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국수는 냉면, 콩국수 등과 더불어 여름 하면 생각나는 면 요리다. 차갑게 먹는 음식인데도 도톰하고 부들부들한 메밀 면발이 입술에 닿으면 어쩐지 따뜻한 정이 느껴지곤 한다. 투박한 매력에 순수함까지 더한 순 메밀 100% 막국수 맛집 ‘메밀연가’를 소개한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카페나 레스토랑 같은 막국수의 명가
서울 강남구 롯데백화점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 ‘메밀연가’는 맛집으로 알려진 여느 막국수 가게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막국수나 냉면은 시원하게 한 그릇 뚝딱 먹고 가기 좋아 테이블 회전이 빠른 곳이 많은데, 이 때문에 사람이 북적거리고 소란스럽다. 그에 비해 메밀연가는 여유롭고 편안한 식사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곳에 다녀간 맛집 블로거들의 후기를 보면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막국수를 먹는 것 같다’고 하는데, 그러한 반응은 인테리어가 한몫했다. 앞마당 테라스가 돋보이는 하얀 2층 건물이 깔끔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고, 원목 테이블과 한쪽 벽면에 가득한 창문이 따뜻함을 더한다. 알고 보니 막국수집이 생기기 전에는 파스타를 파는 레스토랑이었다고 한다. 단체 룸도 있고, 2층을 통째로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에 모임이나 주변 회사 회식 예약이 많은 편이다. 막국수 외에도 보쌈, 홍어삼합, 숯불구이 등 여럿이 나눠 먹기 좋은 메뉴가 많다.
구수하고 담백한 순 메밀 100%의 맛
‘메밀연가’라는 이름답게, 주메뉴인 막국수는 직접 도정한 메밀을 갈아 반죽해서 뽑는 순 메밀면을 사용한다. 막국수를 파는 곳마다 메밀 함량이 다른데, 이곳은 100% 메밀이 특징이다. 몇몇 음식 평론가들은 순수하게 메밀만으로 반죽한 면발은 힘이 없어 툭툭 끊기기 때문에 식감이 덜하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대부분 밀가루를 첨가해 쫄깃하게 만든다. 그러나 오히려 연약한 면발이 주는 부드러움과 구수한 메밀향이 좋아 일부러 찾는 사람도 많다.
메밀이 들어간 메뉴는 동치미 막국수(9000원), 비빔 막국수(9000원), 들깨 메밀 칼국수(9000원), 메밀 꿩 만두(9000원), 메밀 곤드레 전병(9000원), 메밀전(1만원) 등이 있다. 메밀 싹 한방 보쌈(대 4만3000원, 중 3만8000원), 참숯숙성 홍어삼합(대 5만6000원, 중 4만8000만), 메밀 싹 숯불구이(대 4만5000원, 중 3만5000원) 등 요리도 막국수와 잘 어울린다. 편육, 메밀전병, 막국수를 함께 맛볼 수 있는 막국수정식(1만3000원)과 보쌈(밥+국), 꿩 만두, 샐러드, 명태식혜가 한 상에 나오는 보쌈정식(1만5000원)을 주문하면 다양한 메뉴를 조금씩 즐길 수 있어 좋다. 주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동 935-24
문의 02-2052-8700 영업시간 매일 10:00~23:00
변종경(卞鍾敬·68) 국일제지(주) 사장에겐 ‘촉’이 있다. 신규 사업을 하면 길이 열린다. 만년 적자에 허덕이던 기업도 그가 손을 대면 황금알을 낳는다. 사람들은 그의 촉을 부러워하고 타고난 기획전략가라고 인정한다. 그런데 그의 촉이 이번엔 제조업에 뻗쳤다. 60대 후반의 나이에 특수지 제지업체 국일제지(주)를 드라이빙하는 중책을 맡았다. ‘아직 제지업계 초보’라고 자신을 겸손하게 소개하는 그는 삼성맨으로서, 그리고 전문 경영인으로서의 경험을 살려 국일제지가 나아가야 할 길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안주하는 삶은 재미없다”고 말하는 그의 인생과 재미있는 일, 그리고 추구하고 있는 미래에 대해 들어본다.
변종경 사장의 이력은 화려하다. 서울대와 UCLA 대학원을 졸업하고 삼성물산 경영기획부장, 삼성그룹 비서실 임원, 사회공헌위원회 부사장 등 삼성맨 시절을 거쳐 삼부토건그룹 계열 (주)신라밀레니엄 대표이사 등을 역임한 그는 올해 초 국일제지(주) 사장으로 선임됐다.
‘고희록’ 써 경험과 지혜 전수하고파
사장으로 취임할 때 마침 그의 나이는 60대 후반에 들어섰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은퇴해도 여러 번 은퇴했을 나이, 그는 김형석 교수의 말을 빌려 이제야 자신이 전성기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원로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96세의 나이에도 강의 등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65~75세의 나이가 쓴맛 단맛 다 보고 인생의 소중함을 음미할 수 있는 인생의 황금기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지금 김형석 교수가 말씀한 인생 황금기에 3모작을 하고 있어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는 종전에는 매주 수요일 등산, 주 1회 골프 등으로 건강관리를 했으나 요즘에는 매일 아침 20~30분 시트업 등 스트레칭을 하고 주말에 등산이나 골프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건강관리는 킬리만자로,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했을 정도로 여행을 좋아하는 그에게 필수적인 것이다.
“여행 마니아는 못 되고요, 등산이나 트레킹은 자주 했지요. 여행은 새로운 풍광과 문물을 통해 색다른 경험을 하는 것이 좋고요. 등산이나 트레킹의 경우 목표에 도전하고 정상에 이르렀을 때 희열은 말로 표현할 수 없지요. 그리고 등정 과정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성찰할 시간을 갖는 것도 보람이지요. 지난번 킬리만자로 등정 시에는 그동안 내 자신을 되돌아보며 70세가 되면 그동안의 삶을 담아 을 써보기로 한 것이 수확이지요.”
살면서 지켜야 하는 3가지
은 제목 그대로 70세에 이른 자신을 돌아보며 쓰고자 하는 책이다. 베스트셀러가 되겠다는 욕심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후손에게 자신이 평생 배운 지식과 지혜를 전수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70 가까이 살면서 꼭 지켜야 할 3가지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는 자신을 책임지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올바른 가치관과 도덕성을 가지고 신뢰를 지키는 삶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입니다. 영국 속담 ‘인생의 평판을 쌓는 데는 30년이 걸리지만 평판을 잃는 데는 30분이면 충분하다’가 이를 잘 대변해준다 할 수 있겠지요.
둘째는 경제적으로 생활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돈이 수단이 될지언정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자신과 가족을 건사할 최소한의 경제적 여유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베푸는 것도 마음만이 아니라 금전적으로 베풀어야 효과가 높습니다. 우리 속담에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도 있습니다.
셋째는 주변과 사회성을 잘 유지하는 것입니다. 저희 세대는 대체로 앞만 보고 달려와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게 후회됩니다. 가족에게도 미안하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그랬고요. 요즈음은 가족, 친구들과 어울리려 노력해 많이 좋아졌지요. 평소부터 가족, 친구들에게 잘해야 노년에도 관계가 좋지 않을까요.”
기업은 복합적 가치를 지닌 조직
그는 최근 새롭게 회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각종 회의를 주재할 때 오프닝 멘트를 통해 자신이 경험했던 노하우 등을 간단한 사례 등과 연결시켜 전수해 주고 있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있다.
“물론 사전 준비 등으로 힘들기도 하지만 임직원이 경청하고 활용할 때 보람을 느낍니다. 에 나오는 ‘가르치면서 절반은 본인이 배운다’는 글귀대로 저도 준비하며 또한 배웁니다. 최근의 예는 ‘역발상 아이디어’를 강조하며 2006년 독일 월드컵 축구대회 당시 한국과 프랑스가 1:1 무승부일 때 프랑스의 지네딘 지단 선수가 후반 46분 경고 누적으로 퇴장 당한 뒤 홧김에 라커룸 사물함을 발로 차 찌그러졌는데 라이프씨티 축구경기장 측에서 배상 청구을 검토하다 오히려 찌그러진 사물함에 금테를 두르고 11유로 입장료를 받고 관광객을 유치해 성황이라고 얘기해준 게 생각나네요.”
그가 현역 경영자임을 다시금 느끼게 만드는 부분이다. 그는 경영에 있어 기업 자체적으로 보면 수익 가치가 중요하겠지만 국가 및 사회와의 관계적 측면에서 볼 때 고용 및 인적 자본 형성, 기술 축적, 양질의 제품 및 서비스 제공, 사회공헌 등 사회적 가치 기여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경영해야 한다고 보고 있었다. 기업이야말로 복합적 가치를 지닌 조직이라는 생각이 이유였다.
“경영자의 길을 가지 않았더라면요? 글쎄요. 고위 관료나 정치인의 길을 갔을지도 모르지요. 저는 고등학교 때 이과반이었는데 대학은 문과를 택했지요. 당시 주변에서 저에 대해 나름 논리적이고 언변이 좋다고 부추겨 대입 때는 문과를 지원했습니다. 사실 정치에도 관심이 있었고요. 사주에도 정치를 했으면 ‘한 인물’ 했을 거라고 하네요. 그러나 요즈음 세태를 보면 정치 지망 안 하기를 잘한 것 같고요.”
회사의 미래를 위한 길 닦는다
그는 자신을 ‘제지업계 초딩’이라고 겸손하게 낮춰 표현했다. 그러나 그는 삼성그룹의 구조조정본부의 임원이었다. 기업과 경영의 엔진 구조를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경험과 지식이 그의 커리어에서부터 보여지고 있었다.
1994년 삼성물산에서 삼성그룹 회장비서실로 옮겨 삼성자동차 사업을 성공적으로 진입시켰던 때를 떠올렸다. 그는 당시 삼성이 상공부로부터 자동차 기술도입 신고서를 1차 반려받은 후 비서실에 차출되어 전략지원팀을 만들었고 6개월 뒤 삼성자동차 사업을 성공적으로 진입시켰다. 10여년간 삼성그룹 회장비서실에서 열정과 집념을 갖고 그룹과 회장을 보좌하던 때를 회상하며 새로운 도전에 최선을 다해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간 업무 파악을 통해 회사의 비전을 ‘첨단 정밀 종이로 100년 가는 강한 기업’으로 정하고 선순환적 구조조정, 즉 사업구조를 수익력 있는 기존 품목 이외 부가가치 높은 지종 확충, 영업 인력 확대 등 미래지향적 인력 운용, 쥐어짜기식 경비 절감이 아니라 필요한 것은 과감히 투자하고, 절약할 수 있는 경영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간 본사는 물론 2개 공장 200여 명 전 직원에게 7~8회 경영방침을 설명하고 회식을 통해 공감대를 갖는 기회를 가져 직원들이 ‘한번 해보자’는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어 저 자신도 보람을 느끼고 있고 이와 관련하여, 회사의 미래 토대 마련을 위한 청사진인 중기 계획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노년에 가장 중요한 건 품위를 잃지 않는 것
기업의 체질을 바꾸는 쉽지 않은 미션을 수행 중인 그는 은퇴를 잊고 경영에 매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그가 나이 먹어도 절대로 잃고 싶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품위를 잃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품위를 유지하려면 조급하지 않고 마음의 여유를 갖는 자세도 중요하고 독서 등을 통해 인격 도야에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며 경제적으로도 여유를 갖고 베푸는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이 들어 품위가 있어야 멋도 있고 존경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는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위해 준비 중인 것들도 있었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많기 때문이다.
“취업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트레킹 등 여행을 많이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그리스, 이집트, 터키, 러시아 등을 비롯해 중남미 지역을 여행하지 못해 시간이 나면 몇 년 내에 꼭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2인승 컨버터블 스포츠카를 타고 전국을 일주하는 것이 버킷리스트입니다.”
결혼식에서 말한다. '이 결혼을 통하여 이제 몸과 마음이 한 몸이니 머리카락이 파뿌리가 되도록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그러나 사람들은 사랑하기보다는 싸우며 파뿌리가 되기도 한다. 부부는 한 몸이 되어 자식을 낳고 연대감을 가지며 가족을 보살피고 양육의 의무를 나눈다. 이러는 사이 사랑으로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한 몸 인줄 알고 일을 벌이면 알 듯 모르겠고 모르는 듯 알 것 같은 상황이 연출된다. 오죽하면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라고 하겠는가.
결혼 초 시집에서 함께 살았다. 필자는 막내 며느리였고 근처에 시누 두 사람이 살았다. 필자는 남편과 7년의 열애 끝에 결혼을 했고 시어머니는 늘 몸이 안 좋았다. 형제가 10명 이었다. 기본적으로 시부모님을 좋아했다. 시아버님의 근면한 모습과 시어머니의 후덕한 부분이 좋았다. 남편을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했고 온화한 가정의 분위기를 만드시는 분에 안도했다.
그런데 신혼이었지만 남편은 함께 저녁을 먹기 힘들 정도로 귀가 시간이 늦었다. 필자는 종일 시부모님의 손님과 시누들의 접대로 쉴 새 없이 차를 타고 과일을 깎고 식사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가사 도우미도 있었지만 안방에서 들려오는 ‘아기야’ 소리에 언제라도 튀어나갈 준비를 하고 지냈다. 손님이 많은 날은 방문객이 20여명 일 때도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귀가하자 오늘은 다리가 아파서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벌떡 일어나더니 엄마에게 가서 따지겠다고 했다.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 필자가 원하는 것은 한 마디였다. “수고했구나.”
남편이 첫 월급을 가져오는 날이었다. 내미는 봉투가 뜯겨 있었다. 명세표를 보니 돈이 비었다. 순간 필자는 “혼자 벌은 것이니 혼자 쓰든지 다 채우라”고 했다. 미리 시부모 용돈과 자신이 쓸 것을 빼고 남은 금액이라 얼마 되지 않았다. 화를 내어 고쳐졌고 그 후 필자는 살림을 도맡아하기 시작했다. 제할 것도 필자가 했다.
남편은 회식이다 접대다 많은 출장으로 얼굴 보기 힘들었다. 그러다 필자보다 먼저 귀가하면 벼락이 떨어졌다. 육아와 살림과 일을 하는 필자는 늘 종종거리며 다녔다. 동등한 관계를 원하면 대책 없이 하는 말이 있었다.“힘들면 하지 마.“ “남자랑 여자랑 같니?" 그리곤 슬며시 다리 안마를 해줄까 물어오곤 했다.
바꿀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날선 요구보다 포기를 익히게 된다. 부부싸움이 ‘칼로 물베기’라고 하는 이유는 처음 사랑했던 순간의 떨림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든 참아낼 수 있으며 오히려 배려를 즐길 수 있게 되기까지 한다. 엄마들이 많은 세월 남편도 품고 자식도 품고 친척도 품고 품으며 살은 과정을 이제 나도 가는 것이다.
1, 지리산 청학동서 세상을 만나다
필자는 촌놈이다. 지리산 삼신봉 아래 청학동 계곡에서 세상을 만나서다. 청학동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일원을 이른다. 삼신봉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기암괴석으로 둘러쳐진 계곡을 돌고 돌아 섬진강으로 이어진다. 하동읍까지 40리(약 15.7㎞), 진주시까지 100리(약 39.3㎞)다. 지금은 관광지로 많은 사람이 찾지만, 앞산 토끼와 뒷산 토끼가 서로 발맞출 수 있는 두메산골이었다. ‘정감록’을 비롯한 몇몇 옛 문헌에 신선들이 사는 이상향으로 등장한다. 청학이 노닐고 흉년, 질병, 난리가 없는 지상 낙원으로 신라 말기부터 전해오는 마을이다. 할아버지도 거창군 가조면 율리에서 그 이상향을 찾아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유불선합일경정유도교"의 신자들도 1960년대 초반부터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한복을 입고 결혼 전에는 댕기 머리를 땋고 결혼 후에는 남자는 상투를 틀고 여성은 쪽 지은 머리에 비녀를 꽂는 풍습의 도인촌이다.
이곳으로 이주한 조부모와 부모는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지었다. 계곡 주위의 다소 반반한 터를 잡아 다랑논을 만들었다. 어느 가을날 그 밭에서 일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빨치산에게 붙잡혔다. 부역을 시키거나 총살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소나무 둥치에 포박하여 둔 채로 그들은 떠나갔다. 어둠이 깔리자 두 분은 묶인 손의 밧줄을 간신히 풀고 일궈놓았던 논밭과 익어가던 곡식을 팽개친 채 빈 몸으로 10리(약 3.9㎞) 떨어진 대밭 몰이라는 아랫마을로 소개하여 삶의 터전을 새로 마련했다.
필자는 청학동서 배태하여 이곳에서 삼 형제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음력으로 1950년 2월 초나흘 새벽닭이 울 무렵이었다. 배냇저고리에 쌓여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곳에서 유소년시절을 보냈다. 끼니를 챙기는 어머니 곁에서 딸처럼 아궁이에 불을 지피어 드리기도 하고 들녘에서 나물을 캐기도 하였다. 닳고 닳은 놋쇠 숟갈로 감자 껍질을 벗겨드리기도 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동읍에 있는 하동중앙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등잔불을 켜고 살았다. 밤에 공부하고 나면 콧구멍이 까맣게 그을렸다. 등잔불에 넣을 기름도 40~ 50분 걸어가야 하는 면사무소 근처의 가게에서 기름때 진득하게 낀 됫병에 짚으로 꼰 새끼줄을 묶어 조심스레 들고 와야 했다.
어머니 나이 33세에 필자를 낳았다. 큰 형님과는 10세, 둘째 형님과도 6세 터울이다. 할아버지의 만류로 9세에 초등학교에 입학(1958)했다. 징검다리가 있는 개울을 건너 신작로 고갯길을 돌고 도는 1시간 거리에 있는 청암초등학교였다. 공부 잘하고 달리기, 웅변, 그림 그리기 등 모든 부분에서 두각을 보였고 전교 학생회장도 했다. 중학교 역시 수석으로 입학하였고 3년 동안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수재로 지역주민의 기대를 받고 자랐다. 중학교 때는 같은 학년의 친구 집에 입주하여 공부를 도와주고 숙식을 해결한 적도 있다. 중학생이 가정교사로 일한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모교 졸업식에서 축사한 특별한 경험이 있다. 동네 결혼식의 축사도 도맡아 했다.
2. “당신은 중책을 맡게 될 거야!”
거창대성고등학교를 졸업(71)한 후 72년 곧바로 국민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1학년을 마치고 공군에 자원입대하여 관제병으로 3년 만기 전역했다. 이후 77년 10월, 대학 졸업 직전에 쌍용그룹 고려화재해상보험㈜에 공채로 입사했다. 특종보험 언더라이팅 업무를 하다 기획조사부로 발령되어 신상품 개발 업무를 하여 국내 최초 골프보험, 낚시보험 등의 레저보험을 개발하였다. 79년 4월 15일, 다섯 살 아래인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다.
보험감독원 등 외부기관 연수에서 늘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재무부 장관 표창도 받았다. 83에는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보험연수소(SITC)를 수료(사진)했다. 중견 사원이 되었을 때는 운영상 문제가 있었던 제주지점, 대전지점, 동대문지점장으로 부임하여 업적을 크게 올렸다. 그런 덕으로 96년 초 직장의 별인 임원으로 승진해 부산, 경남, 제주를 관장하는 본부장(부산 주재)을 지냈다.
3, 47세에 용도폐기
호사다마라 했던가? 임원으로 승진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던 1997년 12월 말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 충격이었다. 나이 47세 때다.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으며 회사 일에 매달려온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한창 일할 나이였고 두 아들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아버지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필자에게 거는 기대를 생각하면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넥타이를 매고 정상 출근하듯 집을 나서 공원에서 배회하다가 퇴근 시간에 맞춰 귀가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필자가 바로 그 처지가 되었다.
4. “당신 제 명에 살게 하려고”
해임된 그 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떻게 아내에게 알려야 하나를 고민했다. 믿고 있는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망설여지기도 하였으나 그날로 아내에게 사실을 알렸다.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가? 서로를 알고 서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용기를 내어 알렸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일이어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잠시 시간을 보낸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참 잘 됐어요. 당신 제 명에 가게 하려고 하늘이 도왔나 봐요! 그동안 애 많이 쓰셨어요. 어디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우리 세대들이 다 그러했듯 나 역시 목표달성을 위하여 몸을 사리지 않고 밤낮으로 일했다. 거래처 접대와 직원 격려를 위한 회식 자리로 자정 무렵에야 겨우 혼자 살던 사택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가 제 명에 갈 수 없겠다 싶은 생각을 수차례 하였을 것이다.
5. “설상가상”, 이런 때 쓰는 말이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퇴직한 다음 해 IMF 위기가 닥쳤다. 먹고 사는 일이 걱정거리로 등장했다. 재취업하려 발버둥 쳐봤지만,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단계 모집 광고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런 현실은 분노를 부추겼고 속이 더 상했다. 분노를 일간신문 독자 투고란에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필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 마음을 비워가기 시작했다. 체면이나 자존심을 조금씩 버렸다. 그런 과정에서 마음을 가장 잘 가라앉혔던 생각은 “나의 직장 운이 거기까진 데 어이하겠어”라고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주어진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찾기 시작했다.
6, 마당쇠가 되다
생계유지를 위한 일을 찾아야 했다. 퇴직 6개월이 지나서야 고용노동부 고양시고용센터에 들러 실업급여를 청구했다. 처음엔 쑥스럽고 창피하여 신청을 미루고 있었다. 국민연금을 해지하여 생활비로 사용했다. 다른 보험도 모두 해지하였다. 그 후 별별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만화방을 창업했다. 누워서도, 엎드려서도 만화책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 도입으로 좋은 호응을 얻어 사업이 잘됐다. 수입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하여 라면을 직접 끓여 팔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대조류였던 PC방이 성업하면서 이 업종도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이 사업을 접고 경기 부천시 상동에서 부대찌개 음식점을 창업해 운영했다. 90% 이상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통계를 누누이 들으면서도 많은 퇴직자가 덤벼드는 것이 요식업이다. 필자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엔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회사 다닐 때 몸에 익힌 고객서비스 정신이 도움되어 친절한 음식점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수익이 괜찮아졌다. ‘이런 맛에 음식점을 하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몸이었다. 계속 아팠다. 특히 나이도 환갑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계기를 맞았다. 때마침 가게를 욕심내는 사람이 나타나 적정한 가격 협상 끝에 가게를 넘겼다. 그 후에도 먹고 살기 위해서 다양한 일을 이어갔다. 월 40만 원을 받으며 작은 회사의 조경관리사로 취업하여 매일 아침 긴 대나무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쓰레기봉투를 치우는 일도 하였다. 마당쇠가 된 셈이다. 대형 고깃집 일산한우마을 점장도 하였고 일당을 받기 위하여 MBC 드라마 ‘주몽’ 엑스트라 출연도 해보았다. 마음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경험이 되었다. 강의 콘텐츠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7, 친구의 비명횡사, 인생의 전환점 되다
57세 때 가까운 친구를 비명횡사로 잃었다. 두 살 아래의 직장 친구였다. 평소 술은 하지 않았고 담배도 수년 전에 끊어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추석 전날 다른 친구들과 남한산성에 올랐다. 산행 중 가슴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구급 차량을 불렀으나 고향 가는 차량 행렬에 막혀 늦게 도착한 119차량에 실려 가까운 성남시의 한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정말 황당했다.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퇴직 후 보낸 10년의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열심히 산다고는 했지만, 내로라할만한 일은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도 친구와 같이 무의미한 생을 마감하겠구나 싶었다. ‘100세 장수시대를 맞아 보람 있고 즐거운 생활을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제부터는 필자를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8, 60살에 사진 배우다
직장생활과 생업으로 잊고 있었지만, 은퇴하면 햇살 좋은 언덕에 캔버스를 세우고 수채화를 그리는 꿈을 꾸곤 했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필자가 사는 고양시에서 무료로 하는 사진강좌를 알게 되었다. 당시에 필자는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를 운영하면서 사진을 곁들인 글을 쓰고 있었다. 좀 더 좋은 사진을 생각하고 있던 때여서 강좌에 참여했다. 화필 대신에 카메라를 잡은 셈이다. 2010년 7월부터 한 달에 3회 6개월 강좌를 들었다. 필자 나이 60대 중반이었다. 사진에 특별한 재능이나 솜씨를 갖고 있지 않은 초보자였다. 카메라도 소형 디지털카메라 한 대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리산 청학동 계곡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감성과 초등학교 때 수채화를 그렸던 경험, 전 직장에서 맡았던 홍보 관련 일과 사보편찬 업무가 도움돼 일취월장했다.
사진 취미활동은 여가를 무료하지 않게 보내면서 건강도 챙기고 여러 사람이나 자연과 함께함으로써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게 했다. 때로는 작품으로 부가적 소득과 재능기부도 하면서 평생을 현역처럼 살 수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했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개월 뒤인 2010년 10월부터 공인 사진작가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일반인이 사진작가가 되는 길은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인정하는 전국사진공모전에서 입선 이상을 하여 획득한 점수가 50점을 넘겨야 했다. 입선하면 2점을 받는다. 일 년 동안에 28회 출품해 절반 이상 낙선하였으나 어쨌든 15회의 수상으로 사진작가 명함을 달았다. 첫 번째로 출품했던 제1회 너브내전국감성사진공모전에 ‘형상II’이 동상의 영예를 안겨주어 출발이 순조로웠으나 다른 공모전에선 잘 뽑히지 않아 포기할 생각도 수차례 하였다. 그러나 사진 자체가 재미있었다. 꾸준하게 찍으며 관련 서적을 사서 공부하고 기회가 되면 망설이지 않고 재능기부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년 만인 2013년 7월 국전인 대한민국사진대전에 ‘무한 질주’라는 작품이 입선했다. 2013년 10월에는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에서 주관한 ‘8만 시간 디자인공모전’의 사진 부문에 ‘몰입’이라는 작품이 우수상을 받았다. 11월에는 부산일보 주최 제21회 ‘부일 전국사진대전’에 출품한 ‘닭장’이 1,166점 중에서 좋은 심사평으로 2위인 우수상 영예를 안았다. 부산일보는 2013년 12월 26일 자 기사에서 이렇게 전했다. "변용도 씨의 우수상 '닭장'은 울타리 안에서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닭의 붉은 머리 부분을 어두운 배경에서 강렬하게 보여 주어, 닭의 모습에서 감옥에 갇힌 사회의 한 단면을 풍자하는 듯한 표현이 출중했다는 평을 받으며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9. 사진취미,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다
필자는 사진을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로 정의하고 ‘포토스토리텔러’라 자칭한다.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의 숫자가 37만 장이다. 카메라는 가장 아끼는 친구다. 늘 함께한다. 사진은 취미가 아닌 일상이 됐다.
사진 활동이 바탕이 되어 다양한 분야로 활동영역이 확대되어 다용도(多用途)로 후반생을 바쁘고도 보람 있게 산다. 사진이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었다. 필자는 그 텃밭에 글솜씨, 강의 솜씨를 추가로 뿌렸다. 그런 씨앗에서 싹이 돋고,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2008년에는 ‘미역국’ 외 다수의 작품으로 ‘순수문학지’ 신인상에 당선되어 수필가 명함을 달았다. 2012년에는 필자의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가 대한민국 100대 우수블로그로 선정됐다. 사진작가, 사진 칼럼니스트, 수필가, 저자, 강사(은퇴준비, 생애 재설계, 변화관리, 사진), 방송인(KBS 1TV ‘아침마당’, SBS라디오 ‘유영미 마음은 언제나 청춘’ 시니어리포터, 머니투데이 행복특강, 토마토TV 강연, 아리랑TV, CBS라디오, 한국직업방송), 기자(시니어조선 사진명예기자, 사회연대은행 KDB시니어브리지센터 두드림기자), 유어스테이지 시니어리더 겸 시니어리포터, ‘디카와 놀자’와 세화포토클럽 운영자다. 최근엔 경제신문 이투데이 자매지 브라보 마이라이프의 동년기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11월 ‘아름답게 보니 아름다워’, 2016년 1월 ‘카메라로 쓴 아름다운 이야기’를 출간하여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판매 중이다. 대우조선해양㈜와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 고려대 평생교육원 액티브시니어전문가과정 전임강사다.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 있는 우면청춘대학의 사진강좌를 2년째 맡아오고 있다. 사진이 근간이 되어 활동 영역이 확대되었다.
10. 도랑 치고 가재 잡다
대학을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경기 고양시 외곽의 한적한 전원 마을에서 자그마한 주택을 지어서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아니하여도 현실을 인정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일상을 즐긴다.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라고 한 어느 노부부 여행가의 생활 철학을 닮아가려 한다. 젊은 시절에 느끼지 못하였던 보람을 느끼며 산다. 전반생보다 후반생을 더 바쁘고 활기차게 보낸다. 그 바탕에 사진이 있다. 많지는 않아도 용돈도 번다.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형국의 삶을 산다. 2차 성장을 한 셈이다. 하버드대 성인발달연구소 윌리엄 새들러 교수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재창조하는 것이 인생의 2차 성장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제2의 절정기를 만들기 위해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변함없는 도전이다. 필자의 이름을 ‘변함없는 용기로 도전하는 남자’로 풀이해본다. 그런 덕분에 누구나 한 번쯤 출연해보고 싶은 KBS 1TV의 ‘아침마당’(2014, 11, 24)에 섭외를 받아 출연했다. ‘다시 시작하는 인생- 나의 두 번째 직업을 소개합니다’란 주제였다. 사진작가로, 은퇴준비강사로 안사람과 함께 출연해 삶의 정점을 새로 찍었다.
11,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세계적 사진작가 프랑스의 마크 리부가 있다. ‘에펠탑의 페인트공’, ‘꽃을 든 여인’ 등 유명한 작품을 만든 현존하는 사진작가다. 기자가 물었다. “선생님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어느 것입니까?” 리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일 찍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세계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작가이지만, 더 나은 작품을 얻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겠다는 꿈을 꾼다. 희망으로 산다. 진정한 대 작가의 마음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마음과 자세가 새로운 경지로의 작품세계를 창조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에 머무르지 않고 발전을 거듭하려는 삶의 철학이, 남이 넘볼 수 없고 흉낼 수 없는 작품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 여겨진다. 미래를 향해 또 다른 꿈을 꾼다. 필자 또한 늘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아직 오지 않은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도전의 발길을 멈추지 않으련다. 또한 하늘이 인생의 구석구석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경험과 지혜를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아낌없이 다 쓰고 가리라.
이봉규 시사평론가
중년이 돼서도 예쁜 여자나 ‘쭉쭉빵빵’한 몸매의 여인들을 보면 눈이 자동으로 돌아간다.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품고 싶은 욕망을 느끼지만 어쩔 수 없이 눈요기만 한다. 수컷 본능이다. 암컷들은 수컷에 비해 소극적이기 때문에 멋진 남성을 대놓고 쳐다보지 못하고 드라마를 보면서 눈요기를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한다.
드라마 속 주인공과 비교하면 가끔은 신세가 한탄스럽기도 하다. 남자나 여자나 한탄하고 부러워하면서 늙는다. 포기하는 것에 익숙해져버린 우리네 인생이다. 죽기 직전이 되어야 “왜 그토록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았나?” 하고 피눈물을 흘린다. 중년의 나이에도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인생을 허비한다. 어느새 중년이 되었듯이 불현듯 늙어버리고 한 줌의 재가 될 날도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며 다가온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짜릿하게 살아야 한다. 가장 짜릿한 것은 역시 연애(戀愛)일 것이다. 사랑하는 마누라와 짜릿하게 연애하듯 살면 최상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마누라가 엄마처럼 느껴지거나 선생님처럼 또는 가정부처럼 느껴지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짧은 인생 허송세월할 시간이 없다. 그럴 때는 이혼이 정답이다.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부부관계를 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성을 찾아야 한다. 이혼을 하고 다른 이성을 찾든지, 아니면 부부가 합의하에 다른 이성과 교제를 하든지 적극적으로 행복 찾기에 나서야 한다. 아니면 부부가 서로 자위행위를 해주거나, 그 어떤 방법으로라도 서로를 위해 짜릿한 감정을 살릴 수 있는 특단의 돌파구를 찾아야만 한다.
참고로 필자는 요즘 정말 짜릿하게 살고 있다. 지난 3월 29일 일본 교토(京都)의 한인교회에서 하객이 단 한 명도 없는 단둘만의 멋진 결혼식을 올리고 짜릿한 재혼생활에 흠뻑 빠져 살고 있다. 매일 결혼식 사진을 보고 동영상을 관람하면서 마누라와 환하게 웃는다.
요즘은 회식도 줄이고 친구들과의 소주파티도 대폭 줄였다. 대신 마누라와 북한산 바로 밑 신혼집에서 거의 매일 저녁 단둘이 파티를 즐긴다. 달콤한 발라드나 재즈 음악을 틀어놓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블루스를 추고 난리다. 20년 전 이혼하고 숱한 연애를 했건만 지금처럼 행복하진 않았다. 지금이 인생 최고의 전성기다.
만약 하나님이 나에게 “언제로 돌아가고 싶니? 그때로 돌려 줄게!”라고 물으신다면 나는 주저 없이 “지금입니다. 이대로 건강만 허락해 주세요!”라고 간곡하게 요청드릴 것이다.
누구라도 필자와 같이 행복할 권리가 있다. 행복은 쟁취하는 것이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살고 있는 배우자와의 생활이 무미건조하다면 과감하게 다른 이성을 찾아야 한다. 얼마든지 이성으로부터 유혹을 당할 수 있다. 그 상대가 나에게도 끌린다면 못이기는 척하고 넘어가 주면 된다. 수동태가 될 가능성이 없으면 능동태로 적극적으로 이성을 유혹해서 행복 찾기에 나서야 한다.
부인과 남편이 따로따로 불행한 나날을 보내면서 세월만 낚고 있다면, 내 인생은 물론 포기한 것이지만, 배우자의 인생도 같이 망가뜨리고 있는 공범이다. 중년인 지금부터라도 서로 의기투합하면 윈-윈 게임을 할 수 있다. 그게 이혼일 수도 있고, 별거라는 형식으로 합의하에 서로 다른 이성과 짜릿한 연애를 하면서 가정을 지키는 것도 방법이다. 아니면 솔직하게 서로 털어놓고 짜릿한 만족을 위해 요구하고 조정해야 한다.
결혼 30년 차인 내 지인은 아내와 잠자리를 한 지가 10년도 넘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술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그런데 몇 달 전 갑자기 신수가 훤해져서 나타났다. 마치 아우라를 드리운 스타와도 같았다. 이유인즉, 부인과 합의해서 서로 다른 이성을 찾아 연애를 하기로 의기투합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지금 15살이나 어린 젊은 애인과 너무나 짜릿한 연애를 하고 있다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부인은 어떠냐?”고 필자가 물어보니, “와이프도 초등학교 동기동창과 기분 좋은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하는데 아무런 감정이 없어서 자기 자신도 놀랐다고 심경을 피력했다. 털끝만큼의 질투심도 남아 있지 않아서 놀랐다는 자가진단이다. 오히려 부부사이가 더 편해져서 진짜 친구(Best Friend) 같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 전에는 부인과의 성생활이 전혀 없기에 본능적인 성욕의 해소를 위해 몰래 직업여성과 가끔 돈 주고 섹스를 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부인에 대한 죄책감이 들어서 찜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의 연애를 인정해주니까 부인에 대한 죄책감도 없고 오히려 신뢰감이 더 쌓였다고 한다.
부인도 스스럼없이 초등학교 동창과의 만남을 소상히 얘기하면서 남자의 심리에 대해 물어보곤 하는데 정말 재미있다고 털어놓는다. 극히 드문 케이스지만 중년에 짜릿한 행복을 쟁취한 경우다. 전통적인 도덕관에 비추어 본다면 당연히 옳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도덕관마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다. 불과 백 년 전에는 행세깨나 한다는 남자들은 첩을 두고 살아도 사회적으로 아무 문제가 되질 않았다. 심지어 같은 집에서 본부인과 첩이 형님 동생하면서 의좋게 살기도 했다. 첩이 두세 명인 경우도 허다했다.
10년 이상 섹스 없이 서로 각방을 쓰면서 배우자 몰래 바람을 피우는 것보다는 배우자와 서로 합의하에 애인을 두는 편이 훨씬 도덕적으로 정당할 수 있다. 실비아 크리스텔(Sylvia Kristel)이 열연한 영화 에서 부부는 정말 사랑한다. 그 부부는 서로의 행복을 위해 다른 파트너와 잠자리를 적극 권장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그 장면을 보면서 음미하기도 한다. 영화 의 스토리는 에로티즘으로 한 발 더 나아갔지만, 아까 소개한 지인 부부의 경우는 앞으로 백세 시대의 행복을 위해서는 보편화될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는 이혼한 지 20년 만에 짜릿한 재혼생활을 하고 있고, 전 아내도 필자보다 먼저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딸에게서 전해 듣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이혼하지 않고, 배우자 몰래 도둑연애나 하고 대충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에 급급하게 살고 있다면 얼마나 불행했을까 생각하면 끔찍하다.
자칭 대한민국 최고의 한량이라고 자부하는 필자가 독자들에게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지금 살고 있는 배우자와 짜릿하지 않다면 이혼이나 위에서 예로 들었던 케이스처럼 뭔가 특단의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행복은 최고의 가치이고 쟁취해야만 한다. 눈치를 보다간 이 생명 다할 때 피눈물 흘리며 후회하게 될 것이다. 중년인 지금이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결심할 최고의 적기다.
>> 이봉규 시사평론가
조지워싱턴대 정치학 석사, 한국외대 정치학 박사, 한국외대 외래교수
집안에 특별한 행사가 없는 달에 아내 직장으로 꽃바구니를 보냈다. 엽서에 다음과 같이 짧은 글을 넣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달이라서 보냄. 온 산야에 꽃이 만발했으니 자기 책상에도 꽃을 놓아두길….’ 그 꽃바구니는 마침 아내가 자리를 비운 틈에 도착했고 짓궂은 직장 여성 동료들이 동봉한 카드를 읽게 되었다.
저녁에 집에서 만난 아내는 표정 관리하면서 자기는 현금이 좋은데 뭐하러 쓸데없이 꽃을 보냈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그러면서 직장 동료들이 나를 소환했다고 한다. 정신적으로 심하게 타격을 받았기 때문에 꽃을 보낸 남자를 소환해 밥을 뺏어 먹어야겠다고 했단다. 아내 직장 동료들은 특별한 날이 있을 때도 꽃을 받아보지 못했는데 이건 너무 잔인한 처사라고 했다던가.
소환되던 날 아내의 직장 동료들은 나를 성토하려고 잔뜩 벼르고 나온 듯했다. 그러나 나도 그냥 당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저녁 식사는 그들이 자주 회식장소로 이용하는 횟집을 선택했다. 그리고 회식할 땐 거의 못 먹는 그 집에서 제일 비싼 특선 회 코스요리를 주문했다. 일단 푸짐한 특선 요리로 기를 좀 누른 다음 술로 적당히 분위기를 띄우고 나서 노래방으로 유도했다. 그날 나는 오십 대 아줌마들 앞에서 체면을 다 버리고 망가졌다.
다음 날 퇴근한 아내는 매우 난처한 표정으로 나에게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다. “어제 자기하고 놀고 나서 그들이 더 큰 상처를 받았대. 그래서 한 번 더 자기를 소환해야겠다는데….”
지금 우리는 카톡과 밴드가 난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루에도 글이 수십 건씩 올라온다. 그것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휴대폰을 징징거리게 한다. 똑같은 내용이 이 밴드, 저 카톡으로 복사돼 날아다니기도 한다. 깨알같이 작은 글씨라서 읽는 게 고통인데 내용은 왜 그리 많은지. 그 많은 내용대로 읽고 답하려면 도덕군자도 힘들 거라는 생각에 대부분 앞부분만 읽고 지워버린다.
우리는 이제 더는 손 글씨 안부 인사를 주고받지 않는다. 연말이면 수많은 안부 인사와 도덕적인 말귀를 담은 현란한 연하장 이미지들이 SNS를 타고 날아다닌다. 그 이미지들을 누가 그렇게 많이 만들어 내는지 궁금하다. 디자인도 수준 이하인 경우가 많다. 서로 전달하고 퍼 나르다 보면 같은 이미지가 돌고 도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렇게 종이 연하장이 사라진 것은 대세가 된 SNS 때문이기도 하지만 연말에 행사와 모임도 많아 지인들에게 손 글씨 연하장를 쓰기가 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필자는 역설적으로 6월에 엽서를 쓴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고마운 분들과 바쁘다는 핑계로 한참 못 만나고 지내는 지인들에게 아주 짧으나 진정성 가득한 엽서를 쓴다. 또 엽서를 쓰면서 명함첩도 정리한다. 명함첩을 넘기다가 문득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전화를 건다. 아주 친근하고 반가운 사이라는 것을 목소리로 확인할 수 있다.
6월은 봄과 여름의 경계라서 좀 어정쩡한 느낌이 드는 달이다. 지천으로 꽃이 널려 있는 봄과는 좀 거리가 있는 것이다. 또 ‘호국보훈의 달’이어서 마음도 다소 무겁다. 더구나 6월이 되면 세월의 빠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벌써 한 해의 반이 지나갔다고…. 곧 닥칠 장마가 지나면 여름의 한가운데에 있을 것이고, 이어 가을, 겨울이 오면 또 해가 바뀐다.
그러나 계절이 어정쩡하고, 순국선열의 아픔이 가슴을 저리게 하고, 일 년의 반을 접은 탓에 마음이 답답하더라도 이길 방법이 있다. 바로 6월에 쓰는 엽서다. 이 엽서 한 통이 특별한 이유 없이 아내에게 보낸 꽃바구니와 같은 특별함을 가져다줄 것이다. 특히 못 만나던 친구들의 소환도 은근히 기대해볼 수 있으니 일거양득 아닌가.
글 권택명(한국펄벅재단 이사, 시인)
애송시 을 쓴 故 청마 유치환 시인은 그의 시 에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리라’라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쓰고 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그런데 그 행복을 넘어서는 것이 사랑하는 것, 즉 사랑을 주는 것이라는 시인의 표현은 시적 수사(修辭)이고 역설적 표현이지만 한 차원 높은 행복론이다. 근원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받기를 좋아하는 인간의 본성에서 비켜서는 것이기에 그런 만큼 성숙함의 증표라 할 수 있다.
시혜(施惠)를 자랑하거나 순수하지 못한 의도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아름답다. 이는 주위를 여유롭게 하고 선순환하게 한다. 물론 줄 수 있는 ‘여건’이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는 대상물보다 주는 마음이고, 태도이며, 습관이다. 가진 것의 크기나 양보다 이를 나누려는 마음과 이웃과 세계의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惻隱之心: compassion/sympathy]이 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기부는 단순히 ‘GIVE’ 하는 것만이 아니다. 마음을 담은 자선 행위는 더 높은 차원의 행복을 누리는 방법이기도 하다. 여러 조사에 따르면, 자신보다 남을 위해 쓸 때 한 차원 높은 행복감을 느끼게 되며,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행위가 뇌에서 사회적 유대감과 관련된 부분을 활성화시킨다고 한다. 남을 돕는 사람들이 혈압과 스트레스 정도가 낮아 더 건강하고 장수한다는 조사 자료도 있다.
기부가 바꾸는 세상
‘부자의 기부는 나라의 운명을 바꾼다.’ 지난 8월, 2000억 원의 전 재산을 통일나눔펀드에 기부한, 이준용 대림산업 명예회장 관련 언론의 기사 제목이다. 세계 기부 역사를 새로 쓴 철강왕 카네기나 석유재벌 록펠러, 기업인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 등의 거액 기부자들, 삼성·현대·LG 등 한국 대기업들의 기부, 그리고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1억 원 이상 기부자 모임인 ‘Honors Club’ 등. 이들 고액의 기부 단체나 기부자가 복지 제고 차원에서 사회와 세계를 바꾸는 역할을 한 것은 자명하지만, 반드시 고액 기부만이 세상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커피 2잔(1만 원)이면 아프리카 영양실조 아동 1명의 1주일 치 영양치료식, 치킨 1마리(2만 원)면 빈곤국가 6인 가족 한 달 치 식량, 회식 1회(3만 원)면 빈곤국가 6인 가족 1개월 치 식량 제공이 가능하다’는 어느 국내 비영리자선단체의 모금 광고처럼, 소액이라도 얼마든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금보다 더 낫게 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복지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고 있지만, 국가만으로 사회 전반의 복지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는 없다. 양식 있는 시민사회의 기부와 나눔 활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때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던, 생활고로 인한 송파동 세 모녀 자살 사건 등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우리가 돌봐야 할 벼랑 끝에 선 이웃들은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기부문화의 현주소
2013년도 기준 총 기부금액 약 11조8000억 원(종교기부 포함) 중 개인이 7조7000억 원으로 65% 정도를 점하고 있다. 현금을 기부한 개인 비율 약 33%, 1인당 평균 기부금액 약 16만 원으로, 2011년도 기준 미국의 82%, 1000달러 수준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수치이다. 또한 고소득층의 기부 참여율이 중·저소득층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고액 기부자들을 중심으로 기부가 더욱 활성화되어야 할 이유로 지적되고 있다.
최근 국제기부문화선진화컨퍼런스 주제 강연 차 방한한 영국 자선사업감독위원회의 케네스 디블 법률서비스국장이 국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영국에서 기부는 경제의 필수 요소다. 영국인의 삶 속에 기부는 관습(ethos)처럼 스며들어 있다”라고 말한 것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기부금 수준은 국민들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한 좋은 척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13년 기부금에 대한 세제 혜택 축소 후 기부금이 많이 줄었다는 뉴스가 있다. 다행히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개정 법안들이 기부금의 세금공제 혜택을 늘리는 쪽으로 추진되고 있다 하므로, 경주 최 부자나 제주 거상 김만덕, 개성상인의 나눔정신, 두레나 품앗이 등으로 이어져온, 우리의 나눔과 기부 전통이 더욱 활성화할 것으로 기대한다.
손쉬운 기부의 실천
IT 기술과 SNS의 발달 등으로 기부의 방법도 다양화하고 있다.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쉽게 할 수 있다. 또 그동안 모금을 하는 비영리자선단체들의 재정 투명성 문제로 기부를 꺼리게 되는 경우도 많았으나, 지금은 많은 모금단체들이 국세청 자료나 홈페이지 등을 통해 재정 상태를 상세히 공개하고 있어서 신뢰성 확인도 쉬워졌다.
기부의 사전적 뜻은, ‘자선 사업이나 공공사업을 돕기 위해 돈이나 물건 따위를 대가 없이 내놓는 것’(네이버 국어사전)으로 되어 있다. 필자는 즐겁게 낸다는 ‘희사(喜捨)’ 쪽을 더 선호하지만, 기부는 꼭 물질만을 내놓는 것은 아니다. 요즘은 사회 지도층이나 문화·예술인, 연예인들의 재능기부를 비롯하여, 이·미용 기술, IT 등 각종 재능기부에서 장기기증까지 다양한 기부들이 실행되고 있다.
흔히 재산이 많은 부자를 ‘잘 산다’라고 표현하는데, ‘부자는 그저 재산이 많아 부유하게 사는 사람이고, 잘 사는 사람은 자신과 가족을 넘어 그 부를 사회 전반에 유익하게 사용하며 사는 훌륭한 품격을 갖춘 사람이다’라고 늘 주장하시던 필자의 친척 한 분이 생각난다. 이제 자선활동의 피크인 연말이 다가온다. 사회복지시설에 대한 기부든, 국내외 불우아동에 대한 1:1 후원이든, 고액이든 소액이든, 한 해가 가기 전에 일단 기부를 하여 차원 높은 행복감을 맛보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유한한 이 세상에서 ‘잘 사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남자의 계절 가을. 서늘한 바람이 부는 날엔 홀로 고독을 휘어 감고 앉아 위스키 한 잔을 즐겨보는 것 어떤가. 그렇다면 여심을 자극하는 아기자기한 레스토랑보다는 투박하지만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레스토랑이 제격이겠다. 남심을 사로잡는 뉴 아메리칸 다이닝 ‘보타이드버틀러’를 소개한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나비넥타이를 한 집사’라는 뜻의 ‘보타이드버틀러(Bowtie de Butler)’는 빈티지하면서도 중후한 인테리어가 돋보인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체스판 무늬 바닥부터 벽에 걸려 있는 흑백 사진, 바 테이블 옆에서 나오는 무성영화까지 레스토랑 곳곳에서 묻어나는 흑백의 조화가 아날로그적인 향수를 자극한다. 화려함보다는 무게감이 느껴지는 보타이드버틀러만의 분위기는 20대 여성 고객 위주의 맛집과는 차별화된 이곳만의 매력이다. 실제 레스토랑을 찾는 고객도 40대 이상의 중년 남성들이 많다고 한다.
인테리어 분위기는 남성 취향이지만, 음식 맛에서는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할 만한 다양한 메뉴가 준비돼 있다. 보타이드버틀러는 1980년대 뉴욕에 이주민들이 몰리며 여러 나라의 식재료와 레시피가 어우러지며 탄생한 뉴 ‘아메리칸 다이닝’을 선보인다. 혼자 가볍게 식사와 와인을 즐기러 오는 중년 남성부터 기념일을 맞이한 커플, 가족 모임이나 회식을 하기 위해 찾아오는 고객까지 누가 오더라도 나름의 멋과 맛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이다.
무채색 배경이 주를 이루는 보타이드버틀러에서 가장 색감이 두드러지는 것은 키친과 마주한 에머럴드색 소파다. 소파 바로 위의 빈티지한 창문과 함께 어우러져 오픈된 주방에 활력과 빛을 더한다. 보타이드버틀러의 윤영기 총괄셰프는 신선한 제철 식재료를 엄선하여 최선을 다한 정찬을 선보이고 있다. 그는 “보통 고객들이 오시면 여러 메뉴를 시켜서 나누어 먹곤 하죠. 다양한 음식 맛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좋지만 한 가지 음식에 대해 온전히 다 느끼긴 어렵기 때문에 늘 아쉬워요. 한 분이 오셔서 한 가지 음식을 드시더라도 충분히 풍미를 느끼고 든든하게 식사를 하실 수 있도록 정성스럽게 준비하고 있어요”라며 접시 위에 놓인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며 즐겨볼 것을 조언했다.
보타이드버틀러는 다양한 코스와 단품 메뉴, 주류를 제공한다. 런치 코스는 3만 9000원이고, 총 4가지로 구성된 디너 코스는 메뉴에 따라 4만 5000원, 6만 3000원, 8만 9000원, 10만원이다. 스파클링, 레드, 화이트 등 수십 여 가지 와인은 물론, 간단하게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는 튜브형 와인도 판매하고 있다. 싱글몰트 위스키, 버번 위스키, 블렌디드 위스키 등 다양한 위스키와 코냑, 보드카, 데킬라 등도 즐길 수 있어 도수가 높은 주류를 선호하는 이들에겐 안성맞춤이다.
주소 서울 강남구 청담동 84-20
영업 시간 12:00~15:00, 18:00~22:00 /일요일 휴무
예약 및 문의 02-3443-6643, www.bowtiedebutler.com
주차 유료 발레 서비스(3000원)
역모 혐의로 능지처참을 당한 허균(1569~1618)은 수많은 조선조 인물 가운데 여러 모로 특이한 사람입니다. 고리타분한 유교질서에 염증을 냈던 허균은 어머니 상중에도 기생을 끼고 놀아 비난을 받은 바 있습니다. 광해군일기에는 ‘천지간의 괴물’이라고 기록된 인물입니다.
그가 광해군 3년(1611)에 귀양지인 전북 함열에서 엮은 ‘성소부부고(惺所覆?藁)’에 ‘도문대작(屠門大爵)’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8도의 명물 토산품과 별미를 소개한 음식 안내서입니다. 귀양살이를 하다 보니 지난날에 먹었던 음식 생각에 견딜 수 없어 종류별로 기록해 놓고 때때로 보아가며 한번 맛보는 것처럼 한다는 게 집필 동기였습니다.
허균이 참 가엾습니다. 처형 직전에 “잠깐 할 말이 있다”고 소리쳤지만 무시당한 채 처참하게 죽은 그는 마지막으로 무슨 음식을 먹고 갔을까?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이 처형장에서 지은 절명시(絶命詩)에는 “황천길엔 주막 하나 없다는데 오늘 밤은 뉘 집에서 잘까?”[黃泉無一店 今夜宿誰家]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곧 죽을 사람들이 왜 먹는 생각을 할까? 음식이란 몸을 살찌우거나 생존을 이어주는 영양소만이 아니며 정신의 허기를 달래고 불안을 덜어주는 그 무엇입니다. 생존의지에 관한 행위와 관련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음식은 마시고[飮] 먹는[食]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저작(詛嚼)하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심신을 기르고, 세상과 함께 하면서 사람들과 정을 다지고, 그 시대와 사회를 섭취합니다.
음식남녀 인지대욕존언(飮食男女 人之大慾存焉), 예기(禮記)가 갈파한 대로 음식과 남녀의 정, 쉽게 말해 먹는 것과 섹스는 인간의 가장 큰 욕망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원초적 본능을 다스려 사회질서와 양속(良俗)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제도와 절차를 만들고 규제와 금지 장치를 마련해왔습니다.
음식은 예절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숟가락 젓가락 포크는 어떻게 쥐고 어른 앞에서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배운 뒤 식사공동체의 일원으로 편입됩니다. 밥상머리교육은 인간의 품성을 결정하는 원초적 교육기제입니다.
쌀을 뜻하는 글자 ‘米’를 파자(破字)하면 八十八이 됩니다. 옛 어른들은 쌀 한 톨을 얻기 위해서는 88번이나 농부의 손길이 가야 하는 걸 알라며 이 글자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예절은 먹는 방법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음식 자체에 대해 지켜야 할 예의가 있습니다. 먹을 게 귀하고 쌀이 모자라던 시절에는 밥풀을 남기면 꾸중을 들었고, 맛있는 것만 먹거나 같은 반찬을 두 번 떠가는 것도 남을 배려하지 않는 행동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최근 번역된 댄 주래프스키 교수(미 스탠퍼드대·언어학)의 ‘음식의 언어’(The language of food)에 의하면 고급한 식사일수록 에티켓을 따집니다. 요리의 이름이 길수록, 식재료의 출처를 거론하는 횟수가 많을수록 음식 값이 비싸집니다.
음식은 정입니다. 온 가족이 모여서 밥 한 끼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복인가요? “음식 끝에 의 상한다”는 말, “콩 한 쪽도 나눠먹는다”는 말에서는 상부상조하며 살아가는 인심과, 누구에게나 똑같은 고통인 가난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내가 아는 술꾼 3형제는 명절에 모이면 소주를 궤짝으로 갖다 놓고 마시면서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웁니다. 어차피 가실 분인데, 병상에 누워 “한 잔만, 한 잔만” 하는데도 끝내 술을 드리지 않았던 불효를 그들은 지금 후회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또는 주부는, 또는 아내는 가족을 위해서 정으로 다듬고 무치고 사랑 양념을 넣어 음식을 만듭니다. “세상에서 제일 듣기 좋은 소리는 제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와 내 새끼 입에 밥 들어가는 소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려서 어머니가 해주었던 반찬이나 요리가 맛이 없어지면, 그때는 죽을 때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과학적 근거는 모르겠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음식은 소통입니다. 왕조시대에 기근이 들고 흉년이 심하면 왕은 부덕의 소치라고 자성하며 하늘에 빌면서 반찬 가짓수를 줄였습니다. 이른바 감선(減膳)의 소통정치라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서로 자기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손님 접대랍시고 내놓은 두루미와 여우의 우화는 달리 해석하면 서로 다른 음식을 통한 소통의 시도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음식은 배려입니다. 우리는 요리를 잔뜩 빚어 내놓고도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십시오” 하고 인사를 합니다. 예전에 중국인들은 “이미 익힌 걸 날것으로 되돌릴 수 없지요”[熟不還生]라고 말하며 식사를 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고 있고(장 지글러 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세계의 절반은 먹거나 더 먹거나 또 먹고 있습니다. 음식을 먹으면서 기아의 진실, 과식과 체증의 진실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중국 북송시대의 명재상 범중엄(范仲淹·980~1052)은 ‘강상어자(江上漁者)’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강 위를 오가는 사람들/농어 맛을 즐길 줄만 아는데/그대들 보시게나 작은 배 하나/풍파 속에 출렁거리는 것을.”[江上往來人 但愛?魚美 君看一葉舟 出沒風波裏] 농어만 즐기지 말고 농어를 잡는 이들의 고생도 알라는 뜻입니다.
굶주리는 이들도 많고, ‘혼밥’이나 불기 없는 1회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가족과 따뜻한 음식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이걸 좋아한다고 내세울 만한 음식이 없는 사람, 함께 먹자고 남에게 권할 만한 메뉴나 음식점에 무지하거나 무신경한 사람, 무엇이든 한 가지라도 남을 위해 만들어 먹일 수 있는 음식이 없는 사람의 삶은 끝내 불행합니다. 구차하고 용렬합니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은 어느 책에서 “여성이 매일같이 요리를 하는 것은 작은 기적을 만들어 내는 일상의 기도와도 같은 것”이라고 썼습니다. 이제는 남자들도 나를 위해, 남을 위해 요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즘 TV화면을 점령하다시피 한 먹방, 쿡방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조류입니다.
요리는 본질적으로 살아 있는 것을 죽여서 먹을 것으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살아 있는 것을 죽여서 생명을 살게 합니다. 그러니까 역설적이지만 음식은 삶입니다. 그리고 살림입니다. 이 경우의 살림은 생계를 꾸려가는 일이나 세간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것들이 목숨을 이어가게 해주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런데 살아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움직이는 것, 푸른 것, 부드러운 것, 따뜻한 것, 촉촉한 것, 선한 것, 맛있는 것입니다. 일용(日用)하고 장복(長服)하는 음식을 통해 삶과 살림의 길을 찾아가는 일이 늘 즐거움과 행복이 되기 바랍니다.
신중년 세대로 진입하게 되면 당뇨병과 고지혈증, 성기능 장애, 관절염, 심혈관계 질환뿐 아니라 위암과 간암의 발병 가능성도 높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세심하게 스스로의 몸을 관찰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생애전환기 건강검진을 필수적으로 챙기고 적절한 운동을 병행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40대 에 접어들면 몸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낀다. 하지만 사회와 직장에서 한창 바쁘게 일할 때인 만큼 교제활동도 많아지고, 귀가도 늦어진다. 눈, 치아, 성기능 등 신체 노화가 서서히 진행되면서 본격적으로 몸을 생각하며 운동도 시작해야 하는 시기다.
알코올 분해 능력도 떨어지기 때문에 주량도 줄여야 한다. 40대부터 ‘운동’, ‘절제’와 함께 건강을 위해 따로 챙겨야 하는 것이 폐암과 대장암, 위암 등 각종 암에 대비하는 것이다.
운동부족과 잦은 회식으로 혈관과 내장에도 지방이 쌓이고,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등의 생활습관병과 심장질환의 발병률도 높아진다. 그래서 40대 이상이라면 1년에 한 번씩 건강검진을 받아야 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만 40세를 대상으로 하는 생애전환기 건강진단은 꼭 챙겨야 한다. 여성은 자궁경부암과 유방암 검사와 함께 폐경기 전후 골다공증의 예방 및 조기치료를 위한 골밀도 검사를 받아야 한다. 골다공증은 폐경, 임신, 수유 등으로 칼슘을 대량 소비하거나, 마르거나 운동 부족으로 근육이 발달하지 않으면 잘 발생한다.
60세가 넘어가면 신체적 정신적 노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근육량이 줄어들면서 상대적으로 체지방 비율이 높아지고, 치매, 관절염 등 퇴행성 질환에 대한 위험에도 노출된다. 그래서 건강을 위한 운동은 필수다.
운동은 노화가 진행되며 나타나는 갖가지 신체 이상을 예방하고 늦춰주는 가장 좋은 처방이다. 1주일에 3회 이상, 한 번 운동할 때 30분 이상 땀이 맺힐 정도로 하는 것이 좋다. 무리한 근력 운동보다는 빨리 걷기처럼 유산소 운동이 효과적이다.
통계적으로 65세 이상 고령 인구 중 30% 이상이 2가지 이상의 질병을 앓는다. 때문에 1년에 한 번씩의 정기검사는 필수다. 건강검진 결과에서 경계 고혈압 혹은 당뇨 의심, 비만, 고지혈증 등의 뇌졸중 위험인자가 발견되면 바로 추가 검사를 통해 혈관의 이상 유무를 확인해야 한다. 스트레스 관리도 중요하다.
바깥 출입활동을 왕성하게 하는 것이 좋으며, 사회기관이 운영하는 문화교육프로그램에도 적극 참여하자. 그리고 심혈관계 질환이나 당뇨병, 호흡기 질환 등의 만성질환자나 65세 이상 고령자의 경우에는 9~10월 독감 예방접종을 받는 것이 좋다.
건강검진 전 미리 체크해야 할 사항
- 가족의 암 병력, 유전질환, 과거 병력이 있는지 살펴본다.
- 평소 식생활습관, 최근 느꼈던 증상 등을 고려하여 자신의 건강상태와 관련된 정보들을 꼼꼼히 파악한다.
- 안전한 검진을 위해 약물이나 조영제 등에 의한 부작용이 있었는지 체크한다.
- 이전에 받았던 검진기록을 살펴보고, 더 필요한 검사가 있는지 확인한다.
건강검진 진행과정에서 주의할 점
◇건강검진 전날
금식
- 건강검진 2~3일 전부터는 음주, 기름진 음식은 피한다.
- 최소 8시간 이상 금식한다.
- 금식 기간에는 물, 껌, 사탕, 담배는 절대 금한다.
약물
- 평소 복용하는 약은 가급적 2~3일 전부터 먹지 않는다.
- 내시경 조직검사 또는 용종을 제거할 경우 출혈의 위험이
있으므로 내시경 검사를 한다면 반드시 항혈전제를 일주일 전
부터 복용을 중단한다.
※ 단 뇌졸중, 혈전증, 심장질환, 폐질환을 앓고 있거나, 최근 3개월 이내 수술 및 입원치료를 받았다면 출혈 위험성을 높일 수 있는 약물을 중지해도 무방한지 반드시 주치의에게 확인 후 검사 여부를 결정한다.
대변
- 대변채취는 건강검진 전날 또는 당일 채변용기에 밤알 크기
(용기의 1/3정도)를 넣는다.
- 채취한 대변은 검사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차고 서늘하게
보관한다.
◇검진 당일
약 복용
혈압약은 건강진단 당일 새벽 6시 이전에 최소량의 물과 함께 복용한다. 당뇨약은 건강검진 당일 아침 인슐린이나 당뇨약을 복용하지 않는다.
※ 단, 위장 조영술을 할 경우 약을 먹지 말고 가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