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이 주는 우연한 풍경은 경이롭다. 비일상적이고 조금은 불편하면서도 불현듯 찾아오는 자유로운 감정에 가슴 부푼다. 볼거리 많은 제주 섬에서는 더욱 그렇다.

바다와 숲과 오름이나 둘레길을 걸어야 하고, 옛이야기가 담긴 터전에선 잠깐 멈춰 서게 된다. 예술이 담긴 마을을 만나면 사유의 시간을 갖는 느릿한 하루를 미리 확보해두는 게 좋다. 나를 마주하며 그 땅에 잠겨 누리는 시간, 여행은 가능한 한 머무를 것.
마을을 둘러싼 산은 하늘과 맞닿은 듯하다. 한라산 서쪽의 부드러운 능선 아래 한경면 저지리 마을에 현대미술관이 생기면서 열정 가득한 예술인들이 살기 시작했다. 자연 친화적인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푸근한 자연과 예술이 어우러진 제주 서부의 전형적인 중산간에 위치한 저지리 마을은 1500년대에 형성됐다. 닥나무가 많아 닥모로, 닥몰이라 불리다가 언제부터인가 저지리라는 마을 명칭을 갖게 됐다.
제주는 어디를 돌아봐도 천혜의 자연환경을 품었다. 그중 한경면 저지리는 다른 마을에 비해 조금 다르다. 마을 구석구석 골목길 끄트머리까지 예술 감성이 피어난다는 점이다. 전국에서 다섯 번째 문화지구로 지정된 것도 그렇고,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이 조성된 것만으로도 저지리만의 매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저지리에선 예술이 특별한 게 아니라 그저 일상이다. 서울이나 도심 속 예술인마을과는 달리 저지리는 제주 서쪽으로 깊숙이 들어와 한적하고 고요하다. 비교적 덜 알려진 보석 같은 공간이다. 한없이 편안하고 느긋해서 발걸음부터 느릿해진다. 이토록 청정한 마을에서 보내는 인문학 여행의 하루라니.
마을의 중심, 제주현대미술관
저지문화예술인마을에 다다르면 우뚝 선 야자수 아래 제주현대미술관 안내판이 먼저 설렘으로 다가온다. 현대미술관은 마을 중심부에 자리 잡았다. 상설전시실과 특별전시실, 기획전시실, 공공 수장고, 1평 미술관을 둘러볼 수 있다. 제주현대미술관 분관은 따로 떨어진 곳에 자리해 겨울 동백이 피어난 미술관 뜰이 한적하다. 실내엔 자연과 인간, 계절의 정취를 담은 작품을 전시 중이다.
현대미술관 본관 방향으로 걸어가는 길은 마치 문화적 성지를 찾아가는 기분이다. 길가에 자연스럽게 앉힌 조각 작품들이 저지리의 오래된 숲과 어우러진다. 울퉁불퉁하고 구멍 난 검은 현무암 사이로 들꽃이 함께한다. 살짝 가슴 뛰는 여정의 시작이다.
마을 중심축인 현대미술관은 주변의 또 다른 미술관과 생태환경이 선사하는 예술적 감각 공간의 주축이라 할 수 있다. 최평곤 작가의 설치작품 ‘여보세요’가 미술관 입구에서 맞아준다. 안쪽은 하모니즘을 주창하던 김흥수 화백의 공개되지 않았던 작품과 다양한 아카이브, 화가의 예술 세계를 들여다볼 기회다. 기획전시실의 지역 네트워크 교류전 역시 늘 자연을 마주하는 제주에서 삶의 가치를 보여준다. 국내외 작가들의 뛰어난 예술의 쉼 없는 전시는 언제든 기대하고 찾아도 된다. 현대미술관 뒤편으로 1평 미술관의 특별한 감각적 예술 체험도 자칫 빠뜨릴 수 있으니 꼭 챙길 것. 예술촌 입구의 공공 미술관 수장고는 현대미술관 티켓으로 함께 볼 수 있다. 일상의 공간을 예술로 확장한 공간이다. 관객과 소통하는 실험적인 미디어아트와 야외 전시를 9월까지 볼 수 있다.

‘물방울 화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김창열 화백의 작품 세계에 푹 빠져볼 수 있는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도 마을에 있다. 6.25전쟁 통에 일 년 반 정도 제주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한 이후 작가는 제주를 제2의 고향으로 여긴다고 했다. 감각적 공간에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영롱한 물방울 속으로 우릴 끌어들인다. 두 눈을 통해 작가의 물방울을 직접 접하고 보니 알 수 없는 맑은 울림이 전해진다.
작품 감상 후 미술관 외부의 숲에 있어 놓치기 쉬운 실감체험관까지 알차게 둘러봐야 한다. 미술관 중정 분수에서 옥상을 통해 갈 수 있는데, 이런 건축 설계도 이 미술관만의 돋보이는 구조다. 인터랙티브 체험 공간 두 곳과 플리커 현상을 통한 무중력 물방울 공간에서 물방울 속에 투영되는 심상이 오묘하다. 의외로 이곳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이 많아, 물방울 미디어아트를 고요하게 누리는 시간도 된다.
건축까지 멋스러운 곳
저지문화지구 한편으로 또 다른 멋스러운 건축이 돋보인다. 제주를 사랑한 건축가이자 아티스트 이타미 준의 건축예술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이타미준뮤지엄이다. 바람의 건축가로 알려진 재일교포 유동룡(이타미 준)과 만날 수 있는 건축물은 이곳 말고도 방주교회, 제주 포도호텔, 비오토피아박물관 등 제주에 여러 곳 있다. 조용히 머물며 건축물에 투사된 이타미 준의 건축예술을 공유하는 공간이다. 사전 예약은 필수다.
이타미준뮤지엄 옆의 저지문화지구 생활문화센터는 지역민과 여행자들에게 예술 향유 기회를 제공하는 문화예술 공간이다. 현대미술관 맞은편으로도 예쁜 건물이 보이는데 제주공예박물관이다. 제주의 수목과 흙, 돌이 재료인 생활밀착형 공예 작품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제주 출신으로, ‘TV쇼 진품명품’에 출연하는 양의숙 위원이 관장이다.

하루 종일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의 전시관을 조용히 돌아보았다면 고요한 시간의 침묵은 대화였다. 예술가들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일상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타인의 세계를 마주하며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았다고나 할까. 비로소 마음을 나눈 듯 기분이 스르르 풀린다. 이제 미술관 순례를 벗어나 야외 공간으로 나와 풍요로워진 영혼을 나른하게 맛본다. 빼어난 예술 작품을 온전히 만난 후 미술관 뜰을 거닐어보는 시간은 여유롭다. 야외 조각 공원과 테마 공간이 함께하는 자연환경의 조화 속에서 잠시 쉬어야만 제대로 마무리된다. 예술가의 작품을 통해 다양한 속살을 들여다보는 시간. 제주 여행 중 하루쯤은 예술의 날로 잡아두는 건 어떨지. 한경면의 저지리 마을은 날마다 화(畵)요일이다.

문화 충전 플러스, 동네 책방 ‘소리소문’
제주 한경면 저지문화지구 안쪽 깊숙한 곳에 소리 소문 없이 숨어든 듯한 동네 책방이 풍경 속에 스며 있다. 아담한 단층집 앞마당이 주차장이고, 담장 아래 잡초조차 자연스럽다. 책방 ‘소리소문(小里小文)’의 문을 연 순간 정갈한 시간 속에 담긴 책들이 편안하다. 대들보와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실내 공간에 부디 사진만 찍고 나가지 말아달라는, 오래도록 책방을 꾸려나가고 싶다는 책방지기의 글이 마음을 붙든다. ‘작은 마을에서 만나는 작은 글’이라는 뜻처럼 동네 책방 ‘소리소문’의 감성 여운이 길다.
저지리 마을은 예술만큼 아름다운 자연과 사람이 중심이다. 용암이 남긴 신비한 지형 위로 동식물이 자라는 독특한 생태계 환상숲 곶자왈이 마을을 품고 있다. 중산간 서편의 저지오름은 제주 올레 코스 중 하나로, 해송과 잡목으로 정글인 듯 숲을 이룬 생명의 숲이다. 그 길을 헤치고 오름에 오르면 사방으로 펼쳐진 제주의 비경을 한눈에 담는다. 참고로 저지리 가는 길에 어음리 억새 군락지와 새별오름도 묶어서 들르기 딱 좋은 위치다. 우뚝 선 풍차와 함께 숲속 미로를 누비는 듯한 억새 숲과 저 멀리 애월 앞바다까지 즐길 수 있는 기회다.
예술과 생태숲에서 일상의 고단함을 해소하고 내려와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본다. 길가 김밥집 간판이 ‘뉴저지’다. 저지리라는 동네 이름보다 조금 새롭게 하느라 뉴저지(New-jeoji)라 했는데, 인근 국제학교 부모들이 미국 뉴저지와 연관시키더라며 주인장이 김밥을 말면서 크게 웃는다. 이젠 뉴저지라는 애칭이 붙은 저지 마을은 제주 서부의 문화 거점 공간으로 존재감이 달라지는 중이다. 미술관을 지나 마을 속을 어슬렁거리고 골목을 기웃거리며 널널한 마음이 된다. 세월의 결을 그대로 간직한 돌담집 안마당엔 빨래가 마르고, 텃밭의 귤나무와 제주의 푸른 하늘. 더 바랄 게 무엇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