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목으로 둘러싸인 치유정원, 충북 괴산트리하우스가든

기사입력 2025-02-14 09:32 기사수정 2025-02-14 09:32

[일상 낙원 민간정원 순례] 겨울나무의 일갈, “딱 나처럼만 살아라!”

▲초록 벤치가 있는 자작나무길에 운치가 자욱하다.(주민욱 프리랜서)
▲초록 벤치가 있는 자작나무길에 운치가 자욱하다.(주민욱 프리랜서)


겨울철 정원은 파장을 본 장터처럼 고요하다. 철 지난 해수욕장처럼 고즈넉하다. 봄부터 가을까지 형형색색의 꽃과 잎을 매달았던 초목과 관목들은 이제 헐벗은 채 묵연하다. 별로 보잘 게 없다. 벌과 나비를, 또는 꽃핀 식물에 반색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들을 유혹할 재능을 상실한 나무들의 촌락에서 무슨 용무를 볼 게 있으랴.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퍼렇게 건재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활기를 잃고 혼곤한 잠에 취한 겨울 정원에서 무슨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랴.


▲동화적 분위기를 연출한 ‘트리하우스’ 내부.(주민욱 프리랜서)
▲동화적 분위기를 연출한 ‘트리하우스’ 내부.(주민욱 프리랜서)


그러나 이는 단견일 테다. 하나만 보고 둘은 보지 못하는 비좁은 생각이다. 겨울나무들은 고독한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사실은 고상하다. 마치 고귀한 지성처럼. 몸에 걸친 것 하나 없이 혹한을 견디는 나목들의 굳센 모습은 예컨대 추사 김정희를 생각나게 한다. 제주도의 무너져가는 오두막에서 귀양을 살며, 얼어 죽을 지경의 겨울을 개결한 깡으로 통과한 추사의 고난과 결기를 떠올리게 한다. 겨울나무는 바위처럼 묵직하게 좌정한 선사를 닮기도 했다. 군더더기 훌훌 털어버리고 본질만으로 가뿐히 존재하는 성자로 다가온다. 나무들의 누드를 가난의 초상으로, 고통스러운 노숙의 상징으로 바라볼 일이 아니다.


▲키 큰 소나무들 사이에 세운 ‘트리하우스’다. 이곳의 시그니처 구조물이다.(주민욱 프리랜서)
▲키 큰 소나무들 사이에 세운 ‘트리하우스’다. 이곳의 시그니처 구조물이다.(주민욱 프리랜서)


겨울나무를 잘 읽으면 내가 보인다. 내면의 눈으로 솔직하게 바라보면 더 많은 것이 보인다. 비루한 삶이 보인다. 과욕과 급발진을 일삼은 성과로 쌓아두거나 움켜쥔 게 이미 많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군더더기가 붙는 자신을 발견한다. 자꾸 비대해지는 욕망에 휘둘리는 기이한 악습과 생쇼를 자각할 수 있다. 때가 되면 버리고 비우는 식물과, 그럴 줄 모르는 사람은 이렇게 서로 다르다. 그렇다면 겨울 나목은 인생을 가르치는, 또는 길을 가리키는 족집게 과외교사다. 겨울 정원은 내가 나를 만나게 하는 단독 회합장이다. 인생을 모처럼 겸허하게 바라보게 하는 고마운 가이드다.


▲‘괴산트리하우스가든’의 전경.(주민욱 프리랜서)
▲‘괴산트리하우스가든’의 전경.(주민욱 프리랜서)


‘괴산트리하우스가든’은 자연이 좋아 자연과 함께 살기를 자청한 부부가 15년 전부터 나무를 심어 가꾼 정원이다. 그들은 농사를 지어 돈을 버는 족족 부지와 묘목을 사들이는 데 썼다. 오랜 세월에 걸친 노력을 통해 아기자기한 정원을 만들어냈다. 왜 그랬나. 치유정원을 표방하는 데에서 연유를 짐작할 만하다. 몸과 마음의 병증으로 고생하는 이들에게 좋은 걸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나무들의 생태와 매력과 미덕을 느끼는 일. 그것만으로도 세상의 탁류를 눈곱만치라도 더 가볍게 건널 수 있다고 믿어서였을 것이다. 어쩌면 부부가 먼저 식물이라는 묘약의 효능을 확인하고서 남들과 나누고 싶었던 게 아닐까. 무릇 날이면 날마다 식물을 만지고 바라보고 뒷바라지하는 사람이라면 남들이 보지 못한 걸 보는 눈을 얻게 마련이다. 자리이타(自利利他, 스스로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다)의 가치를 모를 리 없다.

겨울철 정원은 인적이 드물어 호젓하다. 칼바람만 돌아다니며 나무들의 휑한 우듬지를 뒤흔든다. 연둣빛 봄부터 노랗고 붉은 단풍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지는 가을까진 다르다. 많은 사람이 찾아와 수려한 정원의 낭만과 운치를 맛본다. 500여 종의 식물이 펼치는 꽃과 색채의 화려한 향연을 즐긴다. 식물이 사람에게 교태를 짓기 위해 꽃을 피우는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꽃 앞에서 행복감을 느낀다. 작은 풀꽃 하나에도 감정을 이입해 설렌다. 하지만 겨울엔 깨끗이 관심을 거둔다. 한 철 휴업한 가게를 건너뛰어 다른 가게로 들어가듯이. 그러나 식물은 한순간도 문을 닫지 않는다. 생명력과 생기를 잃는 법이 없다. 맨살인 채 얼어붙은 나무의 내부는 생존의 열기로 후끈하다. 식물의 완전성과 치열성은 이렇게 겨울에도 흐트러지는 일이 없다.


▲정원 내에 있는 카페에서도 창밖 풍경을 즐길만하다.(주민욱 프리랜서)
▲정원 내에 있는 카페에서도 창밖 풍경을 즐길만하다.(주민욱 프리랜서)


정원을 걷는 중에 자주 보이는 식물에 눈길이 머물곤 한다. 억새풀이다.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보이는 그것의 꽃대엔 아직 꽃이 매달려 있다. 마를 대로 마른 저 은빛 꽃떨기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산발을 하고 몸을 흔들며 춤을 춘다. 바람이 거칠어질수록 좋아 죽겠다는 양 미친 듯이 ‘헤드뱅잉’을 한다. 이걸 환희의 율동이라 말 못 할 것도 없겠다. 이렇게 억새는 엄동설한에도 태평하게 노닌다. 어쩌면 억새도 바람의 심술에 삿대질을 하겠지. 서슬 퍼런 1월의 바람에서 제 따귀를 올려붙이는 횡포를 느낄 수 있다. 나를 부수려는 것들과 조우하지 않아도 되는 운명이란 세상에 없다. 때로 서럽게 떨지 않는 생명이 없다.

명이란 세상에 없다. 때로 서럽게 떨지 않는 생명이 없다.

정원 산책로는 둥글게 휘어지며 야산 자락으로 뻗어 오른다. 길의 외진 곳엔 자작나무들이 모여 산다. ‘자작나무길’이라 부른다. 자작나무의 피부는 희다. 그러잖아도 하얀 비단을 다시 무두질해 입힌 것처럼 섬려하다. 그래 오솔길이 통째 유려하다. 좋은 친구, 세상을 떠난 혈육, 또는 자작자작 뜨겁게 타오르다 가슴에 잔불만 남기고 사라진 사랑이 그리워지는 건 대개 이런 곳에서다. 좀 더 잘 해줄걸. 회오가 밀려든다. 이마저 살아 있다는 증거이리라. 야야, 엄살 떨 것 없다. 딱 나처럼만 살아라! 겨울나무의 일갈에 더 켕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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