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등산 바우정원은 사뭇 독특하다. 숫제 바위산이라 불러도 무방할 만큼 돌이 흔전만전한 산골짝에 정원을 조영하다니. 해외엔 몰라도 국내엔 이런 정원이 다시없다. 바위투성이 악산에 정원을 꾸릴 발상 자체가 너무 기발해 비현실적일 수 있다. 순천만국가정원 내에 바위정원이 있다. 그러나 인근 고속도로 건설 공사장에서 나온 바위 다수를 모아 듬성듬성 배치한 수준에 그쳤다. 무등산 바우정원은 순도와 농도가 높은 바위정원이다. 자연 정원의 본이다. 천연 기암괴석의 원초성과 야생성을, 미감과 상징성을 오롯이 만끽할 수 있는 이색 정원이다. 바위를 애호하는 사람들은 환호하리라.

정원 초입엔 돌이 깔려 있다. 주변에서 고른 판판한 돌들로 통로를 다듬었다. 무뚝뚝한 돌길이지만 가지런히 규격과 물매를 맞춰 발길에 순하다. ‘사뿐히 즈려밟고 오시옵소서!’ 돌들의 초대장을 건네받는 기분이다. 길 좌우편엔 이끼가 무성하다. 어미 등에 업히고 싶은 갓난아기처럼 바위와 나무둥치를 기어오른 이끼들의 초록이 상큼하다. 꽃을 피울 줄 모르는 이끼. 뿌리라곤 몇 오라기 실밥처럼 변변찮은 ‘헛뿌리’뿐. 그래 남의 살에 입주해 간신히 살아가는 식물계의 마이너리티. 여려서 애잔하나 타고난 운명에 순응하며 능란하게 살아가는 저 고결한 풀, 이끼!

사람들은 흔히 이끼를 보잘것없는 풀로 친다. 그러나 이끼들이 번성해 수평으로 또는 수직으로 퍼진 이곳 이끼 마을엔 생명의 아우성과 자존감이 완연하다. 4억여 년 전 여느 초목보다 먼저 지구에 데뷔해 깡과 전략을 길렀으니 알조다. 무적함대에 맞먹을 실력자다. 우주의 황량한 행성에 툭 던져놓아도 끄떡없이 살아갈 생물로 알려졌다. 사람이 이끼에 필적할 길은 없다.
이끼들이 모여 사는 구역은 이끼정원이라 불린다. 그런데 색다른 사물이 곁들여져 있다. 습기를 좋아하는 이끼의 생태에 맞추어 안개 분사 장치를 설치한 것. 조각가가 만든 작품이다. 둥글게 휘며 뻗어나가는 넝쿨인 양 나선형으로 비튼 호스의 형상이 묘해 위트가 느껴진다. 정원엔 이와 유사한 구조물이 많다. 즉 예술을 입힌 정원이다. 동선 조성을 위해 소소한 범위 안에서 바윗돌을 걷어내거나 옮겼을 뿐, 수려한 기암들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은 대신 곳곳에 세미 아트를 집어넣었다.

이는 무슨 조미료를 가미하기 위한 얕은 수가 아니다. 바위의 본연과 자연의 흐름을 살려 격과 결을 돋웠다. 자제력을 발휘해 너무 튀지 않게 만들었다. 그러고서도 눈길과 마음을 붙잡는다. 공들인 흔적과 우거진 조형 솜씨가 환히 비쳐서. 건축가, 디자이너, 미술인, 석수(石手) 등 프로들의 작품답게 재미있고 우미한 게 아닌가. 미학과 기능성을 동시에 구현했다. 덕분에 관람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무료해질 틈이 없다.

구조물들의 내용을 볼까. ‘야외공연장 도토리’에선 때로 소공연이 펼쳐진다. ‘팽나무 서재’에선 책을 빌려준다. 정원 어디에든 앉아 숲을 흔드는 바람 소리와 물소리를 들으며 자유롭게 책을 읽으라고. 잠시나마 속세를 벗어나라고. 계곡을 건너는 ‘견우다리’와 ‘직녀다리’는 앙증맞아 살갑다. ‘편백숲 트리하우스’에 올라서서는 숲의 동향을 관찰할 수 있다. 가을이면 쑥부쟁이 하늘거리는 자리에 있는 ‘쑥부쟁이 갤러리’에선 간헐적으로 전시회가 열린다. 정원주의 땀이 밴 가드닝 도구들과 골동품을 전시한 ‘수평창고’도 살뜰하다. 비틀스의 곡 ‘옐로 서브마린(Yellow Submarine)’ 가사에 나오는 노란 잠수함에서 착상한 것으로 보이는 잠수함 모양의 대형 물통 ‘비틀깡통’도 별미. 일일이 나열하기도 숨차다. 상다리 부러질 성찬이다. 포식을 통해 배를 불리듯이, 문화예술로 가슴을 채우라고 차린 밥상이다.
압권은 물론 바위 경관이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식의 과격한 조경을 삼간 덕분에 경관의 순수성이 살아 있다. 바위들이 뿜는 아우라가 짙다. 새파란 하늘처럼 투명하고 깊어 눈부시다. 돌길은 연신 바위 곁을 스쳐 나아간다. 잇달아 바위 군락 속으로 들어간다. 파도를 헤치는 수영처럼 돌계단들이 두 팔을 휘젓는 형국이다.

뭐랄까, 바위들은 클래스가 높다. 크거나 작거나, 허공으로 솟거나 땅바닥에 엎드렸거나 저마다 잘났다. ‘고래눈물바우’와 ‘하늘종’ 등 이름 붙은 기암괴석은 물론, 그저 널브러진 바위들까지 하나같이 미와 위엄을 갖추었다. 인간의 예술 작품을 훌쩍 능가한다. 천년만년 세월, 그리고 바람과 비와 햇빛이 빚은 역작이니 어련하랴. 바위가 표상하는 영원성, 초월성, 포용성은 또 어떻고? 그 광활한 정신세계에 매혹될 수밖에 없다. 그러곤 모처럼 겸손해진 태도로 바위의 형용과 내면을 뜯어보며 자가 검문을 하게 된다. “나여! 넌 누구냐? 언제 한번 바위처럼 살아본 적 있나?”

사람이 바위처럼 살긴 어렵다. 바위처럼 한자리에 고요하게 박힌 태세로 중심을 잡고 살기가 쉽던가. 묵상 삼매에 빠져 미동조차 없는 바위. 순간순간 물결처럼 뒤집히는 인간의 마음. 대비도 이런 대비가 없다. 우리는 그저 저 투박한 무생물에게 위로받을 뿐이다.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바위처럼 묵직한 삶을 동경할 뿐이다. 시인 유치환이 그랬다. 시 ‘바위’를 통해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고 노래했다. 불가에선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위를 경전으로 읽는다. 이미 법을 설하는 바위를 굳이 헤집어 불상을 만들고, 그 앞에 바위처럼 뭉쳐 앉아 득도를 갈구한다. 그렇다면 이 바위정원은 수행 도량? 수행은 어려워 아득하다. 가만히 눈 감아 속을 가라앉히는 명상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하라고, 정원주 안국현이 바위정원을 만들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말했다. ‘어리석은 사람은 서두르고 영리한 사람은 기다리지만, 현명한 사람은 정원으로 간다.’ 정원을 만들며 지침으로 삼은 명언이다. 정원 조성 작업은 까다로웠다. 바위 더미 속에 길을 내기가 실로 힘들었는데,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을 치유했다. 살 길, 나아갈 길이 모두 바위 안에 들어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바위를 사물로 보지 말고 ‘길’로, ‘인생 해법서’로 보란 얘기다. 바위는 무슨 테레사 수녀도 아니면서 받은 것 없이 주기만 한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은 인생에 덜미 잡힌 사람들에게 많은 걸 기부한다. 휴식을, 위안을, 꿈을 준다. 고독의 힘을, 독존의 희열을, 종국엔 인간이나 바위나 흙으로 돌아갈 운명임을 통찰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아하! 바위 아래에 풀꽃 피어 환하다. 꽃이 영롱한 건 맑은 솔바람 소리 때문만은 아닐 테다. 장부처럼 훤칠한 바위에 슬쩍 기대어 핀, 그 주체 못 할 열락(悅樂)에 겨워 찬란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