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과 행복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실제로 행복한 사람이 더 건강하고 오래 산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또 그 행복을 통해 얼마나 더 건강해질 수 있을까? 행복함은 몸이 아닌 마음으로 느끼는 감정이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많은 뇌과학자는 마음으로 느끼는 행복도 모두 뇌가 만들어내는 화학적 변화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행복호르몬이다. 지금부터 우리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행복호르몬 4종 세트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첫째,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호르몬이 있다. 바로 엔도르핀이다. 엔도르핀은 기분을 들뜨게 만들고 신나고 즐겁게 해준다. 엔도르핀의 어원은 ‘endo+morphin’이다. 즉 스스로 만들어내는 모르핀 같은 물질을 의미한다. 모르핀은 통증을 줄여주고 기분을 좋게 해주는 화학물질로서 주로 약물 원료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엔도르핀이 많이 나오는 상태가 되면 통증이 줄어든다. 또 암세포를 죽이는 면역세포인 NK세포를 활성화한다. 실제로 우리 몸에서는 하루에도 수천 개의 암세포가 발생한다. 그러나 정상적으로 NK세포가 활성화한 상황에서는 암세포가 사멸된다. 엔도르핀이 많이 생성되면 건강해지는 이유다.
엔도르핀이 많이 나오게 하는 방법은 활짝 웃는 것이다. 웃음이 건강에 좋다는 말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해주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웃을 일이 있어야 웃지….” 하지만 뇌과학자들은 웃을 일이 없어도 억지로라도 웃으라고 권유한다. 그러면 엔도르핀이 많이 나오고, 그로 인해서 즐거워지고, 건강해지므로 웃을 일이 더 생긴다는 말이다. 실제 미국의 여러 암치료센터에서는 암 환자 치료 과정에 웃음치료를 도입했다. 실컷 웃게 하면 몸의 면역세포가 더 좋아진다는 게 입증됐기 때문이다.
둘째, 즐겁고 재미있는 감정이 있다. 바로 행복함을 느끼는 마음이다. 그런데 이 감정만큼이나 행복한 또 다른 느낌이 있다. 인간이라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감정, 즉 ‘평안함’이다. 즐거움 못지않게 우리에게 중요한 감정이다. 평화로움은 삶을 윤택하게 해준다. 이러한 감정을 자주 갖는 사람은 심리적으로 안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대인관계도 좋다. 그렇다면 평안한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그것은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에서 비롯된다. 세로토닌은 밤이 되면 멜라토닌으로 바뀐다. 멜라토닌은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호르몬이다. 즉 평안함을 많이 느끼는 사람들이 잠도 잘 자는 것이다. 숙면은 치매 예방뿐 아니라 면역 증진, 비만 예방 등 신체 건강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세로토닌이 부족하면 우울해진다. 실제 우울증 약 중에는 세로토닌을 증대시켜주는 약이 있다.
세로토닌은 어떻게 하면 많이 만들어낼 수 있을까?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하나는 햇빛, 다른 하나는 리듬운동이다. 햇빛이 없는 어두운 곳에서 오래 지내면 세로토닌이 감소되고 우울해진다. 리듬운동의 기본은 걷는 것이다. 밝은 낮에 산책을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공원이나 숲 등 자연 속에서 이러한 활동을 하면 건강에 좋다. 햇살을 즐기면서 산책을 하면 많은 세로토닌을 만들어낼 수 있다.
셋째, 성취감이나 만족감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고차원적인 감정이다. 그래서 인간은 도전을 하며 성취감과 만족감을 얻는다. 이러한 고차원적 행복감을 갖게 해주는 호르몬이 바로 도파민이다. 도파민은 중독과 관련한 나쁜 호르몬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렇다. 도파민은 양날의 칼이다. 잘못 사용하면 중독자를 만들지만, 잘 사용하면 자신감과 만족감을 키워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해준다. 평소에 도파민이 많이 나오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의욕적이고 부지런하다.
도파민은 ‘새로움’, ‘호기심’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호르몬이다. 누구든 새로운 것을 보면 호기심을 갖는다. 이 감정이 도파민을 불러일으킨다. 반대로 늘 똑같은 생활을 하며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사람은 의욕도 없고 게으르다. 성취감이나 만족감을 얻고 싶다면 그동안 미뤄왔던 것들에 하나씩 도전해보자.
마지막으로 인간이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관계다. 좋은 관계는 행복감을 준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느끼는 행복감과 연결되는 것이 옥시토신이다. 옥시토신은 자궁수축호르몬으로서 임산부가 분만할 때 분비되는 호르몬이다. 출산을 하면서 옥시토신이 흠뻑 분비된 엄마는 아기를 보면서 모성애를 느끼기 시작한다. 옥시토신은 관계에서 친밀감을 갖게 해줄 뿐만 아니라 신뢰감도 키워준다. 서로 믿고 의지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끼리 느낄 수 있는 중요한 행복감 중 하나다.
그렇다면 어떤 상황에서 옥시토신이 잘 분비될까?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 그리고 스킨십을 통해 분비된다. 서로 교감하고 바라만 봐도 옥시토신은 증가한다. 일부 학자들은 옥시토신이 미래 사회에서 가장 주목받게 될 호르몬이라고 말한다. 옥시토신이 많이 분비되는 사람은 친화력, 사회성이 좋으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도 더 크다고 한다. 이러한 연구결과를 토대로 미국에서는 ‘쑥스러움 방지제’라는 이름으로 코에 뿌리는 옥시토신 스프레이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그만큼 옥시토신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지금까지 살펴본 4가지 행복호르몬은 좋은 부분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이들 호르몬은 홀로 작용하는 게 아니다. 서로 복잡하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의 감정이 결정된다. 이제 앞에서 말한 방법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많이 웃고, 자연을 벗 삼아 햇빛 아래서 산책을 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과감한 도전도 해보자. 또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주 교감하고 대화하자. 행복호르몬을 잘 가꾸고 키워 슬기로운 피로 컨트롤러가 되면 우리 삶에 피곤함이 끼어들 틈은 없어질 것이다.
검단농협 오왕지점에 머물러 있으면 은행을 찾는 손님들 외에 기분 좋은 웃음을 머금은 채 2층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목격할 수 있다. 그들의 발길을 따라가면 빼어날 수(秀)에 많을 다(多), 집 원(院) 자가 새겨진 한자 팻말이 눈에 띈다. 여긴 대체 뭐하는 곳이지? 궁금증을 안은 채 철문을 여니 햇살에 부서지듯 와르르 환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어서 오세요, 수다원입니다.” 정체불명의 공간을 책임지는 나영자(66) 수다원 원장의 목소리가 낯선 이를 반긴다.
“이름을 짓는 데 신중했어요. 이 동네가 자연부락이 재개발되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곳이라 원래 거주하던 사람들과 새로 유입된 사람들 사이 괴리감이 있거든요. 원래 거주하던 분들을 ‘토백이’, 새로 유입된 분들을 ‘아파트 사람들’이라 구분지어 부를 정도로 거리감이 확연했는데, 전 그게 참 안타깝더라고요. 다 한동네 사람들인데 서로 즐겁게 지낼 수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수다원이란 공간을 마련하게 된 거죠. 함께 모여 수다떨면서 융합하고, 정보도 교환하고, 감정을 나누면서 살아가는 공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이런 이름을 지었어요.”
나영자 원장이 수다원을 만들게 된 계기는 담백하고도 의미가 깊다. 이웃에 살면서도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 각박한 현대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네’의 가치를 실현하고 싶었던 것. 그렇기에 수다원의 활동은 거창하진 않아도 따스하고 잔정이 깊다. 바쁘게 살다 보면 잊고 지나치기 일쑤인 생일을 챙겨주고, 봄가을이면 그 옛날처럼 설렘을 안은 채 근교로 소풍을 떠나고, 때로는 곱디고운 꽃도 그려보고 사군자도 친다. 영화감상이나 네일아트, 도자기와 승마체험 등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특강은 문화시설이 부족한 이 동네에서 큰 호응을 받는 프로그램. 새해를 맞으면 동네별로 재료를 준비해 큰 양푼 두어 개에 넣고 쓱쓱 비빈 비빔밥을 먹는 특별한 시무식을 열고, 연말이면 재능기부한 봉사자들에게 작은 선물을 증정하는 송년회를 열기도 한다.
단절된 동네의 융화를 위한 사랑방
한마디로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여 행복하게 융화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활동이든 제약이 없다. 재미난 건 나 원장이 ‘토백이’와 ‘아파트 사람들’ 중간에 위치한다는 것. 1980년대에 수다원 인근에 위치한 단봉초등학교에 재직한 적은 있지만 이 동네 아파트로 이사 온 것은 퇴직 직전이다. ‘토백이’ 중에는 재직 당시의 학부모들이 남아 있어 친근하고, 나 원장은 ‘아파트 사람들’에 속하기도 하니 중간자적 입장에서 이런 공간의 필요성을 가장 먼저 캐치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가장 큰 목표는 남녀노소 다 같이 어울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거예요. 가을부터는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꽃꽂이 강의를 열고, 젊은 엄마들의 기존 독서모임이 있는데 동화구연도 더할 생각이에요. 퇴직하신 어른들을 초빙해 초등학생들에게 천자문과 바둑, 장기 등을 가르칠 계획도 있고요. 중요한 건 실용성을 뛰어넘는 감정의 확산에 있어요. 시골 할머니들이 꽃꽂이 배운다고 플로리스트가 될 건 아니잖아요? 다만 꽃꽂이를 하고 그걸 집에서도 응용함으로써 평생 안 해본 경험을 하고, 그 경험과 감정을 가정에서도 공유한다는 게 중요한 거죠.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쳐 한자 몇 자 알게 하고, 바둑과 장기의 스킬을 늘려주는 게 아니라 그걸 매개체 삼아 인성 지도를 받게 해 사람 됨됨이가 되도록 하는 게 목적이에요.”
여성 회원이 많다 보니 남성들은 궁금해서 슬쩍 들렀다가도 쑥스러움에 발길을 돌리곤 한다. 수다원은 남성 회원 역시 두 팔 벌려 환영한다고.
수다원에 흔쾌히 공간을 빌려준 농협의 운영시간에 맞추다 보니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밖에 문을 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초등학생들은 물론 더 많은 사람이 이곳을 이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나영자 원장의 계획이다.
도서관도, 문화센터도 없는 문화 불모지에서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으로 다가가는 수다원은 2017년 5월 10일 개원 직후부터 빠르게 성장해왔다. 개원 당월에 봄소풍을 다녀온 이래 꾸준히 배우고 경험하는 프로그램이 많아졌고 최근에는 비영리단체로 등록까지 마쳤다. 그간 무료로 재능기부한 봉사자들이 단체 등록을 계기로 1365 자원봉사포털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나 원장의 표정에서 뿌듯함이 여실히 묻어난다.
함께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삶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 안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프로그램을 꾸준히 기획하는 능력은 사실 쉽지 않다. 수다원을 이끄는 나영자 원장의 리더십은 그녀가 평생 쌓아온 시간에서 기인한다.
나 원장은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2015년 교감으로 퇴직할 때까지 오랜 시간 봉사활동을 하며 보냈다. 남편과는 주말마다 양로원에 가고, 세 자녀 또한 고아원으로 봉사를 보낸다. 모범공무원 선정, 신일스승상 선정, 녹조근정훈장 수여 같은 명예로운 수상은 봉사의 삶을 살면서 따라온 부상들. 퇴직하고 난 뒤에도 자신의 역량을 활용해 남을 돕는 삶을 살아왔다.
“정년 10년 전부터 퇴직 이후의 삶을 준비했던 것 같아요. 제가 아동미술을 전공한 데다 미술교사 동아리 활동도 했고 개인 작업을 거쳐 전시회도 몇 차례 하며 국전에도 입선한 경험이 있어서 그림을 가르치며 봉사하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러다 이 동네 특유의 분위기에 안타까움을 느껴서 이런 공간을 만들게 된 거고요. 여기서도 다양한 미술활동 프로그램을 펼치고 있으니 더 외연이 넓어진 셈이네요.”
사람과 사람을 잇는 공간을 만드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행복 추구로 귀결된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수다원은 치유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수다원 회원 중에는 수십일 동안 집 안에 칩거해 있을 만큼 감정적으로 고립됐던 사람도 있고, 아픈 손자 때문에 홀로 마음앓이를 했던 사람도 있다. 전문가의 치료로도 꽤 긴 시간을 필요로 할 만큼 우울 증상이 깊었는데 수다원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사실 제가 상담사와 미술심리치료사 자격증도 있어요. 그런데 그분들에게 필요했던 사람은 자격증을 지닌 전문가보다는 눈을 맞추고 꾸준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존재였다고 봐요. 요즘은 오전 9시 땡 하면 수다원 문을 열고 오실 만큼 열성적인 회원이 되셨죠. 그런데 그거 아세요? 사람들과의 교류 때문에 행복해지는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퇴직하고 나서도 아침에 눈 뜨면 바로 이곳으로 오거든요. 사람들과 함께하니 외로울 일도 없고 하루하루가 행복해요.”
사비를 털어 수다원을 개원할 당시 ‘과연 사람들이 모일까?’ 했던 기우는 점점 사라졌다. 사람들이 행복해질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필요한 지원금을 확보하려 동분서주할 때도 초반에는 수다원의 존재를 몰라 애를 먹었지만 이제는 인근에서 모두 아는 단단한 존재가 되었다. 수다원이 위치한 인천 오류왕길동은 물론 검암지구, 멀리 김포에서도 수다원을 찾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진작 이런 곳을 알았으면 여기로 이사 올걸” 하며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다는데, 그만큼 사람들 간 교류가 이뤄지는 공간이 적다는 방증이리라.
“이 공간의 장점 중 하나는 동네 사람들끼리 정보 교환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경험하고 배우는 것도 좋지만 한동네 사람들이 애들 데리고 가볼 만한 곳은 어디인지, 어느 곳에서 질 좋고 저렴한 물건을 살 수 있는지 실용적인 정보교환이 이뤄지니 건설적이죠. 이런 공간이 없었다고 생각해보세요. 마을회관에서 고스톱 치며 시간을 보내거나 몇몇이 몰려다니며 쇼핑이나 가십에 열중하게 되지 않겠어요?”
은퇴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고하는 말
나영자 원장의 말에 따르면, 교직생활을 마치고 은퇴자의 삶을 사는 이들도 다른 은퇴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유형으로 나뉜다. 여러 명이 모여 등산이나 나들이 갔다가 술 한잔 걸치고 집에 들어가는, 흔히 남성들에게서 보이는 삶. 손자손녀들을 맡아 돌보거나 자식들 살림을 도와주는 삶. 이것저것 배우러 다니는 삶 등등. 그녀는 친정엄마가 아이를 맡아준 적도 있고, 자신이 직접 육아를 해보기도 했지만 길러보니 자식은 부모가 키울 때 더 보람차고 행복했다며,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손자손녀를 돌보는 은퇴 후의 삶은 마다했다. 퇴직 후 남을 돕고 사는 삶을 살기로 했지만 수다원을 만들기 이전에도 서구역사문화연구회를 꾸려 회장을 맡는 등 봉사에 임하는 모습이 수동적이지 않다. 아니, 마치 개척자의 용기를 보는 것 같다.
“은퇴 후의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건 ‘내 것을 먼저 내어준다’는 마음가짐이에요. 봉사를 한다 해도, 퇴직 후 나만을 위해 준비된 자리가 기다리고 있지는 않아요. 돈이든, 시간이든, 열정이든 내 것을 먼저 내어놓는 것에 익숙해져야 해요. 저도 수다원을 만들었지만 수익이 난다거나 경제적인 이득을 보는 건 없어요. 감자철이면 감자를 한두 박스씩 사다가 쪄서 나누는 등 오히려 퍼다 나르는 게 많지요.(웃음)”
4년 전 퇴직해 성실히 은퇴자의 삶을 살아가는 만큼 나영자 원장의 조언은 디테일하다. 과거의 영화를 잊어야 하는 건 물론 앞으로 소속되어 살아갈 커뮤니티에 맞춰 말투와 행동거지, 옷차림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가장 최악은 ‘내가 왕년에 이랬는데’ 하는 생각입니다. 학교에서 교장선생님이었다고 은퇴하고 나서도 교장선생님 대접받길 바라면 곤란하죠. 특히 전문직에 종사했던 분들이 은퇴 후 이사하거나 귀농귀촌한 동네에서 은연중 우월의식을 보이는 경우가 있어요. 거기다 초점을 맞춰, 편하게 말해도 될 이야기를 영어까지 섞어 말하면 고만고만한 동네에서 튀어 보일 수밖에 없죠. 손주들도 할머니가 자기들 수준에 맞춰 놀아줘야 좋아합니다. 은퇴 후에는 왕년의 허물을 벗어버리고 함께 살아갈 동지를 만들어야 해요. 누가 만들어주지 않는답니다.”
100세 시대인 만큼 예순여섯 살 나영자 원장은 아직 살아갈 날이 한참 남았다. 그녀가 꿈꾸는 성공한 삶, 더 많은 사람과 지혜와 사랑을 나누는 삶을 위해 내일도 나 원장은 더 많은 사람과 신명나게 수다를 떨고 웃을 예정이다. 나눌수록 행복하다는 믿음을 안고서.
도심을 벗어나 어느덧 국도를 달린다. 햇살 쏟아지는 시골 마을을 지나 녹음이 짙어가는 산길로 들어서자 소음조차 숨죽인다. 숲길에서는 뒤엉킨 마음을 맡겨버린다. 구불거리는 좁다란 산길 위에서 너울거리는 계절을 느낀다. 그리고 비로소 땅의 너그러움에 마음이 열리기 시작한다. 충북 진천이다.
보탑사 삼층 목탑과 꽃 정원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 했다. 사는 곳은 진천이 좋다 하더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서울에서 출발해 자동차로 두 시간 정도 달리면 진천에 닿는다. 친절한 사람들이 비켜주는 좁다란 숲길을 따라 산밑을 지나면 길 옆 계곡에서 물소리를 들려준다. 산 아래에는 정갈한 사찰 보탑사(寶塔寺)가 조용히 앉아 있다.
고려시대의 절터로 추정되는 이곳에 대목수 신영훈 장인을 비롯해 문화재급 전문가들과 지광·묘순·능현 비구니 스님이 1996년 창건한 절이다. 그 후 지장전·영산전·산신각 등을 건립하고 2003년 불사를 마쳤다.
역사가 길진 않지만 보탑사가 많은 이에게 관심을 받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이 절 삼층 목탑은 상륜부를 제외한 높이가 42.7m. 못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끼워 맞추는 전통 방식으로 만들었다. 내부에는 삼층까지 오르는 계단도 있다. 108척 높이의 대웅전(1층), 법보전(2층), 미륵전(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모습이 웅장하다. 지나치지 말고 들여다봐야 한다.
또 사방에는 꽃들이 가득하다. 봄, 여름, 가을까지 쉬지 않고 꽃이 피어난다. 목탑 주변에는 경계석도, 담도 없다. 야생화가 가득 피어난 화분들이 풋풋하게 자리 잡고 있다.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하는 아담한 처소 앞에 피어 있는 올망졸망한 꽃들의 모습은 수채화 같다. 군데군데 예사롭지 않은 석탑과 반가사유상, 불족석, 영산전, 전각, 그리고 격조전 입구의 석불과 와불의 평온한 표정은 꽃과 자연 속에서 제 몫을 보여주니 바라보는 느낌이 달라진다.
사찰 계단을 오르면 탐스런 작약이 화들짝 얼굴을 들이민다. 작약을 시작으로 경내 어디로 발걸음을 옮기든 꽃밭이다. 계단참에도, 돌무더기 위에도, 담장 허리춤에도 색색의 꽃들이 가득이다. 산속 정원이 바로 여기다. 보탑사는 여느 사찰들처럼 규모가 웅장하지도 않고 근엄한 분위기를 자랑하지도 않는다. 평온하고 아늑할 뿐이다. 불자가 아니어도 머물다 가려는 여행자들이 조용히 오간다. 꽃과 나무들로 어우러진 경내를 걷다 보면 사찰이 아니라 어느 조용한 고택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자연생태공원에서 함께하는 휴식
보탑사 주차장에서 나와 5분 남짓 달리면 ‘만뢰산 자연생태공원’이 나온다. 11만8500여 ㎡의 넓은 공간을 자랑한다. 잔디광장, 생태교육장 등의 열린 마당과 생태습지, 수목원, 야생초화·허브원, 가족 피크닉장, 습생초지원, 열매나무원 등 체험 숲을 갖추고 있다.
남녀노소 누구라도 가볼 만하고, 특히 아이들 자연학습장으로 좋다. 연인들이 손잡고 산책로를 따라 걷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 물소리길, 별따라가는길, 산내음길 등을 걸으며 생태공원의 신선한 공기를 맛볼 수 있다. 넓은 잔디밭에서는 축구를 하는 아이들, 텐트를 치고 휴식 중인 가족들 모습이 평화롭다. 인근에 위치한 연곡저수지와 백곡저수지는 살아 있는 시골 풍경이다. 종(鐘) 박물관과 참숯 테마공원도 있다.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
만뢰산 자연 생태관에서 다시 1~2분 정도 달려가면 ‘사적 제414호 진천 김유신(鎭川 金庾信) 태실(胎室)과 만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태실 유적이다. 태실 유적은 아기가 태어날 때 함께 나오는 태반과 탯줄을 묻어놓는 곳을 말한다.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은 이곳 진천(옛 지명은 만뢰)에서 태어났고 그의 태실은 진천읍 상계리 태령산 정상에 있다. 태실 유적 입구엔 수국이 탐스럽게 피어 있다. 역사를 지닌 장소라 그런지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진다.
천년의 다리
진천 하면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농다리(농교)’다. 아직도 시골에 가면 정겨운 징검다리를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진천의 농다리도 그중 하나다. 900여 년 전 임 장군이라는 사람이 만든 다리라 전해지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돌다리로 알려져 있다. 두툼하고 널찍한 돌을 포개어 쌓은 것뿐인데, 거의 천년의 세월을 지탱해왔다는 사실이 놀랍다. 무수한 풍상을 겪고 홍수에도 끄떡없었다니 첨단기술로 만든 다리가 하나도 부럽지 않다. 농다리는 이제 역사의 다리가 되었다. 이곳에서는 매년 5월 중하순경 ‘천년의 발자취! 농다리에 반하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한바탕 축제의 장을 연다. 최근에는 수변산책로도 조성되어 조용한 시간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다.
진천에서 만난 수수한 음식점 두 집을 소개하고 싶다. 민물새우찌개, 수제비, 정갈한 더덕구이 정식을 전문으로 하는 ‘풍경소리’와 묵밥을 맛볼 수 있는 ‘하늘소’이다. 두 곳 다 제법 알려진 오래된 맛집으로, 당연히 파전과 동동주도 있다. 산속에 자리한 ‘하늘소’에 앉아 창밖 풍경들을 보고 있으면 세속의 갈등과 번뇌가 어느새 사라진다. 매달 5일, 10일에 열리는 진천 장날에 맞춰 가면 더 좋다.
때론 조용한 시간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럴 땐 고민하지 말고 훌쩍 서울을 떠나보자. 고속도로를 두 시간여 달리면, 일탈과 휴식과 피서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진천에 도착한다. 시골길을 달리고 산속에 파묻혀볼 수 있는 하루 코스는 역시 생거진천(生居鎭川)의 마을이 제격이다.
추사고택에서 화암사에 이르는 용산 둘레길의 길이는 약 1.5km. 가볍게 올라 산책처럼 즐길 수 있는 숲길이다. 추사를 동행으로 삼으면 더 즐겁다. 추사고택을 둘러본 뒤, 추사기념관을 관람하고 산길을 타는 게 이상적이다. 추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씨를 심어 자랐다는 백송공원의 백송도 볼 만하다.
산(山)에 산을 닮은 사람[人]이 살면 선(仙)이다. 세사의 난리법석 가운데 태산처럼 우뚝 솟은 사람을 선인(仙人)이라 한다. 달인이라고, 초인이라고, 거인이라 해도 되겠지. 여기 용산에도 거인이 왔다가 갔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그가 용산의 솔바람을 숨 쉬며 산 아래 마을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성년이 돼서도 드나들었다. 용산에서 선경(仙境)을 구가하고자 했다.
추사는 죽어서도 살아 있다. 오늘날까지 팬덤을 거느리는 창의의 아이콘이다. 불멸의 성좌다. 유배의 고난을 오히려 동력으로 삼아 시대의 파랑을 건넌 무적 구축함이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아직도 추사에 열광한다. 참을 수 없는 외경으로 추사에게 길을 묻는다.
용산의 북쪽 산마루 아래에 ‘추사고택’이 있다. 폐허처럼 스러져가는 걸 1970년대에 와서 복원한 53칸 기와집이다. 집을 지은 건 영조의 사위 김한신이며, 그는 바로 추사의 증조할아버지다. 코흘리개 꼬맹이 시절, 추사는 이 할아버지 집에서 자랐다. 대기(大器)의 싹눈이 여기에서 새파랗게 움텄다. 용산에 신령이 근무한다면 그는 기억할 게다. 어린 추사의 어린애다운 천진과 호기심을, 어린애답지 않은 다재와 조숙을. 용산 자락에 유년의 꿈과 기억을 심었던 추사는 용산 자락에서 흙으로 돌아갔다. 고택 옆, 봉긋한 젖무덤처럼 포실한 묘에 누워 영원으로 회귀했다.
고택 옆댕이로 난 둘레길을 따라 용산을 오른다. “이게 무슨 산인가? 들판 가운데에 간신히 솟은 언덕에 불과한 것을.” 크고 높고 깊은 산에 심취하는 버릇이 몸에 밴 사람이라면 그리 말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억지스럽다. 당신의 몸피가 작다고 좁쌀 소인인가? 작은 산이라 얕보지 마라. 있을 것 다 있다. 숲 사이로 부는 바람, 롱런하는 명가수라 불러야 할 산새들, 태초의 침묵 하나로 좌정한 암반들, 뜻밖에도 깊은 골골마다의 정적…. 마음 한 자락 슬쩍 얹기에 부족할 게 없다.
야산이라고 놀리지 마라. 슬리퍼 질질 끌고서도 만만히 오르내릴 수 있으니 후덕한 산이다. 눈감고 걸어도 길을 잃을 일 없으니 어디나 광명천지다. 이 산에 오르거들랑, 그대여, 남모를 슬픔마저 하얗게 헹구고 헛된 인생사 차라리 통 크게 볼 일이다. 작아도 큰 게 산이며, 쩨쩨해도 마음 한 번 크게 먹어 거산을 닮을 수 있는 게 사람이지 않던가.
옛사람들은 이 산을 용(龍)으로 봤다. 누운 용이 머리를 휘저으며 일어나 저 너머 삽교천의 물을 들이키는 형국으로 읽었다. 그래서 용산(龍山)이다. 이젠 이름 없는 산으로 이름났지만 일찍이 대동여지도에 주민등록을 낸 산이다. 바람에 실려온 소식에 따르면, 합덕 성동산성에서 견훤이 쏜 화살이 이 산에 꽂히기도 했다지. 용산에 진을 친 왕건을 겨냥한 화살이었다. 알고 보면 눈여길 게 많은 산이라 할 수밖에.
숲 사이로 느릿느릿 걷는다. 쪼르르 산에 오른 어린 추사가 다람쥐랑 깔깔대며 놀았을 수도 있는 길이다. 걷다가 몇 번이고 멈추어 길을 아낀다. 산에 올라 산의 마음 한 움큼을 훔쳤으니 서두를 게 없다. 들이치는 햇살을 거머쥐려 발돋움하는 나무들만 다투어 산이 곧 생명임을 천명한다.
숲길 곳곳엔 묘가 있다. 어떤 묘는 가히 아름다워 심지어 목가적이다. 어떤 묘는 잡목을 뒤집어썼으니 머리를 득득 긁는 넋이 지하의 옥살이를 투덜거리는 것 같다. 어쨌건 이제 딱히 할 일 없는 게 넋이다. 목숨이란 계약직이라서 시효가 지나면 영구적인 실직자로 돌아간다. 무덤을 딛고 올라 마침내 허공으로 흩어지는 게 아니던가.
바위는 다르다. 천년만년을 살아 불멸을 꿈꾼다. 용산엔 기묘한 바위들이 많다. 개중 우람한 암벽은 쉰질바위. 여기엔 선계(仙界)를 뜻하는 ‘소봉래(小逢萊)’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추사의 필적 암각문이다. 숲길 끝자락, 추사 가문의 원찰(願刹) 화암사 병풍바위에도 추사의 글씨 ‘시경(詩境)’이 박혀 있다. 추사가 이 산에서 이상향을 구가하고자 했던 표징으로 간주되는 각자(刻字)들이다. 그는 저 요지부동한 바위의 정신으로, 부나비처럼 부유하는 생의 허허(虛虛)를 날려버릴 생각을 한 게 아니었을까.
추사는 생시에 이룰 것 다 이루었다. 문사철(文史哲)로, 시서화(詩書畵)로. 그럼에도 선계(仙界)를 그렸다. 어차피 가망 없는 꿈인 걸 모를 리 없었겠지만.
춤을 보다가 음악을 듣다가 이윽고 눈을 감는다. 감은 눈앞에 펼쳐지는 건 에메랄드빛 바다, 미소 담긴 맑은 얼굴, 하늘하늘 치마 끝자락, 사랑과 고귀함을 담은 손끝. 훌라댄스의 매력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동경의 세계로 빠져들기 쉽다는 점이다. 하늘과 땅, 대자연의 기운을 온몸으로 전하는 이들을 만나봤다.
고층빌딩이 길게 늘어선 강남의 대로변을 지나 한적한 골목에 다다르니 하와이예술문화협회의 코랄빛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우쿨렐레와 파도소리가 시원하게 들릴 것만 같은 분위기다. 훌라댄스는 잘 알려진 대로 미국 하와이 섬의 전통춤으로 그곳 원주민인 폴리네시아인들에 의해 계승되어오고 있다. 춤의 모든 동작이 수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연의 아름다움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와이 전통음악인 멜레 선율에 맞춰 춘다. 하와이의 해변 곳곳에서 이 춤을 추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어서인지 여행을 마치고 훌라 춤을 배우러 오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김주영 하와이예술문화협회장은 말한다.
“시니어 여성분들 중에 하와이 여행에서 훌라춤을 보고 난 뒤 잊지 못해 오셨던 분들이 꽤 계셨어요. 그곳에서 진짜 하와이 훌라댄스를 보고 용기를 내시더라고요. 춤을 추면서 우아한 미소를 지을 수 있고 말이죠. 나이가 들어도 여자는 여자잖아요.”
2011년에 정식 창단한 하와이예술문화협회는 서울과 부산을 비롯해 광주, 대구, 대전 등에서 훌라 교실을 열고 있다. 등록 인원은 100명 정도. 30대에서 40대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고, 50대에서 70대까지도 훌라댄스로 세대가 공감하며 어울린다. 훌라춤의 가장 큰 장점은 추는 동안 행복에 빠진다는 것. 노래가사에는 자연과 사랑이 가득할 뿐만 아니라 이별을 노래할 때도 쓰라린 마음의 상처 대신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라는 아름다운 메시지를 담는다고 한다.
“훌라춤을 추는 시간만큼은 스트레스를 잊는 겁니다. 노래에 따라서 내 몸에 긍정 에너지가 생겨나요. 그리고 하와이는 보이는 모든 것들이 대부분 야생의 꽃과 식물이잖아요. 그것을 다 수화로 표현한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하와이 원주민 언어로 된 노랫말과 손동작을 외워야 율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약간의 두뇌 회전이 필요하다. 그래서 치매 예방에도 좋다고들 한다고. 훌라춤은 하체 근육은 물론 몸 전체 근력을 향상시켜주어 시니어에게 특히 권할 만하다. 골반을 흔드는 동작이 많아 자궁 건강에도 좋단다.
“훌라춤을 출 때 발레 슈즈를 신는 분이 계신데 잘못된 거예요. 발을 구속하면 안 됩니다. 맨발로 땅을 밟으면서 에너지를 받고 손을 펴서 우주의 에너지를 받아 전파하는 거죠. 자연과의 교합을 추구하는 춤이 훌라댄스예요.”
엄마와 딸이 정답게 훌라 선율을 따라가다
하와이예술문화협회에서 훌라댄스를 처음 춰봤다는 유병란(61), 이보라(29) 모녀를 만났다. 김주영 협회장의 구령에 맞춰 춤을 익히고 있었는데 처음치고는 둘 다 곧잘 따라해 초보 훌라 댄서(?)인지 모를 정도였다. 훌라춤을 배우러 온 계기에 대해 이보라 씨에게 물으니 배우는 것이면 무엇이든 좋아하는 어머니 유병란 씨 때문이었다고.
“봉사하러 갔다가 훌라댄스 공연을 봤어요. 연배가 있는 분들이 무대에 서셨는데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막 흉내도 냈어요. 집에 와서 우리 애한테 얘기해주고는 혹시 춤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있는지 알아보자고 해서 오게 됐습니다. 처음이니까 어색하기도 한데 아주 재미있네요.”
웃음이 절로 나는 바다의 춤
이날 청일점이었던 손정식(52) 씨는 주말을 맞아 서울로 올라온 부산 사나이였다. 구릿빛 피부가 훌라춤과 너무 잘 어울렸다. 하와이에서 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 그는 하와이예술문화협회에서 이사직을 맡아 다양한 활동을 돕는 한편 8월 말에 있을 해운대 하와이안 페스티벌을 준비하고 있다. 해운대구 재송2동장이기도 한 손정식 씨는 하와이안 페스티벌 규모를 늘려 해운대를 대표하는 페스티벌로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들을 해왔다.
“6년 전 하와이안 페스티벌을 준비하는 담당자인 제가 훌라춤을 모르면 안 될 것 같아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추기 시작했는데 너무 마음이 좋더라고요. 하와이 전통음악을 멜레라고 하는데 훌라춤을 배우고 나서부터는 멜레만 들어요. 다른 노래는 안 듣게 되더라고요. 춤출 때만큼은 항상 웃게 됩니다. 정서에 제일 좋습니다.”
한국 무용수, 훌라걸스 선언하다
홍예담(54) 씨는 11년간 경남 창원에 살면서 한국무용을 가르쳐왔다. 그리고 3년 전 남편이 직장을 서울로 옮겨 이사온 후 고민에 빠졌다.
“이곳에 와서 ‘한국무용으로 내가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이가 있으니까 그냥 ‘운동을 좀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처음 훌라춤을 접했습니다. 그때가 서울 온 지 만 2년 정도 됐을 무렵이에요. 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에게 보급하기에 딱 적합했던 것 같아요. 남녀노소 누구나 따라 출 수 있는 춤이었어요. 처음부터 정말 버릇없게 선생님께 말했어요. 나는 ‘가르칠 목적으로 배운다’고요. 작년 11월에 들어와 2개월 배우고 1월부터 지도자 과정을 밟게 됐습니다.”
창원에 있을 때만 해도 모셔가기 바쁜 무용 선생님이었다.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찾아서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오랜 시간 가르친 경험이 있잖아요. 배우는 것도 좋지만 지도를 하면 더 많이 늘어요. 안 보였던 것들이 세밀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제가 오히려 배우고 있더라고요.”
사실 올해는 하와이예술문화협회가 잊지 못할 한 해로 기억할 것이다. 훌라춤의 올림픽이라고 할 수 있는 ‘2019 메리 모나크 축제’ 전야제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공연을 하고 돌아왔다. 뿐만 아니다. 훌라 팀과 함께 우리의 전통예술 공연을 하와이 관중 앞에서 선을 보여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제는 한국에 사는 이들에게 훌라춤이 주는 힐링의 세계를 선사할 시간이라고 했다. 올여름 사랑을 노래하고 순박한 미소가 담긴 훌라댄스의 리듬에 꼭 한 번 빠져보기를 권한다.
남과 북으로 땅이 갈리고 길이 막힌 지 오래. ‘분단 50년’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70년을 넘어섰습니다. 흐르는 세월 속에 잊히고 사라지는 것이 한둘이 아니겠지만, 식물 분야에서도 각종 도감에 나오는 엄연한 ‘우리 꽃’들이 갈수록 이름조차 생소해지고 기억이 가물가물해집니다. 노랑만병초니 두메양귀비, 구름범의귀, 개감채, 홍월귤, 두메자운, 비로용담, 화살곰취, 구름꽃다지, 두메분취, 구름국화 등 해발 1000m가 넘는 고산에서 자라는 각종 북방계 식물들이 그들입니다. 이 중 노랑만병초와 홍월귤, 비로용담 등 몇몇은 설악산과 한라산 등 극히 제한된 곳에서 극소수의 개체를 근근이 보존하고 있지만, 대개는 남한 지역에서의 자생 여부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백두산과 연변 지역은 언젠가 다시 만나야 할 ‘우리 꽃’들을 확인하고 기억하는 소중한 통로입니다. 물론 내 나라 내 길이 아닌, 남의 땅을 통해 ‘우리 꽃’을 만나러 가야 하는 현실이 불편하고 불만스럽기는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다시 만나 힘차게 끌어안아야 할 ‘우리 꽃’이 거기에 있기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찾아가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주고, 카메라에 담아 널리 알립니다. 이는 어쩌면 ‘우리 꽃’을 사랑하는 이들이 해야 할 최소한의 책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백두산과 그 일대의 ‘우리 꽃’을 만날 수 있는 기간은 매우 짧습니다. 9월이면 눈이 내리고 이듬해 5월 말이 되어야 새싹이 움트면서 6~8월 3개월 동안 모든 꽃이 피었다 집니다. 그 짧은 기간 천지 주변은 희고 붉고 노랗고 파란 꽃들이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리는 천상의 화원으로 변모합니다. 그 많은 고산식물 가운데에서 오늘 소개하는 꽃은 남한에서는 만날 수 없는 가솔송입니다. 그렇다고 북녘 맨 끝 백두산 일대에서만 자라 왠지 낯설고 멀게 느껴지는 그런 꽃이 아닙니다. 백두산의 대표 야생화 중 하나인 건 분명하지만, 그 아래 함남 검덕산과 차일봉 일대를 거쳐 평남 맹산·영원·대흥군에 이르기까지 해발 1000m 이상 북녘의 고산 초원 지대에 폭넓게 분포합니다.
6월 중순 백두산, 자작나무와 사스래나무 군락이 시야에서 사라지면서 수목 한계선 위로 들쭉나무, 월귤, 담자리꽃나무, 담자리참꽃, 콩버들, 좀참꽃, 가솔송, 시로미, 백산차 등 풀처럼 키 작은 나무들이 나타납니다. 그중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무수한 꽃송이를 레드 카펫 깔듯 눈앞에 펼쳐놓는 가솔송. 작은 항아리 모양의 꽃만으로도 깜찍하기 이를 데 없는데, 눈부신 아침 햇살을 온몸으로 받은 채 이슬을 머금은 진홍색 가솔송 꽃들의 반짝거림이란….
가는 잎이 솔잎을 닮아 그 이름을 얻은 것으로 추정되는 가솔송은 매송(梅松) 또는 송모취(松毛翠)라고도 불리는데, 항아리 모양에 뾰족한 입까지 꽃을 가만 살펴보면 잘 구워진 매병(梅甁)의 미니어처와 똑 닮았습니다. 키 작은 나무여서 다 자라야 높이 10~25cm에 불과합니다. 줄기 밑 부분에서부터 옆으로 누우면서 많은 가지가 갈라집니다. 좁고 긴 잎은 빽빽이 나는데, 잎의 뒷면 가운데에 흰색의 털이 있습니다. 꽃은 6~8월 묵은 가지 끝에 2~6개씩 달려 땅을 보고 핍니다. 개개 꽃의 크기는 7~8mm에 불과하지만, 전초에 비해 상대적으로 커 보입니다. 우리나라 외에 일본과 중국에도 분포합니다.
사려니 숲길은 알겠는데, ‘고살리 숲길’은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제주 숲길이다. 왕복 2시간, 아주 천천히 걸어도 3시간이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2.1km 숲길이다.
서귀포 선덕사 맞은편 다리 옆으로 30m만 들어가면 숲길 입구다. 고살리 숲길의 고살리에 리자가 붙은 것으로 보아 마을 이름으로 짐작, 검색했으나 나오지를 않는다. 고살리는 사시사철 샘물이 솟는 하천가 벼랑을 부르는 말이어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단다. 이 지역에 고사리가 많이 자라서 고살리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숲길은 짧지만 사철 푸른 나무가 울창하고 비가 많이 내리면 물이 무섭게 흐르는 효돈천을 끼고 있다. 잎에 바람 스치는 소리, 재재거리는 새소리가 들린다. 다공질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제주도 땅은 물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기 때문에 비가 올 때만 하천에 물이 흐르고 맑은 날에는 바닥이 바싹 말라있다. 물이 흐르지 않는 하천을 탐방하는 재미가 쏠쏠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계곡으로 들어갈 마음을 먹는다.
입구 쪽은 아래가 낭떠러지고 하천은 빽빽한 나무 그늘에 갇혀있어 아래로 내려갈 엄두가 나지를 않는다. 내려갈 수 있는 적당한 곳이 나올 때까지 숲길을 걷는다.
두 사람이 옆으로 걷기에 적당한 정도의 좁은 폭의 길이다. 생김새가 다른 이파리들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무늬를 그린다. 숲 그늘 아래 나뭇잎 사이로 비쳐든 빛을 받은 제주무엽란이 피어있다. 무엽란이니 당연히 잎이 없다. 뿌리 박테리아 등으로 유기물을 분해하기 때문에 잎이 필요 없다. 지난해의 흔적인 씨방이 올해 핀 꽃보다 미학적이다. 빛이 비쳐드는 방향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큰 나무 둥치에 자리 잡은 호자덩굴 꽃도 보인다. 나무가 울창하니 비쳐든 햇살이 귀하다.
천천히 걷다보면 드디어 계곡으로 들어갈 만한 곳이 나온다. 쉽게 갈 수 있겠다 싶은데 다가가 보면 툭 떨어지는 벼랑이다. 물길과 불길 흔적을 좆아 하천 위쪽을 한참을 바라본다. 세월의 유구함이 여장을 풀고 쉬고 있다.
숲은 습기를 품고 있어 공기 입자가 치밀하게 느껴진다. 수피를 덮은 콩짜개덩굴과 사철 푸르른 구실잣밤나무, 붉가시나무 등 늘푸른나무의 이파리에 녹음이 들고 있다. 숲길은 좁아졌다 넓어졌다 리듬을 타고 하늘은 파란색이 어쩌다가 보일 정도다. 숲길을 걷기가 지루하다 싶으면 만만하다 싶은 계곡에 내려가 널찍한 바위 암반에 앉아 쉴 수 있다. 조용한 계곡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어디선가 용천수가 솟고 있나보다.
쉬엄 쉬엄 숲길을 걸었다. 여름 숲 바닥에서 자라는 꽃과 눈 맞춤 하고 찬란한 여름을 뿜어내는 초록 이파리로 눈을 정화했다. 되돌아 나오는 길이 짧게 느껴진다.
뜨거운 여름날 걷기 좋은 이 숲길, 떠나기 싫다.
지난해 말 개봉돼 흥행가도를 달렸던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증권회사 금융맨 윤정학(유아인 분)은 직감한 나라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 과감히 사표를 던진다. 여기서 궁금한 것 한 가지. 느닷없이 회사를 떠나는 윤정학을 바라보던 나머지 동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1997년 외환위기를 겪은 지 20여 년이 흐른 지금, 평범했던 그 금융권 회사원들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물론 누구나 예상하는 것처럼 그들은 자의와는 달리 격동의 역사를 헤쳐 나와야 했다. 제주에서 만난, 현재 제주햇살담음에서 행정 및 연구실장으로 지내는 최종보(崔鍾甫·61) 씨도 그랬다.
“아내가 그 영화를 보고 그러더군요. 고구마를 스무 박스 먹은 기분이라고요. 저 역시 먹먹했습니다.”
IMF는 국내 금융시장에 거대한 생채기를 남겼다. ‘5대 은행’으로 손꼽히던 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은행 중 원래의 사명(社名)을 유지한 곳은 SC제일은행이 유일할 정도다. 대부분 둘이 하나가 되거나 소멸되는 과정을 거쳤다. 이 외에 많은 은행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소용돌이 속에 최 씨도 있었다.
“저 역시 당시 번듯한 은행에 다니고 있었죠. 1983년에 입사해 지점에서 8년 현장 경력을 쌓은 후 본사 인사부에서 일했어요. 당시 제 관심사는 해외 점포에 파견되어 근무하는 것이었어요. 주재원 자격도 얻어 관례상 발령이 눈앞에 있었고, 이를 위해 입사 후 영어 공부를 꾸준히 했죠. 저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미국 점포 근무를 꿈꾸면서요. 하지만 34개나 되던 해외 점포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더군요. 회사의 존립마저도 걱정해야 하는 위기가 불어 닥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죠.”
둘 중 한 명 나가라 강요하던 ‘지옥’
이후 회사에서 벌어진 장면들은 그야말로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1만 명 가까이 되던 직원 중 절반은 명예퇴직 대상이 됐다. 인사부 담당자 5명이 5000명에게 대상자임을 전화로 알렸다. 저승사자 역할을 한 사람 중에는 최 씨도 있었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눈물 젖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선배이자 동기이자 후배였다. 형편없는 음질의 구식 전화였지만 감정은 여과 없이 전달됐다.
“못할 짓이었죠. 딱 5일째 되던 날 저도 사표를 썼어요. 통보를 받은 어느 누구도 저에게 심한 말을 하지 않았지만, 제가 받는 스트레스가 너무 크더라고요. 직전까지 실적이 좋았던 우수사원들도 거래처가 줄도산한 탓에 저평가자가 되면서 가차 없이 잘려나갔어요. 해외 점포들도 모두 폐쇄되면서 제 꿈도 함께 날아갔죠.”
불과 며칠 전까지 9시 뉴스는 우리 경제의 건실함을 알렸다. 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외환위기는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최 씨는 “삶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증언한다.
“번듯한 명함을 들고 참석하던 동창회 참석 인원은 10분의 1로 줄었죠. 친구 부인들은 마트 계산원 같은,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자리를 찾아 나섰어요. 자영업 전선에 뛰어들어 망한 친구도 많았고요. 은행에서 정직원으로 근무하던 청원 경찰은 300만 원 가까이 되던 월급이 3분의 1로 줄었고, 신분도 계약직으로 전환됐죠.”
퇴사 이후의 삶은 ‘실패 사례집’
당시 41세였던 최 씨. 이후 이 가장의 인생 여정은 ‘외환위기의 세대’가 겪을 수 있는 모든 실패 사례를 보여주는 듯했다. 은행에서 나와 입사한 외국계 보험회사에선 입사 초반 억대 연봉의 ‘꽃길’을 걷는 듯했지만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결국 회사를 나와야 했다. 해외 발령을 위해 준비했던 영어 실력으로 차린 입시학원도 초창기엔 잘됐지만 건물주와의 분쟁으로 보증금을 손해보고 쫓겨나듯 나와야 했다. 특허기술을 바탕으로 새집증후군 제거 회사를 차렸지만, 후발 업체의 덤핑 경쟁으로 쓴맛을 봤고, 청소 프랜차이즈에 가입했다 본사의 부도로 가맹비만 날렸다.
비슷한 과정을 겪은 많은 가장처럼 그 역시 많은 것을 잃었다. 우울증을 겪었고, 술에 의존하는 시간도 늘었다. 대출을 주선했던 은행 선배를 다시 볼 면목도 없어졌고, 피해의식에서 한동안 벗어나지 못했다.
“정말 나락으로 떨어졌을 땐 친구가 며칠에 한 번 보내주는 막걸리 값에 의존해 살았을 정도였어요. 아내가 융통한 생활비로 겨우 살아갔죠. 집과 차는 이미 제 것이 아니었고요. 나에 대한 원망이 계속됐죠. 그래도 그 과정에서 날 버티게 해준 것은 공부였어요. 책과 강연을 읽고 들으며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았어요. 결국 외환위기가 어쩔 수 없는 과정이었음을 깨닫고 자책을 멈췄어요. 있는 그대로의 날 사랑하는 방법을 깨달았죠.”
새로운 직장에서의 성공적 출발
그리고 2015년, 그는 제주행을 선택한다. 서울에서 갑들에게 매몰되는 직장을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나이 들면 서울을 벗어나 살고 싶은 소망도 있었고, 당시 제주엔 중년도 할 만한 일거리가 있을 거라는 추천도 있었다. 그는 그렇게 59년간의 서울생활을 정리했다.
“안 해본 것이 없어요. 렌터카 회사와 주유소에서도 일했고, 호텔에선 프런트부터 시설관리, 청소까지 했어요. 하지만 한 번도 나를 낮게 보거나 일을 얕잡아본 적은 없습니다. 세간이 주는 가치관에 연연하지 않고, 오랜만에 행복을 느꼈죠. ‘러브 유어셀프’를 들으며 방탄소년단의 팬이 된 것도 이 즈음이죠.(웃음)”
그러다 우연히 제주도청에서 노사발전재단의 지원 책자를 본 것이 또 다른 터닝포인트가 됐다. 제주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의 소개로 2018년 4월 19일, 그의 전공과 다양한 사회 경험을 인정받아 화장품 회사인 제주햇살담음의 행정 및 연구실장으로 입사한다. 실로 오랜만에, 사무실 책상 앞자리로 복귀한 것이다.
제주햇살담음은 제주에서 자란 건강한 재료를 바탕으로 유기농 화장품을 만드는 회사다. 온라인 쇼핑몰과 소셜커머스를 통해 전국에 제품을 판매 중인데 입소문을 타고 늘어난 충성고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지난해보다 두 배 늘어난 매출 달성도 눈앞에 두고 있다.
“직원 7명이 일하는 작은 회사이다 보니 연구개발에서 제품 영문번역, 세무·회계 관련 업무까지 맡고 있어요. 회사에서 번번이 실패했던 각종 지원제도에 도전해 중장년·청년 지원제도 등의 지원금도 확보했죠. 회사 자금이나 매출에 기여할 수 있어서 보람이 커요. 대부분의 중소기업들이 젊은 직원을 선호하는데 마케팅이나 경영, 금융, 행정 등 다양한 분야의 경험자들은 중장년임을 알아주셨으면 해요.”
그는 비슷한 아픔을 겪어온 또래의 동료들에게도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내려놓는 것이 필요해요. 눈높이를 조금 낮추고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일자리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일자리에 대한 기준이 낮아져도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나 자신감은 잃지 말기를 당부드려요.”
이런 기분이었다. 시원하게 속이 뻥 뚫리고 세상이 진짜 내 것 같은 느낌 말이다. 노곤한 몸을 일으켜 잠에서 깰 때까지도 몰랐다. 사람들이 왜 이 새벽에 뛰겠다고 모이는가 생각했다. 그 생각은 너른 호수가 눈에 들어오고 푸르른 나무 사이를 지나다 햇살이 몽환적으로 몸을 감싸는 순간 사라진다. 아침에 달리는 느낌이 이런 것! 하루를 만나고 또 만나다 보니 15년 한결같이 같은 곳을 바라보며 뛰게 됐다는 사람들을 소개한다. 바로 ‘런조이일산마라톤클럽’이다.
매주 토요일 아침 6시. 일산호수공원 제1주차장에서 호수공원 쪽으로 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런조이일산마라톤클럽 회원들이 삼삼오오 모이다가 금세 40명에서 50명으로 무리를 이룬다. 시간이 되면 빙 둘러서서 함께 몸을 풀고 뛸 준비를 한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벤치에 놓인 과일과 물을 나눠 마시고 난 뒤 대열을 맞춰 호수공원 트랙을 뛰기 시작한다. 매번 이렇게 모여 호수공원을 두 바퀴 뛰면 일정이 마무리된다. 말이 쉽지 일산호수공원 두 바퀴는 10km 코스를 의미한다. 이들은 매주 수요일 밤과 토요일 새벽에 만나서 어김없이 뛴다고 했다. 사실 런조이마라톤클럽은 일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서울 동작구의 보라매와 여의도, 잠실 등지에서 먼저 생겨났고 일산은 마지막에 조직됐다. 게다가 꽤 유명한 마라토너가 창단한 클럽이라고 이희준 훈련감독이 말했다.
“이 클럽은 이홍렬 감독님이 마라톤에 대한 열정을 담아 ‘뛰는(RUN) 기쁨(JOY)’이란 이름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나라에서 10년 동안 넘어서지 못하던 2시간 15분대의 벽을 1984년 동아마라톤대회에서 1초 앞당겨서 깨신 분입니다. 국가대표도 오래하셨고 마라토너 출신 첫 체육학 박사이십니다. 저도 감독님께 배웠죠.”
특히 런조이일산마라톤클럽이 받은 혜택이 있다면 이홍렬 감독이 초창기부터 꽤 오랜 시간 일산에 거주했다는 것. 다른 지역 클럽은 애써 찾아갔다면 일산은 매번 와서 함께 훈련하고 뛰었다. 바탕이 튼튼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꾸준하게 회원들이 찾아온다고. 매주 이렇게 모여서 뛰면서도 줄곧 하는 얘기는 또 마라톤 이야기다. 회원들은 자세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다 뛰고 나면 다 같이 몸을 푼다. 15년 된 초창기 회원도 매주 나와 뛰고 있고 적게는 3년, 평균적으로 10년 정도 이곳에서 마라톤 경력을 쌓아온 베테랑이 많다.
사뿐히 뛰는 아름다운 꽃중년 미녀들
런조이일산마라톤클럽 부회장을 맡고 있는 정혜경 씨는 이곳에서 10년째 뛰고 있는 베테랑 중 한 명. 취재를 할 때도 뛰면서 이야기하자고 할 정도로 자신감과 활기가 넘쳤다. 팔다리가 길고 여린 체구의 그녀에게 “요즘은 여자들을 위한 실내운동이 많은데 왜 마라톤을 선택했냐”고 묻자 참 단조로운 답이 돌아왔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었거든요. 나중에 지인들이 뼈가 부러질 거라면서 말리더라고요. 물론 여자로서 꺼려지는 게 있죠. 햇빛에 노출되어 주근깨도 생기고 피부 걱정이 돼요. 그런데 야외에서 뛰다 보니까 실내운동은 생각만 해도 답답해요. 매일매일 다른 풍경을 보여주는 자연과 호흡하면서 뛰는 느낌이 정말 좋습니다.”
7년 전 갑상선암 수술을 한 뒤 1년 쉰 기간을 제외하고는 매주 호수공원 트랙을 돌고 있다. 덕분에 남들이 걱정하는 골밀도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고 했다.
“완전 정상이에요. 갑상선암 수술하면 골밀도가 문제라던데 저는 전혀 그런 거 없고 지금은 갑상선 약도 끊었어요. 마라톤 덕을 확실히 봤죠.”
긴 머리 휘날리며 호수공원을 뛰는 또 한 명의 미녀가 있다. 올해 4월 보스턴마라톤대회에 참가하고 돌아온 정경화 씨다.
“작년에 개띠 선배님들이 보스턴에 다녀왔는데 너무 좋으셨다며 자꾸 바람을 넣는 거예요.(웃음) 그래서 보스턴마라톤대회 참가자 2기가 꾸려졌습니다. 보스턴마라톤대회에는 42.195km 풀코스밖에 없어요. 그런데 진짜 말로만 들어서는 이해하지 못할 감동이 있어요. 동네가 온통 축제 분위기이더라고요. 다들 손 흔들어주고요. 첫발부터 결승점까지 계속 감동이에요. 눈물 날 것 같았어요.”
마라톤 경력 3년, 과감한 도전을 하고 감동까지 만끽하고 돌아왔다는 그녀의 눈빛이 촉촉하게 빛났다.
팔순잔치 삼아 참가한 보스턴마라톤대회
런조이일산마라톤클럽에서 단연 눈에 띄는 사람은 바로 이명희 씨다. 이 모임의 최고 연장자이지만 열정만큼은 20대를 방불케 하는 인물. 젊은 회원들하고 뛸 때도 뒤처짐이 없을 뿐만 아니라 80대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다리 근육도 단단해 보였다. 그의 마라톤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작년에 참가했던 제122회 보스턴마라톤대회. 정경화 씨가 언급한 58년 개띠들과 함께 보스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저를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작년에 제가 80세였거든요. 그걸 기념하고 싶었어요. 마침 회원 들 중 작년에 환갑을 맞이한 58년 개띠들이 보스턴에 간다고 하더라고요. 같이 가겠다고 했죠. 생일은 6월인데 팔순 기념으로 4월 말 보스턴에 다녀왔죠. 제가 참가했던 첫 마라톤이 2005년에 열린 ‘보스턴제패기념마라톤대회’였거든요. 그때부터 보스턴에 한 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꿈을 이뤘죠. 폭풍우가 몰아쳤지만 완주는 했습니다.”
현역 시절 공인노무사로 일하다가 정년퇴임 뒤 일산 신도시로 들어오면서 그의 마라톤 인생이 시작됐다.
“2004년부터 였으니까 우리 클럽이 생기기 전부터 뛰었습니다. 일산에는 65세에 이사 왔어요. 그때 제 눈에 운동할 만한 곳이 호수공원밖에 없어서 매일 나왔습니다. 어느 날 보니까 런조이마라톤클럽이 회원을 모집하더라고요.”
이제 정말 마라톤 은퇴를 생각한다면서도 미련을 버릴 수가 없는 모양이다.
“팔십 먹어 마라톤 하면 사람들이 욕해요. 죽으려면 집에서 죽지 미쳤다고 길거리에 죽냐고요.(웃음) 금년까지는 뛰고 싶습니다. 하프 코스에서 10km로 조금씩 줄여나가야죠. 이제는 좀 힘들어요.”
15년을 함께 뛰다 보니 기념일도 챙긴다. 매년 6월에 있는 클럽 창립 기념일에는 환갑을 맞이하는 회원들을 위해 ‘환갑 마라톤’을 연다. 올해는 정년퇴임을 하는 회원과 함께 양평으로 가서 뛸 예정이다. 혹시 마음속에 질주 본능이 있다면 토요일 아침 6시 일산호수공원으로 나가보시라.
※ 라이프@이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소개하고 싶은 동창회, 동호회 등이 있다면 bravo@etoday.co.kr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솔향기길 1코스는 충남 태안군 이원면 만대항에서 꾸지나무골 해수욕장까지 약 10km 구간에서 전개된다. 숲길을 거닐며 바다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명품 둘레길. 구간의 일부만을 탐방해도 뿌듯하다. 어느 구간이건 차량 접근도 쉽다.
뭍의 끝자락에, 작은 포구 만대항. 포구에선 들뜬다. 드나드는 고깃배들의 생기 때문이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대낮부터 술 마시는 어부들의 파안대소 때문이다. 한나절을 머물러도 무료하지 않은 게 포구다. 정들기도 정 두기도 쉬운 게 어항이다. 쏠리는 마음을 거두고 산길로 접어든다. 만대항은 솔향기길 1코스의 기점이다.
이 둘레길은 바다로 가는 산길이다. 해변으로 이어지는 숲길이다. 산과 바다가 동행하는 해안길이다. 산이 있어 푸르고 바다가 또한 푸르러 천지가 통째 푸르고 푸르다. 잿빛 도시에 발목 잡힐쏘냐, 한달음에 내달아 닿은 게 감옥 밖이다. 철창 없는 철창. 비정한 성시(成市)를 그리 이르는 게 아니다. 감옥이 마음 안에 있지 어디 밖에 있더냐. 좀스러운 자는 자주 마음의 해방을 갈구한다. 그런 나에게 산과 바다는, 자연은 특별사면을 허한다. 자연이라는 유토피아 외 믿을 만한 의지처가 다시 있던가.
해송 숲 사이로 구불구불 길이 펼쳐진다. 뇌수까지 건드리는 솔바람, 콧등을 치는 솔향기에 심취한다. 창고에 처박힌 오감이 훌훌 먼지를 털고 깨어나는 순간이다. 감관이 잠 깨면 눈앞의 사물이 자못 새롭게 느껴진다. 모처럼 공정한 눈으로 풍경의 진실을 살핀다. 나는 지금 숨을 헐떡이며 오르막을 오르고 있다. 그러나 오르막을 오르막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보는 방향에 따라 오르막은 내리막이며, 내리막은 오르막이다. 숲 덤불에선 이 꽃이 피고 저 꽃이 진다. 이게 단지 꽃만의 일이겠는가.
숲길 저 너머로, 저 아래로 자주 바다가 보인다. 쪽빛? 코발트블루? 울트라마린? 바다색은 찬연히 푸르다. 반할 게 색뿐이랴. 광활해서 장엄하고, 잔잔해서 은은하고, 쾌청해서 요요한 저 바다. 이 모든 미덕의 총합을 ‘그지없는 아름다움’이라 해두자. 아련한 수평선 위로는 하늘이 피어오른다. 해는 중천에 떠 활을 겨누듯 바다를 겨냥해 햇살을 쏜다. 그러자 수면에 어리는 수천수만의 물비늘들. 찰나에 반짝이다 찰나에 스러지는 저 시리도록 눈부신 빛의 알갱이들. 윤슬이라고 하지.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는 건 이슬이지만, 윤슬은 순간에 명멸한다. 저건 어쩌면 잡아둘 수 없는 시간의 허무한 잔상이다. 야야, 덧없다, 생성과 소멸이 한 몸이다, 그런 뉴스를 전하며 황홀하게 떠난다, 윤슬.
산은 낮고, 숲은 무성하다. 길은 거칠 게 없으니 구미에 맞다. 다정도 하여라. 나무들은 그 따뜻한 손을 내밀어 숲길로 인도한다. 내 몸을 어루만진 해풍은 산을 넘어 어느 꿈의 교각 아래에 나를 눕힐 것인가. 딱딱한 바위 벼랑에 뿌리 내린 나무들은 어떤 마법의 묘약을 마셨기에 저토록 굳센가. 보매 의연한 초목이며 사람만 갈피없이 설렌다. 수려하기로는 또한 산경(山景)이며 경이롭기로는 바다다. 보라, 솔향기길의 명소를, 미모를, 쾌활을…. 당봉, 가마봉, 여섬, 칼바위, 용난굴 등 빼어난 조망과 신비를 자랑하는 경승이 즐비하다.
솔향길에는 ‘보은의 길’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다. 지난 2007년, 이른바 ‘태안 기름 유출사건’ 당시 전국에서 사람들이 쏜살같이 달려와 불철주야 해안에 들러붙은 기름을 닦아냈다. 당시의 자원봉사자 123만 명이 작업하기 편하도록 지역민들이 황급히 길을 닦고 밧줄을 매단 게 솔향기길의 시발이었다지.
흔쾌히 발 벗고 나섰던 사람들의 선의는 실로 고귀하다. 일왕에게 도시락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의 열정에 맞먹을 장쾌한 행장이었다. 지옥으로 통하는 길조차 선의로 분장된 세태라지만, 계산이 없는 선의는 얼마나 위력적인가. 봉사자들의 선의에 찬 연대는 결국 자연을 살렸고, 사람의 마을을 데웠다.
홀연히 날개를 펼친 선의로 세상과 만나는 자, 그는 사랑을 아는 자다. 자연에 기생하길 습으로 삼은 게 인간사이지만, 그들은 공생의 도리를 알아 사랑을 실천했으니 매혹의 행장이지 아니한가. 솔향기길에 감도는 솔향에 살포시 포개진 저 선의의 향. 두 겹 향이 가슴을 채운다. 일몰의 수평선엔 어느덧 놀빛 너울거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