또 내려주신 것이다. 1989년 크리스마스는 이래저래 영원히 기억될 것 같다.
대학 2학년 때인 12월 24일 오후 5시 무렵, 소공동 미도파 백화점 옆에 있는 맥스웰인가 그 비슷한 이름의 커피숍에서 남녀 학생 10명 정도가 자리를 함께했다. 같은 과 남자친구 대여섯 명이 오래전부터 각자의 재주와 인맥을 총동원해 다른 대학 여학생들과의 미팅을 주선해 크리스마스이브를 함께 지내기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필자도 주변 인맥을 총동원해 알아봤으나 단순한 미팅이 아니라 밤새 함께 지내는 조건이다 보니 아무리 점잖게 행동하겠다고 다짐을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먼 친척 여동생의 협조 하에 필요한 비용은 남학생이 전부 부담하고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으면 중도에 돌아가도록 보장하겠다는 조건에 어렵사리 겨우 미팅을 성사시켰다. 결과적으로 필자가 주선한 모양이 되어 어쩔 수 없이 함께 지낼 음식점도 앞장서서 예약하게 됐다. 신경 쓸 일이 많아 은근히 필자가 주선한 것이 후회되었지만 어찌어찌하여 어려운 일은 다 해결하고 함께 만나 예약 장소로 옮겨가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약속시간이 한 시간 이상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는 것이었다. 30분 이상이 더 지체되자 여학생들이 술렁이더니 자기들끼리 실랑이를 벌였다. 일부가 그만 가겠다고 나가버리자 나머지도 그냥 따라서 나가는 상황이 벌어졌다.
우리끼리 허탈하게 앉아서 아직 오지 않는 친구 욕도 하면서 이러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2시간 이상이 지난 7시가 넘어서야 마침내 그 친구가 씩 웃으며 “어~ 일이 있어 좀 늦었어, 미안해들! 그런데 여자들은 어디 있어?” 하고 대수롭지 않게 눙치면서 자리에 앉는 것이었다.
필자는 너무 화가 나서 왜 늦었는지 자초지종도 묻지 않고 대뜸 그 친구에게 “야! 이 새끼야! 너는 전화할 줄도 모르냐? 개 상놈의 새끼!”라고 거친 욕을 퍼부어주었다. 필자가 욕을 하자 그 친구도 화를 내며 “야! 네가 뭔데 나에게 쌍욕을 해?” 하며 대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실랑이는 결국 그날 밤 눈 내리는 소공동 길 위에서 주먹다짐으로까지 이어졌다. 다행히 다른 친구들이 결사적으로 말려 싸움의 결말을 보지 못하고 일주일 후에 석관동 들판에서 다시 만나 결투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약속한 날 오후, 석관동 시내버스 종점에서 함께 만나 널찍한 장소를 찾아가 심판도 없이 둘이서 맞짱을 떴다. 한 10여 분쯤 싸웠을까. 쉬는 시간이 없어서 그랬는지 둘 다 완전히 녹초가 되어 그만 싸우기로 합의하고 헤어졌다.
그 후 겨울방학이 끝나고 개학 때 만나 서로 악수만 했고 한참 동안은 서먹하게 지냈다. 그러다가 차츰 가까워졌고 함께 시험 준비도 하고, 수업이 없는 자투리 시간에는 탁구와 당구도 치고, 음악 감상도 함께하는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사회에 나온 후에도 서로의 조경사를 챙겨주며 가끔 연락해 만난다. 그렇게 서로를 아끼고 위하는 우리들의 우정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악연이 오히려 수십 년 지기 절친한 친구의 인연이 된 것이다.
그때 비록 성사는 안됐지만, 그런 미팅을 내 남은 생애에 언제 또다시 주선해볼 수 있을까? 지나간 추억은 대부분 아름다운 것 같다.
벌써 30여 년 전의 일이다. 필자는 딸 둘을 키웠는데 3년 터울이었다. 누구나 그러하듯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영혼으로 자라게 하고 싶었다. 크리스마스엔 가족뿐만 아니라 친척끼리도 서로 선물을 나누며 감사와 사랑을 확인하곤 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랐을 때 인디언 핑크 스웨이드 천을 잘라서 손바느질로 고리가 달린 버선을 두 개 만들었다. 버선엔 각자의 이름을 흰 실로 수놓고 테두리 마감 스테치도 한 땀 한 땀 공을 들였다.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기 한 달 전쯤부터 이층 침대에 걸어두었다.
아이들이 서로 다투거나 양보나 배려가 부족할 때는 크리스마스에 올 산타할아버지를 불러내 긴장을 시키곤 했다. 아이들은 산타할아버지의 존재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고 해마다 필자가 몰래 넣어주는 선물을 기다렸다.
그날은 유난히 눈이 많이 오던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아이들은 평소 갖고 싶은 물건 이름을 적어서 버선 속에 넣으면 산타할아버지가 보시고 선물을 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기대에 가득 차 삐뚤빼뚤 글씨를 쓰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필자는 아이들 몰래 메모지를 꺼내 보곤 혼자 나가서 선물을 사고 포장도 했다. 그리곤 커다란 장바구니에 숨겨 집으로 돌아온 후 살짝 안방 장롱에 숨겼다. 호기심 많은 아이들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엔 기대에 들떠 잠도 자지 않는 아이들이었다. 자다가도 부스럭 소리만 나면 혹시 산타할아버지가 오셨나 하고 벌떡 일어나곤 했다.
그날 늦게 귀가한 남편이 현관 벨을 누르자 그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 아이들이 비어 있는 버선 속을 보며 거의 울상이 되어 아주 슬픈 표정을 지었다. 자기들이 착하지 않아 선물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를 본 남편이 기발한 생각을 했다. 아이들이 이미 일어났으니 선물을 넣을 기회는 놓쳤고 다른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남편은 버선 속에 몰래 메모지를 넣었다. 아빠가 썼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왼손으로 쓴 글씨의 메모지였다.
‘착한 아이에게만 선물을 주는 산타할아버지다. 거실 두 번째 서랍장을 보아라.’
아이들은 울다가 깜짝 놀랐다. 흥분한 아이들은 거실로 도토리처럼 굴러갔다.
‘흐음, 잘 찾았구나! 착한 아이들아. 피아노 뚜껑을 열어보아라.’
아이들은 피아노 뚜껑을 열려고 또 뛰었다.
‘이것도 잘 찾았구나! 이번엔 세탁기를 열어보아라.’
아이들은 다용도실로 뛰었다. 그리곤 환성을 터뜨렸다. 세탁기 속에 예쁘게 포장된 선물 보따리가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물을 다소곳이 들고 거실로 돌아온 아이들 얼굴은 기쁨을 주체할 수 없는 듯 홍조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다음 날 학교와 유치원에서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마치 커다란 비밀이라도 알게 된 듯 울먹이며 내게 안겼다.
“엄마, 아이들이 그러는데 산타할아버지는 없대요. 맞아요?”
지난 밤,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을 받던 행복했던 순간을 친구들에게 말했더니 모두 그런 할아버지는 없다고 해서 자기만 있다고 우겼다는 것이다. 순간 당황한 필자는 고민하다가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산타할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에 한동안 절망하며 슬퍼했다.
그 후로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은 사라졌지만, 아이들은 크리스마스이브에 나누던 따스한 기억을 잊지 않았다. 용돈을 모아 조몰락거리며 서로의 선물을 준비했다. 서로에게 산타가 되어준 것이다. 그렇게 동화 속 마지막 산타할아버지는 떠났지만 그 아름다웠던 크리스마스이브는 영원히 아이들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떠올리면 스크루지 영감이 떠오른다.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제대로 알려주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필자도 좀 구두쇠이기 때문에 더 공감이 간다. 그래서 반성도 하며 교훈을 얻어 지침으로 삼는다. “그 친구를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어. 처진 어깨 다독여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 하는 거였어.” 특히 이 구절을 늘 가슴에 품고 지낸다.
아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의 일이다. 집 안에는 한 달 전부터 만든 크리스마스트리에 불이 번쩍번쩍했다. 두 아들은 그 앞에 옹기종기 앉았다가 다시 일어나 펄떡펄떡 뛰었다. 전구 불빛 한 번 만지고 자지러지게 좋아했고, 장식을 살짝 손대면 까르르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필자도 덩달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크리스마스이브 날 해가 어둑해질 무렵 유치원 교사와 운전수 아저씨가 크리스마스 복장을 하고 서로 약속된 시간에 찾아와 현관문 벨을 울렸다. “나 산타 할아버지야, 하우가 말을 잘 들어 선물을 가지고 왔어.” 선물을 손에 들고 줄듯 말듯하면서 “엄마 아빠 말 잘 들었지?” 하고 물었더니 아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네” 했다. 선물을 받고 아들은 자기가 평소에 갖고 싶었던 것이라며 끌어안고 좋아했다. 필자가 미리 선물을 사다가 유치원에 맡긴 걸 알 리가 없는 아들은 ‘어떻게 알았지?’ 하는 표정으로 기뻐했다.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날 밤은 눈이 펄펄 내렸고, 새벽녘에는 동네 골목에서 교회 성가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러….” 낭랑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는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 집에 축복의 기도를 해주시는 듯 아름답게 들려왔다.
아들은 선물을 만지작거리면서 이런 말을 했다. “엄마, 산타할아버지가 운전수 아저씨 목소리 같아” “그랬어?” 그때는 숨기고 싶었다. 얼버무리며 필자는 미소만 지어 보였다. 몇 년이 더 지난 후 아들은 “엄마 그때 운전수 아저씨라는 거 알고 있었어. 그런데 그냥 말하지 않고 지나간 거지.”
잊히지 않는 크리스마스의 추억이다.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떠들썩하게 보냈다. 선물도 주고받고 흥분된 마음으로 지냈다. 거리마다 가게마다 불빛이 빛났고 밤늦은 시간까지 술집은 사람들로 붐볐다. 가수들은 캐럴송 음반을 서로 다투어 출시했고, 거리에 한 가득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요즘은 크리스마스 날이 되어도 조용하다. 이제 필자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지 않는다. 아이들이 어릴 적 그 시절의 크리스마스가 그립다.
필자가 중고생일 때 교회 오빠가 좋아 새벽기도 한 달 개근한 적도 있고 크리스마스 새벽 송을 부르러 다닌 경험도 있다.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다.
크리스마스 때 생긴 일을 말씀드리려 한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교회 다니시는 어르신들이 새벽 송을 당신 집 앞에서 불러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지금은 신림사거리가 번화하지만 그 시절만 해도 한적한 시골 마을의 읍내 번화가만도 못했다. 집들도 여기저기 떨어져 있고 가게도 일찍 문을 닫아 깜깜한 거리를 무리지어 다니면서 오들오들 떨면서도 기분 좋게 삼삼오오 새벽 송을 부르며 다닌 기억이 있다.
그러면 어느 댁에서는 뛰어나와 사탕봉지를 건네주시고, 어느 분은 센베이 과자를 몇 봉지씩에 담아서 주셨다. 당시에는 그런 먹거리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다들 좋아했다. 그중 한 할머니께서는 추우니까 마지막에 꼭 당신 집에 와서 단팥죽을 먹으라고 당부하셨는데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그 할머니 댁에서 일어났던 에피소드다.
몹시 추운 날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새벽 송을 마치고 발을 동동거리며 할머니 댁으로 몰려갔다. 다들 따뜻한 단팥죽을 먹을 기대 속에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가파른 고갯길을 좀 올라가 드디어 할머니 댁에 도착했고 모두에게 한 공기씩의 먹음직스런 단팥죽이 앞에 놓였다.
그런데 한 숟갈을 떠 뜨거운 단팥죽을 입속으로 떠넣는 순간 우리 모두는 요즘 인터넷 용어로 헉~~!!이었다. 단맛도 아닌 정말 희한한 맛이었는데 뱉을 수도 없고 참 난감했다.
그 순간 할머니가 우리들 표정을 보더니 이렇게 한마디하시는 게 아닌가.
“당원인 줄 알고 소다를 넣었나봐유. 워쩐대유~”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야말로 멘붕 상태였다.
그때 젊은 청년이었던 선생님께서 우링게 무언의 눈빛을 보내셨다.
“그냥 먹어라. 아무 소리 말고.”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눈치는 있었던 우리는 표시 안 내고 웃으면서 “잘 먹겠습니다~”를 외쳤다.
춥고 배고프던 시절에 있었던 ‘크리스마스 단팥죽 사건’이었다.
갑자기 추워진 어느 날 저녁 밖에서 사들고 온 단팥죽이지만 몸이 아픈 남편에게 고명 얹고 따끈하게 데워주던 날 그날의 추억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야간통행금지가 시행되던 시절 통금이 해제된 크리스마스는 젊은이의 가슴에 불을 댕겼다. 통금해제 크리스마스이브 인파에 밀리고 진눈개비에 눌려 아내에게 선물할 우산은 이미 부서져버렸지만 그래도 선물은 선물이었다.
야간통행금지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실시되던 야간통행금지는 1982년 민심회유책으로 해제할 때까지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위반자는 파출소에 연행되어 즉결재판을 받고 과태료를 납부해야 했다. 밤 11시가 되면 귀가전쟁이 벌어졌다. 대중교통이 끊기면 택시 잡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도심 광화문·을지로·충무로는 늘 귀가 인파로 뒤덮였다.
통금시간의 거리에서는 야경원의 호루라기 소리만 요란할 뿐 사람 한 명 찾을 수 없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세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통금해제는 그야말로 별천지와 다름없었다.
통금해제 체험
젊은 시절 어느 크리스마스이브 날, 필자는 퇴근 후 근처에서 근무하는 몇몇 친구와 광화문 네거리에서 만났다. 그날은 마침 눈까지 내려 눈꽃에 취한 우리는 저녁식사에 반주까지 곁들였다. 결국 술기운이 불을 붙였다. “통금해제를 체험하자!” 누군가의 제안에 “옳거니!” 맞장구를 치고 말았다. 연년생 아이들이 어려서 외출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를 그만 깜박 잊고 말았다. 코트 주머니에는 아내에게 줄 예쁜 우산이 들어 있었다.
당시에는 미니스커트 입고 꽃무늬 우산을 든 미녀들이 방송 화면에 자주 등장하던 시절이었다. 양산 겸용 접이식 우산은 숙녀들의 소지품으로 인기가 높았다.
부서진 우산
수천·수만의 인파 구경이 통금해제 체험의 전부였다. 자정이 넘어도 귀가전쟁이 없는 것 말고는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초저녁에 내리던 눈이 자정 무렵 진눈개비로 변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날씨가 안 좋아 대중교통이 거의 끊겨 걸어서 귀가를 해야 했는데, 걸어가는 동안 통금해제로 몰린 사람들과 부딪치고 진눈개비에 젖었다. 도리 없이 아내에게 주려고 산 우산을 펴들고 말았다. 그래도 집에 도착했을 때는 물에 빠진 생쥐 모양새가 되었다. 우산을 살펴보았다. 비에 젖은 천은 말짱하였는데 살은 이미 구부러지고 부러져서 선물이 아니라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물건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우산을 아내에게 쑥스럽게 내밀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 우산 덕분에 걸어서 무사히 집에 왔다. 다음에 더 좋은 선물할게!”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진눈개비 피하는 우산으로 사용하면 되지! 살 몇 개 고치면 새것과 똑같겠네!” 천사의 대답이었다.
세월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마는 크리스마스 날이 예전과 다르게 이렇게 조용하게 변할지는 몰랐다. 어릴 적 크리스마스이브는 무조건 교회 가는 날이었다. 교회 가는 목적은 단 하나, 종이봉투 속에 빵과 사탕 몇 개를 담은 선물 봉지를 받고 싶어서다. 그 당시 시골 아이가 크림이 들어 있는 단맛 나는 빵과 알록달록한 사탕과 과자를 얻어먹는다는 것은 횡재라고 부를 만큼 기쁜 일이었다. 제삿날 밤늦게 기다리다 얻어먹던 하얀 쌀밥에 참기름 넣은 나물 무침과 상어고기 한 토막과는 또 다른 맛이었다.
예전에는 크리스마스 무렵이 되면 온 동네가 시끌벅적했다. 전자제품 A/S센터가 없던 시절이라 골목마다 라디오 고치는 전파사가 있었는데 하루 종일 징글벨 노래가 울려 펴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루돌프 사슴코 노래도 엄청 들었고 창밖을 보라, 실버 벨, 기쁘다 구주 오셨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등 메들리 캐럴송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교회에서는 긴 망토를 입은 세 명의 동방박사가 예수님 탄신을 경배하기 위해 찾아가고 예수님은 구유에서 태어나시는 모습을 주제로 한 연극을 했고 어린이 관객은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필자가 고등학생일 무렵에도 떠들썩한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변함이 없었다. 교회 다니는 신도들보다 교회 다니지 않는 친구들이 더 야단이었다. ‘광란의 올나이트’라고 이름 붙이고 밤새 춤추고 노래 부르며 놀았다. 그날만큼은 통행금지도 없었고 교인들의 행렬도 장관이었다. 특히 연인들은 그날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나야 하는 날이었다.
필자가 초년 직장인이었던 시절에는 경제 부흥의 여파로 세상이 역동적이고 경기도 좋았다. 크리스마스를 시발점으로 하여 연말연시는 늘 시끌벅적했다. ‘Marry Christmas And Happy New Year’라는, 즉 크리스마스와 새해 신년인사를 함께 하는 카드를 주고받는 것이 유행이었다. 일 년 내내 소식 한 번 전하지 않고 지내다가도 이때 다양한 카드를 주고받으면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 그림 솜씨가 좋은 학생들은 직접 그린 수제 카드를 길거리에서 팔았다. 그림이나 글귀가 좋은 것은 책상 유리 밑에 끼워두고 오래 보기도 했다.
요즘은 크리스마스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넘어간다. 길거리에서도 캐럴송을 들어본 지 오래다. 캐럴송이 사라진 이유는 저적권법에 걸려 고액의 사용료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노랫소리가 듣기 싫은 사람들이 소음공해로 민원을 제기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TV 방송이나 라디오에서도 예전만큼의 캐럴송이나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한 가슴 훈훈한 이야기들을 특별히 소개해주지 않는다.
부처님 오신 날이든 예수님 탄신일이든 정부에서 경축 기념일로 정한 날은 세상이 좋은 쪽으로 조금은 시끌벅적하면 좋겠다. 해당 종교를 안 믿는 사람에게도 공휴일의 혜택은 다 같이 주어지기 때문에 종교 기념일이라고 굳이 색안경을 끼고 반대할 명분도 약하다. 해당 종교를 믿든 안 믿든 기쁜 날로 생각하며 시끌벅적 사람 사는 냄새가 나면 좋겠다.
브라질의 삼바 춤 축제는 열흘이나 이어진다고 한다. 일본에도 지역별로 진행되는 다수의 ‘마츠리’ 축제가 있다. 건강, 사업 번창 등을 기원하는 일종의 종교행사다. 우리나라도 예전부터 농한기가 되면 풍악을 울리고 명절 때는 마을마다 다양한 놀이가 있었다. 이런 자발적인 축제는 이제 다 없어지고 얼토당토않은 관 주도의 행사에 뒷말만 많다. 크리스마스 날만이라도 저작권료나 소음공해민원 걱정 없이 신나는 캐럴송이 온 나라에 울려 퍼지는 좀 시끌벅적한 날이 되면 좋겠다.
크리스천으로 생활한 지 40년이 넘다 보니 크리스마스 하면 교회 성탄절 행사가 우선적으로 떠오른다. 크리스마스이브 날 교회에서 예배드리다가 성탄절에 맞는 성찬식은 의미가 있었다. 성탄절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어서 즐겁게 보냈다. 어릴 적에는 산타할아버지에게 선물 받는 즐거움도 있었다. 결혼해서 아이들에게 몰래 선물 준 일도 기억이 난다.
이런 기억들 말고 필자에게는 크리스마스에 얽힌 또 다른 추억이 있다. 20대 때 대학원에 다니고 있을 때다. 논문 준비로 부심하던 어느 크리스마스이브 날에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고 연락이 왔다. 형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충격에 아버님이 그만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불행은 어깨동무를 하고 온다더니 겹친 악재였다. 만사 제쳐두고 친구 집에 가서 빈소를 지키면서 밤을 새웠다. 크리스마스인 다음 날 새벽에 발인을 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무척 많이 내렸다. 다른 일이 있어 지방의 장지까지는 동행하지 못했다. 올 것이라고 믿고 연락한 친구에게 고마웠다. 그 후로 그 친구와 더 가까워졌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나 크리스마스이브에 그 친구에게서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우연의 일치인지 같은 날짜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이다. 아내의 불평을 뒤로 하고 가족과 세운 모든 크리스마스 계획을 포기하고 성내 아산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영안실에서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다 밤늦게 취해 혼자 병원 앞 다리를 건너왔다. 바람이 몹시 불었다.
어려울 때 같이할 수 있어야 친구다. 즐거운 날에 슬픔을 같이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친구는 필자가 반드시 올 것이라 믿고 부담을 느끼지 않고 연락을 했다. 그러다 보니 친구와의 신뢰가 더 깊어졌다. 그 친구는 그 뒤 역경을 딛고 성공했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같이 여행도 가고 깊은 속도 털어놓는 관계가 되었다. 친구가 있는 근처에 가서 연락하면 만사 제쳐놓고 나온다. 친구의 행동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인간관계는 주는 만큼 받는다. 풍파 많은 세상이다. 어떤 일을 겪을지 알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등질 때 내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하다. 그런 친구가 세 명만 있으면 세상살이가 외롭지 않을 것이다
1971년 크리스마스이브.
제대 후 복학하고 처음 맞는 성탄절이다. 통행금지도 없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의기투합해 생일을 따져 의형제를 맺은 동갑내기 형과 아우가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 날 각자 장래를 약속한 여인들까지 여섯이서 만났다. 어쩌면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는 마지막 성탄이 될 것 같은 생각에 이른 시간에 만나 함께 온종일 몰려다녔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이라 부처님이 외로우시겠다며 안국동에 있는 조계사로 가서 조용한 경내를 돌며 새해 소망의 기도를 올렸다. 비원에서는 앙상한 가지를 보며 별별 희한한 대화를 나눴다. 시간가는 줄 몰랐다.
호텔로 들어가서는 구멍가게에서 사온 술과 안주를 놓고 각자 앞으로 계획한 삶에 대해 대화를 나누며 새웠다. 되돌아보니 그때 계획한 삶대로 거의 비슷하게 살아온 듯싶다. 시공간을 초월해 아직도 그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잠시 벽에 기대어 졸고 있는데 비상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호텔 직원들은 “근처에 화재가 발생해 거리가 혼잡하오니 투숙객께서는 서둘러 체크아웃하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며 다녔다.
알고 보니 22층의 그 유명한 대연각 호텔이 불타고 있었다. 우선 각자의 집에 전화부터 넣었다. 왜 이제야 전화하냐고 역정을 내시면서도 안심하시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니 너무 죄송했다. 나중에 신문에 난 기사를 보니 세계 최대 호텔 화재였단다. 기가 막힌 건 160여 명이 사망했는데 여력이 없어 피해 보상금은 놀랍게도 ‘0’.
일찌감치 소풍 끝내고 우리 함께 살 좋은 터 미리 잡으러 간다며 미소 띠고 이승 떠난 형과 자녀들이 있는 미국에서 살고 있는 형수, 대기업에서 전무로 정년을 마치고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막내와 제수씨 그리고 뒤늦게 공부에 미쳐 강사생활은 하늘에서 소명으로 주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돌아다니는 나.
나이 듦이 고마운 이유는 삶은 절대 별게 아닌 게 아니라는 것을 이제라도 알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