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내가 사는 울타리 안이 전부인 양 알고 지낼 때가 있다. 늘 보던 풍경과 늘 만나던 얼굴에 익숙하다 보니 문득 그곳에 내가 보이기는 했던가 생각해본다. 그러면서 일상의 푸념과 그리움을 늘어놓으며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이테 하나 더 얹는다.
2026. 말(馬)의 해. 또다시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이다.
이럴 때 잠깐 나만의 시간에 머물 수 있는 온전한 공간을 기대하면서 제주를 떠올린다. 한 시간 남짓의 비행으로,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으면서 세상 어느 곳과도 비길 수 없을 만큼 멋진 섬 제주가 이 땅에 있다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공항 밖으로 몇 걸음만 걸어 나가면 ‘여기가 제주구나’ 하는 풍경이 떠나옴의 행복을 와락 안긴다. 눈앞의 야자수 몇 그루와 육지와는 확연히 다른 이국적인 기후가 여행지의 설렘을 전한다. 제주는 작은 섬인 듯하지만 구석구석 찾아다니다 보면 생각만큼 간단치 않다. 섬을 동서로 나누어 다닐 수도 있고, 그중에서도 북과 남으로 나누어 좀 더 섬세하게 살필 수도 있다. 이번엔 제주의 자연·문화·생태가 공존하는 동쪽의 중산간 지역을 꼬닥꼬닥(‘천천히’를 뜻하는 제주어) 돌아볼 생각이다. 그렇다고 바다를 못 볼 리 없다. 제주는 바다와 산과 숲, 그리고 마을이 한데 어우러졌다. 중산간 지역으로 이동한다 해도 달리다 보면 때로 잔잔한 수면의 해안가를 달리고 숲을 만난다. < br>

닭머르해안과 함덕해변 겨울 산책
제주에 왔으니 우선 제주섬의 바람을 마음껏 만나고 싶다면 공항에서 가까운 닭머르해안길을 달려 제주 겨울의 찬 바닷바람에 휩싸여보자. 제주 조천에 자리한 닭머르해안길은 올레길 18코스에 속한다. 말 그대로 닭이 흙을 파헤치고 양 날개를 펼친 듯한 풍경이다. 조용한 바닷가 마을에 억새 군락이 바람에 날리며 반짝인다. 닭의 머리 부분을 닮은 전망대 정자에서 멀리 제주 동쪽 바다의 해안선을 바라보며 맞는 세찬 겨울바람이 비로소 제주에 왔음을 시원하게 알려준다. 공항이나 제주시에서 가까워 지나는 길에 가볍게 들르기 좋은 감성 해안길이다. 코스도 짧아서 강아지와 함께 걷거나 연인이나 가족 단위 산책 코스이기도 하다. 해양수산부에서 우수한 해안 경관과 걷기 좋은 코스를 해안누리길로 정하고 있는데, 닭머르해안길은 50번째 해안누리길이다. 저녁노을도 예뻐서 제주를 떠날 때 들르는 코스로도 좋다.
여길 왔으니 기왕이면 닭머르해안에서 자동차로 10분 정도 거리의 함덕해변을 잠깐 거쳐가는 건 덤이다. 까마득한 바다 저편에서부터 달려온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함덕의 모래밭을 걷는 시간은 멋지다. 제주 최초 반려견 동반 입욕이 가능한 해수욕장으로 애견인들의 호응도가 높은 함덕해변의 겨울바람이 상쾌하다.
숨 쉬는 자연, 산굼부리
제주 동쪽의 오름 코스이기도 한 산굼부리. 온 산을 뒤덮은 억새 군락의 은빛 물결은 바라만 봐도 가슴 벅차다. 산굼부리는 활발한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지형으로, 화산 지질학적으로 독특한 가치를 지닌다. 산굼부리의 영봉문을 통과하는 순간 돌담길을 따라 오래된 나무들이 숲을 이루었고, 제주 동쪽 오름의 경이로움에 탄성이 절로 터져 나온다. 늦은 가을부터 겨울에 이르는 길목에서 제주의 산굼부리는 꼭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산굼부리 능선을 따라 흐르는 억새들의 일렁임이 풍성하다. 굼부리는 분화구를 가리키는 제주 방언이다. 산을 이룬 분화구들의 억새 사이로 한라산과 오름이 만드는 자연의 어울림은 아찔하도록 신비롭다. 억새밭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거대한 분화구는 온통 수목으로 빼곡하다. 한라산의 기생화산인 분화구 모양이 진기하다. 백록담보다 더 깊고 더 넓은데 움푹한 분화구 안에는 물이 고여 있지 않고 식물들만 분포돼 있다. 해설사가 말하기를 이곳은 사유지인데 국가가 연구하기 위해 빌린 형태라고 한다. 이 엄청난 지형의 땅을 소유한 개인이 누구인지 궁금하지만 열린 공간인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다. 옥황상제의 말잣딸(셋째 공주)과 한감(한별)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산굼부리에 지금은 서로 손을 잡은 연인들이 숨바꼭질하듯 오간다. 설화 속의 말잣딸과 한감도 이 좋은 계절에 어디선가 산굼부리의 신비로움을 찬미하고 있지 않을까.

고요한 숲길에서 만나는 자연의 위로, 비밀의 숲
제주 구좌읍 송당리 중산간 동로가 교차하는 길을 달리다 보면 길 옆으로 비밀스러운 숲이 보인다. 송당리 안돌오름 자락 비밀의 숲은 특별하게 관리하는 입구도 없다. 얼핏 도로변으로 열린 울타리가 보여 찾아들면 민트색 커피 트레일러에서 입장료를 받는다.
들어서자마자 60년 세월의 울창한 편백이 사방으로 빼곡하다. 산책길 블록마다 마련된 여러 갈래의 공간에는 철 따라 메밀꽃이나 동백꽃이 피어나 볼거리를 만들고 포토존을 제공한다. 터널 속으로 들어가듯 숲길을 한참 산책하다 보면 높다란 나무 사이로 뚫고 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시다. 강렬한 피톤치드가 마냥 팡팡 뿜어 나온다. 깊은 숲속에서 만난 오두막은 비밀스러운 영화 속 장면처럼 요정이 나올 듯한 분위기다. 아늑하고 평화롭다. 숲길을 다 돌아 나가면 탁 트인 들판이 나온다. 바로 앞에서 걷던 아이들은 자유로운 세상을 만난 듯 즐겁다. 다둥이들은 잔디광장에서 마음껏 뛰어놀고 부부는 벤치에 앉아 영상 촬영을 하면서 유유자적한 시간을 누린다. 요즘 도심 속 키즈카페에서 아이들이 노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자연 속 놀이 모습이다. 마구간의 말에게 당근을 건네면서 동물과 교감하고 숲을 느끼며 아이들도 완벽한 힐링을 누린다. 숲의 향기와 새소리, 바람 소리가 감싸주는 비밀의 숲은 이름처럼 고요하고 신비롭다.
제주만의 정서, 동백의 계절
다시 길을 따라 달리다 보면 어디서든 제주의 겨울 동백을 만난다. 서귀포 남원읍 위미리는 동백나무 군락지가 많으니 취향껏 찾아들면 된다. 11월 말경부터 붉은 꽃을 피워내기 시작해 이듬해 2월까지 화려한 겨울 낭만을 선사한다. 동백수목원, 동백포레스트, 돌낭예술정원, 제주허브동산, 카멜리아힐, 동박낭 등이 있고, 대부분 카페와 함께 운영해 이맘때면 SNS에 제주 동백이 쏟아져 나온다.
좀 더 제주의 겨울과 생태습지의 깊이 있는 겨울 동백을 느끼고 싶다면 조천읍 선흘리의 동백동산이 있다. 제주 동북 방향 중산간에 있는 선흘 1리의 곶자왈은 1만여 년 전 용암대지 위에 뿌리내린 람사르 습지 보호지역이다. 잘 가꾸어진 다른 동백 정원의 화려함과는 달리 동백동산은 숲의 가치를 온몸으로 느끼며 깊이 있는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나무 밑동부터 줄기까지 수백 년의 시간이 얽혀 있는 수목들이 울림으로 다가온다. 특히 람사르 습지 먼물깍으로 향하는 탐방로에 과거 4.3사건 당시 피신했던 도틀굴이 있다. 동백동산의 동백은 단순히 겨울꽃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오래된 자연과 역사의 흔적, 그리고 제주만의 정서를 느끼게 한다.
원시림의 숨결, 머체왓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에 자리한 머체왓숲길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오후였다. 몇 년 전에 왔을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눈부시도록 하얗게 반기던 메밀꽃은 이제 간데없다. 무엇보다 길이 달라졌다. 머체왓 저편으로 도로가 생기면서 숲길이 조금 바뀌었다. 머체왓숲길은 ‘돌과 나무가 한껏 우거진 숲길’이란 뜻이다. 숲속 속속들이 날것의 순수 원시림을 간직했다. 목장길을 시작으로 편백림길과 숲 터널을 지나 서중천길을 따라 걷다 보면 생명력이 살아 있는 숲이란 것이 이런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머체왓숲길과 소롱콧길이 각각 6~7㎞ 정도다. 숲은 어둠 속에 잠기기 시작했고, 서서히 노을이 내리는 목장에선 풀을 뜯던 말들이 어둠 속에서 실루엣을 드러냈다. 2026년 병오년을 상징하는 붉은 말(馬)의 기운을 받아 새해에도 여전한 날들이 이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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