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는 청년이 많지 않고 인재를 구하기가 어렵다. 반면 퇴직을 앞둔 중년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이 같은 상황을 이용해 지방 소재 7년차 중소기업에 서울에 거주하는 50대 전문가에게 주거비를 별도로 지원했다. 신사업 성장세에 따라 후속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남았다.”
9일 서울시50플러스재단에서 연 '50+ 기술전문가, 중소기업에서 살아가기' 온라인 포럼에서 공태영 기술자숲 대표가 ‘50+기술 전문가와 중소중견기업 매칭 사례’ 주제 발표에서 이 같이 말했다.
공 대표는 “예상과 달리, 고 경력 전문가들은 유연근무형태나 비교적 낮은 임금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며 50+전문가와 기업을 연결해 주면서 새롭게 안 사실을 추가로 소개했다.
기술자숲은 제조산업 전문가 매칭 플랫폼 기업으로 서울시50플러스재단이 주관하는 ‘50+기술전문가 매칭지원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이 사업에 참여한 전문가 73명 중 68%가 유연근무형태를 선호했으며, 55%는 희망급여로 300만 원 이하를 선택했다.
또 기술자숲이 진행한 ‘2021 하드웨어 Start Up! 고 경력 전문가와 함께 Scale Up!’(SUSU) 사업에 참여한 기업 94%가 ‘조건에 적합하다면 50대 전문가와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다’고 답했다. 공 대표는 “기업이 성장하고 기술력을 보완하기 위해서 전문가 나이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설명했다.
한편 공 대표는 중소기업과 50+전문가 매칭에서 가장 큰 실패 원인으로 50+성공사례 부재와 사회적 긍정 문화 부재를 꼽았다. 그러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중장년층 전문가로 인한 성공 사례가 많아지거나 금전적 지원이 늘어나면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공태영 대표는 인턴과 유사한 작은 프로젝트를 진행해 성공 경험을 쌓은 뒤 장기적인 일자리 연계를 유도하고, 추가로 신규 일자리 창출까지 이끌어내는 방식을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업과 전문가가 각개 전투를 하는 대신 서로 이런 매칭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여러 주체들이 협력 모델을 구축해 문화를 확산하고 선도해야 한다”며 “이 자리가 다양한 아이디어가 도출되고 새로운 협력 모델이 만들어지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발표를 마무리했다.
이어진 ‘50+기술 전문가와 스타트업의 협업’ 발표는 하드웨어 액셀러레이터 기업 ‘N15’ 배중구 팀장이 맡았다. N15는 서울시와 용산전자상가와 협력으로 ‘메이커스페이스’를 탄생시킨 기업이다.
배 팀장은 “제조업에서 많은 부가가치가 창출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라며 “아이디어의 빠른 사업화가 부가가치를 창출한다는 사실이 명확하지만 현실적 어려움으로 현실화가 되지 않고 있어 이 어려움을 해결해주고자 N15가 출범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제조산업은 젊은 패기로만 승부하기 어려운 영역”이라며 “전문적이고 축적된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스타트업 측은 아이디어가 있지만 제조 파트너와 소통이 어렵고, 제조 생태계를 이해하고 있는 전문인력이 필요하다. N15 측에서 떠올린 해답은 제조PM(프로젝트 관리)과 시니어 기술자, 제조공장을 연결하는 방식이다. 이에 공장의 니즈와 스타트업의 니즈를 조율하며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플랫폼을 구축했다.
20대 스타트업 기획자는 50대 기술자의 지혜와 경험을 원하고, 퇴직을 앞뒀거나 이미 퇴직한 50대 전문가는 구직을 원한다. 그러나 사업을 진행하다 보니 20대 기획자와 50대 기술자 사이에는 세대 차이로 인한 문제가 발생한다.
배 팀장은 “30대 실무자로서 스타트업의 MZ세대와 50+기술 전문가인 베이비부머 세대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메울지 고민한 끝에 세 가지 솔루션을 도출해냈다”고 말했다. 직급 체계를 개선해 수평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만들고, 제조워크숍을 통해 직접 만나 소통하는 등 소통 채널을 다각화하며 제조 팀에도 기업과 동일한 명함을 제공해 ‘원 팀’(one team)이라는 인식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등의 방식이다.
그는 “기술의 빠른 변화, 인구 감소, 평생 학습 등으로 조직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며 “AI가 대체하기 어려운 영역의 50+기술전문가가 가진 노하우, MZ세대의 창의력과 열정이 합쳐져 시너지를 기대한다”며 발표를 마무리했다.
이어 김원진 기술전문가가 ‘50+기술전문가의 내가 경험한 재취업’을 주제로 포럼의 마지막 발표자로 나섰다. 그는 IT 기반 마케팅 기업 ‘원트리즈뮤직’에서 ‘조달청 나라장터’에 공고된 IT 사업의 제안서를 작성하고, 이에 대한 지원 업무를 수행 중이다.
그는 퇴직 전까지 전자부품 제조기업에서 전산실을 운영했으며, 정부 및 공공기관 정보화 관련 사업기획, 시스템운영 및 보안관리 총괄을 맡았다. 개인정보보호 인증심사 등도 수행했으나 퇴직을 앞두니 실무에서 물러나 자문위원으로 역할이 축소됐다.
김 전문가는 “나 역시 퇴직 후 사회생활에 대한 고민을 했었다”며 “경력과 직위에 따라 다르지만 퇴직 직전에 맡는 업무는 관리직 성격이 강하므로 전문성과 업무 연속성 복구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재난관리사 자격증 취득, 정보통신중급기술자 인증을 발급하는 등 전문성을 살리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그럼에도 일반 기업과 IT 사업에 참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판단해 정부, 공공기관 사업의 평가위원으로 활동하거나 컨설팅 지도 업무를 수행했다.
그는 “기술과 트렌드가 빨리 변해 회사의 기존 직업과 협력하기 어려웠다. 자료가 부족해서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맡아야 했을 때는 스트레스도 컸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지금은 문제가 원만히 해돼 만족하며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원진 전문가는 퇴직 후 구직을 원하는 50+기술전문가에게 퇴직 후 자신의 적응력이 얼마나 되는지 서울50+ 인턴십에 참여해 판단하기를 권했다. 그는 “개인의 능력에 대해 냉철하게 판단하는 것이 필요하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생활에서 자존감에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어 “나 역시 50+기술전문가이기 때문에, 서울시50플러스재단에서 내가 맡을 수 있는 분야의 사업이 있다면 참여하겠다”며 발표를 마무리했다.
한국화가 김병종(69)은 남원시에 그림 400여 점을 기증해 미술관을 출범시켰다. 어떤 뜻이 있었을까?
“내 고향 남원은 소리의 성지이자 문예적으로도 명성을 날린 고장이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문화예술의 빛이 퇴색했다. 작은 미술관 하나쯤 필요하다는 생각이었고, 일조하고 싶었다. 그림에 재능 있는 학생들에게 미술관이 멘토 역할을 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도 컸다. 여건이 좋으면 남원에서도 피카소 같은 화가가 나올 수 있는 거다.”
김병종은 전통 수묵의 기법과 정신에 서양의 미학을 수용한 회화로 할 말 다하는 작가다.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개방적인 작풍이 거둔 성과 역시 돌올하다. 무엇보다 그는 안주하지 않는 정신을 창작의 무기로 삼았다. 작품 경향의 변주가 잦은 걸 보면 그걸 알 수 있다. ‘바보 예수’ 연작에서 ‘생명의 노래’로, ‘송화분분’(松花紛紛)으로, ‘풍죽’(風竹)으로, 그의 테마는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변전했다.
“요즘 미술계엔 단일한 주제나 소재를 지속해야 살아남는다는 불문율이 있다. 여기엔 미술 시장의 자본 논리가 가장 큰 배경으로 작용한다. 하나를 평생 파는 화가의 작품이어야 컬렉션의 투자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다. 이건 기이한 풍조다. 작가는 창조적 자기파괴를 하는 존재여야 한다. 피카소는 아홉 번이나 경향을 바꾸었다. 괜히 피카소가 아니다.”
‘바보 예수’ 이후 선생의 그림은 하나같이 밝고 따뜻하다. 삶에 붙게 마련인 고독이나 고통의 기미가 없다. 천성이 낙천적인가?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가족의 생계를 도맡다시피 하셨지만 푸념이나 원망이 전혀 없었던 어머니의 긍정적인 눈길, 낙천적인 DNA를 물려받은 것 같다.”
작품의 테마와 소재가 주로 자연이다.
“고향의 산천이 창작의 모태이지. 만산홍엽, 강물, 들판, 보랏빛 자운영 등 가난했지만 풍성한 자연 안에서 행복했던 유소년기의 체험이 기억의 창고 안에 가득하다. 그걸 하나하나 꺼내 풀어놓은 게 작품이다.”
송홧가루의 노란 미립자를 형상화한 ‘송화분분’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세상의 저 너머까지 보이는 것 같아 아득하고 아찔하다.
“어릴 적 봄날, 노란 뭉게구름처럼 바람에 실려가는 송홧가루에서 받은 감동을 되살린 작품으로 생명의 섭리를 그렸다. 이어령 선생께선 ‘송화분분’에 대해 ‘생명의 바깥에서 생명을 그리던 김병종이 마침내 생명의 안에서 생명을 그렸다’고 과분한 평을 하시더라. 난 여전히 미흡한 작가인데….”
피부처럼 정착한 겸양이 느껴진다. 그림엔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자욱하다. 다독의 힘이 반영됐다. 김병종은 빼어난 에세이스트이기도 하다. 매달 보름은 그림을, 보름은 글을 쓴단다. 이런 그에게 눈총을 쏘는 이들이 많다.
“은사님조차 왜 잡문으로 어지럽히느냐 질책하셨다.(웃음) 완전한 성공을 위해 그림만 하라는 식의 조언과 비난을 자주 들었다. 그러나 그리기만 하면 지적 공허감이 생긴다. 글을 읽고 써야 가슴에 차오르는 게 있다. 글은 내게 그림을 퍼내게 하는 수원지다.”
그에게 글과 그림은 한 몸이다. 글 쓰는 본새로 굶주린 듯 그리는 것!
남원 하면 추어탕부터 떠오르나? 그럴 사람이 많겠다. 널리 이름난 향토음식이니까. 소리의 본향으로도 유명한 게 남원이다. 동편제 판소리 가왕 송흥록과 명창 박초월을 길러낸 민속국악의 옥토이자 산실이다. 광한루와 지리산도 남원의 얼굴이다. 이래저래 여간한 고장이 아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즐길 게 많다. 여행자들의 기쁜 순례지다. 최근 새로운 명소로 떠올라 사람들을 줄줄이 끌어들이는 똘똘한 공간이 하나 있다.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이하 ‘김병종미술관’)이 바로 그렇다. 요천강변 춘향테마파크 안에 있다.
8월의 땡볕이 가혹하다. 게다가 마스크로 입과 코를 틀어막고 돌아다녀야 하니 이거 참 ‘병맛’이다. 세상은 알고 보면 아름다워 희망과 긍정을 노래할 가치가 충분하지만, 요즘은 뭐 좀 그렇다. 물심양면의 불황으로 모두 시난고난, 실의에 빠진 도스토옙스키의 표정처럼 우울하다. 의연한 건 자연이다. 사위로 펼쳐지는 자연 풍광이 싱그러운 김병종미술관으로 들어서자 생기가 돋는다. 야산 언덕배기에 있는 미술관 저 멀리로 지리산 연봉이 보인다. 천하제일 방랑 나그네인 구름이 살랑살랑 산을 넘는다. 흰 구름 사이로 드러나는 새파란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처럼 순수하다. 미술관 인근에서도 푸른 숲이 술렁거린다. 자리 한번 옳게 잡았다. 이 미술관은 전원형 미술관이다.
김병종미술관은 2018년 3월에 개관했다. 한국화가 김병종이 기증한 작품 400여 점을 기반으로 설립됐다. 이후 길차게 자라는 대나무처럼 성장했다. 별로 주목받지 못해 서러운 게 소도시에 있는 미술관이다. 김병종미술관은? 다르다. 개관 이래 다녀간 관람객이 17만여 명에 이른다. 유별나게 화려하거나 거대한 미술관이 아님을 감안하면 이변에 가깝다. 내실과 매력을 갖추면 지방 미술관에도 근사한 피드백이 돌아온다는 걸 입증했다. 작가의 예술과 대중의 일상이 겉도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었다. 명소로 떠오른 까닭이 이렇게 완연하다. 미술관을 통해 남원을 홍보하고, 지역 발전의 동력 하나를 보태고자 한 설립 주체 남원시의 의도가 빗나가지 않은 셈이다.
올봄 이 미술관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주관하는 ‘2021~2022년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국내 명소들의 탐방객 숫자 등 빅데이터를 근거로 고른 이 ‘100선’에 든 미술관은 세 개다. 김병종미술관 외에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원주의 뮤지엄 산이 뽑혔다. 한국의 열악한 문화적 풍토를 병증으로 진단하는 목소리가 많지만 세상은 변하고 있다. 미술관에도 관광지처럼 일쑤 인파가 몰려드는 게 아닌가. 억눌린 일상의 출구를 예술작품에서 찾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아무려나 김병종미술관은 탕탕 기세 좋게 행진한다.
그렇다면 이 미술관은 무엇을 연료로 항진하나? 우선 김병종의 작가적 무게가 헤비급이다. 그는 자기만의 날개를 휘저어 미술의 창공을 비상하는 화가다. 재미와 재치로 터진 실밥 없이 잘 바느질한 스테디셀러 ‘화첩기행’으로도 지명도가 높다. 호젓하고 청명한 분위기에 감싸인 미술관의 입지와 미니멀한 노출콘크리트 건축물의 미감도 감성을 자극해 호감을 산다.
무엇보다 물 정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나무와 잔디로 채운 정원의 일부는 평범하지만 조경의 축을 이룬 물 정원은 기발하다. 사각형 수조 형태의 얕은 못 다수를 계단식으로 배열해 만들었다. 그 절묘한 물 공간 복판으로 난 동선을 따라 건물로 진입하게 돼 있는데, 관람객들은 이 대목에서 가벼운 설렘 이상의 매혹을 느끼게 마련이다. 잔잔한 수면엔 햇살이 아롱지며 연신 신비한 무늬를 그린다. 물에 드리워진 나무와 구름과 하늘의 그림자는 유령처럼 미묘해서 아름답다. 굴레가 없어 자유롭고 무방비 상태로 완전한 게 물이다. 그래서 상선약수(上善若水)다. 목줄 매단 강아지처럼 끌려다니는 삶일지라도 내면에 물의 정신을 담고 살면 견딜 수 있다. 이렇게 물의 정원은 물을 명상하고 삶을 돌아보게 한다. 낭만과 추억을 길어 올리게 한다. 그러라고 만든 공간이겠지.
동화책처럼 쉽게 읽히는 작품들
2층으로 지은 건물 안에는 전시장 세 개가 있다. 당연하게도 김병종미술관에서는 김병종 외에 다른 작가들의 기획전도 빈번하게 열린다. 지금은 김병종의 기증 작품 특별전 3차 시리즈 ‘생명의 숲과 바다’전(10월 17일까지)이 펼쳐진다. 기증 작품 중 90여 점이 나왔다. 대다수가 미공개작이라 애호가들의 구미에 맞을 전시회다.
화가란 다르게 보는 눈과 다르게 생각하는 머리를 장착한 존재다. 현상의 외피를 걷어내고 본질을 발굴해 캔버스에 옮긴다. 자신만의 인생관과 심미안으로 세상의 행간을 읽는 것인데, 김병종의 초기 작품 ‘바보 예수’ 시리즈는 흑인 예수를 그리는 등 사회의식을 드러냈다. 사뭇 독자적인 수묵 기법을 구사해 국내 화단은 물론 유럽 일각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는 ‘생명’을 화두 삼아 자연을 그리는 쪽으로 급선회했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경을 헤맸던 경험이 야기한 전환이었다. 이번 특별전에 걸린 작품 대부분이 이 시기에 그려졌다. ‘생명 작가’라 불리기 시작한 시절의 그림들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김병종의 그림을 보자면 그건 환희이자 순수이며, 존엄이자 행복이다. 신이 고안해 삼라만상에 고루 주입한 사랑의 발현이며, 비루하거나 고통스러울 일이 없는 화평의 지속 상태다. 흥미로운 건 술술 읽히는 동화책처럼 쉽게 다가오는 그림이라 감정이입이 쉽다는 사실. 아이들, 꽃, 학, 토끼, 닭, 물고기, 산, 물, 구름 등이 등장하는 화폭마다 소박하고 밝고 따뜻하다. 심지어 어린아이가 장난으로 휘갈긴 그림처럼 천진하다.
딱한 건 그림을 보는 사람 쪽이다. 그림은 생명의 생명다운 힘으로 저토록 아름다운데 나의 삶은 왜 피폐하지? 그런 상념, 문득 들솟기 십상이다. 우리는 모두 오욕칠정의 탁류를 헤엄치는 가여운 존재이지 않던가. 그러나 그쯤에서 멈추면 멍청이의 잡념일 뿐이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 성격이 좋아진다. 김병종의 그림을 바라보면 막힌 가슴이 어느덧 열린다. 잃어버린 동심과 행복을 돌아보는 사이에 삶의 쇠사슬 같은 게 풀려나가는 기분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김병종의 환한 그림이 주는 자극과 감흥의 약발이 이렇게 세다. 가슴속에 고인 불만과 불안을 털고 돌아가게 한다.
● Exhibition
◇앨리스 달튼 브라운 : 빛이 머무는 자리
일정 10월 24일까지 장소 마이아트뮤지엄
앨리스 달튼 브라운은 지난 50년간 건물의 외부와 실내의 경계, 그리고 실내에 빛이 머무는 자리를 그려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해외 최대 규모 회고전이다. 드라마 ‘부부의 세계’, ‘미스티’, ‘비밀의 숲’ 등에 아트 프린트가 소개돼 인기몰이를 한 ‘황혼에 물든 날’(Long golden day)의 오리지널 유화 작품과 마이아트뮤지엄 의뢰로 제작한 신작 3점을 포함해 2~3m 크기의 대형 유화와 파스텔화도 소개한다. 이외에도 작가의 작품 활동을 총망라하는 작품 8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자연 소재와 인공 소재의 대비를 섬세하게 그려내는 앨리스 달튼 브라운의 작품은 빛과 물, 바람이 어우러진 청량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준다. 오디오 가이드와 도슨트를 운영해 작품의 이해를 높일 수 있으며, 어린이 대상 키즈 아틀리에와 시즌 이벤트 프로모션 등 전시와 연계한 다양한 교육·문화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아트 오브 뱅크시
월드투어 인 서울
일정 2022년 2월 6일까지 장소 갤러리아포레 더 서울라이티움
‘얼굴 없는 거리의 화가’, ‘거리의 아트 테러리스트’ 등으로 불리는 세계적인 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의 행동하는 예술 세계를 관객들과 공유할 체험형 전시가 아시아 최초로 서울에서 열린다. 뱅크시는 사회·정치적인 문제와 예술의 허례허식, 미술계의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퍼포먼스로 화제를 일으켰다. 그는 도둑 전시와 길거리 그림 판매, 아트 테러, 다큐멘터리 연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본주의에 잠식된 예술계를 조롱했다. ‘뱅크시가 누군지 아무도 모르지만 모두 그가 누군지 안다’라는 말까지 생겨났을 정도로 뱅크시의 정체는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다. 이러한 익명성 덕분에 불평등하고 억압된 세상에서 사회·정치적인 문제에 침묵하지 않고 자신의 메시지를 자유롭게 담아 표현할 수 있었다. 스스로를 ’예술 테러리스트‘라 칭해온 뱅크시는 디스토피아 같은 장소에 그래피티 예술을 그려 넣음으로써 우리가 처한 현실을 풍자한다.
● Book
◇치매니까 잘 부탁합니다 (노부토모 나오코·시공사)
늙어가는 부모가 가장 두려워하는 병은 ‘치매’다. 자식에게 끝을 알 수 없는 부담을 지게 하는 건 어떤 부모든 피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 노부토모 나오코의 어머니도 그랬다. 완벽한 주부이자 자랑스러운 어머니였던 그녀는 딸에게 뜻밖의 새해 인사를 전한다. “올해는 치매니까 잘 부탁합니다.” 이 책은 다큐멘터리 영상감독인 노부토모 나오코가 치매를 앓는 어머니와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아버지의 애틋한 나날을 기록한 에세이다. 치매 전후로 질병 당사자, 가족,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생활이 어떻게 바뀌는지 여과 없이 보여준다.
책은 치매를 슬프고 비참한 것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치매 진단을 받은 85세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를 돌보는 아버지. 딸은 카메라를 통해 부모님을 바라보며 비참했던 일을 다르게 받아들인다. 치매 할머니와 귀먹은 할아버지의 맞물리지 않는 어긋난 대화는 훈훈하고 사랑스럽게도 느껴진다.
어머니가 치매 진단을 받고, 아버지가 간병에 뛰어들며 외부의 도움을 거부하던 노부부는 사회와 다시 연결된다. 이 과정을 시간 순으로 전개하는 이 에세이는 우리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노화와 질병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한편, 가족과 돌봄의 의미를 새롭게 일깨워준다.
저자는 어머니를 돌보면서 인간적으로 한 단계 더 성장하고 있음을 느낀다. 저자의 간병 경험을 통해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한 사람의 인생이 질병으로 정의되거나 기억될 수 없고, 우리는 모두 언젠가 늙고 약해지며, 결국 서로에게 의존해야 하는 연결된 존재라는 걸, 간병은 일방적인 희생이 아닌 상호 돌봄이라는 걸 알려준다.
◇보험, 인문학에 빠지다 (이경재 저·바른북스)
보험은 이제 필수품이 됐지만 아직 보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팽배하다. 30여 년 동안 보험을 연구하고 강의한 저자가 보험을 인문학적으로 생각하게 하고, 보험의 새로운 가치를 알려준다.
◇데카메론 프로젝트 - 팬데믹 시대를
건너는 29개의 이야기 (마거리 애트우드 외 28인·인플루엔셜)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하던 14세기, 액자 소설 ‘데카메론’이 사람들을 위로했다. 700여 년 전 ‘데카메론’을 재현하기 위해 ‘뉴욕타임스’가 세계 각지 작가들의 단편을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장명숙·김영사)
한국인 최초 밀라노 패션 유학생, 이탈리아 정부 명예기사 작위 수여자, 구독자 87만 유튜버 밀라논나의 인생 내공을 담은 에세이. 오늘도 고군분투하는 모든 이에게 위안과 희망의 언어를 전한다.
● Stage
◇하데스타운
일정 9월 7일~2022년 2월 27일
장소 LG아트센터
연출 박소영
출연 조형균, 박강현, 시우민, 최재림, 강홍석, 김선영 등
제73회 토니어워즈 최우수 작품상, 제62회 그래미어워즈 최고 뮤지컬 앨범상에 빛나는 최고의 무대가 한국에서 최초로 펼쳐진다. 극작과 작곡·작사를 맡은 아나이스 미첼의 동명 앨범을 극으로 만든 ‘하데스타운’은 2016년 브로드웨이에서 첫선을 보인 후 뮤지컬 애호가들이 가장 주목하는 작품이 됐다. ‘하데스타운’은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한다.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아내 에우리디케를 되찾기 위해 지하 세계로 향하는 오르페우스, 사계절 중 봄과 여름은 지상에서, 가을과 겨울은 지하에서 남편인 하데스와 보내는 페르세포네의 이야기가 지상과 지하 세계를 배경으로 자연스럽게 교차된다.
◇사랑했어요
일정 10월 31일까지
장소 광림아트센터 BBCH홀
연출 임영근
출연 조장혁, 정세훈, 성기윤, 고유진, 홍경인, 김용진 등
독보적인 음악 세계로 대중을 사로잡은 故김현식 주크박스 뮤지컬 ‘사랑했어요’가 광림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故김현식은 한국적 언더그라운드 스타일을 제시했다는 평가받는 싱어송라이터다. ‘비처럼 음악처럼’, ‘내 사랑 내 곁에’ 같은 명곡들을 편곡을 통해 되살린 그의 음악이 다시 한번 세대를 뛰어넘는 감동을 선사한다.
◇카포네 트릴로지
일정 9월 14일~11월 21일
장소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연출 오루피나
출연 이건명, 고영빈, 박은석, 송유택, 장지후, 강승호 등
독보적인 갱스터 누아르 장르의 작품 ‘카포네 트릴로지’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3년 만에 관객을 만난다. 연극 ‘카포네 트릴로지’는 20세기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마피아 ‘알 카포네’가 주름잡던 미국 시카고를 배경으로, 렉싱턴 호텔 661호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선과 정의가 위태롭게 흔들리던 시대의 ‘안티 히어로’ 이야기를 그려낸다. 탁월한 시대상 반영과 풍자, 위트로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내가 가진 좋은 습관과 나쁜 습관의 목록을 죽 적어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좋은 습관보다 나쁜 습관의 개수가 더 많았다. 내가 오죽잖은 인간인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습관 따라 성격이 만들어지고, 성격 따라 운명이 정해진다 했던가. 좋은 습관이 좋은 삶을 가져온다는 기본을 뻔히 알면서도 실족한다. 좋은 습관은 몸에 붙이기 어려운 반면, 나쁜 습관은 나도 모르게 도둑처럼 스며들어 따개비처럼 들러붙는 게 아닌가.
나쁜 습관 중에 최고봉은 분노의 감정을 처리하지 못해 스스로 고통을 불러들이는 멍청한 짓을 반복하는 버릇이다. 평소 지인들은 나를 따뜻하고 다정해 화를 모르는 사람이라 하지만 그거 오진이다. 내 생각에 천국이란 분노가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다. 그래 나름 마음을 다스려 분노를 관리함으로써 천국 건설에 이바지하려 하지만 자주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나는 남들에게 웬만해선 크게 화를 내지 않는 편이다. 이견으로 충돌해도,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넘겨버린다. 알고 보면 사람은 누구나 꽤나 이상하고 꽤나 이기적이고 꽤나 애처로운 존재이니, 가급적 보듬어 내 상처를 줄이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화를 품고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흔하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속에선 화가 부글거리는 것이다.
가족 앞에선 더 좀팽이가 된다. 특히 아버지와의 관계에 전전긍긍이 많다. 천하무적 분노의 화신인 아버지는 여차하면 화를 앞세우는 분이다. 화를 생산하는 장기 하나를 몸 안에 가지고 있는 양 작은 일에도 쉽게 격분하는 캐릭터다. 말도 안 되는 꼬투리를 잡아 분노의 번갯불을 내리칠 때는 정말이지 죽을 맛이다. 때로 대거리를 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고령의 아버지에게 그럴 수는 없는 일. 끝내 참아내지만 안에서 들끓는 화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서 괴로움을 겪는다. 참는 척할 뿐, 이미 나 역시 분노의 정상에 올라선 당장의 실정을 알기에 고통스럽다. 결국은 고통이 겹이다. 꾹 참아내는 고통과, 속에서 올라오는 분노가 가져다주는 고통이 이중으로 겹친다. 참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분노할 것 없이 감정의 평정을 유지하고 싶지만 그게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이 난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일상에서 올라오는 크고 작은 분노의 감정을 능히 해치울 묘안이 내게 있을 리 없다. 다만 내가 모자란 인간이라는 걸 자각하는 것으로 나 자신과 협상한다. 문제의 원인이 내게도 있음을 자인하는 거다. 그 왜 있잖은가? ‘내 탓이오!’ 상대의 분노에 맞서기보다 까짓것 대범하게 받아들여 나의 분노를 허공으로 날려버리지 못한 내 탓!
나는 절집에 관한 책 두 권을 낸 바 있는데, 취재를 위해 돌아다닌 절이 많은 편이다. 궁금한 건 도(道)며 해탈이 무엇인지, 어떻게 마음을 닦아야 걸림이 없어지는지, 뭐 그런 거였다. 도를 말하는 승려들의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고매하고 오묘한 언어로 도를 말하는 방식인데, 너무 관념적이고 어려워 귀에 맺히는 게 별로 없었다. 다른 하나는 아주 쉬운 말로 도를 말하는 방식이다.
나에겐 후자가 구미에 맞았고, 믿음이 갔으며, 소낙비처럼 시원해 두고두고 반추하는 맛이 났다. 이를테면 첩첩산중 암자에서 만난 어떤 노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승려는 한마디로 웨이터라고. 남에게 서비스를 하는 게 본분이며, 완벽한 서비스 맨을 일컬어 도인이라 하는 것이야!” 쉽고 시원하지 않은가? ‘도란 중생의 똥을 치워주는 데에 있다.’ 일찍이 원효도 그렇게 가르쳤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의 원효 버전이다. 모름지기 남에게 나를 아낌없이 쏟으라는 충고들이다. 이타(利他)의 바다에서 살면 수행자이건 중생이건 통한 자라는 메시지다. 나는 이런 언설이 좋다. 내게 쓸모가 커서다. 따뜻한 말 한마디에 인색해질 때, 나쁜 습관의 노예로 헤맬 때, 분노를 통제하지 못할 때 이 말씀들을 새기면 힘이 된다. 문제의 원인이 알고 보면 비좁은 나의 이기심에 있다는 걸 깨우쳐주기 때문이다.
관계의 불화나 분노로 야기되는 고통이 결국은 그릇 작은 내 탓임을 인정하면 뜻밖에도 환하게 밝아지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매사 내 탓으로 돌리고 초연하게 처신하기가 어렵다. 따지고 보면 내 탓이 아님이 자명해 앙앙불락 괴로워지는 경우도 있고, 내 탓임이 분명할지라도 그런 줄을 모르거나 외면한 채 날뛰는 경우는 더 많기 때문이다. 결국은 도돌이표처럼 돌아가 악습과 분노의 처리에 무능한 모습을 드러내기 십상이다.
무엇으로 대책을 삼아야 하나. 정토회 법륜 스님의 얘기에 귀 기울일 만하다. 요점은 이렇다. 명철하고 재미있고 화통한 이 스님에 따르면, 사람의 몸에 붙은 습관과 성격은 고치기 어렵다. 화 역시 습성이 되면 뜯어내기 힘들다. 화가 솟구칠 때마다 전기충격기로 한 번씩 몸을 지지는 충격요법이 가장 확실한 대책이지만 그건 고문이라 잔혹하다. 그렇다면 화가 붙은 대로 태연하게 사는 게 답인데, 이 경우엔 과보(果報)를 감수해야 한다고 한다. 화를 떼어내려고 고통을 겪느니 그냥 놔두고, 대신 창의적으로 살아 인생을 보완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법륜 스님이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다. 화가 치솟아 뚜껑이 열릴 때면 아하, 지금 내가 화를 내고 있구나, 그렇게 자신을 주시해 알아차리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화를 내는지도 모르는 채 무의식적으로 화를 내는 우행에서 벗어나라는 충고다. 아하, 내가 지금 화를 내고 있구나, 또렷이 인식하기를 거듭하다 보면 참회와 각성이 일어나면서 서서히 화의 규모를 줄여나갈 수 있고, 언젠가는 분노 처리에 유능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방법은 상당한 효험이 있다. 내가 사용해본 경험으로는 약발이 ‘짱’이다.
‘헉! 이거 뭐지? 혹시 그날 아람이가 얘기했던 게 이건가?’
누리는 미술관의 다섯 번째 전시실 모퉁이에 걸린 그림을 보다가 놀라 뒷걸음질 쳤다.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마침 까만색 유니폼을 입고 목에는 스태프 라고 쓰인 표를 달고 있는 남자가 느린 걸음으로 5전시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저 아저씨! 저 그림 좀 이상해요.”
“응? 뭐가?”
“그러니까 저게...”
하면서 누리가 다시 그림을 보니 그림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멀쩡했다.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묶고 갸름한 얼굴에 눈에는 슬픔이 가득 담긴 채 마치 맞은편에 있는 남자 그림을 바라보는 것 같은 모습. 조금 전 누리가 봤던 그 놀라운 모습이 아니었다.
“저- 그게 저 그림이... 아, 아니에요.”
직원은 누리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더니 다시 천천히 걸으며 다음 전시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림을 보는 게 아니라 전시실에 상태를 살피는 거 같았다.
누리는 자기가 착각을 한 걸까 생각하면서도 이상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이번 전시를 오픈하던 날, 아람이가 했던 말이 떠오르자 자기가 본 것이 착각이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누리는 다시 그 여자그림 앞으로 가려다가 그만 두었다. 무슨 괴기 영화나 환타지 영화에서 본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싶으면서 지금 이 순간을 함께 해줄 사람이 그리웠다. 아람이랑 얘기를 하고 싶었다.
전시 개회식은 일주일전 목요일 오후 5시에 있었다.
할머니는 미술관을 놀이터 드나들 듯 좋아하는 누리 때문에 미술관에 자주 가시게 됐다. 그러다가 지난 가을부터 미술관에서 하는 도슨트 교육을 받으셨다. 도슨트는 미술관에서 관람객에게 전시에 대한 여러 정보와 전시물,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해주는 봉사자라고 한다. 그날 할머니가 누리에게 전시 오픈식에 참석해서 작가들을 만날 거라고 함께 가자고 하셨다. 누리는 미술관엔 자주 가서 그림과 조각들을 보았지만, 작가들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다. 더구나 오픈식이 끝나면 맛있는 다과 파티도 있다는 할머니 말씀에 누리는 냉큼 할머니를 따라 나섰다. 그렇지만 아람이는 시큰둥했다.
이란성 쌍둥이로 태어난 아람이와 누리는 불과 32분 차이로 세상에 나왔다.
아람이는 12월 31일 밤 11시 49분, 누리는 다음 해 1월 1일 0시 21분.
부모님은 출생신고를 하면서 잠깐 같은 날로 올릴까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결국 병원에서 기록한 그대로 출생신고를 해서 아람이는 학교도 한해 먼저 들어갔다. 4학년이 된 아람이는 걸핏하면 3학년 보다 4학년이 되니 할 일이 너무 많다며 유세를 부렸다.
쌍둥이지만 둘은 비슷한 것보다 다른 면이 훨씬 많다.
아람이는 책을 좋아하고, 누리보다 덩치는 작지만 야무져서 누나답다는 얘길 많이 듣는다.
누리는 활발하고 덜렁거리는 편이다. 그렇지만 게임이나 그림 그리는 것, 만들기는 아람이보다 선수다. 그래서 할머니와 엄마는 ‘금손 누리’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오픈식 때, 아람이가 미술관 건너편에 있는 학원에서 수업이 일찍 끝났다며 미술관으로 왔다. 전시 담당 큐레이터가 인사를 하고 전시 기획의도를 알려주는 동안 할머니는 메모장을 들고 제일 앞쪽 자리로 가서 앉으셨고, 누리는 다과가 차려지는 쪽 가까이 앉았는데 아람이는 지루했는지 혼자 전시실로 들어갔다.
문화재단 대표이사가 활짝 웃으며 조선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의 반열에 오른 것은 역사적인 사건이라며 오랫동안 얘기 했다. 그다음엔 그 왕릉 중 8기가 우리 시에 있으니 큰 자랑거리라고 시장이 더 길게 길게 얘기했다. 누리가 보니 가슴에 꽃을 달고 한쪽에 쭈-욱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작가들 같았다. 작가들도 지루한지 얘기하는 시장을 보다가 바닥을 보다가 자기 손을 맞잡았다가 했다. 그때 얼굴빛이 빨갛게 상기된 아람이가 누리 옆으로 오더니,
“누리야, ‘류원’이란 화가는 어디 있어?”
하고 물었다. 행사 식이 끝나면 재빨리 좋아하는 케잌을 먼저 집으려고 음식물들이 있는 상을 보고 있던 누리는
“나도 몰라. 아직 작가들은 인사 안 했어. 저쪽에 있는 사람들 중에 있을 거야.”
하며 작가들 쪽을 가리켰다.
그때, 드디어 누구에게 감사하고, 또 누구에게 감사하고, 또, 또 누구에게 감사말씀을 전하는 바라고 말하던 시장님 얘기가 끝나고 작가들 인사 차례가 되었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어떤 인물과 관계된 것인지 어떤 방법과 의도로 제작한 것인지를 짧게 얘기했다. 그런데 여덟 명의 얘기가 다 끝났는데 ‘류원’이란 작가는 없었다.
사회를 보던 큐레이터가 말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는 총 11명인데 그중 세 분은 개인 사정과 해외 전시에 참여하느라 못 왔으니 양해바랍니다.”
아람이는 실망하는 표정이 되었다.
“왜 그러는데?”
누리가 이상하다는 듯 묻자,
“글쎄- 내가 잘 못 본 걸 수도 있어서......”
하다가 누리를 빤히 보며 물었다.
“너 다음에 또 올 거니?”
누리는 전시가 열리는 동안 적어도 두세 번은 관람을 하곤 했다.
집에서 10분 거리인데다가 시립 미술관이라서 입장료도 저렴하다.
또 미술관 간다고 하면 엄마는 늘 입장료에 1,000원을 더 얹어 준다.
그러니 누리에게 미술관 관람은 그야말로 1석 2조, 아니, 1석 3조도 넘는 거다.
“당연하지. 오늘은 사람들이 많아서 제대로 볼 수도 없을 걸.”
“그럼 다음에 올 때 5 전시실에 있는 ‘류원’이란 화가 그림 좀 자세히 봐줘. 정말 이상했거든.”
“뭐가?”
“그건 네가 그림 보고난 다음에 얘기 할 게.”
‘그래. 아람이도 그날, 분명 나랑 같은 걸 봤을 거야.’
마음이 급해진 누리는 여섯 번째, 일곱 번째, 그리고 마지막 전시실도 그냥 지나쳐 집으로 내달렸다.
현관문 번호단추를 빠르게 눌렀다. 운동화는 벗겨져 날리듯 흩어졌지만 그건 쳐다볼 생각도 없었다.
“아람아, 아람아 너 그거 봤지?”
급하게 자기를 찾는 누리를 보면서도 아람이는 소파에 앉아 동화책을 읽다가 느긋하게 한 마디 했다.
“저런~ 누나라고 불러야지. 3학년 꼬마야.”
“웃기지마. 너 그거 봤지, 맞지?”
“음- 너, 지금 미술관 갔다 온 거구나?”
“그래. 그 ‘류원’이란 화가가 그린 여자 그림 봤어.”
“어땠는데? 너도 이상했어?”
“있잖아. 꼭 ‘헤리포터’ 영화에서 본 그림들처럼 움직이고 나한테 말을 거는 같았어.”
“그래? 내가 볼 때도 그랬어. 근데 그거 너 혼자 봤어? 무슨 말을 했어?”
“몰라. 무서워서 뒤로 물러섰더니 원래대로 안 움직이는 그림이 됐어. 넌?”
“나도 잘 모르겠어. 갑자기 그림이 움직이면서 말하는 거 같아 얼른 밖으로 도망쳤지. 다른 사람이 하나도 없었거든.”
“나는 거기 직원 아저씨한테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림이 그대로 안 움직이는 거야. 그래서 미쳤다는 소리 들을까봐 그냥 한참 동안 서 있다가 너랑 얘기하려고 얼른 온 거야.”
“마법 그림인가? 그런 게 정말 있는가봐. 그치?”
아람이가 일어나며 말했다.
“이상해, 이상해. 우리 지금 가 보자.”
“안 돼. 지금 가도 소용없어. 미술관은 6시까지만 연단 말이야.”
아람이가 다시 소파에 앉으며 무슨 큰 결정이라도 내리는 듯 누리에게 나직이 말했다.
“우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우리끼리 비밀을 풀어 보자.”
“무슨 비밀?”
“그림 속 여자는 왜 우리에게 말을 건 것인지, 정말로 그림이 움직이는 게 우리 눈에만 보인 건지. 이유가 있을 것 같아. 왜 있잖아, 동화나 영화에서 나오는 그런 거. 우리가 그 여자의 원한이나 비밀을 푸는 순수한 아이들로 선택된 걸지도 모르잖아.”
아람이는 야무지게 말했지만, 누리는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종잡을 수가 없었다.
“누리야, 우선 이번 전시의도를 알아야 하고 ‘류원’이란 화가는 왜 그런 그림을 그렸는지 알아야 해.”
“그건 어렵지 않아. 전시가 설명된 리플릿도 있고 10시, 11시, 오후 2시, 3시엔 전시를 설명해 주는 선생님들도 있거든. 아, 이번부터 할머니도 미술관에서 도슨트 하니까 할머니한테 물어보면 간단하겠다.”
“아냐. 그럼 재미없지. 우리가 선택됐으니까 우리가 해결하는 거야. 어른들에겐 비밀로 하고.”
아람이는 다시 눈동자를 굴리며 입술을 옴찔거리며 생각을 모으느라 애썼다.
“그래. 우선 전시 리플릿부터 보자. 너 갖고 있지?”
“물론이지. 난 여태껏 전시 리플릿은 다 모았다니까.”
누리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뒷주머니에서 리플릿을 꺼내 놓았다.
아람이와 누리는 머리를 나란히 하고 전시 설명이 담긴 네 면으로 된 리플릿을 읽었다.
앞면엔 전시 제목과 대표 작품 사진, 전시 날짜가 적혀있고, 안쪽 두 면에는 전시 내용과 사진 두 개가 있었다.
왕릉의 전설
-조선 왕족들의 미술관 행차-
은 조선왕조 500년을 이끌어 왔던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가장 화려한 삶의 중심에 있었으면서도, 권력과 명분 획득을 위한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혹독한 고독과 괴로움을 겪어야 했던 증언자들이기도 하다. 이들 왕족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처절한 주인공으로 8인을 선정하고 각 존재들에 대한 시각적 대화를 시도하는 작가 11명의 작품을 소감형식으로 구성한 전시이다.
전시의 소재가 된 왕족은 인수대비, 폐비 윤씨, 인종, 소현세자, 숙종, 희빈 장씨, 의빈 성씨, 그리고 철종이다.
왕릉이라는 신들의 정원에는 그들이 마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전설이 전해온다.
인간의 삶이 언제나 그러하듯 온전하게 충족되지 못한 애절한 마음은 후손인 우리의 심정을 흔들어 생각을 일으킨다.
사실 조선왕조의 역사적 의의가 갖는 무게에 비해 현대인들의 그에 대한 관심은 가벼웠다.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그 표현 중심에서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인간의 본질적 욕망과 치열한 꿈의 허상을 새로운 예술적 형식으로 보여줄 것이다.
여기까지 읽고 나자 누리가 투덜거렸다.
“이게 뭔 말이야아~? 난 짜증나.”
“어른들한테 보여주는 거라 그래. 어쨌든 조선시대 왕족들 얘기를 그린 작품이란 말이지 뭐.”
“그럼, 류원이란 화가는 누구 얘길 그린 걸까?”
누리가 마음이 급해져서 뒷장으로 넘겼다.
뒷면에는 참여 작가 11명의 이름과 간단한 작품 내용이 있었다. 문경은, 태인주, 노장현, 박영훈, 류원, 신희경, 백승민, 최원범, 우정석, 김화준, 이민숙. 누리와 아람이는 류원 작가 옆에 있는 글만 소리 내어 읽었다.
“류원은 신비한 전설 속 이야기를 끊임없이 제작하고 있는 작가이다.
이번 전시에는 고양시 서삼릉에 있는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데, 그동안 작가가 그려오던 기법에서 크게 벗어난 새로운 시도를 엿볼 수 있다.”
“의빈 성씨 얘기라고?”
아람이는 의빈 성씨를 아는 거 같은 표정이었다.
“그게 누군데? 너 알아?”
“응.”
“어떤 사람인데?”
아람이가 좀 뻐기는 표정으로 누리에게 말했다.
“누나, 아니 '누님 알려 주시옵소서.'하면 가르쳐 주-지.”
“야! 겨우 32분 먼저 태어났다고 그 소릴 듣고 싶냐? 나 같으면 그냥 친구먹자고 하겠다.”
“싫음 말구.”
“어-휴!”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궁금증이 풀릴 열쇠인 것만 같아서 누리는 ‘이번만’하는 맘으로 더 과장되게 아양을 떨었다.
“누님, 저는 의빈 성씨가 누구인지 매우, 매우, 매우 궁금하옵니다. 알려 주시옵소서.”
“좋다! 내 알려주지. 잠시만 기다리거라.”
그러더니 아람이는 누리에게 의빈 성씨가 누구인지 얘기는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왜? 가르쳐준다면서 왜 가?”
아람이는 책 한 권을 들고 나오며 말했다.
“내가 좀 똑똑한 편이기는 하지만 그걸 다 외우는 건 아니쥐이. 여기 봐-.”
아람이는 ‘조선왕조실록’이란 만화책권을 펴서 195쪽에 있는 ‘제 22대 정조 가계도’를 손가락으로 톡톡 가리켰다.
거기엔 정조 밑으로 ‘효의왕후 김씨(1753~1821)- 후사 없음’ 이라 적혀 있고, 그 다음 줄엔 ‘의빈 성씨(1753~1786)-1남, 문효세자 일찍 죽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림 속 여자가 이 사람이구나. 그런데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거야?”
“이거 봐. 의빈 성씨는 겨우 서른네 살에 죽었어. 그러니까 뭔가 사연이 더 있을 거야. 이 책에서 보면 화빈 윤씨가 미워한 거 같거든.”
아람이는 입을 야무지게 다물더니 말했다.
“그래서 화빈이 의빈 성씨를 죽였대?”
“아니. 그런 건 없어. 그렇지만 아직 풀리지 않은 원한이 있어서 우리한테 말을 걸었는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알아내야지. 그림 속 여자가 우리한테 하려고 하는 말도 뭔지 알 수 있고, 영혼을 달래줄 수도 있겠지.”
“하~ 아람아! 내가 보기엔 넌 이상한 책을 너무 많이 읽은 거 같아.”
“뭐라구? 너도 그림이 움직이면서 말하는 거 봤다며? 얼마나 억울하면 그림이 말을 다 하겠니?”
“엄마랑 아빠한테 물어 보자. 아니 이따가 할머니한테 물어 보는 게 낫겠다.”
“안 돼, 안 돼. 하지 마! 이렇게 재밌는 사건이 우리 평생에 얼마나 있겠어? 어쩌면 이건 우리 생애 최고로 짜릿한 비밀을 만들 수 있는 기회란 말이야.”
“치~ 비밀 만들고 싶은 거야?”
“동화를 읽다보면 비밀이나 엄청난 사건이 생겨서 주인공이 재미난 경험을 하는데, 우린 언제 그런 일이 생기겠어? 만날 똑같은 날이니... 그러니까 너랑 나, 둘이서만 이 문제를 풀어보자고. 내가 너한테 슬라임 전부 다 줄게.”
“진짜? 앗~싸~. 그러지 않아도 만들고 싶은 게 있어서 엄마한테 사달라고 조르려고 했는데... 좋아! 어떻게 하면 돼?”
“우선, 의빈 성씨에 대한 자료를 더 찾는 거야. 그리고 미술관에 가는 거야. 사람들이 없는 시간에.”
“사람들이 없는 시간을 어떻게 알고? 5 전시실에서 사람들이 나가길 기다려야 하나?”
“그렇지! 자, 이제 자료를 어떻게 찾는다? 도서관에 가야 할까?”
“에이 바보! 컴퓨터로 인터넷 검색을 하는 게 빠르지.”
아람이는 민망한 듯,
“아하하... 그렇구나. 근데 조금 있으면 엄마랑 아빠 집에 올 시간이야. 그니까 일단 오늘은 숙제 하는 척 하면서 이 책을 보고, 내일 학교 갔다 와서 찾아봐야지.”
“와~ 철저하네. 난 그냥 내일 학교 끝나고 곧장 미술관에 가서 의빈 성씨랑 단판을 내고 싶구만...”
다음 날 오후, 누리는 학교 운동장에 땀을 흘리며 친구와 축구공으로 놀고 있는데 아람이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누리야, 누리야아~~ 지금 미술관 가자~~”
“너네 누나도 미술관 좋아하냐? 이상한 남매야. 나도 이제 학원 가야겠다.”
하며 친구가 교문밖으로 나갔다.
“나 입장료도 없단 말이야.”
누리는 아람이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야! 내가 누구냐? 초대권을 할머니한테 두 장 받았어. 그리고 인터넷 검색은 아까 점심시간에 도서실에서 해놨고.”
“역시! 짱인데.”
“학습지 선생님 올 시간 맞추려면 빨리 갔다 와야 해. 뛰자~”
1 전시실에서 4 전시실까지는 건너뛰고 5 전시실로 들어간 아람이와 누리는 다른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의빈 성씨의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아주 잠깐, 그림은 그림인 채로 있었다. 그런데 그림 앞 1m 정도로 바짝 다가가자 그림이 움직이며 말을 걸었다.
“어서오세요.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헉! 정말요? 왜요?”
누리가 깜짝 놀라 물었고, 아람이도 서둘러 말했다.
“무슨 사연이 있으신 거죠? 혹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셨나요?”
“아~ 글쎄... 왜 그렇게 생각지?”
“내가 다 찾아봤어요. 이름은 성덕임이고, 정조 임금님이 무척 사랑했고, 아들인 문효세자는 다섯 살에 죽고, 딸도 태어나서 첫돌도 안 돼서 죽었잖아요. 또 세 번째 아기를 낳기 두 달 전에 죽은 것도 알아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거 아닌가요?”
“어머나! 나에 대해서 많은 걸 공부했구나? 고맙다. 그렇지만- ”
그때, 세 사람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5전시실로 들어 왔다.
“아니, 이게 누구야? 우리 아람이랑 누리네! 책가방도 메고 있는 걸 보니 학교에서 곧장 왔구나?”
“네, 할머니.”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며 그림을 돌아보니 그림은 다시 멈춰 있었다.
아람이와 누리는 눈을 맞추고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그런데 그림이 다시 움직이며 말을 시작했다.
“정조 임금님과 나는 금슬 좋은 부부였지요. 정조 임금님은 내가 죽은 후 저를 애도하는 글을 많이 써 주셨지요. 저는 지금도 그분이 그리워 이렇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답니다.”
눈이 휘둥그레진 누리와 아람이와는 달리 할머니와 다른 두 분은 웃으며 그림을 향해 인사했다.
“수고가 많아요. 박선생님!”
다시 또 놀란 누리가 물었다.
“할머니! 어떻게 된 거에요?”
“이런 작품은 누리도 처음 보지? 이런 작품을 ‘인터렉티브 아트’라고 하는 거야. 테크놀러지가 결합되어 관객을 만나야 완성되는 작품. 관객들이랑 얘기도 나눌 수 있어.”
“그럼 그림 안에 AI라도 들어 있는 거예요?”
이번엔 아람이가 물었다.
할머니가 바닥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건 아니고 여기 이 지점에 사람이 서면 센서가 작동해서 관람객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그림 뒤에 숨어 있는 분이 말을 하는 거지. 그러면 디지털로 된 그림이 움직이는 거야.”
“그림 뒤에 있는 분은 우릴 볼 수 있어요?”
“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보지는 못 해. 컴퓨터를 앞에 놓고 검색어를 치면서 여러 가지 질문에 답도 해야 하니까. 하하, 내가 비밀로 해도 될 걸 너무 많이 알려준 건가?”
그제야 아람이와 누리는 모든 게 이해되었다. 그러면서도 누리는 디지털 그림이 너무나 감쪽같아 놀라웠고, 아람이는 신비한 경험을 놓친 거 같아 크게 서운했다.
나중에 아람이와 누리에게 둘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얘기 듣고, 할머니는 즐겁게 웃으며 말했다.
“애들아! 할머니는 너희들 덕분에 미술관에서 새로운 걸 많이 배우고 또 그걸 여러 사람과 나눌 수 있어서 참 좋구나. 더구나 그림 하나가 호기심을 자극해서 이렇게 배워나가는 아람이랑 누리를 보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
•수상소감 - 우수상 동화 배홍숙
“동화나 그림책을 쓸 땐 내 생각이 신기해 기분이 좋아져요”
감사합니다.
블로그에 동화를 몇 편 써 두고 공개는 안했는데,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에 처음 응모해서 이렇게 상을 받으니 많이 기쁩니다.
독서 동아리 회원이 공모전이 있다고 단톡방에 링크를 걸어주셨어요. 그 분도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응모 부문에 동화가 있어 용기를 내봤습니다. 어쩌면 50대 이상이 참가하는 거라면 동화 부문 응모자가 적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하면서…
글쓰기 관련 책을 보기도 하고, 강의도 가끔 듣습니다. 함께 독서동아리 활동을 하는 친구들과 가족, 제가 하는 모든 활동이 글쓰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적극적인 글쓰기엔 특별한 동기가 필요한 거 같아서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이후에 다른 공모전이 있나 살펴보고 있습니다.
어떤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고 요청이 온다면 글쓰기에 더 큰 동기부여가 될 것 같네요.
내가 쓴 에세이는 항상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화나 그림책을 쓸 땐, 내가 해낸 생각들이 신기해서 기분이 좋아지고요.
그래서 새로운 아이디어로 동화나 그림책 글을 계속 쓰면서, 감동을 주는 좋은 수필도 쓰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공모전 정보를 주셨던 선생님, 잘못된 파일 경로를 수정하라고 알려주신 담당자에게 감사드리며, 독서동아리 친구들과 어린 시절에 많은 얘기를 들려주셨던 엄마와 외할머니, 응원해 주는 식구들에게도 감사함을 전합니다.
나직이 숨을 고르고는 붓에 힘을 주었다. 오늘은 왠지 붓끝이 가볍다. 이제 한 획만 쓰면 된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마지막 획을 길게 내리긋는다. 미세한 흔들림도 없이 붓끝이 전서체의 획을 마무리했다. 나는 황색 부적지에서 붓을 떼고 지긋이 글씨를 바라보았다. 집안에 두 마리의 용이 화목하게 깃들어 있는 모양새다. 마주 보는 획이 기울지 않고 균형을 잘 이루고 있다. 게다가 단아한 글씨와 잡귀를 물리치는 담백한 운필로 금방이라도 집안 가득 화평한 꽃 기운이 생동할 것만 같다. 나는 매우 흡족해하며 붓을 옆에 나란히 놓았다.
보통 부적符籍이라 함은 대개 한 해의 액厄을 피하거나 벽사壁邪와 기복祈福의 민간 신앙을 담고 있는 데서 유래한다. 요즘에는 현대적이며 새로운 글씨체를 통해 무병장수의 삶과 소망을 담긴 부적을 주로 찾는다. 적당한 먹의 농담과 담백한 운필. 그리고 기운 생동한 붓질과 여백 등이 조화롭게 그려진 부적을 높이 쳐 준다. 가게 진열대에 인쇄소에서 찍어낸 부적이 다발로 있지만 단골 손님들은 내가 직접 쓴 부적을 원한다. 내가 직접 써서 파는 것은 한 장에 십만 원 정도를 받는다. 부적은 누가 쓰느냐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비싼 것은 한 장에 백만 원까지 받는다는 소문도 있다. 그런 경지의 부적은 가로세로 획마다 금석기金石氣가 있으며 글씨는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과 다양한 서체를 넘나들며 자유로운 조형미까지 갖추고 있다. 실로 대단한 경지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게다가 그보다 한술 더 뜬 최고 경지에 이른 부적은 완연한 획의 흐름에서 삶의 희로애락이 감지되며 파격적인 데다 변화무쌍하고 괴기스러움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나는 부적을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쓴다. 부적을 쓰는 날은 보통 손 없는 날을 잡는다. 부적을 쓸 때는 신령한 공력이 배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날은 일찍 일어나 목욕재계를 하고 동쪽을 향하여 정화수를 올린다. 그리고 향을 사른 후 무릎을 꿇고 주문한 손님들의 소망을 염원하며 기도를 올린 뒤 경건하게 붓을 든다.
나는 진열장 겸 책상으로 쓰는 계산대에 앉아 방금 쓴 부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황색종이 위에 마르지 않는 붉은 글씨가 물기로 번들거렸다. 부적지로 사용하는 종이는 홰나무로 만든 괴황지다. 크기는 가로 10센티 세로 15센티 정도다. 붉은 먹물은 흔한 물감이 아니라 경면주사鏡面朱砂라고 하는 특별한 안료이다. 그것의 원료는 붉은색을 띠는 광석에서 채굴한다. 원료를 작은 용기에 넣고 절구공이로 곱게 빻아서 미세한 가루로 만든다. 그리고 부적유符籍油로는 참기름이나 백설탕을 녹인 액체를 가루와 섞으면 부적 특유의 붉은 색깔과 특유의 향을 풍기는데 이것을 경면주사라 한다.
나는 고개를 들고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벽시계는 한겨울의 나른한 오후를 가리키고 있다. 가게 중앙에는 활활 타는 전기난로가 썰렁한 가게 안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있다. 아담한 공간에는 무속인들에게 필요한 각종 제의 용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맞은편 붙박이 진열장에는 망자들의 넋을 달래줄 영가 옷이 촘촘히 쌓여있고 그 옆에는 무속인들이 굿할 때 쓰는 무신도 대신방울 오방기 장군칼 향로 장구 꽹과리 북 등 무구가 가지런히 놓여 있으며 등 뒤로는 기도할 때 쓰는 등초 무지개초와 목향 금난향 궁연향 등 각종 향과 초가 칸칸마다 들어있다.
다시 고개를 들고 실내에 놓인 간이 탁자 위로 시선을 옮긴다. 그것은 장판을 씌운 자그마한 작업용 탁자다. 무속인들이 필요한 물건들을 골라 탁자에 놓으면 그것들을 큰 보자기로 싸서 묶는 곳이다. 그들이 한 번씩 가게에 들러 굿판에 쓸 제의 용품을 고르면 보통 서너 보따리가 넘을 때도 있다. 흔히 사람들은 무속인, 하면 무당이라 하여 천시하는데 정작 그들의 신심은 대단하다. 그들은 과거 현재 미래를 꿰뚫어 보는 신령님을 섬긴다. 신령님을 무가에서는 보통 몸주라 부르는데, 그들은 몸주와 교감하는 능력을 지닌 영매자靈媒者이기 때문이다.
잠시 창밖으로 눈길을 부렸다. 하늘이 점차 흐려지는가 싶더니 진눈깨비가 풀풀 날리기 시작했다. 저만치서 팔짱을 낀 연인이 까르르 웃으며 정답게 걸어왔다. 세련된 차림에 잘 어울리는 커플이다. 두 사람의 어깨엔 얼음 가루가 묻은 스케이트화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어디 스케이트장에라도 다녀오는 모양이었다. 언뜻 부러운 생각도 들었다.
눈길을 당겨 부적을 봤다. 부적이 거의 다 말라 있었다. 부적을 조심히 집어서 서랍장에 넣었다. 지금은 명절 전이어서 손님이 뜸한 편이다. 설이 지나면 한해의 액땜이나 복을 바라는 부적 주문이 들어오고 굿판도 자주 열릴 것이다. 내가 부적을 쓰게 된 것은 손님들 때문이다. 부적을 찾는 손님마다 직접 손으로 쓴 걸 원하기에 오빠를 통해 부적 쓰는 법을 배웠다. 처음엔 한 장 두 장 팔리던 것이 지금은 소문이 좋게 돌아 단골로 내 부적을 사가는 손님들이 제법 있다. 유리문에 매달린 종소리가 쨍그렁, 하고 울렸다. 출입문 쪽을 보았다. 조금 전에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걸어가던 연인이다. 나는 방긋 웃으며 손님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언니, 우리가요, 만난 지 꼭 백 일째거든요. 그래서 부적처럼 간직할 수 있는 기념품을 찾는데, 어떤 게 있어요?”
“그러세요? 축하드려요.”
나는 현대적으로 고안된 액세서리 부적 용품이 걸려 있는 매대로 그들을 안내한다. 진열대에는 갖가지 액세서리 부적 용품들이 걸려 있다. 그들은 이것저것 가늠해보다 그중 하나를 고른다.
“언니, 이걸로 할게요.”
그들이 고른 것은 나비 문양의 매듭 핸드폰 줄이다. 날개 사이에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고 그 위에 옴(범어)자가 새겨져 있다. 옴이란 길상의 뜻을 지닌다. 전통 문양인 나비 그림에 상감기법을 적용한 앙증맞은 부적이다.
“나비 문양이네요. 나비는 기쁨과 행복 그리고 아름다움을 상징한대요. 게다가 사이좋은 연인이나 금실 좋은 부부를 상징하기도 하구요.”
“그래요? 그럼 우리가 잘 고른 거네요, 호호.”
풋풋한 연인들이 싱그러운 웃음을 떨어뜨려 놓고 나가자 마음 한곳이 공허해졌다. 나는 콤팩디스크를 켰다. 오카리나의 잔잔한 소리가 가게 안을 흘렀다. 혼자 있을 때면 자주 듣는 음악이다. 나는 눈을 감고 향기로운 소리에 잠겨 들었다. 짙고 푸른 숲이 보이고 맑은 계곡물 소리와 바람 소리. 그리고 가난한 저녁을 먹고 달빛 맑은 산중에서 도란도란 자연과 대화하는 소리. 때로는 별빛 아래에 앉은 외로운 목동의 피리 소리 마냥 멜로디가 귓가에 들려왔다.
주전자에 물을 끓여서 찻잔에 부었다. 계산대에 앉아 한 모금 들이키고 다시 창밖을 내다봤다. 눈발이 제법 굵어져서 분분히 날리고 있었다. 집안일 외엔 다른 일이라곤 전혀 해 본 적 없던 내가 10년 전에 불교용품점을 차리게 된 까닭은 불의의 화재 때문이다. 그 화재로 인해 남편은 세상을 떴다. 남편을 빼앗아간 그 화마의 기억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악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어쩌면 내 마음 어느 한켠에는 여전히 남편과의 마지막 순간이 스냅사진처럼 뚜렷하게 찍혀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남편이 내 곁에 존재하는 듯 그의 부재를 인지하지 못하는 환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남편을 빼앗아가 버린 그 악몽의 기억이 스르르 떠올랐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자동차 딜러였던 남편은 여느 날처럼 출근 준비를 했다. 새로 다려놓은 하얀 와이셔츠에 내가 생일 선물로 사 준 넥타이를 맸다. 그리고는 셋집 빌라 이 층 계단을 바쁘게 내려갔다. 부지런함이 몸에 밴 남편은 남보다 항상 먼저 출근을 했다. 또한 가장의 책임감 때문인지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성실함 때문인지 남편은 동기들보다도 먼저 승진하는 기쁨도 누리기도 했다.
잠시 뒤 남편이 투덜거리며 다시 계단을 올라왔다. 자가용 바퀴가 펑크 났다고 했다. 아무래도 전철역까지는 버스를 타고 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날씨가 풀렸다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한 날씨여서 나는 남편에게 외투를 한 겹 더 입혀주며 잘 다녀와요, 라고 하며 생긋 웃음을 지어보였다. 잘 다녀와요, 라고. 그리고 아이를 유치원에 등원시킨 후에 청소를 하며 TV를 켜는데, 뉴스 속보가 자막으로 떴다. 오전 9시 경 ㅇㅇ역 전철 내에서 50대 남성이 플라스틱 통에 든 휘발유에 불을 붙인 뒤 객실 내에 던져 차량 내부를 완전히 전소시켰다는 뉴스였다.
뉴스 자막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ㅇㅇ역은 남편이 종종 전철을 타고 회사에 출근할 때 이용하는 전철역이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범인의 방화시간과 남편의 출근 시간을 되짚어보았다. 9시 경이면 남편은 이미 회사에 출근해서 근무를 하고 있을 시간이다. 남편은 보통 회사에 한 시간 정도 일찍 출근하기 때문에 화마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남편의 직업상 외근이 잦은 업무여서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그의 휴대폰에 전화를 해 보았다. 그런데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음성만 줄곧 들려왔다.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계속 통화 중이더니 겨우 연결이 되었다. 저쪽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사모님,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김과장님이 9시 경에 ㅇㅇ역 방향으로 외근을 나갔다고 합니다. 저희도 지금 연락이 안 돼...‘ 나는 저쪽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휴대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전철 화재는 내 운명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남편의 시신은 화염 속으로 사라져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너무나 큰 충격에 오열과 통곡을 하며 까무러치기를 반복했다. 그날 이후 나는 한동안 빙의 상태로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수없이 오가며 넋을 놓고 살았다. 살아도 산 게 아닌 그저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남편은 꿈속이든 현실이든 가릴 것 없이 언제든지 내 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우리가 연애할 때 서로 손을 꼭 부여잡고 마음 졸이며 봤던 이라는 영화가 문득 떠올랐다. 예기치 못한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 사랑하는 남자를 잃고 슬픔에 잠긴 한 여자와 그런 여자를 두고 이승을 떠나지 못한 한 남자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감동적인 영화였다. 우린 영화가 끝날 때까지 눈물을 글썽이며 가슴 저릿하게 관람했었다.
그런데 그 영화가 몇 년 후 내 얘기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남편을 잃은 그 도시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내가 어느 정도 사고의 후유증에서 벗어나고 정신적인 안정을 되찾을 무렵. 친오빠의 도움으로 수원으로 이사한 뒤 ’종로불교사‘라는 가게를 열었다. 친오빠는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불교용품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가게를 연 후로 나는 남편을 가슴 깊이 묻어두고 살아왔다. 행여 힘든 일이 생기면 나 자신이 나약해질까 두려워서 일부러 강해지려고 노력했다.
창밖에는 여전히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리고 있었다. 가게 앞에 서 있는 남천나무에도 조용히 눈이 쌓여갔다. 붉게 물든 채로 말라버린 남천나무 이파리들은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어도 떨어지지 않고 나무에 꼭 붙어있다. 나는 시선을 당겨 계산대 끝에 놓인 모래시계를 발견했다. 유리로 된 호리병 모양의 입구가 위아래로 마주 보게 붙어있다. 그 안에는 보라색 모래 알갱이가 들어있다. 모래시계를 거꾸로 세우자 보라색 모래 알갱이가 주르륵 쏟아져 내렸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듯 모래 알갱이들이 시간을 거슬러 쌓인다. 모래시계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보니 남편을 떠나보낸 지 5년쯤 후에 문득 내 앞에 나타난 한 남자가 떠올랐다. 평소 친한 언니의 소개로 알게 된 남자다. 언젠가 그 남자와 애들이랑 커다란 모래시계가 있는 바닷가에 놀러 갔다가 사 온 기념품이다. 피차 서로 미워해서 헤어진 게 아니어서 추억이 깃든 모래시계를 굳이 버리지 않고 남겨두었다.
초혼일 때는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더 크고, 재혼일 경우에는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더 크다,라고 어느 심리학자가 말했던가. 만약 다시 그때로 되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한 남자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될까. 아니면 아이들의 의견을 따라 지금처럼 혼자의 삶을 선택하게 될까. 지혜롭게 사랑하고 냉정하게 판단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행복이다, 라는 명제를 어느 책에선가 읽었지만, 나는 여전히 내 운명에 대해서 확신이 서지 않는다. 운명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는 것일까. 아니면 바꾸기 나름일까. 여전히 나는 홀로서기라는 무거운 숙제 앞에 주눅이 들곤 한다.
그 남자는 시를 쓰는 시인이라고 했다.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은혜 씨를 향한 사랑만큼은 누구보다도 열정적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자신도 몇 년 전 이혼이라는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수수하고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그의 첫인상에 호감이 갔다. 그 남자가 싫지는 않았다. 아니, 그 남자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이나 나도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우리는 결혼을 전제로 종종 만남을 가졌다. 남자가 모 문예공모전에서 상을 받았을 때 나는 누구보다도 기뻐했고 축하를 건넸다. 그날 밤 우리는 수상의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격렬하고도 뜨거운 사랑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사랑의 증표로 남자에게 새 자동차를 선물했다. 자동차 키를 받아든 남자는 감격하며 자신은 여태까지 한 번도 자동차를 소유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로 사랑한다고 다 결혼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신은 인간에게 그렇게 호락호락 않다는 걸 알았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은 그 남자에게 매우 호의적인 데 반해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은 은근히 적의를 품고 있는 듯했다. 아마도 엄마를 너무 사랑해서 어쩌면 낯선 남자에게 엄마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심리가 깔려있는 것 같았다. 그런 심리가 은연중에 나타난 날이 있었다. 한번은 다 같이 어느 공원에 나들이 가는 중이었다. 그날따라 비를 뿌렸는데 자꾸 앞 유리창에 성에가 끼면서 뿌예졌다. 아직 새 차에 적응하지 못한 남자는 어떻게 성에를 제거하는지를 몰라서 무척 당황해했다. 그 와중에 뒷좌석에 탔던 아들이 괜히 심통을 부렸다. 남자는 차량 조작법을 몰라 당황하던 터라 아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풀이를 했다. 그 순간 왠지 모를 불안감이 머리를 스쳤다. 과연 내가 저 남자를 선택한 것이 잘한 일일까, 하는 의문이 문득 들기도 했다.
내가 가끔씩 남자를 만나는 동안 유독 예민해진 아들이 은근히 속을 끓였다. 어느 날은 밥을 먹지도 않고 짜증을 부리는가 하면 예전에 안 하던 심술을 부리기도 했다. 그런 아들이 한편으로는 안 되어서 하루는 잠들기 전 나란히 누워서 대화를 나눴다.
“엄마, 그 아저씨랑 함께 사는 거야?”
“왜? 그러면 안 돼?”
“나, 그 아저씨 싫어. 나는 엄마랑 오래오래 살 거야. 엄마, 그 아저씨랑 살지 마. 알았지?”
나는 가슴이 먹먹해지며 뭔가 설움 같은 게 울컥 치밀어서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엄마는, 아무하고도 안 살아. 우리 아들하고만 살 거야.”
나는 아들을 꼭 껴안아 주었다. 아들은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지 내 품에서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그리고 며칠 후 기어코 사단이 나고 말았다. 한날은 잠시 놀러왔던 남자는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거실에서 깜박 낮잠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때 밖에서 들어온 아들이 그걸 보고는 안 그래도 꼴보기 싫었던 터라 마침 잠자고 있던 남자의 머리통을 냅다 발로 밟아버렸다. 남자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 치듯 너무 황당하고 화가났다고 했다. 어찌 생각하면 순수한 아이로서는 지극히 본능적인 행동이었지만, 사랑하는 엄마를 빼앗아가는 남자가 오죽 미웠으면 그랬겠는가, 싶기도 했다. 남자는 어린아이의 돌발적인 행동에 무척이나 당황하기도 하고 실망해서는 그날 이후로 발길도 뜸하다가 자동차를 돌려주는 것으로 관계를 정리했다.
그렇게 그 남자와 사이가 멀어지고 나니 다시 예전처럼 되돌리기는 쉽지가 않았다. 아마도 남자도 자신의 혈육이 아닌 두 아이를 감당하며 어찌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도 많이 했을 것이다. 그 후로 그 남자와는 가끔씩 안부를 묻는 친구 사이로 남기로 했다. 최근에 그 남자로부터 시집이 배달되었다. 등단 후 출간한 첫 시집이라고 했다. 나는 가만히 그의 시집을 펼쳐들었다.
모래시계의 모래 알갱이들이 거의 다 흘러내릴쯤 유리문에 달린 방울 소리를 짤랑거리며 누군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고개를 돌려보니 천궁 보살이다. 보살은 올해 쉰 줄로 머리가 벌써 반백이다. 생머리를 뒤로 빗어 넘겨 쪽을 쪘다. 굿이 있는 날이면 가게에는 가끔씩 들렀다. 그는 늘 피곤한 기색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가격을 흥정할 때도 고갯짓으로 거의 다 하곤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쉽게 속내를 보인 적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말해야 될 때도 필요한 말이 끝나면 도로 입이 닫힌다. 나는 예의 밝은 표정으로 인사말을 건넸다.
“보살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
“차 한 잔 드릴까요?”
보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탁자에 앉았다. 그날따라 보살은 더욱 초췌하고 피곤해 보였다. 나는 차를 타서 보살에게 건네고 곁에 앉았다. 볼륨을 줄인 오카리나 소리가 가게 안을 잔잔히 흐르고 있다. 보살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입에 댔다가 뗐다.
“부적이나 한 장 받을까 하고….”
“부적이라면 보살님도 쓸 수 있지 않아요?”
사실 웬만한 무속인들에게 부적은 필수여서 대개가 다 직접 써서 판다. 그런데 뜬금없이 그저 어깨너머로 배운 내게 부적을 써 달라니. 나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부적이라면 신통력이 있는 무속인들의 부적을 더 높이 치기 때문이다. 무속인 중에도 세습무인 숙무와 신내림을 받은 강신무가 있는데, 특히 강신무의 부적이 더 영험하다 하여 부르는 게 값이다. 천궁보살도 내 짐작으론 강신무降神巫임에 틀림없다. 일전에 어느 손님이 천궁보살한테 부적을 받은 거라면서 쓴 지 오래된 부적을 보여 준 적이 있었다. 흔히 보는 부적이 아니라 자동 기술된 검은색 글씨였다.
“나, 부적 안 쓰네.”
“아니, 부적을 안 쓰다니요?”
“…….”
“아무렴, 제가 쓴 부적보다야 보살님이 쓴 부적이 훨씬 더 영험하지 않아요.”
“영험은 무슨...우리 집 영감이 엊그제 죽었네. 그래서 저승 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부적 보시나 하려고.”
“그렇다면 영감님을 위해서 더욱 부적을 쓰셔야죠.”
“급살 맞을 냥반….”
보살은 퀭하게 들어간 눈언저리를 비비며 물기를 닦았다. 나이에 비해 훨씬 늙어 보인다. 그동안 마음고생도 어지간히 한 것 같아서 측은한 생각마저 들었다. 남편과 살아오면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을 보살의 심정을 어느 정도 헤아릴 것 같다. 어쩌면 보살의 마음이 시린 하늘에 떠 있는 조각달처럼 한없이 쓸쓸하리라. 남편이 떠난 이후에 내게 하늘을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다. 길을 걷다가도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면 마치 남편이 손짓하는 듯한 환영. 꿈속을 찾아온 남편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 눈을 뜨면 문득 혼자란 생각에 하염없이 베개를 적시던 눈물. 내 안에 간직된 남편이라는 슬픈 단어. 신의 시샘을 받은 것일까. 남편은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나려고 내게 많은 사랑을 안겨주었는지도.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 힘들게 결혼한 만큼 남편은 나를 더욱 아껴주었지. 그런 남편의 따뜻한 품에서 나는 온실 식물처럼 살았다. 쉬는 날이면 나를 데리고 드라이브하는 게 취미인 듯, 바다로 가서 개펄을 파헤치거나 산을 오르기도 했다. 한 번은 산을 오르다 토끼풀이 수북이 우거져 있는 걸 발견하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네잎크로버를 찾기로 했다. 먼저 내가 한 잎을 찾자 남편도 곧이어 찾았다. 그리고는 네잎크로버가 잇따라 발견되었다. 남편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에게 행운이 줄줄이 오려나 보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행복했던 시간들. 남편은 발견한 네잎크로버를 행운의 부적이라며 책갈피에 소중히 끼워 두었다.
실내를 흐르던 오카리나 멜로디가 다음 곡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보살을 향해 조심히 입을 열었다.
“영감님이 생전에 보살님한테 잘못한 게 많으신가 보네요?”
“웬수도 그런 웬수가 없지. 불쌍하기도 하고….”
목이 타는 듯 보살은 손에 든 찻잔을 입에 가져가 길게 들이키고 한숨을 내쉬었다. 윤기를 잃은 반백의 머리가 빗질을 자주 하지 않아서 부스스 일어나 있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보살이 부적을 쓰지 않을까. 보통 무속인들은 굿이 없을 때는 사주를 봐주거나 부적을 써서 생업을 이어간다. 더러는 식당이나 상점을 하기도 하지만. 보살은 찻잔에서 입을 떼고 헛기침을 한 뒤에 목청을 다듬었다.
“우리 집 냥반이 젊었을 적부터 내 속께나 썩였지. 아들을 하나 낳고 둘째를 가지려는데 어떤 영문인지 들어서지가 않더구먼. 그래서 외아들을 금쪽같이 여기며 키웠네. 그런데 원래 난봉기질이 있던 냥반이 슬슬 바람을 피우더란 말일세. 그래서 바람기를 잡으려고 점쟁이 집에 가서 부부금슬이 좋아지는 애정 부적을 샀네. 부적은 양과 음이 조화를 이루어야 효험이 있잖은가. 그래서 두 장을 받아서는 한 장은 꼭 접어서 영감 바지춤에 몰래 숨겨놓고 또 한 장은 베개 속에 넣었지. 그런데 부적이 효험이 없는지 이 냥반의 바람기는 갈수록 심해지더구먼. 그래서 다음번엔 용한 점쟁이를 찾아가서 비방을 물어봤네. 남편 바람기를 잠재우는 데는 여우자궁 만큼 좋은 부적이 없다는 거야. 그래서 요새 살아있는 여우도 보기 힘든데 어디서 여우자궁을 구하냐니까. 다 구하는 수가 있다며 알려주데. 중국을 드나드는 보따리 상인들이 몰래 사가지고 들어온다는구먼. 그래서 얻기 힘든 여우자궁을 하나 얻지 않았겠나. 그리고는 그것을 내 속옷에 몰래 숨기고 있었지. 그러고 한 며칠 지나니까 아닌 게 아니라 이 냥반의 바람기가 수그러들더란 말일세. 집에도 곧장 들어오고 사업차 출장 간다는 핑계도 줄어들고 말이지. 그게 정말 효험이 있어서 그런 건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바람기는 없어졌네.”
“아휴, 보살님. 사내들은 젊을 적에 한 번씩 다 바람을 피운다잖아요.”
남편에게도 그와 비슷한 일이 한 번 있었다. 한번은 빨래를 하려고 남편 바지주머니를 뒤지는데 쪽지가 하나 나왔다. 업무적인 메모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아닌 것도 같고. 암튼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나를 혼란스럽게 했던 건 메모 내용이 아니라 글이 적힌 메모지였다. 그것은 일상적인 메모지가 아니고 하트 그림이 그려진 종이였다. 저녁에 퇴근하자 대뜸 당신, 어디 숨겨놓은 여자 있어요? 하고 물었다. 남편은 뜨악한 눈빛을 하다가 이내 웃으며, 당연히 있지. 여기 당신, 하고는 얼버무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남편이 뭔가 숨긴다 싶어 감추고 있던 메모지를 얼굴에 디밀었다. 메모지를 본 남편은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아, 그거! 하면서 고백을 했다. 며칠 전 출장길에 우연히 결혼 전 사귀었던 여자를 만났다고. 그리고 함께 차를 마시고 헤어질 때 여자가 남편에게 메모지를 건네준 거라고. 나는 남편에게 이딴 메모지를 받지 말라며 못을 박고는 씩씩댔던 기억이 났다.
보살은 눈이 약간 침침한 듯 눈을 한번 비비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일별했다. 어젯밤에 잠을 옳게 못 잤는지 눈동자도 붉게 번져있었다. 찻잔에 남은 차를 마저 입에 붓고는,
“그것뿐이면 말을 안 하지. 이 냥반의 바람기도 좀 잠잠해지고 사업에 열심이다, 싶었는데 덜컥 부도가 나버렸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집 앞으로 열차가 지나다니는데, 철로에서 놀고 있던 외아들이 열차에 치여 죽었어. 부도난 이후로 이 냥반은 도망다니느라 기별도 없고, 외아들은 죽고. 나는 실성하다시피 해서 사는 걸 작파했지. 그러다가 종종 부적을 받으러 드나들던 무당을 찾아가서 죽은 아들 넋이나 달래주려고 굿을 부탁했어. 그리고 굿판이 한창 열리고 연신 비나리를 하는데 천궁에서 온 신령神靈이 그예 턱 하니 내 몸주로 들어와 버렸다네. 그때가 아마 20여 년 전이었지.”
물끄러미 얘기를 듣고 있는 내 마음도 덩달아 숙연해졌다. 늘 입을 닫고 살아가는 보살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게다가 가게에 올 때마다 늘 추레한 옷차림. 영감님의 행방불명과 외동 아들의 불의의 사고. 아마 보살은 죄인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소중한 자식을 잃고 녹록지 않은 세월을 살아온 저 앙상한 가슴에는 얼마나 깊은 한을 담고 있을까. 부모가 죽으면 산에다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데, 생떼 같은 아들을 잃은 어미의 슬픔을 그 무엇에 비할 수 있겠는가. 살아있는 날이 어쩌면 죽는 일보다 못한 형벌의 삶이리라. 내 삶이란 것도. 남편이 남기고 간 흔적을 매일 마주쳐야 하는 슬픈 날들. 아침이면 눈물로 흥건히 젖어있는 베개를 안고 또 흐느껴야 하는 텅 빈 시간. 남편이 여느 날처럼 일찍 일어나는 습관처럼, 불쑥 화장실에서 나올 것만 같은 착각에 물끄러미 화장실 문을 응시하기도 했다. 다른 남편들은 반찬 타박도 잘한다는데, 어떻게 된 건지 음식솜씨도 별로인 내가 밥상을 차려주면 꾸역꾸역 군소리 없이 잘도 먹었다. 한번은 그 모습이 귀여워서, 그때는 정말 남편이 귀엽게 보여서, 일부러 맵고 짜게 국을 끓였더니 내 입맛이 변했나,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남편이다. 남편과 사내 결혼한 내가 잠깐 직장 생활한 것 말고는 결혼한 이후 줄곧 살림만 했다. 아침에 눈을 뜨고서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남편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데, 하며 문득문득 며칠 전의 아침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침울한 아이들을 달래 학교에 보내 놓고 힘없이 앉아 남편의 체취가 밴 가구들을 만져보다 울컥 슬픔이 복받쳐오기도 했다.
가난한 우리는 소박한 결혼식을 하고 비용을 줄이기 위해 신혼여행을 설악산으로 갔다. 마침 눈이 내려 산길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등산로에 사람들이 아무도 없을 때 나를 덜렁 업고 가면서 내 와이프가 보기보다 무겁네, 하며 놀려댔었지. 엊그제 남편의 쉰 번째 생일날, 생일상에 밥과 미역국을 떠 놓고 그의 부재에 난 또 얼마나 흐느꼈던가. 남편은 결혼하고 십 년간 내 곁에 머무르다 떠났다. 그리고 홀로 견뎌온 십 년의 시간. 그 시간 동안 가끔씩 모든 게 허무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살아있으면서 이렇듯 무감각하게 세상을 응시하는 지금의 나. 어떤 날은 일이 손에 안 잡혀 매사에 흐느적거리다 하루해를 넘기기도. 그럴 때면 거울을 들고 또 다른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치 깨진 거울 조각 속에 내 얼굴이 들어 있는 것처럼. 그 안에 조각난 얼굴이 슬픈 눈으로 나를 지그시 건너보았다.
언젠가 남편과 함께 동해 바닷가로 드라이브 갔던 날, 처연한 장면을 봤다. 국도 한복판에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죽어있었다. 차량들이 쌩쌩 달리며 일으키는 바람에 하얀 털이 날리고 있었다. 만지면 아직은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을 것 같은 들개의 주검. 나는 문득 죽어있는 들개의 몸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 순간 내 손끝을 타고 끔찍한 소름과 시체의 온기가 동시에 전해져 온 것 같아 몸을 가늘게 떨며 움츠렸다. 사체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차량들이 들개의 몸을 타고 넘어갔다. 그럴 때마다 죽은 들개의 머리가 들썩거렸다. 죽기 전까지도 한 발만 더 뛰면 바퀴에 치여 죽는다는 것을 모른 채 앞으로만 달렸을 미련한 짐승. 어쩌면 내 삶도 길 위에 죽어있는 그 미련한 짐승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미욱한 존재. 어느 순간 내 앞에 깊은 슬픔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달려오지 않았던가. 남편이 책갈피에 끼워놓은 네잎크로버의 행운이 늘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리라 여기듯. 슬픔과 행복은 야누스의 얼굴처럼 둘이 아님을, 남편을 잃고서야 가슴이 저리도록 와 닿았다. 전철 화재사건 뒤 처참한 내 심정은 길에서 죽은 개의 사체 같았다. 개의 몸뚱이 위로 차바퀴가 수없이 지나다 보면 나중에는 털가죽만 남듯, 남편을 잃고 한동안 방황한 내 삶은 생명을 잃은 털가죽이나 다름없었다. 남편이 바닷가 큰바위에 서서, 우리도 여기 온 기념으로 글을 새겨두자고 했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보면 싫어할 텐데, 하며 말렸다. 그러나 남편은, 옛날 선사시대에 바위에 그렸던 암각화라는 것도 일종의 행운을 비는 부적이래. 그때 사람들도 바위에 그림을 새기며 풍요를 빌었을 거야. 그리고 바위에 새긴 동물마다 상징하는 그들의 소망도 깃들어 있는 거래, 하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마침 색깔이 나는 작은 돌멩이를 찾아서는 글을 새기기 시작했다. 우리 가정에 사랑과 행복이 가득 넘치기를. 현우와 은혜 다녀감. 글을 다 쓰고 난 남편의 환하게 웃는 표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이들과 함께 힘든 삶을 살아가야 하는 많은 시간. 어느 순간 남편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아이들과 나를 지켜보리라는 느낌이 불현듯 들 때도 있다. 언뜻 등 뒤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시선. 얼핏 뒤돌아보면 무료한 정물 풍경만이 헛헛한 가슴으로 밀려들던 상실감에 몸을 떨기도. 아이들은 아빠와 함께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예감이라도 한 듯이 유독 아빠를 잘 따랐다. 퇴근한 남편과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장난을 치거나 할 때면 은근히 질투가 생길 정도였으니까. 짧은 시간 동안 남편은 나와 아이들에게 사랑을 듬뿍 안겨주고 떠난 것 같다. 평생 나누어 줄 사랑을 한꺼번에 다 주고 가려는 것처럼.
시난고난한 삶을 살아 온 보살은 나이에 비해 주름도 많이 잡혀 있었다. 그 모진 세월을 저 보살은 어떻게 견디며 살아왔을까. 보살은 눈언저리로 흘러내린 몇 올의 머리카락을 갈퀴 같은 손으로 쓸어 올리더니,
“그렇게 집안 폭삭 망하고 팔자에도 없는 무당이 되었지. 사는 게 힘들 때는 한 많은 이 세상과 연을 끊으려고 골백번도 마음먹었지. 그래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났다고, 모진 게 목숨인가 벼. 이를 악물었지. 죽을 때 죽더라도 이 냥반이 집에 돌아오는 것 보고 죽겠다고. 그래서 내가 배운 짓이라고는 푸닥거리밖에 없으니 굿판을 열거나 부적을 쓰면서 연명했네. 시난고난 갖은 고생하며 사는데 한날은 파출소에서 깜깜무소식이던 그 냥반 소식이 들려오더란 말이여. 웬 부랑인이 나를 찾더라고 하면서. 한달음에 가보니 허, 이 냥반이 거지꼴을 하고 쭈그려 앉아있는데, 우리 집 영감이 맞는가 싶더구먼. 가만히 보니 눈도 좀 이상해 보이는 게 정신도 온전치 않더라니. 옛날에 그 번지르르하던 행색은 어디 가고 꼭 비렁뱅이 짝이었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조금 전까지 사락사락 날리던 눈발이 어느새 멎었다. 그 눈발은 보살의 앙상한 가슴속에서 여전히 날리는 것 같다. 황량한 들판 위로 가뭇없이 날리는 눈보라처럼. 보살의 눈동자가 텅 비어 보인다. 생기라곤 한 가닥도 없어 보이는 그런 눈빛. 예전에 내 눈빛이 그랬었지. 멍한 눈으로 앉아있는 날들이 많았다. 공원에서 낯선 이가 앉았다 간 빈자리도 쓸쓸해 보이는데, 하물며 가장 사랑하는 남편의 빈자리임에랴. 혼자인 시간에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보면 햇빛 쨍쨍한 대낮이 걸려 있고, 눈을 감으면 내 안에는 굵은 눈발이 날렸다. 하루하루가 혼돈과 혼란스러움의 연속이었다.
행여 시장이라도 다녀오다 아는 이를 마주치면 왠지 미워지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도 저이와 나는 행복의 저울질을 하지 않았던가. 우리 형편과 비슷한 집이나 조금 잘 사는 집의 행복을 저울질하며 그렇게.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 오면 일부러 돌아가기도 하며 내 처지에 대해 원망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나는 작은 일에도 신경질을 내거나 분노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한없이 나락으로 추락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전에는 간혹 싱크대 밑에 서식하던 바퀴벌레라도 스멀스멀 기어 다니면 징그러워 비명을 질렀는데, 언젠가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손으로 꾹꾹 눌러 죽이는 내 모습에 스스로도 놀랐다. 남편을 잃은 내 마음은 늘 공허했다. 부적 쓰는 법을 배운 뒤 처음으로 남편의 넋을 위해 붓을 잡던 날. 나는 한 획도 쓰지 못하고 펼쳐진 부적 종이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종이 위에 남편의 얼굴이 어른거려 눈물만 떨어뜨렸다. 나는 붉어진 눈언저리를 닦고 모질게 마음먹었다. 아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남편을 위해서 악착같이 한번 살아보리라. 만약 신의 시샘이라면 멋지게 살아서 초라해진 내 삶을 복수하리라고. 그리고는 다시 붓을 잡고 온 기력을 쏟아 부적을 썼다.
나는 고즈넉이 난로를 바라봤다. 여전히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열기로 가게 안이 따뜻해졌다. 혼자가 된 이후 나는 한동안 불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불을 보면 자꾸만 남편이 떠올랐다. 저 뜨거운 불 속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남편의 모습. 그 악몽 같은 환상에 사로잡혀 꿈속에서도 남편은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 나타나곤 했다. 뜨거운 불길 속에서 남편과 내가, 그리고 단란했던 우리 가정이 송두리째 불길에 휩싸였던 그날의 악몽에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다.
어느덧 오카리나 소리도 멎어있었다. 보살은 회한이 밀려오는 듯 눈을 잠깐 감았다 떴다. 다시금 눈에서 물기가 나오는지 손등으로 살짝 훔치더니,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집에 돌아온 냥반이 그래도 핏줄은 보고 싶었는지 아들을 찾더라니. 벌써 저 세상으로 간 아들이 살아올 리는 없고. 아들이 열차에 치여 죽은 걸 알고는 점점 더 정신이 오락가락했지. 그래서 굿판도 열어 푸닥거리도 해보고 부적을 써서 집안 곳곳에 붙여도 봤지만 효험이 없더구먼. 나중에는 병이 깊어져 할 수 없이 병원에 입원을 시켰네. 그런데 며칠 후에 이 냥반이 병원에서 사라져 버렸다네. 다시 찾고 보니 이 양반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큰 사고를 내지 않았겠나. 그 사고로 온몸에 중화상을 입고 여태까지 식물인간과 다름없이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네. 그러다가 결국 저승사자가 불러서 엊그제 저 세상으로 갔네.”
“참 안 되셨네요. 그런데 영감님이 무슨 사고를 냈는데요?”
“급살 맞을 냥반이 글쎄, 귀신에 홀렸는지 전철 안에다 불을….”
“전철요? 아니, 영감님이 전철에다 불을 냈다구요?”
“…….”
나는 너무 놀라 동공이 저절로 크게 열렸다. 혹시 보살의 말을 잘 못 들었나 싶었다. 그날의 악몽을 잊기 위해 그곳에서 이사를 왔는데, 설마 그 사건의 방화범이 지금 내 앞에 있는 보살의 영감님이라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기막힌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내 볼이라도 꼬집어보고 싶었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엉키어버린 듯 복잡해졌다. 나는 보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보살의 얼굴이 많이 일그러져 있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지 입매가 씰룩이고 눈썹이 파르르 떠는 것 같았다.
“그 냥반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뒤로 부적을 끊었네. 천벌을 받아도 시원치 않을 여편네가 무슨 낯으로 부적을 쓰겠나. 죽는 날까지 그저 죄인의 몸으로 살아야지….”
고개를 세우고는 남편의 부적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쓴 남편의 부적을 들고 유골이 안치된 납골당으로 갔다. 화재 현장에는 여러 유해가 뒤엉켜있어 그 일부를 유골함에 담아 납골당에 안치했다. 유골함에 부적을 붙이고 돌아오는 길에 여러 무리의 새 떼가 황혼의 서편 하늘가를 나는 게 보였다. 나는 차를 길가에 세워두고 새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산과 하늘의 경계선이 흐릿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하늘 한편에서는 노을이 스러져 가고, 아래로는 완만한 능선이 아름답게 보일 무렵이었다. 새들은 황혼을 날면서도 서두름 없이 날고 있었다. 뒤 쳐진 새 한 마리가 바삐 무리를 쫓고 있었다. 나는 새들이 서편 하늘로 가뭇없이 사라질 때까지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들이 사라지고 난 후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슬픈 것 같기도 하고 편안해진 것도 같았다.
천궁 보살이 가게를 나간 뒤 시계를 보니 정오를 막 지나고 있었다. 나는 멍해진 기분으로 줄곧 앉아있다가 창밖으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멎었던 눈발이 다시 내리고 있었다. 나는 깨끗한 부적지를 꺼내어 조심히 유리판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복잡한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남편 얼굴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희미하게 웃는 것도 같았다.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뒤 망자의 부적을 정성껏 써 내려갔다.
•수상소감 - 최우수상 단편소설 박도열
“닐 암스트롱처럼 아무도 밟지 못한 미지의 땅에 소설가로서 첫발자국을 남기고 싶어”
코로나 19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저에게 뜻밖에 소설 당선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게는 올 한해 최고의 선물이 되겠습니다.
제가 소설에 관심을 가진 지는 오래됐습니다. 하지만 경제적 여건과 생업 때문에 소설 쓰기에 집중적으로 매달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최근 오랫동안 하던 일을 접고 비로소 소설 쓰기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소식을 접하고는 응모를 하게 됐습니다.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으며 다방면의 책을 읽었습니다. 이십 대에는 감동적인 소설을 읽고 나면 볼펜으로 필사를 해 보는 등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저의 경험을 토대로 여러 편의 소설 습작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시에도 관심이 많아서 초기에는 한동안 시에 매달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모임에 종종 참석하게 됐는데, 그곳에서 유명한 소설가를 만나게 됐습니다. 그분이 평소 저의 시를 보셨는지 하루는 시보다는 소설 쪽에 더 어울린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도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분 말씀을 듣고 나서 소설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소설가라면 으레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오래도록 기억되는 작가로 남는 게 가장 큰 소망이겠습니다. 저 또한 그런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겠습니다. 더 욕심을 부려본다면 달나라에 첫발을 내디딘 닐 암스트롱처럼 아무도 밟지 못한 미지의 땅에 소설가로서 첫발자국을 남기고 싶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제게는 아픈 손가락들이 있습니다. 늘 무거운 짐으로 제 가슴에 내려앉아 있습니다. 그 아픈 손가락들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지난주에 작은 우체통 하나가 놀이터에 생겼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인 은지가 좋아하는 노란색이었고 작은 집 모양의 우체통이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 나는 마음 우체통이에요. 누구와도 말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말을 편지로 써서 보내주세요. 비밀도 보장해주고 답장도 해드려요.’ 라는 설명이 우체통 아래에 붙어 있었습니다. 안내문을 슬쩍 읽고 난 은지는 며칠 째 낯선 우체통 앞을 그냥 지나쳐 집으로 갔습니다.
은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엄마가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은지 왔구나. 학교 수업 잘 했어?”
은지는 무심한 듯 “네.”라고 답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엄마는 실망했지만 다시 목소리를 높여서 은지의 방을 향해 물었습니다.
“은지 좋아하는 피자해 놨는데 먹을래?”
은지는 이번에도 짧게 “아뇨.”라고 대답했습니다.
엄마는 한 숨을 쉬며 무슨 일을 해야 할 지 생각하다가 정원으로 나갔습니다.
‘볕이 참 좋네.’ 엄마는 두 팔을 벌리고 혼잣말을 했습니다. 하늘을 쳐다보고 난 후, 멀리 보이는 놀이터의 우체통에 눈길을 주었습니다.
빨랫줄의 빨래가 바람에 펄럭였습니다. 엄마는 은지의 바지와 원피스와 티셔츠를 걷어서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소파에 빨래를 놓고 맨 위에 있던 청바지부터 개키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낡아서 입지 못하겠네.’ 엄마는 실밥이 터지고 무릎 부위가 두 주먹만큼 뚫린 바지를 옆으로 치웠습니다. 새 바지를 사 주면 은지가 좋아할 거라는 상상을 했습니다. 새엄마라서 헌 옷만 입힌다는 오해를 받을까봐 걱정도 되었습니다. 나머지 옷들도 차례대로 개키면서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은지가 마음을 열까, 어떻게 해야 은지의 말수가 늘까.’
은지 엄마는 삼 년 전에 교통사고로 은지 곁을 떠났습니다. 그 충격으로 다섯 살이었던 은지는 말을 잃었고, 다행히 작년부터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아빠의 노력이 컸습니다. 아빠는 일주일에 두 번씩 회사에 조퇴를 하고 은지를 심리상담 센터로 데리고 갔습니다. 거기서 은지는 아빠랑 함께 미술치료를 받았습니다. 상담 선생님이 소풍가는 사진을 그리라고 하면 은지는 자신과 아빠 사이에 엄마를 그려 넣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림 속의 엄마는 아빠나 은지보다 두 배로 컸습니다.
“은지, 이건 뭐야?”
“엄마소예요.”
“이건?”
“엄마나무예요.”
동물을 그리건, 식물을 그리건, 늘 은지의 도화지엔 엄마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아빠는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두 시간씩 은지와 놀아주었습니다. 아빠가 퇴근해서 오기까지 세 시간 동안은 은지를 위해 돌봄이 선생님이 와주셨습니다. 은지가 유치원에서 끝나면 돌봄이 선생님이 데리러 가서 같이 손을 잡고 집으로 왔습니다. 돌봄이 선생님은 은지가 종이접기를 했고, 사과를 두 쪽 먹었고,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등 그날그날의 일을 은지 아빠에게 상세히 전달했습니다. 은지 아빠는 좋은 선생님을 만난 것 같아서 안심이 되었습니다. 은지도 돌봄이 선생님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삼 년을 지낸 은지는 돌봄이 선생님과 친해졌습니다. 은지의 아빠도 선생님과 친해졌습니다. 주말에 세 사람이 함께 놀이동산에 놀러가기도 했습니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은지 아빠와 돌봄이 선생님은 결혼을 했습니다.
“은지야, 선생님과 결혼해서 같이 사는 건 어때?”라고 아빠가 물었을 때 은지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은지는 결혼식 날, 꽃분홍 드레스를 입고 빨간 융단위에 꽃을 뿌리는 역할을 잘 해냈습니다. 하지만 새엄마와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아빠가 은지와 놀아주는 시간이 조금씩 줄어들었습니다. 아빠는 밀렸던 회사 일을 해야 했습니다. 아빠 대신 엄마가 동화책도 더 읽어주고 많이 놀아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은지, 잘 자. 자다가 무서운 꿈꾸면 언제든지 안방으로 와.”
엄마가 은지의 잠자리를 봐주고 떠날 때 하는 말이었습니다. 엄마가 방의 불을 끄고 나가면 은지는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나란히 누워 있을 아빠와 엄마를 생각하면 아빠를 빼앗기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엄마가 좋은 사람이란 걸 알면서도, 엄마가 아빠한테 잘 하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되고 아빠가 엄마한테 잘 할 때는 골이 났습니다. 선생님으로서 하루에 세 시간씩 돌봐줄 때와 엄마로서 매일 함께 지낼 때와는 느낌이 달랐습니다.
엄마가 된 선생님은 집이 지저분하다며 이것저것 버리자고 했습니다.
“아빠가 바빠서 대청소할 시간이 없었나봐.”
은지는 싫었습니다. 친엄마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을 하나도 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은지 마음을 엄마뿐 아니라 아빠도 알 지 못했습니다.
“싫어, 싫어.”
떼를 쓰는 은지에게 아빠가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은지가 고집이 심하네. 너무 오래 되고 망가져서 쓸 수가 없다고. 더 좋은 걸로 사줄게.”
은지는 문을 쾅 닫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한참을 울었습니다. 은지는 점점 아빠와 엄마가 섭섭했습니다. 은지가 말을 잘 하지 않아서 답답한 아빠와 엄마는 잠들기 전에 은지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러다가 엄마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다음날, 엄마는 인터넷으로 주문한 재료를 이용하여 우체통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삼 일 후에 예쁜 우체통이 식구들 모르게 만들어졌습니다. 엄마는 사람들이 없는 틈을 이용해서 우체통을 놀이터에 있는 큰 나뭇가지에 얹어놓았습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노란 우체통으로 놀이터가 환해졌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좋아했습니다. 표현을 하지 않아서 은지의 마음을 알 수 없던 엄마가 슬쩍 물었습니다.
“놀이터에 이상한 물건 있는 거 봤어?”
“네.”
“예쁘지?”
“네.”
그뿐이었습니다. 엄마는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은지가 학교에 간 사이에 한 번씩 놀이터로 가서 자물쇠를 열었습니다. 편지가 한 통, 두 통씩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는 편지마다 정성들여 답장을 썼습니다. 편지 내용은 여러 가지였습니다. 동생이나 친구 흉보는 편지도 있었고 욕을 써 넣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중 엄마에 대한 불만의 편지가 제일 많다는 점에 은지 엄마는 놀랐습니다. 아이들이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고, 엄마는 가족 중에 잔소리하는 역할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아이들의 마음을 전보다 더 잘 알게 되어서 기뻤습니다. 엄마는 편지가 늘어날수록 답장을 써야할 시간도 늘었지만 막상 기다리던 은지의 편지는 없었습니다.
우체통 앞을 지나치던 은지가 이번엔 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돌았습니다. 우체통을 한참 쳐다보다가 가방을 열어서 노란 편지봉투를 꺼냈습니다. 두 손으로 우체통에 밀어 넣었습니다. 톡,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습니다. 미루던 숙제를 끝낸 것처럼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그때부터 은지는 답장이 올 날만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거짓말처럼 하늘나라 엄마의 답장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지런히 걸어서 집에 도착했습니다. 거실 창으로 엄마가 지켜보고 있단 사실을 은지는 몰랐습니다.
“은지,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네.”
엄마가 은지의 표정을 살폈습니다. 이번에도 은지는 “네.”라고만 답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나는 새엄마가 좋으면서도 싫어요. 친구들이 새엄마 생겼다고 소곤거리는 것도 싫고, 새엄마와 종일 뭐하고 지냈냐고 아빠가 묻는 것도 싫고, 새엄마가 친엄마의 물건들을 내다 버리는 것도 싫어요. 점점 싫은 게 많아져서 싫어요.’
엄마는 은지가 학교에 간 사이에 편지를 꺼내 읽었습니다. 은지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 미안했습니다. 고민하다가 답장을 썼습니다. 며칠 후 편지는 우편배달부를 통해 은지 집에 도착했고,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편지를 은지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와서 편지를 발견한 은지는 기뻤습니다. 은지는 노란 편지봉투를 뜯고 편지를 꺼내서 읽었습니다.
‘은지, 편지 잘 받았어요.
나도 은지처럼 어려서 싫은 것 투성이었어요. 엄마도 싫고, 아빠도 싫고, 친구도 싫고, 학교 가기도 싫고. 우리 통하네요. 그런데 싫은 걸 표현 안하고 참고 있으면 상대방이 몰라요. 내가 화가 나서 엄마한테 참았던 말을 쏟아 부었어요. 엄마는 이래서 싫고, 저래서 싫어! 듣고 난 엄마가 놀라면서 말했어요. 진작 말하지, 맘을 몰라줘서 미안하다고.
은지도 싫은 것들에 대해서 엄마한테 말해보면 어때요? 예를 들어, 은지가 물건을 버리기 싫은 이유를 설명하면 엄마가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요? 말로 하기 힘들면 편지를 남기는 건 어떨까요?’
편지 끝에 세 잎 클로버가 그려있었습니다. 전에 엄마가 세 잎 클로버의 의미를 말해준 적이 있습니다. 네 잎 클로버는 귀해서 ‘행운’의 뜻이 있고, 세 잎 클로버는 ‘행복’의 의미가 있으니, 네 잎 클로버 하나보다 세 잎 클로버가 많을수록 좋다고.
은지는 세 잎 클로버를 보니 행복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의 이름은 없고, ‘마음 우체통으로부터’라고만 적혀있었습니다. 누가 보내준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은지는 답장을 쓴 사람이 하늘에 있는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만한 나이였습니다. 은지는 편지를 책상 서랍 깊은 곳에 숨겨두었습니다. 답장에 있는 대로 하진 않더라도, 남의 흉을 본 것처럼 마음이 가벼워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은지는 또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답장을 기다렸습니다. 마치 은밀한 비밀 모의를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었습니다. 학교 갈 준비를 마친 은지가 낡은 청바지를 찾았습니다.
“너무 낡아서 며칠 전에 버렸는데......"
은지가 엄마를 노려보면서 소리 질렀습니다.
“미워, 미워. 내가 제일 아끼는 바진데......”
“미안해, 은지야, 도저히 입을 수 없는 상태야. 더 좋은 걸로 사줄게.”
은지는 막무가내였습니다. 마음 우체통의 답장처럼 엄마한테 청바지를 아끼는 이유를 말하지 않은 게 은지는 후회되었습니다.
엄마는 겨우 은지를 달래서 학교로 보내고 주민센터로 급히 전화를 걸었습니다. 헌옷 가져가는 트럭이 은지 동네 옷을 조금 전에 가져갔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엄마는 차키를 들고 달려 나갔습니다. 계단을 내려가다 발목을 삐끗했습니다. 절룩거리면서 차로 가서 올라탔습니다. 차에 시동을 걸고 주민센터에서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급한 사정이 생겼으니 차 좀 멈춰주세요. 금방 도착합니다. 제발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 기다려주세요.”
엄마는 마음이 초조했습니다. 운전을 하면서 서럽게 울던 은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엄마가 그리워서 은지가 물건들을 못 버리게 한 거구나.’ 뒤늦게 은지의 마음을 알게 된 엄마는 부끄러웠습니다.
엄마는 힘들게 헌옷을 수거해 간 차를 발견하고 무사히 은지의 낡은 청바지를 찾아왔습니다. 곱게 접어서 편지를 쓰던 서재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바지를 찾아오느라 오전을 다 소비해버렸기 때문에 답장은 밤에 잠을 줄이고 써야 했습니다. 당장은 밀린 청소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땀을 흘리면서 부지런히 청소를 마친 엄마는 은지가 오길 기다렸습니다.
은지가 현관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엄마가 서재에서 바지를 뒤에 감추고 나왔습니다. 화가 풀리지 않은 은지는 신발을 함부로 벗어던졌습니다. 인사는커녕 엄마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엄마가 낡은 바지를 내밀었습니다. 은지는 얼굴 표정이 바뀌더니 깡충깡충 뛰었습니다. “그렇게 좋아? 맛있는 간식 만들어 줄게.”
엄마가 돌아서다말고 신음 소리를 내며 어쩔 줄 몰랐습니다. 아까 옷을 찾으러 가다가 삐끗한 발목이 아팠습니다. 그때 서재에 있던 엄마의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울상이 된 엄마가 말했습니다.
“은지야, 휴대폰 좀 갖다 줄래?”
은지는 얼른 서재로 달려갔습니다. 책상위에서 벨소리가 나고 있었습니다. 휴대폰을 집으려는데 책상위에 쌓여있는 온통 노란색의 편지봉투와 편지지가 보였습니다. 익숙한 글씨체였습니다. 편지 끝에 세 잎 클로버도 그려져 있었습니다. 은지는 놀랐습니다.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 은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못 찾았니?”,
“가요.”
은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휴대폰을 엄마에게 주었습니다. 벨소리가 멈췄습니다. 엄마는 휴대폰 화면을 확인하고 나서 은지에게 물었습니다.
“청바지가 너무 찢어졌는데 입을 수 있겠어?”
은지가 밝은 목소리로 답했습니다.
“저도 입을 수 없는 거 알아요. 하지만 그래도 갖고 있을래요.”
“그 바지를 은지 방의 벽에 멋지게 걸어 두는 건 어떨까? TV에 나오는 언니, 오빠 방을 보면 연예인 사진이나 천 조각을 붙여두는 것처럼.”
“너무 멋진 생각이에요.”
은지는 손뼉을 치며 잇몸이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었습니다.
며칠 후에 엄마는 은지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엄마, 감사해요. 제가 엄마의 비밀을 알아버렸거든요. 이제 아빠 몰래 엄마랑 저만 비밀을 나누는 거예요. 앞으로 잘 할게요. 친엄마도 내 엄마고, 새엄마도 내 엄마에요. 저는 엄마가 둘이라서 두 배로 행복해요.’
편지 끝에는 세 잎 클로버가 빼곡히 그려있었습니다.
그 후로도 마음 우체통은 거기에 있었고, 여전히 은지는 편지를 쓰고 답장을 기다리는 시간이 즐거웠습니다. 낡은 청바지가 벽에 걸려있는 자기만의 방에서.
ㆍ수상소감 - 쏠드상 동화 박상미
“성인이 돼 읽은 동화, 신선하면서도 잊고 있던 사실을 일깨워 줘”
기쁘면서도 어리둥절합니다.
몇 년 전에 서랍 정리를 하면서 어쩌다 한 번씩 써 놓은 이십여 년 전의 일기장을 발견했습니다. 읽다보니 가슴이 답답해졌어요. 내 맘조차도 상세히 적어 내려가지 못한 어설픈 문장들, 막연하고 추상적인 단어들의 나열,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한정적 어휘나 표현 방식. 일기장을 덮고 나니 글에 시멘트가 발린 느낌이었어요.
내 몸에 음식을 잘 넘어가게 하는 기관인 식도가 있듯이, 내 감정을 체하지 않고 잘 넘어가게 하는 방법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지요. 글쓰기 강의를 신청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직장 근무시간을 피해서 들을 수 있던 장르는 소설밖에 없었습니다. 얼떨결에 단편 소설을 읽고 쓰기 시작했지요. 처음엔 소설을 쓴다는 행위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불편했지만, 쓰고 보니 유치하면서도 신기했어요. (초등학교 때 아이들 모아놓고 꾸며낸 얘기를 해줄 때는 거짓말 한다는 의식이 없었거든요.) 그러면서 책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고, 소설 한 권, 한 권이 나올 때마다 작가가 얼마나 진통을 겪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미술도, 음악도 마찬가지겠지만 글쓰기도 ‘주기’가 있어서 어떤 느낌이 오면 글이 술술 나오는 듯하다가, 한 줄도 못 쓰고 몇 주를 흘려보내기도 하고, 심지어 글 쓰는 실력이 후퇴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답니다. 직장을 다니면서 1년에 4편의 단편을 쓴 적도 있지만, 작년부터는 코로나로 인한 우울과 두 번에 걸친 수술로 인해 다리가 아프니까 근력도 빠지면서 몸 전체가 병들어가는 느낌이었어요. 직장을 그만둔 터라 시간은 많은데 글이 써지기는커녕 오히려 머리에 박스를 뒤집어쓴 기분이었습니다. 소설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만 가진 채 애꿎은 텔레비전 리모컨만 눌러댔지요. 그러다가 예능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고, ‘우체통’ 이란 모티프를 건지게 되었고, 동화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 쓰기를 시작한 이래로 동화를 쓰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던 터에, 이만교 작가 수업을 들으면서 몇 편의 동화를 읽게 되었습니다. (이 기회를 통해서 이만교 작가님께 감사 말씀 드립니다.) 성인이 되어 읽은 동화는 신선하면서도 잊고 있던 사실을 일깨워주었어요. 동화 속에는 무한한 상상의 세계가 있고 불가능이 없는데, 동화를 읽고 자란 어른이 된 나는 왜 상상력이 줄어들고 있을까. 줄어든 상상력 자리에 편견과 선입견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군다나 필명을 ‘상상’이라고 지었는데.
가장 인상에 남은 동화는 미셀 누드슨의「도서관에 간 사자」였습니다. 읽는 내내 웃음이 나왔어요. 편견을 허물고 융통성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 규칙을 만들 때 예외를 둘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내용. 읽고 나서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두 읽을 수 있는 동화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생각이 연장되다 보니 한 편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때 써놓은 작품과 이번에 응모할 작품을 초등학교 3학년 조카한테 읽어보라고 했지요. 응모작인 ‘마음 우체통’은 재미있고 주인공의 마음이 잘 전달되는데, 전에 써놓은 작품은 덜 감각적이라는 답이 돌아왔어요. “감각적이란 게 무슨 말인지 설명해줄래?”라고 물었더니 조카가 대답했어요.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소리는 귀에 대고 듣는 것처럼, 묘사는 진짜 보는 것처럼 써야 한대요.” 입이 벌어졌지요. 내가 조카 나이 때 그런 생각을 못했거든요. 소설 수업에서 과제물로 썼던 동화는 슬그머니 서랍 안에 넣어두고, 조카의 칭찬을 받은 최근 작품으로 응모를 하게 되었습니다. 조카는 수상 소식을 듣고 신기해했어요. 고모가 유명한 동화작가라도 된 듯.
이제 조카는 나의 1호 평론가가 되었답니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동화를 계속 쓰고 싶습니다.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가 읽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는……
같이 소설 공부하는 문우가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소식을 알려주었습니다. 공고를 보고 ‘여기에 당선되는 사람들은 좋겠다’는 생각만 하고 말았지요. 잊고 지내다가 응모 기간 일주일을 남겨두고 느닷없이 동화 소재거리가 생각났고, 몇 시간 만에 써 내려갔습니다. 시간을 투자하고 힘들게 만든 곡보다, 갑자기 악상이 떠올라서 몇 분 만에 쓴 곡이 의외로 인기가 더 많은 경우가 있다는 작곡가의 말이 떠올랐어요. 문제를 아무리 해결하려고 해도 풀리지 않는 경우가 있지만, 예상과 반대로 빨리 풀리기도 하는 삶의 과정과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을 하든 포기하지만 말고 꾸준히 하자고 오늘도 나 자신을 독려합니다. 그러다 보면 나의 뮤즈를 만날 수 있으니까요.
시니어 문학이 자리를 잡아갈 수 있도록 장(場)을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퇴직이라는 위기의 기로에서 맞잡은 손을 더욱 단단히 그러쥔 부부가 있다. 예상치 못한 권고사직과 재취업 실패, 노후 자금 공백. 금슬 좋은 부부를 시험하기라도 하듯 중년에 들어 온갖 폭풍이 닥쳤지만, 두 사람은 갈라섬을 고민하는 대신 서로의 기둥이 되기로 했다. ‘사모님’ 소리를 듣던 아내는 결혼 후 처음으로 사회에 발을 내디뎠고, 전용 기사를 둔 대기업 임원 출신 남편은 ‘따릉이’를 타고 다니는 택배 노동자로 인생 2막을 열었다. “인생에 가을이 찾아와 가을옷을 입은 것뿐”이라는 강찬영(60)·박경옥(57) 부부를 만났다.
예측할 수 없는 날씨가 반복되는 여름이다. 맑은 하늘에 마른 천둥이 내리치는가 하면, 소나기가 쏟아져 우산 없이 낭패를 보는 날이 잦다. 잠깐의 소나기는 손우산으로 피하면 그만이지만, 장마철 태풍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비 없이 찾아온 태풍은 집을 휩쓸고 봄내 가꾼 논밭을 가차 없이 망가뜨린다. 준비 없는 퇴직도 비슷하다. 수십 년 경력이 최고점에 달했을 때 보금자리가 사라지고, 차곡차곡 쌓은 커리어는 휴짓조각이 된다. ‘오늘, 남편이 퇴직했습니다’ 저자 박경옥 씨는 남편의 퇴직을 “한여름의 태풍 같았다”고 비유했다.
태풍이 찾아오기 전의 여름은 뜨거운 열정이 타오르는 청년의 모습처럼 한없이 청량하다. 강찬영 씨의 청년기도 빛났다. 이름만 들으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해운회사에서 27년간 영업직으로 일했다. 퇴직 전 2년 동안 임원도 맡았다. 임원직에 앉아 있을 때, 임시직인 만큼 실적과 관계없이 계약이 끝나는 대로 회사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회사가 공중분해될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강 씨는 2013년, 53세의 이른 나이에 권고사직이라는 대책 없는 폭풍을 맞았다. 강 씨는 “학창 시절을 다 합친 것보다도 긴 시간 회사를 다녔으니 그야말로 ‘멘붕’이 왔다”며 “현실을 깨닫는 것부터 어려웠다”고 말했다.
퇴직 부부의 동상이몽
퇴직 후 퇴직금이 두둑하게 쌓여 있던 1년간은 평화로웠다. 벼르던 여행도 가고, 주말마다 부부끼리 산에 다니며 자유 시간을 만끽했다. 강 씨는 5개월 만에 비슷한 직무로 재취업에 성공했다. 외국 회사와의 계약을 따내야 하는 중소기업의 큰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최종 단계에서 계약이 무산되면서 1년여 만에 다시 회사를 나와야 했다. 두 번째 폭풍이었다.
대부분의 화이트칼라 퇴직자가 그러하듯, 강 씨 부부도 퇴직 후 얼마간은 동종 업계로의 재취업을 준비했다. 강 씨가 자기소개서를 쓰면, 박 씨가 오탈자와 문맥을 봐주며 정성을 쏟았다. 그러나 돌아오는 연락은 없었다. “현역 때의 열기가 살아 있을 때니 재취업이 가능할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했던 강 씨와 달리 박 씨의 속은 점점 타들어갔다. “세상 물정 모르고 눈을 낮추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한 번은 외국으로 굿을 다니는 무당의 통역사를 뽑는 공고에 대기업 시절 연봉을 적어 지원했다는 남편의 말을 듣고 ‘통역사에게 그만한 월급을 주려면 한 달에 굿을 얼마나 해야 하느냐’고 속으로 나무란 적도 있었다.
모아둔 노후 자금이 야금야금 줄어들고, 재취업의 동상이몽이 길어지는 와중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니 두 사람은 사소한 일에도 부딪혔다. 임원 시절 지시하던 습관이 집에서도 배어나오는 탓이었다. 강 씨가 지방에 일이 생겨 기차표를 끊어달라 하면 박 씨는 “여긴 회사가 아니니 당신이 직접 알아보라”며 반박하곤 했다. 늘어나는 집안일도 박 씨의 신경을 긁는 요인 중 하나였다. “남편이 집에 있으니 일이 더 많아졌어요. 젖은 옷은 탁탁 털어서 널어야 구김이 안 가는데, 그대로 널어 두 번 일하게 만들고. 세탁기도 버튼 한 번만 누르면 다 되는 줄 알고.(웃음) 안 해봤으니 모르는 게 당연한 건데 화가 나더라고요.”
강 씨는 “답답한 마음은 이해되지만, 조금은 기다려주길 바랐다”며 “27년 동안 가족을 위해 일만 했는데 배신당한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고 내심 서운함을 드러냈다. “저 역시 연금이 나올 때까지 공백이 생기니 놀고만 있을 수는 없겠다 생각했어요. 아내와 동등한 입장에서 집안일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죠. 그래도 은퇴하면 적응의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어깨의 힘을 빼고 자세를 낮춰야 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고 싶었죠.”
‘인생 공부’로 되찾은 금슬
박 씨는 남편과의 불편한 동거가 계속되자 절에서 숙식하는 공양주 보살 일을 찾아보며 잠깐 떨어져 있을 생각까지 했다. 그런 그녀가 깨달음을 얻은 건 주말 농사를 하면서다. 어느 날 고랑의 잡초를 뽑던 그녀는 문득 계절의 흐름에 따라 자라나는 작물을 보며 “인생의 가을에 접어든 남편에게 잘나가던 여름의 모습이 계속되기만 원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계절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건 강 씨도 마찬가지였다. “인생의 여름이 지나갔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가을에 여름옷을 입고 있으면 춥잖아요. 계절이 흐르면 그에 맞춰 옷을 갈아입고 준비해야죠.”
마음가짐을 달리하니 부부 사이에도 변화가 생겼다. 두 번째 퇴직 후 1년쯤 지났을 무렵, 박 씨는 무료해하는 남편을 데리고 지역 도서관에 갔다. 남편이 일하는 동안 심심하면 도서관에 가서 인문학 공부를 했던 기억이 나서다. “‘뭐라도 해라’는 심정이었죠.(웃음) 그런데 독서를 해보니 남편이 책 한 권을 꼼꼼하게 읽는다는 걸 알았어요. 특히 동양학 서적을 집중해서 보길래, 관심 있으면 공부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죠.”
박 씨의 말에 용기를 얻은 강 씨는 2017년 원광디지털대학교 동양학과에 입학했다. 잠들어 있던 학구열에 불씨가 피어난 순간이었다. 서울시 50플러스센터 공유사무실을 빌려 작정하고 공부에 돌입했다. 박 씨는 “남편과 잠시나마 떨어질 수 있었던 팁”이라며 웃었다. 혼자만의 공간이 생긴 덕분이었을까, 첫 학기를 제외하고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졸업했다.
함께하는 취미가 생기니 소통도 늘었다. ‘베갯잇 대화’ 시간도 생겨났다. “새벽에 눈 뜨자마자 이야기를 나누는 거예요. 공부라는 공통분모가 있으니 소재가 무궁무진하더라고요. 덕분에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어요. 퇴직 후 남편이 스크린 골프장에 가는 걸로 자주 싸웠는데, 알고 보니 언제 찾아올지 모를 비즈니스 자리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알게 됐죠.”
골머리를 썩이던 집안일 문제도 해결했다. 두 사람이 생각해낸 부부 갈등의 해답은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말 뒤집어보기다. “아내가 곰국을 끓이면 남편이 긴장한다고 하잖아요. 삼시세끼 곰국만 먹게 될까봐요. 그런 자조적인 농담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요. 아내가 없으면 곰국에 면을 삶아 넣거나 사골 향 나는 김치찌개를 끓여 먹으면 되죠. 집안일은 함께하는 거니까요. 이제 저도 설거지, 신발 정리 정도는 직접 해요.(웃음)”
함께 일하니 보람은 두 배
강 씨가 공부에 매진하는 동안 박 씨는 50플러스센터에서 건강 관리, 감정 조절 등을 주제로 강연을 하며 인생 2막을 시작했다. 남편의 재취업을 독촉하는 대신 생활 전선에 함께 뛰어들기로 한 것이다. 스터디 모임에서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재능기부 강의를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제는 기업과 최고경영자(CEO)를 대상으로도 러브콜을 받고 있다.
“남편의 은퇴로 상담을 받은 적이 있는데, ‘남편을 바꿀 수 없으면 나를 바꿔라’고 하시더라고요. 순간 제가 이기적이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돈 버는 일은 으레 남편의 몫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이참에 남편으로부터 경제적 독립을 해봐야겠다 싶었어요. 적은 돈이라도 제 힘으로 벌 수 있다면 뿌듯할 것 같았죠.”
경력 단절도 아닌 ‘무경력’ 전업주부가 일자리를 얻는 것은 쉽지 않았다. 박 씨는 “능력이 부족할수록 탐색을 게을리해선 안 된다”며 “관련 기관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녀는 틈날 때마다 여성인력개발센터, 50플러스센터 등을 방문해 인맥을 늘렸다.
그 무렵 강 씨는 주말 농사에서 알게 된 지인의 소개로 택배업을 시작했다. 오후 3시부터 8시간 정도 택배 분류를 반복하는 고강도 노동이다. 그는 “아내가 일을 하면서 고연봉 직업을 찾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눈을 낮출 수 있었다”며 “제안해준 지인의 덕도 크다”고 말했다. 지인은 그가 대기업 임원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부부는 이를 두고 ‘낯선 사람 효과’라 설명한다.
“잘나가던 모습을 봐온 학교 동창이나 직장 동료는 이런 제안을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지인의 눈에는 그저 백수였던 거죠.(웃음) 이래서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 사람의 과거가 아닌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보니까요. 아내가 책을 내고 강단에 설 수 있었던 것도 기관에서 만난 사람들 덕분이죠.”
박 씨가 가사노동의 굴레에서 해방될 때 강 씨는 땀 흘려 일하는 육체노동의 보람을 배웠다. 배턴 터치하듯 뒤바뀐 인생이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은퇴 전에는 술자리가 많아 과체중이었어요. 지금은 하루에 5~8시간 움직이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건강해졌죠. 관리자로 모든 일을 책임지는 대신 맡은 일만 성실히 하면 되니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어졌어요. 그러다 보니 아내와 사이도 좋아지더라고요. 그야말로 ‘수신제가’죠.(웃음)”
어느덧 퇴직 생활 9년째, 이제 두 사람은 같은 목표를 바라보며 노후를 꿈꾼다. 황혼의 위기를 ‘주경야독’으로 이겨낸 그들은 “나이가 들어도 내면 수양을 지속해 서로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비슷한 고민을 겪은 동년배 부부들의 멘토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인정하고 내려놓으면 다른 길이 보여요. 우리는 서로 다른 우주에서 온 행성 같은 존재라는 것, 그렇기에 부딪히는 대신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고, 공존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요. 그런 마음으로 살다 보면 내 곁에 있는 사람이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답니다.”
폭풍을 견디면 시원한 가을이 온다. 추수의 시간이다. 두 사람에게 가을은 갑작스러운 기상이변처럼 조금 일찍 찾아왔지만, 그들은 더 많은 곡식을 거두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대신 더 빨리 나눌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래서인지 사진 찍는 순간 렌즈 안에 들어온 두 사람의 해사한 미소가 청명한 가을 하늘과 닮아 보였다. 부부가 함께 보는 하늘이 멋지게 저물어가기를 바라며 셔터를 눌렀다.
왕년 전성기에 누렸던 최고의 영웅담이나 에피소드. 이상우 한국추리작가협회 이사장의 과거 그때의 시간을 되돌려본 그 시절, 우리 때는 이것까지도 해봤어. 나도 그랬어, 그랬지!! 공감을 불러일으킬 추억 속 이야기를 꺼내보는 마당입니다.
“태어나 하고 싶은 건 다 해봤다. 여한이 없다.” 80 평생을 산 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상우(84)가 그중 한 사람이다. 한국추리작가협회 이사장, 한국증권신문 회장인 그는 우리나라 스포츠신문의 산 역사로 창간하는 것마다 족족 대박을 터뜨려 ‘스포츠신문 업계의 미다스의 손’으로 불린다. 또한 50년간 역사 및 추리소설을 무려 400권이나 내고, 지금도 일주일에 7개 매체에 기고하는 왕성한 필력의 작가다. 에두를 것 없이 범상치 않은 그의 인생 속으로 직진해보자.
신문사 사장 된 신문팔이 소년 가장
“저와 신문의 인연은 대학 2학년 때인 1958년, 영남일보 견습기자에서 시작됩니다. 1964년 대구일보 최연소 편집부장에 이어 2년 후 한국일보사로 옮겨 또다시 최연소 편집국장(31세)이 되면서 한국일보사가 발행하던 ‘일간스포츠’를 만나게 됩니다.”
이상우는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경향신문 등을 섭렵하며 사장, 회장, 창업자 등 국내 최장수 언론인으로 자리매김했다. 패션 전문 프랑스 잡지 ‘엘르’의 한국 지사 대표로,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추계예술대학의 교수로, ‘세종대왕 이도’를 비롯, 추리소설 ‘악녀 두 번 살다’로만 50만 부가 팔린 잘나가는 소설가로 승승장구했다. 한글 가로쓰기체 신문(스포츠서울이 효시), 활판을 없앤 전산화 신문(소년한국일보가 최초) 시대도 그에 의해 열렸다.
1938년 경남 산청 출신으로 6남매 중 다섯째인 그의 10대는 전쟁 후의 피폐로 얼룩졌다. 6.25전쟁 때 전사한 형에 이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단칸방에는 자리보전한 할머니와 6명의 가족들. 며칠을 꼬박 굶고 어머니와 밥을 구걸하러 다녔지만 몇 숟가락 얻지도 못하던 때였다. 부친이 살아 계실 때도 구두닦이와 신문팔이로 가족의 생계를 도와야 했다.
이 무렵의 ‘웃픈’ 에피소드가 있다. 단칸방 주인집 남자가 영남일보 윤전기 기사였는데 퇴근할 때 신문을 10부 정도 몰래 빼와서는 돈을 나눠 갖자며 그더러 팔아오라고 했다. 다 못 팔 때도 있고, 비가 와서 신문이 젖을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신문 값을 그에게 물어내게 했다. 갑질 아닌 갑질로 횡포를 부리던 그 남자를 영남일보 기자가 되고 나서 윤전실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뒤가 켕겼는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긴 후였다.
“양공주 구두를 닦을 때가 제일 좋았죠. 뾰족구두인데다 면적이 적어서 구두약도 덜 들고 팁도 후했으니까요. 신문은 제가 잘 못 팔았어요. 배급소 앞에서 제 또래 소년들이 줄을 서 있다가 신문이 나오기 무섭게 받아가지고는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야 했지요. 번화가에 먼저 도착해야 한 장이라도 더 파니까요. 근데 저는 신문 연재소설을 읽고 나서야 팔았으니 늘 꼴찌였죠. 김대중 대통령도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그가 영어 학원을 다녔는데, 당시 자칭 국보 양주동 선생이 가르쳤다. 학원비가 있을 턱이 있나. 등록증을 재주껏 위조했다.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는 인식처럼 배움 도둑질도 같은 맥락으로 넘어가던 시절이었다. 양주동 선생은 훗날 한국일보 초청 좌담회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구두통에 교복을 쑤셔 넣고 다녔다. “아버지가 학교를 못 다니게 해서 중학생이 된 걸 숨겨야 했지요. 임종 머리맡에서 처음 말씀드리자 ‘하는 수 없는 일이지’ 하며 체념하셨어요. 그때부터 떳떳이 교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지식인으로 좌우익의 사상을 넘나들다 결국 목숨을 잃게 된 그의 형으로 인해 ‘머리에 먹물이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선친의 한 맺힌 신조였다. 실의에 빠져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더 이상 그의 앞길에 장애가 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가난이 발목을 잡았다.
“고등학교 원서 접수 마감일이었어요. 진학을 포기한 제게 교장 선생님이 무조건 원서를 넣으라고 채근하셨지요. 마감 1시간을 남겨놓고 어디 갈 데가 있어야죠. 길 건너에 대구상고가 있어서 거기다 넣었죠. 뜬금없는 상업고등학교 이력이 그래서 생긴 겁니다. 대학은 영남대 전신인 청구대를 나왔고, 전공은 국문학입니다. 당시 대학신문사 기자를 하면서 생계와 학비를 동시에 해결했지요.”
필화 사건 옥살이, 추리작가 변신 기회로
소설가 이상우는 1961년 대구일보에 ‘신 임꺽정 전’ 연재를 시작으로 지속적인 문단 활동을 이어오며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0매를 쓴 적도 있을 만큼 다작하는 작가다. 서울신문 편집부장으로 24시간이 부족하던 때에도 7개 신문사에 소설을 썼다. 연재가 여러 개다 보니 엇갈려 보내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하필 추리작가가 된 계기는 뭘까.
“대구일보 시절 제가 단 기사 제목이 5.16 쿠데타 세력의 보안법에 걸렸어요. 그때 화폐개혁이 있었는데 바뀐 화폐정책이 지방 말단까지 원활히 유통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방지대’라는 제목을 붙였더니 그게 꼬투리가 잡힌 거죠. ‘이방지대라니, 대한민국에 이방이 있다니, 김일성 나라가 있다는 뜻이냐?’며 억지를 부리면서 사형 구형까지 들먹였어요.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40일 동안 살인, 강도 등 잡범들과 한 방에 구금되어 있었지요. 3평 방에 21명이 수감되어 있었는데 때는 7월 말, 얼마나 더웠던지 내 땀, 네 땀이 뒤섞일 지경이었죠. 제가 신문기자라는 걸 알고는 사형수였던 감방 두목이 재미난 이야기를 하라는 거예요. 2인자 지위를 보장해주겠다면서. 신참인 제가 서열 2위가 되면서 변기통 옆에서 안 자기, 동료 수감자의 부채질 받기, 담배 먼저 빨기 등의 특혜가 주어졌지요. 주로 흉악범들이다 보니 탐정, 범죄 이야기를 좋아하는 거예요. 날이면 날마다 머리를 쥐어짜다 보니 출감 후엔 어느덧 추리소설 작가가 되어 있더라고요. 그때 100개 스토리를 창작했으니 작가의 토양이 수감 중에 빚어진 거죠.”
데카메론과 천일야화가 따로 없었다. 서울신문 시절, 바이엘약품사의 광고 모델이 되어 매스컴을 주름잡기도 했는데, 그 또한 추리소설 작가였기에 발탁될 수 있었다. 작품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골을 싸매다 바이엘사의 진통제를 먹고는 머릿속이 맑아져 글이 술술 풀린다는 콘셉트였으니. 당시 바이엘사는 각 나라마다 추리소설 작가를 광고 모델로 기용했는데 한국에서는 김성종을 제치고 이상우가 뽑힌 것이다.
스포츠신문 미다스의 손, 대박의 비결은?
“일간스포츠는 고우영의 만화삼국지, 김성종의 추리소설 연재 등으로 판매 부수를 올렸지요. 스포츠서울은 우리나라 최초의 순한글 가로쓰기가 판매에 주효했어요. 한겨레신문이 최초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그 공로로 2019년 한글날에 대통령 포상을 받았으니 제가 시작한 게 맞는 거죠. 가로쓰기 한글 신문이 나오자 젊은 세대가 열광했지요. 창간 첫날 90만 부가 팔리는 쾌거를 이뤘어요.”
그는 이때가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1985년, 스포츠서울을 만들 때 말이다. “전두환 때 프로야구가 생기면서 다른 신문과 달리 그 소식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스포츠 특성상 순간 포착을 위해 기존 1, 2명에 불과하던 사진기자를 15명까지 투입하여 읽는 신문에서 ‘보는 신문’으로 탈바꿈시켰죠. 컬러 지면으로 혁신을 이룬 것도 짜릿했습니다.”
컬러화 작업은 스포츠신문의 효시인 일본에서 배워갔을 정도였다. 1999년 국민일보로 영입된 후 만든 ‘스포츠투데이’는 창간 6개월 만에 고지를 탈환했다. 스포츠신문 5개 중에서 4개를 창간하거나 운영하면서 족족 대박을 터트렸다.
“IMF 직후라 실업자가 쏟아져 나올 때였죠. 스포츠투데이에 구직 정보를 총망라해 실었습니다. 좁고 긴 판형으로 바꾸고 제본을 시도한 것도 매출과 직결되었지요. 창간 기념으로 현대자동차 100대가 걸린 퀴즈를 100일간 냈습니다. 매일 자동차 한 대가 경품으로 나가니 신문이 팔릴 수밖에요.”
이어 2000년 ‘파이낸셜뉴스’를 창간한 후 다음 행보는 2001년 경향신문. 이번에는 사주가 되기로 하고 140억 원의 자본금과 250명의 임직원과 함께 경향미디어그룹을 꾸리고 회장직에 앉았다. 그의 나이 60세 때였다. 스포츠 기사를 포함한 종합일간지 ‘굿데이신문’이 탄생했다. 창간 기념으로 비행기를 경품으로 걸고 ‘대물’, ’쩐의 전쟁‘ 등 연재만화의 인기로 예의 순탄한 경영이 이어졌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고르바초프가 찾아와 모스크바에도 스포츠신문을 만들어달라고 제안했을 정도니. 그러나 악재의 그림자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스며들었다.
“2004년 무렵 무가지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신문이 안 팔리는 거예요. 우리도 무가지로 돌리고 광고비로 운영할 수도 있었지만 문제는 가판 보증금 50억 원을 돌려줄 방법이 없었던 거죠. 제가 만드는 신문은 무조건 팔린다는 인식 덕에 전국의 신문 가판대와 계약이 되어 있었는데 무가지 때문에 신문이 안 팔리니, 그 돈을 물어주고 나서야 무가지로 변신을 해도 할 거 아닙니까. 그때부터 광고도 안 들어오고 자금난에 봉착했던 거지요. 얼마 안 가 무가지는 인터넷 신문에 밀려 역시 쓴맛을 보게 되었지요.”
자본금 문제로 4년간 재판을 끌면서 법정 구속될 위기까지 간 후 무죄로 풀려났지만 300억 원에 달하는 전 재산을 잃었다. 70이 가까운 나이였다.
스물한 살 연하 아내 아침상 차리며 화가를 꿈꾸는 홈즈 아빠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서울신문이 철퇴를 맞자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설암을 앓던 아내의 간호를 위해 안방을 중환자실로 꾸몄다. 대형 병원 설비와 환자 침상을 집 안에 들이고 10년간 아내를 간병했다.
“먹지도 못하고 말도 할 수 없어서 필담을 주고받았는데 잠깐 외출할 때면 두려움에 젖은 애절한 눈빛으로 내 허리춤을 붙들곤 했지요. 그 사람 보내고 63세이던 2002년에 재혼했는데 제가 차린 신문사가 1년 만에 망했으니 저는 지금 아내 덕에 먹고삽니다.”
평생 4시간 수면을 고수해온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아내의 아침상을 차리고 애완견과 산책한 후 글을 쓴다. 스물한 살 연하인 그의 아내 권경희는 심리상담가이자 추리소설 작가다. 서로는 추리소설 응모전 심사위원과 당선자로 만났다. 애완견의 이름은 홈즈. 추리소설 작가 부부답게 ‘셜록 홈스’에서 따왔다. 하고 싶은 거 다 했다면서도 한 가지를 더 이루고 싶단다. 어릴 때 꿈인 화가가 되는 것이라고. 신문 발행인으로, 소설가로, 대학교수로, 화가로, 그는 일생이 참 좋은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