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의 은둔자, 예술을 묻다

입력 2025-11-19 06:00

박종용 화백·내설악백공미술관장, 흙에서 찾은 예술과 삶의 교향곡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설악의 품에 안긴 내설악백공미술관. 이곳에 20년째 칩거하며 자연의 결(紋)을 화폭에 옮기는 박종용 화백이 있다. 50년 넘는 세월 동안 민화와 불화,

조각과 도자기를 넘나들며 ‘전천후 예술가’로 불렸던 그는 이제 흙이라는

원초적 재료를 통해 자신만의 예술 세계인 ‘결의 교향곡’을 완성했다.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소년 가장의 생존 위한 몸부림

강원도 인제, 매봉산 자락 용대자연휴양림 인근에 자리한 내설악백공미술관은 박종용 화백의 작업실이자 지난 20년간 삶의 터전이 되어준 곳이다. 원래 그는 관장직을 수락하며 1년만 머물다 갈 생각이었지만, 설악의 자연이 주는 평온함과 창작의 자유로움에 매료돼 눌러앉았다. 서울의 번잡함을 떠나 이곳에 머물면서 그는 온전히 자신만의 예술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서울에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겁니다. 여기서는 하루에 한 시간 남짓 결재하는 시간을 빼면 온전히 내 시간이죠.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바로 붓을 잡습니다. 밤이 되면 고요 속에서 작업에 몰두하죠. 매주 두어 차례 4시간씩 산에 오르내리며 자연과 호흡하고, 팔굽혀펴기를 천 개씩 합니다. 화가는 팔 힘이 없으면 붓을 못 잡아요. 이 생활이 내 그림의 원천입니다.”

오늘날 그를 만든 것은 유복한 환경이나 정규 예술 교육이 아니다. 오히려 예술과는 거리가 먼,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그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었다. 그는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석탄 기차에 몸을 싣고 상경했다. 서울살이를 시작하자마자 고향에서 아버지의 부고가 들려왔다. 홀어머니의 생활비와 동생들 넷의 학비라는 책임감이 어린 그의 어깨에 얹혔다.

“예술이나 미술이라는 건 잘 몰랐습니다. 그저 내가 가진 기술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죠. 두꺼운 종이를 구해 연하장을 그려 팔았더니 누가 인사동에 가보라고 하더군요.”

인사동에서 ‘꼬마’, ‘촌놈’이라 불리며 그림을 베껴내는 ‘나카마(임화, 臨畫)’로 시작했다. 낮에는 학교에 가고, 수업이 끝나면 공장처럼 그림을 찍어냈다. 그림값을 떼먹으려는 이들과는 주먹다짐도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고, 힘없는 동료 화가들을 대신해 싸우며 그는 인사동의 ‘독고다이’로 불렸다. 치열했던 젊은 시절의 경험은 그의 작품에 강인한 생명력을 불어넣는 자양분이 됐다.

어머니를 향한 애틋함은 그의 삶을 지탱한 또 다른 기둥이었다. 입대를 앞두고 그간 그렸던 작품들을 어머니께 맡겼는데, 생활이 어려울 때마다 팔아 쓰셨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수십 년이 흐른 뒤, 돌아가시기 몇 해 전 어머니는 먼지 쌓인 그림을 꺼내 아들에게 보여주었다.

“차마 아들의 그림을 팔 수 없었던 어머니의 마음을 그제야 알았습니다. 부모가 되고도 어머니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기엔 부족했던 것이죠. 늘 저를 안타까워하시며 잠들 때까지 머리를 쓰다듬어주시곤 하셨어요.”

그런가 하면 아내와 자식에게는 한없이 부족한 남편이자 아버지였다고 털어놓는다.

“어느 날 아들이 아버지와 같이 놀러 갔던 기억이 없다고 하더군요. 단청 작업을 할 때부터 아기 입에 돌가루(석채, 石彩) 안 들어가게 하겠다는 핑계로 집을 비우고 전국을 쏘다녔으니까요.”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 한양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하고는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으로 생활했다. 낮에는 문화예술계 공무직에 종사하고 밤에는 작가로 살며 동서울미술관장, 서울역사프라자미술관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러한 자리들을 두루 거쳐 지금의 내설악백공미술관장직에 이르는 동안 한 번도 붓을 놓은 적이 없다는 박 화백. 그의 예술 세계를 이야기할 때 ‘다재다능함’을 빼놓을 수 없다. 특정 장르에 얽매이지 않으며 시대가 요구하고 시장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려내고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민화, 불화(탱화), 인물화는 물론, 가수 남진의 쇼 간판을 그리기도 했고, 도자기와 조각에도 손을 댔다.

이러한 그의 ‘생계형 예술’은 역설적으로 예술적 스펙트럼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2000년대 들어 그는 또 한 번의 변화를 택했다. 추상 표현 작품으로 전환한 것이다. 그럼에도 기법은 동양화에 뿌리를 두었다.

“캔버스라는 재료는 서양의 것이지만, 흙과 돌가루를 아교에 개어 쓰는 것은 단청이나 불화를 그리는 방식과 같죠. 두껍게 올린 흙으로 모양을 내는 건 도자와 조각의 것이고요. 수십 년간 몸에 밴 것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든 결과입니다.”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설악산의 은둔자, 예술을 묻다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그는 여전히 뜨거운 창작열을 불태운다. 세상의 풍파를 온몸으로 맞서며 붓 한 자루로 버텨온 그의 삶은 한 편의 거친 교향곡과 같다. 그의 대표 연작 ‘결의 교향곡’은 그가 이곳 설악의 자연과 맺은 깊은 교감의 산물이다. 캔버스에 마대(麻袋)를 올리고 그 위에 흙과 아교를 섞어 질감을 쌓는 독특한 기법으로 완성한 작품은 자연 건조 과정에서 저마다 다른 균열을 만들어낸다. 이는 작가의 의도와 자연의 섭리가 결합해 빚어내는 예측 불가능한 예술로, 인간과 자연의 합작품인 셈이다.

“흙이 마르면서 터지고 갈라지는 모습은 매번 다릅니다. 맑은 날과 흐린 날, 또 속도에 따라 결이 달라지죠. 이제야 ‘아, 이것이 예술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변수는 ‘삶의 진짜 결’과도 같다. 이러한 독창적인 기법을 완성하기까지 무려 25년의 세월이 걸렸다. 마음에 드는 흙을 찾고 아교의 농도를 조절하며 수많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비로소 만족스러운 ‘결’을 얻을 수 있었다.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그의 작품에 대해 박우찬 미술평론가는 “그가 찾아낸 자연의 진실은 세상 만물이 지닌 ‘결’의 표현이었다. … 세상 만물은 각기 자신만의 고유한 결을 지니고 있다. … 결은 외모를 꾸미거나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결은 세상 만물이 태어나 오랜 시간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며 만들어진 결과다. 우주가 시작된 이후 지상에 생겨난 세상 만물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해왔다. … 그런 이유로 결은 단순한 외면상의 패턴이 아니라 그 물체의 역사이며 그 자체다”라는 말로 그가 결에 천작하게 된 이유를 짚었다. 비슷해 보이는 한점 한점이 서로 다른 사람과 삶을 은유한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의 화가 인생 시발점인 인사동 화랑가에서 외면받던 흙 그림이 프랑스 경매에서 억대의 가격에 낙찰되며 세간을 놀라게 했으며, 지난 7월 일본 긴자에서 열린 개인전에서도 현지 언론의 찬사와 컬렉터의 주목을 받으며 모든 작품을 판매하는 성과를 거뒀다. 우리나라에서는 뒤늦게 그의 작품 세계를 재조명하고 인정하는 모습이다.

그의 삶은 ‘일’과 ‘수련’의 연속이었다. 은퇴 후의 무료함을 걱정하는 동년배들과 달리, 그는 여전히 할 일이 너무 많아 바쁘다고 말한다. 평생 붓을 놓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그는 후배 작가들과 인생 2막을 준비하는 독자들을 위해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넸다.

“자신만의 고유한 것을 찾아야 합니다. 남의 것을 베끼거나 흉내 내서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치지 않는 열정과 체력이 중요합니다.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하세요. 세상의 변화에 안주하지 말고 자신만의 ‘결’을 만들어가길 바랍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작업실로 들어선 그의 눈빛이 다시 예리하게 빛났다. 화폭 위, 그가 찍어낼 점 하나하나가 모여 또 하나의 장엄한 ‘결의 교향곡’을 완성할 것이다. 삶과 예술을 향한 뜨거운 열정으로 음표를 새기는 그의 교향곡은 보는 이에게 깊은 울림을 남긴다.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더 궁금해요0

관련 뉴스

  • 이서형 작가, CEO에서 예술인으로 인생 3막
    이서형 작가, CEO에서 예술인으로 인생 3막
  • 시간을 초월한 색채의 시인  마르크 샤갈 특별전
    시간을 초월한 색채의 시인 마르크 샤갈 특별전
  • [Trend&Bravo] '국중박' 다음은 '국현미', 시니어 나들이 코스 4
    [Trend&Bravo] '국중박' 다음은 '국현미', 시니어 나들이 코스 4
  • 인생 2막의 변주곡
    인생 2막의 변주곡
  • 회화의 한계에 맞선, 구순 작가의 여전한 실험 정신 ‘하종현 5975’
    회화의 한계에 맞선, 구순 작가의 여전한 실험 정신 ‘하종현 5975’
저작권자 ⓒ 브라보마이라이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브라보 스페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