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은 워낙 적은 편이다. 영화관에선 저녁시간에 딱 한 회만 상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로 영화관은 거의 텅 비었다. 그 때문에 조용히 영화에 몰입할 수 있긴 했지만, 영화 속에서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폭격 소리에 초반엔 몇 번씩 놀라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그동안 우리네 삶이 비교적 평온하기만 했던 것 같아 영화를 보며 미안하기도 했던 시간이었다.
사마의 엄마인 ‘와드 알-카팁’은 카메라 영상을 통해 어린 딸 사마에게 시리아 내전의 실상을 내레이션 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대통령의 장기집권에 저항하는 반군들과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정부군과의 대립이 심화된다. 그러면서 걷잡을 수 없는 전쟁이 일상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 화면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보는 내내 민주화 열망을 위해 피와 땀을 아끼지 않았던 우리의 역사가 간간이 겹쳐진다.
2012년, 시리아 북부 도시 알레포 대학의 학생이던 와드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마주한 참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기 시작했고 마지막 남은 병원의 의사 '함자 알 카팁‘과 뜻을 함께 하던 와드는 부부의 인연을 맺는다. 그리고 전쟁의 폐허 속에서 소중한 생명 '사마'가 태어난다.
“사마는 하늘이란 뜻입니다. 저희가 사랑하고 원하는 하늘, 공군도 공습도 없는 깨끗한 하늘요. 태양과 구름이 떠 있고 새가 지저귀는 하늘요.”
고통과 절망의 순간이 낱낱이 기록되는 영상은 사마에게 더 나은 미래를 전하기 위한 모성이다. '전쟁은 무섭지 않지만 사마, 너와 함께 하지 못할까 봐 두렵다'라고 와드는 말한다. 그럼에도 그들의 위태로운 행복은 지속된다. 갈수록 폭탄이 빗발치고 하늘로 치솟는 연기와 폭음 속에서도 딸을 향한 마음이 애틋하고 절절하다.
“사마, 넌 우리 삶의 단비였단다. 하지만 널 이런 곳에서 낳다니, 네가 선택한 것도 아닌데. 엄마를 용서해줄래?”
엄마 와드는 총 대신 카메라를 들고 나서고 아빠 함자는 날마다 총탄과 폭격에 쓰러지고 죽어가는 수백 명의 사람을 치료하며 그들만의 신념을 지켜나간다. 핏자국으로 얼룩진 건물 바닥에 환자를 눕혀놓고 치료하고 주검의 한쪽에서는 새 생명이 태어난다. 목숨을 위협당하면서도 비명을 질러대는 아수라장 속에서 또 다른 목숨을 구하고, 공포감 속에서도 전쟁의 깊숙한 곳까지 카메라는 파고든다.
폭격으로 먼지를 뒤집어쓰고 피범벅이 되어 죽어가는 어린 동생을 바라보는 아이, 폭격 맞은 아이를 안고 함자의 병원에 온 어머니는 카메라를 보며 울부짖는다. “이거 지금 찍고 있어? 어떻게 저들이 우리한테 이럴 수 있어? 이거 빠짐없이 다 찍어.” 저널리스트들이나 매스컴에서 보도하지 않은 참상들이 와드의 카메라에 거침없이 고스란히 담긴다. 팔다리가 잘리고 온몸에 흘러내리는 피와 폭격 먼지가 뒤덮인 얼굴이랑 여과되지 않은 아비규환의 현실이 무방비로 노출된다. 연출되지 않은 생생한 참상에 할 말을 잊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전쟁을 경험 중인 느낌이다. 잘 만들어진 전쟁영화만 보아왔던 무지함에 가슴이 무너진다. 안타까운 희생과 뜨거운 피로 써나가는 역사를 본다.
시리아 내전이 장기전이 되면서 강대국들까지 끼어든다. 하지만 이 영화는 자신들이 살아가던 터전을 지키고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을 알리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대학생이었던 와드가 결혼을 하고 딸 사마를 낳고 전쟁을 겪는 5년 동안 시리아 내전의 기록을 위해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마지막에 와드는 말한다.
"이 모든 건 사마, 너를 위해서야."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카메라에 담아 세상에 알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프지만 감동이다. 마지막 자막이 올라가는데도 몇 명 되지 않는 관객들은 선뜻 일어서질 못한다.
그녀가 들려주는 얘기의 톤도 내용도 화창하다. 꽃 핀 개나리처럼 밝다. 전공은 미나리 농사. 청초하기로 개나리에 맞먹을 미나리와 자신이 딱 닮았단다. 미나리의 억센 생명력, 그걸 집어 자신의 정신적 초상으로 여기는 거다. 미나리의 초록처럼 싱그러운 시절은 아쉽게도 이미 몸에서 떠났다. 그러나 이옥금(62) 씨가 누리는 귀농생활은 베어낸 자리에 다시 싹눈이 돋는 미나리처럼 싱싱하다.
농사란 정한(情恨)의 사업이다. 흠뻑 정을 쏟아도 일쑤 허무한 결산이 돌아오는 게 농사이니까. 그러나 미나리 농군 옥금 씨는 구슬피 우는 일 한 번 없이 쾌속 직진했다. 미나리 농사를 시작한 첫해부터 오붓한 결산을 봤으며, 지금까지 줄곧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거침없이 질주할 게 빤하다는 게 아닌가.
‘뭐시라? 그럼 나도 미나리 농사에 뛰어들어볼까나!’ 이렇게 솔깃해하며 미나리를 믿고 귀농에 용기를 내는 이가 있다면 그는 머잖아 싱긋 웃을지도 모른다. 썩 유능한 작목을 선택했다는 안도감으로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옥금 씨의 믿을 만한 귀띔에 따르면, 개중에 유망하면서도 수월한 게 미나리 농사라는 게 아닌가. 물론, 남의 흉내만으로 덩달아 성취할 수는 없는 게 농사다. 야무진 자립 의지와 노력, 그리고 속 깊은 꾀주머니가 필요하다. 행운을 배달하느라 늘 업무에 바쁘신 천사의 내방도 필요하다. 여하튼 농사 초보자에게 미나리만큼 대견한 작물이 다시없다는 게 옥금 씨가 주는 금쪽같은 힌트다. 그녀 자신이 일련의 성취를 이룬 본이라는 자부심도 크다.
미나리 연간 매출액 약 7000만 원
흔히 남편의 근사하고도 집요한 꼬드김에 따라 부부 귀농이 이루어진다. 옥금 씨의 경우는 달랐다. 옥금 씨가 먼저 남편 정덕근(69) 씨를 유인했다. 아마도 신혼 첫 밤의 속삭임처럼 자못 감미로운 유혹이지 않았을까. 지루한 서울 생활을 접고 시골에서 자연을 즐기며 인간의 고유한 의무인 평온한 삶을 구가하자, 피로에 찌든 두 사람의 영혼에 생기를 부여해보자는 요지의 제안을 했던 모양이다. 거기엔 아무런 먹구름이 없었다. 해서, 은퇴 이후의 나날을 다소 따분하게 보냈던 덕근 씨는 노년의 신세계가 멋들어지게 펼쳐질 것을 기대하며 마침내 아내와 함께 시골로 내려온 것이다. 저 멀지 않은 곳에서 희양산의 우뚝한 바위 봉우리가 눈부신 빛을 뿜는 경북 문경군 가은읍의 변두리께 시골로. 그게 10년 전의 일이었다.
“제가 원래 여행을 좋아했어요. 문경으로 귀농한 것도 여행 중에 만난 문경 산수에 반한 호감 때문이었지요. 명산이 많아 어딜 보나 아름다운 지역이니까요. ‘문경’(聞慶), 즉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지명의 뜻도 아주 기분 좋더라고요.”
“귀농하자마자 미나리 농사를 시작했나요?”
“처음 한동안은 오미자 농사를 했어요. 오미자가 문경의 명산물이거든요. 지역의 대세를 따랐던 셈이죠. 그런데 전지(剪枝) 작업을 비롯해 모든 게 너무 힘들었어요. 특히나 부부 둘 다 키가 작아 오미자 덩굴을 지지대 위에 올려주는 작업이 엄청 힘들더군요. 남편의 불평불만마저 심해져 자칫하면 이혼 법정에 설 것 같은 상황이기도 했어요.(웃음) 이래저래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미나리로 바꿨지요.”
미나리엔 두 종류가 있다. 물속에서 길러 뿌리째 생산하는 물미나리와, 밭에다 재배해 잎자루를 수확하는 밭미나리. 옥금 씨는 비닐하우스를 지어 밭미나리를 기른다. 경지 면적은 1200평. 그간의 연간 매출은 평균 6000만~7000만 원이며 이것의 70%가 순소득이란다. 미나리 재배 첫해부터 이런 수준의 성과를 거두었다니 놀랍다. 더욱 기똥찬 건 연중 작업기간이 다만 두어 달이라는 점.
“미나리 농사의 매력은 한둘이 아니에요. 우선은 첫해부터 수익 발생이 가능하다는 점이지요. 생산까지의 작업 과정도 단순하고, 다년초라서 한 번 심으면 과수처럼 해를 이어 계속 수확이 됩니다. 농약이나 농기계가 필요한 일도 아니고요.”
“연중 작업기간이 불과 두어 달이라 했죠? 그 이상은 생산이 어려운가요?”
“연중 생산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늦겨울과 초봄 사이 두어 달만 집중해도 채산성이 좋기에 그리 하고 있어요. 이 시기엔 잡초도 거의 없어 일이 한결 쉽지요.”
“판로 문제는? 생산이 쉽더라도 판매조차 쉽지는 않을 텐데요?”
“그게 가장 중요한 대목이죠. 즙으로 가공하지 않는 한 저장 판매가 불가능해 생물로 즉시 팔아야 하는 게 미나리이니까. 저는 밭을 살 때 일부러 차량 내왕이 많은 도로변을 택했어요. 관광지구 문경을 드나드는 관광객들이 직접 재배 현장을 구경하고 시식까지 겸할 수 있도록 찻길 가에 간이식당이 딸린 농장을 조성한 게 주효했지요. 지인들을 통한 택배 판매나 SNS 마케팅도 겸해왔지만 현장 판매가 참 재미있어요. 주말이면 허리에 찬 전대가 순식간에 불룩해지던걸요.(웃음)”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밤낮없이 식은땀을 흘리기 쉬운 게 농사다. 물정에 어두운 귀농인의 시련은 더 자심할 수밖에 없다. ‘하이고, 이건 뭐 모래성을 쌓는 거 아녀?’ 그런 푸념이 푸짐하게 터져 나올 수 있는 것. 하지만 옥금 씨는 까딱없다. 오미자로 초기에 잠시 죽을 쑨 것 외엔 순풍을 만난 돛배처럼 길찬 행보를 거듭해왔다. 이게 오로지 자력으로 이뤄진 것만은 아니란다. 지자체 공무원들이 적극 거들어준 대목이 많다는 게 아닌가. 멘토를 붙여주고 판로를 함께 모색하는 식으로. 올봄부터는 관에서 주도하는 ‘문경 미나리삼겹살 식당 단지’에 미나리를 납품할 예정이며, 공급 물량의 지속을 위해 미나리를 연중 생산할 계획이다.
“사견이지만, 제가 파악하기로는 전국의 미나리 농가들이 대체로 안정적인 운영을 하는 것 같아요. 경북 청도군에 이어 미나리 농업 특화지구로 부상하고 있는 문경군으로 귀농한 건 행운이었지요. 애초 농사에 전념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정말 재미있게 빠져들었어요. 귀농 이후 할일이 많아졌지, 사귄 사람 많아졌지, 갈 곳과 오라는 곳 많아졌지, 이모저모 즐거워요.”
고충은 낙관적 근성으로 해결했다
신바람 났다, 옥금 씨. 예상하지 못한 고난으로 어혈이 든 심정으로 헤매기 쉬운 게 귀농생활. 그러나 그녀에겐 무관한 얘기다. 두루두루 즐거운 일 속에서 활갯짓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만족과 기쁨을 느낀다는 게 아닌가. 이는 옥금 씨가 몹시 사랑해 마지않는 희양산의 정기를 받은 덕택이라기보다는, 그녀 자신이 스스로 기른 활달한 기상의 정기를 받은 덕이라 봐야 할 것 같다. 타고난 근면성, 낙관적인 근성, 거침없는 사교성을 겸비했으니, 한마디로 어느 물에 던져놔도 물방개처럼 능숙히 활개칠 성향이지 않겠는가. 게다가 딱 부러지게 대찬 투지마저 타고났다. 귀농 초기, 그녀는 여기저기서 몇 번 맞붙었단다.
“귀농인들에게 던지는 눈초리부터 차가운 게 시골 분위기입니다. 초기에 저는 세 차례 들었다 놨다, 원주민들과 싸워 이겼어요. 한번은 공무원들과도 싸웠지요. 농지원부 관련 일처리에 너무도 미온적이라 분통을 터트렸던 건데, 누가 그러더라고요, 일단 책상을 탕탕 치며 ‘면장 나오라고 해!’라고 버럭버럭 고함을 치라고요. 그래 그대로 했더니 비로소 태도를 바꾸더라고요.(웃음)”
“원주민 한 사람과 싸우고 나면 마을 전체가 돌아앉을 수 있지요. 미운 털이 박힐 걱정은 하지 않으셨나?(웃음)”
“통과의례를 피할 수는 없지요. 충돌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는 긍정적 관계의 조성을 앞당겼다고 봐요. 뭐 사실, 저의 단점은 인정합니다. 매사 너무 적극적이라는 거!”
“문경군 귀농귀촌협의회장으로도 활동했죠? 조용하고 한가한 시골 생활을 계획했던 처음의 구상과 다른 방향으로 살아온 셈인가요?”
“별안간 방향이 달라진 게 사실이지요. 그런데 일이 즐거워 집 안에만 박혀 있긴 힘들더라고요. 이왕 시골에 온 김에 남들과 어울려 더 즐겁고 더 보람찬 일을 찾아 해보고 싶다는 욕구를 누를 수가 없어서.”
“나만의 이익이 아니라 남들의 유익까지 생각했다는?”
“남들에게도 득이 되는 일이 결국은 저 자신에게 보람으로 돌아오는 거 아니겠어요? 저는 지인들이 일손을 필요로 할 경우엔 무조건 달려갑니다. 불편하고 험한 일에 더 큰 흥미를 느끼는 게 저의 특질이기도 해요. 예전엔 혼자 떠나는 배낭여행을 자주 했는데 그때에도 주로 오지를 누볐지요. 그런 여행이 삶의 본질 같은 걸 사색하게 하니까.”
귀농을 통해 자연 속에 살다 보니 이젠 딱히 여행 충동을 느끼지도 못한단다. 가만히 바라보면 주변의 자연 풍경이 경이로워 이미 이색이며 충분한 사색의 재료이기 때문에.
“삶의 본질? 그걸 뭐라고 보죠?”
“황량하고 쓸쓸한 게 인생의 본질 같아요. 그러나 다 긍정하고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 가급적 재미있게 살아야겠다는 것. 그런 걸 자주 생각해요. 제가 한번은 국수집을 차려 즐거웠어요. 문경 아줌마들이 모이는 수다방을 만들고 싶어 한 그릇 가격을 3000원으로 정해 문턱을 낮췄지요. 그런데 이게 대박이 났어요. 어휴, 남녀노소 손님이 어찌나 많던지 남편의 원성이 하늘에 뻗치던걸요.”
“박수가 아니라 원성이?”
“일을 거들던 남편이 질려 나가떨어진 겁니다. ‘이거야 원, 농사도 힘들어 죽을 맛인데 내가 국수까지 말아야 하느냐? 이젠 정말 못 살겠다!’ 그런 비명을 지른 거예요. 냉큼 가게를 접었지요. 하하하!”
투덜이 남편은 하나뿐인 길벗
옥에 티라 할까. 옥금 씨의 미끈한 시골생활에도 폐단이 있다. 남편과 앙앙불락 실랑이가 잦았으니 말이다. 이는 사실 간단한 ‘티’가 아니라 토네이도의 전조일 수 있었지만 용한 곡예로 어렵사리 넘어온 것 같다. 내외는 한집에 살면서도 3년째 별거하고 있다. 옥금 씨는 안채에, 덕근 씨는 별채에. 이렇게 소가 닭 보듯이 사는 게 서로 속 편하단다. 규격화된 부부 시스템에서 진취적으로 벗어나 호젓하게 개체의 인권과 자유를 누리기에. 용무가 있을 때면 상대의 주둔지로 면회를 가겠지. 영치금을 넣어주듯이 간간이 풍미 넘치는 별식을 넣어줄지도 모르겠다. 잠이야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달빛이 있으니 한 이불을 덮지 않아도 될 테지.
아직 불후의 저작을 내지는 못했지만 옥금 씨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해 시(詩)로 등단도 했다. 덕근 씨는 국토교통부 산하 기관에서 항공교통관제 공무원으로 35년을 근무하다 퇴직했다. 사회와 이웃을 교란한 적 없는 이 무고한 사람들은 제각각 억울하다고 하늘에 대고 탄원서를 쓴다. 할 만한 일이라는 일은 모두 찾아 나를 쏟아 부음으로써 명랑 사회 건설에 이바지하는 게 무슨 죄냐고 옥금 씨는 툴툴거린다. 반면, 덕근 씨는 무슨 억하심정으로 날이면 날마다 나를 일에 처박아 골병들게 하느냐고 투덜거린다. 그것도 ‘무보수 명예직’으로 말이다. 덕근 씨는 괜스레 아내의 꾐에 코 꿰여 애초 기대했던 시골이라는 낙원은커녕, 만고에 허무한 지옥에 풍덩 빠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씩 웃으면 해맑은 표정이 드러나는 이 순둥이 남자는 낙원을 찾아 모퉁이를 돌다가 왕퉁이 벌에게 쏘인 격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옥금 씨는 고고싱! 어디까지나 직진이다. 인생이란 저마다 외로운 별처럼 홀로 광을 내야만 하는 고독 드라마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제가 이젠 남편을 완전 포기했어요. 남편 역시 저를 도저히 뜯어고칠 수 없는 여자라는 걸 명석하게 알아차린 것 같아요.(웃음) 그러자 살짝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돌아요. 연민이라 하나? 그런 감정도 생기고요. 알고 보면 남편이 엄청 착한 사람이거든요.”
유유상종할 게 드문 연이라는 걸 귀농하고서야 알았단다. 그러나 근 한평생을 동행한 남편이란 앞에도 없었고 뒤에도 오지 않을 하나뿐인 길벗. 그걸 인정하고 이젠 연민으로 남편을 보듬을 생각인 것 같다. 그러나 옥금 씨의 머릿속에는 지금도 일 생각으로 꽉 차 있다.
“이 좋은 시골을 놔두고 왜 아비규환 같은 도시에서들 살까요? 요즘 저는 어떻게 해서든 도시 주부들을 한 트럭씩 실어다 1주일이라도 시골 체험을 하게 할 생각에 골몰해 있어요. 귀농을 유도하기 위해.”
이옥금 씨가 주는 Tip
•시골에서 살고 싶다면 주저 없이 용기를 내라. 이것저것 재다 보면 세월만 축난다. 어떻게든 기어이 살아남겠다는 결심이면 길이 열린다.
•시골에 으리으리한 집을 짓지 말자. 이웃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나중에 팔기도 어렵다.
•사전에 잠깐이라도 살아보고 귀농지를 결정하자. 농사는 지역 환경이 중요 변수이니까.
•유아독존할 게 아니라면 경치 좋다고 깊은 산중에 올라가 살지 마라. 눈길이나 빗길에 구르기 십상이다. 3년쯤 지나면 다 내려온다. 좋은 경치야 슬슬 근방을 찾아다니며 즐기면 된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그녀는 오랫동안 암 투병을 했다. 유방암 말기 진단을 받았었다니 실로 격렬한 싸움이었을 게다. 음산한 죽음의 공기를 숨 쉬며 처절하게 견뎠을 게다. 알고 보면 하등에 슬퍼할 이유가 없는 게 죽음이라는 고상한 소식도 있지만, 일단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칠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의 본능이지 않은가. 한때 ‘극단적인 선택’까지 고려했었다는 이윤경(56) 씨는 불굴의 의지로 결국은 10여 년 만에 암을 물리쳤다. 투병 후반의 귀농이 일종의 묘약이었다.
인생이란 미스터리. 암과 조우하게 될 줄을 어이 알았겠는가. 지독한 지뢰가 매설된 게 삶이라는 전선(戰線)임을 어이 짐작했겠는가. 고난이 깊고 길어 하늘도 땅도 어두웠겠지. 그러나 다 지나갔다. 투병을 통해 세상을 건너는 방법을 터득한 덕일까. 이윤경 씨의 귀농생활엔 별다른 결함이나 한숨이 없다. 공연스레 지지고 볶는 강박이 없으며, 불확실성을 명백한 특징으로 하는 농업을 여우처럼 노련하게 운영해온 결과 딱히 내세울 만한 실패 기록이 없다. 귀농의 보편적 실정을 들여다본 사람들은 이미 다 안다. 그게 험악한 고행이라는 것을. 오직 그녀만이 예외라 쳐도 무방할 거라는 생각마저 든다.
이윤경 씨가 평택시 외곽의 시골로 귀농한 건 2013년, 암 투병 말엽. 방사선 치료 30회와 항암제 투약 등, 양방을 통해 해볼 건 다 해본 뒤의 귀농이었다. 항암에 좋다는 약초를 찾아 손수 재배해 먹는 자연요법으로 완치를 앞당길 수 있을 거라는 기대 하나를 품고서였다지. 사전 준비는 그지없이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은 유능한 약초를 찾아내기 위해 국내외 자료를 섭렵했고, 재배 현장을 견학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귀농지 물색에도 남달리 신중한 공을 들였다. 마지막으로 자그만 텃밭에다 갖가지 약용작물을 시험 재배, 생육의 양상을 관찰하며 재배 기술을 익혔다. 이 모든 과정을 주도한 건 남편 최창학(59) 씨였다. 국어교사였던 그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 사표를 던지고 충직한 신하처럼 충성을 다했다. 그러하니 이 부부의 노정기는 차라리 멜로드라마. 뒤돌아보면, 아마도 모든 게 사랑이지 않을까.
“긍정적인 생각을 놓지 않도록 남편이 저를 자주 세뇌했어요. 농사 근육이 없는 남자임에도 관절이 망가지도록 농사에 열성을 다했고요. 덕분에 좋은 결과가 왔지요. 마침내 완치 판정을 받았으니까. 지금은 1년에 한 차례씩 추적 관찰을 위해 병원을 찾을 뿐이에요.”
“10여 년에 걸친 투병의 고통과 고독이라니. 상상만 해도 아찔합니다.”
“가혹한 전쟁을 치른 기분이었어요. 온몸 열여덟 곳으로 전이가 돼 강도 높은 항암치료를 받아야만 했어요. 거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지경의 몰골로 지낸 시간이 길었지요. 삶이라고 할 수 없는 삶이었어요. 뼛속까지 파고드는 통증도 견디기 어려웠지만, 연일 이어지는 불면증이 가장 괴로웠어요. 우울증도 심했고요.”
“애초 기대했던 자연 요법의 효과로 마침내 완치 판정을 받았다고 보시나요?”
“기대 이상의 효험을 봤다고 생각해요. 몸이 서서히 회복되면서 운동 이상의 노동량을 감당하기 시작했는데, 그 역시 치유에 가속을 붙여줬던 것 같아요. 완치 판정을 받은 뒤로는 매사에 자신감이 생겼지요. 특히 약용작물 재배의 유익함, 즉 곤경에 처한 환자들에게 긍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농사라는 것, 따라서 그게 유망한 농업일 거라는 판단을 했던 거예요.”
“부부 공히 농사 초심자였죠? 그럼에도 유망한 농업 장르라는 걸 대뜸 찾아냈군요.”
“소소한 시행착오가 없진 않았지만 비교적 순조롭게 정착했어요. 제가 약으로 먹기 위해 텃밭에 시험 재배했던 초기의 경험을 기반 삼아 본격적인 사업으로 확장해나갔어요. 남들이 흔히 하지 않는 새로운 트렌드의 작물들을 발굴해나간 게 적중했고요.”
연간 순소득 1억 원
창의(創意)라는 것. 기존에 없었던 기발한 고안의 힘이라는 것. 이윤경 씨 내외는 이 매력적인 기제를 농사에 도입했다. 강장(强壯)과 치병에 좋다는 약용작물을 집약적으로 재배할 경우 승산이 충분하다고 봤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썩 괜찮은 약용 농산물을 생산하는 농장으로 입소문이 나며 성장세를 탈 수 있었다는 게 아닌가. ‘다믈농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농장의 규모는 약 4500평. 이 중 3분의 1쯤 되는 부지에 온갖 작물을 재배한다.
사람들의 관심을 산 첫 작목은 스테비아. 남미가 고향인 이 국화과 다년초는 설탕보다 200~300배 정도 달지만 혈당에 영향을 주지 않는 특성이 당뇨병 환자에게 효용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윤경 씨는 이 스테비아를 재배+ 생산해 독특한 성과를 거두었다. 몇몇 매체에 소개되면서 신생 농장의 존재가 단박에 부각됐던 것. 이후 너도나도 스테비아 농사에 뛰어드는 바람에 시장성이 악화됐지만 그녀에겐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이후 더욱 박차를 가해 다종다양한 작물들을 재배해나갔다. 뉴욕타임스가 20대 건강식품의 하나로 선정한 히카마, ‘기적의 식물’이라는 모링가, ‘페루의 인삼’으로 통하는 마카, 샛노란 과일이 달리는 구아바, 삼채 등 똘똘한 외래종 약용식물을 비롯해 블루베리, 체리 같은 과수와 상추·고추·오이·작두콩·수세미 따위의 갖가지 채소류를 기르고 있다.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지경의 다작을 해왔다 하니 햐! 놀랍다.
“새롭고 뛰어난 작물을 발굴하기 위해 늘 공부했어요. 그러면서 어느덧 수백 종으로 작물 수효가 늘었죠. 대별하자면, 특용작물과 과수, 그리고 양봉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양봉까지? 부부가 모든 일을 전담하는 거예요?”
“그렇죠. 인건비에 돈을 쓰지 않으려면 직접 해내는 수밖에 없으니까. 애환이 많았어요. 새 작물 재배에 실패하기도 했고, 종묘 업자에게 속기도 했어요. 예초기 사고로 남편의 시신경에 손상도 왔었고, 농기계를 다루다 뼈가 바스라지기도 했지요. 저는 벌에 쏘여 병원 신세를 진 적도 있어요. 팔뚝이 몸뚱이보다 더 크게 퉁퉁 붓던걸요.(웃음)”
“농산물 가공 작업과 판로 확보 문제도 쉽지 않겠죠?”
“어느 한 가지 쉬운 게 없지요. 가령, 하나의 새 작물을 선정했다 할 경우, 우선은 재배에 성공해 수확을 해야 합니다. 수확 뒤엔 생물로 팔 것인가, 가공 판매를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죠. 가공엔 손이 많이 가는데, 건조 분쇄를 하고, 디자인과 스티커 작업을 통한 소포장을 마친 뒤 완제품검사 대행업체에 보내 품질검사를 의뢰해요. 거기서 합격성적서가 나오면 비로소 판매에 나서는 거죠. 결정적인 건 역시나 판로 문제이지요. 저희는 주로 SNS나 로컬푸드마켓,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고객들을 통해 거의 완판하고 있어요. 이렇게 해서 연간 1억 원 정도의 순소득을 올리고 있지요.”
이런! 드문 고소득이다. 당연하게도 인근 농가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음마야, 항상 요상한 것만 가져와 기른다!” 그렇게 눈총을 주던 이웃들이 이젠 덩달아 약용작물 재배에 나서기도 한다지. 이윤경 씨는 향후 농장을 본때 있는 사회적 기업으로 키워나가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이 당찬 여자의 외양은 여려 보인다. 그러나 내부에선 수학을 전공한 사람다운 기민한 두뇌와 긴 투병 과정에서 육화한 근기와 깡이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다. 귀농 초기의 개척자적 근성을 지속한다는 건 만만한 내공이 아니다. 그 무엇보다 일에 대한 욕심, 성공에 대한 집념, 이 자체가 그녀의 재능일 테고. 감정의 소모와 분산을 허하지 않는 내성적 성격도 재주일 테고.
오나가나, 앉으나 서나 부지런한 근로와 연구로 농장의 생산성을 드높이는 남편은 그녀가 보유한 최적의 자산이겠지. 아내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몸 바쳐 이바지한다는 게 아닌가. 그녀 역시 남편을 사랑스러운 일꾼으로 부리기에 다시없는 재목으로 간주한다. 배우자란 흔히 암암리에 상대방의 행복을 앗아가는 음흉한 존재. 이 부부의 유대는 빛깔이 다르구나.
“낮잠을 자본 게 언제였지?”
“남편은 새벽부터 밭일을 시작합니다. 워낙 부지런한 ‘아침형 인간’이에요. 반면 저는 ‘저녁형 인간’인지라 조용한 밤 시간에 가공 작업을 주로 맡아 해요. 어느 정도 분업화가 된 셈이죠. 그런데 우리 남편은 행운아예요. 제가 경제 문제를 알아서 다 관리해왔으니까요.(웃음)”
“부군께서 말하길, 아내가 너무도 알뜰한 나머지 구두쇠로 산다는 거, 그게 문제점이라 하더군요. 좀 누리며 사는 게 좋지 않나?(웃음)”
“일찍부터 몸에 밴 습성일지도요. 남편이나 저나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정말 힘들게 살았거든요. 신혼살림도 단돈 200만 원으로 시작했어요.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 수밖에 없었지요. 이젠 경제적 능력이 있는 셈이지만 검소한 생활을 포기할 순 없지요.”
“일벌레처럼 산다는 인상을 강렬하게 풍겨요. 저 너른 농장과 수많은 비닐하우스, 게다가 닭과 토끼까지 기르는데 때로 괴롭지 않아요? 도시에서의 안락한 생활이 그립진 않을까?”
“아마도 주부들의 90% 이상은 귀농에 결사반대할 거예요. 그럴 만한 충분한 고충들이 있는 게 사실이고요. 어휴, 내가 왜 이러고 살지? 일에 너무 시달리다 보면 저 역시 혼자 중얼거리며 회의를 느끼곤 해요. 하지만 그게 잠시잠깐이라는 거. 아마도 행복한 비명이라는 거. 농장이 여하튼 순탄하게 굴러가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시골생활의 장점이 많더라고요. 주변에서 순환하는 자연 풍경, 다채로운 방문객들과의 상담, 돌연히 펼쳐지는 즐거운 일들. 이모저모 익사이팅하게 사는 거죠. 잠이 부족하다는 게 아쉽지만.”
“만약에 내일 하루, 완전한 자유시간이 당신에게 주어진다면 무슨 일을 하고 싶죠?”
“(한참 생각하다가)하루 종일 자고 싶어요. 낮잠을 자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거든요.”
누가 그러라고 삼엄한 명령을 내린 바 없으나 그녀는 주로 일에 묻혀 산다. 이게 시간을 선용하는 그녀의 방식이다. 밝은 쪽으로 인생을 이끌어준다는 믿음에서일 게다. 하기에 잡념이나 무슨 조바심이 끼어들 리도 없겠지. 천장의 쥐 따위에는 신경 꺼! 고양이가 알아서 잡아줄 테니까! 그런 투로 잡사는 거두고 사업에만 몰두해온 것이다. 그럼에도 어쩐지 섭섭하게도 결여된 건 삶의 여흥. 이러다가 건조한 일상에 매몰될 수 있다는 걸 알아차린 그녀는 곰곰이 궁리하다가 축제 하나를 띄웠다. 작년에 이어 올여름 두 번째 ‘해바라기 축제’를 펼쳤던 것.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축제가 필요하다 싶어 만들었지요. 농장 밭에 모종을 심어 약 2만 송이의 꽃을 피웠지요.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꽃 풍경이었어요. 예상외로 많은 사람이 몰려오더라고요. 첫날부터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어요. ‘어, 이게 뭐지?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오지?’ 둘째, 셋째 날엔 감당이 어려워 ‘아이고 죽겠다!’ 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어요. 유료 입장이었는데 축제 사흘간 5000여 명이 다녀갔지요. 인터넷 실검 순위 1위에 오르기도 했고요. 기대치를 상회하는 성공을 거둔 셈이었죠. 내년엔 소공연까지 곁들인 놀이판을 펼쳐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축제 뒤 해바라기 꽃은 어떻게 쓰였죠?”
“씨앗을 탈곡해 판매할 수도 있었지만 수익성이 낮아 포기했어요. 거름으로 활용하는 게 훨씬 나아 밭에다 그냥 갈아엎었죠.”
“세상의 트렌드에 민감하게 부응, 그에 따른 적절한 아이템을 개발해내는 머리로 농장을 성장시켰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누구나 관심을 갖는 특용 건강식품의 생산에 주력한 게 안착을 가능케 했지요. 가장 보람찬 건 환자분들이 우리 농장 제품으로 좋은 효과를 봤다는 얘기를 들을 때입니다. 저의 투병 경험을 곁들인 상담시간도 소중해요. 어쩌면 그런 보람들 탓에 일에서 발을 떼지 못하고 수렁처럼 빠져드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어요."
“좋은 삶이란 어떤 거라 보죠?”
“긍정과 낙관이 있는 삶이랄까. 주어진 삶을 불평 없이 받아들이는 게 잘 사는 길이겠죠.”
투병 이후, 귀농 이후, 성향과 기질에 변화가 왔더란다. 지극히 내성적이어서 하고 싶은 말조차 하질 못했으나 이젠 와일드해졌다는 것. 강인한 태도로 삶의 모든 걸 긍정하게 됐다는 것.
이윤경 씨가 주는 귀농 Tip
•생계를 다 놓고 자연인처럼 살 게 아니라면 가급적 도시 근교로 귀농하자. 그래야 생산물 판매에 유리하다. 너무 외진 시골로 귀농했다가는 차후 철수할 상황이 발생할 때 땅을 매도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농사로 소득을 올리기 쉽지 않다. 특히나, 오자마자 수익이 발생할 확률은 0%라는 걸 유념하자.
•이웃 원주민들을 무조건 존중하라. 고집과 프라이드가 강한 게 농촌 어른들이다. 배울 점도 많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신과 신화, 인간들의 이야기가 풍성한 코카서스 3국의 첫 번째 여행지는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Baku)다.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첫 여행지가 됐다.
먼저 한국엔 코카서스 3국으로 가는 직항 노선이 없다. 모스크바, 이스탄불, 카타르 혹은 카자흐스탄의 알마티 국제공항을 경유해서 가야만 한다. 둘째,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적대국이기 때문에 두 나라 간 국경 통과가 불가능하다. 셋째,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운행한 침대열차 1등 칸에 타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아제르바이잔이 실크로드 서쪽 끝에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세계에 몇 곳 없는 동서양 문화의 완충지대에서 출발해 유럽 문화의 변방을 향해 서쪽으로 가는 여정이었다.
자정이 넘어서야 예약한 호텔에 도착했기 때문에 ‘바쿠’라는 도시를 제대로 처음 본 것은 다음 날 아침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식사를 할 때였다. 흐린 하늘 옅은 구름 아래로 반듯하게 서 있는 황갈색 사각형 빌딩들, 민트색 둥근 아치 지붕을 머리에 이고 있는 고풍스런 정취의 건물들이 창밖으로 보였다. 동유럽의 어느 도시에 와 있는 듯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서서히 구름이 걷히고 하늘이라는 거대한 캔버스가 희미한 푸른 잉크로 물들기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여행이 시작됐음을 깨달았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 솟아 있는 바쿠의 상징, 플레임 타워(Flame Tower)도 눈에 들어왔다.
바쿠는 구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세의 고건축과 현대 건축물들(플레임 타워, 헤이다르 알리예프 센터 등)이 잘 어우러져 있다.
저마다의 사연을 담은 사유의 길
12세기에 지어진 벽이 둘러싸고 있는 유서 깊은 ‘이체리 셰헤르’(Icheri Sheher)는 바쿠의 구도시다. 커다란 성문을 통과해 성 안으로 들어서니 오랜 세월 밟히고 마모되어 반짝이는 돌로 포장된 길이 열렸다. 서유럽의 도시처럼 위대한 건축물이나 예술작품을 볼 수 있는 광장은 아니다. 사람과 시간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길들이 성 안에 그물망처럼 촘촘히 엮여 있다. 골목은 관광지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한적하지만 저마다의 사연을 담은 사유의 길이 도시 구석구석 실핏줄처럼 퍼져 있다.
큰길가 양쪽으로는 상점과 식당들이 죽 늘어서 있다. 그중 눈길을 끈 것은 과거 실크로드를 오가던 대상들이 묵었다는 ‘카라반세라이’(Caravanserai)다. ‘물탄 카라반세라이’를 비롯해 16세기에 지어진 ‘부카라 카라반세라이’ 등 역사적 건축물들이 이곳이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 옛날 이토록 먼 길을 어떻게 이동해 여기까지 왔는지 상상이 안 되지만, 곳곳에 실크로드의 흔적들이 보인다. 시간이 흘러 그 카라반세라이는 기념품 판매점과 고급 레스토랑으로 바뀌었다.
바쿠의 중세를 만나다
바쿠의 구도시 중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12세기에 지어진 ‘메이든 타워’(Maiden Tower)다. ‘처녀의 망루’라는 뜻을 지녔다. 바쿠 왕의 딸 메이든이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이곳에 감금당하자 탑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삶을 마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 바쿠 왕이 감금한 여동생이 수치심으로 투신했다는 전설도 있다. 아무튼 지금까지 성벽이 부서지거나 외부 세력에 정복당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한다. 탑은 직경 16.5m, 높이 29.5m 규모의 원통형. 성벽의 두께는 5m나 된다. 탑 꼭대기는 내부의 나선형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다. 탑 위에 올라서니 구시가지와 카스피해가 한눈에 들어왔다. 카스피해를 넘어온 바람의 숨결을 느끼면서 다음 일정을 위한 휴식을 가졌다.
미로 같은 골목을 헤매다 도착한 곳은 ‘시르반샤 궁전’. 15세기에 지어진 이 건물은 아제르바이잔 건축 양식의 진주로 불린다. 왕궁과 건물들이 균형감 있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궁전으로 가는 골목을 걸을 때 어디선가, 신을 부르는 듯한 애절한 소리가 들렸다. 한여름의 열기 속에 길게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아잔’(이슬람 사원에서 기도시간을 알리는 소리)을 따라가 보니 이슬람 사원 ‘무하마드 모스크’(Muhammad Mosque)가 나타났다.
성의 바깥 서쪽에는 성곽길을 따라 바쿠에서 첫 번째로 조성된 ‘필라모니야 공원’(Filarmoniya Park)이 있다. 주변에는 노란색 건물의 ‘클래식 음악 전문 공연장’, ‘예술 박물관’, ‘음악 재단’이 있다. 클래식 음악 전문 공연장은 100년 전 유럽풍 스타일로 지어진 극장으로 운치를 더해준다. 오래된 성벽에 기대어 숲을 안고 있는 공원은 언제든 지친 여행자의 등을 쓰다듬어줄 것만 같다. 곳곳에서 공연을 하고, 한 레스토랑에서는 탱고 파티가 한창이다. 사랑에 취해, 춤에 취해 있던 커플이 카메라를 든 여행자를 보고 포즈를 취해준다. 계획에 없었던 장면들. 여행하면서 만나는 득템이다. 닫힌 마음을 열어주고, 생의 피로를 씻어주는 경험이다.
예술을 존중하는 나라
아제르바이잔은 페르시아인을 중심으로 코카서스인과 튀르크족이 병합되는 과정을 거쳐 11세기에 셀주크 튀르크에게 정복당했다. 이때 아제르바이잔은 튀르크족에 동화돼 완전히 튀르크화됐다. 현재 아제르바이잔 언어의 80%는 터키어다. 그래서 터키와는 ‘한 민족 두 나라’로 불리고, 아제르바이잔 언어를 ‘아제르바이잔튀르크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인지 아제르바이잔은 언어와 문자, 문학작품을 매우 존중한다. 도시 곳곳에 시인의 동상이 있다. 특히 성의 주 출입구인 동쪽 성문 밖에는 아제르바이잔의 국민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인 ‘니자미 간자비’(Nizami Ganjavi)의 동상이 세워진 기념 공원이 있다. 다섯 편의 서사시 ‘하므사’(Khamsa)를 발표하면서 페르시아를 대표하는 시인이 됐다. 기념 공원 바로 앞에는 ‘니자미 문학 박물관’도 있다. 이슬람식 문양과 디자인을 주로 사용한 건물이다. 건물 2층에는 유명 문인 6명의 동상이 있다. 이들 동상 때문에 박물관은 마치 성전 같은 분위기다.
바쿠의 로데오 거리는 이 박물관 앞에서 시작된다. 바쿠의 현재로 들어가는 길이다. 가성비 좋은 고급 레스토랑과 블링블링한 카페, 유명 브랜드 숍들이 이어지는 보행자의 거리다. 저녁이 되면 수많은 사람이 나와 밤을 즐긴다. 이곳에서는 인종, 국적, 나이, 언어가 달라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타인의 결을, 사물의 결을, 세상의 결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은 다른 영혼의 결을 안아줄 줄 안다. 이곳에는 여행자를 긴장하게 만드는 소매치기, 강도, 도둑질 같은 경직된 단어도 없었다.
바쿠의 속살들
구 소련 치하에 있었던 영향 때문인지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은 영어를 잘 못한다. 하지만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젊은이는 많았다. 영어를 하든 못하든, 나이가 많든 적든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은 ‘친절’이다. ‘28 May 광장’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는 한 아가씨가 도와줄 일 없냐고 먼저 물어왔다. 예약한 숙소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만난 할아버지는 200m 정도를 걸어 숙소 앞까지 우리를 데려다줬다. 이곳 사람들의 온기가 느껴졌다.
코카서스 3국 중 아제르바이잔의 물가가 가장 비싼 편이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의 2분의 1 수준밖에 안 된다. 커피 한 잔은 3.0AZN(약 2100원), 슈퍼에서 파는 와인은 4.0AZN(약 2800원)쯤 된다. 지하철이나 버스(0.2AZN, 약 140원) 등 대중교통비는 놀랄 정도로 싸다. 전철은 2개 노선에 정류장도 많지 않아 이용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바쿠의 속살을 보려면 전철역에서 파는 충전식 바쿠 카드로 대중교통을 이용해봐야 한다.
바쿠의 로데오 거리 끝으로 지나가는 큰 대로를 건너면 카스피해를 끼고 바쿠만을 따라 엄청 길고, 넓은 공원이 펼쳐진다. 바로 ‘불바르 공원’(Bulvar Park)이다. 공원 한쪽 끝에서 반대쪽까지 걸으면 2시간 정도 걸린다. 카스피해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나뭇가지가 한 방향으로 치우쳐 있다. 공원 안에는 여객선 터미널, 요트 정박장, 대형 쇼핑몰, 국립 카페 박물관, 아즈네프 광장, 대형 회전 관람차인 ‘바쿠 아이’, 대규모 고급 호텔 등 새 시설들이 호화롭게 자리를 잡고 있다. 첫눈에도 공원 조성에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음이 짐작된다. 하지만 뭐가 문제일까? 바로 앞 바다에서 원유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데….
카스피해 보석에서 유럽 보석으로
카스피 해변과 근해에는 영화나 사진에서 많이 본 석유시추 시설이 곳곳에 있다. 지하를 뚫기만 하면 기름이 나온다고 한다. 이렇게나 많이 매장돼 있는 석유를 처음 유럽으로 가져가 막대한 부를 쌓은 이가 있다. 바로 노벨상으로 유명한 스웨덴 사람 ‘노벨’의 형이다. 그가 이 지역에서 석유를 발굴하고 정유소, 송유관, 원유소 등을 개발해 바쿠의 석유산업이 발전했다. 바쿠의 경제기반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인지 바쿠 시는 1884년 비잔틴 양식으로 지은 ‘노벨형제석유사’(브라노벨)의 복지시설 건물을 ‘노벨 박물관’으로 바꿔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있다.
현재는 이곳에서 생산된 석유를 바쿠에서 시작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1769km의 파이프라인을 통해 유럽에 보내고 있다. 이 파이프라인은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를 거쳐 터키의 제이한 항구까지 이어진다. ‘Baku’, ‘Tbilisi’, ‘Ceyhan’ 세 도시의 약자를 따서 ‘BTC 파이프라인’이라 부른다. 카스피해에서 생산된 원유가 BTC 파이프라인을 거쳐 지중해로 가고 이곳에서 다시 유럽으로 공급되는 것이다.
불바르 공원의 중심인 ‘무감 센터’(Mugam Center) 건너편에는 ‘업랜드 공원’ 정상까지 올라가는 푸니쿨라 승강장이 있다. 공원으로 올라가면 바쿠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에 보았던 플레임 타워가 보인다. 3개의 타오르는 불꽃 형상을 한 건물의 높이는 190m. 6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2013년에 완공했다. LED조명을 설치한 건물 외곽은 형형색색의 불꽃을 보여주며 화려한 쇼를 한다. 이제 바쿠는 ‘바람의 도시’에서 ‘불의 도시’가 되었다. 그 랜드마크가 플레임 타워다. 타워 옆 바쿠만과 카스피해가 한눈에 보이는 공간에 ‘순교자의 길’이 있다. 우리나라의 현충원처럼 전쟁 때(주로 소련이 붕괴할 때 일어난 독립운동) 희생된 사람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든 공원이다. 공원 안에는 ‘나고르노-카라바흐(Nagorno-Karabakh) 분쟁’ 당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순교자의 탑’도 있다. 도시의 랜드마크 옆에 추모 공간을 마련한 깊은 뜻을 헤아리며 카스피해와 바쿠의 야경을 감상했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의 정신
여행이 끝나면 바쿠는 어떤 도시로 기억될까? 아름답거나 시각적인 즐거움만 제공한 도시로 남을 것 같지는 않다. 고개를 돌려서 보니 신을 향해 인간이 엎드리는 곳, 자그마한 모스크가 있다.
바쿠의 현재를 상징하는 게 또 하나 있다. 여성 건축가로서는 처음으로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디자인한 ‘헤이다르 알리예프 센터’(Heydar Aliyev Center)다. 우리나라 서울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도 그녀가 디자인했다. 그래서일까. 친숙한 느낌이다. 건물의 경이로운 비정형성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사각형 건물이 가득한 도시의 삭막함 속에서 바람에 흐르듯 우아하게 굽이치는 곡선이 숨통을 트이게 했다. 물결도 연상됐다. 멀리서 비탈진 광장의 초록과 물을 배경으로 놓고 봤을 때는 연체동물의 패각이 떠올랐다. 그 껍데기 집에 인간과 세계를 따스하게 감싸는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의 정신이 담겨 있는 듯했다.
창밖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있는 겨울밤에 따뜻한 솜이불 속으로 몸을 담그는 순간 느껴지는 행복감. 그 포근하고 편안한 느낌이 겨울 여행의 맛이다. 뻔한 새해맞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겨울 여행에 갈증을 느꼈다. 그때 하나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지중해는 푸른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황금빛 방울처럼 딸랑딸랑 울리던 곳…”
레몬 향 실린 따스한 바람과 지중해가 반사한 겨울 햇살이 내 영혼을 포근하게 적셔줄 것 같았다. 오렌지빛 겨울 노을을 가슴 속에 슬그머니 담고 싶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크레타섬’이다.
겨울에 만난 크레타 섬
크레타(Creta) 섬은 그리스 본토와 아프리카 대륙으로부터 각각 300km 떨어진 정확히 중간 지점에 있다. 그리스에서 다섯 번째 큰 섬으로 제주도 면적의 4.5배 크기다. 아테네의 피레우스(Piraeus) 항구에서 밤 페리선을 타고 크레타 섬으로 향했다. 밭이랑을 세우듯 하얗게 물이랑을 일으키는 파도를 밤새도록 넘어 이른 새벽에 크레타의 이라클리온(Heraklion) 항구에 도착했다.
지중해의 겨울은 날씨를 예측할 수 없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바람과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세찬 바람이지만 찬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겨울바람이다. 살갗을 쓰다듬어주는 바람이 피부에 착착 달라붙었다. 나도 모르게 한 마디가 나왔다. “아! 바람 좋다.” 잠시 후 새벽 여명과 함께 나타난 야자수와 파릇파릇한 나무들은 멀리 동쪽에서 찾아온 여행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라클리온의 중심지는 베니젤로(Venizelos) 광장이다. 광장 가운데 있는 1600년대에 만든 사자분수를 중심으로 수많은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주변에 있다. 비수기여서인지 문을 닫은 가게들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밤이 되자 광장 주변은 물론 골목길에 있는 작은 카페와 바까지도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다가 어두워진 후에서야 이렇게 나타나는지 놀라웠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밤이 하얗게 새도록 이야기를 나눈다. 이곳 사람들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은 긴 겨울밤 내내 공감과 소통을 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중해의 겨울밤은 하얀색 이야기의 성(城)이다.
겨울 석양을 맞이하기 위해 바닷가 길을 걸었다. 해안가를 따라 즐비하게 늘어선 예쁜 카페 거리가 아니라 황갈색 바위의 방파제 길을 걸었다. 길 중간에서 1500년대에 만들어진 ‘베네치아 요새’를 만났다. 크레타 섬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지어진 군사시설이다. 겨울 지중해는 해 질 녘 주황색 하늘을 나에게 선사하지 않았다. 아마 겨울이 오면 여름을 기다리는 섬사람들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에게 선사하기 위해서 참았을 것이다. 방파제에 앉아 한숨을 쉬며 파도로 해변을 핥는 겨울 바다를 지켜보았다. 바다를 지켜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가 바다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바다가 나를 지켜주는 것 같은 포근함이 밀려왔다.
미노스 문명의 크레타 섬, 크노소스 궁전
크레타 섬은 고대 그리스 문명에 영향을 준 미노스 문명의 중심지였다. 시내에 있는 ‘이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에는 놀라울 정도로 발달한 청동기 시대 미노스 문명의 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앞에서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크노소스 궁전’으로 갔다. 겨울이라 관광객도 거의 없이 한산해서 여유롭게 궁전을 둘러볼 수 있었다. 크노소스 궁전은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그리스 전설 속의 반은 인간, 반은 황소였던 ‘미노타우로스’가 살았다는 전설로 유명한 곳이다. 미로 같은 건물로 지었다는 이야기가 충분히 나올 만한 규모와 구조였다. 서로 연결된 방이 무려 1,400개라고 한다. 벤치에 앉아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궁전에 얽힌 인물과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꿰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만나다
크레타섬 출신으로 유명한 사람을 꼽는다면 화가 ‘엘그레꼬’, 가수 ‘나나 무스끄리’와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뽑을 수 있다.
이라클리온을 둘러싼 성벽 위에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가 있다. “최후의 유혹”이라는 작품으로 인해 그리스정교회와 로마가톨릭으로부터 파문을 당했기 때문에 공동묘지에 묻히지 못하고 성벽 위에 있었다. 바람 부는 성벽 위, 그의 묘는 소박했다. 묘비의 글처럼 죽어서도 욕심내지 않은 모습이었다. 평평한 돌과 묘석 그리고 나무 십자가 그것이 모두였다. 묘비에는 그의 소설에서 따온 유명한 문장이 새겨져 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욕심과 욕망을 버리고, 자유롭게 삶을 즐기라는 그의 외침이 바람에 실려 귓가를 맴돌았다. 자유를 갈망하며 거칠고 힘든 삶을 살았지만, 탁 트인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지금의 자리가 그의 영원한 안식처로 선택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 것이다. 고개를 돌리면 조금 떨어진 곳에 니코스 카잔차키스 문학의 동료이자 사랑을 알려 준 두 번째 부인 엘리니의 묘가 있다. 그녀의 묘 역시 소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묘 주변을 둘러볼 때 벤치에 앉아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여인을 만났다. 파리에서 프랑스 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페르(Ferr)’였다. 한국에서 교환학생으로 1년 동안 공부했었다는 그녀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크레타 섬을 정말 좋아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그의 문학과 그의 외침 ‘자유’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유롭지 못해서 더 자유를 열망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과 시간, 사연이 오가는 겨울의 항구
크레타 섬에서 이라클리온 다음으로 큰 도시는 하니아(Chania)다. 이곳 역시 베네치아 공화국과 오스만 튀르크의 지배를 받았었다. 여러 문화가 공존하는 낭만적이고 이국적인 분위기의 작은 예쁜 항구다. 하니아는 이라클리온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3시간을 가야 하는 거리에 있다. 하니아로 가는 도로는 해변을 따라가는 풍경이 아름다운 길이다. 가는 내내 올리브 나무가 지천에 깔려있는 구릉지들이 바다와 함께 길옆으로 함께 달린다. 크레타 섬에는 30,000그루의 올리브 나무가 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올리브 관련 상품들이 특산품으로 많이 판매되고 있었다.
하니아 베네치아 항구의 작은 카페에 앉아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지중해의 겨울 햇살이 내 몸을 관통하고 있었다. 항구는 배만 오가는 곳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과 시간, 사연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 안에 나의 시간도 있었다. 지금까지 나를 지키는 것조차 버거워 얼마나 많은 것들을 외면해 왔는지 크고 작은 것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조르바의 말처럼 매사를 정밀하게 재는 저울 한 벌을 내 안에 가지고 있었다. 이제 저울을 버릴 때다. 필요한 건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뿐이다.
△ 지중해 섬 여행 정보 Tip (아테네에서 크레타 섬 가는 방법 중심으로)
- 아테네 피레우스 항구에서 페리를 타면 된다. ‘미노안 라인’과 ‘블루 스타 페리’ 두 개 노선이 있으며 크레타 섬까지는 9시간 정도 걸린다.
- 피레우스(Pireaus) 역까지는 지하철(Metro) M1 노선을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
- 피레우스 항구 입구에는 배를 타는 각 게이트로 가는 무료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
- 예약서를 페리 타는 게이트(Exit)에 있는 부스에서 탑승권으로 교환하면 된다. 혹은 직접 구매해도 된다.
▪ 미노안 라인 예약 홈페이지 www.ferries.gr/
▪ 블루 스타 페리 예약 홈페이지 www.bluestarferries.com
※ 크레타 섬 외에 산토리니 등 다른 섬을 가기 위한 예약과 승선도 동일한 방법으로 하면 된다.
※ 겨울철에는 숙박비, 렌트비 등 모든 요금이 절반 정도로 싼 편이다. 하지만, 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으면 배가 출항을 못 해 발이 묶여 있을 수도 있다. (물론, 비행기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겨울철 지중해 섬 여행은 반드시 시간적 여유가 있는 일정이어야 한다.
△ 크레타 섬 추천 먹거리
베니젤로 광장 꼬치구이 전문점
대구 청라언덕으로 가는 길에 가곡 ‘동무생각’을 흥얼거렸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 맡으며….” 어릴 적 배운 노래인데도 노랫말이 또렷이 떠올랐다. 우리나라 근대 풍경을 묘사한 벽화 골목을 지나자 야트막한 언덕이 나타났다. 정원으로 가꾼 언덕 위에 붉은 벽돌로 지은 서양 주택 세 채가 그림처럼 자리했다. 청라언덕은 상상했던 것만큼 아름다웠다.
걷기 코스
동대구역▶ 버스▶동산 청라언덕▶ 3·1만세운동길 계단▶ 계산성당▶ 이상화고택▶ 서상돈고택▶ 마당깊은집▶ 교남YMCA▶ 대구기독교역사과(구 제일교회)▶ 약령시한의약박물관▶ 진골목(종로)▶ 화교협회(화교소학교)▶버스▶ 김광석골목
청라언덕에서 부르는 연가
1890년대 조선에 들어온 미국인 기독교 선교사들은 동산언덕을 사들여 주택, 교회, 병원을 지었다. 푸른 담쟁이넝쿨이 붉은 벽돌로 지은 주택을 휘감았다. 대구읍성 동쪽 언덕이었던 동산은 이때부터 푸를 靑(청)과 담쟁이 蘿(라) 자를 써 ‘청라언덕’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1910년경 선교사들이 지은 서양 주택 세 채가 남아 있다. 선교사 이름을 딴 스윗즈 주택, 챔니스 주택, 블레어 주택이 그것. 미국식 방갈로 형태로 지은 주택 둘레에 나무가 우거진 정원과 산책로를 조성해 이국적 정취를 더했다. 이 건물들은 각각 선교박물관, 의료박물관, 교육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900년대 전후의 서양 의료기기들과 외국인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 3·1운동 역사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챔니스 주택과 블레어 주택 사이에서 대구 출신 작곡가 박태준(1900~1986)이 곡을 붙인 ‘동무생각’ 노래비를 찾았다. 이 노래에 작곡가의 러브 스토리가 담겨 있을 줄이야. 박태준이 고교생 시절 한 여학생을 짝사랑했는데, 훗날 이 사연을 들은 이은상 시인이 노랫말을 써줬다고 한다. ‘동무생각’의 ‘동무’는 동성 친구가 아닌 이성이었던 것.
청라언덕에서 계산동으로 넘어가기 위해 3·1만세운동길 계단을 내려간다. 좁고 가파른 이 계단은 1919년 대구 3·1만세운동 당시 고교생들이 일본의 눈을 피해 집결지로 이동했던 통로였다. 계단 중간쯤에 멈춰 서니 가로수 위로 우뚝 솟은 계산성당 쌍탑이 보인다.
대구의 예술가를 만나는 골목길
계단을 내려와 큰길을 건너면 곧 계산성당 앞이다. 계산성당은 100여 년 동안 이 터를 수호하듯 하늘을 향해 뾰족한 쌍탑을 얹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다. 외국인 여행자들 눈에도 멋있어 보이는지 성당을 배경 삼아 기념 촬영을 하느라 분주하다.
성당 뒤쪽에는 민족시인 이상화(1901~1943)와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던 민족운동가 서상돈(1850~1913)의 고택이 골목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이상화는 1934년부터 1943년 사망하기 전까지 이 집에 살면서 수많은 항일 시를 남겼다. 그가 해방된 조국을 보았다면 자신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 대한 답시를 짓지 않았을까.
두 고택 앞을 지나는 골목에는 시인 이상화, 소설가 현진건, 화가 이인성 등 대구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모여 살았다 하여 ‘예술가 골목’으로 불리기도 했다. 최근 이 골목에 한국전쟁 직후 대구를 배경으로 한, 한 소년의 성장소설 ‘마당 깊은 집’(1988)의 문학체험공간이 들어섰다. 이 소설은 김원일(1942~)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한데 드라마로도 방영되어 인기를 끌었다.
이곳에서 5분 정도 걸으면 3·1만세운동 때 주요 지도자들이 회의했던 대구 구 교남YMCA 회관과 1893년에 지은 대구기독교역사관(구 대구제일교회)을 만난다. 모두 문화재로 지정된 근대건축물이다.
한약재 향 머금은 약전골목
대구기독교역사관 옆에는 약령시한의약박물관이 자리했다. 2층에서는 사상체질 진단, 무료 한방차 시음, 족욕 체험, 한방비누 만들기 등의 다채로운 한방 체험을 할 수 있다. 한의약박물관 골목 일대는 한약재상이 밀집한 약전골목이다. 카페에서도 한방차를 판다. 이 골목에선 늘 한약재를 달이는 냄새가 달달하게 풍겨온다.
약전골목을 빠져나와 조선시대 영남지방 선비들이 과거 보러 한양 가던 길, 영남대로를 걷는다. 대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한약재 상점과 음식점, 카페 등이 모여 있는 좁은 골목길이다. 과거 보러 가는 선비에 얽힌 이야기를 그린 담장 벽화가 소소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벽화보다 눈길을 끈 것은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선 칼국수집이다. 대기하던 손님이 “이 집이 유명한 원조 칼국수집인데요, 빵게를 넣고 얼큰하게 끓여 맛이 기가 막혀요” 하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운다. 김이 펄펄 솟는 칼국수 찜통을 아쉽게 바라보며 다음 대구 여행을 기약한다.
넓은 종로 긴 진골목
영남대로에서 한 블록 위로 올라가면 열십자 모양의 대로인 종로가 있다. 종로 인근에 부자 동네였던 진골목과 약전골목이 있어 요정, 권번 같은 유흥 시설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한약재상과 음식점, 전통시장, 백화점 등이 자리한 대형 상권을 이루고 있다. 종로에는 화교의 역사도 공존한다. 근대에 화교들이 정착해 요식업, 포목업 등을 하며 살았다. 이들은 대구 갑부 서병국의 저택을 매입해 화교협회 건물로 사용했고, 그 앞에 화교 소학교를 세웠다. 근대건축물인 화교협회 건물은 예약(053-255-0561)한 후 관람할 수 있다.
차와 사람이 뒤섞여 지나다니는 종로를 걷다 진골목으로 숨어든다. ‘진’은 ‘길다’의 경상도 사투리 ‘질다’에서 비롯됐다. 조선시대에도 있던 골목이며, 근대에는 재력가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진골목 명소인 정소아과의원은 1937년에 지은 서양식 주택으로 소설 ‘마당 깊은 집’에도 등장한다. 노인들과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 미도다방도 이곳 터줏대감이다. 한때 유학자가 많이 방문해 양반다방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골목이 긴 만큼 옛이야기도 끊이지 않는다.
또다시 김광석다시그리기길
진골목까지 둘러본 뒤 버스를 타고 방천시장 인근 김광석골목을 찾아간다. 대구에 오면 왠지 꼭 들러야 할 것 같다. 애잔한 그의 목소리와 어울리는 계절, 늦가을엔 더욱더 그렇다. 김광석(1964~1996)이 방천시장 골목에서 태어난 인연으로 이 골목이 조성됐다. 350m쯤 되는 골목 입구에서 김광석의 기타를 본뜬 대형 조형물이 반긴다. 골목 담벼락에는 한몸 같았던 기타를 품에 안고 하회탈처럼 웃음 짓던 김광석과 그의 노래들이 벽화로 되살아났다. 오토바이를 탄 김광석은 그림 속에서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실감난다.
그가 포장마차에서 우동 한 그릇을 건네는 벽화 앞에 앉아 골목으로 흐르는 노래를 듣는다.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어 지친 그대 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밖에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오늘도 그의 노래에 위로받는다.
주변 명소 & 맛집
안지랑 곱창골목
안지랑 동네의 넓고 긴 골목 양옆으로는 곱창집이 늘어서 있다. 식당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상가 규모가 크다. 안지랑에서 곱창을 주문할 때는 1인분, 2인분 단위로 주문하지 않는다. 꼭 한 바가지, 두 바가지로 주문할 것. 한 바가지는 500g이다. 매운 양념을 한 불곱창과 곱창, 막창 등의 메뉴가 있는데 숯불에 한 번 더 구워 불맛을 더한 불곱창이 인기다. 메뉴를 고르기 어려울 땐 반반 주문을 해보자.
동인동 매운찜갈비 골목
대구 사람들은 매운 음식을 즐겨 먹는데, 그 이유는 여름에 너무 더워서란다. 이열치열로 더위를 이기겠다는 전략 음식인 셈이다. 서문시장에 매운양념어묵이 있다면, 동인동에는 매운찜갈비가 있다. 굵게 다진 마늘과 고춧가루를 아낌없이 넣어 만든 새빨간 양념이 갈비를 뒤덮고 있다. 보기보다 맵진 않다. 매콤하고 짭조름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조화롭다. 양은이나 스테인리스로 만든 양푼에 찜갈비를 내놓는 것이 특징이다. 낙영찜갈비, 봉산찜갈비, 싱글벙글찜갈비 식당이 유명하다.
별난 먹을거리 천국 서문시장
대구 최대 시장인 서문시장에는 5000여 개의 점포가 성업 중이다. 대구가 패션 섬유 도시로 이름난 만큼 원단, 한복, 의류 관련 제품을 파는 매장이 많다. 먹을거리도 풍성하다. 납작만두, 칼제비, 삼겹살자장면, 매운양념어묵 등 타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독특한 음식을 판다. 납작만두는 당면으로 만든 엄지손톱 크기의 만두소를 얇은 만두피로 감싸 지진 것이다. 매운양념어묵은 맵게 조린 어묵 위에 콩나물을 수북이 올린 것인데 아귀찜과 흡사하다. 자장면에 노릇하게 구운 삼겹살 열 조각을 올려주는 삼겹살자장면이야말로 서문시장의 독보적 아이템이다.
여행 정보 걷기 Tip
• 중구 도심의 근대문화유산을 탐방하는 걷기 코스 ‘근대로의 여행’은 총 5개 코스로 이뤄져 있다. 본문에 소개한 코스가 가장 인기 있는 2코스 ‘근대문화골목’이다. 매주 토요일 10:00, 14:00 두 차례 무료 정기해설을 진행한다. 신청은 대구시 공식 홈페이지에서 하면 된다.
• 서문시장은 2코스 걷기 전후에 가면 좋다. 걷고 난 뒤 들를 경우 김광석골목을 먼저 둘러보고, 2코스 근대문화골목길을 역순으로 걸으면 된다. 청라언덕에서 서문시장까지는 도보 10분 거리다.
그는 자유 해방의 흰색 날개를 몸 어딘가에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하늘로 날아올라 들국화 만발한 넓은 들판을 밝은 눈으로 보게 되리라. 매년 가을 러시아의 거장 톨스토이와 차이콥스키, 도스토예프스키를 한 번쯤은 만나봤을지 모를 기러기들을 보러 철원으로 떠난다는 90대 청년. 캠핑 속에서 끊임없이 답을 찾고 우주를 품는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온 진정한 캠핑 선구자 박상설(朴相卨·91) 씨를 만났다.
지하철 1호선 양주역에서 내려 또 시내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서 내리니 신축 아파트가 들어선 신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캠핑과 함께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면 직접 집으로 찾아오라고 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서 있는 박상설 씨가 반갑게 맞이한다.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남자 혼자 사는 집이 맞나 싶을 정도로 깔끔했다. 서가에는 캠핑과 관련한 각종 서적들과 심리학 책 등이 보였다. 방 안에는 당장이라도 어디론가 훌쩍 떠날 때 입을 등산복들이 걸려 있었고, 강의할 때 사용하는 프로젝터와 각종 캠핑 도구들이 곳곳에 있었다. 집 안 구석구석에는 세월을 가늠케 하는 책처럼 90년 넘게 살아온 이 남자의 이력을 상징하는 것들로 가득했다. 칼럼니스트, 자연과 삶의 전문기자, 기계기술사 등 명함에는 다양한 직업이 적혀 있었다.
사색하는 아버지와 자연 속으로 여행하다
그가 기억하는 최초의 캠핑 장소는 소양강변이라고 했다. 일제강점기,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박상설 씨는 법무사였던 아버지 덕에 불편함 없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법원을 드나들다 보니 일본인 판검사들과 친분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어를 할 줄 몰랐던 그들은 통역이 가능한 아버지를 자주 찾았어요. 그들과 관계를 하면서 일본의 캠핑 문화를 접하게 된 거죠.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여섯 살 무렵에도 아버지와 함께 캠핑을 했을 거예요. 초등학교 운동회 때 쓰는 큰 타프 있잖아요? 해 가리개요. 그걸 강가에 친 뒤 그 아래 평상을 놓고 모기장을 쳤어요. 아버지는 낚시도 하고 책도 읽으시고요. 텐트 치고 여름을 즐기는 집은 당시 우리 집밖에 없었을 거예요. 캠핑은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접했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따라 습관이 생기잖아요.”
인문학을 좋아하고 책 읽기를 좋아하던 아버지 손에 이끌려 간 곳은 책이 즐비한 도서관이 아닌 대자연 속이었다. 그 뒤 시간이 흐르고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한국전쟁이 터졌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 출신인 박상설 씨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육군 공병으로 입대했다.
“미군에서 지원해준 불도저나 글라이더 같은 중장비를 다루는 유일한 공병 중대였습니다. 다른 군인들이 총 들고 싸울 때 저는 대한민국의 길을 닦았어요. 텐트생활을 하면서 계속 이동해 다녔고, 중대장이 된 뒤에는 미군용 CP텐트를 썼는데 꽤 컸어요. 난로와 침대도 있었고요. 다른 사람들은 천막생활을 모를 때였죠. 군대에서 뭐가 제일 좋았냐고 물으면 텐트생활이 가장 좋았다고 말합니다.”
집을 짓고 사는 것은 가짜라고 생각했다. 집은 그에게 있어서 어두컴컴한 박쥐 둥지였다. 박쥐가 사는 곳은 아무리 좋아도 답답한 동굴 속이다.
“박쥐 둥지를 떠나게 해준 것이 텐트였죠. 그리고 책도 있었어요. 셰익스피어, 하이네, 루소의 책을 읽다 보니 캠핑의 의미가 더 선명해졌습니다. 어려서부터 캠핑을 해서 그런지 집에서 사는 게 제일 싫었어요. 특히 기와집이요. 그래서 노마드 보헤미안이 되고 말았죠.(웃음) 풀벌레 소리와 빗소리가 저는 정말 좋습니다.”
인문학과 정서가 스며야 진정한 캠핑이다
캠핑 인구가 100명도 안 됐던 시절,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듯 조금씩 캠핑 문화를 만들어갔다. 한국에 오토캠프의 씨를 뿌린 사람도 박상설 씨였다. 하지만 캠핑이 이뤄지는 행위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의 깨달음에도 집중한다고 했다.
“남이 하니까 부러워서 좇아다니는 것은 캠핑이 아니에요. 텐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우주를 품은 거 같습니다. 예를 들면 그 안에서 전혜린의 책을 읽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감동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저는 텐트를 친다고 표현하지 않고 품는다고 말합니다. 정치인의 스캔들이나 세상 떠도는 소문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우리는 그저 자연과 우주의 섭리에 의해 사는 거죠.”
박상설 씨는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단 한 번도 호텔에서 잔 적이 없다고 했다. 친척집이나 지인의 집에서 자는 일이 생겨도 마당에 텐트를 치고 잔다. 사람들은 집 안으로 들어와 자라고 하지만 고사한다. 그는 건물 속에서 자는 사람이 오히려 불쌍해 보인다고 했다.
“사막에는 꼭 가봐야 해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수많은 별이 쏟아집니다. 알래스카 자작나무 밑에서도 자봐야 해요. 호수가 참 많은데 아침에 일어나서 모닥불 피우고 커피 한잔하고 있으면 사슴이 다가와 5분이고 10분이고 서서 먼 산을 쳐다봅니다. 그 정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아요? 캠핑 문화는 알프스 사람들의 목가적 생활에서 시작됐습니다. 알파인 문화라고 하죠. 우리나라 사람들의 캠핑은 알파인 문화를 알고 정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하니까 따라 하면서 장비 자랑하러 다니는 것 같아요. 목가적인 여유를 즐겨야 하는데… 캠핑장도 너무 갑갑해 보입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캠핑장 안 텐트의 간격이 너무 좁아요. 오토캠핑을 제가 소개했지만 이렇게 변형되어 참 안타깝습니다.”
벼랑 끝에서 다시 시작한 캠핑
군 생활 10년 동안 한 가정의 가장이 됐고 아이들이 태어났다. 종전 후 밥벌이를 못하게 된 아버지를 대신해 누나와 여동생까지 공부시키고 시집보내야 했다.
“그때는 정말 버거웠습니다. 군대 월급이
1만5000원밖에 안 될 때였습니다. 제가 벌어먹여야 하는 사람이 저 포함해서 열세 명이나 됐어요. 부업으로 학원 선생을 했어요. 다른 사람들 10만 원 받을 때 저는 50만 원 받는 실력 있는 강사였습니다.”
아무리 벌고 또 벌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한동안은 죽을 생각에 호주머니에 늘 나일론 끈을 넣고 다녔다.
“그때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을 읽고 자연에 대해 알게 됐어요. 죽으면 안 되겠구나 하고 끈을 버렸어요.”
1963년 육군 공병 대위로 제대한 후에는 신흥건설종합설계회사에서 근무했다. 당시 부업으로 용산구 보광동 지역 토지를 외상으로 구입해 건설자재 후불 조건으로 15평짜리 집 10채를 지어 큰 수입이 생겼다.
“뭘 할까 고민하다 땅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한 평당
5원 하는 가평의 임야 30만 평을 매입했는데, 캠핑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그동안 주말농장 운영과 함께 인문학 강의도 하면서 지냈어요. 서른일곱 살 때부터 했으니 벌써 54년이 됐네요.”
‘캠프나비’라고 이름 지은 그의 농장은 현재 강원도 홍천에 있다. 2000평이나 되는 농장에는 들국화도 피고 각종 채소와 과일들이 자란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워크숍이 열린다. 인문학 세미나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잘 지은 건물은 없다. 비닐하우스가 있을 뿐이다. 아이와 어른이 만나 세대를 뛰어넘는 대화를 나누고 잠을 잘 때는 농장 곳곳에 텐트를 친다. 틀에 짜인 도시형 캠핑은 거부한다. 참된 자유를 알고, 본성 찾기를 권하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가 죽기로 했다
그는 지금도 가끔씩 캠핑을 즐긴다. 생각나면 바로 실행에 옮기고 미루지 않는다. 91세 할아버지가 혼자 산다면 사람들은 그의 자식들에게 손가락질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세간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는다.
“사람은 어차피 혼자 살아갑니다. 혼자 산 지 33년 됐어요. 이제는 식구하고도 같이 못살죠. 제 자식들과 손주들도 캠핑을 좋아합니다. 대기업 다니는 손주는 결혼 비용을 아껴 주말농장을 샀어요. 우린 이메일로만 연락을 주고받아요. 아흔 살, 백 살이 되면 이렇게 살아야지요. 왜 내가 아들네 집, 딸네 집에 가서 살아야 하나요.”
박상설 씨는 이미 죽음의 문턱을 한 번 넘어갔다 왔다. 환갑 무렵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됐다. 그의 건강을 다시 찾아준 것은 의술이 아닌 캠핑이었다. 가족한테도 알리지 않고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했다. 그러자 움직이지 않던 몸이 서서히 좋아지면서 펴졌다. 자신감이 되살아났고, 길 위에서 삶의 방향을 잡고 살아왔다.
“나이가 아흔하나면 세상 떠나는 날이 내일이 될 수도 있고 모레가 될 수도 있어요. 언젠가는 죽죠. 지금 내가 이렇게 떠들지만 오래 살아봐야 백 살이겠죠. 9년밖에 안 남았습니다.”
그는 82세에 집을 나간 뒤 길을 걷다가 빈촌의 기차역장 집에서 폐렴으로 열흘 만에 생을 마감한 러시아 문학의 거장 톨스토이의 이야기를 해줬다.
“얼마나 멋진 죽음이야. 물론 톨스토이를 흉내 내려는 건 아니에요. 아들딸들도 내가 걷다가 죽기를 원할 거야. 충분히 잘 알기 때문에. 나는 여행할 때마다 시신기증등록증과 약간의 돈을 목에 걸고 다닙니다. 죽으면 제 몸은 대학병원 해부학 교실로 들어가요. 그럼 영안실이 필요 없겠죠.”
주변에 자신이 죽었다는 것도 알리지 말고, 조의금도 받지 말고, 제사상도 차리지 말라고 했다. 어느 날 딸이 “아빠가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하고 물었단다.
“제가 가을에 핀 들국화를 제일 좋아하거든요. 길을 걷다가 야생 국화를 보면 ‘아버지가 참 좋아하셨는데…’ 그렇게 스쳐가듯 가끔씩 생각해주면 된다고 했습니다. 캠핑은 인생에서 우러나와야만 제대로 발현되는 정서 운동입니다. 일평생 하고도 화장터에 갈 때까지 해야 하는 것, 그것이 캠핑입니다.”
신중년들의 재취업은 하늘의 별 따기. 수명은 길어지고 건강나이는 늘어 정년 후에도 뭔가 일거리를 찾아야 한다. 어떻게 찾을 것인가? 틈새나 새로운 시장을 창의적으로 개척해 성공한 신중년들의 경험담은 더없이 좋은 사례다. 이러한 점에 착안한 고용노동부와 한국고용정보원(원장 이재흥)은 “창의와 도전으로 시작하는 인생 3모작” 신중년 창직 포럼을 9월 17일 aT센터(서울시 양재동)에서 개최했다.
꿈과 아이디어 그리고 도전정신으로 인생 3모작에 성공한 신중년 사례를 확산하기 위해 마련한 포럼이다, aT센터 세계로룸을 꽉 채운 방청객의 높은 관심 속에 진행됐다. 새로운 도전의 필요성과 의미 그리고 인생 3모작을 앞둔 신중년들이 준비해야 할 것에 대한 기조강연을 시작으로, 새롭게 경력개발을 시도한 신중년 4인의 사례 발표와 질의응답 토크쇼로 이어졌다.
기조 강연에 나선 백만기(67세) 인생학교 교장은 은퇴 후 행복한 삶을 위해 필요한 조건과 마음가짐, 일을 통해 가치를 추구하는 방안을 들려주었다. “30년 가까이 금융회사에서 일한 뒤, 지역사회에 기여하기 위해 인생학교를 설립했다”며 “먹고 사는 일, 재미있는 일, 의미 있는 일, 이 세 가지가 부족함 없이 균형을 이뤄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첫 번째 사례발표는 수다나무협동조합 홍성화(58) 이사장은 “꿈과 사회적 가치를 함께 완성하는 인생 후반”을 주제로 취약계층 관련 시설과 학교 등 공공시설 환경 개선을 위해 협동조합을 운영하는 사례를 구체적으로 발표해 도움을 주었다. 창직은 “내게 필요하고 앞으로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것으로 나와 주변 사람들이 공감하고 의미 있는 것에 대한 자기성찰이 우선 돼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두 번째 발표는 더 쇼퍼(웨딩카운전) 노경환(68) 대표의 “경험과 역량을 살린 인생 3모작”를 주제로 이어졌다. 노 대표는 호텔리어, 대리운전 기사 경험 등을 살려 웨딩카 운전 전문 업체를 운영하고 호텔리어로 일하면서 익힌 고객 응대 노하우를 살려 결혼식 신랑신부의 웨딩카를 운전해주는 웨딩카운전원을 창직했다. “아들의 결혼식에서 신랑신부 이동 서비스에 영감을 받아 창직했다”며 “틈새시장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도전한다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세 번째 사례발표는 유품관리사 김석중(51) 대표가 나섰다. 고령화 및 1인 가구 증가에 대비한 유품관리사의 전망을 소개하고 신 직업에 진출하면서 겪은 어려움과 지속적 도전의 원동력을 들려주었다. 일본 NHK 방송 유품정리회사 다큐멘터리를 보고 회사대표를 직접 찾아가 노하우를 배웠다. “우리보다 먼저 고령화 등을 겪은 일본의 경험을 바탕으로 패키지 형식으로 유품 정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를 창업할 수 있었다”고 했다. “단순히 유품을 치우는 청소업이 아니라 지식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관련 산업이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끝으로 농업협동조합 정년 후 취미로 텃밭 가꾸기 시작해 도시농업전문가로 거듭난 오영기(66) 회장의 사례발표가 있었다. 신중년이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선 과거의 모습과 지위 등을 과감하게 떨쳐버리기를 권유하면서 새로운 분야의 틈새를 공략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일러주었다.
포럼을 주관한 한국고용정보원 관계자는 “신중년의 경력개발을 지원하기 위한 미래직업, 창직 등 다양한 콘텐츠를 생산해 알리고 있다”고 했다. “새로운 인생 후반을 완성하고 싶은 신중년에게 다양한 경력개발 사례로 창직과 사회 가치 구현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러한 포럼을 비롯하여 신중년을 위한 다양한 채널의 지원제도가 이어지기를 희망해본다.
귀촌을 위해 집을 샀으나 온전히 그의 것이 아니다. 남의 토지 위에 들어앉은 건물만 샀으니까. 건물 값은 900만 원. 토지 사용료는 연세(年貰)로 치른다. 폐가에 가까운 건물이었다지. ‘까짓것, 고쳐 쓰면 그만이지!’ 그런 작심으로 덤벼들었다. 뭐든 뚝딱뚝딱 고치고 바꾸고 꾸미는 재주가 있는 그는, 단지 두 달여 만에 쓸 만한 집을 만들어냈다. 민병덕(64) 씨의 귀촌살이는 그렇게 시작됐다. 조촐하고도 옹골차게.
집 밖으로 물처럼 찰랑찰랑 흐르는 게 있다. 음악이다. 처마 밑에 매단 스피커에서 출발한 선율이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아리아 ‘사랑의 산들바람은’이다. 환영사인가? 방문객을 위해 미리 준비한? 알고 보니 그것만은 아니다. 늘 음악을 튼다는 게 아닌가. 음악이 없는 인생은 사막처럼 황량하다, 그게 민병덕 씨의 생각이다. 잠자는 시간 외엔 항상 음악을 듣는단다. 그 좋은 음악을 혼자 즐기기엔 아까워 옥외 스피커까지 장착했다. 담장 밖 길을 오가는 마을 사람들도 귀를 씻을 수 있도록.
마음껏 음악을 즐길 수 있다는 것. 이건 민 씨의 귀촌 이유이기도 하다. 대문 바깥으로까지 종일 음악이 흘러나가도 무사할 수 있는 게 시골이니 말이다. 도시에선 다르다. 남의 피곤한 귀를 괴롭히는 소음 유발자로, 악취미의 소유자로 탕탕 규탄받을 가능성이 많다.
음악은 그의 밥줄이기도 하다. 음악을 짓거나 노래하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그는 빈티지 오디오를 수리하는 기술자다. 진공관식 오디오 수리에 관한 한 마지막으로 남은 전문가를 자처한다. 최상의 선율을 듣기 원하는 이들이, 진공관식 전축으로 고품격 음질을 갈구하는 마니아들이, 고장 난 장비 때문에 실의에 젖어 끙끙대던 이들이 그의 시골집을 찾아온다.
어려서부터 팝송에 폭 빠졌다지. 1970년대 중반, 수원에 있었던 ‘역마차 다방’을 기억하는 독자가 계시려나? 당시 이 음악다방 디제이의 인기는 하늘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방의 천장 정도는 무난히 찌를 지경이었다. 다방이 미어터지게 처녀들이 몰려와 디제이가 선곡해 들려주는 팝송에 넋을 놓은 채 청춘의 참을 수 없는 우수와 뜨거운 갈증을 다독였다. 이 디제이는 입대 뒤 100통이 넘는 감미로운 팬레터를 받았다. 그건 재수 없는 고참병들에게 괜스레 쥐어터지고 으깨어지는 게 다반사인 군대에서의 일상을 견디게 하는 힘이 돼주었다. 민병덕 씨가 바로 그 ‘역마차 다방’ 디제이였다.
음악에 관한 취향과 애호, 경험이 결국은 인생의 길이 되고 방향이 됐다. 죽 한 길을 살아온 건 아니다. 이런 사업, 저런 영업, 전전한 바가 많으며 굴곡도 심했다지. 세상은 아름다워 뒤에 두고 떠나기엔 섭섭하다. 아울러, 아름답기는커녕 세상은 때로 정나미 떨어지는 난장판이다. 민 씨의 삶에도 곡절이 많았단다. 믿었던 이들에게 당하거나 뜯기거나 찢겨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이게 또한 그의 귀촌 동기다. 하이고, 지겨워라, 나 이제 조용한 시골에서 살래! 그는 그리 속으로 외치며 난생처음인 시골살이를 시작했다.
뭐든 쓱싹 잘 고쳐주는 남자
“시골에서라고 이상적인 생활이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각박한 도시를 벗어나 마음 편하게 살고 싶었어요. 낯선 농촌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은 거의 없었고요. 제가 원래 매우 낙천적인 사람이거든요. 이웃들에게 잘하면, 마을 어른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나, 그런 자신감으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거나 딱히 준비한 것 없이 귀촌했지요.”
“완전한 내 집이라 할 수 없는, 이른바 ‘지상권 주택’을 사서 오셨어요? 굳이 그래야 했을 이유라도?”
“그야 뭐, 돈이 없었으니까. 하하하!”
“그간 뭘 하셨기에? 모으기보다 쓰기에 주력하셨나?”
“제가 잘나갈 땐 상가 건물도 소유했어요. 근데 어쩌다 보니 다 날아가더라고. 제 능력 부족 탓에 사업을 망친 경우엔 그러려니 했지만, 믿었던 사람에게 금전적 손실을 당했을 땐 괴롭더라고요. 아무튼 지상권 건물은 제 처지에 적격이었어요. 3000만 원 정도 들여 집을 싹 고쳤지요. 아 참, 제가 이 집에 매력을 느낀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마당에 있는 커다란 목련나무가 맘에 들었다는 거. 야, 이 집에 살면 봄철에 백목련을 실컷 즐길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에 들떴으니까.”
“꽃을 좋아하는 남자?”
“꽃이 세상을 환하게 하니까. 꽃나무 안에 사계의 순환이 있고요. 식물들이 주는 소소한 행복을 포기하기란 어렵죠. 좁은 마당이지만 갖가지 화초와 나무들을 가꾸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라일락, 쥐똥나무, 배나무, 능소화, 장미, 머루, 다래, 패랭이, 달맞이꽃, 튤립….”
꽃에서 꽃피기까지의 상처와 고통을 보는 사람이 있다. 꽃에서 기어이 피어날 삶의 축복과 환희를 보는 사람이 있다. 민 씨의 성향은 후자 쪽이다. 낙관과 순응을 속에 담고 사노라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런 그의 귀촌은 긍정적인 예견과 함께 단행되었다. 남들 보기엔 허술한 귀촌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실은 적극적인 청사진을 내장한 상태로 시골에 등장했다. 그가 집을 보수한 뒤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한 일은 꽃 가꾸기였다. 마을 안길에 꽃길 만들기!
“이사하기 전, 마을을 몇 번 드나들며 퍼떡 꽃길 조성을 생각했어요. 보시다시피 나지막한 산들이 에워싼 이 마을 풍광은 썩 아늑합니다. 그러나 입구에 공장도 있고 꽤나 어수선한 분위기더라고. 아하, 꽃길을 가꾸면 마을 인상이 훤해지겠구나, 누군들 꽃을 싫어하랴! 그런 생각으로 집 앞 도로변부터 꽃을 심기 시작했어요. 버려진 보도블록을 잔뜩 실어다 화단을 만들어 꽃씨를 뿌렸어요. 뿌리면 피어나는 법. 크게 힘들이지 않고 모두가 좋아하는 꽃길을 얻은 셈이죠. 덤으로 원주민들에게 호감을 샀어요.”
원주민에게 호감 사기. 이는 귀농귀촌의 튼실한 뿌리를 내리는 데 가장 필요한 영양성분이다. 도시나 시골이나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명암과 요철은 하등 다를 게 없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처럼 주로 점잖은 사람들이 모여 오순도순 사는 곳이 시골일 거라 여기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시골 사람들이 요상하게도 더 사납고 더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의외로 많다. 이는 도시 사람들이 더 사납고 더 이기적이라고 도매금으로 싸잡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관념이다. 이런 인간, 저런 인간이 골고루 분포해 먹이를 사냥하는 게 인간사회라는 수렵장이지 않던가. ‘이기적 유전자’를 씨앗처럼 몸에 달고 태어난 인간들의 공동체 어디건 가혹한 생존 조건을 보유하고 있다는 걸 염두에 둔다면 한결 공정한 관점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너나 잘하세요!’라는 말. 이 안엔 우렁찬 진실이 서려 있다. ‘닥치고, 너부터 잘하세요!’라는 말과 동의어일 이 시쳇말엔 존중과 자존과 이타(利他)를 설하는 경책이 들어 있으니 말이다. 민병덕 씨는 세상에서 배운 지혜의 모든 걸 귀촌생활에 쏟아 부은 것 같다. ‘내가 먼저 진심을 다해 베풀면 무슨 사단이 나랴, 알것제? 나여! 나부터 잘해보더라고!’ 그는 자신에게 그렇게 속삭이며 귀촌생활에 발동을 걸었던 모양이다. 이사 직전 그는 동네 이장을 찾아갔더란다. 자못 쓸모 있는 사람 하나가 마을에 새로 출현하게 됐음을 예고하기 위해서였다지.
“마을발전기금이라는 거. 요즘은 귀촌귀농인들에게 그런 희한한 것까지 요구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저는 가진 게 없는 사람이에요. 그렇다고 주눅들 게 뭐란 말인가. 이장에게 말했어요. ‘난 내가 가진 재주를 유익하게 나누겠다, 내가 전자 기술자다, 뭐든 다 고칠 수 있다. 이제부터 마을 분들의 고장 난 가전제품은 내가 다 무료로 고쳐드리겠다!’ 돌아온 응답은 훈훈한 환영사였어요.”
“당신이 가진 재능을 아낌없이 이웃들에게 베풀라! 이건 귀촌귀농의 성공 필살기죠.”
“혼자 돌아앉아 고독과 고립을 벗 삼아 살 게 아니라면 어울려야죠. 그게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만은 아녜요. 주민들에게만 좋은 일도 아니고요. 결국은 나 자신을 위하는 현명한 처신이니까.”
“뭐든 쓱싹 잘 고쳐주는 남자. 결국 그렇게 소문난 거예요?”
“고장 난 경운기를 고칠 수 있는 용접기까지 미리 장만하고 주민들을 기다렸어요. 주로 할머님들이 가전제품 수리를 부탁해오더라고요. 전기밥통, 믹서, 선풍기, TV 등 뭐든 다 수리해드렸죠. 점차 입소문이 나면서 저 건너 이웃마을에서도 저를 불렀어요. 그러면 재까닥 달려갑니다. ‘아유 고마워라, 수리비는 얼마요?’ 처음엔 그리 묻는 분들이 많았고.”
“받은 게 있으면 반드시 갚는 게 시골 사람들이죠.”
“그게 시골 특유의 정서죠. 외지인에게 배타적이고, 어떤 특정한 상황에선 돌변하기도 하지만, 선의라는 건 통하는 법이라서 준 만큼 받게 되는 게 농촌이에요.”
“주로 무엇을 받으시지? 우호적인 마음, 친밀감, 신뢰, 그런 거?”
“한마디로 따뜻한 인정이죠. 뭐든 농작물이나 음식을 수시로들 가져와요. 제가 집에 없을 땐 대문 앞에 놓고 가는데, 자주 고양이들이 음식을 먼저 먹어치웁니다. 그래 대문간에 아예 전용 보관함을 설치했어요.(웃음)”
해마다 마당에서 펼치는 꽃 축제
민 씨는 아마도 잘나가던 시절의 잉여물일 외제차와 외제 바이크를 타고 다닌다. 물개처럼 늘씬한 사냥개 두 마리도 기른다. 인근의 강변 활터에 나가 활쏘기도 즐긴다. 이런 그의 동향에 마을 사람들은 이물감이나 위화감을 느꼈을 수도 있겠지. 사생활의 자유를 보장하는 게 이 나라이지만, 편견과 간섭이 가랑비처럼 쏟아지기도 하는 게 세사이지 않던가. 어라, 수상한 한량 하나가 우리 마을에 들어왔네! 눈총이 쏟아지고 괜히 미운털이 박힐 수도 있었을 거다. 일테면, 귀촌자가 개를 끌고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일은 거북이를 끌고 돌아다니는 일만큼이나 오해를 살 수도 있는 게 농촌이니 말이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민 씨는 응분의 노력을 다해 융화와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다.
손수건에서 비둘기를 뽑아 날리는 재주만이 마술은 아니다. 인간관계의 지반을 촉촉이 적시어 생활의 여건을 증진하는 일, 없었던 우정을 돋우어 삶의 재미를 촉진하는 일도 마술처럼 유쾌하다. 마을 속으로, 이웃 속으로 빗물처럼 스며들어 귀촌의 재미와 안락을 누리는 민 씨의 행장엔 한 번뿐인 아까운 생을 스스로 부양할 줄 아는 자의 현명과 전략이 서려 있다.
10년. 그가 귀촌 이후 흘려보낸 세월이 그렇다. 그 10년간 흘린 진땀이 숱할 테지. 그러나 그의 진정한 관심사는 ‘놀이’에 있다 하니 솔깃해진다. 사람은 일벌레가 아니니 나이 든 자라면 놀이에도 일가견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어떻게 하면 더 잘 놀 수 있을까? 자주 그런 생각합니다. 답은 간단해요. 내 처지에 맞는 즐거운 놀이, 민폐가 없는 취미, 내가 진정 좋아하는 특기를 찾아 몰입하면 된다는 것.”
“일은 뒷전이어도 좋은 거예요?”
“아하, 일단 일은 최선을 다해야죠. 이곳이 시골이지만, 문제가 생긴 오디오를 들고 저를 찾아오는 손님들이 꽤 많습니다. 기술이 녹슬지 않는 한 외진 산골짝에 살더라도 밥 굶을 일은 절대 없지요. 아아, 가고 싶다, 깊고 고요한 산골로.”
“외롭지 않을까? 산중생활이라는 거.”
“점점 자연으로 마음이 쏠립니다. 외로움이란 도시의 군중 속에서 더 커지는 게 아닌가? 제게는 많은 지인이 있어요. 어딜 가든 찾아오는 정든 벗들 말이죠. 저는 그들을 초대해 축제를 해요. 귀촌 10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두 차례 잔치를 벌여왔어요. 백목련 축제와 장미 축제죠. 저의 집 마당에 목련이 필 때, 장미가 만개할 때, 그 좋은 꽃철에 맞춰서.”
그는 ‘요섹남(요리하는 섹시한 남자)’을 자처한다. 대접할 요리 구상까지 해놓은 뒤 정성껏 만든 축제 초대장을 보낸다지. 꽃 속에서 신나게 놀아보자고. 초대받을 자격에 미달하는 인사들은 사절이다. 일테면, 부부 동반이 아닌 경우가 그렇다. 정작 민 씨는 ‘돌싱’이지만.
어떻게 하면 더 잘 놀 수 있을까? 자주 그런 생각합니다. 답은 간단해요. 내 처지에 맞는 즐거운 놀이, 민폐가 없는 취미, 내가 진정 좋아하는 특기를 찾아 몰입하면 된다는 것
◇민병덕 씨가 말하는 귀촌 Tip◇
•굳이 집 마련에 큰돈 쓸 일 아니다. 자금이 부족하다고 낙심할 것도 없다. ‘지상권 건물’을 매입하면 된다. 공들여 수소문할 경우, 의외로 쉽게 찾을 수도 있는 게 지상권 건물이다.
•귀촌 장소를 신중히 물색해야 한다. 과연 내가 정붙이고 살 수 있는 마을인지 사전에 자주 드나들어 판단하자. 이장을 미리 만나 마을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도 필수.
•원주민들과 인간적 신의를 쌓아야 한다. 불신을 사 외톨이 신세가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우울증이 찾아올 수 있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여고 동창생, 특히나 여고 졸업반 친구들은 아련하고 각별하다. 돌이켜보면 인생의 갈피갈피를 같이하는 게 고교 친구가 아닐까. 방과 후 수다를 조잘조잘 나누던 여고 동창생들이 이제는 며느리, 사위 볼 이야기까지 나누게 되었다. ‘거울 앞에 선 누이’가 된 적잖은 나이이지만, 함께 모이면 여전히 단발머리, 교복 입었던 그 시절로 달음질친다. 추억은 돌아보는 것이지만 만들기도 해야 한다는 소신 하에 계를 부어 여행을 계속 떠나며 추억을 만들어온 지 어언 12년째다. 서로를 안 지 40년 남짓. 강산은 네 번이나 변했지만 우정은 한결같다.
도화진, 오은경, 이소윤, 김성회. 우리 4명의 가장 큰 공통점은 모두 헛똑똑이, 허당이라는 점. 방향 감각이 엄청 떨어지는 길치란 점도 그렇다. 해외는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같은 길을 몇 번씩 돌아갔다 원점으로 돌아올 때, 지하도 출구를 몇 번씩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할 때 서로를 보며 깔깔거린다. “어쩌면 우린 이런 것까지 똑같니? 요즘 세상에 이렇게 만나기도 힘들다. 이렇게 덜떨어진 우리 같은 사람들끼리 만나는 것은 우연이니? 필연이니?” 하면서.
우리 여고 동창들은 대학교 다닐 때 함께 국내 여행을 다니다가 해외로 여행 영역을 넓혔다.
지금도 그때 그 시절 사진을 보면 웃음이 나온다. 서로의 옷을 바꿔 입고 나름 예쁜 척하며 바닷가에서 찍은 모습들이란… 촌스럽지만 풋풋하다. 이후 한 친구는 유학을 갔고, 한 친구는 노동운동을 하면서 모두 모이지 못하는 소강기간도 있었다. 그러다가 마흔 넘어 비로소 네 명의 아귀가 채워질 수 있었다. 2010년 처음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갔고, 2013년엔 스페인으로 패키지여행을, 그다음 2016년엔 조금 더 용기를 내서 크로아티아로 에어텔을 예약, 여행을 다녀왔다. 그리고 올해 5월 11~20일 네덜란드-벨기에로 여행을 다녀왔다. 해외여행으론 네 번째다. 좌충우돌 알콩달콩 네덜란드-벨기에 자유여행 이야기를 공개한다. 3회로 나누어 연재할 예정이며 그 첫번째를 싣는다.
암스테르담 교외 전원마을 히트호른 직행
우리는 해외여행을 갈 때 되도록 밤비행기를 이용한다. 호텔비 1박을 아끼는 이점, 그리고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활동, 시차적응이 쉽다는 양수겸장의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저녁은 간단히 먹고 기내식으로 푸짐하게 배를 채운 뒤 와인 한 잔까지 걸치고 푹 잤다. 좁은 이코노미석 새우잠에 익숙하지 않은 친구는 뒤척뒤척 잠을 못 이뤘다. 11시간의 비행 후 새벽 5시(현지 시간)에 네덜란드 스히폴공항에 도착했다. 높다란 천장, 히딩크처럼 큼직큼직 건장하게 생긴 외국인들…. 네덜란드에 왔음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공항 화장실에서 간단히 세수를 하고 화장을 했다. 우리나라의 이마트쯤에 해당하는 알버트하인 마트에서 수프와 빵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곧바로 네덜란드의 동화마을 히트호른을 향했다. 히트호른은 염소의 뿔이란 뜻이다.
도착하니 오전 9시 30분가량. 거의 일착이다. 우리가 마을 전체를 완전 전세 낸 것처럼 고적해서 더욱 좋았다. ‘네덜란드의 베니스’란 별칭에 어울리는 강가에 예쁜 집들, 그리고 그 옆에 작은 배들이 그림처럼 정박해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는 동시에 탄성을 터뜨렸다. 눈앞에 펼쳐진 쨍한 하늘과 전원, 강 옆의 억새지붕을 한 집들이 오순도순 동화처럼 아름답게 늘어서 있었다. 네덜란드에서는 창문에 스탠드이든, 인형이든 쌍으로 놓는 게 인테리어의 기본 법칙이다. 그래야 균형이 맞는다고 생각한단다. 반 고흐의 작품 ‘아를의 반 고흐의 방’을 보면 침대 오른쪽 벽에 그림액자 2개가 나란히 걸려 있는데 네덜란드의 독특한 풍속이 미친 영향이다. 집 앞의 강에는 집집마다 작은 배를 정박해놓았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청량한 공기…. 모두들 피곤함도 잊고 탄성을 연발하며 “이런 예쁜 집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가 급격히 말을 거뒀다. 햇빛이 아쉬운 네덜란드의 환경상, 이곳의 가옥구조는 한 벽이 다 창문이라 할 정도로 창문이 많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창문이 얼룩진 곳 하나 없이 반짝반짝한 게 아닌가. 또 집 안도 빤히 들여다보이는 구조다. 이런 집에서 살려면 늘 청결하고 인테리어도 안목이 있어야 할 텐데 자신이 없었다. 어쨌든 파란 하늘, 초록 풀밭, 흐르는 강, 그림 같은 집 등…. 네덜란드는 포토제닉 국가 그 자체다. 실제 풍경도 아름답지만 사진으로 보는 경치가 더 아름답다.
프리워킹투어+마차 관광과 숙박
암스테르담 시내는 프리워킹투어를 이용했다. 미리 한국에서 신청해놓아 만남의 장소인 담 광장을 향했다. 우리 팀을 인솔할 사람은 아랍인 용모를 한 중년 남자. 네덜란드로 이민 온 지 오래된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네덜란드 역사관광 가이드를 외국인이 맡은 것이 신기했다. 가령 경복궁 안내를 푸른 눈의 외국인이 안내하며 한국 역사를 설명한다면? 암스테르담이 이민자의 도시라서 가능한지도 모른다. 암스테르담 궁전, 벼룩시장 등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돌다가 자신이 아는 카페로 관광객을 인도, 아니 유도했다. 그리고 무료 관광이며 자신은 별도로 공공기관에서 돈을 받는 것도 아니라고 구구한 설명을 하며 팁을 유도해서 피곤했다. 더구나 행인들과 차가 다니는 길거리에서 영어 설명을 들으려니 청해는 고사하고 청취도 힘들었다. 중간에 들른 카페에서 커피와 케이크를 먹으며 간단히 요기를 한 후 “다음 일정이 바빠 어쩔 수 없이 중도에 빠지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우리끼리 시내를 돌기로 했다.
우선 길을 다니며 조심해야 할 것은 자전거들. 자전거들이 씽씽 달려 부딪힐까봐 늘 경계해야 했다. 마침 우리나라 유학생이 스마트폰으로 길을 찾던 중에 자전거와 부딪혀 크게 부상당했다는 소식을 들어 더 긴장하고 조심했다. 종일 걸으니 다리가 아팠다. 길치라서 헤매는 거리까지 합하면 통상 표시된 거리의 1.5~2배. 만보계로 체크해보니 하루 평균 2만 보는 걸었다. 마차를 타고 암스테르담 시내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마차가 따각따각 소리를 내며 포장된 도로를 도는데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들거나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손 흔드는 법을 연습해둘걸. 솔직히 말하면 조금은 민망했다. 재미있는 것은 트램이나 자동차, 마차 모두 같은 도로를 이용한다는 것. 앞에는 마차가 달리고, 그 뒤에서 자동차가 천천히 따라오고…. 그런데도 클랙슨 한 번 울리지 않고 기다리는 게 신기했다.
암스테르담 시내에서 주의할 것 중 하나는 커피숍과 카페의 구별이다. 카페는 우리나라에서처럼 커피를 마시는 곳이다. 그런데 커피숍 간판이 붙은 곳은 대마초를 피우는 장소란다. 어쩌다 간판만 보고 들어가면 큰코다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네덜란드의 커피숍(coffee shop)은 관용정책(gedoogbeleid)의 아편법에 따라 일정 금액의 판매 소지가 허용된 소프트 드러그(soft drug, 중독성 없는 마약)의 대마초를 포함한 제품을 판매하는 소매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마초를 공식 허용하는 정책이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호기심을 덜 갖게 하는 효과를 낳았다고 한다. 하지만 현지에서 만난 네덜란드 교민은 “암스테르담에서 이런 곳을 출입하는 사람은 주로 외국인이지, 네덜란드인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네덜란드인은 보수에 가깝다”는 말을 들려줬다. 자유로운 사람이 오든, 오면 자유로워지든, 암스테르담은 자유인을 위한 도시다.
이곳은 물가가 비싸서 호텔은 역세권 아파트형 호텔로 정했다. 슈퍼마켓에서 장을 봐 아침, 저녁을 해결했다. 한결 비용이 절약됐다. 빵에 주스, 요구르트, 견과류, 과일을 곁들여 먹으니 특급 호텔 조식 못지않았다.
건축도시 로테르담과 마르크트할, 유로마스트
암스테르담을 떠나 다음 목적지인 로테르담으로 향했다. 산더미만 한 캐리어백을 낑낑대고 끌며 겨우 로테르담행 기차에 올랐다. 캐리어가 커서 객석으로 끌고 들어가기도 힘들고, 기차 선반에 올리자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기차 연결 부분에 짐칸이 있었지만 멀리 두자니 도난이 걱정됐다. 어쩔 수 없이 짐을 지키느라 짐칸 옆에서 한 명씩 돌아가며 경비(?)를 볼 수밖에 없었다. 짐을 끌며 역에 겨우 도착했는데 호텔 찾아가기가 난망이었다. 구글맵으론 도보 5분 거리라는데 아무리 뱅뱅 돌아도 나오지 않았다. 짐은 무겁고, 길은 못 찾겠고….
이때 비로소 우리 여행은 심각한 갈등 속에 빠지기 시작됐다. 택시를 타자는 입장, 아니면 좀 더 찾아보자는 입장의 대립이었다. 역에서 최대한 가까운 호텔을 찾아 예약하느라 애를 쓴 친구는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택시기사는 호텔 이름을 듣더니 “아니 코앞인데 이곳을 택시로?” 하는 표정이었지만 우리는 너무 지쳐 있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가주세요” 했다. 그리고 호텔 고고(Go Go!!).
로테르담은 네덜란드 제2의 도시. 쭉쭉 올라간 고층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고풍스런 암스테르담과 확 달라진 분위기. 오히려 우리 눈에는 낯설지 않아 서울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공습으로 중심부는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전후의 부흥에 따라 현대도시로 재생됐다. 이곳의 명물인 큐브 하우스를 보고 마르크트할로 향했다. 큐브 하우스는 건축가 피트 블롬(1934~1999년)이 로테르담의 블락 역에서 광장을 가로지르는 보행자용 다리 위에 주택을 세운 것. 54° 기울어졌고, 바닥부터 위를 향해 육각기둥이 세워져 있다. 노란색의 추상적인 숲 형태의 집이다. 어떤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도 잘 나오고 독특해 발상의 전환에 대해 경탄했지만 살고 싶지 않다는 데는 우리 모두의 의견이 일치했다. 내부로 들어가 보니 가파른 계단이 굽이굽이 달팽이 모양으로 설치돼 있어 오르기가 쉽지는 않아 보였다. 경험 삼아 1박 예약도 고려했었는데 캐리어 들고 이 계단 오르락내리락했을 것 생각하니 보기만 해도 진땀이 주르르 흘렀다. 암스테르담에서 묵은 아파트형 호텔도 가파른 계단이었지만 옥외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곳은 그마저도 없으니… 우리 여기서 묵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곳 유스호스텔은 늘 예약이 꽉 차 있다니 그런 걱정은 기우인 셈이다. 역시 아름다운 것은 불편한 걸까?
로테르담 일정은 주로 도보관광으로 여유롭게 잡았다. 도서관을 구경하고 에라스무스 다리 등을 걸으며 유유하게 보냈다. 마르크트할에서 시장 음식을 조금씩 사서 주전부리로 먹는 것도 쏠쏠한 재미였다. 간단하게 식사를 한 후 그다음은 네덜란드의 남산타워라 불리는 유로 마스트에서 정찬을 즐겨보기로 했다. 유로마스트는 로테르담을 한눈에 360° 전망할 수 있는, 높이 185m의 회전 전망대로 레스토랑도 운영하고 있다. 우리는 오후 7시 30분으로 디너 예약을 했다. 아줌마의 알뜰 본성을 속일 수 없어, 식사비 지출을 너무 하는 건 아닌지, 차라리 그 돈으로 마켓할에서 맛있는 음식 사먹는 게 낫지 않느냐며 난상토론을 벌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최고의 식사’였다. 네덜란드는 오후 9시는 돼야 해가 진다. 7시 30분에 예약한 덕에 해가 지기 전 경치와 일몰 풍경, 그리고 해가 진 후의 야경까지 두루 즐길 수 있었다. 안 오면 정말 후회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와인을 곁들여 먹었는데도 4명 식사 총액이 170유로(한화 23만 원)밖에 안 나왔다. 우리나라의 호텔 식사비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가격이 좋은 편이었다. 단, 서비스 속도가 느려 애피타이저에서 디저트까지 나오는 데 무려 3시간여가 걸렸다.
불덩이 같은 해가 지는 것을 보며 모네의 그림 ‘해넘이’ 풍경을 연상한 것도 잠시, 다시 도시의 야경으로 경치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360° 원형으로 바라보는 전경의 아름다움, 그곳에 온 선남선녀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앞 테이블의 노부부도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서로를 부축해주며 일어나 옷깃을 매만져주는 모습을 보며 순간 뭉클해졌다. 다른 친구들도 같은 마음을 느꼈는지 “우리, 한국에 있는 식구들에게 문자 한번 보낼까?” 한다. 그래, 여행의 가장 좋은 점은 떠남 그 자체보다 현재를 되돌아보고 감사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여행도 그렇게 무르익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