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럿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일이 즐거운 사람들이 있다. 그런 편이 못 되다 보니 가능하면 이럴 땐 피하고 싶기도 하다. 혼자 혹은 동행 한 명쯤과 다니기 좋은 미술관이나 박물관 관람은 어수선함이나 소음으로 피곤한 상황을 피하기 좋다. 혼자서 자기 속도대로 구경하고 한참씩 멈춰 있어도 뭐라 할 이 없으니 말이다. 동행이 있어도 각자 생각의 방향으로 돌아보고 나서 만나면 된다.
이번에 가본 안성의 한국조리박물관도 그렇게 돌아보기 좋은 곳이다. 조리박물관의 메인 전시관과 요리아트스쿨 교육장을 중심으로 주변의 너른 공원과 잘 정돈된 조경, 예쁜 카페와 식당까지 고루 잘 조성된 테마파크형 박물관이다. 서양요리 100년의 역사를 갖춘 한국조리박물관은 국내 최초이면서 세계에서는 프랑스와 미국에 이어 세 번째라고 한다.
전시관은 국내 서양요리 역사, 조리인, 메뉴 레시피, 식문화 조리단체, 조리기구와 도구, 소스와 향신료, 커피·바리스타·와인·베이커리 등 8개 테마로 구성되었다. 공간 구획에 따라 준비된 각종 자료들이 생생한 역사를 전달한다. 찬찬히 돌아보며 만난 도구 하나하나, 맛과 연관된 역사적 사실이나 작은 소스 하나까지 신기하고 흥미로워서 한참씩 들여다보게 된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뜻깊은 관람이다. 이를 이루고자 한 걸음씩 심혈을 기울이며 나아간 이들의 진심이 느껴진다. 총 부지 1만 평 정도의 테마파크형 박물관으로, 자연 속에서 관람과 휴식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일석이조다.
이번엔 조용히 혼자 전시장을 돌아보려던 생각을 바꿨다. 키오스크로 입장권을 사서 입장하려는데 안내석에 계시던 분이 말을 건넨다. “해설이 필요하면 말씀하십시오.” 사실 해설을 들으며 볼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괜찮다며 그냥 들어섰다. 그러다가 문득 이곳은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면서 제대로 관람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해설사로 교육받으신 분답게 자신의 소개를 시작으로 친절한 안내와 꼼꼼한 설명으로 전시관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어찌나 성심성의껏 안내를 하시는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연륜이 돋보이는 분이었다. 안내를 마치고 잠깐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안성시청 소속 문화관광해설사로서 현재 이곳 한국조리박물관에서 파견근무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에서 일하는 문화해설사는 20명 정도인데 우리가 사는 지역을 위한 일이어서 다들 자부심을 가지고 즐겁게 일합니다. 이곳의 문화해설은 팀마다 다르지만 한 번에 한 시간 정도, 경우에 따라 세 시간 한 적도 있어요. 내가 즐거우면 관람객들도 즐겁고, 잘 따르도록 리드하는 능력도 생깁니다. 그런 즐거움이 날마다 여기로 나오게 합니다.”
맡은 일에 자부심이 넘치신다. 청산유수로 설명하는 내용도 귀에 잘 들어오고 구수하기까지 하다. 주어진 일이 즐겁다고 연신 말한다. 유용한 시간으로 하루를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값진 일인지 전해진다.
“내가 7학년입니다, 하하하. 건강관리만 잘하면 꾸준히 할 수 있는 일이죠. 지금 하는 일이 대가 여부를 떠나서 보람이 큽니다. 문화 관련 일을 접하는 것도, 또 전시관 주변의 자연도 아름다워서 하루하루가 즐겁습니다. 무엇보다 이곳에 오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고, 내 시간을 가치 있게 만들어나가는 것 또한 행복한 일 아니겠어요?”
은퇴 후의 시간을 이렇게 보람찬 나날 속에 보내는 심혁주 문화관광해설사님의 진심 어린 말이다. 시니어들의 일자리 문제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초고령화 시대를 사는 시니어에겐 안정된 노후나 취미 생활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노후의 경제활동이나 적극적인 사회활동이 필요하다. 심혁주 문화관광해설사님의 말처럼 일이란 건강한 삶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진취적인 삶이 행복을 유지해준다.
마침 한국조리박물관 초대 관장을 맡은 최수근 관장을 만나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근 경희대 교수를 은퇴한 최 관장은 여러 호텔 근무 경력도 지닌 식품학 박사로 실무와 이론을 겸비한 분이다. 특히 ‘소스의 대가’로 불리기도 한다.
“대학 졸업 후 요리 일을 열심히 하다가 더 공부하기 위해 파리 르코르동블루로 유학을 갔지요. 그때 처음으로 이런 박물관을 세우고 싶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남프랑스 니스에 있는 개인박물관이었어요. 프랑스 요리의 거장 에스코피에 셰프의 기념박물관에서 받은 감동을 오랜 꿈으로 간직해왔는데 이렇게 현실이 되었습니다. 주방 관련 사업을 하는 이향천 대표를 만난 겁니다. 문화와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인데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셔서 한국 최초의 조리박물관 건립이 이루어졌습니다. 요리 분야 원로들이 귀한 자료들을 많이 주셨고 저 또한 모든 것을 쏟아부었죠. 지금도 콘텐츠 발굴이나 행사 진행을 하고, 자문을 얻으며 공부합니다. 요리에 관해서라면 누구든 언제든 이곳에 찾아오시면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습니다.”
넓은 공원의 자연과 전시관을 돌아보는 그의 시선에 애정이 듬뿍 묻어난다. 바쁜 와중에도 조리박물관을 향한 뜨거운 마음으로 성의껏 이야기해주셨다. 일정 때문에 급히 이동하면서도 끝까지 예의를 다해 조리박물관의 의미를 전해주시는 마음이 와 닿았다.
한국조리박물관에 가면 근현대 요리와 조리의 방대한 자료를 통한 스토리텔링을 마주하게 된다. 조리계 원로들과 한국 조리명장들이 분야별 자문위원단으로 동참한 귀하고 소중한 것들을 가득 만날 수 있다. 그동안 국내는 물론이고 외국의 유명한 박물관이나 요리학교, 셰프들을 방문하고 벤치마킹하며 진행해온 일이다. 이 모든 것이 주방 제조업계의 이향천 대표와 한국 조리업계의 역사를 보존하고 재조명하려는 최수근 관장의 열정이 힘을 합친 결과로 지금에 이른 것이다.
현재 한국조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는 ‘대통령의 밥상’이라는 전시를 하고 있다. 청와대 요리사가 들려주는 대통령의 밥상 이야기와 청와대 요리사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전시장에는 대통령의 식기가 역사 순으로 전시되었는데 이 또한 전해지는 일화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국빈 만찬에 일본 도자회사의 그릇을 사용해왔다. 이를 본 육영수 여사가 한국 도자기를 주문 생산했고, 그 뒤로 국빈들에게 당당히 우리 그릇을 내놓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요즘은 가히 요리와 먹방의 시대다. 맛있는 요리를 나누고 누군가에게 알리는 것이 근래의 일만은 아니다. 답답한 도심에서 벗어나 자연 속의 전시장을 둘러보고 맛의 역사에 다가가 보는 시간이 알차다. 조리인들의 철학과 발자취를 돌아보며 흥미로운 요리 세계로 빠져볼 만하다. 안성 일죽면에 가면 봄이 오는 길목에서 맛의 원천을 되새기는 시간을 만날 것이다.
주변에 가볼 만한 곳
서일농원 한국조리박물관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서일농원이 있다. 볕 잘 드는 곳에 자리 잡은 2000여 개의 장독대에서 우리의 장맛이 익어가는 옛 정서를 만끽해볼 만하다. 연못가를 지나 산책로를 걸으며 차분히 사색에 빠져보아도 좋을 듯하다. 코로나19 이후 닫혔던 문이 비로소 올해는 열린다고 한다.
죽주산성 죽산면 쪽으로 조금만 더 달려보자. 시원하게 죽주산성에 올라 봄바람을 맞아볼 일이다. 삼국시대 신라의 북진 과정에서 축조한 성곽이다. 성벽을 따라 걸으며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확실한 기분전환을 할 수 있다.
김제천(69, 영동자연호두농원)이 아내와 함께 영동군 산골로 귀농해 호두나무 농원을 경영한 지 올해로 15년째. 농사 기술도, 안목도 푹 익었을 연륜이다. 성취한 것의 수효가 드물지 않을 경력이다. 그런데 얄궂게도 소득은 여전히 신통치 않다. 하품 한 번 늘어지게 해볼 겨를 없이 부지런히 뛰었지만 손에 들어오는 게 별로 없다는 게 아닌가. 그럼에도 구겨진 기색이 없다. 웃음이 흔하게 터져 나온다. 난처한 현실을, 남모를 애환을 얼버무리는 웃음이라기보다, 불운과 부진을 통째 이의 없이 받아들여 차라리 긍정하는 심리의 소산일 테다. ‘뭔가 미묘한 간계가 침투해 나를 고생길로 데려간 건 아니지 않은가?’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 김제천은 귀농으로 치르는 홍역의 책임이 일면 섣불리 일을 저지른 자신에게도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김제천의 농원은 완전히 외진 산중에 있다. 마을은 저 너머 멀리에 있어 고독을 벗 삼기에 적격인 곳이다. 숲속의 공인된 가수들인 산새들만 이따금 지지재재 노래할 뿐 별반 들려오는 게 없다. 산세가 기차게 수려한 것도 아니라 경관에 넋 놓고 종일 해찰하는 폐단이 생길 리도 만무하다. 즉 잡념 없이 일에 홀린 듯, 종일 농장에서 이리 뛰고 저리 달리기에 딱 좋은 입지다. 게다가 김제천은 ‘뭐든 자청해 덤벼든 일에는 갈 데까지 가야 직성이 풀리는 성향’의 소유자다. ‘멍 때리기’나 게으름 피우기는 당최 적성에 맞지 않다. 해서 늘 일에 묻혀 살아왔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몸을 쓰겠다는 투로 부단히, 부지런히, 농사 하나에 전념하며 15년 세월을 살았다.
그는 대전에서 회사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귀농했다. KT에 근무하다 뜻한 바 있어 명퇴를 하고 이 후미진 산골짝에 들어왔다. 애초 농사에 입문할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그저 물 좋고 산 좋은 시골에서 나빠진 건강을 회복하며 한가하게 살고 싶었던 거다. 유유히 노닐기를 생활의 중심에 두고서 인생의 가을을 참신하게 누리고자 했다.
“귀농보다 귀촌하는 기분으로 이곳에 자리 잡았다. 농사를 지어 소득을 올리는 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내려온 게 아니었다. 부부 둘이 먹고살기에 지장 없을 정도의 연금이 나오기 때문에 굳이 농업 소득을 바랄 이유가 없었다.”
터는 어떻게 마련했나?
“귀농 전에 3만 평 규모의 임야를 사들였다. 마음을 내려놓고 한적하게 살기에 좋은 곳이라서. 그저 소소하게 텃밭 일구고, 가족이 따먹을 수 있을 정도의 몇몇 과일나무를 기르며 살기에 적당한 땅이라고 생각했던 거지.”
땅을 살 때엔 신중하게 고민부터 하라는 충고는 고대 로마의 ‘농업론’에도 나오더라. 당신의 얘기는 널따란 임야의 활용 방안을 구상하지 않은 채 덜커덕 사들였다는 걸로 들린다.
“별 생각 없이 매입했다. 면적이 넓은 데다 가격도 싼 편이라 일단 사들였으니까. 그렇게 시골 생활을 시작하고서 감나무, 포도나무, 다래 등을 몇 그루씩 심었다. 도시에 사는 손자들을 가끔 불러들여 자연학습의 기회를 제공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별 할 일 없이 지낸다는 게 예상보다 따분했다. 성격상 마냥 놀면서 지내지 못하겠더라고. 도시에서와 달리 일에서 해방돼 좀 편하게 살고 싶다는 뜻이 있었지만, 딱히 몰두할 일이 사라지자 갑갑증이 몰려들었다. 그래 시작한 게 호두 농사다.”
호두를 작목으로 선택한 이유는?
“작목 선정을 위해 임업진흥청 같은 곳에서 농업교육을 받았는데 호두 농사를 권했다. 임야를 이용한 과수 농사 가운데 호두가 유망하다는 얘기였다. 여느 과수와 달라 나무를 소독해주지 않아도 되는 등 관리와 수확에 용이하다고 했다. 한마디로 한결 쉽고 편하게 다룰 수 있는 작목이라는 거였다. 이러한 홍보에 이끌려 호두 농사를 시작한 이들이 많았다.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실상은 달랐다.”
어떻게 다르던가?
“재배부터 생산까지 일반 과수 농사에 필요한 공정보다 수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퇴치가 어려운 외래 해충의 발생에 따른 피해와 어려움이 컸다. 호두나무가 1000그루로 늘어나면서는 감당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힘겨웠다. 다른 과수들은 관련 기관에서 생산물을 수매해주지만, 호두 유통엔 그런 시스템조차 없다는 것도 뒤늦게 안 약점이다. 이래저래 작목 선정을 제대로 하지 못한 착오가 있었던 셈이다.”
귀농 교육장 강사들의 얘기를 곧이곧대로 믿지 말라는 충고가 흔하던데.
“강사들은 교과서적인 이론에는 밝다. 그러나 실제 상황엔 둔감하다. 농업의 현장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있다는 거. 나는 이러한 정황을 미처 몰랐다.”
김제천은 귀농의 목적을 또렷하게 정하지 않은 채로 호두 농사에 뛰어들었다. 물샐 틈 없는 사전 준비와 구상을 하고도 일이 이상하게 풀려나갈 수 있는 게 귀농인데도 말이다. 따라서 그는 예상하지 못한 곤란을 수시로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성실한 근로와 기민한 머리로 상황을 돌파하길 거듭했지만, 어쩌면 그의 내부에 풍성하게 서려 있을 강인하고 낙천적인 기질에 힘입어 주저앉는 시늉조차 해본 적이 없지만, 15년간 흘린 비지땀과 남모를 고뇌의 총량은 아마도 드럼통에 담고도 넘칠 정도일지도.
귀농 자체를 만류하고 싶다
고달픈 노역은 임야의 토질을 보강하는 데에서부터 가시화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알고 보니 땅 거죽 하부엔 온통 돌투성이더란다. 척박하기 그지없는 땅이었던 것. 해서 그는 땅을 파 돌들을 끄집어냈다. 큰 돌은 정으로 깨부숴 파냈다. 그러곤 퇴비를 듬뿍 묻어주는 작업까지 손수 다 했다. 지하에 일일이 배관을 하는 관수 시설도 필수였다. 허리 휘어질 고생이 자심했을 걸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야생 짐승들의 훼방도 그를 괴롭혔다지.
“멧돼지들이 수시로 들이닥쳐 열매를 먹기 위해 호두나무 줄기를 마구 찢어놓더라. 청설모, 삵, 담비, 때까치 등도 방어하기 어려운 애들이다. 특히 무리 지어 날아와 호두 열매를 노련하게 파먹는 때까치의 실력엔 당할 재간이 없다.”
감전 효과를 발휘하는 전선을 설치하고, 심지어 대포 쏘는 소리를 내는 장비까지 동원해 방어하는 농가를 보자면 농사라는 게 실로 만만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저 옛날 전통사회의 농부들은 짐승들과 사이좋게 반반씩 나눠 먹는 걸 관습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이게 차라리 현명한 걸까?
“딱히 방비책이 없다. 그런데 짐승들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 아니겠는가. ‘야야! 애들아! 적당히 먹고 가라. 너희들이 먹고 남은 걸 우리가 거두면 된다!’ 이렇게 체념하고 그냥 놔두는 거다. 그게 상책이라 생각해서다. 고만한 일로 속 끓일 게 뭐 있겠나?(웃음)”
호두 농사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은 어떤 것일까?
“호두가 훼손되지 않게 열매를 따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어렵다. 이건 기계 작업이 불가능하다. 대나무 장대로 조심스럽게 털어야만 한다. 호두의 딱딱한 껍질을 벗겨 알맹이를 일일이 끄집어내는 작업도 쉽지 않다. 펜치를 들고 하나하나 껍질을 까 형태가 손상되지 않도록 분리한다. 세심한 손놀림이 필요하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다. 겨울철엔 주로 아내와 함께 이 작업을 한다. 농한기가 없는 게 호두 농사다."
연간 순수익을 말해줄 수 있나?
“800만 원쯤 된다.”
저런! 너무 적다.
“호두 농사의 수익성이 이렇게 열악하다. 그러니 내가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나?(웃음) 잘나가는 포도 농가나 복숭아 농가의 수익에 비하면 10%도 안 되는 수준이니까 말이다. 다행히 연금이 있어 의식주 생활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귀농하려는 이들에게 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농사로 돈 벌기 어렵다는 거! 연금이라거나 믿을 만한 게 없다면 아예 시골에 오지 말라는 거!”
원점으로 돌아가 귀농을 다시 한다면 어떤 작물을 재배하고 싶지?
“복숭아 농사 정도가 좋겠지. 복숭아가 이 지역 특산물이기 때문이다. 귀농하려거든 부디 지역 특산물에 관심을 가지는 게 좋겠다. 생산 여건과 유통 구조가 훨씬 안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농 자체를 만류하고 싶다. 형편이 된다면 귀농보다 귀촌을 해 농사 없이 편안하게 사는 게 현명하다.”
성장하는 나무들의 신비로움
시골에서 느긋하게 살기. 족쇄 없는 영일(寧日)을 보내기. 그는 그런 걸 원했다. 그러나 어쩌다 보니 원했던 삶과 현재의 삶이 상당히 불일치한다. 그렇다고 낙심으로 찡그리고 살면 우습다. 별처럼 마냥 빛나는 삶이 어디에 있겠나. 그는 15년간 정당하게 일하고 호두나무들을 공정하게 대했다. 따라서 여전히 당당하다. 내가 기죽을 일 있나 봐라, 하듯 부진한 행진을 해온 호두 농사에 새삼 발동을 건다. 으슬으슬 진저리칠 만한 현실이지만 이왕 내친걸음 끝까지 가보겠다 한다. 농사 기술이야 이미 일취월장했다. 크고 알맹이가 꽉 찬 고품질 호두를 생산한다.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덕분에 배우고 깨달은 게 많다. 궁리 끝에 늘 도달하는 건 반성이더라. 삶도 농사도 반성으로 돌아보면 얻을 게 많다.”
산중에서 반성을 일삼아 뭔가 환해지는 게 있다면 그게 도인(道人)인데?(웃음)
“어! 내가 도통하려나? 하하하. 여하튼 시골의 삶을 로망으로 삼은 이들이 많지만 돈 욕심을 다 내려놓지 않고선 어렵다. 귀농이 곧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일 수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의식주 걱정 없고, 몸 안 아프고, 게다가 괜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입에 매달고 산다면 그보다 나은 게 있을까.
“내가 감성적인 인간은 아닌데 산골에 살다 보니 전에 느끼지 못했던 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내 자식처럼 아끼며 기르는 호두나무들이 우렁차게 성장하는 걸 바라보면 신비로움이 느껴진다. 이건 깊은 감동을 준다. 이러한 재미에 내가 농사를 짓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호두 농사에 헌납한 15년 세월. 말 못 할 고통이 왜 없었으랴.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의 말처럼, ‘고통스러워야 살아 있는 것’이다. 게다가 고통도 지옥도 다 지나가게 마련이다.
김제천이 주는 귀농 Tip
•시골 생활에 낭만적인 로망을 품은 이들이 많지만, 현실의 시골은 낭만을 누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사고를 하자.
•무턱대고 집이나 땅부터 사는 건 위험하다. 사전에 1, 2년 정도 농촌 빈집을 빌려 살아본 뒤 적응 가능성부터 판단하라.
•부부가 뜻이 맞지 않은 채 귀농하거나 단신 귀농은 금물이다. 정착에 실패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임야에 농사를 지으려 할 경우엔 인허가 사항부터 꼼꼼히 점검하고 진행하라. 지자체의 농촌활력센터를 찾아 문의하면 원스톱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농산물 유통을 위한 공부와 고민을 많이 하라. 좋은 농산품을 생산해도 유통의 벽에 가로막히는 경우가 숱하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택시라는 공간은 참 묘하다. 내 앞에 멈춰 선 택시에 오르는 순간 택시 운전사와 잠시 잠깐이나마 인연의 호흡을 함께해야 한다는 점에서. 대화를 나누든 안 나누든 서로의 에너지가 엉기고, 그 긴장을 털어내기 위해 일부러 생각에 빠져들거나 짐짓 딴청을 하기도 하지만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내내 운전사의 존재가 의식되어 도무지 편하지가 않다. 그렇다고 내 쪽에서 먼저 말을 걸지는 않는다. 차라리 그쪽에서 말을 걸어주면 편할 것 같지만 그 말이라는 것이 도통 내게는 관심도 없는 주제이기 일쑤라 여전히 고역이다. 그래서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하는 게 뱃속 편하다. 어지간해서는 내가 택시를 타지 않는 이유다. 몸 좀 편하자고 마음은 좌불안석이니. 비싼 돈까지 내고서 말이다.
유난한 예민함이라고? 그쯤되면 병이라고? 택시를 모는 사람은 그게 직업인지라 승객에 대해 시시콜콜 관심을 갖진 않을 거라고? 승객의 인상이 아주 험상궂어서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것 같은 불안감이나 늦은 밤 취객에게 시달림을 받지 않는 한. 물론 섹시하고 야한 여성이 탔을 때 슬쩍 성적 호기심이 동하기도 할 테지만. 여하튼 그런 좀 별난 경우가 아니고서야 승객에게 무슨 그리 관심이 있겠냐고? 혹 말을 시키더라도 대꾸를 안 하면 그쪽에서도 알아서 입을 다물 텐데 뭐가 걱정이냐고? 이런 나를 두고 친구들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운전사 거슬려 택시 못 탄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며 놀린다.
1년 만에 탄 택시, 인연이 기가 막혀
그날도 그랬다. 평소처럼 그날 또한 택시를 탈 불가피한 이유 같은 건 없었다. 벚꽃에 취해 발을 접지르기 전까지는. 봄바람 안온한 지난해 4월 중순, 벚꽃이 만개할 무렵이었다. 딱 1년 전 일이다. 어디 멀리 따로 꽃 구경을 갈 필요는 없었다. 온 천지가 벚꽃이었으니까. 집 앞, 동네 산책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만족스러웠으니. 땅에 시선 둘 짬 없이 고개를 온통 쳐들고 다니는 시기가 1년 중 꽃철과 단풍철이 아닌가.
아뿔사! 동네 벚꽃길에 이런 턱이 있었나. 도저히 ‘턱이 있을 턱이 없는 곳’에서 발목을 삐끗했다. 발등이 커브를 그리듯 휘어지며 시큰한 느낌과 동시에 눈앞이 아득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평지와 겨우 3cm 정도 차이 나는, 보통 계단의 10분의 1도 안 되는 단차를 가진 곳에서 발목을 접지른 것이다. 어이없고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거짓말처럼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으니. 그 위치 그대로 퍼질러 앉아 발목만 하릴없이 주물러야 할 상황인데, 이번에도 또 거짓말처럼 택시 한 대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어디 다치셨어요? 병원이나 댁에 모셔다드릴까요?”
조수석 창문을 내리면서 나이가 꽤나 들어 보이는 운전기사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큰 소리로 물었다. 요즘 택시에는 고령 운전자가 많다더니.
‘이게 무슨 경우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영화를 찍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 이런 경우도 있나? 지나가는 택시가 먼저 나서다니….’
운신을 전혀 못 하는 처지에서 반갑기도 했지만 반사적으로 긴장과 의심이 올라왔다. 평소 택시 타기 싫어하는 이유와는 차원이 다른. 아무리 60줄에 든 여자라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다친 자리 1m 전쯤에서 승객을 내려주고 출발하려던 찰나 주저앉아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이고, 혹시나 운이 좋아 승객일 수 있을까 하여 친절을 겸해 물어본 것일 뿐이었다니, 특별히 수상한 상황도 아니었다.
“네… 그럼, 요 앞 정형외과로 저를 좀 데려다주시겠어요? 제가 발목을 다쳐 꼼짝을 할 수가 없네요. 짧은 거리지만 부탁드립니다.”
실로 1년 만에 타는 택시다. 봄볕 화사한 정오 무렵이었고, 병원은 코앞이다. 무슨 흉한 일이 있을까 싶었다. 차창 밖으로 말을 붙일 때 본 운전사의 인상도 온화하고 곱상하다. 말투도 배운 사람 분위기다. 얼굴 보고 마음까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안심이 된다.
사별 아내 못 잊어 잡은 운전대
그 사이 발목 아래부터 발등이 자색고구마 색을 띠면서 소복하게 부어올랐다. 통증보다 겉의 상태가 더 겁이 났다. 기사는 나를 배려해 병원 입구에 바투 택시를 세웠지만 나는 도무지 일어나 걸을 수가 없었다. 운전대를 잡은 채 돌아보던 기사가 지체 없이 사이드 브레이크를 끌어올리더니 운전석에서 내려 돌아와 나를 부축했다. 황공스럽도록 고마웠다. 병원 로비 원무과 앞 빈자리에 나를 앉혀주고는 고맙다는 인사도 듣는 둥 마는 둥 황급히 자리를 뜨나 싶더니 5분쯤 지나 다시 나타나는 게 아닌가. 아마도 안전한 곳에 주차를 해놓고 급히 다시 돌아온 듯싶었다.
그가 없었다면 접수도, 진료도, 처치 후 다시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반나절을 내 옆에 있어 주었다. 나는 돈벌이를공친 그의 시간을 걱정하면서도, 생전 처음 본 사람이 옆에 붙어 있는 어색함과 황당함에 어쩌지 못하면서도, 과분한 신세를 졌다며 이제 그만 가보시라고 하지는 못했다. 병원에서도 그를 나의 보호자로 알고는 그에게 이런저런 지시와 주의사항을 전하고 있었으니.
그와 나의 만남은 그런 기연으로 시작되었다. 영화에서나 있음직한 일이 내게 일어날 줄이야. 그가 택시를 몬 경력이라야 1년 남짓. 4년 전 별안간 사별한 아내를 이렇게도 못 잊고 저렇게도 못 잊어서 마음 대신 운전대를 잡았단다. 택시를 몰면 싫어도 이리저리 쏘다니게 되고, 손님을 태우고 긴장하는 사이 피곤으로 지친 몸 그대로 쓰러져 자다 보면 아내 없는 일상에 다시 적응할 수 있을까 하고.
그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꽤 규모가 큰 건축회사의 임원을 지내다 정년 퇴임을 했다. 생활의 여유가 생기자 이제야 오붓하게 부부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으려니 했는데, 퇴임한 지 3년 만에 아내가 위암 판정을 받았다. 그러고는 허망하게도 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오직 남편과 자식밖에 모르는 여자였다며, 그 헌신적인 뒷바라지 덕분에 본인도 슬하의 1남 1녀도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었다며, 내 앞에서도 서슴없이 아내를 그리워하고 아내에게 미안해했다. 워낙 규모 있게 살림을 꾸려온 사람이라 노후자금도 부족하지 않게 비축되어 있었고, ‘삼식이’ 대열은 완전히 남의 일일 뿐 부부 금슬도 유달리 좋았다고.
이제 우리 함께 달릴까요?
“그러면 뭐하나요? 결정적으로 건강이 두 사람을 갈라놓았는 걸요.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자기를 죽이고 살아서 병이 났지 싶어요. 자기 주장은 고사하고 너무나 헌신적인 사람이었으니까요. 세월이 4년 남짓 흘렀지만 아직도 아내의 빈자리가 커서 하루 일을 마쳐도 집에 들어가기 두렵곤 했지요. 그때 마침 발을 다친 당신이 눈에 띄었고 내친김에 병원까지 동행했던 거지요. 당신은 먼저 간 아내와 많이 닮았어요. 죽은 사람과 비교되니 기분이 별로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단아한 분위기에 조신한 행동거지, 나이까지 비슷하니 내게는 마치 아내가 환생한 것만 같네요.”
몇 차례 더 나를 태워 병원을 오가며 만난 지 석 달쯤 되었을 무렵, 이런 말을 하면서 겸연쩍게 그러나 만족스레 웃는 그를 보며 나도 빙그레 웃음 지었다. 그 말이 나에 대한 고백이자 청혼처럼 들렸다면 괜히 오버하는 것일까.
“아내 연배의 여성을 태우거나 거리에서 지나치듯 볼 때면 가라앉았던 슬픔이 다시금 올라와 마음이 힘들어지곤 했더랬지요. 그런 내게 신이 선물을 주신 거지요. 그날 아내와 닮은 당신을 만나게 해주셨으니까요. 몇 년이나 끙끙대며 자기를 잊지 못하는 내가 딱하고 안쓰러워서 아내가 당신을 보내줬는지도 모르죠.”
이쯤 되면 오버가 아니지 않나? 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첫 만남 이후 한결같이 내 곁을 지키고 있는 것만 봐도. 접지른 발은 이미 다 나았건만 여전히 내 발이 되어주고 있으니. 영업용 택시에서 자가용 승용차로 갈아탔다는 차이만 있을 뿐.
참, 그러고 보니 내 이야기를 전혀 안 했네. ‘택시를 기피하는 여자’라는 것 말고는. 나도 그와 같은 사별자다. 나는 50세에 남편을 간암으로 보냈다. 그러곤 두 아들을 결혼시키고 얼추 십 몇 년을 혼자 지냈다. 사업을 하던 남편이 남기고 간 돈이 좀 있어서 생활이 그다지 쪼들리진 않는다. 하지만 평생 살림만 한 터라 딱히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성격도 내성적이라 대부분 집에서 책을 보며 소일한다. 이따금 로맨스 소설을 읽을 때가 있지만, 내가 택시를 매개로 한 ‘황혼 로맨스’의 주인공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친구들은 ‘택시 대박’이라는 둥, ‘택시 내숭’이라는 둥 나를 놀린다. 친구들이 보기에도 뒤늦게 찾아온 나의 사랑이 좋아 보인다는 뜻이겠지.
김경오(89) 명예총재의 영웅담은 끝이 없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만연하던 시절, 군대에서 끝끝내 대한민국 여성 최초로 단독비행을 성공했다. 이후 유학을 떠나 기죽지 않고 나라를 알렸고, 자전거 한 대 갖기 어려운 시절에 비행기 한 대와 함께 귀국했다. ‘마담 킴’의 비행 아래, 우리나라는 괄시받는 가난한 국가에서 국제기구 총회 유치에 성공하는 항공 선진국이 됐다. 그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심어주고 전후(戰後)의 어둠을 걷어내는 새벽별과도 같았다.
김경오 명예총재는 ‘대한민국 최초 여성 비행사’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스무 살의 나이에 6·25전쟁에 공군 조종사로 참전해 비밀문서를 전달하는 업무를 전개했다. 예편 후 후학 양성을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생활고를 버텨낸 끝에 ‘조국과 후배들을 위해 비행기 한 대를 가지고 돌아오겠다’는 꿈을 이뤘다. 또한 자신의 뒤를 이을 여성 비행사를 양성하기 위해 한국여성항공협회를 창설하고,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여성운동에도 앞장섰다.
그는 최고의 비행사이기도 하다. 공군 창군 50주년이던 1999년, 최고의 조종사에게 주어지는 훈장(Command Pilot Wings)을 받았다.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비행사인 그는 국제항공연맹에서 항공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비행사에게 시상하는 ‘에어골드메달’ 훈장을 수여받았다. 미국 오클라호마 세계여성파일럿박물관에는 한국 여성으로 유일하게 개인 전시관인 ‘김경오 전시관’이 마련돼 있다.
“여자라는 이유로 조종을 못 하고 있습니다”
비행과의 인연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시작됐다. 그는 교장선생님의 호출에 무작정 연필과 지우개를 들고 시험을 치렀다. 이북데기(이북 출신을 낮잡아 부르던 말)라고 놀림받던 것을 설욕하기 위해 공부도 열심히 했던지라, 시험에 이은 면접과 신체검사까지 통과했다. 최종 합격통지서를 받은 날에야 알았다. 제1기 공군 여성 조종사 후보생을 모집하는 시험에서 몇 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었다는 사실을. 이승만 전 대통령이 공군사관 생도를 뽑으면서 여성 항공병도 따로 뽑도록 지시했기 때문인데, 김경오 명예총재는 실질적 목적은 따로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젊을 때 미국 유학을 떠났었죠. ‘하늘의 퍼스트 레이디’로 불리던 아밀리아 에어하트를 비롯해 활발하게 활동하는 여성 조종사들을 보면서 생각했을 거예요. ‘우리나라가 독립해 자주국가가 되었음을 알려야 하는데 이를 위한 홍보 수단으로 여성 조종사만큼 좋은 아이콘이 없겠다’고요.”
하지만 비행사가 되기까지의 여정은 멀고도 험난했다. 전쟁이 터졌고, 여성 생도들은 소위로 임관되어 비행기를, 전투기를 타며 참전하기만을 꿈꿨지만 유야무야 시간만 흘렀다.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동기들은 하나둘 떠났고, 김 명예총재만이 군에 남게 됐다. 홀로 남은 여성 소위를 향한 회유와 협박은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됐다. 그는 ‘이대로 가다간 비행기를 몰아볼 기회조차 얻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절망감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승만 전 대통령이 공군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하며 정복을 정갈하게 다려 입었다. 행사 당일, 이대로 대통령을 보내면 다신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모든 용기를 끌어모아 대통령 앞으로 튀어나가 보고했다. 헌병들도 다 얼어붙어서 말릴 틈도 없었단다.
“‘경례! 공군 소위 김경오입니다. 각하, 저는 1949년 대통령의 뜻에 따라 공군에 들어온 사람입니다. 제가 여자라는 이유로 조종을 안 시켜줘서 못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딱 두 마디 했죠. ‘아, 기억나요. 잘하고 있습니까?’ 막사로 돌아왔는데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릅니다. 헌병들이 날 잡으러 오겠구나 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는데, 그 다음 날 명령을 받았어요. ‘공군 소위 김경오 명(命) 비행 훈련, 사천 훈련장.’ 공군참모총장의 특명 제1호였죠.”
우여곡절 끝에 그는 1952년 대구에서 최초의 단독비행에 성공했다. 단독비행을 하던 날 아침, 그는 손톱·발톱과 머리카락을 깨끗한 종이에 싸서 유서와 함께 어머니에게 건넸다고 한다. 전쟁 중이어서 위험했거니와 비행 사고가 나면 시신을 수습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워서다. 전쟁에 참전하여 비밀문서를 전달하거나, 결혼하고 큰딸을 낳은 뒤 6개월 만에 일본과의 친선비행에 나설 때 그는 유서를 남겼다. 무사히 비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유서를 태워버렸고, 다음 비행에 나서기 전에 새로운 유서를 썼다.
타잔처럼 멋지게, 마음먹은 대로 사는 인생
‘누가 뭐래도 네 인생은 네가 컨트롤해야 한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타인에게 기대지 않는 것이며, 모든 것은 너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김경오 본인이 그런 삶을 살았다. 두 딸이 결혼하기 전까지 적었다 태우기를 반복한 유서처럼, 남에게 기대지 않고 목표한 바를 이룰 때까지 노력을 멈추지 않는 삶. 그는 남다른 투지와 인내심으로 계속해서 기적을 일궈냈다. 다치거나 죽는 이들도 많았던 단독비행을 성공해냈고, 민간항공을 공부하고 후학을 양성하라는 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영어 한마디 할 줄 몰랐고, 동양인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자행되는 차별에 생활고까지 감내하며 버틴 나날은 고통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훈련용 경비행기 한 대를 고국에 가져가는 것. 당시 우리나라에는 훈련용 비행기가 없어 공군 생도들이 실전 훈련을 받아보지 못한 채 졸업해야 했다. 김 명예총재는 후배들을, 우리나라 항공의 미래를 위해 영어 공부에 매진했다. 그러는 사이 그가 한국전 참전 용사이자 한국 최초의 여성 조종사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매스컴의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타임’, ‘뉴스위크’, ‘라이프매거진’ 등 유수의 매체에 그의 인터뷰가 실렸고 6·25전쟁의 참상을 알리러 강연을 다녔다.
“초대받은 자리에는 빠짐없이 나서서 열정적으로 임했습니다. 내가 지금 하는 모든 활동이 민간 외교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했어요. 비행기를 가지고 돌아가겠다는 제 목표를 들은 기자들은 고개를 저었지만 결국은 해냈죠. 당시 미국의 여성 비행사 1만 명이 저를 돕기 위해 ‘We Help Captain Kim’이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모금을 진행했어요. 모금이 유명해지면서 한 경비행기 회사에서 경비행기 ‘파이퍼 콜드’ 한 대를 기증해줬거든요. 덕분에 목표한 대로 비행기 한 대와 함께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어렵던 시절 한국군 유일한 여성 비행사는 희망의 아이콘이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체득한 군인 정신으로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임했다고 말하지만, 호방한 성정도 한몫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일화가 있다.
“초등학생 때는 장래 희망으로 ‘밀림의 왕 타잔’을 적어냈어요. 동화책을 보는데, 호령 소리만 들리면 작은 동물부터 맹수까지 한 번에 달려오는 게 너무 멋있게 느껴졌거든요. 나도 말 한마디로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멋진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담임선생님한테 혼났어요. 여자애가 무슨 타잔이냐 교사나 하지 하면서 머리를 쥐어박혔죠.”
밀림의 왕처럼 하늘을 누비던 그는 2009년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20분간 마지막 비행을 했다. 그림처럼 예뻤던 하늘에서 내려온 그는 세계여성파일럿박물관의 김경오 전시관을 둘러본 뒤, 한국으로 돌아오는 여객기를 탔다. 그는 주문한 샴페인을 마시고, 남은 한 모금을 머리에 부으며 하늘에 인사를 건넸다. ‘Good bye, dear my blue sky.’ 성격만큼 호쾌한 인사였다.
한계 대신 지금에 집중하는 삶
이후 직접 조종석에 앉는 일은 없었지만 그의 역할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국제항공연맹, 국제여류비행사협회 등의 국제회의에 꾸준히 참석하며 우리나라 민간항공의 성장을 도모했다. 미래는 하늘에 있으리라는 것을 일찍이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수석대표로서 회의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은 물론, 쉬는 시간이 주어지면 선진국 대표들과 안면을 트고 이야기를 나누느라 바빴다. 모두 그만의 ‘민간외교’ 연장선상에 있는 일이었다. 그의 공로는 높아진 한국의 위상으로 인정받았다. 2009년 인천의 제103차 국제항공연맹총회 유치에 성공하기까지 김 명예총재의 기여한 바가 컸다.
아흔을 앞둔 지금도 삶을 대하는 자세는 군인 시절과 다르지 않다. 일찍 전역했지만 어릴 적부터 군대 제식 교육을 받아서인지 아직까지 그렇게 생활하게 되더란다. 오전 3시 30분이면 눈을 뜨고, 천천히 일어나 기지개를 켠 뒤 침대에서 내려온다. 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밖에 나갈 일이 있으면 꼭 화장을 하고 나선다. ‘나이 들어 화장해서 뭐하느냐’고 말하는 친구에게는 따끔하게 한 소리 한단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자연히 몸에 배어 있다.
“매일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해요. 나는 ‘백세시대’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백세시대라고 말해버리면 내 나이를 백세까지로 한정 지어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나는 이 나이에도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 공상하기를 즐깁니다. 이를테면 내가 연애를 한다면 어떤 남성이 어울릴까, 즐겨 보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보면 재밌겠다, 이렇게 지내면 매일이 즐겁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딱 한 번 비행을 할 수 있다면 어디로 떠날 것인지 물었다. 망설임 없는 대답이 이어졌다. “답이 정해진 질문이네요. 평안북도 강계요.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이 지금은 어떤 모습인지, 하늘에서라도 빙 둘러보고 싶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또다시 공군이, 비행사가 되어 하늘을 날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를 갈고닦겠다는 김경오 명예총재. 미국의 시인 새뮤얼 울먼이 말했듯, ‘머리를 높이 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그가 늘 푸른 청춘이 아닐 리 없다.
후기청년기에 들어선 40·50세대의 가장 큰 고민은 일자리다. 120세까지 산다는데, 남은 시간을 어떻게 꾸려가야 하나 막막하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또래의 명예퇴직 소식이 들려오고, 50세가 되기 전 은퇴를 해야 할지 모르는 불안감도 있는데, 연금 수령 시기를 더 늦춘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후기청년기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김병숙(75) 한국직업상담협회 이사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저는 150세까지 살 테지만, 기자님은 170세까지 살 거예요. 지금부터 10년에 한 번씩 직업을 8번 바꿔도 50년은 더 살아야 하는데, 남은 50년은 뭐 할 거예요?”
순간 멍해졌다. 100세 시대, 아니 120세 시대라고 하지만 내가 그때까지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사실 ‘설마 그때까지 살겠나?’ 하는 마음이 더 컸다. 그런 기자를 보며 “설마가 현실이 되는데, 다들 내 이야기가 아닌 줄 안다”는 김병숙 이사장의 이야기를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후기청년기를 보내는 40·50세대의 이야기를 하러 왔지만, 결국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였다.
150세 시대 준비하려면
김병숙 이사장은 40여 년간 직업에 관한 연구를 해왔고, 경기대학교에 직업학과를 설치해 교수로 활동했다. 직업상담사 자격제도를 도입하고 한국직업상담협회를 설립했다. 책을 25권 집필했으며, 은퇴 후에는 4050을 위한 전직 지원 등 직업 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10년 전, 65세의 나이로 교수직을 은퇴하면서 김병숙 이사장은 150세 인생 계획을 선언했다. 75세까지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6시에 퇴근하는 정시 근로를 하고, 95세까지는 시간제로 일하고, 100세까지는 봉사활동을 하고, 150세까지는 화가로 살겠노라고. 그리고 3년 뒤 계획을 바꾸었다. 95세까지 정시 근로를 하겠다고. 김 이사장은 2012년 ‘은퇴 후 8만 시간’이라는 책을 쓸 때부터 150세까지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우리가 이미 100세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통계에 따르면 2015~2019년 우리나라 최빈사망연령(한 사회의 대다수 구성원이 실제로 사망하는 빈도가 가장 높은 연령)은 남성이 85.6년, 여성이 90년으로 나타났다. 2021년 기준 기대수명은 평균 83.6세지만, 사고 등으로 조기 사망하지 않는다면 평균 85세 이상 산다는 말이다.
“90세 가까이 살다 간다면 지금 40·50세대는 앞으로 최소 40~50년을 더 살아야 합니다. 50년 뒤면 2073년이죠? 그런데 미래학자들은 20세기에 이미 ‘2050년이면 인간 수명은 150세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어요. 30년이 지나면 2050년이네요.”
150세 시대를 산다고 생각하면 이제는 60세, 80세, 100세를 각각 20세, 40세, 60세로 봐야 한단다. 40·50세대라면 한창 청년기라고 해도 무방하다.
“생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버는 프라임 시기에 일을 그만두는 평균 나이가 47세입니다. 2~3년 내에 43세까지 낮아질 거예요. 최근 은행권에서 명예퇴직한 사람 중에는 20대도 있었다고 하죠? 그런데 주된 일자리 은퇴 연령이 40대고, 노동시장에 굿바이를 외치는 시점은 73세입니다. 연금을 65세부터 받는다고 하면 47~65세까지 18년을 더 일해야 합니다. 이때 노동시장에 나가서 경제생활을 하려면 경쟁력이 필요해요. 그래서 150세 계획을 세우고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는 거예요.”
‘나’를 잃어버린 낀 세대
2023년 현재 40·50세대를 사는 이들은 X세대다.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풍요를 동시에 누린 첫 번째 세대’라거나 ‘도무지 알 수 없는 세대이자 신(新)인류’라고 불리곤 했다. 이전 세대보다 개인의 취향에 관심 있는 이들이 많은 세대로 평가받지만, ‘낀 세대’인 이들은 정작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 안에서 40·50세대는 ‘낀 세대’죠. 최고의 생산량을 내는 시기에 회사에서 나가야 하는 상황을 맞이해요. 윗세대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회사에서 일했지만, 그들처럼 회사에 오래 남을 수 없습니다. 아랫세대인 MZ세대는 어때요? 30대는 주어진 시간에만 충실히 일하고 20대는 월급만큼만 일합니다. 그 사이에서 인적 관리를 해야 하는 40·50세대는 위아래로 치여 참 어려워요.”
개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세대지만, 사회와 조직의 문화는 그렇지 않았다. 자녀를 돌보거나 부모님을 부양해야 하는 데다 자신의 노후까지 준비해야 하는 가장 힘든 시기에 직장에도 적응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사라지고 없다.
“보통 60세까지는 사회, 가족을 위해 살다가 은퇴를 앞두고 혹은 은퇴하고 나를 위한 삶을 찾죠. 회사에서 나가라고 해서 나와 보니 퇴직금은 3년이면 사라져요. 앞으로 50년은 더 일해야겠는데, 직업 세계가 옛날처럼 단순하지 않으니 얼마나 기가 막혀요? 그런데 별안간 ‘너 뭐 좋아해? 좋아하는 거 해’ 하니까 방향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어느 세대든 나이를 먹으며 40대, 50대를 산다. 후기청년기는 누구나 거치는 시기다. X세대라고 불린 지금의 40·50세대는 120세 시대를 맞아 후기청년기를 보내는 첫 세대가 됐다. 김 이사장은 조직에 젖어들다 보면 누구든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말했다. 앞으로 직업을 8번 바꾸며 살 것을 생각한다면, 과감하게 기존의 조직을 벗어나는 것도 좋다는 조언이다.
“누구든 후기청년기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배움을 멈추지 않아야 해요. 어느 날 삼성전자 수석이라는 분이 찾아왔어요. 회사에서 그동안 인공지능(AI)을 공부하라고 했는데 하기 싫어서 안 했대요. 이제 모든 곳에 AI가 쓰이기 시작했잖아요. 그러니 회사에서 쫓겨나게 생겼다는 거예요. 변화의 맨 앞에 서 있는 삼성전자 직원도 그럴진대, 우리는 어떻겠어요? 퓨처 타임 퍼스펙티브(Future Time Perspective). 미래 시간 전망을 길게 하세요. 미래 시간을 길게 보는 사람일수록 긍정적인 사람이 됩니다.”
스스로 구해야 하는 시기
우리나라에는 7번의 진로 분기점이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중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고등학교에서 대학에 갈 때, 대학 졸업 후 취업할 때 등이다. 김병숙 이사장은 이 진로 분기점에 도달해서야 자신이 누구인지 들여다본다며 안타까워했다. 직장 3년 차에 이직하고 싶어질 때에야 닥쳐서 생각한다는 것. 40대 후반에는 또 한 번 분기점이 온다. 이때 어떻게든 버텨서 50대 초반에 회사를 나오면, 오히려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는다. 40대 후반에 승부를 봐야 한다.
“분기점에 섰을 때 고민하면 늦어요. 프라임 시기 이후에는 돈을 적게 벌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내가 능력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느냐에 따라 급여 하락세가 달라질 거예요. 10년을 분기점으로 두고 3년은 새로운 역량을 키워내는 공부를 하고, 5년은 키운 역량을 바탕으로 새로운 일을 해보는 식으로 다리를 놔야 합니다.”
그런데 국가에서는 청년 지원 정책이나 노인 일자리 지원 정책 등 여러 정책을 쏟아놓지만, 정작 중장년을 위한 정책은 많지 않다. 50세에 은퇴하고 재취업을 하려고 해도 갈 곳이 마땅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은퇴 후 퇴직금으로 창업하는 건 내 돈으로 내 직업을 사는 셈이다. 바야흐로 스스로 구해야 하는 시기다. 김병숙 이사장은 고령화 시대에는 기업들도 점차 50대 이상의 인력을 찾을 것으로 전망했다.
“우리나라 출산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다고 하죠. 인력이 없다는 뜻이에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나이 든 사람을 써야 할 시기가 올 겁니다. 대신 나도 그만큼 실력이 있어야 해요. 요즘은 융합 시대입니다. 세 가지 영역을 알고 통합할 줄 알아야 해요. 배움을 축적하면 나의 자본이 되는데요. 40·50세대에는 여가가 중요한 자본이 됩니다.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등산이라고들 많이 말하는데, 그냥 산에 올라 정상에서 ‘야호’ 외치고 내려오는 여가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등산하면서 보는 주변 식물에 관심을 두다가 내가 직접 키운 차나무로 차를 내려주는 찻집을 구상한다든가 하는 식의 연결이 필요합니다.”
후기청년기는 주된 일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 시기다. 김 이사장은 이때 집에서 편하게 쉬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40·50세대의 재취업은 80% 이상이 지인 추천으로 이뤄진다. 매일 출근하듯이 차려입고 밖에 나가 사람을 만나야 한다. ‘내가 이러이러한 기술이 있어서 이러이러한 일을 하고 싶은데, 관련 일자리 정보를 알게 되면 나에게 말해달라’며 나를 홍보하라는 팁이다. 더해서 건강을 챙기는 건 필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이 타령을 너무 많이 해요. ‘이 나이에’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부디 호기심을 잃지 마세요. 인생 40년 살아보고 직장 20년 다녀보면 다 경험해봤다고 생각해 모두 안다고 여깁니다. 그러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게 어려워요. 경험을 바탕으로 가족, 건강, 재무, 여가, 사회망, 인간관계에 관해 150세 시대를 계획해보세요. 나이는 먹는 것이 아니라 진화하는 것입니다.”
수치나 담론에 경험담이 붙으면 생생한 맥락이 생긴다. 그래서 맥락을 만들어줄 두 명의 ‘찐’ 후기청년을 초대해 대화를 나눴다. 후기청년이라는 공통분모 덕분인지 나이와 성별, 가구 형태가 전부 달랐음에도 대화가 수월하게 이어졌다.
대담 참여자 소개
유지은(45) 경북대 수의학과 4학년. 15년의 브랜드 컨설팅 경력을 뒤로하고 마흔에 새 공부를 시작해, 97학번에서 18학번이 되어 Z세대와 공부 중. 마케터로서 시니어의 욕망을 분석한 책 ‘뉴그레이’를 공동 집필했다. 미혼이다.
조성일(53) 포스코경영연구원 수석연구원. 건강한 조직 문화를 조성하려면 각기 다른 세대의 구성원 사이 관계에 집중해야 한다고 믿는다. 연구 보고서 ‘낀 세대(X세대)의 자존감을 높이자’ 등을 집필했다. 결혼해 자녀가 있다.
진행자 신중년, 액티브 시니어, 낀 세대 등 새로운 중년을 하나의 용어로 아우르기 위한 시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당사자로서 각 용어들을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조성일(이하 조) 중장년이 제일 적절한 것 같습니다. 세대 갈등을 말할 때 종종 언급되는 낀 세대의 경우 인류 최초의 세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내가 낀 세대’라고 주장했을 확률이 높아서, 딱 우리 세대를 정의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유지은(이하 유) 제게 낀 세대라는 용어는 이중적이에요. 위로는 베이비부머, 아래로는 Z세대 사이에 낀 우리의 애환을 달래주는 의미가 담겨 있죠. 하지만 한편으론 ‘우리 세대는 다른 세대에 빗대야만 정의하고 설명할 수 있는 세대인가’ 생각하게 해요. 실버 세대나 액티브 시니어, 중장년에는 의도치 않게 노인이나 노화에 대한 기존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남아 있어서인지 조금 기피하게 되고요.
진행자 그렇다면 후기청년은 어떻게 평가하세요?
유 제일 적절하다고 생각해요. 아직 청년이라고 불릴 수 있다니 감사한데요.
조 동감입니다. 다만 청년이란 단어가 젊은 남성만을 의미할 때도 있기 때문에 조금 조심스럽네요.
진행자 아,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에요.
조 성별을 구분하는 용어가 계속 쓰이면 ‘차별이나 소외감을 조장할 수도 있다’는 문제 제기가 가능하니까요. 어렵지만 언론이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죠.
진행자 그렇네요. 세대 구분이 다시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시나요?
유 네. 구체적으로는 청년기가 길어져야 한다고 봐요. 저만 해도 옷 입는 스타일, 친구들과 만나서 노는 방식이 97학번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기대수명이 길어지니 전반적으로 돈을 벌지 않고 공부하는 시기가 더 길어지고, 가정을 꾸리는 시기도 늦어졌죠. ‘청년’과 같은 건강 상태를 누리는 시기 역시 길어졌고요.
조 저도 청년기가 길어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세대’라는 단어는 어린아이가 성장해 부모 일을 계승할 때까지의 기간을 의미하죠. 이전에는 20대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는데, 이제 30대나 40대가 돼야 결혼하는 경우가 흔하잖아요.
유 그러네요.
조 오히려 세대가 짧아질 수도 있겠죠. 세대는 나이로만 나눌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니까요. IMF나 기술의 발전처럼 대대적인 사건이나 하나의 흐름을 같이 겪은 사람들은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진행자 그런 의미에서 대학생 때 IMF를 겪었던 두 분은 같은 세대로 묶는 게 자연스럽겠네요.
유 그렇죠.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IMF가 터졌는데, 저와 동기들만 해도 캠퍼스 생활에 대한 로망이 컸어요. 그런데 바로 한 살 밑의 후배들부터는 경제위기 속에서 대학을 입학해서인지 1학년 때부터 취업 준비를 하더라고요. 공통 경험에 따라 세대를 구분하는 것도 좋은 방식인 것 같습니다.
진행자 일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100세 시대를 넘어 120세 시대를 바라보는 요즘, 적정 정년 연령은 몇 세라고 생각하세요?
유 조 70세요.
조 일본에서는 이미 70세가 됐고, 미국이나 서유럽 등은 정년이 없어요. 원하면 죽을 때까지 일할 수 있는 전문직처럼요. 노동시장이 유연하기 때문인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죠. 그러니 생계를 걱정하는 근로자들이 정년을 연장해달라고 요구하는 거고요.
진행자 두 분은 몇 세까지 일하고 싶으세요?
유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한 나이 상관없이 계속하고 싶어요.
조 전 60세나 65세? 사실 65세도 넘기고 싶지 않아요. 남이 주는 월급 받으며 해야 하는 일이라면요.
유 남이 시키는 일을 하는 월급쟁이 말고 개인사업자, 프리랜서로 내가 한 만큼 돈을 버는 일을 한다면 일단 마음가짐부터 다르겠죠. 저는 15년 정도 브랜드 컨설팅 일을 하다가 마흔에 회사를 그만뒀는데, 일은 재밌지만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어요. 저는 누군가를 돕는 데에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인데 그런 의미를 찾지 못한 거죠. 그러다 우연히 수의사라는 새로운 진로를 찾았고, 동물을 돕고 사람도 도울 수 있는 점이 좋아서 기꺼이 도전하게 됐어요. 수의사 일은 평생 하지 않을까요?
조 저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하는 만큼 돈을 버는 형태의 일에는 기한을 두지 않으려고요. 올해로 정년까지 7년 남았기 때문에 요즘은 회사를 나가면 뭘 하며 살지 고민하고 있어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기보다 연구 경력을 살려 책을 내고 강연하는 프리랜서로서의 삶이 좋지 않을까 싶네요.
진행자 하고 싶은 일을 오래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위한 재투자가 필수겠어요.
유 그렇죠. 직장 그만두고 대학 다니면서 시간을 쓰고 학비를 내는 것도 재투자의 한 방식이고요.
조 저는 최근에 30만 원짜리 만년필을 셀프로 선물했습니다. 수고한 내게 보상을 주고 싶을 때 좋아하는 만년필이나 펜 같은 문구류를 사거든요. 또 앞으로 책을 내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초고 작업을 끝내면 5년 쓴 휴대폰을 신형으로 바꿀 생각이에요. 동기부여를 위한 일종의 당근이죠.(웃음)
유 저도 비슷한 의미로 마음대로 커스텀이 가능한 아동용 청진기를 10만 원에 샀어요. 제가 존경하는 수의사가 사용하는 것을 보고 따라 산 건데, 그분의 마음가짐을 본받고 공부도 실습도 열심히 해보자는 다짐의 일환이랄까요.(웃음)
진행자 두 분은 바쁘게 사느라 나이 드는 걸 느낄 새도 없겠어요.
유 그럴 리가요. 이제는 공부하려고 오래 앉아 있으면 몸이 너무 힘들고, 아침에는 분명 잘 보였는데 밤이 되면 눈이 침침하고 글자가 잘 안 보이더라고요. 처음에는 우울해하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영양제 한 통 더 사는 걸로 넘기고 있어요. 달리 어떻게 하겠어요.(웃음)
조 맞아요. 그래서 최대한 걸으려고 해요. 걸으니까 기분이 환기되고 아이디어도 잘 떠올라서 좋더라고요.
유 저는 운동 좀 해보려고 20대인 학교 친구들과 함께 ‘방송댄스 프로그램’ 한 달치를 끊은 적도 있어요. 그런데 제 몸이 너무 맘대로 안 따라주더라고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에 우울해하다가 결국 남은 강습권을 날렸죠. 하지만 이건 나이 때문이 아니잖아요. 세상에 춤 잘 추는 나이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그냥 개인의 능력치나 성향이 달라서인데, 나이 탓하는 게 제일 쉬우니까 나도 모르게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나이 핑계를 대면서 안주하려 하더라고요. 이제는 의식적으로 안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나이가 들어도 ‘성장한다’는 감각을 유지하는 게 더욱 중요하니까요.
진행자 조 연구원님도 같은 생각이신가요?
조 전적으로 동의해요. 제 인생의 목표도 ‘성장’이에요. 성장에 끝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유 시간은 동일하게 흐르는데, 왜 젊은 사람은 ‘성장’하고 나이 든 사람은 ‘늙는다’고 말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10년 전보다 지금이 제 인생의 한창때 같아요.
진행자 왜요?
유 그때는 회사에 소속돼 있었으니 안정적이긴 해도 성장한다고 느끼진 못했거든요. 예전에는 수동적으로 일했지만 지금은 안 그래요. 하나를 배워도 나중에 개인 병원을 차리면 어떻게 써먹을지 고민하고 계획을 짜게 되더라고요. 지금의 경험이 나의 미래를 완성해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경험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느껴져서 더욱 집중할 수 있고요.
조 매일 두 시간씩 바이올린을 연습하는 90세의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누군가 왜 매일 연습을 하냐고 물었더니 ‘지금도 연습하면 내가 조금 더 나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라고 답했대요. 저는 이 이야기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이 바이올리니스트처럼 같은 일을 계속하고, 꾸준히 고민하고 노력하는 삶을 살려고 해요. 나 역시 조금씩, 더디더라도 성장할 테니까요. 매일을 충실히 사는 것이 앞으로의 목표입니다.
지구촌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지 약 8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해외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상속 고민은 속 시원히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재산을 물려줄 사람의 거주지에 따라 법이 다르고, 밟아야 할 절차가 복잡해서다. 아직 법률에서 전 세계 통합이 이루어지기는 요원한 듯하다. 그러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다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이번 법률 가이드에서는 사례를 통해 해외 상속의 대략적인 흐름을 살펴보자.
case
“미국에 사는 54세의 Kate Song(케이트 송)이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미국 유학 시절 어머니를 만나 결혼해 저를 낳으셨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분은 이a혼하셨고, 아버지는 한국으로 돌아가셨어요. 새 사람과 재혼해 아들도 태어나고, 단란한 가정을 꾸렸더군요. 그 아들은 저의 이복동생인 셈이죠. 행복하게 지내시는 듯했지만 최근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장례식장을 찾아가 애도의 뜻을 표하고 계모, 이복동생과 상속에 관한 대화를 했습니다. 그동안 아버지가 꽤 많은 부동산 자산을 축적한 것으로 알고 있는 데다 평소 관계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합리적인 분배를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그들은 받을 재산이 거의 없다며 아버지의 재산 내역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해당 사례는 피상속인의 이혼 전 자녀(전혼 자녀) 케이트 송 씨와 이혼 후 재혼 배우자, 그 자녀 간 상속 분쟁이 일어난 경우다. 통상적으로 이들은 모두 상속인으로 인정되지만, 전혼 자녀는 가족관계등록부에 등록돼 있지 않으면 재산을 받을 수 없다. 더불어 전혼 자녀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과정이 더욱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다. 우선 국제적인 문제에서는 어느 나라의 법을 따라야 하는지가 중요하다. 이 경우 결론적으로 대한민국 법령에 따라 상속 절차를 진행하게 된다. 국제사법상 상속은 고인의 국적에 따라 관할하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상속 절차를 진행하는 방법
계모와 이복동생이 아버지의 자세한 재산 내역을 알려주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겠지만 다행히 그들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상속인이라면 고인의 자산과 채무 현황을 확인할 수 있다. 정부24에서 제공하는 안심상속 원스톱 서비스를 통해 기관 방문 없이 국세(체납, 고지세액), 금융거래(은행 잔고, 대출, 보험, 주식 등), 국민연금(가입 여부), 지방세(체납, 고지세액), 자동차(소유 정보), 토지(소유 내역) 등 사망자의 재산 상황을 볼 수 있다. 서류를 구비하면 대리 신청도 가능하다. 사망일이 속한 달의 말일부터 6개월 이내에 신청해야 한다. 처리 기한은 7~20일가량 소요된다. 금융감독원 역시 상속인이 사망자의 금융 재산 및 채무를 확인할 때 각 금융회사를 일일이 방문해야 하는 불편을 덜어주고자 상속인 금융거래정보 조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알고 보니 케이트 송 씨의 아버지는 서울시 강남구의 아파트 세 채와 예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계모, 이복동생과 협의를 마친 끝에 부동산을 한 채씩 나눠 갖기로 했다. 예금은 상속세 납부에 보태기로 한다. 그러나 송 씨는 한국에 자주 방문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성인이 된 후 한국 방문을 제대로 해본 적도 없는 터라 아는 친척이나 친구도 없다. 어떤 서류를 준비해야 할까?
고인의 재산을 내 명의로 가져오려면, 기본적으로 상속인 전원의 ‘인감증명서’가 첨부된 합의서가 필요하다. 하지만 외국인이나 해외 거주자는 인감이 등록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 다소 복잡하지만 방법은 있다.
먼저 예금 수령 또는 상속등기에 동의한다는 합의서를 작성한다. 그리고 본인 확인을 위한 서명확인서와 신원 확인을 위한 거주확인서를 작성하고 여권 사본을 첨부한다. 대신 인감증명서를 대체할 공식 절차가 필요하다. ‘아포스티유’ 또는 ‘영사인증’을 받아야 한다. 본인이 거주하는 국가가 미국, 일본 등 아포스티유 협약국이면 아포스티유를, 그렇지 않으면 영사인증(캐나다, 중국 등)을 받으면 된다.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영사관을 찾아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고 영문으로 작성된 서류는 모두 한글 번역문을 제출해야 하지만, 한국에 직접 가지 않아도 되니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이러한 서류는 반드시 원본이어야 하니 ‘Fedex’ 등 국제우편을 통해 원본을 한국으로 보내야 한다.
준비해야 할 서류 적지 않아
케이트 송 씨가 어릴 적 아버지가 한국에 출생신고를 했던 모양이다. 가족관계증명서의 이름은 송지연이었다. 미국 여권 속 Kate Song이라는 이름과 다른데, 가족관계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한국 내 등록된 이름이 따로 있다면 동일인확인서(Certification of Identity)라는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여권 이름과 한국 이름이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동일인확인서도 함께 준비해 아포스티유 또는 영사인증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
아파트를 내 명의로 상속등기하기 위해 주민등록번호를 대신할 ‘부동산등기용 등록번호’ 부여까지 신청하면 상속등기를 포함한 모든 상속 절차를 밟을 수 있다. 외국인 토지취득신고까지 마치고, 상속세를 납부하면 마무리된다. 드디어 모든 서류 작업을 마치고, Kate Song 명의로 압구정 아파트 한 채의 등기를 끝냈다.
그러나 케이트 송 씨는 아파트를 처분하고 매각 대금을 미국으로 가져오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임대료를 받기도 번거롭고, 임차인 관리 또한 쉽지 않아서다. 한국에 그대로 두자니 아깝고, 해외 거주자 신분으로는 투자도 녹록지 않다. 게다가 세금 신고와 납부의 번거로움까지. 이럴 때는 중개업체를 통해 부동산을 처분한다. 매수인과 계약을 마친 후에는 매도인 인감증명서가 필요하다. 앞서 설명한 아포스티유 또는 영사인증을 통해 처분위임장과 관련 서류를 준비하면 된다.
한국 비거주자인 케이트 송 씨는 상속으로 취득한 부동산의 매각 대금을 외국으로 송금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를 상속받았다는 점을 입증할 관련 서류를 외국환은행에 제출해야 한다.(외국환거래규정 제9-43조) 거주자란 상속 개시일 현재 국내에 주소를 두거나 183일 이상 거소를 둔 개인을 말하며, 비거주자는 거주자가 아닌 자를 말한다. 주소는 거주 기간, 직업, 국내에서 생계를 같이하는 가족, 국내 소재 자산의 유무 등 생활 관계의 객관적 사실을 기초로 판단한다. 상속세, 양도소득세를 모두 완납했다는 세금완납증명서 역시 반드시 준비해야 한다.
외국인이 국내 재산을 상속받기 위한 절차는 결코 쉽지 않다. (여담이지만 쓰면서도 몇 번이나 주제를 바꾸어야 하나 고민이 컸다. 이를 모두 읽었다면 자녀들에게 문해력을 자랑할 법하다.) 실제로 진행할 때는 서류에 문제가 있을 경우 처음부터 다시 준비해야 할 수도 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니, ‘가능하다’는 점만 알고 반드시 경험 있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것을 권한다.
일본도 연금만으로는 노후 생활이 풍족하지 않아 60대에도 일하고자 하는 노인이 많다. 은퇴를 앞둔 이들은 재고용과 재취업을 두고 저울질하고 있다. 일본의 시니어들은 제2의 직업을 어떻게 찾고 있을까?
구인 검색 엔진 인디드(Indeed)가 실시한 ‘시니어 세대의 취업에 관한 의식’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2022년 ‘70대’ 키워드 일 검색 수가 2017년 대비 53.7배 증가했다. 70대보다는 증가 폭이 크지 않았지만 ‘60대’ 일 검색 수도 같은 기간 7.9배 증가했다. 70~74세의 취업률은 2018년 이미 30%를 넘겼다. 75세 이상의 취업률은 10% 미만이지만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고령자 일자리에 대한 수요는 높아지는데 일할 곳은 많지 않아 재고용과 재취업 어느 쪽이 유리한지 고민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재고용과 재취업은 어떻게 다를까
재고용은 정년까지 일한 기업에 다시 고용되어 일하는 형태다.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기업의 약 80%가 60세를 정년으로 하고, 약 70%가 재고용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같은 기업에서 일하기 때문에 익숙한 환경에서 하던 일을 할 수 있다. 퇴직을 하고 다시 고용되는 형태로, 퇴직금을 받아 목돈이 생긴다. 근로자만 가입할 수 있는 후생연금도 유지되어 연금 수령액이 늘어난다는 것도 장점 중 하나다. 하지만 재고용은 대부분의 기업(약 80%)이 계속고용 상한을 65세까지로 두기 때문에 5년 이후의 일자리를 또 고민해야 한다. 급여 수준도 현직에서 받던 임금의 80% 미만 수준으로 내려간다.
재취업은 일하던 회사를 퇴직하고 다른 회사로 취직하는 것을 말한다. 재취업은 정년 이후 바뀌는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새로운 커뮤니티에 속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진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경우가 많아 삶에 활기를 느끼는 시니어도 많다. 고용 상한 연령이 없는 기업에 취직하거나 나이와 상관없이 계속 일할 수 있는 직업을 찾으면 평생 일할 수도 있다. 다만 현실적으로 정년퇴직 후 다른 기업으로의 재취업 기회가 적고, 새로운 것을 배워나가야 한다는 점이 부담스럽게 여겨지기도 한다.
퇴직 후 일할 수 있는 기간과 받을 수 있는 지원금을 따져보려면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해야 한다. 멘션 서포터(멘션 관리원이 쉬는 날 대신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를 운영하는 회사 우에르네스(うぇるねす)는 재고용과 재취업 중 자신에게 더 유리한 선택을 하려면 세 가지를 우선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정년이 오기 전부터 구인구직란을 살핀다. 둘째, 타협점을 명확히 한다. 아무리 정년 후 일자리가 구하기 어렵다고 해도 자신이 양보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명확히 해두어야 한다. 셋째, 은퇴 후 생활을 위해 연금 외에 필요한 수입이 얼마인지 계산해 그만한 수입을 낼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늘어나는 지원 제도
일본 정부는 정년 후 고령자들이 계속 일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 제도를 실시한다. 후생노동성은 ‘헬로워크’라는 기관을 운영한다. 전국에 300개 지점이 있으며 ‘생애 현역 지원 창구’를 통해 65세 이상 시니어를 지원하고 있다. 기업 일자리를 소개하거나 이력서 쓰는 법, 면접 준비하는 법 등을 무료로 가르쳐준다.
도도부현 지사의 지정을 받은 공익 사단법인 ‘실버 인재 센터’도 있다. 60세 이상 고령자가 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을 제공한다. 높은 수입이 보장되는 일보다는 임시 혹은 단기 일자리를 연결한다. 따라서 안정적인 근무처보다 사회관계를 이어가고 싶은 고령자가 이용하기에 적합하다.
금전적 지원도 이어진다. 정년 후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급여 수준이 현저하게 낮아진다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 고용보험 급부금을 지급한다. 이를 통해 고령자의 재고용과 재취업을 유도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60세에 정년퇴직한 뒤에도 계속 일을 하면 고용보험 급부금을 받을 수 있는데, 재고용과 재취업 때 받는 종류가 다르다. 같은 회사에 재고용됐을 경우 현직에서 받던 임금보다 75% 이하로 임금이 책정되었을 때 ‘고연령 고용계속 기본급여금’을 받을 수 있다. 60세부터 65세까지 5년간 지원받을 수 있다. 지급 한도는 2022년 8월 기준 36만 4595엔(약 350만 원)이다.
재취업을 할 경우에는 실업 기간 중 기본(실업) 수당을 받을 수 있다. 이후 재취업에 성공하면 일정 요건에 따라 ‘고연령 재취업 급부금’ 또는 ‘재취업 수당’을 받을 수 있다. 1년 또는 2년 한정으로 지급된다. 둘 중 하나만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더 많이 받을 수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100세 시대에 70대에도 일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리커런트(Recurrent) 교육과 리스킬링(Re-skilling)도 주목받고 있다. 리커런트 교육은 회복 교육이라는 뜻으로 업무 능력과 커리어를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교육이다. 후생노동성, 경제산업성, 문부과학성 등이 교육을 받고자 하는 근로자들의 비용을 지원하는 정책들을 시행하고 있다.
리스킬링은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 내각이 새롭게 추진하는 전직 교육 서비스다. 기업과 산업간 노동력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지침을 올해 6월까지 발표할 계획이다. 또한 향후 5년간 리스킬링 지원에 약 1조 엔을 투입할 예정이다.
창업에 도전하는 이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바로 ‘실패’일 것이다. 경제적 타격도 상당하고, 이로 인한 정신적 타격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이들이 있다. 지난해 창업진흥원 재도전 성공 패키지 우수 사례에 이름을 올린 중장년 재창업가 3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자료 제공 및 도움 창업진흥원
[1] 경영 파트너와의 호흡으로 기술에 탄력 더하다, 새솔테크(주) 한준혁 대표
ㆍ회사설립 2021년 5월 13일 ㆍ매출액 6억 원(2022년 기준)
ㆍ주요사업 자율주행, V2X 보안 토탈 솔루션 공급
한준혁 대표는 새솔테크 창업 이전 2006년부터 2011년까지 모바일 소프트웨어 개발 사업을 했었다. 한때 유행하던 피처폰 소프트웨어 개발 용역을 주로 맡았는데,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관련 사업은 외면받기 시작했다. 시대 흐름에 대응하지 못한 채, 자금난까지 더해지며 결국 폐업의 고배를 마셨다. 그렇게 폐업 후 10여 년은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프리랜서 생활도 하고, 직장도 몇 군데 다니며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Q. 폐업 이후 재창업 과정은 어땠나?
마지막 직장에서 자율주행 분야를 접했다. 기술적으로 노하우가 생기고 인적으로 네트워크가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관련 분야의 창업을 준비하게 됐다. 이전 사업에서 금전적인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다양한 지원 사업의 존재 자체를 전혀 알지 못했다는 점이 후회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법인 설립 전 개인사업자를 내자마자 창업진흥원의 재도전 성공 패키지를 포함해 정부나 기업 등의 지원 사업을 적극적으로 찾아봤다. 그렇게 얻게 된 경제적 지원 덕분에 본격적인 사업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개발자 출신이라 경영적인 역량은 부족한 편이다. 사업의 방향성을 설계하고 운영해 줄 파트너가 필요했다. 대기업에서 근무하며 수많은 성공 경험을 지닌 이재성 대표님을 만나게 된 것은 내게 행운이었다. 현재는 이 대표님이 경영총괄, 내가 개발 총괄을 맡고 있다. 덕분에 이전보다 좋은 성과를 내는 중이다.
Q. 새솔테크(주)는 자율주행 V2X 보안기술 회사다. 이는 어떤 기술인가?
자율주행 자동차가 상용화되려면 사이버 보안이 전제돼야 한다. 이에 대한 글로벌 규제들도 생겨나는 추세다. 새솔테크(주)의 자율주행 V2X 보안기술은 인간의 생명 보호와 교통 효율화라는 큰 목표를 지닌다. 2021 하반기 ‘C-ITS 상호 호환성 시험행사’를 통해 국제보안규격 IEEE 1609.2 & SCMS 1.0(CAMP) 기반의 V2X 보안인증서 발행과 단말 탑재를 성공시키며 기술적으로 신뢰를 쌓았다. 앞으로 우리가 자부하는 기술력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도록 객관적인 수치로 증명해 나갈 예정이다.
Q. 본인 기술력을 바탕으로 창업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조언 한다면?
일단 혼자서는 시작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비즈니스란 너무 복잡해서 본인이 가진 기술 역량만으로는 사업체를 이끌기가 힘들다. 그래서 이런 부분을 보완해줄 파트너와 함께 시작하기를 추천한다. 또한, 소프트웨어 개발자로서 관련 사업을 준비하는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건 프런트엔드(Front-end)와 백엔드(Back-end) 기술을 모두 섭렵하라는 거다. 사업적으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보여주고 다른 개발자들을 이끌기 위해서는 제품에 들어가는 모든 기술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2] ㈜예성글로벌 김경태 대표, 독보적인 기술로 세계무대 꿈꾸다
ㆍ회사설립 2018년 12월 18일 ㆍ매출액 19억 1000만 원(2022년 기준)
ㆍ주요사업 친환경 생활용품군과 첨단 소방용품군을 개발·생산·유통
만 18세에 기술직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김경태 대표는 서른 살이 되던 해 사직서를 냈다. 퇴직 후 10년은 아내와 디지털 도어록 대리점을 운영했다. 점차 디지털 도어록 보급률이 높아지며 역으로 고객이 줄었고, 그동안 터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업에 도전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김 대표는 문에 부착하는 소방용품인 자동폐쇄장치와 도어 클로저를 사업 아이템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사업은 생각만큼 풀리지 않았고, 결국 문을 닫는 지경에 이르렀다.
Q. 야심차게 준비한 사업이 폐업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뭐라 생각하나?
기술력이 있으니 얼른 자체 제품을 출시해서 도어록 대리점 운영하듯 유통하면 되겠다는 다소 안일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제품 개발이 늦어졌다. 투자금은 자꾸 늘어나는데 비용 회수가 안 되니까 힘들어지고 결국 문을 닫게 된 거다. 또, 엔지니어로서 기술력은 자신 있었는데 경영에 관해서는 무지했다. 경영이나 재무, 조직 관리 등의 지식과 노하우가 좀 더 있었다면 다르지 않았을까, 후회를 많이 했다. 그래서 폐업 이후 6년 정도 회사에 다니면서 제품 개발과 동시에 경영도 공부했다. 또 이전 사업에서 오로지 대출로만 사업 자금을 확보했던 것도 문제였다. 그래서 재도전을 준비하면서 각종 지원 제도를 꼼꼼히 알아봤고 이를 통해 일정 부분 사업 자금을 만들었다. 폐업을 통해 배운 교훈인 셈이다.
Q. 폐업 이후 재도전은 어떤 과정으로 이뤄졌나?
회사는 폐업했지만, 제품 개발에 대한 의지는 멈추지 않았고 인적 인프라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재창업을 결심하고 창업진흥원 재도전 성공 패키지 사업을 신청했다. 현재는 공압식 도어클로저와 방화문 자동폐쇄장치, 두 제품에 주력하고 있다. 공압 도어클로저는 특허 및 디자인 등록이 20여 건, 출원 13건, 해외특허출원(PCT)이 1건이다. 특허는 출원 신청 이후 평균 1년 반 정도 지나 공개되는데, 자체 기술을 보유하면 남들보다 1년 반 정도는 앞서간 셈이다. 도어클로저는 현재 개발 막바지 단계이고, 올 가을 쯤 출시를 앞두고 있다. 방화문 자동폐쇄장치는 지난해 9월에 글로벌 기업에 공급 계약을 체결해 연간 40억 원 이상 매출이 발생하게 됐다. 두 제품 모두 글로벌 기업으로부터 관심이 높아 세계 시장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다.
Q. 기술 창업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기술력, 아이템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특히, 기술 창업인으로 제조업에 뛰어들고 싶다면 더더욱 그렇다. 독자적인 기술력이 없다면 창업을 하는 의미가 없다고 본다. 본인이 가진 기술, 만들고 싶은 제품이 없다면 차라리 기존에 잘 만들어진 제품을 사서 유통업을 하는 편이 나으니까. 또, 엔지니어 정체성을 지닌 대표라면 반드시 경영 관련 공부를 하라고 말해 주고 싶다. 관심을 갖고 찾아보면 정부 지원 프로그램이나 좋은 제도들이 많다. 아무리 기술력이 좋아도 경영을 너무 모르면 그 무지가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3] 두 번의 폐업 후 세 번째 도전, 토미코리아 김성진 대표
ㆍ회사설립 2020년 10월 26일 ㆍ매출액 매출액 12억 원(2022년 기준)
ㆍ주요사업 고양이용품의 프리미엄 브랜드 묘우묘우 고양이 정수기
김성진 대표는 청년 시절 아파트 청소용역업체를 개업한 적이 있다. 그러다 트럭에서 떨어져 허리는 다치는 바람에 육체노동이 필요했던 해당 사업은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다. 이후 지인 추천으로 차량용 방향제 사업을 시작해 월마트 입점까지 내다볼 정도로 승승장구했지만, 이 역시 좋지 않은 결과를 맞았다. 안일했던 독점거래로 적자를 떠안게 된 것. 다시 직장인이 되어 성실히 빚을 정리해가며 반려동물용품 사업으로 재도약을 꿈꾼 김 대표다.
Q. 두 번의 폐업 후, 새로운 창업 아이템으로 반려동물용품을 택한 이유는?
새로운 사업은 시장 규모가 크고 성장 가능성이 높은 일로 하고 싶었다. 자동차 방향제 시장이 200억 원 정도였는데, 반려동물용품 시장은 6조 원에 육박하더라. 고령화와 1인 가구 증가 속에서 반려동물 인구는 점차 늘어날 전망이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일본 바이어를 통해 강아지 패드를 수입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시드 머니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돈이 될 만한 물품은 무엇이든 수입해서 판매했다. 그러던 중 자체 브랜드 묘우묘우를 만들어 OEM으로 생산한 고양이 관련 제품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자체적으로 기획과 개발부터 생산까지 모두 담당한 고양이 정수기까지 이르렀다. 고양이 정수기 사업계획서로 창업진흥원의 재도전 성공 패키지에 응모해 지원금을 받아 곧바로 제품 개발에 들어갔다. 2022년 1월에 브랜드 ‘묘우묘우’를 론칭했는데, 10년 후에는 고양이 정수기 하면 묘우묘우가 떠오르게 하고 싶다.
Q. 세 번째 창업을 준비하며 가장 신경 쓴 것은 무엇인가?
네이버 스마트스토어, 쿠팡, 옥션 등 각종 온라인 마켓의 성장세가 놀라웠다. 이 플랫폼에서 물건을 팔아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컴퓨터라면 독수리 타법으로 겨우 칠 정도의 실력밖에 되지 않았다. 정부 무상 교육을 찾아다니며 온라인 마켓 관련 수업을 듣는데, 답답한 마음에 처음엔 그야말로 울면서 배웠다. 열심히 배운 덕에 이제는 온라인 스토어의 메커니즘을 모두 이해하고 있다. 포토샵으로 기본적인 일러스트 작업도 가능하다. 또 창업진흥원의 재도전 성공 패키지를 포함해 여기저기 정부 무상 교육을 찾아다니며 100시간 넘는 수업을 들었다. 컴퓨터는 물론 직원 관리 방법이나 세무회계, 노무 등 기업 운영에 필요한 지식을 습득했다. 사업은 종합예술이라고 생각한다. 회계, 영업, 경영, 디자인, 관리 모든 분야를 다 알고 있어야 한다.
Q. 현재의 성과가 있기까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하고 있나?
2022년 기준 매출액이 12억 원 정도다. 중국, 일본으로 제품 수출도 하고 미국 아마존 입점도 준비하고 있다. 이러한 성과에 현재는 감사한 마음이 큰데, 사실 젊은 시절에는 감사함을 잘 몰랐다. 한때 매출 20억을 달성해도 감사하기보다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가난한 기분이었다. 이제는 모든 순간이 감사하다. 일할 수 있는 것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도, 물건이 팔리는 것도, 이런 감사한 마음을 갖고 계속 해나가려 한다. 무엇보다 나는 나이가 들어도 영원한 현역으로 남고 싶다. 그러려면 열린 마음으로 배우려는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용기만 있다면 몇 살이 됐든 도전 가능하다고 믿는다.
우리나라에서 오는 2025년까지 65세 이상 고령자 비중이 100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고령화에 따라 노인 돌봄 서비스의 수요 또한 빠르게 커지고 있다. 지금까지 국내 ‘시니어케어’ 시장은 영세 사업자들을 위주로 형성되어 왔으나 최근에는 전문적이고 다양한 서비스를 원하는 소비자가 늘면서 관련 업계에서도 이를 만족시킬 수 있는 상품을 선보이고 있다.
소비자에 최적화한 시니어케어 서비스
시장 수요의 확대에 발맞춰 프리드라이프는 첫 번째 전용 상품으로 시니어케어 서비스를 탑재한 간병비 지원 신상품 ‘늘 든든’을 선보였다.
‘늘 든든’은 매년 증가하는 노령층 인구를 위한 맞춤형 상조 상품으로 디지털 헬스케어 전문 기업 에임메드와 협업을 통해 전문적인 시니어케어 서비스와 간병인 지원, 프리미엄 장례 서비스를 제공한다.
상품에 가입한 고객은 병원 입원 상황 발생 시에 회복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58만 원 상당의 간병비 지원 포인트를 일시에 제공받을 수 있다. 또한 분할식 납부 방식으로 비용 부담을 낮추는 등 소비자의 이용 편의성도 끌어올렸다.
시니어케어 서비스로는 가입 후 10년간 시니어 인구를 위한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한다. 먼저 14개 진료과목 전문의로 구성된 의료진의 건강상담, 전국 50여 개 대형 병원과의 진료협력 네트워크를 통한 종합병원 진료 간편 예약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여기에 요양병원 비교견적 및 장기 요양 등급 컨설팅 등 노년기에 필요한 다양한 서비스와 혜택을 ‘늘 든든’ 상품 하나로 만나볼 수 있다.
프리미엄 상조 서비스를 동시에
‘늘 든든’은 프리드라이프의 프리미엄 상조 서비스도 함께 누릴 수 있는 상품이다. 프리드라이프는 차별화된 ‘장례 토탈 케어 시스템’을 기반으로 사전 상담부터 사후 유족 케어까지 고객 중심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와 함께 시니어 소비자들이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크루즈 여행 ▲수연 ▲AI 추모서비스 등 다양한 전환 서비스도 선보이고 있다. 프리드라이프의 크루즈 여행 상품은 로얄캐리비안 크루즈를 비롯한 세계적인 선사 5곳과 제휴해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특별한 추억을 선물하는 리마인드 웨딩과 환갑, 칠순 등 뜻깊은 날을 위한 수연 서비스도 이용할 수 있다. 최근에는 디지털 인공지능(AI) 기술로 고인의 모습을 구현해 그리운 추모 대상자를 만나보고 회상할 수 있는 AI 추모 서비스를 추가했다.
프리드라이프 가입 고객을 대상으로 제공되는 다양한 멤버십 혜택도 누릴 수 있다. 멤버십 적용시 제휴된 전국 건강검진센터에서 종합 건강검진 우대를 받을 수 있으며, 한화 리조트와 켄싱턴 리조트도 회원가로 이용 가능하다. 또한 프리드라이프 직영 장례식장 할인과 심리전문가의 상담을 통해 유족 케어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다.
업계 최대 자산 규모와 고객 서비스
프리드라이프는 ‘늘 든든’ 상품을 비롯해 고객의 생애 주기 고려한 라이프 서비스를 선보이며 상조 업계 선진화에 앞장서고 있다.
2002년 설립된 프리드라이프는 공정거래위원회 정보 공개 기준 자산 및 선수금 모두 1위를 기록한 업계 선두 기업이다. ‘좋은라이프’, ‘금강문화허브’, ‘모던종합상조’와의 상조 4개사 통합에 이어 올해는 여행 전문 법인인 ‘프리드 투어’ 합병을 완료하고 1위 기업으로서 입지를 더욱 강화했다. 현재 전문경영인 체제하에 약 190만 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5개사 합산 규모는 지난 12월 말 기준으로 총 선수금 약 1조 8천억 원, 총자산 2조 2천억 원을 초과 달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전국 139개 사업점, 1156명의 LP(Life Partner) 등 전국 영업망을 바탕으로 국내 어디서든 24시간 신속하게 출동할 수 있는 의전 조직을 갖추고 전문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프리드라이프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국가장에 참여할 만큼 최고의 의전과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故 노무현 前 대통령 국가장, 사할린 강제 동원 희생자 유해 귀환 사업, 이태원 참사 합동 분향소 운영 등에 참여한 바 있다.
장례부터 토탈 라이프케어까지
프리드라이프는 ▲장례 ▲웨딩 ▲축연 ▲여행 ▲홈 인테리어 등 라이프 스타일에 따라 선택이 가능한 토탈 라이프케어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다
또한 빠르게 변화하는 소비자의 생활패턴과 디지털 서비스 니즈를 반영해 24시간 모바일 장례 접수 서비스, QR코드 활용한 디지털 추모관, AI추모서비스 등을 출시하며 디지털 전환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프리드라이프 관계자는 “초고령화 시대에 접어들며 시니어 시장의 규모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소비자 니즈도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업계 선두 기업으로서 프리드라이프는 변화하는 시대에 최적화된 시니어케어 서비스를 선보이며 든든한 토탈 라이프케어 파트너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