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다른 분위기를 자랑하는 상점이 많기로 유명한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평일 점심시간이었지만 가로수길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듣던 대로 각양각색의 개성들이 넘치는 상점들이 즐비했다. 그중 ‘한복 팝니다’라는 네온사인이 기자 눈에 들어왔다. 유리창 너머로 갓을 쓰고 곰방대를 문 흑인 모델 사진이 보였다. 외국인과 곰방대 그리고 한복과의 조화라니. 이곳의 이름은 ‘ㄹ(리을)’, 전통 한복이 아닌 ‘네오(NEO, 새롭다는 뜻) 한복’을 판매하는 매장이다.
21세기 한복을 만들기 위해 의기투합
“저희는 대학교 선후배도, 원래 알고 지내던 사이도 아니에요. 예전에 다른 사업으로 팀이 꾸려졌는데 그때 알게 된 분이 유지연씨예요. 아쉽게도 그 사업이 흐지부지되면서 팀은 해체됐지만, 이후 ‘ㄹ’을 기획하게 되면서 다시 연락하게 됐어요.”
‘ㄹ’은 김종원(25)·유지연(27) 대표가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다. 김 대표는 20세 때부터 사업을 시작한 5년 차 CEO, 패션을 전공한 유 대표는 ‘ㄹ’을 위해 다니던 교복 회사를 그만두고 나왔다. 다른 누구와 함께 뜻을 맞추고 공동으로 작업한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김 대표는 유 대표와의 만남을 운명이라고 표현했다.
“사업가 중에선 혼자 일하는 걸 편해하는 사람이 많아요. 저도 그렇고요. 하지만 유 대표랑 일하면서 느낀 건 ‘정말 잘 맞는다’는 거예요. 말하지 않아도 잘 통하는 그런?(웃음)”
두 대표가 함께할 수 있었던 이유는 ‘ㄹ’이라는 브랜드를 통해 한글과 한복을 세계적으로 알리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매장을 열기까지 순탄치 않은 일들이 많았다.
“처음엔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어요. 사업하지 말고 공무원 준비를 하라면서요.”
어느 날 갑자기 자식이 잘 다니던 학교를 휴학하고 사업을 하겠다고 하면 대부분 김 대표의 부모 같은 마음일 것이다.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께 걱정은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제가 할 수 있는 한 능력껏 준비했죠. 저희 브랜드 취지에 공감해주신 분들이 투자를 해주시는 덕분에 자본금 0원으로 시작할 수 있었어요.”
그들의 독특한 아이디어에 매료된 것일까. 매장을 연 지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스타일리스트 사이에서는 소문이 자자하다. 그 명성에 힙입어 벌써 10곳 넘게 협찬 의뢰가 들어왔고, 얼마 전에는 가수 솔비의 뮤직비디오 촬영 의상을 협찬하는 등 꽃길을 걷고 있다.
문득 왜 브랜드 이름을 ‘ㄹ(리을)’로 정했는지 궁금해졌다. 만약 자음을 고집했다면 ‘ㄹ’이 아닌 다른 글자를 선택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예를 들어 ‘기억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ㄱ(기역)’을 쓸 수도 있고 사람 인(人)을 닮은 ‘ㅅ(시옷)’을 고민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브랜드 이름으로 외국인에게 한글을 알리는 동시에 ‘ㄹ’이라는 브랜드는 한복을 판매하는 곳이라고 알리고 싶었어요. 해외에 나가서 외국인과 대화하다 보면 훈민정음의 우수성을 아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하지만 아직 외국인한테 ‘ㄹ’을 보여주면 숫자 ‘2’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외국인이 저희 매장을 들르거나 브랜드가 유명해진다면 다음부터는 2가 아닌 한글 ‘ㄹ(리을)’로 봐주시겠죠.”
한복의 변신은 무죄
이제 한복은 한국인도 잘 입지 않는, 실용적이지 못한, 옛날 옷이 되었다. 최근 서울시에서 ‘일상 속에서 한복 입기’ 장려책을 펼치고 있는 가운데 경복궁이나 인사동 주변으로 대여를 해주는 매장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을 뿐이다. 참 씁쓸한 풍경이지만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외국인 친구가 한복을 대여해 입어보더니 ‘예쁜데 실생활에서 입기엔 불편해. 너희도 불편해서 안 입는 거 아니야?’라고 물어보더라고요. 현대인들에게 19세기 옷을 겨우 알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저 체험에 불과한 일이 되어버린 거죠. ‘우리나라 사람들도 불편해서 안 입는데 과연 외국인이 한복이 예쁘다고 살까? 그리고 입고 다니기는 할까?’ 이런 질문을 해보고 트렌드에 맞춘 한복이 필요하다는 답을 찾았죠. 최종적으로 저희가 선택한 건 한복의 원단을 선택해 옷을 만들자는 거였어요.”
실제로 매장 안에서 본 그들의 옷은 놀랍게도 모두 한복 원단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심지어 청재킷인 줄 알고 만져봤던 옷 또한 말이다.
“만져보시면 아시겠지만, 한복 원단이에요. 자수도 직접 디자인하고 있고요!”
자신 있게 말하는 유 대표의 목소리에서 ‘ㄹ’ 브랜드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저희가 디자인한 정장의 경우 두루마기처럼 겉옷을 만들 때 사용하는 양단을 사용했고, 미니스커트는 옛날 속치마나 치마 안감으로 사용한 깨끼원단으로 제작했어요. 이렇게 서양 옷 패턴에 한복 원단을 사용함으로써 동양과 서양 문화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동시에 편하게 입을 수 있는 ‘네오 한복’이 탄생되는 거죠.”
디자인에 있어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무엇이냐고 물어봤을 때 돌아온 답변은 다소 의외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만드는 한복은 한복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의식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디자인에 있어서 신경 쓰는 부분은 없어요. 저희는 옷의 패턴에 그냥 한복 원단을 사용할 뿐이거든요. 원단을 보다가 ‘아, 이 색의 원단으로는 반바지를 만들면 예쁘겠다’라는 생각이 들면 반바지를 만드는 식으로요. 물론 처음 딱 보면 한복으로서는 약간 낯설게 느껴질 수 있겠죠. 근데 그거 아세요? 김치도 처음엔 백김치였는데 고춧가루가 들어오면서 지금 우리가 먹는 빨간 김치가 됐죠. 한복의 이미지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을 알리는 국가대표 ‘ㄹ’이 되고 싶다
수입이 생기면 돈에 욕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ㄹ’의 대표는 달랐다.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에요(웃음). 저희는 돈을 버는 게 목적이 아니라 한국을 알리는 브랜드가 되자고 했거든요. 사실 지금 인기를 끌면서 수입이 생기다 보니 어떤 디자인으로 똑같이 대량생산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우리가 처음 일을 시작할 때 맞춤제작 옷을 많이 만들기로 다짐했어요. 돈 때문에 브랜드의 목적을 잃고 싶지는 않아요.”
이들의 초심을 최근에 다시 한 번 다잡을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 ‘ㄹ’의 인스타그램 계정으로 한 혼혈인 학생이 감사 인사 메시지를 보내왔다는 것이다. 해외에 거주하는 이 학생은 혼혈인이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친구가 ‘ㄹ’의 옷을 보더니 “너희 나라 옷이냐?”고 물어보면서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줬다는 내용이었다.
“뿌듯했죠. 우리가 만든 브랜드로 인해 관심을 받고 또 한복을 알린 거니까요.”
김 대표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고 한다.
“저는 원래 검도를 했었는데 국가대표가 되지는 못했어요.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축구나 농구 같은 스포츠 종목에 출전하는 것도 국가대표이지만 제가 생각하는 국가대표의 의미는 조금 더 넓어요.”
김 대표는 20대 초반에 국가에서 지원금을 받아 해외에 많이 다녀왔다고 한다. 이런 활동도 국가대표라고 생각하는 그는 사회 공헌 프로젝트 국가대표로서 해외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해 ‘ㄹ’ 브랜드의 한복을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해외에서 유명인사나 높은 분들을 만나면 ‘내가 국가대표로 이 자리에 왔는데 한국을 알리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며 고민한 적이 엄청 많아요. 그래서 한국을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해 저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 사연을 받아 ‘ㄹ’의 옷을 선물하고 싶어요. 그분들 한 분 한 분이 특별한 국가대표가 되길 희망하면서요.”
재활용센터 한 귀퉁이에 태극기 하나가 다른 폐품들과 함께 수거 돼 있다. 태극 문양이 선명하고 낡지 않았다. 대체로 태극기는 나라의 상징이어서 아무렇게나 버리지 않는다. 왜 이렇게 버려졌을까? 쓸모가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나라를 버리고 싶은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을까? 한때 소수의 국민은 나라를 등지거나 이민을 선택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 국가에 대한 신망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오늘의 현실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나라가 국민을 지켜줄지 의심하는 경향이 없는 바도 아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진정한 지도자는 찾을 길이 없고 권력과 치부를 위한 다툼이 난무하는 듯하다. 근래엔 선거 양상이라고 둘러댈 수 있으나 보수와 진보 그리고 중도를 주장하는 부류로 나뉘어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다. 국민 통합을 외치면서 상대의 괴멸을 부르짖는다. 핵 개발로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를 위협하는 북한의 행태 또한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관련 국가들이 펼치는 국제 정세도 불안을 더한다. 먹고 사는 일도 만만치 않다. 경제 사정이 어려워서다. 젊은이의 취업도 쉽지 않다. 최대의 실업률이 이를 웅변한다. 정년 퇴직자도 800만 명에 이른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려는 젊은 남녀도 늘어나고 출산율도 자꾸만 줄어들어 “인구절벽”을 실감한다. 미래가 불안하다. 4차 산업혁명으로 내닫고 있는 앞날도 걱정이다. 수명은 상상 이상으로 늘고 있다. 과연 나라가 나를 지켜줄 수 있을까? 멀쩡한 태극기를 재활용 센터에 버리듯 나라를 버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다른 폐품 속에 버려진 태극기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한다.
199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백인 경찰의 흑인 폭행으로 시작된 흑백 갈등이 엉뚱하게도 코리아타운으로 불똥이 튀었다. LA폭동이었다. 미국 매스컴들의 편파보도는 살림 잘하고 있던 한 한국 아줌마를 ‘욱’하게 만들었다.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그녀는 그 길로 정치판으로 뛰어든다. 이 드라마틱한 스토리의 주인공은 미셸 박 스틸(62). 미주 한인 커뮤니티에서 가장 사랑받고 있는 여성 정치인이자, 현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 슈퍼바이저 위원장이다. 그녀를 미국 현지, 산타에나 오렌지카운티 청사에서 만났다.
카운티 슈퍼바이저(County Supervisor). 우리에겐 무척 생소하니 단어 정리부터 해보자. 카운티는 미국 주 정부의 하부 행정 구역으로 캘리포니아 주(州) 오렌지카운티 안에는 총 34개의 시(市)가 포함되어 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세 번째, 미국 전체에서는 여섯 번째로 크다. 인구 320만 명에 한해 예산만 6조원에 이르는 오렌지카운티는 한국의 광역시와 비슷한 규모의 자치단체다.
카운티는 각 지역구에서 선출된 5명의 슈퍼바이저(슈퍼바이저 위원회)가 이끌어 가는데 박 위원장은 2014년 선거에서 한인 최초의 슈퍼바이저로 당선됐다. 지난 1월에는 만장일치로 위원장에 선출, 그녀는 명실상부 오렌지카운티의 행정 수장이다.
“한국뿐 아니라 이곳 한인분들도 낯설어했어요. 당선되고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슈퍼바이저가 뭐하는 자리냐는 거였으니까요. 그만큼 한인 정치인이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죠. 저는 한마디로 오렌지카운티의 모든 살림을 맡아서 합니다. 법을 만들고 집행도 하지요. 소방국, 경찰국, 보건국 관리는 물론 교육, 사회복지, 심지어 쓰레기를 수거·처리하는 일까지 모두요.”
얼마나 바쁘냐는 질문에 다이어리를 살핀다. 존웨인공항의 리모델링과 국제선 비행기의 공항 사용료 문제, 야생 코요테의 사체 처리 법안, 등·하교시간 교통 체증에 대한 주민 항의, 노숙자 샤워와 숙박시설 허가…. 박 위원장의 수첩을 꽉 메우고 있는 현안들이다. 오늘 잡힌 미팅만 4개. 자잘한 방문 약속까지 소화하려면 오늘도 칼퇴근은 어렵겠다며 웃는다. 그녀의 기분 좋은 미소 뒤로 성조기가 아닌 태극기가 눈에 들어온다.
그녀가 정치인이 된 이유
한국 이름 박은주. 그녀의 고향은 서울 성북동이다. 어린 시절 뛰놀던 학교 운동장이며 창경원(現 창경궁)에 놀러갔던 일, 경복궁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추억이 그녀의 뇌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일본 한국교육문화원으로 발령이 나면서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동경여자대학교 영문학과 1학년이던 1975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페퍼다인대학(Pepper dine University)에서 경영학을 전공할 때만 해도 박 위원장의 꿈은 현모양처였다. 예쁜 앞치마를 입고 쿠키를 구우며 아이들을 키우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고. 1981년 테니스 동호회에서 만난 전도유망한 청년 변호사 션 스틸과 결혼해 예쁜 두 딸도 얻었다. 그렇게 현모양처의 꿈을 이루는 듯했지만 그녀의 길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LA에서 홀로 옷가게를 운영하던 어머니가 어느 날 국세청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어요. 세금을 속였다며 정말 어마어마한 벌금을 부과했더라고요.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어요. 어머니는 한국과 일본에서 교편을 잡았던 분이세요. 평생 정직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사셨던 분이 탈세라니… 너무나 억울했지만 아무도 우리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그때 처음으로 소수계가 당하는 부당함과 설움을 알게 됐어요. 거기에 불을 지핀 것이 4·29 폭동이었고요.”
LA 4·29 폭동은 박 위원장에게 ‘행동하지 않으면 변화하지 않는다’는 신념과 자신이 ‘한국인’임을 각인시켜준 사건이었다. 1992년 4월 29일 흑인 로드니 킹을 폭행한 백인 경찰관들이 무죄 선고를 받자 흥분한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공권력은 부유한 백인들이 살고 있는 비벌리힐스를 보호하기에 바빴고 결국 폭도들에게 한인 타운으로 가는 길을 내준 꼴이 되었다. 맨손으로 일군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한인들은 직접 총을 들었고 미국 매스컴들은 앞다투어 한·흑 갈등으로 몰고 갔다.
닷새간 이어진 방화와 약탈로 2300여 한인 업소가 피해를 입었고 피해액만 5억달러에 이르렀다. 돈 벌기 위해 너무 앞만 보고 달렸다는 각성의 목소리도 나왔지만 그 대가치고는 너무나 참혹했다. 한인 타운은 그야말로 잿더미로 변했다.
“한마디로 미디어의 횡포였어요. 뉴스, TV 쇼에서 잘못된 내용을 말하고 있는데 누구 하나 정정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뭔가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어요. 정치인 친구들이 많았던 남편에게 부당함을 쏟아냈고 뭐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말했어요. 정말 뭐라도 해야 할 거 같았어요. 남들 앞에 나서기를 지독히도 싫어하던 제가 말이죠.”
1993년 LA시장에 출마한 리처든 리오든 선거캠프 자원봉사를 시작으로 그녀는 미국 정치판으로 뛰어들었다. 안 하면 안 했지 적당히 하는 꼴은 못 보는 한국 아줌마의 힘은 어디서나 단연 돋보였다.
시장에 당선된 리오든 시장은 그녀를 LA소방국 커미셔너로 전격 발탁했고 이후 LA공항, LA아동복지국 커미셔너를 역임했다. 커미셔너는 해당 분야의 정책자문 역할을 하면서 시의 전반적인 행정에 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직책이다.
박 위원장은 이어 1999년 한미공화당협회 회장, 2001년 부시 행정부에서는 아시아태평양 자문위원을 거치며 차근차근 정치 이력을 쌓게 된다.
한인 커뮤니티가 사랑하는 선거의 여왕
사실 박 위원장이야말로 ‘선거의 여왕’이라 불릴 만한 전력의 소유자다. 24년 정치인생에서 세 번의 선거에 출마, 모두 승리했다. 특히 2006년 당시 ‘듣보잡’ 후보에 가까웠던 그녀가 도전한 ‘캘리포니아 조세형평국 위원’은 캘리포니아 조세 정책을 총괄하는 막중한 자리였다.
그녀는 이 선거에서 정치 거목이었던 상대 후보를 꺾고 60.5%라는 득표율로 압승했다. 한국 커뮤니티는 물론 그녀가 속한 공화당 내부에서도 놀란 결과였다. 목소리까지 가냘퍼 보이는 그녀의 이런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박 위원장은 서슴없이 ‘한국인의 DNA’ 덕분이라고 말한다.
“처음 출마선언을 하고 후보 인준을 받기 위해 연설을 한 날이었어요. 얼마나 무서웠던지 연설을 마치고 나와서는 자동차 뒷좌석에서 결국 울음이 터졌죠. 옆에 앉은 분이 걱정이 되어 남편에게 전화를 하더라고요. 전화를 끊고 아무 말이 없길래 남편이 뭐라고 하더냐 물었더니 그냥 놔두라고 했대요. 금방 다시 씩씩해질 거라고. 미셸은 한국 여자라고요(웃음)!”
박 위원장은 2010년 재선에서도 거뜬히 승리하면서 8년간 조세형평국 위원으로 재직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그녀의 이름 앞에는 ‘가주 내 한인 최고위 선출직 공직자’,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공화당원’ 등의 수식어가 붙게 된다.
미셸 박 스틸의 러닝메이트는 바로 한인 커뮤니티다. 그녀는 한인 커뮤니티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다며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것은 모두 한인들 덕분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선거는 선거자금이 당락을 결정짓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미국 정치인들에게는 선거자금 캠페인, 모금행사 등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기부금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한인들에게는 이것이 낯설기만 하다. 또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유권자 등록이나 투표는 늘 딴 세상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아쉬운 이야기이지만 한인 유권자 등록률과 투표율은 아시안 커뮤니티에서 늘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셸 박 스틸이 출마하는 선거는 유독 한인들의 투표율이 높다. 박 위원장이 슈퍼바이저로 당선된 지난 2014년 선거에서 오렌지카운티의 한인 유권자 투표율은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미셸 박 스틸만큼은 밀어줘야 한다는 분위기다. 이렇다 보니 미주 한인사회의 오랜 숙원인 연방하원에 입성할 인물로 박 위원장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박 위원장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시정에서는 한인 커뮤니티를 어떻게든 메인스트림으로 끌고 들어오려는 노력이 느껴진다. 카운티에 공식적으로 미주 한인의 날을 만드는가 하면, 한인 단체가 벌이는 행사를 카운티가 공식 후원함으로써 힘을 실어주고 있다.
조세형평국 시절에는 정부 공식 홈페이지에 한글로 된 안내문을 올리기도 했다. 부당한 세금이 청구된 납세자가 있다면 자신에게 연락하라, 혐의가 입증되기 전에는 무혐의로 믿고 끝까지 보호하겠다는 취지의 글이었다. 그녀 어머니가 당했던 억울함을 한인들에게 다시는 없게 하겠다는 의지였다. 강철 벽처럼 느껴지는 주 정부 홈페이지에 한글로 된 안내물이라니… 어찌 한인들이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연한 일이에요. 메인스트림 안에서 한인을 대변하기 위해 정치를 시작했으니까요. 임기 동안 하나라도 더 정착시켜놓으려 합니다. 제가 이 자리를 떠나더라도 카운티 차원에서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요. 그만큼 어깨가 무겁기도 하지만 보람도 있습니다. 초심을 잃지 않으려 해요. 내가 왜 이 자리에 오려 했는가를 생각하죠. 정치인은 유권자의 선택으로 살아남는 사람들이에요. 유권자가 내려가라 하면 내려가야죠. 다행히 아직까지는 저를 많이 사랑해주고 계세요(웃음).”
박 위원장은 내년 그녀의 네 번째 선거를 치러야 한다. 슈퍼바이저 재임에 도전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역시 선거자금을 모으는 일이다. 이제 곧 후보들 간의 모금 현황부터 비교하며 당락 가능성을 점치는 언론들의 보도가 쏟아져 나올 것이다. 다시 전쟁이다.
남편, 그리고 엄마
박 위원장의 정치인생에 없어선 안 될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남편 션 스틸 변호사(공화당 전국위원회 위원)와 어머니 정옥희 여사(2011년 작고)다. 박 위원장이 정치를 시작하면서 함께 살기 시작한 세 사람에게는 소소한 추억들이 많다. LA 문단에서 수필가로 활동하기도 했던 정옥희 여사의 수필집 곳곳에는 딸과 사위 이야기가 있다. 특히 사위 스틸 변호사에 대한 묘사에는 애정이 그대로 담겨 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사람. 우리나라 함경도 사람처럼 일하며 처자 권속을 확실히 지키는 사람. 내가 여행이라도 가는 날이면 손에 돈과 정을 같이 쥐어줄 줄 아는 사람이 우리 사위다. 집에 돌아오면 조용한 집 안을 장터같이 활기차게 만들고 장모의 김치볶음밥과 순두부찌개가 최고라고 치켜세우는 사위는 가정을 지키는 것이 생애 최고의 행복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정옥희 수필집 모음 중에서)
결혼 36년 차의 남편은 박 위원장에게 늘 휴식 같은 존재다. 캘리포니아 공화당협회 의장까지 지냈지만 정치적 조언보다는 시정에 지친 아내를 살피는 일이 우선이다. 타고난 유머감각으로 박 위원장을 늘 웃게 만들어주는 것도 그의 몫이다.
지난해 큰딸 채안(29)이 결혼하면서 박 위원장은 사위를 봤다. 그래서인지 돌아가신 ‘엄마 생각’(박 위원장은 꼭 엄마라고 불렀다)이 더 잦아졌다고.
“참 강하고 현명하셨던 거 같아요. 그때는 엄마로서 이민자로서 살기가 지금보다 훨씬 힘들었던 시절이었는데 말이에요. 처음 일본에 가서 말도 못하고 친구가 없는 저를 보고 엄마는 늘 웃으라고 했어요. 내가 웃기만 하니 아이들이 ‘아호(바보)’라고 하더군요. 엄마는 그래도 계속 웃으라고 했어요. 정치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미셸은 잘 웃어서 좋다는 말이에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엄마라면 뭐라고 했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엄마가 딸을 위해 내어놓는 솔루션보다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박 위원장은 자신이 엄마를 추억하듯, 훗날 딸들이 자신을 그렇게 추억해주기를 원한다. 그녀의 뒤를 이어 한인 커뮤니티를 대표할 차세대 정치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삶에 덕이 되고 싶고, 길을 먼저 가는 선배로서 그들이 올 길을 조금은 편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다.
“정치적 야망이요? 그렇게 거창한 표현은 안 어울리고요. 정치인으로서 잃고 싶지 않은 것은 있어요. 민심과의 소통, 발로 뛰는 열정 그리고 정직이요. 어디까지 가든 소통과 열정, 정직 없이 가게 될까봐 겁이 납니다. 연방하원… 가야죠. 제가 아닌 누구라도 가야 합니다. 제가 갈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갈 것이고 혹 나보다 더 좋은 후보가 나타난다면 저는 미련 없이 그를 밀 것입니다.”
인터뷰 말미, 그녀가 고향 성북동의 안부를 묻는다. 두어 차례 한국 지자체의 초청을 받아 남편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지만 정작 추억 어린 곳은 찾지 못했다고 한다. 서울 시내 곳곳이 너무 많이 바뀌었지만 성북동은 아직 옛 정취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하니 아이처럼 반가워한다. 남편과 함께 꼭 가볼 거라고 코를 찡긋거리며 웃는 그녀.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으며, 열정적이고, 그대로의 자신을 내어 보이는 미셸 박 스틸은 아름다웠다.
종교와 정치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노선이 달라 언제든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 아무리 친한 친구나 가족 간에도 하나의 통일된 생각을 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간혹 관계를 힘들게 한다.
필자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다. 대학교 4년을 늘 형제처럼 붙어 다녔던 친구가 있다. 졸업하고 직장을 잡고도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하며 친분을 유지했다. 우리의 우정이 영원할 것처럼….
그러다 관계가 틀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바로 대통령 선거였다. 다 지나간 이야기이니까 이니셜로 밝혀도 되겠다. 당시 후보는 YS(김영삼)와 DJ(김대중)였다. 우리나라 민주화를 이끈 두 거목이다. 두 사람은 수십 년간 야당생활을 하면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기틀을 잡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YS의 통일민주당과 DJ의 평화민주당으로 갈라서게 되면서 따르는 사람들도 분열했다. 한 사람은 호랑이를 잡겠다고 여당과 합당을 했고 한 사람은 야당에 남아 정치를 계속했다. 결과적으로 두 분 다 목표를 달성하긴 했다. 그런데 두 사람만 헤어진 게 아니다. 두 사람을 지지했던 지지자들, 즉 우리 같은 일반인들도 갈라서게 됐다. 필자와 친구도 그랬다. 당시 친구는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을 필자에게 설득시키려 했다. 필자가 늘 자기편이고, 자기 생각과 같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달랐다. 친구 관계가 좋다고 지지하는 사람까지 똑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필자의 주관이었다. 학교에서 반장선거 할 때도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이 당선이 되면 좋겠지만 안 된다 해도 크게 문제될 것 없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친구는 집요하게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했고 필자는 그 주장에 응할 수 없었다. 잠시 설전이 있었고 그 후 만남도 연락도 소원해졌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시절의 친구로 돌아가지 못했다. 1년에 한두 번 모임 때 만나 의례적인 인사나 나누는 사이가 됐다.
정치뿐 아니라 종교도 관계를 힘들게 한다. 우리 부부는 성당에 다니고 어머님은 교회를 다니신다. 신교와 구교일 뿐 다 같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머님은 우리 부부가 성당에 다니는 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신다. 자신의 교회로 와야 한다고 난리시다. 만날 때마다 그렇게 강조를 하시니 뵙는 것이 점점 불편하다. 물론 연세 드셔서 종교를 갖고 즐거워하시는 것을 보면 참 좋고 다행이다 싶다. 그렇게 행복해하시는 것은 좋은데 그게 지나쳐 강요를 하시니 문제다.
필자의 경험을 통해 살펴보았듯, 종교와 정치에 대한 대화는 참 어렵다. 갈등의 원인은 지나친 데서 나온다. 각자가 다른 인격체인 만큼 생각이 다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도 상대의 관점을 존중하지 않고 동일시하려는 데 문제가 있다. 인정하지 않고 자기 뜻이 관철되지 않는다고 타인을 배척하거나 적으로 삼으면 갈등은 커진다. 특히 종교, 정치와 관련한 대화에서는 서로의 입장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내 생각이 중요하듯 다른 사람의 의견도 중요하다.
요즘 태극기 집회와 촛불 집회를 보면서 착잡한 마음이다. 서로 상처받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화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의 가치를 인정해줘야 한다. 내가 중요하듯 다른 사람도 소중한 인격체로 인정받을 때 갈등은 치유될 수 있고 관계가 새롭게 형성될 수 있다. 아직도 마음속 저 깊은 곳에는 친구와의 우정이 마그마처럼 저장되어 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필자가 먼저 친구에게 연락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제는 관심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친구의 마음을 돌릴 수 있지 않을까?
겨울 떠나보내고 봄을 재촉하며 창가를 소곤소곤 두드리는 비가 밤새도록 귓전에서 맴돈다. 어느덧 절기상으로 ‘우수’가 성큼 다가와 봄을 기다리는 마음에 사위어가는 한 줄기 희망의 모닥불을 살려냈으면 좋겠다.
24절기중 두 번째 절기인 우수(雨水)는 봄으로 들어서는 입춘(立春)과 겨울 잠자던 개구리가 놀라서 깬다는 경칩(驚蟄) 사이에 있는 절기이다. 우수는 '눈이 녹아서 비가 된다.'는 말로 이때가 되면 추운 겨울이 가고 대지에는 봄기운이 돌기 시작한다.
겨우내 서해바다에서 모질게 불어대던 서풍한설(西風寒雪)도 주춤하고 훈훈함이 설핏 묻어있으니 조금은 살만하다.
이제야 봄은 오려나? 겨우내 나라 안팎은 시끌벅적하고 을씨년스러웠다. 그 모진 한파속에 수많은 촛불이 바람에 나부끼고 태극기가 맞불작전으로 세과시(勢誇示)를 하면서 서로에게 쏟아낸 혐언(嫌言)들은 공허하게 부딪치는 파열음이 되어 서민들의 마음을 허탈하게 만들었으며 자괴감마저 들게 했다. 흑백의 논리가 판을 치고 외눈박이사랑처럼 자신의 진영만이 옳다는 짝사랑식 막말을 쏟아부은채 표류하는 허송세월이 길어지고 있다. ‘배려’라는 단어는 이미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에게 자신의 논리를 강요하고 있다. 자신의 논리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미 반대편 사람으로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며 반쪽짜리 사회를 심화(深化)시켜 가고 있다.
인간은 어차피 사회성(社會性, social qualities)을 가지고 있기에 혼자서는 이 풍진 세상을 살아내기는 어렵다. 어차피 둘이상이 모여 살아가는한 사유(思惟)의 상이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상식과 보편, 관습과 배려를 모두 동원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의 핵심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각자의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켜 있다. 해결되지 않는 시시비비를 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이지만 요즘은 초법적 발상이 활개를 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흔히 말하는 ‘떼법’이 ‘헌법’의 상위에 있는지 궁금하다. 뭐니뭐니 해도 편가르기식 정치를 등에 업고 무엇인가 변화를 설레발치는 수준 미달(?)의 정치인들의 영향으로 사회는 더욱 양분화 되어 갈등을 조장해 낸다.
이래저래 이번 겨울은 차가운 한파와 더불어 서민들의 마음마저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봄은 언제쯤 오려나? 봄이 오기는 할까?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모락모락 피어오르지만 이러 저리 표류하는 이 사회는 좀처럼 오는 봄을 두 팔벌려 맞이하려는 기세가 보이지를 않는다.
세상만물의 조화는 오묘한 것. 아무리 추운 엄동설한도 때가 되면 해동이 되고 나뭇가지에는 물이 올라 만물이 기지개를 켤 준비를 하겠지. 혹독했던 지난겨울은 그 겨울에 묻어버리고 이제는 따뜻한 봄기운으로 삼천리 방방곡곡 대지를 물들였으면 좋겠다. 이 겨울의 갈등과 반목은 잠시 접어두고 꽃피는 봄이면 우리 모두가 하나의 마음으로 어우러졌으면 좋겠다.
많은 나라를 여행해 보지는 못했지만 우리나라만큼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나라는 흔치 않다. 사계절이 뚜렷하여 계절마다 조화롭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금수강산은 우리나라만의 축복이요 선물이지 않겠는가? 자손만대에 물려줄 이 멋진 나라를 더욱 잘 가꾸고 꽃을 피워내 오늘을 살아내는 필자가 훗날 멋지고 아름다운 선조였다는 말을 후손들에게 들었으면 좋겠다.
요즘 방송이나 언론의 대부분이 박대통령 탄핵사건 보도가 차지하고 있다. 보도의 내용은 확실한 실체가 없이 의혹이 먼저다. 이러이러한 의혹이 있고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잘못이다. 라는 말이 나오면 한쪽에서는 그런 일은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맞받아친다. 대다수 소리 없는 국민은 어안이 벙벙하고 촛불집회나 맞불성격인 태극기 집회에서 뱉어내는 말들을 들어보면 믿기 어려운 왜곡된 말들이 많아 혼란스럽고 막말은 듣기에도 민망하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이라 하더라도 잘못보고 잘못 들을 수가 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듣고 싶은 것을 듣고 싶어 하고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싶어 하기 때문에 진실과 다르게 듣기도 한다. 거두절미하고 말의 한부분만 뭉툭 잘라버리면 말한 사람의 의도와 완전히 다른 말이 된다. 남의 말을 전달할 때는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고 먼저 말하여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음을 밝히고 말해야 한다.
불교의 금강경은 ‘나는 이와 같이 들었으니(如是我聞)’라는 말로 시작된다. 부처님의 10대제자중 한사람인 아난존자의 말이다. 아난존자는 누구인가? 부처님의 사촌동생으로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후 20여년이 지난 다음에 여러 제자들 중에서 선출되어 부처님을 시봉(侍奉)하는 제자가 되었다. 인물이 출중하여 여자의 유혹이 많았으나 지조가 견고하여 흔들림 없이 수행을 하여 드디어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다. 그는 비상한 총명과 뛰어난 기억력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가장 많이 기억하는 제일의 제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난존자는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나는 이렇게 들었습니다.’라고 했다. 이것은 아난존자는 내가 어떻게 부처님이 이야기하신 그 진의를 그대로 말할 수 있으랴?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들었다고 생각되어지는 것만을 이야기 할 뿐이다. 내가 잘못 기억했을 수도 있고 나의 의견이 은연중 말속에 들어갈지도 모르기 때문에 내가 확실히 들은 것만 이야기 하겠다는 본인의 강한 의지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의 깊은 의미는 부처님만이 아실뿐 나는 거기까지는 모른다. 그러하기에 ‘나는 이와 같이 들었으니’ 라는 표현을 쓰는 아난존자의 정직하고 진실한 자세 그리고 겸손한 모습을 그리게 된다.
우리 부모님들은 자식이 잘못되면 부모로서 자식을 잘못 가르친 무한책임을 느끼고 ‘내가 잘못했다.’라고 말했다. 자칫 남이 들으면 아들이 범인이 아니고 부모가 범인인 것처럼 들린다. 이 말을 잘못 전달하면 전달자가 증인이 돼버리고 일파만파로 번져 꼼작 없이 부모가 범인으로 만들어진다. ‘그럴 것이다.’ 라는 예단을 갖고 남의 말을 들으면 ‘역시 그렇구나.’하는 속단에 빠지기 쉽다.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할 것 중에 거짓말이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실망하는 첫 번째가 자식의 거짓말이다. 종교에서도 계율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엄격하게 주의를 준다.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고 그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은 눈덩이처럼 점점 커져서 나중에는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애매모호해진다. 그러면 세상은 혼탁해지고 위계질서가 무너진다.
장님들이 코끼리 코를 각자 만져보고 누구는 기둥 같다고 하고 누구는 커다란 산과 같다고 각자 다르게 말했다. 장님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각자 느낀 바를 사실대로 말하지만 고 결과는 얼토당토 아닌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 귀로 똑똑히 듣고 내 눈으로 똑똑히 본 것도 사실이 아닐 수가 있음을 경계하고 늘 조심해서 진실을 말해야 한다.
운동회 날 지참해야 하는 물건은 물과 도시락 그리고 비 올 때를 대비해 우산을 준비해야 한다. 물론 손수건이나 휴지도 챙기지만 그 외에는 가져가는 것이 없다. 체육복을 입고 홍군, 백군 표시가 나도록 운동모를 쓰고 운동화를 신고 가면 된다. 운동회 날에는 동네 어른들과 학부모들의 참관이 가능하다. 운동회 구경 오는 어른들은 아무것도 가져 오면 안 된다. 물이라도 마셔야 한다면 가지고 온 것들을 모두 챙겨서 다시 가지고 가야 한다. 학교에 쓰레기를 남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운동회가 끝난 뒤 학교 운동장을 보니 처음처럼 깨끗했다.
어른들은 응원만 열심히 했다. 어렸을 때 자신이 홍군이었던 기억이 있어서 홍군을 응원하는 어른들도 있었고, 손자가 홍군이거나 이웃집 아이가 홍군 응원해 달래서 응원하는 어른들도 있었다. 모두들 어린아이로 돌아가 즐거워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학생들은 전부 교실로 들어가 도시락을 먹었고, 어른들은 이따 다시 만나자며 집으로 점심을 먹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점심을 먹은 후에도 다시 만나 한 마음으로 하루를 즐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학생들에게 운동회는 분발도 하고 자신감도 얻는 시간이었다. 또 협력의 미덕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땀을 흘리며 열심히 뛰는데 물을 마시며 태평하게 관전하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물이 먹고 싶어도 아이들 생각해서 참아야 한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뭔가 뼛속 깊이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특히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고 그 앞에서 어른들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엄마들이 존경스러워 보였다. 시간 맞춰서 상용 약을 먹어야 하는 엄마들은 물병을 예쁜 손수건으로 둘둘 말아서 다른 엄마들 등 뒤에 숨어 연신 ‘스미마셍(미안합니다)’을 연발하며 마셨다.
우리나라 엄마들하고는 너무나도 생각이 다르고 행동도 달랐다. 멋쩍어진 필자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운동장 하늘에는 만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거기엔 태극기도 있었다. 내가 놀라면서 황홀해하자 옆에 있던 엄마가 김군(필자 아이들) 둘이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태극기를 그려서 붙였다는 귀띔을 해줬다. 원래 일본에서 만든 만국기 속엔 태극기가 없는데 필자 아들 둘이서 태극기를 그렸다는 것이다. 학교 아이들도 처음으로 태극기를 보았단다. 엄마들이 칭찬을 할 때 필자의 눈은 또 한 장의 태극기를 찾아 헤맸다. 학교 전교생이 그린 만국기 속에 태극기 두 장도 함께 자랑스럽게 펄럭였다는 사실이 감동으로 밀려왔다. 우리나라 운동회 풍경과는 너무 다른 모습에 놀랐고 정성을 다해 아이들을 응원해주는 어른들의 모습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정동 전망대 카페에서
차 한잔 하면서 오랜 역사와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나를 돌아보게 되고 수많은 세월 동안 스처 간 사람들의 숨결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곳은 서울시청 서소문청사1동 13층에 있는 정동 전망대이다. 덕수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멀리 인왕산과 백악산이 펼쳐 보인다. 가까이 서울 신청사가 우람하게 서 있고 빌딩 숲 속에 옛 고궁인 덕수궁이 자리 잡고 있다.
필자가 이곳을 자주 찾는 이유는 주변에 많은 문화재와 유물이 있기 때문이다. 정동 전망대에서는 커피를 비롯한 각종 음료를 주변 반값에 즐길 수 있다. 서울 시청역에서 나와 덕수궁 쪽 출구로 나오면 대한문이 보이고 덕수궁 돌담길이 이어진다. 덕수궁을 한 바퀴 돌며 옛 왕궁을 둘러 볼 수도 있고 빌딩 숲 속의 허파와 같은 정원에서 힐링 할 수도 있다.
역사 유물이 늘어서 있고
덕수궁 주변으로 1897년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에 의해 최초의 서양식 개신교회인 정동제일교회가 있다. 정동제일교회는 일제하에 항일운동의 거점으로 독립선언문과 태극기 등이 등사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이 있고. 1926년 서양인에 의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설계된 성공회 대성당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
근처를 걸어보면서 이 역사의 현장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또 다른 감회가 아닐 수 없다. 조금 더 발걸음을 옮겨보면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이 있는데 그곳은 대한제국시 근대적 사법기관인 평리원이 세워졌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재판소로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재판을 받거나 고문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생각하면 가볍게 발걸음을 뗄 수가 없게 된다.
황제가 살던 왕궁
그리고 정동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덕수궁에는 역사의 수례 바퀴를 돌려 대한제국의 그 시대로 돌아갈 듯 착각에 빠진다. 그 굴곡의 역사가 한눈에 다 들어오기 때문이다.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덕수궁 함녕전은 고종황제가 침전으로 사용했고 1919년 승하한 건물이기도 하다. 왼쪽 옆으로 정관헌이 보이는데 고종이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연회를 열었던 곳이다. 덕수궁내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 그 앞으로 덕수궁 석어당은 덕수궁 내 유일한 2층 건축물로 선조가 승하할 때까지 16년 동안 거처했던 곳이다. 바로 앞쪽에 웅장한 건물이 덕수궁 중화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사신의 접대 등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중요한 으뜸 전각이기도 하다. 조금 떨어진 곳으로 중명전이 있는데 왕실도서관으로 쓰이기도 했고 한때 고종의 집무실로 사용되기도 했다. 고종이 헤이그 특사를 접견한 장소이기도 하며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고종이 일제에 의해 주권을 빼앗기고 덕혜옹주를 낳아 유치원으로 사용하던 장소도 여기에 있다. 최근 덕혜옹주가 영화로 만들어져 관심을 받고 있다.
나를 돌아보게 하는 곳,
정동 전망대는 이 역사의 숨결이 잠들고 있는 현장을 차 한 잔 하면서 바라볼 수 있다. 필자는 시내를 나오는 길이면 그래서 이곳을 자주 찾는다. 빌딩 숲 속에 황제가 집무를 보던 집무실이 있고 그 당시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듯하다. 수많은 사람이 거쳐 간 덕수궁을 바라보며 필자 또한 한 시대의 작은 징검다리가 되어 역사를 이어주고 있다. 커피 향기를 맡으며 나에게 묻는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이 시대의 주인이 되어 있는가?
언젠가부터 태극기를 아끼자는 캠페인으로 국경일엔 꼭 태극기를 달자는 운동이 있었다. 지난 현충일 뉴스엔 어느 고층 아파트에 한 집도 빠지지 않고 내 걸은 태극기를 보여 주었는데 보는 마음이 뿌듯했다.
수십 층 되는 아파트에 줄지어 펄럭이는 태극기의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졌으며 한마음으로 국경일을 기리며 뜻을 모아 태극기를 단 그 아파트 주민들이 돋보였다. 요즘 아이들이 너무나 우리 역사를 등한시하여 3.1절을 삼 점 일절이라 읽었다는 뉴스도 있었던 터라 나라 사랑이나 애국심 고취에 어른들이 좀 더 앞장서서 우리 태극기 사랑까지 가르쳐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세계의 어느 나라든 다 고유의 국기가 있고 각각의 디자인과 색상이 다르다.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은 심플하게 빨간 동그라미 하나가 그려져 있고 별 달 모양을 그려 넣은 나라도 매우 많다. 국기는 각 나라마다 뜻하는 바가 있어 표현된 모양일 것이다. 우리나라 태극기는 참으로 독특하고 예쁘다. 세계 여러 나라 대부분 국기가 심플한 디자인인데 우리 태극기는 건곤감리 복잡하기도 하고 하나하나 가진 뜻도 심오하다. 디자인 때문만이 아니라 필자는 우리 태극기가 참 좋다. 항일 운동 때 독립투사들이 품속에 소중히 지녔다든지 선조들의 숭고한 희생과 불굴의 나라 사랑이 깃들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표식이라는 것만으로도 잘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아파트도 통장님이나 반장으로부터 국경일엔 태극기를 꼭 달자는 의논이 있었다. 아파트는 베란다 중앙이나 왼쪽에 달아야 한다는 정보도 들었다. 5층에 사는 필자는 5.6.7. 층을 맡은 아파트 반장이다.
한 달에 한 번 나오는 우리 구의 소식지를 집집의 우체통에 넣어주거나 아파트 일로 주민 의견을 물어야 할 때 앙케이트 받는 정도의 일을 하고 있다.
반장이 아닐 때도 국경일에 태극기 다는 일은 잊지 않고 있었다.
지난 현충일 점심 무렵 누가 초인종을 눌렀다. 이웃집 아주머니가 베란다 뒤편을 산책하다가 땅에 떨어진 태극기를 주웠다며 댁의 태극기 아니냐고 하셨다. 베란다에 가보니 우리 태극기가 없었다. 아침에 분명히 내걸었는데 고정받침이 없어 리본으로 칭칭 동여매 놓았던 게 바람에 풀어졌나 보았다. 아주머니가 떨어진 태극기를 들고 올려다보니 우리 집과 두어 집이 태극기가 없더라고 하셨다. 한 집씩 찾아다니려 했다며 웃으신다. 우리 태극기 맞는다며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이번엔 좀 더 꽁꽁 베란다 난간에 동여매었다. 땅바닥이 말라 있었던지 다행히 더럽혀지지는 않았다.
몇 년 전까지 우리 가족은 동해안으로 여행을 자주 다녔다. 여름이나 겨울 휴가철엔 꼭 동해안을 찾았다. 우리나라 어디든 다 아름답고 멋진 곳이 많은데 우리 아이 아주 어릴 때부터 놀러 다녀서인지 휴양지하면 동해안이 먼저 떠올랐다. 매년 다녔기 때문에 가는 길도 익숙했고 어쩐지 고향에 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동해안은 우리에게 멋진 곳이었다. 동해안 설악산 가는 곳 모두 경치 좋고 공기 맑은 훌륭한 도시지만 언젠가의 기억이 마음을 씁쓸하게 한다.
서울에서 인제 원통을 통해 설악으로 가는 길이었다. 거리 곳곳에 국기 게양대가 있고 태극기가 걸렸는데 너무나 불쌍한 모습을 하고 있어 마음이 아팠다.
태극기의 하얀 바탕은 이미 더러운 회색으로 물들어 지저분해 보여 안타까웠다. 차라리 저렇게 방치할 바엔 달지 않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며 강원도 지자체 어디에 신고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땐 좀 젊었고 놀다 보니 잊어버리고 귀찮기도 해서 그냥 걱정만 하고 오게 되었었다. 아마 할머니가 된 지금이면 필자는 분명히 신고했을 것이다. 어디에 더럽혀진 태극기가 있으니 새것으로 교체하고 관리 좀 잘하라고 쓴소리 깨나 했을 것 같다.
지금도 길을 가다가 국기가 걸려 있으면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요즘은 대체로 다 깨끗하게 잘 관리되고 있다. 조금이라도 지저분한 태극기가 보이면 당장 지자체에 전화해서 호통을 치려 한다. 거리에 펄럭이는 깨끗한 우리 태극기를 보면서 강원도 그 자리의 태극기도 지금은 깨끗하고 힘차게 휘날리고 있을 것을 기대해 본다.
한해를 반으로 접는 유월을 ‘희망’의 달이라고 부르고 싶다. 과연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유월은 신록이 절정을 향해가는 시기다. 신록은 우리에게 평안과 위로를 준다. 무엇보다도 신록은 희망을 준다.
한해를 시작한 1월은 시무식을 비롯한 이런저런 행사로 쏜살같이 지난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2월이 지나면 3월은 입학식으로 설렘과 기대가 가득한 달이다. 목련꽃이며 진달래꽃이 벚꽃의 화사함과 함께 추운 계절을 지낸 우리의 마음을 마음껏 위로한다. 푸른 하늘 속에서 노란 물을 들이는 것 같은 산수유가 활짝 핀 오솔길을 걷노라면 어느새 추억 속의 시절로 돌아가고 만다. 이렇게 노란 꽃물이 가슴에 들어 서서히 깊어지면 가을에는 빨간 사랑이 솟아나는 것인가.
5월에는 어린이, 어버이 챙기느라 이런저런 행사며 식사자리가 넘쳐 난다. 이렇게 바쁜 상반기를 보내고 숨을 좀 돌리며 호흡을 가다듬을 때 푸른 신록이 몰고 온 6월이 마음에 위로를 전한다.
6월은 장미의 계절이기도 하다. 담장을 타고 오르며 경쟁하듯 빨간 얼굴을 뽐내는 장미를 보는 것만으로도 삶의 의욕이 솟구친다. 수줍은 듯 하얀 감꽃이 피고 청초하게 하얀 미소를 띤 개망초가 들녘을 순결하게 수놓는 유월에는 희망도 녹음처럼 우거지는 것 같다.
올해 6월 5일은 24절기에서 아홉 번째에 해당하는 망종(芒種)이다. 이때가 보리를 베고 모내기를 하기에 가장 알맞은 시기다. 보리를 추수하기 전까지 식량이 떨어져 어려웠던 시기를 ‘보릿고개’라고 한다. 유월이 되면 식량문제에서도 희망이 보이는 것이다.
이런 6월이 우리 민족에는 역설적으로 가장 아픈 상처를 겪은 달이다. ‘6·25동란’이 일어났고 ‘6·10민주항쟁’도 있었던 달이다. 희망으로 가득해야 할 푸른 유월에 우리 민족에겐 뼈아픈 시련이 닥쳤던 것이다.
우리는 6월을 ‘호국보훈의 달’로 지정하여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유월 초 농촌 들녘에서는 모내기가 한창이었고 산등성이에서는 뻐꾸기 소리가 종일 심사를 흔들어 놓았다. 바쁜 시기였던 만큼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기가 무섭게 집안 일손을 도와야 했다.
학교에서 ‘반공 웅변대회’, ‘호국·보훈 글짓기’가 연례행사로 열렸던 것도 6월이다. 머리띠를 두르고 두 손을 치켜들어 주먹을 불끈 쥐며 열변을 토하던 그때 연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현충일이면 집집이 대문 앞에 태극기를 달았다. 성물처럼 고이 간직한 국기함을 열 때면 어떤 경건함을 느끼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상상이 되지 않지만, 그때는 그랬다.
세계는 이념의 대결과 냉전의 시대를 뒤로하고 지구촌 시대의 물결 속에 꿈의 사회(Dream Society)를 열어가고 있다. 이런 시대의 흐름 속에서 6월은 어떤 의미여야 할까?
초고령사회를 향해 가는 대한민국은 노령인구와 양극화 문제를 풀기 위한 해법을 찾는 데 많은 힘을 쏟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1955년~1963년 출생자)가 700만 명 정도이고 ‘5575세대’(55세~75세)가 1천만 명에 이른다.
‘은퇴가 없는 나라’의 저자 서울대학교 산업공학과 김태유 교수는 “고령화는 고령화로 풀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시니어들은 복지의 수혜대상자를 의미하는 용어가 아니다.
시니어는 이 시대를 만들어낸 우리의 토대고 비빌 언덕이다. 시니어는 새로운 경제의 잠재력이고 보물이다. 시니어를 무기력하고 힘없는 노인들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시니어는 지혜의 샘이고 발전의 원천이다.
사무엘 울만(Samuel Ullman)은 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청춘은 인생의 어느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장밋빛 볼, 붉은 입술, 유연한 무릎의 문제가 아니라 샘솟는 상상력과 넘치는 감수성과 의지력이다. 그리고 인생의 깊은 샘에서 공급되는 신선함이다.”
늙음은 낡음이 아니다. 늙음은 거꾸로 가는 신비한 새로움이다. 제대로 된 늙음에는 더욱더 원숙한 삶과 깊은 깨우침이 펼쳐진다. 늙음에는 심오한 맑음이 있다. 연륜에서 샘솟는 품격과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늙음과 낡음을 구별할 줄 아는 분별력이 삶의 질을 갈라놓는다. 원숙한 인격에서 풍기는 그윽한 삶의 향기는 늙음의 고상함에서만 맛볼 수 있는 진정한 멋과 아름다움이다. 이것이 바로 거꾸로 나이 드는 신비로 빚어내는 진정한 청춘이다.
농촌에서는 보리 베기와 모내기가 겹치는 이 무렵이 가장 바쁘다. 그만큼 생명력이 왕성한 시기라는 의미다. 본분에 충실한 생명체들의 활력이 우리의 마음에도 짙푸른 희망을 가득하게 한다.
인생에서의 유월은 인생 이모작 모내기를 하는 시기다. 시니어여! 이 유월, 우리야말로 인생의 유월을 맞이한 사람들임을 기억하자.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아프고 힘들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희망이 있었기에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오늘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았던가.
역사학자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는 “모든 역사는 현재 역사다”라고 했다. 지금에서의 평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5575세대’는 지금 이제까지 지내온 것보다 더 깊고 넓은 이모작 파종의 시점에 서 있다. 이런 이유로 유월을 ‘희망의 달’이라고 부르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