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잃어버린 땅
- 6월 13일, 강신영, 김종억 동년기자와 내가 백두산 트레킹 팀(총 33명)에 합류했다. “백두산은 한민족의 발상지. 또 개국의 터전으로 숭배되어온 민족의 영산(靈山)이다.” 어떤 결의에 찬 출발이라기보다 막연히 뿌리를 보고 싶었다. 또 더 나이를 먹으면 백두산에 오르기 힘들 것 같은 불안감도 있었다. 일찌감치 4박 5일의 여행 일정표를 받았지만 비용과 둘러볼 장소만 보고 무심히 있다가 출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자세히 보니 ‘오전 6시,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 3층 집합’이라 씌어 있었다. 난감했다. 다른 사람들은 4시에 출발하는 공항버스를 이용할 수 있지만 경기도에 사는 나는 그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인천공항 근처의 호텔을 알아봤다. 아침에 공항까지 데려다주는 서비스까지 포함해 숙박료가 4만5000~5만5000원 정도였다. 인천 운서역 근처에 있는 호텔을 예약한 뒤 4만5000원을 지불했다. 다음 날 새벽 5시 40분까지 인천공항까지 데려다주는 서비스를 받았다. 집에서 왔으면 잠도 설쳤을 텐데 느긋하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비용으로 쓴 4만5000원은 그 가치가 충분했다. 짐을 꾸리면서 트레킹과 등산, 어디에 맞춰야 할지 좀 헷갈렸다. 그래서 트레킹 준비를 했고, 내 상태를 고려해 스틱까지 준비했다. 우산과 비옷, 따뜻한 옷도 집어넣었다. 허전한 코리아타운 드디어 1시간 30분 만에 심양국제공항에 도착,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버스에서 내려 코리아타운 ‘서탑가’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중국어와 한국어로 된 간판이 이어져 있었지만 한국어가 생경하게 느껴졌다. 마사지, 노래방, 술집, 음식점, 찻집, 미용외과, 횟집, 족도관, 한국당구장…. 뭔가 허전했다. 거리에서 돈을 쫓아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이 느껴져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조선의 문화가 배어 있는 풍경은 아니었다. 문화를 팔아야 돈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잘 보존된 고려의 옛 거리, 결기 있는 독립투사 후예들이 자신들의 혼을 녹여 만든 거리를 상상했는지도 모르겠다. 고구려 유적지, 민족 성지 만주벌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러나 곧 이런 생각들을 후회했다. 먹고살기 팍팍하고 안전이 보장되지 못하면 문화도 역사도 예절도 지키기 힘들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많은 고난 속에서도 조선족으로 남아 우리의 말과 풍습을 지켜오지 않았는가. 산 자와 죽은 자의 도시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통화시에서 집안시로 두 시간에 걸쳐 이동했다. 광개토대왕비와 능, 장수왕릉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을 관광하기 위해서였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우리의 논, 밭, 산과 너무도 흡사했다.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지인 국내성이 있었던 곳이다. 고구려 2대 왕 유리왕이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한 이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400여 년 이상 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이다. 지금도 땅을 파면 유적과 유물이 나오는,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도시다. 1570년간 땅속에 묻혔던 광개토대왕비는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장수왕은 높이 6.9m, 무게 37t의 비석에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해놓았다. 그러나 탁본을 뜨는 과정에서 훼손되었고 일제가 기록 일부를 변조하는 일까지 벌였다고 한다. 우리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수모의 공간, 빼앗긴 국토에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광개토대왕비는 중국 공안 복장의 경비원이 지키고 있었는데 사진촬영을 금했다. 인형처럼 유리로 둘러싸인 공간에 박제가 된 채 서 있는 비석. 우리 조상의 업적을 다른 나라 사람이 지키면서 우리에게 입장료를 받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뒤를 돌아 광개토대왕릉으로 향했다. 마치 조그만 동산처럼 느껴지는 흙더미. 그 위에 초라한 나무 한 그루가 능임을 알게 해줬다. 내부 석실에는 한국 관광객이 던져놓은 듯한 1000원짜리 지폐 몇 장이 놓여 있었다. 먹먹한 마음을 그렇게라도 달래고 싶었던 모양이다. 좀 더 걸어가니 413~490년에 축조된 장군총이 나왔다. 거대한 화강암을 쌓아올리고 그 옆에 밀리지 않도록 지지석을 세운 피라미드식 축석묘다. 높이 12.4m, 길이 31.6m의 7단 계단식 동방의 피라미드는 아직도 탄탄해 보였다. 침묵, 그리고 안타까움 장수왕 무덤가에 머물며 안타까운 질문을 하고 싶었다. ‘거대한 만주 벌판을 버리고 평양으로 천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안 그랬다면 아직도 만주는 우리 영토일 텐데요.’ 모두의 가슴으로 젖어드는 안타까움. 그것이 비가 되었는지 그칠 줄 모르고 따라다녔다. 아니면 아비를 박제화한 것을 통곡하는 장수왕의 눈물일지도 모르겠다. 웅장하고 거대한 무엇을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뿌리에 존재하는 의식을 일깨워준 여행이었다. 순간순간 가슴이 저려왔다. 잘 키운 딸을 강탈당한 부모의 심정이 이럴까. 가이드는 천지에 올라 태극기를 꽂았다가 벌금 물고 감옥까지 갈 뻔했던 한 한국인의 이야기를 해줬다. 순간 웃음이 나왔지만 괜히 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2018-08-28 09:34
-
- 핸드볼 슈퍼스타, 윤경신
- 1995년, 핸드볼 최고의 리그라 불리는 독일 분데스리가에 최초로 동양인 선수가 등장했다. 13년 뒤 그는 독일인들이 핸드볼의 신이라 칭송하는 영웅이 되어 한국에 돌아왔다. 선수에서 감독으로, 3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핸드볼과 동고동락한 윤경신(46) 감독을 만났다. 두산베어스 핸드볼팀의 오전 훈련이 한창인 의정부종합운동장, 그곳에서 윤경신 감독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2m가 넘는 키 덕분에 멀리서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의 옆에 서니 마치 개미가 된 기분이랄까. 앉으면 괜찮을까 싶어 서둘러 카페를 찾았다. 웬걸… 앉아서도 그를 한참 올려다봐야 했다. “아버지 181cm, 어머니 170cm, 누나 174cm, 남동생이 194cm이니까 가족이 다 크죠. 엘리베이터에서 사람들이 저희 가족을 보면 흠칫 놀라곤 해요.” 그는 203cm로 가족 중에서도 가장 크다. 중학교 때부터 키가 빠르게 크기 시작했는데 2학년 땐 3주 만에 11cm가 자라 거인병을 의심했을 정도라고. 그는 다시 태어난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90cm만 되면 좋겠다고 말한다. “큰 키의 장점이요? 별로 없어요. 공기가 맑나?(웃음) 오히려 단점이 더 많은 것 같아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도 불편하고 맞는 옷을 찾는 것도 쉽지 않고, 또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기도 하죠. 그래서 어릴 땐 큰 키가 콤플렉스였어요.” 하지만 핸드볼 선수인 그에게 큰 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장점이었다. 2m 3cm 장신이 꽂아 내리는 시속 120km의 속사포를 막아낼 사람은 없었다.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시작으로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금메달과 득점왕, 1995년 세계선수권대회 득점왕을 수상하며 세계에 그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핸드볼 정상에 오르다 우리나라 3대 스포츠가 축구, 야구, 농구라면 유럽에선 핸드볼이 그중 하나다. 특히 독일의 핸드볼 분데스리가는 전 세계 핸드볼 리그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힌다. 1부 리그 18구단, 2부 리그 20구단 등 남녀 1, 2부를 통틀어 60여 개가 넘는 팀과 시합할 때마다 경기장을 꽉 채우는 수천, 수만 명의 팬들이 그 인기를 증명해준다. 1995년, 핸드볼 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무대인 분데스리가에 윤경신이 진출했다. 동양인으로는 최초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했다. “성적이 좋다, 전통 있는 팀이다 해서 들어갔죠. 근데 가서 보니까 성적이 밑바닥이더라고요. 그 당시 16구단 중에서 13~14위를 다투고 있었으니까요.” 그가 들어간 굼머스바흐 핸드볼팀은 1부 리그에 겨우 발을 걸치고 있던 최하위 팀 중 하나였다. 2부 리그로 강등당할 뻔했던 굼머스바흐를 살려낸 주인공이 바로 윤경신. 그는 지능적인 플레이와 파워풀한 공격을 앞세워 굼머스바흐를 3위의 막강 팀으로 만들었다. 유럽 선수들 가운데서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했다. “한국에서 핸드볼을 시작했다는 게 가장 큰 무기였어요. 탄탄한 기본기와 경기 기술을 배운 게 많은 도움이 됐죠. 유럽 선수들보다 뒤처지는 웨이트 부분은 개인 트레이너를 고용해서 보완했어요. 믿기지 않겠지만 몸싸움에서 항상 밀려 나가떨어지곤 했거든요. 동료들이 오죽했으면 절 북한 괴뢰군이라고 불렀겠어요.(웃음)” 그는 첫 시즌이던 1996-1997시즌부터 2001-2002시즌까지 연속 여섯 시즌 득점왕, 다시 2003-2004시즌과 2006-2007시즌 득점왕에 오르며 역대 분데스리가 최다 골을 기록했다. 그중 2000-2001시즌엔 324골로 분데스리가 역대 유일한 300골 이상의 기록을 달성했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2002-2003시즌 득점왕을 놓친 이유가 유럽 선수들이 동양인에게 계속 득점왕을 내주는 게 자존심 상해서 한 선수에게 7m 드로우를 몰아줘 득점왕 자리를 빼앗았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처음 독일에 갔을 땐 텃세성 파울이 많아 힘들었다고 말했다. 또 유일한 동양인이다 보니 인종차별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한국인은 개고기를 먹는다, 마늘 냄새가 난다. 이런 말을 들었어요. 그 고정관념을 깨주기 위해 어머니가 많이 도와주셨죠.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해서 마늘이 들어간 불고기랑 잡채를 해주셨거든요. 애들이 밥을 다 먹으면 제 역할은 술 게임을 알려주는 거였어요. 독일엔 술 게임 문화가 없다 보니 ‘369’나 ‘007빵’ 같은 걸 가르쳐주면 정말 좋아했거든요. 그렇게 술 게임을 하면서 서로 친해졌던 것 같아요.” 제2의 고향, 독일과의 작별 2006년 윤경신은 함부르크로 이적했다. 그는 굼머스바흐를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굼머스바흐의 구단주가 바뀌면서 그의 연봉을 삭감하는 등 부당한 대우가 많았다는 것. “이적할 땐 배신감을 느껴서 번호도 7번에서 77번으로 바꿨어요. 그 당시엔 21번 아래 번호 선수가 주축을 이뤘는데 제가 높은 숫자로 바꾼 이후엔 다들 저를 따라 하더라고요. 나 때문에 유행한 게 맞나…?(웃음)” 2008년 그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독일에서 가진 마지막 경기에서 공교롭게도 함부르크와 굼머스바흐 두 팀이 맞붙었다. 걱정과는 달리 굼머스마흐 팬들도 그의 마지막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모였다. “그때 함부르크가 두 골 차로 이겼어요. 굼머스바흐를 상대로 제가 여덟 골인가 넣었죠. 유럽 사람들이 굉장히 다혈질이라 이 사태를 어떡하나 했는데 다행히도 굼머스바흐 팬들이 마지막이라고 예우를 많이 해준 것 같아요. 끝날 때 박수도 쳐주고 북도 쳐주고. 특히 대형 유니폼을 만들어서 작별인사해주던 모습은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당시 독일에서 윤경신의 인기는 ‘한국은 몰라도 윤경신은 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인터넷에서 그를 검색하면 아직도 ‘핸드볼의 신’, ‘득점기계’, ‘구기종목의 전설’이라는 연관검색어들이 뜬다. 문득 그도 인터넷에서 자기 이름을 검색해보는지 궁금했다. “검색해보는 거 좋아해요.(웃음) 사실 안 좋은 기사가 있으면 어떡하나 더 걱정하는 편이죠. 2012 런던올림픽 개막식 때 기수로 섰는데 하필 태극기가 바람에 뒤집힌 순간에 찍힌 사진이 뉴스로 나갔더라고요. 아휴… 욕 엄청나게 먹었죠. 그래도 종종 제 이름 검색해보고 새로운 기사 나오면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핸드볼 선수에서 감독으로 두산베어스 핸드볼팀은 지금까지 2014년을 제외하면 한 번도 우승을 놓쳐본 적이 없는 강팀이다. 윤경신 감독은 지난 2013년, 두산의 지휘봉을 잡으면서 감독으로 데뷔했다. 부임 첫해 우승을 이끌며 감독으로서도 성공적인 출발을 보여줬다. “처음엔 두산이 날 감독으로? 왜? 이런 의문이 들었어요. 승승장구하는 팀인데 과연 내가 들어가서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부담감도 컸죠. 한편으론 ‘스타플레이어는 훌륭한 감독이 될 수 없다’는 말을 깨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우승의 기쁨도 잠시, 이듬해인 2014년 지금은 해체한 웰컴론 코로사에게 패해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한 번도 우승을 놓쳐본 적 없는 두산에게 준우승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결과였다. “첫해에 우승하니까 나태해진 거죠. ‘아 이제 됐어, 이렇게 하면 2년 차에도 우승할 수 있을 거야’라고 자만했던 게 결국 패배로 이어졌어요. 그래도 한 번 넘어져봤기 때문에 3년 차, 4년 차에 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윤경신 감독은 우승의 비결로 선수들과의 소통을 꼽았다. 비시즌에는 선수들과 거리낌 없이 술도 마시며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그러다 보니 서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을 많이 헤아릴 수 있게 됐다고. 핸드볼과 함께한 지 어언 30여 년. 지긋지긋할 법도 한데 아직도 핸드볼이 좋을까. “중간중간 농구해라, 배구해라 유혹이 많았었는데 핸드볼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한 제 자신을 칭찬해요. 핸드볼을 했기 때문에 외국에 나가서 명성과 명예를 얻고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잖아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핸드볼을 했지만, 정말이지 매 순간 행복했어요.” 다가오는 11월에 국내 핸드볼의 최강자를 가리는 핸드볼코리아리그가 열린다. 경기장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사람 윤경신, 그의 다섯 번째 우승 도전을 응원한다.
- 2018-06-26 08:43
-
- 60세 이상 주축으로 한반도 평화 만들기 ‘은빛순례단’
- SNS를 통해 솔깃한 소식이 들려왔다. 젊은 시절, 사회에서 한몫 제대로 하던 시니어들이 뭉쳐 모종의 계획(?)을 꾸민다고 했다. 앉아서 말로만 걱정할 게 아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밖으로 나가 세상 이야기를 들어보자. 세대와 이념, 종교를 떠나서 터놓고 우리 얘기 좀 해봅시다!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음 세대에게 불안하지 않은 미래를 물려주고 싶다는 이들이 모였다. 열정만큼은 청춘인 60대 이상 시니어가 주축인, 이름하여 ‘한반도평화만들기 1000인 은빛순례단(이하 은빛순례단)’이다. 갈등을 넘어서 마주 보다 “걸으면서 세상과 나누고 귀를 기울이는 행동을 하자.” 이런 의견이 모인 것은 작년 9월 지리산 실상사에서 있었던 연찬 모임에서였다. 남북에 불어온 훈풍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시기였다. 한반도 전쟁 위기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흘러나왔고 이 땅을 물려받을 미래 세대를 위해 뭔가해보자며 의견을 모은 것이 ‘은빛순례단’을 탄생시켰다. 지난 3월 1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성대하게 출발 행사를 치르고 난 뒤 은빛순례단의 첫 번째 행보는 국립 현충원 참배였다. 호국영령을 모신 현충원은 엄숙한 장소이면서도 정치 대립이 극명한 곳이다. 소위 내 편의 영령만 찾아가 고개를 숙이고 참배한다.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부영 이사장은 은빛순례단으로 발을 떼면서 난생처음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찾았다. 1974년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뒤 민주화운동에 투신하다 민주당 국회위원을 지낸 인물. 그가 박정희 묘역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고 말하면 놀랄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 이부영 이사장은 “마음이 복잡했지만 이것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우리 역사가 또 다른 질곡 속에서 갈등과 대결을 되풀이할 뿐이라 생각했다”며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 참배로 인해 마음속 무엇인가가 씻겨나간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단순히 분노와 적개심이 아니라 이해와 성찰, 현재의 과제를 생각하게 해준 계기였다고. 이를 옆에서 지켜본 도법 스님(조계종 화쟁위원회 위원장)은 감동적이었다고 했다. 일생 지켜왔던 자기 원칙을 깨기란 쉽지 않은 나이이기 때문이다. 은빛순례단의 운영단장을 맡고 있는 수지행 실상사 기획실장도 현충원 방문이 꽤나 충격적이고 놀라웠다고 말했다. “애국지사 임정요인(臨政要人) 묘역에서 돌아가신 대통령의 묘역 말고도 신돌석 의병장, 홍범도, 김규식 등의 묘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며 “우리나라를 지킨 분들 또한 잠들어 있는 곳인데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새해 어떤 정당인이 누구의 묘소에 참배했는지 그 사실에만 가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두고 부정적 시각으로 적대시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 또한 인정하고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은빛순례단의 생각이다. 이후 은빛순례단은 몽양 여운형 선생 묘소와 4·19 기념탑을 참배하고 종교계 인사를 만나는 등 비교적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4월에는 충주, 충북 음성, 옥천, 영동 등지에서 걷기 순례와 연찬, 방문 순례를 했다. 5월에는 전남 일대를 돌며 평화의 소중함을 알렸다. 도법 스님과 느리게 함께 걷는다 인천 지역에서 은빛순례단 걷기 모임이 있던 날, 도법 스님과 수지행이 지하철을 타고 이동한다기에 함께 가기로 했다. 이날은 문화해설사와 함께 인천 차이나타운 일대를 걸으며 개항의 역사를 비롯해 한국전쟁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 역사 탐방으로 꾸며졌다. 60세 이상을 은빛, 이하를 금빛이라 칭하는 은빛순례단. 은빛과 금빛이 어울려 신구 세대가 함께 조화롭게 어울려 걷는 아름다운 동행이었다. 은빛순례단은 3·1운동 100주년인 내년까지 연찬 모임, 방문 순례, 걷기 모임 등을 통해 세상과 경계 없이 나누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행동을 이어나간다. 이날 모임에는 도법 스님 외에도 이삼열(대화문화아카데미 이사장)·손이덕수(디자인 아티스트) 부부, 정세일(생명평화기독연대 공동대표) 씨 등 은빛순례를 함께하고자 하는 50여 명이 동참해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도법 스님이 세상을 향해 얼굴을 든 것은 20여 년 전. 지리산 댐 건설 반대운동을 펼치던, 지리산 실상사 주지 시절이었다. 2004년에는 주지 자리를 내려놓고 탁발순례길에 나서기도 했다. 깨달음과 가르침을 찾아 전국을 누비고 세상과 마주했다. 수지행은 도법 스님을 도와 일정을 짜고 다양한 이벤트를 기획한다. 수지행이 일정을 짜주면 도법 스님은 따져 묻지 않고 순례길에 응했다. 매일같이 10km를 걷는 강행군을 계속해온 순례의 달인들이다. 인천으로 향하던 지하철 안에서 문득 궁금해 도법 스님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길에서만 사시냐?”고 말이다. 도법 스님은 “나는 할 줄 아는 게 걷는 것밖에 없다”며 미소를 짓는다. 잠시 생각을 하다 “순례, 즉 걸으면서 얻은 것이 많았다”고 했다. 순례는 꼭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주제가 있는 활동도 하는데 그중 첫 번째가 ‘경청 순례’라고 했다. “우선 각 종교계를 먼저 만나고 있어요. 천주교 주교회의장 김희중 대주교를 만났습니다. 은빛순례단의 취지에 대해 말씀드리고, 종교계가 우리 사회 통합에 역할을 해주시기를 바란다는 얘기를 전했습니다. 천도교, 기독교, 진보 성향과 보수 성향의 단체들도 만나볼 생각이에요. 한국 사회에서 갈가리 찢어져 있는 마음을 잇고 벽을 허물어 넘어설 것인가가 화두이자 과제입니다.” 두 번째는 연찬 순례다. 대중을 상대로 평화의 한반도로 만들려면 과연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서로 이야기하는 마당이다. 그리고 주말에는 현장을 찾아가는 걷기 순례를 한다. 걷게 되더라도 많이 걷지는 않는다. 시니어가 주축이다 보니 걷기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은 있다고. 매일 8km 정도는 걸을 생각이었으나 좀 더 시니어 세대의 상황에 맞게 계획을 바꿨다. 도대체 왜 걸으십니까?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하고 말았다. 걷지 않고 편히 쉬면 그만 아니냐? 걷는 행위를 거스를 수 없는 순례길. 다리도 성하지 않을 텐데 왜 굳이 길 위를 선택했는지 궁금했다. 장수시대인 만큼 환갑을 넘겼다고 해서 뒤로 물러나 안주하는 시대는 아니라고 도법 스님은 말했다.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버린 것입니다. 옛날과 비교해 뭔가 할 일이 없는 세대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할 게 많은 시대인데 그것을 못 찾고 있는 것이죠.” 은빛순례단 중심에서 도법 스님과 함께하는 이부영 이사장에게서 들은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전쟁 불안이 고조되니 자녀들 입에서 이민을 가고 싶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이부영 이사장이 이렇게 생각했답니다. 내가 젊었을 때 뭘 한다고 설치고는 다녔는데 결국 내 손자, 손녀들한테 전쟁 불안을 대물림해야 하는 상황이구나. 자신이 뭔가 잘못했나? 헛살았나? 하는 자괴심이 컸다더군요.” 이부영 이사장은 남은 세월이라도 이 땅의 미래 세대들이 평화롭게 꿈꾸며 살아갈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면 스스로와 아이들에게 떳떳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또 사람들과 만나고 함께 걷고 이야기하는 순례가 시니어에게 더욱 적합한 사회운동이자 시민운동이라 생각했기에 선택했다고 했다. 세대가 극단적으로 충돌하다 도법 스님 눈에도 우리 사회의 씁쓸한 단면이 포착됐다. 은빛순례단이 출범식을 하던 날, 태극기와 함께 한쪽에서는 성조기를, 한쪽에서는 한반도기를 흔들며 서로에 대해 극단적으로 불신과 적개심을 표출하던 모습. 99년 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드높이던 우리 조상들이 원하던 미래는 아니었을 거란 생각을 했다.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서 모든 종교와 이 편과 저 편이 벽을 넘어서 함께 독립선언을 했습니다. 그날을 기리는 날 후손은 서로를 불신하고 적개심을 표출했죠. 독립선언을 했던 선조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서로 반목하는 모습, 이것을 풀어내지 않고서는 우리 아이들에게 편안하고 평화롭게 꿈꾸며 살아갈 수 있는 한반도를 넘겨주는 것은 불가능하죠. 그러려면 누군가가 벽을 허무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바로 어른들이 나서서 해야 하지 않을까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누구든 다 만날 겁니다. 찾아가서 만나는 것과 만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다르니까요.” 도법 스님은 사회를 좀 더 종합적으로 균형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며 새의 날개 이야기를 했다. “흔히 새는 두 날개로 난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온몸으로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몸으로 날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않아요. 대한민국이라는 새도 온몸으로 날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좌우 갈등만 있었는데 지금은 세대 갈등도 있습니다. 어른과 젊은이들 사이가 대단히 불편하고 부담스럽고 불만스러운 것이죠. 모든 관계가 소중하고 고마워야 하는데 그런 마음들이 깨진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보여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지려면 삶의 모든 과정을 평화롭게 다뤄갈 수 있는 실력과 방법, 정화의 체질화, 문화 풍토가 만들어져야 한다. 기본이 돼야 한다. 평화운동은 통일이 돼도 지속돼야 한다. 일상의 평화. 결국 은빛순례단이 미래 세대를 위해 다지고 싶어 하는 기본이란 일상 속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상생하는 평화가 아닐까.
- 2018-06-20 20:52
-
- “폐지 팔아 훈련했죠” 썰매에 미친 남자, 강광배
-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스켈레톤과 봅슬레이 두 썰매 종목에서 한국 최초의 메달리스트가 탄생했다. 메달 소식과 함께 주목을 받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한국체육대학교 강광배(姜光倍·45) 교수다. 그는 동계올림픽 최초로 모든 썰매 종목(루지, 스켈레톤, 봅슬레이)에 출전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후 썰매 불모지인 우리나라에서 제자를 발굴하고 육성에 힘쓴 그의 노력은 오늘날 한국 썰매의 발전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한국 썰매의 아버지’, ‘한국 썰매계의 문익점’, ‘한국 썰매의 개척자’. 이 모든 수식어는 한국 썰매의 시초부터 함께한 강광배 교수에게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그와 썰매의 뗄 수 없는 인연은 20여 년 전으로 돌아간다. 때는 그가 대학교에 막 입학하기 전 무주리조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부터다. 한국의 첫 루지 국가대표 탄생 “휴무 날에 생전 처음으로 스키를 타봤어요. 아니나 다를까 스키에 푹 빠져버렸죠. 처음으로 확실한 꿈이 생겼어요. 국가대표가 되는 것.” 그의 스키 실력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 대학부에서 우승하는가 하면 스키장에서 강사로도 활동했다. 꿈에 한 발짝 다가가는 듯싶었지만 불의의 사고로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스키 강습 도중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한 것이다. 절망하던 그에게 한줄기의 빛처럼 눈에 띈 게 있었다. 바로 학교 게시판에 붙은 루지 국가대표를 뽑는다는 루지 강습회 안내문이었다. “태극 마크를 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루지가 뭔지도 몰라서 찾아봤는데 누워서 타는 썰매더라고요. 무릎에도 부담이 없을 것 같고… ‘아 이건 정말 나를 위한 종목이다’ 하곤 바로 강습회에 신청서를 냈죠.” 국제루지연맹에선 군터 렘머러 수석 코치를 파견해 한국 선수 지도를 도왔다. 말도 통하지 않아 손짓 발짓 해가며 루지 조종법을 익혔다. 제대로 된 장비나 훈련장도 없었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수준이었다. “선발전이라곤 그냥 아스팔트 언덕길에 꼬깔콘 모양의 라바콘을 세워두고 누가 빨리 장애물을 피해 내려오나 초시계로 재는 거였어요.(웃음) 썰매에 바퀴를 달고요.” 아직 무릎도 완치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선발전에 출전했다. 잘못될 경우 재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부담감도 있었지만, 그가 품은 국가대표의 꿈이 훨씬 더 컸다. “기회라는 게 자주 오는 게 아니잖아요. 정말 간절했거든요. 오히려 몸을 더 과감하게 던졌죠.” 그 결과 3명을 뽑는 선발전에서 2등을 기록했다. 1등과 3등을 한 선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루지를 그만뒀다. ‘루지는 비전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대표팀을 꾸리기 위해선 서둘러 두 자리 공석을 채워야만 했다. 이때 새로 들어온 선수가 강광배의 3년 후배인 이기로와 현재 봅슬레이 대표팀 감독인 이용이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한국 첫 루지 국가대표팀이 탄생했다. 1996년 캐나다에서 열린 첫 전지훈련, 강광배 교수는 이날을 회상하며 “아팠던 기억밖에 없다”고 말했다. “트랙에 하도 많이 부딪혀서 저녁만 되면 선수들끼리 서로 약 발라주느라 바빴어요. 보호대를 착용하면 그나마 덜했을 텐데 그 당시에는 보호대를 착용하는 것조차도 몰랐으니까요.(웃음) 썰매를 탈 때마다 연습복도 다 찢어졌는데 매번 새 옷을 입을 수 없는 형편이어서 찢어진 데를 테이프로 붙여가며 훈련을 했어요.” 마땅한 장비도 훈련장도 경기장도 없었지만, 루지 국가대표 3인방은 구슬땀을 흘리며 올림픽 무대를 향해 달렸다. 그렇게 처음 출전한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강광배는 출전 선수 34명 중 31위를 기록했다. 기권한 두 명의 선수를 제외하면 꼴등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등수는 중요하지 않았다. “전 세계에서 썰매를 가장 잘 탄다는 선수들은 다 모인 거잖아요. 국가대표로 출전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죠.” 불행이 행운이 되어 돌아오다 나가노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뒤 강광배는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체육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첫째 ‘루지를 제대로 배우고 싶어서’, 둘째 ‘더 넓은 세상에서 공부하고 싶어서’였다. 인스브루크 체육대학에 입학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루지연맹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전달받았다.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그의 선수 자격을 박탈한다는 내용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릎 부상까지 겹쳤다. “루지를 배우러 갔는데 가자마자 목표가 사라져버린 거죠. 유학 가기 전에 선생님, 친구들, 가족한테 열심히 하고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한국으로 돌아가자니 제 인생을 포기한 사람이 된 것 같더라고요.” 평생 흘릴 눈물을 하루 만에 다 흘렸다는 그는 ‘이곳에서 뭔가를 이루기 전까진 절대로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이후 절박한 심정으로 더욱 공부에 매진하던 강광배는 어느 날 스켈레톤 선수이자 인스브루크 학생인 마리오 구겐베르거를 소개받는다. 루지를 탈 수 없었던 그에게 스켈레톤은 새로운 탈출구였다. 당시 트랙을 두 번 이용하는 데 들었던 비용은 약 5만 원. 스켈레톤을 타기 위해 그는 3~4시간 정도 폐지와 캔을 주웠다. 그래봐야 겨우 두 번 정도 탈 수 있었다. “낮에는 민망하니까 사람들이 다 자는 밤에 나와서 폐지랑 캔을 주웠어요. 특히 강 주변으로 산책로가 있었는데 그 근처에서 신문을 보거나 맥주 마시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곳으로 자주 주우러 갔죠.(웃음) 덕분에 자전거 타고 한 바퀴 쭉 돌면 더 이상 실을 수 없을 만큼 주울 수 있었어요.” 그렇게 그가 스켈레톤에 미쳐 있을 때 생각지도 못한 희소식이 들려왔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스켈레톤이 54년 만에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부활한다는 소식이었다. 스켈레톤은 1948년 생모리츠 동계올림픽 이후 선수가 별로 없다는 이유로 폐지된 상태였다. “루지 선수 자격을 박탈당했을 땐 나한테 왜 이런 시련이 왔나 했는데 돌이켜보면 큰 행운이었죠. 덕분에 스켈레톤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또 한 번의 태극마크를 다는 길은 순조롭지 않았다. 대회에 나가기 위해선 의사의 확인도장과 연맹 회장의 직인이 찍힌 라이선스가 필요했다. 가장 큰 문제는 한국에 스켈레톤 연맹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를 자른(?) 대한루지협회에 전화해 도움을 요청했다.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건 좋지만, 그에게 10원도 지원할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도 좋았다. 그는 가입에 필요한 서류를 모두 준비하고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털어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렇게 1999년, 우리나라도 국제 봅슬레이 스켈레톤 연맹 회원국이 됐다. “매년 국제연맹에서 회의가 열리는데 2000년에 제가 참석했어요. 갔는데 태극기가 딱 걸려 있더라고요. 뿌듯했죠. 우리나라를 국제연맹에 가입시킨 건 제 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일이었어요.” 1998년 유학길에 올라 루지 선수 자격을 박탈당하고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스켈레톤 국가대표로 나가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그는 되돌아보니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한다. “제가 힘들어도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썰매를 정말 좋아했기 때문이에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은 고생이 아니잖아요. 그땐 제가 미쳐 있었으니까요.(웃음)” 이젠 국민들의 관심이 필요할 때 강광배는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봅슬레이 출전을 끝으로 모든 썰매 종목에서 올림픽 진출이라는 기록을 세운다. 이후 한국체육대학교에서 썰매부를 맡으면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스켈레톤 금메달리스트 윤성빈을 발굴하는 등 한국 썰매 육성에 힘을 보태고 있다. “선수들과 지도자들이 노력해서 딴 메달입니다. 마치 제가 다 한 것처럼 비춰지지 않으면 좋겠어요. 전 그저 씨앗을 뿌렸을 뿐이고 농사가 잘된 거죠. 얼마나 큰 행운입니까. 잘 성장해줘서 고마울 뿐입니다. 이젠 저보단 우리나라를 빛낼 선수들과 감독, 코치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썰매라면 이제 지겨울 법도 한데 그는 어쩔 수 없는 썰매 바보인가보다. “가장 힘든 건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계속 가고 있다는 생각에서 오는 외로움이었어요. 이제는 터널을 빠져나와 빛을 봤으니 미련도 여한도 없습니다.”
- 2018-04-09 16:16
-
- 박혜경 동년기자와 함께 창신동 동덕 교정을 추억하다
- 서울시 지하철 1호선 동묘역과 6호선 창신역 사이의 창신동은 최근 예쁜 옛 동네로 주목받고 있다. 낡고 오래되면 ‘뉴타운’이라 이름 붙여 첨단 건축물을 세우고 땅값을 올리는 것이 불과 몇 년 전까지 도시의 운명이었다. 창신동은 개발을 거부하고 주민들의 푸근함을 담아 이른바 재생의 길을 택했다. 창신동 구석구석 남아 있는 기억 중 하나가 바로 동덕여자중·고등학교다. 1960년대, 단발머리 어린 숙녀 박혜경(朴惠慶·66)은 창신동 이곳저곳을 누비며 추억을 쌓았다. 우리 학교 동덕여자중·고등학교 박혜경 동년기자에게 창신동은 동덕여중·고 시절 기억과 함께한다. 1986년에 학교가 서초구 방배동으로 이전해 사실상 그 시절의 흔적이라든가 추억 한 자락 남은 것이 없었다. 운동장이 있던 자리에는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섰다. 참새방앗간 드나들듯 다녔던 문방구는 반찬가게가 돼버렸고 말이다. 하지만 박혜경 동년기자의 눈은 기자의 눈과 달랐다. 아파트 입구를 보며 학교 정문을 설명하고, 그 너머 너른 학교 운동장과 숱한 세월의 더께가 앉은 수위실이며 귀밑머리 1cm를 외치는 규율부 학생들을 회상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추억 속 교정을 거니는 듯 말이다. “지금 창신동 두산아파트 자리가 바로 우리 학교가 있던 자리예요. 요즘은 가수 아이유가 나온 학교로 유명하더라고요.(웃음) 우리 때는 시험을 쳐서 들어갔는데 저도 무사히 잘 붙어서 동덕여중·고를 다녔어요. 일제강점기 때 조동식 박사가 우리 민족이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우선이고, 여성도 교육받아야 한다며 세운 게 우리 학교거든요.” 1973년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우승 주역인 탁구선수 정현숙 씨와는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이었다. 동덕여고는 사라예보대회로 세계에 이름을 날리기 전에도 탁구로 유명한 학교였다. 당시 이에리사 선수(서울여상)를 제외한 정현숙, 나인숙, 박미라, 김순옥 선수 모두가 동덕여고 출신이다. 방과 후 특별활동으로 무용을 할 때마다 강당 한 편에서 열심히 운동하는 탁구선수 친구들을 봐왔다. 민족학교이자 독립운동가의 산실 여기서 잠깐! 현재 동덕여자고등학교 사서교사이자 59회 졸업생인 이숙희 씨의 추억 속을 좀 들춰보기로 하자. 옛 사진을 구하기 위해 동덕여고에 연락을 했더니 마침 이 학교 졸업생인 이숙희 씨를 소개해준 것. “동덕은 순수 민족자본으로 세운 민족학교입니다. 1908년 스물두 살이던 조동식 박사가 동원여자의숙이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빨리 독립을 하려면 여성이 공부를 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어요. 옛날 양반 댁은 딸들을 동덕여고로 보냈다더군요. 그리고 여성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학교이기도 합니다.” 3·1운동 만세사건 때 동덕 학생들이 태극기를 몸에 숨겨 만세 현장으로 가서 전달했다. 현재 서대문 형무소 여옥사에는 동덕여고 시절 단짝이었던 18회 이효정과 박진홍이 눈물의 상봉을 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석고상이 설치돼 있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수감돼 1935년 4월 이곳에서 재회했다. 일제강점기 학교의 명성 또한 높았다고 덧붙였다. “그 시기 우리 학교는 전국구 학교였어요. 함경도 함흥, 명천, 경상도 봉화, 울주, 마산, 전라도 고창, 제주도 등지에서도 동덕을 왔으니까요.” 지방의 한 중학교에서 우등상을 놓치지 않았던 이숙희 씨 또한 1972년 서울로 유학을 올 때 여성 교육의 전통적인 명문의 이미지를 가진 동덕여고를 선택했다. 동대문 아파트와 낭만의 스케이트장 다시 박혜경 동년기자의 추억으로 돌아가서 학교 주변 이야기에 대해 들어보자. 학교 밖을 나와 학생들 사이의 핫 플레이스는 바로 동대문 스케이트장이었다. 이곳도 안타깝게 남아 있는 것 하나 없이 찜질방 건물이 들어서 아쉬움을 남겼다. “동대문 친구들이랑 자주 가서 놀았어요. 얼음 바닥 정리 시간이 되면 다들 스케이트장 밖으로 나가잖아요. 그때 매점에서 남학생들을 만나는 거예요. 일종의 즉석만남이요.(웃음) 음악소리가 들리면 스케이트장으로 가서 기차를 만들 듯 길게 늘어서서 같이 스케이트를 타기도 했어요.” 1964년 1월에 문을 연 동대문 스케이트장은 우리나라에 생긴 첫 실내 스케이트장이었다. 스케이트가 붐이었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스케이트를 타려면 논바닥이 꽝꽝 어는 겨울을 기다려야만 했다. 사시사철 얼음을 지칠 수 있는 실내 스케이트장의 출현은 일대 사건이었다. 오전 8시부터 밤 9시까지 연중무휴로 운영된 동대문 스케이트장은 성황을 이루다 롤러스케이트장의 출연과 다양한 놀이 시설 도입으로 경영 악화를 겪다가 여러 번의 폐점 위기에 봉착하더니 1990년대 중반 자취를 감췄다. 동대문 스케이트장 바로 옆에는 연예인들이 많이 살았다 하여 ‘연예인 아파트’로 불리던 동대문 아파트가 있다. 1965년 완공된 7층짜리 건물로 지은 지 50년이 넘은 이 아파트는 지금까지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당시만 해도 고급 아파트였던 동대문 아파트는 중앙정원형으로 지붕이 없는 형태로 요즘 건축 양식에서는 보기 드문 구조로 만들어졌다. 영화 숨바꼭질의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현존하는 아파트 중 두 번째로 오래된 동대문아파트는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창신동 일대 입학과 졸업 철이면 발 디딜 틈 없이 문전성시를 이루던 진고개 식당을 끝으로 박혜경 동년기자와의 데이트를 마무리했다. 창신동 이곳저곳을 거닐며 아이처럼 좋아하던 박혜경 동년기자의 웃음소리가 지금까지도 들리는 듯하다. 창신동에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도 많지만 여전히 남아 함께 숨 쉬고 있는 것도 많다. 동대문 아파트도 그렇고 백남준의 생가를 복원한 백남준 기념관, 곳곳에 옛집들도 남아 있다. 창신동의 추억이 있는 독자라면 날씨가 풀리는 어느 날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산책 나가 보시기를 권한다.
- 2018-02-09 11:03
-
- 겨울 밤에 쓰는 편지
- 문형! 독하게 추운 겨울입니다. 한파가 그야말로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수도가 얼고 비닐하우스의 농작물도 성장을 멈추어 서민들의 마음이 무겁습니다.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간 연이은 화재 참사도 한파 이상으로 춥게 합니다. 기후 온난화를 꽤 걱정했으나 올겨울은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입춘 절기가 코 앞인데 추위는 물러갈 줄 모릅니다. 예전부터 입춘 추위가 있다 했으니 봄기운은 더 멀리 머물고 있나 봅니다. 이런 겨울이면 지리산 청학동 계곡 언덕배기 자그마한 마을 초가집에 살던 때가 생각납니다. 방문 틈새로 들어오는 차가운 겨울바람을 막기 위하여 문풍지를 달곤 했습니다. 요즘 같은 좋은 바람막이가 아닌 종이를 잘라 풀로 붙여 칠흑 같은 자정이면 고요를 타고 문풍지를 울리며 찬바람이 새어들기 마련이었습니다. 문형! 집 안에 도배해 본 경험이 있나요? 저는 도배를 많이 해 보았습니다. 요즘엔 도배 전문가에게 맡깁니다만, 예전엔 직접 했습니다. 저 같은 촌놈은 대부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쉬울 것 같아도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살던 마을은 정말 심심산골이었습니다. 반듯한 집이 아닌 허술한 초가집으로 요즈음 그림에 나오는 운치 있는 모습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곧 쓰러져 갈 것 같았고 기둥들이 곧지 못하여 방의 벽은 평평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황토벽돌을 만들어 사용하지 않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 넣은 대나무 거푸집에 잘게 썬 지푸라기를 넣어 반죽한 황토를 채워 벽을 만들었습니다. 으레 벽면이 울퉁불퉁해서 도배는 쉽지 않았습니다. 칼바람이 윙윙대는 깊은 겨울 저녁이면 그런 시절이 생각납니다. 나이가 들어감은 추억을 되돌려보며 나름의 행복에 젖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어린 시절에 살던 초가집은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정성껏 지었으나 설계도나 자재가 오늘날 같지 않아 방안이어도 찬바람이 귓전을 때리기 예사였습니다. 외풍이라 했습니다. 차가운 공기는 내려앉고 따뜻한 공기는 위로 올라가는 과학이 외풍을 설명합니다. 외풍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도배가 필요했습니다. 지금의 인테리어 측면도 있으나 당시는 벽에서 방바닥으로 떨어지는 흙 부스러기를 막고 찬바람을 다소라도 줄이는 방편이었습니다. 도배한 방은 그렇지 못한 방보다 훨씬 따뜻했습니다. 도배는 우리를 따뜻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외부에서 스며드는 찬바람을 막아주고 보기 흉한 부분을 감춰주기도 했습니다. 도배는 삶의 한 단면이었습니다. 도배라는 말에 정감을 느끼는 이유입니다. 문형! 저는 신혼 살림집의 도배와 페인트칠을 안사람과 함께 직접 했습니다. 그 버릇이 남아 어지간한 집안의 페인트칠은 직접 합니다. 전문 일꾼들에게 비할 수는 없어도 돈이 덜 들기에 그렇게 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하찮고 옹색해 보이기도 했으나 힘이 들어도 보람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지 싶습니다. 문형! 밤이 깊어 갑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에 별이 총총합니다. 자연과 함께함이 좋아 전원에 작은 집을 짓고 삽니다. 이 마을에도 다양한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아갑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런저런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곳입니다. 사람은 누구도 완벽할 수 없습니다. 때론 잘못도 저지르고 죄인이 되기도 합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로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의 노여움을 사기도 합니다. 지나 놓고 보면 내가 잘못하였다는 후회가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흔 살에 가까워지니 깨닫고 반성하고 그러면서 세월을 가꾸어 가는 것이 인생살이란 생각이 더 들어갑니다. 젊은 시절의 나의 아집이 부끄러워지기도 하니 이제 철드나 봅니다. 차가운 겨울날씨만큼이나 세상도 어려워 보입니다. 정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국민 대통합을 이끌 수 있는 진정한 지도자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국내외적으로 정말 어려운 국면에 놓여있지 싶습니다. 한때 촛불과 태극기로 양분된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 방법은 없을까요? 어떤 정치인은 입만 열면 모든 것을 촛불에 대입하고 있어 걱정됩니다. 왜냐하면, 그 반대쪽에 섰던 사람들을 또다시 내모는 표현으로 들려서 그렇습니다. 통합의 의지가 아닌 배척의 길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선거에서는 편이 갈릴 수 있으나 선택된 지도자는 양편을 다 끌어안아야 바른 지도자가 되어 더 나은 나라를 만들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어 다르고 아 다르다” 오늘날 새겨 보아야 할 금언입니다.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야 합니다. 미래보다는 과거에 집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일일까요? 상처를 받은 이웃들의 뚫린 마음에 몰아치는 찬 바람을 막아 줄 도배가 필요합니다. 비뚤어진 마음의 벽에도, 외풍이 심해 찬바람이 쌩쌩 이는 냉랭한 분위기의 방에도 따사한 기온이 감도는 여유로운 무늬의 도배지를 바르고 싶습니다. 문형! 지난번 만났을 때 얘기했듯이 올해엔 행복은 덧셈, 나이는 뺄셈, 재물은 곱셈, 기쁨은 나눗셈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가끔 거닐던 산언저리에 쌓인 눈이 녹고 봄기운이 도는 춘삼월의 따뜻한 봄날을 택해 빈대떡에 소주 한잔 기울입시다. 그때까지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나이에 건강보다 더 중요한 사항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 세상과 싸우지 말고 자아실현을 해야 할 시기입니다. 미끄러운 길은 특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만 줄입니다.
- 2018-02-05 14:05
-
- 카탈루냐 광장에서 시작하는 바르셀로나 여행
- 흔히 투우와 집시의 정열적인 플라멩코 정도로 알기 십상이던 스페인이 황영조라는 우리의 마라톤 영웅 덕분에 바르셀로나가 내게도 조금씩 부각되기 시작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바르셀로나는 어쩐지 친근한 도시로 여겨졌고 태극기가 휘날리던 그 도시의 몬주익 언덕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있게 되었다. 새벽에 이스탄불에서 작은 비행기를 타고 세 시간 반 정도 날아 바르셀로나 공항에 도착했다. 책이나 영화 등으로만 보아왔던 스페인의 하늘에선 뜨거운 태양이 쏟아질 거란 막연한 기대는 간단히 무너진다. 구름이 가득 얹힌 하늘 아래 잠시 서서 스페인의 공기 속에 묻혀본다. 카탈루니아 광장 부근의 숙소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내다보는 거리 풍경이 내 가슴을 두근두근 설레게 한다. 그 거리를 오가는 까무잡잡한 피부와 높은 콧날의 스페인 사람들이 이 땅에 내가 왔음을 실감시켜 준다. 일단 예약해 두었던 호텔에 짐을 부려놓고 무조건 밖으로 나왔다. 가 볼 곳도 많고 해야 할 것도 있지만 우선 카탈루나 광장 계단에 걸터앉아 여행자의 자유로움을 느껴보기로 한다. 사람 반 비둘기 반이라고 할 만큼 사람과 비둘기가 바글바글하다. 물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비둘기가 훨씬 많아서 수백 마리가 날개를 펴고 한꺼번에 날게 되면 여행자들에게 카탈루냐 광장의 추억을 단숨에 만들어주는 듯 한 풍경을 연출한다. 광장 옆 도로로 발걸음을 옮겨보니 마치 단체 여행객들을 쏟아놓은 것처럼 사람들로 가득 채워진 골목이어서 놀랐다. 광장 지하의 여행자 정보센터에 가서 투어 브로슈어를 몇 가지 챙겼다. 긴 날짜가 확보된 여행이 아니긴 했지만 버스나 지하철, 그리고 트램, 푸니쿨라 정보를 얻기 위해서 필요하다. 지하철 역에서 판매되는 교통권은 1회권이나 1일권이 있고 10회권, 50회권이 있기 때문에 계획된 동선이나 머무는 날에 맞게 구입하면 유용할 수 있다. 일단 여행지에서 한 달 살기라든지 2주 3주씩 머물 만큼 긴 시간이 주어지지 않다 보니 우린 짧은 날 동안이나마 바르셀로나를 충분히 느끼기 위한 마음을 활짝 열어둔다. 그리고 카탈루냐 광장을 벗어나 가우디의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시작했다.
- 2017-11-24 13:12
-
- 내 친구 뺀질이
- 작년에 미국에서 사는 친구가 와서 내장산에 갔다 왔다. 어렸을 때 동네 친구인데 필자와 치킨집 하는 친구가 동참했다. 또 한 명 뺀질이라는 별명의 친구가 있는데 마침 해외출장 중이라 동참하지 못했다. 3명이 일사불란하게 일박 코스를 재미있게 다녀왔다. 그런데 이번에 미국 친구가 또 와 일박 여행을 짜봤다. 이번에는 지난해 동참하지 못했던 친구까지 4명이 동참했다. 그동안 치킨집 하던 친구는 은퇴 후 공기 좋은 곳에 살고 싶다며 용문으로 이사 갔다. 그래서 용문산 등산을 중심으로 계획을 잡았다. 오전 10시에 상봉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뺀질이가 분당에서 출발하면 아침 출근시간이라 너무 붐비니 한 시간 늦게 오겠다고 했다. 그래서 미국 친구와 둘이서 출발했다. 상봉역에서 만나 용문역에 도착하니 11시였다. 마침 장날이라 용문에 사는 친구는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고생했다고 했다. 3명이 한 사람을 기다리느라 한 시간 동안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용문산에 올라갔다 내려오려면 한 시간쯤 모자랄 것 같았다. 시간 맞춰 오라고 했으나 나이 들어 굳이 정상까지 갈 필요 있냐며 산 밑에서 있다가 오자며 뺀질거렸다. 미국 친구는 다리 성할 때 정상 등정을 해야 나중에 나이 들어 못 걸을 때 후회 안 한다며 산행을 고집했다. 12시에 뺀질이가 도착했다. 그런데 약속 장소로 와야 하는데 용문역 태극기 밑에 있다며 찾으러 오라고 해서 더 화가 났다. 태극기 있는 곳을 또 찾아야 했다. 겨우 뺀질이를 만났다. 그는 히말라야 등정을 해도 충분할 것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산행 준비를 하긴 한 모양이었다. 닭백숙으로 점심을 맞춰놓았다고 했다. 가서 보니 근사한 개울가 펜션이었다. 용문에 사는 친구가 숙소 준비는 자기네 집에서 해놨다고 했다. 하지만 뺀질이는 친구 와이프 고생하니 펜션에서 자자고 우기며 펜션 숙박 회비를 걷었다. 용문에 사는 친구는 이미 며칠 전부터 우리를 위해 준비를 해두었는데 이제 와서 펜션에서 자고 가면 섭섭하다고 했다. 그래서 일단 숙소는 용문에 사는 친구 집으로 정했다. 다음 코스는 용문산이었다. 뺀질이는 용문사까지만 갔다가 내려오자며 뺀질거렸다. 친구들은 일단 올라가자고 하고 용문사에 가서는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뺀질이는 계속 투덜댔다. 해가 일찍 떨어지니 그만 내려가자는 것이었다. 결국 정상까지 가지도 못하고 필자만 마당바위까지 갔다 내려왔다. 그때까지 나머지 친구들은 뺀질이의 자기중심적 행동들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했다. 그다음이 문제였다. 용문산 관광단지에서 저녁식사 겸 술 한잔을 해야 하는데 승용차 처리가 문제였다. 용문에 사는 친구가 술을 마시면 대리운전을 시켜야 하는데 워낙 한적한 동네라 대리운전이 힘든 동네였다. 그렇다고 용문에 사는 친구 집에 가서 술을 마시자니 친구 와이프를 힘들게 하는 것은 물론 음식점에서 먹는 즐거움을 포기해야 했다. 고민하고 있던 터에 뺀질이가 자기는 원래 술을 안 마시니 대신 운전을 하겠다고 했다. 단번에 해결책이 나온 셈이다. 뺀질이도 쓸 데가 있었던 것이다. 친구 3명이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작년에는 그랬다. 그러나 4명이 되면 한 명은 왕따가 되기 쉽다. 작년보다 한 명이 늘었을 뿐인데 의견이 모아지지 않고 분분했다. 뺀질이가 집중 난타 대상이 되었다. 나중에 뺀질이는 심장이 좋지 못해 힘든 운동을 자제하라는 의사의 권고를 받았다고 고백했다. 그제야 뺀질이의 모든 행동이 이해되었다.
- 2017-10-27 10:26
-
- [추억이 있는 길] 종로통 구석구석 옛 기억이 살아나다
- 세상 모든 길에 사람이 지나다닌다. 이들 중에는 길과의 추억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다. 추억이란 살아온 시간, 함께했던 사람, 그날의 날씨와 감정이 잘 섞이고 버무려져 예쁘게 포장된 것이다. 박미령 동년기자와 함께 오래전 기억과 감정을 더듬으며 종로 길을 걸었다. 흑백사진 속 전차가 살아나고 서울시민회관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그리고 행복한 발견. 감동이 잔잔히 밀려왔다. 경복궁에서 스케이트 타던 시절이 있었어요! 서울시 종로구 당주동에서 태어난 박미령 동년기자는 대학 시절을 넘어 결혼 전까지 종로에서 산 토박이다. 세종문화회관 전신인 서울시민회관 계단이 놀이터였고, 중학생이 돼서는 경복궁과 인왕산 활터가 주 무대였다. “인왕산에 활터가 있어요. 활터 아저씨들이랑 얘기하고 맛있는 것을 주시면 먹기도 했어요. 경복궁은 젊었을 때 너무 많이 왔어요. 경회루 연못이 얼면 그곳에서 스케이트를 탔어요. 그때는 뭣도 모르고 탔죠. 스케이트 날을 가는 아저씨와 스케이트 빌려주는 아저씨가 저기 경회루 계단 아래 앉아 있었어요.” 현재를 사는 젊은이에게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경복궁은 문화재청이 엄격하게 관리하는 문화재다. 취재 당일에도 문화재청에 경회루 사진촬영허가신청서를 냈다. 스케이트를 탔다는 말이 그저 충격이었다. “창경원에서 보트도 탔는걸요. 밤벚꽃놀이도 하고요.” 이 부분에 있어 옛 추억으로 그냥 넘어가기에 씁쓸함이 앞선다. 일제강점기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불렸다. 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 등 놀이시설이 들어섰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벚꽃 수천 그루를 심어 놓고 밤벚꽃놀이를 즐겼다. 왕이 사는 궁궐의 의미를 상실한 시대를 지나야만 했다. 경복궁 내에 세워졌던 조선총독부 건물은 1996년 철거됐고, 창경원으로 불리던 창경궁은 1983년 원래 명칭으로 환원하였다. 시니어의 추억은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 잔인한 역사와 함께한다는 생각이 들어 꼭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아버지와 아침식사, 금천교시장 기름떡볶이 1960년대, 박미령 동년기자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서울시민회관 옆 길가에는 중국인이 직접 운영하는 중화요리집이 있었다. 아침잠이 없는 아버지는 아침잠이 많은 어머니를 깨우지 않고 박미령 동년기자를 데리고 그곳으로 아침식사를 하러 가곤 했다. “중국 사람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먹고 부인 먹을 것을 싸들고 온답니다.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근데 거기서 먹었던 콩국이 정말 맛있었어요. 콩국에 찹쌀튀김을 잘라 넣은 것인데 시리얼 같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나서 중국여행 가면 찾아는 보는데 딱 그 음식 맛이 나는 걸 아직은 못 먹어봤어요.” 함경도 출신인 박미령 동년기자의 아버지는 혈혈단신 남한으로 내려왔다. 이북 사람들은 의식주 중에 먹는 것을 가장 최고로 친다고 한다. 그래서 음식 솜씨가 좋은 외할머니와 아버지가 여느 모자 못지않게 친했다. 그리고 기름떡볶이에 대한 추억도 나눠주었다. “어렸을 때 먹었던 기름떡볶이에 대한 기억이 많아요. 떡볶이가 먹고 싶어서 엄마 따라 시장에 갔습니다. 제 기억에 떡볶이는 빨간 떡볶이가 아니고 기름에 바짝 구운 떡볶이예요.” 박미령 동년기자의 말에 곧장 기름떡볶이를 파는 통인시장으로 향했다. 사실 박미령 동년기자가 말한 기름떡볶이는 통인시장에서 파는 것이 아니다. 경복궁역 2번 출구, 금천교시장에서 기름떡볶이를 팔던 故 김정연 할머니(향년 98세)의 떡볶이다. 북에서 홀로 남한으로 내려온 김 할머니는 평생 모은 재산을 기부하고 돌아가셨다. “김 할머니는 간장으로 간을 한 기름떡볶이만 했어요. 금천교시장 할머니가 원조죠. 할머니는 곤로에다 무쇠솥 하나 올리고는 낚시의자에 앉아 떡볶이를 만드셨어요. 할머니 앞에 손님들이 빙 둘러앉으면 ‘몇 개 줄까?’ 하고 물어보셨어요. 겉을 바삭하게 무쇠솥에 지져서 구워주셨는데 정말 맛있었어요. 어렸을 때 그 기름떡볶이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정신여고 회화나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통인시장에서 택시를 타고 박미령 동년기자의 모교인 정신여고가 있던 종로구 연지동 옛터를 찾아갔다. 명성왕후의 주치의이자 선교사였던 애니 엘러스 벙커(Annie Ellers Bunker)가 1887년 중구 정동에 설립한 정신여고는 1895년 종로구 연지동으로 교정을 옮겼다. 1978년 지금의 교정인 잠실로 이전하기 전까지 깊은 역사의 흔적이 쌓인 곳이 연지동 교정 터다. 이곳에서 박미령 동년기자는 여중·여고 시절을 보냈다. “버스를 타고 지나는 다녀봤지만 내려서 학교 쪽을 가본 적은 없어요. 종로5가 뒤쪽 대학로로 가는 중간에 있어요. 종로통을 잇는 전차를 이용해 통학했는데 종로4가에 내려서 학교로 걸어갔어요.” 지금 생각해도 학교 시설이 너무 좋았다고 회고했다. 수세식 화장실에 라디에이터 난방을 했다. 기숙사에는 침대가 설치돼 있는 등 당시에는 최고 시설을 갖춘 서양식 학교였다. 예쁜 교정이 그립지만 정신여고 옛터에는 본관과 기숙사로 사용됐던 세브란스관만 남아 있다. 현재는 다양한 기업체들이 상주해 과거 교실을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옛 모습 그대로 사용하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우리 저기 뒤쪽으로 가보면 안 될까요? 교정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과거 정신여고 부지를 사들였다는 보험회사 건물과 남아 있는 정신여고 본관 건물 사이에 조성된 녹지공원이 보였다. 그곳에 가보니 정신여교의 교목인 회화나무가 그대로 서 있었다. “우리 학교 교목이에요. 옆에 건물도 보니 우리 학교 건물이 맞아요. 건물 사이를 이어주는 구름 다리도 기억나고요. 제가 찾아올 줄 알았겠어요? 나무를 찾아서 너무 좋아요.” 정신여고의 교목인 회화나무는 독립운동을 함께한 고마운 나무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애국부인회의 출발점인 정신여고가 일본 관헌의 수색을 받았을 때 비밀문서와 태극기, 국사책 등을 고목의 구멍에 숨겨 보존할 수 있었다. 걸어 다니기 힘들 정도로 뜨거운 날에 만나 시원한 바람으로 마무리한 멋진 데이트였다. 한 사람의 역사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였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종로의 작은 틈, 작은 돌 하나에도 우리의 역사와 추억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 2017-09-15 08:27
-
- 가슴 뭉클했던 ‘한국환상곡’
-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G.E.N.Y 가족음악회’라는 행사가 있어 가 봤다. G.E.N.Y는 Global Education Network for Youth의 약자로 학생들을 글로벌 인재로 키우기 위해 만든 청소년 단체라고 한다. 2시간 동안 진행된 음악회에서 마지막 곡이 ‘한국환상곡’이었다. 뉴서울오케스트라, 제니오케스트라의 협주로 30분간 연주되었는데 성악가들과 여러 합창단이 함께 불러 전율을 느끼게 했다. 잘 알려진 대로 이 곡은 고 안익태 선생이 작곡한 관현악곡이다. 태고 적부터 유구한 역사를 유지하며 외적의 침략에도 항거하여 독립을 이룬다는 스토리가 들어 있는 곡이다. 애국가도 들어 있다. 연주가 진행되다가 합창단이 동시에 함성을 지르는 순간 머리칼이 바짝 서는 전율을 느꼈다. 연주 마지막 즈음, 모니터 화면에 태극기가 나오자 전 관객들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기립하여 연주와 합창을 들었다. 이 대목에서 가슴이 울컥하고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음악적으로도 대작이지만,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만한 감동이었다. 원래 합창의 위력이라는 것이 그렇다. 특히 남성들의 합창은 가슴을 울린다. 제니오케스트라는 어린 학생들로 구성되었는데 프로 연주자들 속에 섞여 무난히 대작을 소화해냈다. 합창단으로는 콘서트홀 무대 뒷면에 메트 오페라합창단, 국민대 합창단, 숭실대 콘서트 콰이어로 구성한 대학연합합창단, 인천동구립 소년소녀 합창단, 부천시소년소녀합창단, 강원해오름어린이 합창단 등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이날 음악회는 1부에서는 브루흐의 ‘비올라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로망스 Op.85’를 시작으로 ‘투우사의 노래’, ‘험담은 바람을 타고’, ‘정결한 여신이여’, ‘공주는 잠 못 이루고’, ‘오늘밤’, ‘축배의 노래’ 등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곡들을 성악가들이 불렀다. 인터미션 후 2부에서는 역시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 바이젠 Op.20’으로 시작했다. 이어 성악가들이 ‘그리운 금강산’, ‘비목’, ‘청산에 살리라’, ‘신아리랑’, ‘강 건너 봄이 오듯’을 불러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원래 청소년 관람객들이 많이 와서 해설이 있는 음악회라고 했는데 정작 해설은 빈약했다. 곡마다 해설을 한 것은 아니고 1, 2부 시작 전에 한꺼번에 소개하는 정도였다. 영화 에 나왔던 우등생 서태화가 해설을 맡았는데 알고 보니 그는 성악과 출신에 미국 음악대학원까자 졸업한 음악인이었다. 장마 막바지라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마지막 연주곡인 ‘한국 환상곡’에서 받은 감동이 너무 커서 자리에서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보통 때 같으면 폭우를 피해 빨리 실내로 들어갔겠지만, 이날은 폭우 속에서 우산에 내리치는 빗발을 그대로 받으며 서 있었다. 청소년 관객들을 위해 오후 5시에 시작하고 7시에 끝났다. 보통 음악회는 직장인들을 고려하여 오후 8시쯤 시작하여 10시 반쯤 끝나는데 7시에 끝났으니 뒤풀이하기에 좋은 날이었다.
- 2017-08-23 1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