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와 저출산 속도에 지속가능하지 못한 사회로 변하고 있다. 인구 구조가 크게 변화함에 따라 나타나는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언론과 전문가들도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다들 지적만 할 뿐 뚜렷한 대책을 내놓고 있지는 못하다. 이런 상황에서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만난 마강래 중앙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는 대한민국의 초고령 사회를 베이비부머가 바꿀 수 있다고 설명했다.
“베이비붐 세대에 대한 정년 연장론과 계속 고용에 대한 논의는 시대적으로 필수불가결하다. 베이비부머가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액티브하게 활동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이들에 대한 일자리 정책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문화·의료 정책을 맞물려 제시하면 인구 구조 변화로 발생하는 많은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
1955년부터 1974년까지 베이비붐 세대
베이비부머는 원칙적으로 1955년부터 1963년까지 태어난 세대(1차)를 말한다. 한국전쟁으로 발생한 인구 감소를 보완하기 위해 정부에서 계획적으로 출산을 장려하면서 많은 이들이 태어난 시기다. 1964년부터 출생자가 너무 많다는 의견에 정부에서 가족계획을 강하게 내세워 출산율이 잠시 감소한다. 1964년부터 1967년까지다. 흔히 낀 세대라고 부른다. 이어 1968년부터 1974년까지 다시 2차 베이비붐 세대가 만들어진다.
여기서는 베이비부머를 1955년부터 1974년까지 20년 동안 태어난 세대를 기준으로 한다. 마강래 교수는 “인구 구조를 보면 거대 인구 덩어리다. 1차만 보면 안 된다. 2차도 거대하다. 이 인구 덩어리를 토대로 학술과 정책적인 고민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20년을 함께 봐야 올바른 정책이 나올 수 있다는 의견이다.
1955년생은 베이비부머의 맏형으로 지난해부터 65세 이상 고령인구에 편입됐다. 베이비부머는 각 연령별 인구가 60~80만 명으로 총 1700만 명에 달한다. 지난해부터 20년 동안 매해 60~80만 명이 고령인구에 편입된다는 얘기다. 이러면 한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이 발생한다. 매년 60만 명 이상이 국민연금을 최대로 받기 시작하는데, 2018년 국민연금공단의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2057년이면 국민연금이 바닥나기 때문이다.
마강래 교수는 “평균 수명이 짧던 과거 기준으로 65세 이상을 복지의 대상으로 잘못 진단해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며 “평균 수명 100세 시대에 베이비부머는 80세까지 활동할 수 있다. 이들이 10년 이상 더 일을 할 수 있다면 국민연금 고갈, 경제활동 인구 감소, 부동산 가격 상승까지, 한국 사회가 직면한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해결책으로 내세운 전략은 도시의 베이비부머가 가고 싶은 지역이나 지방으로 귀향하는 것이다. “베이비부머가 수도권에 800~900만 명 있고, 수도권에서 태어나지 않은 다른 지역 출신이 440만 명”이라며 “이들 중 60% 이상이 고향으로 가거나 수도권을 떠나고 싶다고 밝혔다.”
440만 명 중 10~20%만 귀향을 해도 임팩트가 엄청나다는 설명이다. 예를 들어 10%인 44만 명이 지방으로 내려간다고 하면 이들이 소유하거나 거주하던 주택이 매매와 전월세로 나온다. 부부가 겹치는 경우를 고려해도 최소 20만 호 이상이 시중에 나온다. 마강래 교수는 “현재 매매와 전월세 시장에서 이보다 빠르고 효과가 큰 정책은 없다”고 설명했다.
“가장 부자이면서 가난한 세대”
그런데 현실은 60%는커녕 몇 퍼센트의 베이비부머도 귀향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살 만한 곳을 찾지 못해서다, 귀향에서 가장 중요한 게 일자리인데, 베이비부머에게 맞는 일을 지방에서 찾기 어려워서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모이는 이유도 일자리 때문인데, 지방에서 베이비부머가 할 만한 일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다.
베이비부머는 주택 등으로 재산이 가장 많은 세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은퇴한 베이비부머에게 일자리가 필요한 걸까. 마강래 교수는 “가장 부자이면서 가난한 세대다. 자산의 80% 이상이 부동산”이라고 평가했다. 베이비부머가 상대적으로 재산은 많은 편이지만 대부분 깔고 앉아 있다 보니 가난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베이비부머는 과거에 샌드위치 세대로 불렸다. 부모를 모시고, 자식도 챙겨야 했다. 그런데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임금과 부동산이 크게 올라 부를 축적한 세대가 됐다. 시간이 흘러보니 요즘 청년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았던 것으로 나오지만 당시에는 매우 힘들었던 세대다.
실제로도 베이비부머가 여유롭지는 못하다는 것이 전문가 의견이다. 마강래 교수에 따르면 은퇴 후 부부 기준 필요한 생활비가 월 240만 원, 최소 생활비가 176만 원이다.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떨까. 은퇴 후 부부 생활비 현황을 살펴보면 상위 그룹은 135만7000원, 중위 그룹은 98만1000원, 하위 그룹은 79만3000원으로 확인됐다(최상위 5%, 최하위 5% 제외 시). 이처럼 은퇴한 부부들은 필요한 생활비는커녕 최소 생활비조차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다.
이는 상대적으로 자산이 가장 많다는 베이비붐 세대도 일이 없으면 생활이 어려워질 만큼 일자리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청년 일자리도 부족하다는데 이들까지 고려할 수 있을까.
마강래 교수는 “베이비부머에게 필요한 일자리는 기존 일자리와 다르다”며 “은퇴 후에도 일을 하고 싶다는 분들은 많지만 기존처럼 많이 받겠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베이비부머가 필요로 하는 일자리는 풀타임 일자리가 아니고, 중소기업에서 일주일에 2~3일 정도 일하고 한 달에 150만 원 정도 월급을 받을 수 있다면 충분하다는 설명이다. 이런 조건이면 베이비부머가 국민연금과 연계해 부족한 노후자금을 충당하고,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며 즐겁게 생활할 수 있다.
최근 선진국을 중심으로 주 4일 근무가 보편화되고 있다. 베이비부머가 주 3일 근무한다면 업무효율 측면에서도 바람직한 모습이 될 수 있다. 게다가 경력과 역량에 비해 요구하는 임금 수준도 매우 낮아, 중소기업에서 효과적으로 활용한다면 일석이조를 기대할 수 있다.
베이비부머 귀향은 도시와 지방의 상생 전략
부동산이 자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베이비부머에게 주택연금은 매우 유용한 제도다. 하지만 주택연금을 받으면 실거주를 해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귀향을 선택할 수 없다. 또 일정 금액 이상의 주택은 연금을 받을 수도 없다. 그는 “실거주하지 않아도 역모기지를 받을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며 “중소도시 지역으로의 귀농이나 귀향이라는 조건을 걸어 도시 주택을 임대할 수 있게 하면, 현재 발생하는 도시의 부족한 임대 시장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제안했다.
마강래 교수는 여기에 정부가 보완 정책을 제시하면 더 효과적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지역의 중소기업 밀집단지에 타운하우스를 만들어 원하면 30년 동안 거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이렇게 하면 해당 지역으로 갈 사람들이 줄을 설 것”이라고 확신을 갖고 말했다. 이와 유사한 임대주택 공급 방식은 실제로도 구현된 바 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폐교 직전의 학교를 살리려고 함양에서 주택 12호를 지어 학부모들에게 제공했더니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은퇴하면 처음에는 등산에 골프에 바쁜 일정을 보낸다. 하지만 몇 주만 지나면 매일 쉬는 것이 고통으로 다가온다. 베이비부머가 귀향을 해 타운하우스에 살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마강래 교수에 따르면 우선 한 달에 15만 원 정도의 적은 비용으로 거주비를 해결한다. 그리고 거주지 주변 일자리에서 주 2~3일 일하고 150만 원 정도를 받는다. 거주와 일자리, 생활비가 모두 해결된다. 연금 수급도 늦출 수 있어 연금 고갈 시점도 연장된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타운하우스에는 공감하며 함께할 수 있는 비슷한 연령대의 친구도 많다. 또 지역에는 인구가 늘어 중소기업과 지역 경제가 살아난다. 이에 따라 지자체는 문화체육시설 등을 지원하고,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지역 대학과 연계할 수 있다. 베이비부머가 대학에서 교육을 받으면 다른 직종으로 바꾸기도 쉽고, 중소기업도 원하는 인력을 공급받기가 쉬워진다. 마강래 교수는 “이렇게 하면 베이비부머가 도시에서 젊은이들과 일자리 경쟁을 하지 않아 서로에게 이익”이라며 “정부와 지자체가 제대로 준비한다면 도시와 지역, 시니어와 청년이 상생하며 ‘윈윈’하는 모습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은 노인 복지 측면에서 후진국에 속한다. 마강래 교수는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다. 앞으로 노인 인구가 빠르게 늘어나는 만큼 복지 지출도 빠르게 증가해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현재처럼 수혜의 대상에게 복지 비용을 지급하는 방식으로는 나아질 수 없다. 대신 복지 비용을 노인들이 활발하게 일하고 생활하면서 삶의 질을 높여갈 수 있도록 보조하는 비용으로 생각하고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조언했다.
마강래 교수는 정부 및 지자체 관계자들과 함께 베이비부머와 도시 정책 방향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베이비부머의 귀향을 통해 도시 주택 문제도 해결하고, 지역에서 활동하며 지역 경제와 연금 문제를 해결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의 제안처럼 베이비부머가 하루 빨리 귀향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길을 잃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길을 잃었습니다. 사업이 무너지니 가정도 파탄되고 종교생활도 다 무너졌습니다. 그동안 알던 모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불편하고 싫었습니다. 자격지심(自激之心)인지 저의 현재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에 비참함을 느꼈습니다. 방황하며 현실을 도피했습니다. 일부러 서울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타지(他地)에 가서 머물렀습니다. 그러다가 중국까지 도망치듯 오게 되었습니다.
흔히 인생을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합니다. 태어나서 죽기까지 매번 선택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그중에 중요한 3대 선택을 결혼, 직업, 종교라고 하는데, 나이 50세에 이 모든 것들의 기반이 한순간에 붕괴된 것입니다.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는 어떤 선택이 잘못된 것일까?’ 지나온 저의 50년을 곰곰이 반추해보았습니다.
나의 1차 꿈
저는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1·4후퇴 때 월남해온 이산가족입니다. 남한에 친척이 없었고 저의 어머님을 중매로 만났지만 가정에 정(情)을 못 붙이시고 한평생을 유랑하듯 밖으로만 떠도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이 홀로 저희 3남매를 키웠습니다.
어머님의 고생을 익히 보고 자란 저는, 빨리 커서 돈 벌어 어머님께 집 한 채 사드리는 것이 1차 목표였습니다. 대학 갈 때쯤 우연히 저의 주민등록초본을 떼어보았는데, 거기에는 제 나이보다도 주소지 이전 횟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만큼 더 싼 곳으로 자주 이사를 다녔다는 의미입니다.
대학 시절엔 저를 특별히 아끼시는 교수님께서 제게 미국에서의 7년간 석·박사 유학 코스를 권하며,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 대학의 교수가 되라고 기회를 주셨는데, 저는 거절했습니다.
제게는 현재의 대학생도 과분하며, 저는 제가 교수되는 것보다, 빨리 돈을 벌어 어머님을 편히 모시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교수님께서는 “사람이 돈을 쫓으면 추해진다. 돈이 너를 쫓아오도록 해야지” 하시며 저를 훈계하셨지만, 그때 저는 그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군(軍) 입대할때도 경제생활을 고려해 장교를 선택했고,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1년 반 만에 대형 증권사로 이직(移職)을 합니다. 거기서 3년 만에 드디어 꿈을 이룹니다. 드디어 어머님께 집을 사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때의 제 나이가 서른 살이었습니다. 이후 증권사에서 저는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고 승승장구합니다.
고민이 시작되다
그리고 이어 제가 서른한 살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에 아들 이름을 지으며 저는 처음으로 인생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처럼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타며, 가족끼리만 잘 먹고 잘 사는 게 목표일까? 그 이상의 인생은 없는 걸까? 나중에 크면 아들에게 인생이란 무엇이라고 말해줘야 할까?’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금강산(金剛山)’. 저의 성이 김(金)이니, 김강산이나 금강산이나 한자(漢字)의 표기는 같았습니다. 제가 그때는 교회도 열심히 다닐 때였기에, ‘역사의 하나님’께서 앞으로 우리 민족의 미래를 열어주실 때, 제 아들 녀석을 ‘금강산 찾아가는’ 통일의 도구로 써주십사 하는 의미였습니다.
저는 비록 제 가족밖에 모르는 인생이지만, 제 아들만큼은 그 이상의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해달라는 기도의 산물이었습니다.
한편 증권사 시절은 가히 저의 전성시대였습니다. 최연소 영업추진부장, 지점장, 연수원장, 홍보실장, 강남본부장(11개 지점 총괄), KBS 라디오 증권방송 등 종횡무진(縱橫無盡)했고, 급여도 억대 연봉이었습니다. 20여 년 전에 연봉 1억 원이면 거의 상위 1% 수준이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위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왠지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습니다. 경제적인 풍요가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았고, 가시적 1차 목표가 사라진 인생은 조금씩 허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IMF 때 저는 증권사 신촌지점장이었는데, 문득 제가 하는 일에 회의(懷疑)가 생겼습니다. ‘조국 대한민국은 현재 달러가 없어서 국가부도 사태인데,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이 혼란 속에서도 돈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좀 더 벌게 해주는 역할 정도가 아닌가? 과연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본질적인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증권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게 되었을 때, 저를 아끼셨던 사장님께서 제게 물었습니다. “지금 잘하고 있는데, 왜 갑자기 사표를 내는가?” 그때에 저는 ‘재미가 없어서요’라고 답한 기억이 있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그 말에 사장님께서는 씨익 웃으시며 “사표는 유보할 테니, 유급으로 한두 달 푹 쉬고 충전해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처리해주셨지만, 저는 결국 사표를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헤드헌터(Head Hunter)사의 유혹
증권사 퇴직 얼마 전부터 강남의 유명 헤드헌터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대기업이나 국가기관이 소수의 전문가를 특별 채용하고자 할 때는 공개채용을 하지 않고, 헤드헌터사가 보유한 분야별 전문 인력 풀에서 추천을 받곤 합니다. 어찌된 일인지 그쪽 추천 리스트에 저도 포함되어 있었나 봅니다. 기분 나쁘지 않았고 신기했습니다.
첫 번째 제안은 외국계 증권사의 홍보팀장이었는데 제가 거절했습니다. 우선은 IMF 시기에 외국 회사라는 게 싫었고, 저의 공식적인 답변은 그쪽 역할이 지금보다 작고, 연봉도 저의 현재 수준이 더 높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2개월 후 다시 제안이 왔습니다. 이번엔 역할도 크고 연봉도 맞춰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게 우리금융그룹 홍보실장이었습니다.
일단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우리금융은 IMF 때 공적자금을 받은 5개 은행을 통합하여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금융지주회사인데, 빨리 회생하여 주가를 높여야 우리나라가 IMF로부터 벗어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단 면접이라도 보아달라는 헤드헌터사의 거듭된 요청을 받아들여, 면접을 보고 결국 입사를 결정하게 됩니다.
가서 만나보니, 하나은행을 성공적으로 경영하셨던 윤병철 회장님께서 우리금융그룹 초대회장으로 오셨고, 이후에 금융감독원장이 되신 전광우 부회장님이 제 직속 상관이셨습니다. 두 분 모두 능력도 탁월하시고 인품도 훌륭하셨습니다. 특별히 저를 많이 아껴주시고 믿어주셔서 가까이서 많은 일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무여건은 녹녹지 않았습니다. 산하의 은행들은 지주회사를 마치 점령군처럼 인식하여 노조를 중심으로 사사건건 반발했고, 언론도 호의적이지 않아, 매일 밤 언론사를 찾아가 부정적인 기사를 막아내는 것이 저의 주된 업무가 되었습니다.
또다시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고, 저는 결국 1년 만에 최종 사직을 합니다. 저의 사표에 대한 답신으로 윤병철 회장님이 써주신 덕담 가득한 친필 서한(書翰)에, 저는 한 번 더 감동하며 고별인사를 드렸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엿보다
총 18년간의 직장생활을 정말 미련 없이 정리하고 나서는, 직장인 시절에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일들에 관심을 갖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첫째는 각종 동문회 참가였고, 둘째는 강사 활동이었습니다.
동문 모임으로는 서울시립대학교 대학동창회와 ROTC 총동기회가 있었는데, 나름 열심히 하다 보니, ROTC 21기 총동기회장으로 전국을 누볐고, 당시 ROTC 중앙회장이셨던 5기 차인태(전 MBC 아나운서) 회장님과도 좋은 신뢰를 쌓았습니다.
이어 회사 다닐 때부터 간간이 요청이 있었던 몇몇 대기업에서의 강의 요청을 이제는 편하게 다닐 수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삼성그룹, 효성그룹, 푸르덴셜생명 등에 리더십, 프레젠테이션, 커뮤니케이션, 네고시에이션(협상기술) 등을 주제로 4~8시간까지 강의를 진행하곤 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푸르덴셜생명으로부터 한 가지 큰 제안을 받게 됩니다. 난치병 어린이들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한국 메이크어위시(Make A Wish) 재단’의 초대 사무총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제겐 생소한 분야였지만, 자원봉사자 선발 및 교육, 소원행사 감동연출 및 홍보, 그리고 기업으로부터 후원금 조달업무 등을 총괄하는 역할이어서, 저를 적임자로 평가한 것 같았습니다. 저에 대한 기대도 감사하고 좋은 일이어서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한국 메이크어위시 재단의 사단법인 인허가 설립부터 총 2년여를 봉사했는데, 미국재단으로부터 매뉴얼 교육을 받고, 소아암병원으로부터 소원 대상자를 추천을 받아, 최선을 다해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수십 건의 소원성취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때에 저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약값이나 치료비를 지원하지 왜 소원성취인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꿈꿀 수 없는 어린이들에게 단 한 번의 소원은 무얼까? 인간에게 진정한 소원이란?’ 이런 물음을 통해 사회봉사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고, 이런 생각은 후일 중국에 와서도 나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새로운 큰 도전, 그리고 실패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깊이 생각한 것은, 돈 이상으로 의미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한류문화 관광사업’ 이었습니다.
이 사업을 선택한 이유는 첫째, 우리 문화를 사랑하고 상품화하는 것은 제가 잘할 줄 아는 분야였고, 둘째, IMF를 겪고 보니 국가적으로 달러 버는 일이 중요했는데, 이 일이 바로 그쪽 분야의 일이었고, 셋째는 우리나라 환율이 오르니, 이른바 인바운드(inbound, 한국 입국) 관광사업에 경쟁력이 높아졌던 시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 맞춰서 일을 시작하려던 계획이었는데, 여기저기 세상을 엿보다가 좀 늦어져서 2004년에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오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한국적 감동을 추가로 전하며, 1인당 100불씩 더 쓰게 하자는 내부 경영목표를 세우고, 독창적 한류문화 전시 및 상품개발 사업을 기획합니다.
그리고 김포공항 국제선 제2청사 지하 1층에 약 1000㎡ 규모로 ‘한류스타 홍보관’을 제법 호화롭게 개장했습니다. 전시관 조성에만 총 9억 원을 투자했습니다. 당시 일본에 한류 붐이 있었고, 국제선 제2청사는 도쿄 하네다공항을 직행하는 항공편이 매일 16편이 있었습니다. 김포공항의 한국공항공사는 물론, 문화관광부, 한국관광공사 등의 기대와 관심을 한껏 받으며 사업을 자신감 있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초기에 공동으로 지분투자를 약속했던 일본 도쿄의 파트너 관광사업자가 약속을 어기면서 틀어지기 시작했고, 개장 6개월 후부터 갑자기 일본의 한류 붐이 식으면서 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한류 페스티벌 행사에도 참가하고, 말레이시아와 중국 등에도 직접 진출을 시도했습니다. 중국은 그때 처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수익 다변화를 위해 국내 이벤트 기획사로도 사업영역을 넓혔습니다. 당시 오세훈 시장 시절에 서울시 장애인 예술제도 연출했고, 노인협회 주관의 세계노인문화예술제를 8개국을 초청하여 속초와 설악산에서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포천 양귀비 꽃 축제, 대기업 행사 등을 수주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불황과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개장 4년 만에 전시시설을 김포공항에 기부체납하면서 사업장의 문을 닫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부채청산을 위해 모든 개인 재산 정리를 했고, 가정도 파탄을 맞습니다. 돌이켜보면 뜻만 좋았지 저 자신이 자신감을 넘어 너무 교만했고, 위기대응 준비가 충분하지 못했고, 모두가 저의 부덕한 탓이었습니다.
어머님이 계시기에
졸지에 더 이상 갈 곳도 없고 반기는 곳도 없었습니다. 낮에는 대인기피증이 생겼고, 밤에는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나쁜 생각도 참 많이 했었지만, 그때마다 어머님이 슬퍼하실 얼굴이 떠올라서 참고 참았습니다.
어머님은 당시에 큰아들이 고생한다고 제가 사드린 집을 처분하여 제게 마지막 힘을 보태주셨는데, 저는 그 기대마저도 부응하지 못하고 무너진 것입니다. 저 때문에 졸지에 어머님마저도 다시 사실 곳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그 몇 해 전부터 어머님은 몸이 많이 상하셔서 거의 거동을 못하시는 상태셨습니다. 한약방에서는 맥박도 약하고 보약도 효험이 없다고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업이 망하고 가정파탄마저 겪게 되자, 어머님은 기적처럼 아픈 몸을 털고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이유는, 갈 곳 없는 저의 끼니를 챙기시고 저의 옷을 세탁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녕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말을 저는 그때 다시금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원인도 모른 채 제가 밤새 심한 복통으로 끙끙 나뒹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님은 두 손으로 저의 아픈 배를 계속 문지르시며, 당신은 평소 불교 신자셨는데 제가 믿는 하나님을 외치시며 ‘우리 큰아들을 제발 살려달라’고 밤새 우셨습니다. 너무도 아프고 길었던 그날 밤, 어머님의 그 뜨거운 눈물과 안타까운 외침 소리를 저는 결코 잊지 못합니다.
중국으로 떠나오다
그런 어머님을 뒤로하고 저는 중국행을 선택합니다. 당시 중국과는 비록 지지부진했지만, 고구려의 420여 년간 수도였던 집안시(集安市) 정부 관료들과 제가 고구려축제를 협의하던 중이었던 바, 거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아니 그것을 핑계로 한국을 도망치듯 떠납니다. 어쩌면 아무도 없는 무인도(無人島)를 찾는 마음이란 표현이 더 솔직할 겁니다.
집안시의 고구려 프로젝트는 3개월 뒤 결국 무산됩니다. 제가 한국인이라는 이유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인이 중국에서 고구려를 거론하는 것은 그 자체가 금기시되는 일이었습니다. 집안시 정부 책임자도 처음에는 그 정도로 민감한 문제인 줄을 미처 몰랐던 것 같았습니다.
집안시 프로젝트는 무산되었지만 저는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대책도 목적도 없이 그저 좀 더 중국에 머물기로 하고 지인이 있는 곳을 찾았는데, 그곳이 바로 단동시(丹東市)였습니다. 단동은 압록강을 사이로 북한 땅 신의주와 마주하고 있으며, 북한 대외무역의 약 80%가 단동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단동은 한마디로 우리말 백화점이었습니다. 당시 단동에는 중국 조선족이 1만 5000명, 북한 사람이 1만 명, 북한에서 태어난 중국 화교(華僑)가 1만 명, 요동대학교 한국·조선(북한)어과 학생들이 1000여 명, 그리고 한국인이 총 2000명 정도 살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대북사업 관계자이거나 선교사였습니다.
누구를 만날 일도 없고 아무 일과도 없는 저는, 매일 새벽 혹한의 추위에도 저를 채찍질하듯 하염없이 압록강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새벽 교회당을 찾아 무릎 꿇고 홀로 숨죽여 울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밤, 강 건너 불 꺼진 북한의 신의주 땅을 멍하니 넋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저의 ‘살아남아 버티기’의 중국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이 살고 있었네
그렇게 한두 달을 보내다 보니, 점점 주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도 저와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 해 전 소설가 황석영이 북한을 다녀와서 쓴 책의 제목이었던 ‘사람이 살고 있었네’가 생각났습니다. 한인교회를 통해 한국 사람들을 접하고 단동한인회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시간이 많으니 한인회 봉사를 제의받아, 당시 막 설립한 단동한국문화원의 부원장직(원장은 한인회장이 겸직)과 한인회 사무국의 사무총장으로 무료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단동한인사회는 대부분 1992년 한중수교 직후와 1997년 IMF 전후로 중국에 건너오신 소상공인 분들이 많았던 바, 아마도 저와 같은 대기업 출신의 사회 경험자가 드물어, 오자마자 졸지에 감투를 쓰게 된 것이었습니다.
봉사의 길에 들어서다
뜻밖에 할 일이 생긴 저는, 대기업에서의 기획력과 이벤트 기획사 대표로서의 경험을 되살려 많은 일들을 추진했습니다.
우선 요동대학교 한국·조선어과를 찾아서는 한국어 말하기 대회와 글쓰기 대회, 그리고 합동 문화공연을 매년 추진했습니다. 재외동포재단에는 기획서를 보내 한인회관 건축지원금을 50% 받고 나머지는 현지 모금하여 3층짜리 아담한 단동한인회관을 건립했습니다.
한편, 장기체류 단동 한인들의 대부분이 현지인과 결혼한 다문화가족들이었는데, 이들에 대한 지원체제가 없어, 문화원 내에 다문화가족 복지센터를 만들고, 당시 단동을 방문한 국회 통일외교안보위의 박선영 국회의원님과 심양총영사관의 협조를 얻어 다문화가족 합동결혼식과 단체 한국 신혼여행을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족학교에 가보니, 70% 이상 대부분 학생들은 부모가 한국에 돈 벌러 가서 없는 결손 가정이거나 조부모 위탁상태였고, 소학교를 졸업해도 별도 우리말도 잘 못하고 중국어도 잘 못하는 언어수준에다, 문화예술 방면 재능교육 발견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몸은 건강해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꿈꾸지 못하는 조선족 아이들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문화원에서 조선족 학생들을 대상으로 우리말 교육과정을 시작했고, 해마다 한국어 말하기 대회를 개최하여 수상자들에게 한국문화체험여행을 제공했습니다. 제가 단동에 머문 4년 동안 총 140여 명의 학생들이 한국을 방문했는데, 여행비용은 경기문화재단과 한국 지인들의 개인적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조선족 학생들의 예술적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 나아가 그들 스스로가 무언가를 꿈꾸게 하기 위해, 제가 예술단장이 되어 직접 학교에 가서 학생 67명을 선발하여 ‘압록강 청소년예술단’을 공식 발족하였습니다.
그 뒤 8개월간의 훈련 후에 5성급 호텔에서 1000여 명의 학교관계자과 학부모들을 모시고 ‘내 마음의 북두칠성’이라는 제목의 예술단 창단공연을 성공리에 추진하였습니다. 대부분 첫 무대를 경험하는 것이라 감동은 컸고, 학교를 향한 후원금도 쏟아졌고, 부모님들은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심양으로 진출하다
이런 저의 활동들이 인근 지역에도 소문이 났던 모양입니다. 심양총영사관에서는 당시 조백상 총영사님의 파격적 배려로 저를 총영사관의 경제문화행사 기획자 겸 사회자로 발탁해서 일을 맡겼습니다.
마침 한중수교 20주년도 겹쳐서, 각 도시마다 한중우호의 밤 행사가 있었고, 중국 동북3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27개 대학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말하기 대회 및 K-Pop 경연대회’, 그리고 한국 국경절(개천절) 기념 총영사관 한복패션쇼 등의 행사를 연출했습니다.
그러면서 항일유적연구소장과 동북3성 한국인연합회 사무총장을 맡게 되어 동북3성 최대도시인 심양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심양은 단동의 10배 규모로, 외곽까지 도농(都農)인구 합계가 총 2000만 명인 대도시입니다.
중국 동북3성에 와서 알게 된 사실은, 전 세계 한민족 항일유적지의 3분의 2가 중국에 있고, 중국 항일유적지의 3분의 2가 동북3성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인은 물론 조선족들도 우리의 항일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항일유적지 찾기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항일유적연구소였습니다.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의 항일역사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저는 연구소장으로서 연구원을 모집하고, 안중근 13일간의 이동경로와 거사일정을 뒤따라가 보기도 했고, 윤동주의 생가, 신흥무관학교의 발자취 등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많은 항일열사들의 발자취도 찾아다니며 공부했습니다.
그런 중 우리나라 3대 독립선언 중 하나이자 최초의 독립선언인 ‘무오독립선언’의 내용과 의미를 분석, 발굴하여, 심양총영사관과 국가보훈처의 협조 아래 저희 항일유적연구소가 주관하여, 중국 현지 최초로 ‘무오독립선언 기념식’을 개최하였습니다. 저의 가장 큰 보람 중 하나인 이 행사는, 민주평통 선양협의회의 주관으로 지금도 8년째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중교류문화원을 설립하다
대도시 심양에 와서 저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제가 잡다하게 벌여놓은 문화예술 봉사활동과 조선족학교 지원, 그리고 항일역사연구와 유적지 방문활동 등을 종합하여,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시스템과 공간 확보의 필요성이 커진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한중교류문화원’을 설립 추진합니다.
한중교류문화원은 심양의 코리아타운 지역인 서탑가 인근에 약 2000㎡ 규모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2014년 7월 19일 설립하였습니다. 자체적으로 130여 석 규모의 강당을 갖게 된 문화원은 많은 교육활동과 문화예술 공연행사를 연출합니다. 그중에 최고의 대박상품은 ‘실버대학’입니다.
제1기 실버대학은 2014년 가을에 약 15주의 과정으로 진행되었는데, 50세 중반부터 80세 전후의 조선족 어르신들 93명이 첫 신입생으로 입학했습니다. 노래교실, 역사문화특강, 10년 젊어지기 미용특강, 핸드폰 사용법, 기본생활영어, 도전 골든벨, 그리고 졸업여행에 이어 사각모와 졸업가운 입고 졸업식하기 등의 행사에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실버대학은 제가 문화원장으로 재임한 약 3년 반 동안 총 4회가 이어졌습니다.
한편, 실버대학은 제가 특별한 의미로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한국에 두고 온 저의 어머님을 생각하며 만든 행사입니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 어머님의 집에 가면 마음으로는 늘 눈물겹게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우리 세대 장남들이 그러했듯이 다정다감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무뚝뚝한 아들이었습니다.
사실은 어머님과 재미있게 놀아드리고도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죄송스러움과 한(恨)을 실버대학을 통해서 조선족 어머님들께 재롱도 부리며 조금이나마 풀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일까요? 실버대학 어머님들의 공통된 감사인사 표현은 “우리 아들도 못 해준 호강을 실버대학에서 받았네요, 너무 행복합니다!”였습니다. 저도 응답합니다. “아닙니다. 행복하시다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그밖에도 한중교류문화원에서는 항일사진전, 어린이 K-Pop대회, 한국가수 김광석 가요제, 중국가수 등려군 가요제, 장예모 감독 영화제, 한국영화제, 조선족학교 돕기 프로젝트, 청춘콘서트, 사물놀이 강습, 한국 만화도서관 개관, 한중친선 배구대회와 탁구대회 등의 행사를 연출하였습니다.
동주학당, 동북에 물들다
그렇게 3년 반의 초대원장 자리를 마치고, 조선족에게 한중교류문화원 2대 원장을 물려주었습니다. 경영의사결정 과정에서 오해와 어려움도 있었고, 제가 너무 강하게 한국 문화를 중국 조선족들에게 전파한다는 정치적 오해가 깊어져서, 부득불한 조치였습니다.
대신에 저는 조선족 지식인들과 함께 윤동주의 이름을 딴 ‘동주학당(東柱學堂)’이란 모임을 만들고, ‘한중 문화융합연구소’라는 개인연구소를 차린 후, 다시 독립하여 조선족들을 향한 집중 봉사활동을 재개합니다.
동주학당은 민족시인 윤동주를 한민족 디아스포라(Diaspora)의 대표인물로 생각하여 ‘한민족 디아스포라 사랑방’을 추구하는 가운데, ‘찾아가는 민족문화원’을 표방했습니다.
우선 심양에서 ‘윤동주 100주년 기념 시낭송음악회’를 연출했고, ‘동주학당, 대련에 물들다’, ‘동주학당, 치치하얼에 물들다’, ‘동주학당, 영구에 물들다’ 등 동북3성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찾아가는 민족문화원’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또한 심양 남부 소가툰 지역에 ‘윤동주 문화원’을 건립하여 실버대학도 성황리에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거의 최북단으로, 3만 명의 조선족이 거주하는 흑룡강성 치치하얼에도 ‘치치하얼시 조선족문화원’ 설립을 지원하고, 제가 명예원장을 맡아, ‘치치하얼시 조선족 아리랑 예술제’ 및 대동제를 개최하였습니다.
이어 거기서도 같은 마음으로 실버대학을 진행했는데, 제가 중국에서 총 6번째로 진행하게 된 ‘치치하얼 조선족 실버문화대학’은 무려 1200km 거리(심양-치치하얼)를 3개월간 매주 고속열차로 달려가서 진행한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것의 크기는, 자신의 재물과 시간과 열정을 투자한 것에 비례한다는 말을 저는 온전히 믿습니다. 치치하얼이 제겐 그런 곳입니다. 그곳에서 만난 조선족 동포 분들이 제겐 그랬습니다.
한중 갈등에 아파하다
그렇게 해서 어느 새 10여 년이 흘렀고, 50세에 길을 잃고 도망치듯 중국에 왔는데, 뜻밖에 어쩌다 길이 되어버린 조선족 대상 봉사활동을 하다, 어언 환갑을 지나 올해 63세에 이르렀습니다.
앞에서 제가 제법 많은 일들이 성취되었음을 자랑하듯 나열했는데, 그러나 돌이켜보면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고, 어렵고 힘든 문제들은 지금도 계속 발생되고 있습니다.
특히나 한중관계가 어려워지면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숨이 막힐 만큼 생존에 위협을 느낍니다. 평소에도 역사문제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부딪치며 민감해서 매우 조심해야 했지만, 설상가상 사드 사태 등 정치적으로 꼬이면 한국인은 택시 탑승을 거절당할 만큼 배척됩니다. 지금도 한중관계가 소원해지면 겁부터 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동주학당이 야심차게 윤동주문화원을 설립했으나, 윤동주의 국적문제가 불거지면서 설립 1년 만에 활동을 접어야 했고, 개인적으로는 문화간첩으로 오해받아 특정 지역에 출입이 막힌 적도 있었습니다.
살펴보면, 중국인들은 조건 없는 봉사를 믿지 않습니다. 조선족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분명히 숨겨진 다른 목적이 있다고 의심합니다. 그리고 문화는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침투 등 정치적인 오해로 몰면, 어느 친구도 나서서 저를 변호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게 중국이고 그게 조선족의 입장임을, 너무 아프고 안타깝지만 이제는 이해하고 인정합니다.
한편, 한때는 한국 정부도 저를 오해해서, 제가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역인 압록강 지역을 자주 오고가니까, 인천공항에 입국할 때마다 혹시 친북간첩이 아닐까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한국과 중국이 모두 저를 의심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있었습니다.
흔히 우리나라 외교를 ‘안미경중’(安美經中)이라고 말합니다. 안보는 미국이요, 경제는 중국이라는 뜻입니다. 양쪽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다리기 외교만큼, 재중 한국교민들의 마음도 불안하고 위태롭습니다. 어찌되었거나 서로 신뢰하고 미래지향적으로 협조하는 훈훈한 한중관계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조선족 전성시대’가 온다
제가 중국에서 만나본 조선족들은 현재 중국인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아울러 한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어디 가도 비주류요, 이방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1950년대 초에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으로 편입되어, 그동안 중국인으로 산 세월이 미처 70년이 되지 않습니다. 아직 중국의 주류인 한족들과의 융화가 문화 차이로 쉽지만은 않고, 마찬가지로 모국인 한국에 와서도 여전히 차별받는 비주류요, 이방인입니다.
현재 조선족 부모와 자녀들은 매우 고민합니다. 중국에서는 점차 조선족에 대한 우대조치가 사라지고, 얼마 전 조선족학교를 향해 앞으로 조선말이 아닌 중국어로 교육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그동안 조선어로 시험 보아 다소 유리했는데, 앞으로는 대학시험도 중국어로 쳐야 합니다.
그러자 조선족 유치원과 학교에는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빨리 중국 한족학교로 옮겨가야 그나마 중국 학생들을 따라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조선족 학생들이 한족 학생들과 경쟁에서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대학을 나와도 갈 곳이 거의 없습니다.
얼마 전 조선족 대학생연합회 대표들과 대화했는데, 그들의 대다수가 원하는 꿈이 커피숍이나 식당을 꾸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 외에는 별다른 기회가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 조선족들에게 저는 이제 곧 ‘조선족의 전성시대’가 온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입니다. 이는 굳이 정치적 통일이 아니더라도, 상호간 화해협력을 기반으로 북한이 경제적으로 개방하는 시대를 의미합니다. 이때가 되면 조선족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바, 이를 잘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외칩니다. “조선족은 어디 가나 비주류요 이방인이 아니라, 향후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에 모두가 필요로 하는 핵심인재들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미리 점지(點指)하고 100년 전부터 중국 땅에 선발대로 보낸, 최고의 일꾼들입니다.” 저는 이런 점들을 우리 조선족들에게 분명히 가르쳐주려 합니다.
저의 그런 주장의 근거는 세계적인 투자자 짐 로저스의 분석에 기초합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제 인생 이모작의 꿈도 거기서 같이 출발합니다.
20년 전부터 중국의 획기적 성장을 예견했던 짐 로저스는, 이제 일본의 시대는 끝이 났고, 앞으로는 북한의 개방을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북한의 개방은 분명 대한민국과 한민족의 미래에 가장 큰 기회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합니다. 저도 이 주장에 100% 공감하며 진실로 기대하며 설렙니다.
‘조선족 희망전도사’의 꿈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중국에서도 가끔은 강의를 할 기회가 생깁니다. 대부분은 조선족단체 모임이고, 한국국제학교 학생들에게도 할 기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공통적으로 빠지지 않고 제가 설파(說破)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조선족이여,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의 실무주역이 되자!’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독일 통일 이후의 상황에 주목합니다. 1989년 서독과 동독이 통일할 때 양국의 경제력 차이는 8:1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32년간 동독의 발전을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서독과 동독은 아직 2:1 이상의 격차 상태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과 북한은 3년 전 기준으로 경제력 차이가 무려 44:1입니다. 이 격차를 해소하자면 적어도 향후 50년 이상의 투자와 인적교류가 무조건 필요합니다. 그때에 필요한 실무인력으로 조선족보다 더 경쟁력 있는 집단은 없다고 저는 감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북한이 문을 열면, 서울 청년들이 평양 청년들과 별 갈등 없이 일할 수 있을까요? 저는 매우 어렵다고 봅니다. 당장에 한국인과 조선족도 문화인식 차이가 작지 않은데, 남북한 간에는 불가피하게 갈등해소 시간과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소요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한국의 자본주의도 충분히 알고, 중국의 공산주의 체제에도 잘 적응하고 있는 조선족만의 실무역할 영역이, 다가올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에 차별적 블루오션(Blue Ocean)으로 분명히 생겨날 것이라 저는 판단합니다.
앞으로 적어도 50년 동안은 조선족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활짝 열릴 것입니다. 그러하니 조선족이라면, 기본적으로 우리말은 무조건 똑똑히 배워두고, 능력이 되면 한국의 기술이나 장점을 잘 공부해두라는 조언을 조선족 청년과 부모들에게 진심을 다해 전해줍니다.
그렇게 강의하며 말하고 다니다 보니, 일부 조선족들이 제게 붙여준 별명이 ‘조선족 희망전도사’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별명이 참으로 과분하지만 제 마음에도 흡족하게 스며듭니다. 더 노력해서 진짜 ‘조선족 희망전도사’로 살아보자는 꿈도 생겨났습니다.
대륙에서 길을 묻다
나라 잃은 슬픔 속에서 민족시인 윤동주는 그의 시 ‘길’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게 나아갑니다.’ 아마도 나이 50에 직업과 가정과 신앙의 동반 몰락을 경험하면서 도망치듯 중국으로 넘어온 때의 제 심정과 조금은 닮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운을 차려, 작고 소박하지만 같은 민족으로서의 안타까움과 애정을 담아, 혹시라도 저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에, 특별히 조선족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달려갔던 중국에서의 지난 10여 년을 정리해봅니다.
중국의 대문호 노신(魯迅) 선생이 청년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말했던, ‘처음부터 길은 없었다. 사람들이 다니면서 비로소 길이 되었다’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처음엔 미처 길인 줄 몰랐는데 저도 어찌어찌 십여 년을 지나고 보니, 이젠 나름 하나의 길처럼 느껴집니다.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했던 한심한 존재가, 어쩌다 타국 땅에서 문화 봉사를 통한 희망전도사로 모질게 살아남아 있습니다. 30~40대의 젊고 풍요로울 때 그렇게도 갈구했으나 찾지 못했던 인생의 참 의미와 가치를, 어리석게도 60을 훌쩍 넘어 늙고 가난해지면서 비로소 조금씩 깨닫고 배워갑니다.
그동안 중국에 와서 개인적으로 절망하며 힘들었을 때, 제게 특별한 위로가 되어준 시(詩)가 있습니다. 정호승(鄭浩承) 시인의 ‘봄 길’입니다.
봄 길
-정 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김영식이 있다’
이제 고백합니다. 정호승 시인의 ‘봄 길’은, 제가 대륙에 와서 길을 묻다가 십 수년 만에 찾아내어 저 스스로에게 답한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저는 시의 마지막 구절 뒤에 한 줄을 더 보태어, ‘김영식이 있다’를 다짐처럼 홀로 외치기도 했습니다.
오늘도 길을 잃고 다시 길을 찾는 분들에게 지난날 저의 절망도 작은 위로 중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깜깜한 절망 속에서 위로를 받았듯, 많은 분들이 그랬으면 좋겠고, 앞으로 살면서 서로에게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봄 길’의 내용처럼 희망이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하늘이 허락하셔서, 제게도 ‘인생의 이모작’이 가능하다면, 우선은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에 무한 감사하며, 이제부터는 중국 땅에서 한 핏줄 동포를 향한 희망전도사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아가 더 축복해주신다면, 30여 년 전 제가 아들 이름을 ‘금강산(金剛山)’이라 지었던 그 기도의 응답까지 받아서, 북녘의 아버지 고향 땅에 달려가 입 맞추고, 거기 그분들을 뜨겁게 보듬다, 그곳에서 그분들과 함께 묻히고 싶습니다. 이런 저의 마지막 소망이 너무 큰 욕심일까요?
•수상소감 - 대상 미니자서전 김영식
“중국 조선족 100년의 이야기를 중국판 처럼 작품으로 써 세상에 알리겠다”
•대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수상 소감은?
저는 7살 어릴 적 시골에서, 코 흘리게 손수건을 왼쪽 가슴에 달고 소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학교 가는 게 너무너무 좋아서,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1학년을 마치는 날, 담임선생님께서는 제 이름을 호명하시며 뜻밖에 1등 우등상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태어나 받은 ‘첫 상(賞)’이었습니다.
우등상 상품은 공책 한 권과 연필 두 자루였습니다. 그걸 들고 낮은 언덕의 신작로 길을 뛰어 어머니께로 달려갈 때, 저는 얼마나 가슴이 뛰며 기뻤는지 모릅니다. 만나는 모든 분들에게 막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로부터 어언 56년이 지났습니다. 어쩌면 ‘마지막 상(賞)’일지도 모르는 이번 상이 저에게는 그때만큼이나 기쁩니다. 그때만큼이나 설렙니다.
저에게 이렇게 설레고 행복한 순간을 선물로 주신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의 주최한 브라보와 신한은행의 관계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인사 드립니다.
이번에 제가 쓴, 미니 자서전 는, 어쩌면 교만했던 인생의 부끄러운 고백이고, 뻔뻔한 반성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특별히 큰 상을 주신 뜻은, 아마도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저 나름 생각해 봅니다.
하나는,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인생 이모작’에 도전하라는 따뜻한 격려로 느껴집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대만큼 열심히 새로운 길에 도전하며 살겠습니다.
또 하나 이번 상은, 제 글쓰기에 대해 숙제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를 통해, 세상에 조금이나마 ‘선한 영향력을’ 보태라는 명령입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늘 정직하고 공감과 위로를 주며, 보존할 가치가 있는 글을 쓰겠습니다.
다시 한 번, 큰 상을 주신 브라보와 신한은행에 감사드리며, 끝으로, 조국 대한민국의 조속한 코로나 승리를 기도하고 응원하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응모 배경이나 동기는?
저는 현재 중국 심양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생활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지난해 설 명절을 지내고 중국에 온 후, 한국에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난해 말에는 운동 중 아킬레스건이 파열되어, 중국에서 수술을 받고 3개월을 치료한 후 현재는 재활 중입니다.
한국의 가족도 한국의 소식도 모두 그립습니다. 한국뉴스를 검색하다가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을 발견했습니다. 그중에 특별히 ‘50+’라는 표현에 많은 생각이 스쳤습니다. 제가 사업에 실패하고 도망치듯 중국에 온 것이, 바로 50세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타향살이 어언 13년이 흘러, 갑자기 코로나로 멈춘 일상 속에서 지나온 저의 인생을 되돌아 반추해보는, 귀한 시간을 가져 보게 되었습니다. 뜻밖에 좋은 기회를 주셔서 정말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시니어 공모전을 통해 ‘인생 이모작’도 새로이 꿈꾸게 되었습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글을 잘 쓰기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기왕에 제가 쓴 글이 독자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며 더 잘 읽히면 좋겠다는 차원에서의 노력은, 제가 많이 부족해서 앞으로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소 저의 글은 딱딱하고 설명형입니다. 재미없는 제 성격과 꼭 닮았습니다. 게다가 글쓰기로 처음 상을 탄 것이 대학 때 논문공모대회였고, 대기업에서 기획담당자였기에 더더욱 저의 글은, 사사로운 감정이 담기지 않은, 그래서 재미와 감동이 ‘1’도 없는 필법(筆法)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개인적으로 지난 10여 년간, 중국에 와서 여러 종류의 한글 잡지를 만들고 배포했는데, 주된 독자층이었던 중국조선족들은 한국인들에 비해 우리말 어휘력이 30% 수준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글은 그저 수준 높고(?) 어려운 글이었습니다.
로 유명한 미국작가 훼밍웨이가 어느 회고문에서 자신의 독자로부터 받은 편지 하나를 소개했습니다. 전쟁 파병(아마도 한국전쟁) 중인 미군병사가 자신의 소설을 읽고 나서, 어려운 단어가 없어 ‘사전(辭典)찾기 ’없이도 100% 공감하며 큰 감동을 받았다는 감사편지였습니다.
저 역시, 쉽고도 감동적인 글, 그리고 오래 간직하고픈 글을 쓰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글을 쓰는데 도움을 준 멘토나 동기부여 이유가 있다면?
직접적인 멘토는 아니지만, 제가 특별히 닮고 싶은 작가가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한국의 유명한 시인 류시화이고, 또 한 분은 의 저자이자 인류학자인 미국의 루스 베네딕트 교수입니다.
시인 류시화는 개인적으로 저와 고등학교 동기동창입니다. 본명은 안재찬이며, 대광고등학교 30회로, 고교 2,3학년을 같은 반에서 공부했습니다. 경희대학교 2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당선된 그는, 인도 여행을 다녀와서 쓴 수필집 및 시집 등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인기작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글은 쉬우면서도 깨달음을 줍니다. 저도 글을 쓴다면 그런 면을 배우며 닮고 싶습니다.
다음은 미국의 여성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 교수인데, 제가 단동에서 항일유적연구소장을 할 때, 그분의 저서 을 읽었습니다. 2차 대전 전쟁을 종료하기 직전에 미국이 일본에 대해서 분석한 책으로,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인들에게 일본과 일본인 분석에 관한 제 1의 필독서입니다.
같은 패망국인 독일과는 달리, 일본은 왜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가에 나름의 분석이 명쾌합니다. 일본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상태에서 쓴 글이라는 점도 놀랍고, 냉철한 대안 제시가 전후(戰後) 미국과 일본의 관계설정에 기준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대단히 유효합니다.
일본에 대해 비판만하고 흥분만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나는 중국인에게 대한민국에 대해 얼마만큼 설명할 수 있는가, 또는 한국에 와서는 중국에 대하여, 그리고 제가 중시하는 중국 조선족에 대해서, 나는 얼마만큼 본질을 명쾌하게 공부했는가에 대해 통렬하게 반성하게 하는 책입니다. 중국판 같은 글에도 도전하고 싶은 이유입니다.
•수상을 계기로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얼마 전 미국 아카데미상에서 영화 가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70년 전 조선인의 미국 이민사를 소재로 한 영화인데,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제 주변의 중국조선족들을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100년 전후로 대륙에 이주해 왔고, 영화 미나리 이상의 휴먼 스토리가 얼마든지 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향후 중국 조선족 100년의 이야기를 중국판 처럼 작품으로 써서 세상에 알리는 것도, 이번 상(賞)을 통하여 저에게 주신, 귀한 소명 중 하나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감사와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많은 사람이 있지만, 딱 한사람만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저의 여동생 ‘김경희’를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교만한 실패와 방황, 그리고 대륙에서 길을 묻는 지난 10여 년 동안, 개인적으로는 부끄럽게도 맏아들로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저희 어머님께 제가 한 때는 자랑이던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걱정을 끼치는 아들로 살고 있는데, 그 빈자리를 저의 여동생이 말없이 채워주고 있습니다.
여동생 김경희는 제 인생에서 가장 미안하고 가장 고마운 존재입니다. 이번에 받은 저의 수상이, 제 여동생에게도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나이 되어서 그래도 당신을 만나서 고맙소, 고맙소, 늘 사랑하오.’ 가수 김호중이 방황하던 학창 시절 자신을 바로 잡아준 고등학교 선생님을 생각하며 불러 화제를 모았던 노래다. 그 사연처럼 누구나 인생에 잊을 수 없는 스승이 있다. 교정을 떠난 지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도 스승의 은혜는 가슴에 영원히 남는다.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사제 간의 정을 느낄 수 있는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완득이 (Punch, 2011)
‘참된 스승’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제자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상처가 있는 학생을 응원으로 북돋아 주는 선생님. 이를테면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같은 이를 두고 참된 스승이라 부른다. 영화 ‘완득이’에서 완득이의 담임을 맡은 동주는 그와 거리가 멀다. 따뜻한 말 한마디는커녕 제자들 앞에서 욕을 서슴지 않고, “안 될 애들은 지금부터 해도 안 된다”며 성적 관리도 손을 놓는다. 매사에 무관심한 그지만, 문제아 완득이 앞에서만큼은 이상한 오지랖을 부린다. 숨기고 싶은 가정사를 폭로하는가 하면, 집에 찾아와 귀찮게 한다. 그런 관심이 싫은 완득이는 “똥주 좀 죽여달라”고 기도까지 한다. 이상적인 사제 관계가 아님에도, 영화를 보는 내내 입가에는 미소가 지워지지 않는다. 동주의 거친 표현이 제자를 바로잡기 위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있어서다. 이처럼 영화는 문제아와 타성에 젖은 교사, 평범하지 않은 사제 간의 교감을 다정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동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김윤석과 유아인 두 배우의 열연이 원작의 감동을 되살렸다는 평을 받는다.
2. 땐뽀걸즈 (Dance sports Girls, 2016)
친구들이 공부와 취업 준비에 한창일 때, 춤바람이 난 소녀들이 있다. 그 중심에는 구수한 거제 사투리가 매력인 이규호 선생님이 있다. 실화 바탕의 다큐멘터리 영화 ‘땐뽀걸즈’는 거제여자상업고등학교 댄스 스포츠 동아리 학생들이 이규호 선생님과 함께 대회를 준비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는 대회 당일 무대를 앞두고 분주히 움직이는 제자들과 그런 아이들을 독려하는 이규호 선생님의 모습을 담으며 시작된다. “쌤이 볼 때 대상감은 아니고”라며 장난스러운 농담을 던지다가도 “입상 안 해도 괜찮다. 참가하는 데 의미가 있다”며 도전 자체에 응원을 보내는 이규호 선생님의 특별한 제자 사랑은 러닝타임 내내 눈에 띈다. 화려한 댄스 스포츠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드라마틱한 사건은 없다. 그저 대회에 나가기 전까지 연습 과정과 그 안에서 꽃피는 사제 간의 정을 잔잔하게 비춘다. 중간중간 화면에 잡히는 한적한 시골 풍경과 푸르른 녹음도 영화의 평화로운 분위기를 더한다. 영화를 본 이들은 그 자체로 “힐링이 된다”는 반응. 여고생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귓가에 남는 작품이다.
3. 선생 김봉두 (Teacher Mr. Kim, 2003)
사제 간의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는 대개 스승이 인생의 길라잡이로서 문제를 일으키거나 방황하는 제자의 멘토가 되어주는 내용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영화 ‘선생 김봉두’에서는 초등 교사 김봉두가 문제다. 교재 연구보다는 술을 좋아하고, 학부모들에게 촌지를 적극 권장하는 전형적인 불량 선생이다. 영화는 그런 그가 ‘돈 봉투 사건’으로 시골의 작은 학교에 좌천되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전교생이 5명뿐인 엉성한 학교, 한글을 가르쳐달라는 할아버지 등 만만치 않은 시골 생활에 난관을 맞은 봉두의 모습은 시종일관 웃음을 유발한다. 견디다 못한 봉두는 학생들의 특기를 찾아 서울로 전학을 보내고 자신도 돌아가기 위해 ‘방과 후 특별과외’를 시작하는데, 이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아이들과 가까워지며 저마다의 아픈 사연도 알아나간다. 빵빵 터뜨리던 초반과 달리 찡한 반전이 가슴을 울리는 영화 ‘선생 김봉두’는 차승원 표 코미디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시골을 배경으로 한 정겨운 분위기와 더불어 등 자전거 탄 풍경의 ‘보물’, 양희은의 ‘내 어린 날의 학교’ 등 감성적인 OST가 향수를 자극한다.
20대가 되기 전까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바로 학교다.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 선생님과의 관계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기도 한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속 키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영감과 동기를 불어넣은 것처럼. 덕양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폐교 위기 학교를 혁신학교의 대명사로 변화시킨 이준원(65) 교장을 만나 참스승으로서의 삶과 교육에 대한 철학을 들어봤다.
지난해 방영된 EBS 다큐멘터리 ‘무엇이 학교를 바꾸는가’는 공교육 혁신 모델 사례로 덕양중학교의 일대기를 다뤘다.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덕양중학교는 교육청으로부터 지속적으로 폐교 요청을 받았던 학교다. 폐교 위기의 학교가 8년 만에 어떻게 공교육 혁신 모델로 우뚝 선 것일까? 그 변화의 열쇠는 이준원 교장이 쥐고 있었다. 그가 2020년 정년으로 퇴임하기 전까지 8년의 세월 동안 덕양중학교에는 그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었다. 처음 그가 부임했을 때 덕양중학교는 어떤 상태였을까?
“제가 교장으로 왔을 때 덕양중학교는 매년 교육청으로부터 폐교 압박을 받을 만큼 다 쓰러져가는 학교였습니다. 교육장님이 오셔서 학생 수를 늘려야 한다고 당부하고 가셨죠. 제가 부임하던 해 인근 초등학교 6학년이 12명이었는데, 이마저도 확실치 않았어요. 4명은 다른 곳으로 간다고 했기에 실질적인 중학교 입학 인원이 8명이었죠. 당장 중3 아이들이 졸업하면 전교생이 100명 이하로 떨어질 게 불 보듯 뻔했어요. 그래서 학생을 유치하려고 학군 외에 있는 초등학교 6학년 학부모를 만나 저의 비전을 설명하면서 설득했죠. 발품을 판 덕분에 그해 40명 정도 입학할 수 있었어요.”
그렇다면 왜 덕양중학교였을까? 교장 공모제란 절차로 부임했는데, 굳이 폐교 위기인 학교의 교장이 되려고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초임 시절부터 교직을 마칠 때까지 어려운 학교만 골라 다녔어요. 겉으로만 봐서는 잘 모르지만, 사실 우리 모두 내면의 상처를 안고 살아요. 학생들도 마찬가지고요. 특히 외부적인 요인 때문에 아픈 친구들이 많았죠. 가정 형편이 어렵다거나 부모님이 이혼했다거나 여러 가지 아픔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을 교사로서 지도하고 보듬고 싶었어요. 좋은 학군에서 자라 학원에서 미리 선행학습을 한 덕분에 공부도 잘하고 말도 잘 듣는 친구들이 있는 학교에 갈 수도 있겠죠.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런 학교에는 가고 싶지 않았어요. 스스로 ‘그런 친구들에게 교사로서 어떤 역할을 해줄 수 있을까?’ 물었을 때, 그에 대한 대답을 쉽사리 하지 못했거든요.”
실패한 교사의 고백
오랜 세월 교직에 있었던 그가 생각하는 교사의 역할은 무엇일까?
“학교는 학원이 아니죠. 지식의 전달도 중요하지만 학교는 함께 어울려 살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식의 양을 측정하는 곳이 아니라, 인간답게 존중받고 인간답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좋지 못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손을 잡고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어둡고 깜깜한 터널 속에서 헤매고 있는 아이들 앞을 밝게 비추는 한 줄기 빛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는 그것이 교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평교사 시절의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40대 이전에는 실패한 교사였다”고 고백했다.
“사실 마흔 살이 되기 전에는 가면을 쓰고 살았죠. 동료한테 인정받는 선생님, 잘 가르치는 선생님, 친절한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요. 얼굴 표정과 내면의 모습이 너무나도 달랐죠. 마음의 병이 생기는 줄도 모르고 분노나 스트레스를 억누르기만 했어요. 어디 가서 내색도 잘 안 하고 그렇게 다녔는데, 일 년에 한 번씩 축적된 화가 폭발했어요. 그 화는 고스란히 학생과 아내에게 돌아갔어요. 이렇게 제가 불안정하다 보니 아내와 이혼 위기까지 갔고, 어머니와 아내의 갈등은 갈수록 깊어졌어요.”
도저히 이렇게 살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마흔 살을 앞두고 큰 결심을 한다. 치유 상담을 받아보기로 한 것.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한 선택은 그의 앞길을 바꾸는 교두보가 됐다.
“매주 월요일 저녁마다 치유상담연구원으로 달려갔어요. 내면 치유를 통해 저는 다른 사람으로 거듭났죠. 내면 치유란 것이 특별한 게 아니에요. 그냥 다 같이 모여 각자의 상처를 꺼내놓으면서 서로를 보듬는 일이에요. 저 역시 이제껏 남들에게 말하지 못했던 아픔과 분노, 슬픔을 모두 솔직하게 인정하고 털어내는 일을 그때 했어요. 그 이후론 제 삶이 변했어요. 아내와의 관계도 좋아지고, 학생들과의 관계도 개선되고, 어머니와 아내 사이의 갈등도 눈 녹듯이 사라졌죠. 그때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면 누구나 상처가 있다는 거예요. 이후 삶의 방향이 이때 결정되었을지도 몰라요. 제가 덕양중학교를 택하고, 그 학교에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경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속적인 관심과 환대
그가 고백했듯이 한때 가면을 쓴 채 가식적으로 아이들을 대했던 그는 내면 치유 이후 놀랍게 변했다. 그의 변화는 앞서 소개한 EBS 다큐멘터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졸업식 날 졸업장을 받으러 단상 위에 올라오는 학생들은 이준원 교장 앞에서 어김없이 눈물을 보였다. 정년 퇴임식에서는 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모두 울면서 그를 떠나보냈다. 그 울음의 원인은 모두 한 사람이었다. 그를 보내지 못하는 마음이 모두의 속눈썹을 촉촉하게 했다. 그들은 왜 그리도 아쉬워했을까? 그들에게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재임 시절 누군가를 만날 때 교장이란 지위를 앞세우지 않았어요. 학교 내의 직원과 학생, 그리고 학부모를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났어요. 당연히 차별하지 않았고요. 모두 그 마음을 알아주셨던 것 같아요. 8년 동안 덕양중학교에 있었는데, 사실 4년쯤 하고 나서 다른 곳으로 가야 했죠. 가기로 해놓고 날짜만 기다리고 있는데, 교장실에 학부모님들이 찾아오시더군요. 가끔 그렇게 스스럼없이 찾아오시곤 해서, 그날도 어김없이 재밌게 대화를 나눴죠. 그런데 끝에 다들 ‘다른 데 안 가시죠?’라고 말씀하시더군요.(웃음) 부족한 저를 붙잡아주시는 게 정말 감사했어요. 그때 운 좋게 중임이 가능해지면서 한 번 더 열심히 하게 됐죠.”
실제로 그는 학교 내 구성원에게 세심하게 다가갔다. 얼마나 세심한지 교무실에서 일하는 행정실무사의 생일도 챙길 정도였다. 특히 그는 매일 등교 시간에 교문으로 나가서 아이들을 맞았다. 등교하는 학생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아침을 열었다. 8년 내내.
“아이들이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가는 그 순간까지 모두 교육의 연장선이에요. 아이들은 환경과 사람에게 아주 많은 영향을 받죠. 제가 모두를 따뜻하게 대한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에요. 제가 만약 배식하는 아주머니를 함부로 대하면, 아주머니도 배식하면서 아이들을 함부로 대할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모두를 정성스럽고 따뜻하게 대했어요. 매일 아침 교문에서 아이들과 하이파이브한 것도 그런 차원에서였죠.”
하지만 하이파이브만으로는 아이들이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쉽게 열지 않았을 터. 그만의 소통법이 궁금했다. 그는 “아이들에게는 지속적인 관심과 환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먼저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죠. 그들의 얘기를 지속적으로 경청했어요. 그 과정에서 그들의 아픔을 헤아리려고 노력했고요. 예를 들어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경험이 있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것이 그 친구에게 가장 큰 상처였더군요. 그 이후 어긋나기 시작했고, 소위 말하는 주먹 좀 쓰고 다니던 친구였어요. 할머니와 살았는데 가정 형편이 어려웠죠. 영하 10℃ 날씨에도 롱 패딩을 못 사서 매일 얇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다녔어요. 자존심은 세서 롱 패딩 입고 다니는 애들 보고 이불을 덮고 다닌다며 깔보더군요. 어느 추운 겨울날 교문 앞에서 그를 만나 ‘춥지?’ 하면서 핫팩을 주머니에 넣어줬어요. 날카로웠던 평소의 눈빛이 봄눈처럼 사라지고, 오히려 ‘교장 선생님은요?’ 하고 따뜻하게 묻더군요. 관심이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켜요. 그동안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고 아이들을 따뜻하게 대하려고 노력했어요.”
진심으로 다가가기
그의 환대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같이 일하는 동료 교사와 학부모에게까지 이어졌다. 그는 교사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었고, 매주 목요일 ‘이슬비 사랑 학부모 교실’을 통해 학부모와 소통했다.
“혁신학교가 될 수 있었던 동력 중 하나는 교사들의 자발적인 참여 덕분이었어요. 일종의 집단지성이 만들어졌죠. 교사들의 단점 대신 장점을 발굴하려고 노력했어요. 단점을 찍어서 고치려고 하면 잠깐 바뀌는 척만 할 뿐이에요. 진심으로 변화시키려면 그 사람의 장점을 키워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그렇게 모두의 장점이 뭉쳐서 하나의 집단지성을 만들어내는 일을 교장을 하면서 많이 경험했어요. 학부모 모임에서는 가정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아픔에 대해 경청하려고 노력했어요. 가정은 또 다른 학교나 다름없어요. 가정에 문제가 있으면 아이의 표정이 아침부터 밝지 않거든요. 놀라운 건 모임을 통해 학부모의 상처나 아픔에 대해 서로 듣고 공감하는 시간만 가졌을 뿐인데, 이후 그 모임에 참가한 학부모의 아이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어요.”
그의 말처럼 아이들에게 가정은 또 다른 학교라고 할 만큼 중요하다. 그렇다면 사춘기 손주를 둔 시니어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가면 좋을까? 손주와 같이 사는 그에게 한번 물어봤다.
“잔소리 대신 전폭적으로 사랑하고 지지하되 깜짝 놀라게 반응하는 게 좋아요. 잘했을 때는 ‘진짜 잘했어!’라는 말과 함께 기쁜 표정으로 맞이해주면 좋아해요. 그들이 가진 본연의 감정을 직시하고 공감해주면 돼요. 아이들은 스스로 존중받을 때 말문을 열어요. 그래서 다짜고짜 다그치고 비난하는 것보다는 언어, 표정, 눈빛으로 아이들과 소통하는 것이 중요해요.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걸 알게 해줄수록 아이들은 달라져요.”
끝으로 그가 생각하는 참스승의 모습과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봤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따뜻한 환대를 맛본 사람은 그것을 잊지 못해요. 아이들도 마찬가지예요. 진심으로 따뜻한 환대를 받아본 아이들은 커서도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다가갈 줄 아는 어른이 되는 법이죠. 이는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고, 내면으로부터 큰 변화가 있어야 생길 수 있어요. 그래서 늘 아이들의 상처에 귀 기울이며 진심으로 다가가려고 노력했어요. 그것이 참스승의 길이라고 생각하면서요. Turn your scars into stars.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속담이에요. 상처를 희망의 별로 바꾸는 일. 아이들의 상처를 보듬어서, 그것을 큰 밑거름으로 만들어주는 일. 참스승의 역할은 그런 것이 아닐까요? 앞으론 제가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순회강연을 할 예정이에요. 제 얘기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희망의 별이 되기를 바라면서요.”
폐교 위기의 학교를 정상화하려면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까? 8년의 교장 생활은 보람도 있었겠지만, 그 이면에는 고충도 있었다. 용인에서 고양까지의 긴 출근 거리로 인해 8년 내내 주말부부를 감수해야 했다. 교육 현장에서 실험적인 시도를 하는 그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고, 그를 믿고 따라왔던 학생·학부모·교사들이 있었기에 그 일을 해낼 수 있었다. 그가 학교에 있었던 8년 사이 학생 수는 늘어났고, 학습 부진아를 찾아볼 수 없는 학교로 성장했다. 그가 연단에 서면 떠드는 아이들이 없을 정도로 아이들은 그를 존경하고 존중했다.
졸업식에서 이준원 교장을 보고 눈물 흘리던 교사와 학부모, 학생들. 처음에는 그 광경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를 만나고 나서 다큐멘터리의 그 장면을 이해하게 됐다. 남의 아픔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 남의 얘기를 경청하고자 하는 마음. 이 모든 것은 진심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진심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오늘도 별처럼 빛나는 진심을 품고 미래 세대를 위한 강연을 하고 있을 그를 응원하며 마친다.
조부모는 손주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삶의 지혜를 들려주는 역할을 맡는다. 동서양과 시대를 막론하고 그랬다. 다만 세월이 흐르면서 조부모의 역할과 모습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조부모의 모습을 통해 좋은 조부모로서 갖춰야 할 자세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당신은 어머니의 형상을 한 천사였어요. 내가 넘어질 때면, 당신이 와 날 잡아주겠죠. 날개를 펼친 모습으로 멀어질 테죠. 그리고 신이 당신을 데리고 돌아갈 때,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집에 돌아왔구나.’ 영국 출신의 1991년생 싱어송라이터 에드 시런이 자신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쓴 ‘Supermarket Flowers’의 가사다.
그는 뛰어난 작곡 실력과 아름다운 목소리로 2010년대 전 세계 음악 시장을 휩쓸었다. 인지도와 수익 등을 고려했을 때 세계적으로 뛰어난 아티스트로 손꼽힌다. 그는 “좋든 나쁘든 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저의 첫 반응은 기타를 잡는 것입니다”라고 할 만큼 일상 속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 앞서 소개한 곡은 외할머니 사후에 추모하기 위해 만든 곡으로, 어머니의 관점에서 쓴 가사다.
가수로서의 명성도 대단하지만 효손으로도 유명하다. 한창 앨범을 만드는 데 박차를 가하는 와중에도 당시 아프셨던 외할머니의 병동에 매일 찾아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곡이 수록된 앨범에는 ‘Nancy Mulligan’이란 곡이 있다. 곡 제목은 외할머니의 이름에서 따왔고, 이 노래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사랑 얘기를 그리고 있다. 그가 이렇게까지 외할머니를 아꼈던 것은 그의 과거와 무관하지 않다.
학창 시절 그는 빨간 머리 때문에 생강 소년으로 불렸고, 어릴 때 잘못된 수술로 인해 말을 더듬는 증세가 있었다. 이런 특징 때문에 학교 내에서 왕따를 당했다. 무명 시절에는 노숙자 신세를 면치 못했다. 하지만 SNS를 통해 그의 실력이 입소문 나면서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됐다. 가수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노랫말처럼 외할머니의 조건 없는 사랑과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격대교육과 학조부모
조부모는 사랑을 전해주는 ‘천사’의 역할과 더불어 지혜의 ‘길잡이’ 역할도 한다. 조선 시대에는 ‘격대교육’이 있었다. 격대교육이란 조부모가 부모를 대신해 손주를 교육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에 따르면 포손불포자(抱孫不抱子)라 하여, 군자라면 손주는 안아도 아들은 안지 않는다고 했다. 격대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굳이 왜 이렇게 한 것일까? 그 이유는 ‘맹자’에 나온다. ‘맹자’에 실린 내용에 따르면 아버지가 자식을 직접 가르치면 기대가 지나치기 때문에 오히려 갈등이 생긴다고 했다. 이러한 이유로 한 세대를 건너뛰고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퇴계 이황 선생은 맏손주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격대교육을 했다고 전해진다. 시대가 달라도 말하는 주제는 비슷했다. 특히 맏손주가 과거 공부를 게을리한다는 소식을 듣고 꾸중하는 편지를 보내서 손주를 타일렀다. 퇴계 선생은 과거 공부를 출세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한 가정의 가장이자 사회인으로서 생업에 종사하는 것을 장려했기에 과거 공부를 게을리하는 손주를 혼낸 것이다.
또한 원칙과 도리를 지키고, 마음가짐을 바르게 할 것을 늘 당부했다. 예를 들어 손주가 조정 대신을 많이 안다고 동네방네 자랑한다는 소식을 듣고 손주의 태도를 나무라기도 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실천하고 있었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퇴계 선생은 평소에 출처가 불분명한 물건은 받지 않았고, 원칙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손주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실제로 퇴계의 마지막 30일을 담은 문집을 쓴 이가 바로 맏손주다.
그렇다면 현재 조부모의 모습은 어떨까? 세월이 지나도 손주에 대한 교육열과 관심은 높다. 이른바 ‘학조부모’란 신조어도 탄생했다. 학부모와 조부모의 합성어로, 육아뿐만 아니라 취학 후에도 조부모가 손주의 교육을 담당하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교육 현장에서 ‘할머니 치맛바람이 거세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아동 및 청소년 교육 전문가는 “공개수업이나 상담에 참여하는 학부모님 가운데 조부모님이 많다. 조손 가정이 아니더라도 맞벌이 가정의 경우 조부모님이 학교에 오시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손주에 대한 사랑과 교육에 대한 열의는 좋지만, 사랑이라는 이유로 손주를 너무 다그치면 안 된다. 잘되라는 뜻으로 하는 얘기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반복되거나 듣기 싫은 말이 되면 잔소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손주에게 유연하게 접근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김대성 부산시교육청 학부모교육 강사는 “전달할 내용을 무조건 단호하게 말하기보다는, 따뜻한 태도로 공감하는 표현을 먼저 하고 난 뒤에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하는 것이 좋다”라고 말했다. 지혜의 길잡이로서 지혜 전수도 좋지만, 손주에 대한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
좋은 조부모가 되기 위해 알아야 할 3계명
❶ 마음 상태를 고려 ▶ ‘걱정’이라는 명분 아래 하는 말이지만 손주가 듣기 불편해한다면 그 말은 안 하는 것이 좋다. 잔소리와 조언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말하기 전에 손주의 마음 상태를 고려하자.
❷ 말은 따뜻하게 ▶ ‘개인’을 중요시하는 손주 세대의 특성을 고려하여, 그들의 마음 상태를 공감하고 따뜻한 표현을 써보자. 사실에 기반하는 것보다는 그 사실로 인한 아이의 마음 상태를 생각하자.
❸ 칭찬으로 자신감 UP ▶ 아이들은 칭찬을 받을수록 자신감이 올라간다. 사소한 부분일지라도 반복적으로 칭찬을 해주는 것이 좋다. 칭찬을 많이 받을수록 손주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활짝 열린 교문 앞 즐비하게 늘어선 꽃다발 행렬, 환하게 웃으며 친구들과 인사하는 학생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전 졸업식과 입학식 풍경이었다.
국내에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발생한 지 바야흐로 1년이다. 그동안 마스크는 필수품이 됐으며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사람들의 사회활동의 폭도 많이 좁아졌다. 학생들은 등교 대신 온라인 수업에 익숙해졌다. 이 같은 변화는 졸업과 입학 시즌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지난달 서울 원효초등학교와 우솔초등학교 등 일선 학교에서는 졸업생과 학부모가 온라인으로 참석할 수 있는 비대면 졸업식이 진행됐다. 졸업장만 받아 귀가하는 ‘드라이브스루 졸업식’, ‘워킹스루 졸업식’은 물론, 졸업장을 택배로 발송하는 방식 등 전통적인 졸업식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1~2월 졸업식 및 입학식 시즌이 ‘대목’이었던 관련 업계의 상황도 바뀌고 있다. 대표적인 졸업·입학 선물인 노트북은 흔히 1분기가 성수기다. 하지만 노트북 시장이 코로나19로 인해 지난해 하반기부터 성장하고 있다. 광주신세계에 따르면 2019년 하반기 대비 2020년 하반기의 노트북 판매량이 두 자릿수의 높은 성장세를 보였다. 또한 올해 역시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전망했다.
대학교 입학과 새 학기를 맞이해 옷 소비가 늘어나는 새내기들 사이에서는 패션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온라인 강의가 늘어나면서 화면에 보이는 상의에 초점을 맞추고 하의는 트레이닝복, 파자마 등 편하게 입는 ‘키보드 위 패션(Above Keyboard Dressing)’이 화제다. 여성 쇼핑 앱 지그재그가 지난해 1월부터 9월까지의 검색 빅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2020년 ‘상의’ 키워드 검색량이 전년 대비 54% 증가했고, ‘하의’ 키워드는 18% 증가했다.
대학가에서 온라인 강의가 일반화되고 화상 프로그램 사용이 늘어나면서 성형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코로나19 이전에는 ‘수능 성형’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능 직후에 대학 새내기들의 성형 상담과 성형수술이 몰려있었던 반면 비대면 생활이 확산되면서 상담 및 수술 일정을 여유롭게 정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새내기들이 관심을 갖는 부위도 다양해졌다. 코로나19 이전에는 한 번의 수술로 이미지 개선 효과가 큰 눈과 코에 대한 관심이 컸다면, 최근에는 눈, 코 외에도 얼굴형, 턱 등 다양한 부위에 대한 상담까지 늘고 있다. 기존에는 수술 후 부기 및 염증 관리에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관심이 있다 하더라도 상담이나 실제 수술로까지 이어지기 힘들었다. 반면 최근에는 화상 프로그램을 통해 화면에 콤플렉스 부위가 더 크게 노출되고 집에서 편히 회복할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바노바기 성형외과 반재상 대표원장은 “코로나19로 인해 외부 활동이 줄고 화상 프로그램 사용이 늘어나면서 대학 새내기 성형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며 “쌍꺼풀 수술, 눈매 교정술, 콧대 수술, 콧볼 축소술 등 눈과 코를 개선하는 수술뿐 아니라 안면윤곽수술, 가슴성형 등 다양한 부위에 대해 상담하는 경우가 늘었다”고 말했다.
“언니, 저 이번에 쇼핑몰 열었어요.”
학부모로 인연이 된 친구의 문자가 왔다. 링크를 타고 들어가니 알록달록 마스크 걸이를 파는 인터넷 쇼핑몰이다. 어린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핑크핑크는 물론 투명한 유리알이 조르르 연결된 것 등 예쁜 스타일이 꽤 많다. 마스크 착용이 일상이 되면서 하나의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 잡은 게 분명하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한 일이다.
이미 사용하는 마스크 걸이가 있지만 몇 가지 아이템을 골라 장바구니에 넣었다. 꼬맹이들을 위한 알록달록한 모양도 있었는데 손녀 몫으로 선택했다. 나중에 받아보니 내가 구매한 것 외에 2가지 아이템이 더 들어 있었다. 물건이 더 왔다고 연락했더니 "언니한테 어울릴 거 같아서 더 넣었어요." 한다. 이렇게 주면 남는 게 있나? 염려가 된다.
주말에 딸이 왔다. 요리조리 다니며 장난칠 궁리를 하던 손녀가 거실 탁자 위에 둔 마스크 걸이를 발견하고는 "할머니, 이거 나 가져도 돼요?" 한다. "엄마, 마스크 걸이가 왜 이렇게 많아?" 딸도 묻는다. 딸은 가느다란 검은색 마스크 걸이를, 손녀는 제 것 외에 투명한 것 하나를 더 고른다. 몇천 원짜리 선물로 아이들이 즐거워하니 마음이 뿌듯하다.
마스크 안 쓰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녀의 마스크 걸이가 많이 팔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겹치면서 예전에 우산장수 아들과 짚신장수 아들을 둔 어머니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비가 오는 날에는 짚신 파는 아들을 걱정하고 활짝 갠 날에는 우산 파는 아들을 걱정했다는 어머니.
아이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치는 친구인데 쇼핑몰을 시작한 걸 보면 코로나로 학원 운영에 차질이 생긴 게 분명하다. 요즘은 하나의 직업으론 살아남기 어렵다는 얘기가 실감난다. 땀 흘린 노동만 팔아서는 살아가기 어려운 시대. 자본이 많은 곳으로만 몰리는 시대. 경제적 자유를 외치면서도 성실하게 실력을 기르기보다 요행을 바라는 청년들이 늘어나는 시대.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노년의 경제적 불안이 늘어난 시대. 마스크 걸이가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 잡은 시대. 내일은 또 어떤 일이 생길까?
몇 년 전부터 나만의 북큐레이션으로 무장하고 독자와 호흡하는 소소한 이벤트로 세상에서 사라져가고 있던 동네 책방을 되살려내고 있는 책방지기들이 등장했다. 이곳 동네 책방 한쪽에 앉아 차 한 잔 마시며 조용히 책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가슴속 묻어뒀던 작은 행복 하나가 ‘똑똑’ 심장을 두드리며 응답한다.
“남에게 보이는 것보다 내가 행복한 삶’이 좋다. 오늘 당장 떠날 것, 가까운 동네 책방으로!!”
전국동네책방네트워크에 가입된 독립서점들을 살피다 보니 눈에 확 들어오는 이름이 있다. 마치 “저를 찾아와주세요… 저요, 저요” 하고 손을 드는 것처럼 시선을 붙잡아 맨 곳. 바로 ‘날일달월’이다.
일단 인터넷에서 ‘날일달월’ 웹사이트와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을 찾아봤다. 색다르다. 비건식당? 아니, 책방에서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음식을 판다고? 컴퓨터 모니터 화면 속에는 컬러풀한 채소들로 가지런히 상차림한 사진이 올라와 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이번 호에 소개할 동네 책방으로 선택했다.
‘날일달월’은 2호선 강변역 근처에 위치해 있다. 강변역에는 동서울터미널이 있어 늘 사람이 북적이고 어수선한 곳이다. 이런 번잡스런 곳에 독립서점이라니? 의아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동네 책방이 산골에도 생기고 우리 동네 구석탱이에도 있는데 터미널이 무슨 상관일까 싶었다.
건물 3층에 위치한 ‘날일달월’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열심히 채소를 씻던 분이 반겨준다. 먼저 점심 메뉴로 미역콩국수진지를 주문하고 창가에 앉았다. 한국의 마사 스튜어트라 불리는 이효재 씨와 언뜻 인상이 비슷하다.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광목 앞치마를 둘렀다. 한눈에 봐도 대표인 듯 보였다.
창가를 제외한 벽면에는 책들이 가득 꽂혀 있다. 찬찬히 살펴보니 출판사별로 칸이 나뉘어 있다. 서가를 살펴보다 음식 준비에 바쁜 주방으로 다가가 물었다. “혹시 이곳 대표님이신가요?” 그러자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 제가 이메일로 인터뷰 요청을 드렸는데 답장을 기다리지 못하고 궁금해서 와봤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희숙 대표와 날일달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생채식 식당과 작은 책방의 조합
‘날일달월’은 2018년에 문을 열었다. 비영리법인인 한국도서관친구들 대표를 맡고 있는 여희숙 씨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생채식 식당이자 작은 책방이다. 여 대표는 교사 생활과 독서시민운동 등을 하며 평생 책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오래전부터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독서모임을 하고 저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갖고 싶다는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2017년경 자녀들이 모두 성장해 독립을 하고 은퇴한 남편과 덩그러니 넓은 아파트에 살면서 큰 공간이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즈음 건강이 안 좋아진 남편 덕(?)에 먹거리도 완전히 바꾸게 됐다. 이래저래 그동안 살아왔던 삶의 패턴을 바꿔야 할 때 거추장스럽기만 한 대형 아파트를 호기롭게(?) 팔고 두 부부가 살기 적당한 크기의 아파트로 옮겼다. 그리고 집 앞의 빌딩 3층을 임차해 책방 공사를 시작했다.
나만의 공간인 동네 책방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나니 전국 각지의 ‘도서관친구들’ 회원 성원이 하늘을 뚫을 듯했다. 이왕이면 전국 곳곳에 그물망처럼 뻗어 있는 네트워크를 활용해, 친환경 농산물이나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드는 식재료를 소개하면 어떻겠냐는 의견도 많았다. 사실 전국에서 도서관 서포터즈를 하는 이들의 경우 귀농을 해 친환경 농사를 짓고 있거나 여러 가지 먹거리 관련 일을 하는 이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공유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여희숙 대표가 ‘가장 좋아하는 책’과 ‘가장 필요한 생채식 먹거리’가 조합된 ‘날일달월’이 탄생했다. 책방에 식당?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날일달월에 들어서면 오묘한 조합을 느낄 수 있다. 그러면서도 흔히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확’ 풍기는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아 놀라게 된다. 여 대표는 생채식 먹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생채식이라 지지고 볶을 일이 없어요. 음식 냄새가 나지 않아서 책을 읽거나 고를 때 거슬리는 게 전혀 없습니다. 채식동호회나 환우회 카페 등을 통해 알고 방문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데 오히려 이분들은 ‘채식 전문식당인 줄 알고 왔는데 책방이네?’ 하며 놀라고 가요.”
낭독모임, 희곡 대본 읽기 등 프로그램 다양
여희숙 대표는 오랫동안 독서모임을 꾸리고 진행해왔던 터라 작은 책방을 열고 나서도 꾸준히 모임을 이끌고 있다. 현재 4팀의 독서모임을 이곳에서 하고 있는데 성격도 다채롭다. 주로 시니어들이 함께하는 월요일의 독서모임은 낭독모임이다. 얼마 전 1년간 이어진 ‘열하일기’ 낭독이 끝나고 현재는 ‘돈키호테’를 낭독 중이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새롭게 등장한 모임도 있다. ‘연극배우와 함께 희곡 대본 읽기’다. 연극 공연이 줄줄이 취소되면서 힘들어진 연기자들을 조금이나마 지원하고 싶어 ‘좋은 희곡 읽기 모임’ 대표인 장용철 연기자와 함께 진행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희곡 대본을 함께 읽으며 연기의 맛을 조금 맛봤다. 이후 6주 코스로 ‘햄릿’을 낭독했고 현재는 ‘오이디푸스’를 함께 읽고 있다.
초등학교 교사들과 함께하는 독서모임도 2팀이나 있다. 22년간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한 여희숙 대표는 어린 시절의 독서 지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교사들과의 모임은 아무리 피곤하고 힘이 들어도 이끌어나가고 있다. “어느 날은 오전 오후 꽉 찬 독서모임을 하면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때가 많지만 마음만은 너무 행복하다”며 환하게 웃는다.
이밖에 ‘그림책 따라 그리기 100일 프로젝트’도 있다. 그림책 한 권을 정해 그림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모임이다. 최근에는 안승준, 홍나리 작가의 ‘어느 날 우리는’을 따라 그렸다. 이 책에는 고양이와 사자, 돌고래 등의 동물들이 등장하며 그림책 속 QR코드를 스캔하면 노래와 함께 애니메이션 뮤직 비디오까지 감상할 수 있다. 젊은 친구들의 호응이 특히 높다.
또 백승우 감독이 진행하는 금요시네마는 2018년 8월부터 꾸준하게 진행해왔다. 한 달에 한 번 매월 둘째 주 금요일 백 감독이 큐레이션한 작품을 함께 보며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날일달월의 빼놓을 수 없는 대표 프로그램이다.
한편 8월부터 11월까지 마지막 주 금요일에는 ‘금요일, 달이 뜨면 심야책방으로!’ 이벤트가 열린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사단법인 한국서점조합연합회가 함께하는 ‘심야책방 2020’은 서울 지역에서 ‘날일달월’을 포함, 15곳의 동네 책방이 참여한다.
‘날마다 달마다 좋은 책과 음식을 먹으면 밝아진다’는 의미를 담아 이름을 지었다는 ‘날일달월’. 이곳에서 금요일 둥근 달이 뜨면 가족과 함께 친구와 함께, 조용히 책 한번 읽어보면 어떨까? 심야먹방 아닌 심야책방을 꿈꾸며.
Mini Interview ‘날일달월’ 여희숙 대표
여희숙 대표는 출판계와 교육계에서 유명한 인물이다. 진주교대를 졸업하고 마산과 하동, 광양, 포항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22년을 근무했다. 교사 시절 교실마다 작은 학급 도서관을 만들어 ‘아이들과 함께 책 읽는 선생님’으로 소문이 날 만큼 아이들에게 책 읽기의 생활화를 몸에 익히게 했다.
교사 일을 천직으로 알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해왔던 여 대표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포스코를 다니던 남편이 서울로 발령이 나면서였다. 천직을 포기할 수 없어 주말 부부로 살기를 3년. 결국엔 사직서를 쓰고 남편과 합류하면서 서울 광진구에 정착했다. 낯선 서울 생활은 오로지 동네 도서관에서 책 읽는 즐거움으로 버텨냈다.
독서시민운동에 나서게 된 계기 역시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는 여희숙 씨를 사서가 눈여겨보고 도움을 요청하면서였다고. 이후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도서관친구들’ 활동을 시작해 현재 전국 회원 1만2000명에 달하는 비영리법인 대표를 맡고 있다. ‘도서관친구들’은 보령, 정읍, 남원, 광주, 진주, 울산, 창녕 우포, 부산, 제주, 부천 등 전국 16개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2004년부터 활동했으니 16년의 세월이다. 이렇듯 오랜 시간 독서시민운동가로 활동한 여 대표는 KBS, EBS, 교통방송 등을 통해 아이들의 독서와 토론 지도를 위한 학부모 강좌를 진행하거나 패널로 출연, 독서 토론의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펴낸 책으로는 2001년 ‘1년을 쓰고 50년을 간직할 독서노트’를 시작으로 ‘책 읽는 교실’, ‘토론하는 교실’, ‘도서관 친구들 이야기’, ‘아이는 도서관에서 자란다’ 등이 있다.
‘날일달월’ 서울 광진구 구의강변로 57 서림빌딩 3층
민화라고 하면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친숙한 이미지들이 있다. 익살스러운 표정의 호랑이, 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도, 무속에서 나오는 작은 신들을 그린 그림들 등등 평자에 따라선 가장 한국적인 이미지를 그려내는 그림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현대 민화 작가들의 손에서 겨우 명맥만 유지돼오던 민화는 최근 미술에 관한 일반인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다시금 주목받는 장르가 되어가고 있다. 민화는 주로 화가가 아닌 일반 민화 작가들이 그려왔다. 지난해 전국민화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이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자 민화를 그려온 이복자(60) 작가다. 그녀를 만나 민화를 통해 얻은 삶의) 의미와 제2의 인생에 대해 들어봤다.
강원도 영월군이 주최하고 조선민화박물관이 주관한 제22회 김삿갓문화제 전국민화공모전 대상은 ‘현역’ 교장선생님인 이복자 작가에게 돌아갔다. 그녀가 내놓은 작품은 8쪽 병풍으로 구성된 ‘평양감사향연도’. 미국 피바디에섹스박물관이 소장한 작자 미상의 동명 작품을 재현한 것이다.
이 작품은 민화에 속하긴 해도 우리가 흔히 민화 하면 떠올리는 소품이 아니다. 다양한 인물 군상들이 등장하는 연회를 소재로 하고 있고 8쪽 병풍으로 구성된 만큼 규모가 꽤 크다. 심지어 미국에서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라 관련 자료도 변변찮았다. 당연히 이복자 작가로서는 큰 도전이었다. 작품이 완성된 뒤 6개월 동안 안과를 다녀야 했을 정도다. 그러나 안구 질환과 함께 얻은 공모전 대상이라는 결실은 그녀가 민화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어느새 13년, 대작을 완성하다
이 작가는 서울교육대학교와 인천교육대학교 미술교육대학원에서 미술교육을 전공했다. 즉 천생 작가가 되어야 할 사람이었고, 스스로도 그 꿈을 내려놓은 적이 없다.
“대학교 때는 채색화의 대가인 이숙자 선생님께 사사했어요. 대학원에서는 동양화를 공부했죠. 그때 한지공예도 배웠는데, 거기에 민화를 그리는 과정이 있었어요. 그리고 2007년 박수학 선생님의 인사동 전시회에 갔다가 ‘궁모란도’를 보고 홀딱 반했죠. 배워야겠다고 다짐했고 그때부터 제자가 된 지 13년이 되었죠. 지금도 스승이신 박 선생님 인사동 화실에 나가고 있어요.”
2019년 서울 남명초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후에도 그녀는 뼛속까지 민화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다. 자신을 작가이기 전에 교육자라고 생각하는 그녀는 사람들이 전통 미술을 너무 모르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거듭 말했다.
“우리나라 전통 미술이 상당히 중요하고 교육 과정에서도 강조는 하는데 잘 가르칠 수 있는 선생님이 부족해요. 아이들도 우리 것이 소중하다는 건 알지만 못 배우고 있어서 제가 열심히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에요. 요즘 한류가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우리 민화도 전 세계 사람들이 즐겁게 감상하는 날들이 오면 좋겠어요. 최근 홍콩에서 우리 민화를 소개했는데 강의가 성황리에 끝났고 민화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는 분위기예요. 제가 초창기에 작업할 때보다 관심이 높아졌고 전국의 다양한 평생교육센터에도 강의가 많이 개설됐죠. 저도 민화의 저변 확대를 위해 교육자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싶어요.”
이 작가는 이미 오래전부터 아이들에게 민화에 대해 가르쳐왔다. 2009년 초등학교 미술 교과서 집필위원으로 활동할 때는 민화 관련 내용을 교과서에 수록하기도 했다. 그리고 교감으로 지낼 때는 고학년들에게 민화를 지도했다.
민화를 가르치는 열정 교장선생님
“교장이 되면서 두 가지 모토를 생각했어요. 하나는 전교생에게 수업을 하는 것, 나머지 하나는 선생님들에게 행복한 학교를 만들어주는 것이었어요.”
그 다짐대로 이 작가는 고학년들에게는 민화를 가르치고 저학년들에게는 그림책을 읽어준다. 아이들과 감성을 나누고 공감하기 위해 직접 수업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지은 교내 미래관에 갤러리를 열었다. 원래 설계에는 없었으나 그녀가 교육청을 설득해 만든 것이다. 단순한 갤러리가 아닌 아이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감상 교육을 하고 미래를 디자인하는, 아름다운 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또한 선생님들과 함께 운동을 하고 그림을 그리는 동아리를 운영하고 있다. 철저하게 자율적으로 돌아가는 모임이라서 어떠한 인위적 강요도 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학교 만들기가 꿈인 그녀는 학교가 시각적으로도 예쁘고 깨끗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목표를 위해 식물 재배와 시설 개량 등을 하면서 학교를 계속 가꿔나가고 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학교로 들어가면서 느낀 밝은 분위기는 그 때문이지 싶었다. 그야말로 에너지가 넘치는 삶이다.
“선생님들과 하는 미술 동아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활동해요. 거기서 배운 걸 아이들에게 가르치기도 하고요. 학부모 참여도 계획하고 있어요. 내년에는 학교 바깥에서의 전시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광주 민주화 항쟁 당시 진압군 헬기 사격으로 245개의 탄흔이 발견된 전일빌딩 5층에서 정동한(55세) 씨를 만났다. 2019년 8월부터 AI 콘텐츠 기업지원센터 스타트업팀 수석으로 근무 중인 그는 2030 젊은이들과 함께 당당하게 일하고 있지만 카메라 앞에서는 내내 쑥스러워했다.
정동한 씨의 방황은 45세에 시작됐다. 그리고 고비 때마다 그에게 위안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곳은 노사발전재단 광주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였다. 센터와의 인연이 벌써 10년이 됐고, 이곳에서 그는 자신만의 경쟁력을 찾았다. 일이든 사람이든 인연이 아니면 어찌할 수 없었다. 인연이 되려면 어느새 곁에 와 있었다. 물론 그 인연을 발견하는 안목은 스스로 키워야 했다.
점점 더 어려워진 회사, 퇴직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다니던 회사의 사정이 나빠지기 시작했을 때 당장 다른 직장을 알아봐야 할 정도로 경영 상태가 안 좋았지만 경영정보 총괄 책임자로서 기업전산을 담당했던 그는 쉽게 발을 뺄 수 없었다. 한동안의 방황 끝에 결국 퇴직을 선택했다.
“금방이라도 재취업이 될 줄 알았어요. 그때는 제가 아직 젊은 나이(45세)였으니까요. 어딘들 갈 데가 없을까 하는 자신감이 있었죠.”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어느 곳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는 점점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고,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찾아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한 곳이 노사발전재단 광주중장년일자리센터였다.
“처음에는 그곳에 가본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냐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나하나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조금씩 자신감도 생기고 위안이 되더라고요. 스스로에 대한 신념도 잃지 않았죠. 마음치유가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10년 인연의 시작이었다. 이명숙(현 노사발전재단 광주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소장) 컨설턴트는 심리상담을 통해 그의 지친 마음을 위로해주었고 직업 검사, 교육 안내와 함께 직업 매칭까지 해주며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노사발전재단의 지속적인 관심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졌는데 처음에는 대부분의 면접에서 떨어졌어요. 나이 때문이었죠. 어렵게 잡은 직장에서는 그동안 해오던 업무와는 전혀 다른 일을 해야만 했어요. 힘들어서 그만두었죠. 아마 지금 같았으면 극복하고 그 일을 했을 거예요.”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지난 10년간의 치열했던 시간들이 느껴졌다. 힘든 과정들을 거치며 전직에 대한 의욕이 점점 떨어지자, 그는 차라리 창업을 준비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명숙 컨설턴트는 창업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면서 상황이 어려워도 좀 더 시간을 두고 준비하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가장으로서 당장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급함이 밀려왔고 그 절박함이 그의 귀를 막았다. 지금이라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후 창업을 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러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결국 2년 만에 사업을 접어야 했습니다. 교육 콘텐츠 사업과 학원 운영을 동시에 했는데 과도한 투자와 시장조사 없이 시작한 게 원인이 됐습니다. 학생만 관리하면 될 줄 알았는데 학부모 관리가 더 중요한 걸 뒤늦게 깨달았어요. 모든 게 쉽지 않았죠. 게다가 경쟁업체까지 생겨나는 바람에 폐업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방황은 짧았다
폐업 후 한 달 동안은 이런저런 후회와 절망 속에서 지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다잡은 그는 다시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를 찾았다. 회사에서 퇴직하고 방황할 때 따뜻한 손길을 내어주던 곳, 창업하려고 할 때 말렸던 컨설턴트의 말이 생각났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전히 그곳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려는 이들을 위해 조언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아직 있다는 자체만으로 그에게 위안이 됐다.
이번에는 무모함에서 빚어졌던 첫 실패를 경험 삼아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갔다. 힘든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고,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구직 활동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고, 이후 직업 매칭도 이뤄졌다. 그동안의 경력이 쓸모없어졌다고 낙담하던 그에게 관련된 일을 함께 찾아보자며 힘을 불어넣어줬다.
달랑 하나였지만 정보처리기사 자격증이 그에겐 있었다. 정보 분야의 업무를 찾았고 다행히 취업이 되었다. 집에서 두 시간 거리의 선거관리위원회가 새로운 일터가 됐다. 출퇴근에 소요되는 시간과 급여 액수에 연연하지 않고 경력을 쌓는다는 생각으로 일에 전념했다. 계약기간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짧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그를 자극했고 게을렀던 지난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첫 직장에서의 정년은 생각도 안 하고 살았습니다. 퇴직은 남의 일처럼 여겼죠. 한창 일할 나이에 직장을 잃는 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인데 말이죠. 그래서 40대부터 제2의 인생을 준비해야 합니다.”
4개의 자격증에 도전, 재취업 성공
새 일터에서 그는 4개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빅데이터, 디지털 포렌식, 통계(사회조사분석), 정보보안 관련 자격증들이었다.
“시험을 보러 가면 다들 젊은이들이었어요. 나이가 많아봐야 30대? 50대는 저밖에 없더라고요. 합격은 했지만 뒤늦게 공부하면서 정말 힘들었어요.”
하지만 그는 목표를 끝내 이뤘다. 올해부터는 인공지능 분야를 공부하고 싶어 대학원을 다닌다고 했다. 일에 대한 열정과 자기 계발에 쉼이 없었다. 선거관리위원회 업무는 얼마 동안 연장됐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계약 만료 후 실업급여 교육장에서 그는 이명숙 컨설턴트와 다시 만났다.
“2019년 8월 정보문화산업진흥원에 입사 지원서를 내고 젊은 사람들과 경쟁해서 당당하게 합격했습니다. 제가 가장 나이 많은 합격자입니다.”
그동안 취득한 자격증과 경력을 쌓기 위한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현재 40개 기업을 관리하며 4차산업 관련 기업 육성, 중장년 1인 창조기업 투자 컨설팅, 일자리 창출 등의 업무를 맡고 있다. 일자리를 찾기 위해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를 찾았던 그가 10년이 지난 지금에는 중장년의 창업과 일자리를 컨설팅하는 일을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준비되어 있으면 문이 열린다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두드리지도 않는데 문이 저절로 열릴 리가 없잖아요.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를 비롯해 시 또는 나라에서 운영하는 시설을 잘 활용하면 재취업의 길을 찾을 수 있어요. ‘과연 도움이 될까? 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지나?’ 하면서 자기만의 사고에 갇혀서 참여를 꺼리는 경우가 많은데 잘못된 선입견입니다. 문을 두드려 그 안에 들어가면 많은 정보와 지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기회를 찾는 노력은 해야죠.”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중장년들에게, 그 길을 걸어온 선배로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물었다. 그가 명쾌하게 답했다.
“퇴직 후의 사업은 말리고 싶어요. 반드시 해야겠다면 최소한 2년 정도의 준비기간을 갖길 권합니다. 우리나라의 창업 시스템은 잘되어 있는 편이니 적극 활용하면서 절차에 따라 신중하게 창업하면 됩니다. 그동안 일해온 분야와 연결되면 더 좋습니다.”
그는 재취업을 원한다면 자존심을 버리라고 조언했다. 취직이 될 때까지 이력서를 쓰고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을 파악해 거기에 알맞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보를 많이 찾아보고 노력을 멈추지 않으면 언젠가는 문이 열릴 것이라고 힘을 실어 말했다.
창업과 기업지원 등에 관해 의문이나 도움을 구하고 싶으면 광주 1인 창조기업 지원센터/중장년기술창업센터에 문의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자신을 찾아와도 된다고 흔쾌히 말하는 그의 얼굴에서 일에 대한 자신감과 중장년의 고충을 이해하는 선배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