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달리지 않아도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입력 2026-01-15 06:00

[말의 해, 말의 의미] 실버승마로 삶의 리듬을 되찾은 시니어들

(한국마사회)
(한국마사회)

은퇴 이후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낯설다. 매일 반복되던 역할이 사라지고, 몸은 예전 같지 않다는 신호를 보내온다. ‘이제는 무리하면 안 되지’라는 말이 습관처럼 입에 붙는 순간, 시니어의 삶은 조금씩 움츠러든다. 하지만 한국마사회가 운영하는 재활·힐링승마, 이른바 실버승마 프로그램은 그 흐름에 질문을 던진다. ‘정말 시니어는 멈춰 있어야 할까?’ 그 질문에 조용하지만 분명한 방식으로 답한다.

신정순 한국마사회 말산업진흥부 재활승마지도사(코치)는 실버승마를 단순한 운동 프로그램이 아니라, 시니어가 다시 삶의 리듬을 찾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실버승마는 함께하는 시간을 만드는 활동

(한국마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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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순 코치는 실버승마를 단순한 ‘기승 중심 승마’로 설명하지 않는다. 말을 타기 전과 후, 말과 함께 보내는 모든 과정이 프로그램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말 손질, 말 끌기, 장비 착용, 말의 습성을 이해하는 비기승 활동이 충분히 이뤄져야 비로소 기승이 가능하다.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말은 기계가 아니라 감정을 지닌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말의 몸짓과 반응을 이해하지 못한 채 올라타는 것은 위험할 뿐 아니라, 승마가 지닌 본래의 의미를 놓치게 된다. 실버승마는 말을 ‘타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존재’로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말은 커다란 동물입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두려움을 느껴요. 하지만 쓰다듬고, 솔질하고, 말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 두려움은 교감으로 바뀝니다. 말은 나를 태워주는 도구가 아니라, 함께 시간을 보내는 팀원이라는 인식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버승마는 혼자 잘하는 운동이 아니다. 말, 지도사, 자원봉사자, 참여자가 하나의 팀을 이뤄 움직인다. 서로를 살피고 배려하며 호흡을 맞추는 구조 속에서 시니어들은 자연스럽게 관계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은퇴 이후 줄어들었던 사회적 접촉이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회복되는 순간이다.


안전이 바탕이 될 때 따라오는 즐거움

(한국마사회)
(한국마사회)

고령자가 말과 함께하는 활동에 우려의 시선이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낙마 위험, 말의 돌발 행동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신점순 코치는 실버승마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안전’을 꼽는다. 안전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모든 즐거움의 출발점이다.

신 코치는 “말과 함께하는 활동에는 항상 위험 요소가 있다. 그래서 반복적인 안전교육, 말의 컨디션 관리, 숙련된 자원봉사자 양성이 필수”라며 “안전이 확보돼야 말이 주는 즐거움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거듭 강조했다.

특히 그는 서두르지 않는 접근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강조한다. 말의 특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반복 연습을 통해 몸에 익히는 과정이 긴장과 불안을 낮춘다. 지도사의 역할은 기술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시니어의 마음을 먼저 읽는 안내자다.

“어르신들은 ‘잘 해내고 싶다’는 마음과 ‘혹시 못 할까 봐’라는 불안을 동시에 가지고 계세요. 그래서 늘 실수해도 괜찮고, 반복해도 괜찮다고 말씀드려요. 말과 함께하는 활동은 시간과 연습에 비례합니다.”

이 말은 시니어들에게 큰 안도감을 준다. 잘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는 순간, 몸은 풀리고 표정은 부드러워진다.


몸보다 먼저 달라지는 것은 표정과 감정

(한국마사회)
(한국마사회)

실버승마에 참여한 시니어들의 변화는 생각보다 빠르게 나타난다. 처음에는 경직된 자세와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말과 주변을 바라보는 표정이 달라진다. 말의 작은 움직임에도 웃음이 나오고, 다음 순서를 기다리며 다른 참여자를 응원하는 여유도 생긴다.

이런 변화는 단순한 기분 전환이 아니다. 새로운 환경에서 몸을 움직이고, 타인과 상호작용하며, 생명체와 교감하는 경험은 정서적 회복을 촉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해외에서는 말과 함께하는 활동이 고령자의 우울감과 불안을 낮추고, 정서 안정과 사회적 관계 회복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연구가 꾸준히 보고됐다. 말이 주는 감각자극과 즉각적인 반응이 감정 인식과 조절을 동시에 자극하기 때문이다.

“두려움 가득하던 눈빛이 설렘과 애정으로 바뀌어요. 말, 자원봉사자, 다른 참여자와 상호작용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경청하고 배려하는 태도도 생기죠.”

신 코치는 특히 한 참여자의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이 나이에 설렐 일이 없었는데, 어제는 잠이 안 오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순간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이 일을 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죠.”

말과의 만남은 그 어르신의 하루에 다시 ‘기다림’이라는 감정을 불러왔다. 다음 수업을 기대하고, 말을 떠올리며 하루를 보내는 경험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신체적 변화 못지않게 감정의 변화가 삶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은퇴 이후 찾아온 무기력과 정서적 위축이 조금씩 풀리는 지점이기도 하다.


말과 함께 찾는 ‘나만의 속도’

(한국마사회)
(한국마사회)

실버승마가 시니어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더 빨리 달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젊을 때처럼 움직일 필요도 없다. 대신 지금의 몸으로, 지금의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속도를 찾게 한다.

이는 고령자의 신체·심리 특성을 고려한 접근이기도 하다. 노년기에는 속도와 강도를 높이는 운동보다, 균형·리듬·지속성을 유지하는 활동이 삶의 만족도를 높인다. 말의 움직임은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있어, 참여자가 무리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호흡과 자세를 조율하도록 돕는다.

말은 사람을 재촉하지 않는다. 말의 호흡에 맞추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호흡도 정돈된다. 신정순 코치는 이 과정을 ‘삶의 박자를 다시 맞추는 일’이라고 말한다.

“실버승마는 잘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 할 수 있는 만큼, 천천히, 반복하면서 가는 거죠. 그게 시니어들께 가장 잘 맞는 방식이에요.”

이런 경험이 시니어의 자기효능감 회복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본다. ‘할 수 있다’는 감각이 쌓일수록 시니어는 다시 일상 속 선택과 도전에 나설 힘을 얻는다. 말이라는 상징적인 동물을 매개로 다시 설렘을 느끼고, 몸을 움직이며, 하루를 기대하는 경험. 실버승마는 시니어에게 이렇게 말한다.

“멈춘 것이 아니라 잠시 쉬고 있었을 뿐이다. 내 나이가 어때서. 나는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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