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중․고교생이었던 시절에는 스승의 날이 되면 각 반의 반장이 중심이 되어 학생들의 코 묻은 돈을 걷어 선생님 선물도 마련하고 가슴에 꽃도 달아드리곤 했다. 또 강당에서 재롱잔치도 벌이고 운동장에서 선생님들과 배구시합을 하는 등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이렇게 사랑이 넘치고 화기애애했던 스승의 날 분위기가 언제부터인가 달라졌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가정 경제가 좋아지면서 학부모들의 치맛바람이 거세졌고 소위 금일봉이라는 돈 봉투가 눈도장을 찍는 도구가 되었다. 돈 봉투가 한창 문제가 돠었을 때, 어떤 봉투가 너무 무거워(?) 선생님이 되돌려 보냈더니, 그 어머님이 “내년 치도 포함한 걸로 알고 받아주세요”라고 했다는 웃지 못할 얘기도 있다.
그러나 이젠 소위 김영란 법으로 선생님이 학생에게 꽃 한 송이도 받지 못한다. 편지만 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니 너무 각박한 세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인성교육은커녕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단지 시험 준비를 위해 지식만 가르치는 지식 소매상처럼 되어버린 요즘 세태가 아쉽기만 하다. 학생이 선생을 고발하는 사태도 흔하다고 하니 정말 문제가 많은 세상이다.
평생을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교장으로 정년퇴직을 한 친구는 교사가 자신의 천직이라고 말하곤 했다. 결혼 전에는 일요일이면 어서 월요일이 되어 아이들과 만나고 싶어 했다. 그만큼 학생들을 사랑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아이들이 선생님을 존경할 줄 모르고 학생들이 순수함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며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필자는 우연히 노인대학에서 영어 강사를 시작했다. 벌써 수년째 재능 봉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몇 년 전 암 수술을 하고 또 칠순을 넘겼는데도 학생들과 많이 친해져 그만두지 못 하고 있다. 지난 5월 스승의 날, 같은 또래 어르신인 수강생들이 꽃바구니와 카드 그리고 선물까지 주셨다. 수업이 끝난 후에는 일동이 기립해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로 시작하는 스승의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며 반은 웃고 반은 울었다. 나이 들어 늦은 공부를 하며 스승님이 얼마나 고마운 분인가를 새삼 느꼈다면서 서로가 감격해 급기야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꼭 물질적으로 감사 표시를 해야 하는 건 아니다. 꽃 한 송이도 뇌물로 생각하는 인정 없는 법이 너무나 삭막하고 기가 막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노인대학 학생들은 용감하게 법을 어기고(?) 꽃바구니, 카드, 선물을 준비했고 거기다가 점심 대접까지 했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모두 기립해 불러준 스승의 노래가 감격스러웠다. 솔직히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이 일을 끝내고 싶지 않다.
“오늘 당신 딸은 더없이 아름다운 오월의 신부였다오”
‘2017년 5월 28일 오후 5시 더 라움 4층’
전달 중순쯤 날아온 카톡 메시지다. 놀라움과 반가움이 동시에 겹친다.
벌써 일년! 세상사가 무상하다지만 생사의 갈림길은 언제여도 쉽지 않다. 성여사는 20년 지기 필자의 지인이다. 초등 1학년 아이의 학부모로 아파트 이웃에서 시작 된 인연이 결혼식을 알리는 사이로 이어 온거다.
작년 이맘쯤! 필자 여식의 혼례를 무사히 마치고 기분 좋은 피곤함을 즐기고 있었다. 신혼여행을 떠난 신참 부부에게 축하와 당부를 전하며, 축하해 준 지인과 친인척들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느라 분주한 며칠을 보냈다. 그 와중에 받은 부고 소식에 순간 감전되었다.
병고에 투병 중이던 지인이 생을 달리했다는 소식은 몇 번을 들어도 믿기지가 않았다. 결혼 전에 찾아가서 인사를 시킬까 했다. 아니 신혼 여행 다녀와서 시간을 내봐야겠다고 미루어 두었던 자신을 탓하였다. 삼오제 후에도 한동안 충격이였다. 자기 탓이라며 격하게 슬퍼하는 지인의 둘째 딸아이 고백에도 위로의 말을 찾을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보낸 지인과의 마지막 대화가 좋은 사윗감을 찾아봐달라는 것이였음을 늘 부채처럼 지니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일 년이 흐르고 지인의 큰딸아이 혼례에 참석하게 되었다. 단아하게 꾸민 신부대기실에 앉아있는 아이를 보니 급 마음이 내려앉는다. 그 친구가 그립다. 어디선가 분명 보고 있으리라 믿지만 아쉽고 아쉽다. 많이 좋아라 했을텐데...
5월의 신부답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니 울컥한다. 드레스, 신혼집, 가전제품, 만만치 않은 혼례준비를 혼자하느라 애썻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리다. 활짝 웃으며 인사를 전하는 신부의 옆모습에서 제법 어른스러움이 보인다. 화촉점화를 생략했다는 신부아버지의 멘트에 또 한번 빈자리를 떠올리며 안녕을 빌어본다.
아침고요 수목원, 남이섬, 수많은 맛집들.....아이들과 함께했던 기억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무탈무고하게 잘 자라 인생의 반려자를 맞이한 우리 모두의 아이들에게 축복을 빈다.
“성여사! 장모됨을 축하해요!”
본인 동의 없는 개인정보의 수집과 활용은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금지됐다. 그런데도 얼마 전 경기 오산의 한 고등학교가 부모의 직업과 월 소득은 물론 월세 보증금 액수까지 적으라는 학생생활기초조사서를 배포했다가 학부모들의 몰매를 맞고 이를 회수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국전쟁 정전 후 어려운 시기에 초등학생이 된 우리 세대에게 ‘가정환경조사’에 대한 아픈 기억이 많다. 성인이 된 후에야 전기가 들어온 산간벽지 내 고향은 문화시설이라곤 어느 집에도 없었다. 따라서 모두가 빈칸으로 조사서를 제출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선생님도 모든 형편을 다 알고 있어서 손을 들라는 말씀이 없었다. 조사서에 기재된 항목들을 보면서 도시에서는 신문도 보고 라디오도 듣는가 보다 나름 짐작만 하였다.
하지만 읍내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시골 동네와 문화차이가 많은 것을 느꼈다. 학교에서 지식이 아니라 수치심을 배웠다. 우리 집엔 단 하나도 없는 시계ㆍ라디오ㆍ전축 따위들이 친구들의 집에는 번듯하게 있었다. 세월이 가면서 환경조사는 절대다수의 학생들은 내 집과 내 가족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매번 신학기를 맞았다. 해마다 한 번씩 정기적으로 가난을 확인해야 하는 굴욕을 맛본 것이다.
그게 부끄러우면 거짓말을 해야 했다. 부모의 직업을 차마 쓰지 못하고 그냥 회사원으로 기재한 일, 국졸인 부모의 학력을 고졸이나 대졸로 쓴 일 등은 신학기 언론의 독자투고란에 단골메뉴로 등장했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매 학기를 맞이해야 했다. 그럼에도 가정환경조사서는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학생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다는, 너무도 행정편의주의적인 발상 때문이었다. 돌이켜 보면 학생의 능력과 별 관계가 없는 허망한 일이었다.
이제는 뿌리 깊게 내려온 가정환경조사 관행이 사라지고 자기능력을 검증하는 시대가 되었다. 취업현장에는 성별ㆍ나이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남자 경비원을 모집하면서도 남자라는 표시를 하지 못하여 여자 지원자가 접수를 하고, 나이제한 공고를 하지 못하여 힘든 작업에 고령자가 찾아오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진다. 이를 어기면 엄격한 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입사지원서에 학력기재 금지가 제도화할 예정이다. 입시 때 자기소개서에 부모 언급도 금지하며, 이를 어길 경우 아예 탈락시키는 방향이다.
대선정국이 열렸다. 각 진영의 선수들이 앞 다투어 내달리고 있다. 주자들의 자기능력 검증이 절실한 시점이다. 과거의 검증은 사돈네 8촌의 뜬소문까지 쫓다가 세월 다 보낸 경우가 많았다. 그들의 부동산 투기나 위장전입까지 문제 삼을 만큼 시간이 많지 않다. 선수의 배우자와 직계 존ㆍ비속만 검증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대선주자 자기능력 검증을 철저히 하여 허깨비가 등장할 수 없도록 하여야 한다. 또 다시 국정농단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필자는 좋은 모임을 여럿 갖고 있는데 고등학교나 대학교친구 모임, 그리고 우리 아이 초등학교 때부터 만나고 있는 학부모 모임 등이다. 그중에서 남편 때문에 갖게 된 좋은 모임이 있다.
남편의 대학친구들 모임으로 멤버는 다섯 명이지만 각자의 부인과 아이들까지 합하면 매우 큰 인원수가 된다.
필자가 결혼할 당시 남편과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결혼을 한 분들이었다.
그때는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만들어 대접을 하였는데 필자가 갓 결혼했을 때 필자는 요리 솜씨가 형편없었다.
그런데 세 명의 부인들은 정말 훌륭한 요리사들이었다. 달마다 돌아가면서 친구댁을 방문해 남편들은 포카를 치고 아내들은 수다를 떨면서 초대한 집 부인이 만들어 주는 음식을 먹는 건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필자 차례가 왔을 때 서툰 솜씨로 차렸지만 다들 칭찬해주고 맛있다고 격려를 아끼지 않는 좋은 분들이었으며 아이들이 어릴 땐 단체로 대가족이 되어 여행도 많이 가고 낚시도 하러 가는 등 친목을 돈독히 하는 사이였다.
세 명의 다른 부인들보다 좀 나이가 어렸던 필자를 모두 예뻐해 주는 배려를 받았는데 마지막 한 분이 뒤늦게 결혼을 해서 필자 인기는 시들고 새로운 막내가 탄생하였다.
서로 격의 없이 친한 사이였으므로 먼저 결혼한 세 분의 부인들을 노계라며 놀렸고 필자는 영계라고 불렸다.
그런데 막내로 새로 합류한 부인은 나이도 엄청나게 차이 나는 그야말로 영계소리를 들을 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그만 영계자리를 빼앗기고 중닭이 되었다.
노계, 중닭, 영계, 그렇게 말하면서 얼마나 웃어댔는지 지금 생각해도 무척 재미있고 그리워지는 시간이다.
그중 한 커플인 진오 아빠 엄마는 유난히 사이가 좋았다. 결혼도 제일 먼저 해서 나머지 4명의 총각 친구들이 모두 그 신혼집에 가서 살다시피 해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다 받아주었다는 마음이 넓은 부인이다.
지금은 멤버들 모두 자식들이 다 장성해서 결혼을 하고 부부만 남았는데 제일 나중에 결혼한 분의 아이가 아직 고등학생이라 뒷바라지가 다 끝나진 않았다.
아이들이 다들 결혼해서 부부들만 남으면 한곳에 모여 집을 짓고 살자는 계획도 세웠고 멀리 여행도 하며 살자고 약속을 했었는데 몇 년 전에 가장 사이좋은 부부인 진오 아빠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부부가 너무 사이가 좋으면 하늘이 질투해서 한 사람을 먼저 데리고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데 그래서였을까, 정말 우리가 놀릴 정도로 서로 사랑했던 진오 아빠가 먼저 우리 곁을 떠났다. 남편을 보낸 진오 엄마의 심정이 어땠을지 지금도 눈물이 난다.
그 후부터는 매달 모이지 못했고 3개월에 한 번씩 만나고 있다.
그래도 진오 엄마는 항상 모임에 참석을 한다. 이제는 시간도 많이 흘러 웃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어 다행인데 사진 찍는 공부를 하고 사진동아리에 들어 출사로 여행도 다닌다며 작년에는 직접 찍은 사진으로 탁상용 달력을 만들어 멋진 선물을 해주었다.
20대에 처음 만난 부부모임이 이제는 모두 60이 넘은 시니어들이 되었으니 이 모임을 생각하면 우정의 인연이 얼마나 깊고 따듯한지 가슴이 먹먹해지고 뿌듯하다.
인생을 살면서 좋은 인간관계를 갖는다는 건 너무나 중요하고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러자면 이기적으로 자기만 생각하기보다는 상대방을 배려해주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새해를 맞아 부부동반 모임이 있었다. 물론 진오 엄마도 참석했고 올 한해도 열심히 건강 지키며 살자는 다짐을 하면서 반가운 모임을 가졌다.
오랜 시간 알아온 우리 석우회 멤버들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해 본다.
아름다운 섬 제주. 최근 이곳은 플리마켓(Flea Market), 즉 벼룩시장의 성지가 된 듯 하루가 멀다 하고 크고 작은 장(場)이 ‘섰다, 내렸다’를 반복한다. 그런데 관광객의 시선을 끄는 비누, 방향제, 액세서리 등을 파는 곳이 대부분이다. 는 10월호에 이어 농산물과 사람들의 웃음이 함께하는 도시장터를 제주에서 찾아보기로 했다. 투박해 보이지만 주민들의 정이 물씬 넘치는, ‘플리마켓’보다는 ‘도시장터’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지꺼진장’에서 지꺼지게(?) 놀아봤다.
제주시 아라동 휴게 음식점인 아라올레 앞마당에서는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제주 지역 농산물과 특산품, 착한 먹거리가 함께하는 ‘지꺼진장’이 선다. 지꺼진장은 제주 방언으로 즐겁다는 의미의 ‘지꺼지다’와 시장의 ‘장(場)’을 조합해 만든 ‘즐거운 시장’이라는 의미의 신조어다. 작년 5월부터 문을 연 지꺼진장은 최근 인기에 힘입어 금요일 저녁에만 운영하던 것을 토요일까지 연장 운영하고 있다. ‘지꺼진장’은 10월호에 소개한 마르쉐@의 생각을 빌려와 만든 장터다. 다른 점이 있다면 매주 같은 장소에서 열린다는 것과 제주 농민들이 주축이 돼 지역 농산물 직거래 장터의 물꼬를 텄다는 점이다. 물론 다른 플리마켓에서도 만나볼 수 있는 수·공예품과 아기자기한 수제품 등도 구색을 갖추고 손님들을 맞이한다.
취재차 방문했던 9월 말의 지꺼진장은 예년만큼 규모가 크지 않았다. 만 1년 넘은 지꺼진장, 그 사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목 좋은 곳에 플리마켓이 연이어 생겼다. 게다가 제주시가 지꺼진장을 비롯한 플리마켓의 식·음료 판매 금지조치를 내렸다. 먹거리가 중심이던 지꺼진장이 한산해진 결정적인 이유다. 문근식(文根植·49) 아라올레 지꺼진장 공동대표는 제주시의 결정을 존중하면서 숨고르기 중이라고.
“규모가 커지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봤어요. 지꺼진장은 지금 일종의 과도기입니다. 마르쉐@의 경우 올해로 4년차 되는 도시장터잖아요. 물론 처음에는 이벤트도 하면서 총력을 기울이는 게 맞아요. 작년에 그랬죠. 이제는 이벤트가 아니라 어느 정도 시장으로 인식이 되는 시기를 거쳐야 합니다. 마라톤을 100미터 달리기하듯 뛸 수는 없죠. 훗날 다 남는 거라고 생각해요.”
제주시의 결정에 대해서도 문 대표는 비관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이런 시장이 꾸준해지기 위해서는 법 테두리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와 관련한 조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상황을 감성적으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될 텐데 기다리고 잘 진행해야죠.”
제주 농민들이 중심인 시장
대부분 이런 시장은 유기농이라든지 친환경 농산물을 내세운다. 지꺼진장은 제주에서 나고 자란 것이면 된다.
“화학비료를 써서 농사지은 농산물이 가치가 없을까요? 친환경으로만 축소시키면 편향되기 마련입니다. 친환경 농민들만 가치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관행으로 농사짓는 농부도 소비자들을 만나면서 점차 친환경 쪽으로 전환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설명하는 것보다 함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숨고르기라지만 매주 금요일, 토요일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제주의 정기를 듬뿍 담은 지꺼진장이 열린다. 갓 담고, 갓 따온 제주의 농산물과 사람을 만나고 싶다면 꼭 찾아가 보시라.
지꺼진장에서 만난 볍씨학교 졸업생 박진희·권소정 양
볍씨학교는 제도권 교육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고와 활동 속에서 공부하고 느끼는 대안학교다. 지꺼진장에 갔을 때 아이들 열댓 명이 모여 피자를 만드는 모습이 생소했지만 지금은 이 아이들이 없으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정도다. 지꺼진장 진행 전반에서 이 어린 아이들이 신나게 관여하고 참여한다. 작년부터 제주에서 생활한 박진희(16), 권소정(16) 양과 여러 명의 졸업생들이 제주를 떠나지 않고 있다. 대안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궁금할 독자들을 위해 잠시 얘기를 나눠봤다.
Q. 볍씨학교는 어떤 학교인가요?
박진희 대안학교입니다. 볍씨학교는 자율이에요. 자기가 하고 싶은 것, 관심 있는 것을 배우고 있어요.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과 선생님이 같이 배우고 서로 알려주기도 해요. 지금은 학교라는 것을 제대로 느끼고 있고 또 좋다고 생각해요. 제주 오기 전까지는 잘 몰랐어요.
권소정 이 학교는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키워주는 곳이에요. 이 세상 보통학교의 아이들은 부모님, 선생님 손에서 곱게 지내다가 갑작스럽게 딱! 하고 사회로 나가잖아요. 저희는 그게 아니고 그전부터 사람들을 만나면서 배우고 사회에 나가는 연습을 해요.
Q. 다른 제도권 아이들처럼 보호받는 게 좋지 않을까요?
박진희 그런데 언젠가는 보호를 안 받고 살아가야 하잖아요. 언제까지 우리가 어린애일 수는 없어요. 그리고 언제까지 보호를 받아야 하는 건지 그것도 의문이에요.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뭔가가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어느 선에서 끊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주도에 와서 살면서 그렇게 된 거 같아요. 왜 지금부터 그렇게 사는지 물어보는 분들이 사실은 많아요. 어차피 또 힘든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저는 말해요. 힘들죠. 그런데 다른 사람들을 만나보는 것도 좋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나는 것도 좋아요. 그리고 이곳에서는 내가 볍씨학교 학생이 아니라 나 박진희로서 관계를 만들어나가기도 해요. 사람들이 잘한다, 예쁘다 하니까 힘들어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도 있더라고요.
권소정 결국 또 다른 연습이라고 생각해요. 저희도 언젠가는 이 사회의 구조 속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 벽을 깨고 들어가야 하잖아요. 그런데 미리 깨보면 좀 더 성숙한 인간이 될 거 같아요.
Q. 굳이 빨리 성숙해질 필요가 있을까요?
권소정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저희 학교에서는 ‘세상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가르쳐요.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관심을 가져야 하죠. 또 세상을 바라보는 성숙한 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더 노력하면서 사는 거 같아요.
Q. 대학에 가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박진희지금까지는 생각이 없어요. 대학에 가서 또 새로운 경험을 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 지금도 볍씨학교도 안 다니고 제가 하고 싶은 거 하고 싶어요. 다양한 것을 배우고 싶어요. 지금은 액세서리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어요. 7학년 때 현장 탐방을 해서 인턴십으로 배워봤는데 재밌더라고요. 학부모님 중에도 가르치는 분이 있고요. 그리고 여행을 하고 싶어요. 마을 활동에도 관심이 많아서 더 배우고 싶어요. 요즘 많이 생기는 마을 공동체에 찾아가보고 싶어요. 아직은 스스로 제 생활을 꾸려나가기에는 부족해요. 더 많은 훈련이 필요해 보여요.
담임선생님이 아기를 낳아서 대신 60세 가량의 백발 노선생님(여자)께서 대신 맡았다. 그때가 4학년이었는데 아이들은 선생님을 무시하는 행동을 하면서 학교 전체의 문제로 만들었다. 담임선생님이 워낙 빠릿빠릿하고 단호한 성격이었던지라 아이들은 노선생님을 할머니라고 생각했는지 시쳇말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정확하게 잘 지키던 규율들을 안 지키고 학생들이 똘똘 뭉쳐서 수업도 제대로 안 받았다. 모범반이 순식간에 빗나간 행동을 하는 문제반이 된 것이다.
대부부 형제가 함께 다니는 동네 학교라 어느 반에서 일이 생기면 삽시간에 온 동네에 소문이 돌았다. 모든 학부모들도 그 사실을 알게 되어 서로 걱정하며 의견을 주고받았지만 학교에 가서 제발 잘 지도해달라거나, 아니면 다른 선생님으로 바꿔달라고 항의하는 부모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서로 만나기만 하면 손을 잡고 걱정들을 했다. 온통 같은 말이었다. “도오나룬데스까네에~고도모다찌가젠젠오찌쯔까나꾸데다이헨데스네~(어쩌지요? 아이들이 침착성을 잃었어요. 큰일이네요)” 이 말은 온 동네 인사말이 되었다. 똑같은 말로 인사를 건네고는 그동안의 상황을 서로 아는 데까지 교환하고 마무리는 “아이들도 선생님도 노력하고 있으니까 조만간 해결되겠지요?”였다. 학교와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마음으로 그냥 헤어지는 거였다. 어느 엄마 아빠도 학교를 마구 흔들어대는 일은 없었다. 조용히 해결되기를 기다리면서 자기 아이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무슨 일로 이렇게 된 건지, 오늘은 어떻게 보냈는지를 아이들 입장에서 들어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학생으로서 선생님께 해야 하는 행동을 일러주고 지키라고 타이르는 정도였다. 한 달여를 그렇게 지내자 차차 나아져갔다. 담임선생님이 다시 학교에 나왔지만 어른들의 생각과 권위로 아이들을 혼내는 일은 없었다. 노선생님이 그만둘 때는 학생들 전원이 진심으로 잘못한 점을 무릎 꿇고 빌고 용서를 받았다고 한다. 몇 명이 반의 분위기를 흐려놓으면서 동요를 일으켰던 일이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벌을 내리는 일 없이 서로 용서하는 분위기로 마무리되었다. 요즘 신문에서 제자와 선생님 그리고 학부형들의 이해 안 되는 행동에 마음 상하는 일이 있으면 옛날 그 일이 생각나곤 한다. 그들은 “아이들도 다 생각이 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라고 믿어주면 기다려줬다. 신뢰하는 마음이 상호 간에 존경심과 믿음을 키운다는 걸 체험했다. 업신여겼던 자기들 행동에 대한 용서를 빌고, 그 답으로 용서를 해주는 너그러움을 주고받으면서 진정한 교육이 이뤄졌던 것이다. 그 뒤로 어느 누구도 그 일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깨끗하게 끝난 일이었다. 그 뒤 내가 4년을 더 살았지만 이름을 거론하면서 잘못한 아이를 지적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우리나라 부모들이 본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운동회 날 지참해야 하는 물건은 물과 도시락 그리고 비 올 때를 대비해 우산을 준비해야 한다. 물론 손수건이나 휴지도 챙기지만 그 외에는 가져가는 것이 없다. 체육복을 입고 홍군, 백군 표시가 나도록 운동모를 쓰고 운동화를 신고 가면 된다. 운동회 날에는 동네 어른들과 학부모들의 참관이 가능하다. 운동회 구경 오는 어른들은 아무것도 가져 오면 안 된다. 물이라도 마셔야 한다면 가지고 온 것들을 모두 챙겨서 다시 가지고 가야 한다. 학교에 쓰레기를 남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운동회가 끝난 뒤 학교 운동장을 보니 처음처럼 깨끗했다.
어른들은 응원만 열심히 했다. 어렸을 때 자신이 홍군이었던 기억이 있어서 홍군을 응원하는 어른들도 있었고, 손자가 홍군이거나 이웃집 아이가 홍군 응원해 달래서 응원하는 어른들도 있었다. 모두들 어린아이로 돌아가 즐거워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학생들은 전부 교실로 들어가 도시락을 먹었고, 어른들은 이따 다시 만나자며 집으로 점심을 먹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점심을 먹은 후에도 다시 만나 한 마음으로 하루를 즐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학생들에게 운동회는 분발도 하고 자신감도 얻는 시간이었다. 또 협력의 미덕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땀을 흘리며 열심히 뛰는데 물을 마시며 태평하게 관전하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물이 먹고 싶어도 아이들 생각해서 참아야 한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뭔가 뼛속 깊이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특히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고 그 앞에서 어른들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엄마들이 존경스러워 보였다. 시간 맞춰서 상용 약을 먹어야 하는 엄마들은 물병을 예쁜 손수건으로 둘둘 말아서 다른 엄마들 등 뒤에 숨어 연신 ‘스미마셍(미안합니다)’을 연발하며 마셨다.
우리나라 엄마들하고는 너무나도 생각이 다르고 행동도 달랐다. 멋쩍어진 필자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운동장 하늘에는 만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거기엔 태극기도 있었다. 내가 놀라면서 황홀해하자 옆에 있던 엄마가 김군(필자 아이들) 둘이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태극기를 그려서 붙였다는 귀띔을 해줬다. 원래 일본에서 만든 만국기 속엔 태극기가 없는데 필자 아들 둘이서 태극기를 그렸다는 것이다. 학교 아이들도 처음으로 태극기를 보았단다. 엄마들이 칭찬을 할 때 필자의 눈은 또 한 장의 태극기를 찾아 헤맸다. 학교 전교생이 그린 만국기 속에 태극기 두 장도 함께 자랑스럽게 펄럭였다는 사실이 감동으로 밀려왔다. 우리나라 운동회 풍경과는 너무 다른 모습에 놀랐고 정성을 다해 아이들을 응원해주는 어른들의 모습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한 번 빠져들면 출구 찾기 힘들다는 배우 금보라를 돌직구 시사평론가 이봉규가 만났다. 중년임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하는 금보라는 지나간 삶을 돌아보는 여유를 가지며 아름답고 당당한 삶을 열어 가고 있었다. 그녀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으나 또 많이 달라져 있기도 했다. 그간 몰랐던 그녀의 진짜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 주면서 그녀와 그는 꽤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녀의 자취가 ‘센 언니’처럼 보이겠지만 금보라는 도시락 싸주는 엄마, 현모양처로 살고 있었다.
글 이봉규 시사평론가
최근 MBC 주말드라마 에서 ‘명품연기’를 보여 주고 있는 금보라와의 데이트 약속을 잡고서는 설레었다. 거침없는 그녀가 무슨 말을 쏟아 낼지 궁금해서였다. 나와는 TV조선의 라는 프로그램에서 몇 달간 같이 방송을 한 적이 있어서 어느 정도 그녀의 캐릭터를 알고 있기에 분명 깜짝 놀랄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금보라는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폭주했다. 특히 분위기가 무르익자 정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더니 눈이 반짝거리면서 폭탄발언을 와장창 쏟아 냈다.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정치인들 미친 거 아닙니까?” 라고 핏대를 세우더니 “우리 집 앞에 사드를 설치하라고 데모라도 하고 싶다”면서 “대한민국 국민이 어떻게 이렇게 안보에 무책임 할 수 있나?”하고 광분한다. 그녀의 평소 성격대로 솔직하고 꾸밈이 없이 민감한 정치적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연예인이 예민한 정치적 발언을 하면 자칫 구설수에 올라 상당히 곤란을 겪을 수 있는데도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녀 성격에 이봉규가 ‘보수 꼴통’이라서 분위기를 맞추려고 하는 이야기기는 절대 아닐 것이다. “나 금보라야!”라고 금방이라도 소리칠 것 같다.
사람들이 답답해서 할 말이 많아도 토론하기를 꺼리는 세월호에 관해서도 거침이 없다. “세월호 침몰은 부도덕한 기업의 잘못으로 일어난 비극적 사건인데 왜 대통령을 욕하냐?”면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내친김에 정치 이야기를 더 끌고 나갔다. 금보라는 충청남도 당진이 고향이라 같은 충청도 출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대통령 되는 걸 바랄 줄 알고 그에 관해 물었더니, “반기문 절대 안 찍겠다”고 잘라 말한다. 그 이유는 “벌써 자기가 대통령이 된 줄 알고 거품이 잔뜩 들어가 있어서 싫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새누리당에서 이정현 대표가 요즘 괜찮아 보인다고 말한다. 그의 인생 스토리가 드라마와 같아서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어린 나이에 배우로서 안 해 본 역할이 없을 정도로 간접 경험을 많이 해 본 터라 인생스토리가 중요함을 깨달은 것은 아닐까. 필자도 대통령이 될 사람은 인생스토리가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표로 연결된다고 믿는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서 그녀의 분석이 날카롭게 꽂힌다. 정치평론가 누구도 아직 확신을 가지고 이정현 대표가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고 예언하지 않는데 금보라가 말한 것이다. 정치평론가 보다 오히려 일반 시민들이 잘 맞추는 경향이 있다. 그냥 마음속에 와 닿는 대로 평가하기에 이심전심으로 통하고 그게 선거 결과로 그대로 반영 될 수 있다는 논리다. 물론 이정현 대표가 지금 상황으로 볼 때 대통령이 될 확률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만약 이정현 대표가 대통령이 된다면 아마 대한민국의 유명인사들 중에서는 금보라가 처음 맞추었을 것 같다.
필자가 진행하는 TV조선의 에 게스트로 초대해서 본격 정치토론을 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요청하자 그녀는 흔쾌히 응했다. 조만간 금보라가 정치토크에서 열변을 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개봉박두! 기대해도 좋을 듯!
두 번째 남편, 먼저 자빠뜨린 남자
이혼의 아픔을 겪고 난 후에 지금의 남편과는 정말로 행복해서 “비행기 타고 가다가 이대로 떨어져 죽어도 한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금방 “아니지! 지금은 행복하니까 죽으면 아깝지”라고 번복한다. 지금의 남편과는 우연히 만났는데 진짜 괜찮은 사람이라서 “나하고는 안 되겠다”하고 지레 겁먹었다고 털어 놓는다. 그래서 이판사판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 그녀의 털털하고 솔직한 모습에 반해서일까 그와 결혼에 성공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남편과 만난 지 8개월 만에 금보라가 먼저 결혼하자고 프러포즈를 했단다.
남편 이야기가 나오니까 입에 모터를 달아 놓은 것처럼 자랑을 늘어놓느라 정신이 없다. “통통하고 생긴 것도 마음에 들지만 경상도 ‘상남자’에다 배려심이 많다”며 그녀는 한마디로 남편을 존경한다고 한다. 결혼 전에 남편과 데이트 할 때 그녀가 밥값과 술값은 도맡아 냈을 뿐만 아니라 지갑이나 벨트 등 선물 공세를 펼쳤다는 것이다. 다른 여자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금보라처럼 예쁘고 대한민국이 다 알아주는 스타인데 금상첨화로 매너까지 좋다면 어느 남자가 반하지 않을까? “나는 늪이거든~”이라고 또 자랑 질이다. 한 번 빠지면 절대로 헤어날 수가 없단다. “인간 금보라를 제대로 알려면 사계절은 지나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그녀가 아직도 남편과 아이들 도시락을 직접 싸 준다니 믿기 어렵다. 밤샘 촬영을 하고 지쳐도 도시락은 꼭 자기 손으로 정성스레 싸 준다니 이봉규가 금보라를 아직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자기가 남편보다 뛰어난 것이 없기 때문이란다. “남편에게 잘 해 줘서 내가 없으면 불편하게 만들어 내 소중함을 어필하자는 작전”이라는 것이다. 라는 프로그램에서 같이 방송 할 때가 생각난다. 그녀는 ‘예쁘고 거친 여우’임에 틀림없다.
그런 그녀도 “이혼 후 아이들 문제로 난감했던 적이 있었다”고 털어 놓는다. 아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어린이날 운동회를 갔는데 ‘아빠와 달리기’ 경기가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재혼 전이라서 아빠가 없었었기에 참가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옆에서 한 학부모가 대신 아빠 역할을 해 주겠다고 했지만 기분이 상해 주최 측에 ‘부모와 달리기’로 바꿔 달라고 항의했다. 결국 그날 엄마와 뛴 사람은 우리 아들뿐이었다”며 당시의 안타까운 사연을 말한다. 금보라는 아들과 열심히 뛰었지만 아빠들과 뛰는 아이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아이가 위축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엄마가 못 뛰어서 졌다”고 속상해 했지만 “자기 혼자 아빠 없이 엄마와 뛰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 깔끔한 성격은 엄마를 닮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여배우 처지에 아빠와 달리기 경기에 엄마가 뛰게 해달라고 우겨서 참가했으니 그녀도 참 어지간하다.
그녀에게는 지금의 남편이 데리고 온 25세의 딸이 있는데 최근에 갤러리아 백화점에서 명품 신발을 사와 속상했다. 아직 명품을 살 나이는 아니라는 평범한 엄마와 같은 생각이다. “13년 동안 자기 딴에는 정성껏 잘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다”는 고백이다. 소리 지르면서 야단치면 폭발할 것 같아서 카톡으로 차분하게 주의를 줬다고 한다. 그리고는 주말에 반품을 하는지 지켜보고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응징을 할거라며 결과를 지켜보고 있다고.(추후에 반품했다는 메시지가 왔다.) 남편의 금보라에 대한 평가는 “가방끈은 짧아도 똑똑하고 아는 건 많지 않아도 현명한 여자다.” 남편의 평가대로 그녀는 현명하게 장문의 카톡으로 딸을 꾸짖었다. 그 내용을 지면으로 그대로 옮긴다.
어제 일은 내가 수십 번을 생각하고 생각해도 결코 옳지 않은 일이라 잠까지 설치는구나. 나름 딸내미를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잘 키웠다고 자부했건만 솔직히 약간은 쇼크라고 할까?
여하튼 속상하고 화도 났다.
어떻게 네 나이에 그런 쇼핑을 할 수 있는지? 아무리 명품 신발이 신고 싶다고 해도 그건 아니라고 본다.
세상 살면서 네 말대로 없는 게 더 많을 수 있지만 그 반대로 넌 다른 네 또래보다 많은 걸 가졌고 넘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설사 네가 돈을 많이 번다 해도 사치와 허영에 들떠서 생각 없이 명품만 쫓는 한심한 여자로밖에 난 생각이 안 들었다.
...(중략)...
아빠와 엄마가 너를 언제까지고 보호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너 스스로 살아가려면 절제도 배우고 참을 줄 알고 그래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단다. 너의 가치관으로 볼 때 내 지적이 틀린다 할 수도 있겠지만 부모로서 널 위해 하는 말이다. 그래도 네가 옳다면 이것만은 알아 두길 바란다.
명품 신고 입고 든다고 사람이 명품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거. 올바른 삶을 살아갈 때 사람은 비로소 빛난다는 걸.
존경하고 사랑하는 남편이 데리고 온 딸이 내가 낳은 자식보다 더 애틋하고 사랑스러워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 그녀의 글 속에 절절히 묻어난다. ‘계모는 이래도 계모고 저래도 계모’라는 내용의 책을 쓰고 싶다는 금보라의 속내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기른 정이 낳은 정보다 깊다는 말일 것이다.
지금 인터뷰하고 있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 극동빌딩 6층의 ‘M바’대표에게 직원들 빨리 퇴근시키라고 야단치면서도 뒤로는 직원들에게 택시비를 슬며시 건네는 금보라의 마음 씀씀이로 볼 때 딸에 대한 꾸짖음도 끔찍한 사랑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어느 보석이건 나를 빛나게 해 주지 않았다. 오직 남편만이 나를 빛나게 해줬다”고 하니 금보라의 딸에 대한 꾸짖음과 사랑은 정당해 보인다.
“마누라가 천국”이라고 말하는 자신감은 그녀의 일상에 배어 있을 것 같다. 외모만큼 섹시한 금보라의 일상을 염탐하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활발한 성격인 필자는 낚시를 좋아하지 않았다. 장비를 늘어놓고 하염없이 물을 바라보며 기다림의 미학을 즐겨야만 하는 낚시는 필자의 성질에 맞지 않았다.
정적인 우리 남편은 취미가 식물 가꾸기와 낚시이다.
한창 젊었을 때 남편이 낚시를 즐기니 어쩔 수 없이 몇 번 낚시터 동행을 하기도 했다.
낚시터는 대부분 경치가 좋은 곳에 있어 꼭 물고기를 잡는 목적이 아니라도 따라갈 만했는데 더욱 좋은 건 낚시터 밥집의 짭짤한 시골 음식이었다.
대부분 낚시터를 관리하는 사람의 집에서 밥집을 겸하고 있어 그 집의 토방에 앉아 둥근 양은 쟁반 상에 오른 시골 된장찌개며 아삭한 오이장아찌, 어떻게 졸였는지 구수한 생선찜 등 낚시를 좋아하지 않아도 즐겁게 따라나설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상하게도 아들이 아빠의 취미를 물려받아 어릴 때부터 낚시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낚시 대회가 열려 많은 학부모가 참가해서 즐거운 하룻밤을 보냈는데 많은 아이들이 뛰어노는 동안 우리 아들과 친구 하나가 밤새 한자리에 앉아 낚시에 집중하고 있는 걸 보고 다들 놀라기도 했다.
필자가 낚시를 싫어하는 이유는 고기가 잡히지 않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지루함도 있지만 잡힌 물고기가 불쌍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도 음식 중에서 생선을 가장 좋아하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잡은 후엔 꼭 다시 놓아주지만 그래도 물고기는 상처를 입을 것이니 마음이 언짢다.
주말에 남편이 시동생 부부와 같이 가기로 했다며 낚시터 예약을 했단다.
필자는 낚시를 즐기지 않지만, 시동생과 동서는 낚시를 좋아한다고 한다.
오랜만의 형제간 단합을 위해 흔쾌히 따라가기로 했다.
요즘 날씨가 무척 가물다. 비가 많이 내려서 해갈이 되어야 식수며 농수에 대한 걱정을 덜 텐데 어제 좀 비가 내렸지만, 오늘은 아주 햇볕이 쨍쨍하다.
장소는 안성의 고삼 낚시터로 근처의 다른 저수지는 밑바닥이 갈라져 낚시 좌대가 땅 위에 얹혀있을 정도로 메말랐다. 그 모습이 매우 황량해서 가뭄에 대한 걱정이 심각하게 다가왔다.
고삼낚시터에 도착해 보니 전보다는 물이 줄긴 했다지만 저수지 위로 드문드문 서 있는 좌대가 그림같이 펼쳐졌고 이미 많은 좌대에 사람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예약했다는 집 모양의 좌대가 물 건너편으로 보인다. 보트를 타고 갔는데 이곳은 저녁 6시면 관리인이 다들 퇴근해서 6시 이후엔 뭍으로 나올 수 없다고 한다.
전기도 없어 배터리로 TV를 보고 저녁은 미리 주문해야 했다.
문제는 화장실이었다. 집 옆으로 만들어진 화장실에 대해 언급은 하지 않겠다. 다만 화장실 갈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랐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가격은 한 사람당 3만 원이어서 방값만 12만 원이니 좀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방안에 짐을 넣고 베란다처럼 생긴 좌대에 낚싯대를 설치한 후 의자에 앉았을 때 눈에 들어온 풍경은 시리도록 아름다워서 아깝다기보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어제 내린 비로 모든 먼지가 다 쓸려 내린 듯 새파랗고 깨끗한 하늘에 솜사탕 같은 구름이 너무나도 멋지게 유영하고 있다.
가뭄의 걱정도 오늘만은 비켜두기로 하고 풍경을 즐겼다.
남편과 시동생, 동서는 각각 서너 대씩 낚싯대를 펼쳐 드리웠고 필자는 직접 하지는 않아도 그 모습을 보는 게 흐뭇했다.
드디어 하염없이 낚싯대의 찌만 바라보는 인내의 시간이 시작되었는데 펼친 지 두세 시간이 지나도록 입질이 없다.
뒤쪽 의자에 앉아 풍경을 감상하던 필자는 누구라도 한 마리 잡았으면 좋겠다는 조바심이 났다.
드디어 낚시꾼이라는 남편을 제치고 동서가 한 마리를 끌어올렸다.
날렵한 은빛의 물고기는 눈치라고 한다.
몇 시간만의 첫 수확이라고 모두들 즐거운 탄성을 질렀고 고기가 잡히는 걸 바라지 않던 나도 손뼉을 치며 축하해 주었다.
소가 뒷걸음치다 쥐 잡는다는 말처럼 이후에도 동서의 낚싯대에서만 연달아 세 마리가 올라왔다.
6시경 음식이 배달되고 이후로 저수지는 적막에 휩싸였다.
밤이 되었다. 전깃불 없이 바라보이는 까만 하늘에 별이 반짝인다.
그러나 어릴 때 올려다보았던 밤하늘에서 쏟아질 듯 가득 찼던 별빛은 보이지 않는다.
그 많던 별님은 다 어디로 갔을까? 마음이 씁쓸하다.
밤늦게까지 꽤 많은 물고기를 잡았다.
잠이 안 올 줄 알았는데 누웠다 깨보니 아침이다.
밤새 잡은 어망에 담겼던 고기를 풀어주었는데 필자는 다시는 잡히지 말라고 속으로 빌어주었다.
필자 취미는 아니었지만, 이번 낚시여행으로 충분히 마음이 정화된 듯한 느낌이다.
우리 남편은 이미 은퇴했지만, 아직 현역에 계신 시동생과 동서도 낚시터의 하룻밤으로 휴식이 되었기를 바라며 신나는 다음 계획을 꿈꿔본다.
꿈은 인생에 장마가 지고, 눈이 올 때마다 점점 깊숙하게 땅속에 처박힌다. 하지만 실종된 꿈을 찾지 않으면 인생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꿈은 어떻게 찾아야 할까.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고, 어릴 적부터 무엇을 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는지 찬찬히 살펴보면 꿈이 보인다. 이렇게 자신을 후벼 파서 꿈을 찾다 보면 옵션이 생기고, 다채롭고 재미나는 삶을 살 수 있다. 재미있게 산다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잘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 인생을 한 번 글로 서봤다.
◇꿈의 발원지
초등학교 때 신작로로 등ㆍ하교했다. 역고개를 넘어 역말다리를 건너 다시 올망졸망한 가게들이 즐비한 읍내를 지나 산 아래 있는 학교까지 이어지는 길이었다. 당시 신작로 양옆으로는 미루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가끔 트럭이 지나갈 땐 먼지가 풀풀 날리어 사람이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충북 괴산군이 고향이다. 도서관은 교과서에서 나오는 그림에서 봤을 정도의 촌이다. 다행스럽게 학교와 집의 중간 정도에 살는 임명희라는 친구가 있었다. 명희 아버지는 필자 학교 선생님이었는데 동화책과 위인전을 전집으로 사놓았다. 그 집은 여러 형제가 있지만 그 누구도 책을 즐겨 읽지 않았다. 하굣길이면 늘 친구 집에 들러 책을 팠다. 처음 ‘알프스 소녀’를 읽고 하이디에 빠진 후로 괴산의 하이디라고 생각했다. 책에 흠뻑 빠져 전집을 몇 번씩 읽었다.
그 시간은 자신만의 시간이어서 행복했다. 명희는 깔깔거리고, 팔짝거리며 고무줄놀이를 하고 필자는 마루 끝 구석에 앉아 고개가 아프도록 책을 읽었다. 해가 저물고, 그 집 식구들 저녁상이 들어올 때까지도 죽치고 읽었다. 천국이었다. 명희 어머니가 “영희야, 이제 해가 저물었다. 집에 가야지”라고 해야 그제야 일어나 땅거미 내린 1.5㎞의 신작로를 마치 책에 나오는 주인공이 된 듯 사뿐거리며 걸으면서 중얼거렸다. ‘책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꿈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면서 잊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발견, 다시 꿈꾸다
늘 필자로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한때는 역사가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모든 것이 다르게 흘러갔다. 매우 실망했고, 무기력해졌다. 꿈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화가도 되고 싶었다. 그것도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작가 꿈을 꾼 적도 있었으나 마찬가지였다. 몇 년 동안 아무 생각 없는 주부로 살았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위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작가로서 자서전 쓰기 전문가로 나서게 되었다. 작가라는 토대 위에 ‘자서전 쓰기 전문가’라는 건물을 올린 것이다. 또 그것은 재능이라는 골조로 지어졌고 취향이라는 마감재로 모양을 갖추었다.
자신만의 이야기가 담긴 자서전은 특별함을 준다. 삶 속에서 나온 이야기이기에 진솔하고, 진실한 만큼 자신을 대신해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말해 줄 수 있다. 또 세월의 경험이 축적돼야 쓰는 것이 아니라 더 채워야 할 게 많고 더 부족함을 느낄 때 쓰는 것이다. 이렇게 쓰다 보면 꿈이 구체화하게 된다. 많은 사람과 필자가 자서전을 쓰며 받았던 느낌을 공유하고 싶다.
필자의 어릴 적 꿈은 여장군이었다. 군인을 거느리고, 당당한 모습으로 살고 싶었다. 또 작가도 되고 싶었다. 군인이 되고 싶은 것이 겉 꿈이었다면 작가가 되고 싶은 것은 속 꿈이다. 첫 번째 꿈은 이미 사라졌고, 두 번째 꿈은 얼마든지 꿀 수 있다. 또 어릴 때 그림도 그리고 싶었는데 매주 수요일 밤이면 누드크로키를 한다. 그 시간은 행복하다. 지금은 글쓰기 강사와 집필, 그림에 열중한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꿈이 아니다. 그냥 별이다. 그래서 필자는 '내가 누구인지 조금씩 더 나가보자. “내 꿈은 말이야 ”라고 시작하는 화법으로 꿈을 찾아가는 중이다.
꿈은 마음이 원하는 것을 내 몸이 체득해서 토해 내는 것이다. 또한 찾는 것도, 쇼핑하는 것도 아닌 매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기와집 맏손녀
1956년 음력 섣달 보름, 밝게 비추는 달 아래서 저녁 먹고 한참 후에 필자는 태어났다. 오봉산 봉우리가 정면으로 바라다보이는 산 아래, 앞에는 동진천이 흐르고, 10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아버지는 외아들이었기에 첫 손녀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쁨이었다.
조부모, 부모, 고모, 일하는 아재들, 부엌에 밥하는 언니, 애 보는 사람 등 대식구가 모여 살았다. 애보는 사람이 필요했던 이유는 필자의 형제가 칠 형제여서다. 필자 느낌으론 학교만 다녀오면 갓난아기의 울음이 들린 것 같았다. 가방을 마루에 던진 채 심통이 나서 뒤 곁으로 확 달려가곤 했다.
◇아버지 기억
색동저고리를 입고, 초등학교 입학식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추운 봄에 역고개를 넘어 학교에 가고 있자니 “주머니에 손 넣고 가지 마라” 하면서 아버지가 자전거를 탄 채 쌩하고 눈길을 지났던 것도 생각난다. 필자는 발을 동동거리며 그냥 걸을 수밖에 없었다.
가끔 아침이면 학용품 살 돈을 달랬다. 아버지는 잔돈이 없으면 읍내까지 가서 바꿔다 주었다. 가계부는 아버지가 기록했다. 필자에게는 별말이 없었고 필자도 어려워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내셔널라디오를 사왔다. 저녁이면 온 동네 사람이 모여들었다. 필자는 라디오에 아주 작은 사람들이 있는 줄 알았다.
3학년 때는 아버지가 네모난 빨간 비닐 책가방과 쑥색의 슬리퍼를 사 왔다. 슬리퍼의 뒤축에 자갈이 수시로 박혀 그것을 빼내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밤색 코르덴 바지를 뜯어 타이트스커트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집에 싱거 미싱이 있었고, 아버지도 미싱 기술이 있었다.
6학년 때는 주름치마에 스트라이프 무늬의 봄 스웨터를 사 주기도 했다. 그걸 입고 서울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서울 김포국제공항에 가서 수세식 변소를 처음 사용해 보았다. 사용 방법을 몰라 이곳저곳을 눌러 보고 물이 쏴 나오자 아이들과 함께 놀랐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졸업 후 양복 기술을 배웠다. 이태 정도 기술을 배우다가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주농고와 충북대 임학과를 졸업하고 산림청에 근무했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났고, 아버지는 군대에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났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는 군대에 가면 대가 끊기게 되니 산속에 숨어 있었다. 할머니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아들은 6세 무렵, 무를 묻어 두었던 구덩이에 빠져 숨졌다. 하나 남은 아들을 애지중지하느라 쌀 두 가마니를 들여 군대에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로 아버지는 별 할 일이 없어서 책을 뒤적이거나 바깥마당 한쪽에 돼지를 길렀다. 누에와, 양봉도 했다. 잉크를 찍어 노트에 뭔가를 쓰는 것도 좋아했다. 아버지는 필체가 좋았는데, 필자 보고 “글씨가 그게 무어냐”며 자주 타박하였다. 농사를 적극적으로 해 볼 생각은 없는 듯했다.
고향에서는 조부모가 중농, 아버지는 대학을 나오고, 겉으로 보기에는 부러울 게 없었다. 다만 가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한패가 되어 어머니를 나무라곤 했는데 그게 유일한 분란이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옆구리에 보따리를 끼고 나갔다가 해가 넘어갈 무렵이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필자는 처음에는 울고불고했는데 나중에는 외면해 버렸다.
◇그 오해와 진실
아들은 남이다. 고로 남의 인생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아들이 자기 아내 편을 든다고 필자는 당장에 보따리를 싸서 집으로 돌아왔다. 예전 필자 남편은 부모 편만 들고 효자이더니, 이제 아들은 마누라 편만 드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난 그래서 불행해’ 라고 생각하면 끝없이 불행해 진다. 그래서 남편이 부모편만 들었을 때 마음이 상했던 걸 떠올렸다. 그 속상함을 며느리가 가져야 하는 거는 더 안 될 일이다. 남편은 자기 부모에게 잘했으니 효자였고, 아들은 자기 부인에게 잘하니 괜찮다고 마음 다잡았다.
◇둘째 아들 1
필자는 둘째 아들은 스스로 자라게 키웠다. 그래서 이 아이는 매우 주체적이다. 유치원 때의 일이다. 봄에 심어 놓은 고구마를 캐 오는 날이다. 다른 아이들은 한두 개만 가지고 왔으나 아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큰 비닐봉지가 터지도록 질질 끌고 왔다. 물론 주인아저씨가 가지고 가고 싶은 만큼 갖고 가라고 했지만 가져올 수도 있고, 안 가져올 수도 있는 그 순간 아들은 이렇게 스스로 전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는 모든 학용품도 스스로 선택해서 사도록 했다. “친구들은 어떤 회사 물건을 사 왔니”, “네가 보기에는 어떤 것이 괜찮아 보이니”라고 한 뒤 돈을 주었다. 그랬더니 물건을 잘 골라왔다.
학교에서 폐휴지를 가져오라고 하면 위층에 사는 외동아이는 그 엄마가 나서서 난리다. 학교까지 날라다 주고, 복도가 시끄럽게 한바탕 소동이다. 아들은 만약 집에 신문지가 없으면 경비아저씨한테 사정이라도 해서 지하에 갖다 둔 신문지를 바퀴 달린 가방에 넣고 혼자 끙끙대며 끌고 간다. 애처롭지만 그냥 두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보이스카우트를 하려고 할 때도 “엄마, 보이스카우트 해보고 싶어”라며 “보이스카우트는 단복 입고, 사회에 봉사하는 것을 배우는 첫걸음”이라며 필자한테 설명했다. 그래서 “그래 그럼 한번 해 봐”라고 했더니 아들은 3년 동안 스스로 열심히 했다. 운동장에서 1박 2일 야영훈련 때도 필요한 것 외에는 스스로 물건을 준비하도록 했다. 그랬더니 끝난 후 아이들이 버리고 간 물건 중 먹을 만한 것은 전부 집으로 한 보따리를 가져왔다. 대견했다.
5학년 때는 자전거를 사 달라고 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자전거를 요구하면서 시장조사 뒤 비교 분석해서 설명했다. 그래서 한술 더 떠 “네가 가서 사와라”라며 13만원을 주었다. 그랬더니 서비스품목까지 모두 챙겨왔다. 자기가 골라온 자전거라 그런지 애착을 가졌다.
6학년이 끝나고 초등학교 졸업식에 갔더니 스카우트활동을 잘했다고 교육감상을 받았다. 그런데 담임교사가 “진우 어머니세요. 어쩜 학교를 안 찾아오세요. 원래 진우가 단장감인데 할 수 없이 학교를 자주 오는 어머니 중의 아들을 단장으로 시켰어요”라고 했다. 하지만 필자는 “네 괜찮아요, 그리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란 대답만 했다.
중고생이 되면 학부모들은 학교 앞에까지 자가용을 끌고 가서 모두 픽업하느라 난리다. 그러나 필자는 가지 않았다. 버스 네 정거장 거리였다. 혼자서 해결하라고 했다. 왜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없었겠는가. 잘못하더라도 아이들과 다투더라도 혼자 해결하도록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렇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주시는 하고 있었다.
아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학원에서 수업이 끝난 후 칠판을 지우고 청소를 해 놓으면 학원비를 면제해 주겠다고 하니 그 일을 하겠다고 손을 번쩍 들었다, 근면, 성실성까지 있는 아이다.
아들이 빠져 있는 게 하나 있었다. 게임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 얼마나 몰두하든지 ‘어주 구리, 이것 봐라’ 했다. 이때는 필자도 속이 좀 탔다. 전국게임회장이 되어 게임머니를 주무를 땐 특히 그랬다, 그러나 필자는 참았다, 되레 ‘어 이놈 봐라, 사업하면 잘하겠네’고 오히려 좋게 봐줬다. 더구나 대학 가서는 거의 안 했다. 안심됐다. 하지만 결혼하고 게임을 다시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며느리가 싫어하니 담배와 게임을 끊었다. 아마 지금은 거의 안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학에 가서도 후배와 선배, 교수들과의 관계를 잘 맺었다. 자기한테 자꾸 일을 맡긴다고 투덜댄다. 일을 맡기면 잘해낼 뿐 아니라 믿음이 가서 일 것이다. 이런 것에 대해서도 ‘완급을 조절해 보라’ 고 조언하는 게 전부다. 사실은 필자도 큰아들한테 보다는 작은아들한테 일을 맡기면 안심이 된다.
군대에 복무할 때는 도움을 요청하거나 그럴 때만 대꾸를 했다. ‘알아서 잘하겠지’라는 믿음이 있었다. 대신 어머니로서 아들을 향한 기도를 늘 했다. 어머니가 올리는 기도가 대단히 효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운동을 시작한 지 15년 되었지만 도복을 입고 훈련에 임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처음으로 한국체대 체육관에 가 보았다, 열심히 군인으로 생활하고 이다음에 퇴직하면 운동을 보급하면서 살아갈 예정. 자기의 인생목표가 뚜렷했다
결혼을 한 지금도 스스로 잘 헤쳐 나가고 있다. 마찬가지다. 상의하거나 어떤 사안에 관해 이야기할 때만 진지한 의견을 교환한다,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될 수 있으면 간섭을 하지 않으려 매사 애를 쓴다.
◇밤새워 할 부부이야기
찰칵찰칵 엿장수 가위 소리에 골목이 떠들썩했다. 남루한 차림의 어른과 아이들이 그 옆에서 뭔가 호기심에 찬 눈을 굴리고 있다. 엿판을 실은 손수례 아래에는 구멍 뚫린 솥단지, 고무신짝, 철사 토막까지 구경거리가 많았다. 단조로운 시골 마을에 엿장수의 등장은 일종의 문화행사였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기웃기웃. 무쇠 가위를 엿에 대고 치는 모습은 예술이었다.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그런데 어느 날 옆집에 놀러 갔는데 엿장수 가위가 있었다.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엿가위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이웃집 여인은 대뜸 "그 가위 마음에 들면 줄까" 한다. 말이 바뀔까 봐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가위를 받아들고 서둘러 집으로 왔다. 어떤 선물보다 기분이 엄청 좋았다. 퇴근 후 남편이 집으로 왔다. 그런데 “그 가위 어디서 가져 왔나. 당장 버리라”고 소리 지르는 것이 아닌가. . '엿장수 한 조상이 있나 봐, 왜 그래'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는데 남편은 그냥 “구질구질해서 싫다”는 것이었다. 개포주공아파트 4층, 지금은 분리수거를 하지만 그 당시는 쓰레기를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그냥 투하했다. '쨍그랑'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오메, 아까운 엿가위, 지금도 가위가 눈앞을 아른거린다.
필자 집에는 골동품과 민속품이 즐비하다. 바라보고 있으면 편안하고 좋으니까 모든 것이다. 심란한 마음이 들 때 먼지를 닦으면서 만지작거리면 얼마나 행복한지. 며칠 전 일이다. 남편이 소파에 앉아서 주위를 둘러 보더니 "이사를 하게 되면 저런 것들도 가져갈 거야"라고 민속품을 삿대질하면서 다그쳐 묻는다. 필자는 이에 “물론이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남편은 더는 대꾸를 하지 않고 방으로 슬슬 가더니 잠자리에 들었다. 필자 부부는 잘해 보려고 하거나, 좀 더 친하게 지내보려 노력하면 할수록 결국은 티격태격 싸운다. 의지와 사고방식이 참 많이 다르다.
어느 날, 무릎을 탁 쳤다. ‘본처가 아닌 첩처럼 살자’ 하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생각하자 필자는 달라졌다. 이야기 중에 이상한 기류가 감지되면 ‘아니 여보, 왜 이리 졸리지’ 핑계를 대며 안방으로 들어가 거기서 불을 켜 놓고, 할 일을 하든가 잠을 청하게 되었다.
필자는 남편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척한다. ‘그랬군, 이제 고생 끝났네, 대단해요’ 하는 추임새까지 넣어주면서 말이다. ‘미주알고주알’ 해봐야 누더기가 되기에 십상임을 몸의 체득을 통해 알고 있다.
◇인수봉 정상에 오르다
인수봉을 오르고 싶었다. 그래서 북한산 바위를 오르는 연습을 했다. 1주일에 한 번 정도 동호회에 참가해 원효길, 우정1ㆍ2길. 인수AㆍB길에서 바위에 손을 짚어 기어올랐다. 한 발자국만 헛디디면 그대로 가는 거다. 의도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걸어 본 사람만이 그 맛을 뭐라고 말할 수 있다.
주요 봉우리인 인수봉, 백운봉, 만경대 세 봉우리가 삼각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삼각산이라고 불렸다. 인수봉은 서울 강북구 우이동과 경기 고양시에 걸쳐 있는 삼각산 세 봉우리 가운데 하나. 세 봉우리 모두 산 정상에 바위 암반이 그대로 노출된 모양이라 산 아래서 올려다보아도 ,직접 올라도 그 위엄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산이다. 특히 인수봉은 81m가 매끄러운 화강암 봉우리다.
필자가 이 봉우리에 도전한 그 날은 눈발이 스산하게 날리며 찬바람이 제법 불었다.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도 있었으나 그냥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단 등반을 시작하면 물러날 곳은 없다. 그냥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물러나면 다른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자신을 타이르고 윽박질렀다. 그리고 악전고투 끝에 정상에 올랐다. 이미 많은 사람이 올라와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상에 오른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필자 팀은 산봉우리의 기쁨을 느끼며, 줄에 의지하여 모두 하산했다. 그때 로프 줄에 엉킨 젊은 두 남녀가 줄을 풀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었다. 죽음과 삶은 한 끗발 차이다. 사람들은 사고를 보고도 또 올랐다.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인수봉에 이르기 위해 그 많은 고통을 감내하고 훈련했다. 이 세상에서 줄을 타고 인수봉에 오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인생에 잊지 못할 한 편의 드라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