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확이 끝나고 나면 농번기에서 농한기로 넘어가며 룰루랄라 하려나 할 테지만, 실상은 잡다한 일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기에 블루베리 농장의 8월은 수확기 못지않게 분주하다.

“열매를 다 따고 나면 블루베리에게 상을 줘야 해. 사람으로 치면 임신해서 출산한 셈이니까. 산후조리를 잘 해줘야 내년에도 실한 열매를 매달 거야.”
충남 천안시 성환읍에서 6만 6115㎡(2만 평) 배 농사를 짓는 블루베리 주인장의 절친이 초보 농사꾼에게 코치해준 이야기다.
올해는 7월 중순에 주문받은 블루베리 배송을 마감하고, 하순에 로컬푸드 출하를 끝냈다. 농사 초창기엔 7월 말부터 8월 초가 수확기의 피크였고, 8월 중순이 돼서야 가까스로 끝물 정리를 마치곤 했다. 최근 10년 사이 블루베리 수확 기간이 무려 한 달가량 앞당겨진 걸 보면, 기후 변화의 속도가 그저 놀라울 뿐이다. 게다가 최근 들어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는 블루베리 나무들이 자꾸 늘어가는 걸 볼 때면, 기후 변화의 위력이 두렵기까지 하다.
블루베리는 참으로 예민한 과일이라 배송 과정에서 혹 무르진 않을까, 행여 터지면 어쩌나 늘 마음 졸인다. 장마철엔 습도가 높아지면서 결로 현상까지 나타나 고객들로부터 오해를 받거나 원성을 듣기도 한다. 냉장고에서 꺼낸 사이다병에서 물이 줄줄 흐르듯, 결로 현상이 생긴 블루베리를 사진 찍어 보내며 항의하는 고객도 있었다. 그래도 지난 15년 동안 재고 없이, 반품 없이 무사히 한 해 수확을 마무리하곤 했으니 생각할수록 고마운 일이다.

농부의 결실로 이어가는 관계
해마다 수확이 끝날 때쯤이면 고마웠던 얼굴을 떠올리면서 짤막한 감사 글과 함께 블루베리 선물을 보낸다. 겨울에 거름 얹어주고 봄에 가지치기하고 여름에 수확할 때까지 일 년 농사의 땀과 노력과 정성이 듬뿍 들어갔기에, 선물 포장할 때면 마음이 제법 뿌듯해지곤 한다. 우리 농장의 블루베리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소중한 관계를 이어가는 끈이란 초심을 되새기는 의미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농장의 단골 고객 명단에는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온 지인들 이름이 가득하다. 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 동창들 이름도 눈에 띄고, 옛 직장 동료의 친근한 이름 뒤로 아들 친구 부인 이름도 올라와 있다. 친정 언니 친구는 지금까지 이런저런 선물을 돌려봤는데 블루베리 선물을 돌린 후에야 “이 귀한 걸 보내주다니 고맙습니다”, “블루베리 선물 받고 감동했어요” 하는 감사 인사를 두루 받았다면서 단골 고객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생(生)블루베리 철이 돌아오면 주위 분들에게 선물을 돌리는 고객 이름도 하나둘 늘어가며 뿌듯함도 배가 됐다. 선물을 보낼 때는 보낸 이의 마음이 정성스레 전달되길 바라며, 특별히 빛깔 고운 색지에 “○○의 선물입니다”로 시작되는 편지를 함께 넣어 보낸다.
그러던 어느 해인가, 한 아버지가 두 딸에게 블루베리를 선물하면서 주소를 바꿔 보낸 적이 있었다. 큰딸 이름 아래 작은딸 주소를, 작은딸 이름 아래엔 큰딸 주소를 보낸 것이다. 당황한 아버지는 직접 농장으로 전화를 걸어 ‘실은 우리 딸들이 사이가 나빠 연락을 안 하니, 농장에서 직접 오해를 풀어주십사’ 부탁해오신 것이다. 두 딸에게 전화로 “내용물은 똑같은데 농장의 실수로 배달 사고가 일어나 정말 죄송하다. 상한 마음 푸시고 아버지 마음을 헤아려달라”고 그 아버지를 대신해 간절한 마음을 전했던 기억이 난다. 의도치 않게 한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된 것 같아 내심 당황했던 기억과 함께.
평소 왕래가 뜸해 서먹한 사돈댁이나 먼 곳에 살아 자주 만나지 못하는 큰집, 작은집에도 블루베리를 선물로 보내드린다. 블루베리 덕분에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안부도 주고받고, 집 안팎 소식도 나누는 동안 서먹함도 사라지고 미안함도 덜어지니 이 또한 고마운 일이다. 농장에서 제일 맛있는 열매는 새들 차지지만, 블루베리 마니아인 손주들을 위해 굵고 실한 열매들 챙겼다가 보내는 일도 빼놓을 수 없는 기쁨 중 하나다.
나는 그해 가장 고마웠던 얼굴을 떠올리며 그중 한 사람을 정해 짤막한 감사 글을 담아 보내곤 한다. 그동안 감사를 표했던 주인공으로 가난했던 유학생 시절 나를 가족처럼 알뜰살뜰 보살펴주었던 절친, 반년 넘게 고생하던 역류성 식도염을 한방에 치료해준 이비인후과 의사, 학과장을 맡아 동분서주할 때 헌신적으로 도와주었던 사회학과 행정조교, 함께 나이 들어가며 궂은일 마다 않고 챙겨주는 친구 같은 제자, 복잡한 세금 계산을 흔쾌히 맡아 해결해준 세무사님 등의 얼굴이 떠오른다.

농사 마무리는 주인의 손길로
선물 보내기를 대략 마치고 나면 이제부터 끝물 정리가 기다리고 있다. 농장의 끝물 정리는 지루하기도 하거니와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한창 수확기엔 알바를 구할 수도 있고 일손의 도움을 청할 수도 있다. 하지만 끝물 정리는 기꺼이 하고 싶다고 손드는 사람도 없거니와 누군가에게 맡길 수도 없는 일이다. 아무도 대신 해줄 수 없는 일이기에 오롯이 주인이 감당해야만 한다.
한데 농장의 끝물 정리를 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인생의 마지막과 묘하게 닮았구나 싶다. 무엇보다 끝물 열매는 빛깔부터 초라하게 바뀐다. 우리네 겉모습이 나이 들면서 추레해지듯 말이다. 아침 햇살에 영롱하게 반짝이던 블루베리 특유의 보랏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뽀얗게 덮여 있던 분(粉)까지 깨진 채, 희미하게 바랜 빛깔의 열매가 듬성듬성 눈앞에 나타난다.
훤칠했던 키가 5㎝나 줄었다며 끌탕하는 블루베리 주인장처럼, 끝물 열매는 크기도 작은 것이 정말 볼품없다. 주인 몰래 뒤늦게 맺힌 열매들이 나중에 익어서 속을 썩이기도 한다. 과일은 같은 종자 중엔 클수록 맛이 좋다는 복숭아 농장 주인의 말씀이 백번 옳다. 볼품없이 작은 끝물 블루베리는, 보기만 해도 어금니에 침이 고이던 새콤달콤한 맛은 물론 한입 깨무는 순간의 탱글탱글한 식감도 모두 사라져버린 채 밍밍하기만 하다.
끝물을 정리하노라면 지난 한 해 동안의 실수가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내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어버리고 싶다. 겨울 가지치기할 때부터 새봄 꽃눈 따주기를 거쳐 열매 솎아줄 때, 제때 제대로 끝맺지 못했던 작업의 결과물이 가감 없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뿌리가 얕게 뻗어나가는 특징을 갖고 있는 블루베리는 7~8개 정도 굵은 가지를 남기고 나머지 새로 올라오는 가지는 과감하게 잘라내야 한다. 한데 막상 가지치기할 때면 아까운 마음이 올라와 ‘올해만 열매를 따 먹자꾸나’ 하고 남겨두게 된다. 묵은 가지일수록 크기도 작고 맛도 시큼한 열매를 늦게까지 달곤 한다.
그뿐이 아니다. 안쪽으로 난 가지들도 가차 없이 잘라내야 하는데 미련이 있어 남겨두면, 햇볕도 안 들고 통풍도 안 돼 열매들이 늦게 익는 데다 쉽게 곯기도 한다. 열매를 수확할 때 무성한 이파리 뒤에 숨는 바람에 눈에 안 띄어 놓쳐버리기도 한다. 내년엔 제대로 해야지 다짐하지만, 그 다짐을 실행에 옮긴 적이 거의 없으니 초보 농사꾼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모양새다.
블루베리는 이미 말했듯이 꽃눈 한 개에서 10송이 가까운 열매가 달리는 다산형이기에, 가지마다 꽃눈을 2~3개만 남기고 모조리 따주는 것이 상책이다. 이때도 부지런한 농부가 소출이 적다느니, 봄에 냉해를 입으면 어쩌나 걱정이 앞서 꽃눈을 여러 개 남기다 보면 열매 크기가 작아져 수확기에 후회막급이다.

인생의 수확기에 남겨야 할 것
이미 버스는 떠나갔지만 잘못을 만회할 기회가 한 번 더 온다. 과일 농장에서 필수 작업인 과일 솎아주기가 바로 그 기회다. 송이가 너무 많이 열렸다 싶으면 송이째 솎아주고, 한 송이 안에서도 유독 작은 열매가 보이면 한 알씩 솎아주고, 뒤늦게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경우도 깨끗이 따야 한다. 한데 열매 솎아주기는 너무 많은 시간과 엄청난 인내가 필요한 작업이기에, 꾀가 나서 적당히 게으름을 부리기 마련이다. 그 결과는 끝물 작업 때의 고생으로 돌아온다. 제대로 솎아주었으면 크고 튼실한 열매가 달렸을 텐데, 후회막심이지만 소 잃고 외양간도 안 고치니 매해 부끄러움이 반복되는 것 아니겠는지.
이렇게 끝물을 정리하노라면, 동물이든 식물이든 사람이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마지막 모습은 비슷한 면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끝물처럼 인생 수확기가 끝날 때쯤이면 그때 왜 과감히 상황을 정리하지 못한 채 필요 없는 가지를 남겨두었을까, 그때 왜 욕심이 앞서 누가 봐도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까, 그때 왜 멀리 앞을 내다보지 못한 채 바보처럼 게으름을 부렸을까, 아쉽고 안타깝고 후회스럽고 한스러운 것들이 새록새록 생각날 테니 말이다.
교수 시절 이화여대에서는 매 학기 시작 전, 정년퇴임 교수를 위한 환송 예배 자리를 마련했다. 후배 교수들을 향해 3분가량의 짧은 퇴임 인사를 하는 동안 30여 년 봉직했던 교수 생활이 압축적으로 전달되곤 한다는 사실이 정말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그때마다 퇴임식장의 분위기는 왠지 모를 숙연함과 경건함으로 가득 차곤 했다. 인생의 끝물 앞에서 누구에게 감사를 전해야 할지 생각해보고, 무엇을 남길지 어떻게 버릴지도 찬찬히 정리해보면서, 후회가 남지 않을 ‘깔끔한’ 마무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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