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어떤 인류도 경험하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길들이 펼쳐져 있다. 거미줄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는 길은 당연한 듯하지만 생각할수록 경이롭다. 단순한 길이든 먼 길이든 길이라면 출발지와 도착지는 있어야 한다. 더구나 끊어져서는 안 된다. 그런 길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쉬지 않고 꿈틀대며 흐르고 있다. 물리적인 길도 확장되고 있을 뿐 아니라, 길의 개념도 넓어지고 있다. 이미 많은 길이 있는데도 새로운 길은 여전히 열리고 뜸한 길은 닫히고 있다. 비행기 길도, 뱃길도, 정상을 향한 길도, 꼭대기에 오르기보다 빙 둘러가는 둘레길도 이 나라에서도 저 고을에서도 유행처럼 만들어지고 있다.
그런 길을 찾아다니던 나는 1990년 초, 오래 사용하지 않아 이름만 있고 오히려 끊긴 길을 찾아 나섰다. 비단길이었다. 그 길을 취재하며 카라코람 하이웨이라 불리는 산중 하늘길을 따라 흐르는 인더스 강에 닿았다.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국과 파키스탄의 국경을 지나 일주일을 쉬지 않고 물과 함께 내려가는 그 길이 내겐 충격이었다. 수시로 그 길들의 여러 모양이 가끔 꿈에 나타난다. 최근에도 난 그 길을 꿈에서 보았다. 세계 3대 산맥인 카라코람, 힌두쿠시, 히말라야가 모인 자리에 우뚝 솟은 하나의 바윗덩어리 낭가파르바트! 그 자체의 높이만으로도 끝이 보이지 않으리라 짐작했는데 중턱에 구름이 걸려 있다. 신들이 음식을 만드느라 생긴 연기가 구름이란다. 그렇게 속세와 단절된 정상이 구름 사이로 살짝 보이며 푸른 하늘과 잿빛 바위가 아득하다. 자꾸 뒤돌아보며 내려가던 길이 아련하다.
이곳이 바로 우리 조상들의 시간과 공간이 묻혀 있는 비단길 중 가장 험준한 실크로드의 한 자락이다. 나는 경주에서 로마로 이어진 사연 많고 한까지 맺힌 우리의 그 비단길을 이스탄불 시장의 초대 사진전으로 연결시켰다. 2011년 가을, 이스탄불 탁심공화국 예술 갤러리 막셈(Taksim Cumhuiyet Sanat Galerisi-Maksem)에서 개최된 을 통해서다. 이 전시를 주최한 카디르 돕바쉬 이스탄불 시장은 초대장에서 비단길의 종착점을 로마로, 출발지를 서라벌로 연결시켰다. 더구나 전시의 주제가 멈추지 않고 형체가 없는 바람과 물을 주제로 한 풍류였기에, 왜곡된 우리의 조선과 고려를 넘어 신라와 대진국, 백제, 고구려, 가야, 북부여, 고조선 배달겨레를 관통하는 중앙아시아 나라들과 연결된 시간과 공간의 뿌리를 확장할 수 있었다. 오래된 미래가 유전된 풍류의 맥은 앞으로 21세기 아시아와 유럽이 하나로 연결되었던 아름답고 부드러운 새 시대의 비단길을 다시 이을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요즘 세상에서는 가상공간의 길이 고전적 개념의 실제 길보다 더 유용하고 바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원거리 통신이나 방송국에서 쏜, 한 방향으로만 흐르던 일방적 전파의 길도 이젠 인터넷을 이용한 다양한 다자간의 형태로 엉켜 전 인류를 하나로 묶는 길을 내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라도 길을 만들 수 있게 된 세상이다. 이제 원하는 모든 길은 준비되었다. 더 이상 하드웨어적인 길은 문제될 것이 없는 세상이다. 길은 태생적으로 도구와 효용의 성격이 강하다. 길이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문제는 준비된 그 길에 ‘무엇을 싣고 갈 것이며, 무엇을 전할 것인가?’라는 소프트웨어적 가치다. 우리 어른들이 얘기했던 만남을 위한 장이 길 자체보다 중요해진 시대에 우린 살고 있다. 만남과 교류를 위한 신시(神市)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피부색과 민족을 넘어 상대를 존중하는 성숙한 만남, 새로운 생각과 서로의 아름다움을 인정하고 나누기 위한 길인 것이다. 이러한 일을 함께 담당할 우리 아이들에게 전해줄 우리의 오래된 미래! 우리가 어른들에게 이어받은 우리의 오래된 미래! 나만을 고집하는 것에서 우리의 가치로 아우르는, 아시아와 유럽을 이어줄 시대정신!
넓은 새 땅 새 벌, 시베리아에 우연처럼 펼쳐진 작은 민족들과 지구의 등뼈 같은 중앙아시아의 사람들이 두 팔을 들어 올리는 그날이 바로 우리가 함께 기다리는 오래된 미래인 것이다. 여기 동방의 해가 돋는 우리나라에서 우리와 우리 아이들이 길의 한 자락을 잇고, 저기 멀리 서방에선 이런저런 사연으로 헤어졌던 또 다른 우리의 아이들이 이 길을 이어오는 소리가 차츰 커지고 있다. 이제 지구 상에 다시 열리길 기다리고 있는 큰길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오래된 비단길뿐이다.
함철훈(咸喆勳) 사진가·몽골국제대학교 교수
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액션대회(NGO의 유엔총회)서 대상 수상. 저서로 , 등이 있다.
백수는 옛말로는 한량, 지금 용어로는 프리랜서가 아닐까. 백수는 여유있게 산다. 경제적으로 반드시 풍부하지 않지만 정신적 자유를 만끽하고 산다. 『열하일기』를 쓴 박지원, 퇴계 이황, 이덕무, 이익, 김시습, 김삿갓 등이 대표적인 백수가 아닐까. 백수가 되는 동기와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다. 공통적인 기질은 구속받고 사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리라. 연암 박지원 선생은 과거에 일부러 붙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고 알려진다. 주위 기대에 떠밀려 과거 보러 가면 시험지를 안 내고 나오거나 문제에 대한 답 대신 관련없는 그림이나 낙서를 제출하였으니 낙방을 자초하였다고 보여진다. 어렵게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나가도 당파싸움에 연루되어 잘못되면 귀양가거나 사약을 받는 일이 다반사였으니 생명을 거는 위험한 곡예이었다.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으로 보아 과거에 태어났으면 당연히 백수가 되었을 것이다. 백수는 벼슬길을 포기하고 풍류를 즐기거나 저술활동을 하는 등 자유인의 삶을 살았다.
10여년 전에 자의반타의반으로 백수의 생활의 접어들어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아니 즐기는 편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치 보지 않고 마음대로 사는 자유를 즐긴다. 백수도 생활을 하여야 하니 아주 일을 안 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양심과 철학에 거슬리지 않는 일이 주어지면 한다. 단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무턱대고 일을 선택하지는 않을 따름이다. 일이 주어지면 하고 일이 없으면 하고 싶은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쉰다. 정기적인 직장인이나 사업가에 비해 극히 적은 수입밖에 벌지 못한다. 그래서 단순, 소박하게 사는 방법이 몸에 배었다. 차를 처분하고 채식위주로 식사하며 골프를 안 치는 등 단순한 삶을 산다. 마음이 편하니 물질적인 부족은 큰 문제가 아니다.
친구 중에 존경하는 백수가 있다. 15년 전에 대기업 임원을 과감히 그만 두고 백수로 산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올려 수많은 페친을 유지한다. 일년에 몇 차례씩 페친들의 요청에 의해 전국유람을 다닌다. 상당한 글 솜씨와 풍성한 이야기거리를 지니고 있어 출판이나 강의 요청을 받아도 그럴 수준이 아니라고 단호히 거절한다. 글도 절대 유료로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닌다. 그래야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다고 한다. 마음에 안 맞으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할 말을 다 한다. 그래 별명이 골통이다. 백수 사부로 모셔야 할 친구이다. 백수도 등급이 있는 셈이다. 도저히 넘겨 보지 못할 수준이다. 백수라고 위축될 필요가 없다. 결국 나이가 들면 다 백수로 돌아간다. 욕심내지 않고 현재의 백수 수준에서 소박하고 멋있게 살려고 한다.
어린 시절 어른들로부터 자주 들은 말이 있다. 바로 ‘저놈 인간 안 될 놈’이라는 말이었다. 이 말을 들으면서 항상 어떻게 사람 노릇하는 인간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닮고 싶은 롤 모델을 찾는 것이었다. 꿀맛을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한 숟가락 입에 넣어주면 끝나는 것 아닌가. 필자가 그렇게 지나한 노력으로 찾아낸 것이 바로 퇴계 이황이었다.
1. 사람의 근본인 효의 실천
이황은 어린 시절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 빗고 옷과 관을 바르게 하고는 어머니를 문안했는데 한 번도 어긋남이 없이 명랑하고 공손하며 삼갈 것은 삼갔다고 한다. 여럿이 생활할 때도 종일 단정히 앉아 옷과 띠를 반듯이 하고 말과 행동은 삼갔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이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늘 실천한 효심이 밑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다.
2, 나라를 걱정하되 벼슬에 연연하지 않는다
벼슬에 올라도 받지 않아야 마땅한 것이 있다면 힘써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는 것을 도리라고 여겼다. 자기의 분수를 헤아리지 않고 마땅한지 여부도 묻지 않고 그저 받음은 있되 사양함은 없으며 나아감은 있고 물러남이 없다면 임금을 섬기는 공손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의 능력은 고려치 않고 연줄을 이용하여 승진 운동만 하는 현대의 공직자에게는 큰 귀감이 될 몸가짐이다.
3.건강해야 지혜로운 삶을 산다
술이 사람을 망친다고 탄식하며 술이 한사람에게 들어가서는 그 몸을 망치고 한 나라에 들어가서는 나라를 엎어버리는 독이라고 생각했다. 최고의 한약인 중화탕(中和蕩)은 의사가 못 고치는 병을 고친다고 하는데 중화탕은 약초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중화란 우리 양심의 본래 모습과 함께 세상 살이하면서 흔들리는 양심이 본래의 지극히 선한 상태로 돌아가면 만 가지 병이 생기지 않고 헛된 기운이 침범하지 않고 오래도록 편안히 살수 있다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4, 배움이 큰 즐거움이다
높이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낮은 곳에서 시작하고 멀리 가기위해서는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지금 한발도 들어 올리지 못하는데 갑자기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고 꾸짖거나 아직 수레바퀴가 구르기도 전에 멀리 나기기만을 바란다면 성공할 수 없다. 배우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여기고 밑바탕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 빨리가기보다 가는 방향이 옳아야 한다.
5, 자연은 큰 스승이다
선생의 자연사랑은 유별났다. 고향에서 지낼 때나 벼슬살이할 때 임지에서도 맑고 아름다운 자연을 벗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풍류를 즐기는 선비다운 삶을 영위 할 수가 있었고 많은 풍류시를 남기고 있다. 각박해 지려는 현대의 삶에도 틈틈이 자연을 노래하면 마음 부자로 삶을 살 것 같다.
선생은 실천을 강조했다. 입으로만 나불되고 실제 행동은 딴판인 엉터리 지식 꾼을 배격했다. 지식과 실천은 수레의 두 바퀴나 새의 두 날개와 같다. 선생의 삶을 년도 별로 잘 정리된 '퇴계 선생에게서 배우는 인생의 지혜' 라는 책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테레사 수녀의 통신에 따르면 ‘인생이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이다. 덧없고 허무한 게 삶이라는 얘기다. 과연 그렇지 않던가? 부평초처럼 떠돌다 허둥지둥 저승에 입문하기 십상인 게 삶이다. 그저 따개비처럼 견고하게 들러붙은 타성의 노예로 간신히 살다가 파장을 보기 쉽다. 어이하나? 저마다 나름의 대책과 궁리가 있을 터인데, 백발의 사진가 이종원씨(72)는 산골로 들어가는 일을 방책으로 삼았다.
내내 도시에서 살았던 그는, 인생의 다양한 골목골목을 편력했다. 공무원으로, 사진가로, 교수로, 언론인으로 뛰며 존재를 돋우길 거듭했다. 때로는 돌부리에 걸려 엎어지거나 뒤집어졌으나, 특유의 깡과 오기를 발동한 나머지 얻은 것도, 이룬 것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이, 마음은 늘 산골의 자연으로 향했다. 나 마침내 산중에 살리라! 그런 작심을 무시로 다지며 근 20년쯤을 고민하고, 모색하고, 탐색했다. 내가 발붙일 곳이 어디냐, 하며 여기저기 국토의 많은 곳을 훑었다는 게 아닌가.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에, 마침내 귀촌을 결행했다. 더 미룰 수 없는 결정적인 상황 때문에. 그가 애지중지하는 아내 이현숙씨(70)가 중병에 걸렸던 것. 두 종류의 암에다가 당뇨병까지 겹쳤으니 위중한 형편이었다. 공기 좋고 물 좋은 산골에서 요양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딱히 모아 둔 자금이라는 것도 없었지만 일을 서둘렀다. 그렇게 해서 옴팡지고 외지고 수려한, 충북 보은 땅 팔메실의 산골짝에 둥지를 틀게 되었다.
“제가 말이죠, 사진 장르 중에서도 생태사진, 특히 곤충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라는 1시간짜리 영화를 만들어 각광을 받기도 했지요. 그러면서, 생태사진을 실컷 찍으며 살아갈 수 있을 만한 산골을 갈망하고 찾았어요. 그러던 차에 아내가 중한 병에 걸린 겁니다. 뜸 들일 수가 없었어요. 용케 제가 원하던 산골을 찾아냈고, 곧바로 귀촌을 감행했어요. 모든 것을 다 내려놔야겠다는 생각으로, 갖고 있던 방대한 서적과 자료들까지 다 불 질러버리고, 새롭게 다시 태어나야겠다는 심정으로 산골에 들어왔어요. 아내에게 참회하기 위해서였죠.”
“그토록 참회할 게 많았어요?(웃음)”
“많았죠. 제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지만 무모하게 확 저지른 일들도 많았고, 사기를 당해 곤경에 빠진 일도 있었고, 우쭐대기도 했고, 마누라로서는 참 힘들었을 겁니다. 이제부턴 아내의 병 치료를 위해 순수한 남편 노릇을 해야겠다, 올인해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산골살이를 시작했어요.”
“맘먹은 대로 됐나요?”
“노력한 만큼의 좋은 결과가 왔어요. 귀촌 이후 제가 살림살이를 도맡다시피 했어요. 가령 밥 짓고 국 끓이는 일을 전담했죠. 세상의 거의 모든 아내들은 남편을 위해 사오십 년을 뒷바라지하는데, 그 노고에 보답해야 하지 않겠어요? 적어도 10년쯤은 남편이 가사와 살림을 맡아 빚을 갚는 게 도리라 봅니다. 여하튼, 산골에 살면서 아내의 건강을 회복시킬 수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언젠가 작가 이외수에게서 들은 얘기가 있다. ‘우리 부부는 부부애가 아니라 전우애로 살았다!’ 아내란 사랑스러워 꽃향기를 뿜기 마련이다. 하지만 서방들은 흔히 교만과 방심을 일삼아 숱한 실수를 반복한다. 급기야 맹숭맹숭한 관계로 추락하거나 왕따를 자초한다. 어쩌면 세계평화보다 구현하기 어려운 게 부부간의 화평이다. 그러나 이종원씨는 귀촌을 통해 부부애를 고양했으니 이게 경사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를 잘 아는 지인들은, 귀촌 이후의 이종원을 두고 이런 논평들을 한단다. 당신, 새사람이 됐구먼.
집 앞 계곡에 수력 발전기까지 설치해
월든 호숫가 숲 속에 살았던 H.D소로는, 강인한 스파르타인의 정신이 아니고서는 산골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투의 얘기를 했다. 사실 귀촌이란 낙원으로의 입장 같은 것과는 다르다.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선 응분의 고군분투가 따라야 한다. 이종원 역시 진땀과 비지땀, 팥죽땀을 쏟아야 했다. 솔바람과 꽃향기 그윽한 산중에서 오붓하게 누릴 수 있을 법한 한가한 풍류나 낭만은 오랫동안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냇물이 돌돌돌 흐르는 산자락 둔덕에 터를 잡은 직후 지프차 안에서 잠을 자며 산골살이를 시작했다. 그 얼마 뒤엔 140만원을 주고 중고 컨테이너를 구입해 거처로 삼았다.
“땅은 샀으나 집이 없어서 집을 지어야 했어요. 아내와 함께 컨테이너에서 살며 어떻게 집을 지을 것인가, 궁리하고 설계하고, 나무를 심고 텃밭을 일구고, 그런 뒤에서야 집짓기에 착수할 수 있었어요. 힘든 시절이었죠. 이게 왜 이렇게 됐는가 하면,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제가 말이죠, 평생 돈 욕심 없이 살았는데요, 그럼에도 일을 늘 저질렀고, 결국은 성사시키고 그랬어요.”
“뚝심으로?”
“부단히 노력하는 근성으로.”
“이곳의 터전은 호방한 맛이 있고, 무엇보다 선생의 집이 보기에 좋아요. 주변의 자연과 소박하게, 겸손하게 조화를 이룬 구색이라서.”
“제가 손수 지은 집입니다. 어떻게 하면 가장 좋은 집을 지을 수 있을지, 자나 깨나 연구를 많이 했어요.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자문을 했으나 시원한 답이 나오질 않더라고. 돈을 덜 들이고 좋은 집을 짓는다는 게 사실상 이율배반이라는 걸 알게 되었죠. 그러나 밀어붙였어요. 내 손으로 집짓기의 모든 걸 감당하자는 작정을 하고서 말이죠.”
“건축에 문외한이었던 사람이 단독으로 127㎡(38평)짜리 집 한 채를 손수 지은 거예요?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죠?”
“소소하게 남들의 일손을 빌린 대목들이 있긴 하지만 거의 저 혼자 지은 집입니다. 미리 뒷산에 올라 나무를 베어다가 말려 기둥을 쓸 목재를 준비하는 일부터 시작했어요. 아울러, 건축 시공 현장을 찾아다니며 부지런히 견학했고, 관련 책자들도 철저하게 독파했죠. 집의 설계 과정에선 아내의 의견을 100% 수용했습니다. 제가 원래 과학적인 성향과 재간이 좀 있는데요, 공부하고 연구한 건축 지식들을 토대로 상·하수도 배관, 정화조 설치, 전기 작업 등등 중추가 되는 공정들을 전부 혼자 해냈어요. 그러다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귀촌 4년 만에 착공을 했고, 이후 7년 세월을 이 집에서 만족스럽게 살아왔지만, 외벽 단장이라거나 아직도 미완성된 부분이 남아 있어요.”
“집을 지으며 염두에 둔 지향이 있었겠죠?”
“에너지 자립형 주택을 짓자는 게 목표였어요. 그게 상당히 성공적으로 구현되었어요. 단열을 철저히 하거나 태양열을 이용해 전력 소비를 줄이자는 것, 차가운 냇물을 끌어들여 냉방을 하자는 것, 그런 것들이죠. 집 앞 계곡에 수력 발전기를 설치하기도 했어요. 아직은 완성되지 않아 가동을 못 하고 있지만, 조만간 가동시킬 작정입니다.”
“수력 발전기까지? 놀랍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그렇게 많은 일들을 손수 해치운다는 게 너무 버겁진 않으세요? 그저 적당히 대충 작은 집을 지어 몸 고생을 더는 게 낫지 않나?(웃음)”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탕진이 많았던 게 사실입니다. 집 짓다가 사람이 죽기도 한다던데, 그게 실감이 나더라고.(웃음) 그러나 뭐든 끝장을 보고서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서 어쩔 수가 없더라고요.”
육체노동으로 스트레스를 풀어
장기간의 노역을 통해 근사한 집을 지은 그는 농사도 꽤 많이 짓는다. 몇 해 전에 구입한 6만6000㎡(2만 평)의 임야에 약초를 재배하기도 한다. 예사로운 힘이 아니다. 집념, 또는 깡. 이종원씨의 내부엔 그런 성분이 가득한 것으로 보인다. 살아온 날들의 굴곡을 정직하게 돌아보고, 살아갈 날들의 꿈과 상상을 실현하기 위해 산골에서 새로운 기반을 닦아가는 사람의 온몸에 박혀 있는, 짱짱한 패기. 그걸 열정이라 할 수 있을 터이니 고희를 넘긴 이종원은 여전한 열혈 청년이다. 나로 말하자면, 이왕지사 인생의 늘그막에 조용하고 평온한 산림에 몸을 들였다면, 누추한 산방에서나마 가급적 한가하게 노닥거리며, 이를테면 휘영청 달 밝은 밤이면 먼 곳의 벗을 불러들여 한잔 착실하게 걸치는 식의 도락을 누리며 느긋하게 사는 게 흐뭇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종원씨에 따르면, 유유자적이란 가당치 않은 물건이다.
“시골생활에서 유유자적이라는 게 가능할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물론 집이나 터를 작게 잡아 살아갈 경우엔 여유를 부릴 수도 있겠고, 사실은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저의 경우처럼 일을 많이 벌인 귀촌자들은 온몸으로 투신해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게 마련이에요. 그런 상황을 자청해서 뛰어든 사람에게 그게 고역이랄 것도 없고 말이죠. 저는 육체노동을 아주 좋아합니다. 일상의 스트레스를 노동으로 풀고 있어요.”
“산골생활의 즐거움이 노동에 있는 거예요?”
“제가 말이죠, 일을 안 하면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습니다.(웃음) 그렇다고 일만 아는 일벌레로 오해는 마시라. 저 역시 자연이 주는 기쁨과 행복에 충분한 즐거움을 누리며 사니까. 원했던 일을 실현해 나가고 있다는 성취감! 그게 무엇보다 큰 즐거움이고 말이죠.”
“선생께서는 산골에 살며 실컷 생태사진을 찍고 싶다 했어요. 그 점에서도 많은 성취가 있었나요?”
“사진가가 사진 작업을 하는 건 날마다 밥을 먹는 일처럼 일상이지 않겠어요? 저에겐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귀촌 귀농에 관한 책, 사진이론에 관한 책, 한국의 자연 풍경을 집대성한 도감, 이 세 가지 책을 준비하고 있어요. 이곳에 사진박물관을 만들어 문화적 공간으로 가꿀 계획도 포기할 수 없고 말이죠. 자연 속에서 발견되는 미적 가치를 승화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겁니다.”
박물관까지라니. 웅장한 포부렷다. ‘늙음’은 때로 ‘낡음’일 수 있다. 그러나 안일하고 범속한 매너리즘을 거부한 채, 산골에서 기운 찬 숫말처럼 양양하게 뛰는 이종원씨는 낡음을 허하지 않는다. 아직은 미완인 게 많지만.
>> 박원식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에는 다산 정약용의 유적지가 있다. 유적지 내에는 그의 생가인 여유당과 선생의 묘가 있고 다산 문화 관, 다산 기념관등이 있다. 참다운 지식인을 대표로 하는 남양주시가 교육의 도시로 거듭난다.
다산 정약용, 한국학의 바다라 일컫는 조선후기 최고 ‘실학의 집대성자’라고도 한다. 19세기초 실학파의 철학적인 입장을 확립한 다산은 ‘다산 학’이라는 거대한 실학의 봉우리인 자신만의 독창적인 학문을 완성한다. 또한 천연두 예방법에 대한 체계적인 글을 썼던 의사이기도 하지만 르네상스적인 인물 이었다고 한다. 그의 관심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영역과 주제들에 이르렀다.
민중의 편에 섰던 그는 선구적인 사상가이며 저술가였으며 법학 가였다. 시인이면서 음악학자 또한 조선의 차 문화에 활력을 일으킨 조선 차의 연구자로 풍류를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다산은 단지 꿈꾸는 자만이 아니고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해결책을 모색했다. 결국 오랜 세월 속에서 각고의 노력과 탐색으로 독창적이고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이 탄생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남양주시의 다산 문화 관에는 그에 대한 많은 저서들로 간단한 소개가 있으며 직접 체험 가능한 체험학습도 있다. 다산 기념관에는 수원 성 축조 과정에 쓰였던 거중기, 녹로 그리고 유배생활을 했던 강진, 다산 초당의 축소 모형 등이 전시되어 그의 위대한 업적들을 한눈에 볼 수가 있다.
그는 출세가도를 달리던 명문가의 고위관료였지만 반대파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남녘의 외진 곳에 유배를 간다. 그러나 신세한탄이나 절망을 하지 않으며 오히려 어떠한 굴욕과 탄압 속에서도 용모를 단정히 하고 의로움에 기 죽지 않으며 마음만은 자유를 만끽하며 당당하게 살아간다.
산수를 벗삼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거나, 때로는 핍박을 받는 백성들을 향한 한없는 사랑으로 펼쳐낸 국가의 총체적 개혁서인 ‘경세유표’와 ‘목민심서’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익숙하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부패하고 썩어가는 국가의 현실을 새롭게 바꾸고, 허물어진 주춧돌을 단단히 하는데 평생을 바친 다산에게 돌아온 것은 18년동안의 혹독한 유배생활뿐이었다.
그는 고향에서는 죽기 전까지 ‘먼 미래를 기다린다’는 사암(俟菴)이라는 호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가 끔찍이 사랑했던 두 아들에게 보냈던 편지의 내용을 기술해본다.
“지식인이 세상에 전하려고 책을 펴내는 일은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책의 값어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해서이다. 나머지 욕하는 사람들이야 신경 쓸 것 없다. 만약 내 책을 알아주는 이가 있다면 너희들은 그가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면 아버지처럼 섬기고, 설령 적대시하던 사람이라도 그와 결의형제를 맺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이 근간이 되어 남양주시가 교육의 도시, 문화의 도시로 거듭나기를 기대해본다.
풍류-이스탄불, 풍류-베이징, 풍류-밀라노, 풍류-홍콩에 이어 풍류-서울 전시회(7월 13일~8월 9일)를 포스코미술관으로부터 초대받았다. 자랑스러운 조상 덕이었다. 그중 이탈리아 밀라노에서는 유럽을 대표해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유럽 예술과 패션의 중심지로 알려진 밀라노는 사진이 태동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런 도시가 2012년 9월 24일부터 말일까지를 ‘한국문화주일’로 선포했다. 우리 영화 등을 밀라노 상영관에서 개봉하고, 밀라노 광장에서 케이팝 공연과 한글을 소개하는 문화행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풍류-밀라노 사진전이 밀라노 사진학교(FORMA) 전시실에서 열렸다. 이 행사는 유럽 최초로 우리 문화주일을 선포하는 이탈리아 대한민국 총영사관과 밀라노시의 공동 축제였다.
전시 관람객은 날이 거듭될수록 늘었고, 전시작품에 대한 진지한 질문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리 부부는 행복했다. 특히 전시 마지막 날에는 한 관람객으로부터 큰 선물을 받았다. 마감 시간이 임박한 저녁 7시경 관람객 무리에서 한 부인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부인은 작품 아래 붙여진 설명을 우리말로 읽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그녀에게 한국어를 공부하는지 물었다. 그녀는 설명서에 이탈리아어로 쓰여 있어 작품의 콘셉트는 이해했지만, 그 내용을 직접 한국 발음으로 듣고 싶다고 했다. 그러는 사이 관람객들이 둥그렇게 작품 앞에 모였다. 난 그들을 바라보며 작품 설명을 우리말로 천천히 읽어주었다.
“사진도 청각 예술의 소리처럼 증발시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
비록 말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한국의 정서를 이해하려는 관람객들의 열정에 나는 놀랐고,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관람객이 감상을 전해주었다.
“당신의 말을 듣고 작품을 보니 한국은 참 아름답고 고상한 나라란 것을 알겠어요.”
그때 느낀 벅찬 감동은 아직도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젊은 날 뜻도 모르고 겉멋에 흥얼거리던 칸초네 가락이 언뜻 떠올랐다.
풍류를 사랑했던 조상의 멋을 우린 사진기 뷰파인더 안에서 만날 수 있었다.
바람과 물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쉽게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것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특별한 장치가 필요했다. 시간이라는 날줄과 공간이라는 씨줄이었다. 그렇게 그 바람과 물에 맞는 그물을 엮으면서도 그 간격의 밀도가 또한 관건이었다.
내 사진기는 수많은 조합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내가 볼 수 없었던 세상을 사진기는 열어 주었다. 또한 바람과 물은 나라와 민족을 넘어서는 공통의 언어였으며, 창조의 숨결, 흐르는 생명이었다. 이렇게 준비된 사진을 통해, 관객의 내면 깊이 침잠해 있던 낯설음과 낯익음이 되살아나 새로운 이야기 길이 열리길 바랐다. 전시회가 나의 독백이 아니라 관객이 전시회를 완성시키는 주체이길 원했다. 관객과 작가 사이의 바람직한 긴장감.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는 호숫가 살얼음판 위를 걸을 때 전해지는 얼음의 울림을 기대했다.
스틸에는 동영상처럼 프레임마다 이어지는 스토리가 없다. 그래서 전시 중에 우리의 잠재의식 깊이 숨어 있는 이야기가 열렸으면 했다. 더 나아가 우리 조상들이 유언으로 후손들에게 남기고자 유전인자에 새겨놓은 우리 어른들의 오랜 이야기 말이다. 그 새로운 지혜의 이야기 길을 빛으로 나누고 싶었다.
포스코미술관 전시 중에는 초등학교 아이들의 방문이 있었다.
어른과 함께한 의젓한 아이들이었지만, 나는 당황했고 긴장했다. 아이들에게도 너무나 커다란 전시장이라 먼저 그 규모에 지루해하는 기색이 보였다. 먼저 전시장 안을 한껏 달려보게 했다. 여러 아이들의 달리기 소리에 당번 큐레이터가 질겁하여 뛰어 나왔지만 곧 상황을 이해했다. 그렇게 아이들과 아름다움에 대한 얘기를 시작해야 했다. 있는 듯 없는 듯 일하는 바람, 낮은 데로 흐르며 아낌없이 자신을 주는 물…. 그 나이 아이들이 듣기만 해도 웃음이 터지는 ‘똥’ 이 아름다울까? 등으로 족히 한 시간을 넘어, 어느 투어 못지않게 진지한 풍류를 나눌 수 있었다.
특히 이번 포스코미술관 전시에서는 그동안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연재하였던 18편을 가로 50cm로 디자인하여 작품 사이에 진열하였다. 그리고 다큐영상실에서는 예멘의 딸들(daughters of Yemen), 몽골의 색(color of Mongolia), 우리들…(about us…) 세 영상이 각각의 모니터로 상영되어 서로 다른 생각으로 인해 생겨나고 있는 난민들과 전쟁으로 파괴되어 이젠 사진으로만 남게 된 문화재들을 알리는 사진의 힘을 얘기했다.
내가 사진 촬영을 위해 떠나는 여행의 목적지는 오지라 불리는 곳, 그러니까 세계의 변두리나 사람들의 관심이 미치지 않는 구석진 곳들이 대부분이다. 문명으로부터 벗어난 지역이라 불편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문명의 이기로부터 멀어진 순수한 삶의 모습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을 쐴 수 있으니 그 정도의 불편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돌아보면, 잊을 수 없는 경험이나 세상에 하고픈 이야기들도 대개는 그런 오지로부터 바람처럼 불어왔다.
그런 여행 중 피엔지(PNG)라고 불리는 파푸아뉴기니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뉴질랜드에 살고 있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일정을 조정하였다. 더니든(Dunedin). 남섬과 북섬으로 길게 이어진 뉴질랜드. 그 남섬에서도 남동쪽 남극해와 닿아 있는 더니든에서 나는 보고픈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친구가 안내한 바닷가는 한적했다. 아니 우리밖에 없었다. 친구와 두 딸, 그리고 그의 아내와 함께 맞는 바람은 순하고 조용했다, 왜 여기까지 왔는지? 우리 세대는 그렇게 살았다. 많은 말이 필요 없었다.
다음 날 친구가 안내한 곳은 넓은 바다가 한눈에 가득 보이는 높은 절벽 위였다. 절벽 끝에는 등대가 있었고 커다란 새들이 많이 있었다. 처음 본 새였는데 가까이 다가가도 별로 피하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하는 이상한 새였다.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새는 방향도 바꾸지 않고 제 길을 가고, 졸고 있는 새는 뭔가 좀 모자라는 녀석처럼 보였다. 부리를 아예 몸 깊이 묻고 자고 있는 새는 무슨 배짱인지 내가 곁에 가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아주 가까이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야생의 큰 새를 자세히 보기는 처음이었다. 몸의 크기에 비례해 부리도 아주 컸지만 뾰족한 구석이 없어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한 녀석이 잠자기도 지겨웠는지 기지개를 켰는데, 난 정말 놀랐다. 그렇지 않아도 큰 몸에 날개가 펴진 것이다. 이렇게 클 수 있다니! 바로 그 유명한 알바트로스가 땅에 발을 딛고 활짝 펼친 날개를 본 것이다.
친구의 권유에 따라 누워서 하늘을 바라봤다. 그것이 알바트로스-신천옹(信天翁)을 가장 잘 즐기는 방법이라 했다. 난 그렇게 보고픈 그 친구와 한동안 하늘을 유영하는 창공의 왕자들의 눈으로 하늘보다 더 높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돌아와 당시 연재하고 있던 내 고정 칼럼 ‘프리즘 파인더’에 올렸다. 이랜드가 운영하는 도서출판 한세가 발행하는 주간지 프리즘이다. 최종훈 편집장이 글을 붙여 주었다. 내 사진과 설명이 단번에 녹아나는 글이었다. 사진가인 나는 글의 힘을 보았다. 그동안 좋은 글은 많이 만났어도 내 사진과 얘기에 맞춰 내 앞에서 그것이 글다운 글로 만들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흥분된 내 설명과 감정을 가라앉히면서 생각을 승화시키는 아름다운 글이 만들어지는 현장을 난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하늘은 이미 내 안에 살아
하늘 위에 더 높은 하늘이 있다는 걸 알고부터 모든 게 하찮아졌어.
두 번씩이나 접히는 내 크고 고운 날개도,
더 높이 날아서 더 멀리 봐야 한다는 의지도.
그래, 이름 석 자를 위해 퍼덕이기엔 난 너무 늙었어!
신천옹 네 이름만큼이나
하늘 위에 더 높은 하늘이 있다는 걸 알고부터 난 자주 여기서 살아.
날개를 접고 부리를 땅에 박고 있을 때조차 난 이곳에 떠 있지
약해진 두 발목을 노리는 올가미로도, 약 먹인 낟알로도,
단 한 발로 모든 걸 끝내버리는 총알로도 날 여기서 끌어내릴 순 없어.
난 이미 하늘보다 더 높은 하늘을 내 안에 넣어뒀거든
하늘은 이미 내 안에 살아
그리고 한참 후에 보들레르가 같은 새 알바트로스를 노래한 시를 보았는데, 난 최종훈의 글이 감히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보다 한층 더 좋다고 생각했다. 보들레르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는 글로 눈을 열어준 내겐 참 아름답고 귀한 사람이다.
◇ 함철훈 사진가 개인전 '풍류(風流)' 안내
장소 포스코미술관(포스코센터 지하1층)
일정 7월 13일~8월 9일 *평일 10~19시, 토요일 정오~17시, 일요일ㆍ공휴일 휴관
'우리가 만난 바람과 물'이라는 부제로 펼쳐지는 이번 전시에서는 그동안 지면을 통해 선보인 몇몇 사진과 더불어 함철훈 사진가의 다양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아울러 그동안 연재한 '함철훈의 사진 이야기'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돼 있다.
박원식 소설가
인문학 열풍이 거세다. 인문학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강좌와 콘서트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얼마 전 나는 찻집에서 지인을 기다리다가 옆 자리에 앉은 50대 꽃중년들이 열띤 토론을 하는 걸 보았다. 조정래의 장편소설 을 두고 벌이는 갑론을박이었다. 은 여순반란사건부터 6·25 전쟁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격동과 굴곡을 파헤친 소설로 분단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이다.
봄날의 햇살이 화사하게 들이치는 찻집 창가에 둘러앉은 꽃중년들은 이 작품을 통해 우리의 역사에 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 모두 흐뭇하게 합의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한 아줌마가 조정래 소설의 문체가 지닌 몰개성(沒個性)을 문제 삼으면서 갑자기 논쟁의 장으로 변했던 것이다.
꽃중년 특유의 드높은 목청이 실내 가득 번지어 자못 소란스러웠다. 그러나 나의 귀는 은근히 즐거웠다. 흔히 찻집에 모여 앉은 아줌마들의 화제라는 게 돈 얘기나 건강 타령, 또는 자식 자랑 따위의 수다이기 십상이지 않던가. 범속한 일상의 권태와 스트레스를 그저 범속하게 푸는 일을 타성적으로 반복하는 게 우리네 삶이지 않던가. 그러나 이 아줌마들은 ‘역사’와 ‘문학’을 얘기하며 봄꽃처럼 생동하는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신선하고도 수려한 정경이었다. 알고 보니 이들은 해방전후사를 주제로 삼은 어느 인문학 강좌의 수강생들이었다.
‘문사철(文史哲)’에 주목하는 이유
인문학이란 한마디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삶에 관한 통찰을 돋울 수 있는 공부이다. 머리에 지식을 우겨넣는 지식 축적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파랑(波浪)을 유쾌하게 건널 수 있는 구체적 항해술을 배울 수 있는 지혜의 전당이다. 자비로운 신에게 의탁하고서도 어쩔 수 없이 엄습하는 불안과 고독을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얻어올 수 있는 노하우의 숲이다.
나이를 먹는 일, 늙어가는 일은 쾌거일 수 있다. 내부에서 날뛰는 욕망이라는 망둥이를 잘 제어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살아온 경륜의 힘으로 눈 없이 헤매는 욕망에 눈을 달아줄 수만 있다면 노경(老境)이란 실로 삶의 절정일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이라는 놈이 어디 만만하던가. 인간의 모든 문제는 결국 욕망이라는 난적을 어떻게 해치우느냐에 달려 있다. 인문학이라는 인간학에 조예를 키울 경우 이 난처한 욕망의 농간을 제어할 병법을 체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른바 ‘문사철(文史哲)’, 즉 문학, 역사, 철학으로 대표되는 인문학은 결국 인간의 욕망이 움직이는 방향과 동향을 성찰하고 통찰하게 하는 학문이 아니던가.
시니어의 삶에 문사철이 붙어 있을 경우 더 즐겁고 더 행복할 수 있다. 자칫 진부해질 수 있는 노년의 정신에 촉과 가락이 서려 새삼 감각적일 수 있으며 한결 치열할 수 있다. 세상은 그럴싸한 욕망들이 날뛰는 난장이지만 대체로 재미가 없다. 삶이 재미없는 건 빤한 수족관처럼 너무도 범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문학과 긴밀한 교제를 할 경우, 범속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커진다. 인간이라는 고등동물이 한낱 진부한 습성의 노예가 아니라는 것을, 나 자신이 밤하늘에 빛나는 초록별 하나처럼 고귀한 존재라는 것을, 현실의 억압과 틀에 얽매일 수만은 없는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삶이 마땅하다는 것을 인문학은 일깨워준다.
인문학에 취하다
내가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면, 아울러 여자로 몸 바꾸어 조선을 만날 수 있다면, 꼭 한번 만나 수작을 걸어보고 싶은 사내 하나가 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다. 예술에, 학문에, 처신에 추사는 인생의 모든 종목에 탁발(卓拔)했다. 타고난 준재였는가 하면, 고통 속에서 피어난 꽃과도 같은 존재였다. 추사를 생각하면,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던 그가 다 쓰러져가는 움막에서 홀로 엄동설한을 견디던 모습이 떠오른다. 병든 몸으로 사시나무처럼 삭풍에 떨면서도, 지팡이를 짚고 허리를 곧추세운 자세로 방바닥에 앉아 밤을 지새웠다는 게 아닌가. 후세 사람들 그 누구도 추사의 정신세계를 따를 수 없다는 게 이미 중론이지만, 추사가 지녔던 시적 상상력, 다시 말해 문기(文氣)라는 건 가히 독보적이자 독창적인 것이었다. 추사는 이 장려한 자기 세계를 무엇으로 구축했는가. 모태에서 받은 천품(天稟)이라는 게 있었겠지만, 그 무엇보다 문사철의 힘이 그를 추동했다. 문사철의 방대한 섭렵과 그에 따른 도저한 서권기(書卷氣)! 추사는 그 자체로 인문학의 바다이자 대륙붕이었다.
공부가 많았으니 혜안이 열렸으렷다. 삶이란 실로 가소로운 곡예일 수 있으나 추사에 이르러선 얘기가 달라진다. 추사는 이마에 매단 등불처럼 환한 혜안으로 걸릴 게 없는 활보를 거듭했으며, 예술과 학문의 산정에 도달했다. 풍류에도 소홀한 바가 없었으니 그가 후끈하게 열을 냈던 로맨스가 한둘에 그치지 않는다.
이 매력적인 조선의 인걸이 지구 위에 살아가는 남정네들에게 널리 권장한 풍류의 필수 종목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독서요, 둘째는 여색이고, 셋째는 음주다. 고명한 사대부가 웬 여색과 음주를 권했을까, 그렇게 의아해 할 수 있지만, 셋 중 독서를 으뜸으로 내세운 데에서 추사의 깊고 깐깐한 속뜻을 읽을 수 있다. 세상을 견디자면 때로 주색잡기도 썩 괜찮은 묘약일 수 있지만, 그러나 야야, 놀 때는 흐벅지게 놀더라도 미리 공부부터 해두렴! 이런 훈계였을 게다. 나날이 일삼은 독서로 세상 물정과 인간에 대한 개안이 있고 난 뒤여야 풍류도 비로소 떳떳하다는 경책일 게다. 삶을 읽는 꿈과 지향을 가지지 못한 자는 여색과 음주를 즐길 자격조차 없다는 힐난으로도 들린다.
추사뿐이랴. 아름다운 생을 살다 떠난 사람들의 족적엔 인문학적 수련과 체험의 양광(量光)이 아롱진다. 인문학의 저수지에 풍덩 몸을 담가 얻은 에너지로, 삶의 시원한 지평을 향해 걸어갈 수 있다는 얘기는 신빙성 있는 오래된 뉴스다.
시니어들은 대체로 건강과 시간, 그리고 돈을 행복의 척도로 여긴다. 그러나 이것들에 관한 과욕은 오히려 타락을 부추긴다. 인문학이 유혹하는 대로 부응하여 지혜를 거둬들일 경우 행복의 척도부터가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인문학은, 물신(物神)이라는 주님에게 길들여진 욕망기제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전혀 다른 삶의 대안과 상상력을 열어주기도 한다. 인문학이라는 성찰의 숲에 뛰어드는 일은, 그래서 기쁜 제전이다.
>>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다. 등의 저서가 있다.
정읍역에 내려 역사로 나가는 출구에는 ‘정읍농악대’를 그린 서양화 작품이 걸려 있다. 예로부터 풍류의 고장으로 불리는 정읍을 한눈에 느낄 수 있는 그림. 벚꽃이 잔잔하게 깔린 시내 곳곳에서도 ‘농악’, ‘전통’이란 문구의 표지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 예술혼을 줄기차게 이어가는 곳 정읍. 이곳에 우리악기를 3대째 계승 발전시키고 있는 이가 있다.
바로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악기장(장구·북) 서인석(徐仁錫·58) 명인이다.
서인석 명인은 지난해 12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장구·북) 악기장이 됐다. 전통기법에 따라 장구와 북을 손으로 직접 깎아 만드는 유일한 전승 기능 보유자다. 이는 할아버지(서영관 徐榮寬·1884~1973)를 시작으로 아버지(서남규 徐南圭·1924~2005), 서인석 명인까지 3대째 내려오는 가업이다.
“열두 살 때부터 도끼 들고, 칼 들고, 대패질 정도는 할 수 있었습니다. 중학교 때는 200kg 되는 나무들도 툭툭 쳐가면서 옮겼습니다.”
악기 만드는 방법을 앉아서 배워본 적도 없다. 그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돕다 자연스럽게 국악기 전승 장인이 됐다.
서인석 명인의 할아버지는 동네 훈장이었다. 마을의 세시풍속 행사도 관장했다. 동네 대소사에 풍장(풍물놀이)이 빠질 수는 없다. 당연히 악기를 만들고 연주하는 데 도통할 수밖에. 그렇게 가업이 시작됐다.
아버지 대에서 서인석 명인으로 국악기 제작 가업이 넘어오면서 큰 시련을 겪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전답에 집까지 저당 잡혀 사들인 대형 트럭 7개분의 나무가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가세가 기울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있다가 공무원이 됐다. 1년 뒤, 수소문 끝에 나무를 훔친 범인을 잡았지만 노름으로 돈을 다 탕진한 상태였다. 범인을 잡은 이후 공무원 생활을 그만둔 서인석 명인은 힘든 시간을 버티며 가업을 이어갔다.
“할아버지 때는 무형문화재 제도가 없었고, 아버지 때가 돼서 생겼습니다. 아버지는 이런저런 이유에서 문화재 지정이 미뤄지다 1996년 3월에 무형문화재가 되셨습니다.”
3대째 가업승계를 하고, 2대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국악기 명가지만 현실은 많이 척박하다. 시중에 유통되는 장구 대부분이 기계로 빠르게 제작돼 박리다매된다. 만드는 데 5년에서 10년은 걸리는 서인석 명인의 장구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장구와 가격 경쟁이 안 된다. 전통을 고수하고 이어나가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세상의 편견과도 맞서야 한다. 그래서 2000년에는 대학에 들어가 국악을 전공하고 석사과정까지 마쳤다. 그에게 악기를 사러 오는 국악 전공자는 대학물(?)을 먹었다는 이유로 서인석 명인 앞에서 아는 척을 했다.
“제가 아버지의 문화재 제1호 ‘전승 장인’이라 할지라도 국악 전공자들은 ‘이렇게 해달라’며 요구를 했습니다. 장단이 틀리는 사람들도 전공자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배운 것들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악기장으로 무형문화재가 됐지만 장구 연주자로도 유명하다.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설장구로 두 번이나 장원을 했다. 김병섭 류 설장구를 비롯해 설장구는 모두 섭렵했다. 대학교에 다닐 때 장구 장단을 오히려 교수에게 가르칠 정도였다. 석사 논문은 온전히 아버지로부터 보고 배웠던 것을 썼다.
“현대와 고려 시대의 비교 논문을 썼어요. 고려 때는 토기로 악기를 만들었어요. 장구 제작 기법에 관한 연구론을 썼죠. 논문을 쓰면서 용어 정리를 제대로 했습니다.”
박사과정에도 도전하고 싶었지만 우리나라에는 국악기 제작 박사과정이 없다. 주위 사람들이 일본 유학을 권유했다.
“일본에는 제작학과가 있다더군요. 그런데 갈 수 없었습니다. 제가 가서 공부하면 우리의 기술을 일본에 주는 격이니 더더욱 갈 수가 없었어요.”
선대에는 국악을 아는 사람도 많았고, 악기만 잘 만들면 됐다. 지금은 편견을 이겨내고, 한 단계 더 발전해 나가야 하기에 헤쳐 나갈 것들이 너무나 많다.
집안의 가업 승계에 관한 얘기를 하다가 4대째로 넘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4형제를 둔 아버지인 자신도 궁금한 부분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집안일을 보며 자랐지만 ‘아직은 아버지, 어머니가 하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꼭 이어야 할 가업이라는 것을 아들 모두 알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필요하다고 할 때 오겠습니다’라고는 하더군요.”
4형제도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돕고 거들면서 성장했다. 모두 장구를 깎고, 연주할 줄도 안다.
“장남이건 막내건 거부감이 없어요. 그냥 늘 보던 일인 거죠. 이게 복입니다. 아버지도 복이시고 할아버지도 복이신 거죠.”
현재 서인석 명인은 호남우도(전북 정읍) 풍물의 명맥을 이어가는 설장구 연주자로 무형문화재 신청을 계획하고 있다.
“악기를 다룰 수 있어야 원하는 공명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을 찾고 싶습니다.”
전통의 맥을 잇는 것이 정말 소중하다는 서인석 명인. 세상 사람들이 비록 그것이 식상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봄이 물씬 오른 4월이면 봄바람도 쐬고 꽃구경도 하기 위해 산에 오른다. 그러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등산을 마치고 허기진 배를 채우려는 발길로 인근 식당이 북적북적해진다. 여러 음식이 있겠지만, 간단하면서도 든든한 산채비빔밥을 빼놓을 수 없다. 벚꽃놀이를 즐기기 좋은 남산 둘레길의 비빔밥 맛집 ‘목멱산방’을 소개한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남산 둘레길 관광객을 위한 아늑한 밥집
목멱산(木覓山)은 남산의 옛 이름이다. 그 이름을 딴 ‘목멱산방’은 남산 케이블카 정류장 맞은편 돌계단을 오르면 찾을 수 있다. 서울시가 15억원을 들여 지은 한옥으로, 아름다운 남산자락이 어우러져 멋을 더한다. 시에서 위탁관리를 하고 있지만, 음식의 맛은 운영자 장경순씨의 아내 강현영씨의 부모(강광전·조효숙씨) 역할이 컸다. 고품질·저가격, 무(無)화학 조미료, 족보 있는 먹거리를 지향하는 목멱산방, 이곳의 주재료인 장맛을 강씨 노부부가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 메뉴인 비빔밥에는 ‘비빔 매실 고추장’이 빠지지 않는다.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노부부가 재배한 매실로 만든 매실청(청과 과육을 갈아 넣음)에 고춧가루와 비법이 담긴 육수를 더해 맛을 낸다. 이외에도 직접 농사지은 콩으로 메주를 쑤어 만든 간장·된장 역시 나물과 음식에 들어가는 핵심 조미료다. 부모의 손길로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장 덕분에 목멱산방의 음식은 믿음직스럽다는 평가를 받는다.
남산 둘레길을 끼고 있어 산책을 나온 시민이나 등산객들의 발걸음이 잦다. 또, 서울의 명소인 N서울타워를 보고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도 한국미가 물씬 나는 외관에 이끌려 방문하곤 한다. 특히 남산 둘레길에 벚꽃이 개화하는 4월이면 손님이 늘어나 줄을 서기도 한다. 목멱산방에서 맛볼 수 있는 산방 비빔밥(7000원), 불고기 비빔밥(9000원), 육회 비빔밥(1만1000원)은 골고루 인기 있다. 나물과 밥, 고추장이 따로 나와 입맛에 맞게 비벼 먹을 수 있다.
비빔밥에 들어가는 나물은 봄 향기 가득한 취나물부터 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머금은 깻잎나물, 겨울 눈 속에서 자라는 부지깽이나물, 유채나물 등이다. 지리산 언저리에서 수십 명의 할머니·할아버지가 직접 채취한 나물을 사용한다. 나물에는 순도 99.9%의 들기름을 넣어 깊은 고소함을 느낄 수 있다. (순도 99.9% 참기름은 밥에 들어간다)
목멱산방에는 정이오(鄭以吾)의 ‘남산팔영(南山八詠)’이라는 시에서 따온 여덟 개의 방(운횡북궐(雲橫北闕), 수창남강(水漲南江), 암저유화(岩底幽花), 영상장송(嶺上長松), 삼춘답청(三春踏靑), 구일등고(九日登高), 척헌관등(陟巘觀燈), 연계탁영(沿溪濯纓))이 있다. 방마다 있는 창문을 통해 남산의 경치를 즐길 수 있다. 주기적으로 오가는 케이블카도 흔한 풍경이 된다. 뒤뜰에 마련된 야외 테이블은 남산을 병풍 삼아 한적하게 식사와 전통차를 즐기기에 좋다. 한쪽에는 작은 인공폭포도 있어 상쾌한 분위기를 더한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경치를 보러 가는 것도 묘미다.
편안하고 아늑한 이미지이지만, 메뉴 주문과 서빙, 정리까지 셀프 서비스(self service)다. 조금 수고스럽긴 하지만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경치가 그에 대한 보답이라 할 수 있겠다.
봄과 가을에 추천하고 싶은 자리는 야외 테이블이 있는 뒤뜰이다. 봄이면 따뜻한 바람을 타고 날아온 꽃잎들이 비빔밥에 달달함을 더하고, 가을에 쌓인 알록달록 낙엽은 한옥과 어우러져 고아한 정취를 풍긴다. 비빔밥과 곁들이는 메뉴로는 해산물 부추전(1만2000원), 지리산 참도토리묵(1만원), 우리 콩 두부김치(1만원) 등이 있다. 그 외에 훈제오리와 참나물 무침·한우 육회 무침·묵은지 보쌈(각 2만5000원)도 푸짐한 저녁 식사를 원할 때 많이 찾는 메뉴다.
식사 후 차를 주문하면 1500원을 할인해준다. (모든 차 메뉴는 아이스로 주문 가능, 500원 추가) 목멱산방에 들어서면 한의원에서 맡을 수 있는 쌉싸름한 한약 향이 솔솔 난다. 십전대보탕·대추차(4500원), 오가피차·당귀차(5500원) 등 몸에 좋은 한약재로 만든 차를 매장에서 직접 끓여내기 때문이다. 유자차·모과차(4500원)는 시원하게 에이드(ade)처럼 즐겨도 좋다.
겨울이면 각종 청을 만드는 손길로 분주해진다. 전남 고흥의 유자, 전북 장수에서 재배한 생강과 경북 청도의 모과 등을 설탕에 재워둔다. 과일청이 들어간 전통차에 카운터에서 판매하는 모둠한과(4500원, 삼색유과·모둠강정·찹쌀약과)를 곁들이면 잘 어울린다.
주소 서울시 중구 남산공원길 627 영업시간 11:00~21:00 문의 02-318-47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