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맞물려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 예술이다. 토양의 기운과 그 땅을 디디고 사는 사람들의 기질이 조화를 이뤄내는 것은 전통예술이다. 역사의 질곡에 이은 현대사회 전환기에 살았던 한 소년. 그는 음악에 눈뜨면서 막중한 임무처럼 국악계의 문을 두드렸다. 전통음악의 한계를 허물고 한국 예술 전반에 주춧돌을 쌓다 보니 어느덧 30여 년 세월. 우리 음악이고 예술이고 하고 싶은 것이 여전히 많다고 말하는 KBS국악관현악단 이준호(李準鎬·59) 상임지휘자. 대금과 소금 연주자를 거쳐, 작곡가 그리고 대한민국 예술의 중심에서 명성 높은 국악인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국악, 문턱 낮추고 저변을 넓히다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던 7월의 어느 날, 여의도 너른 길을 걸어 한국방송공사(KBS)로 향했다. 24시간 잠들지 않는 방송사. 일하러 오는 사람과 그들을 보러 오는 사람으로 매일 인산인해인 곳. 여기에 KBS국악관현악단이 있다. 오전 연주 연습을 마치고 단원들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준호 상임지휘자와 마주했다.
KBS국악관현악단 상임지휘자로 살아온 지 올해로 14년째. 국악기를 손에 쥔 사람들 정중앙에서 음악이 갈 길을 제시하고 함께 호흡한다. 1985년 소금 연주자이자 창단 단원으로 KBS국악관현악단과 처음 인연을 맺었으며, 같은 해에는 국악실내악단 ‘슬기둥’을 결성해 대중과 눈 맞춤하기에 앞장섰다. 대금과 소금 연주자로서 활약은 물론, 작곡가로서 친근한 국악 창작을 위해 지금도 노력 중이다. 한국청소년국악관현악단(1988)과 경기도립국악단(1996) 창단에도 힘을 보탰다. 두 단체에서 또한 상임지휘자를 맡아 활동했다. 지난 6월에는 대금연구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우리 고유의 악기 대금 보존과 계승, 발전에 한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슬기둥’, 국악이 변화하다
지금은 소규모 국악 그룹이 넘쳐나지만 ‘슬기둥’의 등장은 파격 그 자체였다. 이준호 지휘자와 함께 KBS국악관현악단 창단 동기인 강호중, 김영동, 민의식 등 20대 국악 연주가들은 경계 없는 신선한 음악을 해보자는 마음에 ‘슬기둥’을 결성했다. 그들은 모두가 공감하고 나누는 친숙한 예술을 선보이려고 애썼다. 특히 ‘슬기둥’이 세상에 나오면서 국악은 관객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했던 옛것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슬기둥 1집에 발표된 ‘산도깨비’와 ‘소금장수’는 교과서에도 실렸습니다. 슬기둥을 창단했던 저와 제 친구들의 선택이 맞았습니다. 모두가 국악의 정통성을 외칠 때였어요. 그런 역할은 국립국악원에서 충분히 하고 있잖아요. 영산회상(조선시대 후기 기악곡 형태의 풍류음악)이나 수제천(관악합주곡, 원곡명 ‘정읍(井邑)’)으로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어요. 일반 대중이 국악을 쉽게 느낄 수 있게 하는 방법이 뭘까 생각했습니다. 국악가요 같은 것을 따라 부르면 더 편하지 않나요? 민요도 전통음악이잖아요. 슬기둥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제가 작곡에 열을 올게 된 것이죠. 198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이준호 지휘자는 지금까지 국악을 바탕으로 1000곡 가까이 창작해왔다. 무용극, 뮤지컬, 연극, 창극, 마당극에 사용하는 공연음악과 TV드라마 음악 등 국악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 국악의 대중화에 발 벗고 나섰다. 20여 편 되는 MBC마당극 중 일곱 개의 작품도 작곡가 이준호의 손에서 탄생했다. 국악과 현대음악을 접목시키고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고자 노력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후배들이 설 자리를 마련해주고 싶었다.
“새로운 장르를 개발해서 국악에 몸담고 있는 후배들이 갈 길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길이 있어야 젊은 친구들이 국악을 공부하며 열정을 보일 거 아니에요. 전통음악이든 현대음악이든 음악계 전체가 풍성해져야죠.”
새로운 국악을 주창했던 슬기둥 원년 멤버들은 모두 국악과 교수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이준호 지휘자도 4년 전부터 모교인 추계예술대학교에서 대금과 작곡, 지휘를 가르치고 있다.
“음악 만들면서 현장에 있는 게 좋지, 학교에 있는 걸 원하지는 않았어요. 이제 제가 나이를 꽤 먹었다는 거겠죠.(웃음)”
트럼펫 대신 대금을 손에 쥐다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난 이준호 지휘자는 음악 하는 외삼촌들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특히 외삼촌 주변에 학교 다니면서 브라스 밴드 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동네에서 행진곡 합주를 들을 기회가 많았는데 영향이 저한테 굉장했죠.”
그는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브라스 밴드에 들어갔다. 다양한 서양악기를 접했고 트럼펫을 배우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국립국악원 연수를 한 달 정도 다녀온 음악선생님으로 인해 국악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어느 날 선생님이 밤낚시를 가자고 하시더군요. 그곳에서 국악에 대한 깊이와 역사를 이야기하시면서 ‘국악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습니다. 듣고 잊어버려야 했는데 그 말씀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대전환이었다. 그때부터 트럼펫을 내려놓고 국립국악고등학교를 목표로 고입 준비를 해 입학했다. 대금과의 인연도 국립국악고등학고 입학과 함께였다.
“국악을 처음 접하는 거라 뭐든 생소했어요. 악기 주법과 모양새도 그랬고요. 국악기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이 학교에 들어갔어요. 결국에는 대금을 선택했는데 나하고 잘 맞았던 거죠.”
젊음으로 한바탕 놀다
이준호 지휘자가 추구하고 생각하는 국악의 장점은 언제든 변형 가능하고 다른 장르와도 잘 어우러진다는 점이다. 국악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면서부터 다양한 음악, 예술 장르와의 협연을 끊임없이 모색했다. KBS국악관현악단 혹은 슬기둥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해외 여러 나라에 나갔다. 그리고 우리 가락의 흥을 가지각색 협연 무대로 펼쳐 보이기도 했다. 사물놀이패는 물론이고 비보잉, 재즈, 록 등 국악과 접목할 수 있다면 뭐든 함께 무대에 세우고 실험을 이어갔다.
“언젠가 카자흐스탄에 한국어과가 있는 대학교에서 특강을 해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아무리 통역을 붙여 강의한다고 해도 재미없을 것 같아서 비보잉 그룹과 함께 갔습니다. ‘10분에서 15분만 내가 할 테니까 나머지는 너희들이 해라!’ 하고요.(웃음)”
우리나라 문화를 잠깐 소개하고 비보잉 그룹에게 바통을 넘겼다. 그 곳에서도 비보잉이 인기가 있었는지 20여 명되는 팬이 몰렸다. 우리 가락에 맞춰 한국 비보이에게 동작을 배웠다.
“그때 국악과 비보잉의 결합은 새로운 방식의 문화 융합이었습니다.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열리는 하라레축제에 갔을 때는 기타리스트 김도균과 색소폰 연주자 이정식과 함께 공연했습니다. 그들에게 국악과 록의 접목을 보여주고 싶었죠. 그런데 공연 끝나고 뒤풀이가 더 오래 걸렸어요. 우리 예술인과 깜짝 협연이 열린거죠. 아프리카 사람들이 리듬을 좀 알잖아요. 우리 것을 다른 나라에 알리고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의미 있고 좋은 일입니다.”
창작은 멈추지 않는다
인터뷰를 하면서 인상적이었던 공간은 바로 국악관현악단의 연습실이었다. 방송 전파를 위해 존재하는 방송사 공간에 공연을 준비하는 이들의 아지트가 있다는 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KBS국악관현악단이 생기고 30년 동안 제대로 된 연습실이 없었어요. 라디오 공개홀에서 본관 뉴스센터, KBS별관으로 옮겨 다녔어요. 제가 여기 창단 멤버이고 오래 활동해서 아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3년 전에 공간 좀 제발 마련해 달라고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그때까지 국악관현악단 명의로 된 연습실이 없었답니다.”
방송사 건물이 한정적인 데다 사람과 장비가 늘어나 이해는 했지만 오랜 세월을 참고 참다 큰맘 먹고 연습실 문제를 알렸던 것이다.
“사실 방송사 내에 사무실 없는 분들도 있으니 그 사정은 지금도 이해가 돼요. 어쨌든 요즘은 연습이 중단되고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일이 없어서 단원들이 좋아해요. 대신 저희는 열심히 뛰어야겠죠. 연주회도 하고 좋은 레퍼토리도 만들고요. 한국음악을 접하지 못하는 소외 지역이나 교도소, 군부대 등도 저희가 찾아가서 음악회를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더 나은 공연으로 국민들에게 보답하면 됩니다.”
KBS국악관현악단 상임지휘자라는 높은 위치가 늘 행복하고 달가운 자리만은 아니다. 현재 이끌고 있는 악단과 단원들을 위해서 책임지고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나서야 했다. 정권이 바뀔 때 생각지도 못한 오해를 받거나 힘든 일을 겪기도 했다. 국민의 시선이 쏠려 있는 공영방송사 한 분야의 수장으로서 말을 아끼는 것이 ‘최고의 수’라는 것도 나이가 익어가면서 알아갔다. 그래도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옆에 있는 단원들과 함께하는 예술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앞으로 어떤 것을 더 하고 싶냐고 물으니 당연히 국악 얘기로 다시 돌아온다.
“곡 써야죠. 작곡가니까. 판소리 5마당 중에서 심청가만 남았어요. 판소리만 한 대목 한 대목 연주해왔는데 그걸 전체 다 오케스트라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영산회상 전 바탕, 종묘제례악 합창가….”
지금까지 1000곡 가까이 작곡했다는 분이 아직도 정리할 곡도 많고 할 일이 많단다. 시간이 나면 KBS 신관 길 건너 연구동 5층 사무실에서 곡 쓰는 것이 낙이라고 한다. 이 열정을 어찌 말릴 수 있을까 모르겠다. 언젠가 휴식의 시간이 찾아온다면 펜도, 지휘봉도, 대금도 다 내려놓고 좀 쉬시기를 간청드려본다.
양반 시대가 부활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는 양반과 상민 시대가 있었다. 양반은 하인을 두고 노동력이 들어가는 일은 직접 하지 않고 하인에게 시켰다. 주로 학문을 하거나 벼슬에 올라 백성을 다스리는 일을 했다. 또한, 벼슬에서 물러나면 야인 생활을 하기도 했고 후진 양성에 심혈을 쏟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풍류를 즐기는 데 사용했다. 서예, 그림 등의 문화와 예술이 발전하게 된 배경일 수도 있다. 골프가 국내에 들어왔을 때 양반 측의 사람들은 왜 그런 것을 직접 하느냐 반문했다는 우스개도 있다. 골프 자체는 하인이 하고 구경만 하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몸으로 하는 일은 양반의 몫이 아니었다. 양반 시대의 전형적인 생활 모습이다.
형태는 조금 다를 수 있으나 새로운 양반 시대가 오고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사람의 노동력이 필요한 곳에는 인공지능에 의한 로봇이 대신 자리해가고 있다. 특히 힘들고 위험한 일을 비롯하여 전반적으로 로봇이 그 일을 대신하고 있고 생산성 측면에서도 효율성이 높다. 스포츠 용품업체인 아디다스가 동남아 지역 공장에서 본국인 독일로 회귀하였다. 인건비 절감을 위해 동남아 지역으로 공장을 옮겼던 요인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로봇으로 인력을 크게 줄일 수 있게 되어 해외에 공장을 둘 필요성이 사라졌다. 300명의 종업원이 일하던 같은 규모의 생산량을 인공지능 로봇으로 대체하여 상주 인력 10명 정도로 해결하고 있다. 사람의 노동력을 대신해가고 있다. 드론도 한몫한다. 앞으로 자동주행 자동차도 그럴 예정이며 일반화할 시기도 가까이 왔다. 그뿐만 아니라 3D프린터도 그렇다. 최근 미국에서 총을 3D프린터로 만드는 기법이 공개되었다. 스탠퍼드대학교 제리 카플란 교수는 그의 저서 '인간은 필요 없다'에서 인공지능 로봇을 인조노동자라 쓰고 있다. 사람은 그 인조노동자를 예전의 하인을 부리듯 하고 그 시간을 학문, 문학, 음악, 춤, 여행 등에 사용하게 된다. 노동하는 시간은 크게 줄어든다. 가히 여가 혁명 시대라 할 만하다. 이러한 모습은 예전의 양반과 상민의 시대를 방불하게 한다. 다만, 하인 대신에 인공지능 로봇이 그 자리를 메꾸고 있다. 새로운 양반 시대의 부활이 아닐까? 신(新) 양반 시대다. 많은 사람이 기계, 로봇에 종속되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한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편리와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 위하여 인간이 만들었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도구로 사용되리라 여긴다.
술을 즐기다 보니 술 만드는 기술이 궁금해졌더란다. 그래서 양조법을 배웠고, 조예를 키웠고, 마침내 술도가를 차렸다. 최고의 술을, 독보적인 전통주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고 싶었다. 이게 그의 귀촌 내력이다. 산골 숲속에 터를 잡았다. 된통 외진 골짝이다. 바람소리 물소리 도란거려 술을 익히나? 술 아니라 맹물이라도 향긋하게 무르익을 풍광이다.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산골 술도가 사장 정회철(56) 씨의 전직은 변호사. 변호사였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집어치우고 고시학원 강사로 뛰어 이름을 들날렸다. 충남대학교 로스쿨 헌법 교수로도 재직했다. 남들 눈에는 활보였겠으나 그는 도중에 멈췄다. 시골로 내려가기에 마땅한 사정이 생겼기 때문에. 건강에 탈이 났기에. 일밖엔 난 몰라! 그는 그리 속으로 외치며 열렬히 직업 활동을 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몸에 적신호가 켜진 것.
“머리 아픈 증상이 극심했어요. 오랜 세월 누적된 과로로 몸에 과부하가 걸렸던 거죠. 온몸의 기(氣)가 머리로만 몰렸던 것 같아요. 단 5분도 책을 집중해서 읽을 수 없었어요. 밤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그 단계를 넘어서면 정신병원으로 가야 할 상황이었죠.”
“사법고시 준비생들에게 스타 강사로 널리 알려졌었다죠?”
“근 10년쯤 신림동 고시학원에서 강의를 했어요. 하루 너덧 시간을 내리 강의하는 식으로 열심히 했죠. 제가 고시생들을 위한 헌법 수험서 열 권을 펴냈는데, 날이면 날마다 글을 쓰는 일도 무리였어요. 명예도 좋고 부(富)도 좋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건강부터 되살리고 보자, 그런 생각으로 귀촌을 했습니다.”
“귀촌 이후 건강은 좋아지셨고?”
“강의하고 책 쓰고, 머리의 에너지를 모조리 써야만 하는 강행군에서 벗어나자 몸이 빠르게 회복되더군요. 요즘 다시 머리가 아파지려 하지만.(웃음)”
“양조장 일의 과로로?”
“양조사업 구상은 귀촌 이전부터 나름 충실하게 해왔어요. 양조 공부를 많이 해뒀죠. 덕분에 일의 진행이 빨랐어요. 그런데 전통주 사업, 이게 만만한 게 아닙니다. 일본 술 사케나 서양 와인은 1년에 한 번 빚으면 그만이지만, 저희 토속주는 1년 365일 계속 매달려야 하거든요. 게다가 양조장 개업 7년이 지났지만 아직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머리 아플 수밖에.”
“적자 발생 원인이, 문제점이, 어디에 있죠?”
“소비자들이 전통술을 잘 모릅니다. 변호사가 만든 술이라 호기심을 가질 법하지만, 별 관심들이 없더라고요. 전래의 청주 문화, 약주 문화는 이미 고사 직전이에요. 거대 기업들이 장악한 유통망을 저희 같은 작은 업체가 파고들기도 어렵고.”
정회철 씨의 양조장엔 ‘전통주조 예술’이라는 상호가 걸렸다. 그 옛날의 고귀한 양조 정통을 살려 예술에 맞먹을 술을 빚겠다는 의지를 실었다. 산중 유벽한 곳에, 수려한 숲속 5000평 부지에, 살림채를 비롯해 완벽한 수준의 양조 시설물들을 구축했다. 본때 있게, 맵시 있게.
“뭘 모르고 뛰어들었어요”
개량 한복을 소탈하게 차려입은 정 씨. 안면에 자란 텁수룩한 수염이 입성과 오붓하게 어울린다. 숨어사는 사람처럼 표정은 고요하다. 넘치는 의욕으로, 신명에 찬 근면으로, 그는 오직 술 만들기에 전념해왔단다. 주조(酒造)만을 일삼진 않는다. 양조 기법과 술 문화를 배울 수 있는 체험교실도 운영한다. 게스트하우스도 겸한다. 하지만 아직은 불황! 세상의 그 어디에도 예외가 없다. 사업판이란 적자생존의 정글이라는 거. 누구나 알 만한 사실이지만, 전국 곳곳에 산재한 군소 전통주 업체들이 고전한다. 그는 그걸 몰랐을까? 몰랐단다.
“뭘 모르고 뛰어들었어요. 상황을 알았다면 덤벼들지 않았겠지요. 몰랐기에 사업 착수가 가능했던 겁니다.”
“그 무슨 신념이 있었기에?”
“우리 선조들이 마셨던 전통주를 제대로 복원해 보급하고 싶었어요. 진정한 민속주를, 장삿속만을 추구하지 않는 술다운 술을 빚는다는 거, 그건 사업 성패를 떠나 매우 가치 있는 일이라 판단했어요.”
“전통주를 만드는 사람마다 자기의 술이 최고라 자부해요. 장인정신을 표방하며. 당신이 만드는 술은 어떤 특장이 있나요?”
“좋은 술은 일단 맛이 빼어납니다. 미각과 후각은 물론, 시각까지를 미묘하게 자극해 만족을 주죠. 또 숙취라는 게 없어요. 그럼 좋은 술을 만드는 관건은 무엇인가? 누룩입니다. 어떤 누룩을 썼느냐에 따라 술의 품질이 결정돼요. 대부분의 업체들은 첨가물이 들어간 인위적 누룩을 사용하는데, 이게 술의 품질을 저하시키는 겁니다. 저는 직접 자연발효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어요.”
정 씨가 술을 내놓는다. ‘무작53’이라는 이름이 붙은 술이다. 알코올 도수는 53도. 조선의 명주 ‘적선(謫仙)소주’를 원본으로 해 빚었다는 정통 증류식 소주. 한 잔 털어넣자 감미롭게 혀를 굴러 뜨겁게 목으로 넘어간다. 그는 증류식 소주 외 약주와 막걸리도 만든다. 술마다 고가격을 매긴 건 품질로 승부하겠다는 자부심의 표출이겠지.
술꾼들은 좋은 술에 대한 얘기만 나와도 엔도르핀이 솟는다. 이태백 이래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술과 더불어 풍진 세상 흥겨이 노닐었던가. 날이면 날마다 막걸리를 마시며 쓸쓸한 이승을 소풍처럼 살다 귀천(歸天)한 천상병 시인의 동류는 또 얼마나 많던가. 술로 구겨진 인생도 숱하지만, 술의 위무(慰撫)로 일어선 인생사도 즐비하다. 가장 복스러운 인생은 술 빚는 자의 것일지도. 향기로운 술로써 세상에 미만한 고독과 고통을 씻는 일에 일조하기에.
“술을 만드는 일, 좋은 술을 빚는 일, 거기에 심혈을 기울이는 일은 정말 즐거워요. 용케도 만족할 만한 술이 만들어졌을 땐 기뻐 날뛰고 싶은 심정에 사로잡히죠. 모두들 세상에서 최고는 돈이라고들 하지만, 제겐 술이 최고예요.”
“‘최고의 술’을 만든다지만 부진을 면치 못하는 중이군요. 불안은 없을까?”
“귀촌 전, 진정 기꺼이 즐기며 남은 생 전체를 쏟을 일을 찾았어요. 그게 전통주 사업이었죠. 단순한 술도가가 아니라, 풍류를 중심에 두고, 모두 흥겹게 어울려 놀 수 있는 복합 술 문화공간으로 가꾸고 싶었어요. 그게 꿈이자 목표예요. 불안? 그런 건 없어요. 다만, 화증과 짜증은 많이 늘었죠. 화 폭발의 대상은 와이프이고.(웃음)”
“부인이 무슨 죄? 신사는 여자에게 큰소리를 치지 않는 법이죠.”
“아내가 하는 말, 서울에서 이토록 열심히 일했다면 빌딩을 벌써 사고도 남았을 거요! 저는 일벌레입니다. 부진한 수익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노력하는 것, 그 하나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사업상의 향후 전망은 밝으니까.”
“활로를 찾았다는 얘긴가요?”
“예전과 달리 젊은이들이 전통주에 관심과 호감을 갖기 시작했어요. 제겐 고무적인 정황이죠. 어, 이거 맛있네! 기존 막걸리와는 다르잖아! 이게 뭐지? 전통주네! 그런 반응들.”
“우리가 마시고, 남으면 팔자!”
바람 잔 날에 바람개비를 쥔 사람의 태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바람이 일기를 기다리기. 다른 하나는 앞으로 바람처럼 달려 바람 일으키기. 정회철 씨는 냅다 질주 중이다.
“선택과 집중. 돌아보면, 제 인생은 그걸 나름 잘 해왔어요. 뭐든 신중하게 선택하고 가차 없이 몰두해왔죠. 이게 아니다 싶으면 바로 바꿨어요. 이런 저의 삶을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기분으로 조마조마 바라보는 건 와이프이고.”
“어릴 적 꿈은?”
“제가 대학 땐 운동권에서 뛰었어요.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다 할까, 정치인이 되고 싶은 꿈이 좀 있었죠. 그러나 한계를 느꼈어요. 그건 나의 길이 아니다, 그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긴 해도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런 판단을 했어요. 오늘날 이곳에서의 양조 일, 그건 인생 후반에 발견한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입니다.”
“술 사업과 적성이 잘 부합하는 거예요? 비즈니스란 허울 좋은 요령과 처세가 무기일 텐데.”
“흠, 얼마 전 너무도 힘들어 난생처음 점집에 가서 사주를 봤는데요, 절더러 한량 타입이라 합디다. 한량? 내가 정말 그런 거야? 반신반의했지만,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정히 그렇다면 잠든 ‘끼’를 살려 재미있게 살면 되겠지, 워낙 모범생으로 성장해 내향적인 성격이 굳었지만 술과 더불어 한평생 즐겁게 살자, 그런 다짐을 해보는 것이죠. 저희 부부에겐 슬로건이 하나 있어요. ‘재미있게 살자!’ 부제(副題)도 있어요. ‘우리가 마시고, 남으면 팔자!’”
떠밀릴 수밖에 없는 거대한 파도에 직면한 것과도 같은, 그런 절박한 굽이를 곧잘 마주치는 게 인생이지만, 웬일인지 파도는 흔히 절로 가라앉는다. 그걸 문득 느끼자면, 순항도 재미요, 난항도 재미다. 자신이 선택한 상황 안에서 자극과 감흥을 발견해 즐기는 데에서 삶의 풍미는 돋아난다.
“귀촌을 해서 목가적인 낭만을 즐기겠다는 태도는 위험해요. 일 속에서 재미와 가치를 구해 행복의 실체를 찾아가는 게 옳다고 봐요. 귀촌을 환상으로 모색하는 건 실패의 첩경입니다. 시골 환경은 예상보다 더 단조롭고 답답할 수 있어요.”
“원주민과 흐뭇하게 지내는 일에도 공을 쏟아야만 하죠.”
“귀촌인들은 마을에서 백년을 살아도 외지인이에요. 애초 마을과 뚝 떨어진 곳에 터를 잡는 게 현명할 수도 있어요. 지나친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되니까.”
“도시보다 시골에 막대하게 많은 건 자연의 얼굴들이죠. 자연이 주는 안정감, 그건 귀촌으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행운이지 않을까?”
“사계의 변화에 자주 가슴이 먹먹해지더라고요. 철 맞춰 꽃이 피고, 향기가 번지고…. 아아, 그럴 때면 넋을 잃어요.”
생물과 무생물이 섞인 도시. 생물과 생명이 얼크러져 순환하는, 시골이라는 자연. 자연을 향해 넝쿨처럼 뻗어나가는 마음이라면, 귀촌이란 자못 근사한 여행이겠지.
정회철 씨가 주는 귀촌 준비 tip
❶ 시골은 돈 버는 곳이 아니라 돈을 줄여 쓸 수 있는 곳이다. 너무 열악한 경제 형편 하에서 귀촌하면 괴로워진다.
❷ 가급적 마을과 떨어진 곳에 터를 잡자.
❸ 시골의 문화 여건은 미비하다. 스스로 즐길 수 있는 뭔가를 준비해서 귀촌하자.
❹ 도시에서 맺은 인적 관계를 꾸준히 관리, 지속하자.
❺ 사업을 할 게 아니라면 터를 넓게 잡을 필요 없다. 200평 정도면 텃밭까지 즐길 수 있으니.
50여 년 전 가족을 따라 우연히 전라도 나주에 왔다가 한국 학자로 살게 된 베르너 사세(Werner Sasse·78) 전 한양대학교 석좌교수. 월인천강지곡, 농가월령가, 동국세시기 등은 그의 이름에 따라붙는 한국 고대 언어 연구를 위한 목록들이다. 서독인 최초로 한국학 박사학위를 받고 독일에서 한국학과를 개설해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정년퇴직 후에는 아예 한국으로 들어와 전라도에 둥지를 틀었다. 2010년에는 세계적인 전위무용가 홍신자 씨와 황혼 재혼을 하면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모두 운명에 이끌리듯 일어난 일들이다.
왜 하필 한국이었을까. 그는 스스로에 대해 “전생에 한국 사람이었는데 현생에 독일로 유배된 것 같다”고 설명한다. 전생의 육체가 기억해놓은 장면들이 있다면 현생에서 이끌림으로 다가왔으리라. 한옥과 한복을 좋아하고 남도의 홍어와 젓갈의 깊은 맛까지 알아버린 푸른 눈의 남자. 이렇게라도 주석을 달아야, 독일에 있을 때도 매일 아침 한국 신문을 꼬박꼬박 챙겨봤다는 그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한국에 첫발을 디딘 것은 1966년. 독일의 원조로 전남 나주에 비료공장이 만들어졌을 때다. 당시 독일 기술자였던 장인이 “한국에 기술학교를 지으려고 하는데 좀 도와 달라”고 해서 들어왔다가 이 나라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25세였던 독일 청년의 눈에 비친 한국인들은 가난했지만 일 열심히 하고, 정 넘치고, 잘 놀고, 흥도 많은 사람들이었다. 4년간 전라도와 서울에서 살다가 독일로 돌아간 뒤에도 그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 같은 나라가 여전히 궁금했다. 결국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30세의 나이에 다시 학교로 들어가 서독인 최초로 한국학 박사학위를 받고 독일 보훔대학교와 함부르크대학교에 한국학과를 개설, 학생들을 가르쳤다. 정년퇴직 후에는 한국에 들어와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석좌교수로 지냈다.
50여 년 한국 문화를 연구하며 보낸 그는, 이제 자신의 고향은 독일이 아니라 전라도라고 말한다.
다시 찾은 사랑, 그리고 황혼 재혼
태풍 쁘라삐룬이 올라오던 날, 그가 사는 전남 담양으로 출발했다. 비가 사납게 몰아치는 길이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20여 킬로미터쯤 더 가서야 그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간중간 비에 젖은 나리꽃이 마중하듯 반갑게 피어 있었지만 80이 가까운 두 사람이 살기에는 위태로워 보이는 산속이었다. 갑자기 몸이라도 아프면 어쩌려고 이렇게 깊은 곳에서 사시느냐 했다. 그러자 홍안의 미소년 같은 얼굴로 그가 되물었다.
“그런 걸 왜 미리 걱정해요? 시니어의 관심은 오로지 건강밖에 없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루는 친구랑 산에 올라갔는데 다음 날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했더라고요. ‘아이고 나 힘들어 죽겠어.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나봐. 온몸이 다 아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바보야, 나도 아파. 그런데 그건 나이 때문이 아니고 우리가 연습 없이 산에 올라가서 아픈 거야. 젊은 사람도 연습 없이 산에 오르면 힘들어’ 하고 말해줬어요. 제가 보기엔 나이가 아니라 엄살이 문제예요. 감기라도 걸리면 이 산속에서 어떻게 하냐고요? 일주일만 버텨보셔요. 저절로 치유됩니다.”
그는 먼 미래의 일을 걱정하며 사는 한국 사람들이 이해 안 될 때가 있다고 했다. 급속한 경제발전을 겪으면서 생겨난 불안감이 아닌가 하는 진단도 내린다. 자신은 ‘지금, 여기’ 일만 생각해도 하루가 너무 바쁘다 했다. 그가 살아온 시간들을 요약해보니 그렇다. 누가 뭐라 하든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며 살았다. 젊은 시절에는 낯선 나라에 매료돼 고려방언이니 가사문학이니 한국인들도 쉽지 않은 공부에 골몰하더니, 70세에는 뒤늦은 재혼으로 지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남들은 졸혼이니, 휴혼이니 하면서 무거운 결혼생활 끝내고 혼자 한번 살아보리라 희망할 때 그는 한 여자와 새살림을 차린 것이다. 배우자는 자유롭고 파격적인 춤을 추며 살아온 전위무용가 홍신자 씨. 그래서 그의 결혼은 더욱 화제가 됐다.
“그녀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지 몰랐어요. 지인 전시회 때 처음 보고 몇 차례 우연히 더 만나게 됐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끌렸습니다. 그래서 같이 살아보자 했지요. 우리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아니, 그 나이에 결혼을?’ 하며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었을 테지요. 그런데 사랑하는 데 정년이 있나요? 그런 생각에 얽매여 주저할 시간에 더 열심히 사랑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홍 선생과 같이 산 지 벌써 8년이나 됐네요. 그녀와 저는 생각하는 게 비슷해서 충돌하는 일이 없어요. 각자 하는 일도 있어 존중해주고 도와줄 일 있으면 힘을 보태면서 재밌게 살고 있습니다. 젊을 때 결혼했다면 이런저런 욕심이 생겨 이거 하면 안 되고 저거 하라며 상대에게 잔소릴 해댔겠죠. 나이가 드니 상대가 그렇게 할 수도 있지, 좋아하면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이해하게 되더군요. 집안일도 남녀 구별 안 해요. 누구든 해야 할 상황이 되면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합니다. 자유롭게요.”
사람들은 더러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지나친 관심과 간섭 속에 상대를 가두곤 한다. 삶의 상상력을 펼쳐야 할 때는 이런 욕구들에 맥없이 멱살 잡혀 있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베르너 사세는 관계 속에서 서로 다른 점들은 스트레스가 아닌 영감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새로움, 즉 영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이 들어 결혼할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해학’이라 덧붙인다. 깊은 산속 빗소리와 함께 들은 최고의 문장이었다.
민낯이 예쁜 나라, 한국
“가끔 한국의 어떤 음식이 맛있냐, 한국의 무엇에 매력을 느꼈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답이 하나일 수 없어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르니까요. 술을 예로 들면, 한국 음식과 곁들일 때는 맥주보다 막걸리가 좋지요. 육체노동을 할 때도 물론 막걸리가 어울리고요. 그러나 목이 마를 때는 맥주가 맛있고, 특별히 분위기를 내야 하는 날은 와인이 낫지요. 한국 음식, 한국의 매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랑 먹고 누구랑 함께 있느냐에 따라 그 맛과 매력이 다 다르지 않겠어요?”
그는 전통 문화란 힘들게 보존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자주 사용하고 즐겨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옛것을 시대에 맞게 자기 것으로 만들어 활용하는 데서 진정한 전통의 힘이 발휘된다는 것이다.
“제가 개량한복 입고 독일 가면 사람들이 어디서 이렇게 디자인이 예쁜 옷 샀냐고 묻습니다. 저는 양복보다 한복이 훨씬 편해서 즐겨 입어요. 그런데 한국인들은 정작 한복을 잘 입지 않잖아요. 그러면서 외국에 나가서는 아름다운 옷이라고 소개합니다. 이건 앞뒤가 좀 안 맞는 행동으로 보여요. 불편해서 입지 않는다는 이유를 대는데 설득력도 없어 보이고요. 그렇다면 늘 입고 다니는 양복은 과연 편해서 입는 걸까요?”
저서 ‘민낯이 예쁜 코리안’에서도 그는 한국인의 역사관을 냉정한 시각으로 언급했다.
“한국 사람들은 ‘오천년 역사’, ‘세계 제일’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다닙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오천년이면 신석기시대입니다. 한국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이죠. 외국인들에게 이런 역사관 공감될까요? 저는 오히려 신뢰를 떨어뜨린다고 봐요.”
가차 없는 논리의 학자다운 지적이다. 고유 문화에만 집착해 사실을 회피하는 자세는 건강한 역사의식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가 보기에는 화장하지 않은 민낯의 한국이 더 아름답다. 그걸 봐버린 죄(?)로 한국인 못지않은 긍지로 이 땅의 문화를 연구하며 반평생을 보내지 않았겠는가.
그는 요즘 수묵화에 빠져 있다. 한국을 소개할 책 번역도 틈틈이 하고 있지만 붓을 들고 있는 시간이 더 많다. 얼마 전에는 광주에서 전시회를 가졌고 서울에서의 전시도 준비 중이다.
“수묵화는 20년 전부터 그렸어요. 한지를 알게 된 뒤부터죠. 서양화는 머릿속으로 상상한 대로 그림이 나오지만 동양화는 달라요. 내 의지가 아닌, 붓이 그리는 대로 따라가게 돼요. 동양화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붓과, 나와, 한지의 대화예요.”
이제 풍류의 멋까지 섭렵해보겠다는 태세다. 전력을 다해, 더러는 문득 생각난 듯 ‘지금, 여기’의 삶을 살며.
초간정(草澗亭) 원림(園林)을 찾아 길을 나선다. 경북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에 있다. 햇살이 따갑다. 매서운 폭염이다. 그러나 땡볕을 먹고 여름 꽃이 피고 과일이 실팍하게 여무니 해를 향해 눈총만 쏠 일 아니다. 접때엔 물 폭탄처럼 장대비 내렸다. 장자 말하길, 자연은 자애롭지 않아 만물을 하찮게 여긴다 했던가. 폭우도 폭염도 무심한 자연의 순행(順行)이다.
초간정 원림에 들어서자 솔숲이 펼쳐진다. 뙤약볕 아래 솔은 푸르다. 대낮 천지가 밝아 초록 솔잎들 한결 환하다. 실바람조차 없어 미동 없이 고요한 소나무들. 외양은 그러하나, 쏟아지는 햇볕에서 양분을 취하는 솔의 내장기관엔 1초의 정지도 없을 것이다. 겉으로 푸르디푸르게 양양하고, 안으로 마당쇠처럼 분주한 저 여름 소나무들. 저마다 꼿꼿한 지체로 개결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무서리를 뒤집어쓰거나 불볕이 내려치거나, 언제 어디서나 늘 푸르른 소나무. 해서, 선비정신의 표상이다. 푸른 갓에 푸른 도포를 걸친 소나무의 의연한 모습에서 옛사람들은 선비의 풍모를 읽었다. 그래서 소나무를 학자수(學子樹)라 일컬었다. 공자는 문필수(文筆樹)라 불렀다. 대나무, 매화나무와 더불어 ‘세한삼우(歲寒三友)’로 통했다.
선비란 어떤 사람인가. 수기(修己)를 일삼은 존재였다. 마음과 학문을 갈고닦아 세상에 이롭게 쓰이기를 갈구한 사람이었다. 목에 칼이 들어올지언정, 권력의 농간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고 살기를 미션으로 삼은 사람이었다. 지식을 채우고, 기개를 돋우기 위해, 참된 선비는 쉼 없이 공부를 했으며, 지독하게도 노년마저 공부에 바쳤다.
보라, 여기 초간정에도 조선 선비가 살았다. 곧은 선비정신이 깃들어 숨 쉬는 정자다. ‘대동운부군옥(大同韻府群玉, 보물 제878호)’, 이는 조선조의 저작 중 매우 독특한 명저다. 이 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이 책은 단군 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의 지리, 역사, 인물, 문학, 식물, 동물 등을 망라, 운별(韻別)로 분류 수록했다. 전거(典據)의 충실성과, 민중 중심적 시각으로 일찍부터 그 학문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편찬자는 초간 권문해(權文海, 1534~1591). 초간 선생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초간정을 짓고 칩거, ‘대동운부군옥’을 완성했다. 책을 집필하며 조선 지식인들을 통절히 질타했다. 중국의 역사엔 밝으면서 조선의 일엔 아둔하다고.
원림엔 소나무 외 느티나무, 팽나무, 단풍나무, 참나무 등속이 함께 어울려 숲을 이룬다. 숲의 안통으로는 계류가 여울져 흐른다. 물소리 찰랑이는 계곡 바위 벼랑 위에 초간정이 있다. 조촐한 규모와 단아한 태로 질박하고 곱살한 운치를 자아내는 정자다. 온돌방 하나를 중앙에 조성해둔 건 애초 정사(精舍)로 쓰여서겠지. 초간 선생은 이곳에서 드시고 마시고 주무시며 집필에 임했다. 정사였다지만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두른 대청이 누마루처럼 후련하다.
차경(差境)이라 하지. 마루의 열린 공간으로 정자 바깥의 자연 풍광이 렌즈로 당긴 듯 끌려 들어온다. 솔숲이 정자 내부로 들이치고, 숲 너머 산이 들어오고, 산 걸린 하늘 자락까지 스며든다. 마루 아래로 눈을 던지면 솰솰 굽이치는 계류가 청신하다. 공부면 공부, 집필이면 집필, 쉼이면 쉼, 풍류면 풍류, 초간 선생은 이곳에서 누릴 것 다 누렸을 게다. 그러나 여한 없이 누릴 걸 다 누리는 삶이 있던가? 눈시울 적실 일이 한둘이던가? 선생의 비통한 글 한 귀가 가슴에 아리다.
‘그대, 상여에 실려 그림자도 없이 저승으로 떠나니, 나 이제 어찌 살란 말이오. 상여소리 한 가락에 구곡간장(九曲肝腸) 미어져, 차마 슬퍼할 말을 찾지 못하겠네.’
상처(喪妻) 뒤 선생이 ‘초간일기(草澗日記)’에 남긴 글이다. 사별이란 아파 세상의 모든 별들이 저문 듯 암담해진다. 정녕 보내지 않았음에도 훌쩍 떠난 사람의 그림자라도 잡으려고 발버둥 쳐보지만, 이미 부질없다. 제아무리 의연한 선생이라지만, 슬픔에 사무쳐 갈피없이 흔들렸을 테지.
탐방 Tip
예천 초간정 원림은 담양 소쇄원과 함께 가장 아름다운 조선의 원림으로 불린다. 초간정 옆 별채에선 한옥 체험 민박을 운영한다. 초간 종택(보물 제457호)이 초간정에서 2km 거리에 있으니 함께 답사한다.
국민대학교가 주관하는 풍류나누기 ‘명인시리즈’를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국민대학교에 근무하는 동생에게서 지나가듯 들었던 것인데 이번 프로그램이 마침 판소리 공연이라는 소식에 귀가 번쩍했다. 남편이 “나이가 드니 판소리 같은 우리 가락이 좋아진다”는 말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 이참에 나도 한번 들어보자’라는 생각에 급히 공연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공연장의 운치 또한 그만이었다. 국민대학교 후문 옆에 멋진 고택이 자리하고 있었다. ‘명원민속관’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60칸짜리 양반 고택인데 원래 구한말 한성판윤을 지낸 한규설 대감의 장교동 집을 도시개발과 함께 이 자리로 이전한 것이란다. 북한산 자락을 끼고 솟을대문, 사랑채, 안채, 별채, 행랑채뿐 아니라 연못이 조성된 녹야당이라는 이름의 초당까지 그야말로 그윽한 도심 속의 휴식처였다.
공연은 안채 대청마루에서 열렸다. 병풍을 둘러친 앞쪽이 무대이고 북이 놓인 아래쪽에 가지런히 방석이 놓여 있었다. 이 또한 정겨웠는데, 낡아서 부실한 무릎이 견뎌줄 것인지 걱정이 앞섰다. 오늘의 주인공 판소리 창은 전남대 예술대학 국악과 교수이자 중요무형문화재인 전인삼 명인이다. 등장하자마자 자신은 인삼이지만 형님은 산삼이라는 우스갯소리로 분위기를 휘어잡는다.
도입부 ‘진국명산’이라는 단가를 디저트로 삼은 뒤 곧이어 ‘춘향가’ 중 ‘십장가(十杖歌)’로 넘어갔다. ‘십장가’는 이름 그대로 변 사또의 수청을 거절한 춘향이 곤장 열 대를 맞는 장면이다. 매를 맞을 때마다 그 숫자에 맞추어 고사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처연한 심사를 표현하는 노래다. 명창의 쇠를 긁는 듯한 탁성으로 슬픔을 고조시키니 가슴을 저미는 아픔이 전해졌다.
두 번째 노래는 ‘흥부가’ 중 ‘놀부 박 타는 대목’이다. 동생 흥부가 떨어져 다친 제비 다리를 고쳐주고 큰 복을 받은 사실에 샘이 난 놀부는 일부러 제비 다리를 제 손으로 부러뜨린 뒤 고쳐주고 역시 같은 복을 기다리다가 혼이 나는 대목이다. 앞의 ‘십장가’와는 달리 재미와 해학이 넘친다. 그래서 리듬도 주로 휘모리장단과 중모리장단이 많이 쓰인다. 창자도 흥이 나서 발짓 몸짓을 하며 청중을 웃긴다.
판소리는 세계에서 유래없는 우리만의 고유한 음악 장르다. 당시의 하층민을 중심으로 이런 음악이 탄생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러나 사설 내용은 사대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대단히 수준 높은 현학적인 고사들로 이루어졌다. 흥미로운 것은 마당극 형태의 이런 음악이 당시 상류층의 지원으로 공연되었다는 점이다. 마치 르네상스 시절의 피렌체의 메디치가 같은 스폰서십을 연상케 한다.
내용을 듣고 있자니 한국적 정서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개 주제를 권선징악으로 뭉뚱그리지만 그런 교훈적인 면은 양반 스폰서에 대한 립 서비스이고 내면에는 강렬한 반항의식이 숨 쉬고 있다. 권력이나 신분을 이용한 갑질에 대한 저항정신은 오늘날과 다를 바 없다는 느낌이다.
창과 고수의 북소리가 어우러지는 중에 한 시간 반이 후딱 지나갔다. 무아지경에서 깨어나자 그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무릎이 비명을 지른다. 다리는 아프지만, 우리 정서의 정체성을 확인한 뿌듯함이 더 컸다. 그런데 TV의 국악 프로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민속극장풍류’는 내가 관련하는 기관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 시간이 날 때마다 자주 찾는다. 담장 하나 너머로 소나무 숲이 울창한 선정릉이 있어 주변 경치도 무척 아름답다. 높은 빌딩 숲 가운데 넓은 능이 있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민속극장풍류는 우리나라 무형문화재를 보존·전수하는 ‘국가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 건물 안에 있다. 전수교육관은 명칭 그대로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와 전승자를 위한 작품을 전시하거나 무대에 올리는 등 민족 정체성의 근간이 되는 전통예술의 버팀목 역할을 한다. 반원형의 아담한 공연장으로 무대와 객석의 거리가 가까워 출연자들의 표정과 숨소리, 손끝 떨림까지 볼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이러한 공간의 특성상 예전 풍류방(風流房)이나 마을의 넓은 마당에서 열렸던 여러 가지 전통 마당놀이 등을 시연(試演)하기 좋은 공연장이다. 매주 금요일은 무형문화재 예능 종목을 소개하는 상설공연으로 판소리, 굿, 탈춤, 민요, 가야금 등 다양한 주제의 볼거리가 마련돼 있다.
가능하면 공연시간보다 1시간 정도 일찍 나서서 가족과 함께 능 산책을 한 후 공연 관람을 하면 더욱 알찬 시간이 될 것이다. 또 인근에 직장인들의 경우 접근성이 좋아 퇴근 후 관람하기에도 제격이라 말한다. 한 달에 무료공연을 열흘씩이나 하는 데다가 오후 3시에서 7시 30분 사이에 시작한다. 돈 없고, 시간 없고, 거리가 멀다는 핑계를 한 번에 없앨 수 있는 곳이 있다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2018년 6월 극장 ‘풍류’ 무료공연일정
△1일 19:00 ‘발탈’ 문영식(국가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 전수교육조교) △5일 19:30 ‘거문고산조’ 김선한(국가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산조 전수교육조교) △8일 20:00 ‘가곡’ 김경배(국가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예능보유자) △9일 17:00 ‘강령탈춤’ 김정순, 손용태 외 강령탈춤보존회 (국가무형문화재 제34호 강령탈춤) △10일 17:00 ‘경기민요’ 김혜란(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전수교육조교) △12일 19:30 ‘경기민요’ 이춘희(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14일 15:00 ‘판소리’ 송순섭(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 △15일 19:30 ‘판소리고법’ 정철호(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고법 예능보유자) △16일 15:00 ‘발탈’ 조영숙(국가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 예능보유자) △23일 17:00 ‘서도소리’ 김광숙(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예능보유자) △25일 19:30 ‘거문고산조’ 김영재(국가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산조 예능보유자) △29일 19:30 ‘판소리’ 신영희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
자세한 일정 확인 및 문의는 한국문화재단 홈페이지를 통해 가능하다.
나는 궁벽한 서해안의 한촌(閑村)에서 태어나 중학교 시절까지 보냈다. 소나무가 아주 많은 곳이었다.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 ?~1866)도 이곳을 다녀간 후 “그곳에 소나무가 많다”고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적었다. 장터 옆 중학교까지는 시오리 길이라 왕복 30리 길을 매일 걸어 다녔다. 신작로 주변의 야트막한 산에도 소나무가 지천이었다. 운동장 서편에는 노송 한 그루가 푸른 잎과 검붉은 보굿(껍질)을 자랑하며 개교 68년이 지난 지금도 모교를 지키고 있다. 뒷동산도 솔밭이라 때론 그 그늘 아래 낮잠을 자며 쉬기도 했다.
송화가 만발하는 5월 무렵 꽃가루를 모아 다식을 만들어 입에 넣으면 달콤하고 매콤한 맛이 목에 오래 남았다. 새순으로 빚은 송순주(松筍酒)의 솔 향도 그만이다. 살아서 수백 년, 베어져서도 궁궐이나 한옥의 기둥과 서까래로 또 수백 년을 버텨내니 나무 ‘목(木)’에 어른 ‘공(公)’을 붙여 예찬할 만하다.
소나무 화가로 첫손을 꼽는 소산 박대성(小山 朴大成, 1945~) 화백은 이 땅의 굴곡진 역사를 헤쳐 온 예술인이다. 해방둥이로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3세에 어머니를 여읜 그는 한국전쟁 직전 한의사였던 아버지마저 잃는다. 빨치산에게 ‘반동 지주’로 찍혀 칼에 맞아 즉사한 것이다. 당시 등에 업혀 있던 박 화백도 왼팔을 잘렸다. 그의 애절한 삶은 그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쪽 팔만으로만 살아온 신산한 일상에서도 “제사 때 둘러친 병풍의 그림과 글씨를 따라 그리는 것이 좋았다”고 회고한다. 예닐곱 살 때, 새들이 와서 부딪쳤다는 신라의 황룡사 벽 ‘노송도’를 그린 천재 화가 ‘솔거’ 이야기를 교사였던 형에게서 듣고 화가의 꿈을 다졌다. 신체의 불구를 야유하던 철없는 학우들 틈에서 내성적이고 비사교적이었던 그는 더 이상 학교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의 학력은 중학교까지가 전부였다. 20대 때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1892~1979) 화백과 서예가이자 미술평론가인 석도륜(昔度輪, 1923~)을 찾아가 잠시 지도를 받았고 독학의 고행은 계속되었다. 1970년대엔 국전 8회 입선, 1980년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다. 대상 수상은 그의 작품이 종래의 화풍을 파격적으로 벗어난 독창성과 창의성을 인정받은 쾌거였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실경(實景)의 맥을 이으면서도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 1897~1972), 소정 변관식(小亭 卞寬植, 1899~1976) 같은 대가의 반열에 오르고자 열과 성을 다해 그리고 또 그렸다. 1990년대에는 현대미술의 정체성을 찾고자 미국 뉴욕에서 1년여를 보냈다. 그때 “내 것을 모르고 남의 것, 서양이라는 뚱딴지부터 찾았구나” 하며 깨달았다. 귀국 즉시 경주 불국사를 찾아 그곳에서 1년 동안 사찰생활을 했다. 1995년에는 경주 삼릉(三陵) 지역으로 하향한다. 어쩌면 유년기에 가졌던 아련한 ‘솔거’의 꿈을 성취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후 박 화백은 회화 435점, 서예 182점, 벼루·먹·붓 213점 등 도합 800여 점을 경주시에 기증, 2015년 8월 경주시 엑스포공원 내 아평지 인근 연못가에 우뚝한 ‘솔거미술관’을 개관했다. 문기(文氣) 어린 그의 작품 중에서도 용(龍)의 형상을 닮은 노송도(老松圖)는 가히 압권이다. 이 그림[사진1] ‘송풍라월도(松風蘿月圖)’는 소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과 나무에 감긴 담쟁이덩굴이 달빛 아래 흔들리는 아취(雅趣)를 갈필로 단숨에 붓 놀린 작품이다. 성긴 여백에 달빛 가득한 정경이 솔잎 사이로 고즈넉하다.
우리 부부가 서울 종로구 부암동의 홍소안(洪小岸, 1958~) 화가를 찾았을 때 그는 화실 바닥에 엎드려 붓질을 하고 있었다. 200호가 넘는 화폭 위로는 노송 두 그루가 용 비늘 같은 두꺼운 껍질과 부딪고 있었다. “제 고향 전남 곡성에 있는 소나무를 현장에서 일주일 스케치한 뒤 옮겨 그리고 있어요.” 화실 창 너머로 인왕산 등성이와 좁은 길 사이로 소나무가 나란히 보였다. 여기저기 벽에 걸린 크고 작은 그림도 모두 소나무뿐이었다. “10여 년 전에 이곳으로 이사해 인왕산을 매일 산책하며 소나무를 깊게 만났지요. 그 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며 큰 소나무들을 미친 듯이 찾아다녔고, 현장에서 며칠씩 머물며 그렸지요.” 그는 화폭의 질감을 돋보이게 하려고, 흰 광목에 흰 물감을 발라 말린 뒤 손으로 비벼 구긴 다음 뒷면에 물감을 바르고 다시 뒤집어 색을 입히는 배체법(背彩法)을 활용했다.
홍소안이 개발하다시피 한 이런 화면의 구성은 소나무의 음영과 굽은 가지, 솔잎의 입체적인 표현에 아주 적합하다는 평을 받게 되면서 소나무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했다. 일찍이 한국화로 국전에서 입선과 특선의 결실을 거둔 것도 오로지 독학으로 이룬 성과였다. 화선지를 사용하며 익힌 선염(渲染)의 묘를 광목에 아크릴 물감으로 실현해보기를 수년간. 시행착오를 겪으며 이뤄낸 1998년 ‘한국의 소나무 전(展)’은 그의 작품세계에 큰 획을 그어주는 전기가 되었다. 그를 수차례 만나 보니 실경(實景)의 “소나무를 통하여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며 자신이 속한 시공(時空)을 기록하고, 언제나 푸른빛을 잃지 않는 우직하고 고집스런 꼿꼿함은 그의 성정과 매우 닮아 있다”는 평자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인왕산 소나무’[사진2]는 그의 화실에서 떼어온 작품이다. 인왕산 기슭에서 지금도 잘 자라고 있는 소나무 세 그루를 광목 위에 옮긴 그의 대표 작품이다. ‘자신의 작품을 좋아하고 화실을 찾아간 고마움에 다섯 달 분납하도록 편의’를 주어 위층으로 오르는 계단 벽에 걸고 매일 바라보며 소나무의 정령(精靈)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나무 중에 으뜸인 소나무는 언제 보아도 범접하기 어려운 신령함이 있다. 그런 소나무를 즐겨 그리다 보면 곧 소나무의 고상한 기(氣)가 화폭에 젖어들어, 보는 이들의 마음까지 맑게 한다.
조선 풍류 화가 혜원 신윤복과 겸재 정선의 대표작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바람을 그리다 : 신윤복‧정선 展’을 5월 24일까지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디지털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지난해 11월 24일부터 개최한 이번 전시는 두 거장이 남긴 우리의 멋과 혼을 오늘날 미디어 아트 기술로 재구성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신윤복 화폭에 담긴 감각적인 필치와 색채, 치밀한 화면구성을 낭만적인 대형 애니메이션화면에 옮겼다. 또, 정선의 독창적인 시각과 혁신적인 필법은 모던한 미디어아트 작품으로 되살아났다. 진경풍속과 진경산수 걸작들에 현대 기술에 접목해 창조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함으로써 현재 우리가 가진 진경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아울러 간송미술문화재단은 신윤복과 정선의 주요 작품들을 전시한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첩인 ‘혜원전신첩’(蕙圓傳神帖, 국보 제135호)의 ‘단오풍정’, ‘월하정인’, ‘쌍검대무’ 등 원작 전체를 한눈에 감상할 기회다. ‘해악전신첩’은 정선이 금강산의 명승지들을 원숙한 솜씨로 그려낸 최절정기의 작품으로 학술적, 예술적으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지정이 예고됐다.
한편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정선이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의 명승지를 소재로 그린 대표작 3점을 선정해 특유의 표현 기법과 더불어 그 안에 담긴 화가의 관점과 창작 원리까지 보여주고자 했다. 장대한 금강산을 기하학적으로 묘사한 3D모션그래픽부터 불정대의 까마득한 폭포수를 아름답게 승화한 프로젝션 맵핑까지, 압도적(가로 21m, 높이 5m) 규모의 디지털 콘텐츠에 실감 나는 음향효과를 더해 장엄한 풍광을 입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특히 신윤복과 정선이 그려낸 한양과 금강산을 하나의 여정으로 묶어 마치 원테이크 뮤직비디오처럼 디지털 퍼포먼스를 연출하는 등 다양한 미디어와 설치 작품이 원작과 어우러져 전시의 가치와 흥미를 더한다.
이영희 한복디자이너가 재현한 ‘혜원전신첩’ 속 인물들의 화려한 의상과 이이남 작가가 정선의 ‘금강내산’과 ‘단발령망금강’을 모티브로 제작한 미디어아트 작품도 이색적인 볼거리다. 더불어 ‘혜원전신첩’의 다양한 풍속 장면을 SNS 포스팅 형태로 재치 있게 해석해 그래픽월로 재구성한 섹션도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한다.
어느 날 인생 이모작을 잘 준비했다는 지인을 만나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의견의 일치를 본 부분이 있었다. 이제 남은 시간엔 하고 싶었던 것을 하고, 좋은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것이었다. 또 죽을 때까지 공부를 멈추면 안 된다는 것. 하기 싫은 일이나 시험을 위해 하던 공부에서 해방되었으니 허락된 시간을 누리자는 생각이었다.
인문학 책을 함께 읽고 나눌 그룹을 찾다가 독서클럽은 아니지만, 글 쓰는 훈련을 하는 그룹이 있어 탐색 겸 백화점 문화센터에 갔다. 보통은 말 잘하는 사람이 글도 잘 쓰지만, 글을 잘 쓰는 사람 모두가 말을 잘하는 것 같지는 않다. 가끔 글은 좋은데 강의는 엉망인, 작가 반열에 오른 분을 만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잠깐 들어본 강의가 맘에 척 달라붙어서 계속 듣게 되었다. 입을 벌릴 때마다 주옥같은 박식함이 무슨 보석처럼 인생의 경험에 녹아 나오면 수업 내내 행복한 마음으로 강의를 경청하곤 했다. 3개월 12만원 정도의 비용으로 주 1회 1시간 30분씩 듣는 강의였다.
수필을 쓰고 퇴고를 거치며 글쓰기를 연마하는데 인간이 살아가며 경험하는 솔직한 표현들이 좋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이 따스함으로 가만가만 스밀 때는 저절로 눈이 감긴다. 게다가 마음에 드는 수필을 외워서 문학회의 ‘연간 행사’로 무대에 올라 낭송하게 되었다. 원하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처음엔 외운다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요령은 그냥 반복해서 읽는 수밖에 없다. 어느 단계가 되면 저절로 외워진다. 외우다 보면 작품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되고 또 독자에게 그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는데 이 과정은 좀 힘들어도 얻는 것은 그 이상이다. 좋은 작품을 외우게 되면 글쓰기에도 상당한 도움이 된다. 부수적으로 발성, 호흡에 대해서도 기본 훈련을 하게 되어 발음이 정확해진다.
처음에는 무대에서 느낌을 전달하기가 쉽지 않고, 무대 울렁증이 있는 사람도 있어서 열심히 외웠어도 보통 7분 정도 소요되는 중간에 잊어버리거나 어색해져서 진땀을 흘리기도 하지만 곧 익숙해진다. 한번은 남여 듀엣으로 아포리즘 고전 수필 낭송을 했었다. 조선 인조 때 문신으로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한문 4대가의 한 사람인 ‘신흠’의 아름다운 수필이었다. ‘숨어 사는 선비의 즐거움’으로 한가로움과 풍류를 전하는 내용이었다.
필자와 남자는 함께 호흡과 감정을 조절하며 연습을 여러 번 했다. 작은 몸짓까지도 맞추며 우린 무대 위 완벽한 커플로 탄생할 참이었다. 그는 감청색 양복을, 필자는 양반가의 여인답게 하늘색 모시 저고리와 연청색 모시 치마를 기품 있게 받쳐 입고 한 손에는 부채를 들고 무대에 섰다. 인사도 맵시 나게 연습한 대로 잘했다.
이제 마이크를 숨소리 같은 부담스러운 잡음이 나지 않도록 조절하며 낭창거리는 소리로 낭송을 시작했다. 그와 필자는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선비의 멋스러움과 풍류를 살려가며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켜나갔다. 필자의 대사가 끝나고 그가 할 차례가 되었다. 시작을 잘하는가 싶었는데 아뿔싸! 이상하게 같은 대사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두 번쯤 그러더니 소리가 끊겼다. 난감했다. 필자는 그의 대사까지 외우지 못했다. 스토리가 연결되는 글은 잊어먹어도 비슷한 내용으로 이어나갈 수 있지만 이런 수필은 단락이 끊어져 있어 외우기도 어렵고 중간에 잊어버리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수도 있다. 20개 정도의 단락을 각자 외우고 있었는데 단락의 시작을 찾아야 꼬이지 않고 술술 나오게 되어 있다. 그는 순간 당황했는지 단락의 처음부터 다시 낭송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끝을 맺었지만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혹시 잊었으면 자연스럽게 다시 시작해도 사람들은 반복이겠거니 생각하기도 한다. 당황하지만 않으면 그럴 일은 별로 없다.
묵독이 아닌 낭독의 문화 즐기기
시는 글이 짧고 은유가 많아 청취자에게 전달이 쉽지 않을 때도 있지만 수필은 작가의 체험에서 나온 글이라 이해가 쉽고 공감이 잘된다. 그 대신 시보다는 외워야 할 분량이 많다는 어려움이 있다. 시와 비교해서 감정을 잘 살리면 즐거운 시간이지만 아니면 지루한 시간이 되기도 쉽다.
작품에 따라 무대 의상이나 헤어스타일, 효과음악을 고르고 표정과 작은 몸짓도 연구하고 무대에 오른다. 작품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와 마치 새로운 연인을 만나듯 가슴이 뛰고 활기가 넘친다.
필자는 4년째 기획, 연출, 낭송을 즐겁게 하고 있다. 함께하는 회원(10명)과 1년에 두 번씩 공식무대를 만들고 외부 초청 낭송에도 응한다. 작가의 강연 때 그의 작품을 낭송해 강의를 풍요롭게 하기도 한다. 눈으로만 읽는 것보다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는 효과가 있다.
꼭 문학단체가 아니라도 격조 있는 모임에서 옛 선비들이 시조를 읊듯 시나 수필 낭송을 원할 때도 있다. 종종 감동한 관객이 끝나도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보람이다. 얼마 전 어떤 문학회 출판기념회에서 초청, 낭송을 했는데 70명 정도 모이는 조촐한 모임이었다. 그 모임 지도교수님의 대표작 낭송이 끝나자 교수님은 벌떡 일어나 젖은 눈으로 다가와 필자에게 악수를 청하며 고맙다, 잘했다, 문우들은 그 작품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 작품이 이렇게 좋은지 몰랐다고 말했다. 낭송하는 시간은 마치 앞에 앉은 사람이 필자에게 눈을 맞추고 자신의 얘기를 진솔하게 털어놓는 듯하다. 그래서 몰입하면 깊은 내면을 함께 여행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수입은 낭송 작품당 보통 20~30만원을 받는다. 외우는 데 걸리는 시간이나 노력을 생각해서 그리 주시는 것 같다. 필자는 현재 두 개의 작품이 예약되어 있다. 하나는 피천득 기념 강좌에서 선생님의 작품 ‘보스턴 심포니’를 낭송하고, 또 하나는 일현수필문학회 송년회에서 손광성 선생님의 ‘누나의 붓꽃’을 낭송하기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