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오전, 전철 1호선을 타고 종착역인 인천역으로 간다. 한산한 전철 안에서 시간여행자가 되는 상상을 한다. 인천역 앞에 있는 화려한 패루를 통과하면, 1800년대 말 인천 개항 시절의 풍경이 펼쳐지는 상상 말이다. 실제로 패루 너머에 근대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그곳에 새겨진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시간을 되짚어보면, 나도 모르게 근대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고 만다.
걷기 코스
전철 1호선 인천역▶ 제1패루▶ 차이나타운▶ 선린문(제3패루)▶ 자유공원▶ 제물포구락부▶ 청일조계지 경계계단▶ 인천 중구청(옛 일본영사관)▶ 중구생활사전시관▶ 인천개항박물관(옛 인천일본제1은행)▶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옛 인천일본18은행지점)▶ 신포시장▶ 답동성당▶ 애관극장▶ 싸리재 카페▶ 전철 1호선 동인천역
인천 개항과 함께 형성된 화교 마을
1883년 인천 개항 후 청국인, 일본인, 러시아인, 독일인, 영국인들이 앞다퉈 제물포(지금의 인천항)로 몰려왔다. 항구 일대에는 각국의 조계지가 형성되었다. 최초의 근대식 공원, 극장, 학교, 호텔, 은행과 같은 서양식 근대건축물도 세워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 철도, 시외전화, 화폐, 구두, 등대, 담배 성냥, 축구, 야구 등 해외 문물도 물밀듯 들어왔다. 이 시절의 흔적이 제물포와 가까웠던 지금의 인천시 중구에 오롯이 남았다. 그 자취를 찾으며 질풍노도 같았던 인천의 근대사를 돌아본다.
출발지인 인천역부터 특별하다. 인천역은 1899년에 개통한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의 시·종착역이었다. 인천역에서 서울 노량진까지 우마차나 수로로는 반나절 이상 걸릴 길을 열차로 한 시간 만에 갔다고 하니, 당시 사람들에게는 신세계나 다름없었겠다.
인천역 광장 맞은편에는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 시에서 기증한 패루가 화려한 단청을 뽐내며 서 있다. 패루 사이로 차이나타운의 ‘T’자형 대로가 보인다. 차이나타운 골목마다 붉은색으로 치장한 대규모 중식당과 중국 간식 상점, 기념품점이 즐비하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개항 후 중국 산둥성에서 건너온 화교들이 살기 시작한 곳이다. 이때 정착한 화교들이 중국요리점을 열고, 한국인 입맛에 맞는 자장면을 개발했다고 한다. 자장면의 대명사로 불렸던 ‘공화춘’의 우희광 씨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1983년에 문을 닫은 공화춘은 30년 뒤인 2012년에 ‘짜장면박물관’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옛날 공화춘의 인기는 신승반점, 만다복, 연경, 중화원 등이 잇고 있다. 차이나타운에서 중국 요리 외에 화덕 호떡인 옹기병과 월병, 홍두병, 공갈빵 같은 중국 전통 간식도 재미 삼아 먹어볼 만하다.
뜨거운 옹기병을 뜯어 먹으며, 차이나타운 중간 지점에 있는 선린문(제3패루)으로 향한다. 3개의 계단을 지나 마지막 계단 위에 우뚝 세워진 선린문은 차이나타운 최고의 포토존이다. 선린문을 통과해 다시 계단을 조금 오르면 자유공원 입구와 만난다. 왼쪽 길에 초한지 벽화 골목이 있고, 오른쪽 길은 자유공원 산책로와 연결된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인천 근대사 이야기
자유공원은 1888년 응봉산에 건립된 국내 최초의 서구식 근대공원이다. 공원 초입에 있는 석정루에 올라 인천 앞바다와 월미도를 조망하고, 한미수교 100주년(1982년)을 기리는 기념탑과 한국전쟁 영웅으로 알려진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둘러본 뒤, 제물포구락부로 이동한다. 제물포구락부는 자유공원과 이어진 계단 중간에 있다. 이곳은 개항 당시 제물포에 거주했던 독일, 미국, 러시아, 일본인들의 사교장이었다. 하얗게 회칠한 외벽과 고풍스러운 홀이 인상적이다. 제물포구락부와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도 거리가 가깝다. 이 계단은 일본과 청나라가 각각 조계지를 설정하고, 영역을 구분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계단을 경계로 북성동 쪽은 청나라의 차이나타운이, 신포동 쪽은 일본 건축물이 들어섰다. 계단 양쪽에 세운 석등조차 중국식과 일본식으로 구별돼 있다. 계단 상단의 공자상도 중국 쪽으로 약간 치우쳐 세워졌다. 외국인들이 조선 땅을 땅따먹기하듯 갈라놓은, 어처구니없는 역사의 현장이다.
청일조계지 계단을 내려와 왼쪽, 중구청(옛 일본영사관)으로 가다 보면, 일본 적산가옥과 일본제1은행, 구 일본18은행과 같은 근대건축물이 모여 있는 개항장 거리를 만난다. 차이나타운처럼 이국적인 분위기다. 거리 입구에 있는 중구생활사전시관은 1888년에 개업한 국내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의 외관을 되살려 지은 건물이다. 귀부인이 머물렀을 법한 객실과 1960~70년대 인천 중구의 의식주 생활공간을 실감나게 재현했다. 나무 전봇대가 세워진 골목길과 문방구, 백항아리집(선술집), 극장, 다방, 의상실, 이발소 등 추억을 부르는 풍경이 마냥 반갑다.
전시관 옆 개항박물관은 옛 일본제1은행을 개조한 것이다. 1883년에 건축한 르네상스풍의 석조 건물로서 일본영사관의 금고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들어온 우표와 우편물, 우체통, 전보와 전화기, 경인선 기관차 모형 등을 전시하고 있다. 같은 라인에 있는 근대건축전시관은 일본제18은행 건물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나가사키 상인들이 상해에서 수입한 영국 면직물을 한국에 수출해 큰 이익을 얻자, 인천에 은행 지점을 세운 것이다. 이곳에서 개항장 일대에 현존하는 근대건축물과 소실된 건축물의 모형을 볼 수 있다.
인천과 서울을 연결했던 싸리재 고갯길
개항장 거리를 지나 먹거리 성지인 신포국제시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신포시장은 인천 개항 이후 형성된 인천 최초의 근대적 상설시장이다. 19세기 말 화교 농민들이 산둥성에서 채소 씨앗을 가져와 키워 시장에 내다 판 것이 신포국제시장의 시초라고 한다. 역사가 깊은 만큼 먹거리도 풍성하다.
쫄면의 탄생지도 신포시장이며, 신포순대, 신포만두의 고향도 이곳이다. 주먹으로 깨 먹는, 단단한 공갈빵과 매콤한 맛을 강조한 신포 닭강정의 인기는 말할 것도 없다. 닭강정을 사려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골목 안이 새까맣게 보일 정도다.
시장 골목 끝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국내 성당 중 가장 오래된 답동성당과 국내 최초의 극장인 애관극장을 만날 수 있다. ‘보는 것을 사랑한다’는 뜻을 지닌 애관극장은 1895년에 ‘협률사’라는 이름으로 설립됐다. 1920년대부터 애관극장으로 불리며, 복합상영관이 주름 잡는 이 시대에도 꿋꿋하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시설은 여느 극장과 비슷하고, 상영작도 같다.
흐뭇한 마음으로 애관극장을 구경하고, 동인천역으로 내려가는 고갯길, 싸리재를 걷는다. 옛날에 이 길에 싸리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낙후한 거리가 되었지만, 1920년대 말부터 70년대까지만 해도 병원, 한약방, 약국, 양화점, 포목점 등이 즐비했던 곳이다. 서울 명동 못지않은 상권을 자랑했다고. 옛날 양복점과 병원 건물과 기록 사진만이 싸리재의 옛 영화를 증명한다.
최근, 뉴트로 열풍에 힘입어 싸리재의 아날로그 정취가 돋보인다. 그 중심에 ‘싸리재’ 카페가 있다. 지은 지 90년 된 목조 카페에서 노부부가 커피를 내린다. 카페 안쪽에는 노부부의 100년 된 한옥 살림집이 있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부부는 수집한 축음기로 레코드판 음악을 들려준다. 마침 퀸의 ‘보헤미안랩소디’가 흘러나와 한껏 흥에 젖는다. 바리스타인 박차영 대표에게 메뉴 추천을 부탁하니 자신이 개발한 ‘커피봉봉’과 ‘싸리재’를 권한다. 모든 커피를 모카포트로 내려준다. 쌉싸래한 에스프레소와 달콤한 연유, 촉촉한 생크림의 조화가 감미롭다. 싸리재의 빈티지한 분위기와 포근하게 손님을 맞이하는 노부부가 두고두고 기억날 것 같다. 싸리재 카페에서 동인천역은 멀지 않다. 전철을 타기 전에 송현동 순대 골목이나 화평동 냉면 거리, 동인천 삼치 거리에서 요기를 해도 좋겠다.
주변 명소 & 맛집
신승반점과 명월옥
공화춘은 1983년에 폐업했으나 우희광 씨의 자손들이 공화춘의 손맛을 이어가고 있다. 우희광 씨의 외손녀가 운영하는 신승반점이 그곳. 신승반점의 인기 메뉴는 돼지고기와 채소를 갈아 춘장과 볶은 유니자장면이다. 달지 않으면서 감칠맛 나는 자장 소스와 부들부들한 면발이 입맛을 당긴다. 흰 자장면이 궁금하다면 만다복(032-773-3838)을, 맛있는 짬뽕을 먹고 싶다면 복림원(032-773-8778)을 추천한다. 한식은 신포시장 가는 길목에 있는 백반식당, 명월집이 잘한다. 1966년에 개업한 식당이다. 7000원짜리 백반에 밑반찬만 열 가지. 여기에 곤로 위에서 푹 끓인 돼지김치찌개와 누룽지도 양껏 먹을 수 있다.
신승반점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로44번길 31-3, 매일 11:00~21:00
명월옥 인천 중구 신포로23번길 41, 07:30~19:30(일요일 휴무)
송월동 동화마을
송월동 동화마을은 차이나타운과 이어져 있다. 2013년 마을 주거환경개선사업을 통해 세계명작동화를 주제로 마을을 예쁘게 꾸몄다. 입구의 아치문을 통과하면, 알록달록한 동화 속 세상이 펼쳐진다. 골목마다 도로시길, 빨간모자길, 전래동화길 등 테마가 있다. 동화 캐릭터 입체 조형물이 많아 곳곳이 포토존이다. 이 마을이 개항기 때 독일, 일본, 프랑스인들이 살았던 부촌이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인천 중구 자유공원서로37번길 22(연중무휴)
짜장면박물관
1908년 차이나타운에 개업한 중식당, 공화춘의 내부를 개조해 2012년에 개관했다. 전시물을 통해 화교와 자장면의 탄생기, 전성기, 자장라면의 역사 등을 알 수 있다. 1930년대 공화춘 접객실, 1960년대 공화춘 주방을 실제 크기로 재현했다. 졸업식이나 운동회 날에 부모님과 자장면을 먹으러 갔던 추억이 떠오른다. 공화춘 건물은 중국 산둥 지방의 장인이 참여해 중국식으로 지었으며, 2006년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로 56-14, 09:00~18:00(월요일 휴관)
걷기 Tip
❶ 차이나타운은 골목이 많으므로 인천역 앞에 있는 관광안내센터에서 지도를 받아, 갈 곳을 미리 표시해두는 게 좋다. 송월동 동화마을을 코스에 넣는다면, 맨 먼저 들르자.
❷ 신포시장까지만 걷는다면, 수인선 신포역에서 전철을 타면 된다.
❸ 개항박물관, 짜장면박물관, 중부생활사전시관, 근대건축전시관, 한중기념관 등 5개 전시관 통합관람권을 구매하면 입장료를 아낄 수 있다. 통합관람권 어른 3400원. 매달 마지막 수요일 문화의 날에는 입장료 무료.
때론 유명인사의 죽음이, 사인이 된 질환에 대한 선입견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다. 최근 재조명되고 있는 프레디 머큐리의 에이즈나 스티브 잡스가 걸린 췌장암이 대표적이다. 콩팥병이나 혈액투석과 관련한 이야기를 할 때, 중장년들은 신부전증으로 유명을 달리한 가수 배호를 떠올린다. 비싼 병원비 때문에 힘들어했다는 사연이 전해지면서 이 병은 집 기둥뿌리 뽑아 병원비를 대야 할 만큼 치료비가 비싸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하지만 배호는 혈액투석과는 거리가 있다. 그는 1966년 사망했는데, 국내에 인공신장기가 처음 도입된 시기는 1965년 수도육군병원에서였다. 일반인이 쉽게 혈액투석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전문의들 또한 이런 선입견에 반기를 든다. 신장병은 치료비 부담이 크지 않고, 삶의 질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대구로병원 신장내과 권영주(權映珠·57) 교수를 만나 만성콩팥병 치료에 대해 들어봤다.
“일본에선 혈액투석하며 30년 넘게 건강한 분도 많아요.”
만성콩팥병이 절망적인 병은 아니냐는 질문에 이런 답변이 돌아온다. 권 교수는 “실제로 대다수의 사람이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는 경우가 많지만 현실에서는 충분히 관리가 가능하고 금전적으로 부담이 큰 병도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고혈압과 당뇨병이 주요 원인
신장병은 대부분 신장을 이루는 기본 단위인 사구체에 이상이 생겨 발생한다. 사구체는 혈액을 여과하는 모세혈관 덩어리다. 이곳에 염증이 발생하는 것이 사구체신염이다. 이 질환은 신장기능을 감소시키면서 만성콩팥병으로 이어진다. 신장기능 이상이 3개월 이상 지속되면 만성콩팥병이라고 부르며, 그 이전에 호전되면 급성으로 구분한다. 이 병을 일으키는 원인은 또 있다.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고혈압과 당뇨병이라고 권 교수는 설명한다.
“신장이 아주 미세한 혈관으로 이뤄져 있다 보니 고혈압이 신장에 문제를 일으키기 쉽습니다. 또 반대로 사구체신염이 고혈압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거죠. 당뇨병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당뇨병 관리가 제대로 안 되면 신장에 문제가 생기면서 단백뇨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당뇨병 환자가 가장 주의할 것 중 하나는 방심이라고 권 교수는 강조한다. 인슐린 투여나 약물 복용 등으로 혈당관리를 잘해도, 자각증상 없이 만성콩팥병으로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장을 위협하는 또 하나의 복병은 바로 담배다. 혈관에 악영향을 주는 흡연은 손상되기 쉬운 미세혈관으로 구성된 신장에는 상극이다.
노화도 위험요인 중 하나다. 권 교수는 “40세 이상이 되면 신장질환이 없어도 기능이 매년 1%씩 감소하기 때문에 고령일수록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식이요법이 치료만큼 중요해
신장기능에 이상이 있는지를 판단할 때 의료기관에선 크레아티닌이라는 성분을 측정한다. 혈중 크레아티닌 농도는 낮고, 요중 농도는 높아야 정상이다. 이 농도를 통해 신장기능의 정도를 5단계로 구분하는데, 3단계 이상을 만성신부전이라 부르며, 가장 심각한 5단계는 신장기능이 정상인에 비해 15% 이하 수준이다. 혈액투석이나 이식수술 등을 고려하는 단계는 5단계다.
권 교수는 “환자가 가장 주의해야 할 시기는 1~2단계”라고 강조한다.
“병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따라 1~2단계에서는 유지가 가능해요. 식이요법을 제대로 따르고 복약을 잘하면 악화되지 않고, 안되어도 절반 정도는 투석이나 신장이식이 필요한 5단계까지 발전하지 않도록 조절할 수 있어요.”
발병했을 때 자각증상은 밤에 소변이 보고 싶은 야간뇨로 나타난다. 신장기능이 저하되면 야간뇨농축기능이 감소해 요의가 자주 느껴지는 것이다.
만성신부전의 치료 과정에서 혈당이나 혈압 조절과 함께 의료진이 가장 주의를 주는 부분은 바로 ‘식이요법’이다.
“만성콩팥병의 정도에 따라 나뉘는데, 1~2단계에선 단백질과 소금을 제한해야 하고, 3단계에서는 칼륨 섭취를, 4단계부터는 인 섭취를 줄여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어렵더라도 만성콩팥병 치료에서 소금 조절은 심장상태에 따라 필수입니다.”
소금을 피해야 하는 이유를 권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혈액투석을 받던 환자가 사망하는 원인은 크게 감염과 심혈관 질환 두 가지입니다. 혈압이 높아 심혈관을 보호하기 위해 이뇨제를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뇨제는 마치 젖은 수건을 짜듯 신장에 무리를 줘요. 그래서 이뇨제 투여를 최소화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싱겁게 먹는 게 중요합니다.”
권 교수가 말하는 칼륨 피하는 방법은 이렇다. 야채는 데쳐먹고 줄기 채소는 줄인다. 생야채는 하루 열 잎 이내로 찬물에 오래 담갔다가 먹고, 사과, 호박은 껍질을 벗겨 먹는다. 바나나와 토마토는 피한다.
투석비용 많게는 월 30만 원 정도
신장기능이 정상의 10%로 이하로 떨어지거나 영양실조, 요독증상이 심해지면 병원에서는 신대체요법을 고려한다. 신대체요법이란 환자의 신장기능이 떨어져 신장 대신 혈액 속 노폐물을 배출하는 치료법을 말한다. 투석이나 신장이식이 여기에 속한다.
투석은 크게 두 가지, 집에서 환자 스스로 가능한 복막투석과 의료기관의 장비를 이용한 혈액투석이 있다. 복막투석은 상대적으로 비용이 저렴하고, 병원을 자주 찾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다. 투석에 필요한 물품만 챙겨 가면 장기 해외여행도 가능하다. 그러나 투석 과정에서 잘못 조치하면 감염 등의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반면에 혈액투석은 조치를 병원의 의료진이 해주기 때문에 환자의 부담은 적지만 대신 비용이 높다.
가장 중요한 비용 부분은 국민건강보험 혜택을 받게 되면서 환자의 부담이 많이 줄었다. 환자는 전체 치료비의 10% 정도만 내면 된다. 혈액투석 본인 부담금은 월 20만~30만 원 정도, 복막투석은 15만~20만 원 선이다.
신장이식은 가족 중 기증자가 없으면 뇌사자의 신장을 기증받는데, 국내 뇌사자 장기기증이 활발하지 않아 어렵다. 기증자가 나타나면 이식받을 환자 후보군을 등록 시점 등을 고려해 복수로 선정 한 뒤 최종 결정하는데, 처음 후보군에 오르기까지 4년에서 6년 정도 걸린다. 수술 비용은 1500만 원 내외다.
“그래도 심장, 간, 폐 등 주요 장기 중에 기능이 거의 멈춰도 대체 방법을 통해 일상생활이 가능한 것은 신장밖에 없어요. 환자 중엔 투석을 받으면서도 택배일 등 직장생활을 하는 환자도 있습니다. 대체요법을 고려할 정도로 신장기능이 악화되어도 희망을 버리면 안 돼요. 낙담하지 말고 힘을 내셨으면 합니다.”
대법원이 일할 수 있는 나이를 60세에서 65세로 연장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늘어난 것 등이 이유라고 했다. 일할 수 있는 나이 60세 기준은 평균수명이 남성 67세, 여성 75.3세였던 30년 전 판결이므로 지금은 수정되어야 하는 게 맞다고 본다. 이제 평균수명은 남성 79.7세, 여성 85.7세로 당시보다 10년 이상 더 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할 수 있는 나이와 일해야 하는 나이는 구별해야 한다. 경제적으로 더 벌어야 하거나 봉사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더 일해도 된다. 그러나 일만 하다가 죽을 수는 없다. 일을 하면 수입이 생겨 경제적으로는 도움이 되지만, 개인의 삶에서는 그만큼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다.
나는 50세에 퇴직한 뒤 60세까지 개인 사업을 했다. 60세에 일을 접은 것은 성과도 없는데 살아남기 위해 더 투자를 하고 혹독한 고생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해외 박람회에도 열심히 쫓아 다니면서 바이어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생산기지였던 중국의 최저 임금이 너무 급격히 올라 베트남,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등을 새로 개척해야 했는데 엄두가 안 났다. 그래서 사업을 과감히 접었다.
개인 사업을 할 때는 지인이 많아 큰 도움을 받았지만 협의를 하기 위해 실무자들을 만나면 내가 직책도 높고 나이가 많아 대하기 어렵다면서 젊은 직원을 보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실적이 불규칙해서 사람을 고용할 수도 없는 1인 기업이라서 젊은 직원을 따로 둘 수가 없었다. 몇 달간 얼굴도 모르고 메일만 주고받았던 해외의 한 바이어는 막상 내 얼굴을 보자 나이 때문인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중에 그 바이어에게 경쟁사의 젊은 여성이 드나드는 것을 알고 일을 그만둘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갑질하는 젊은 바이어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것도 힘들었다. 영업을 하면서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의 나이가 젊어서 내가 활동하던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60세 이후부터는 인생 2막의 삶을 시작하며 생활 방식을 바꿨다. 취미 활동과 사회봉사 활동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지인들 중에는 그 시기에 고인이 된 사람도 많아 인생이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00세 시대라지만, 지금 시니어 중 100세까지 살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들의 건강수명은 남성 64.7세, 여성 65.2세다. 그 이후는 삶의 질이 떨어져 인생을 제대로 즐기기 어렵다.
얼마 전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오면서 느낀 점은 힘든 여행은 이제 다니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여행길에 동행할 사람을 찾아봤지만 모두 손사래를 쳤다. 나는 그나마 잘 다져놓은 체력 덕분에 무사히 다녀왔으나 지인들은 내 걱정을 많이 한 모양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더 늦기 전에 여행길에 부지런히 나설 것을 권하고 싶다. 70대 중반만 되어도 여행사에서 꺼려한다는 얘기도 있다. 아직 체력이 받쳐주므로 먼 곳부터 먼저 다녀오고 더 나이 들면 가까운 곳을 여행할 작정이다.
1월에 히말라야에 다녀왔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가 4130m이니 태어나서 가장 높은 곳에 갔다 온 셈이다. 고생길이었으나 여행의 맛을 제대로 알게 됐다. 또 가고 싶으냐는 질문에는 “노!”라고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히말라야에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간 사람은 없다”는 말이 있을 만큼 매력적이다.
그 뒤 엉덩이가 자꾸 들썩이는데 이번에는 아프리카 여행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빅토리아 폭포를 보는 것이 하이라이트이고 보츠와나, 남아공, 잠비아, 에티오피아 5개국을 10일 동안 다녀오는 여정이다. 기본 경비는 480만 원. 생각한 것보다 싼 편이다. 추가 경비로 가이드 기사 팁 120달러, 비자 비용 100달러, 빅토리아 폭포 헬기 투어 165달러, 크루거 국립공원 야간 게임 드라이브 80달러를 준비하면 되고 생수를 사거나 팁을 줄 때도 약간의 돈이 필요하다. 이참에 집에서 가장 먼 아프리카에 가보자는 결심이 섰다.
이번에도 같이 갈 사람을 섭외해봤는데 실패했다. 비용도 부담되고 장시간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그렇게 고생하면서까지 굳이 아프리카 여행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돈이면 유럽 등 편한 여행을 하겠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 갈 기회가 자주 생기는 것은 아니다. 유럽 여행은 이미 여러 번 가봤고 앞으로도 갈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쉽게 가기 어려운 지역이다. 또 대자연을 감상하며 여행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황열병 예방주사를 맞아야 하는 일은 물론 부담스럽다. 부작용으로 고생한 사람들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나 앞으로 남미 지역 여행을 하려면 어차피 황열병 예방주사는 맞아야 하므로 맞기로 했다. 예방 백신 접종 증명이 없으면 아예 입국이 안 되는 나라가 몇 개국 있다. 황열병은 모기로 인해 감염되고 사망률이 25~50%에 이른다 한다. 말라리아, 뎅기열도 모기가 일으키는 질환이다. 말라리아는 예방 백신이 없고 단기 여행자는 여행 2일 전부터 귀국 7일 후까지 매일 말라톤이라는 약을 복용해야 한다. 뎅기열도 백신이 없다.
국립중앙의료원에서 황열병 예방 백신을 맞으려면 일주일 전에 예약해야 한다. 생백신이라 보관 유효기간이 짧기 때문이다. 일주일 전에 예약하고 가야 해서 번거로웠다. 또 행정수수료로 3만2460원을 내고 전자 수입인지를 사야 한다. 인지는 국립중앙의료원 내에 있는 신한은행에서 취급한다. 신한은행에서 줄을 서 기다리는 게 싫으면 다른 은행에서도 발급받을 수 있다. 다만, 취급을 안 하는 은행 지점이 많아 하나은행 을지로 6가점, 신한은행 국립중앙의료원에 문의해봐야 한다.
국립중앙의료원 로비에 가면 8번 창구에 황열병 전용 창구가 있다. 고객대기표를 뽑고 기다리지 말고 바로 8번 출구로 가야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여기서 접수 및 기본 문진표를 작성하고 2층 감염병 센터로 가면 된다. 체온을 재고 진찰실에서 담당의사가 다른 병력에 대해 질문한다. 모두 통과하면 주사실에서 예방주사를 맞는다. 진료비는 1만8880원. 다시 1층 접수창구로 가서 황열병 예방 접종 증명서를 발급받아 여권에 붙이면 끝난다. 단, 주사 쇼크 반응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20분 정도 근처에서 더 시간을 보내라고 권장한다. 이 접종은 10일 후부터 효과가 있으며 평생 유효하다. 그러나 여권을 갱신할 경우 기재사항이 달라지므로 다시 접종해야 한다. 접종 후 부작용은 10~25%로 높은 편이다. 두통, 근육통 등 경미한 증상이 나타나지만, 사람에 따라 다르다. 심하게 고생했다는 사람도 많다. 드물게 뇌염, 신장염, 간염 등 심각한 합병증이 올 수도 있다고 한다. 샤워는 접종 후 12시간 후에 할 수 있지만, 3일간은 음주, 목욕, 격렬한 운동을 피해야 한다.
이외에도 해외 여행자를 위한 예방 접종으로 파상풍, 장티푸스, A, B형 간염, 일본 뇌염 등을 권하는데 나는 일단 황열병 백신만 맞았다.
아들딸과 식사를 했다. 식사 도중 국민연금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나는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이 국민연금에 가입한 것이라 했다. 1988년 국민연금제도가 처음 도입됐을 때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강제로 가입해야 했다. 재직 시에는 회사가 절반의 금액을 내줬으므로 큰 부담이 안 되었다. 그러나 퇴직 후에도 연금보험료는 계속 내야 했다. 나도 힘들었지만 계속 부었다. 그렇게 냈던 보험료가 이제 매달 연금으로 나오니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연금 때문에 자녀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아도 경제적으로 문제가 없다. 월 100여 만 원이 물가상승률에 맞춰 꼬박꼬박 죽을 때까지 나오는 것이다. 국민연금 평균수령액은 50만 원 수준이다. 나는 월 100여 만 원을 수령한다. 공무원 연금 월 200만 원에 비하면 절반의 액수이지만, 국민연금 수령자로서 상위급이다. 아들은 그런 내가 부러운 모양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국민연금이 고갈될 가능성이 많아 울며 겨자 먹기로 보험료를 낸다고 한다. 고갈되지 않는다 해도 연금 수령까지는 너무 많은 세월이 남아 있어 연금을 탄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도 했다.
“월 100만 원이나 받으시면 저축도 가능하겠네요?” 아들이 물었다. 나는 가계부를 작성하지 않아 한 달에 얼마를 어떻게 쓰는지 잘 모른다. 내 답변에 따라 아들에게 보태줘야 할 경우도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리비 30만 원, 보험료 30만 원, 식대 30만 원….” 대충 따져본 금액만 보면 100만 원이 안 되었다. 서울시에서 제시하는 생활임금은 월 200만 원 수준이다. 내 한 달 지출액도 비슷해 보인다. 지출액 중 술값이 가장 큰 금액을 차지한다. 카드결제액이 월 100만 원 정도 되고 한 달에 서너 번 30만~40만 원씩 인출해서 쓰는 금액이 100만 원쯤 되니 대략 그렇다. 물론 해외여행 갈 때 드는 돈은 별도다. 그렇다고 그런 얘기 다 하면 일도 안 하고 수입도 없는데 너무 흥청망청 쓰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죽자사자 일해도 월급을 얼마 못 받는 아들 입장에서 보면 당연했다. 사실은 점심과 저녁도 다 사 먹어 하루 1만5000원 정도를 쓴다. 식대로만 한 달에 45만 원이나 지출이 되는 것이다. 아들은 하루 두 끼를 매식하는 내가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찾아낸 답변이 경조사비다. 아들이 장가갈 때 와준 사람을 300명으로 잡으면 그 사람들 부모, 장인 장모, 아들딸 결혼식 때 갚아야 한다. 부모나 장인장모가 돌아가신 분도 많지만 그래도 이론적으로는 와준 사람 곱하기 6을 해야 한다. 단순 계산을 해도 가야 할 경조사가 1800건이나 되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다 가지 못할 수도 있다. 또 내가 받은 축의금은 물가상승률에 따라 최하 10만 원으로 되갚아야 할지도 모른다. 경조사는 평균 한 달에 세 건 정도 되지만 많을 때는 대여섯 건이 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 사회에서 개선해야 할 점이기는 하지만, 일단 신세를 졌으니 갚아야 한다.
아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스코틀랜드의 긴 역사가 고이 간직된, 천년고도 에든버러. 대영제국이 된 지 300년이 흘렀어도 근원은 스코틀랜드일 뿐이다. 남자들은 킬트 줄무늬 치마를 입고 길거리에서는 백파이프 연주가 흐른다. 스코틀랜드의 민족성과 풍습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이외에도 스튜어트 왕가와 귀족들, 월터 스콧,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흄, 로버트 번스 등 세기의 작가들 흔적이 남아 있다. 회색빛의 고풍스러운 건축물에 서리서리 스며 있는 역사의 이야기는 긴 겨울밤을 하얗게 지새우게 한다.
스코틀랜드의 대문호 월터 스콧 기념탑
에든버러 공항에서 버스를 타면 시내 중심까지 한 시간이 채 안 걸린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탓일까? 아니면 약간 구릉진 언덕 위에 자리를 잡은 고색창연한 건축물들 때문일까? 에든버러 겨울의 첫 느낌은 ‘회색빛’이다. 어쩌면 버스정류장 앞쪽에 우뚝 서 있는 스코틀랜드 대문호인 월터 스콧(1771~1832)의 기념탑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해달라는 스콧의 유언에 따라 시커먼 사암석으로 만든 뾰족한 탑. 61m 높이의 기념탑은 왠지 기괴하고 음산하다. 이 탑을 만들 때, 잉글랜드에 대한 경쟁심으로 영국에서 제일 높은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 기념탑보다 5m 더 높이 올렸다는 후일담이 있다. 287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에든버러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지만 포기하고 스콧 기념탑 아래 프린세스 정원의 국립 갤러리, 로열아카데미를 찾는다. 모두 무료 입장이다. 관광객으로서는 매우 반가운 일. 미술관에 걸린 수준 높은 명화를 마음껏 감상하면서 미소 짓는다.
에든버러의 국교는 장로교
에든버러는 남북을 가로지르는 프린스 스트리트를 경계로 북쪽의 올드 타운과 남쪽의 뉴타운으로 구분된다. 구시가지는 15세기부터 스코틀랜드 왕국의 수도로 행정, 문화의 중심지였다. 신시가지는 18세기 이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조성된 주택, 상업지구. 1985년, 유네스코는 신·구시가를 묶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시선도, 마음도 구시가지에 다 빼앗긴다. 무조건 ‘고성(古城)’을 기점으로 걷는다. 고성까지 걸어가는 길목에서 화폐 박물관, 뉴대학을 만난다. 대학 건물은 해묵은 향기를 뿜어낸다. 토마스 찰머스(1780~1847) 목사의 동상이 있는 이 대학은 스코틀랜드 장로교 교구가 있던 곳. 16세기경, 이곳은 매우 중요했다. 1560년, 스코틀랜드가 국교로 지정한 장로교를 잉글랜드와 미국으로 전파하는 중심지였다.
스코틀랜드-잉글랜드 격전지, 에든버러 성
에든버러 성은 오래전 활동을 중단한 화산 꼭대기(133m)에 있다. 성 뒤쪽은 거대한 바위산이 버티고 있는데 3면이 깎아지를 듯한 절벽을 이루고 있다. 딱 봐도 요새로 최적이다.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동쪽이 출입구. 이 성은 현재 영국군 사령부 역할을 하고 있는데 전통 복장을 한 두 명의 근위병이 성을 지키고 있다. 한겨울에도 킬트를 입은 채 맨살을 보여주는 근위병은 여행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지만 정작 그들은 관광객들의 시선에 무심하다. 에든버러 성은 6세기에 지어졌다는 설이 있지만 정확한 기록은 없다. 1018년부터 조금씩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고 현재의 건물들은 16~18세기 혹은 그 이후에 지어졌다. 이 성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격렬한 투쟁사를 보여주는 현장이다. 수 세기에 걸쳐 여러 차례 성주가 바뀌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수많은 전투를 치르는 동안 이 성은 이긴 자의 차지였다.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조를 끝으로 결국 잉글랜드 차지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성내에는 가장 오래된 12세기 초기의 건축물인 세인트 마가렛 예배당이 있는데 대부분 군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타탄 무늬 제품의 천국 도시
에든버러의 백미는 구시가지 거리 로열마일이다. 에든버러 성과 홀리루드 하우스 궁전을 연결하는 1.6km 남짓의 도로. 과거 왕가에서 쓰던 전용 도로로서 길이가
1마일이나 되어 ‘로열마일’로 불린다. 왕족들만 다닐 수 있는 로열마일 때문에 서민들은 좁은 클로즈 골목을 이용해야 했다. 대로 옆으로 무수한 클로즈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클로즈는 한국의 피맛골 거리와 엇비슷하다. 로열마일 양쪽으로는 역사를 간직한 옛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기념품 숍, 식당, 호텔 등도 무수히 이어진다. 로열마일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은 브로디스(Brodie’s) 클로즈다. 18세기, 낮에는 저명한 인사로 지내고 밤에는 도둑으로 살았던 윌리엄 브로디(1741~1788)의 이름을 따서 붙인 골목이다. 론마켓에서 캐비닛을 만드는 장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낮에는 경건하고, 부유하고, 훌륭한 시민이었다. 1781년에는 시의 조합장(deacon)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밤에는 강도짓과 도둑질을 했고 도박꾼으로 방탕하게 살았다. 그는 두 번째 부인과 살면서 돈을 많이 써댔다. 1786년에는 시립은행의 열쇠를 복사해 800파운드를 훔쳤다. 또 부유한 집안에 일하러 다니면서 열쇠를 따로 복제했다. 주변 상인들도 도둑질에 끌어들였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교활함과 뻔뻔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결국 성 자일스 교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브로디의 이중적인 캐릭터에 영국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1850~1894)이 영감을 얻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라는 작품이 탄생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나 그 진위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 그의 집은 카페로 이용되고 있다.
애덤 스미스 동상과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로열마일의 가장 번화한 광장에 과거 스코틀랜드 국회의사당, 청동 말과 동상으로 만들어진 버클루 공작의 기념비, 애덤 스미스의 동상과 성 자일스 성당 등이 몰려 있다. ‘국부론’으로 잘 알려진 애덤 스미스(1723~1790) 동상은 랜드마크 역할을 한다. 애덤 스미스 동상 앞에 있는 성 자일스 성당(1495년 건립)의 노르만 양식의 탑이 인상적이다. 이 교회는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곳. 종교개혁가 존 녹스는 프로테스탄트 동지를 규합했다. 성당 앞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18세기 시청사가 있다. 시청사 옆 리얼 마리 킹 클로즈는 ‘귀신 나오는 골목’으로 관광 트렌드가 되었다. 이 광장에서 조금 밑으로 내려가면 콕번 스트리트를 앞두고 데이비드 흄(1711~1776)의 흉상이 있다. 흄은 에든버러 근교인 나인웰스에서 태어났지만 에든버러에서 대학을 다니는 등 인연이 깊다. 우여곡절이 많은 그의 인생 이야기가 참 재미있다. 흄은 “철학자가 되어라. 그러나 철학 가운데서도 여전히 인간이어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메리 여왕이 살던 홀리루드 하우스
흄 흉상을 지나면서 길은 한가해진다. 길 끝에 홀리루드 하우스 궁전이 있다. 홀리루드 하우스는 1128년 데이비드 1세가 지은,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성당이었다. 1498년, 제임스 4세의 명에 따라 궁전으로 다시 지었고 1530년대에는 제임스 5세가 자신과 왕비인 기즈의 메리를 위해 탑을 덧붙였다. 1560년대에는 이들의 딸인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가 살았다. 메리는 1565년, 이 수도원에서 사촌 단리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하지만 단리가 살해되자 얼마 되지 않아 남편 살해 용의자 보스웰 백작의 아이를 임신한 채 이 궁전에서 결혼했다. 메리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메리와 단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제임스 6세는 에든버러에 머물 때는 홀리루드 하우스를 이용했으나 1603년, 그가 영국으로 떠난 뒤로 이 궁전은 왕가의 방문이 있을 때만 사용되었다. 2002년에는 왕실이 소장한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퀸스 갤러리’가 만들어졌다.
주인의 무덤 지킨 충견, 보비
에든버러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보비의 동상이다. 존 그레이의 양치기 개 보비. 존은 보비와 여행을 하던 중 병으로 객사했다. 존의 시신은 보비가 지켜보는 가운데 에든버러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 묘지에 묻혔다. 당시 두 살이었던 보비는 죽을 때까지 무려 14년간 매일 밤 존의 무덤을 지켰다. 보비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스코틀랜드 전역은 물론 해외까지 퍼졌고, 에든버러의 아이들은 용돈을 모아 보비에게 목걸이를 선물했다. 보비가 집 없는 개로 오인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잡혀가거나 사살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보비는 개로서는 유일하게 에든버러 시 명예시민권을 부여받았고, 죽은 뒤에는 특별허가를 받아 존 옆에 묻혔다. 보비의 동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해리포터’의 작가인 조앤 롤링(1965~)이 즐겨 찾았다는 카페가 있다. 이혼 후 에든버러에 정착한 그녀는 아이 분유 값을 벌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동화를 쓰기로 결정한 그녀는 집 근처 카페에서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완성했다.
Travel Data
항공편 스코틀랜드까지 가는 직항편이 없다. 인천→영국 런던행 직항편을 이용해 히드로공항까지 약 11~12시간 소요.
교통 런던 빅토리아 코치 역에서 에든버러까지 내셔널익스프레스 버스가 운행된다. 런던 킹스크로스 역에서는 매일 20여 회 기차가 운행된다.
시차우리나라보다 9시간 늦다.
음식 ‘하기스(Haggis)’가 유명하다. 양의 내장을 잘게 다져 곡물과 섞은 것을 양의 위장에 채워 삶은 음식. 스코틀랜드의 전통 요리로서 매시포테이토와 순무를 곁들여 먹는다.
주류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것 중 하나가 스카치위스키다. 몰트위스키와 그레인위스키를 섞어 만드는 블렌디드 위스키가 가장 일반적이고, 한국인들이 즐겨 마시는 종류다.
숙박 게스트하우스, 호스텔 등을 이용하면 된다. 고급 호텔은 25만 원 이상의 비용이 들지만 평균 8만~10만 원대에서 이용 가능하다.
화폐 파운드
여행 포인트 시간 여유를 갖고 북부 고지대에 있는 ‘하일랜드(Highland)’ 지역을 연계하면 좋다. 에든버러 시내 여행사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히말라야 트레킹 때문에 네팔이라는 나라에 처음 갔다. 네팔은 한반도의 약 70% 정도 면적이며 인구는 대략 3000만 명이다. 인도, 중국, 부탄, 방글라데시에 둘러싸여 있는 내륙 국가다. 1인당 GDP가 2011년 기준으로 835달러에 불과한 빈국이기도 하다. 한국에 약 5만 명의 네팔 근로자가 와 있으며 한 해에 1만여 명이 입국을 대기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경쟁률이 8대 1이나 되어 한국행도 쉽지 않다고 했다. 전 인구의 90%가 농업에 종사한다. 종교는 대부분 힌두교를 믿는다. 세계 10대 고봉 가운데 8개를 보유한 산악 국가라 등산을 좋아하는 한국인이 2017년 기준 약 5000명이나 다녀갔다고 한다. 트레킹 비수기인 지금도 오가는 사람들이 온통 한국 사람이다.
이번 히말라야 트레킹 프로그램에는 네팔 시내 관광도 있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찍고 3일간 하산한 후에 포카라 시와 수도 카트만두 시내를 관광했다. 포카라 시는 그나마 좀 나았으나 카트만두 시내는 그야말로 먼지구덩이 속 같았다. 1월이 건기라서 더 그랬겠지만 마치 밀가루 같은 흙이 비산하며 먼지를 일으켰다. 서울도 미세먼지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카트만두는 마스크 없이는 돌아다니지 못할 정도였다. 서울은 먼지를 쓸어내는 살수차가 다녀서 깨끗한 편이다. 그러나 카트만두는 엉망이다. 2015년 7.8도의 강진이 지나간 후 도시도 많이 파손되어 있었다. 세계문화유산들도 거의 절반이 이때 파괴되어 복구 중이다.
네팔이 행복지수 세계 3위 국가라는 사실이 내 관심을 끌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현지 가이드는 한국에서 10년간 일하면서 한국과 네팔을 비교해봤다고 했다. 네팔 사람들은 욕심이 없다고 했다. 너무 열심히 일하는 한국 사람들에 비해 네팔 사람들은 얘기하는 것을 좋아해서 일의 능률이 안 오른다고 덧붙였다. 우리 일행은 산촌의 한 학교에 컴퓨터 12대를 기증했다. 50년 역사에 컴퓨터 구경은 처음이라고 했다. 시장과 내외빈이 많이 참석했다. 그런데 공연을 포함한 축사가 무려 3시간 동안 이어졌다. 현지 가이드는 5분이면 충분할 축사를 각자 20~30분씩이나 하는 현장 사례를 들어 네팔인을 설명했다. 네팔 사람들은 순박한 편이다. 한국에 5만 명이나 와 있는데도 큰 문제 없이 조용히 일하고 있어서 우리가 잘 몰랐던 것이다.
카트만두에서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박타푸르를 방문했다. 사원 및 여러 유적들이 있는데 이곳도 지진으로 파손되어 복구 중이었다. 좁은 골목에는 오토바이와 트랙터가 복잡하게 오가서 정신이 없었다. 시내 몇 곳을 더 다녔는데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것이 모두 사원이었다. 네팔인들이 이마 한가운데 그리는 빨간 점은 ‘제3의 눈’이라 한다. 부처님이 보고 있다는 의미라 했다. 누구나 그렇게 신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티베트 난민촌을 돌아보고 중국이 무자비하게 티베트를 공격한 역사로 볼 때 네팔도 중국의 눈치를 많이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네팔도 중국이 공격할 수 있는 것이다. 인도도 이웃 대국이라 눈치를 본단다. 오일 등의 공산품을 인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르카’라는 네팔 용병은 용감하기로 유명하다. 시내에서 구르카 용병들이 사용하는 칼을 파는 가게가 많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구르카다’라는 서양 작가의 소개 글과 함께 구르카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이들 용병들이 해외에서 번 돈으로 히말라야의 계곡에 여러 개의 다리를 만들어 기증했다는 표석도 붙어 있다.
네팔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왕정국가였다. 지금은 민주공화국이다. 반군이 10년간 산에 숨어 살며 내전을 일으키기도 했다. 워낙 고산이 많아 호랑이, 곰 등 맹수가 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산속에 숨어 살던 반군들 덕분에 맹수가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히말라야 눈이 녹은 물은 당연히 1급수라 생각하고 마시고 싶었으나 풍토병이 우려되니 마시지 말라고 했다. 수력발전으로 전기를 만들고 있지만 전력 사정이 열악하다. 숙박업소인 롯지에서 휴대폰 충전료로 2000원 정도를 받고 있을 정도다.
오래전 재미있는 보도를 접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시험에서 “다음 중 가구가 아닌 것은?”이란 질문에 많은 아이들이 ‘침대’라고 답한 것. ‘침대가 가구가 아닌 과학’이라고 강조했던 인기 광고 영향이었다. 아이들의 이유 있는 오답에 어른들 또한 웃으면서 수긍하고 말았다는 미담이었다. 이 희대의 사건(?)을 빚어낸 주인공을 만났다. 걸어온 길이 한국 광고계의 역사였다고 말해도 아깝지 않은 이 사람, 신강균(申橿均·67). 은퇴했다는데 매일 시간을 쪼개야 하는 연예인급 스케줄에 인터뷰 시간 맞추느라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속내 먼저 털고 인터뷰로 들어갔다.
60대 과즙미가 뿜뿜 터지는 사람
사진에서 느껴지는 저 중후함을 보라. 이제 막 은퇴 3년 차에 접어든 사람. 산책을 하고 조용히 커피를 마시고 사색을 즐길 것만 같은가? 오산이다. 인생 뭐 있나. 생기발랄 여기저기 안 걸친 데가 없다. 그래서 별명이 걸침이다. 시낭송은 기본이요, 판소리도 모자라 남도와 경기민요를 오간 지도 7, 8년쯤. 요리하는 요시남(요리하는 시니어 남자), 가야금, 대금, 피리, 댄스, 캘리그래피 등이 취미이자 요즘 하는 일이다. 카카오톡 프로필은 자화상, 배경화면은 길게 뻗은 고속도로 중앙선에서 발랄하게(?) 뛰어오른 모습이다. ‘지금이 좋다’는 문구도 함께 적혀 있기에 물었다. 그래서 지금이 좋으십니까?
“벨기에 학자 말에 인생의 행복 곡선이 U자 모양으로 됐답디다. U자에서 제일 밑이 30, 40대래요. 밥벌이도 해야 하고 자식들도 키워야 하니까. 행복감이 다시 회복되는 게 60대 이후라던데 김형석 교수님도 ‘백년을 살아보니’에 쓰셨더군요. 나도 지나고 보니까 지금이 딱 좋아요. 왜? 일의 터널에 있다가 빠져나와 나만의 시절을 사니까요. 지금 내 시간이 온전하게 딱 생긴 겁니다. 그렇죠?”
거절 받을 용기, No는 Yes의 신호
신강균 씨의 공식적인 이력은 광고대행사 오리콤에 입사해 기획이사까지 지낸 22년, 그리고 한세대학교 광고홍보학과 교수 생활 18년이 전부다. 얘기를 듣다 보니 번외 이력 하나가 더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힘들다는, 영어로 된 백과사전 영업사원을 했어요. 경영대학원 다닐 때 스스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죠.”
다짜고짜 팔아야 했다. 당시 영업지역장이 웅진그룹의 윤석금 회장. 그가 지역을 정해주면 청계천이든 탄광촌이든 사람이 있는 곳이면 달려가 영업을 했다.
“무조건 일대일이었어요. 영어 새카맣게 모르는 노동자들에게도 팔았어요.(웃음) 영어로 된 명함 주고 가면 ‘뭐야 이게?’ 하는 반응이었죠. 열 번째 가면 ‘고생하쇼’, 스무 번째 가면 ‘물이나 한잔 들고 가슈’ 했죠. 거절당하는 훈련을 했던 거예요. 세일즈의 기본은 거절. 그러나 ‘노’는 ‘예스’의 또 다른 신호입니다.”
못 팔면 버스비가 없어 영등포에서 청량리까지 걸어서 귀가했다. 두 군데만 더 가보자 하고 약국에 들렀다가 백과사전을 팔기도 했다. 그때의 경험이 광고계에 입문해서도 큰 자산이 됐단다. 어떻게 하면 상대가 지갑을 열 것인가 고민하고 설득의 방법을 배우던 시간이었다.
광고계를 들었다 놨다 하던 시절
“광고회사도 내 발로 찾아 들어갔어요. 그때 광고계 대가이셨던 신인섭 씨를 찾아가 광고일을 하고 싶은데 어디가 좋겠냐고 물었죠. 학구적인 곳이라면서 오리콤을 추천해주시더군요. 그래서 오리콤으로 갔죠. 안내데스크에서 내가 여기 들어와야 하는데 누구를 만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차장급을 만나게 해줬어요. 결국 국장까지 대면했습니다. 마침 두 달 후에 경력 사원을 뽑는다기에 응시했죠. 대학원 졸업을 경력으로 인정해주던 때였거든요.”
광고계에 발을 들인 신강균은 신나고 강렬하게, 균형 잡힌 광고를 쏟아냈다. 유한킴벌리의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OB라거의 ‘라라라’, 대우전자 ‘봉세탁기’ CF 등 한국 광고계에 길이 남을 작업을 했다. 특히 침대를 가구의 영역을 넘어 과학과 건강으로 해석해낸 에이스침대 광고는 사회적 인식 전환에 크나큰 기여를 했다.
“당시 가구회사에서 침대를 생산하다 보니 침대 전문회사가 하향세를 타고 있었습니다. 이사할 때 가구 바꾸면서 침대를 세트로 바꾸는 거지. 침대 회사에서 봤을 때 환장할 일이죠.”
에이스의 침대공학연구소에 가보니 엄청난 무게가 나가는 쇠공을 침대 스프링 위에 8만 번 떨어뜨리며 연구를 하고 있었다. 매트리스 스프링이 몇 mm가 줄어도 폐기처분했다. 이 모습을 보고 난 뒤 ‘침대는 과학이다’라는 광고 카피가 탄생했다. 말 그대로 광고계를 휘젓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칸 광고제 동사자상을 받은 것은 물론 런던광고페스티벌에서도 그의 이름이 불렸다. 한국광고대상은 안방 드나들 듯하며 받았다.
인생은 3·7제다
지금도 광고주 앞에서 발표한 뒤 깨지는 꿈을 종종 꾼다는 신강균. 일에만 미쳐 살았으니 어디 소홀한 데도 있지 않았을까?
“내 신조가 3·7제입니다. 인생의 70%는 열심히 일하면서 조직에 충실하고 30%는 자기계발하자. 회사로 치면 자기만의 기획실이 필요한 겁니다. 그런 사람이 조직이 필요로 하는 인재가 되는 겁니다.”
출근 전 시간을 활용해 영어학원에도 다녔다. 전날 술을 새벽까지 마셨어도 어김없이 일어나 영어학원에서 공부하고 회사에 갔다.
“8시 반에 시간 맞춰 출근하면 끌려가는 기분인데 내가 하고 싶은 걸 앞서 하고 가면 자발적으로 나가는 거죠. 아침에 일어나는 게 다를 수밖에 없어요. 오늘 가서 뭔가 배워야지. 설득에 있어서도 자발성이 중요하거든요. 자발성 욕구를 자극하는 거요. 저를 위한 취미도 많이 했어요. 사물놀이도 하고 말이죠.”
주말이 되면 회사 일은 접고 무조건 가족들과 함께하는 아빠였다. 텐트를 가지고 홍도로 선유도로 해외로 이곳저곳 참 많이도 다녔다. 대학교수 시절에도 제자들과 각종 연수를 함께하면서 눈높이 교육을 했다. 취업률 성과 말고 제대로 성장하고 자생할 수 있는 제자 양성에 집중했다. 가르쳤던 학생의 70%는 광고계에서 일하고 있을 정도이니 나름 제자 농사는 잘 지은 셈.
“제자들이 지금도 술 사달라며 연락하는데 내가 바빠서 스케줄을 못 잡아요.(웃음)”
맞벌이 부부의 진정한 은퇴식 세계일주
작년 2월 교직에서 물러난 아내와 7개월여 세계 일주를 하고 돌아온 신강균. 정년퇴임한 아내가 쓸쓸해하지는 않을까 걱정돼 먼저 퇴임한 신강균이 다양한 취미생활에 매진하면서도 여행 준비를 해놓았다.
“작년 3월 9일에 딱 출발했어요. 캠핑 텐트 가지고요. 프랑스 파리에서 120일 정도 차를 빌려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전역을 돌았어요. 그다음엔 배로 건너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스위스에서 트레킹하고요. 주로 산으로 들로 걸어 다녔어요.”
매일 5시간 이상 산을 오르고 캠핑장에서 텐트치고 밥 해먹어가며 여행했다.
“호텔에서 거의 자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호텔은 100달러 이상 비용이 드는데 캠핑장은 20달러면 샤워도 할 수 있어요. 그리고 호텔에 가면 손님인데 캠핑장에서는 우리가 주인입니다. 왜 비싼 돈 주고 손님 노릇을 해요.”
인생 목표는 황진이처럼 살기
신강균이 부부 세계일주 여행을 마치고 도전한 것은 바로 영화다. 서울대학교 총연극회 후배인 배우 정진영이 직접 쓰고 연출한 독립영화에 캐스팅돼 꽤 많은 분량을 소화하며 영화 연기에 도전했다. 이번 기회에 영화판에도 기웃거려볼까 생각한다며 호탕하게 웃는다.
“황진이가 제 목표예요. 시·서·화·창(詩·書·畵·唱) 그리고 악기, 무용까지 다 하는 것이죠. 인생은 한 번뿐이고 아침에 눈을 뜨는 자체가 늘 고마운 일이죠. 그런데 까닥 잘못하면 너무 오래 살 수도 있어요.(웃음) 일본에서 100세 노인한테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게 뭔지 물었대요. ‘이렇게 오래 살 줄 알았다면 일흔 살에 30년 계획을 세웠을 텐데’라고 했답니다. 저는요, 30년 계획은 욕심인 것 같고 20년 계획은 세워뒀습니다.”
50년이나 이어온 동네 친구 4명의 우정이 깨졌다. 일단 나 먼저 단톡방에서 탈퇴하고 개인적으로 절교 선언을 했다. 문제의 발단은 A와 B의 아내들끼리의 대화에서 시작되었다. 오래 된 사이인데 오랜만에 만나 스트레스도 풀 겸 하고 싶은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던 중 A의 아내가 월세 집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은 것이다. 늘 말쑥한 외모에 승용차도 타고 다녀서 전혀 그런 눈치를 못 챘다. 거슬러 생각해보니 차를 두고 전철로 출퇴근하니 좋더라, 해외여행은 돈이 너무 든다 하며 브레이크를 걸던 일들이 있었다. 형편이 어려워서 그랬던 모양이다.
B는 성격이 직선적이고 급한 편이다. 친구들이 만난 자리에서 “너 월세 산다는데 무슨 얘기냐?“라고 물은 것이다. 자존심 센 A는 부인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대답도 못하고 좌절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리고 왜 여러 사람 있는 데서 큰 소리로 꼭 그렇게 물어야 했는지 의문을 가졌다. B는 청력이 안 좋아 목소리가 늘 큰 편이다. 그래서 그날도 큰 소리로 말했다.
얼마 전 미국에 사는 친구 C가 왔다 갔다. 이번에는 얼마 못 살 것 같다는 등 행동이 좀 달라 보였다. 어릴 때 봤던 A의 형제들도 함께 불러 저녁식사를 대접하는가 하면, A와 B 부부를 불러 함께 식사자리를 만들기도 했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2월 미국 여행에 나는 빼고 두 부부만 초청한 것이다. 새로 산 벤츠가 5인승이라 나까지 탈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A의 아내가 옛날 얘기를 하던 중 내가 가면 자기가 빠지겠다고 했다. 그러나 B가 들을 때는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며칠 후 B가 할 얘기가 있다며 나를 따로 불러 C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두 친구를 유언집행자로 지정할 테니 그런 줄 알라고 했다는 것이다.
친구 A가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친구 B가 내게 얘기를 다 했다고 털어놨다는 것이다. 혼자 마음의 정리는 하고 나갔다. 미국에 사는 친구 C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내가 이해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었다. 차분하게 자초지종을 얘기하는 A와 긴 시간을 얘기하다 보니 섭섭하지만, 나만 빠지면 되는 일이었다. A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다 보니 여러 일들이 자꾸 틀어진다며 양해를 구했다. B가 내게 C의 이야기를 전하지만 않았어도 그냥 넘어갈 일이었다며 원망했다. 그러고는 그동안 계속 충돌했던 일들에 짜증을 내며 B와 절교의 뜻을 내비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단톡방에서 나간다는 말을 남기고 빠졌다. 미국 사는 C의 이름을 보는 순간 더 이상 같이 말을 섞기 싫었기 때문이다. 얘기가 잘됐다고 안심하고 돌아가던 친구 A도 이참에 다 깨버리자며 단톡방을 나갔다. 내년에 C가 다시 한국에 오면, 나는 그를 안 볼 작정이다. A와 B도 같이는 안 만날 것이다. 50년 친구들이 대혼란 속에 휘말린 것이다.
이쯤 살다 보면 친숙함에서 오는 피로감에 싫증이 나는 모양이다. 최근 들어 오래된 친구들끼리 결별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고 한다. 호르몬 변화로 성격도 변하고 건강도 안 좋아지니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이유도 있다. 나이 들면 용서와 화해를 해야 한다는데 실제로는 거꾸로 간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인천성모병원과 함께 ‘백세 건강 챙기는 가정용 의료기 백배 활용법’을 연재합니다. 시니어가 흔히 가정에서 사용하는 의료기를 제대로 알고 쓸 수 있도록, 재미있는 영상과 함께 찾아갑니다. 영상은 네이버TV 브라보 마이 라이프 채널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감수 김대균 인천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출연 안지현 인천성모병원 간호사
평생 내복 한 번 입지 않고 겨울을 지내왔다는 것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중년 남성들이 적지 않다. 건강에 대한 자랑도 자랑이지만, 그들에겐 몸에 딱 붙는 속옷이 익숙지 않기 때문. 그랬던 중년 남성들이 달라졌다. 아침마다 부지런히 속옷을 챙겨 입는 이들이 하나 둘 늘고 있다. 그것도 그냥 내복이 아닌 스타킹, 게다가 입기도 까다로운 압박스타킹을 말이다.
시니어가 압박스타킹을 챙겨야 하는 이유는 바로 하지정맥류와 노인성 하지부종 때문이다. 하지정맥류는 말 그대로 다리에 있는 정맥, 피부 바로 밑에 있는 표재 정맥이 늘어나 피부 밖으로 보이는 질환을 말한다. 종아리나 오금 등에 푸른 빛이 도는 혈관이 실뱀처럼 드러나 보인다면 하지정맥류 가능성이 우선 크다. 이 질환은 50~70대 시니어들에 잘 나타나는데, 이유는 혈관이 노화로 인해 탄력이 떨어져 쉽게 확장되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순환되어야 할 혈액이 제대로 돌지 않고 넓어진 혈관에 고이게 되는 것. 혈액순환을 위한 근육의 펌프 기능이 점차 떨어지는 것도 문제이고, 노인비만도 원인이 된다. 특히 오래 서 있는 직종일수록 이러한 증상은 쉽게 나타난다. 만약 당뇨병이 있다면 더욱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 혈전이나 피부궤양 등의 합병증이 발생할 수도 있다.
제대로 착용하면 하지부종에 효과
반면 노인성 하지부종은 노화의 과정에서 피부가 처지고 다리의 근육이 쇠약해지면서 생기는 현상으로, 정맥기능이 감소되면서 특징적으로 무릎 이하의 다리에만 부종이 생기는 증상이다. 정맥은 스스로 피를 이동시키지 못하고 주변 근육의 움직임에 의해 발생되는 압력에 의해 순환이 이루어진다. 하지부종은 평소 꾸준한 운동으로 예방할 수 있으나 운동을 할 수 없거나 이미 발생한 상태라면 압박스타킹으로 부족한 근육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
압박스타킹은 다리를 전체적으로 압박해 혈관에 피가 고이는 것을 방지한다. 실제로 스타킹 업계 관계자들은 “여성 사용자의 비중이 높지만, 그래도 증상을 개선하기 위해 제품을 찾는 중장년 남성들도 적지 않다”고 귀띔한다. 특히 시니어의 경우 해외여행 시 2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야 하는 상황이라면 압박스타킹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사용하는 이코노미 클래스의 좁은 자리에 장시간 앉아 있게 되면 다리의 혈액 흐름이 억제되어 자칫 혈전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 뇌경색, 폐색전증 등 심각한 합병증이 발생할 수 있는데 압박스타킹은 이를 효과적으로 예방해준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입어서는 곤란하다. 제대로 입지 않으면 되레 혈액순환을 방해할 수도 있고, 지나치게 압력이 센 스타킹을 골라도 병을 더 키울 수 있다. 그러므로 의료용 제품이 아니거나 너무 압박력이떨어지는 제품은 피하는 것이 좋다. 의료용 압박스타킹도 신체 사이즈와 용도에 맞게 압력을 제공하므로 유의해서 골라야 최적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압박스타킹 선택법은?
의료용 압박스타킹은 형태나 재질, 압력별로 무척 다양하다. 모양에 따라 종아리형, 무릎형, 허벅지형, 팬티형 등이 있고, 재질이나 색깔도 다양하다. 평소 복장이나 용도에 따라 적당한 것을 맞춰 고르고 압력도 증상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전문의와 상담을 통해 증상에 맞는 형태와 압력을 골라야 한다는 것. 특히 30mmHg 이상의 중압 제품은 의사와 상의 없이 무작정 입었다가는 부작용에 시달릴 수 있다. 최근에는 패션을 고려한 제품들도 많이 나와 있어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의료용 압박스타킹의 시중 가격은 3만~15만 원 선.
어떻게 입을까?
압박스타킹의 가장 기본이 되는 착용법은 스타킹을 완전히 뒤집은 후 발끝부터 입는 것이다. 대충 양말을 신듯 발을 집어넣다가는 제품에 손상이 갈 수도 있고, 다리에 균일한 압력을 제공하지 못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a 스타킹을 완전히 뒤집은 후 발끝부터 뒤꿈치까지 위치에 맞게 신는다. b 발목부터는 양손 엄지손가락을 안쪽으로 넣어 스타킹을 잡은 후 차근차근 말아 올린다. c 이 과정에서 주름이 잡히지 않도록 스타킹을 끝까지 펴면서 입는다.
관리는 이렇게
제조사에서는 압박스타킹의 수명을 유지하기 위해 같은 제품을 매일 입는 것보다는 두 개 이상을 준비해 번갈아 입는 것이 탄성을 유지하는 데 유리하다고 말한다. 또 가능하면 착용 후 바로 세탁을 하는 것이 좋다고. 세탁은 미지근한 물에 약간의 중성세제를 풀어 손세탁하되, 잘 헹구는 것이 중요하다. 비틀어 짜거나 세탁기로 탈수시키면 안 된다. 마른 수건 사이에 펴 넣은 후 물기를 제거하고, 빨랫줄이나 건조대에 널지 말고, 그늘 바닥에서 말리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