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정 북촌탁구 관장
‘뛰기 젊은 나이, 50+’ 캠페인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서울시50플러스재단’은 중장년 세대의 창업을 통한 도약을 지원하기 위해, ‘뛰기 젊은 나이, 50+’ 캠페인을 펼칩니다. 한국토지주택공사와 서울시50플러스재단이 함께 한 점프업5060 프로젝트를 통해 창업에 성공해 새 인생을 펼치고 있는 중장년들을 지면을 통해 소개합니다.
북촌에는 숨 가쁘게 돌아가던 일상을 내려놓고 한숨 돌리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그런 점에 매료돼 차린 탁구장에 ‘도시재생’이라는 어렴풋한 꿈이 더해졌을 때, 그는 ‘점프업5060’ 프로젝트에 지원했다. ‘문화예술을 탐구하는 스포츠 공간’ ,북촌탁구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아담한 탁구장을 마을 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켜보자는 마음은 차근차근 현실이 됐다. 북촌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북촌탁구를 찾는다. 박현정 관장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길거리 간식을 두고 가기도 한다. 영락없는 마을 사랑방의 모습이다.
“북촌에는 지역 특성상 재능 있는 분들이 많아요. 그분들과 협력해서 전시나 공연을 기획하고, 지도를 만들고, 영상을 제작했죠. 기획할수록 하고 싶은 일들이 점점 많아지더라고요. 3년 전에는 아예 이사를 와서 북촌 홍반장을 자처하며 많은 일을 거들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이 ‘자꾸 일을 벌이면 힘들지 않냐’고 물어보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어 즐겁기만 합니다.”
북촌 홍반장이 꾸린 사랑방
북촌탁구는 여느 탁구장과 달리 탁구대 두 대가 전부인 곳이지만, 쓰임새는 훨씬 다양하다. 글쓰기 교육이나 기타 레슨을 위해서라면 흔쾌히 탁구대를 접어 넣고, 탁구장 벽면에 전시를 열기도 한다. 지난해 말에는 한국예술인복지재단과 예술로 협업사업을 통해 동네 어르신 9분의 사진을 모아 ‘당신의 빛나는 라떼’전을 열었다. 사업에 참여한 예술가들과 함께 먼지 쌓인 앨범에 들어 있던 종이 사진을 디지털 사진으로 변환해 어르신께 드리는 작업을 거쳤다. 그 후 사진들을 탁구장에 내어 전시를 열었는데 반응이 좋았다고. 전시 덕분에 북촌탁구가 북촌 외부에도 알려지면서 탁구 관련 tvN 예능 프로그램 ‘올 탁구나!’ 1회 촬영지로 선정되기도 됐다.
북촌 사람들 사이에 호평이 자자한 주민 참여 프로그램 ‘아무연주대잔치’도 그와 북촌탁구의 작품이다. 그간 코로나19 대유행으로 탁구장 내에서 진행했는데, 올해는 종로구 원서공원에서 첫 야외무대를 가졌다. 종로구청과 진행하는 민간협치사업 프로그램으로 선정된 덕분이다. 날씨까지 도와줘 이번 대잔치는 연주단원 모두에게 특별한 추억으로 남았단다.
요즘은 온라인 사랑방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 점프업5060 프로젝트의 기존 수료생을 대상으로 하는 점프업5060 재도약 프로젝트에 선정돼 북촌탁구 온라인 홈페이지를 만들기 위한 과정을 밟는 중이다. 북촌탁구만의 로고송과 뮤직비디오는 이미 제작이 완료돼 세상에 공개됐다. 점프업5060 프로젝트에 참여할 때는 공간 자체를 꾸리는 데 집중했다면, 재도약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지금은 북촌탁구의 활동 영역을 확장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는 설명이다.
“마을 이장님이 확성기에 대고 공지사항을 안내하듯, 외부 사람들에게도 북촌 소식을 안내할 수 있는 온라인 확성기를 만들기 위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좋은 행사들이 마을 안에서만 공유되고 끝나는 게 아쉬웠거든요. 또 북촌을 찾는 관광객들도 쉽게 볼 수 있도록 관광할 때 지켜야 할 주의사항을 온라인에 올려두려고 해요. 북촌에도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고,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있어요. 하지만 북촌이 관광지로 워낙 주목받다 보니, 놀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 북촌 주민들의 피로도가 높아지고 있죠.”
주민·관광객 모두 즐길 수 있도록
이는 최근 여행 트렌드인 공정여행의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여행지의 환경에 해를 끼치지 않고 현지 문화를 존중하는 관광객은 지역을 즐김과 동시에 가꾼다. 그렇게 지속 가능한 여행이 만들어진다. 박현정 관장은 관광객이 더 잘 즐기고 가꿀 수 있도록 거들고 있다. 최근에는 마을 주민들만 알기 아까운 명소들을 소개하는 계동 지도를 만들어 크라우드 펀딩을 열었다. 자주 걷는 북촌 산책길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뽐내기 위해 마을 뮤직비디오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가 하는 일은 곧 북촌 주민들을 위한 일이 된다. 북촌 주민들이 만든 수공예품을 상품화해 판매하는 것, 필요로 하는 이가 있다면 기꺼이 공간을 내어주는 것. ‘마을 경제를 활성화’하는 거창한 도움이 아니더라도 주민들을 위한 일이라면 두 팔 걷고 나선다. 비가 올 때 무료로 우산을 빌려주거나, 코로나19에 확진된 이웃을 위해 대신 약을 타오는 소소한 일쯤은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다.
북촌탁구는 꿈이 많다. 우선 올해가 가기 전 동네 잡지를 내려고 준비 중이다. 서울시시청자미디어센터의 ‘방방곡곡 마을미디어 교육지원사업’에 선정돼 무료 글쓰기 교육을 받은 주민들이 기자가 될 예정이다. 취재한 북촌의 시시콜콜한 소식들은 한데 모여 새로운 소식지로 탄생할 것이다. 송년회를 겸하는 ‘뒹굴뒹굴 어린이 영화제’도 개최를 앞두고 있다. 아이들에게 영화 관람의 즐거움을, 엄마에게는 자유 시간을 선사할 예정이란다.
박현정 관장이 정한 목표는 ‘3년 안에 북촌생활문화센터로 인정받기’다. 하고 싶은 것이 많고 벌이는 일도 많은 사람이라, 시기를 정해두지 않으면 지키지 못할 것 같아서 3년이라는 기한을 스스로 세워뒀다. 그러나 하교하는 아이들의 발걸음이 자연스레 북촌탁구로 향하는 것을 보면, 그 목표는 이미 이룬 듯하다.
새파란 가을 하늘 아래 녹색 공원이 있고, 호수가 있고, 산책로가 있다. 안산시 외곽 개활지에 있는 화랑유원지다. 시월 한낮의 부드러운 햇살을 받으며 산책 삼아 한가하게 거니는 이들이 많다. 이름은 유원지지만 왁자한 분위기가 아니라서 안락하다. 경기도미술관은 화랑유원지 안에 있다. 자리 한번 기차게 잘 잡았다. 풍경과 산책과 미술품 감상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미술관이라니. 접근성이 매우 뛰어난 입지이기도 하다. 어슬렁거리는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미술관 관람의 목적을 호주머니에 담았을지도 모른다.
미술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예전보다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미술관 보기를 소가 닭 보듯 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소란스러운 세상을 생동감 넘치는 감성으로 수용하는 눈을 얻을 수 있는 게 미술관이다. 하지만 따분하고 난해하다는 선입견으로 외면한다. 미술관 운영자들은 이런 현실이 야속하다. 어떻게 해야 사람들의 관심과 호감을 살 수 있을까. 오나가나 골똘히 고민하는 문제가 그렇다.
얼마 전에 종료됐지만, 경기도미술관을 찾아간 날엔 ‘미술관의 입구: 생태통로’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는 고민의 한 결과물이다. 미술관의 진입장벽을 낮춰 관람객을 불러들일 방법을 모색해 꾸린 기획전이니까. 유원지를 가로지르는 통행로이기도 한 미술관 야외 길에 설치작품 다수를 전시했다. 하나같이 쉽고 재미있었다. 미술은 어렵다는 통념이 오해에 불과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미술이 지닌 위계와 경계를 철거해 관람객들을 포용하고자 했다. 사람들에게 한결 친절하고 살갑게 다가가고자 하는 미술관 측의 선한 의도가 완연해 인상적이었다. 환경 악화로 고립된 동물들의 활로로 쓰이는 ‘생태통로’처럼, 외부 전시물 전체가 공감과 소통의 가교로 기능하고 있었다.
경기도미술관은 2006년 경기도가 설립했다. 운영은 경기문화재단이 맡았다. 공립미술관답게 건물 규모부터 크고 훤칠하다. 안산시에 사는 미술 애호가들은 언제든 찾아가 무료로 손쉽게 예술을 즐길 수 있는 환경 형성에 반색했겠다. 나는 경기도미술관에 관한 작은 기억 하나를 가지고 있다. 이 미술관은 세월호 침몰 때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안산 단원고와 가까운 거리에 있다. 한결 절절한 애도 분위기에 이끌린 건 그래서였을까. 세월호 2주기인 2016년 4월, 경기도미술관 측은 희생자들을 추념하는 ‘사월의 동행’ 전을 열었다.
당시 정치권에선 세월호 사고 원인 규명 문제 등을 놓고 두꺼비씨름을 하고 있었다. 사립미술관도 아닌 공립미술관이 앞장서서 추모 전람회를 들고 나서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문학계에서는 추모시가, 음악계에서는 추모곡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술계의 반응은 상대적으로 미지근하던 때였다. 따라서 경기도미술관의 추념 미술전이 야기한 반향이 작지 않았다. 햐! 미술관이 진정 아름다운 레퀴엠을 헌정했구나! ‘사월의 동행’ 전소식을 듣고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눈앞에 있는 현상과 형상을 넘어 무한으로 달려가는 게 예술이다. 그러나 현실의 거대한 아픔과 슬픔에 무디다면? 눈치를 보고 공기만 살핀다면? 그건 예술이 아니라 정치 행위에 불과할 뿐이다. ‘사월의 동행’전은 예술의 역할이 무엇인지 새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전람회이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작가들은 무엇을 표현할 것인지, 세상에 만연한 모순과 고통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졌던 셈이다.
유명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가 설계해
미술관 건물 입구로 다가가자 최정화의 설치작품 ‘꽃꽂이’가 눈길을 잡아당긴다. 플라스틱으로 꽃들과 열매를 만들어 설치한 작품이다. 원색의 붉은 인조 꽃떨기가 밤에 쓴 성급한 연애편지처럼 격정적이라 강렬하다. 최정화는 한국에서 요즘 가장 바쁜 화가다. 자칭 ‘설치작품으로 설치는 사람’이다. 그는 플라스틱 폐품 등 ‘눈부시게 하찮은 것들’을 모아 이를테면 꽃처럼 특별할 것 없는 외적 형상을 조형한다. 플라톤식으로 말하면 ‘저급한 모방’이다. 그러나 대중은 그의 메시지를 지체 없이 수신한다. 최정화는 이렇게 묻는다.
“우리가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정말 그럴까? 플라스틱도 제2의 자연 아닐까?” 그는 아까 얘기한 세월호 추념 전시회에선 10m 높이의 대형 설치작품 ‘검은 꽃’을 선보였다. 공기주입기로 작품에 공기를 넣어 꽃잎이 피었다 졌다 반복하게 해 세월호 희생자들의 부활을 기원했다.
먼 과거에 경기도미술관 일대는 바다였다. 이후 바닷물을 밀어낸 간척지였다. 지금도 호수가 있지만 원래 물이 머문 자리였던 것. 이와 같은 역사성과 장소성에 착안해 물 공간을 디자인 요소의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설정하고 건축 설계를 했다. 미술관의 남쪽과 동쪽 면에 사각의 대형 수조를 만들어 물을 채움으로써 저만치에 있는 호수 경관과 연계성을 갖도록 했다. 나아가 건물을 통째 물 위에 뜬 배로 간주하고 심벌을 입혔다. 거대한 철골 프레임에 유리판을 끼워 돛대 형상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 건물은 예술을 싣고 삶의 대양을 항해하는 중?
국내 미술관 가운데 거의 최초로 시도된 자동 개폐식 천창(天窓) 시스템도 비범하다. 전시실에 자연광을 뿌리기 위한 채광 장치다.
설계자는 프랑스의 유명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다. 일찍이 30대에 프랑스 국립도서관을 설계해 세계 건축계에 표나게 데뷔한 인물이다. 국내에도 이미 이름난 사람이다. 경기도미술관 건물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는 건축에 자연 요소를 적극 융합한다. 세련된 기술로 추상적인 건축 언어를 발신한다.
지하 공간으로 건축을 끌어들인 데다 ‘빛의 계곡’까지 구현한 ‘이화여대 캠퍼스센터’(ECC)는 세계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2021년에 착공한 지하 건물 ‘영동대교 광역복합환승센터’도 페로의 작품인데, 태양광을 흡수해 반사하는 초대형 라이트 빔을 쏴 지하 깊은 곳까지 자연광을 배급하는 시스템이라니 흥미롭다.
전시 공간은 2층에 있다. 방문 당시 ‘당신의 가장 찬란한 순간’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디지털 문명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욕망을 무한 소비하는 풍속을 돌아보게 하는 전시회다. 경기도미술관의 컬렉션 중에 ‘감각적인 작품’ 22점을 골라 선보이는 ‘소장품으로 움직이기’전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
재미있기론 지구 곳곳에 이름을 알린 강익중의 대형 벽화 ‘오만의 창, 미래의 벽’이다. 미술관 1, 2층 벽면 한쪽을 통째 점유한 가로 72m, 세로 10m 크기의 대형 벽화다. 전국의 어린이 5만 명이 3×3인치짜리 나무판에 그린 그림 5만 점을 모둠으로 엮은 대작이다. 강익중은 뉴욕에서 노점상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습작을 했다. 퇴근길 지하철이 유일한 작업실이었으며, 지하철에서의 짧은 이동시간 중에 그림을 한 점씩 그렸다. 그렇게 해서 강익중표 ‘3×3인치 미니 캔버스 작품’이 나오게 됐다. 그는 5만 어린이들의 작은 그림들이 모여 뿜는 웅장한 에너지에 심취했나? 동어 반복적인 벽화 작업을 연달아 해왔다. 작은 그림들이, 작은 꿈들이 모여 삼라만상과 우주를 이루는 장관을 보라! 강익중의 메시지가 그렇다. 그는 백남준이 제자로 인정한 유일한 화가다. 명성과 감흥은 겉돌지 않는다.
자생의료재단은 지난 23일 코트야드 메리어트 서울 남대문 호텔에서 인하대학교 대학원 융합고고학과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한 한의사들의 삶’을 주제로 학술 세미나를 개최했다고 24일 밝혔다.
인하대학교 대학원 융합고고학과가 주최하고 자생의료재단, 대한학술원이 후원한 이번 행사에는 50여 명의 역사학 전문가들이 참여했으며 한의사의 독립운동사를 다각적으로 조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학술 세미나는 인하대학교 남창희 교수의 환영사와 박민식 국가보훈처장, 대한한의사협회 홍주의 회장,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박경목 관장을 비롯한 각계 주요인사들의 축사로 시작됐다.
방송인 김범수가 세미나의 사회를 보는 가운데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자생 윈드림 관악단과 성악가들의 축하공연이 진행돼 분위기를 돋웠다. 자생 윈드림 관악단은 자생의료재단의 문화예술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저소득층 청소년들의 안정적인 연주활동을 돕기 위해 창단됐다.
먼저 1부는 자생한방병원 설립자 신준식 박사와 자생의료재단 신민식 사회공헌위원장(잠실자생한방병원 병원장)의 숙조부 신홍균 선생과 선친 신광렬 선생의 독립운동사를 주제로 발표가 진행했다. 첫 번째 발표자로 나선 국민대학교 이계형 교수는 ‘월남유서를 통해 본 신광렬의 생애와 독립운동’ 논문을 중심으로 신광렬 선생의 업적을 재조명했다.
신광렬 선생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한의사로 간도에서 3·1절 11주년을 앞두고 일어난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당시 그는 시위운동의 주동자로 지목 받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신광렬 선생은 정부로부터 업적을 인정받아 지난 15일 대통령표창이 서훈되기도 했다.
신광렬 선생의 숙부 신홍균 선생에 대한 논문도 소개됐다. 인하대학교 융합고고학과 한태일 연구원은 ‘신홍균 한의사의 항일 독립운동 사상적 배경 연구’를 통해 독립군 군의관 신홍균 선생의 독립운동사와 그 배경을 설명했다. 신홍균 선생은 경술국치 직후 독립운동을 위해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을 떠나 독립군 ‘대진단’을 창설하고 항일무력투쟁에 일생을 바쳤다. 이를 기려 신홍균 선생에게도 2020년 11월 건국훈장 애족장이 서훈됐다.
이어 한국 영토사 주요 주제 중 하나인 ‘간도’에 대한 활발한 논의도 이뤄졌다. 인하대학교 복기대 교수는 ‘간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논문을 통해 1900년대 초 간도의 상황과 역사적 연원에 대한 설명을 진행했다.
2부에서는 한국 전통문화와 민족의학에 대한 논문 발표가 이어졌다. 인하대학교 정다원 연구원은 ‘대일 항쟁기 독립군의 전통의학 이용에 관한 고찰’ 논문을 통해 한의학이 독립군 활동에 미친 영향에 대해 소개했다. 정 연구원은 “주변에서 쉽게 약재를 구할 수 있었고 한약방을 거점으로 군자금을 조달하는 등 독립군은 자연스럽게 한의학에 기대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후 마지막 강연에서는 인하대학교 이상화 연구원이 ‘한국독립군 창설 배경 및 대전자령 전투’를 주제로 논문 발표를 진행했다.
모든 강연이 끝난 후 폐회사는 자생의료재단 박병모 이사장이 맡았다. 박병모 이사장은 “이번 학술 세미나는 한의사의 독립운동사를 다각도로 조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학술의 장으로서 그 의미가 컸다”며 “앞으로도 매년 학술 세미나를 개최해 꾸준히 한의계 관련 논문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노래를 잘하는 이들이 그룹을 이루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세상에는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종류의 합창단이 있다. 하지만 구성원이 여성 성악가, 그것도 소프라노들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런 면에서 레이디스타즈는 특별하다. 성악계의 스타들이 모여 창단한 그룹이기 때문이다.
소프라노는 이탈리아어로 ‘높은’이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에서 온 단어다. 말 그대로 성악에서 높은 음역을 담당하는 여성 성악가를 말한다. 단지 높은 영역의 목소리를 가졌기 때문에 특별한 것은 아니다. 흔히 프리마돈나라고 말하는 오페라의 주인공은 소프라노가 맡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부분의 오페라가 이것을 전제로 이뤄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렇게 모인 여섯 명은 무대에서 프리마돈나로 스포트라이트를 당연히 독차지했던 인물들이다. 모든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주인공들이다 보니, 어떤 면에선 어느 정치인이나 기업인보다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분위기가 있었다.
어머니들이 만든 성악의 길
리더인 김경희도 “소프라노들이 그룹을 이루는 것은 드문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남성 성악 그룹은 조금씩 생기는 편인데, 그에 비해 여성 그룹은 거의 없어요. 그것도 여섯 명이나 모인 경우는 거의 없을 거예요. 게다가 저희는 대부분 독일이나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 등에서 수학한 해외파로만 구성되었으니 더욱 신기한 일이죠.(웃음)”
레이디스타즈는 한국예술문화재단이 중심이 돼 지난 3월 창단했다. 6월 17일에는 첫 번째 창단콘서트도 가졌다. 남성 테너 10명이 모인 ‘더 텐테너스’ 역시 한국예술문화재단을 통해 탄생했다. 일종의 남매 그룹인 셈이다.
콧대 높은 소프라노들이 모여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모습은 예상과 다르다. 부르는 노래도 오페라 아리아뿐만 아니라 팝페라, 팝송, 가곡 등 다양하다. 여러 장르를 소화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지난 창단콘서트 때는 ‘넬라 판타지아’나 ‘섬웨어 오버 더 레인보우’ 같은 우리에게 친숙한 곡들도 선보였다.
연습 과정은 어땠을까? 빛나던 여성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보니 일종의 기싸움 같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합이 잘 맞아 자매처럼 지낸다고 입을 모은다. 이들의 결속력의 배경에는 다양한 이력과 유사한 성장 과정도 한몫했다. 같은 소프라노지만 김정현은 메조소프라노 출신으로 다른 역할 분담이 가능하고, 정지민은 뮤지컬을 전공한 이력의 소유자다. 현재는 대학에서 실용음악을 강의하고 있다.
다양한 매력을 지니고 있지만 성악가의 길로 들어선 계기는 유사하다. 그 중심에는 어머니가 있다.
김경희는 트로트 가수 출신의 어머니 영향을 받아 음악을 시작했다. “어머니가 자신을 닮아 끼가 있을 거라며 민요를 가르치기도 하셨죠. 그러다 중학교 때 성악을 해보았는데 적성에 맞아 시작하게 됐어요. 성악을 만나면서 성격도 바뀌고, 제게 물려받은 것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됐죠.”
김정현도 비슷한 경우다. 피아니스트 출신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다. “어머니가 음악에 대한 열정이 많아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오래 했어요. 그러다 중학교 때 성악을 만나면서 진짜 맞는 것을 찾게 됐죠. 악기를 연주할 땐 그저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한다는 기분이었다면, 노래는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으니까요.”
김정현은 대학 졸업 후 국내에서 알아주는 오디션에 합격해 활동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유학길에 올랐다. 솔리스트를 위해 합창을 하던 어느 날 ‘내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평생 남 뒤에서 합창만 할 것 같아서 용기를 냈다”고 설명했다.
막내인 강수연은 본인이 원했다가 어머니의 후원을 받은 케이스다. “내성적이었는데도 초등학교 때 교회 성가대에서 솔로를 뽑는다길래 바로 손을 들었죠. 너무 하고 싶었어요. 무대를 보신 선생님이 성악을 권해주셔서 발을 내딛게 됐어요. 변성기를 겪으면서 포기하려 했는데, 어머니 생일에 선물 대신 참가를 강요하셨던 오디션에서 좋은 결과를 얻으면서 성악을 다시 시작하게 됐죠.”
이은진의 출발에도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어린 딸에게 맞는 것을 찾기 위해 안 해본 것이 없었다고. 체육부터 컴퓨터까지 해볼 수 있는 것은 모두 시도했다. 그러다 맨 마지막에 남은 것이 합창단이었다.
“하지만 정작 성악을 한다니까 반대하셨어요. 집안에 성악을 접해본 사람이 없으니 덜컥 겁이 나셨던 거죠. 그러다 나중에 음악 선생님도 될 수 있다며 허락해주신 것 같아요.(웃음).”
코로나가 만든 고난
하지만 이들이 가족의 응원을 등에 업고 탄탄대로만 걸었던 것은 아니다. 리더 김경희와 함께 수험 생활을 하기도 했던 ‘단짝’ 정지민은 “오랜 솔로 생활을 마치고 합류해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대학 졸업 후 빠른 비트의 음악에 끌려 대학원에서 뮤지컬을 전공했죠. 하지만 뮤지컬계 나름의 구조가 있기 때문에 주역을 맡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솔로 팝페라 가수로 활동하기도 하고 행사도 다녔는데, 쉽지 않았어요. 혼자 성악곡도 하고, 뮤지컬곡도 하고, 공연 외적인 부분도 모두 처리해야 했으니까요. 방송국에서 로고송 가수 생활도 했고요. 앨범도 하나 발매했어요. 처음에 합류 제안을 받았을 땐 성악을 공부하긴 했지만 벗어난 곳에서 오래 활동한 터라 좀 망설여지기도 했는데요, 그룹 내에 친구도 있고, 함께하는 활동이 재미있고 기대돼요.”
이은진은 유학 과정에서 방황을 겪었다. 독일에서 계속된 입시 실패에 당황해하던 때 마스터 클래스에서 만난 선생님의 추천으로 프랑스로 나라를 옮기는 모험을 감행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입국신고서에 국적이 북한으로 되었을 정도였는데도 무작정 떠났죠. 이후 죽어라 연습하면서 30대 가까이 되어서야 노래하는 방법을 알게 됐어요. 그러고 나서야 ‘목소리 개발이 안 됐다’는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어요.”
문부희는 성악을 접하는 과정까지는 일사천리였다. 음악 시간만 되면 문부희의 독무대가 열렸고, 선생님들은 당연하다는 듯 성악을 추천했다. 학년이 바뀌고 학교가 달라져도 선생님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성악을 전공했다. 학비 걱정에 시립대를 선택해야 했지만 고난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학교에서 남편을 만나 약혼을 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났어요. 예상과 다르게 유학 기간이 길어지던 와중에 첫째를 낳았죠. 학업과 객원 합창단 생활, 육아를 병행한 셈인데 쉽지 않았어요. 밤 11시에나 주변 친구들이 봐주던 아이에게 돌아온 날도 많았고요.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이 서로 돕고 살던 시절이죠.”
이어 졸업 직전에 둘째가 생겼고, 한국으로 돌아와 셋째를 낳았다. 큰애는 벌써 아홉 살이다.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해볼까 생각하던 시점에 코로나가 터져버렸어요. 일이 자연스럽게 정리되면서, 이참에 아이를 하나 더 갖자고 마음먹었죠. 신기하게 막내 돌이 가까워지니까 다시 노래할 기회가 생기더라고요. 그러다 레이디스타즈를 만났고,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음악을 할 수 있어서 지금은 너무 행복해요.”
강수연 역시 코로나 여파를 겪었다. 유학 이후 자리 잡았던 미국에서 팜비치 오페라단 등 다양한 활동을 하다 매니지먼트 회사와 계약을 맺고 본격적인 활동을 준비하던 와중에 코로나 직격탄을 맞았다.
“코로나 초기 뉴욕에서 동양인은 지하철도 제대로 탈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인종차별이 심해지면서 매니지먼트 회사에서도 잠시 한국에 가 있으라는 조언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던 중 작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소극장 오페라 축제에 참가했다가 리더를 알게 돼 레이디스타즈에 참여하게 됐어요.”
함께라서 더 설레
평생 클래식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활동한 이들이기에 다른 분야의 음악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을까 궁금했다. 김경희는 “시대가 변했다”고 명쾌하게 설명했다.
“멤버 모두 오페라나 클래식 무대에서 개인적인 활동도 많이 하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이런 기회를 통해 우리 그룹이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다른 장르의 음악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이죠. 저도 유학 시절에는 클래식이 아닌 다른 무대는 쳐다보지 않을 정도로 무지했어요. 하지만 많은 무대에 서면서 관객들 입장을 생각하게 되고, 형식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됐죠. 그래서 많은 관객들과 공감할 수 있는 그룹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어요.”
이은진은 레이디스타즈 활동이 모두에게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아직은 새로운 곳과 통하는 문손잡이를 잡고 있는 기분이에요. 문을 열면 어떤 광경이 펼쳐질지, 이후에 어떤 길을 걷게 될지는 제게 달려 있으니까요. 밝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많이 필요하겠죠. 하지만 긴장보다는 설렘이 더 커요. 혼자가 아니라 함께 갈 수 있으니까요.”
안양시는 ‘공공예술의 도시’를 표방하며 개성과 위상을 돋우고 있다. 도시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갤러리로 가꾼다는 의도를 가지고 지역 곳곳에 예술을 흩뿌렸다. 안양예술공원은 그 센터이자 견고한 플랫폼이다. ‘지붕 없는 미술관’이라 할 만한 이 산속의 예술공원은 사실상 국내 초유의 야외 공공미술 실험장으로 등장해 선구적인 성취를 거두었다. 마음을 훌훌 털어놓기에 적당한 숲길 산책과 미술품 감상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이색적인 명소다. 안양문화예술재단 김연수 공공예술부장에게 작품 소개와 관람 방법을 들어봤다.
“가장 중요한 작품은 관람 출발점인 알바루 시자의 ‘안양파빌리온’이다. 시자 특유의 미니멀리즘 건축 미학을 체험할 수 있는 이 건축물은 직선이 거의 없는 유선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자연 채광 효과에 의한 빛과 음영의 변화, 곡선으로 처리한 내부 벽면이 야기하는 안락하고 부드러운 느낌 등에서도 시자 작품의 디테일과 문맥을 읽을 수 있다.”
공원에 산재한 미술품을 구경하다가 작품 ‘전망대’에 오르자 시야가 탁 트여 시원하더라.
“네덜란드 작가 MVRDV의 설치 작품이다. 삼성산의 등고선을 기반으로 산의 구체적인 형태를 작품으로 표현했다. 예술에 자연을 극적으로 접목한 설치 작품이다.”
플라스틱 상자를 첩첩이 쌓아 만든 ‘안양 상자 집’은 어떤 의도로 만든 작품일까? 평범한 오브제로 독특한 대형 설치 작품을 조형했다는 점에선 기발했다.
“불교적 상상력으로 만든 작품이다. 사원(寺院)을 형상화했다고 보면 되겠다. 겹쳐진 플라스틱 박스들의 틈새로 스며드는 빛의 효과를 통해 자연과 예술의 관계를 절묘하게 표출했다. 밤에는 내부에 밝힌 불빛이 밖으로 흘러나가 신성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는 독일 작가의 작품인데, 대량의 재활용 음료수 박스를 독일에서 직접 가져왔다. 한국의 박스는 빛의 투과율이 좋지 않아서다.”
순전한 예술로서의 작품 외에 실용성과 현장의 기능성을 추구한 작품들도 있어 이채롭다. 가령 앉아 쉴 수 있는 벤치 용도의 작품들이 그렇다. 이런 경향을 공공미술의 특징으로 보면 되나?
“그렇다. 공공미술의 특징 중 하나인 공익성을 구현한 작품이 많다. 시민들이 산책하는 장소에 필요한 요소를 문제의식을 갖고 찾아내 보완하듯이 설치 작품으로 채워 넣은 것이다. 대형 작품 ‘나무 위의 선으로 된 집’ 역시 마찬가지 계열의 작품이다. 예술 작품이자 시민들의 통행로로 쓰이는 공간이니까.”
프랑스 작가의 작품 ‘발견’은 나무로 된 작고 허름한 원두막 형상이다. 이 작품은 시간 속에서 스러져 결국은 소멸할 것을 예감하고 만들었을까?
“냇가 흙 속에 묻혀 있던 쉼터 용도의 원두막을 발굴, 약간의 구조 보강을 해 복원했다. 유원지였던 과거의 역사성을 담은 작품이며, 이런 경향 역시 공공미술의 특징이다. 공원의 작품들은 지속적으로 보수해 관리한다. 자연적으로 소멸되는 건 어쩔 수 없고.”
한결 효율적인 관람 방법이 있다면?
“현재 코로나 상황이라 잠정 중단됐지만, 우리는 도슨트를 통한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이 프로그램을 경험한 관람객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다. 작품들에 대한 상세한 해설로 감상의 재미와 즐거움이 커지니까.”
도슨트의 해설을 곁들이면 금상첨화라는 얘기다. 그러나 소나무와 하늘과 구름까지 만끽할 수 있는 산속 야외 미술관이니 혼자라도 충분히 즐겁다.
도시 인근에 꽃 피는 산과 맑은 냇물이 있으니 어련했으랴. 행락객들로 몹시 붐비는 곳이었다. 휴일이면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소풍을 즐겼다. 덩달아 주변 일대의 식당과 주점이 성황을 이루어 난장판처럼 어지러웠다. 경기도 안양시 삼성산 자락에 있었던 예전 안양유원지의 모습이 그랬다. 이 유원지는 결국 제풀에 지쳐 시들었다.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난개발이 극에 달한 데다 대홍수가 계곡을 휩쓸어서다. 이렇게 사필귀정처럼 붕괴한 유원지를 딛고 문화 공간의 신예로 데뷔한 게 안양예술공원이다. 안양시가 주관한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 Anyang Public Art Project)의 트리엔날레를 기반으로 2005년에 첫발을 내딛은 것. 지금은 안양문화예술재단이 주도한다.
안양예술공원 일대엔 조각과 설치 미술, 디자인 작품 60여 점이 산재한다. 다시 말해 수많은 미술 작품으로 구성한 노천 미술관이다. 일명 ‘화이트 큐브’라 일컫는 기성 미술관들의 정형성에서 탈출, 거리와 산야로 원정을 나간 작품들의 집합장이다.
한편 이곳은 공공미술의 전당이다. 공공미술? 이건 재미있다. 소수 전문가 그룹이 마치 대중의 미의식을 대리하는 것처럼 독점적으로 예술을 향유하는 추세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발생한 게 공공미술이다. 즉 미술관에 들어앉아 사람을 불러들이는 게 아니라 생활 속으로, 대중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 미술이다. 작가의 주관적 세계관을 앞세우기보다 미술 행위를 펼치는 지역의 장소성, 역사성, 공공성을 중심에 두고 조형물을 생산, 제작 현장에 그대로 전시하는 장르이기도 하다.
안양예술공원 관람 기점은 ‘안양파빌리온’이다. 20세기 모더니즘 건축의 신사조를 주창한 알바루 시자(Alvero Siza, 포르투갈)의 작품이다. 이는 아시아에 최초로 등장한 시자의 생산물이다. 그의 건축은 논리와 합리, 그리고 개념을 근간으로 이루어지는 일반적 건축 경향과 달라 돌올하다. 추상적이고 실험적인 건축을 하니까. 빛과 재료의 물성을 중시하는 미니멀리스트 시자를 ‘건축의 시인’이라 추켜세워도 과하지 않은 게 그의 작품은 다분히 서정적이며, 지극히 관조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저히 시각화된 여느 건축과 다르다. 간소하다 못해 금욕적이기까지 한 안양파빌리온의 건축적 성향을 보라. 튀지 않으며 모나지 않은 외관으로 주위의 경관과 조용히 조응하는 게 아닌가. 시자의 파빌리온이 어디 있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두리번거리며 찾아야 찾아지는 건 나직하고 수굿한 형상을 구현했기 때문이다.
파빌리온의 내부를 볼까. 외관의 단순성과 백색 색조가 고스란히 내부로 흘러들어 간명하고 유려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나 단순하기만 하다면 무슨 재미? 곡면의 연쇄로 이루어진 벽면은 부드러운 리듬감으로 생동한다. 사각형과 원형, 유선형 등 다양한 형태의 창들도 흥미를 돋운다. 거대한 둥근 천장 모서리 틈새로 들이치는 자연광은 은은하게 굴절하며 공간에 빛과 그림자를 배급해 슬쩍 유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인공 조명보다 미묘하고 전위적인 저 빛살은 뭐랄까, 물이 흐르는 걸 바라볼 때처럼 상서로운 기분마저 야기한다. 태양이 쏴 보낸 광선으로 구조물에 자연을 입히는 방식은 시자의 오래된 건축적 관습이다. 빛의 유입과 변화에 관한 탐색과 성찰을 설계의 기저로 삼았다. 건축 행위를 통해 빛과 사물의 존재를 탐구한 철학자라 할 만하다. 이렇게 기똥차게 빼어난 고수의 작품을 눈요기할 수 있다는 건 흔한 행운이 아니다.
공공미술이 던지는 시대적 화두
이제 거리로 나서 냇물을 건너 산으로 들어간다. 지나치는 길목마다 작품이 있다. 거리의 미술품들은 세상에 만연한 획일성과 권태를 누그러뜨린다. 삶이 우리를 녹초로 만들지만 예술 한 자락 걸친 감성으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지 않던가. 그래 미술품이 노상에 천변에 산야에 널려 있다는 건 황무지에 내리는 단비처럼 반갑다.
봄날의 산은 화사해 더 보태지 않아도 이미 낙원이다. 그럼에도 미술로 보탠 게 많으니 이 작품을 보고 나면 저 작품이 쓱 출연한다. 등산로를 따라 걷는 일 자체가 예술 향연에의 동참이다. 작품들 대부분은 까다롭지 않아 이해가 쉽다. 심지어 완구처럼 익살스런 소품들도 있으며, 걸터앉아 다리를 쉬게 만든 조형물들도 있다. 그렇다고 후루룩 건성으로 지나칠 일은 아니다. 이름난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도 많으니까. 물론 작가의 이름을 보고 작품에 혹하는 건 우습지만, 농밀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간과한다면 짜장면을 먹으러 갔다가 단무지만 질근거리다 나오는 것처럼 엉성하다.
저기 풀밭에 에페 하인(덴마크)의 ‘거울 미로’가 있다. 거울 기둥들로 원형의 미로를 만들었다. 미로란 기독교의 진리를 찾는 순례자의 유랑을 상징한다. 거울 기둥 100여 개는 불교에서 말하는 백팔번뇌의 표식이기도 하다. 기독교와 불교를 융합한 조각인 셈이다. 작가가 굳이 불교를 동원한 건 안양예술공원이 있는 삼성산이 불교의 발흥지였기 때문이다. 공공미술이 지향하는 방법의 하나는 현장의 역사성을 작품에 담는 것인데, ‘거울 미로’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다. 불교적 테마를 조형한 작품은 그밖에도 여러 점 더 있다. 인도네시아의 에코 프라워트는 자기 나라에서 가져온 수백 개의 대나무로 사원을 만들어 안양의 불교적 풍토를 기렸다.
공공미술은 지역의 풍속에도 지대한 관심을 표명한다. 중국 작가 왕두의 ‘신기루’는 그 본이다. 그는 이미 소실된 안양유원지 시절의 건물 형태를 대리석 조각으로 재현해 냇물에 담가두었다. 이건 공공미술의 본령이 지역의 사회사를 형상화하는 데에도 있음을 알게 한다. 공공미술은 현장의 환경 개선과 기능성 보강에도 신경을 쓴다. 작품이 통째 벤치가 되기도 하고, 어수선한 주차장을 설치 예술로 성형해 실용성과 미감을 동시에 구현한 작품도 있다. 공공미술은 이렇게 명멸하는 세사와 역사, 바람에 실려 사라진 시간들의 사연을 예술의 두레박으로 건져 올린다. 무섭게 변하는 세상과, 더 무섭게 악화되는 환경의 문제를 가급적 예리한 갈고리로 찍어내 시대의 화두로 던진다. 비교적 단순한 내러티브와 표현 방식을 구사하지만 의도가 선명해 허영이 없다.
안양예술공원 관람의 종장에선 김중업건축박물관이 덤으로 등장한다. 한국 현대 건축의 아버지라 할까. 김중업의 건축은 서구의 모더니즘을 고지식하게 차용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한국의 전통과 자연을 건축에 반영했으니까. 김중업의 설계로 지어진 옛날 공장 건물을 손질해 설립한 김중업박물관에서는 그의 설계 도면, 설계 수첩, 사진, 문학적 기록 등을 볼 수 있다. 김중업은 알바루 시자처럼 차라리 시인이었다. 그는 말했다. “건축은 노래해야 한다”고. “울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집이다”라고. 이런 시적 메시지, 들어본 적 있는가?
서울시50플러스재단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책읽는사회문화재단과 함께 책을 통한 50+세대의 사회 참여 활동을 돕는 사업을 추진한다. 50+세대가 책을 매개로 인생 후반기의 삶을 더 풍요롭게 설계하고, 지역 내 인문독서문화 가치 확산에 기여할 수 있는 사회 활동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재단은 두 기관과의 협력을 바탕으로 50플러스캠퍼스에서 전화로 책 읽어주는 활동가 입문, 북큐레이션 문학도서 입문, 어린이 미술사 에듀케이터 입문 등 3개 정규 교육 과정을 운영하고 사회 공헌 활동을 펼칠 예정이다.
‘전화로 책 읽어주는 활동가 입문’ 과정은 어르신들에게 전화로 책을 읽어주는 자원봉사 활동가를 양성하는 과정으로 운영된다. 강좌 수료생 대상으로 ‘전화로 책 읽어주는 봉사단’을 구성하고 자원봉사 활동으로 연계할 계획이다.
‘북큐레이션 문학도서 입문’ 프로그램 수료생을 대상으로는 ‘문학도서활용 모니터링단’을 운영할 예정이다. 수료생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문학 나눔 도서 보급사업 참여 시설을 대상으로, 도서활용 모니터링 역할을 수행한다.
아이들의 미술 교육 지도 역량을 키워주는 ‘어린이 미술사 에듀케이터 입문’과정의 경우, 수료생을 대상으로 ‘문화누리인솔 자원봉사단’을 운영할 계획이다. 문화누리카드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한 자원봉사 활동을 연계할 예정이다.
각 기관은 원활한 프로그램 운영 뿐 아니라, 인문독서문화 가치 확산과 책을 통한 50+세대의 사회참여 활동 확대를 위해 적극 협력할 방침이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은 북부캠퍼스 내 3개 정규 교육 과정 개설을 통한 교육 및 후속 프로그램 운영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도서 기증, 문학도서 활용 모니터링 대상처 제공, 모니터링단 사례비와 문화누리인솔 활동비 지원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은 문화체육관광부를 통해 진행한 ‘2021 60+책의해’ 경험을 바탕으로 추진 노하우 전수 및 교육 과정 강사를 추천을 담당한다.
고선주 서울시50플러스재단 생애전환지원본부장은 “50+세대는 인문 독서 활동에 특히 적극적인 세대”라며 “전문 기관과 협력을 통해 50+세대가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 공헌 활동을 더욱 확대하고 서울시 지역사회 내에서는 문화예술 가치가 확산될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말했다.
성악에서 진성으로 가장 높은 음역을 소화하는 남성을 테너라고 부른다. 일반인들은 흉내 내기 힘든 높은 음을 내기 때문에 관객들은 테너의 노래에 열광한다. 오페라에서 테너가 여성인 소프라노와 함께 남녀 주인공을 독차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만약 이런 테너 10명이 모인다면? 그런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낸 그룹이 있다. 바로 한국예술문화재단이 기획한 그룹 ‘더 텐테너스’다.
그룹 더 텐테너스는 한국의 젊은 테너 10명으로 이뤄진 일종의 프로젝트 그룹이다. 10명 모두 개인 연주자(성악가)로 각자 활동하면서도 그들을 필요로 하는 공연이 있을 땐 뭉쳐서 화음을 이뤄낸다.
개개인의 면면을 살펴보면 성악 애호가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음악계에서 잘 알려진 인물들이다. 리더인 이재필과 세컨드 백승화를 중심으로 강전욱, 김재민, 원유대, 유정우, 이경호, 이사야, 조찬욱, 최용석 등이 힘을 모았다. 더 텐테너스 멤버는 모두 외국의 음대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해외파’로, 이들 중 상당수는 대학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거나 각종 공연의 단골 연주자로 활동 중이다. 함께 모여 있다고 이들을 가벼이 볼 수 없는 이유다.
조연은 없는 주인공들만의 무대
늘 주인공을 차지하며 음악계에서 인정받은 테너는 자존심이 세고 다루기 힘든 상대로 취급받는다. 어디서든 주목받는 존재라는 뜻이다.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를 3대 테너라고 기억하지만 대부분의 대중이 3대 바리톤인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 토머스 햄슨, 브린 터펠에 대해서는 생소해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이런 테너 10명이 어떻게 모이게 된 것일까?
리더 이재필은 “사실 이런 경험은 음악을 오래 한 저희도 낯선 일입니다. 오페라 주인공을 뽑는 오디션 같은 곳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죠”라며 웃는다.
이재필 “텐테너스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그룹은 하나가 아닙니다. 몇몇 국가에서 같은 이름으로 활동하는 그룹들이 있어요. 국내에선 저희가 처음이죠. 목적도 비슷합니다. 가곡이나 팝송 등을 클래식화해서 아름다운 노래를 하기 위해 모였죠. 저희도 지난해 6월 결성돼 활동 중입니다. 테너라고 모두 같은 소리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양한 음역대를 통해 앙상블을 이룰 수 있고, 테너만의 강점인 청량한 고음을 통해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죠. 한 곡을 10명이 나눠 부르다 보니 쉬지 않고 최대치의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는 장점이 있어요.”
사실 보수적인 성악계에서 성악가 10명이 모여 클래식이나 아리아가 아닌 다른 장르의 노래를 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용기가 필요한 부분이 아니었을까?
이경호 “성악 팬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어요. 새로운 것에 대한 관객들의 요구가 늘었죠. 저희 입장에서도 관객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양보이기도 하고요. 가요나 팝송이라도 그대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저희의 색깔을 만들어내기 위해 연구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반감도 줄어드는 것 같아요.”
오랜만에 관객과의 만남 ‘감동’
이들은 지난해 11월 오랜만에 관객들과 마주했다. 팝페라 페스티벌 ‘비상’이 그것이다. 이들에겐 지난 2년 가까이 코로나19로 인해 멈춰졌던 공연의 첫 재개였던 셈이다.
유정우 “이탈리아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런 공연에 참여할 수 있어서 행운이었죠. 이탈리아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한 봉쇄가 훨씬 심해 무대는커녕 집 안에만 갇혀 있었거든요. 더 텐테너스를 통해 큰 무대에서 함께 공연할 수 있었던 것 자체로도 정말 좋았고, 관객 덕분에 오히려 제가 힘을 받은 기분이었죠.”
원유대 “공연 덕분에 저희가 끈끈해질 수 있는 계기도 됐죠. 연습을 통해 더욱 가까워져, 개인적으로는 우리 팀의 우정으로 더욱 뜨거워진 무대였다고 생각해요.”
오랜 기간 멈춰 있었던 이들에게 무대를 통해 만나는 관객은 최고의 회복제라는 것을 확인한 계기가 되었다며 입을 모은다.
김재민 “많은 에너지를 받아요. 호응을 잘 해주시면 힘이 나죠. 늘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하지만, 그래도 기복이 있을 때가 있잖아요. 공연 전에는 피곤한 기분이 들어도 관객의 반응이 뜨거우면 어느 때보다 최고의 컨디션으로 착각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죠.”
이사야 “무대에 섰는데 아무도 환호해주지 않으면 민망하잖아요.(웃음) 최고의 환호를 끌어내기 위해서 늘 연구하고 노력하게 되죠. 우리에게 관객은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게 만드는 자극제예요.”
자존심 강한 테너 10명의 조합에서 불협화음은 없었을까? 이들에게도 첫 경험이었을 ‘그룹 활동’은 어떤 의미였을까?
최용석 “몇몇은 해외에서 유학 중에 이미 알던 사이예요. 동문도 있고요. 좁은 음악계 안에서 추천을 통해서도 영입이 이뤄지다 보니, 서로의 어색함을 쉽게 덜어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백승화 “공식적인 활동을 한 지 1년 가까이 되었는데, 아직도 늘 즐겁습니다. 물론 모두 자존심 강한 예술가들이지만, 10명이 모여 하모니를 만들어가기 위해 양보할 것은 양보하면서 지내고 있죠. 궁극적인 목적은 즐겁게 음악을 하는 것이니까요.”
공연 소외 지역이라면 어디든
강전욱 “사실 다른 장소에서 만났으면 라이벌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관계죠. 이렇게 테너들이 모이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처음엔 걱정도 많았는데, 다행히 사이좋게 긍정적 방향으로 향하고 있어요. 같은 테너라는 경쟁심이 건전한 긴장감을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관찰자의 입장에선 또 하나의 걱정거리가 생겼다. 대단한 테너 10명의 조합이니 당연히 무대의 규모나 개런티 등 현실적인 부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가뜩이나 코로나19로 좁아진 공연 환경에서 이들의 활동이 걱정됐다. 그러나 리더 이재필은 “어떤 무대라도 설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재필 “상대적으로 문화생활을 하기 어려운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할 계획입니다. 성악과 대중음악의 차이점 중 하나는 마이크를 쓰지 않고 육성의 울림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의학적으로도 심리 치료 효과가 있다고 해요. 공연 관람 경험이 많지 않은 분들이 이런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소외 지역을 찾아 노래를 들려드리고 싶어요.”
지금 이들은 2월 18일 공연 때문에 분주하다. 한국예술문화재단의 하다아트홀에서 신년음악회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의 전당 같은 대형 무대는 아니지만 이들의 각오는 진지하다.
백승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코로나19 사태가 우리에게 무대가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한번 가르쳐줬어요. 지금 연주자들 입장에선 크든 작든 관객이 있는 공연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공연이라는 것은 결국 관객이 있어야 어우러지는 예술 분야니까요. 이제 무대의 크기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할 계획입니다.”
정부는 초고령화사회 진입을 앞두고 2004년부터 ‘노인 일자리 및 사회활동 지원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만 60세 이상 노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정부의 사업이라는 사실을 막연히는 알겠지만, 정확히는 모르겠다. 수행기관도 많고, 복잡하게만 느껴진다. 노인을 위한 정책인데 정작 노인들이 어렵게 느끼니 접근부터 쉽지 않은 현실이다. 이에 노인 일자리 사업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봤다.
우리나라는 2000년을 기점으로 노인 인구 비율이 7%를 넘어섰다. 인구 고령화와 더불어 노인 복지는 사회·경제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됐고, 정부는 정책적 대응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노인 빈곤 문제를 해결하면서 노인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노인 일자리 사업이 2004년에 도입됐다.
보건복지부가 주관하는 ‘노인 일자리 및 사회활동 지원사업’은 노인복지법 제23조에 의거해 시행되고 있다. 일할 의욕과 능력이 있는 노인에게 일자리 창출과 보급을 통해 사회참여와 근로 소득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활기차고 건강한 노후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기여하는 정책이다.
2022년 사업 확대의 중요성
더욱이 2023년에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약 14% 이상을 차지하는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 세대가 전원 60대 노인 세대로 편입된다. 더불어 2025년에는 예정대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하고, 약 50년 뒤인 2070년에는 고령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46%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통계청, ‘2020~2070년 장래인구추계’)
이에 노인 일자리 사업의 중요성이 부각됐고, 정부는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지난해 82만 개에서 올해는 84만 5000개로 사업이 확대 추진됐다. 만 60세 또는 만 65세 이상이라면 조건에 따라 참여 가능하다. 기초연금 수급자는 거의 모든 사업에 참여할 수 있다.
노인 일자리 사업의 임금은 평균적으로 월 30만 원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유형에 따라 천차만별인 것으로 확인됐다. 노인 일자리 유형에는 공공형, 사회 서비스형, 민간형 사업이 있다. 먼저 공공형에는 공익 활동(노노케어, 취약계층 지원, 공공시설 봉사, 경륜전수 활동)과 재능 나눔이 있다. 2020년 기준 일자리 참여 노인 76만 9605명 중 공익 활동에 참여한 노인은 55만 4101명으로 가장 많았는데, 평균적으로 월 30시간 일하고 27만 원을 받았다.
민간형에는 시장형 사업단, 취업 알선형, 시니어 인턴십, 고령화 친화 기업이 속한다. 이 중에서는 시장형 사업단 참여자가 가장 많았다. 2020년 참여자는 6만 879명이었고, 평균 임금은 32만 9000원으로 나타났다. 반면 취업 알선형, 시니어 인턴십, 고령화 친화 기업의 경우는 평균 임금이 100만 원을 넘었다.
고득영 보건복지부 인구정책실장은 “노인 일자리는 참여자들의 노년기 소득에 큰 보탬이 될 뿐만 아니라 삶의 만족도 증가, 우울감 개선, 의료비 절감 등에서 성과가 있다고 인정할 만큼 사회적으로도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보건복지부의 조사에 따르면 사업 참여 노인 가구는 미참여 가구보다 상대적 빈곤율이 7.3%p 낮고, 가구 소득도 월평균 17만 원 많다. 또 스스로 경제적 상태가 좋다고 인식하는 비율도 사업 참여 후 14.9%p 상승했다. 이외에도 ‘건강이 좋아졌다’, ‘인간관계가 좋아졌다’, ‘아직 일할 수 있음을 느낌’ 등 긍정적인 응답을 보였다.
노인 일자리 체계 이해하기
먼저 복잡하게 느껴지는 노인 일자리 사업 수행 체계를 살펴보자. 보건복지부는 노인 일자리 사업 정책 결정, 관련 법·제도 개선, 예산 지원 등 정책 전반에 대해 관장하며, 보건복지부 산하 공공기관인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은 노인 일자리 전담기관 역할을 수행한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은 2005년 12월 설립됐으며, ‘1000만 노인 시대, 100만 노인 일자리 선도기관’이라는 비전을 갖고 있다. 노인 일자리 사업 지원, 노인 일자리 사업 종사자 교육 훈련, 노인 일자리에 관한 조사 및 연구, 노인 일자리 종합 정보 시스템 및 노인 인력 데이터베이스 구축·운영 등의 일을 담당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는 지역사회 내 사업을 총괄하며 재정과 행정의 지도·감독을 맡고 있고, 사업 수행기관의 역할도 일부 맡는다. 지자체 외 사업 수행기관으로 시니어클럽, 노인복지관, 대한노인회 등이 있다.
“나에게 딱 맞는 일자리, 어디서 찾을까?”
앞서 언급한 다양한 노인 일자리 수행기관들은 각각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차이가 있을까. 노인 일자리 사업에 참여하고 싶은 시니어가 어디를 방문하면 자신에게 가장 맞는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지 정리해봤다. 전국 시니어클럽, 대한노인회, 노인복지관, 중장년희망센터, 그리고 서울시50플러스재단과 서울시어르신취업지원센터를 소개한다.
지역 특화형+시장형 일자리 찾는다면 ▶ 시니어클럽
시니어클럽은 노인 일자리 사업을 가장 많이 담당하는 기관이다. 실제로 2020년 시니어클럽을 통해 일한 노인은 25만 6449명으로 가장 많았다. 2020년부터 시니어클럽은 노인 일자리 지원기관으로 변경됐고, 노인인력개발센터도 시니어클럽에 포함시켜 참여자가 더욱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시니어클럽은 수행기관 중에서 시장형 사업단을 주도한다. 2020년 시장형 사업단 참여자는 총 6만 8729명이었는데, 이 중 시니어클럽을 통한 참여자는 5만 3935명으로 무려 78.5%를 차지했다.
시니어클럽은 노인 일자리 사업의 출발점이었다. 2001년 보건복지부는 시니어클럽 5개 기관에서 시범사업을 추진했고, 2004년 전국으로 확대하며 노인 일자리 사업으로 명명한 것. 시니어클럽은 지역사회 내에서 일정한 시설과 전문 인력을 갖추고 지역의 자원을 활용해 노인의 일자리를 창출·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서울, 경기, 부산, 대구 등 전국에 17개 지회를 두고 있으며, 회원 기관은 총 189개다.
경비원·청소원 취업 원한다면 ▶ 대한노인회 취업지원센터
대한노인회 취업지원센터에서는 노인 인력이 필요한 구인처, 60세 이상의 구직자를 모집한다. 취업을 알선해주고, 교육 및 취업 후 사후 관리까지 해준다. 근로 능력이 있는 노인에게 적합한 일자리 활동을 지원함으로써 안정된 노후 생활을 보장한다는 목표다.
대한노인회가 발표한 2020년 취업자 실적을 보면 직종은 총 68개, 3만 7089명이 취업했다. 이 중 남자는 1만 9942명, 여자는 1만 7147명이다. 남자는 경비원이 6539명(여자는 164명)으로 가장 많았고, 여자는 청소원 및 환경미화원이 6104명(남자는 2803명)으로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즐기면서 재능 나눔 원한다면 ▶ 노인복지관
노인들이 노인복지관을 찾는 이유 자체는 무료하지 않게 즐거운 노후 생활을 보내고 싶어서다. 보통의 노인복지관에서는 노인의 교양·취미생활 및 사회참여 활동이 가능하도록 각종 정보와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와 관련 노인복지관에서는 보통 노인 일자리 사업 중에서 재능 나눔 활동 지원사업을 주관한다. 재능을 보유한 노인이 재능 나눔 활동에 참여하면서 다양한 재능을 지역사회에 환원하고, 사회참여를 통해 노후 성취감 및 대인관계 향상을 도모하는 사업이다. 참여자는 평균적으로 한 달에 10시간 일하고 10만 원을 번다.
노인 여가 복지시설 및 공공시설 안전 관리 활동, 노인 상담, 학대 예방, 인권 지킴 활동, 박물관 안내, 내외국인 대중교통 안내, 음악·미술·공연·전시·체험 등과 관계된 문화예술 활동 등이 있다.
40대부터 재취업 준비한다면 ▶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는 노사발전재단에서 운영한다. 만 40세 이상 퇴직자(예정자 포함)는 누구나 참여 가능하며, 서울, 부산, 광주 등 전국 광역 단위에 12개 센터와 업종별 센터 1개를 운영 중이다.
중장년층에 대해 퇴직 이전 단계부터 이후 구직 활동에 이르기까지 전직 및 취업 등 전반적인 고용지원 서비스를 제공한다. 기업 맞춤형 인재 추천, 중장년을 위한 생애경력 설계 서비스부터 퇴직 예정 중장년을 위한 전직 스쿨 프로그램, 구직자 재취업 지원을 위한 재도약 프로그램 등이 있다.
앙코르 일자리 원하는 서울 시민이라면 ▶ 서울시50플러스재단
서울시50플러스재단은 서울시 산하기관으로 40대부터 60대까지 50세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서울시 시니어를 위해 사회공헌 일자리, 창업·창직·전직 지원, 종합상담 및 교육 등 노후 준비에 필요한 다양하고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재단은 ‘앙코르 커리어 일자리’를 추구한다. ‘50+ 세대의 경험과 연륜을 활용하되, 사회적 가치와 수익 모두를 적절히 만족하는 수준으로 제공하는 일과 활동거리’를 뜻하며, 보다 체계적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회공헌 일자리로는 ‘서울시 50+보람일자리’가 있으며, 약 3200명을 뽑고 월 57시간 이내 일한다. 시니어 인턴십 유형은 파트타임형인 ‘서울 50+ 인턴십’과 풀타임형인 ‘서울 50+ 뉴딜 인턴십’이 있다. 이 밖에도 창업·창직을 돕는 ‘점프업 5060’ 등이 있다. 다양한 프로그램 중에 자신에게 가장 맞는 활동을 찾아 제2의 삶을 시작해보자.
재취업 원하는 55세 이상 서울 시민이라면 ▶ 서울시어르신취업지원센터
2004년 4월 서울시가 설립, 서울노인복지센터 부설 서울시어르신취업훈련센터로 운영했다. 만 55세 이상의 고령자를 대상으로 재취업을 위한 상담, 교육, 알선을 담당한다. 2018년 ‘서울시어르신취업지원센터’로 확대 개편하고, 서울시 어르신의 취업과 사회활동 지원을 위한 다양한 기반 조성 사업, 재취업을 준비하는 시니어를 위한 다채로운 훈련과 실전 인턴십 등을 개발해 서울시 어르신들의 취업 환경을 개선하고 있다.
그의 깍두기라는 표현에 내심 놀랐다. 국내 최초의 팝페라 가수. 3500회 넘게 무대에 섰고, 미국과 영국에서 성악을 전공한 유학파 출신이다. 자존심 높은 성악가가 후배들의 공연에 ‘깍두기’를 자처하다니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의문에 대해 강마루(59)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이제야 깨달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대와 관객을 만나고, 노래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라고.
“1등! 강마루.”
마이크를 든 사회자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까까머리 중학생은 어리둥절했다. 그간 그의 노래 실력을 칭찬해준 것은 학교 음악 성적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갑자기 성가경연대회에서 1등이라니. 그것도 충남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한 대회에서 말이다. 강마루 교수는 “성악의 길에 발을 내디딘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당시 대회에서 1등을 하면서 내가 재능이 있나 하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죠. 물론 학교 음악 수업 시간에 성적이 좋긴 했지만, 그 정도 아이는 한 반에 하나씩 있잖아요. 당시만 해도 지역이나 교회마다 ‘가곡의 밤’이나 ‘성가의 밤’ 같은 행사가 많아 다양한 음악적 경험을 할 수 있었죠. 훌륭한 노래를 들으며 자란 것이 자양분 역할을 한 것 같아요.”
까까머리 중학생 성악가를 꿈꾸다
그날로 중학생 강마루의 미래는 성악가가 되었다. 음대 진학을 목표로 한 수험생 생활은 한양대 입학으로 결실을 맺었다. 장학금 덕분에 등록금 걱정도 없었다. 이후 그는 미국행을 선택한다. 성악가로 활약하기 위한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고 강 교수는 이야기했다.
“당시 성악계에서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는 해외 경험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었죠. 그리고 성악은 결국 서양 음악이니까, 그들은 어떻게 노래하는지, 발성은 어떤 식인지 현장에서 듣고 배우고 싶었어요. 물론 세계적인 무대에 서고 싶다는 야망도 있었고요. 한편으론 운이 좋게도 수업료를 면제받아 크게 고민할 것도 없었죠.”
미국 최고의 음악대학으로 꼽히는 메네스 음대(Mannes School of Music)에서의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살인적인 뉴욕의 물가는 가난한 유학생에게 다양한 경험을 강요했다. 강 교수는 “안 해본 것이 없었을 정도”라고 말했다. 택시 운전 같은 알바는 기본이고, 불러주는 무대에는 무조건 올랐다. 무대의 수준이나 어떤 관객이 오는지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다양한 무대에 올랐어요. 크고 작은 공연뿐만 아니라 한인 교회 성가대 지휘도 하고, 레슨도 하러 다녔죠. 생활비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은 무조건 해야 했거든요. 덕분에 미국에서 공부는 어려움 없이 마칠 수 있었어요. 이후 영국 런던 테임스밸리 대학원에서의 수학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죠.”
인생을 바꾼 노래 ‘슬픈 전쟁’
그는 미국과 영국에서의 유학 시절을 “마치 아이를 품은 산모와 같았던 시절”이라고 표현했다. 어떤 아이가 태어날지 기대에 찼던, 현실은 괴롭지만 핑크빛 미래를 꿈꿀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고 이야기했다.
“어디에서나 차별을 겪어야 했어요. 한편으론 당연한 상황이라고 생각했죠. 실력으로 보여주고 이겨내면서 한국인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해낼 수밖에 없었어요. 불평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도 이것을 이겨내면 세계적인 성악가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꿈이 있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어요. 유학을 다녀와 한국에서 만난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으니까요.”
한국으로 돌아와 경원대와 협성대 강단에 서며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일을 막 시작한 무렵, 그는 예기치 못했던 인생의 변곡점을 맞이하게 된다. 그의 이름을 전국에 알린 계기가 된 노래, ‘슬픈 전쟁’과의 만남이다. 1996년 가요계에선 낯설었던 대중가요와 클래식의 만남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중앙일보 기사에선 “발라드의 미래를 제시했다”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사실 노래를 부른 최진경 씨와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당시 앨범 준비하던 제작자와 인연이 있었는데, 고음이 가능한 바리톤을 찾고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선뜻 나섰는데, 지금 생각하면 제게는 숙명 같은 일이었어요.”
이 노래는 그에게 ‘국내 최초의 팝페라 가수’라는 칭호와 함께 대중적인 인기를 안겨줬다. 물론 보수적인 성악계에선 그를 향한 비뚤어진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대중에 대한 그의 생각은 크로스오버나 팝페라에 대한 도전을 계속하게 만들었다.
“클래식이라는 장르는 대중이 쉽게 접하기 어렵잖아요. 일단 기본적인 공부가 되어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분야니까요. 그러다 보니 소수만 즐길 수 있는 관상용 도자기 같은 존재가 된 것 같았어요. 그에 반해 제 음악은 그 안에 김치도 담고 찌개도 담는 생활용 그릇 같은 존재가 되길 바랐죠. 좀 부딪히고 상처가 나더라도 모든 사람이 쉽게 쓸 수 있는 그릇이요. 저로 인해 누군가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다른 것은 문제되지 않았어요.”
실패작 된 최고의 명작
그러나 화려한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만 받을 것 같았던 그의 인생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후학 양성을 위해 의욕을 갖고 나섰던 대학 설립은 결국 경제적 부담만 안겨줬다. 이후 의욕을 갖고 진행한 1집 활동은 매니저의 횡령으로 제대로 꽃피우지도 못하고 져버렸다.
“1집 ‘산책’을 준비할 때 너무 행복했어요. 1년간 공들여 준비하고, 제작에만 세 달이 걸렸죠. 세션으로 기타의 함춘호, 드럼에 신석철 같은 당대를 대표하는 뮤지션들이 참여했죠. 곡도 너무 좋았는데, 많이 아쉬워요. 대중에게 제대로 전달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잊혔으니까요. 그래도 너무나 좋은 곡이라 언젠가는 ‘역주행’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어요.”
그리고 9년 만에 발매한 2집은 의외의 선택으로 화제를 모았다. 트로트 가수 태진아의 곡 ‘동반자’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성악계 일부에서 ‘딴따라’라는 손가락질을 받고 있었던 그에게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태진아 씨가 흔쾌히 곡 사용을 허락해줘서 타이틀곡으로 부를 수 있었죠. 그저 신나는 전통가요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가사를 음미해보면 무척이나 철학적이고 서정적인 노랫말을 갖고 있어요. 원곡의 ‘출신성분’ 같은 것은 제게 중요치 않아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통해 삶과 기쁨을 공유하는 것이 제가 하고 싶은 일이에요. ‘동반자’는 대중적으로 많은 인기를 얻어서 제게 수많은 무대를 선사해준 고마운 곡이에요. 주변에서 “왜 태진아냐”며 폄하하는 분도 많았지만, 그분의 창법이 갖는 매력이 있고, 둘이 함께 선 무대가 많지는 않았지만 둘 사이의 화합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달려오던 그의 무대는 잠시 멈춰야 했다. 많은 가수들과 마찬가지로 코로나19의 등장은 그가 설 수 있는 무대를 송두리째 앗아갔다.
“잠시 멈춘 사이 그동안 저의 활동을 되돌아보았죠. 음악인으로 살아오면서 앞만 보고 달려왔다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음악이 나를 정화시키고 힐링을 주어야 하는데, 삶의 수단으로만 남용한 것은 아닌지 반성했어요. 관객에게 감동을 전하면서 정작 제 자신은 위로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됐죠. 음악을 직업으로 삼는 분은 저랑 비슷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난 11월 30일은 그에게 소중한 경험을 전해준 날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면서 모처럼 관객 앞에 설 수 있었다. 한국경제TV의 팝페라 페스티벌 무대였다. 그가 설립한 한국예술문화재단을 통해 조직한 성악 그룹 ‘더 텐테너스 그룹’과 함께 공연할 수 있었기에 더욱 의미 있었다. 30~40대 테너 10명으로 이루어진 이 그룹을 조직하기 위해 그는 3년간 공을 들였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그룹은 해외에선 활동이 활발하지만 국내에선 처음 시도하는 것이다.
“11월 공연에선 관객들이 박수는 가능했지만 환호성은 지르지 못했어요.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한 방역수칙 때문이죠. 무대에 서는 입장에선 김 빠진 사이다 같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았어요. 관객과 함께하는 무대가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한번 깨달았어요. 누구나 열망하고 바라는 소망을 잊고 있었던 거죠.”
더 텐테너스 그룹에 대해서는 “성악계의 BTS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음악대학 강사 이상의 자리에서 활약할 수 있는 해외파 출신 테너들로 구성된 성악 그룹으로, 갈수록 설 무대가 좁아지는 후배들을 위해 강 교수가 기획한 작품이다. 후배 위해 깍두기 되고파 강 교수는 한국예술문화재단을 통해 다양한 활동을 꾀하고 있다. 대중이 성악이라는 어려운 장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마스터스 성악 최고위과정’은 벌써 21기가 되었을 정도로 전통을 자랑하고 있고, ‘노블레스 최고위과정’이나 ‘와인인문학 최고위과정’도 인기를 얻고 있다.
“어릴 적부터 음악이 꿈이었지만 이루지 못한 분들이 생각보다 많더라고요. 그런 분들의 염원을 담아 한 분씩 가르치다 보니 정규 과정이 되었어요. 처음엔 예상치 못했던 일이죠. 사회 각계각층의 많은 분들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하모니를 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보람을 느껴요.”
그가 최근에 설립한 공연장 ‘하다 아트홀’도 같은 맥락이다. 2020년 10월부터 준비한 장소가 지난해 11월 결실을 맺었다. 하다 아트홀은 후배들에게 공연할 장소를 제공하고, 한국예술문화재단의 교육 장소로도 활용하기 위해 만든 공연장이다. 또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만나 사회적 관계를 만들며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놀이터’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람도 담겨 있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는 말이 있잖아요. 인간의 본질이 유희라는 점에 기초하는 인간관인데, 저 역시 상당 부분 동의합니다. 먹고 놀고 노래하기를 좋아하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장소가 되길 희망해요. 모두가 ‘놀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지만, 제대로 노는 사람은 찾기 어렵잖아요. 술밖에 모르는 우리 현대인에게 인문학에 기반한 다양한 ‘노는 방법’을 알려주려고 해요.”
하다 아트홀이라 이름 지은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아내 박정희 씨다. 노래를 하고 공부를 하는 다양한 행위의 산실이 되기를 바라며 지은 이름이라고. 마케팅 전문가로 활약하다 은퇴한 박정희 씨는 현재 수만 명의 팔로어를 자랑하는 유튜버로 활동 중이다. 강 교수는 “저희 공식 유튜브 채널보다 팔로어가 많아 샘이 날 정도”라면서도, “아내를 존경하는 마음이 커서 유튜브 채널 운영 등 여러 활동에 대한 다양한 조언에 늘 귀 기울이며 산다”며 웃었다. 가수 강마루로서의 계획은 어떨까? 그는 불쑥 깍두기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는 주인공이 아니어도 좋다고 이야기한다.
“팝페라 가수들이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무대를 많이 만드는 것이 꿈이에요. 이제 저도 신체적인 상황이 젊을 때와 많이 다르다는 것이 느껴져요. 앞으로는 제 무대에 대한 욕심만 챙기며 후배들과 경쟁하기보다는, 후배들이 성장하고 대중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더 많이 하고 싶어요. 그 과정에서 관객들이 팝페라라는 장르의 매력을 알게 되고, 가수와 관객이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길 기대하고 있어요. 전 그저 ‘깍두기’로 그들과 함께 무대에 설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해요. 꼭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무대에 서서 관객의 환호와 박수를 받을 수 있는 생활을 마지막 그날까지 유지하고 싶어요. 그게 제 희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