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록·이태옥 작가

올해 아흔둘인 송재록 작가는 AI를 배우며 새로운 그림을 만들고, 여든여덟의 이태옥 작가는 10여 년 동안 그린 민화를 과감히 잘라 또 다른 작품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두 사람의 나이를 합치면 180세. 이들이 함께 연 첫 부부전의 제목이기도 하다. 흔히 이 나이대를 수식하는 단어는 ‘노년’이나 ‘황혼’이지만, 송재록·이태옥 작가의 하루를 들여다보면 그런 단어가 무색해진다.
사람들은 나이를 기준으로 삼는다. 예순이면 은퇴를 말하고, 일흔이면 취미를 찾고, 여든이면 쉬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조금 다르게 흐르는 곳이 있다. 바로 송재록·이태옥 작가 작업실이자 집이다. 이들의 삶을 보고 있으면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사람을 늙게 만드는 것은 정말 나이일까, 아니면 더 이상 배우지 않는 순간일까?’
배우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청춘이다

송재록 작가의 삶은 처음부터 예술가의 길과는 거리가 멀었다. 1934년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난 그는 열두 살에 해방을 맞았고, 아버지와 생이별한 채 어머니와 형제들과 함께 두만강을 넘어 석 달에 걸쳐 서울에 도착했다. 열세 살부터 해양경비대 군속으로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전쟁과 생계 속에 학업은 뒤로 밀렸다. 중학교 1학년 2학기로 편입했다가 6.25전쟁으로 다시 중단되고, 해군에서 4년을 복무한 뒤 또래보다 몇 해 늦게 고등학생이 됐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진학한 후 생계를 위해 2학년 때부터 학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쳤고, 방송국 중국어 강좌를 맡으면서 평생 ‘중국어 가르치는 사람’으로 살았다. 이후 대만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고, 인하대학교에서 20년간 재직하며 국내 중국어 교육 1세대 학자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유튜브를 통해 중국어 강의를 이어가는 등 국내 중국어 교육의 초창기를 이끌었다. 하지만 그 긴 세월 동안 마음속 한편에는 늘 같은 바람이 남아 있었다.
‘언젠가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이 꿈은 정년을 앞두고서야 현실이 됐다. 연구실 한쪽 구석에 이젤을 들여놓으면서 시작된 것이다. 누구보다 늦었지만, 누구보다 꾸준히 그렸다.
재미있어서 계속된 일

많은 사람이 새로운 취미를 시작하면서 ‘잘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낀다. 하지만 송 작가는 “꼭 잘 그릴 필요 있나? 아이처럼 그리면 어때서”라며 정반대로 생각했다.
그에게 그림은 경쟁이 아니라 놀이였다. 유화를 그리다가 냄새와 붓 씻는 번거로움 때문에 수묵으로 옮겨갔고, 수묵을 그리다 보니 화면이 단조롭게 느껴져 컴퓨터로 색을 입히기 시작했다. 색을 입히다가 동영상을 만들게 됐고, 최근에는 AI와 NFT(디지털 자산 원본성과 소유권 증명 기술)로 확장하며 작업하고 있다. 이런 확장은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고 쌓아온 결과다. 사람들은 “AI로 예술을 대신하는 것 아니냐”고 묻지만 그는 담담하다.
“AI가 예술을 망친다 또는 창의성을 없앤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AI도 연필이나 붓처럼 하나의 도구일 뿐이에요. 중요한 건 그걸 가지고 내가 무엇을 표현하느냐죠.”
새로운 기술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모르는 기능이 생기면 딸에게 배우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는다. 아흔둘에도 그는 여전히 학생이다.
이태옥 작가의 시작 역시 특별할 것 없었다. 사학과를 졸업한 그는 남편이 온종일 작업실에서 그림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다 문화센터에 등록했다.
“내가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어서 민화를 시작한 게 아니에요. 잘 그리고는 싶은데 재주가 없었어요. 그래서 문화센터를 다니면서 그리기 시작한 게 지금까지 이어진 거예요. 10여 년이나 흐를 줄 몰랐지.”(웃음)
그렇게 시작한 민화는 어느새 10년을 훌쩍 넘겼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전통 양식을 따르는 민화의 특성상 오래 그릴수록 비슷한 그림이 쌓여갔고, 그는 자신만의 화법에 갈증을 느꼈다. 완성작은 손대지 않는 것이 관습이지만, 그는 정반대 선택을 했다. 완성한 민화를 가위로 오려 다른 그림에 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꽃을 옮기고, 산을 이동시키고, 새를 날렸다. 현실의 원근과 물리 법칙 대신 자신만의 기억과 감정의 질서로 화면을 재구성했다. 그는 이 작업을 ‘불가능한 민화’라 부른다.
“완성된 작품엔 손대지 않는 것이라고 하지만 새로운 걸 찾고 싶었어요. 그림들에 애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잘린 그림들이 아깝진 않았어요. 자르고 붙여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는 작품이 나오더라고요. 그때 정말 짜릿했어요.”
완성을 해체가 아니라 재창조로 받아들인 순간이었다. ‘모란이 산을 넘는 날’, ‘맹수의 꿈’, ‘풍요’, ‘보랏빛 유영’, ‘꽃의 길’, ‘수호’ 등 그가 최근 선보인 작품들은 모두 한지 위에 완성된 민화를 오려 붙인 콜라주다. 화려한 색감의 꽃과 동물, 산수가 한 화면 안에서 현실에는 없는 방식으로 재배치돼 있다. 그의 작업을 두고 “해체가 아니라 시간을 다시 연결하는 방식”이라는 평이 따라붙는 이유다.
꾸준히 작업해온 덕분에 올 5월 ‘180세 부부展’이란 이름의첫 부부 전시회를 열었다. 미술 전시 기획을 업으로 삼은 딸이 그동안 여러 전시를 기획해온 경험을 살려, 어버이날 선물처럼 준비했다. 부모의 나이를 더한 숫자를 제목으로 내세운 발상은 관람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겼지만, 정작 전시장을 나서며 사람들 기억에 남은 것은 숫자가 아니었다. 92세에도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88세에도 완성작을 과감히 해체할 줄 아는 태도, 그 자체였다.
전시는 끝났지만 두 사람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이 작가는 현재 경기도 용인시 구산성당에서 열리는 그룹전에 작품을 선보이고 있으며, 내년에는 네덜란드에서도 전시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국내 갤러리에서 시작된 ‘불가능한 민화’가 이제 유럽 관객과 만날 차례다. 전통 민화의 문법을 스스로 해체하고 재구성해온 그의 작업이 문화적 배경이 전혀 다른 관객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읽힐지 지켜볼 대목이다.
송 작가 역시 “더 새로운 걸 시작한다는 건 이제 욕심”이라면서도 “지금 하는 걸 잘 유지하는 것, 그것으로도 충분히 좋다”고 현재진행형의 태도를 놓지 않았다.
서로 다른 길, 같은 방향

두 사람은 서로의 작업에 깊이 간섭하지 않는다. 대신 상대가 꾸준히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모습 자체를 가장 큰 응원으로 여긴다.
송 작가는 “이런 취미 생활이 없었다면 매일 따분했을 거예요. 이렇게 계속 작업하는 모습을 보면 보기 좋아”라며 민화를 시작한 아내 이태옥 작가를 응원했다.
이 작가는 남편이 컴퓨터와 AI를 배우는 모습을 보며 “나는 저걸 못 하잖아. 그래도 옆에서 보면 신기하고 좋아”라며 부럽게 바라봤다.
두 사람의 하루는 단조롭지만 지루하지 않다. 아침에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그림을 그리고, 일주일에 서너 번 이상 산책을 한다. 송 작가는 “특별한 건강 비결은 없지만 젊어서부터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고, 최근 4~5년째 하루 한 끼만 먹는다”고 밝혔다.
“한 끼 먹는 게 체중 유지에도 좋은 것 같아요. 젊었을 때 몸을 혹사하지 않은 덕분에 지금껏 건강하게 지내고 있어요. 무엇보다 그림 그리는 게 즐거우니까 저절로 관리가 된다고 생각해요.”
시작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송재록·이태옥 작가가 나이를 의식하지 않는 점이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다. 송 작가는 “나이는 잊고 사는 게 좋은 것 같다. 하늘에서 오라고 하면 가는 거고, 아니면 그전까지 즐겁게 살면 된다”면서 자신의 인생철학을 이야기했다. 이 작가 역시 “우리는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산다. 끊임없이 뭔가를 하는 게 즐거우니 90이라는 숫자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이 들어감에 따라 포기한 것이 없느냐는 질문에는 오히려 되물었다.
“포기할 게 뭐가 있나요. 지금까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니 아쉬울 것이 없고, 그림이든 어학이든 계속 뭔가 배우고 있으니 오히려 얻은 게 많죠.”
우리 사회는 나이를 기준으로 많은 것에 마침표를 찍는다. 은퇴하면 새로운 공부는 어렵고, 예술은 젊은 사람들의 영역이며, 디지털 기술은 따라가기 힘들다고 선을 긋는다. 하지만 송재록·이태옥 작가의 삶은 이런 통념에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반박하고 있다. 나이가 배움을 막는 것이 아니라, 배우지 않는 순간이 사람을 늙게 만든다는 것을 두 사람은 붓과 마우스, 가위로 매일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송 작가는 친구들에게도 꾸준히 “그림이 아니어도 괜찮다. 악기든, 외국어든, 글쓰기든 무엇이든 좋다. 중요한 것은 잘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하는 것”이라고 권한다며 웃어 보였다. 생각해보면 두 사람의 삶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뛰어난 재능이 아니었다. 열세 살 가장이었던 소년은 평생 생계를 책임지느라 꿈을 미뤘고, 그림에 재주가 없다고 생각했던 소녀는 문화센터에서 붓을 처음 들었다. 그러나 시작한 뒤에는 멈추지 않았다.
“늦은 건 없어요. 그저 시작을 안 했을 뿐이죠. 그냥 하면 되는데….”
이 말은 지금 이 순간 무언가를 망설이는 모든 중장년을 향한 다정한 격려가 아닐까.

![[다음 삶의 설계] 웰니스 한 달 살기, 무엇이 다를까](https://img.etoday.co.kr/crop/190/120/2374496.jpg)


![[60+궁금증] 사기 피해, 순진해서가 아니라, '믿어서’](https://img.etoday.co.kr/crop/190/120/2374998.jpg)







![[일자리 유형 테스트] 내 취향에 맞는 일자리 선택하기](https://img.etoday.co.kr/crop/360/203/2364397.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