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노후 생각에 잠긴 중년 남성이 있습니다.”
매주 일요일 정오 두 편의 영화를 소개하는 남자, 김경식. 2004년부터 벌써 2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과거 개그맨으로 화려한 시절을 보낸 그는 이제 영화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엔터테이너가 아닌 인간 김경식은 중년의 시기를 보내며 삶의 자세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수준이다. 김경식은 2025년 초고령사회 진입과 인구 변화, 먼저 고령화를 겪은 일본의 선제 대응 등을 줄줄 읊었다. 그는 “사람은 자기와 관련된 얘기를 할 때 제일 자신 있고 재밌어한다. 사람들이 나이를 안 먹는 것 같다고 하지만, 벌써 올해 55세로 중년이다. 직장인이라면 퇴직할 나이다 보니 관련 뉴스가 남 일 같지 않고, 노후를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아버지께서 50대 중반, 딱 제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어요. 그리고 건강하시던 어머니도 어느 날 갑자기 대장암 판정을 받으셨죠. 그러다 보니 가장으로서 자연스럽게 노후를 어떻게 맞이하고 보내야 할지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70대 중반이 넘으면 노화를 겪는다고 합니다. 저는 이제 20년 남짓한 시간이 남았죠. 지금 보내는 한 시간이 20~30대에 보낸 한 시간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껴요. 그래서 미래를 준비하는 한편, 지금 행복한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뭔가를 가지려 하기보다는 갖고 있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고, 내려놓음, 자유로움의 자세는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죠.”
삶이라는 영화
“저라고 ‘영화 대 영화’를 20년 넘게 할 줄 알았겠나요? 우리 인생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김경식은 오랜 시간 MBC 예능 프로그램 ‘출발! 비디오 여행’의 코너 ‘영화 대 영화’ 진행을 맡고 있다. 비슷한 소재나 내용의 두 영화를 비교하는 코너다. 맛깔나는 입담으로 그는 모든 영화를 흥미롭게 소개해 관람 욕구를 자극한다. 방송을 보고 실제로 영화를 관람한 뒤 실망한 관객들은 ‘김경식한테 속았다’라는 반응을 보였고, 그는 ‘영화사기꾼’, ‘영화낚시꾼’ 등의 별명을 얻게 됐다.
“‘영화 대 영화’가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작가님의 역량 덕분이죠. 프로그램 제작에서 제가 한 역할이란 그저 구강 구조와 목소리만 빌려드린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님이 잘 쓰신 원고를 이미 영화를 보고 온 것처럼 얘기한 것밖에 없죠. 서인, 김초롱 아나운서와의 호흡도 중요한데, 그분들과 함께한 지도 벌써 8년이네요. ‘출발! 비디오 여행’ 팀은 제게 또 다른 가족이에요. 오랜 시간 좋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고, 방송을 재밌게 봐주시는 시청자 여러분에게 늘 감사함을 느낍니다.”
영화를 하이라이트 위주로 짧게 소개하는 입장에서 우려되는 부분도 있다. 영화는 전체로 볼 때, 여러 차례 볼 때 그 매력이 각기 다르기 때문. 김경식은 “영화를 함축해 소개하는 영상은 90% 정도 스토리텔링에 집중돼 있다. 그러다 보면 ‘그 남자는 부자가 됐다’, ‘그들은 결혼해 행복해졌다’ 등 영화를 단순하게 해석하게 된다. 그러나 누군가의 삶이란 다각적인 면에서 들여다봐야 제대로 알 수 있다”고 말하며, 어떤 영화든지 단편적인 부분만 보고 판단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이와 함께 그는 “우리 삶은 영화와 닮았다”는 어록을 남기며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에 관해 얘기했다.
“모든 삶은 영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한 사람의 인생을 2시간으로 함축하긴 어렵죠. 그럼에도 이 세상에는 좋은 영화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으로 ‘인생은 아름다워’를 꼽을 수 있습니다. 참혹한 전쟁 속에서 피어난 아버지의 부정을 얘기하는 영화죠. 그리고 ‘인생은 아름다워’처럼 드라마 장르가 아니더라도 SF, 코미디 등 모든 영화에는 인간, 즉 인문학이 포함돼 있습니다. 같은 인간으로서 공감하고 이해하는 감정이 들어가야 영화가 재밌다고 느껴지는 겁니다.”
유튜브 진출로 새로운 도전
유튜브 채널에 영화 리뷰어들이 늘어나면서, 원조 격인 김경식의 등장을 기다리는 이들이 많았다. 그는 이에 응답, 2024년 2월 유튜브 채널 ‘경식씨네’를 오픈했다. ‘영화 대 영화’와 구성은 비슷하지만, 한 편의 영화를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김경식이 직접 기획, 원고 작업에도 참여한다. 벌써 채널을 운영한 지 1년이 되어가고, 구독자는 10만 명을 향해 가고 있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욱 가까워지고 싶은 김경식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대중들이 영화를 더욱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지 고민하고 있어요. 리뷰만 할 것이 아니라 ‘경식씨네’만의 색다른 콘텐츠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중 하나로 토크쇼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라이브로 온라인 만남도 가능하고, 영화관을 대여하는 방법도 있죠. 영화 한 편을 두고 스토리, 미장센, 감독의 의도 등에 대해 많은 사람과 다양한 얘기를 나누고 싶어요. 그 토론의 장을 제가 마련하겠다는 거죠.”
김경식은 친구 이동우와 ‘우동살이(우리들의 동화처럼 살아가는 이야기)’ 채널도 운영하고 있다. 김경식이 이동우의 눈이 되어 책을 읽어주는 콘텐츠를 다룬다. 과거 두 사람은 개그맨 그룹 틴틴파이브 활동을 함께하며 우정을 쌓았다. 그러던 가운데 이동우는 2004년 망막색소변성증 진단을 받은 데 이어 2010년 실명 판정을 받았는데, 이를 알게 된 김경식은 “죽을 때까지 챙기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그 이후 지금까지 김경식은 변함없이 이동우의 곁을 지키고 있다.
“사람들이 저와 동우의 우정을 보고 눈물이 난다든지, 저한테 천사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반응이 감사하긴 하지만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에요. 전 흠결이 많은 사람이고 스스로 착하다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앞이 안 보이는 친구를 챙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요. 사람들은 제가 동우를 헌신적으로 도와준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 반대예요. 동우가 저를 구한 사람이고, 제 생명의 은인이에요. 과거 힘든 시간을 보낸 적이 있는데, 그때 동우를 매일 찾아갔어요. 그 친구가 해주는 말이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됐거든요. 그게 이어져서 지금까지 온 것뿐이죠.”
2025년, 그리고 행복한 노후
올해 김경식은 이루고 싶은 두 가지 목표가 있다. 첫 번째는 시니어 전문 유튜브 채널을 만드는 것이다. 중년인 그는 같은 시니어들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 싶다면서 “시니어는 준비하는 세대, 시니어 당사자, 그리고 인생을 마무리하려는 세대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내가 공부한 것과 경험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싶다”고 밝혔다. 다른 목표는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개선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었다.
“동우가 나오는 방송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친구라서가 아니라 정말 재치 있고 재밌는 사람이에요. 저는 사람들이 동우를 코미디언으로 봐줬으면 좋겠어요. 코미디 프로에 그 친구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얼마든지 무대에 서서 개그를 펼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괜찮을까’ 눈치를 보는 거죠. 그렇게 장애인을 보는 자체가 저는 편견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장애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게 참 안타까워요. 2025년은 편견이 줄어드는 좀 더 성숙한 사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김경식은 삶의 목표는 없다고 말한다. 영화 같은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 그저 ‘남한테 도움을 주고,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단다.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고 싶기에 그는 늘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려고 노력한다. 나이를 먹는 만큼 성숙해지고 진짜 어른이 되고 싶은 것. 그런 그가 꿈꾸는 미래는 해피엔딩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열심히 일하며 살아오던 제 친구는 어느 날 갑자기 앞을 못 보게 됐어요. 그리고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게 우리 삶이에요. 그렇게 언제 어떻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부(富)·집·차 등에 집착하는 게 과연 옳은 삶일까요? 저는 어떤 삶을 살면 노후가 행복할 것인지 고민한 끝에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놓았어요. ‘이안의 풍선’이라고 장기 기증 관련 동화책의 제작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앞으로도 동화 작가로서 계속 글을 쓰고 싶어요. 노후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 걸 바라진 않아요. 멋진 동화를 쓰고, 누울 수 있는 작은 방만 있었으면 좋겠고, 가족들과 동우와 지금처럼 평온한 일상을 이어나가고 싶어요.”
[장소 협조 : 충무로영상센터 ‘오!재미동’, 영화의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