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스켈레톤과 봅슬레이 두 썰매 종목에서 한국 최초의 메달리스트가 탄생했다. 메달 소식과 함께 주목을 받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한국체육대학교 강광배(姜光倍·45) 교수다. 그는 동계올림픽 최초로 모든 썰매 종목(루지, 스켈레톤, 봅슬레이)에 출전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후 썰매 불모지인 우리나라에서 제자를 발굴하고 육성에 힘쓴 그의 노력은 오늘날 한국 썰매의 발전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한국 썰매의 아버지’, ‘한국 썰매계의 문익점’, ‘한국 썰매의 개척자’. 이 모든 수식어는 한국 썰매의 시초부터 함께한 강광배 교수에게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그와 썰매의 뗄 수 없는 인연은 20여 년 전으로 돌아간다. 때는 그가 대학교에 막 입학하기 전 무주리조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부터다.
한국의 첫 루지 국가대표 탄생
“휴무 날에 생전 처음으로 스키를 타봤어요. 아니나 다를까 스키에 푹 빠져버렸죠. 처음으로 확실한 꿈이 생겼어요. 국가대표가 되는 것.”
그의 스키 실력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 대학부에서 우승하는가 하면 스키장에서 강사로도 활동했다. 꿈에 한 발짝 다가가는 듯싶었지만 불의의 사고로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스키 강습 도중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한 것이다. 절망하던 그에게 한줄기의 빛처럼 눈에 띈 게 있었다. 바로 학교 게시판에 붙은 루지 국가대표를 뽑는다는 루지 강습회 안내문이었다.
“태극 마크를 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루지가 뭔지도 몰라서 찾아봤는데 누워서 타는 썰매더라고요. 무릎에도 부담이 없을 것 같고… ‘아 이건 정말 나를 위한 종목이다’ 하곤 바로 강습회에 신청서를 냈죠.”
국제루지연맹에선 군터 렘머러 수석 코치를 파견해 한국 선수 지도를 도왔다. 말도 통하지 않아 손짓 발짓 해가며 루지 조종법을 익혔다. 제대로 된 장비나 훈련장도 없었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수준이었다.
“선발전이라곤 그냥 아스팔트 언덕길에 꼬깔콘 모양의 라바콘을 세워두고 누가 빨리 장애물을 피해 내려오나 초시계로 재는 거였어요.(웃음) 썰매에 바퀴를 달고요.”
아직 무릎도 완치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선발전에 출전했다. 잘못될 경우 재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부담감도 있었지만, 그가 품은 국가대표의 꿈이 훨씬 더 컸다.
“기회라는 게 자주 오는 게 아니잖아요. 정말 간절했거든요. 오히려 몸을 더 과감하게 던졌죠.”
그 결과 3명을 뽑는 선발전에서 2등을 기록했다. 1등과 3등을 한 선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루지를 그만뒀다. ‘루지는 비전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대표팀을 꾸리기 위해선 서둘러 두 자리 공석을 채워야만 했다. 이때 새로 들어온 선수가 강광배의 3년 후배인 이기로와 현재 봅슬레이 대표팀 감독인 이용이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한국 첫 루지 국가대표팀이 탄생했다.
1996년 캐나다에서 열린 첫 전지훈련, 강광배 교수는 이날을 회상하며 “아팠던 기억밖에 없다”고 말했다.
“트랙에 하도 많이 부딪혀서 저녁만 되면 선수들끼리 서로 약 발라주느라 바빴어요. 보호대를 착용하면 그나마 덜했을 텐데 그 당시에는 보호대를 착용하는 것조차도 몰랐으니까요.(웃음) 썰매를 탈 때마다 연습복도 다 찢어졌는데 매번 새 옷을 입을 수 없는 형편이어서 찢어진 데를 테이프로 붙여가며 훈련을 했어요.”
마땅한 장비도 훈련장도 경기장도 없었지만, 루지 국가대표 3인방은 구슬땀을 흘리며 올림픽 무대를 향해 달렸다. 그렇게 처음 출전한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강광배는 출전 선수 34명 중 31위를 기록했다. 기권한 두 명의 선수를 제외하면 꼴등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등수는 중요하지 않았다.
“전 세계에서 썰매를 가장 잘 탄다는 선수들은 다 모인 거잖아요. 국가대표로 출전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죠.”
불행이 행운이 되어 돌아오다
나가노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뒤 강광배는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체육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첫째 ‘루지를 제대로 배우고 싶어서’, 둘째 ‘더 넓은 세상에서 공부하고 싶어서’였다. 인스브루크 체육대학에 입학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루지연맹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전달받았다.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그의 선수 자격을 박탈한다는 내용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릎 부상까지 겹쳤다.
“루지를 배우러 갔는데 가자마자 목표가 사라져버린 거죠. 유학 가기 전에 선생님, 친구들, 가족한테 열심히 하고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한국으로 돌아가자니 제 인생을 포기한 사람이 된 것 같더라고요.”
평생 흘릴 눈물을 하루 만에 다 흘렸다는 그는 ‘이곳에서 뭔가를 이루기 전까진 절대로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이후 절박한 심정으로 더욱 공부에 매진하던 강광배는 어느 날 스켈레톤 선수이자 인스브루크 학생인 마리오 구겐베르거를 소개받는다. 루지를 탈 수 없었던 그에게 스켈레톤은 새로운 탈출구였다. 당시 트랙을 두 번 이용하는 데 들었던 비용은 약 5만 원. 스켈레톤을 타기 위해 그는 3~4시간 정도 폐지와 캔을 주웠다. 그래봐야 겨우 두 번 정도 탈 수 있었다.
“낮에는 민망하니까 사람들이 다 자는 밤에 나와서 폐지랑 캔을 주웠어요. 특히 강 주변으로 산책로가 있었는데 그 근처에서 신문을 보거나 맥주 마시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곳으로 자주 주우러 갔죠.(웃음) 덕분에 자전거 타고 한 바퀴 쭉 돌면 더 이상 실을 수 없을 만큼 주울 수 있었어요.”
그렇게 그가 스켈레톤에 미쳐 있을 때 생각지도 못한 희소식이 들려왔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스켈레톤이 54년 만에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부활한다는 소식이었다. 스켈레톤은 1948년 생모리츠 동계올림픽 이후 선수가 별로 없다는 이유로 폐지된 상태였다.
“루지 선수 자격을 박탈당했을 땐 나한테 왜 이런 시련이 왔나 했는데 돌이켜보면 큰 행운이었죠. 덕분에 스켈레톤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또 한 번의 태극마크를 다는 길은 순조롭지 않았다. 대회에 나가기 위해선 의사의 확인도장과 연맹 회장의 직인이 찍힌 라이선스가 필요했다. 가장 큰 문제는 한국에 스켈레톤 연맹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를 자른(?) 대한루지협회에 전화해 도움을 요청했다.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건 좋지만, 그에게 10원도 지원할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도 좋았다. 그는 가입에 필요한 서류를 모두 준비하고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털어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렇게 1999년, 우리나라도 국제 봅슬레이 스켈레톤 연맹 회원국이 됐다.
“매년 국제연맹에서 회의가 열리는데 2000년에 제가 참석했어요. 갔는데 태극기가 딱 걸려 있더라고요. 뿌듯했죠. 우리나라를 국제연맹에 가입시킨 건 제 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일이었어요.”
1998년 유학길에 올라 루지 선수 자격을 박탈당하고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스켈레톤 국가대표로 나가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그는 되돌아보니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한다.
“제가 힘들어도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썰매를 정말 좋아했기 때문이에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은 고생이 아니잖아요. 그땐 제가 미쳐 있었으니까요.(웃음)”
이젠 국민들의 관심이 필요할 때
강광배는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봅슬레이 출전을 끝으로 모든 썰매 종목에서 올림픽 진출이라는 기록을 세운다. 이후 한국체육대학교에서 썰매부를 맡으면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스켈레톤 금메달리스트 윤성빈을 발굴하는 등 한국 썰매 육성에 힘을 보태고 있다.
“선수들과 지도자들이 노력해서 딴 메달입니다. 마치 제가 다 한 것처럼 비춰지지 않으면 좋겠어요. 전 그저 씨앗을 뿌렸을 뿐이고 농사가 잘된 거죠. 얼마나 큰 행운입니까. 잘 성장해줘서 고마울 뿐입니다. 이젠 저보단 우리나라를 빛낼 선수들과 감독, 코치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썰매라면 이제 지겨울 법도 한데 그는 어쩔 수 없는 썰매 바보인가보다.
“가장 힘든 건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계속 가고 있다는 생각에서 오는 외로움이었어요. 이제는 터널을 빠져나와 빛을 봤으니 미련도 여한도 없습니다.”
천운을 타고나 이룰 것 다 이뤘는데도 탁구 천재 현정화의 눈매는 아직도 살아 있고 견고한 에너지를 방출 중이다. 시사평론가 이봉규의 강한 스매싱(?)과 날카로운 서브를 넣어도 그녀의 핑퐁 토크는 명불허전이었다. 역시 레전드와의 만남이었다.
용인시에 있는 ‘현정화 탁구교실’에 들어서서 그녀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분명 얼굴은 현정화가 맞는데 마치 고등학교 탁구선수가 훈련을 준비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비쩍 마른 체구에 얼굴은 조막만 하고 짧은 머리가 영락없는 고교생 이미지였다.
6~7명의 중·고생 탁구 유망주들이 그곳에서 현정화의 지도를 받기 위해 준비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문밖에서 보니 나이 오십인 현정화도 그 학생들과 또래처럼 보였다. 걱정도 되고 궁금하기도 해서 “왜 이리 말랐나?” 하고 물었더니 “나태한 걸 싫어한다. 많이 일하고 움직이다 보니까 살찔 시간이 없는 것 같다”고 대답하면서 건강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안심시킨다.
몸매도 몸매이지만 눈매도 아직 배고픈 선수처럼 살아 있었다. 탁구선수로 최고의 위치까지 올라갔고 지금도 부러울 것 없는 탁구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눈매가 살아 있는 것이 신기했다.
인터뷰하는 동안 한시도 흐트러짐 없이 목소리도 카랑카랑했다. 이 같은 눈매와 자세가 그녀를 만리장성의 벽을 깨고 세계 최고로 만든 원동력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이룰 거 다 이루고 나이도 오십쯤 되었으니 이젠 느슨해질 때도 되었건만 아직도 그녀는 견고한 힘을 유지하고 있다.
기러기 엄마, 독수리 엄마
현정화의 강직한 힘을 빼기 위해 한량 이봉규가 슬쩍 찔러봤다. “당시 현정화 선수는 실력이나 외모 등 지금의 김연아급 인기를 끌었는데 실감했나?” 그러자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재미없게 살았다. 탁구만 쳤다. 운동 잘하는 선수로 국민들이 인정해주는 줄만 알았다.” 현정화의 대답에 다시 꼬리를 물었다. “예쁜 얼굴에 인기 절정의 현정화에게 대시하는 남자가 없었나?” 급작스런 질문에 현정화는 몇 초간의 인터벌을 갖더니 “당시 선수촌에서 남자 상비군인 연습 파트너와 짜릿한 비밀 데이트를 했다”고 털어놨다.
다소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의 이봉규를 달래기라도 하듯 곧바로 “그 남자와 10년 후 결혼했다”고 마무리를 했다. 당시 다른 선수들은 몰랐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녀에게 아마 다 눈치 채고도 남았을 텐데 현정화 본인만 그 사실을 몰랐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그녀는 “그래봤자 탁구 잘 치면 그만이다”라며 당당한 표정이다.
중2 딸과 고2 아들을 둔 지금에 와서야 편하게 말하는 것이겠지만 당시 인기 절정의 현정화가 선수촌에서 몰래 데이트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007작전을 방불케 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연애가 결실을 맺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지금 두 아이는 미국에서도 유명한 명문 학군인 캘리포니아 얼바인에서 아빠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른바 ‘기러기 엄마’인 셈이다.
현정화 본인은 ‘독수리 엄마’로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미국 가고 싶을 때 언제든지 갈수 있기 때문에 기러기가 아니라 독수리라는 해명이다.
남편은 미국에서 탁구 레슨을 하면서 두 아이를 돌보고 있다. 현정화 감독도 시합이 끝나면 무조건 미국으로 달려가 일주일 정도 머물며 가족들과 함께한다. 다행히 딸이 미국의 대입시험인 SAT 1600점 만점에 1500점이라는 높을 점수를 얻어 스탠포드대학교나 존스홉킨스 의대 진학을 희망하고 있다. “엄마 아빠가 운동선수 출신인데 왜 운동을 안 시켰나?” 하고 따지듯 물었더니, “일부러 운동을 안 시켰다. 운동은 너무 힘들어서”라고 말꼬리를 힘없이 흩뿌렸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아이들이 중간만 하고 살면서 행복하면 좋겠다”는 것. 즉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본인이 훈련에 힘들었고 온 국민의 기대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해서 자식들에게는 그러한 고통을 물려주기 싫었을 것이다. 현정화는 “육체적 훈련보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더 견디기 힘들었다”고 실토했다.
태극마크에 대한 소중함을 안다
운동 얘기가 나온 김에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남북 단일팀 이야기로 넘어갔다.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구성에 대해 현정화는 결과적으로 단일팀은 선수들에게 나쁘지 않은 결정이었다고 했다.
“온 세계가 주목하는 올림픽에서 일생의 큰 경험과 기회가 됐을 것”이라고 단일팀을 경험해 본 선배로서 의견을 비췄다. 그런데 1991년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 대회는 사정이 좀 달랐다고 설명했다. 참가규정 인원이 5명인데 당시에는 이번 여자 하키 단일팀과 달리 국가별 참가 선수 인원을 늘려주지 않았다. 만약에 단일팀을 꾸리지 않았다면 “다른 남한 선수들이 출전 기회를 얻었을 테고 설령 금메달은 따지 못했어도 은메달이나 동메달은 딸 수 있지 않았을까”라며 과거를 회상했다.
그러면서도 “국가가 있어야 선수도 있고 국민도 있다”고 강조한다. “태극마크에 대한 소중함을 안다”고 부연 설명도 한다. 당시 같이 출전 못한 국가대표팀 동료에게 다소 미안한 마음도 있었겠지만 국가의 결정을 따르는 것이 대표선수의 당연한 의무였기에 복잡한 심경이었으리라 이해된다.
어쨌든 당시 현정화는 북한의 리분희와 함께 단일팀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니 복 받은 선수임에 틀림없다. 본인도 “나는 정말 운을 타고난 운동선수”라고 겸손하게 인정했다.
천운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선수
현정화의 타고난 운은 사실 88서울올림픽이었다. 그때 탁구 종목이 처음으로 채택됐는데 그 대회를 위해 국가는 수년 전부터 어린 꿈나무를 육성시켰다. 그 선수들 중 한 명이 현정화였다. 당시 현정화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시대적 상황으로도 천운이라 할 만했다. 그때 그녀는 복식에서 양영자 선수와 함께 금메달을 땄다. “우리는 금메달 딸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복식에서 금메달을 따야 한다고 해서, 단식을 접고 복식 연습을 3년간 하루에 서너 시간씩 했다. 나중에는 눈만 쳐다봐도 언니가 뭘 원하는지 알 정도로 서로가 완벽하게 호흡이 잘 맞았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평창올림픽에서 아이스하키 단일팀이 화제가 되었다. 단일팀의 원조격인 현정화에게 탁구 남북 단일팀 결정으로 인한 당시의 심경이 어땠는지 물어봤다.
“사실 진짜 제 속마음은 ‘이거 왜 하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렇지만 만들어져서 해야 하는 상황이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면 빨리 우리가 단합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했다. 또 나는 개인적으로도 성적을 잘 내는 걸 원하는 선수였기 때문에 서로 간에 합심해서 성적을 잘 낼 수 있도록 노력하자, 그런 마음으로 했다. 우리가 한 달간 합숙훈련을 하고 보름을 같이 시합해서 45일 정도 함께 지냈는데, 절대로 긴 시간이 아니었다. 양영자 선배랑 복식 3년을 준비한 것처럼 준비를 해도 메달을 딸까 말까였는데, 남북 단일팀이 한 달 만에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까 그런 의구심은 들었다. 그냥 결승만 올라가도 우리는 할 일을 다 하는 거라는 생각으로 시합을 했다. 북한의 에이스가 리분희이니까, 그 선수도 마찬가지 심경이었을 것이다. 나는 또 대한민국의 에이스이니까 책임감을 갖고 시합을 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시절을 되돌아보며 그녀는 차분하게 자신의 심경을 설명했다.
남북 단일팀과 리분희에 대한 추억
“북한의 에이스 리분희 선수가 간염으로 아팠다. 그래서 훈련을 제대로 소화 못했기 때문에 예선전부터 계속 리그를 치러야 하는 부담감이 고스란히 나한테 왔다. 북한 선수가 한 명 나가고 내가 나가서 함께 힘을 합쳐 해야 하는 경기여서 정말 부담스러웠다.” 현정화로서는 리분희 선수가 컨디션이 나쁜 걸 아니까 그래서 더 파이팅을 하고 또 집중했을 것이다.
그 결과 만리장성의 벽을 남북 단일팀으로 넘을 수 있었다. 현정화와 리분희는 서울올림픽 때 만나서 1993년 세계선수권대회 때 한 번 보고, 그 후로 25년 동안 한 번도 못 봤다. 이번 평창 패럴림픽 때 리분희가 올지도 모른다는 기사도 있었다. 이에 관해 현정화는 “얼마 전에 리분희가 인터뷰한 걸 봤는데, 현정화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얘기해서 사실 감동받았다”고 말한다. 그 표정을 보니 온 마음을 다해 리분희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는 눈치다.
평창 패럴림픽 개막식이 3월 9일인데 이 잡지가 나간 후 아마 둘이서 만나는 장면이 각 언론사 톱뉴스로 실릴지도 모르겠다. 25년 만의 현정화와 리분희가 다시 만날 때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또 어떤 옷을 입고 TV 화면에 나타날지 몹시 궁금하다. 천운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치열한 노력을 해야 한다. 천운을 타고난 현정화의 여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서울시 지하철 1호선 동묘역과 6호선 창신역 사이의 창신동은 최근 예쁜 옛 동네로 주목받고 있다. 낡고 오래되면 ‘뉴타운’이라 이름 붙여 첨단 건축물을 세우고 땅값을 올리는 것이 불과 몇 년 전까지 도시의 운명이었다. 창신동은 개발을 거부하고 주민들의 푸근함을 담아 이른바 재생의 길을 택했다. 창신동 구석구석 남아 있는 기억 중 하나가 바로 동덕여자중·고등학교다. 1960년대, 단발머리 어린 숙녀 박혜경(朴惠慶·66)은 창신동 이곳저곳을 누비며 추억을 쌓았다.
우리 학교 동덕여자중·고등학교
박혜경 동년기자에게 창신동은 동덕여중·고 시절 기억과 함께한다. 1986년에 학교가 서초구 방배동으로 이전해 사실상 그 시절의 흔적이라든가 추억 한 자락 남은 것이 없었다. 운동장이 있던 자리에는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섰다. 참새방앗간 드나들듯 다녔던 문방구는 반찬가게가 돼버렸고 말이다. 하지만 박혜경 동년기자의 눈은 기자의 눈과 달랐다. 아파트 입구를 보며 학교 정문을 설명하고, 그 너머 너른 학교 운동장과 숱한 세월의 더께가 앉은 수위실이며 귀밑머리 1cm를 외치는 규율부 학생들을 회상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추억 속 교정을 거니는 듯 말이다.
“지금 창신동 두산아파트 자리가 바로 우리 학교가 있던 자리예요. 요즘은 가수 아이유가 나온 학교로 유명하더라고요.(웃음) 우리 때는 시험을 쳐서 들어갔는데 저도 무사히 잘 붙어서 동덕여중·고를 다녔어요. 일제강점기 때 조동식 박사가 우리 민족이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우선이고, 여성도 교육받아야 한다며 세운 게 우리 학교거든요.”
1973년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우승 주역인 탁구선수 정현숙 씨와는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이었다. 동덕여고는 사라예보대회로 세계에 이름을 날리기 전에도 탁구로 유명한 학교였다. 당시 이에리사 선수(서울여상)를 제외한 정현숙, 나인숙, 박미라, 김순옥 선수 모두가 동덕여고 출신이다. 방과 후 특별활동으로 무용을 할 때마다 강당 한 편에서 열심히 운동하는 탁구선수 친구들을 봐왔다.
민족학교이자 독립운동가의 산실
여기서 잠깐! 현재 동덕여자고등학교 사서교사이자 59회 졸업생인 이숙희 씨의 추억 속을 좀 들춰보기로 하자. 옛 사진을 구하기 위해 동덕여고에 연락을 했더니 마침 이 학교 졸업생인 이숙희 씨를 소개해준 것.
“동덕은 순수 민족자본으로 세운 민족학교입니다. 1908년 스물두 살이던 조동식 박사가 동원여자의숙이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빨리 독립을 하려면 여성이 공부를 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어요. 옛날 양반 댁은 딸들을 동덕여고로 보냈다더군요. 그리고 여성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학교이기도 합니다.”
3·1운동 만세사건 때 동덕 학생들이 태극기를 몸에 숨겨 만세 현장으로 가서 전달했다. 현재 서대문 형무소 여옥사에는 동덕여고 시절 단짝이었던 18회 이효정과 박진홍이 눈물의 상봉을 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석고상이 설치돼 있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수감돼 1935년 4월 이곳에서 재회했다. 일제강점기 학교의 명성 또한 높았다고 덧붙였다.
“그 시기 우리 학교는 전국구 학교였어요. 함경도 함흥, 명천, 경상도 봉화, 울주, 마산, 전라도 고창, 제주도 등지에서도 동덕을 왔으니까요.”
지방의 한 중학교에서 우등상을 놓치지 않았던 이숙희 씨 또한 1972년 서울로 유학을 올 때 여성 교육의 전통적인 명문의 이미지를 가진 동덕여고를 선택했다.
동대문 아파트와 낭만의 스케이트장
다시 박혜경 동년기자의 추억으로 돌아가서 학교 주변 이야기에 대해 들어보자. 학교 밖을 나와 학생들 사이의 핫 플레이스는 바로 동대문 스케이트장이었다. 이곳도 안타깝게 남아 있는 것 하나 없이 찜질방 건물이 들어서 아쉬움을 남겼다.
“동대문 친구들이랑 자주 가서 놀았어요. 얼음 바닥 정리 시간이 되면 다들 스케이트장 밖으로 나가잖아요. 그때 매점에서 남학생들을 만나는 거예요. 일종의 즉석만남이요.(웃음) 음악소리가 들리면 스케이트장으로 가서 기차를 만들 듯 길게 늘어서서 같이 스케이트를 타기도 했어요.”
1964년 1월에 문을 연 동대문 스케이트장은 우리나라에 생긴 첫 실내 스케이트장이었다. 스케이트가 붐이었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스케이트를 타려면 논바닥이 꽝꽝 어는 겨울을 기다려야만 했다. 사시사철 얼음을 지칠 수 있는 실내 스케이트장의 출현은 일대 사건이었다. 오전 8시부터 밤 9시까지 연중무휴로 운영된 동대문 스케이트장은 성황을 이루다 롤러스케이트장의 출연과 다양한 놀이 시설 도입으로 경영 악화를 겪다가 여러 번의 폐점 위기에 봉착하더니 1990년대 중반 자취를 감췄다.
동대문 스케이트장 바로 옆에는 연예인들이 많이 살았다 하여 ‘연예인 아파트’로 불리던 동대문 아파트가 있다. 1965년 완공된 7층짜리 건물로 지은 지 50년이 넘은 이 아파트는 지금까지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당시만 해도 고급 아파트였던 동대문 아파트는 중앙정원형으로 지붕이 없는 형태로 요즘 건축 양식에서는 보기 드문 구조로 만들어졌다. 영화 숨바꼭질의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현존하는 아파트 중 두 번째로 오래된 동대문아파트는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창신동 일대 입학과 졸업 철이면 발 디딜 틈 없이 문전성시를 이루던 진고개 식당을 끝으로 박혜경 동년기자와의 데이트를 마무리했다. 창신동 이곳저곳을 거닐며 아이처럼 좋아하던 박혜경 동년기자의 웃음소리가 지금까지도 들리는 듯하다. 창신동에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도 많지만 여전히 남아 함께 숨 쉬고 있는 것도 많다. 동대문 아파트도 그렇고 백남준의 생가를 복원한 백남준 기념관, 곳곳에 옛집들도 남아 있다. 창신동의 추억이 있는 독자라면 날씨가 풀리는 어느 날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산책 나가 보시기를 권한다.
사랑하는 스승을 하늘로 떠나보낸 제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여느 해 같았으면 활기찬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분위기는 엄숙했고, 숙연했다. 간간이 웃음소리가 들리지만 길지 않다. 한국 연극계 큰 별이고 원로였던 故 윤조병(1939~2017) 극작가가 살아생전 죽을힘을 다해 정성을 쏟았던 희곡교실의 마지막 수업 현장. 제자들은 조명 켜진 무대에 올라 객석을 주시한다. 아이 볼에 입꼬리 닿는 것처럼 해맑게 웃던 윤조병 선생이 저만치 객석에 앉아 있지는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다시 한 번… 또… 바라본다.
배우 입김을 불어넣은 희곡, 무대에 오르다
과천시설관리공단의 ‘극장에서 쓰는 희곡’ 프로그램은 2006년부터 매년 진행하고 있는 글쓰기 교실이다. 말 그대로 연극의 주재료이면서도 기초인 희곡을 극장에서 배우며 써보는 특별한 수업. 과천시민극장의 상주 단체인 극단 모시는사람들(대표 김정숙)과 함께 기획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작년 12월 5일 과천시민극장 소극장에서 가진 낭독회를 끝으로 2017년 전 과정을 마무리했다. 23명의 수강생 중 총 10명의 희곡이 낭독회 무대에 올랐다. 극단 모시는사람들의 배우 3명(문상희, 신문성, 이재훤)과 수강생이 무대에 나와 앉아 배역을 나눠 실제 연기하듯 희곡을 읽었다. 세월호를 주제로 한 ‘갈매기가 전해준 편지(현재경 작)’를 시작으로 그로테스크한 반전이 돋보이는 ‘어디만치 왔어요(박수자 작)’, 노부부의 허망한 이별을 다룬 ‘늦은 오후에 병을 만나니(김영희 작)’, 연천 GOP 총기난사 사건을 생각하게 만드는 ‘나는 GOP 병장입니다(정진영 작)’ 등 작가 10명의 작품이 무대 조명 아래 빛을 발했다. 다양한 주제와 각기 다른 연령에서 담아낸 작품은 전문가 못지않았다. 글을 꾸준히 써야 하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재수강이 가능해 오랜 시간 희곡을 쓰고 배우면서 나날이 성장한 결과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희곡을 알게 되고 또 작가로도 활약하는 수강생도 꽤 되는 내공 깊은 글쓰기 모임이다.
극작가 윤조병의 후학(後學)이 꽃피다
이날은 수강생의 희곡 발표와 함께 그리움을 나누는 시간으로 이루어졌다. ‘극장에서 쓰는 희곡’ 교실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극작가 겸 연출가 윤조병 선생이 마지막 수업 한 달여를 남기고 타계했다. 윤조병 선생은 수업이 하고 싶은 마음에 진통제를 먹어가며 최선을 다한 진정한 스승이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극작가의 꿈을 꾸는 제자들에게 용기 북돋워주는 말은 물론이고 거침없는 독설까지 뱉어내면서 애정과 열정으로 가르쳤다. 제자들은 스승이 위독하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희곡을 써내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가르침을 받고 싶어서였다. 희곡교실 전체가 슬픔에 빠지고 말았다. 제자들은 침통해했고 상황을 버거워했다. 이날 낭독에 앞서 추모글을 읽은 현재경 씨는 “선생님이 돌아가신 이후 글 한 줄을 적을 수 없었다”며 애끊는 마음을 전했다.
2011년부터 돌아가시기 전까지 열두 번의 강의를 한 윤조병 선생. 이를 통해 제자 240명을 만나 희곡을 가르쳤고 함께 성장했던 노장이자 현역 극작가였다. 윤조병 선생 사후 그가 각색한 연극 ‘위대한 놀이’가 한국연극평론가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연극 베스트3에 올라 죽어서도 이름을 남긴다는 말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윤조병 선생은 드라마센터연극아카데미 1기 출신으로 극작가 노경식과 함께 유치진, 차범석의 계보를 잇는 한국 사실주의극의 계승자였다. 윤조병 선생을 대신해 남은 수업을 진행해온 극단 모시는사람들의 김정숙 대표는 이날 인사말을 통해 “윤조병 선생님이 틀림없이 이곳 어딘가에서 앉아 여러분이 갈고닦은 보석 같은 작품을 함께 들어주실 것”이라면서 “밑거름이 돼주신 선생님이 더욱더 생각나는 밤”이라고 눈시울을 적셨다.
조용한 가운데 낭독회를 마친 수강생들은 시원섭섭한 마음과 함께 윤조병 선생을 회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수강생 강수정 씨는 “살아오면서 글 쓰는 사람을 많이 만났는데 작가라고 부르고 싶은 한 사람이 윤조병 선생님이고, 글쓰기를 즐길 수 있게 가르쳐주신 그분이 오늘 많이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 현역 극작가인 정승진 씨는 “2015년부터 희곡교실을 다닌 덕에 희곡을 쓰며 살고 있는 것에 감사드리며 거짓 없는 글을 쓰겠다고 마음속으로 선생님과 약속했다”고 밝혔다.
살아생전 마지막 수업 날 몸이 너무 아파 목에 뭐가 넘어가지 않는다며 힘들어하던 윤조병 선생. 앉아 있기도 힘든 상황에도 끝까지 수업을 이어가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 라이프@이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소개하고 싶은 동창회, 동호회 등이 있다면 bravo@etoday.co.kr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인아야 앞으로는 나를 '코델리어'하고 불러줘. 알았지."
"알았어 엄마. 내가 엄마의 다이애나가 되어 줄게"
몇 달 전 나와 우리 딸의 대화 내용이다.
우리는 둘 다 빨강머리 앤을 좋아하고 있다. 나는 소설세대이고 딸애는 만화세대이다. 일본작가가 그린 빨강머리 앤의 그림들은 소녀들의 취향에 딱 맞기에 나와 우리 딸을 그 그림 속에 퐁당 빠트렸다.
소설 '빨강머리 앤' 은 캐나다의 몽고메리 여사 작품이다.
'빨강머리 앤'은 고아이지만 감성이 풍부하고 씩씩한 소녀이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인 '앤'이 아무래도 너무 평범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느 날 그녀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코델리어'로 불러주기를 주문했다. 다이애나는 그녀의 단짝친구 이름이었다.
<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빨강머리 앤 귀여운 소녀
빨강머리 앤 우리의 친구 >
지금도 나는 고아소녀 빨강머리 앤의 주제곡을 가끔 부르며 추억에 젖어보곤 한다. 그녀는 내 10대를 행복하게 해준 행복의 아이콘이다.
"와우! 빨강머리 앤이다!"
얼마나 좋았던지 지금도 50년전 그때의 감격을 잊지 못하겠다.
내가 빨강머리 앤을 만난 것은 서둔야학 3학년 시절인 1967년 봄이었다. 야학 운동장에 서있는 내게 조용민 선생님이 야학에 오시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손에 건네주셨다. 선생님께 인사를 하며 살펴보니 선생님 손에 책들이 있는 것이었다. 책을 광적으로 좋아하던 나였다. 금세 호기심으로 긴장됐다. 저게 무슨 책일까? 다섯 권으로 되어있는 소설 빨강머리 앤이었다. 아직도 잉크냄새가 가시지 않은 듯한 새 책이었다. 그때까지 거의 새 책을 만져보지 못했던 내게 그것은 엄청난 기쁨이었고 감동이었다. 야학생들을 위해서 새 책을 선물해 주신 조 선생님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책 선물을 받아들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내게 조 선생님은 웃음이 얼굴 가득 환하게 웃으셨다. 나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순수한 앤이라는 캐릭터에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단번에 다섯 권을 다 읽어버렸다.
그해에 서울대 농대 농교육과 신입생으로 입학하신 조용민 선생님은 야학생들에 대한 사랑이 유난히 깊으신 분이라서 우리들도 모두 그 선생님을 많이 따르고 좋아하고 있었다.
소풍날이었다.
한해 후배인 명희는 눈은 샛별 같이 빛났고 코가 오똑한 예쁜 소녀였다. 그러나 그 애는 골수염으로 다리를 절었다. 노래를 끝낸 그 애에게 선생님들과 우리들은 가엾어서, 동정심으로 ‘잘했다’고 칭찬 해주며 손바닥이 따갑도록 박수를 쳐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눈치 없게도 정말 자기가 잘해서 칭찬해 주는 줄 알고 거푸거푸 자기만 계속 노래를 부른다고 하여 그 애를 보기가 참으로 딱했고 선생님들 뵙기가 민망했다.
그날 명희가 소풍을 따라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조용민 선생님 덕이었다. 가장 어린 축에 속하면서도 병마와 싸우느라고 가엾을 정도로 몸이 말라 있었던 명희는 힘이 들어서 쉬엄쉬엄 걸어야 했기에 소풍을 따라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안쓰럽게 생각하신 조 선생님이 야학교에서 칠보산까지의 20리가 넘는 왕복 길을 기꺼이 업어주셨다. 시간을 보시려면 늘 바지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서 보시던 조 선생님이었다. 당신 자신도 너무 마르셨던 조 선생님의 손목이 견디기에는 시계가 너무 무거웠던 것이다. 그리고 등가죽과 배가 거의 맞붙어버리다시피 했던 선생님은 허리가 너무 없었기에 수업 중에도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연신 추켜올리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 선생님 몸 어디에 그런 힘이 숨어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국사 선생님이었던 조 선생님은 시에도 관심이 많으셔서 한용운 시인의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이나 신석정시인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와 변용로 시인의 '논개'등을 칠판에 적어주시곤 하셨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 - 논개 중 -
나는 강렬한 색채의 대비로 내 가슴에 깊게 각인되던 논개의 애국심이 눈 부시게 아름다웠다.
후에 조 선생님은 말하셨다.
야학생들의 수업이 끝날 때쯤에는 일부러 상록사에서 나와 야학에 가서 야학생들과 합류하곤 하셨다고. 우리들이 집에 갈 때는 연습림 골짜기에 노래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지곤 했다. 선생님들과 제자들이 같이 '바위고개' '가고파' '고향생각'등의 우리 가곡이나 '메기의 추억' '아름다운 꿈'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 등의 미국민요를 부르며 연습림 오솔길을 걸어서 집에 가곤 했던 것이다. 조 선생님은 그 시간이 너무 좋으셨단다. 선생님의 야학수업이 없는 날도 우리들과 그 시간을 함께하고 싶어서 야학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야학에 가곤 하셨단다. 나도 그 시간들이 내 가슴에 가장 아름답게 회상되는 부분이다.
58개띠들이 하면 유행이 된다. 폭발적인 우리 사회 인구증가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58년생들은 사회 변화와 유행을 주도한, 지금으로 치면 ‘완판남’·‘완판녀’로 부를 수 있는 세대다. 그들의 문화적 파괴력은 굉장했다. 여러 분야 중 특히 여행과 관련한 58개띠들의 문화주도도 눈여겨볼 만하다. 빈궁에서 벗어나 경제성장의 혜택을 보기 시작한 이들은 다양한 여행을 경험해나갔다.
1978년. 58개띠들이 만 스무 살이 되던 해. 당시 8월 17일자 경향신문에는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실린다. ‘바캉스 파장 … ‘고요’ 되찾는 산하, 연인원 5천만 기록’이라는 제하의 기사는 당시 여름휴가를 위해 산과 계곡, 바다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렸는지를 증언한다. 재미있는 내용 중 하나는 작년 대비 피서객이 40% 늘었다는 대목이다. 예년보다 높은 기온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성인이 된 58개띠들이 피서객 증가에 한몫하지 않았을까.
당시에도 제주도는 관광지로 인기가 좋았다. 평소 600석 내외로 운영되던 서울-제주 간 항공편은 피서기간에는 1000석 이상으로 증편돼 관광객을 실어 날랐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탓인지 다음 해인 1979년, 철도청은 고급여행을 원하는 관광객을 위해 새마을호 객차 확충을 서둘러 진행했다.
물론 58개띠들이 여행 보따리를 맘껏 싸기 시작한 원인에 경제성장의 수혜도 빼놓을 수 없다. 1977년은 우리 경제의 상징적인 시기였다. 1인당 GDP가 처음으로 1000달러를 돌파해 1034달러를 기록했고, 수출 역시 최초로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배고픔은 점차 잊히고 있었다.
가장 원하는 신혼여행지는 ‘제주도’
그렇다면 58개띠들의 신혼여행은 어땠을까. 통계청이 2011년 발표한 ‘최근 30년간 초혼자료 분석’에 따르면, 1981년의 남성 초혼 연령은 26.4세, 여성은 23세로 나타났다. 이를 바탕으로 유추해보면 58개띠들의 결혼이 이뤄진 시기는 이들이 23세에서 26세를 지낸 1981년에서 1984년 사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1982년 5월 27일자 동아일보에는 당시 젊은이들의 신혼여행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사가 등장한다. 한국갤럽이 18세 이상의 남녀 121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가장 많이 다녀온 신혼여행지는 부산(21.6%), 경주(12.6%) 순이었다. 아무래도 비용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제주도는 3위(12.2%)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재미있는 것은 순위에 자리 잡고 있는 ‘서울’의 존재다. 당시 지방 거주민들에게 서울은 충분히 매력 있는 여행지였다. 신혼여행으로 서울을 선택한 이들은 5.4%나 됐다.
가고 싶은 신혼여행지로는 역시 제주도(46.5%)가 가장 많이 꼽혔고, 당시 왕래가 여의치 않았던 외국을 꼽은 이들도 13.1%나 됐다. 3위는 설악산(11.8%)이 꼽혔는데, 다녀온 여행지에서 7위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높은 수치다. 설악산이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말. 1978년 진갑을 맞은 박정희 대통령이 선택한 관광지도 개발이 막 시작된 설악산이었다.
해외여행 자유화로 ‘천지개벽’
58개띠가 해외 땅을 밟은 것은 ‘여행’보다 ‘일’이었다. 물론 해외 출장이라고 쉬운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 고위직 공무원이나 주요 기업의 임원이 해외 출장이라도 나가면 모두 기삿거리가 됐다. 그만큼 해외 방문은 쉽지 않았다. 출장이 목적이어도 회사의 매출 규모가 낮은 기업은 여권을 받기도 어려웠던 시절.
중동에서 일어난 건설 붐은 58개띠들의 해외 구경의 좋은 구실이 됐다. 굳이 따지자면 58년생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말까지 일었던 중동 붐의 막차를 탄 세대다.
1985년 해외로 나간 한국인은 약 48만 명이었다. 일본과 미국을 방문한 이가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사우디아라비아가 많았다.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결과다.
서울올림픽 개최 다음 해인 1989년이 되면서 전 국민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졌다. 1983년만 하더라도 50세 이상인 사람이 관광예치금을 200만 원 이상 맡겨야 관광여권을 받을 수 있었지만 매년 대상 연령이 낮아지다가 1989년에 완전 자유화가 이뤄졌다.
해외여행 자유화는 우리 사회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1990년부터 신문 지면에는 ‘배낭여행족’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고, 즐겨 찾는 신혼여행지는 제주도에서 태국이나 필리핀으로 바뀌었다.
세운상가 외제장사 아시나요?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 해외 출장 근로자들의 부업 중 하나는 바로 소니와 산요로 대표되는 일본 가전제품을 내다 파는 일이었다. 이들이 면세점 등에서 구매해 들여온 카메라, 오디오, 전기밥솥 등은 세운상가 상인들에게 늘 환영받았다.
그러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지면서 소비자들이 해외에서 직접 물건을 사갖고 들여오는 문화가 확산됐다. 이런 문화의 아이콘으로 ‘코끼리 밥통’이 있다. 일본 조지루시 전기밥솥은 밥맛이 좋다고 입소문을 타면서 고소득층 사이에서 필수품 대접을 받았고, 점차 대중화되어갔다.
매일경제신문은 1992년 광복절 ‘일제선호 불치병인가’란 기사를 통해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일본 버블경제의 거품이 꺼져가면서 가전제품 상점가가 몰려 있는 아키하바라역 인근 가게들은 불황을 겪고 있지만, 한국 관광객들이 너도나도 밥통 등 가전제품을 사주는 덕에 상권이 유지되고 있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다. 최근 중국 관광객 유커들이 백화점에서 한국산 밥통을 사재기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당시 58개띠들의 나이는 34세였다. 김포공항 입국 수속 행렬에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을까.
당시 신문에 게재된 해외여행 광고를 보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도 일본, 미국, 동남아로 지금과 차이가 나지 않았고, 도쿄 4일 여행상품이 70만 원 선, 필리핀 4일 여행 상품이 48만 원 선으로 가격도 비슷하다. 다만 다른 부분이 있다면 중국 관광의 유무다. 58개띠들이 중국 관광지를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1994년 중국여행 전면자유화 이후부터다.
[추억 한토막] 대전역 가락국수 맞먹는 앵커리지공항 우동의 추억
경부선과 호남선이 지났던 대전역. 선로가 붐비고, 대기시간이 길었던 탓에 대전역 승강장의 가락국숫집은 승객들이 꼭 들러야 하는 명소가 됐다. 비행기 여행과 관련해서도 대전역 가락국수와 비슷한 추억의 공항이 있다. 다소 엉뚱하게도 미국 알라스카 앵커리지공항이 그곳이다.
대한항공이 1975년 서울-파리 여객노선을 개설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과 유럽 노선이 늘기 시작하면서 앵커리지 공항은 상당수 여객기가 들러야 할 경유지였다. 당시 여객기들의 비행거리가 짧았고, 냉전으로 인해 소련 영공을 지날 수 없었기 때문에 필연적인 절차였다. 이런 사정은 일본도 마찬가지. 버블시대 해외 여행객이 폭발적으로 늘었던 일본의 항공사들도 이곳을 들러야 했다.
환승보다는 급유의 목적이 컸기 때문에 앵커리지에서 머무는 시간은 짧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 해외 출장이 잦았던 상사맨들이나 항공사 관계자들은 당시 앵커리지의 추억을 기억한다. 항공사 승무원으로 근무했던 안영희 동년기자는 “한 시간은 있어야 했는데 승객들이 딱히 할 만한 것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면세점들이 장사가 잘됐죠”라고 설명한다.
이 공항에서 인기가 가장 높았던 매장은 바로 ‘우동’. 해외 왕래가 잦았던 한국과 일본의 ‘밀리언 마일러’ 사이에선 반드시 거쳐야 할 일종의 성지였다. 일본의 몇몇 사이트에 남아 있는 기록의 편린을 맞춰보면, 앵커리지 우동은 주인이 두 번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 주인은 미국계 일본인으로 육수 제작과 제면을 직접 하는 정통파여서, 본토 일본인들도 인정할 정도였다고. 가격은 10달러 내외로 비싼 편이었다. 지금도 일본에선 ‘앵커리지 우동’이란 단어는 여행지에서 만나는 수준 높은 우동집을 칭하는 대명사처럼 통용되고 있다.
장사가 잘되자 한 항공사 자회사가 주인을 밀어낸다.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 물론 우동은 인스턴트로 바뀌었다. 냉전의 종말과 항공기 성능의 향상으로 앵커리지 경유 노선이 줄자 이 우동집은 한국인 사업가에게 넘어간다. 맛도 한국식으로 변했고, 단무지는 별매여서 원성을 사기도 했다.
대한항공에서 정년퇴직한 정용진 기장은 “당시 조종사들 사이에서 앵커리지공항의 우동은 자주 언급될 정도로 유명했어요. 우동과 함께 팔았던 연어 고기도 한국에선 구하기 힘든 물건이어서 인기가 많았죠”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취기가 오른 탓일 수도 있겠지만 나의 피아노 선제공격이 먹혔다. 임수정이 바로 옆에서 노래하고 내가 피아노 반주를 했다. 이슬 같은 여자 임수정과 참이슬을 마주하고 흥이 돋는 밤을 보냈다.
“무작정 당신이 좋아요~ 이대로 옆에 있어주세요~” 이 노래가 TV에서 흘러나올 때 나는 가사 그대로 무작정 임수정이 좋아 죽었었다. 이 노래가 하루에도 몇 번씩 라디오로 흘러나오던 그녀의 전성기 시절 피가 끓는 청년 이봉규는 마치 그녀가 나에게 옆에 있어 달라고 애타게 원하고 있는 줄 착각하고 입을 헤~ 벌리고 넋을 놓은 적이 많았다.
중년이 되어서도 “임수정은 어디서 뭘 하고 지낼까?” 궁금했다. 그러던 중 몇 년 전에 배철수가 진행하는 ‘콘서트 7080’에 오랜만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을 보곤 깜짝 놀랐다. “아니 어쩜 나이를 먹어도 아직도 이슬 같은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까?” 오늘 임수정을 만나고는 입이 다물어지질 않는다.
조그만 선술집에서 만나자마자 그녀에게 대뜸 물었다. “아직도 이슬 같은 비결이 뭡니까?” 그녀는 그런 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서일까? 담담한 표정으로 “‘참이슬’을 많이 먹어서 그래요”라고 받아치며 소주병을 능숙하게 흔들고 딴다. 정확한 주량은 말하지 않았지만 “남들 마실 만큼은 마신다. 어지간해서 잘 취하지 않는다”고 믿기 힘든 말을 던진다. 의아한 반전에 한량 이봉규도 움찔하고 말았다.
이렇게 시작한 술자리가 2차까지 이어지면서 한바탕 무르익어갈 무렵에서야 눈치를 챘다. 술도 약한 편은 아니지만 정신력이 강해서 절대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질 않는다는 걸. 임수정 같은 아름다운 여인이 술자리에서 흐트러지면 늑대들은 아마 제정신 차리기 힘들 것이다. 어려서부터 약간 틈만 보이면 자신에게 남자들이 달려든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본능적으로 자기방어가 몸에 배어 있다. 특히 술자리에서는 더욱 철저하다. 인터뷰하는 나와의 술자리도 매니저인 그녀의 사촌 동생이 옆자리에 딱 붙어서 경호했다. 매니저가 사촌 동생인 점도 아마 철저한 자기관리의 하나일 것으로 짐작된다.
여전히 매력적인 임수정
이자카야에서 소맥 폭탄주로 한껏 흥이 오른 우리는 2차로 피아노가 있는 라운지로 자리를 옮겼다. 젊은 시절 꿈에 그리던 임수정을 바로 앞에 앉혀놓고 나는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취기 때문에 용기를 냈지만 내심 그녀에게 피아노를 치는 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평소 TV에서 도발적인 톤으로 윽박지르는 이봉규의 거친 표정을 많이 보아왔던 임수정은 놀란 토끼 눈으로 쳐다보면서 나의 노래를 경청했다. 내친김에 그녀를 무대로 불러냈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른 탓일 수도 있겠지만 나의 피아노 선제공격이 먹혔다. 그녀가 바로 옆에서 노래하고 내가 피아노 반주를 했다. 네다섯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던 20여 명의 손님들은 환호했다. 나의 손놀림은 평소보다 더 들떴고 힘이 들어갔다.
가슴은 뿌듯했고 온몸의 마디마디는 ‘연인들의 이야기’ 음절에 따라 춤췄다. 노래가 끝난 후 박수가 터져 나오자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멀리 떨어진 바텐의자에서 슬며시 웃으며 박수 치는 내 아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인터뷰하면서 나는 임수정에게 내 아내를 소개했고 아내는 인터뷰에 방해되지 않도록 저만치 바텐의자에 앉아 관람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임수정도 무장해제하고 나와 2차까지 상당히 마실 수 있었고 또 노래까지 부른 것이다. 대중가수가 조그만 라운지에서 노래를 한다는 것은 큰 인심을 쓴 것이나 마찬가지. 나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고 거기 오신 손님들에게 엄청난 서비스를 제공한 셈이다. 어쨌거나 그날 밤은 황홀한 밤이었다.
그녀는 왜 갑자기 사라진 걸까?
임수정은 여고 재학 중 미인대회에서 포토제닉상을 수상하면서 모델로 먼저 데뷔했다. 모델 활동을 하면서도 그녀는 가수와 배우를 하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러던 중 작곡가 계동균을 만나면서 그녀의 인생이 달라졌다. 계동균과 작사가 박건호 두 사람은 임수정의 외모와 음색에 딱 어울리게 남성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노래를 만드는 데 의기투합했다.
1982년 서라벌레코드에서 발매된 앨범의 타이틀곡 ‘연인들의 이야기’ 연주곡이 그해 방영된 KBS2 드라마 ‘아내’의 OST로 삽입되었는데 발칵 뒤집혔다. 드라마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자 방송국에 이 노래에 대한 전화와 편지 문의가 빗발쳤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와 두 명의 여성이 엮어가는 기구한 스토리가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데 ‘연인들의 이야기’ OST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앨범은 발매 몇 달 만에 30만 장이 넘는,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음반 판매 기록을 세웠다. 뒤돌아보면 미처 준비도 안 된 임수정에게 벼락스타의 자리는 쉽지 않았다. 그녀는 이와 관련해서 “한번은 탤런트 강부자 씨가 슬픈 노래인데 왜 웃으면서 노래를 하느냐고 핀잔을 줄 정도로 준비가 안 됐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이제 나이를 먹고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니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런 시절을 겪고 난 후 임수정은 노래나 삶의 철학이 원숙해졌다. “최근에 강부자 씨를 만났더니 노래가 확 달라졌다고 칭찬을 해줬다”며 자신을 스스로 평가했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당시에는 별의별 소문이 난무했다. 배우 정윤희와 맞먹는 외모의 소유자이고 한창 인기를 누리던 임수정이 갑자기 사라졌기에 호사가들은 소설을 쓰면서 입방아에 올렸다.
그녀가 사라진 이유는 정작 따로 있었다. 당시 임수정에게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이 한꺼번에 밀어닥쳐서 젊은 나이에 감당할 수 없었다. 일종의 현실세계로부터의 도피였다. 30만 장의 앨범이 팔려나간 ‘연인들의 이야기’에 이어 1985년 ‘사슴 여인’이란 곡을 내놓았는데 그 가사가 문제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나는 밤거리에서 사랑을 먹고 사는 사슴 여인”이라는 가사가 직업여성을 뜻한다며 방송사 심의에 걸려 노래가 전파를 탈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무렵 임수정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여기에 레코드사 이적 문제까지 복잡하게 얽힌 것이 결정타였다.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한꺼번에 몰아닥치면서 여린 성격의 임수정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모든 걸 다 던지고 1989년 미국으로 떠났다. 그녀는 자신의 음악성에 대한 비판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에 대해서도 견디기 힘들었다. “너무 비주얼만 강하고 오디오가 약하지 않느냐?”는 말을 감당하기엔 어린 나이였고 마음의 상처가 깊었다. “고생 끝에 정상의 자리에 올라간 분들은 소중하게 그 자리를 지켜내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정상에 올라가다 보니까 소중함을 잘 몰라서 공백기를 갖게 된 것 같아요”라고 그녀는 나이를 먹은 지금 뒤늦게 밝히고 있다.
제2의 전성기를 꿈꾸고 있다
사실 임수정은 뛰어난 가창력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청순한 목소리와 그녀만의 독특한 비브라토(vibrato)는 상당한 음악적 가치가 있었다.
임수정이 가창력이 없다는 비판은 일종의 어깃장이다. 음악에 정석이 어디 있을까? 어떤 목소리와 창법이 노래를 잘하는 것일까? 수치로 계량화된 것도 없고 그저 당시의 유행과 통론에 치우쳐 마음에 안 든다고 비판하는 군중심리의 일종이다.
임수정의 ‘연인들의 이야기’가 대중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니 그녀의 실력을 인정해줘야 한다. 대중이 선택한 음악이고, 대중이 사랑한 가수다. 거기에다 이슬 같은 청초한 외모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임수정의 매력이다. 음악의 선진국이라는 미국과 유럽에서도 가수의 외모는 아주 중요한 자산으로 여긴다. 심지어 스포츠인과 정치인의 외모도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임수정은 제2의 전성기를 꿈꾸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추억을 무너트리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20대 때 제 모습을 기억하시는 분들에게 실망을 안겨드릴까봐 많이 망설였지만, 팬들이 ‘감성가수’ 하면 ‘임수정’ 하고 바로 인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제 꿈이에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노래를 제대로 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고 예쁜 얼굴은 더 상기되었다.
100세 시대다. 팬들도 나이를 먹고 가수도 함께 나이를 먹는다. 70세에 아직도 전 세계 무대에서 매력을 발산하는 ‘올리비아 뉴튼 존’보다 임수정은 열다섯 살이나 어리다. 그녀의 전성기는 이제부터다.
2017년 대한민국을 강타한 트렌드 키워드는 바로 ‘욜로(YOLO)’다. 욜로는 ‘You Only Live Once’의 약자로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니 인생을 즐기라는 의미다. 욜로와 관련한 방송과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고 말 그대로 욜로 열풍이 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직장과 사회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어느 날 다가온 ‘욜로’라는 용어는 마치 구세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들은 지금까지 부모와 상사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살아가는 욜로의 삶을 추구한다. 대한민국의 욜로 현상이 삶의 원동력이 될지는 바로 오늘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유행처럼 번졌던 단어가 있다. 바로 ‘웰빙’과 ’버킷리스트’다. 그러나 앞만 보고 달려온 삶을 살아온 기성세대에게 웰빙과 버킷리스트는 사치처럼 느껴졌다. 이들이 잠깐의 휴식을 취할 수는 있겠지만 다시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하는 현실에서 또 다른 삶을 선택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현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욜로(YOLO)는 인생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해주는 주제다. 결단하듯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을 떠나거나 퇴직금을 몽땅 털어 자녀 셋을 데리고 세계일주를 하는 등 욜로의 삶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잠깐의 휴식 개념에서 벗어나 인생은 단 한 번뿐이라는 명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에서 진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 실천하는 문화가 시작된 것이다.
반면, 욜로를 잘못 해석한 사례도 있다. 한 번뿐인 인생이라고 생각해 너무 쉽게 삶을 생각하거나 과한 소비를 하는 행위가 그것이다. 특히 경제적 개념이 아직 많이 부족한 젊은 세대들에게 욜로식 소비는 위험해 보이기까지 한다. 욜로 열풍은 각종 방송 매체와 기업의 마케팅 수단이 되면서 젊은이들의 지갑을 열게 하는 ‘문화적 마케팅 기법’으로 전락했고 욜로족을 위한 여행상품, 욜로족 핫아이템, 욜로 전용상품 등이 연일 출시되고 있다.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소비를 조장하는 분위기다. 이들은 어차피 혼자 살아가는 삶을 선택한 경우가 많아 집을 구매할 생각도 결혼할 생각도 없다. 오로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돈을 쓰며 마치 미래가 없는 사람들처럼 소비를 한다. 혹자는 이들에게 ‘욜로 욜로 하다가 골로 간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욜로는 젊은이들만 유행처럼 따르는 현상은 결코 아니다. 욜로 라이프의 의미를 좀 더 들여다보면 자신의 내면 목소리에 집중하며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큰 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욜로가 젊은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액티브 시니어에게도 적합한 키워드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은퇴를 앞둔 남성들에게 미래를 그려보라고 하면 대부분 과거의 화려한 경력과 추억을 회상하며 꿈을 제대로 그리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함께 생활한 아내에게 미래를 그려보라고 하면 대부분 자신이 정말로 살고 싶었던 삶을 멋지게 그려낸다. 그동안 억누르고 참아왔던, 그리고 이루고 싶었던 진짜 삶을 당당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욜로다. 부모와 자녀, 그리고 환경에 영향받지 않고 남은 인생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면서 보내는 삶이 바로 욜로의 삶이다. 이러한 삶은 돈이 크게 필요하지도 않다. 스스로 선택한 삶이기 때문에 돈에 얽매이기보다는 원하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욜로의 삶을 제대로 즐긴 사례를 살펴보자. 투병 대신 미국 전역을 여행하며 여생을 마감한 91세 노인 노마 진 바우어 슈미트가 보여준 욜로 라이프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다. 노마의 남편은 어느 날 병원에 입원을 하고 이틀 뒤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자신이 자궁암 말기 암에 걸렸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항암치료를 받다가 세상을 마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죽음을 기다리기보다는 여행을 하겠다고 결심한다. 152cm 키에 45kg의 작은 체구를 가진 그녀는 수술 후 생존을 보장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11년간 미국을 여행 중인 캠핑여행가 아들, 며느리와 함께 여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페이스북에 여행 스토리를 남겼다. 그러자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좋아요’를 누르며 팔로우했고 그녀는 유명인이 되었다. 캠핑카를 타고 1년 넘게 미국 32개 주 75개 도시 2만1000km를 누빈 그녀는 여행 중 가장 좋았던 곳이 어디냐는 질문에 “지금 여기요”라고 대답했다.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지금 하고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이런 말도 남겼다. “사는 게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어요. 당신이 원하는 걸 하세요. 하고 싶다고 느껴지는 일을 하면 됩니다. 그게 전부인 거죠.” 이제는 생을 마감한 그녀가 남긴 한마디는 오랫동안 사람들 가슴속에 남았다.
욜로족의 직업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프리터족은 영어의 프리(free, 자유)와 독일어의 아르바이터(arbeiter, 노동자), 그리고 한자 족(族, 같은 부류)의 합성어로 1980~1990년대 일본에서 만들어진 신조어다. 집단에 소속되는 것을 꺼리고 필요한 돈이 모아질 때까지만 일한 뒤 쉽게 떠나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다 해서 붙여진 말이다. 일본에서는 일부러 프리터의 삶을 사는 청년이 많다. 일본의 한 프리터족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파트타임으로 일하면 쓸모없어지거나 퇴물처럼 될 일이 없습니다. 파트타임으로 일하면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여유도 생기고, 내가 원하는 삶이 필요로 하는 돈만 버니 부담이 없고 행복합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세요. 돈은 자연히 따라올 거예요.”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면 딱 필요한 만큼만 벌게 되고 그만큼만 소비하게 되기 때문에 행복감이 커진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의 기준이 아닌 오직 자신만의 기준으로 삶을 살기 때문에 비교도 거부한다. 이들의 삶의 만족도는 생각보다 크다. 모든 삶이 똑같이 정시에 출발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모든 삶이 정시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딱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인생이다. 어떤 사람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 매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행복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늘 새로운 삶에 도전하면서 행복을 느낀다. 어느 쪽이 더 나은 삶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한 번뿐인 인생을 사는 것이니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살아봐야 하는 것이다. 돈을 위해, 그리고 일에 매달려 사는 삶은 어쩌면 도둑맞은 인생이다. 문제는 도둑맞은 삶을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깨닫는다는 것이다.
법정 스님은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늙음이 아니라 녹스는 삶이다. 인간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배우 남경읍(59)의 경력을 보니 그가 처음 뮤지컬을 한 것은 이라는 작품으로,
어언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야말로 한국 뮤지컬 1세대라고 불리는 게 당연할 수밖에 없다. 그 후로도 그는 꾸준히 뮤지컬 활동을 하며 척박했던 뮤지컬 장르를 지금의 보편적 문화계로 올려놓는 데 기여했다. 또한 수많은 연극과 영화, 드라마에서의 활약으로 정통 연기자로서의 자신을 각인시킨 그는 얼마 전까지 연기를 가르치는 교육자로서의 삶도 살았다. 여러 사이클을 거쳐 앞으로의 10년을 위한 연기자로서 다시 현장에 선 그에게 삶과 사람에 대해 물어봤다.
기자가 배우 남경읍을 다시 만나게 된 건 6년 만이었다. 최고의 전성기는 딱히 없지만 늘 힘이 나는 그래서 변함없이 차분하고 믿음을 주는 인상을 가진 그는 깊은 가을과 어울리는 남자였다. 드라마와 영화 뮤지컬을 동시에 종횡무진 활동 중인 그는 활발한 외부 활동과는 별개로 얼마 전 큰 아픔이 있었다. 한 달여 전, 어머니를 하늘로 떠나보낸 것이다.
인생을 바꿔준 어머니의 말씀
“원래 제가 재수할 때 연극영화과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음대를 가려고 했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연기를 할 테면 해보라고 말씀하셨죠. 회상해보니 초등학교, 중학교 때 연극을 했었거든요. 중학교 때는 대본이란 말도 몰랐는데 강감찬, 을지문덕, 이순신 등 위인들을 소재로 막 대본을 썼어요. 그걸로 집에 세트를 만들어서 동네 아이들과 연습도 했고. 그때 문경읍에는 녹음기가 없어서 점촌까지 나가서 녹음기를 사서 녹음해서 연습했어요.”
그는 어머니가 ‘남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고 말하던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돈은 있다가도 없는 것이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라고, 돈 벌려고 아등바등하는 건 남자답지 않다는 거였죠.”
1970년대의 보수적이고 고루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던 여자. 어머니의 그런 태도는 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항상 어머니께 감사해요. 그런데 동생인 남경주가 연기를 한다니까 어머니가 한 집안에 광대가 둘이나 있어도 되겠냐며 반대하시더라고요. 그때는 제가 설득했죠(웃음). 아들 둘을 배우로 만든 어머니는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받기도 했어요.”
“남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많은 아쉬움이 있을 듯했다. 그래서 어머니 얘기를 해도 될까 걱정했다.
“어머니가 생선장사를 하시며 혼자 4남 1녀, 5남매를 키우셨어요. 약사이셨던 아버지께서 고등학교 2학년 때 부도를 맞아 집에 못 들어오시고 밖에서 사셨기 때문이었어요. 전국을 유랑하며 글을 쓰면서 사셨던 한량이었어요. 집에는 1년에 한두 번 오셨고, 겨우 하룻밤 주무시고 떠나셨죠. 그래서 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어요.”
어찌 보면 어머니가 그에게 한 “남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는 말은 아버지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10여 년 전에 승천했다.
“아버지가 오시면 동생들이 아버지가 안 오셨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였어요. 우리를 잘 모르면서 간섭하는 아버지가 그저 불편하고 어색했으니까요.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제가 혼절할 정도로 난리를 쳤죠. 그런데 희한하게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눈물이 안 났어요. 정말 신기했어요.”
어쩌면 그것은 어머니의 삶이 서러움과는 거리가 먼, 후회 없는 삶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형제 우애가 돈독해지는 것 같아요. 어머니가 우리에게 준 선물이 아닐까 싶어요. 어머니는 아버지 고향인 경북 봉화에 묻혔어요. 아버지는 그동안 벽제에 있는 서울시립승화원에 계셨는데, 이번에 어머니와 합장했죠.”
소통하는 후배들과의 즐거운 만남
요즘 남경읍은 뮤지컬 에 열중하는 중이다. 루 월리스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우리나라 창작 뮤지컬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오랜만의 뮤지컬 복귀작이기도 하다.
“뮤지컬은 8년 만에 하는 거예요. 매우 아끼는 후배 연출자가 출연을 요청해서 대본도 안 보고 하겠다고 했죠. 작은 역이라고 했는데, 진짜 작은 역이긴 하더라고(웃음).”
그러고 보니 그는 널리 알려진 이미지와는 달리 생각보다 작품이 적다. 작품을 신중하게 고르는 성향 때문이다.
“1년에 한 개나 두 개 정도 해요. 이번 는 워낙 탄탄한 원작에 음악과 연출이 너무 좋아요. 관객 반응도 상당히 좋아서 설 연휴 기간의 공연은 매진이었고. 배우들도 고무돼서 즐겁게 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는 에 함께 출연하는 후배 칭찬을 이어나갔다.
“카이가 아주 인간성이 좋고 정말 열정적이더군요. 깜짝 놀랐어요. 민우혁도 참 멋있는 후배고요. 박민성은 노래를 얼마나 잘하는지, 무대 뒤에서 아이비하고 저하고 입 벌리고 보게 돼요. 무서운 후배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무서운 후배들을 이길 생각 말고 뒤처지진 말자고 생각하죠(웃음).”
신이 내린 계시, “까불지 마라”
지금은 탄탄한 중견 배우로서 입지를 굳혔지만, 여전히 힘든 순간은 있다.
“공연할 때 내가 생각한 대로 표현 안 될 때가 너무 힘들어요. 나는 배우로서 자질이 없다고 자책하고 면박하기도 하고. 내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 날이 있었는데 그날 정말 많이 울었어요. 그런데 그걸 극복하기 위해 결국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받아들이려면 무한 반복하는 수밖에 없어요. 무식한 방법일 수는 있어도 내가 한 만큼 나오니까.”
그는 발레리나 강수진씨가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의 예술세계는 끝이라고 말한 걸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위대한 것을 이룬 사람, 정말 대단한 예술가는 죽기 직전까지 반복해서 연습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가 신문을 며칠 치 모아서 서너 시간을 투자해 한 번에 읽는 편이거든요. 2000년 즈음에, 그렇게 신문을 읽다가 눈에 들어온 제목이 하나 있었어요. 80세 할아버지 피아니스트. 그분이 호로비츠였던가? 외국의 한 기자가 그가 연주를 쉬는 시간에 인터뷰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 80세 피아니스트가 휴게실에서도 계속 연습을 하는 걸 보고 물어봐요. ‘그렇게 평생 피아노를 치셨는데 휴게실에서도 또 치십니까?’ 그러자 피아니스트가 말해요. ‘왜? 난 요즘도 조금씩 느는 것 같아.’ 그때 제가 한창 교만했던 때였어요. 그런데 그 글이 마치 신이 내린 계시 같았죠. 까불지 말라고.”
이미 날짜가 지난 신문들에서 하필 그 제목만 눈에 들어와서 그에게 큰 감명을 줬다는 것은 어찌 보면 운명적인 순간이었다. 그는 그 순간 앞으로 평생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게 됐다.
“제자들에게도 말해요. ‘까불지 말라’고. 이 말이 저에겐 평생 갈 수 있는 심지가 된 셈이죠.”
같은 연기자로서 이해하는 딸
남경읍의 자녀는 외동딸 남유라 한 명이다. 그녀는 아버지와 같은 연기자의 길을 걷는 중이다.
“아직 메이저에서 활동하는 것은 아니에요.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했더니 그렇게 됐죠. 아내는 무용인이라 이쪽 길이 힘든 걸 알아서 딸이 연기하는 걸 반대했는데, 난 힘들어도 얻는 게 있다고 생각해서 찬성했어요.”
아버지와 딸 사이는 돈독하다. 조언과 대화도 많이 하고, 자신이 연기한 걸 보라고 보여주기도 하며 이쪽 계통 얘기들과 인생에 관한 얘기 등등을 지겨울 정도로 한다고 한다. 어쩌면 부녀 사이를 넘어서 같은 연기자로서의 끈이 서로를 잘 통하게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싶다.
“동생(남경주)은 작품을 같이 할 때는 대들기도 해요(웃음). 그런데 뭐, 끝나면 다시 잘 어울리고. 술 한잔하자고 만나자 하면 만나서 한잔하고.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보는 것 같네요.”
연출? 정치? 단칼에 거절한다
탄탄한 중견 배우인 그는 여러 연기 영역을 두루 거쳤다. 그에게 연출할 생각은 없는지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그는 바로 손사래를 치며 거부했다.
“내가 전문가가 아니에요. 우리는 감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니까. 저는 제 재능을 알기에 오로지 배우예요.”
그는 신뢰감을 주는 외모 덕분인지 유난히 정치하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항상 ‘노’다.
“단칼에 거절해요. 저는 장관도 국회의원도 못해요. 내가 나를 알기 때문에. 저는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이 일을 하면 즐거울 건가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돈은 아니에요. 그래서 돈을 못 모았지만(웃음). 하고 싶은 걸 하라는 어머니 말씀이 저에게 계속 남아 있어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돈에 대한 생각은 안 해봤어요. 내가 하고 싶은 걸 정말 최선을 다해 하다 보면 그만한 대가가 오겠지 하는 생각이었죠.”
물론 돈에 대해선 내려놨다는 그 말을 지키면서 만들어진 현실적인 고통들도 있었다.
“쌀이 없어서 라면을 먹은 적은 이루 말할 수도 없고 어머님 생신날에 차비가 없어서 못 간 적도 있고…. 그런데 그것 또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배우는 경험이 많을수록 배역을 잘 소화하게 되니까요. 슬프고 괴로운 경험이라 할지라도 도움이 될 것이고, 마음 한쪽에는 지나간다고 생각하죠.”
명불허전 진짜배기
남경읍은 올해로 59세다. 그도 작품을 하면서 자신이 나이 들었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힘이나 호흡 면에서 특히 그렇죠. 후배들과는 30년 차이가 나니까요. 비교하면 안 되지만 하게 되죠. 나도 한때는 체력 좋았지만 이제 환갑이라(웃음). 그런데 이순재, 신구 선생님은 80대이지만 활동하고 계시죠. 나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그분들은 하늘이 내린 배우라고 봐요. 그래도 70대까지는 활동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에게 사람을 알아보는 덕목에 대해 묻자 ‘처음과 끝이 같으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가 앞서 말한 죽을 때까지 연습하는 예술가와 같은 관점에서의 말이었다.
“사람이 위치에 따라 달라지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초심을 쉽게 잃죠.”
그렇다면 그는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 걸까 궁금해졌다. 이미 베테랑 배우에게 묻기에는 어색할 수도 있는 궁금증이었지만, 그만큼 그에게서 나오는 기운이 젊고 열정적이기 때문이었다.
“좋은 배우로 남고 싶죠. 그럼 좋은 배우가 뭐냐. 대본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캐릭터 역을 최대한 치밀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배우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디테일하고 완벽한 준비가 필요해요. 전쟁에서 쓸 총알을 만드는 일과 같죠. 그러다 보니 너무 바빠요. 그런데 그게 나의 취미이고 생활이자 특기, 원동력인 것 같아요.”
동년 기자로 활동한 지도 2년이 다 되어 간다. 매달 3편 이상의 글을 기고하려 노력하여 나름으로는 쾌나 많은 글을 썼다. 한 편의 글을 초안하고 나면 으레 맞춤법 검사를 하는 등 퇴고를 여러 번 거친다. 그런 과정을 2년이 가깝게 했으니 이제는 맞춤법에 달인이 될 만도 한데 또 다른 글을 쓰고 맞춤법 검사를 하면 여지 없이 틀린 단어나 문장이 맞춤법 검사기에 걸려든다. 예전에 틀려서 여러 번 고친 경험이 있는 단어가 또 걸려든다. 혼자 중얼거린다. “또 틀렸네, 나 참!” 나이가 든 탓으로 돌리며 혼자 웃곤 한다.
요즘은 여러 메신저와 SNS 등을 이용하면서 글을 쓰는 일이 더 빈번해졌음에도 맞춤법은 글을 쓸 때마다 꼭 검사한다. 필자만의 일일까? 과거보다 더 많아진 외래어나 신조어, 줄임말 등이 문장을 만드는 일을 까다롭게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맞춤법 내용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어 누구나 쉽게 틀릴 수 있지 싶다. 특히 SNS를 통한 글 작성을 쉽게 또는 대충 쓰는 버릇이 몸에 배어 더 맞춤법을 헷갈리게 한다. 온라인에 가볍게 쓰는 댓글 하나라도 맞게 쓸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독자를 위한 예의이고 성의 문제다.
자주 틀리는 맞춤법을 정리해보는 방법도 좋지 싶다. 다음과 같은 단어가 자주 혼동된다(괄호 속의 단어가 바른 표현이다). 금새(금세), 넓직한(널찍한), 몇일(며칠), 오랫만에(오랜만에), 어의없다(어이없다), 차돌배기(차돌박이), 희안하다(희한하다) 등이 그런 예다. 한글날을 맞아 취업포털 가 아르바이트 포털 과 함께 성인 남녀 853명을 대상으로 맞춤법에 대한 설문을 했다. 가장 혼동되는 맞춤법은 띄어쓰기 48.0%로 가장 높았고 “되/돼” 43.3%, “이/히” 24.2%, “왠지/웬지” 20.1%, “던지/든지” 18.7%, “않/안” 15.5% 등의 순이었다. 이 내용 중 띄어쓰기를 제외한 나머지 단어의 세부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성질이나 상태가 바뀌거나 변하다, 오거나 이르다, 행동이나 상태가 이루어짐을 나타내는 '되다'는 ‘되어’로 활용하며, 이를 줄여서 '돼'로 쓴다. 따라서 ‘되어’로 바꾸어도 틀리지 않는 경우에는 ‘돼’를 쓰면 된다.
부사의 끝음절이 분명히 '이'로만 나는 것은 '-이'로 적고, '히'로만 나거나 '이' 또는 '히'로 나는 것은 '-히'로 적는다. 예를 들어, ‘이’로만 나는 것은 ‘가붓이’, ‘깨끗이’, ‘나붓이’, ‘느긋이’ 등이고 ‘이, 히’로 나는 것은 ‘솔직히’, ‘가만히’, ‘간편히’, ‘나른히’ 등이다.
왜'는 '어째서, 무슨 이유로'를 뜻하는 부사로 '왠지'는 '왜인지'의 준말이다. '웬'은 '어찌 된, 어떠한, 어떤'을 뜻하는 관형사이다. '무슨 까닭인지'로 바꿀 수 있는 말에는 '왠지'를, '어떤'으로 바꿀 수 있는 말에는 '웬'을 쓰면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얼마나 덥던지’와 같이 과거를 회상할 때 ‘-던지’를 쓴다. 반면, ‘하든지 말든지’와 같이 둘 이상에서 하나를 선택한다는 의미로는 ‘-든지’를 사용한다.
‘않다’는 ‘아니하다’의 준말이다. ‘안’은 부정의 뜻을 지닌 부사이며, 앞뒤 단어와 띄어 쓴다.
확실하게 외워서 쓰는 사람도 없지는 않으나 자주 사용하지 않거나 기억력이 떨어지면 외웠던 내용도 가물거리기에 십상이다. 한자를 읽을 수는 있어도 자주 펜으로 쓰지 않아 잘 쓸 수 없는 현상과 닮았다. 필자는 번거롭지만, 글을 쓸 때마다 맞춤법 문법 검사기로 확인한다. 다행히 요즘엔 두꺼운 국어사전을 펼치지 않아도 간단히 온라인으로 검사할 수 있어 글쓰기에 편한 세상을 산다. 필자는 개인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한국어 맞춤법/문법 검사기(speller.cs.pusan.ac.kr)”를 주로 사용하여 도움을 받고 있다. 대표적인 한국어 맞춤법/문법 검사기로 부산대학교 인공지능연구실과 (주)나라인포테크가 함께 운용한다. 그외에도 네이버 맞춤법 검사기,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stdweb2.korean.go.kr), 다음 어학사전(dic.daum.net), 네이버 사전(dic.naver.com) 등 다양한 온라인 서비스가 있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