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아버지를 간병하느라 병원에 드나들면서 현실은 전혀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4인실 병실엔 70~90세 노인들이 입원해 있었는데 대부분 간병인이 없으면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는 환자들이었다. 간호통합병동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중증 환자라 통합 간호를 받을 수 없어 1인 간병이 필요한 분들이었다.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관리를 잘 받으셨다. 수시로 열을 재고 혈압과 맥박, 대소변 양을 체크했다. 열이 37℃로 오르면 얼음주머니를, 38℃가 넘으면 해열제를 주사했다. 그런데 이가 들떠 씹기가 어렵다 하니 잘게 다진 음식이 나왔다. 그저 불편하다는 하소연이었는데 말이다. 병원에선 환자의 불편함을 그냥 지나치진 않는다. 하지만 불안 두려움 같은 속내를 들어주거나 이해해주는 시스템은 없다. 환자들은 더 나아질 일 없는 목숨을 그냥 그렇게 이어갈 뿐이다.
어느 날 병원의 낮이 소란스러웠다. 어르신 한 분이 집으로 가겠다고 자식을 찾고 소리를 질렀다. 스스로 손끝 하나도 움직이지 못해 콧줄로 영양분을 공급받고 간병인 손에 대소변 처리를 맡기면서도 발버둥을 쳤다. 병원은, 안전이라는 이유로 환자를 침대에 묶었다. 병실 사람들은 다들 그 환자의 괴팍한 성정을 탓했다. 밤이 되자 환자 몸에 달아놓은 기계에서 비상음이 울렸다. 간호사들의 발소리가 분주해졌고 얼마 후 조심스럽게 침대를 옮기는 소리가 났다. 환자는 처치실로 옮겨갔을 것이다. 임종실을 따로 운영하지 않는 이 병원에서는 처치실이 곧 임종실이었다. 아버지도 생사를 넘나들던 날, 처치실 신세를 진 적이 있다. 당직의는 오늘 밤이 고비라고 말했는데 기적적으로 그날 밤을 넘겼다.
드라마를 보면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사람이 가족들을 불러 모아놓고 그동안 잘못한 일들의 용서를 구하고, “사랑한다”는 작별인사와 함께 삶을 마무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병원에서 목격한 건 달랐다. 마지막까지 병과 싸우다가 육체를 다 소진한 후 무기력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나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집으로 가고 싶다고 울부짖던 환자는 자식들 얼굴도 보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침대에 묶여 있다가 처치실에서 생을 마감했다.
인생을 잘 살았다고 말하려면 마지막이 잘 마무리돼야 한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누구나 품위를 잃지 않고 존엄하게 죽기를 바랄 것이다.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자기가 눈감고 싶은 곳에서 맞이하는 죽음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존엄함은 병원에선 불가능해 보인다.
‘어디서 삶의 마무리를 하고 싶은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