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그림’이라는 한국문화의 깊이와 이채로움을 만나볼 수 있는 손인숙 작가 아틀리에가 해외 문화예술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서울 강남구에 자리 잡은 아파트 1층 현관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경탄을 금치 못하는 방문객이 대분분이다. 손인숙 작가의 아틀리에가 이렇게 인기가 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손인숙 작가의 실그림 작품은 한불수교 130주년을 맞아 지난 2016년 프랑스 기메박물관에서 6개월간 특별 전시됐던 적이 있다. 프랑스 국립박물관이 한 개인의 작품을 반년 동안 전시한 것은 매우 파격적인 사례다. 그러다보니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유명해진 손인숙 작가는 우리 예술의 세계적 위상을 가다듬는 전략을 모색하려면 예술이 우리 사회에 기여하는 참다운 의미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세계 각 분야 문화예술인과의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더 큰 문화예술의 아트코어 역할을 해 나가는 데 작은 보탬이 된다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마음을 편안하게 갖고 제 작업실 아틀리에를 방문하는 해외 국빈들에게 작품을 설명해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죠.”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 출판 제안차 방문
실그림 작품은 이후 니스에서도 전시돼 유럽 전역에서 극찬을 받았다. 이후 실그림 아틀리에 명성도 높아지면서 이제 예술 관련 문화 관련 명사와 해외 유수 박물관장을 비롯해 유명 인사들이 한국에 오면 꼭 들르는 명소가 됐다. 최근 손 작가는 프랑스 대형 출판사 갈리마르(Gallimard)로부터 출판 제의를 받았으며 지난 10월 25일부터 3일간 갈리마르 출판사 편집장과 예술 담당 편집자 등 프로젝트 책임자가 실그림 아틀리에를 방문해 작품집 출판 협의를 심도 있게 나눴다.
손인숙 작가 아틀리에서 만난 갈리마르 출판사 편집장 캐롤라인 레베스크는 “2015년 프랑스 기메박물관에서 전시 작품을 봤을 때도 놀라웠지만 서울에서 직접 보니 한국의 전통을 새롭게 재해석한 손 작가의 창의적인 상상력이 세계적으로 통하는 작품을 만들었다고 확신하게 됐다”고 호평을 쏟아냈다.
1919년에 설립된 갈리마르는 20세기 프랑스 제일의 출판사로 알려져 있으며 그동안 앙드레 지드, 사르트르, 카뮈를 비롯한 많은 유명 작가의 주요 작품을 출판했다.
캐롤라인 레베스크 편집장은 “작업실에서 본 손 작가의 작품 중 ‘수월관음도’는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였다. 독특한 작품세계에 매료됐다. 갈리마르가 실그림 작품을 소개하는 일은 저희에게 엄청난 모험이 될 것이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손 작가의 대형 작품을 저희 회사에서 출판하는 작품집을 통해 프랑스 대중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어서 그녀는 출판하고자 하는 손 작가의 작품집 콘셉트는 작가의 정신을 드러나게 할 것이고 작품의 앞보다는 뒤를 더 배려한 손 작가의 작품을 디테일한 부분까지 질감을 밀도 있게 보여줄 수 있도록 디자인 제작에 심혈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내년 가을쯤 출간을 목표로 일정을 체크하는 등 짧은 방문기간에 손인숙 작가와 의견을 다양하게 나누는 등 작가의 개인적인 특징을 파악하고 점검하는 데 집중했다고 밝혔다. 갈리마르 출판사 프로젝트 팀들은 작품집 판형, 페이지 분량, 표지 콘셉트, 내지 용지, 목차, 카테고리, 가격, 사진 구도등 전체적인 디자인 구성 체제를 세워놓고 있다.
실그림 작품을 통해 한국문화에 취한 갈리마르 출판사 프로젝트 팀들은 손인숙 작가의 작품집이 프랑스에서 유일한 베스트셀러로 탄생할 거라는 설렘을 안고 돌아갔다. 내년에 출간할 프랑스어판·영어판 작품집은 ‘실그림의 거장’ 손인숙 작가가 해외에서 이름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美 조지아 귀넷카운티 방문단 영접
지난 10월 28일 강남구청(구청장 정순균)이 미국 조지아 주 귀넷카운티와 자매결연 10주년을 기념해 귀넷카운티(의장 살럿 나시) 방문단 12명을 손인숙 작가 아틀리에에서 영접했다.
2009년 귀넷카운티와 자매결연 후 경제 분야를 중심으로 교류를 진행하고 있는 강남구는 예원 실그림 문화재단(이사장 이기수)을 통해 강남구의 우수 행정을 홍보하는 기회를 특별히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10월 29일에 작업장을 방문한 프랑스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 디자이너는 “손 작가 작품을 보고 너무 행복했다. 환상적이고 살아 움직이는 듯, 불타는 듯했다. 지난 수년간 보았던 아름다운 다른 작품들 중 단연 최고이며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라며 감동을 전했다.
지난 10월 31일에는 소피 듀어르망 루이비통 이사가 손 작가와 인증 사진을 찍으며 “숨이 막히는 발견이었고 실을 이용하여 강한 작품을 창조해낼 수 있는 능력에 감탄했다”며 방문객으로서 인사도 잊지 않았다.
소피 루이비통 이사는 지난 10월 30일 서울 청담동서 열린 루이비통 플래그십 스토어 ‘루이비통 메종 서울’ 오픈 행사 참석과 국내 주요 면세점과 백화점 방문을 위해 방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처럼 25권이 넘을 정도로 찬사와 극찬을 하며 기록을 남기고 간 방문객들의 방명록이 아틀리에의 보물이기도 하다.
최근 손 작가의 아틀리에를 방문한 셀럽들만 봐도 실그림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로르 슈왈츠 극동박물관장, 소피 마카리우 프랑스 국립 기메박물관 이사장, 올리비에 갸벨 프랑스 장식예술박물관장, 다니엘 올리비에 전 프랑스 문화원장, 플뢰르 펠르랭 전 프랑스 문화부 장관, 전 프랑스 장관 장 마르크 에호의 부인 브리지트 에호, 장뱅상 플라세 프랑스 상원의원, 오렐리 사무엘 입생로랑 박물관 컬렉션 디렉터, 프랑스 건축가 장누벨 수석 디자이너, 프랑스·독일·일본·인도네시아·모로코 등지에서 온 대사와 그 부인들이 다녀갔다.
손 작가의 독보적인 작품을 마주한 외빈들은 뿜어져 나오는 강한 기운에 감탄을 연발했다고 한다. 실그림이 한국문화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아주 의미 있는 자리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영역에서 창조적이고 철학적으로 작업을 펼쳐온 손 작가의 아틀리에를 보고 해외 문화예술인들은 어떤 콜라보를 이끌어낼지 귀추가 주목된다.
툭! 톱질이 멈추자 나무 조각이 떨어진다. 바닥에 쌓인 부스러기가 많아지는 만큼 그의 마음도 홀가분해졌다. 그간의 과오가, 미련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수입이 막막한 지금의 사정이나 쪼그라든 통장 따위는 잊은 지 오래. 그에겐 눈앞에 놓인 나무만이 전부였다. 서울남부기술교육원에서 만난 김유(金維·49) 씨는 “앞으로 내가 살길을 찾은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세상을 쉽게 본 것이 실수였죠.”
그가 털어놓는 고생의 폭과 깊이에 비해 목소리는 무척이나 담담했다.
“원래 대기업 급식사업부에서 일했어요. 외부 기관 급식사업을 관리하고, 임직원을 위해 운영되는 사원매장 기획업무를 봤죠. 이 일을 배우려고 친구 아버지가 운영하는 유통 회사에서 무급으로 근무했던 것이 높은 평가를 받아 들어갈 수 있었죠. 입사 이후에는 세상이 너무 쉬워보였어요. 공급업체 사람들과의 원활했던 관계는 갑과 을이라는 위치에서 나온 것인데 저의 선의 탓이라고 믿었죠. 회사 동료와의 믿음도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너무 순진했었죠.”
그렇게 그는 어렵게 입사한 회사를 박차고 나온다. 직접 공급업체를 운영하면 돈을 쉽게 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사람들은 적으로, 갑으로, 남으로 변해갔다. 결국 시작한 사업은 얼마 되지 않아 무너졌다.
사업 실패 후유증, 공예로 극복
“식자재 납품사업을 접고 나서 먹고살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했죠. 무게 단위로 옷을 떼다가 파는 의류 도매업까지 닥치는 대로 해봤지만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어요. 실패가 거듭되면서 의욕이 점점 떨어졌죠. 역설적이게도 용기를 준 것은 통장 잔고였어요. 다 떨어져가는 돈을 보면서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하루에 두세 갑 피우던 담배도 끊고 새롭게 출발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어요.”
나락으로 떨어져버릴 것만 같았던 시절, 김 씨가 선택한 것은 목공이었다. 어릴 때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았지만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 때문에 미대에 진학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지도 못했다. 자신보다 더 재능이 있었던 누님조차 일반 학교로 진학하는 것을 보고 그는 꿈을 접어야 했다.
“뭘 할까 고민하던 차에 떠오른 것이 나무였어요. 취미로도 다뤄본 적이 없었는데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기는 거예요. 어디서 배우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한국문화재재단이 운영하는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를 알게 됐어요. 그 길로 바로 소목반 입학 신청을 했죠.”
소목은 건물의 창호나 목기, 목가구 등을 제작하는 전통 목공예 기법 중 하나다. 소반과 같은 단순한 것부터 보석함, 서안, 찬탁까지 소목을 통해 제작되는 가구는 다양하다.
이단 취급에 대회 출품 못해
“나무로 가구를 만들다 문득 궁금해졌어요. 보통 나무를 가공하고 나면 표면을 기름칠로 마무리하는데 다른 방법은 없을까 하는 것이었어요. 저만의 표현법을 완성하고 싶었는데, 마땅치 않았어요. 그러다 옻칠을 알게 됐고 매력에 푹 빠졌죠. 서울남부기술교육원과 가르쳐주신 임충휴 명장님 덕분이에요. 지금은 본말이 바뀌어서 소목보다 옻칠에 더 집중하는 것 같아요.(웃음)”
그는 옻칠의 매력으로 무궁무진한 확장성을 꼽았다. 다양한 표면 위에 옻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여러 상품에 적용해 실용성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가 옻칠을 배우며 가장 먼저 만든 작품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전자제품인 레코드를 재생하는 턴테이블이었다. 레코드판을 가공해 붙인 판 위에 전통적인 옻칠 기법을 응용해 장식한 작품. 하지만 전통 옻칠 공예인들에겐 환영받지 못했다.
“이 작품을 전통 옻칠 대회에 출품했다가 응모조차 못하고 퇴짜를 맞았어요. 전통공예의 범주에서 벗어난 천연재료로 만들지 않았다는 이유였어요. 왜 재료에 제약을 두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재미있는 사실은 같은 작품으로 대한민국미술대전에 제출해 입선을 했다는 점이에요. 덕분에 내가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지는 않구나 하면서 용기를 얻었죠.”
그의 크고 작은 대회에서의 수상 행진은 계속됐다. 받은 상이 벌써 10개나 된다. 2017년 전주전통목공예대전에서의 입선을 시작으로 지난해 국제전통예술대전에서는 우수상을 받았다. 올해는 대한민국수공예공모대전에서 동상을 받았고, 이어 정부조달문화상품 공모전에서는 장려상을 받았다. 그는 “받은 상금으로 옻칠 재료를 잔뜩 살 수 있어 좋았다”며 웃었다.
멈추지 말고 용기 내 도전하길
현재 그는 서울남부기술교육원 옻칠학과 창업반 소속으로 정식 사업자등록을 내고 활동 중이다. 상호는 ‘이인상여(二人相與)’. 다산 정약용이 저서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를 통해,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인(仁)임을 강조하기 위해 한 말이다.
조달청 공모전 수상을 통해 나라장터에 납품할 자격도 얻고, 다양한 수상을 통해 상품성이나 사업적 가능성도 타진된 만큼 머지않아 공방을 열고 독립할 계획도 갖고 있다.
“아직 사업 형태가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이어나갈 수 있는 구조를 갖추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예요. 운이 좋아 무형문화재 옻칠장 손대현 명장님 공방에서 잠시 일할 수 있었는데, 그때 옻칠 외에도 공방 운영과 관련해 많은 것을 배웠어요. 서울남부기술교육원에서는 매년 많은 졸업생이 배출되는데 그들이 독립하기 전까지 인큐베이터 역할을 할 수 있는 사회적 기업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천천히 가더라도 조심스럽게 이 일을 지켜나가고 싶어요.”
그가 구상하는 주력 상품은 나무나 금속 표면에 금박과 은박 등 여러 가지 옻칠 재료를 장식한 후 교칠기법을 활용해 마무리한 소반과 식기다. 부서지는 파도를 연상하게 하는 독특한 문양을 김 씨만의 상징(시그니처)으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이다.
“나무뿐만 아니라 금속 등 소재 제한도 두지 않을 생각이에요. 문제는 옻칠의 상당수 재료가 일본에서 만들어지다 보니 잘 조색을 해도 소비자 눈에는 ‘왜색’이 느껴지기도 해요. 그 한계를 어떻게 넘어설지가 숙제인 것 같아요.”
하지만 그는 이런 고민조차 즐거운 모양이다. 나무를 잡은 결정이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물론 실력만으로 승부해야 하니 두려움이 없진 않지만, 이러다 죽겠구나 싶었던 구렁텅이에서 절 꺼내줬으니 아주 행복합니다.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빠른 결정이었던 셈이에요. 지금은 절 걱정하던 친구들이 퇴직 후 생활에 대해 제게 조언을 구하기도 해요. 그럴 땐 아버지가 늘 하던 말씀을 그대로 전해요. 시간은 화살과 같이 지나가니 용기를 내서 꼭 도전하라고 말이죠.”
‘어라! 나 어느새 이렇게 나이 들었어? 이젠 시간이 얼마 안 남았도다!’ 우리는 흔히 그렇게 영탄한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흘러 흩어진 세월을 아쉬워한다. 그러고서도 정작 무한정한 시간을 움켜쥔 것처럼 하루하루를 허비한다. 시간이야말로 고귀한 재산이라는 걸 까먹는다. 이 양반을 보시라. 시간 누수 없이 은퇴 이후를 산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시간을 야무지게 쓴다. 귀촌이 그걸 가능케 했다. 삼십육계 뺑소니를 치는 시간에 아랑곳없이, 한결 만족할 만한 시골살이를 누리고 있으니.
영월미디어기자박물관 고명진(69) 관장. 그는 사진기자 출신이다. 이곳 영월의 시골로 귀촌한 건 8년 전. 애초엔 단양에 발을 들였었다. 농사를 짓고 자연사진이나 찍으며 한가하게 살자는 생각이었다지. 그러나 여의치 않아 길을 바꿨다. 스치듯 잠깐 단양에 머물다 영월로 이주, 계획에 없었던 미디어기자박물관이라는 색다른 박물관을 만들었다.
귀촌은 왜 했을까? 이보다 더 좋은 건 다시없다고 널리 소문난 ‘지존’, 바로 돈 때문이었단다. 서울에서 잘나가던 사진기자였던 그는 60줄에 접어든 자신의 정경을 바라보며 윽! 하고 놀랐던 것 같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였다. 정신만 빼고는 없는 게 없는 서울, 재화를 중심에 두고 강호의 협객들이 밤낮없이 각축하는 서울. 이 격렬하고도 머리 아픈 도시에서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럴싸한 재산이나 노후자금이라는 게 필요하다. 그에겐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은퇴한 그가 굴릴 수 있는 자금이라야 연금으로 나오는 월 108만 원이 전부였다지.
“제가 재혼으로 맞이한 아내와 함께 귀촌을 했어요. 전처와는 사별을 했는데, 암 투병을 오래하다 떠났지요. 긴 투병 와중에 전 재산이 날아갑디다. 남은 건 연금뿐. 그 소소한 돈, 월 108만 원으로 서울에서 버틸 자신이 도대체 서질 않더라고. 그럼 어쩌나? 고민 좀 하다가 돈 덜 드는 시골로 내려가자, 귀촌해서 그저 밥 먹는 정도에 만족하며 자연사진이나 찍자, 그런 결론을 내렸어요.”
가진 것 없이도 깡이나 무욕으로 버티며 사는 귀재가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우리네 필부에겐 어림없다. 쥔 게 없는 사람에게 서울은 무정하고 비정하고 매정하다. 삶도 사회도 역사도 일쑤 진흙탕처럼 뒤엉킨 모순과 부조리를 축으로 윤회한다는 걸 고 관장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일 게다. 한평생 사진기자로 살며 이 요상한 세상의 명암과 요철을 깊숙이 들여다봤을 테니까. 남모를 소명감도 가슴에 품었을 테지. 정세의 격랑 속에서 그가 포착했던 ‘기록사진’들은 시대의 증빙으로 남아 있다. 6·10민주항쟁 때 한국일보 기자였던 그가 찍은 ‘최루탄을 쏘지 마라!’라는 타이틀의 사진은 사람들의 심장을 흔들었다. 미국 AP통신사는 이 통절한 컷을 ‘20세기 최고 사진 100선’에 선정했고.
돈 한 푼 안 들인 ‘사진박물관’
나는 찍는다, 고로 존재한다! 아마도 고 관장의 슬로건은 그런 것이었을 터. 결국 천분이자 천직이었던 사진과의 인연은 은퇴 뒤에도 이어져 사진박물관을 꾸리게 되었다. 박물관엔 그가 현역 때 썼거나 기증받은 온갖 사진 장비와 희귀한 자료가 잔뜩 전시돼 있다. 원래 사진박물관을 차릴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지. 귀촌을 했으니 뭔가 사진과 관련한 일로 여생을 보내야겠는데 그게 뭐지? 그렇게 다분히 막연한 궁리를 하던 차에 그의 명민한 아내가 쓰윽 귀띔을 하더란다. 오우, 저 빈 건물에 사진박물관을 만들어보소서!
“영월엔 다양한 사립 박물관들이 있어요. 근데 말이죠, 동네 구경삼아 돌아다니다 우연히 빈 박물관 하나를 보게 됐어요. 원래 폐교였던 건물에 설립한 책박물관이 있었는데 그게 폐관됐던 거라. 그걸 본 집식구가 대뜸 아이디어를 낸 거죠.”
“그 즉시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한 거예요?”
“아내의 반짝이는 권유를 듣고 바로 착수했어요.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으로. 군청으로 달려가 기자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는 뜻을 밝히자 제안서를 제출하라 합디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됐고, 결국엔 성사가 됐어요. 순항을 거듭했다 할까, 매우 좋은 조건으로 협약한 뒤 무난한 운영을 해왔어요.”
“매우 좋은 조건이란?”
“군에서 건물을 통째로 무상임대해줬거든요. 살림할 사택까지 포함해서 말이죠. 학예사도 배치해줬고. 아무튼, 자리 잡기까지 부지런히 공을 들였어요. 명심한 게 뭐냐면, 박물관이되 원래 이 터가 학교자리였다는 걸 잊지 말자는 거였어요. 시골에서 학교란 마을 문화공동체의 중심이니까. 해서, 박물관을 거점으로 많은 마을 사업을 전개했어요. 음악회 같은 문화행사도 적극 유치해 주민들과 함께 즐겼고.”
“관의 지원 승인 자체가 쉽지도 않지만, 사업 진행 과정에도 괴로운 일들이 많다고들 해요. 오라 가라, 이래라저래라, 요구가 많아서. 그래서 어떤 이들은 절대 관공서와 손잡지 말고 독립적으로 일을 추진하라 합니다.”
“우여곡절을 피할 길은 없죠. 그러나 저처럼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내 돈 한 푼 안 들이고 일을 벌일 수 있다는 건 절호의 기회이지 않겠어요?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문화사업이나 마을사업을 열렬히 하되 절대 돈벌이 목적으로는 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에요. 그건 실패의 첩경이니까. 반드시 욕먹고 망가지니까. 나랏돈을 공정하게 집행하는 게 상책이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무슨 예산 집행의 결재 라인엔 아예 서질 않는 게 좋아요. 그저 밥 먹을 정도의 형편만 만들어지면 이게 복이거니, 하고 만족해야 하는 겁니다.”
흔히들 관청을 공감의 파트너라기보다 요령으로 구워삶을 대상으로 여긴다. 슬기와 소신에 찬 처세가 아니고선 기분 좋게 넘기 어려운 철벽일 수 있다. 고 관장은 아마도 민첩한 머리와 저돌적인 근성의 소유자. 설령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단돈 1원도 부당하게 취하지 않겠다는 결기 역시 그의 것. 진정 그렇다면, 이 난잡한 세속에서 사례가 드물 이 인물은 이미 청정(淸正)거사. 어쩌면 그는 자신이 가진 가장 긍정적인 자질과 양심과 패기를 전량 두레박으로 퍼 올려 귀촌의 나날들에다 쏟아 붓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생판 모를 타관에 내려왔으나, 고 관장은 내 집 마당인 양 양양히 활개 쳤던 것 같다. 많은 일들을 펼치거나 만들거나 띄워 올려 흐뭇한 성과를 거두었다. 어떤 일들? 그는 영월에 오자마자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주민들 가족사진을 찍어주었다. 결혼식이나 고희연을 찾아다니며 셔터를 눌렀다. 마을 농산물 마케팅 사진도 척척 찍었다. 물론 무료봉사로. 사회적 협동조합 ‘영월 라디오스타 박물관’도 만들었다. 요즘은 귀농·귀촌 교육장에 가서 강의도 한다. 은퇴 귀촌을 바라는 이들에게 득이 될 얘길 들어볼까?
“요즘은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느낌이 듭디다. 특히 우리 또래들, 너무 일찍 퇴사하고서 삶의 낙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 오늘은 지하철 몇 호선을 탈까, 겨우 그런 생각이나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더 그래요. 섣불리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처갓집 돈까지 까먹는 경우도 많은 것 같은데, 그러지들 말고 귀촌이건 귀어이건 귀산을 하시라 권하고 싶어요. 잴 것 없이, 따질 것 없이 과감하게.”
“흔히들 도시 탈출을 꿈꾸지만 도시생활의 관성에서 쉽게 벗어나질 못하죠. 게다가 실패하거나 괴로워질 가능성이 있는 게 귀촌·귀농이라는 소식도 자주 들려오니 두려워질 수밖에.”
“시골에서 불편한 건 딱 한 가지예요. 의료시설이 열악하다는 거. 그 외엔 도시보다 나쁠 게 없다는 거. 뭐가 문제될꼬. 게다가 시골엔 할 일이 참 많아요. 캐리어와 재능을 가진 도시인들이 시골에 내려와 피폐해진 시골문화를 북돋울 수 있는 기회도 많아요.”
“원주민들과의 융화 문제도 난제라고들 하죠. 뭐 도시에서라고 심통 사나운 삐딱이들이 없으랴마는.”
“아, 텃세 문제엔 귀촌자의 잘못이 더 많아요. 시골의 독특한 문화와 풍습을 재까닥 인정해버리지 못한 잘못!”
“숲속의 자연 생태에도 폭력이 있고 상극이 있죠.”
“단적으로 말해볼까요? 마을에 정말 고약한 사람이 하나 있다 가정합시다. 그럼 그 인간이 죽으면 조용할까? 아니죠. 비슷한 사람이 또 나타납니다. 그게 시골문화예요. 제가 이곳에서 근본을 지키며 살고 있지만 다들 저를 좋아하는 건 아녜요. 열 중 셋은 딴죽을 걸어요. 그게 이상할 게 없는 현상이라 보면 끝! 귀촌자들이 몰려들어야 합니다. 그들의 선의가 시골문화를 더 따뜻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부디 좋아하는 일을 즐기시라
시골에도 우뚝한 철부(哲夫)가 있다. 보수적이고 토속적인 마을의 불문율을 존중하며 맘 통하는 토박이들과 어울리는 건 쓸쓸한 일상을 보완해준다. 귀촌인들과의 친선도모도 촌 생활의 불편과 권태를 면제해준다. 고 관장은 귀촌 직후 영월군 농업기술센터 희망농업대학에 입학함으로써 유치원 과정에 입문했다. 이게 무슨 얘기? 귀촌·귀농 초기엔 유치원생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이후 초등 6년까지를 마쳐야만 비로소 시골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고 관장의 논평이 그렇다. 귀촌 8년째인 이즈음에서야 그는 비로소 안전한 정착에 이르렀다는 거다.
“바람직한 건 농업대학에 들어가는 겁니다. 시골을 사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귀촌인 그룹을 형성할 수 있으니까. 저의 농업대학 동기 34명 중에 90%가 귀촌·귀농을 한 사람들이에요. 이들이 현재 영월군의 문화를 이끌고 있어요. 다들 한가락씩 했던 사람들이지만, 대부분 도시에서 사업하다 망해 시골로 내려들 왔어요. 실패 경험, 그 자체가 큰 배움이겠지. 인생을 크게 배운 사람은 좋은 노후를 누릴 수 있을 것이고.”
그의 눈은 영리한 노루처럼 반짝인다. 목청은 탕탕 우렁차 시원한 맛을 준다. 그의 뇌에 세팅된 최상의 가치는 ‘생동하는 노년’에 있지 않나 싶다. 시간을 허투루 쓸 수 있는 나이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으니 이제 성난 수말처럼 내달리자는 것. 그런 그가 늘 홍보하는 소리가 있다.
“사람이여, 부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죽는 날까지 즐기시라!”
그거야말로 신바람 나는 인생이며, 그렇게 사는 표본이 바로 자신이라는 투로 의기양양하다. 그렇다고 고난이 없었으랴. 황소의 뿔을 잡아 패대기치는 것과 같은 분투가 없었으랴. 비바람이야 피할 길 없더라도 내 방향대로, 내 지향대로 살고 있다는 긍지의 표명. 그의 언동엔 그런 게 비친다.
“6학년 5반쯤 되면 남은 인생을 덤으로 여기는 게 현명하다는 생각이에요. 과욕 부릴 때가 아니라는 거. 생활비 크게 들 것 없는 시골에 내려와, 그저 먹고 잘 수 있는 여건 정도만 만들고, 내가 진정 좋아하는 일,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한다면 그보다 나은 삶이 다시 있을까? 돈벌이는 아예 남의 일로 치부해버리고, 돈을 벌 경우엔 번 만큼의 가치 있는 일을 당당하게 해내고, 일로써 마을 공동체에 이바지하는, 그렇게 일과 놀이가 함께 붙은 삶이라면, 늘 타인을 고려하는 인생이라면 아무런 결함이 없을 거 아니겠어요?”
나만 좋으면 무슨 소용? 그는 그리 외치고 싶은 게다. 이웃에게 귀 기울이기, 선의의 관심 갖기, 그런 걸 박애(博愛)라 하나? 이 문제에 관해서는 부처님도 예수님도 공자 할배님도 뜻이 같을 게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그가 한마디한다.
“인생관을 들어보려오? ‘오늘 이 순간을 재미있게 살자!’ 그런데 요샌 바뀌었구만. ‘마누라를 위해 살자!’로. 하하핫!”
고명진 관장이 들려주는 귀촌준비 Tip
•귀촌해서 돈 벌 생각하지 말자. 도시의 비즈니스 마인드와 시골의 그것은 사뭇 다르다. 특히 돈벌이를 위한 시니어 귀농은 100% 실패한다. 저비용 고효율의 시골생활을 모색하자.
•자신이 평생 해왔던 일과 기능을 썩히지 말자. 일테면, 전기기술자였다면 마을을 돌며 고장 난 가전제품을 수리해주면 된다. 봉사란 행복의 원천이지 않던가.
•마을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자. 비판을 하더라도 참여하고서 비판하자. 그런 태도가 마을의 건강한 토양을 만든다.
•인터넷은 시골생활의 외로움을 덜어주고, 무한한 정보를 제공한다. 인터넷을 모르면 귀촌하지 말라. 페이스북으로 온 세계와 소통하는 세상이지 않은가.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나이가 들어도 여배우는 여배우다. 자신감 가득한 눈빛과 표정은 기본, 자기관리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대사 연습은 또 얼마나 많이 했을까. 대본에 빼곡하게 적어놓은 메모를 보니 지금까지 어느 정도 노력을 기울였을지 짐작이 간다. 배우들의 평균 나이가 70대인 ‘느티나무 은빛극단’을 만났다. 설렘과 벅찬 감동. 무대는 그들에게 언제나 꿈이다.
구로구를 대표하는 시니어 극단
구로문화재단 아트벨리 지하 소강당, 매주 화요일은 정기적으로 구로 시니어 연극 동아리 ‘느티나무 은빛극단’이 모이는 날이다. 지금까지 함께 작품을 해온 세월도 11년째. 2007년 구로문화재단이 설립되고 1년 뒤 시니어 연극 동아리가 생겨난 것이 느티나무 은빛극단의 시초다. 시니어 세대를 위한 프로그램도 있으면 좋겠다는 재단의 뜻이 컸다. 마침 설립 당시 구로구민회관에서는 서울시와 서울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시니어 교육 프로그램 ‘꿈꾸는 청춘예술대학’이 운영되고 있었다고. 그곳에서 교육받던 시니어를 대상으로 단원을 모집해 창단 당시 20여 명으로 시작했다. 지금은 작년 입단한 신입 배우 우성연(66) 씨를 포함해 현재 13명이 정식 단원으로 활동한다.
배우들의 평균 나이가 70대라지만 시민극단 사이에서는 꽤 유명하다. 2018년 제1회 영동생활시민연극제 초청 공연과 함께 성미산동네연극축제, 서울시민연극제에서 2016년과 2017년 각각 무대에 올린 ‘어미’와 ‘우당탕탕, 이사 왔어요!’로 2회 연속 시상대에 오른 바 있다. 느티나무 은빛극단이 아마추어 연극계에서 나름의 성과를 내는 데에는 구로문화재단의 뒷받침이 있다. 단원의 능력 향상을 위해 연극에 필요한 전문 강사를 초빙해주고, 연극 연습이 있는 날이면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소강당도 빌려준다.
육십 넘어 찾은 재능
느티나무 은빛극단 단원들이 자랑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출석률. 정기적인 만남은 당연하고 연극 공연을 앞두고 거의 매일 일정이 잡혀도 밤이고 낮이고 제시간에 맞춰 연습 장소에 전원이 모인다. 이유는 단 하나, 무대에 서는 것이 너무 행복하기 때문이란다. 초등학교 학예회 때 연극을 해본 경험이 있다는 신정례(73) 씨는 느티나무 은빛극단에서 연극을 하면서 우울증이 싹 나았다며 밝게 웃었다. 구로구 토박이이자 극단 최고 연장자인 안영분(81) 씨는 어릴 적 못다 이룬 꿈을 이뤘다고 했다.
“구로구청 뒤가 제가 태어난 곳입니다. 세 자매 중 막낸데 언니들이 마차 4개를 붙여놓고 학예회를 하는 것처럼 공터에서 뭔가를 하는 거예요. 언니들이 노래를 부르면 저는 그 옆에서 엉덩이를 막 흔들고 춤을 췄습니다. 공부는 잘 못해도 남들 앞에 서서 하는 건 잘했어요. 동네 아이들한테 무용도 가르치고 나름 공연도 했고요. 중학교 때는 청춘극단 단원이었던 동네 오빠를 따라다녔어요. 당시 유명했던 영화 ‘별들의 고향’을 연극으로 만들어 지금 고려대학교 구로병원 자리에 있었던 제5보충대에서 공연도 했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15세였는데 아버지가 그만두라고 해서 배우의 꿈을 포기했습니다.”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얌전하게 지내다가 스무 살에 결혼해서 살던 그녀가 바깥 활동을 시작한 건 환갑이 넘어서였다.
“처음에는 구로구민회관에서 노래를 배웠고요. 그 인연으로 연극까지 하게 됐어요. 1년에 한 작품씩은 꼭 하니까 너무 좋아요. 그래서 늙지 않나봐요.(웃음)”
창단 멤버인 이필연 씨는 구내 복지관에서 연극을 하다가 창단 소식을 듣고 입단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이곳에서 활동하며 배우로서의 재능을 새롭게 발견한 이도 있다. 2012년에 입단한 강정자(75) 씨는 지금까지 연극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생각도 못했는데 우연히 알게 되었고 용기를 냈습니다. 와서 보니까 이렇게 좋은 인연들도 만나고 행복하더라고요. 제가 참 내성적인데 몰랐던 재능을 발견했어요. 대사 외우는 게 치매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가족들도 좋아합니다.”
양양례(72) 씨도 이렇게 뒤늦은 나이에 연극을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안 해봤다고 말한다.
“안영분 씨가 어느 날 같이 가자고 했어요. 한 번도 연극을 해본 경험이 없다 했더니 공부하면 다 할 수 있다 하더라고요. 그렇게 인연이 된 지가 벌써 10년입니다. 살면서 슬프고 힘든 시간도 있었는데 연극 때문에 잘 넘길 수 있었습니다. 여기 오면 마냥 즐거워요.”
서막동(78) 씨는 식당 운영을 잠시 쉬고 있을 때 느티나무 은빛극단 공연을 보러 왔다가 배우가 됐다. 벌써 11년 차 베테랑이다.
“경남 하동 화개장터 쪽이 제 고향인데 연극을 한 번이라도 봤겠어요? 처음에는 떨렸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다른 복지관에서도 연극을 합니다. 가끔 연기 잘한다는 소리도 들어요.”
다양한 사연이 연극으로 모여들다
이곳에서 배운 실력을 봉사활동에 연계하는 단원도 있다. 성모병원 과 마포요양원 등에서 봉사를 해온 임절자(77) 씨다.
“봉사활동한 지는 21년 됐어요. 처음 배울 때는 인형극을 했는데 어르신들이 좋아하시더라고요. 어떤 날은 연극하듯 어르신들과 얘기해요. 우리 아이들이 그러더군요. 엄마는 정말 열정적으로 산다고요. 연극은 인생 같아요. 굴곡지고 희로애락도 있잖아요.”
젊은 시절 교편을 잡았다는 안옥희(73) 씨는 직장에 다니는 막내딸의 육아를 책임져줄 생각에 한국방송통신대학 교육학과에 편입한 것이 계기가 돼 연극을 하게 됐다.
“손주 육아와 함께 공부하며 사람들을 만나다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그동안 극단 작품 ‘산불’과 ‘어미’에도 출연했습니다. 제가 원래 남자 전문 배우인데 요즘은 연출도 겸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느티나무 은빛극단에는 남자 배우가 없다. 주로 안옥희, 안영분 씨가 남자 역을 맡는다. 한봉애(66) 씨와 임절자 씨도 남자 역으로 무대에 선 적이 있다고. 처음에는 남자 배우도 있었지만 남자 단원의 출석률이 점점 떨어져 여배우 극단이 됐다.
극훈도 있다. “우아하고, 멋있고, 겸손하자”이다. 죽을 때까지 멋진 모습으로 무대에 설 것이라는 느티나무 은빛극단. 2월까지는 휴식시간을 갖고 3~4월 중으로 올해 무대에 올릴 작품을 고를 예정이다. 느티나무 은빛극단을 기억하시라. 한 명, 한 명 연륜에서 우러나온 귀한 열정을 조명 불빛 아래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mini interview◆
‘여성 리더십’으로 우아하게 극단을 이끌다, 느티나무 은빛극단 대표 이정란
목소리에서 강한 힘이 느껴지는 느티나무 은빛극단의 이정란(78) 대표는 소녀 시절부터 품어왔던 꿈 이야기부터 꺼냈다.
“어려서부터 무용을 했죠. 굉장히 잘했어요. 배우도 해볼까 생각해본 적 있는데 집안 반대로 못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 생활을 하다 결혼을 했다. 남편은 살림하면서 아이 잘 키우는 아내를 원했다. 아이들 다 키우고 맞이한 여유로운 시니어의 삶. 부부가 함께 노후를 잘 보내는가 싶었는데 남편이 10여 년 전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우리 집 양반 돌아가시고 나서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지역 신문을 들춰보다가 인형극 학교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제가 첫 번째 등록자였어요. 그때부터 연극하고 인연이 됐습니다.”
구로문화재단이 시니어 연극 동아리를 만들어보자며 이정란 대표에게 제안을 했다.
“재단에서 시니어 극단을 만들자고 했을 때 너무 좋았어요. 제가 하고 싶어 했던 거였거든요. 여기저기 다니며 새로 생길 극단을 홍보했어요.”
느티나무 은빛극단을 알릴 수 있는 곳은 다 찾아다녔고 관심 있는 이들과 얼굴을 맞대면서 열정을 불태웠다.
“정말 열심히 했어요. 나이 들면 다들 한 고집하잖아요. 지금까지 모르던 사람들이 연극을 통해 만났으니 무조건 감싸고 서로를 보듬자고 생각했어요. 공연 연습을 할 때 혹시 따라오지 못하는 분에게는 따로 시간을 내서 함께 공부도 하고요.”
극단을 이끌던 지난 11년 동안 지각, 결석, 조퇴를 한 번도 안 해봤다는 이정란 대표. 독하고 무섭다는 말을 들을 때도 있다.
“우리 극단 단원은 한 번 나가면 다시 못 들어와요. 나간 사람들이 다시 들어오고 싶다고 해도 냉정하게 잘랐어요. 너무한가요?(웃음)”
대본 외울 때가 제일 즐겁다는 이정란 대표. 대사를 다 외우고 난 다음에는 단원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지금은 다들 너무 잘하셔서 보람을 느껴요. 강사들도 다 딸 같은 사람들이지만 깍듯하게 대우합니다. 단원들 출석률은 칭찬받을 만큼 좋고요. 참 2011년도에 극단 이름을 공모했는데 제가 응모한 아이디어가 채택됐어요. 느티나무는 구로를 상징하고 은빛은 시니어를 의미합니다.”
이 대표는 최근 또 새로운 도전을 했다. 바로 복화술이다.
“연극과 구연동화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배우는 겁니다. 나는 나이 먹어서 못한다는 소리를 안 해요. 자존심 상해서요. 우리 며느리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롤 모델이라고. 나처럼 늙고 싶대요. 항상 도전하는 정신으로요. 연기는 ‘80세까지만 하자!’ 했는데 벌써 팔십이 다 되어가네요. 대본 외울 수 있을 때까지는 무대에 설 겁니다.”
※ 라이프@이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소개하고 싶은 동창회, 동호회 등이 있다면 bravo@etoday.co.kr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중장년 세대가 떠올리는 추억의 뉴스는 아마 ‘대한늬우스’일 것이다. 당시와 비교해보면 요즘 뉴스는 최첨단 기술 덕분에 시각적으로 다양한 정보를 줄 뿐만 아니라, 앵커의 말투와 톤도 한층 부드러워졌다. 그런 시대의 흐름에 역주행하며 7080 레트로 뉴스를 제작하는 젊은이들이 있다. 바로 ‘스파-크 뉴우스’의 이화원(19), 정광석(33), 배욱진(34) 씨다.
서울문화재단이 각 분야 영상 크리에이터와 협업해 만들어가는 온라인 방송국 ‘스팍TV’. 매주 요일별 다양한 채널을 통해 일상 속 문화예술 콘텐츠를 제공한다. 그중 한 주의 시작, 월요일마다 독자들을 만나는 ‘스파-크 뉴우스’ 채널. 정갈한 2대 8 가르마에 금테잠자리안경을 쓴 앵커 배간지의 투박한 외모와 멘트가 압권이다. 1970~80년대를 배경으로 레트로풍 뉴스를 기획한 이화원 PD는 이제 갓 미성년자 딱지를 뗀 대학 새내기. 셋 중 막내이지만 팀장을 맡아 기획을 비롯한 영상 편집 등을 총괄하고 있다. 1999년생인 그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의 시절, 그야말로 기억조차 없는 옛 감성에 꽂힌 이유는 무엇일까?
“요즘은 다들 차별화된 것을 추구하잖아요. 다른 것, 그 다른 것과는 또 다른 것, 그렇게 계속 다른 무언가를 찾는데 매일 새로운 것들이 쏟아지는 세상에서는 뭘 해도 크게 차별화가 되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과거를 바라보게 된 것 같아요. 알 수 없는 미래가 새로운 것처럼, 1970~80년대의 모습도 제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인 거죠. 이미 그 시절을 살아온 어른들에겐 진부할지 모르지만, 저에겐 신선하게 느껴졌어요.”
30~40년 전 뉴스 감성을 표현하기 위해 화면 비율을 4대 3으로 맞추고, 화질이나 음질을 일부러 탁하게 떨어뜨려보기도 했다. 무엇보다 중요했던 건 앵커 배간지의 멘트와 비주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과거 뉴스 영상을 보고 스타일을 연구했고, 재래시장에서 옷과 소품을 골라 현재의 모습을 완성했다. 앵커로 활약 중인 배욱진(배간지) 씨는 “삐까뻔쩍한 것들을 보면 알레르기가 일어나는 듯하다”며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로 평소 낡고 오래된 것들에 관심이 깊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취향만으로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레트로 열풍을 실감하고 있다고 했다.
“촬영 때 쓰려고 동묘와 황학동 시장에서 1980~90년대 트레이닝복이나 ‘88올림픽’ 로고가 있는 옷들을 사려고 보니 굉장히 비싸더라고요. 이미 힙스터(hipster, 유행을 좇는 사람)들 사이에서 핫 아이템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거죠. 그런 트렌드 덕분에 젊은 친구들도 저희 영상을 재미있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그저 옛것을 따라 한다고 해서 최근 유행하는 ‘레트로’ 감성을 표현할 수는 없다. 낡았지만 신선하고, 익숙하지만 흥미롭고, 촌스러우면서도 요즘 말로 ‘힙’(hip)한, 복합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관건. 배욱진 씨는 “단순히 오래된 것의 복원이 아닌 패러디에 주안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레트로를 표방한다고 하지만 아예 원본 그 자체를 따라 하는 건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을 한 번 재해석하거나 살짝 비틀어보려 했죠. 예를 들어 옛날 영상이나 광고에서 요즘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느끼는 걸 보면 굉장히 원색적이거나 갑분싸(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짐)할 만한 내용이에요. 그런 부분을 능청스럽게 소화하면서 웃음 포인트를 주려 했어요.”
세 사람의 고민 끝에 탄생한 ‘스파-크 뉴우스’는 올해 6월 첫선을 보이며 독특한 설정으로 시선을 끄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독자에게 꾸준히 사랑받는 콘텐츠로 자리매김하기까지는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는 셈이다. 촬영을 담당하는 정광석 감독은 거듭 새로운 창작물을 내놓아야 한다는 부담이 적지 않다고 털어놨다.
“처음에는 신선하다는 반응이 많았어요. 그런데 앞으로 저희 콘텐츠에 독자들이 익숙해지면 초반에 느꼈던 참신함이 점점 사라질까봐 걱정이에요. 뉴스 진행 자체가 옛날 방식이라 다소 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거든요. 리포터 영상을 더하거나 청군 백군 머리띠 하고 가을운동회처럼 야외촬영도 해서 넣어볼까 합니다.”
잠시 화제를 전환해 중장년에게 권하고 싶은 레트로 핫 플레이스를 알려 달라고 하자 입을 모아 ‘을지로 커피한약방’을 꼽았다. 배욱진 씨는 “다른 레트로 공간은 젊은 세대를 타깃으로 해 지나치게 트렌디한 느낌이 강한데, 이곳은 자연스러운 레트로 감성이 묻어나는 곳”이라며 중장년 방문객이 꽤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정광석 감독도 한마디 덧붙였다.
“커피한약방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부모 세대(중장년)가 방문하면 커피값을 받지 않는 이벤트를 하는 날도 있는데, 그만큼 윗세대가 이러한 문화를 즐겼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저 역시 그런 점에 공감하고, 많은 중장년분들이 저희 뉴스를 통해 정보도 알아 가시고 다양한 문화생활을 누리셨으면 해요.”
레트로에 열광하는 현대인, 과연 그 열기는 언제까지 계속될까? ‘스파-크 뉴우스’의 간판 앵커 배간지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면 ‘파리의 황금기는 30년 전이었어’, ‘파리의 황금기는 그때(과거)였어’라는 식의 대사가 계속 나와요. 그렇게 계속 현대를 살면서도 전 세대를 그리워하는 거죠. 우리가 현재의 과거를 그리워하듯, 미래엔 또 그때의 과거를 그리워하게 될 거예요. 자기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과거의 어떤 풍요로움을 상상하고 갈망하는 건 어쩌면 인간의 본능 아닐까요?”
‘2018 한국마임’이 오는 5일부터 9일까지 성북구 삼선교 (4호선 한성대입구역 2, 5, 6번 출구 근방 소극장과 야외 공간) 일대에서 열린다. ‘삼선三仙과 놀다!’ 라는 부제가 달린 이번 축제는 거리에서 열리는 공연이라면 누구나 무료 관람할 수 있다. 1989년부터 시작해 서른 번째를 맞이한 ‘한국마임’ 축제는 ‘춘천국제마임축제’의 효시이자 대한민국 마임계 오랜 주축으로 자리 잡아 왔다.
마임 예술의 대중화에 앞장선 사다리움직임 연구소의 인기작 ‘휴먼 코미디’를 비롯해 다양한 형태의 마임극이 삼선교 일대는 수놓는다. 무엇보다 야외무대에서 즐길 수 있는 공연들이 눈에 띈다. 세대, 지역 불문 누구든지 즐길 수 있는 재미난 공연으로 꾸며졌다.
무뚝뚝한 게 무조건 매력이라는 안동윤의 ‘경상도 비눗방울’, 관객과 함께하는 저글링 공연 강한구의 ‘궁금해?’, 어릿광대의 시들어가는 화분 되살리기 프로젝트 홍창종의 ‘어릿광대쇼’, 현대철과 삑삑이의 ‘신출귀몰 야외공연’과 호모루덴스 컴퍼니의 ‘달걀귀신 퍼포먼스’ 등 재기발랄한 대한민국 광대의 공연을 제대로 만날 기회다. 마임축제는 유머로 가득 찬 광대들의 익살스러운 공연을 물론이고 진지하고 우아한 몸짓 언어의 서정성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번 한국마임 축제는 공연예술의 대명사인 대학로를 벗어나 바로 옆 동네인 삼선교에서 진행한다. 성북구(삼선교)는 서울에서도 문화예술인이 가장 많이 거주지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 이웃의 모습이 아닌 공연자로서 관객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가고자 했다. 공연뿐만 아니라 남녀노소가 함께하는 체험행사도 준비하고 있다. 서울문화재단과 성북문화재단이 후원하는 ‘2018한국마임’ 소통의 본질은 개개인의 몸에 있다는 근본적 진리와 감동을 동시에 선사하게 될 것이다.
얼마 전 “15세기 ‘분청자기’ … 크리스티서 33억 원에 낙찰”이라는 한 국내 일간지의 기사를 보고, 몇 년 전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전시된 분청자기(粉靑瓷器)를 본 한 미술 애호가가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글의 헤드라인이 떠올랐습니다.
“수세기 전 찰흙으로 빚은 그릇이 현대성을 말하다.”
이는 반세기 전인 1962년, 한국의 문화유산을 처음 유럽 대륙에 대규모로 전시했을 때, 이를 본 파리지앵들이 남긴 감탄과 맥을 같이합니다. 그들은 “분청자기에서 현대미술적 감각을 보았고, 한국에는 500년 전에 피카소(Pablo Picasso)가 있었다”며 찬사를 보냈습니다.(‘그가 있었기에-최순우를 그리면서’(2017) 참조, 위의 내용은 2016년 2월 본지에 실린 내용과 일부 겹침을 밝힙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고려청자나 조선시대의 청화백자를 두고 말한 게 아닙니다. 15~16세기 이 땅에 ‘돌연변이’처럼 나타난 분청자기에 대한 논평입니다. 분청자기를 보고 눈을 크게 뜬 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관람자들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홀렸던 것입니다.
고려자기나 중국과 일본의 도자 예술품이 보여주는 한결같은 완벽성, 그래서 냉기마저 감도는 고매(高邁)한 것과는 거리가 먼 도자기를 만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장인의 숨소리와 손길이 숨김없이 전해오는 순박한 정감을 그네들도 느꼈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파리지앵과 뉴요커들은 암흑시대와도 같던 15~16세기의 틀을 벗어난 그 자유분방함에서 과감한 현대성을 목도했던 것입니다.
우리네 문화예술에 깊숙이 빠진 서구인들이 “한국인은 아방가르드(avant-garde) 정신이 풍부하다”고 예찬하는 데는 이처럼 오랜 뿌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前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학교 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학교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前 회장, 간송미술재단 이사.
‘민속극장풍류’는 내가 관련하는 기관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 시간이 날 때마다 자주 찾는다. 담장 하나 너머로 소나무 숲이 울창한 선정릉이 있어 주변 경치도 무척 아름답다. 높은 빌딩 숲 가운데 넓은 능이 있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민속극장풍류는 우리나라 무형문화재를 보존·전수하는 ‘국가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 건물 안에 있다. 전수교육관은 명칭 그대로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와 전승자를 위한 작품을 전시하거나 무대에 올리는 등 민족 정체성의 근간이 되는 전통예술의 버팀목 역할을 한다. 반원형의 아담한 공연장으로 무대와 객석의 거리가 가까워 출연자들의 표정과 숨소리, 손끝 떨림까지 볼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이러한 공간의 특성상 예전 풍류방(風流房)이나 마을의 넓은 마당에서 열렸던 여러 가지 전통 마당놀이 등을 시연(試演)하기 좋은 공연장이다. 매주 금요일은 무형문화재 예능 종목을 소개하는 상설공연으로 판소리, 굿, 탈춤, 민요, 가야금 등 다양한 주제의 볼거리가 마련돼 있다.
가능하면 공연시간보다 1시간 정도 일찍 나서서 가족과 함께 능 산책을 한 후 공연 관람을 하면 더욱 알찬 시간이 될 것이다. 또 인근에 직장인들의 경우 접근성이 좋아 퇴근 후 관람하기에도 제격이라 말한다. 한 달에 무료공연을 열흘씩이나 하는 데다가 오후 3시에서 7시 30분 사이에 시작한다. 돈 없고, 시간 없고, 거리가 멀다는 핑계를 한 번에 없앨 수 있는 곳이 있다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2018년 6월 극장 ‘풍류’ 무료공연일정
△1일 19:00 ‘발탈’ 문영식(국가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 전수교육조교) △5일 19:30 ‘거문고산조’ 김선한(국가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산조 전수교육조교) △8일 20:00 ‘가곡’ 김경배(국가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예능보유자) △9일 17:00 ‘강령탈춤’ 김정순, 손용태 외 강령탈춤보존회 (국가무형문화재 제34호 강령탈춤) △10일 17:00 ‘경기민요’ 김혜란(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전수교육조교) △12일 19:30 ‘경기민요’ 이춘희(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14일 15:00 ‘판소리’ 송순섭(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 △15일 19:30 ‘판소리고법’ 정철호(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고법 예능보유자) △16일 15:00 ‘발탈’ 조영숙(국가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 예능보유자) △23일 17:00 ‘서도소리’ 김광숙(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예능보유자) △25일 19:30 ‘거문고산조’ 김영재(국가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산조 예능보유자) △29일 19:30 ‘판소리’ 신영희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
자세한 일정 확인 및 문의는 한국문화재단 홈페이지를 통해 가능하다.
김일태(63) 화백에게 금화의 선두주자라는 말을 쓰니 바로 지적이 날아온다.
“금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세계에 없습니다.”
유일무이. 특유의 단호한 목소리 톤에서 자신의 업에 대한 자부심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김 화백이 예술가로서의 높은 긍지가 느껴지는 이 문답 너머에는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아시아인 최초로 영국 사치 갤러리에서 단독 전시를 하고 교황청 집무실에 그의 금화가 걸렸다. 또 아시아태평양브랜드재단의 100대 브랜드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력이 화려한 그의 작품 세계가 궁금했다. 그 내밀한 세계를 들여다봤다.
얼마 전 김일태 화백은 우리나라 개인 최초로 아시아태평양브랜드재단(APBF) 100대 브랜드에 선정됐다. 2015년 영국 런던에 있는 사치 갤러리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단독 전시회를 가진 이후 들려온 또 하나의 낭보다. 사치 갤러리는 현대미술 콜렉터 찰스 사치가 운영하는 갤러리로 영국 현대미술의 판도를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 곳이다. 그곳에서 단독으로 전시회를 가진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이번에는 하나의 고유한 브랜드로서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금화를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고자 연구했던 지난 40여 년간의 노력을 보상받는 느낌입니다. 예술도 인류에 엄청난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증거이기도 하니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죠.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독창적인 발상으로 세계적으로 알리게 돼 더 기쁩니다.”
김 화백은 구스타프 클림트 이후 화폭에 금을 조금 붙이는 기법은 있었으나 캔버스 전체를 금으로 된 물감으로만 완성하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그가 추구하는 것은 황금의 미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과학의 영역에 닿아 있기도 하다. 금으로 된 물감이라는 기상천외한 소재를 만들기 위해 그가 추구했던 노력과 열정, 그리고 고통을 살펴보면 더욱 그렇다.
“비싸고 좋은 금을 가지고 왜 저렇게 할까. 물질의 욕망에 사로잡힌 분들은 저를 거의 미친 사람 취급했죠. 그러나 저는 미술인이었기 때문에 독창적인 창의력만이 미래가 있다고 생각해서 재료가 비싸고 어려웠지만 그래도 끝까지 꿈을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금은 천 년이 지나도 변치 않을 소재
아무리 흉내 내기 힘든 금화라 해도 어째서 금이었을까? 얼핏 생각해봐도 회화의 재료로 쓰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물질이다.
“금이라는 소재는 인류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귀한 보석류에 속했기 때문에 드러내기보다는 감추기만 했죠. 그걸 감추기보다는 밖으로 드러나게 해서 문화로 발전시켜 다 같이 공유하면 어떨까 싶었어요. 그리고 왜 서양인이 만든 화학적인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반감도 있었죠. 농사도 유기농이 좋듯 순금의 다양한 색을 이용해서 작품을 만들자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금으로 된 미학을 선보이고 싶다는 생각. 이것은 다른 사람과 다른 예술적 방향성을 지향하고 싶다는 김 화백 본연의 미학이 적용된 결과이기도 했다. 또한 재료로서의 금은 천 년이 지나도 색이 변하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었다. 자손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기에 미술품으로서 불멸에 가까운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금의 매력은 보석이라서 있는 게 아니에요.”
김 화백이 금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 그것은 금 본연의 색이었다. 금이 가진 색은 햇빛에 비출 때, 비가 올 때, 바람이 불 때 등등 상황에 따라 나오는 색이 다 다르게 보인다고 한다. 김 화백의 설명에 따르면 그 색은 총 아홉 가지. 착시 현상이 아니라 조도에 의해 색이 변한다는 것이다.
“황금이 한 색깔이 아니다. 그걸 알아낸 순간 엄청난 매력을 느꼈죠. 그래서 금을 물감화하기로 했습니다.”
황금 물감을 만들기 위한 천연오일 개발
김 화백의 작업실에 들어가자 뭔가 독특한 향내가 났다. 허브 향과 비슷한 이 냄새는 금을 물감으로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금의 소재를 계속 탐구한 그의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금을 분말화해서 직접 개발한 천연오일에 섞어 칠을 합니다. 이 냄새는 천연오일의 향이죠. 천연오일을 쓰는 이유는 광물질은 기존 오일이 닿는 순간 새카맣게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콩과 식물 여섯 가지를 배합한 오일을 만들어내는 데 시행착오로 5~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야말로 기본적인 재료에서부터 차별화를 생각해 그림을 그린 셈이다. 그가 어째서 이런 생각을 품게 됐는지, 그 근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어머니가 37년간 미술교사로 교단에 있었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미술 공부를 할 수 있었죠. 그러나 제가 대학에 들어간 1970년대 초에는 시대적으로 교사 돈으로는 자식의 대학 공부가 불가능했어요. 저는 많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했죠. 편안하게 그림을 그릴 여유가 없었던 시절이었어요.”
그렇게 10여 년을 그림과 상관없이 살았다. 그러다 운 좋게 돈을 벌게 됐고 그때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림을 그릴 것이냐, 아니면 물질의 욕망이나 추구하면서 편안하게 살 것이냐고.
“선택하는 데 5년 걸렸어요. 먹고살기 위해 장사를 할 것이냐, 하늘이 내게 준 재능으로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에 내 인생을 던질 것이냐. 선택은 후자였죠.”
미술계의 이단아, 가족도 떠나다
김 화백이 생각하는 예술인의 조건은 간단명료했다. 예술인은 새로운 것에 도전해 미래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으로 그림을 그리는 그의 시도는 미술계에서는 파격이었다. 당연히 인정받기 힘들었다.
“기존 미술계 사람들은 서양인이 만든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공부합니다. 그러면서 무슨 창작을 논하고 독창성을 말할 수 있어요? 애당초 비교를 거부한다는 게 제 첫마디였어요. 그리고 떠났어요. 산에서 10년 6개월 동안 오로지 금을 갖고 작품화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내는 데 몰두했죠. 40대에서 50대까지 그렇게 시간을 보냈어요.”
‘언젠가는 틀림없이 예술의 가치가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칠 때가 올 텐데, 왜 지금 모방만 하며 사는가’라는 기성 미술계에 대한 그의 비판에는 그간 겪었던 고통의 나날들이 묵직하게 담겨 있었다.
“엄청난 끈기와 상상을 초월하는 재료비의 압박에 맞설 두둑한 배포가 아니고서야 이룰 수 없는 결과이거든요.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죠. 나는 미치지도 않았고 단지 미래를 준비하고자 하는 것인데 미친놈, 이단아로 취급했을 때 정말 죽고 싶었어요. 말을 아프게 던지는 사람은 쉽게 던지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상처를 입게 되는 법입니다.”
그를 버린 것은 미술계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아이의 엄마인 제 아내마저도 이해를 못했죠. 금으로 그리다 보니 재료비가 비싸요. 그래서 작은 부동산을 처분해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하니 미친 사람 취급했어요. 결국 이혼했죠.”
주변도, 심지어 가족도 이해 못했다. 그는 고립된 데다 답이 안 나오는 모서리에 매달린 기분이었을 게다. 정말로 미쳐도 이상하지 않았을 그런 시간 속에서 그를 견디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차피 최고가 되려면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세상은 긍정과 부정으로 나뉘어서 보게 되는데, 나에게도 언젠가 긍정의 세상이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죠.”
그의 확신은 10여 년의 오랜 시간을 거쳐 마침내 그 결실을 봤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에 드디어 데뷔하면서, 데뷔 첫해에 작품들을 완판했다. 그 후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신라호텔에서 단독 전시회를 가졌고, 역시 그곳에서도 36점의 작품을 완판했다. 그의 이름은 서서히 다른 나라에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해외 유수의 전시관에서 80여 차례 전시회를 가졌고, 그것들이 모여서 사치 갤러리에서의 단독 전시라는 쾌거를 이루게 됐다.
도자기와 금화의 결합 실험
김 화백의 그림은 다양한 사람이 봐도 공통적인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금이라는 소재가 주는 느낌의 보편성도 그렇거니와, 그의 작품관 자체가 추상보다는 해학적 상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독자에게 친근감 있게 다가갈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그것이야말로 독자들에게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만 아는 추상화를 그려놓고 네 맘대로 생각하라고 물음표를 던지는 건 예술인의 태도로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는 직관적인 그림을 그린다. 그래서 작업실에서 본 그의 그림은 호박과 돼지, 집안의 온기, 어머니의 사랑 등을 많이 다루고 있다. 이는 한국 사람이 특히 좋아하는 소재들이라고 한다.
최근 그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바로 도자기와 금화의 결합이다.
“1300℃의 도자 가마에서 구워내는 작품을 작업하고 있어요. 굉장히 어렵습니다.”
우선 가마에 들어갈 도자기를 100개 정도 만든다. 그리고 흙을 구워낸 후 그 위에 유약 처리를 한다. 다음으로 유약 위에 금을 넣어서 낮은 온도에 구워낸다. 이런 작업으로 지난 7년 동안 단 열 개의 작품밖에 안 나왔다. 지독하게 비효율적이다. 그도 “그 시간에 그림을 그렸으면 200점은 그렸을 텐데…”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작업실에 있는 황금 도자기 거북이를 가리키면서, 어렵고 힘들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이 그가 금화를 그리게 된 유일한 동기라고 했다.
서양에서 먼저 알아본 금화의 가치
그가 자신의 뚝심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그의 작품이 결정적으로 인정받은 것이 한국이 아니라 서양화의 본고장이었다는 점에서도 기인한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외국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을 때, 세계적인 스타 데미 무어, 보이 조지가 제 작품 장미를 사갔죠. 너무 아름답다면서. 그게 참 기억에 남네요.”
지금 김 화백의 작품은 각계각층 저명인사들의 선택을 받는 작품군 대열에 올랐다. 자신의 힘들었던 시절을 기억하는 그는 소외된 계층을 위해 그림이 팔리면 10%씩 기부를 하고 있다. 또한 그는 기독교인이라 성화는 제작비를 안 받고 제작한다. 의뢰인이 재료비, 즉 금을 사오면 그걸로 그려주는 것이다. 이 또한 그가 자신의 성공에 대해 세상에 보답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게 아직 한국 시장은 도전해야 할 영역이다. 아니, 사실 고국은 모든 미술인에게 도전의 대상이 아닐까. 당장 미국의 저명한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가진 작가여도 한국 대중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나’ 하는 정도의 반응밖에 못 받는 것이 우리네 미술인들의 현실이다. 김 화백의 말마따나 자신이 ‘배우라면 아카데미상을 열 번 받을 정도의 쾌거’를 이룬 셈이지만 대중에게 그의 이름은 아직 낯설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한 곡만 성공해도 전 국민이 다 알지만 미술인은 그렇지 않죠.”
그는 지금까지 편견과 부족한 예우, 척박한 환경을 버티며 작업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현실이 원망스럽다가도 좀 더 분발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다짐하는 듯했다. 미술인으로서는 전 세계 어느 작가에게도 뒤지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혼자만의 고독한 싸움
“작가는 늘 새로운 아이디어와 새로운 작품을 독자에게 보여야 한다는 점에서 굉장한 중압감이 있죠. 미술은 온전히 캔버스와 나와의 싸움입니다.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단한 벽과 정면으로 부딪쳐야 하는 인생을 60여 년 산다는 것은 자존감으로 견디는 것과 같은 의미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일반인으로선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것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지독하게 외롭고 고독한 길에서, 그림은 애인이고 자식 같은 것이 됐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여전히 거듭 다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술이 음악처럼 삶의 교훈과 지혜,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는 현실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앞으로도 더욱 많이 그려서 독자에게 보답해야죠.”
전기 보급과 함께 빠르게 사라져버린 것이 있다. 등잔이다. 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막대 사이에 흙으로 빚은 잔을 끼워놓은 것. 잔 안에 심지를 넣고 기름을 부어 불을 붙이면 어두웠던 세상이 밝아졌다. 과거 인간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지만 지금은 없다. 신문물의 등장으로 기억에서 빠르게 잊혔지만 등잔은 우리 삶에 있어 고마운 물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마구 버려졌던 가치를 마음에 새기고 100년 넘게 모아놓은 등잔을 마주하러 한국등잔박물관에 찾아갔다.
金家三代, 등잔의 소중함을 알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사람 길보다 바람 길이 더 많이 나 있는 인적 드문 곳에 한국등잔박물관(재단법인 한국등잔박물관 문화재단)이 있다. 같은 자리에서 박물관을 지키고 있는 세월만도 21년째. 한국등잔박물관의 전신인 고등기(古燈器)전시관(1969년 수원에서 개관)부터 따진다면 49년 전통에 특색까지 갖춘 독보적인 박물관이다. 한국등잔박물관은 미래를 볼 줄 아는 한 가족의 뜻과 의지로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2대에 걸쳐 관장을 역임하고 있는 김형구 관장은 선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정성이 깃든 한국등잔박물관에 대해 찬찬히 설명했다.
“옛날부터 그림이나 골동품 등을 수집하는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사서 모았습니다. 은행이 없을 때는 더 했었죠. 물론 저희 집안에서도 고가의 예술품을 모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저희 삼대가 열심히 모았던 것이 바로 등잔입니다.”
등잔은 모아봤자 돈 되는 물품이 아니었다. 전기가 들어오면서 쓸모없어져버리고 가치가 떨어져 애물단지가 됐다. 그러게 왜 돈 안 되는 등잔인가?
“우리 인간의 삶에 해가 지고 나서 전기가 없을 때 등잔이 없으면 밤에 생활이 안 되잖아요. 인생의 반이 밤이잖아요. 밤을 밝혀준 중요한 물건을 아무도 모으지 않는 거야. 수집하는 사람이 없어서 우리 집안에서 하게 된 겁니다. 나, 아버지, 할아버지가 100년 넘게 모은 등잔이 박물관 곳곳에 다 있습니다.”
가문의 재산이 모두의 자산이 되다
한국등잔박물관은 1대 관장이자 설립자인 김동휘(1918~2011) 관장이 운영하던 산부인과 2층에서 고등기전시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김동휘 관장은 경기도 일대에서 유명하던 산부인과 의사이면서 예술에 조예가 깊어 경기 지역 문화 사업에 기여를 많이 해온 인물이었다. 은퇴 뒤 모아둔 유물의 관리, 보관 활용에 대한 고민이 박물관 개관으로 이어진 것이다.
한국등잔박물관은 현재 재단법인에서 운영하고 있다. 1999년 유물과 건물, 대지까지 150억 원 가까이 되는 재산을 재단법인 설립과 함께 사회에 환원했다. 대한민국이 있는 한 한국등잔박물관은 남아 있을 것이라고 했다.
등잔박물관은 왜 한국에만 있을까?
김형구 관장은 등잔이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라고 주장한다. 장례 문화였던 고인돌이 온돌 생활로 이어져 생겨난 민족의 슬기라고 강조했다.
“우선 온돌 문화는 고인돌에 쓰이는 돌을 깨는 기술에서 왔습니다. 온돌 바닥에 사용하는 구들장 깨는 기술로 전이된 것이죠. 바닥에 앉아서 생활하는데 등을 땅바닥에 그대로 놓아두면 빛의 효율이 떨어지잖아요. 앉아 있는 상태의 눈높이로 불을 끌어올려 허공에 띄워놓은 것이 등잔입니다. 전국이 온돌문화권이었으니 등잔을 사용한 곳은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결국 세계 유일의 박물관일 수밖에요.”
한국등잔박물관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다양한 등기구가 전시돼 있다. 불교국가로서 문화의 꽃을 피우던 고려시대 등잔대에서는 주로 염주와 연꽃 모양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시대에는 의리와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의 죽절 무늬가 눈에 많이 띈다. 등잔을 재떨이로도 사용했고 새색시 혼수품으로 가져가기도 했다고. 박물관 1층에는 등잔을 사용하던 때 남자와 여자의 방, 부엌이 꾸며져 있어 당시 모습과 함께 등잔의 이용을 엿 볼 수 있다. 2층은 시대별로 등잔을 분류해놓았다. 실제 쓰던 대청마루를 원형 그대로 옮겨와 한국등잔박물관과 등잔 관련 기록들을 볼 수 있는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관람안내
관람시간 (10월~3월) 오전 10:00 ~ 오후 5:00 / (4월~9월) 오전 10:00 ~ 오후 5:30
휴관일 월·화요일
입장료 (개인) 성인 4000원 / 중·고·대학생·노인·어린이 2500원
(단체) 성인 3000 / 중·고·대학생·노인·어린이 2,000 원
*부모동반시 미취학어린이 무료입장.
* 단체관람은 사전에 ☎ (031) 334-0797로 문의 예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