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남으로 볼 일 아니다… 충남 천안시 화수목정원

기사입력 2025-03-21 09:07 기사수정 2025-03-21 09:07

[일상 낙원 민간정원 순례] 오는 4월 수선화축제 '주목'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이런! 얼어붙은 겨울날의 화수목정원에 의외로 관람객이 많다. 살을 에는 혹한에 아랑곳없이 정원을 천천히 거닐며 겨울 서정을 즐기는 사람들. 바야흐로 민간정원의 전성기가 도래한 걸까. 전국 곳곳에 개성을 돋운 정원들이 산재한다. 덩달아 정원 애호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머릿속 잡동사니를 비울 수 있는 멍때리기에 적격인 은신처가 드물고, 기댈 만한 언덕도 없는 도시를 벗어나 정원의 식물들과 사교하는 일은 사실 드라마틱한 행위다. 감관이 깨어나면서, 글라스에 향기로운 와인이 채워지듯 불현듯 심신에 차오르는 활력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주민욱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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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유명 조경가는 말했다. “거기에 정원이 없었다면 향후 정원만 한 크기의 정신병원이 그곳에 들어설 수도 있다”고. 정원에서 마음을 헹굴 수 있다는 얘기다. 정서적 안정감을 회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정원은 썩 유능한 치유의 전당이다. 식물들의 자유자재를 바라보며 삶을 한번 반추해볼 수 있는 사색의 활주로다.

화수목정원은 산기슭에 있다. 터는 넓고, 식물은 다종다양하며, 조형물조차 다채롭다. 활달한 스케일과 깨알처럼 흩뿌려진 디테일의 원만한 조합을 통해 재미있는 인공정원을 만들었다. 식물의 동향을 폭넓게,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다. 눈길과 발길을 붙드는 장면이 많아 괜찮은 영화를 관람할 때처럼 슬그머니 기분이 좋아지는 정원이다.


(주민욱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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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겨울 정원에 서린 정조는 어쩔 수 없는 쓸쓸함이다. 헐벗은 초목들의 고독한 포즈를 보라. 몸에 걸친 것 하나 없이 냉엄한 겨울을 견딘다. 나무들의 저 견고한 고독과 기이한 재능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고독과 고난을 밀어붙여 성숙에 이르는 게 나무들의 일만은 아니다. 사람 역시 동류다. 극단의 고난과 맞닥치더라도, 부서지고 까무러질 때까지 해볼 건 다 해볼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의 운명이지 않은가. 나무를 남으로 볼 일이 아니다. 사람을 나무보다 부족한 존재로 여길 것도 없다. 겨울 정원의 나목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걸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삶의 원기를 얻을 수 있다. 설사 세상의 농간에 나가떨어진 형편일망정 나의 내부에 나목 한 그루 들여놓고 지내면 길이 보인다. 그대여, 모름지기 겨울 정원에 가거들랑 나목 한 그루쯤 ‘찐친’으로 만들어놓고 돌아오라.


(주민욱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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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기슭으로 난 산책로를 한참 오르자 야산 솔숲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자연림과 인공정원의 경계 지점이다. 소나무들이 일제히 초록빛 아우성을 토한다. 그걸 바라보자니 기꺼워 가슴이 뻐근해진다. 인공정원과 달리 야생의 숲은 인간과 동행할 의사가 별로 없다. 도도한 자존감을 내려놓는 법이 없다. 반면 인공정원은 강아지처럼 애교를 부리는 재주로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자연을 원전으로 삼아 모방하고 다듬은 구색으로 환심을 산다.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의 속성을 느끼게 하고, 식물을 관조하게 하는 선행을 한다. 정원을 발명한 이에게 갈채를 보낼 수밖에 없다.


(주민욱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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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신가? 초로의 남자가 혼자 정원의 마른 검불들을 걷어내고 있다. 화수목정원을 설립한 오부영(67)이다. 일찍부터 제주도의 식생을 ‘미치도록’ 좋아했다는 그는 제주의 숭숭 구멍 뚫린 현무암에다 난초나 분재를 붙이는 석부작을 즐기다가 정원을 만들었다. 사업차 운영하던 공장 네 곳 중 세 곳을 판 자금을 쏟아부었다지. 그는 인생의 진정한 화양연화를 정원과 함께하는 생활을 통해 구현하고 싶었던 거다. 자신은 물론 세상과 타인을 감싸려는 의도로 정원을 세상에 띄웠다. 그리고 이 노련한 선장은 순항을 거듭해 사람들을 숱하게 불러들이는 정원으로 성장시켰다.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민간정원’이라는 평판도 얻었다. 그의 얘긴 이렇다. “사람에게 최종적으로 중요한 건 자연을 마음 안에 들여놓는 일이다.”


(주민욱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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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수목정원은 4월에 수선화축제를 펼친다. 6월엔 수국축제가 열린다. 수국은 이 정원에 사는 식물 가운데 개체수가 가장 많은 화초다. 초본식물의 꽃잎은 대부분 제철이 지나면 시들어 무너진다. 그리고 마침내 종적 없이 소멸한다. 수국은 다르다. 꽃송이의 형상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겨울을 통과한다. 원래의 색깔과 빛과 물기를 모조리 잃고 그저 누렇게 말라붙은 미라로 존재한다. 보기에 따라선 해탈한 꽃이다. 생시엔 쓸모가 많았던 목탁과 바라와 장삼을 가만히 놔두고 몸만 무심코 빠져나간 선승의 종신을 연상시킨다. 화사했던 꽃 시절과 차마 영별할 수 없는 미련과 애착에 겨워 남몰래 숨어 우는 헛꽃이기도 하다. 아서라, 마른 꽃아! 사람이나 식물이나, 미련을 움켜쥔 삶처럼 미련한 게 다시 있으랴.

정원엔 분재원도 있다. 명품 분재들을 전시한 공간이다. 인간 사회의 미용 성형(成形)보다 훨씬 장구한 역사를 가진 게 분재 성형이다. 분재는 잔혹하게도 나무의 가지를 자르고 비틀고, 철사를 칭칭 감는 반자연적 조작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기발한 미감으로 출중하니 입 다물 수밖에 없다. 조선의 거인 퇴계는 분재를 즐겼다. 지조 깊은 연인, 기생 두향이 준 매화 분재를 애지중지했다. 임종 직전 퇴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말은 이랬다. “매화 화분에 물을 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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