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무게, 즉 자아라는 의식의 무게는 지구의 무게보다 무겁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무게는 얼마나 될까? 결혼한 지 40년째에 접어드는 지금도 아내가 생각하는 가장의 책임과 무게는 남편이 생각하는 책임과 무게와는 많이 다른 것 같다. 가끔 가장의 권위를 존중해 달라고 하면 지금 같은 시대에 무슨 권위가 필요하냐고 되묻는다.
아내에게 농담으로 “당신과 결혼해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사글세나 전세 한 번 살게 한 적 없었소!” 하면 아내는 “고마워요” 하기는커녕 “난 결혼 전에도 사글세나 전세로 살아본 적 없어요. 늘 우리 소유 집에서 살아왔어요” 한다. 8촌 이내 친척 모임에서 누나들 소개로 아내와 맞선을 봤다. 그 뒤 아버지께서 집안을 알아보시고 좋다고 하셔서 7남매 장남 역할을 잘해보겠다는 생각으로 결혼을 했다. 필자는 결혼 전에 이미 방 두 개짜리 13평 아파트를, 당시 현금 20만원과 19년 분할상환 융자조건으로 확보하고 있었다.
아내가 첫딸을 출산했을 때는 겨울이었다. 울산에서 해 뜨기 전에 집을 나서 쇠를 다뤄 화물선 만드는 조선회사에 8시까지 출근했고, 퇴근은 해가 진 후 한참 지나서 했다. 매일 매일이 피곤했다. 그날 저녁에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는데 한밤중에 딸아이가 계속 울어댔다. 좀처럼 떠지지 않는 눈을 비벼대며 자는 아내를 흔들어 깨워 “여보, 아이가 계속 울어대니 좀 달래시오” 했다. 그러나 여전히 딸아이가 울어대는 통에 할 수 없이 일어나 앉았다. 일어나 보니 아내는 일어나 아이를 달래기는커녕 돌아누워 쿨쿨 자고 있었다. 순간 무시당했다는 감정이 일어나면서 화가 솟구쳤다. 피곤한 가장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아내가 미워 상당히 아프게 얼굴을 때려버렸다. 그러자 아내는 벌떡 일어나 자는 사람에게 왜 그러느냐고 대들었고 밤새 언쟁을 했다. 그 후 아내는 필요할 때마다 그날의 일로 두고두고 공격을 해오곤 했다. 산후 몇 달간 쏟아지는 잠을 야속하게도 몰라줬다는 것이었다.
첫째에 이어 둘째, 셋째가 태어날 때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자녀들에게 여러 보험을 들어줬다. 또 7남매의 장남이다 보니 동생들 학비에 결혼식 등 돈 쓸 일이 끊이지 않아 목표한 저축과 목돈 모으기가 어려워 아내가 힘들어했다. 어느 날인가 여동생 결혼식을 마치고 피곤한 상태에서 집으로 가다가 가전제품을 파는 상점에 들어가 세탁기를 즉흥적으로 샀다. ‘이렇게 열심히 힘들게 직장생활을 하면서 과연 남는 게 뭔가?’ 하는 생각과 함께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뭔가 보상을 해주고 싶었다. 그때까지 아내는 손빨래를 했던 것이다. 갑자기 배달된 세탁기에 아내는 눈을 크게 뜨고 “갑자기 무슨 세탁기예요?” 하며 놀랬다.
결혼 10년째가 되니 아이들 나이가 10세, 8세, 5세가 됐다. 당시 회사가 특별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책상을 치우고 교육을 시켰다. 150여 명이 제자리에 못 돌아올 위기에 처했을 때 필자는 그야말로 시베리아 벌판에 홀로 서 있는 듯한 고독과 아픔을 느꼈다. 마치 홀로 지구를 짊어지고 있는 사람처럼 가장으로서 무거운 마음뿐이었다. 나라는 존재 가치와 능력에 대해 자괴감이 몰려왔고 아내에게는 표현할 수 없는 외로움이 필자를 오랫동안 포박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가장으로서의 책임은 더 강해졌다.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아내와 하고 싶은 것들을 과감하게 실천하기 시작했다. 결혼 25주년 때 하와이를 가자고 하자 아내가 킬리만자로를 등정하고 싶다고 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5000미터 높이 이상의 눈 덮인 킬리만자로 산 정상까지 가고 싶다고 해서 3주간 아프리카 사파리 여행 겸 떠났다. 그리고 아마추어로서는 가장 높은 곳에 오를 수 있다는 킬리만자로 산의 두 봉우리(해발 5685미터 길만스포인트와 5895미터 우후르피크)도 등반했다.
지금은 정년퇴직한 지 9년째다. 6시 반에 출근해서 아침식사를 하고 조찬회의를 하던 생활을 10년도 더 넘게 해서 그런지 지금까지도 느긋하게 늦잠을 자거나 아침 일찍 일어나도 다시 누워 휴대용 라디오를 들으면서 유유자적하는 게 좋다. 가능하면 하고 싶은 일들을 다양하게 즐기려고 한다.
아내와는 가끔 언쟁도 하는데, 아내는 필자가 권위적이라며 불평을 하고 필자는 가장의 권위를 좀 존중해 달라고 한다. 아내와 감정 대립을 할 때면 필자는 침묵 상태로 들어간다. 일상생활은 하면서 상당 기간 아내와 말을 삼가는 것이다. 필자 의견을 주장하고 설득시키려 하거나 이기려 하면 감정의 회오리와 더 큰 혼란에 빠지는 것을 반복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른바 묵언수행 또는 침묵피정 같은 행위를 자처하는 것이다. 그러다 며칠이 지나면 침묵으로 부족하니 스킨십이 많아지고 급기야 터져 나오는 웃음을 서로 참지 못한다. “내 스킨십에 눈물 좀 찔끔 흘려줘야 하는 거 아냐?” 하면 아내는 “아직도 너무 권위적이십니다요!” 한다.
연필화를 수년간 그려온 아내는 최근 수채화를 배운다. 어느 날은 아내가 표본 책을 가지고 오더니 “선생님에게 큰 스케치북에 표본 그림을 모두 그려보겠다고 했어요” 한다. 필자는 “잘했소! 하다가 못하면 가장인 내가 다 해줄게요” 했다. 그러자 아내는 “어휴! 또 도졌네요, 그 병이!” 한다.
시니어타운 하면 우리가 흔히 갖는 선입견이 있다. 바로 ‘돈이 많이 든다’, ‘나이든 사람들만 있어서 지루하다’는 것이다. 1947년생 윤규성 전 조흥은행 상무와 그의 아내인 1950년생 장진 도자기 작가는 삼성노블카운티에 입주해 살고 있다. 시니어타운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을 갖고 있던 이들 부부가 시니어타운으로 들어가 살면서 느낀 감정은 ‘매우 만족한다’였다. 무엇이 이들의 생각을 바꾸게 한 걸까?
금융계에 청춘을 바쳤던 윤규성 전 조흥은행 상무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시니어타운에 대해 무조건 긍정적인 생각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 그가 시니어타운으로 이사하기로 결정하게 된 궁극적 이유는 무엇일까?
“집사람 친구가 먼저 와서 좋다, 한번 와보라고 추천했어요. 움직이기 전에 정서적인 면, 생활 반경, 재정상태 확인 등을 했죠. 아내가 좋다는데 못할 게 무어냐 싶어 결정하게 됐어요. 그런 후에 직접 와보니 생각을 바꾸게 만들더군요.”
삼성노블카운티가 가장 마음에 든 것은 자연 속에 있으면서 내부에 스포츠센터, 문화센터 등이 부족함 없이 다 갖춰져 있다는 점이었다.
“비로소 삶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거죠. 뭐든 배우고 싶은 걸 맘대로 배울 수 있고 운동도 맘대로 할 수 있고. 이런 곳이 대한민국에 또 있을까 싶어요.”
다양한 친구를 사귀기 좋은 곳
윤규성씨는 인터뷰 내내 굉장히 만족한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그의 호의적인 반응에는 시설적인 면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부분에서의 만족감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동안의 만남이 직장 친구, 학교 친구 등 폭이 좁았어요. 여기 오니 다양한 전문직에 종사해온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어요. 한 분야에서 뚜렷한 획을 그은 사람, 일가를 이뤄 성공한 분, 300억 기부자 등 자기 인생을 열심히 산 사람들이죠. 대학교수, 공직자, 변호사, 기업인 등등. 그렇다 보니 새로운 관계 속에서 대화의 폭이 넓어질 수밖에 없어요.”
봉사활동의 기회도 발견할 수 있었다.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는 꿈이 있는데 여기 오니 그런 기회가 많았어요. 파파합창단이 있는데, 외부 발렌티어가 와서 지도와 지휘를 합니다. 그리고 소년원, 노인대학 등에 위문을 가고 있죠.”
그는 시니어타운에서의 행복한 삶이란 바쁘고 화려한 삶이 아니라 사소한 자유를 맘껏 누리는 조용한 삶이라고 설명했다.
운동, 취미, 봉사를 할 수 있는 기회와 여건들
이들 부부는 서초동에서 10년, 방배동에서 30년을 살았다. 그가 오랫동안 누린 주거문화와 시니어타운의 문화는 전혀 다르다.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생활 속에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각종 기반 프로그램과 시설 그리고 기회가 있다는 점이다.
“봉사 기회도 많고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 나이를 먹을수록 운동과 취미활동이 매우 중요한데 원하는 만큼 할 수 있어요. 시설과 시간, 여건 모두가 제공되는 셈입니다.”
그는 삼성노블카운티에 입주하면서 골프를 끊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로선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골프를 다 끊고 있다고 해요. 운동한 만큼 효과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죠.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곳으로 이사 온 뒤 배드민턴을 배웠습니다. 외부 전문가들이 가르쳐주고 파트너가 돼주고 있어요.”
윤규성씨는 시니어타운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들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본인이 그러한 선입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인들이 너무 많다, 양로원이다. 그렇게들 말하죠. 그런데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그 사람들을 보며 나의 10년 후 20년 후를 준비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죠. 그래서 저는 60대 후반쯤, 좀 더 젊을 때 입주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각자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여유
아내 장진씨는 덜 늙어가도록 꼼꼼하게 관리를 받을 수 있다는 점과 오페라 강좌 등 문화생활이 가능하다는 점을 우선 생각나는 장점으로 들었다. 부부는 아침을 먹고 나면 각자의 생활에 집중한다. 특히 도자기 작가인 장씨는 곤지암 작업실로 가서 작품을 만들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이곳에서는 부부가 각자 원하는 삶을 추구할 수 있는 시간도 제공되는 것이다. 윤씨의 말이다.
“아침식사를 하고 이 사람(장진씨)이 나가면 내가 알아서 점심도 사먹고 극장도 가고 그러면서 지내요. 하루가 자유로워요. 영통역 근처에도 오가고. 이런 자유를 만끽하는 것도 즐거움이죠. 서로의 독립적인 면을 인정하며 살아야죠. 보금자리는 하나여도 각자의 생활을 누리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장씨는 자신이 하고 싶을 때 작품전을 열 생각이라고 밝혔다. 젊었을 때 열심히 살았으므로 이제는 건강을 챙기며 여유롭게 살고 싶은 게 그녀의 목표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은 함께 운동도 열심히 한다.
“아침 6시부터 8시까지는 항상 운동을 합니다. 아내는 필라테스를 해요. 점심을 먹은 후에는 문화 강좌를 듣고 저녁식사 후에는 같이 걸어요. 하루에 세 시간 정도는 기본적으로 운동을 하는 셈이죠.”
“이곳으로 부인을 데려온 남편들은 참 착한 사람들이에요”
인터뷰를 하는데 부부의 얼굴이 둘 다 굉장히 밝다. 그들이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 궁금해졌다.
“건강이죠. 그리고 행복은 현실 속에서 자기 마음으로 만들어야지, 여건으로 만들려고 하면 안 돼요. 올라가면 또 언덕이 있을 테니까.”
부부가 서로 의리를 지키며 사는 것은 쉽지 않다.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는지 물었다. 우선 장씨의 대답.
“신뢰, 믿음.”
그리고 윤씨의 대답.
“난 없어(웃음). 흘러가는 대로 살아요.”
대답처럼, 윤씨의 기질은 꾸미는 것을 싫어해 자연 그대로를 추구하며 사는 듯 보였다. 그는 아내에 대한 애틋한 마음도 털어놨다.
“아내가 젊었을 때 가족 때문에 빼앗겼던 시간을 더 늦기 전에 되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동안 아이들 챙기는 것은 물론 가족들 수발 다 들며 살았죠. 그만큼 자기완성의 길이 멀어졌어요. 이제 자손들과 헤어지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거예요.”
윤씨의 말에 장씨는 “(시니어타운에) 부인을 데려온 남편들은 참 착한 사람들이에요”라는 말로 맞장구를 쳤다.
“더 늦기 전에 빨리 오세요”
시니어타운 추천에 대해 장씨는 윤씨와 비슷한 말을 한다.
“실제로 살아보니 들어와서 사는 게 생활비가 더 절약돼요. 그래서 며느리 둘에게 육십 지나면 여기 와서 살라고 추천했죠. 그랬더니 첫째 며느리가 자기가 봐도 그렇게 보인다고 대답하더라고요.”
입주를 고민했을 때와 입주 후의 자식들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다들 좋아해요. 상의해서 오게 된 건 아닌데 걔네들은 마음이 편안해졌겠죠. 부담을 덜었으니까.”
마지막으로 보완했으면 하는 점은 없냐고 물었다. 우선 장씨의 대답.
“셔틀버스가 있는데 지금보다 운행을 좀 더 자주 하면 좋겠어요.”
윤씨는 사업적인 부분과 연결시켜 신선한 제안을 했다.
“해외 시니어타운과 체인이 이뤄지면 좋겠어요. 태국, 하와이, 일본에 가면 노블카운티와 자매 계약을 맺은 곳이 있어 갈 수 있으면 좋겠고, 그 나라에서도 올 수 있는 그런 연결망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그 나라의 문화센터를 이용하면서 새로운 지식을 익힐 수도 있겠죠.”
윤씨와 장씨는 시니어타운 입주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오래 망설이지 말라고 한다.
“더 늦기 전에 빨리 오세요. 건강할 때 와야 합니다. 건강할 때 와야 여기 있는 서비스들을 마음껏 즐기며 건강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파서 오면 그 좋은 시설들, 문화 관련 프로그램, 운동센터 등이 무용지물이에요. 이 좋은 시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면 건강해야 합니다.”
연극 연출가 김정숙(金貞淑·56)에 대해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들었다. “그녀를 존경해”, “멋있어”, “사랑해”.
‘김정숙’이란 이름이 거론되면 하나같이 천사를 만난 경험담(?)을 쏟아내곤 했다. 한 번쯤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기회가 없었다. 새뮤얼 베케트의 연극 에서 끝까지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씨처럼. 만나보자.
예전 같으면 대한늬우스에 나올 만한 국위선양(?)도 하고 돌아왔다. 그럼 한번 소리 소문 좀 내볼까?
김정숙 연출가는 ‘극단 모시는 사람들’(이하 모들)의 대표로 28년째 장기집권(?) 중이다. 스물두 살에 극단 에저또에서 연극을 시작해 스물아홉에 극단 모들을 창단했다.
“운명이죠. 고등학교 때 연극을 보고 나서 ‘저 무대에서 평생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극단에 들어간 첫날, 연습실 바닥을 붙잡고 ‘아! 이제 도착했다. 여기서 절대로 떠나지 않겠어’라고 서원처럼 의식을 치르듯 속으로 말했죠. 제자리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 후 단 한 번의 한눈도 팔지 않고 오로지 연극만을 바라보고 살았다. 연극을 뺀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그녀는 24시간이 늘 아깝고 모자라다. 그런데도 인터뷰 날 자정 전에 책상에서 일어난 일을 제일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칭찬하며 뿌듯해한다.
“제가 몸 생각하지 않고 연극 생각만 하니까요. 어쩌다 12시가 넘어버리면 4시까지 잠을 못 자더라고요. 그런 날은 다음 날 스케줄에 무리가 있으니까 될 수 있으면 진짜 그러지 말자 해요.”
그녀의 또 다른 이름 ‘극단 모시는 사람들’
김정숙 연출가의 분신과도 같은 극단 모들은 창단 이후 대중성과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관객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연극을 굳이 몰라도 아이부터 어른까지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다. , , , 등이 모들의 대표작. 특히 은 토종 창작 뮤지컬 중 최고라는 호평을 들으며 각종 시상식을 휩쓸었다. 뮤지컬로 성공적인 삶의 반열에 오른 것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마음이 불편했다.
“브로드웨이 식의 뮤지컬을 꿈꾼 건 아니었어요. 나는 음악의 비중이 크고 내용에 영향을 주는 소리극을 하고 싶었어요. 당시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나타나서 편리하게 이용했던 것뿐이죠. 그런데 마치 우리가 브로드웨이를 지향해서 가야 할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내가 원했던 소리극의 형태가 아니어서 음악에 대한 마음이 많이 닫혔어요.”
그래서인지 최근 들어 모들의 창작 뮤지컬을 보기 어렵다. 화려함 대신 소박한 사람 이야기, 고전 속 주변 인물들에 주목하는 연극이 주류를 이룬다.
행복한 연극을 아는 예쁜 사람
모들은 지난 2003년부터 과천시민회관 상주 공연단체로 입주해 있다. 시민극장을 열어 시민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고 있고, 모들의 대표 연극인 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 프로그램 ‘신나는예술여행’에 선정돼 전국 8개 교도소를 돌며 공연하고 있다.
“저는 대학로나 대극장 공연에 연연해하지 않아요. 그보다는 시골학교나 교도소에 가서 평생 연극을 본 적 없는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 행복해요. 얼마나 기쁜지 제 마음에서 사랑의 샘이 퐁퐁퐁 솟는 거 같아요. 진짜로요(웃음). 내가 가지고 있는 레퍼토리, 내 보물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 최근 2~3년 동안 노력을 많이 했어요. 예를 들어 ‘우리 고향 초등학교에 연극 보여주기’ 이런 걸 하고 싶어 해요. 공연하는 데 300만원이 들면 출신 동창회에 도움을 청하고, 3만원씩 100명이 내주시면 고향 초등학교 어린아이들에게 공연을 보여줄 수 있다고요. 화려하게 신문에 오르내리는 그런 일 말고 진짜 일을 하고 싶어요.”
에든버러를 넘어 케냐까지 한국 연극을 알리다
지난 8월, 김정숙 연출가는 모들 단원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이하 에든버러 프린지)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세계 공연예술 축제의 백미인 에든버러축제는 공연 예술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어 하는 꿈의 무대.
축제기간이 되면 전 세계에서 7000여 단체, 3만여 명의 공연자와 관객이 몰려와 도시를 가득 메운다. 에든버러 방문은 이번이 다섯 번째. 좋은 공연이건 나쁜 공연이건 집중해서 볼 수 있는 기회라 김정숙 연출가는 에든버러 프린지를 사랑한다.
“2008년에 처음 에든버러 프린지에 이라는 작품을 가지고 갔어요. 당시 단원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연극을 해왔는데 뭐했지? 내가 명예를 얻었나, 물질을 얻었나? 나는 연극 안에서 얼마나 행복하지? 하는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세계 연극 속에서 우리를 한번 비춰보자. 놓아보자’라는 심정으로 그곳을 가게 됐어요. 처음인데도 사람들이 너무 많이 좋아해줬어요. 매진에 객석 점유율 80%를 넘었고요.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였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순식간에 입소문을 타더니 사람들이 티켓 박스 앞에 줄을 섰습니다. 그때 ‘아!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구나’ 하는 확인을 서로 하게 됐죠.”
올해 모들은 어린이극 과 그리고 위안부 이야기를 다룬 를 가지고 에든버러를 다시 찾았다. 이번 에든버러 프린지 공연은 김정숙 연출가의 치밀한(?) 계산으로 진행됐다.
“케냐에서 이 초청을 받았어요. 그래서 예술경영지원센터에 항공권을 지원받을 수 있는지 문의했더니 두 곳은 가야 받을 수 있다더군요. 그래서 에든버러 프린지와 케냐 공연을 엮은 거죠. 그런데 공연만 가지고 가는 게 아까웠어요. 케냐는 처음이지만 에든버러는 벌써 세 번째였거든요. 그래서 후배가 연출한 과 를 에든버러에서 공연해보자 했습니다. 4월까지 필요한 서류를 내야 했는데 그때 는 정말 시놉시스와 사진 한 장밖에 없었어요.”
에든버러축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만들어진 축제다. 전쟁이 끝나서 이런 페스티벌도 생겼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상처, 바로 위안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사진 한 장과 시놉시스밖에 없었지만 에든버러 프린지 극장측은 흔쾌히 모들에게 공연장 문을 열어주었다.
“이전 축제에 참가했을 때 작품으로도 인정을 받았지만 저희가 거리쇼라든지 홍보 면에서 기여를 많이 했어요. 극장에 우리가 바로 그 팀인데 를 공연할 수 있는 무대를 줄 수 있냐고 물었죠. 바로 OK 하더군요. 그 한마디로 정말 에든버러에 가게 됐어요.”
딱 시놉시스 한 장이었다. 공연에 관한 정보가 적어 일반인 대상의 홍보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의 관객이 를 찾아왔다.
“가 위안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있잖아요. 하와이와 뉴질랜드에서 이 공연을 보러 오신 분이 계시더라고요. 80 노구를 이끌고 2차 세계대전을 실제 겪으신 분들이 오신 거예요. 하와이에서 오신 분은 이곳에서 볼 첫 작품으로 를 선택했다고 했어요. 4월에 공연 예매를 미리 해놨다면서 수첩까지 꺼내 보여줬어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김정숙 연출가는 다섯 번의 에든버러 페스티벌 참가 중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인 위안부 할머니 이야기를 무대에 올린 것이 소중했다고 말한다. 모들 단원과 김정숙 연출가는 낮에는 , 저녁에는 를 무대에 올리고, 밤에는 다른 팀의 공연을 보러 열심히 뛰어다녔다.
케냐에서 기립박수 받은
에든버러에서의 한 달 일정을 마치고 케냐 나이로비로 떠났다. NGO의 천국 케냐에는 NGO 활동가와 선교사 자녀들이 다니는 70년 된 국제 학교 로슬린 아카데미(Rosslyn Academy)가 있다. 이곳에서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700여 명의 학생이 관객이었는데 이런 공연을 자주 접하는 아이들이 아니었어요. 물론 영어로 공연을 했지만 ‘어떻게 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지?’라고 느낄 정도로 완벽한 시점에 쿵, 짝을 맞추는 겁니다. 공연을 완벽하게 만들어준 최고의 관객을 케냐에서 만났어요.”
게다가 학생들의 자율적인 행동이 몹시 감동스러웠다.
“교정 한 곳에서 쿠키를 팔고 있었어요. 먼 나라에서 공연 팀이 왔는데 도움을 주고 싶다면서요. 그런 기획을 어린이들이 했다는 말이죠.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전 세계 아이들이 모여 편견 없이 대화를 할 수 있는 학교였어요. 에든버러에서는 뛰어다니고 정신없었다면 케냐에서는 큰 위로를 받고 돌아왔습니다.”
관록이 묻어나는 시니어 배우들 모시겠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김정숙 연출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공연(11.25~26 과천시민회관 소공연장)을 준비 중이고 교정시설 공연도 다녀야 한다. 과천 시민과 함께하는 연극 준비에도 여념이 없다. 시민극장에 시니어 층이 많다는 얘기에 시니어의 연극 참여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시민극장에 60대 이상의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아요. 배우 중에 저와 어렸을 때 같이 연극하던 선배가 오셨어요. 연극을 하다가 도중에 그만두신 분인데 은퇴하고 나서야 돌아오신 거죠. 오디션 때 너무 멋있었어요. 인생이라는 공부를 열심히 하셔서 이제 진짜 배우가 될 거 같아요. 시니어들은 인생을 다 겪으신 분들이라 어떤 이야기든 무대에서 제대로 표현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들이 무대로 돌아온다면 100% 환영하고 지원할 겁니다. 잘하실 수 있도록 적극 도와드릴 거예요. 내년에 무대에 올릴 작품에는 등장인물과 같은 나이의 배우들을 참여시킬 계획입니다.”
시간이 흘러 연극 일을 안 하게 되면 무엇을 할 건지 물어봤다. 돌아온 답변이 누룽지를 눌러 파는 누룽지 할머니가 되고 싶단다. 누룽지 한 컵에 1000원, 한 평짜리 가게를 얻어서 누룽지를 팔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마냥 철없고(?) 청순한 소녀 같다. 미래의 모습을 이야기하는데 마치 연극 한 편을 보는 느낌이다. 들을수록 맛있고 찰지다. 영락없는 이야기꾼. 아직은 우리 연극을 위해 할 일이 많아 보인다. 마지막으로 연극이 뭐냐고 물었다. 거침없이 사랑이라고 말했다.
“딱 하나인 거 같아요. 어쨌든 작업 안에서 마지막 선택은 항상 사랑이었어요. 일을 하다 보면 나한테 어떤 이득이 될까를 고민하잖아요. 가끔은 흔들리기도 하지만 결국은 사랑을 선택했어요. 연극을 향한 사랑. ‘세상에 어떤 것도 사랑을 이기는 것은 없다’는 사실, 제가 늘 생각하는 것입니다.”
에든버러축제(Edinburgh Festival)란?
에든버러축제는 1947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시작된 공연 축제다. 전쟁으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의 정신을 치유하려고 만들어진 이 축제는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축제(Edinburgh International Festival)와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Edinburgh fringe Festival)로 나뉜다. 인터내셔널의 경우 100여 개의 공연을 전 세계에서 엄선하기 때문에 초청되는 것 자체가 영광. 프린지는 1947년 채택되지 못한 공연 팀이 축제가 열리는 주변에서 공연한 것이 지금의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로 정착됐다. 올해 ‘극단 모시는 사람들’을 비롯해 한국의 14개 공연 팀이 참여했다. 2011년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축제에 극단 목화의 가 최초로 초청됐으며 ‘헤럴드 에인절스’ 상을 수상했다.
김정숙
극단 모시는 사람들 대표
1982년 극단 에저또 입단
1984년 연출 데뷔
1989년 5월 극단 모시는 사람들 창단
주요 수상경력
-뮤지컬
스포츠조선 뮤지컬 희곡부문 대상, 1996
서울연극제 현대소나타상, 1996
백상예술상 대상, 작품상, 희곡상. 1996
희곡작가협회 올해의 작가상 수상, 2003
-연극
희곡협회 올해의 희곡작가상, 2003
대한민국 국회대상 올해의 연극상, 2011
대한민국 클린콘텐츠 국민운동본부 선정
클린콘텐츠상, 2015
하와이 국제 영화제 대상 수상작이다. 다른 나라에서도 리메이크 결정을 할 정도로 시나리오가 탄탄하다. 신수원 감독이 만들었다. 주연에 서영희, 권소현, 김영민이 나온다.
마돈나는 원래 성모 마리아를 말한다. 그런데 팝스타 마돈나가 이름을 날리면서 마돈나를 혼동하게 만들었다. 이 영화에서 마돈나는 미나로 나오는 권소현이 가슴이 크다고 주변 학우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팝스타 마돈나의 가슴이 큰 것을 비유한 모양이다.
해림(서영희 분)은 큰 병원의 간호조무사로 VIP 병실을 맡게 된다. 이 병실에는 이 병원의 소유주인 철오가 10년째 전신마비 상태로 숨만 쉬고 있다. 아들 상우(김영민 분)는 아버지의 죽음을 막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한다. 아버지 앞으로 매달 10억 원씩 나오는 것을 가로 채고 아버지가 전 재산을 사회 환원하기로 했기 때문에 죽으면 전 재산이 날아갈 판이기 때문이다. 심장 이식 수술을 받은 적이 있으나 또 다시 다른 사람의 심장을 이식 받아야 생명을 연장 할 수 있단다. 어느 날 정체불명의 의식불명의 젊은 여자 환자가 실려 온다. 상우는 해림에게 이 여자의 가족을 만나 강기기증 동의서를 받아오라는 지시를 내린다.
해림은 젊은 환자의 지갑 속에서 ‘마돈나’라는 성매매 광고 명함을 찾아내고 추적에 나선다. 성매매 업소의 삐끼였던 것이다. 성매매업소에는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 드나든다. 그 와중에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고생도 많이 한다.
화장품 공장에서도 일했다. 어머니 병 때문에 돈이 필요해서 회사 물건을 빼돌려 팔려다가 들킨다. 그럴 때마다 남자들의 성적 대상이 된다.
콜센터에서도 일했다. 여기서도 순진한 미나는 남자들에게 계속 이용당한다. 사랑 받지 못하고 자란 탓에 남들이 조금만 잘 해줘도 넘어가는 것이다.
해림은 학교까지 찾아 가서 미나의 행적을 추적한다. 미나는 별 세계에 사는 사람처럼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왕따였다.
해림은 미나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챈다. 그리고 의식이 가끔 돌아 와 회복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알고 아이의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여러 남자에게 당했으므로 사실 아이의 아버지를 규명해 내기는 어렵다.
미나가 전신마비 상태의 철오에게 심장 이식을 해주게 되면 아이까지 죽게 될 판이다. 인도주의적 양심에 미나도 살리고 아이도 살리려고 애써 보지만 아들 상우는 냉정하게 이기심을 드러낸다.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불행했던 미나도 하늘나라로 보내고 아버지도 모르는 아이도 차라리 죽이는 게 낫다는 것이다.
해림과 의사 혁규(변요한 분)는 고심한다. 혁규가 미나가 의식이 돌아왔다고 하자 상우는 강제로 미나가 뇌사 상태임을 말하게 한다. 영화 베테랑의 재벌 아들의 만행을 보는 듯하다.
드디어 수술 날짜가 잡히고 결심의 날이 왔다. 해림은 몰래 철오의 병실에 들어가 인공호흡기를 뺀다. 철오가 죽자 수술 메스를 대려던 수술실이 혼란스러워진다. 결국 아이라도 살리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진다. 아이는 무사히 태어나고 미나는 죽는다. 한 아이를 살리려고 두 사람이 죽은 것이다.
서영희의 연기가 좋다. 서늘한 눈매가 매력이다. 스트레이트 퍼머가 잘 어울리는 여배우이다.
자신이 일군 재산도 마음대로 사회 환원 못하게 하는 자식들이 많다. 죽을 때 전신 마비 상태로 오래 사느니 존엄사를 택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나는 1952년 경남 합천군 초계면의 한 시골 마을 방앗간 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아들만 여섯인 아들 부자 집이다. 원래 어머니는 아들만 일곱을 나으셨는데 첫 째는 돌도 못 넘기고 잃었다고 한다. 그 후 집안의 귀한 첫 아들로 태어난 나는 태어난 후 사흘 동안 눈을 뜨지 않아 부모님의 애를 태웠고, 어릴 때 비행기만 떠도 놀라서 경기가 드는 아이였다고 한다.
우리형제들은 모두 호적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일 년 씩 어리게 되어있다. 돌까지 살아남으면 호적에 올려주었다. 아마 첫째를 돌전에 잃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 덕분에 나는 퇴직 시 명퇴금을 1년 치나 더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고향 마을에서 한집 사이를 두고 결혼을 하셨는데 그 중간 집에 사시는 분이 중매를 하셨다고 한다. 우리 부모님은 동네에서 잉꼬부부로 소문난 금슬이 좋으신 분이셨다. 아버님은 엄격하시고 강직한 분이셨다. 반면 어머님은 따뜻하고 정이 많으신 분이셨다. 아들들을 한없이 칭찬하고 격려하시고 보듬어 주신분이다. 우리 형제들은 우리집안의 유일한 여자 분인 어머님을 무척 좋아했다. 지금도 우리 형제들은 돌아가신 지가 15년이 지났지만 모이면 어머니 애기를 자주하고 다섯째는 대기업의 임원이지만 술 한 잔 되면 보고 싶다고 울곤 한다.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은 지극하셨다. 손자들이 많았기에 우리는 돌만 지나면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잤다. 할아버지는 손자들 이불을 덮어주시고 음식도 챙겨주셨다. 손자들에 대한 자랑과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친구 분들이 오실 때면 언제나 불러 인사를 시키셨다. 우리형제들은 그 당시 초등학교에서 형제들 모두가 급장을 다 하던 때라 자랑이 대단하셨다. 내가 나중에 취직이 되어 첫 월급을 새 돈으로 할아버지께 용돈을 드렸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그 돈을 보관하고 계셨던 분이다.
우리 할머니는 연약하신 분이지만 우리 형제들은 모두 할머니 등에 업혀 자랐다. 낳아주신 분은 어머니이고 키워주신 분은 할머니이다. 할머니 등은 손자들의 코 때가 지워지는 날이 없었다. 서울에서 방학 때 내려가면 맨발로 뛰어 나오시던 분이다. 나는 첫 손자로서 조부모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고 자랐다.
우리 집의 가훈은 우애(友愛)이다. 할아버지는 손자들에게 어릴 때 귀가 닿도록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셨다. ‘조선팔도 다 다녀도 형제같이 화합할까’ 할아버지께서 항상 우리에게 하시던 말씀이다. 우리 형제들은 이 말씀을 어머님 돌아가신 15주기 때 고향 우리 집 정원에 비석으로 새겼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모범생 이었다. 한 학년에 두 반인 작은 시골 학교였지만 나는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6년간 급장을 했고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부모님도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소먹이기, 풀베기, 나무하기 등 집안일도 잘 도와드렸고 어머니가 가지 오이 등을 장에 갖다 팔아야 할 때는 리어카에 실어다 드리는 착한 아들이었다.
나는 1968년 무장공비 김신조가 청와대 담을 넘어 공격하던 해 서울 경기상업고등학교로 유학을 왔다. 경기상고는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하지만 우수한 아이들이 많았다. 청운중학교와 같은 교정이어서 청운 중학교 출신도 많았다. 고향 초계중학교에서는 서울로 두 명이 유학을 왔는데, 친구는 배제고등학교를 가고 난 경기상고에 입학했다. 친구는 고모 집에서 다니고 나는 삼촌 집에서 다녔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나는 은행원이 되었고 친구는 고대의대를 나와 강릉의 유명한 외과의사가 되었다.
경기상고는 일제 강점기에는 경기도립상업고등학교로 도상이라 불렸던 학교로 일제 때부터 훌륭한 선배들이 많았다. 당시 정·재계에는 태완선 총리, 김종희 한국화약 회장님 등을 비롯한 분들이 포진해계셨고 특히 금융권에는 임원들이 많았다.
내가 경기상고를 선택한 것도 유연이다. 아버지와 서울에 올라와 어떤 학교를 가야할지 고심할 때 삼촌 이웃에 양정고등학교 선생님으로 퇴직한 분이 계셨는데, 이분이 도상을 추천해주셨다. 아버님은 대구상고를 나와 제일은행에 취직한 고향의 내 친구 형으로부터 ‘은행에 취직을 하니 당장 선생님의 월급보다 많더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아들을 은행에 취직시키고 싶어 하셨다. 양정고 퇴직 선생님은 상고 중에는 도상이 최고라며 당장 도상을 추천해 연희동에서 청운동까지 버스를 갈아타면서 먼 길을 삼년을 다녔다.
상고에서 은행에 취직하는 것은 인문계학교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과 같았다. 매년 어느 은행에 몇 명이 합격했는지 통계를 내고 홍보하던 때였다. 우리학교는 한 학년이 7개 반으로 6개 반이 취직반이고 마지막 7반이 진학 반이었다. 취업반은 은행 취직을 위한 전략을 세워 공부했다.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은 한국은행, 산업은행, 외환은행 순으로 가고 다음 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은행 등을 갔다. 나는 신설된 한국신탁은행을 지원 했다. 신설된 은행이 향후 전망이 나을 거라고 선생님이 추천해 주셨다. 그해 경쟁률이 높아 우리학교에서는 나를 포함해 두 명 만이 합격했다. 대졸 중견 30명, 상고 졸 초급 60명을 모집했는데, 대졸 중견은 서울 대 출신이 반이 넘고, 나머지는 연대, 고대 등 대부분 명문대 출신이 전부였다. 71년 당시는 지금처럼 삼성, 현대, 엘지 같은 대기업이 성장하기 이전 이어서 공무원, 한전, 은행 등으로 인재들이 몰리던 시기였다.
그 당시 은행의 대우는 좋았다. 복지제도가 좋고 각종 수당이 수시로 나왔다. 그러나 입행을 하고나니 아무래도 대학을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야간 학부에 시험을 봐 합격했다. 그러나 말단 직원이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는 것이 어려워 포기하고 다시 이듬해 야간 전문대학인 서대문에 위치한 국제대학을 지원 해 입학했다. 이 학교는 야간만 있는 대학으로 저녁 6시에 수업을 시작해 그 당시 인기가 있었다. 나는 경영학과에 입학했는데 정원이 30명으로 우수한 인재가 많았다. 한국은행, 산업은행 등 상고출신이 많았다. 적은 인원의 대학이지만 그 당시 매년 사법, 행정고시, 공인 회계사 등의 합격자들을 배출했던 시기이다. 내 친구도 산업은행에 다니면서 공인회계사 전국 수석 합격했다.
그때는 그야 말로 주경야독을 했던 시기이다. 은행의 업무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동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만 했다. 상사들의 눈치도 봐야 했다. 저녁은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라면으로 때우기가 일수였다. 4년을 그렇게 생활하니 위장병이 생길 것 같았다. 토요일도 근무하던 때라 일요일은 도서관에서 공부해야했다. 그래서 나의 이 시기는 다른 애들처럼 취미생활을 하거나 연애를 할 틈이 없었다.
그 당시 나에게는 큰 짐이 있었다. 둘째 동생이 서울로 올라와 중대 앞에서 자취를 하면서 같이 공부했다. 얼마 후에는 막내를 제외한 세 명의 동생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와 동생들과 힘든 시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학비와 쌀을 올려 보내주시지만 아들들이 공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기에 나는 힘을 보텔 수밖에 없었다. 나는 75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12월에 군에 입대를 했다. 나 혼자 만의 일이라면 대학 2학년 정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오는 것이 좋겠지만 동생들을 남겨놓고 입대할 수가 없어 4학년을 마치고 친구들이 다 제대를 할 즈음 입대를 해야만 했다. 내가 입대를 해도 은행은 본봉의 월급이 나오는 때라 그 돈으로 동생들은 학교를 다녔다. 지금도 이야기 한다. 동생들이 형의 월급을 받으려 은행에 갔던 시절을…
둘째 동생은 중앙대 법대에 나왔다. 졸업 후 삼성생명에 입사해 항상 전국에서 일등의 업적을 내는 유능한 직원이 되었다. 신한생명 초기에 스카우트되어 신한그룹 최연소 임원이 되어 부사장 까지 승진해 8년이나 임원생활을 하고 지금도 퇴직해서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 때 동양중학교 학생으로 다니던 다섯째 동생은 한양대 경영학과를 나와 지금은 롯데 칠성의 임원으로 재직 중이다. 필리핀 펩시콜라 사장을 5년 동안 역임했고 우리 동생 중 아직도 떠오르는 별이다. 나머지 두 동생도 대구에서 사업을 잘하고 있다. 힘든 시기를 넘겨 좋은 결과가 있어 보람은 있는 일이었다.
79년 제대를 앞두고 아버지의 권유로 첫선을 보았다. 휴가 중 서울의 작은 다방에서 맞선을 보았는데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결혼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평생의 배필을 선택 했는지 신기하다. 서로의 가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부모님께서 미리 선을 봐 합격점을 준 상태라 하지만 개인적으로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내는 면장님의 둘째 딸이라 자라면서 큰 힘든 일은 해본 적 없이 곱게 자란 규수였다. 그 당시 나는 장남으로서 결혼 후에도 동생들을 데리고 있어야 할 형편이어서 아내를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대학에서 나를 따르는 여자도 있었고, 은행에서 자취집에까지 찾아온 여자도 있었지만 결혼을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다.
79년 6월 제대를 하고 11월에 결혼을 했다. 아버지는 내가 장남이라 전통혼례식을 올리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신부 집에서 아내는 족두리를 쓰고, 난 사모관대를 쓰고 혼례를 올렸다. 동네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멍석을 펴놓고 상위에는 살아있는 닭이 퍼덕 거렸다. 첫날밤은 신부 집에서 보내기로 하는데, 그 날 밤 신랑을 짓궂게 장난을 거는 사람 들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어 나와 아내는 저녁에 해인사로 피신하는 신혼여행을 떠났다. 밤중에 택시를 타고 해인사로 향하던 신혼 여행길에 노루가 튀어 나와 놀라던 추억이 새롭다.
내가 아내를 단한번의 선을 보고 선택한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내 일생의 가장 잘 한 선택이었다. 아내는 검소하고 강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지금 형제들이 성공하여 화목하게 잘 지내는 것은 대부분 아내의 공로인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후회스런 일을 꼽으라면 신혼초기 아내가 힘들 때 너무 도와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동생들 뒷바라지에 아이들 키우기 힘들 때 연탄불 한번 갈아준 적이 없고, 아이들 한번 제대로 봐준 적이 없다. 아내는 밤중에 아이가 깨어 울면 남편 잠 못 자 직장생활에 지장을 줄 까봐 아이를 다른 방으로 대려나가 밤새 혼자 방을 새우곤 했다. 아내는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고 오직 나를 위해 정성을 쏟은 그런 여자였다. 그 당시에는 왜 그리 철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은행에 입행해 퇴직을 하기까지 만 38년을 다녔다. 지나고 보니 나는 직장 운은 좋았고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은행이란 직장은 안정되고 복지가 훌륭하고 좋은 직장이었다. 아이들 대학까지 등록금을 주고 집을 마련하도록 사원주택 아파트를 주고, 월급날 하루도 늦은 적이 없고 지점장 시절 억대가 넘는 연봉에 퇴직금도 적지 않은 직장이다. 재직 시에도 지점장 명함이면 누구나 신뢰하고 인정을 해주는 곳이다.
나는 초년 시절부터 성실했고 열심히 노력했다. 언제나 상사의 인정을 받았고 지점에서 언제나 대부계 같은 요직을 담당했다. 자기계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주경야독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88년에는 해외 OJT연수를 미국 시애틀 은행으로 다녀왔다. 그 후 은행의 중요 부서인 종합기획부에 과장으로 근무하고, 카드 사업부, 개인금융부 등에서 차장으로 근무했다. 1998년 지점장으로 나갈 때 까지 황금기의 시절을 보냈다.
카드사업부에 근무할 때는 해외여행의 기회가 많았다. 일본 JCB카드사, 미국 비자사, 마스터 카드사, 유럽 유로페이 등 카드사를 매년 연수를 다니면서 여행할 수 있었다. 특히 시애틀 연수 후 미주, 유럽, 하와이, 동남아, 핀란드, 스페인, 지중해 해협 등 유럽 전역을 장기간 여행한 경험은 좋은 기회였다.
은행 승진도 남보다 늦지 않게 진급했다. 지점장 진급은 아이러니컬하게도 IMF 덕분에 빨랐다. 선배들이 명퇴를 하고 서울은행, 제일은 행이 매스컴에서 회자될 때 오히려 해택을 보았던 셈이다. 하나은행과의 합병 시에도 많은 직원이 퇴직을 했지만 그때도 살아남아 십년이 넘도록 지점장 생활을 하고 임금피크제 까지 일 년을 하고 퇴직할 수 있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은행원의 천수를 다한 셈이다.
지점장 생활은 10년 동안 시흥남, 관양동, 수원, 서빙고, 부천, 성남 등 6개 점포를 거쳤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점포는 처음으로 부임한 석수역 앞에 위치한 시흥남지점 이다. 첫 지점장 발령을 받고 휴일 혼자 점포를 찾아가 어떤 전략을 구사할 것인가 많이 고심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내는 많은 걱정을 했다. 사교성도 없는 고지식한 사람이 점포영업을 잘 할 수 있을 까 걱정을 많이 해, 지점장으로 승진을 했는데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은 듯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지점 실적이 부진하여 평가에 하위 성적을 받으면 명퇴의 우선대상자가 되어 퇴사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예상외로 난 지점장으로서의 점포경영을 십년이상 훌륭히 잘 수행했다. 내가 부임한 점포는 전임 점포장이 실적 부진으로 불명예 퇴진한 곳이 많았지만 나는 훌륭히 점포를 잘 부활시켰다. 나는 점포 경영의 핵심은 직원들의 관리와 경영 전략에 있다고 믿는다. 점포장의 철학과 의사결정이 중요하다. 그 핵심은 사람의 관리에 있다고 확신한다.
2009년 1월 은행을 퇴직했다. 재직 시에 시간이 없어 못했던 골프를 학교친구들이나 동생들과 같이할 수 있어 좋았다. 5월에는 홀인원을 하는 행운도 누렸다.
양재천과 대공원을 몇 년을 걸으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퇴직 1년 전에 과천어울림 남성합창단에 입단했다. 매주 화요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연습해서 매년 연말에 시민회관에서 정기공연을 한다. 벌써 정기 공연을 일곱 번을 넘겼다. 7년이 지난 셈이다. 단원이 30명이 넘어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친구를 많이 알게 되었다. 플루트는 퇴직 후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아들결혼식 때 연주하고 퇴직직원 모임 등에서도 연주했다. 지금은 동호회를 만들어 매주 목요일 부림동 문회센터에서 연습하고 레슨도 받는다.
퇴직 후 5년을 쉬고 나니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2014년 새로운 준비를 해보기로 결심을 했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유통관리사를 3개월 동안 과천도서관에 다니면서 공부해 합격을 했다. 그리고 경영지도사 공부를 시작해 지난해 1차 시험에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준비 중이다. 그리고 이듬해 3월 호서대글로벌창업대학원에 입학해 이제 졸업을 위해 논문 준비 중이다
2014년에는 건국대학교 미래지식교육원에서 시니어플래너 과정을 공부하고 같이 공부한 동료들 5명이 KSP교육협동조합을 만들고 나는 이사장직을 맡았다.
다음해는 도심권이모작센터의 열린강사에 선정되어 평생 처음 강사로서 강의를 3차례 해보았다.
2015년에는 KDB 시니어브리지 아카데미 과정을 공부하고 시니어블로거협회에 참여하게 되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머니투데이 방송에 시니어 악기배우기라는 주제로 방송에도 출연했다. KBS 시니어토크쇼 ‘황금연못’의 패널로도 출연하고 한겨레신문 시니어통신에 기고도 했다. 2016년 3월에는 공무원연금공단 미래설계교육 여가 주거부문 강사로 선정되었다. 매달 2회 제주, 설악산, 수안보, 천안 등에서 퇴직을 앞둔 공무원들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대학원 동문들과는 석사 박사과정을 마친 24명의 동문들이 참여해 컨설팅프렌즈라는 컨설팅회사를 창업했다. 졸업을 하면 이 멤버들과 할 일이 많아질 것 같다.
퇴직 후 만 7년의 세월이 지났다.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의 속도는 더 빨라지는 것 같다. 내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조금은 알 것 같고, 인생이란 직접 경험해보아야만 알게 되는 것이 많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지금부터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가치 있는 일들을 하고 싶다. 아내와 내가 건강하고 아들과 딸은 독립하여 제 몫을 잘하고 있다. 손녀의 재롱이 귀엽고 한 때 어려웠던 시절을 보냈던 동생들과 할아버지의 가훈처럼 화목하게 지낸다. 이러한 가족 간의 사랑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주변의 사람들도 돌아보고 작은 재능이지만 나누는 삶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 믿는다.
그토록 바라던 조국이 해방된 지도 70여년이 지났다. 단기간에 눈부신 성장을 이룬 조국의 모습을 보니 자랑스럽고 감격스럽다. 특히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에 세워진 내 동상을 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1910년 나라를 잃고 일본의 무자비한 지배가 시작되었다. 조그마한 힘이나마 독립운동에 보태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상해로 떠났다.
내 나이 33세이던 1922년 1월 22일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해 의열단의 일원으로 조선으로 들어왔다. 총독 사이토 암살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밀고로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었다. 작전을 변경해 1월 12일 독립투사들의 원망의 대상인 종로경찰서를 폭파하고 도피하였다. 기습작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일본경찰은 대규모 인원을 투입하여 범인을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다음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눈이 덮힌 남산을 맨발로 달리고 절에도 숨고, 변장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일경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행되는 인해전술에는 한계에 부딪혀 효제동 은신처가 드러났다.
400명의 일경에 포위되어 총격전이 벌어졌다. 항복하느니 죽기까지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온 힘을 다하고 그동안 연마한 쌍권총 솜씨를 최대로 활용하여 3시간 동안 버티었다. 어느덧 10발의 총상을 입었고 총탄은 1발만 남았다. 곧 일경이 들어 닥치면 체포될 것이 분명했다. 이제는 결정해야 한다. 사로잡혀 온갖 수모를 당하느니 한 목숨 아낌없이 바치기로 했다.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1발을 나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순간 가족과 동료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내 사랑 조국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쳤으니 여한은 없다. 다만 독립을 보지 못하고 가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하루바삐 조국이 독립되는 것을 두 손 모아 기원하는 마음뿐이다.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 포기한 개인적인 꿈을 독립국가에서 펼쳐 보고 싶다.
이는 김상옥 열사의 의거를 재구성해 본 장면이다. 김열사는 영화 ‘암살’에 나오는 쌍권총의 전설 하와이 피스톨의 모델이라고 알려져 있다. 열사는 중과부적의 상태에서 쌍권총으로 신출귀몰한 전투솜씨를 발휘하여 3시간이나 대처하여 일경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마로니에 공원에 갈 때마다 열사의 동상을 찾아가 행적을 읽는다. 읽고 나면 복합적인 감정에 사로잡힌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과감히 던진 그 불같은 행적에 감동이 된다. 과연 나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일본의 지배로 치른 대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단지 나라 잃은 이유 때문에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목숨을 잃고 피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순국선열의 숭고한 희생을 바탕으로 독립을 쟁취하였다. 힘이 없는 민족은 반드시 값비싼 대가를 치른다는 명백한 역사의 교훈을 귀중히 되새기며 올해 광복절을 맞이한다.
“이제 배우로서의 삶과 더불어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를 만났습니다. 예쁘게 잘 살겠습니다.” 스타 배우 김하늘(38)이 3월 19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한 살 연하의 사업가와 백년가약을 맺으면서 한 말이다. “평생 존중하며 사랑하고 ‘나’를 위한 인생이 아닌 ‘우리’를 위한 인생을 위해 살겠습니다.” 가수 가희(36)도 3월 26일 세 살 연상의 사업가 양준무씨와 미국 하와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처럼 올해 들어 여자 스타들이 속속 결혼하고 있다. 탤런트 김유미(37)는 두 살 연하 배우 정우와 1월 16일 서울의 한 교회에서 결혼했다. 걸그룹 핑클 출신 연기자 이진(36)은 2월 20일 미국 하와이에서 금융업에 종사하는 여섯 살 연상의 미국 교포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탤런트 황정음(31)은 2월 26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세 살 연상 프로골퍼 출신의 사업가 이영돈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또한, 스타 연기자 김정은(40)은 4월 29일 금융업에 종사하는 동갑내기 재미교포와 결혼했다. 걸그룹 쥬얼리 출신 연기자 박정아(35)는 5월 15일 두 살 연하의 프로골퍼 전상우와 부부의 연을 맺을 계획이다.
연예인의 일거수일투족은 대중의 시선을 모은다. 그중에서도 여자 스타의 웨딩드레스, 결혼사진, 신혼여행지, 결혼식 장소와 형태 등 결혼과 관련된 많은 것들이 높은 관심을 끈다. 오죽했으면 ‘여자 스타 결혼식은 스타 마케팅의 종합전시장’이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여자 연예인의 배우자는 대중의 관심을 넘어 사회적인 화제가 된다. 한류가 거세지면서 우리 스타의 결혼은 외국 언론의 주요한 기사 아이템이 됐다. 대중의 관심을 받는 여자 연예인의 결혼식은 일반인의 소비와 라이프 트렌드를 이끌고 배우자관에 큰 영향을 준다.
그렇다면 그동안 여자 스타의 배우자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연예인 역시 일반인처럼 결혼 배우자가 매우 다양하지만, 연예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위상의 변화와 함께 여자 연예인의 결혼 상대자도 크게 달라졌다.
대중문화 초창기였던 1900~1950년대에는 유교적 인식이 엄존해 연예인들의 사회적 위상이 낮았고 연예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많았다. 1900~1950년대 대중문화 초창기에는 여자 연예인과 일반인 결혼이 많았다. 또한, 백설희-황해, 전옥-강홍식, 황금심-고복수 커플처럼 상당히 많은 여자 연예인들이 동료 남자 연예인과 결혼했다.
연예인에 대한 사회적 위상은 높아졌지만, 여전히 부정적 인식이 존재하고 TV 등 매스미디어가 본격 등장한 1960~1970년대에는 여자 스타의 배우자는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스타들의 우상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이 시기에는 여자 연예인의 결혼 상대는 매우 다양해졌다. 특히, 이 시기 눈길을 끈 것은 여자 스타와 재벌 혹은 중견기업 오너와의 결혼이었다.
영화배우 문희는 1971년 당시 한국일보 부사장이었던 故 장강재 한국일보 회장과 결혼했고 영화배우 안인숙은 1975년 미도파백화점 사장이었던 대농그룹 박영일 전 회장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또한, 펄시스터즈의 배인순은 1976년 최원석 동아그룹 전 회장과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중앙산업 조규영 회장과 결혼한 스타 정윤희를 비롯해 황신혜, 고현정, 김희애, 김성령, 이요원, 최정윤, 박주미 등 여자 스타들이 재벌 혹은 중견기업 대표와 결혼했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과 결혼했다 이혼한 고현정은 “결혼 당시 많은 사람이 재벌과의 만남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우연히 만나 사귀게 됐고 사랑해 결혼했다. 내가 사랑한 사람이 재벌이었을 뿐이다”고 말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일부 여자 연예인들이 재미교포 등 외국 교포와 결혼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물론 엄앵란-신성일, 윤복희-남진, 김지미-나훈아 커플처럼 동료 연예인끼리의 결혼 역시 성행했다.
대중문화 시장이 급성장하고 대학생이나 대학 졸업자의 연예계 진출이 두드러진 1980년대에는 연예인의 위상이 크게 올라갔다. 이 시기 관심을 끈 여자 연예인의 배우자는 연예인의 특성을 이해하고 결혼 후에도 연예활동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방송사 PD, 영화감독 등 대중문화 분야 종사자였다. 원미경은 1987년 MBC 이창순 PD와, 양미경은 1988년 KBS 허성룡 PD와 결혼했다. 임예진 역시 드라마PD 최창욱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근래 들어서도 박성미-강제규 영화감독, 문소리-장준환 영화감독, 김민-이지호 영화감독처럼 여자 연기자와 영화감독의 결혼이 이어졌다.
원미경은 “결혼 후에도 연기를 계속하고 싶었어요. 연예계가 일반 직장과 성격이 크게 달라 배우자는 연예분야를 알았으면 했어요. (남편이) 드라마 PD라 연애할 때도 결혼 후에도 저를 많이 이해해주고 격려해줘요”라고 말했다.
대중매체가 급증하고 연예산업이 산업적 기틀을 갖추어 스타가 엄청난 이윤을 창출하는 주체로 떠오른 1990년대부터는 연예인을 발굴하고 육성, 관리하는 연예 기획사가 스타 시스템의 핵심 역할을 하게 됐다. 이에 따라 연예 기획사 대표와 연예인의 결혼이 흔치 않은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1998년 가수 양수경과 예당컴퍼니 변두섭 회장과의 결혼을 시작으로 배우 신은경-김정수 커플처럼 1990년대부터는 연예기획사 대표, 연예인 매니저와 결혼하는 여자 연예인들이 많아졌다.
또한, 1980년대 최미나-허정무, 최란-이충희 커플처럼 스포츠 스타와 결혼하는 여자 연예인이 등장하기 시작해 1990년대부터는 스포츠 스타와 결혼하는 여자 연예인이 급증했다. 톱스타 최진실이 프로야구 선수 조성민과 결혼한 것을 비롯해 이혜원-안정환, 김성은-정조국, 슈-임효성, 한혜진-기성용, 유하나-이용규 등이 여자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 커플의 대표적인 사례다.
1990년대에는 여자 스타의 배우자 중 가장 많은 것이 연예인이다. 하희라는 1993년 최수종과 결혼했고, 신애라는 1995년 연기자 차인표를 배우자로 맞았다. 이후 유호정-이재룡, 채시라-김태욱, 고소영-장동건, 유진-기태영, 이효리-이상순, 원빈-이나영 커플처럼 수많은 여자 스타들이 동료 연예인과 결혼했다.
신애라는 “같은 드라마 에 출연하면서 자연스럽게 교제를 시작했다. 대중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고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은 연예계에서는 작품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동료 연예인과 사귀고 결혼한다”고 말했다.
1990년대 시선을 모은 스타 결혼식 중 하나가 최명길의 경우이다. 1995년 정치인 김한길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이후 흔치 않지만, 여자 연예인과 정치인의 결혼이 간간이 이어졌다. 심은하-지상욱, 황혜영-김경록 커플이 여자 연예인과 정치인의 만남으로 관심이 쏠렸다.
연예인이 청소년들의 직업 1순위로 부상하고 대중문화 산업이 만개한 2000년대 들어서는 여자 스타들의 배우자는 전문직 종사자에서부터 사업가, 스포츠 스타, 동료 연예인, 일반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해졌다
염정아-정형외과 의사 허일, 한지혜-서울지검 검사 정혁준, 전도연-사업가 강시규, 이영애-사업가 정호영, 소유진-요식업 사업가 백종원, 차수연-연예기획사 판타지오 대표 나병준, 전지현-금융업 종사자 최준혁, 한혜진-프로축구선수 기성용, 김지우-셰프 레이먼 킴 커플에서 보듯 최근 들어서는 여자 연예인의 결혼 배우자의 스펙트럼은 사업가에서부터 전문직 종사자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어졌다.
2000년대 들어 한류가 거세지면서 외국 스타와 결혼하는 여자 스타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중국에 진출해 등 중국 드라마에 출연한 채림은 2014년 중국 배우 가오쯔치(高梓淇)와 결혼해 눈길을 끌었다. 중국에서 드라마 회당 출연료로 1억원을 받는 스타로 부상한 추자현도 최근 올해 중국 배우 위쇼우광과 결혼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추자현은 예비신랑 위쇼우광(于曉光)에 대해 “힘들고 지칠 때 힘이 되어주고 연기자로서 발전을 도와주는 동료이자 연인이다. 중국인이라는 점이 결혼을 결정할 때 장애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처럼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여자 스타들의 결혼 배우자는 시대 상황과 연예인에 대한 인식과 위상 변화에 따라 달라졌다. 또한, 과거에는 여자 스타들이 결혼과 함께 활동을 중단하거나 인기가 하락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최근 들어서는 대부분의 여자 스타들이 결혼 이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제 결혼은 여배우의 인기의 무덤이 아니라 인기 상승 기폭제 역할까지 하고 있다.
바야흐로 봄! 강추위를 이겨낸 당신, 어디든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고 싶다면 온라인 숙박 예약 사이트 에어비앤비가 발표한 ‘2016년 새롭게 떠오르는 여행지 16곳’을 주목하라. 이 조사에 따르면 요즘 여행객들은 현지 주민과 체험할 수 있는 지역에 대한 관심이 높다. 문화예술 활동을 즐길 수 있는 곳, 현지음식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맛집 지역, 특별한 야외 활동이 가능한 곳 말이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2016 새롭게 떠오르는 여행지 16곳’ 가운데 시니어 독자들이 가볼 만한 여행지 Top 4를 정리했다.
자료 제공 에어비앤비(www.airbnb.co.kr)
인정 넘치는 동네, 그리스 아테네 코우카키
‘신들의 도시’ 아테네의 매력적인 동네 코우카키는 최근 ‘차 없는 거리’로 단장하면서 걷기 좋은 곳으로 유명해졌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코우카키에는 작은 노천카페와 빵집, 레스토랑이 모여 있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사람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에어비앤비 집주인 카트리나의 숙소가 바로 이곳에 있다. 작은 뜰이 딸린 집의 주인 카트리나는 건축가이자 도시 설계사로 그리스 고대 건축 양식과 아테네에 대한 숨은 이야기, 각종 정보 등을 여행자들에게 알려준다. 매주 금요일 숙소 근처에서 열리는 시장도 흥밋거리다. 현지의 신선한 과일과 야채는 물론 서민들의 인정까지 느낄 수 있다. 파르테논신전,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이 있는 고대 유적지 아크로폴리스가 도보 10분 거리에 있어 아테네 대표 관광지를 둘러보기에도 좋다.
“숙소에 도착해 보니 식탁에는 쿠키와 과일이 놓여 있었고, 냉장고에는 빵, 우유, 계란, 치즈, 잼과 주스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예상치 못한 좋은 기분이었다.” - 리안, 프랑스
스페인 예술의 발생지, 스페인 세비야 트리아나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고혹적인 도시 세비야. 우리에게는 오페라 로 알려진 곳이다. 세비야 안에서도 특히 매력적이고 정열적인 동네가 바로 트리아나다. 이곳은 스페인 ‘예술의 꽃’ 플라멩코의 탄생지이자 투우의 본고장이다. 또한, 세비야의 과달키비르 강 진흙으로 빚어 만드는 타일 ‘아술레호’ 도공들이 모여 사는 곳이어서 아술레호 타일양식 건축물을 감상할 수 있다.
트리아나 동네에 자리 잡고 있는 마리아의 숙소는 두 개의 큰 창과 강변을 내려다볼 수 있는 야외 테라스가 있어 안달루시아의 화창한 햇살을 즐길 수 있다. 세비야의 명소인 트리아나 교(이사벨 2세 다리)로 걸어서 이동할 수 있으며 숙소 인근에는 현지 요리를 맛볼 수 있는 야시장이 열린다.
“11살과 8살인 아이들과 여행하는 데 큰 불편함이 없었다. 트리아나 현지인처럼 살아 볼 수 있는 이색적인 경험이었다.” - 사라 그레이스, 미국
카네오헤의 샌드바, 미국 오아후 카네오헤
“알로하! 하와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화려한 색감과 무늬가 하와이의 열대 바닷속을 연상케 하는 헬렌의 숙소는 와이키키 해변과 진주만이 있는 오아후 섬의 카네오헤에 있다. 근처 바닷가에서 생생하게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매력적인 공간. 카네오헤는 썰물 때 드러나는 작은 모래섬인 샌드바가 유명하다. 샌드바가 생기면 보트를 타고 나가 그 위에 올라서서 바다 안을 볼 수 있다. 샌드바가 잔잔하게 물에 잠기면 스노클링으로 열대어, 바다거북 등을 직접 볼 수 있다. 에어비앤비 집주인 헬렌은 내과 의사여서 혹시 건강상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하게 조언을 구할 수 있다.
“두 아이와 5일간 이곳에 머물렀다. 친절한 집주인 헬렌은 우리가 해변에서 편하게 휴식할 수 있도록 비치의자, 파라솔, 스노클링 장비, 장난감 등을 준비해줬다. 지인들에게 이 숙소에 머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사라, 미국
먹거리 천국, 호주 멜버른 리치몬드
캥거루와 코알라의 땅, 호주는 이국적인 분위기와 휴양을 원하는 여행객들의 낙원이다. 특히 문화의 중심지로 알려진 멜버른의 리치몬드에는 전형적인 호주식 맥줏집부터 그리스식 선술집, 길거리에서 파는 베트남 쌀국수가게 등이 있어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멜버른 명소인 야라 강을 따라 산책을 해도 좋다. 화가들이 거리 곳곳을 그린 벽화를 감상하는 것도 멜버른을 느낄 수 있는 한 방법이다.
리치몬드에는 안드레아의 숙소가 있다. 손님들을 반기는 듯 집 대문에는 ‘어디에서 온 누구든지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평화로운 주택가에 있어 리치먼드 현지인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호스트가 정말 친절해서 좋았다. 숙소도 시내에서 가까웠다. 안락한 분위기 덕분에 지내는 동안 정말 편했고 리치몬드의 숨은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영선, 한국
에어비앤비 선정 2016년 떠오르는 여행지 16곳은?
상위 1위에서 3위까지는 아시아(일본, 태국, 말레이시아), 4위부터 7위까지는 유럽(프랑스, 그리스, 스페인, 독일), 8위부터 12위까지는 아메리카지역(미국 3곳, 브라질, 멕시코)이 떠오르는 여행지로 뽑혔다. 이 외 13위 헝가리, 14위 인도네시아, 15위 호주, 16위 아르헨티나 순으로 조사됐다.
충청도는 서울에서 멀지 않은 데다 바다와 산 계곡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사람들이 즐겨 찾는 여행지다. 그중에서 금강자연휴양림은 금강 젖줄에 자리 잡아 탁 트인 풍경과 아기자기한 골짜기가 어우러져 다양한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여름의 끝자락 귀여운 손자손녀들과 금강자연휴양림에서 싱그러운 숲체험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서울에서 출발해 경부고속도로에서 천안-논산고속도로 빠져 다시 당진-대전고속도로 상주 방면으로 길을 틀었다. 1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곳은 공주시 반포면. 충남의 긴 젖줄인 금강이 흐르고 군데군데 울창한 자연습지도 눈에 띈다. 예전에는 황새나 왜가리, 가마우지, 검은머리물떼새 등 다양한 새들이 날아와 사시사철 이들의 날갯짓을 볼 수 있었지만 4대강 공사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아쉽게도 이들의 모습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금강에 가로놓인 빨간 아치 모양의 불티교를 건너면 충남산림환경연구소 간판을 단 금강자연휴양림이 나온다. 정문에 들어서면 넓은 주차장부터 눈에 들어온다. 충청도 사람들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해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수가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권에서는 이곳을 생소하게 여기거나 아예 모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금강자연휴양림은 원목 펜션에서 숙박을 할 수 있는 것은 기본이고 체계적으로 구성된 산림박물관, 동물원을 비롯해 수백 가지 희귀한 식물을 전시하고 있는 열대 온실, 여름이면 피서객들로부터 인기를 모으는 계곡 수영장과 야영 캠프장 등 자연을 테마로 즐길 수 있는 시설은 모두 갖추고 있다.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으니 당일치기 여행보다 주말을 이용해 숙박하는 것이 금강자연휴양림을 구경하기에 여러모로 좋다.
◇ 100명이 먹어도 남는다는 잭후르츠
입구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62ha에 달하는 광활한 면적의 수목원이 나온다. 휴양림과 별도로 주소를 가지고 있을 만큼 광활한 넓이의 수목원은 17개의 전시수목원과 7개의 전문수목원으로 꾸며져 있다. 활엽수, 침엽수, 약용수, 야생화 등과 함께 가을에 찾으면 붉은색으로 갈아입은 울창한 단풍나무 숲이 관람객들을 맞는다니 숲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10월 중순께 이곳을 다시 찾아도 좋을 듯하다.
수목원 한가운데에는 충남산림환경연구소가 자랑하는 첫 번째 보물인 열대온실이 나온다. 마치 유리로 만든 궁전인 듯 둥근 돔의 모양을 띠고 있는 열대 온실에는 전 세계에서 자생하는 500여 종의 다양한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부처님이 득도하셨다는 인도 보리수나무와 성경에 등장하는 올리브나무, 인류 최초로 종이를 만드는 데 쓰인 이집트의 파피루스 등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꾸며진 문화식물원은 인류사에 깊은 의미가 담긴 스토리텔링을 아이들에게 들려주기에 제격이다.
바로 옆 열대화원에는 하와이언 훌라댄서처럼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을 지닌 적도지방의 식물을 볼 수 있다. 전통의상의 재료이자 하와이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선사하는 꽃다발인 플루메리아 등 열대지방 특유의 컬러풀함이 무척이나 이색적이다. 열대과수원에도 관람객들을 놀라게 하는 특이한 나무가 있다. 과일 한 개의 무게가 자그마치 50kg에 달하는 잭프루트는 100여 명이 둘러앉아야만 열매 하나를 간신히 해치울 수 있다. 열대지역에서 식량 대용으로 쓰이는 빵나무는 고구마 맛이 나며, 체리모야, 파인애플, 망고, 파파야 등 열대 과수들의 달콤한 향기가 아이들의 발목을 붙잡는다.
열대온실 바로 위에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산림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전통적인 백제 양식을 따라 지붕의 귀솟음과 기둥의 배흘림을 반영한 산림박물관은 6개의 테마별 전시실을 비롯해 시청각실로 이루어져 있다. 산림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올 때쯤이면 당신도 이미 나무전문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자연체험을 할 수 있는 엘리트 체험코스를 갖추고 있으니 산림박물관에 들어올 때는 필기도구를 꼭 준비하자.
◇ 숲길 걸으며 듣는 생생한 자연학습프로그램
금강자연휴양림이 유명해진 이유는 비단 큰 규모만이 아니다. 숲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양질의 숲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이용객들로부터 높은 만족도를 얻고 있다고 한다. 숲체험은 동절기를 뺀 3~11월 내내 휴무 없이 계속된다. 단 추석연휴에는 숲체험을 하지 않으니 잊지 말고 체크할 것.
숲체험은 자연학습프로그램과 숲해설로 구분된다. 자연학습프로그램은 8세 미만의 어린이들을 위한 유아숲체험교실, 초중고생 단체를 대상으로 하는 자연휴양림 숲교실, 장애인 및 다문화가정 등 취약계층을 위한 나눔의 숲교실, 일반인과 숲속의집 이용객을 대상으로 매주 토요일에 진행되는 명상의 숲교실 등으로 꾸며져 있다. 이와는 별도로 개별 탐방객을 대상으로 숲해설 프로그램이 1일 3회씩 무료로 진행되고 있으니 관심 있는 독자들은 아이들과 함께 여름이 가기 전에 숲이 선사하는 싱그러움을 만끽해보자.
◇ 숲을 연주하는 동물들의 교향곡
금강자연휴양림에는 식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동물마을은 동물의 관람 및 생태 관찰, 특히 어린이들의 생태학습과 다양한 볼거리 제공을 위해 수류와 조류로 구분하고 있다. 하늘의 제왕인 독수리는 거대한 발톱과 부리만 봐도 두려움이 생긴다. 연못을 자유롭게 노니는 오리 떼는 원앙과 백조와 함께 관람객들을 반갑게 맞는다.
두 발로 걷다가도 먹이를 한 손에 들고 그루터기에 앉아 맛있게 점심을 먹는 일본원숭이는 꾀도 많고 호기심도 많다. 사람들이 나타나면 이내 달려와 함께 눈을 맞추며 대화라도 하자는 듯 팔을 내밀기도 한다. 울타리가 쳐진 넓은 들판에서 사는 꽃사슴은 자태가 우아하고 수줍음이 많다. 관람객들이 주는 먹이에 호기심을 보이면서도 이내 먼 곳으로 뛰어가더니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사슴에 비해 키는 작아도 씩씩한 염소와 양떼가 관람객들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려고 울타리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땅 속에 굴을 파고 사는 귀염둥이 토끼는 소리가 나면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사람들을 발견하곤 굴 안으로 숨기에 바쁘다.
수목원, 박물관, 동물원 등 다양한 시설을 체험하다보면 어느새 해가 저물고 만다. 이제 숙소를 향해 발길을 돌릴 차례다. 숙박시설은 잣나무, 벚나무, 잎갈나무 등 다양한 목재로 지어져 있다. 나무를 비롯해 자연친화적인 황토, 자갈 등으로 만들어져 아늑한 분위기 속에 휴식을 취할 수 있다. 크기는 작게는 6명부터 30명이 머물 수 있도록 다양하게 꾸며져 여행의 용도에 맞도록 선택할 수 있다. 펜션 내부에는 기본적인 취사 및 취침 시설이 구비돼 있으니 간단한 먹을거리를 준비하기만 하면 된다. 금강자연휴양림은 모두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으니 사전 문의 후 여행일정을 잡아보자. 주말에 이용하려면 가급적 2~3주 전 예약하는 것이 좋으며 9~10월 간절기를 대비해 두툼한 옷을 꼭 챙겨가도록 하자.
◇ 금강자연유양림(충남산림환경연구소)
홈페이지 www.keumkang.go.kr
문의 041-635-7400
위치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산림박물관 길 110
숲해설 시간 1일 3회(10:30~11:30, 13:30~14:30, 15:00~16:00)
※추석 연휴엔 휴관하며, 숲속의 집 펜션과 야영장 숙박, 자연학습 및 숲해설 프로그램은 인터넷을 통해서만 예약 가능
◇ 금강자연휴양림 주변 아이들과 가볼 만한 곳
- 석장리박물관
금강을 따라 발달한 선사시대 주거촌의 유적을 전시하고 있다. 구석기와 신석기시대 위주로 선사문화의 이해를 돕도록 체계적인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다.
홈페이지 www.sjnmuseum.go.kr 위치 충남 공주시 금벽로 990(석장리동)
관람시간 09:00~18:00 문의 041-840-8924
- 국립공주박물관
화려하고 찬란했던 백제 문화의 진수를 알아볼 수 있는 공주박물관에는 무령왕릉실, 충남 고대문화실, 야외 정원 등 다양한 시설이 구비돼 있다. 2004년 개관, 효과적인 체험을 위한 첨단시설을 갖추고 있다.
홈페이지 gongju.museum.go.kr
위치 충남 공주시 관광단지길 34(웅진동 360) 문의 041-850-6300
- 무령왕릉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능으로 한반도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예술적 완성도가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 무령왕릉은 한국 사람이라면 꼭 한 번 가봐야 할 필수 체험 코스. 위치 충남 공주시 송산리 일대
>>>글 임도현 프리랜서 veritas11@empas.com 사진 김남헌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필자는 고 1때까지만 해도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러 간 적이 거의 없는 모범적(?) 학생이었다. 그러나 고 2가 되어서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 당시 필자는 자전거를 타거나 아니면 주로 걸어서 통학을 했는데 걸어 다니는 길목에는 속칭 하코방이라고 부르던 구멍가게들이 여럿 있었다.
주인은 대개 늙수그레한 남자 노인네들(그렇지만 지금의 필자보다 대부분은 더 젊었을 것이다)로서 손님도 별로 없어서 대개는 동네사람들과 담배나 소주 아니면 푼돈내기 장기들을 두고 있었다. 이런 곳을 지나가게 될 때에는 다리도 좀 쉴 겸 장기구경을 하다가 필자도 모르게 훈수를 해서 야단도 여러 번 맞았지만 어쩌다 상대가 없을 때에는 장기 상대도 해 주면서 이럭저럭 이분들과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이들 구멍가게의 열어 놓은 문짝에 대개 주변에 있는 삼류극장들의 영화포스터들을 붙여 놓았고 이들 포스터의 아래 쪽 구석에는 소위 포스터권이라는 것이 붙어 있어서 이것을 가지고 가면 3일간의 상영기간 중 마지막 날에는 공짜로 극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기에 재미를 붙인 필자는 영감님들에게 떼를 써서 포스터 권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였고, 주로 집에 가는 길목에 있던 동도극장에서 엄청나게 많은 영화를 보았다.
그때 본 영화 중 은 한 순진한 소녀가 파리의 일류 모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뮤지컬 드라마로서 청순하고 매력적인 오드리 헵번과 당대 최고의 무용수 프레드 아스테어가 주연을 맡은 작품이다. 당시까지 을 보지 못했던 필자는 이 영화에서 오드리 헵번을 처음 보자마자 그대로 푹 빠져 왕 팬이 되어버렸다.
등으로 유명한 조지 거슈윈의 재즈 선율이 작품의 묘미를 한껏 살려주며, 할리우드 최고의 의상디자이너 에디스 헤드의 화려하고 황홀한 의상 쇼 속에서 오드리 헵번의 매력이 더욱 빛나는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다섯 번이나 극장을 갔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또 하나 도 잊을 수 없는 영화다. 진주만 공습 직전, 하와이의 미군 기지를 무대로 평범하고도 다양한 군인들의 갈등, 사랑, 좌절 등과 함께 부대 내의 폭력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이 영화는 1953년 제25회 아카데미상을 8개 부문에서 수상하였다. 이 영화는 후에 세계적 가수가 된 프랭크 시나트라가 데뷔하자마자 남우조연상을 수상해 화제가 되었고, 바닷가에서의 워든(버트 랭커스터)과 캐런(데보라 커)의 키스 신은 영화사의 명장면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매지오(프랭크 시나트라)가 뚱보 저드슨(어니스트 보그나인)의 폭행으로 죽은 후 프루잇(몽고메리 클리프트)이 밸브가 없는 신호용 트럼펫으로 연주하는 주제가 는 참으로 사람의 심금을 울려 그 장면을 다시 보러 극장을 4번이나 갔었으며 나중에 트럼펫을 꼭 배우겠다고 결심까지 했었다.
이렇게 한 번 영화에 재미를 붙이게 되자 때로는 계림극장이나 명동극장 등 시내 중심부까지도 진출하게 되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브리지트 바르도의 전라(全裸) 신이 잠깐 나온다 하여 그 당시로서는 최고로 야하다고 하던 이라는 영화를 보러 명동극장에 갔다가 물리를 가르치시던 K선생님을 만난 일이었다. 그분을 보는 순간 아찔하기는 했지만 돈암동에서 명동까지 가서 비싼 입장료 내고 들어갔는데 도저히 그냥 나갈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이리저리 피해가며 볼 기분도 아니어서 될 대로 되라 어떻게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오히려 그때까지도 필자를 발견하지 못하고 계시던 선생님 앞으로 일부러 걸어가 꾸뻑 절을 하고는 선생님께서도 이런 영화를 보러 다니십니까, 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다행히 K선생님께서도 요 녀석이 하시면서 꿀밤을 주시기는 하셨지만 더 이상 문제를 확대하지 않아 무사히 영화를 보고 나올 수 있었다. 여하튼 이렇게 영화를 보다보니 나중에는 제작자 누구, 감독 누구, 배우 누구 하면 영화를 보지 않고도 내용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고 2가 끝나갈 때쯤 1년 동안 본 영화들을 세어 보았더니 136개였던 것으로 기억되지만 물론 개중에는 동시상영으로 본 것도 여러 개 있어서 극장을 그 회수만큼 들어갔던 것은 아니었다.
이런 버릇은 고 3이 되면서 일단 수그러들었으나 대학에 들어간 이후에도 꽤 자주 영화를 보러 다녔다. 그런데 당시에는 유일하게 단성사만 예약제도가 있었고 또 단성사에서 상영하는 영화라도 미리 영화를 보려고 계획했던 것이 아니라 데이트 도중에 갑작스레 결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예약을 하지 못 해 표를 사놓고 두, 세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영화를 자주 보러 다니다 보니 나중에는 예약을 하지 않고도 별로 기다리지 않고 영화를 볼 수 있는 요령을 터득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단성사의 경우는 상영시간 좀 전에 예약창구에 가서 예약을 했으니 표를 달라고 하다가 이름이 없다고 하면 “이상하다, 분명히 예약을 했는데.”라면서, 그러면 예약하고 안 온 다른 사람 표라도 달라고 하면 대개는 표를 살 수 있었다.
이 방법이 실패하거나 다른 극장의 경우는 극장 기도(입구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일본어)를 찾아가 새끼손가락을 펴 보이며 “형! 표 없수?”라고 묻는다. 당시 기도들은 대개 동네 깡패의 중간보스쯤 되는 사람들로서 월급 대신인지 부수입인지는 모르지만 매회 표를 몇 장씩 가지고 있었고 필자의 말은 똘마니 중 한 명인 척하며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왔으니 표 좀 구해달라는 뜻이다. 그러면 때에 따라 두 장 내지 넉 장을 구할 수 있었고 표 값을 지불할 때는 우수리는 받지 않았다. 그리고 넉 장일 때는 주변에서 표를 구하려고 서성대는 사람들에게 나머지 두 장을 넘기면 된다.
이런 방법이 통했던 것은 고등학교 때 본의 아니게 잠시나마 노랑머리파라는 동네 깡패들과 어울렸던 경험이 있었던 데다 어차피 그들에게도 필자가 자기들의 똘마니든 아니든 표만 팔아주면 아무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결혼 후에는 공부하랴, 아이들 기르랴 등 이런 저런 사유로 영화에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고 당시까지는 영화비디오가 있다는 사실조차 잘 몰랐으며 그저 음반 모으기에만 열을 올렸다.
1944년 서울 출생.
아호 무애(無碍). 경기고, 서울대 토목공학과 졸. 서울대대학원 교통공학 박사. 서울대, 명지대 토목공학과 및 교통공학과 교수 역임. 현재 명지대 명예교수, 서울특별시 무술(우슈)협회 회장 홍익생명사랑회 회장, 월드뮤직센터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