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그림을 취미로 하는 연예인들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 사이에 회자되었다. 배우 김혜수와 구혜선의 그림이 아트페어에 걸린 이야기가 화제가 되더니, 배우 하정우의 그림이 수천만원에 거래된다는 이야기도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러다 가수 조영남의 대작 논란으로 ‘아트테이너’에 대한 관심이 절정에 이르렀다. 이쯤 되니 그림은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유희’로 여겨진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물론 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젤을 세운다. 그리고 하얀 캔버스를 올려 조금씩 스케치를 한다. 아마 노후의 취미생활을 꿈꾸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상상해 본 장면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떨까.
통계청의 ‘2015년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50대는 53.2%가, 60세 이상은 56.4%가 노후를 보내고 싶은 방법으로 취미활동을 꼽았다. 자원봉사나 종교활동 등 다른 활동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였다. 그러나 실제 여유시간을 보내는 여가활동으로 50대의 72.2%가, 60대 이상의 81.2%가 가장 간단한 TV 시청을 꼽았다. 대다수가 이상과 현실이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예술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응답은 3%도 되지 않았다.
심리적 장벽이 높은 취미 ‘미술’
미술은 시니어들을 위한 취미로 가장 먼저 손꼽히는 분야 중 하나다. 시니어 대상 교육기관에서 미술은 빠지지 않는 단골 분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붓을 손에 쥐지 못하는 시니어들이 적지 않다. 그 이유는 바로 선입견이라고 권인수 화백은 설명했다. 경기도 성남시 판교동에서 5년째 일반인과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회화를 가르치고 있는 화실 ‘아트담’의 대표이기도 한 권 화백은 회화나 미술에 대한 편견이 장벽처럼 작용하고 있다고 했다.
“학교가 입시 교육에 집중하면서 학생들이 미술, 그러니까 아름답게 그릴 수 있는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초등학교에서 멈춘 셈이죠. 잘 못 그리는 것이 당연해요. 그런데 스스로 재능이 없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재능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재능이 아니라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에요. TV 프로그램 에 나오는 수많은 달인들을 보세요. 그들이 자기 직업에 대해 재능을 갖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잖아요. 오랜 직장생활과 노력 덕분이죠.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다른 선입견 중 하나는 그림은 돈이 많이 드는 취미라는 것. 그러나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도구만 따지면 결코 그렇지 않다. 화실 수업료를 제외하면 이젤과 물감, 붓 등의 구매비용은 25만원 내외에 불과하다. 사진이나 자전거 등에 비교하면 되레 저렴한 취미인 셈이다. 이나마도 캔버스를 제외한 나머지 재료들을 강습생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는 교육기관도 있다.
학원…화실…본인에 맞는 곳 선택을
실제로 그림을 그리겠다고 마음먹었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주변에서 ‘스승’을 찾는 일이다. 시니어를 대상으로 회화 등 미술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은 각 자치구가 운영하는 문화회관과 백화점 등이 운영하는 문화센터가 있고, 개인이 운영하는 학원이나 화실 등이 있다.
구청 문화회관이나 백화점 문화센터는 다른 취미와 병행이 쉽고, 가격이 비교적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교육 인원이 많은 편이기 때문에 강사가 1대 1로 지도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다.
학원은 입시 미술을 겸하거나 정해진 강의 위주로 운영하는 형태가 대부분이고, 화실은 1대 1 지도를 중심으로 수업을 한다. 미술학원은 대학 인근에 많고, 화실은 반대로 주거지역 주변에 많다. 수업 형태나 시간, 수업료 등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상담을 통해 충분히 교육기관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본인에게 맞는 곳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림이 시니어에게 주는 장점은 다양하다. 미술 수강생들은 운동에 비해 체력적으로 제한이 없는 취미이면서, 고도의 집중을 통해 잡념을 사라지게 한다고 입을 모은다.
11년째 송파에서 화실 ‘모노그라프’를 운영 중인 서양화가 김용일 화백은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시니어들에게 제공하는 장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평생 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 중 하나죠. 적은 비용에 비해 얻는 성취감도 크고요. 보통 6개월에서 1년 정도 배우면 남에게 그림을 선물할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서는데, 그 과정에서 얻는 자존감도 상당합니다. 그룹 전시회를 통해 본인의 그림이 남에게 인정받거나 팔리는 경험은 시니어들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화실에서 형성된 커뮤니티를 통한 사회활동도 그림을 배우는 과정이 주는 매력 중 하나다. 앞서 소개한 아트담은 인근 구치소 면회자들을 위해 대기실에 그림을 전시하기도 했고, 모노그라프의 경우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그림 봉사활동을 진행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전시회 활동은 그림에 대한 욕구를 재충전하는 기회로 사용되기도 한다.
또 일부 지역의 경우 화실은 체면을 내려놓는 휴식 공간이 되기도 한다. 고소득층 수강생들이 많은 한 화실의 관계자는 “재벌이나 정치인, 연예인 등이 신분을 숨기고 그림을 그리기도 합니다. 유난히 걸레질이나 설거지에 열중했던 한 회원이 지자체장의 부인이라고 밝혔을 때 주변에서 적잖이 놀란 적도 있어요. 사교를 위해 일부러 모인다기보다, 본인의 원래 모습을 찾아 순수한 문하생으로서 서로를 평등하게 대하니 관계가 홀가분해지는 것 같아요.”
그림 그리기는 치매 예방에 큰 도움
그림은 심리적인 부분 이외에 실제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미국의 유명한 병원인 메이요 클리닉의 신경과 전문의 로즈버드 로버트는 지난해 발표한 연구 논문을 통해 “그림 그리기 등 노년의 미술 활동이 경도인지장애(치매의 전 단계)에 걸릴 가능성을 73% 낮춰준다”고 발표했다. 그는 4년간 256명의 85세 이상 노인을 관찰했는데, 미술 활동이 수공예(45%), 사교활동(55%), PC활용(53%)보다 인지기능 보호 효과가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중앙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선미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림 그리는 것이 경도인지장애 예방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은 미술 활동을 통해 마음과 정신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손의 미세한 운동과 관련된 신경을 활성화시키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자극들이 신경세포의 퇴화를 방지하고, 새로운 신경세포의 성장을 촉진하면서, 인지기능 유지에 사용되도록 변화를 일으키는, 일종의 신경가소성 효과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 교수는 그림 창작활동은 치매 예방뿐만 아니라 시니어들의 전반적인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미술 활동은 인지기능이나 창의력 향상으로 삶의 질을 높이고, 추억 회상을 통해 의미있는 대화를 촉진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더불어 의사 소통 능력도 향상시키죠. 자아감이나 자존감의 회복에도 도움이 되고, 심지어 치매환자 간병인의 삶의 질까지 향상시킨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마포복지관에서 수채화를 가르치고 있는 류영선 강사는 “소질을 걱정하는 회원분들에게 관심이 곧 소질이라고 늘 말씀드려요. 그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그릴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니까요. 실제로 시작하고 나면 기대 이상으로 쉽게 적응하시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붓을 잡고 행복하다는 말씀을 연발하시는 회원분들을 보면 다른 분들도 주저하지 말고 빨리 시작하셨으면 합니다”라고 조언했다.
건강한 가정이 모여 크고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이런 공동체가 모여 국가의 초석이 된다. 하지만 가정 해체가 심심찮게 일어나면서 아동학대, 노인 소외 등 심각한 사회문제로 이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허물어지는 가정 해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리 사회의 대안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전문가들은 바로 효(孝)라고 말한다. 이번 호에서는 효를 실천하는 3인이 한자리에 모여 이 시대의 효의 진정성에 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 무크지 을 창간하는 권혁승 백교문학회장(이하 권혁승 회장)
△ 효경영의 리더 상훈유통 이현옥 회장(이하 이현옥 회장)
△ 교육을 통해 효 문화를 정착시키는 최종수 한국효문화센터 이사장(이하 최종수 이사장)
장소 이투데이 6층 회의실
Q.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전통적 가치 ‘효.’ 요즘 효를 얘기하려면 저마다 답답하다고 한탄합니다. 무엇 때문에 시니어들이 분노하는 걸까요?
△ 이현옥 회장: ‘효는 백행지본(百行之本)’이에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모든 행동의 근본이죠. 부모가 없었다면 자식들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섰더라도 이는 모두 부모의 은덕이죠. 부모 모시는 일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데 바쁘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핑계로 찾아뵙는 것은 소홀히 하고 전화 한 번 하는 정도로 생색내는 자식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죽는 날까지 자식 잘 되기를 바라고 좋은 소식 있기를 고대하며 밤낮으로 자식 걱정을 하는 게 부모의 마음이죠.
△ 최종수 이사장: 자식들의 마음가짐을 바로 세우기 위해선 교육이 우선돼야 해요. 옛 서당에서는 과 을 기본으로 어려서부터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예절을 가르쳤어요.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각자 직분에 충실하게 하는 밑바탕에는 효가 자리 잡고 있었지요.
이런 이유로 초·중·고교에서 효와 예절, 질서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어요. 학식을 갖추는 것보다 사람이 되는 게 우선이지요.
이러한 일들을 시작하게 된 게 주위에 있는 문화예술인들이 ‘우리 매일 같은 것만 할 게 아니고, 인성과 효에 대한 공감을 통해 새로운 일을 한번 해보자’고 한 것이 계기가 됐어요.
△ 권혁승 회장: 우리나라 효 사상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고, 한국의 가족주의도 전부 없어져 가고 있어요. 이러한 현상을 두고 ‘가정 파괴’라는 말들을 씁니다. 이는 곧 가정의 예절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가정의 예절이란 자식이 부모를 공경할 줄 알아야 하는데, 요즘은 어버이날이나 부모 생신날이라 해서 선물하나 사서 주는데 그건 효가 아니죠. 효 사상이라는 것은 한국인의 정신문화라는 것이고, 물질의 교류나 거래는 아니죠. 부모자식 간에 아파트 사주고 비싼 선물 사주고, 물론 그것도 효도의 한 방법 일수 있지만, 한국의 기본 사상이자 문화 사상은 아니라고 봅니다.효의 출발점을 가정의 예절에 두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부터 아이들을 교육해야 해요. 요즘은 어린이 교육이 잘못돼 개인주의나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해졌지만, 한국 효 사상이 무너져가는 위기 상황이라고 느끼니 씁쓸하죠. 그러한 문제로 우리(3인)가 모인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웃음).
Q. 지금 효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실천되고 있나요?
△ 권혁승 회장: 요즘 대다수 부모는 자식에게 의지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리고 자식들은 부모에게 효도하려는 생각을 안 하고 있죠. 효를 바라지도, 하지도 않는 게 현 상황인거죠. 그래도 지금 우리가 하는 효 운동을 계속 꾸준히 전개해야 하는데, 도움이 필요합니다. 각 시·구 문화원에서 부모에 대한 시 낭송회를 1년에 한 번씩 한다든지, 강의를 한다든지 말입니다. 이렇게 효에 대한 교류를 해야 효심이 생기는 것이죠. 젊은이들에겐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 날마다 반성을 해나가는 것이 효예요. 아이들이 “학교 다녀 오겠습니다”, “다녀 왔습니다” 인사를 하는 것이 기본인데 휙 갔다가 말없이 돌아오죠. 젊은 엄마들도 다 어릴 적 해본 것으로 신경을 못 써서 그렇지 아이들도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효심’. 그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봤어요. 대한민국 국어사전에 이렇게 나옵니다. 첫 번째, ‘효성스러운 마음’. 두 번째, ‘효심은 엄하게 키운 자식일수록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법이다’ 그러니 부모가 애를 잘 키워야 하죠. 적당히 키우면 효도가 안 돼요. 불효라는 것은 아이에게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 부모자식 간 주고받는 것이거든요.
△ 이현옥 회장: 효를 실천하는 방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 왔어요.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의 물신주의는 가정의 안녕과 질서의 근원인 효를 경시하므로 해체되는 가정들이 늘어나고 어린이나 젊은이 할 것 없이 절대가치와 기준이 상실되어가고 있는 현실이죠.
자식을 물질적으로 키우면 그게 효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권 회장 말씀대로 엄하게 키우고 가정에 모범을 보여야 하죠.
Q. 지난해 12월 ‘효도계약’을 지키지 않은 아들에게 증여한 부동산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이 판결을 놓고 가족모임에서 효도계약서를 쓰는 시니어들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 권혁승 회장: (부모자식 간 효도계약서 등의 문제에 대해서) 나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요. 한국인은 효에 대해 우리 전통문화, 민족문화로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데 개중에는 부모자식 간 효도 계약서를 쓴다든지 하는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사실상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런 몇몇 사건을 미디어에서 너무 부풀리는데, 그런 것을 줄여야 해요. 부모자식 간 화합하고 소통해야 하는데 불화가 있다면 잘못되는 것이죠. 아이들이 자랄 때 가정 예절이나 인성 교육을 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으니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자식이 잘못했든 부모가 잘못 가르쳤든 소통이라는 것은 쌍방이에요.
△ 최종수 이사장: 효도계약서를 쓰고 하는 효는 결코 효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계약을 하는 것도 문제, 그것을 퍼뜨리는 언론도 문제이지만, 어쨌든 그것은 효가 아니고 효가 될 수도 없어요. 중요한 것은 두 분(권혁승, 이현옥)도 그렇지만 자신의 모든 열정과 재산을 털어 효 문화를 전파하는 훌륭한 분들이 계시는데 국가는 대체 무엇을 하는가 생각이 들어요.
지방자치단체 강령에도 효에 대한 지침 등이 있지만, 지나친 복지로 효가 묻히고 퇴색하고 있어요. 노인, 장애인 복지 등을 위한 비용이 당연히 들겠지만, 그중 일부를 효를 위한 예산으로 책정해 정책을 세워야 합니다. 사람들이 효를 통해 그런 노인과 장애인 등을 돌볼 수 있도록 말이죠.
Q. 효에 관한 교육과 정책 지원이 줄어들고 있다는데요.
△ 권혁승 회장: 예를 들어 우리 어린이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시 낭송회를 한다고 하면 그들도 그 며칠 동안은 아버지 어머니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효가 뭔가 선물만 주는 게 아니라 기본을 익히는 교육을 해야 해요. 이런 말이 적절할지는 모르지만 각 지역마다 문화원이 있어요. 대개 문화 강좌를 한다든가 음악, 미술, 무용 등을 가르치는데 효 문화에 대해서도 강의하면 안 될까 싶어요. 문화원마다 책정된 예산들을 다 그런 예술 강좌에만 써야 할까요?
△ 최종수 이사장: 의 독자들의 나이대를 보면 나라 망하고, 6·25사변 나고 배고프고 살기 어려워서 그런 걸 찾을 수 없는 시대였다 할지 몰라도, 그 와중에도 뜻있는 사람들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어요. 좋은 효자·효부 정말 많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었다는 생각 말고 기본적인 교육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요?
△ 이현옥 회장: ‘효’를 바탕으로 회사를 경영하다 보니 직원들도 만족해하고, 사고도 발생하지 않아요.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가는 직원들에게 홍천 대명콘도와 양양 솔비치콘도 숙박을 지원해 줍니다. 1년에 상·하반기 2번 가능하고, 시댁이나 처갓집 식구들도 함께 갈 수 있게 하는데 주로 직원들이 장인·장모를 모시고 가는 편입니다.
‘너희들이 부모에게 잘함으로써 우리 직장도 건전하게 발전이 되는 거다’라고 자주 말합니다. 매년 5월에는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전 직원이 가족을 데리고 세종시에 있는 효림원(효 마을)을 방문해 효심을 나누고 효 문화행사를 진행하죠.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서는 무엇을 바꾸어야할까요?
△ 최종수 이사장: 효 문화예술 교류 차원에서 학교에 전문 강사가 방문해 효 강의 등을 하는데, 어느 정도 한계가 있지만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어머니들의 생각이 좀 바뀌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효에 대해 토론회를 한다고 하면 관심도 없고, 다른 학원에 가라고 하는 등 꽁무니를 빼기 때문이죠. 학생들을 모집하면 3분의 1 정도만 자발적으로 오고, 3분의 1은 학교에서 하라니까 억지로 온 것이고, 또 3분의 1은 참여는 하지만 구실만 있으면 학원에 가거나 빠지려고 해요. 그런 경우에 학생도 학생이지만 어머니들이 적극적으로 인성이나 효, 예절에 관심을 가져야 해요. 인성이 기본이 된 다음에 학력을 쌓아야지 기본도 안 되고 학력만 쌓으니 아이들이 머리만 커지는 것이죠.
효라는 것은 평생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인데, 유가(儒家)에서 배울 때는 부모가 살아 계실 때 모시기를 잘 해야 한다고 하는데, 종교가 달라 많은 부분에 갈등이 생겨나고 있어요. 그런 효가 필요 없다고 하는 단체도 생기고, 내가 효를 안 해도 살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지는 몰라도, 효는 우리나라 정서나 젊은이들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난해부터 인성교육진흥법을 시행하여 인성교육을 강화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단체가 갈팡질팡하고 있어요. 인성과 예절 교육은 효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권혁승 회장: 효 문화, 이런 운동은 돈이 많다고 할 수 있는 운동도 아니고 시간이 많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어떠한 소명감에 의해서 하는 것이지 이해타산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라 ‘기브’만 하는 거죠.
요즘 부모는 자식의 효도를 바라지도 않고, 자식도 안 하는 상황이지만 결코 포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에요. 효는 어디 내다 팔래야 팔 수 없는 한국인의 아주 기본적인 사상이자 문화 사상으로 한국인만이 가지고 있는 정서니까요. 2018년에 동계 올림픽을 하는데 외국인들이 많이 왔을 때 ‘한국은 효의 나라다’라는 게 선전되면 얼마나 좋겠어요(모두 웃음).
△ 이현옥 회장: 생전이나 사후에도 예에 벗어남이 없어야 합니다. 즉, 살아 계실 때도 예를 지켜야 하나 돌아가신 후에도 예를 지켜야 합니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자(慈)라면 자식의 부모 사랑은 효(孝)라고 합니다. 부모는 진 땅을 걸어가도 자식은 마른 땅을 걸어가기 바라는 게 부모입니다. 그래서 전체를 바쳐 희생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인프라 구축이 우선시되려면.
△ 최종수 이사장: 정부의 지원도 중요하지만,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먼저 조성돼야 합니다. 내가 과천문화원장을 8년 정도 하고, 전국문화원 회장을 4년 동안 했어요. 그러면서 체계적으로 구축하여 효 문화를 선도하려는 효 문화센터를 만들려고도 했죠. 그러나 주변에서 ‘왜 저렇게 판을 벌이나’하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어요. 그러니 그런 것을 하려고 해도 먼저 주변의 인식과 분위기를 바꾸지 않으면 안 돼요.
△ 권혁승 회장: 국내 효 문화를 바로잡고 육성, 창달해야 하지만 아울러서 교양을 갖출 수 있어야 해요. 효는 한국 고유의 문화예요. 이 문화가 옛날 중국이나 일본에서 온 게 아니죠. 물론 서양에서도 방식이 다를 뿐 효도를 잘 하죠. 영국의 역사 철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책에 ‘인류문화 발전을 위해 한국이 크게 기여한 게 있다. 그것이 한국인의 가족제도와 효 사상이다’라고 썼어요. 그는 이러한 효 사상을 전 세계에 번지도록 해 모든 세계인이 가족을 사랑하는 정신이 퍼졌으면 좋겠다는 뜻을 설파했고요. 소설가 톨스토이도 “불효하는 사람은 벗으로 삼지 말라”고 했어요. 미국연방준비제도 의장을 지낸 버냉키(Bernanke)도 미국 프리스턴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이제 여러분은 졸업을 하니 매주 한 번씩 부모님에게 전화해라”라고 말했습니다. 생일에 선물을 사주고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1주일에 몇 번씩 전화 걸어 안부를 여쭙는 것이 한국 효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점이 전 세계에 한국인이 어깨 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랑거리가 될 수 있고, 자부심이라 할 수 있어요.
한국의 효 사상을 세계에 널리 알려서 모든 세계인들이 한국의 효 사상을 본받고 한국하면 ‘아! 효의 나라’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해요. 더 나아가서는 효 문화를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록한다든가, 널리 번지도록 힘써야 해요.
△ 이현옥 회장: 이런 분위기를 조성해서 좋은 일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여 정부와 언론이 주목하고, 효에 대한 인식이 관철됐으면 합니다.
△ 권혁승 회장: 효에 대한 좌담회는 한국 언론사, 매체 사상 처음 있는 일 아닐까요? 아마 단군 이래 최초일 것 같아요. 오늘로 끝내지 말고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어요. (웃음)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
△ 최종수 이사장: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타고난 소질과 능력을 개발해 나의 길을 찾고 이웃과 사회를 위한 사랑과 봉사가 바로 ‘효’라는 것이죠. 이를 위해 시대에 맞는 효 문화의 창출이 바로 인성 교육의 출발점이라고 보고 한국효문화센터를 2011년 시작했어요.
한국효문화센터는 효에 관련된 교육과 행사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진정한 효가 무엇인지 되돌아보며 자신에 대한 사랑의 첫걸음을 시작으로 하는 인성 교육과 밝고 건강한 사회 구현이 목표예요.
예술단체장들이 효 문화사업을 하면서 학술회의도 하고, 학생들을 모아 토론한 내용들을 토대로 효 문화를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지 단초를 발견했어요. 요즘 고등학생들은 입시에 시달리지만, 그중에서도 고전 등을 훤히 꿰뚫는 학생들이 꽤 있어요.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하지만, 마냥 그럴 것이 아니라 헌혈도 하고 기증도 해서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의견도 나왔죠. 그러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 시대에 효 문화사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해줬어요. 아이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그들의 수준에 맞는 효 문화사업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렇게 글짓기, 그림 그리기 대회도 하고, 매년 토론회도 열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가고 있어요. 국내 최대 규모의 ‘효’를 주제로 한 문화축제로 1회성 행사로 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지만 그만큼이라도 확실히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상을 받는 아이들과 부모님들을 만나보면 그때만이라도 가족끼리 효에 대해 이야기하고, 부모를 생각한다고 하거든요.
△ 이현옥 회장: 효 문화라는 건 다들 잘 알고 있지만 실천하는 게 어려워요. 어머니가 살아 계실 적에 특히 5형제 중 셋째인 나를 많이 아끼셨고 사랑을 주셨죠. 공직생활 중에도, 사업을 할 때도 어머니가 편찮으시면 달려가 돌봐드리는 등 장남 역할을 했어요. 고향 마을에 1981년 대덕연구단지가 들어서면서 선산을 세종시 조치원으로 이전해 효림원을 조성했어요. 어머니는 그 안에 있는 농가주택에서 4개월 동안 고생하시다 90세에 돌아가셨고, 5일장을 치렀어요. 매년 시묘살이를 하기 위해 내려갔고 거기 가서도 돌아가신 어머니와 대화도 나누고 3년 탈상을 했는데 마을 회장이나 이장이 그 모습을 눈여겨봤나 봐요. 그러다 매년 추모식을 하면서 마을 사람 100명을 초대해 아이들에게 선물도 주고, 면장 추천을 받은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500만원씩 장학금도 수여하는 행사를 진행했죠. 사실 3년만 하고 그만두려 했는데, 막상 해마다 해온 것을 그만두기는 어려웠어요. 나로서는 자식의 도리로 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소문이 나자 군에서 우리 마을을 성균관장에게 추천해 각지에서 몰려와 선전을 해주고, 포상도 받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마을 사람들이 1만원, 5000원씩 자발적으로 980만원을 모아서 선산 공원 입구에 효비를 들여놓았어요. 마을이 효의 고장이니까 “마을 입구에 ‘효림원’이라고 세워 놨어요. 그때 어머니가 옥색 한복을 입고 꿈에 선명히 나타나시더니 ‘마을에서 이렇게 효비도 세워주고 행사도 열어줬는데, 너도 고마운 뜻을 표시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어요. 작은 유통업을 하던 나는 영농조합 농장을 하나 인수했어요. 그곳에서 생산하는 오이, 토마토, 배 등 농산물을 국가유공자 요양원이나 보훈병원, 군부대 등 10여 기관에 기증하고 있어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지역의 소득 증대도 되고, 고용창출도 되니 농민들이 굉장히 좋아합니다.
△ 권혁승 회장: 7년째 백교문학상 효친문학상 작품을 전국적으로 공모하는데, 글과 시 속에 효 사상, 효심 또는 모정이 깃들어져 있는 작품을 심사 기준으로 삼아 상을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잘 쓴 글이라도 사친과 관계없는 글은 입선이 안 되죠. 자식들은 부모가 그렇게 사랑을 줘도 사랑인 줄 몰라요. 일상에서 공기를 마시듯 깨닫지 못하는 것이죠.
강릉 시골 마을에다가 사모정 정자를 지었어요. 마을의 쉼터가 되라고. ‘사모정’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라 해서, 한쪽에는 도예 조각 하는 교수님의 작품도 세워 놨죠. 정자를 강릉시에 기증했는데 하고 나니까 주변에서 그 정자만 가지고 효 사상이 함양되겠느냐 해서 ‘사친문학상’을 만들라 하더라고요. 그걸 만들어 전국적으로 등단한 문인을 대상으로 작품공모를 하고 있어요. 거기다 이 사상을 전 세계에 알려야 되겠다는 의미를 담아 이라는 책을 만들었어요. 국내 200여 도서관에 비치했고, 영어판을 제작해 65개국 130개 도서관에도 전달했어요. 유엔, 세계은행에도 책이 있어요. 대통령, 교육부장관, 문화부장관 등에게도 돌리고, 오바마 대통령에게도 보냈는데 잘 전달이 됐는지는 모르겠어요(웃음).
작년에 사모정이 있는 공원이 너무 좁다고 해서 확장공사를 1년간 했어요. 높이가 3m인 고석에 ‘효 사상 세계화의 발원지 효향 강릉’이라 쓰고 밑에 영어로도 써놓았어요. 그 옆의 돌에도 효에 대한 글을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로 새겼어요. 오는 9월에 도 창간할 예정입니다.
1, 지리산 청학동서 세상을 만나다
필자는 촌놈이다. 지리산 삼신봉 아래 청학동 계곡에서 세상을 만나서다. 청학동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일원을 이른다. 삼신봉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기암괴석으로 둘러쳐진 계곡을 돌고 돌아 섬진강으로 이어진다. 하동읍까지 40리(약 15.7㎞), 진주시까지 100리(약 39.3㎞)다. 지금은 관광지로 많은 사람이 찾지만, 앞산 토끼와 뒷산 토끼가 서로 발맞출 수 있는 두메산골이었다. ‘정감록’을 비롯한 몇몇 옛 문헌에 신선들이 사는 이상향으로 등장한다. 청학이 노닐고 흉년, 질병, 난리가 없는 지상 낙원으로 신라 말기부터 전해오는 마을이다. 할아버지도 거창군 가조면 율리에서 그 이상향을 찾아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유불선합일경정유도교"의 신자들도 1960년대 초반부터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한복을 입고 결혼 전에는 댕기 머리를 땋고 결혼 후에는 남자는 상투를 틀고 여성은 쪽 지은 머리에 비녀를 꽂는 풍습의 도인촌이다.
이곳으로 이주한 조부모와 부모는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지었다. 계곡 주위의 다소 반반한 터를 잡아 다랑논을 만들었다. 어느 가을날 그 밭에서 일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빨치산에게 붙잡혔다. 부역을 시키거나 총살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소나무 둥치에 포박하여 둔 채로 그들은 떠나갔다. 어둠이 깔리자 두 분은 묶인 손의 밧줄을 간신히 풀고 일궈놓았던 논밭과 익어가던 곡식을 팽개친 채 빈 몸으로 10리(약 3.9㎞) 떨어진 대밭 몰이라는 아랫마을로 소개하여 삶의 터전을 새로 마련했다.
필자는 청학동서 배태하여 이곳에서 삼 형제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음력으로 1950년 2월 초나흘 새벽닭이 울 무렵이었다. 배냇저고리에 쌓여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곳에서 유소년시절을 보냈다. 끼니를 챙기는 어머니 곁에서 딸처럼 아궁이에 불을 지피어 드리기도 하고 들녘에서 나물을 캐기도 하였다. 닳고 닳은 놋쇠 숟갈로 감자 껍질을 벗겨드리기도 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동읍에 있는 하동중앙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등잔불을 켜고 살았다. 밤에 공부하고 나면 콧구멍이 까맣게 그을렸다. 등잔불에 넣을 기름도 40~ 50분 걸어가야 하는 면사무소 근처의 가게에서 기름때 진득하게 낀 됫병에 짚으로 꼰 새끼줄을 묶어 조심스레 들고 와야 했다.
어머니 나이 33세에 필자를 낳았다. 큰 형님과는 10세, 둘째 형님과도 6세 터울이다. 할아버지의 만류로 9세에 초등학교에 입학(1958)했다. 징검다리가 있는 개울을 건너 신작로 고갯길을 돌고 도는 1시간 거리에 있는 청암초등학교였다. 공부 잘하고 달리기, 웅변, 그림 그리기 등 모든 부분에서 두각을 보였고 전교 학생회장도 했다. 중학교 역시 수석으로 입학하였고 3년 동안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수재로 지역주민의 기대를 받고 자랐다. 중학교 때는 같은 학년의 친구 집에 입주하여 공부를 도와주고 숙식을 해결한 적도 있다. 중학생이 가정교사로 일한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모교 졸업식에서 축사한 특별한 경험이 있다. 동네 결혼식의 축사도 도맡아 했다.
2. “당신은 중책을 맡게 될 거야!”
거창대성고등학교를 졸업(71)한 후 72년 곧바로 국민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1학년을 마치고 공군에 자원입대하여 관제병으로 3년 만기 전역했다. 이후 77년 10월, 대학 졸업 직전에 쌍용그룹 고려화재해상보험㈜에 공채로 입사했다. 특종보험 언더라이팅 업무를 하다 기획조사부로 발령되어 신상품 개발 업무를 하여 국내 최초 골프보험, 낚시보험 등의 레저보험을 개발하였다. 79년 4월 15일, 다섯 살 아래인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다.
보험감독원 등 외부기관 연수에서 늘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재무부 장관 표창도 받았다. 83에는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보험연수소(SITC)를 수료(사진)했다. 중견 사원이 되었을 때는 운영상 문제가 있었던 제주지점, 대전지점, 동대문지점장으로 부임하여 업적을 크게 올렸다. 그런 덕으로 96년 초 직장의 별인 임원으로 승진해 부산, 경남, 제주를 관장하는 본부장(부산 주재)을 지냈다.
3, 47세에 용도폐기
호사다마라 했던가? 임원으로 승진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던 1997년 12월 말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 충격이었다. 나이 47세 때다.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으며 회사 일에 매달려온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한창 일할 나이였고 두 아들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아버지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필자에게 거는 기대를 생각하면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넥타이를 매고 정상 출근하듯 집을 나서 공원에서 배회하다가 퇴근 시간에 맞춰 귀가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필자가 바로 그 처지가 되었다.
4. “당신 제 명에 살게 하려고”
해임된 그 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떻게 아내에게 알려야 하나를 고민했다. 믿고 있는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망설여지기도 하였으나 그날로 아내에게 사실을 알렸다.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가? 서로를 알고 서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용기를 내어 알렸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일이어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잠시 시간을 보낸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참 잘 됐어요. 당신 제 명에 가게 하려고 하늘이 도왔나 봐요! 그동안 애 많이 쓰셨어요. 어디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우리 세대들이 다 그러했듯 나 역시 목표달성을 위하여 몸을 사리지 않고 밤낮으로 일했다. 거래처 접대와 직원 격려를 위한 회식 자리로 자정 무렵에야 겨우 혼자 살던 사택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가 제 명에 갈 수 없겠다 싶은 생각을 수차례 하였을 것이다.
5. “설상가상”, 이런 때 쓰는 말이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퇴직한 다음 해 IMF 위기가 닥쳤다. 먹고 사는 일이 걱정거리로 등장했다. 재취업하려 발버둥 쳐봤지만,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단계 모집 광고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런 현실은 분노를 부추겼고 속이 더 상했다. 분노를 일간신문 독자 투고란에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필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 마음을 비워가기 시작했다. 체면이나 자존심을 조금씩 버렸다. 그런 과정에서 마음을 가장 잘 가라앉혔던 생각은 “나의 직장 운이 거기까진 데 어이하겠어”라고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주어진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찾기 시작했다.
6, 마당쇠가 되다
생계유지를 위한 일을 찾아야 했다. 퇴직 6개월이 지나서야 고용노동부 고양시고용센터에 들러 실업급여를 청구했다. 처음엔 쑥스럽고 창피하여 신청을 미루고 있었다. 국민연금을 해지하여 생활비로 사용했다. 다른 보험도 모두 해지하였다. 그 후 별별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만화방을 창업했다. 누워서도, 엎드려서도 만화책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 도입으로 좋은 호응을 얻어 사업이 잘됐다. 수입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하여 라면을 직접 끓여 팔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대조류였던 PC방이 성업하면서 이 업종도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이 사업을 접고 경기 부천시 상동에서 부대찌개 음식점을 창업해 운영했다. 90% 이상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통계를 누누이 들으면서도 많은 퇴직자가 덤벼드는 것이 요식업이다. 필자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엔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회사 다닐 때 몸에 익힌 고객서비스 정신이 도움되어 친절한 음식점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수익이 괜찮아졌다. ‘이런 맛에 음식점을 하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몸이었다. 계속 아팠다. 특히 나이도 환갑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계기를 맞았다. 때마침 가게를 욕심내는 사람이 나타나 적정한 가격 협상 끝에 가게를 넘겼다. 그 후에도 먹고 살기 위해서 다양한 일을 이어갔다. 월 40만 원을 받으며 작은 회사의 조경관리사로 취업하여 매일 아침 긴 대나무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쓰레기봉투를 치우는 일도 하였다. 마당쇠가 된 셈이다. 대형 고깃집 일산한우마을 점장도 하였고 일당을 받기 위하여 MBC 드라마 ‘주몽’ 엑스트라 출연도 해보았다. 마음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경험이 되었다. 강의 콘텐츠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7, 친구의 비명횡사, 인생의 전환점 되다
57세 때 가까운 친구를 비명횡사로 잃었다. 두 살 아래의 직장 친구였다. 평소 술은 하지 않았고 담배도 수년 전에 끊어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추석 전날 다른 친구들과 남한산성에 올랐다. 산행 중 가슴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구급 차량을 불렀으나 고향 가는 차량 행렬에 막혀 늦게 도착한 119차량에 실려 가까운 성남시의 한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정말 황당했다.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퇴직 후 보낸 10년의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열심히 산다고는 했지만, 내로라할만한 일은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도 친구와 같이 무의미한 생을 마감하겠구나 싶었다. ‘100세 장수시대를 맞아 보람 있고 즐거운 생활을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제부터는 필자를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8, 60살에 사진 배우다
직장생활과 생업으로 잊고 있었지만, 은퇴하면 햇살 좋은 언덕에 캔버스를 세우고 수채화를 그리는 꿈을 꾸곤 했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필자가 사는 고양시에서 무료로 하는 사진강좌를 알게 되었다. 당시에 필자는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를 운영하면서 사진을 곁들인 글을 쓰고 있었다. 좀 더 좋은 사진을 생각하고 있던 때여서 강좌에 참여했다. 화필 대신에 카메라를 잡은 셈이다. 2010년 7월부터 한 달에 3회 6개월 강좌를 들었다. 필자 나이 60대 중반이었다. 사진에 특별한 재능이나 솜씨를 갖고 있지 않은 초보자였다. 카메라도 소형 디지털카메라 한 대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리산 청학동 계곡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감성과 초등학교 때 수채화를 그렸던 경험, 전 직장에서 맡았던 홍보 관련 일과 사보편찬 업무가 도움돼 일취월장했다.
사진 취미활동은 여가를 무료하지 않게 보내면서 건강도 챙기고 여러 사람이나 자연과 함께함으로써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게 했다. 때로는 작품으로 부가적 소득과 재능기부도 하면서 평생을 현역처럼 살 수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했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개월 뒤인 2010년 10월부터 공인 사진작가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일반인이 사진작가가 되는 길은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인정하는 전국사진공모전에서 입선 이상을 하여 획득한 점수가 50점을 넘겨야 했다. 입선하면 2점을 받는다. 일 년 동안에 28회 출품해 절반 이상 낙선하였으나 어쨌든 15회의 수상으로 사진작가 명함을 달았다. 첫 번째로 출품했던 제1회 너브내전국감성사진공모전에 ‘형상II’이 동상의 영예를 안겨주어 출발이 순조로웠으나 다른 공모전에선 잘 뽑히지 않아 포기할 생각도 수차례 하였다. 그러나 사진 자체가 재미있었다. 꾸준하게 찍으며 관련 서적을 사서 공부하고 기회가 되면 망설이지 않고 재능기부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년 만인 2013년 7월 국전인 대한민국사진대전에 ‘무한 질주’라는 작품이 입선했다. 2013년 10월에는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에서 주관한 ‘8만 시간 디자인공모전’의 사진 부문에 ‘몰입’이라는 작품이 우수상을 받았다. 11월에는 부산일보 주최 제21회 ‘부일 전국사진대전’에 출품한 ‘닭장’이 1,166점 중에서 좋은 심사평으로 2위인 우수상 영예를 안았다. 부산일보는 2013년 12월 26일 자 기사에서 이렇게 전했다. "변용도 씨의 우수상 '닭장'은 울타리 안에서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닭의 붉은 머리 부분을 어두운 배경에서 강렬하게 보여 주어, 닭의 모습에서 감옥에 갇힌 사회의 한 단면을 풍자하는 듯한 표현이 출중했다는 평을 받으며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9. 사진취미,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다
필자는 사진을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로 정의하고 ‘포토스토리텔러’라 자칭한다.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의 숫자가 37만 장이다. 카메라는 가장 아끼는 친구다. 늘 함께한다. 사진은 취미가 아닌 일상이 됐다.
사진 활동이 바탕이 되어 다양한 분야로 활동영역이 확대되어 다용도(多用途)로 후반생을 바쁘고도 보람 있게 산다. 사진이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었다. 필자는 그 텃밭에 글솜씨, 강의 솜씨를 추가로 뿌렸다. 그런 씨앗에서 싹이 돋고,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2008년에는 ‘미역국’ 외 다수의 작품으로 ‘순수문학지’ 신인상에 당선되어 수필가 명함을 달았다. 2012년에는 필자의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가 대한민국 100대 우수블로그로 선정됐다. 사진작가, 사진 칼럼니스트, 수필가, 저자, 강사(은퇴준비, 생애 재설계, 변화관리, 사진), 방송인(KBS 1TV ‘아침마당’, SBS라디오 ‘유영미 마음은 언제나 청춘’ 시니어리포터, 머니투데이 행복특강, 토마토TV 강연, 아리랑TV, CBS라디오, 한국직업방송), 기자(시니어조선 사진명예기자, 사회연대은행 KDB시니어브리지센터 두드림기자), 유어스테이지 시니어리더 겸 시니어리포터, ‘디카와 놀자’와 세화포토클럽 운영자다. 최근엔 경제신문 이투데이 자매지 브라보 마이라이프의 동년기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11월 ‘아름답게 보니 아름다워’, 2016년 1월 ‘카메라로 쓴 아름다운 이야기’를 출간하여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판매 중이다. 대우조선해양㈜와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 고려대 평생교육원 액티브시니어전문가과정 전임강사다.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 있는 우면청춘대학의 사진강좌를 2년째 맡아오고 있다. 사진이 근간이 되어 활동 영역이 확대되었다.
10. 도랑 치고 가재 잡다
대학을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경기 고양시 외곽의 한적한 전원 마을에서 자그마한 주택을 지어서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아니하여도 현실을 인정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일상을 즐긴다.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라고 한 어느 노부부 여행가의 생활 철학을 닮아가려 한다. 젊은 시절에 느끼지 못하였던 보람을 느끼며 산다. 전반생보다 후반생을 더 바쁘고 활기차게 보낸다. 그 바탕에 사진이 있다. 많지는 않아도 용돈도 번다.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형국의 삶을 산다. 2차 성장을 한 셈이다. 하버드대 성인발달연구소 윌리엄 새들러 교수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재창조하는 것이 인생의 2차 성장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제2의 절정기를 만들기 위해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변함없는 도전이다. 필자의 이름을 ‘변함없는 용기로 도전하는 남자’로 풀이해본다. 그런 덕분에 누구나 한 번쯤 출연해보고 싶은 KBS 1TV의 ‘아침마당’(2014, 11, 24)에 섭외를 받아 출연했다. ‘다시 시작하는 인생- 나의 두 번째 직업을 소개합니다’란 주제였다. 사진작가로, 은퇴준비강사로 안사람과 함께 출연해 삶의 정점을 새로 찍었다.
11,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세계적 사진작가 프랑스의 마크 리부가 있다. ‘에펠탑의 페인트공’, ‘꽃을 든 여인’ 등 유명한 작품을 만든 현존하는 사진작가다. 기자가 물었다. “선생님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어느 것입니까?” 리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일 찍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세계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작가이지만, 더 나은 작품을 얻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겠다는 꿈을 꾼다. 희망으로 산다. 진정한 대 작가의 마음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마음과 자세가 새로운 경지로의 작품세계를 창조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에 머무르지 않고 발전을 거듭하려는 삶의 철학이, 남이 넘볼 수 없고 흉낼 수 없는 작품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 여겨진다. 미래를 향해 또 다른 꿈을 꾼다. 필자 또한 늘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아직 오지 않은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도전의 발길을 멈추지 않으련다. 또한 하늘이 인생의 구석구석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경험과 지혜를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아낌없이 다 쓰고 가리라.
생물학적 수명은 늘어나고 사회적 수명인 정년은 점점 짧아지면서, 제2 인생을 준비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두 번째 인생을 위해서는 경제적 자유, 즉 은퇴자금 준비가 중요한 문제이지만 제2 직업은 더 중요하다. 시니어들의 이러한 요구에 발맞춰 여러 민·관 기관에서 제2 직업에 관한 다양한 안내와 새로운 직업 소개를 하고 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기보다 교육과 준비과정을 통해 새 인생에 어울리는 새로운 직업을 알아보는 것은 어떨까?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최근 제2 직업을 위해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시니어들과 이들을 대상으로 구인 활동을 펼치는 업체나 기업을 살펴보면 현실과 괴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장년들의 일자리를 위해 노사발전재단이나 대한상공회의소, 중소기업중앙회,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경영자총협회, 대한은퇴자협회 등 여러 기관에서 중장년 일자리 희망센터를 전국 단위로 운영하고 있다. 이 일자리 희망센터를 이용하면 구인구직 정보에서부터, 교육 프로그램, 관련 컨설팅 서비스까지 받을 수 있다.
시니어 구인구직 단순직종에 집중
문제는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되는 직업이나 일자리가 시니어들이 원하는 수준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일자리가 경비직이나 청소, 택배와 같은 단순 노무직이고 그나마 이런 일자리의 대부분은 40대를 우선적으로 선호한다. 연령이 높은 시니어들에겐 순서조차 돌아오기 힘들다.
도심권50플러스센터의 정현주 대리는 센터가 최근 사회공헌형 일자리로 사업 방향을 옮긴 것도 이런 현상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경제적으로 자유롭거나 노후 자금이 해결된 시니어들은 단순직 일자리를 원치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대부분 그간의 경력을 살릴 수 있거나 새로운 일자리를 통해 경제적 소득보다는 보람을 찾으려는 분들이 많아요. 수고를 인정받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뜻이죠. 저희 센터에서는 이런 시니어들의 요구에 맞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현장에서 활동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 센터에서 준비하는 직업들은 경제적 소득보다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지원이나 참여 시니어들의 자부심 확보에 중점을 두고 있다.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 중에는 건강코디네이터 양성 과정이 있다. 지역 치매센터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도 인지장애(초기 치매) 노인들을 대상으로 상담과 인지학습 역할을 할 사회공헌 활동가를 양성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밖에 바른먹거리전문가 양성과정은 유치원 등 각 교육기관의 학생과 학부모에게 먹거리에 관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전문가를, 다문화가족 서포터스 양성과정은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요청을 받아 한국생활 정착의 멘토 역할을 할 지원자들을 교육하고 있다.
수익보다 보람과 자부심 얻을 수 있어야
지난해 도심권 50플러스센터를 통해 SNS전문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종로지역자활센터 등에서 강사로 활동 중인 김희순씨(64)는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시니어들에 대한 직업 교육은 지식 전달뿐만 아니라 삶의 활력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어요. 재능기부를 통해 교육생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줄 수도 있고, 사회에 기여한다는 자부심도 갖게 됐습니다. 예전엔 손주들이 와이파이 터진다고 하면 뭐가 터졌냐며 놀랄 정도였지만, 이제는 대화도 통하고 생활이 달라졌어요.”
물론 일자리나 전문가들을 양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현장에선 이야기한다. 기본적으로 실업난을 겪고 있는 청년들의 일자리와 겹치게 되면 사업 자체의 정체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고, 현장에서 원활하게 일할 수 있도록 활동 무대까지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회적으로 자리 잡은 성공적인 직업에 정리수납전문가가 있다. 정리수납전문가는 여성발전센터, 여성인력 개발센터 등을 통해 민간에 알려졌다가 현재는 협회까지 설립됐다. 한국정리수납협회의 정경자 협회장은 이렇게 조언한다.
“정리수납은 보통 팀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혼자 활동하기 어려운 시니어, 특히 여성들에게 적합한 직업입니다. 평생 살림을 해온 분들은 원칙과 이론을 알려주면 금방 익숙해지거든요. 이렇게 새로운 직업을 만들거나 창업하려면 좋아하는 일보다는 잘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좋습니다. 소비자를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하니까요.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의 전문성, 문제를 해결할 창의성, 구성원과 소비자를 대할 인성을 갖추고 있는지 늘 끊임없이 점검해야 합니다.”
찾을 수 없다면 창직(創職)도 방법
새로운 직업에 대한 단서가 필요하다면 한국고용정보원(www.keis.or.kr)을 노크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곳에선 제2 직업을 필요로 하는 중년들을 위한 자료를 연구하고 개발해 보급하고 있다. 올해 3월에 발간된 자료집 이 대표적이다. 이 책은 인생 2막을 설계하는 베이비 부머들이 도전하기에 적합한 직업 30개를 선정해 하는 일을 소개하고 해당 직업을 가지려면 무슨 준비를 해야 하는지 등을 알려주고 있다. 또 지난 5월부터는 중장년층의 창직 활동을 돕기 위한 라는 지침서를 배포 중이기도 하다.
# 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뉴욕 맨해튼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볼링그린공원과 월스트리트의 상징인 돌진하는 황소 동상 바로 길 건너에 위치한 뉴욕시립대학교. 아침 10시 무렵이 되자 세련된 차림새의 신중년들이 삼삼오오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웅장한 대리석 건물 안으로 느긋하게 들어간다. 주변에 밀집해 있는 글로벌 금융기관의 고위직 인사들처럼 보이지만 평생교육원에 등교하는 학생이자 교수들이다. 배우, 심리학자, 엔지니어, 의사, 교수, 언론인, 관료, 금융전문가, 기업인, 음악가, 미술가 등 전문직업인으로 맹활약을 했던 은퇴자들이다. 틈틈이 일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여유로우면서도 열정적인 은퇴생활을 누리고 있는 신중년들이다.
스스로 가르치며 배우는 평생교육원 ‘퀘스트(Quest)’. 학교명처럼 진리 탐구를 갈망하는 신중년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배움터이자 아지트다. 취미활동과 문화 탐방 여행과 친밀한 교우관계가 함께 어우러지는 종합 커뮤니티 기능을 하고 있다. 안내서에 나열된 올해 봄 강좌가 얼른 봐도 30개를 넘었다. 고대 그리스, 마음과 뇌, 시 낭송, 클래식 록 앨범, 현대 오페라, 위대한 연극, 현대 단편소설 등 웬만한 대학 강좌보다 수준이 높지만 교수가 따로 없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서는 ‘교수’와 ‘학생’의 구분이 없고 모두 ‘회원’으로 통한다. 내로라하는 전문가 출신 회원들이 직접 강의를 하고 관심 있는 회원은 강의를 신청해 수강을 하는 자급자족 방식이다. 현역 때는 배우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부득이 접어야 했던 학업과 취미와 봉사활동으로 호사를 누릴 수 있는 프로그램이 눈에 많이 띈다. 2주에 한 번은 외부 특별 강사를 초빙하여 지적 탐구심을 더 높이곤 한다. 1년 3학기제로 운영되며 가끔 숙제는 있지만 시험이나 출석 점검은 없다. 한 과목만 수강하나 전 과목을 다 수강하나(물리적으로 불가능) 1년 회비는 500달러. 등록금은 물론 없다.
강좌 개설을 포함한 퀘스트 운영의 거의 모든 사항은 협의회와 분과위원회에서 결정된다. 협의회는 회원들 중에서 선출된 임원 7명과 재정담당관 등 4명의 교직원으로 구성되고 2년 임기의 회원 대표가 회의를 주재한다. 산하 4개 위원회는 회원들로만 구성돼 강좌 개설, 교육자재 관리 및 섭외, 회원 관리, 각종 행사 기획 및 일정 조정 등을 나눠 담당하고 있다. 뉴욕시립대학은 장소와 행정적 도움만 줄 뿐이다.
오는 5월이면 개원 21돌을 맞는 퀘스트의 출범 내력을 알고 나면 이런 자율적인 운영 시스템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명성 있는 뉴욕의 은퇴자 교육기관이 은퇴자들의 생각과 입장을 배려하지 않고 입학 절차와 학사 관리를 매우 까다롭게 하면서 등록금까지 높이 책정하자 40명이 함께 탈퇴해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것이 1995년.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함께할 수 있는 교육기관을 백방으로 물색하던 차에 뉴욕시립대학과 뜻이 맞아 새로운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자유의 여신상이 바라다보이는 아름다운 배터리파크를 여유롭게 산책할 수 있는 맨해튼 최고의 위치에 자리한 퀘스트는 자율적인 평생교육을 갈망했던 40명의 결단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산물이다.
새로운 이념으로 퀘스트의 설립을 기초한 40명 가운데 로버트 하트만 회장을 비롯한 10명은 지금도 퀘스트의 열렬 회원이자 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다. 창립 회원인 샌디와 앨 고든 부부는 매년 발간하는 종합 문예지 20주년 기념 특별판 기고문에서 “퀘스트와 함께한 지난 20년은 결코 지루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우리 은퇴자의 꿈은 따뜻한 햇볕을 쬐고 놀이와 내기나 하면서 소일하는 것이 아니라 열정적이고 모험적인 사람들과 함께 지식을 넓혀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캐롤 아브람스, 스텔라 체이스, 베버리 프란쿠스, 에버린과 러셀 굿 부부, 조 나탄 등 다른 창립 회원들도 퀘스트에 대한 자부심과 만족감이 대단하다.
멤버십 위원회의 에바 샤트킨 위원장은 퀘스트를 찾는 방문인을 일일이 안내하는 가이드 역할을 맡고 있다. 설립 때의 초심을 지키기 위해서다. 샤트킨 위원장은 한국인 학생을 수양딸로 맞이해 함께 살며 교육시켰을 정도로 한국과 깊은 인연이 있다. 수양딸은 훌륭히 성장해 지금은 뉴욕대학(NYU)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해외에서도 교직생활을 한 국제적인 영어 교육자인 샤트킨 위원장은 구순을 훨씬 넘겼는데도 거의 매일 배우고 봉사하고 있다. 구순을 넘긴 회원은 보통이고 백세를 넘긴 회원도 지하철로 등교하기도 해 배움이 회춘의 비결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무급으로 봉사하고 있는 마이클 웰르너 원장은 “퀘스트의 평생교육에 참여하고 싶은 은퇴(예정)자가 인터넷이나 전화로 방문신청을 하면 하루 일정으로 강의도 듣고 회원들과 자연스럽게 교류도 하면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한다”고 말했다. 웰르너 원장은 자택을 방문한 귀한 손님을 맞이하듯 시설과 운영방식을 친절하고 상세히 안내했다.
회원들이 가장 신나는 시간은 함께 창작활동을 할 때다. 한때 에미상 후보에까지 올랐던 유명배우인 도미니크 치아네스와 로이 클레어리 회원이 지도하는 연극 시간이면 모두 브로드웨이를 꿈꾸는 배우로 변신한다. 해마다 작품을 무대에 올릴 때면 온 가족과 친지들이 관객으로 참석하면서 흥겨운 잔치판이 벌어지고 회원은 현실에서도 주인공이 된다. 연극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도나 루벤스 회원이 건강 악화로 정기 공연을 놓쳐 몹시 안타까워하자 집을 방문해 즉석 공연을 했던 일화는 어떤 연극보다 더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날씨가 나쁘지 않은 금요일이면 이스트강변 89번가의 콩츠마켓(Conte’s Market)에서 퀘스트 회원들이 연주하는 포크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문예지 발간은 소설가와 시인을 꿈꾸었던 회원들이 주도하고 있다.
퀘스트에서는 수학여행과 현장학습이 수시로 있다. 뉴욕현대미술관(MoMA),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익스플로러클럽 등 주변에 즐비한 미술관과 박물관은 언제 들러도 즐겁고 배울 게 많은 현장학습장이다. 나이아가라폭포, 재즈와 ‘욕망의 이름이란 전차’와 프렌치 쿼터의 도시 뉴올리언스와 미국 전통의 여름철 문화교육타운인 이리호 남단의 쇼토쿼(Chautauqua)는 단골 수학여행지다.
여행전문가인 캐롤린 맥과이어 회원은 5월로 다가온 런던 수학여행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으면서도 8월 수학여행지를 어디로 할지 고심하고 있다. 다채로운 여름축제가 벌어지는 캐나다와 기네스맥주를 즐길 수 있는 아일랜드를 놓고 회원들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있다. 물론 회원들이 좋다면 두 곳 모두 갈 수도 있다. 여름 내내 여행 다니기를 좋아하는 회원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회원들은 학창 시절처럼 수학여행을 고대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수학여행에는 가족도 참가할 수 있어 더 신나고 추억거리도 넘친다.
뉴욕시립대학교와 교육이념에서부터 학사와 재정 관리에 이르기까지 호흡이 척척 맞아 이제는 회원이 230명을 넘어섰다. 평생교육의 새 장을 열고 있다. 요즘 퀘스트에는 성공비결을 배우기 위해 방문하는 해외 귀빈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평생교육이 국가의 주요 이슈로 부각되면서 묘책과 대안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저 어울려 배우고 교류하는 커뮤니티일 뿐인데 해외에서까지 관심이 쏟아지니 회원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신이 난다.
지난해 9월에는 태국 총리 부인인 나라폰 찬오차 교수를 단장으로 한 태국 사절단이 방문했고 은퇴를 앞둔 캐나다의 리차드 솔터 변호사는 4년째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어 평생교육에서도 글로벌화가 진행되고 있는 분위기다.
‘놀면서 배우는 것(Play and Learn)’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만 적용되는 교육이념이 아니다. 배움의 열정은 나이와 무관하고 호기심은 나이가 들수록 커진다는 진리를 퀘스트에서 깨닫게 된다. “배움이 없는 자유는 언제나 위험하고 자유가 없는 배움은 언제나 헛되다(Liberty without learning is always in peril and learning without liberty is always in vain)”라는 케네디 대통령이 미국인들에게 남긴 교훈을 퀘스트가 실천에 옮기고 있다.
나이 들수록 지식을 뽐내기보다는 지혜(智慧)를 나누고 덕(德)을 베풀었을 때 자연스레 교양이 묻어난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지혜와 덕은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교과서나 시험도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생의 큰 숙제와 같다. 해결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동안의 소양과 더불어 끊임없이 공부하며 그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체력(體力)이다. 몸이 건강해야 정신과 마음이 건강한 상태로 오랫동안 인생 공부를 해나갈 수 있겠다. 교양 있는 중·장년의 삶을 위해 ‘지덕체(智德體)’를 향상할 수 있는 배움의 장을 살펴봤다.
◇ Chapter 2. 서울시민대학에서 德 학점 올리기
서울시는 시민에게 풍성한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서울시민대학’을 운영한다. 2013년 시작해 인문학적 성찰, 시민 민주주의, 삶의 터전, 예술적 감성 등 총 379개 강좌에 교육 인원 2만693명(연인원 8만6363명)이 수강하는 등 인문학 교육을 통해 성숙한 시민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배움의 장을 마련해왔다.
‘서울시민대학’은 시민청, 뚝섬 학습장(방송통신대 서울지역대학), 은평·중랑 학습장, 대학연계 시민대학(14개 대학 학교별 강의장)에서 2016년 상반기 114개 강좌를 3월에 개강하며, 하반기에는 230여 개 강좌로 확대할 예정이다. 서울 시민이라면 누구나 무료로 수강 신청할 수 있도록 서울시 평생학습포털 사이트(sll.seoul.go.kr)를 통해 온라인 선착순 모집한다. 세부강좌는 서울시평생학습포털에서 확인 가능하며, 수강 신청은 3월 8일 10시부터다. 3월 22일 시민청 시민대학부터 강좌별 순차적으로 개강한다.
서울시민대학의 시민청 시민대학은 유명 강사의 재미있는 대중 인문강좌를 들을 수 있고, 은평학습장은 평생교육사, 예술지도사 등 전문가로 성장하고 싶은 시민들에게 전문가 역량 강화 교육을 제공한다. 뚝섬· 중랑 학습장은 평생교육시설이 부족해 학습기회가 적은 일반시민들에게 시민공동체과정, 부모교육 등 생활 속 인문강좌를 진행한다. 또한 시민 누구나 더 가까이 인문 심화강좌를 들을 수 있도록 서울시와 협력을 맺은 대학교 내에서 대학연계 시민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대학연계 시민대학은 2013년 3개 대학이 서울시와 협력운영하여 11개 강좌 365명이 수강했고, 2015년에는 14개 대학 69개 강좌에 2885명이 참여하는 등 8배가량 학습자가 늘었다. 각 대학의 특성을 반영한 다양한 인문 전문강좌에 대해 학습자들의 만족도가 높았던 덕분이다. 이러한 학습자들의 요청에 힘입어 하반기에는 운영대학을 20개 대학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서울시민대학은 학습자에게 배움의 즐거움을 주는 한편, 학습매니저에게 평생교육 전문가로 성장의 기회를 주고, 대학 등 민간 평생교육기관과 협업하는 등 지역사회 환원활동도 해나가고 있다.
‘나를 위한 글쓰기’ 수강생들이 말하는 ‘서울시민대학’
나를 위한 배움을 통해 만난 ‘진짜 나’
경희대에서 ‘나를 위한 글쓰기’를 수강한 50대 김혜순씨는 “대학을 졸업한 지 20~30년이 넘은 중·장년에게 필요한 공부를 선택해 들을 수 있었던 점이 좋았다. 대학 캠퍼스를 다시 거닐어 보는 낭만도 만끽하고, 다시 배움으로써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한다”며 “중·장년이 30% 정도 되는데, 함께 배우는 분들의 의지는 매우 강했다. 처음엔 문단의 개념이나 글의 전개 방식 등에 대해 전혀 몰랐던 동료가 강의를 거듭하면서 눈에 띄게 발전했다. 칭찬을 많이 받고 글로 상을 받는 분들이 늘어났고, 80세에 가까운 어르신은 구술로 전환하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서울시 메일링 서비스를 통해 서울시민대학을 알게 된 60대 김모씨는 “다양한 강좌들이 무료로 진행된다는 점이 정말 좋았다. 강사진과 커리큘럼도 마음에 들었다”며 “앞으로도 이러한 강좌를 지속하고, 많은 이들이 참여한다면 고령화사회를 맞이한 노후에도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소감을 말했다. 특히, 그녀는 ‘나를 위한 글쓰기’를 통해 진짜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었다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동안 잊고 지낸 시간을 되새김하며 치유하지 않고 묻어버린 상처와 아픔, 그리고 기쁨도 다시 찾게 됐다. 학기가 끝났지만, 수업 시간 내에 다 쓰지 못한 나의 이야기를 지속해서 써나갈 수 있도록 격려하는 벗이 생긴 점도 감사하다”며 글쓰기를 통해 건강한 삶을 살아가고 싶다고 바랐다.
학습매니저 이서연(52)씨가 말하는 ‘중·장년 학생들의 학구열’
노력·열정·배려 속에서 발견한 중·장년의 기품(氣品)과 기쁨
서울시민대학에서는 강사와 학습자가 더 잘 소통할 수 있도록 새로운 교육전문가인 학습매니저가 함께하고 있다. 이들은 학습자료 준비, 강의실 및 출석 관리뿐만 아니라 시민대학과 학습자, 교수와 학습자를 이어주는 소통창구 역할을 한다. 학습현장에서 수강생들의 건의사항이나 고충을 듣고 처리하기도 하지만, 수업에 대한 만족도와 반응도 가장 직접적으로 듣고 학습동아리나 커뮤니티 형성을 도와준다. 지난해 홍익대학교에서 학습매니저로 활동했던 이서연(52)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녀는 학습매니저와 담당 교수들이 가장 놀라워한 것은 중·장년 수강생들의 노력과 열정이라 말했다.
“교수님들은 학습자들의 진지한 수업 태도에 찬사를 보냅니다. 일반 대학생을 상대로 강의할 때는 정해진 커리큘럼이나 학점 이수를 목적으로 수업을 듣기 때문에 태도나 열정이 덜하다고 해요. 그런데 이분들은 정말 자기가 원해서 스스로 좋아하는 강의를 찾아오신 거잖아요. 수업 몰입도도 대단하고, 예습 복습도 철저하게 해오니 수업의 질도 높아졌죠.”
수업에는 중·장년뿐만 아니라 학생이나 청년들도 참여한다. 소모임을 만들거나 SNS를 통해 젊은이들과 배움을 나누는 등 세대 간 훈훈한 사례도 많다고. 나이가 적고 많고를 떠나 한 학기를 동기라는 이름으로 어우러지며 나아가 인생 선배들의 따뜻한 배려로 함께 한다.
“질문이 많아지면 진도가 더디게 나가는 경우가 생겨요. 중·장년 학습자들은 주로 쉬는 시간이나 수업이 끝나고 궁금했던 것들을 털어놓으시죠. 양보하고 배려하는 모습에서 교양과 기품이 묻어나더라고요.”
겉으로는 차분하지만 그 속에는 배움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다. 만족스러운 그들의 표정을 볼 때 가장 보람을 느끼는 이씨다. “거동이 불편하신 70대 남자 학습자분이 있었는데, 수업을 빠짐없이 들으셨어요. 같이 수강한 분들이 모두 격려의 박수를 쳐드렸어요. 학습자 자신도 굉장히 뿌듯해하고 기뻐하죠. 마지막 질문은 대개 ‘언제 또 하느냐’예요. 중·장년의 배움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죠.”
어떤 병에 대해서 민간 속설이 많기도 하다. 비뇨기과에서 대표적인 예는 소변발(소변 줄기의 세기)과 정력에 관한 속설인데, ‘뭐, 나는 젊었을 땐 저기 5미터 앞에 있는 자갈돌도 맞혀서 튕겨냈지…. 그러니 밤일은 말할 것도 없지 뭐야. 허허.’ ‘술이 좀 취하면 친구들이랑 전봇대 맞히기 놀이를 했는데, 내가 쏴댔더니 거기 금이 가더라고.’ 등등. 소변 줄기가 센 것이 마치 정력이 좋은 것인 양 은근히 자랑하는 말들을 많이 한다.
그렇다면 이런 말들이 의학적으로 근거가 있는 것일까? 일단, 답부터 말하자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뭐 그런 답이 있느냐고 물어보신다면…. 남성은 남성으로서 반드시 있어야 할 성호르몬인 남성 호르몬 때문에 일생에 걸쳐 다양한 건강상의 변화를 겪는다. 특히 이 남성 호르몬은 성적인 기능도 조절하고, 전립선이라고 하는 정액의 성분 일부를 만들어 내 정액에 포함된 면역 성분, 항염 성분의 중요한 소스가 될 뿐 아니라, 성적 흥분 상태에서 사정이 되기 전에 나오는 소량의 분비물의 형성에도 관련 있는 중요한 기관이다. 사실 남성호르몬-전립선-고환은 남성으로 살아가는 데 대단히 중요한 요소들이다. 그런데 이중 남성호르몬은 안타깝게도 평생 쭉 적당한 수치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의 남성들이 온몸으로 경험했듯) 사춘기에 최고조에 달했다가 30대 이후부터는 서서히 감소하게 된다.
신기한 것이 같은 나이의 모든 남성들이 같은 수치의 남성 호르몬을 유지하고 있지는 않다. 사실 요즘 유행하는 키 크고 야리야리하며 예쁘장하게 생긴 유형의 남성들은 정상치이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낮은 남성 호르몬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반대로 삼국지의 장비 같은 유형의 덩치가 크고, 키는 크지 않지만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성들은 남성호르몬 수치가 상대적으로 높을 가능성이 높다. 남성호르몬이 높으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지만, 40대 넘어서 생기는 제일 번거로운 문제인 전립선 비대증의 발생은 남성호르몬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전립선 비대에 걸릴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이다.
이 전립선 비대에 걸리면 소변 줄기도 약해지고 시원하게 볼 수 없다. 여기에 또 하나 생기는 문제가 성생활에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립선의 위치가 소변을 담고 있는 방광과 소변이 나가는 통로인 요도 사이에, 마치 우리 목구멍에서 아래로 식도와 기도로 연결되는 곳에 편도선이 생기는 것처럼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전립선 비대가 생기면 통로가 일부 좁아져 소변을 보거나 참는 데에도 문제가 생기지만, 사정을 할 때 정액이 분출되는 상황도 많은 저항을 받아 전처럼 시원하게 사정이 잘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 엎친 데 덮친다고 소변도 잘 나오지 않고, 사정할 때도 시원하지 않은 증상에다 아이러니하게도 40대부터는 급격한 남성호르몬의 감소로 성욕도 떨어지고 발기도 잘 안 되는 다양한 성적 문제가 나타나니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상황이 돼 버린다.
실제로 미국과 유럽 등 여러 나라에서 전립선비대증 환자들의 성생활을 조사해본 연구에서는 소변을 보는 문제도 괴롭지만, 성생활도 만족스럽지 못하고, 더불어 파트너 역시 만족하지 못한다는 결과가 보고됐는데, 이런 것들을 종합해 보면 ‘소변 줄기 = 정력’ 이라고 직접적으로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소변의 문제가 생김 = 성생활에도 영향을 줌’의 관계는 성립한다고 할 수 있겠다.
잘 알려진 발기부전 치료제인 PDE5 억제제(상품명으로는 비아그라, 시알리스, 88정, 해피그라, 엠빅스 등등 다양한 이름으로 국내에서 처방되고 있다)가 전립선부 요도의 긴장을 풀어주고, 저용량 매일 요법이 발기부전의 예방, 치료에 더 효과적이라는 연구들이 속속 보고되고 있다. 이에 따라 요즘의 치료 경향은 ‘전립선 비대증 치료제 + 저용량의 발기부전 치료제’를 매일 복용하는 식으로 일거양득의 효과를 노리는 경우가 차츰 많아지고 있다.
남성호르몬 보충 치료는 어떨까? 전립선 비대 치료를 위해서는 남성 호르몬을 억제해야 하고, 발기부전이나 조루 같은 성기능 문제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남성호르몬을 올려줘야 한다. 따라서 전립선비대와 발기부전 예방 혹은 치료를 위해서 남성호르몬을 억제하거나 보충하는 것은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럼 도대체 ‘나는 전립선 문제로 치료받아야 할 상황인지, 지금 내 남성호르몬은 정상적인 수치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면 아래의 사항이 자신에게 해당되는지 찾아보자. 한 개 이상에 해당되면 비뇨기과 상담을 한번 받아볼 것을 권한다.
특히,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 복부비만(허리둘레 90cm 이상), 의학적 비만 (체질량지수 25kg/m2 이상) 중 세 개 이상에 해당된다면 대사증후군으로 진단하는데, 대사중후군이 있을 경우 전립선이나 발기부전과 같은 성기능 문제는 더 잘 생기고 향후 악화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관리를 잘 해야 하므로 전문의의 상담을 반드시 받아 볼 것을 권하고 싶다.
>>> 윤하나 이대목동병원 비뇨기과 교수
대한성학회 상임이사, 대한여성 성의학 연구회 학술이사, 대한요실금배뇨장애학회 교육이사를 맡고 있으며 저서로는 , 와 공동저서 등이 있다.
미술 작품이 여기저기에 걸려 있고, 아름다운 재즈 선율과 즐거운 웃음소리가 흐르는
이곳이 ‘남자만을 위한 요리교실’?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남자의, 남자에 의한, 남자를 위한 요리교실인 행복남 요리 교실의 모습.
쿠킹앤 행복남 요리교실은 복잡한 레시피에 지친 남자들을 위해 쉬운 요리 방법에
특유의 센스를 더한 수업으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요리를 통해 삶을 한층 풍부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맛과 멋을 아는
남자들의 요리교실을 살펴보았다.
밤섬과 한강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서울 마포구 상수동에 위치한 쿠킹앤의 행복남 요리교실은 남성들만을 위한 특화된 요리교실로 유명하다.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나 임직원, 대학교수, 금융기관 은퇴자 등 사회 고위층 남성들이 주 수강생이다. 한희원 행복남 요리교실 대표는 SK, 도래이첨단소재, 신한은행, 롯데 등 기업들과 함께 ‘쿠킹&팀워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요리에 소외된 사람들을 중시하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개인보다는 조직을, 그리고 요리 교육에 쉬이 접근할 수 있는 여자와 아동을 빼면 청소년과 남자가 남더군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요리 교육은 힘들 것 같았습니다. 남자를 대상으로 하는 요리 교육을 하자고 결정하게 됐습니다. 요리를 배우려고 찾아봤는데 자격증 위주로 된 곳만 많다는 하소연도 그 결정에 한 몫 했죠.”
여자의 요리는 직관적, 남자의 요리는 매뉴얼적
한희원 대표가 작금의 남자 셰프 붐보다 앞서서 ‘남자를 위한 요리교실’을 만들기로 한 것은 블루오션을 찾기 위한 모색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게 어느새 3년 차.
“주 연령대는 40대 후반부터 50대 이후가 많습니다. 그 정도 나이대가 되어야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게 가능해져요. 교육은 1조를 2인에서 4인의 구성으로 만들어 진행합니다. 너무 인원이 많아지면 교육의 의미가 없거든요. 그리고 남자분들은 손이 많이 가요(웃음).”
한 대표는 여자들은 요리를 직관적으로 많이 하는 편이라고 평가했다. 여자인 만큼 요리에 관해서는 살아오면서 봐온 것이 많기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의외로 여자들 중에서는 레시피대로 안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반면 남자들은 레시피의 토씨 하나도 안 틀리고 그대로 하려고 한단다. 또한 요리에 대해 계속적인 관심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요리는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남자의 비법
“저희는 남자들이 요리를 배워서 집에서 계속 요리를 하게 만드는 게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봅니다. 그래서 남자가 요리로 가족이나 지인들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실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일수록 가정에서는 헛돌게 되기 마련이다. 아버지들이 겪어야 하는 주말의 집안 풍경을 떠올려 보자. 아이들은 모두 스마트폰만 보고 있고 아내는 아내대로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 고된 노동의 나날을 마치고 얻게 된 쉬는 날, 아버지가 가정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집에 있어도 자신은 없는 존재 같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 현실을 극복하고 가족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요리다. 그래서 한 대표는 ‘요리를 한 가지라도 하셔라’라고 말한다.
“그래서 일상식 계열보다는 스페셜한 이벤트성 요리를 가르칩니다. 만들어서 내놨을 때 가족들이 ‘우와, 이걸 아빠가 했어’ 하는 그런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요리 말이죠. 남자는 리액션이 있어야 의욕이 생기거든요(웃음).”
한 대표는 일상식으로서의 밑반찬은 만들기가 의외로 어렵다고 설명했다. 매일 먹어도 물리지 않는 맛의 요리가 나와야 할 텐데 그 맛이 안 날 수도 있고, 그러면 좌절하게 되고 요리에 관한 관심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관심이 생기면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법이다.
요리를 통해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
한 대표는 남자 요리교실이 단순히 요리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양한 문화를 접하게 하기 위한 준비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저희들은 요리하는 사람이지만 요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요리를 갖고 무얼 하느냐가 중요하죠.”
한 대표의 기억에 남는 수강생 중 70대 CEO가 있다. 부인이 몸이 안 좋아진 상황이었고, 개인적으로 요리를 배우고 싶었는데 일 때문에 못한 이였다. 그는 70대라는 나이가 되니 부담 없이 갈 데도 없어진 상황에서 소개를 받고 요리교실에 들어오게 됐다.
그의 집에는 주말이면 아들이 며느리와 함께 방문한다. 그런데 며느리가 음식을 안 해서, 결혼 후에 단 한 번도 며느리의 요리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요리교실을 다니게 된 후, 하루는 주말에 그가 요리를 해서 아들 부부에게 내놓았다. 의외의 상황에 며느리가 깜짝 놀랐다. 더군다나 맛있기까지 했다. 며느리는 ‘제가 해야 하는데…’라며 말을 흐렸다. 그러나 이내 분위기는 굉장히 좋아졌고 그 다음 주에는 아들의 결혼 이후 처음으로 며느리가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게 됐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할 줄 아는 감식안 있어야
남자요리가 콘텐츠의 대세가 된 현재를 한 대표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녀는 요리에 대해 쉽게 접근하자는 관점은 좋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염두에 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요리를 할 때는 제철 식재료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먹거나 만드는 음식에 뭐가 들어가는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좋은 것이 뭔지, 나쁜 것이 뭔지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요즘 트렌드는 너무 간결하고 빠르게 만든다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그 부분이 취약해지고 있어요. 모르면 속게 되어 있어요. 요새는 먹거리로 장난을 많이 치니까요.”
한 대표는 요리교실의 미래를 소통이라는 키워드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밥상에 소통을 더하다’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기도 한다. 한국인이면 밥은 삼시세끼를 먹게 된다. 한 대표 생각에는 하루에 세 번이라는 그 좋은 소통의 기회를 사람들이 잘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뺏어먹을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먹느라 소통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밥 좀 처먹지 마세요(웃음).’ 함께 먹는 사람을 생각해야죠. 아무 말도 없이 밥만 먹는 사람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겠어요? 그런 사람을 보면 밥맛 떨어진다고 하죠. 배려하지 않는 식사이기 때문이에요. 그게 비즈니스 자리라면, 거래는 끝난 거나 마찬가지죠.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의 한국 남자 직장인들은 그렇게 먹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못 먹어서 밥을 먹는 게 아니잖아요? 맛집을 찾아가면 뭐해요? 거기 가도 그렇게 먹을 텐데. 뭘 먹었는지 누구와 먹었는지 기억 못하는 사람이 많아요.”
요리로, 식사로 소통할 줄 아는 사람이 되자
한 대표는 식사가 곧 소통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도 실천을 못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좀 더 주어진 것을 즐기고 소통을 즐기라는 게 그녀의 조언이었다.
“왜 공기밥은 맛없을까요? 꾹꾹 눌러 담아서 그래요. 그래서 저희는 밥 푸는 법도 가르쳐요. 주걱으로 던지듯이 퍼담는 건 안 되죠. 아래 위를 잘 섞어서 공기가 잘 들어가도록 토실토실하게, 밥알을 살리듯이 담아야 합니다. 그러면 ‘아 옛날에 어머니가 이렇게 담았지. 복 들어가라고’라며 새삼 깨달으시더군요.”
남자들에게 ‘요리’가 단순히 음식을 만들거나 끼니를 때우기 위한 행동을 넘어 가족 간의 사이를 좁혀주는 ‘소통’이며 70 평생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던 주방을 기웃거리게 만드는 ‘관심’이고 서툴지만 정성 가득한 한 상을 아내에게 바치는 ‘희생’이 될 수 있다는 걸 한 대표는 보여주고 있었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닌 상대를 위해 만드는 즐거운 놀이로서 요리에 접근해보자. 삶의 변화와 기쁨이 보장된, 그것만큼 즐거운 놀이가 어디 있을까?
30~40년 전까지만 해도 이상헌의 칼럼이 실리지 않은 여성지가 없었다. 세계일보 칼럼 1000회를 기해 시작한 ‘기쁨세상’은 한 달에 한 번씩 가진 모임이 200회를 훌쩍 넘겼다. 이상헌(李相憲·79) 한국심리교육협회 회장은 이 모임에서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을 전파한다. 그는 감사와 기쁨, 이른바 ‘감기’가 자신을 살렸다고 말한다. 강연과 집필활동의 메시지도 다르지 않다. vk팔순이 다 된 나이에도 섹시한 뇌를 가진 이상헌 씨의 늙지 않은 삶의 나침반을 찾아봤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아기일 때 양잿물을 실수로 마신 저를 동네 장정들이 거꾸로 들고 병원까지 20리 길을 달려가 경추 연골이 닳아 체머리가 생겼고 이렇게 머리를 흔들어대고 있기 때문에 두뇌가 개발됐고 성장판이 늘어나 키까지 컸어요.(웃음)”
이상헌 회장은 ‘예비된 화였지만 화를 품은 복이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집필한 책만 150여 권, 이 중 등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3년 전에는 국민성공시대 대한민국 CEO독서대상도 수상했다. 평생 동안 어림잡아 한 2만권쯤 읽었다. 읽고 쓰는 일에 대해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연명하느라 절실히 매달렸다”고 표현했다. 어린 시절부터 얼마 못 산다는 선고를 수시로 들었다. 그만큼 몸이 여러 질병에 시달린 터라 몰입만이 고통을 잊을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책을 읽었고 방송을 했고 강연을 하며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했다.
그의 대표작 도 이런 그를 우려하는 어머니의 말에 대한 가르침에서 시작됐다. “제가 ‘아파죽겠다’고 하니까 어머니가 그러더시더라고요. ‘죽겠다고 하면 죽는다. 아프면 견딜 만하다고 해라’라고. 그래서 통증이 죽을 것 같을 때도 ‘견딜 만하다’고 말하니까 또 견딜 만하게 변하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죽지 않을까, 생명을 연장시킬까’하고 살아온 그는 “고난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예방주사와 같다”고 한다.
80년이 가까운 세월을 견디며 살아왔다는 그는 자신의 평생에서 지금이 가장 젊고 근사하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드는 것이야 어쩌겠냐마는 모든 기능상으로 가장 젊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전에는 늘 불안, 초조에 시달려 생전 웃지 않던 그는 70세가 넘으면서 해탈했는지 웃는 표정도 갖게 됐다.
그는 요즘 나이가 들수록 건강이 좋아지고 있다고 한다. 70대가 넘으면서 그를 괴롭히던 병들과 아픔도 하나둘 떠나가고 ‘오늘이 가장 젊을 때이고 지금이 가장 행복한 때’라고 한다.
‘감기’가 그를 살렸다…‘운을 부르는 남자’
그는 매일 일기를 쓴다. 다만 일기장에 그날의 일 중 고마웠던 것, 좋았던 것, 기뻤던 것만 적는다. 그러다보니 매일 좋은 날이다. 이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살다보니 평생 그를 괴롭힌 아픔도 감사할 일이다. 그는 “아픔도 즐기자고 마음먹었어요. 난 아파보니까 안 아픈 게 얼마나 행복한지도 알고, 다른 사람들 만나서 얘기할 수 있다는 것에도 감사하게 됐죠. 남들은 못 아파봐서 모르잖아요.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감사한데 뭐가 문제겠어요”라며 질곡의 삶에서 나온 긍정을 드러냈다.
감사나 감동할 때 엔도르핀의 4000배가 되는 다이도르핀이 생겨 신체의 각 기관을 새롭게 만들어 주는 기적을 경험한 그이기에 가능한 것.
그는 어려서부터 오랜 투병 생활을 해서인지 의사들은 40세를 넘기지 못한다고 했다. 몸에 저체온증, 심근경색, 부정맥 등 25가지 병이 있다는 의사의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듣고 나서 그는 젊은 나이에 죽는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갖고 살아왔다. 그래서 두려움을 잊기 위해 눈만 뜨면 책을 손에 쥐었다. 그는 죽음의 두려움을 잊기 위해 15년 동안 책 1만여 권을 읽었다. 책을 통해서 스스로 희망을 찾고 행복을 배워간 것이다. 책이 그를 변화시키고 희망, 성공과 행복에 대한 베스트셀러 저자로 설 수 있게 했다.
수많은 책을 읽고 강의와 글을 쓴 것도 죽음에 대한 준비였을지도 모른다. 강의를 하다가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가기도 하고 집 앞에서 길을 건너다가 오토바이사고로 의식을 잃기도 했다.
12년 전 오토바이 사고를 당했을 때도 같은 심정이었다. 그는 허공에 붕 뜨는 느낌이 들면서 기억이 끊겼던 이 사고로 무릎 연골이 상했고 요추 신경을 건드려 걸음이 편치 않아 지금까지도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또한 감사한 일이라고 표현했다. 얘기인즉슨 그 전까지는 매일 바쁘게 강연을 다니고 글을 쓰느라 하루에 2~3시간밖에 자지 못해서 과로가 심했는데, 사고 덕분에 과로사를 피할 수 있었다는 이유다. 또 다리를 다치고 나니 그 전에는 보이지 않던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이 눈에 들어오게 됐다고. 다리를 다쳐 거동이 어렵게 되자 할 수 있는 것은 기도와 집필뿐이었다. 그래서일까, 사고로 인해 집필한 책들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전에는 강연과 병행하느라 시간에 치이면서 쓰던 글에 더 집중을 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글을 쓸 때는 몰입을 하므로 아픈 게 없다. 방송, 강연도 그렇고 끝나기 시작하면 또 아프다.
고난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예방주사
그는 매일매일 애국가를 부른다. 혹자는 그를 애국자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안 부르면 죽을 것 같아서’ 부른다. 중학교 2학년때 6·25 전쟁을 겪은 그는 피난길 폭격에 형제들을 잃었다. 눈앞에서 둘이 죽고 누이 하나가 중상을 입고 헐떡이는 동안 곧 따라오신다던 부모님이 오실 때까지 공포를 견디기 위해 울면서 애국가를 불렀다.
“해는 넘어가고 새소리만 들리고. 아는 노래라고는 애국가뿐이었는데, ‘하느님이 보우하사’라니 가사도 얼마나 좋아요. 울다가 노래 부르다가 졸다가 하고 있는데, 새벽 3~4시쯤 저 산 쪽에서 아버지가 내 이름을 부르면서 오시더라고요.” 평생 몸과 마음에 고통이 끊이지 않았던 그에게 애국가는 일종의 진통제인 셈이다.
그는 “사람들이 불편한 건 불편한 일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불편한 걸 참다보니 불편한 거예요. 저는 아픔도 즐기거든요. 남들이 못하는 경험을 하는 건데, 돈이 드는 것도 당연하고. 그게 다 제 재산의 일부예요”라며 가급적 긍정적으로 감사한 일을 생각하라고 조언했다.
이 회장은 그를 통해서 사람들이 변화하는 모습에서 기쁨을 찾는다. 완전히 좌절했던 사람을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은 그의 전문, 큰 보람 중 하나다.
“세상에 나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쁜 점만 보니까 나빠 보이는 것이죠. 우리는 항상 자기 입장만 보기 때문에 서로 이해를 못하여 가정도 국가도 힘들어지죠.”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불운의 늪에 빠져 있다면 이에서 탈출해야 한다. 그를 위해서는 삐걱거리는 한 걸음이라도 움직여야 한다. 한 걸음을 움직이기 위해선 “이렇게 하면 운이 좋아져. 자, 넌 할 수 있어”라고 하는 유쾌한 뻥과 긍정의 마취제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처방이다.
‘내 건강은 내가 지킨다’라는 의욕을 가지고 헤쳐 나갈 때, 뇌는 더욱 더 능력을 발휘한다고 그는 자신한다. “영원히 노화를 막을 수는 없죠. 그러나 죽는 순간까지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살고 싶다는 유쾌한 예방주사 한 방으로 뇌 노화에 정면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살면 재밌잖소.”
그는 개인적으로도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사람들에게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글을 쓰면서도 정작 저는 아내(장윤정·70)와 제대로 대화할 시간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에는 아내와 40년 전, 50년 전 추억의 장소를 찾아 함께 식사를 해요. 할 얘기도 많아지고 너무 좋죠.”
매순간 그에게는 삶이 절실했다.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긍정에너지지만, 그의 앞에서 긍정적일 수 없는 일, 감사하지 못할 일이 얼마나 될까. 뇌의 스위치를 온오프 자유자재로 컨트롤할 수 있는 그의 노후가 아름다운 이유이다.
이상헌 회장이 제안하다/건강한 뇌, 젊게 사는 법 30가지
01.아침에 깨어나면 맨손체조부터 하라. 에너지가 넘친다.
02. 하루 5분 마음의 양식을 소화하라.
03. 긍정적인 언어만 사용하라. 말대로 이뤄진다.
04. 날마다 30분을 걸어라. 헬스클럽보다 효과가 크다.
05. 친구 3명과 통화하라. 나이 들면 친구가 보물이다.
06. 날마다 친구 1명씩 만나라.
07. 좋았던 기억을 재생하라. 그래야 천국의 문이 열린다.
08. TV시청은 줄여라. 소모적인 프로가 자신을 황폐화시킨다.
09. 미리미리 치아를 손봐라. 호랑이도 이빨 빠지면 맥을 못 춘다.
10. 호기심을 가져라. 그것이 젊음의 비결이다.
11. 하루 100자를 쓰고 1000자 글을 읽어라. 뇌가 젊어진다.
12. 감사와 기쁨을 기록하라. 하루하루 성장한다.
13. 좋은 취미를 살려라. 취미가 없으면 무미건조해진다.
14. 웃음의 시간을 늘려라. 기쁨이 100배로 증폭된다.
15. 피로가 쌓이기 전에 휴식하라. 의사가 필요 없다.
16. 생각의 폭을 넓혀라. 그래야 존경받는다.
17. 노여움, 미움은 뼈를 삭게 만든다. 용서의 달인이 되라.
18. 진실하라. 그래야 자신의 가치가 올라간다.
19. 규칙적인 생활을 하라. 노화가 발붙이지 못한다.
20. 과로는 노화의 주범이다. 알맞게 일하라.
21. 젊은이들과 어울려라. 나도 모르게 젊어진다.
22. 누구에게나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라. 위험한 말버릇이다.
23. 좋았던 일만 기록하라. 그것이 행복일기다.
24. 통화 대신 편지를 써라. 사고력과 집중력이 향상된다.
25. 손 운동을 하라. 뇌가 활성화된다.
26. 명상을 배워라. 신선 같은 사람이 된다.
27. 남이 잘하는 것을 찾아라. 장점을 보면 행복하다.
28. 불평은 불운을 끌고 다닌다. 좋은 말만 골라서 하라.
29. 누가 뭐라면 맞장구쳐라. 대인관계가 좋아진다.
30. 손주의 그림 하나 정도는 걸어둬라. 감동은 좋은 기운이 난다.
인생2막, 시니어들의 모델 진출이 활성화되고 있다. 광고에서 런웨이까지 시니어 모델들의 역할이 두드러지고 있고 그 수요도 늘어나는 시점이다.
꽃중년들이 일어날 시기가 찾아왔다. 물론 늦지 않았다. 주목해야 할 교육과정과 선발대회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시니어모델의 시작 ‘뉴시니어 라이프’
2007년에 시니어 모델사업을 시작해 교육과정이나 인프라가 상당한 곳이다. 서울시설공단과 함께하는 청계천 패션쇼를 비롯해 독일, 연변 등 해외무대에서도 나름 지명도가 높다. 강남캠프, 일산캠프, 성북캠프 총 3개의 교육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3~4년차 수강생들이 많이 포진된 것이 특징이다.
‘행복한 패션기업’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구하주 디자이너가 설립한 이곳은 교육, 공연, 모델, 제품 사업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시니어 관련사업의 연령대를 낮추고자 노력한다는 점이다. 60대 기준에서 50대로, 베이비부머를 위한 콘텐츠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잡은 것.
뉴시니어라이프 구다원 국장은 “통상 시니어나 실버의 구분이 없이 관련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신중년세대들이 완벽히 적응할 만한 콘텐츠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라며 “편하고 하기 쉬운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질적인 측면에서 완성도를 높이는 교
육을 만들어 가는 데 주력할 시기”라고 말했다.
또 “우리는 관련 교육기관 중에 가장 역사가 오래된 만큼 모델 인프라나 활동 영역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보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시니어 모델 전문 프로그램에 대한 자부심이 넘쳤다.
뉴시니어라이프에는 경력 3년차 3인방 모델이 유명하다. 이들은 50대, 60대, 70대로 구성됐으며 나이차와 관계없이 친구처럼 편한 모습을 보였다.
맏언니 이오영(70)씨는 지난 세월 외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남편이 외교관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의 퇴직으로 한국에 다시 정착하게 되면서 느낀 외로움을 모델 워킹을 통해 극복했다고 한다.
“손주들이 좋아해서 너무 즐겁고 행복하다. 모델 워킹을 교육받으며 새로운 삶을 얻는 것 같다”는 그녀의 미소에서 넉넉함이 느껴졌다.
특히 “그동안 관절염으로 고생했는데 자세 교정을 통해 건강해졌다”고 말했다.
평범한 전업주부로 살아온 권혜영(62)씨는 모델수업을 통해 성격이 달라졌다. “그동안 자녀들 뒷바라지하느라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선천적으로 내성적인 성향을 가졌었다”는 그녀는 “모델 워킹을 통해 활기찬 모습으로 바뀌어 놀랍다”고 언급했다.
또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무대의 긴장감이 있다”며 “이런 긴장감을 통해 에너지와 용기를 잃지 않아 신난다”라고 말했다.
김경순(54)씨는 3년 전 수강생으로 들어왔지만 이제는 보조강사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체형관리와 건강 관리, 순식간에 찾아오는 갱년기 우울증에 이만한 프로그램은 없다고 생각한다”며 “보조강사로 도움을 줄 수 있어 그 행복은 배가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큰언니와는 나이차가 많이 나지만 같은 관심사로 친구가 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녀는 지난 30여 년간 골프용품 사업에 매진하며 꾸준한 마라톤으로 몸매 관리를 해왔다고 한다.
뉴시니어라이프 패션쇼 교육은 기초, 전문, 워킹클래스 총 3개 파트로 나눠진다.
기초과정은 50세 이상을 대상으로 4개월(주1회 3시간)간 진행되는데 기본교육, 패션쇼 준비, 패션쇼 공연 순으로 진행된다.
수료 후에는 시니어패션쇼 공연활동에 참가 할 수 있다. 전문과정은 기초과정을 이수한 수료자를 대상으로 6주(주1회 5시간)동안 전문모델교육을 받게 된다. 전문과정을 마치면 본격적으로 시니어모델 활동(광고/사진/패션/미디어/이벤트) 및 시니어모델 워킹강사로 활동할 기회가 주어진다.
워킹클래스 역시 기초과정을 이수한 자를 대상으로 매주(주1회 3시간) 수업이 진행되며 준비훈련을 통해 시니어패션쇼에 올라서게 된다.
재충전의 다크호스 ‘강남시니어플라자(시니어모델워킹)’
“강남시니어플라자의 모델 워킹반이 재미있다고 입소문이 나고 있다” 이 한마디를 듣고 찾아가봤다.
교육은 올해 시작돼 기간이 길지는 않지만 열정 가득한 수업이 매력적인 곳이다. 강남권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시니어들도 주목하고 있어 분기별로 진행되는 수강신청을 빠르게 해야 한다.
수강생들에게 무대의 현장감을 전달하기 위해 강사 채용에 신경을 쓴 흔적도 보인다.
지난 10년간 패션모델로 일했던 모델 워킹반 이나영 강사는 “시니어를 대상으로 하는 모델 워킹수업은 현 시대가 요구하는 여러 측면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현재 대학 강단에 서고 차밍스쿨을 운영하고 있지만 시니어 모델 교육에도 남다른 열의를 보였다.
그녀는 “고령화 시대에 접어든 우리나라 시니어들의 건강, 자신감 그리고 열정을 심어주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며 “우선적으로 소통을 통해 새로움 아름다움을 찾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수강생들의 만족도는 어떠할까.
우선 모델 워킹반 수강생 대표를 맡고 있는 홍의정(66)씨는 “나이가 들면 걸음걸이로 나이를 가늠할 수 있다고 하는데, 저는 여기서 배운 올바른 자세 교정으로 뒷모습은 아직도 아가씨 같다는 말을 자주 듣곤 한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모델워킹을 하면서 10년은 젊어 진 것 같다”는 그녀의 말에 생기가 돌았다. 그녀는 젊은 시절부터 워킹이나 모델 활동에 관심이 많았지만 잠시 꿈을 포기하고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인으로부터 모델 워킹을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수강신청을 한 후 본격적으로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김쏙니(64)씨는 “40년간 강남에 거주하며 강남시니어들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모델워킹반의
시작과 함께해 개인적으로는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모델 워킹반에서 재충전의 시간을 갖게 돼 행복하다”며 “앞으로도 꾸준한 활동을 통해 긍정적인 자세로 나이도 몸도 늙지 않는 건강관리에 매진하겠다”며 건강과 미모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강윤순(64)씨는 “처음에는 습관이 되지 않아 어색했지만, 수업을 통해 건강한 습관으로 자리
잡게 되어 좋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또 “외부 시니어패션쇼에도 용기내서 참여하니 보람차
고 톱 모델 못지않게 나도 멋진 여성이 된 것 같다”는 말도 했다.
시니어 모델 워킹 클래스는 기초와 프로 2단계로 나눠지는데 각각 6개월씩 주1회 수업이 진행된다.
기초과정의 경우 초반 3개월은 자세교정과 기본 워킹을 중심으로 모델로서 가져야할 태도에 대해 교육받고 후반3개월은T자형무대,원형무대등모델워킹실습을받게된다. 프로과정은기초과정 수강한 자를 대상으로 진행되며 본격적으로 패션쇼에 참가하기 위한 전문적인 교육으로 구성된 상태다.
미즈실버코리아 2014
올해 시니어모델을 위한 유일한 선발대회는 미즈실버코리아뿐이다. 시장이 좁기 때문에 경쟁률도 만만치 않다. 참가대상은 50세 이상 여성이라면 누구나 가능하지만 태생적인 아름다움이나 시간을 거스르는 안티에이징이 관건은 아니다.
주최측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 속에서 묻어나오는 경험과 연륜이 몸에서 절로 발현되는 아름다움을 미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강조했다. 심사 역시 수상자의 삶의 역사, 건강, 지속 가능한 아름다움, 사회봉사에 가장 큰 방점을 두고 있다.
지난 2002년 전주의 한 복지가가 소외된 노년층의 꿈과 미소를 되찾아주기 위해 만든 순수한 목적의 이벤트성 대회로 시작했지만 사단법인 세종문화원과 서울공연 예술센터가 주최하고 보건복지부와 문화예술계의 후원을 받는 큰 규모의 행사로 변모하게 됐다. 대회수상자들에게는 다양한 대외활동 기회가 주어진다.
우선적으로 수상자들은 한류 ‘뷰티 퀸’으로 데뷔하며 방송 MC와 쇼호스트, 연기 등의 분야로 나갈 수 있다. 시니어 뷰티 리더로서 사회봉사활동과 주부 모델, 미즈 모델, 실버 모델로 활동하며 각 단체 및 업체들과 연관된 평생 교육프로그램에도 지도자로서 발돋움할 수도 있다.
“시니어 모델이 된다는 생각으로 무대에서 연습을 해보니 가슴이 벅찰 정도로 희열이 느껴진다. 이제는 프로 모델로 거듭나고 싶다.”
미즈실버코리아 참가자 김지영 (61)씨는 이 같은 포부를 갖고 있었다.
지난 세월동안 육아용품과 화장품 사업에 인생을 바쳤던 그녀는 이번 선발대회를 통해 제2의 인생을 새롭게 설계하고자 마음먹은 것.
그간 사업적인 영역에서 힘써왔다면 이제부터는 제대로 된 모델로서 성장하고 싶다는 말이다.
“탄탄한 몸매를 가꾸기 위해 틈틈이 피트니스센터를 다녔고 화장품 관련업계에 종사했던 만큼 미를 가꾸는데 남다른 소질이 있죠.”
당당한 그녀의 말투에는 내달 진행될 선발대회의 승패와 관계없이 뚜렷한 목표가 보였다.
김지영 씨는 “우선적으로 시니어 모델로서 TV광고나 지면광고, 또 패션쇼 등에 참여하고 싶다”며 “저를 써주신다면 그에 합당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녀는 “모델 활동과 함께 제 인생의 장기적인 목표는 우리 시니어들을 위해 운동이나 화장법, 패션 등을 가르치는 강사로서 나아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