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4.07

시니어의 삶을 브랜드로 바꾸다 “나이는 명품의 헤리티지죠”

입력 2026-04-07 06:00

영산대학교 시니어모델학과 금한나 학과장·장상란 학회장

▲영산대학교 시니어모델학과 장상란 학회장과 금한나 학과장. (박진주 프리랜서)
▲영산대학교 시니어모델학과 장상란 학회장과 금한나 학과장. (박진주 프리랜서)

국내 4년제 대학 최초로 ‘시니어모델학과’를 운영하는 영산대학교. 학과장으로 학과를 이끄는 금한나 교수와 1기 학생 대표 장상란 학회장을 만났다. 이곳에서 런웨이는 단순한 패션쇼 무대가 아니라 ‘인생을 다시 걷는 기회’다.

(박진주 프리랜서)
(박진주 프리랜서)

나이를 브랜드로 바꾸는 대학

부산 영산대학교 해운대캠퍼스 모델 실습실 문이 열리자 강렬한 리듬의 음악이 몸을 흔든다. 40대부터 70대까지 40여 명의 학생들이 대형을 갖추고 당당한 걸음으로 거울 속 자신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간다. 시니어모델학과 2학년이 된 1기 학생들이다.

워킹과 포즈 연습이 한 차례 끝나자, 금한나 학과장이 학생들에게 말했다.

“한 걸음 한 걸음에 집중하며 지금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세요. 우리 인생처럼 모델의 삶도 건너뛰거나 날아가는 일은 없습니다. 차근차근 걷다 보면 하늘에서 예상치 않은 기회가 내려와요. 그럼 그 기회의 줄을 잡고 올라가는 거예요. 어느새 원하던 자리에 선 나를 발견하게 될 겁니다.”

영산대학교는 지난해 국내 4년제 대학 가운데 처음으로 ‘시니어모델학과’를 신설했다. 고령화사회에서 중장년의 삶과 경험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연결하는 교육이다. 그러나 학과 개설을 논의할 때 우려가 적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나이 든 사람들의 비싼 취미 활동이 되는 것 아니냐는 시선도 있었다. 그러나 금 교수는 이 학과의 의미를 조금 다르게 설명한다. 그는 이 학과를 단순히 패션모델을 양성하는 과정이 아니라 ‘인생 브랜딩 교육’으로 정의한다.

“나이의 가치는 명품의 헤리티지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세월과 역사는 명품에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치를 더해주죠. 시니어 모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시간이 흐르고 삶의 경험이 더해질수록 사람의 깊이와 품격이 더해지니까요. 나이를 단점이 아니라 가치로 바꾸는 교육, 그것이 이 학과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금한나 학과장·(박진주 프리랜서)
▲금한나 학과장·(박진주 프리랜서)

지역문화 이끄는 시니어 모델

모델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흔히 패션쇼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이미지메이킹, 퍼스널 브랜딩, 공연 기획‧운영, 강의 실습, 문화‧교양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때로는 와인 수업이 열리고, 학생들이 기획에 참여한 패션쇼가 펼쳐지기도 한다.

금 교수는 학생들이 무대에서 자신을 표현할 뿐 아니라, 사회에서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모델은 단순히 런웨이나 카메라 앞에 서는 직업이 아닙니다. ‘본받고 싶은 사람’, ‘따라 하고 싶은 사람’이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육의 중심도 ‘내면’에 있다.

“학생들이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다이아몬드 원석을 다듬듯, 그 안에 있는 것을 꺼내는 게 제 역할이랍니다.”

금 교수의 퍼포먼스 워킹 수업은 카리스마와 기세로 가득하다. 거울 앞에서 반복되는 워킹 연습, 눈빛 훈련, 자세 교정이 이어진다. 무대에서 시선을 어디에 두는지, 걸음의 리듬이 어떤지, 몸이 흔들리지 않는지 세세하게 점검한다. 시선이 불안해지면 어김없이 금 교수의 “스포팅(Spotting)!”이라는 외침이 날아든다. 학생들이 고개를 들고 응시하는 곳(Spot)에 거울 속 자신이 있다.

“무대에 몇 번 서보면 에너지가 달라집니다.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그 자신감이 일상까지 이어집니다. 모델은 타인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아요. 중장년층이 삶의 주체성과 사회적 리더십을 회복하는 데 중요한 경험이 됩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절이 아니라 전환입니다. 삶의 경험을 사회와 다시 연결하는 과정이죠.”

실제로 시니어모델학과 학생들은 무대와 지역사회 프로젝트를 통해 ‘시니어 모델’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7월 부산 서면 부전몰 지하도상가에서 열린 ‘청춘 리턴즈’ 패션쇼다.

영산대학교와 부산시설공단의 업무협약으로 열린 이 행사는 액티브 시니어 세대에 활력을 불어넣고 지역 상권과 문화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기 위해 기획됐다. 패션쇼는 런웨이에 그치지 않고 500여 명의 시민이 참여하고 소통하는 형태로 꾸며져 하나의 문화 이벤트로 확장됐다. 창원 ‘항노화 바이오헬스 박람회’의 오프닝쇼, ‘영산대학교 휴머니티 콘테스트’의 개막 축하쇼, ‘대만 대학을 위한 뷰티 콘테스트’, 종강 기념 ‘할리우드 아이콘 테마 패션쇼’ 등이 이들의 무대가 됐다. 걸음마를 시작한 모델이 이처럼 많은 무대에 서는 건 흔치 않다.

블로그, 밴드,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SNS 플랫폼을 직접 구축하고 운영하는 실습도 병행한다. 이는 모델 활동뿐 아니라 콘텐츠 제작과 마케팅 역량까지 갖춘 ‘신중년 리더’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이다. 이들의 열정은 방학 기간에도 쉬지 않고 각종 특강을 비롯해 매주 연습을 이어간다.

학생들은 시니어 모델에 도전하는 과정을 담은 동화책, AI를 활용해 작곡한 학과의 노래 등 다채로운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단순히 모델을 양성하는 학과를 넘어 ‘신중년 리더 교육 모델’을 실험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박진주 프리랜서)
(박진주 프리랜서)

▲장상란 학회장.(박진주 프리랜서)
▲장상란 학회장.(박진주 프리랜서)

42년 교육자, 다시 학생이 되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다시 신입생이 되는 것은 생각보다 큰 변화다. 시니어모델학과 학생 중에는 이런 이력을 가진 이들이 유독 많다. 장상란 씨도 42년 동안 유아교육 현장에서 일해온 교육자다. 유치원 교사로 시작해 국공립어린이집 원장으로 지내며 수많은 아이를 돌보고 가르쳤다. 지난해 연말에는 아이들의 성장을 도우며 살아온 공로를 인정받아 교육부 장관 표창을 받은 바 있다. 2월을 끝으로 교육자의 자리에서 내려온 그가 삶의 전환을 이룬 건 사소하지만 강렬한 질문에서 비롯됐다.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서 살아도 되지 않을까?”

그는 영산대학교에 시니어모델학과가 생긴다는 소식을 들었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처음에는 많이 망설였습니다. 안정적인 삶을 오래 살았는데 다시 학생이 된다는 게 쉽지 않았거든요. 사회생활을 거치며 끊임없이 훈련했지만, 본래 성격은 남 앞에 서는 걸 힘들어하는 편이고요.”

고민으로 머리가 복잡해질수록 마음은 단순해졌다.

“런웨이를 걷는 제 모습을 상상했는데 심장이 뛰더라고요. 지금 도전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습니다.”

긴 망설임 끝에 입학원서를 내고 면접을 거쳐 학과의 1기 학생이 됐다. 당시 경쟁률은 4:1이 넘었다는 후문. 대학에서는 ‘성인 학습자’로 분류되지만 마음만은 여느 신입생과 다르지 않다. 새로운 무대에서 그는 시니어 모델일 뿐 아니라 대학생, 그것도 학회장이라는 역할도 맡게 됐다. 이처럼 대학 생활에 적극적인 장 씨가 입학 후 가장 어려웠던 것은 의외로 자신을 믿어주는 일이었다고.

“성인이 된 뒤 누군가에게 자세와 표정, 걸음걸이를 지적받는 경험은 생각보다 낯설었어요. 위축되기도 했죠. 그동안 제가 아이들에게 ‘할 수 있어, 자신을 믿어보자’고 말했는데, 정작 저 자신에게는 그런 말을 못 하고 있더라고요.”

처음의 어색함과 달리, 수업이 이어질수록 학과 분위기는 조금씩 달라졌다. 교수진의 조언과 동기들의 응원이 힘이 됐다. 그 과정에서 장 씨 마음에도 조금씩 변화가 싹텄다.

“교수님과 동기들이 계속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주셨어요. 그 말을 들으면서 ‘아, 나도 할 수 있겠구나’ 하고 조금씩 믿게 됐습니다.”

그에게는 ‘매일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바꿔가는 배움의 감각’을 되살려준 특별한 순간이 있다.

“첫 번째 패션쇼에 설 때였어요. 조명이 켜지고 발을 내딛는 순간, 숨이 멎고 다리가 떨렸어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자’고 마음을 다잡고 한 걸음씩 걷다 보니 자신감이 차오르더라고요. 그날 ‘나는 아직도 성장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모든 조건이 완벽할 때 시작하는 게 아니라, 시작하면 더 단단해진다는 것도 배웠죠.”

(박진주 프리랜서)
(박진주 프리랜서)

무대에서 사회로, 다시 걷는 신중년

장 씨는 “동기들과 연습하다 보면 웃음이 먼저 나온다”며 수업 분위기를 전했다. 어떤 친구는 자세가 좋아져서 키가 2㎝나 더 커지기도 했다고.

“교수님은 늘 마음이 무너지면 몸도 무너진다고 말씀하세요. 처음에는 자세를 두고 하신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1학년을 지내고 보니 삶 전반에도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더라고요. 마음이 바로 서야 자세도 곧아지고 걸음도 자연스러워집니다. 걷는 법을 다시 배우면서 생각도 당당해졌어요.”

현재 그는 자신이 꿈꾸던 모습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평생 아이들과 학부모를 상대하는 일을 업으로 해왔지만 경청과 달리 설득에는 어려움이 있었어요. 저를 굳이 드러내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요. 그런데 모델은 말이 아닌 침묵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직업이잖아요. 처음으로 제가 살아온 시간을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드러내고 싶어졌어요.”

그렇다면 ‘시니어 모델 장상란’은 어떤 인물일까?

“모델의 품격은 정말로 살아온 시간에서 나오더군요. 제 이름 앞에 ‘도전하는 사람’, ‘함께 걷는 리더’, 무엇보다 ‘여전히 성장 중인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시니어가 되고 싶어요.”

학생들이 다시 런웨이에 섰다. 음악이 흐르고 한 사람씩 걸어 나온다. 누군가는 작가였고, 누군가는 간호사, 교사였으며, 또 누군가는 꿈을 간직해온 사람이다. 그러나 도전하기를 선택한 순간 이들은 모두 모델이 됐다. 금 교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은 나이 때문에 멈추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 나이 덕분에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런웨이를 걷는 학생들의 발걸음은 단단했다. 그 걸음은 보여주기만을 위한 워킹이 아니라, 인생의 다음 장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이었다.

(박진주 프리랜서)
(박진주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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