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딕 양식의 건축물로는 최대 규모인 밀라노 두오모 성당은 지하철 출구에서 나오면 바로 보이는 위치에 있다. 교통이 좋아야 하는 건 현대인의 주거 선택 시 중요 요소인데 여행지를 향한 여행자들에게도 해당된다. 때로 먼 길 찾아가 고요히 만나는 여행지의 맛도 남다를 수 있지만 짧은 시간을 만들어 찾아온 사람들에겐 이럴 땐 반갑다. 지하철에서 올라오니 두오모 성당이 기다린 듯 보이는 건 쾌재를 부르게 한다.
두오모(Duomo)는 이탈리아어로 대성당을 뜻한다. 이탈리아는 가는 곳마다 대성당이 있는데 그중에 피렌체와 밀라노의 두오모 대성당이 유명하다. 특히 오래전에 가 보았던 피렌체의 두오모는 그 독특함이 지금도 떠오른다. 어쩜 이다지도 문양이 정교하고 오묘한지 감탄스러웠다. 웅장하고 장대한 건물 곳곳 시선이 닿는 곳마다 섬세함에 놀랐다.
피렌체 두오모는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가 먼저 떠오르는 성당이다. “홀로 멀리 여행을 떠나라. 그곳에서 그리운 사람이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 명대사는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본 사람들에게 강렬하게 남아있다. 영원을 약속하는 연인들의 성지로 준세이와 아오이가 서른 살의 생일에 만나기로 했던 곳. 그러나 서른 살이 되기 전에 헤어진 두 사람이 재회하게 되는 스틸컷의 효과가 크다. 만나지 못한 채 그렇게 시간이 흘렀어도 피렌체에서 다시 그들은 서로 연결되었고 마음을 주고받았다.
여행자들도 두오모 성당 앞에서 영화처럼 나름대로의 무언가를 하는 것, 하다못해 혼자 배회를 하거나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의 BGM이라도 듣는다. 우리들에게 그곳은 매체의 영향이 있는 곳이 되었다. 그 영화음악을 듣다 보면 잔잔한 피아노 선율에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만 두 연인의 풍경을 배경으로 애잔하게 울려 퍼지는 첼로 연주곡이 듣는 이의 감정을 뒤흔드는 걸 느낀다. 낮으면서도 풍부한 첼로음의 분위기가 수분을 머금은 듯한 피렌체의 분위기와 어울려서 좋다. 준세이와 아오이가 어느 공원에서 첼로 연주 공연을 보면서 키스하던 장면도 함께 오버랩 된다. 그리고 느닷없는 일이지만 아오이 역의 진혜림이 다른 영화에서 조용한 반주로 이쁘게 불렀던 A lover's Concerto 도 연달아 떠오른다.
과거밖에 없는 인생도 있다. 잊을 수 없는 시간만을 소중히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것이 서글픈 일이라고만은 생각지 않는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뒤쫓는 인생이라고 쓸데없는 인생은 아니다. 다들 미래만을 소리 높여 외치지만, 나는 과거를 그냥 물처럼 흘려보낼 수 없다. -냉정과 열정 사이, 아오이
아주 오래전, 이탈리아의 피렌체에 갔을 때는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는 나오기 전이었다. 그래서 영화와는 무관하게 대성당에만 열중할 수 있었던 게 다행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기억 속의 피렌체 두오모 성당은 화려한 외관과 내부 그림의 장엄함에 압도되어 시종일관 경이로움의 여행이었다. 지금과는 달랐을 그때의 촉촉하던 정서가 문득 그립다. 갑자기 피렌체의 풍경에 잠겨 그 도시를 걸어보고 싶어 안달이 난다. 밀라노의 두오모를 이야기하려고 시작했는데 슬그머니 피렌체의 두오모와 영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삼천포로 빠졌다.
언젠가는 지금보다 시간이 더 흐른 후엔 이번에 본 밀라노 두오모의 첨탑을 올려다보는 자신의 모습을 또다시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그저 웃으며 그땐 밀라노의 두오모에서 피렌체의 두오모를 떠올렸고 영화 생각만 했었다 하면서 말이다. 두오모는 단순한 종교적 장소만이 아닌 지역민들에게 가장 중심적인 장소라고 한다. 이탈리아에서는 도시 건설할 때 두오모를 가장 핵심적인 위치에 배치했다. 그래서 두오모를 바라보면서 밀라노와 피렌체를 동시에 떠올리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여행의 기억이 금방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니기에 때로 문득 이렇게 떠올려 보며 아릿해져 오는 걸 혼자 즐겨보는 것도 괜찮다.
연말의 두오모 광장은 이른 시간인데도 들뜬 사람들로 가득하다. 맞은편 노천카페의 노란 테이블엔 부부나 연인들이 이미 다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아침 햇살은 두오모 성당을 여유롭게 바라보고 앉아있는 그들을 비춘다. 때로 어딘가 지나치다가 우연히 만나던 안개 속 풍경에 멈춰 서기도 한다. 안개가 내게 스미는 촉촉함과 그 속에 파묻혀 더 머물고 싶기도 할 때가 있다. 엄청난 포스의 두오모 대성당의 광장과 따사로운 노천카페의 풍경이 아름다워 한참 동안 그 풍경 속의 풍경이 되어 보기도 한다.
성당 광장의 비둘기 떼들과 노니는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을 바라본다. 일상을 떠나 있다는 묘한 일탈감과 생경한 도시의 인상이 절묘하게 배합되는 순간이다. 바로 그 옆으로 대형 아케이드가 있는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상가가 아니다.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비토리오 에마뉴엘리 2세 갈레리아 아케이드라는 이름이다. 웅장한 건물의 통로로 들어서면서부터 중앙을 십자로 가르며 사방의 건물의 연결하는 길이 이어지고 천정의 창 구조물이 예술 작품이다.
모르고 들어선다면 처음엔 백화점이나 일반적인 상가인 줄 알 수 있다. 그러나 들어서면서부터 고풍스러운 이곳엔 우리가 흔히 명품이라고 하는 프라다, 베르사체, 루이뷔통 등의 명품 샵이 우아한 무게감으로 쭉 입점해 있다. 고색창연함과 고급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한켠으론 피자와 젤라토를 한 입 먹느라 줄 서 있고, 기둥도 천정도 예술이구나 하며 바라보느라 정신없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두리번거리며 산책하듯 지나가려 해도 쉽지 않은 인파다. 골목도 자칫 길을 잃을 만큼 복잡하게 이리저리 길이 나 있다. 아케이드를 벗어나면 베르디의 푸치니를 초연했다는 스칼라 극장이 있지만 생각만큼 눈에 확 들어오지는 않는다. 역사적 사실이 의미 있겠지만 그냥 쓰윽 보고 지나친다. 미술관이나 동상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칠 정도로 볼거리가 널려있는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수백 년 된 건물들이면서도 정갈하고 도시적이다. 오래된 연말의 찬 기운과 함께 오전의 햇볕이 그 건물을 지나는 길에 그림자를 만들고 배회하던 그곳에 발걸음 소리를 남긴다. 지하철 입구나 거리 곳곳에 빨간색의 선명한 M자 폰트가 밀라노를 더욱 기억하게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