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이면 어린이날, 가족 모임, 외식과 선물 등으로 자연스럽게 소비가 증가한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이 풍경에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겼다. 소비의 중심에 조부모가 서기 시작했다. 손주에게 건네는 용돈과 선물은 물론, 외식과 체험, 여행, 교육비까지 조부모의 지출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단순한 ‘용돈 문화’를 넘어 하나의 소비 흐름으로 읽히는 변화다.
통계청의 ‘가계금융복지조사’(2024)에 따르면, 60대 이상 가구 연간 가계지출은 약 2987만 원으로, 이는 소비지출과 비소비지출(자녀·손주 지원 등)을 합친 금액이다. 이 가운데 비소비지출이 37.6%이며, 소비지출은 62.4%를 차지한다. 특히 자녀·손주 지원 등이 포함된 비소비지출 비중이 최근 5년간 10% 가량 증가했다. 명절과 생일 같은 특별한 날에만 일어나는 일회성 지출이 아니라 방학, 체험, 외식, 여행, 교육비까지 이어지는 반복적 소비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저출산으로 손주 수는 줄었지만, 한 명의 손주에게 집중되는 애정과 지출은 오히려 커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 결과 조부모의 지갑은 가족 안에서 가장 먼저 열리는 지갑이 되고 있다. 단순한 ‘용돈, 선물 문화’를 넘어 하나의 소비 흐름으로 읽히는 변화다. 이른바 ‘손주 경제’다.
가족 안에서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돈’
‘손주 경제’는 겉으로 보면 소비다. 장난감을 사고, 외식을 하고, 여행을 간다. 그러나 구조를 들여다보면 조금 다르다. 진미정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이를 ‘가족 내부의 자원 이전’으로 해석했다. 조부모가 쓰지 않았다면 부모가 썼을 돈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손주 경제의 본질을 정확히 짚는다. 새로운 소비가 생긴 것이 아니라, 기존 비용이 다른 세대로 이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같은 변화는 소비구조의 변화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부모가 주도하던 손주 관련 비용이 이제는 조부모에게로 이동하면서, 가족 내부의 자원배분 방식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 소비의 주체가 바뀌면 시장도 따라 움직인다. 유통업계와 여행업계, 교육업계가 조부모 세대를 중요한 고객층으로 보기 시작한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손주를 위한 소비는 더 이상 사적인 선의에 머물지 않고, 하나의 산업을 움직이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구조적인 요인이 있다. 경제적 자산을 축적한 베이비붐 세대가 노년기에 진입했고, 자녀 세대는 주거비와 교육비 부담 속에서 상대적으로 여력이 줄어들었다. 여기에 저출산으로 손주 수가 감소하면서, 한 명의 손주에게 집중되는 소비는 더욱 커졌다.
진미정 교수는 “손주 경제는 세대 간 자원 형평성을 높이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면서도 “그 구조가 반복될수록 조부모 세대에 부담이 집중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고 짚었다.
숨은 소비 주체에서 핵심 소비자로

손주를 중심으로 한 소비는 이제 하나의 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업계에서는 그 규모를 약 100조 원에서 최대 160조 원대까지 추산한다. 과거에는 부모가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조부모가 소비의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축으로 이동하고 있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의 ‘2025 KB골든라이프 보고서’에 따르면, 50~70대 시니어는 이미 국내 소비 시장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가족 관련 지출 비중이 높은 특징을 보인다. 이는 단순한 지원을 넘어 소비의 의사결정권이 조부모에게 이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출 항목도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용돈과 장난감 중심이던 소비는 교육비, 디지털 기기, 여행, 공연, 외식까지 넓어졌다. 특히 최근에는 ‘물건’보다 ‘경험’으로 이동하는 흐름이 뚜렷하다. 문화체육관광부 ‘국민여가활동조사’에서도 60대 이상에서 가족 동반 여가활동 비중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소비가 단순 지출이 아니라 관계 형성의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의 조부모가 ‘지원자’였다면, 지금의 조부모는 ‘참여자’다. 손주에게 무언가를 사주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경험을 공유하는 소비로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산업 구조에도 영향을 미친다. 결제 주체와 이용 주체가 분리된 소비가 일반화되면서, 기업들은 ‘부모’가 아닌 ‘조부모’를 주요 고객으로 설정하기 시작했다. 손주 경제는 단순한 시장 확대를 넘어, 소비의 구조 자체를 재편하는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해외는 이미 ‘Grandparent Economy’
조부모가 키우고, 소비하고, 시장을 만드는 흐름은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Grandparent Economy(조부모 경제)’라는 개념이 자리 잡았다. 2025년 미국 더 시니어리스트(The SeniorList) 연구팀은 미국의 조부모 경제 시장이 연간 350조 145억 원(2380억 달러) 규모이며, 약 6000만 명(96%)의 조부모가 손주에게 평균 597만 9417원(3917달러)을 지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39%는 손주들이 부족함 없이 살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고 있다고 답했다. 그뿐 아니라 미국은퇴자협회(AARP)는 미국 조부모 1인당 연간 손주 지출이 384만 6074원(약 2562달러)이며, 50% 이상이 양육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일부 조부모는 손주 양육의 핵심 역할을 맡으며, 소비와 돌봄을 동시에 담당하는 주체로 변화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시장도 빠르게 반응해 조부모와 손주를 함께 겨냥한 여행·교육·체험 산업이 성장했다.
한국 역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다만 문제는 그 변화를 ‘가족 내부의 일’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손주를 위해 충분히 지원할 수 있는 가정과 그렇지 못한 가정의 차이는 결국 교육과 경험의 차이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사회적 격차로 확장될 수 있다. 결국 더 이상 개인의 선택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이 된다.

사랑과 부담 사이, 지속 가능한 손주 소비의 기준
이 같은 변화가 항상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손주를 위한 지출은 가족 간 유대를 강화하고 부모 세대의 부담을 덜어주는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부담 구조를 만들기도 한다.
문제는 ‘반복’이다. 일회성 지출은 선물로 남지만, 반복되는 지원은 기준이 된다. 기준이 형성되면 기대가 생기고, 기대는 점차 당연함으로 굳어진다. 지원을 받는 쪽은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고, 지원하는 조부모는 점점 더 큰 부담을 떠안게 되는 구조다.
진미정 교수는 “처음에는 축하의 의미로 시작된 지원이 반복되면 자연스럽게 기준이 된다. 그 기준이 높아질수록 조부모의 부담도 함께 커질 수 있다”며 “부모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지원은 바람직하지 않고, 손주의 소비 기준 자체를 높이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 구조가 장기화되면 문제는 더 커진다. 조부모의 노후 자산이 점차 줄어들고, 가정 간 소비 격차도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통계청 자료에서 확인되듯 고령층 빈곤율은 OECD 최고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노후 자산 관리의 중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명확한 기준이 부족하다. 가정마다 소득 수준과 재정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를 쓰느냐’가 아니라 ‘어떤 원칙으로 쓰느냐’다.
손주를 위한 소비가 오래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조부모 자신의 삶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이뤄져야 한다. 사랑이 부담으로 바뀌는 순간, 관계 역시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지갑이 열리는 곳에 시장이 생긴다. 그리고 그 시장의 방향은 결국 한 사람의 선택에서 시작된다.
도움말 진미정 서울대학교 생활과학대학 아동가족학과 교수한국가족정책학회 회장, 한국가족관계학회 회장, 저출산고령사회 위원회 아동돌봄분과 위원 등을 역임했고, 대한가정학회 부회장, 서울시 인구정책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족, 일·생활 균형, 저출산 및 돌봄 관련 정책, 탈북가족과 다문화가족을 연구하고 있으며, 그 성과를 인정받아 서울대학교 생활과학대학 교수학술상, 세계일보 다문화정책 대상, 교육부 학부모정책추진 유공자 표창, 국민포장(관악구 건강가정지원센터·다문화가족지원센터)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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