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탐방 일정에 윤동주 생가 방문이 있었다. 강신영 동년기자, 이경숙 동년기자와 함께 한 이번 여행에 동행한 신광철 시인의 시평(詩評)이 이동하는 버스에서 이어졌다.
윤동주, 참담한 이름이다. 눈물을 통해서 바라보아야 이해되어지는 맑은 시인이다. 시를 한 편도 발표하지 못한 시인. 시집을 한 번도 내지 못하고 간 시인. 스물아홉이란 나이에 싸늘한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한 시인이다. 첫 시집이 유고(遺稿) 시집이 되었다. 윤동주 시인 자신은 받아보지도 못한 시집이 되었다. 그의 이름에는 성장하지 못한 소년이 들어 있다. 아니 청년이겠지? 스물아홉, 가장 빛나는 시절을 막 넘기려는 나이다. 스물아홉에 죽음을 맞이한 윤동주 시인은 순결의식에 안타까워 쩔쩔매게 하는 빛나는 슬픔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그의 죽음을 정지용 시인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시집 서문에 이렇게 썼다.
“무시무시한 고독 속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자신이 쓴 시를 이 세상에 한 작품도 발표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미완의 한 시인은 죽었다.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라는 정지용 시인의 글에서 또 한 번 숙연해진다. 윤동주 시인을 떠올리면 미완성이라는 단어가 그의 곁에 서성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성숙보다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와 파릇파릇한 양심에 기댄 인생관이 보인다. 막 봄을 만난 나무가 추위에 겨우 견디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다.
- 신광철 시인의 산문 中
숙연한 마음으로 생가를 들어섰다. 대문 앞에 있는 돌비석에는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는 글과 함께 한문이 새겨져 있었다. 1945년, 해방을 6개월 앞두고 29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윤동주는 간도 이주민 3세로 1917년 북간도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다. 윤동주의 성장기는 부러울 것이 없었다. 10칸짜리 생가 옆에는 교회가 있고, 소학교도 얼마 안 된 거리에 이웃해 있었다. 소년 윤동주에게는 교육자요, 기독교 목사인 큰 외숙 김약연(金躍淵, 1868~1942)의 영향이 매우 컸다. 규암(圭巖) 김약연은 명동소학교를 창립하고, 교장을 지낸 우국 교육자다. 그러나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에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작고했다. 당시 그의 나이 29세였지만 실제로는 만 27년 1개월 17일을 살고 갔다.
관리인의 안내로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푸르디푸른 스물아홉의 나이에 현해탄 건너 일본 감옥에서 생체실험을 당하면서 쓸쓸하게 죽어간 시인의 아픔이 절절이 다가왔다. 동행한 이경숙 동년기자가 시비(詩碑) 앞에서 윤동주의 서시(序詩)를 낭송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윤동주 생가에 하루 500여 명의 한국인들이 다녀간다고 하니 그나마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머지않아 불어올 훈풍
이튿날, 우리는 도문을 향해 출발했다. 명동촌 입구에서 중국 공안이 버스를 세우고 차에 오른다. 공안의 표정이 일순간 섬뜩해보였다. 이곳이 중조(中朝, 중국과 조선) 변경에서 가까운 도시라 검문이 철저하다고 했다. 탈북자들을 감시한다는 명목 하에 한 사람 한 사람 여권 사진을 대조하면서 검문을 했다.
얼마 후 고대하던 두만강에 드디어 도착했다. 압록강 강변에서 보았던 북한의 풍경이 더욱 가까이 눈에 들어왔다. 무심한 강물만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내 마음을 대신하듯 빗방울이 간간이 뿌려댔고 하늘도 잔뜩 찌푸려 있었다. 이곳 강물에 손 한 번 담가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친구와 함께 ‘눈물 젖은 두만강’도 불러보고 싶었다. 철조망 너머로 손에 잡힐 듯 보이는 북한 땅은 고요하기만 했다. 두만강 철교는 러시아와 중국, 북한의 접경 지역으로 민간인 출입이 쉽지 않다고 한다.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북미회담까지 이루어졌으니 앞으로 이곳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머지않아 훈풍이 불어오기를 기대해본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곳 분위기는 정중동이라고 할까? 어쩌면 훈훈한 바람은 머나먼 남의 얘기가 될 수도 있다.
강을 가로질러 물보라를 일으키며 배를 타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마도 중국인들이겠지? 친구와 나는 그저 마음으로만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르면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자리를 떴다.
하지만 언젠가는 유라시아 대륙 철도를 타고 자유롭게 두만강 철교를 건너게 될 날도 오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본다.
4박 5일의 모든 일정이 두만강에서 끝났다. 과연 나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낀 걸까? 출발하기 직전의 설렘은 광개토대왕릉을 탐방하면서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마치 현란한 마술쇼를 보여주듯, 안개 장막을 걷어내고 고운 속살을 보여주던 백두산 천지의 모습은 오랜 감동과 전율로 남았다.
압록강과 두만강에서 희망의 싹을 보았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랄까? 그저 감사할 뿐이다. 언젠가 또다시 이곳을 찾는다면 기쁨에 겨워 목청을 돋워보리라.
산과 산 사이 도로를 줄기차게 달려도 산 첩첩. 깊고 후미진 산간이다. 도로를 버리고 접어든 비좁은 산길 끝자락 산 중턱, 후련하게 탁 트인 거기에 나무선(57) 씨의 거처가 있다. 풍경의 절반은 산, 절반은 하늘. 또는 절반은 청풍, 절반은 구름. 절집 자리처럼 개활하니 명당이렷다.
나무선 씨는 서점을 운영한다. 외진 산골짝 서점을 누가 찾아들까 싶지만 드나드는 발길이 허다하단다. 해서, 그는 느긋하다. 살뜰히 정붙이고 산다. 여기가 낙원이거니, 그리 자족한다. 서점 이름은 ‘터득골 북샵’이다. ‘자연주의 플랫폼’을 표방하고 있다. 일찍이 자연 속에서 자연스레 자연과 동화하는 삶을 그리다 마침내 이루었다. 이 산중으로 귀촌한 지 10여 년이 흘렀다.
나무들 울창한 숲속에 차린 서점이란 필시 이색이다. 게다가 장사가 된다 하니 거의 이변이다. 책 또는 독서는 긴 세월 동안 매력적인 향을 뿜었다. 지식 축적과 소통의 유력한 도구였다. 그러나 인터넷, 휴대폰, SNS 등속의 강력한 적들에 밀려 변방으로 밀려났다. 출판사들이 줄줄이 무너지고, 온라인 서점의 파죽지세에 오프라인 서점들이 나가떨어졌다. 정황이 이러하지만 나무선 씨의 숲속 서점은 순항 중. 귀촌생활 방식의 새 지평을 열어가는 중.
귀촌 이전, 그는 서울에서 출판업자로 뛰었다. 말하자면 책을 만드는 사람에서 책을 파는 사람으로 변신했다. 지금으로부터 2년쯤 전에 ‘터득골 북샵’을 오픈했다. 나는 언젠가 서울에서 출판사를 하던 사람 하나가 시골에 내려가 1인 출판사를 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연과 생태에 관한 책들을 주로 출간한다 했다. 당시 퇴고를 마친 원고의 출간을 위해 출판사를 물색 중이었던 나는 그 산골 출판사 사장에게 구미가 동해 원고를 보냈다. 하지만 퇴짜를 맞았다. 얼굴은 보지도 못한 채 두세 차례 전화통화만으로 상황 끝. 당시 그 사장은 재정난을 내세우며, 더 유능한 출판사를 찾으소서! 라는 요지의 기별을 해왔었다. 전화기에서 울려온 그의 언사가 어찌나 정중하고 수굿하던지 스타일 구기고 사기 저하됐던 나는 충분한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의 그 산골 출판사 사장이 바로 나무선 씨다.
“20대 후반에 출판사를 창업, 이후 30여 년 동안 300여 권의 책들을 냈어요. 1년에 한두 권쯤은 베스트셀러에 올랐죠. 그러나 출판이라는 게 남의 뒷바라지나 하는 일이 아닌가, 내 마음은 늘 시골로 향하는데 어쩌자고 서울에 눌러 사는가, 그런 회의가 밀려들더라고요. 그게 귀촌의 단초였어요.”
“황대권 작 ‘야생초 편지’도 기획하셨죠? 몇 부나 찍었죠?”
“100만 부 정도 나갔습니다. 그 밀리언셀러의 파장으로 야생초 바람이 일었죠. 저 개인에게도 큰 행운이었어요. 덕분에 수입을 올려 이곳 산중턱에 너른 터를 장만하고 이주할 수 있었으니까. 출판을 해서 땅을 산다는 게 사실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빈번한 헛발질 뒤에 용케 운이 따랐던 거죠.”
“아까 마음은 늘 시골로 향했다 했어요. 시골의 그 무엇에 끌렸죠?”
“은둔자 성향, 제겐 그런 게 있습니다. 젊어서부터 철학이나 자연, 명상 관련 서적들을 탐독했어요. 니어링 부부가 실현한 ‘조화로운 삶’에, 존재지향적인 사유에 깊이 경도되기도 했죠. 그들의 삶이 부러웠고 그리웠고 꿈꾸었어요. 그렇다면 사람을 지치게 하는 서울을 벗어나 시골의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당연하다 봤어요.”
“사는 일의 희로애락은 시골에서건 도시에서건 마찬가지 아녜요?”
“필생의 프로젝트로 귀촌을 했으나 막상 실현은 어려웠어요. 터를 잡아 집을 짓는 일에서부터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 맺기, 물적 토대를 구축하는 일 등등 상처받기 쉬운 난항이 많았어요. 한동안 너무도 힘들었죠. 먹고살아야지, 무아(無我)도 해야지, 벅찼어요.”
“무아? 자아에서 벗어나면 해탈이라죠? 불로 태우고 도끼로 찍어내도 없어지지 않는 게 자아라 하고.”
“자칫 제멋에 취해 가족이나 생활을 외면한 채 뜬구름 잡기에 그치기 쉬운 게 무아 공부죠. 저 역시 거기에서 예외가 아닐지 모르지만, 산중에 살며, 야생의 자연을 경험하며, 리얼하게 몸으로 생태와 부닥치며 삶의 본질적인 가치를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하게 됐어요.”
나무선이라는 이름에 그의 지향이 이미 완연하다. 고요한 ‘나무[木]’를 닮은 ‘선(禪)’으로 날뛰는 마음을 단속하겠다는 의미로 지었단다.
호랑이를 봤다!
마음을 돌보면 눈도 밝아지는가. 나무선 씨의 눈은 남들이 보지 못한 걸 본 눈이다. 호랑이를 보았다는 게 아닌가. 귀촌 직후, 계곡 물가에서였단다.
“폭우가 쏟아진 이튿날 아침이었어요. 천둥처럼 요란한 물소리 들리는 계곡 저편에 호랑이 한 마리가 떠억 앉아 있더라고요. 믿어지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바로 지척이었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어요.”
“햐! 들고양이를 호랑이로 오인한 거 아녜요? 국내의 야생 호랑이는 이미 멸종했다고 알려졌어요.”
“남들은 영양 부실로 헛것을 본 거 아니냐고들 하지만 분명히 호랑이였어요. 황소처럼 커다란 호랑이. 냅다 달아났지만 반갑더라고요. 야생 호랑이가 생존하는 생태계에 외경을 느꼈어요.”
“토속신앙에서 호랑이는 산신령으로 간주되죠. 귀촌 환영 사절단으로 신령이 납시었군요.(웃음)”
“나의 삶은 이제 모험 속으로 들어와 있다! 저는 그렇게 호랑이 출몰의 의미를 해석했어요. 이전과는 다른 적극적이고 충실한 삶을 살라는 통첩으로 여겼어요.”
호랑이라는 전설과의 기묘한 해후를, 그는 삶을 일깨우는 자연의 선물로 간주하는 것 같다. 호랑이뿐일까. 들풀에 얹힌 아침 이슬도, 말매미의 그악스런 사이렌도, 듣고 보는 관점에 따라 무상의 선물이자 위안이자 기적일 수 있다. 나무선 씨는 한때 ‘조화로운 삶’을 구현하기 위한 공동체 운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아내 이효담 씨와 동행, 미국의 인디언 촌락이나 인도의 오르빌 같은 생태마을을 답사하기도 했다. 공동체 운동의 비전을 탐색하기 위해.
“국내외의 공동체를 나름 둘러본 뒤엔 생각이 바뀌었어요. 장단점을 고루 확인하고서였죠. 특히나 저 같은 인물이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만든다는 건 교만이거나 무익한 도전일 수 있다는 판단을 했어요. 제가 보기보다는 엄청나게 고집이 센 사람입니다. 마음공부라는 걸 해왔지만 때로 문제가 불거져요. 공동체를 꾸렸다가는 자칫 생태근본주의에 매몰된 독불장군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겠더라고요. 해서, 새로운 걸 만드는 대신, 기존 우리네 마을에 서린 미덕과 문화에 관심을 갖고 움직이는 게 더 소중하다고 봤어요. 마을 노인들의 고단했던 삶에 서린 내공을 배우는 건 더욱 소중한 학습이라 봤고요.”
“쇠약한 노인들을 무시하는 게 현실이죠. 과거 전통사회에선 노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죽임을 당하기조차 했어요. 오늘날에도 노인에 대한 푸대접은 비일비재해요. 이는 어쩌면 인간사의 숙명일지도. 노화란 쓸쓸해요.”
“비록 고달픈 인생을 살았더라도 시골 노인들의 기본 태도는 매우 정중합니다. 상대의 성정까지를 헤아려 존중해줘요. 이게 엄청난 내공이죠.”
“마을과 관련해선 어떤 일들을 했죠?”
“예컨대, 이곳 산간 지구 일대에 산재하는 100여 가구 주민들이 동참하는 마을신문을 만들었어요. 계간 신문을 8년째 발행하고 있습니다. 신문을 만들며 저 자신부터 주민들과 긴밀하게 소통할 수 있었고, 외지에서 들어온 귀촌인들과 토착민 사이의 유대도 강화됐어요.”
여한 없는 삶이란?
초여름 산야의 풍광이 싱그럽다. 바람에 설레어 부푸는 숲, 나무 우듬지를 비집고 은빛 비늘처럼 쏟아지는 햇살, 저마다 가창력을 뽐내는 새들의 노래…. ‘터득골 북샵’의 명품은 어쩌면 자연 풍경이다. 나무선 씨 부부가 10년 이상을 공들여 가꾼 집과 정원과 텃밭 역시 빼어나기는 마찬가지. 이 근사한 공간에 무시로 사람들이 찾아들고, 수시로 공연과 이벤트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나무선 씨가 이 산골에 들어와 첫 번째로 한 일은 집짓기였다. 8평짜리 흙집을 손수 지었던 것. 이후 증축을 통해 맵시 있게 규모를 늘렸다. 부부 살림채로 쓰이는 이 집엔 ‘다명헌(多明軒)’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추사(秋史) 김정희가 제주 유배 시절에 쓴 글,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明 使我久坐, ‘작은 창문에 빛이 밝아 나로 하여금 오래 머물게 한다’는 뜻)에서 빌려 쓴 이름이다. 예순 살을 코앞에 두었으니 부질없는 욕망이 잦아들 시절이다. 삶을 한층 진솔하고 겸허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나이이지 않겠는가. 이 점에서 나무선 씨는 귀촌으로 절호의 찬스를 포착했다. 그가 추구하는 무아와 무욕을 실현할 수 있는 토대를 일구고 있으니.
“흙집을 지을 때 다산 초당을 염두에 뒀었죠. 삼간 초막이면 산중 살림에 족하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러나 이젠 살림 규모가 크게 늘었어요. 소박한 귀촌생활을 작정했으면서도 서점을 차린 건 어쩌면 모순이죠. 색다른 방향으로 삶이 풀려나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궁리해왔던 지역문화의 거점 하나를 구축해나가고 있다는 보람과 만족이 커요.”
“산골에서 돈도 벌고, 지역문화에도 이바지하고, 일거양득의 신선한 모델이에요. 극히 내성적이고 조심성 많은 사람으로 보이는 선생에겐 복주머니나 꾀주머니가 장기처럼 붙어 있는 건 아녜요?(웃음)”
“어떤 이들은 가급적 일판을 벌이지 말고 조용히 사는 게 더 좋지 않냐고도 하지만, 일이 없으면 무슨 재미? 일 없이 사노라면 괴팍해지고 피곤해지고 폐쇄적으로 변할 게 빤하지 않겠어요? 자신이 꿈꾸는 삶과 현실을 일치시키는 것, 좋아하는 곳에서 적당한 수입이 가능한 일을 하며 맘 편하게 사는 것, 그게 여한 없을 삶이라 봅니다.”
일로부터의 은퇴란 일을 싫어하는 사람에겐 해방이지만, 일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감옥이다. 귀촌을 하더라도 공을 쏟을 일 하나는 쥐고 있어야 한다! 나무선 씨의 생각은 그렇다.
나무선 씨가 주는 귀촌 준비 TIP
❶ 시골에 대한 피상적인 선입견을 완전히 버리자. ❷ 귀촌으로 실현할 수 있는 버킷리스트를 준비하자. ❸ 수입 창출을 위한 일을 갖고자 한다면 신선한 아이템을 발굴하자. 가령 산골 북샵도 유망하다. 500평 정도의 부지에 크지 않은 집을 지어도 무방하다. 서책 구입과 가구 장만에 소요될 비용 조달 여력은 필수다. 책에 관한 안목을 기르고, 도서 유통 구조를 철저하게 이해해야 한다. 고객들은 책만을 사기 위해 산골 북샵을 찾지 않는다. 주변 자연경관을 즐기기 위해 온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❹ 귀촌 현장과 귀촌인들을 사전에 충분히 접하라.
나의 운명을 누군가가 알려준다면 인생이 편할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델포이 신전의 무녀 ‘피티아’에게 자신의 운명을 점지 받았다. 무녀가 아폴론 신을 대신한다고 철저하게 믿었던 것은 그 시대의 역대 왕들은 물론 소크라테스 등 철학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2500여 년이 지난 지금, 델포이 마을에 유적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파르나소스 바위산과 올리브 나무가 지천인 첩첩 산골마을 델포이. 아름다운 풍경과 정겨운 주민들은 떠나는 여행객의 옷깃을 자꾸만 부여잡는다.
2500여 년 동안 델포이를 지킨 유적지
델포이(오늘날은 델피로 불린다)는 BC 8~6세기 무렵만 해도 아테네보다 훨씬 번성한 도시였지만 현재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길을 묻지 않아도 “뭘 도와줄까?” 하고 말 걸어오는 정겨운 사람들이 있다. 델포이 여행은 서두를 이유가 없다. 느릿느릿 천천히 돌아다니면 된다. 델포이 마을 주변에는 2500여 년 전의 유적들이 흩어져 있다. 유적지는 크게 두 군데로 나뉜다. 산허리를 가르는 도로를 기준으로 위쪽은 신성 지역이고 아래쪽은 김나지움과 마르마리아 유적이 자리한다. 마을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은 신성 지역이다.
우선 입구에서 박물관도 함께 볼 수 있는 통합 티켓을 구입한 뒤 고대의 시간이 멈춰버린, 유적지 안으로 들어선다. 아폴론 신전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종교 용품과 생활 용품을 거래했던 아고라(시장), ‘블레우테리온’이라 불리던 델포이 의사당, 여러 도시 국가에서 보내온 보물을 보관해놓았던 보물창고 등 흥미로운 유적들이 부서진 채로 흩어져 있다.
옴파로스에 앉은 여 사제
아폴론 신전 앞에는 ‘대지의 배꼽(옴파로스)’이라는 돌이 있다. 이 돌 밑에 작은 구멍이 있었는데 이는 그리스 신화 속 제우스가 ‘델포이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표시한 것이다. 신화에 따르면, 어느 날 제우스는 자신이 지배하는 세상의 중심이 어디인지 알아보기 위해 독수리 두 마리를 하늘로 날려 보냈다. 하늘을 날던 독수리들이 다시 만난 곳이 델포이의 파르나소스 산(Parnassos, 2457m) 정상이었다. 제우스는 아들 아폴론을 이곳에 머물게 했다. 아폴론은 파르나소스 산의 코리시안 동굴에 살던 거대한 구렁이 피톤을 죽이고 신탁소(神託所, oracle, 신이 여 사제를 통해 뜻을 나타내거나 인간의 물음에 답하는 일)를 열었다.
아폴론 신이 사는 곳이라 알려지면서 델포이로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당시 델포이 신탁소는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했다. 아폴론은 신이었기 때문에 신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여 사제 피티아(Pythia)를 통해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몸을 정갈하게 한 뒤 듣고 싶은 내용을 남자 사제에게 말하면 남자 사제가 피티아에게 질문을 전달했다. 피티아는 그 내용을 아폴론 신에게 전달해 답을 받아 다시 전달했다. 신탁비로 펠리노스라 불리는 세금을 받았고, 제단에 동물을 바치도록 했다. 델포이 신탁소에는 왕은 물론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철학자들도 찾아와 무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중 리디아의 크리소스 왕이 페르시아를 침공해서 진 이야기와 소크라테스가 무녀의 말을 듣고 탐구의 길을 떠난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렇게 번성하던 신탁소도 서서히 쇠퇴했다. 392년, 로마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교숭배 금지령을 내리면서 델포이는 역사의 페이지를 마감했다. 문득 생각해본다. 현실에서 신이 미래를 점지해준다면 삶의 갈등이 줄어들까?
델포이 원형극장과 스타디움
아폴론 신전을 지나 보물창고를 거쳐 더 위로 오르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델포이 극장을 만난다. BC 4세기에 건설된 델포이 극장은 35단의 관람석이 있어 5000명이 동시에 음악이나 연극 등을 관람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넓은 원형 극장과 부서진 유적들 밑으로 시야가 확 트여 눈이 시원하다. 뒤로는 파르나소스 암산이 턱 버티고 있고,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 밑으로는 울울창창 올리브 나무가 경사진 터를 장악한 풍경이다. 골이 깊어 마치 강이 흐르는 듯한 전경도 장관이다.
극장에서 언덕을 따라 조금 이동하면 온통 침엽수로 둘러싸인 곳에 경기장이 있다. 델포이 제전이 개최되던 경기장이다. 바위를 깎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만든 경기장은 길이가 200m, 폭은 50m에 달한다. 델포이 제전은 아폴론이 구렁이를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BC 8세기부터 열리기 시작했다. 시와 음악에 관한 행사를 중심으로 8년마다 개최되던 제전은 AD 582년부터 육상과 말타기 기술, 마차경주 등이 더해지면서 4년마다 열렸다. 델포이 제전의 흔적은 김나지움과 마르마리아 유적지로 남아 있다. 김나지움은 그리스어로 ‘운동하는 곳’이고 마르마리아는 아테나 여신의 신전과 성역이다. 델포이 신탁소를 찾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들렀던 곳으로, 부서진 아테네 신전과 BC 4세기경에 지어진 원형 건축물인 ‘톨로스’ 등의 유적들이 흩어져 있다. 특히 톨로스는 현재 남아 있는 고대 그리스 건축물 가운데 가장 독특한 유적으로, 그리스를 소개하는 포스터와 책자에 자주 등장한다.
델포이 고고학 박물관
노천 유적지를 다 보고 나면 델포이 고고학 박물관을 찾으면 된다. 1902년에 개관한 이 박물관에는 델포이 유적지에서 나온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내부 전시관은 기원전으로 시대가 돌아가 있다. 1896년에 발굴된 청동상과 작은 도상들, 아르카이크 시대에서 로마 시대까지 시대별로 그리스의 발전사를 볼 수 있다. 눈여겨볼 것으로는 아르카이크 시대에 만들어진 은판으로 된 황금머리 황소, 낙소스 인의 작품인 스핑크스, 대지의 배꼽이라는 옴파로스, 전차를 모는 청동 마부상, 클레오비스와 비톤 형제, 무희의 기둥 등이다. 또 마을 안쪽 끝으로 올라가면 앙겔로스 시켈리아노스(1884~1951)와 에바 팔머(1874~1952)의 축제 박물관이 있다. 이들은 1927년, 델포이에서 고대 그리스 비극 공연을 기획했다. 세계 각국의 유명한 극단이 모여 벌인 연극 축제였다. 현재도 7~8월의 휴가철이 되면 음악과 고대 드라마 페스티벌이 펼쳐진다.
Travel Data
항공편 그리스 직항편은 없다. 프랑크푸르트, 파리, 로마, 이스탄불, 두바이 등을 경유해 아테네로 가면 된다.
현지 교통 아테네 리오시온(Liossion) 버스터미널에서 델포이로 가는 버스가 1일 2~3회 운행된다. 3시간 정도 소요된다.
맛집 정보 고급 식당보다는 일반 식당인 타베르나(Taverna)가 인기다. 카페에서도 피자는 물론 전통 음식을 즐길 수 있다.
숙박 정보 대부분의 숙소는 가정집을 개조해 만들었다. 조식이 제공된다. 카스탈리아 부티크 호텔, 레토 호텔, 이니오호스 호텔이 상위 순위에 있다. 대부분 4~5만 원 정도면 이용 가능하다.
날씨 정보 그리스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를 지닌 나라다. 6월부터 여름이 시작된다. 평균기온은 25℃ 이상. 7월은 30℃를 웃돈다. 델포이는 첩첩산중이지만 부서진 유적지는 나무가 없는 노천이라서 뜨겁다. 여름옷은 물론 파라솔, 모자는 필수다. 고온이긴 해도 습도가 낮아 불쾌지수는 거의 없는 편.
물가와 화폐 정보 물가는 한국과 비슷하다. 유로 사용.
인터넷 정보 대부분의 식당이나 숙소에서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다.
시니어 여행 포인트 델포이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번잡스럽게 움직일 필요 없이 천천히 즐기면 된다.
대왕암은 울산 동구 해안가에 있다. 오랜 세월 파도에 침식된 기암괴석의 자태는 과연 ‘대왕’이라는 단어를 쓰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 대왕암과 함께 동해의 세찬 바람을 잘 버텨내고 있는 소나무 숲이 만드는 경관은 신비롭다. 그래서 건축 관련 일이나 강의가 있어 울산에 가면 시간을 쪼개서 그곳을 찾는다.
대왕암이 있는 동구는 접근성이 좋지 않다. 울산시를 경유하는 열차노선은 시의 서쪽 외곽으로 지나간다. 양산 통도사에서 멀지 않아 역사의 이름도 울산(통도사)역이다. 울산엔 도시철도가 없다. 울산역에서 시내로 들어가려면 택시나 리무진을 이용해야 한다. 특히 대왕암이 있는 동구는 출퇴근이 아닌 시간대에도 리무진으로 한 시간이 더 걸린다. 울산역은 시의 서쪽 끝이고 대왕암은 동쪽 끝이다. 서울에서 울산까지 KTX 소요시간이 두 시간 조금 더 걸리는 것과 비교하면 접근성이 상당히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접근성이 좋지 않은 탓에 대왕암 공원은 잘 알려지지 않았고 평소에도 관광객이 적다. 이것은 오히려 자연 보존에 유리한 면도 있다. 공원 입구 주차장에서 약 1km 거리에 있는 대왕암으로 들어가는 길 주변에는 해송이 빽빽하다. 그 해송을 배경으로 고목 동백나무가 죽 늘어서 있다. 봄에 유난히 붉은 동백꽃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대왕암에 이른다. 시간 여유가 있으면 해송 사이로 난 산책로를 지나 해안가에 조성된 오솔길로 공원을 크게 한 바퀴 돌아 대왕암으로 갈 수도 있다.
얼마 전에 울산 동구 퇴직자 지원센터에서 강의의뢰가 왔다. 퇴직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인생 재설계 과정 중 주거부문 특강이었다. 강의 장소가 마침 대왕암이 있는 동구라서 더 설레었다. 특강 시간이 아침 시간에 잡혀있기도 했지만 새벽에 대왕암 공원을 크게 한 바퀴 돌고 싶어서 그 전날 저녁에 울산에 갔다. 자고 나니 밤새 비가 내린 모양인데 새벽에 숙소를 나설 때는 빗줄기가 강했다.
대왕암 공원의 운무와 소나무 군락이 연출하는 환상적인 경관은 신비롭다. 해안 산책로를 따라 걸으니 해안 곳곳에 숨어있던 절경이 자태를 드러낸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바다운무에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보이지 않는다. 소나무 숲을 지나고 해안 오솔길을 한 바퀴 돌아 대왕암에서 넋을 놓고 있다가 어느 순간 강의 시간에 늦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충분히 시간 여유가 있었지만 비도 내리고 택시를 호출하는 것도 불안해서 공원 입구로 나왔다.
그런데 택시호출에 문제가 생겼다. 대왕암 공원 인근에서 호출에 응하는 택시가 없다는 것이었다. 공원에 인적도 없고 들어오는 버스도 보이지 않았다. 무작정 큰길까지 걸어 나가면서 계속 택시를 호출했다. 그렇게 40분가량 걸어 나오다가 운 좋게 빈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비는 계속 내렸다. 땀도 닦고 택시 운전사에게 울산의 열악한 교통 상황에 대해 한참 하소연했다.
그러다 창밖을 보니 왼편으로 바다가 보였다. 목적지가 대왕암 공원에서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분명 오른쪽에 바다가 보여야 했다. 목적지를 잘못 가고 있는 거 아니냐 했더니 같은 이름의 호텔이 울산에 두 군데 있다는 거였다. 내가 가야 할 호텔의 반대편에 있는 동명의 호텔로 가고 있었다. 위험한 빗길을 뚫고 속도를 내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러고 보니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택시를 구경할 수 없었다. 울산 동구는 현대중공업에 종사하거나 퇴직한 사람들이 많이 산다. 대부분 자가용이나 오토바이로 출퇴근하므로 대중교통 수요가 적을 수밖에 없다. 겨우 강의 시간에 맞추긴 했지만 이런 상황을 모르고 새벽부터 여행 기분 내다가 큰 실수를 할 뻔했다.
숲으로 가는 산언저리마다 눈부시다. 밭두렁에 애기똥풀 흐드러져 숫제 샛노란 화단이다. 다랑논 이고 있는 석축에 어린 그늘이 푸르도록 짙은 건, 5월 한낮의 봄 햇살이 밝아서다. 민들레는 수과(瘦果)를 매단 채, 건듯 부는 미풍에 갓털을 휘날린다. 진초록으로 이미 농익은 초목 잎사귀들. 산야에 뿌리박은 식물마다 의기양양하다. 길로 나다니는 사람만이 계절을 타 들썩인다.
개심사(開心寺) 일주문을 지나자, 일변 눈으로 가득 차오르는 소나무들. 고찰(古刹)치고 들머리 풍광 허술한 곳이 드물다. 개심사 숲길도 기중 반열에 든다. 솔숲에 불그레한 빛살이 어린다. 적송(赤松)들이어서다. 미끈한 붉은 살갗에 건강한 지체, 게다가 저마다 미묘하게 굽어 허리를 요리저리 비트니 수려하다 못해 관능적이다. 흐뭇하면 안고 싶고, 심취하면 안기고 싶어진다. 이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만은 아니다.
굽고 휜 소나무는 내심 안도할 게다. 쭉쭉 곧게 자란 나무들보다 더 온전하게 수명을 누릴 수 있으니까. 목수의 도끼날을 피할 수 있어서다. 목재로서는 별 쓸모가 없게 생긴 덕분이다. 목수의 눈엔 무용지물이지만 소나무 입장에선 천행이다. 그게 나무만의 일이랴. 우리네 인생사에도 자주 적용되는, 일종의 이치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속담에 실린 메시지를 생각해보라.
물매진 들머리 숲길, 그 이후로는 돌계단길이 가지런하다. 여기서도 소나무들의 전시회가 성황리에 펼쳐진다. 나무들의 청신한 향이 그윽하게 번진다. 개심사 전각들 지붕마다 초록이 서린다. 초록 숲 안의 산사여서다.
뜰에 걸린 연등들로 경내가 환하다. 그러고 보니 얼마 뒤면 석탄일이다. 숨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꿈꾸지 않으면 오를 수 없다. 그리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 연등공양이란 부처를 숨 쉬고 꿈꾸고 그리는 일이겠지. 나를 낮추고 나를 비우고, 그리해서 나를 찾아가는 기도일 게다.
천년도량의 위세에 걸맞게 개심사 전각들은 방정하거나 준수하다. 혹은 허심히 잘 늙은 고로(古老)처럼 고졸하다. 전각 속엔 나무가 박혀 있다. 휜 채로, 비틀어진 채로, 그러니까 굽은 원목 그대로를 베어 말려 기둥을 삼고 들보로 채택했다. 주야로 법당의 향훈을 취할 저 고색창연한 재목들. 남벌 탓에 곧은 목재를 구할 수 없어 굽은 나무를 그냥 그대로 썼을까? 쓸모없어 보였을 나무가 쓸모 있게 쓰였다. 거룩한 불상과 동거하며, 더 온전히 살아남았다. ‘곡즉전(曲則全)’이라, ‘굽어서(曲) 온전할(全) 수 있다’는 묘리를 전갈한 이는 노자였다.
개심사는 실로 수목의 향연장이다. 그 친숙한 명성으로 한 벼슬 걸친 거목들의 장원이다. 소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모과나무, 배롱나무, 전나무, 서어나무, 왕벚나무…. 국내엔 이곳에만 있다는 청벚나무에선, 시나브로 봄이 가건만 여전히 끝물 꽃잎들 분분히 낙화한다.
개심사를 벗어나 다시 숲길을 오른다. 낙락장송 휘늘어진 숲 사이로 구불구불 길이 이어진다. 키 작은 관목들. 곧게 뻗어 하늘 한 자락 움켜쥐는 활엽 교목들. 온갖 나무들이 빼곡 들어차 기세를 돋운다.
인간의 도시는 삼엄한 사각의 링을 닮았다. 나무들은 코피를 쏟는 싸움을 하지 않는다. 경쟁을 능사로 삼는 대신, 상호 의존의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생존을 도모한다. 바위 벼랑에 위태롭게 매달린 소나무만 해도 그렇다. 곰팡이와 공생해 균근(菌根)을 만들고, 그 균근에서 발달한 팡이실로 바위 틈새의 수분과 양분을 빨아들인다. 이렇게 소나무는 공생과 상생, 인류의 그 오래된 이상(理想)을 소리 소문 없이 오롯이 구가한다.
숲길에 하오의 놀빛이 어린다. 폐사지 보원사지에 간신히 남은 석탑에도 황혼녘 주황물이 흥건하다. 간절한 탑돌이를 하며 합장 비손했을 옛사람들, 지금은 천상의 어느 푸른 공간에 머무시나. 옛사람들에겐 나무도 석탑과 매한가지였다. 성황당 신목(神木)에 의지해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꿈과 희망을 천상에 탄원했다. 삶이, 영혼이, 견딜 수 없이 슬플 땐, 조용히 숲에 들어가 하늘을 우러렀다. 그래서 숲은 일쑤 정결한 지성소였다. 그들은 숲에서 방귀조차 뀌지 않았다.
>>>탐방 Tip
개심사와 보원사지를 잇는 숲길은, 충남 내포 지역을 광범위하게 포괄하는 ‘내포문화숲길’ 코스들 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구간이다. 개심사에서 보원사지까지는 약 2km 거리. 산마루를 넘자면 오르막과 내리막을 경유하지만 가파르지 않다. 보원사지에서 1.3km를 더 내려가면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을 만날 수 있다.
태어나기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필자가 자란 곳은 경남 진해다. 요즘은 행정 구역이 변경되어 과거 진해시에서 마산시, 창원시와 함께 창원시로 합병되어 진해구가 되었다.
군복무를 해군이나 해병대에서 하신 분들은 잘 알겠지만 진해는 군항도시이자 아주 오래된 계획도시, 그리고 벚꽃도시로 유명한 곳이다. 이른 봄만 되면 필자는 진해의 시루바위에서 다시 태어났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다. 표고 653m, 봉우리 높이 10m, 둘레 50m의 크기로 우뚝 솟은 시루바위는 시루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나 그 바위가 있는 웅산의 이름을 따라 웅산암(곰메바위)으로 불리기도 한다. 시루봉은 옆의 천자봉과 더불어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천자봉은 중국의 천자 진나라 황제가 장생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가 잠시 쉬어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근대에는 명성황후가 세자를 책봉하고 세자의 무병장수를 빌기 위해 ‘웅산신당’을 두어 전국의 명산대천을 찾아 빌었는데 이곳도 그중 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외지인들은 가끔 시루봉(바위)과 천자봉을 혼동해 부르기도 한다.
필자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무렵 어느 봄날이었다. 혼자 산에 올라 시루바위를 보고는 10m 위가 한없이 궁금해서 인적이 드문 곳을 올라가 보기로 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이니 길도 험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절벽뿐이어서 바위를 잡고 조심조심 기울기가 약 110도 정도 되는 비탈진 암반을 올라갔다. 젊은 혈기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도전이었다.
막상 올라가 보니 특별한 것은 없었다. 단지 맑은 날에는 일본의 대마도가 보인다 할 정도로 일본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산이어서 혹시 대마도가 보이나 둘러봤지만 잘 보이지 않았었다. 잠시 진해만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겨 있다가 내려가려고 하니 올라올 때와는 길의 상황이 전혀 달랐다. 내려갈 수 있는 길이 없었던 것이다.
인적이 드물어 소리쳐 구원을 요청할 수도 없고 요즘처럼 핸드폰 같은 것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순간 “아! 여기서 꼼짝없이 굶어 죽게 생겼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왕 굶어 죽게 되었으니 가만히 앉아 죽는 것보다 올라오던 길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더 내려가는 길을 찾아보자 하면서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경사진 곳이라 위에서 보니 밑의 바위는 안 보이고 하늘 위에 그냥 솟아 있는 것 같은 느낌밖에 들지 않아 현기증이 일었다. 포기하려다가 다시 탈출을 위한 도전을 해보기로 했다.
솟은 바위를 양손으로 잡고 발을 내리니 몸이 허공에 붕 떴다. 잘못해서 양손에 힘이 빠지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경사진 곳을 딛고 올라왔으니 철봉하듯 몸을 움직이면 발이 바위 어디엔가 닿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더니 예상대로 발이 바위 끝에 닿았다. 바위를 오를 때처럼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내려왔다.
그때 필자는 다시 세상에 태어난 느낌이 들었다. 진해 시루바위 위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해병혼’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웅산. 해군이나 해병으로 입대하면 최소 한 번쯤은 오르는 산이다. 웅산의 시루바위 그리고 그 옆에 웅장한 모습의 천자봉이 있는 진해는 나를 키워준 자랑스러운 고향이다. 초등학교 교가가 생각난다. “ 높이 솟은 천자봉 병풍을 삼아 굽이치는 푸른 물결 앞에 맑았네. (중략) 문화의 밝은 빛을 갈고 닦아서 누리를 비취어줄 등불이 되자.”
이제 우리는 ‘대전’ 하면 바로 ‘빵집’ 성심당을 떠올린다. 그만큼 대전을 대표하게 된 아이콘 성심당은 지역 공동체와 함께 성장하는 착한 기업의 대명사로도 유명하다. 성심당의 고집은 기업정신이기도 하다. 그것은 나눔과 환원을 통한 가족 같은 공동체의 선을 향한 고집에도 적용된다. 아들은 빵을 굽고 딸은 요리를 하며 아내는 홍보를 맡는 등 온 가족이 빚는 성심당의 아름다운 가치와 그 원동력, 聖心堂 가족의 세상을 향한 희망의 얘기를 임영진 대표를 만나 들어봤다.
성심당은 철저히 ‘대전 프리미엄’을 지킨다. 그래서 다른 지역에 지점을 내지 않아 성심당의 신선한 빵을 맛보려면 무조건 대전을 가야 한다. 그나마 대전역, 롯데백화점 대전점 등 대전 안에는 몇 군데 지점을 마련해서 운영하고 있기에 예전보다 접근성이 좋아졌다.
대전역에 내렸을 때 고소하고 달콤한 튀김소보로 냄새와 함께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줄을 따라가다 보면 발견할 수 있는 게 성심당 대전역점이다. 엄청난 인기 덕분에 전국 곳곳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어오는 수많은 유치 러브콜에도 불구하고 성심당이 대전이라는 지역성을 꿋꿋이 지키는 것은 그로 인해 얻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대전까지 와서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성심당 빵을 사가는 사람들의 표정에 담기는 기쁨. 그 모습이야말로 성심당 빵이 만드는 기적이죠. 100년 가업(家業)으로 오래가려면 여기저기서 다 먹을 수 없는 간절함과 기다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올해로 62년째 대를 이어 성심당을 경영하고 있는 임영진 대표는 자신이 하고 있는 업의 소탈함만큼이나 소탈한 인상으로 성심당이 대전을 지키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의 지론에는 성심당의 오랜 세월에서 얻어진 단순하고도 단단한 논리가 있었다.
삶은 롤러코스터와 같다
“빵은 음식이니까, 무슨 일이 날지 매일 불안하죠.”
성심당은 얼마 전 큰일을 겪었다. 성심당을 대표하는 빵인 부추빵에서 이물질이 나온 것이다. 이에 대해 중앙지에서 크게 내용을 다뤘고, 성심당에서는 사과문을 발표한 후 후속 조치를 취했다. 식품 기업에서 이런 사고가 날 때마다 기업에 미치는 파장은 클 수밖에 없다.
“완전 비상이었죠. 그래서 음식은 폭탄이라고도 해요. 하루에 빵 몇만 개를 만드는데 그중에 이런 일이 벌어지니…. 성심당에는 전국에서 견학을 와요. 빵 만드는 과정은 모두 공개되고 있고요. 그런데도 이런 실수가 벌어진 거예요. 직원들에게는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 정신 차리자고 얘기를 했어요. 너무 죄송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태에도 불구하고 또 불을 꺼주는 일이 있었다. 개그맨 이영자가 나오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그녀가 성심당 빵을 먹으러 가는 장면이 나온 것이다. 그러자 성심당 빵은 불티나게 팔렸고 논란도 다소 잠잠해졌다.
“삶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구나, 내 계획대로 삶이 살아지지 않는구나 싶었죠.”
성심당 역사의 가혹한 순간들
임영진 대표가 삶을 롤러코스터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가 성심당을 운영하면서 겪은 온갖 우여곡절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대전을 대표하는 명물로 정착이 된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62년의 성심당 역사에는 잔인한 운명의 생채기들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성심당의 모든 것을 태웠던 화재 또한 그렇다.
2005년에 일어난 화재는 심각했다. 성심당 운영 48년째 되던 해, 여러 가지 안 좋은 상황이 겹쳐서 경제적인 문제가 회사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들던 차에 화재가 일어났다. 임 대표는 성심당을 부동산에 내놓기까지 했을 정도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고 회고했다.
“그때 직원들이 큰 도움을 줬죠. 한창 추울 때였는데 찬물로 재를 닦고 중고 빵 기계를 구입해서 빵을 만들고. ‘잿더미 속의 우리 회사 우리가 살리자’라는 구호로 단합하여 위기를 극복해보자고 나섰어요.”
화재를 딛고 일어난 성심당이었지만 그 후에도 예기치 못한 일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임 대표의 동생이 프랜차이즈 사업을 한 것도 그중 하나다. 동생이 시작한 프랜차이즈 사업은 실패했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성심당이 떠안게 되어 또다시 심각한 위기를 불러왔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대전 시민들과 직원들은 성심당에게 변치 않는 애정을 보여줬고 일으켜 세웠다. 성심당은 대전이 키운 빵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대전이라는 도시의 역사가 성심당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전 시민과의 가족과 같은 연대감, 이것이 성심당이 대전을 떠나려 하지 않는 이유이자 성심당이 추구하는 사회 환원의 한 배경이기도 하다.
“성심당 같은 회사 100개가 있으면 한국이 바뀐다”
성심당은 최근 독특한 기업 모델로도 인정받고 있다. 바로 사회적 화두인 공유경제의 사례로서다. ‘성심당과 같은 기업 100개가 생기면 한국 경제의 구조를 바꿀 수 있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사회 환원적 행보를 보이고 있는 성심당은 매년 회계, 납세 명세서를 직원에게 공개하며 이윤의 15%를 성과보수로 지급한다. 인사고과의 40%를 차지하는 기준은 동료 직원 사랑이다. 임 대표는 미래 기업은 공유의 개념이 아니면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것 같다고 말한다.
“모두 자기 걸 챙기기만 하면 전부 싸움이 되고 빈부격차도 커지고 좋아질 게 하나도 없잖아요. 자본주의 사회의 파멸을 막기 위해선 뭔가 내놓고 같이 가자고 해야죠. 크게 보면 그게 행복한 삶을 위한 해결책이 되리라고 봐요.”
기업 경영의 목표가 오로지 돈이면, 단순히 돈이 좀 안 벌린다 싶으면 모든 게 무너진다. 그러나 행복이 목표가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접근하는 방법도, 기업 경영도 달라진다. 임 대표는 그것이야말로 하느님이 세상을 만든 후 인류의 행복을 위해 원했던 바가 아니었겠냐고 되물었다. 어떻게 보면 성심당은 가장 높은 사람의 뜻으로 그렇게 하는 게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기쁠 때마다 생각나는 아버지, 故 임길순 회장
성심당이 지금의 문화를 갖게 된 근원을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성심당을 만든 임 대표의 아버지 故 임길순 회장에 대해 물었다. 임 대표는 아버지가 단순하고 우직한 분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러한 자신의 성정을 기업 경영에 그대로 투영했다.
빵은 신선도가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다. 특히 대전은 좁은 지역이다. 임 회장은 빵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다시 찌거나 튀긴 게 아닌 방금 만들어낸 빵만을 팔았고 그게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성심당 전설의 시작은 그렇게 매우 소박하고 아주 기본적인 장사의 정신에서부터 만들어진 셈이다. 임 대표는 자신이 그러한 부모님의 철학과 논리를 그대로 따랐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62년을 운영했으니, 모르는 사람이 없는 거죠.”
아버지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기본을 지켜라’였다. 거래처와의 관계, 대전시와의 관계, 고객과의 관계에 있어 아버지가 추구했던 것은 철저히 기본을 지키는 예의였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믿음 속에서 성심당이 커지기 시작했다.
“단순해요. 새로운 경영법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하라는 거죠. 그렇게 나누다 보니 나눈 것들이 되돌아와서 성장을 시켜주더라고요.”
그러나 아버지를 생각하면, 임 대표는 안타까워지는 마음이 있다.
“사실 아버지는 이북에서 사셨는데, 한국전쟁 때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피란길에 오르셨어요. 살아남기만 해도 다행이었던 상황이어서 나머지 인생은 덤으로 사는 삶이라고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남은 인생은 남을 도와야 한다고 자신과 약속하셨죠. 그걸 지키신 겁니다. 그리고 고생하는 것만 보고 가셨어요. 고향이 아닌 곳에서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그런데 지금 성심당이 대전 브랜드 1위가 되었으니 이걸 보면 얼마나 기뻐하실지…. 기쁠 때 아버지 생각이 나요. 이걸 보셨어야 하는데 싶어서.”
임 대표는 아버지를 하늘에서 만나도 욕먹지는 않겠다 싶어 다행이라며 웃었다. 자신에게 돈이 아니라 정신을 물러주셔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감동만 하고 실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족이 없었다면 이렇게 열심히 안 했을 거예요. 그리고 혼자 할 때보다는 가족과 함께할 때 가치가 더 커집니다.”
임 대표는 4남매를 두었었다. 그러나 그중 아들 한 명을 어린 나이에 지병으로 잃었다. 그런 아픈 경험은 사람으로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희로애락이 깊어지고 삶과 사람의 소중함을 깨닫게 됐다. 그러한 깨달음은 가족적인 기업으로서 성심당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달라진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실천이다. 아무리 좋은 말과 방법이라도 ‘그 손해 보는 걸 왜 하느냐’라고 생각하는 순간 실천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감동은 하지만 실천은 하지 않아요”라는 임 대표의 담담한 목소리에는 폐부를 찌르는 진실이 담겨 있었다.
성심당과 다른 회사들이 구별되는 것은 그 지점이다. 실천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 너무나도 단순하지만 그 누구도 쉽게 하지 못하는 그 차이 말이다.
“기법이나 기술이 아니라 이런 마음을 모방해야죠. 그래야 오래가는 기업이 될 수 있다고 봐요. 오래가기 위해서는 이익보다는 가족과 같은 직원들의 행복이 우선이죠.”
성심당의 경영 철학은 다른 제과점은 물론 중국에서도 벤치마킹의 대상이다. 그렇게 성심당의 생각이 퍼져나가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번에 거창하게 바꾸지는 못한다 해도 조금씩이라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희망이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빵으로 돈을 벌지만 궁극적으론 세상에 희망을 주는 일이 성심당의 목표다.
나는 직원의 조력자
물론 성심당의 나눔과 공유, 그리고 가족 친화 기업이라는 추구가 항상 행복한 결과만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임 대표 또한 배신감도 느껴보고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은 일들도 겪기를 반복했다. 세상의 모든 경영자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도 임 대표는 자신이 좇는 가치가 옳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 뚝심과 확신이야말로 성심당 성공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사실 빵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90%는 나가서 자신의 빵집을 차리고 싶어 해요. 그런 사람들에게 투자하고 지원하는 건 손해 아니냐고도 말하죠. 하지만 그게 그 사람의 꿈인 걸요. 그래서 저는 조력자 역할을 하기로 했어요.”
성심당은 동료애가 강하기로 유명하다. 특히 매주 사보 형태로 내놓는 한가족신문은 10여 년 전부터 만들기 시작했는데 성과를 공유하고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다. 기술인이라는 특성상 서로 살갑기가 어려운 제빵인들의 특성상 이런 자리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여기서의 실천 성과는 인사고과에 반영되어 보상이 따른다. 그래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은 싸웠지만 화해한 사람들이다. 그러다 보니 서로 돕고 사랑하는 사례들도 늘어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기다리는 마음으로 62년, 세상이 답하다
빵을 만드는 것은 일 자체가 어렵고 돈을 벌기도 쉽지 않다. 새벽부터 준비해야 할 정도로 손이 많이 가며 사람들이 예약을 하지도 않는다. 예약이 없으니 수량을 알 수 없는데, 그렇다고 안 만들거나 부족하게 만들어놓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러니까 팔릴지 안 팔릴지 모르는 빵을 만들어놓고 무작정 기다리는 마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 마음의 불안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임 대표가 제빵업의 어려움을 말하면서 “전생에 무슨 죄를 졌는지…” 하고 웃음 짓던 모습이 떠오른다. 구조적으로 빨리 돈을 벌 수 없는 구조, 기다림이 체질이 되어야 하는 직업. 그 체질이 곧 마음이 된 것이야말로 임 대표의 힘이 아닐까. 수많은 시련과 실망 속에서도 그는 나눔과 사랑을 계속 말한다. 오로지 믿음 하나에 자신을 맡겨 구도를 거듭하며 정진하는 수도자의 모습과 비슷하다. 불확실에 대해 믿으면서 정성을 담아야 하는 일을 62년 동안 한 회사라면, 지금의 성공에 대한 대답으로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 임영진 성심당 대표와 인터뷰하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다’. 임 대표는 그런 사람이고, 그가 경영하는 성심당은 그런 회사다. 그 뚝심을 느꼈기에, 성심당 가족이 만들 미래와 희망을 기대해본다.
봄꽃에 설레어 마음에도 꽃물 번진다. 처처에 흐드러진 벚꽃은 절정을 넘어섰다. 꽃잎마다 흩어져 비처럼 내린다. 만개보다 황홀하게 아롱지는, 저 눈부신 낙화! 남도의 끝자락 완도 땅으로 내려가는 내내 벚나무 꽃비에 가슴이 아렸다.
한나절을 달려 내려간 길 끝엔 완도수목원. 칠칠한 나무들, 울울한 숲이 여기에 있다. 사철 푸른 야생의 수해(樹海)다. 천연의 상록 난대림이 산자락을 뒤덮었다. 붉가시나무, 동백나무, 완도호랑가시나무, 구실잣밤나무, 황칠나무, 후박나무, 감탕나무, 녹나무 등 770여 종의 난대성 목·초본과 희귀식물이 자생한다. 환호할 만한 종 다양성과 놀랄 만한 광활한 규모를 과시하며 씨억씨억 거센 숨을 쉬는 삼림이다.
산길로 들어서 초록 숲에 풍덩 빠진다. 숲길을 노니는 발걸음은 노루처럼 가뿐하다. 잡다한 소음과 미세먼지가 들끓는 도시에서의 보행과는 다르다. 인위와 허영이 난무하는 도회의 거리는 개운한 활보를 허용하지 않는다. 고뇌에 사로잡힌 카프카처럼 도시에서 사람들은 흔히 소심한 행보를 하지 않던가. 숲에서는 다르다. 깊은 근원으로 침잠한 숲 사이로 뻗은 오솔길이 발길을 보듬어 유유한 지경으로 인도한다. 숲길을 걷기란 그래서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탈출처럼 자유롭다.
이럴 때 의식은 자명종처럼 깨어나고 오감이 열린다. 온몸으로 말을 걸어오는 숲의 언어에 귀가 민감해진다. 나무를 흔드는 바람소리와 숲속의 공인된 가수인 산새들의 악곡이 귓속으로 스민다. 이것들은 숲과의 협연의 산물이다. 유심히 귀를 기울이는 사람 역시 순간적으로 숲의 식솔이 된다. 물속 같은 적막이나 사무치는 고요마저 숲의 언어다. 이 묵묵한 숲의 좌정 앞에서 번잡한 혀처럼 날름거리던 욕망이 비로소 순해진다. 숲길을 가만히 걷는 일은 그래서 오롯한 순례다. 내밀하게 전개되는, 조촐하되 순수한 향연이다.
완도수목원의 무진장한 상록 숲은 한때 황무지에 가까웠다. 지난 1950년대까지만 해도 남벌과 도벌로 헐벗기어 황량했다. 재질이 조밀해 숯 재료로 널리 알려졌던 붉가시나무와 동백나무 군락은 한결 자심한 수난을 당했다. 수목원 곳곳에 발달한 ‘맹아림(萌芽林)’은 당시의 벌채가 남긴 상흔이자 재생의 현장이다. 맹아림? 밑동이 잘려나간 그루터기에서 새로 돋은 움싹들이 자라난, 여럿의 줄기로 이루어진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을 말한다. 생존의 고역은 사람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나무와 숲도 때로 부당하게 찢기고 스러진다만, 불굴의 인간처럼 용을 써 기어이 회생한다.
숲길에 상큼한 향이 감돈다. 나무들이 내뿜는 피톤치드 향기렷다. 피톤치드는 갖가지 균(菌)들의 내침으로 야기된 상처나 고난을 다스리기 위해 나무가 분비하는 휘발성 물질이다. 아픈 나무가 풍기는 향기, 우리는 그 피톤치드를 마시고 심신을 치유한다. 사람이 나무의 숨을 마시고, 나무가 사람의 숨을 마셔 서로 재미를 본다면 그건 공정거래이겠지.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주기만 하고 받는 게 없음에도 마냥 태연한 게 숲의 천성이다. 나무도 숲도, 사람과 멀면 멀수록 안전하고 온전하다. 사람의 속세는 아수라장. 나무들의 마을, 숲 안의 생명들만 격의 없이 어울려 자애롭다.
근원을 헤아리자면 나무와 사람은 다를 게 없다. 나무의 몸에 흐르는 수액과 사람의 혈관을 달리는 피가 서로 무엇으로 다르단 말인가. 나무를 남으로 알았던 시절엔 꽃이 피건, 무참히 낙엽 지건, 폭설에 가지가 우두둑 부러지건, 사시사철 보기에 좋았다. 나무가 남이 아님을 알고 난 뒤로는 꽃 피우는 진통에, 낙엽 떨구는 우수에, 겨울나기의 고역에 한결 마음이 쓰였다. 내 안의 나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나무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나무들의 도가니를, 숲길을, 느릿느릿 천천히 걷는 행위란, 그렇기에 가상한 명상이자 성찰에 가깝다.
완도 앞바다를 건너온 바람일까. 하오의 숲은 세찬 바람을 품으며 한껏 부풀어 오른다. 등을 미는 바람 따라 들어선 ‘푸른 까끔길’은 어둑한 숲길이다. 기차게 무성한 동백나무 군락이 하늘을 가려서. 태초 이전처럼 심원한 적막에 휩싸인 동백 숲은 그러나 밝다. 순결한 몸을 붉게 연 동백꽃들이 초롱처럼 환해서다. 매달린 꽃도, 통째 떨어져 뒹구는 꽃도 성(聖)의 이미지로 다가와 내 안의 진흙탕을 헹군다. 향화(香火) 아니면 촛불 보살이다, 저 4월의 동백꽃!
탐방 Tip
완도수목원은 2000여 ha(약 600만 평)에 달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난대림 자생지로 공립수목원이다. 숲길의 총길이는 약 94km. 한나절을 머물며 숲길 걷기와 삼림욕을 즐기기에 적격이다. 산림전시관, 아열대온실, 방향식물원, 수생식물원 탐방도 즐겁다. 개원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한 사람의 손을 놔주는 것도, 매달리는 것도 사랑이다. 누군가는 극복한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고 말했다.
유디트 크빈테른(Judith Quintern·46), 그녀는 18년 전 독일에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미지의 땅으로 가는 길이었다. 한 남자와 도저히 헤어질 수 없었던 한 여자는 그 사랑을 극복하기로 했다.
한순간 길을 잃는다 해도 괜찮았다. 그리고 강원도첩첩산중 외딴집에서 된장국을 끓이고 해당화에 빠져 사는 동안 알게 됐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함부로 외롭지 않을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는 일임을….
‘유디트의 정원’이라 했다. 처음 그녀가 운영하는 카페 이름을 듣는 순간 타샤 튜더의 정원이 떠올랐다. “정원에 관해서라면 결코 겸손하고 싶지 않다”고 했던 여자. 문득 그 아름다운(?) 고집스러움이 그녀에게서도 느껴졌다. 그러지 않고서야 유배와 다를 바 없는 먼 이국땅에서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독일에서 정치 철학을 공부한 그녀가 남편 이희원(58) 씨를 따라 한국으로 온 것은 지난 2000년.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와 같이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 생각하려 애썼다.
“제 친구를 통해 남편을 알게 됐어요. 당시 독일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있던 그는 매너가 좋고 친절한 사람이었어요. 생각하는 게 비슷해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눴지요. 그러다 자연스럽게 연애를 하게 됐고요. 그런데 독일에서 둘만의 소풍을 다녀오던 어느 날 그가 갑자기 ‘우리 결혼할까?’ 하고 물었어요. 그 순간 딜레마에 빠져버리고 말았어요. 그가 박사학위를 딴 뒤에는 반드시 고향에 돌아가 연로하신 부모님과 같이 살고 싶다고 했거든요. 저랑 만나는 동안에도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자주 했기 때문에 우리의 연애는 종종 무거웠어요. 며칠 생각할 시간을 달라 했어요. 그와 헤어지거나, 그를 따라 한국으로 가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죠. 어느 결정도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와 헤어지는 것은 상상만 해도 견디기 힘들더군요. 그날 이후 제가 그와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됐어요.”
병이 되어버린 그리움
남편 가족들은 그녀를 환영했다. 물론 유학까지 보낸 아들이 외국인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섭섭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10여 년 만에 유학을 끝낸 아들이 돌아와 결혼을 하면 며느리와 오순도순 지내볼까 기대를 했는데 말도 통하지 않는 독일 며느리라니….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 물었을 때 시아버지는 간결하게 한마디만 했다.
“나는 내 아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그것으로 가족의 의견은 정리가 됐고, 두 사람의 결혼은 무리 없이 진행됐다. 시댁과 남편의 따뜻한 배려를 받으며 그녀도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타국에서의 외로움은 어쩔 수 없었다. 콧마루가 시큰해지는 날이 많아졌다. 결국 그녀는 심한 우울증과 향수병을 앓기 시작했다. 처음엔 매력적으로 보이던 서울도 점점 싫어졌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한국말을 못해 누구를 만나도 바보처럼 앉아 있어야만 했다. 어느새 모국어도 친구도 다 잃어버리고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남편에게는 말도 못하고 혼자 울면서 생각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때로는 마음이 곤두박질치며 당장 독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지금은 TV에 외국 사람들도 많이 출연하니까 분위기가 달라졌지만 제가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관광객 취급을 받았어요. 도시 사람들은 지금도 저를 만나면 ‘젓가락 사용 아주 잘하네요’ 같은 말들을 해요. 그런 대화는 하고 싶지 않거든요. 그들에게 저는 영원한 이방인인 거죠. 그게 힘들었어요.”
삼척에서 정이 들다
안산 한양대학교에서 독일어 강사로 7년 동안 일하면서도 외로움은 치유되지 않았다. 독일과는 분위기가 다른 교수 사회도 그녀를 힘들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강원도에 집을 마련하자고 했다. 그녀는 시부모님과 함께 갔던 시골을 떠올렸다.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마음을 환하게 열었던 곳.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에서 생활하느라 까맣게 잊고 있던 마을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독일을 그리워했던 그녀는 시골로 들어가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영영 힘들어지는 건 아닐까 염려가 됐다. 불안했지만 도시의 일상에 잔뜩 지쳐 있던 터라 시골집을 구하러 가는 남편을 따라 나섰다. 그리고 해발 700m고지 삼척 산중에서 다 쓰러져가는 집 한 채를 발견했다.
“운이 좋았어요. 화전민이 살던 땅을 구하고 싶어 했는데 거의 1년 만에 하늘 바로 밑 햇살이 가득 쏟아지는 곳에서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땅을 발견했어요. 남편은 기분이 좋아 ‘와~ 진짜 화전민이 살던 곳이네’ 하고 소리쳤어요.”
화전민 가옥을 구입한 뒤 두 사람은 도시에서보다 일상이 더 바빠졌다. 전기도 끊기고 재래식 화장실밖에 없는, 잡풀과 거미줄이 가득해 쓰레기더미처럼 보이는 집을 치우다 보면 하루가 다 갔다. 지인들은 이런 집에서 불편해 어떻게 사냐며 집을 부수고 새 집을 지으라 조언했지만 부부는 옛집을 살려보고 싶었다. 특히 그녀는 구석구석 쓸고 닦고 광을 내면서 옛 사람들이 살던 모습을 상상하는 게 즐거웠다. 그녀에게는 그냥 빈집이 아니었다.
“독일 사람들은 오래된 집을 좋아해요. 콘크리트로 지은 집보다 훨씬 기품이 있거든요. 삼척에서 산 집이 100년도 더 된 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묘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 집을 통해 한국이라는 나라를 속속들이 들여다봤어요. 박물관에서는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었어요. 옛 사람의 손길과 마음까지 느꼈다고나 할까요. 집을 떠받들고 있는 나무 기둥과 격자형 문틀, 마루, 그리고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이 매일 사용하며 손때를 묻혔을 바가지와 그릇들이 폐허 속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귀한 보석을 발견한 것처럼 기뻤어요.”
두 사람은 한동안 옛집을 복원하는 일에 빠져 지냈다. 몸은 고단했지만 재미있는 놀이에 중독된 것처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잡풀과 먼지 속에 묻혀 있던 가옥이 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부부는 노다지를 찾아낸 양 행복해했다. 마음껏 늘어져 평화로운 시간을 만끽하기에 딱 좋은 집이었다. 8부 능선에 눈이 푹푹 내려 갇혀버리면 마치 세속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사람들처럼 즐거워했다. 봄이 오면 그녀가 좋아하는 해당화를 잔뜩 심었다. 심심할 때는 트로트를 틀어놓고 따라 불렀다. 그새 두 마리의 고양이가 가족이 됐다. 배가 고프면 청국장을 끓이고 산에서 뜯은 나물을 무쳐 밥상을 차렸다. 그렇게 자연 속 맨발의 시간들과 서서히 정이 들었고 그녀는 독일을 떠난 뒤 찾은 ‘새 고향’에서 비로소 안식을 얻었다.
새로운 놀이터
최근 그녀는 또 다른 정원을 가꾸느라 분주하다. 바로 독일식 카페 ‘유디트의 정원’. 5년 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그만두고 경포호 근처에 예쁜 카페를 하나 짓더니 벌써 4호점까지 열었다 한다. 느리게 사는 걸 좋아하는 분이 어쩌자고 일을 자꾸 벌이시냐 물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웃음) 이곳 강원도에 와서 친구들을 사귀었는데 의외로 유럽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독일 소개도 하고 서로의 문화 차이에 대해 얘기를 나누면 좋겠다 싶었어요. 수다를 떨기에는 이런 공간이 좋잖아요. 또 독일이 그리울 때쯤 핑계를 대고 건너가 가구를 직접 고르는 일도 재미있고요. 그동안 들여온 물건들이 벌써 수백 점이나 돼요. 그러다 보니 자꾸 정원을 넓히게 되네요.”
그녀가 다시 그리는 그림이 어떤 모양새가 될지 슬쩍 궁금해진다. 한국에 와서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비로소 알게 됐다는 그녀는 그것들에 더 집중하며 살고 싶다고 했다.
“산책, 독서, 자연, 고양이, 정원….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에요. 산책할 때는 온몸의 감각기관을 열어놔야 해요. 그냥 걷는 건 의미 없어요. 저는 자연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계절의 변화를 예민하게 느끼고 싶어요. 내 마음에 얹힌 무거운 짐을 내려주고 평화를 찾도록 도와주기 때문이죠.”
이만하면 한국 사람 되려고 더 이상 노력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떤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의 풍경과 음식을 사랑하고 좋아하게 됐으니까.
사랑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를 유배한 곳에서 그녀는 이제 낙원을 찾은 것일까.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성인이나 현자들이 하나같이 사막이나 황야를 찾아간 것은 그곳이 ‘비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비어 있지 않으면 신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 많은 사람이 해오는 질문 중 하나는 가봤던 여행지 중 한 곳만 추천한다면 어디를 꼽겠느냐는 것이다. 장소마다 느낌이 다른데 그런 데가 어디 있냐며 웃어넘겼지만 결국 꼽은 곳은 모로코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진기한 것들로 가득한 곳. 정비된 수도 라바트와 천년 미로의 도시 페스, ‘본 아이덴티티’를 비롯해 온갖 영화의 배경이 된 다닥다닥 붙은 하얀 집들이 있는 항구도시 탕헤르, 이름만 들어도 노래가 흥얼거려지는 낭만 가득한 카사블랑카도 좋지만 역시 모로코 여행의 백미는 세계에서 가장 큰 야시장이 열리는 마라케시와 별이 쏟아지는 사하라 사막의 야영이라 하겠다. 아침에 일어나면 입안에서 모래가 서걱대고 며칠간 제대로 씻을 수도 없지만 밤이 되면 500만 개, 아니 5000만 개의 별을 이불 삼아 잘 수 있는 곳. 사하라 사막의 하룻밤은 세상 어느 5성급 호텔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다.
모로코의 심장, 마라케시
카사블랑카를 지나 기차를 타고 모로코의 심장이라 불리는 마라케시(Marrakesh)로 간다. 밤이면 세상에서 가장 큰 포장마차촌이 펼쳐지는 제마엘프나(Djemaa el-Fna) 광장과 미로로 된 장터 수크(souq)가 있는 곳. 가게마다 손님을 불러 세우고 어느 나라에서 왔냐, 안 사도 좋으니 차 한 잔 하고 가라고 말을 걸지만 다른 곳에서라면 몰라도 이곳에선 귀찮지 않다. 모로코 사람들 특유의 유머와 밝음 때문이다.
이곳에선 반드시 흥정을 해야 한다. 함께 여행한 유럽 친구들은 평소엔 콧대 높게 굴다가도 수크에 갈 때면 한껏 낮은 자세로 함께 가줄 것을 청했는데 그들에겐 흥정 문화가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단 80%는 후려치고 들어가며 흥정하는 내 모습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진다. 난 마치 묘기라도 부린 듯 으쓱해진다. 그들은 왜 정찰제가 아니냐고 투덜대지만 이런 맛이 있어야 장터이지~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노천카페에 앉아 민트차를 마신다. 제대로 씻지 않은 민트 잎에 뜨거운 물만 부었는지 흙이 우적우적 씹힌다. 포장마차가 열리기 전 낮의 빈 광장에선 세상 어디서도 보기 힘든 진기한 묘기를 볼 수 있다. 젤라바(모로코 전통의상)를 입고 춤을 추는 마라케시의 명물 물장수를 비롯해서 뱀 부리는 사람, 약 파는 사람, 헤나 타투를 하는 사람들까지 다양하다, 수백만 명이 들끓는 광장을 보고 있으면 마치 알라딘의 요술 램프를 보는 것 같다. 저녁 무렵이 되니 목욕탕도 아닌데 거대한 광장에 일제히 연기가 피어오른다. 낮 동안 비어 있던 광장이 거대한 포장마차촌으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다닥다닥 붙은 포장마차에서 타진, 하리라, 쿠스쿠스, 케밥, 에스카르고 등 갖가지 산해진미에 취해본다. 현실인지 환상인지 헷갈리는 동안 밤이 깊어간다.
아틀라스 산맥을 넘어 사막 여행이 시작되는 므하미드로!
마라케시에서 뭉친 일행은 미니버스를 타고 아틀라스 산맥을 넘어 사막 캠프가 있는 므하미드(M’hamid)로 향했다. 베르베르족들의 터전이기도 한 므하미드 사막 캠프의 숙소는 진흙으로 된 카스바다. 카스바라니? 가요에서나 듣던 카스바가 정말 존재한다는 말인가? ‘카스바(casbah)’는 ‘요새’라는 뜻으로 주로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도시의 방어를 위해 시가지의 일부 또는 그 외곽에 세워지는 성을 말한다. 붉은 사막 한가운데 미로처럼 붙어 있는 성안에 있는 집에서 민트차를 마셨다. 므하미드엔 사막 캠프가 여러 개 있다. 혼자서 온 여행객도 이곳에서 사막 투어를 예약하면 안내받을 수 있긴 하지만, 그럴 경우 차 한 대와 부대비용을 혼자서 다 감당하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모일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불편이 있다. 사막 투어는 혹시 모를 위험도 있어 혼자 하는 것보다는 여러 명이 함께하는 것이 재미도 있고 비용도 절약할 수 있다. 사막으로 들어가기 위해 3대의 지프차에 나눠 타고 자동차 경주대회인 다카르 랠리가 열리는 길을 따라 에르그 시가가(Erg Chigaga)로 들어갔다.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용광로처럼 뜨겁다. 모로칸들은 머리엔 터번을 쓰고 젤라바라 부르는 긴 가운 같은 것을 입는데, 패션이라기보다는 이곳의 기후에 최적화된 의상이다. 어느 나라의 패션이든 그렇게 입고 다니는 이유가 다 있다. 사막에서 하는 스카프는 장식용이 아닌 것이다. 모래바람을 막아주고, 살을 몽땅 태워버릴 듯한 50℃의 태양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해주는 필수품 중의 필수품이다.
사막 중의 사막, 사하라!
사막 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붉은 모래사막을 떠올리지만 흰색과 핑크색의 소금사막부터 잡초가 자라는 사비나 사막, 이집트의 흑사막과 백사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사막이 있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사막 중 사하라(Sahara)만 한 게 있을까. ‘사흐라(Sahra, 불모지)’라는 이름에서 유래한 사하라는 사막 중 가장 규모가 큰 사막으로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를 비롯해 북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에 걸쳐 있다. 바람이 부는 대로 끝없이 굴곡을 달리하는 사하라의 듄(Dune, 모래언덕)은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막의 이미지는 바로 사하라다. 낮 동안 달궈진 사막은 걸어 다니기가 힘들지만 이른 아침의 사막은 밤 동안 식어 맨발로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이때 발끝에 느껴지는 시원한 감촉은 두고두고 기억될 만큼 감미롭다. 인간의 기억 중 가장 오래가는 감각이 촉각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된다. 해가 지자 사막은 변화무쌍하게 변했고 곧 밤이 찾아왔다. 모로코 전통의상 젤라바를 두른 사막 캠프 주인 하산과 운전기사는 음악을 크게 틀더니 “밥 먹으러들 내려와~” 하며 손짓했다. 언제나 유쾌한 모로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웃음 짓게 하는 매력덩어리들이다.
별이 쏟아지는 사막에서 즐기는 야영
사막 야영을 갈 때는 운전사와 요리사가 함께 간다. 일행이 사막을 보며 광분하는 동안 그들은 텐트를 치고, 저녁식사와 잠자리를 마련한다. 사하라 사막의 밤, 전갈이 있다 해서 높은 매트리스를 깔았다. 무수한 별이 쏟아지는 하늘이 지붕이다. 새벽 무렵 사막을 덮어버릴 듯 쏟아져 내리던 별들. 그 향연을 잊을 수 없다. 낮 동안 뜨겁게 달궈졌던 모래 위에 발을 얹어본다.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싶어 밤새 식어버린 곱디고운 사하라 사막의 모래 위를 맨발로 걸어 아름다운 듄에 호젓하게 올라본다. 최고의 명상이란 바로 이 순간이 아닐까. 고요함 속에서 붉은색 모래 평원을 보니 시간이 그대로 멈춰버린 듯하다. 가늘고 긴 모래가 발가락 사이를 간질인다.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한 달콤한 오르가슴이다. 겹겹이 쌓인 산맥처럼 듄과 듄 사이를 너머 시야를 넓히니 멀리서 부지런한 이탈리아 친구가 벌써 산책 중이다. 모래 위에서 잠을 자던 운전기사 모하메드와 요리사 알리도 어느새 일어나 메카를 향해 절을 올리고 있다.
검은 옷의 카스바 여인!
사막을 나와 낙타를 타고 카스바 마을을 지나는데 단체로 어디를 다녀오는지 검은 옷을 입은 카스바 여인들이 지나간다. “살람 알레이쿰(당신에게 알라의 평화를)!” 하고 인사를 하니 “봉주르~” 하고 답한다.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등은 오랫동안 프랑스 식민지였던 탓에 프랑스어를 공용어처럼 사용한다. 프랑스 사람들은 모로코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에사우이라 등지에 별장을 사두고 바캉스 시즌이 오면 차를 몰고 온 가족이 내려와 한 달간 머물다 돌아가곤 한다. 사막에서 돌아온 밤, 숙소에서 생존을 축하하며(?) 하산이 열어준 모로칸식 전통공연을 관람했다. 마치 현실의 시간이 아닌 듯 몽롱했다. “별밤에 더워서 잠도 안 오는데, 이렇게 공연을 보며 놀지 뭐.” 멋쟁이 프랑스 언니 오빠는 흥에 겨운 듯 덩실덩실 춤을 춘다. 그렇게 아름다운 밤이 꿈결처럼 흘러갔다.
Travel tips
■항공편
인천공항에서 카사블랑카까지 직항이 있으며, 여기서 기차로 이동하면 된다.
■ 추천 숙소 및 카페/ Hotel & Guest House
Marrakech 추천숙소: Hotel Ryad Mogador(tel: 024-43-8646)
Earth cafe website: www.earthcafemarrakec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