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을 다녀왔다. 누군가는 묻는다. 거기가 어디쯤이냐고. 당연히 알 만한 사람들은 아는 지명이지만 더러는 헷갈리기도 한다. 알고 보면 천년 숲의 숨결이 울림을 주고 긴 세월 거듭남을 통해 세상 속의 자연임을 알린 곳, 경남 함양이다.

함양 가는 길, 지안재와 오도재
어느 날 계획 없이 길을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럴 때 차를 몰아 구불구불 굽이치는 고갯길을 천천히 오르거나 내리막을 달리는 길은 어떨지. 모든 게 빨라지는 세상이다 보니 시원하게 쭉 뻗은 길을 빠르게 달리는 질주 본능과는 기분이 사뭇 다르다.
함양에 가면 지안재와 오도재가 기다린다. 이제부터 느릿하게 운전하면서 한적한 이 땅의 길을 누려본다. 롤러코스터 레일을 연상시키는 굴곡진 고갯길을 가기 위해 브레이크 밟는 발은 쥐가 날 정도로 긴장한다. 핸들 잡은 손은 진땀이 나지만 유려한 곡선의 예술 작품 위를 지나는 듯한 마음엔 신선한 감동도 있다.
지리산을 넘는 길, 경남 함양군 함양읍 구룡리의 지안재를 오르다 보면 뱀이 똬리를 튼 듯 이리저리 휘어진 길을 가야 한다. 지안재 고갯길은 워낙 경사가 급해서 차들이 천천히 서행하도록 지그재그로 조성했다고 한다. 그 덕분에 부드러운 S라인으로 이어지는 지안재는 어느덧 명소가 되었다. 별이 쏟아지는 밤이면 구불거리는 길을 따라 자동차의 불빛 궤적을 촬영하기 위해 사진가들이 찾아들기도 한다. 그렇게 담아낸 지안재의 밤 풍경 사진은 마치 한 마리 용이 승천하는 모습처럼 매력적이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선정된 길이다.
그 옛날 함양 사람들은 지리산 장터목에 가기 위해 지안재와 오도재를 넘었다. 오도재는 ‘다섯 가지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함양 도솔암에서 수도했던 청매 인오 선사가 이 고개를 오르내리며 득도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해발 700m가 훌쩍 넘는 오도재는 과거엔 피신처로 중요한 망루였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승군이 머물렀다. 조선시대엔 시인 묵객들이 잠시 쉬었다 가던 곳이었다.
지안재에서 5분 거리의 오도재 제1관문에서 내려다보면 푸른 산천이 눈앞에 꽉 차게 들어온다. 저 멀리 지리산 천왕봉을 조망할 수도 있고, 아스라한 능선과 하늘이 하나 된 풍경으로 벅차게 다가온다.
선비 고을의 정신, 남계서원
지안재와 오도재를 거쳐 함양군 내로 접어들면 남계서원이 맞이한다. 우리 조상들의 풍류 가득한 선비문화의 흔적으로 서원이 있다. 서원은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 2019년 한국의 서원 9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고, 남계서원은 그중 하나다.
임금이 계신 한양을 기준으로 ‘좌안동 우함양’이라는 말이 생겨날 만큼 서원이 많고 묵향의 꽃을 피우던 양반 고을이다. 남계서원은 조선 명종 때 함양 출신 일두 정여창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창건된 초창기 서원이다. 훗날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경남 유일의 존속 서원이기도 하다. 남계(蘫溪)는 서원 앞 들녘을 흐르는 시내 이름이다.

남계서원 홍살문 주변 너른 잔디밭에 피어난 동글동글한 토끼풀이 앙증맞다. 평온한 자연 속 서원이다. 입구의 누각 풍영루에 올라 전면으로 탁 트인 풍경을 그 옛날 유생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맛도 있다. 강원으로 들어가는 양옆으로 조성된 연지에서 한낮의 열기가 확 느껴진다. 연못을 지나 제향 공간과 강학 공간, 지원 공간, 진입 공간으로 나뉜 서원을 돌아보고 나니 지붕 너머로 노송의 푸르름이 운치를 더한다. 우두커니 서서 긴 세월의 회포와 선비문화의 향기를 잠시라도 음미해본다. 사방으로 주변 산세가 아늑하다.
천년 숲의 깊은 맛, 상림(上林)
함양의 볼거리 중에서 상림공원을 빼놓을 수 없다. 멀리 떠나와서 굳이 공원을 왜 가냐고 할지도 모른다. 상림은 천연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된 천년의 숲이다. 통일신라 진성여왕 때 함양 태수였던 고운 최치원이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만든, 천년의 시간을 지닌 인공 풍치림이다. 당시 함양의 중심을 지나던 강이 자주 범람하고 피해가 극심해서, 군민들과 합심해 강물 줄기의 위치를 돌려 제방을 쌓고 나무를 촘촘히 심었다고 전해진다.
상림은 일단 숲에 들면 다양한 수종의 아름드리 수목이 울창해서 놀란다. 숲을 따라 산책로 옆으로 물소리가 시원하고, 기다란 숲길은 첩첩산중을 걷는 듯하다. 깊숙한 산중 느낌인 상림에 뱀이나 개구리가 없다고 한다. 어느 날 상림에서 어머니가 뱀을 보고 놀라자 최치원이 달려가 모든 뱀이나 개구리 같은 미물은 상림에 들지 말라고 한 뒤부터 뱀이 사라졌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상림을 찾는 이들이 특히 반하는 공간이 있는데 ‘이끼원’이다. 공원 내 자생하는 이끼를 한곳에서 만날 수 있도록 조성한 힐링 테마 공간이다. 이끼원 옆으로 물이 흐르고 습한 환경에서 독특한 이끼들이 온통 뒤덮었다. 연두와 초록의 공간이 신비롭다.
상림의 여정은 끝없이 이어진다. 숲길은 2km 남짓이다. 이전에는 그 이상이었으나 점차 숲이 나뉘고 사라지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크기가 달라지긴 했지만, 천년 숲의 정취는 여전하다. 푸르름을 만끽하는 여름이 지나면 가을빛 상림의 깊은 멋엔 누구나 취할 수밖에 없다. 사계절 모두 각기 다른 멋과 특성을 보여주는 오랜 역사를 품은 공원이다. 발걸음을 조금 돌리면 곧바로 운동시설이나 음악 분수대가 있고, 휴식을 위한 정자나 벤치가 나타난다. 옛 숲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도 잊지 않는다.
깊은 숲속 휴식, 용추폭포와 자연휴양림
함양의 인물로 정여창과 최치원만 있는 게 아니다. 선비 고을답게 거연정, 농월정, 동호정, 군자정 등 풍류 넘치는 정자들이 시대적 인물들과 연결 지어 선비문화 탐방로를 따라 숱하게 이어진다. 연암 박지원은 함양군 안의 현감이었다. 용추계곡 가는 길의 안의면 안심마을 일대에 물레방아 테마공원이 있다. 함양은 물레방아가 상징적인 고장이기도 하다. ‘열하일기’의 박지원이 중국 여행을 하면서 본 과학기술 중 백성의 실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기구를 시험해보고자 했다. 물레방아를 돌리기 좋은 용추계곡 물길의 낙차를 이용해본 것이다. 당시에는 첨단 시스템이었을 듯싶다. 공원은 소박하다. 사극이나 근대소설에 나올 듯한 설치물들이 자연 속에 놓여 있다. 박지원의 애민정신과 실용주의적 실천을 구체화한 물레방아를 보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다.
물레방아 공원을 지나면 용추사와 용추폭포가 나온다. 깊은 산속의 절집 용추사는 용추계곡 위에 얹힌 듯 자리 잡았다. 절 마당에서도 들려오는 용추폭포의 장쾌한 물소리가 더위를 날린다. 폭포 쪽으로 다가가기만 했는데도 서늘하다. 비가 내린 다음에는 엄청난 수량의 폭포수 소리가 우레와 같다고 한다. 용추계곡을 지나 용추자연휴양림을 찾아가는 산길은 의외로 멀다. 그만큼 자연휴양림이 깊은 산속에 있다. 깊고 깊은 산속에 콕 박힌 휴양림은 아주 작은 숲속 집이다. 숨어 있기 좋은 방이라고나 할까.
함양, 잠깐만 돌아볼 만한 곳이 아니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유홍준 교수는 함양 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함양과 산청의 답사를 고작 3박 4일로 잡아놓고는 그곳의 모든 유적을 죄다 섭렵할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 땅의 넓이만 생각하고 깊이를 생각지 않은 발상이며 국토에 대한 능멸죄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