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 들수록 죽음은 먼 미래가 아니다. 그럼에도 ‘유언’이라는 말만 나오면 죽음이 성큼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져 자꾸 머뭇거리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유언장을 써둔 어르신들은 한결같이 “오히려 마음이 가볍다”고 이야기한다. 유언은 죽음을 준비하는 문서가 아니라, 남은 삶을 홀가분하게 살아가기 위한 문서다. 무엇을 남길지 정리하는 일은, 결국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다시 묻는 일이기도 하다.
형식 하나로 물거품이 될 수 있다
법적으로 인정받는 유언 방식은 자필증서, 녹음, 공정증서, 비밀증서, 구수증서 다섯 가지다. 형식을 제대로 갖추지 않으면 아무리 진심을 담았어도 효력이 없다. 가장 흔한 자필증서 유언은 전체 내용과 날짜, 주소, 이름을 손으로 쓰고 도장까지 찍어야 한다. 컴퓨터로 작성해 서명만 손으로 하거나 날짜를 정확히 쓰지 않고 ‘몇 월 길일’이라 적은 유언장이 실제로 무효 처리된 바 있다. 평생 고민해 남긴 뜻이 사소한 형식 하나로 물거품이 되는 셈이다. 번거롭더라도 공증인과 증인 두 명 앞에서 작성하는 공정증서 유언이 더 안전하다.
유언은 한 번 써두고 넣어두는 문서가 아니다. 재산과 가족 사정,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몇 년에 한 번씩 꺼내 점검하길 권한다. 가장 나중에 쓴 유언이 앞선 것을 대신하니, 완벽한 한 장을 남기겠다는 부담보다 그때그때 진심을 갱신해나간다는 마음으로 작성하길 권한다. 요즘은 재산을 은행 등에 맡겨 분배 방식과 시기를 스스로 설계하는 ‘신탁’을 이용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유언이 없다면, 법이 대신 나눈다
유언장이 없으면 ‘법정상속분’대로 재산을 나눈다. 배우자는 항상 상속인이 되고, 자녀와 함께 상속받을 때는 자녀 몫의 1.5배를 받는다. 가령 유산이 9억 원이고 자녀가 셋이면 배우자는 3억 원, 자녀는 각각 2억 원씩 받는 식이다. 다만 이 비율은 유언이 없을 때를 대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일 뿐, 누가 부모를 더 정성껏 모셨는지는 담아내지 못한다.
게다가 자녀에게 최소한의 몫으로 ‘유류분’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이는 부모를 방치하거나 학대한 자녀일지라도 법적으로 보장받는 모순이 있었다. 정성껏 모신 자식과 그렇지 않은 자식이 결국 같은 금액을 받으니 ‘불효자 양성법’이라는 불만도 있었다. 최근 헌법재판소가 이를 위헌으로 판단한 뒤(2026년 2월 12일 통과, 즉시 시행) 개정된 민법은 형제자매의 유류분을 폐지했고, 부양의무를 저버린 상속인은 가정법원이 상속권을 박탈할 수 있게 했다. 오래도록 부모 곁을 지킨 자식이 이제야 법으로도 존중받게 된 것이다.
진짜 유산은 통장이 아니다
형식을 아무리 잘 갖춰도 물질적 유산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정신적 유산이다. 그림책 ‘여우나무’에는 늙은 여우가 세상을 떠난 뒤, 숲속 동물들이 모여 여우와 함께한 추억을 하나씩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그 추억이 쌓이고 쌓여 여우가 묻힌 자리에 나무가 자라나고, 그 나무는 다시 동물들의 보금자리가 된다. 여우가 남긴 것은 재산이 아니라 사랑과 추억이었고, 그것이 가장 오래가는 유산이 됐다.
부모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도 다르지 않다. 재산의 분배가 아니라 자녀들이 다투지 않고 화목하게 사는 모습이다. 또한 부모가 서로 의지하며 사이좋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자식에게는 최고의 선물이다. 자식은 부모의 잔소리가 아니라 등을 보며 자란다. 빌 퍼킨스의 저서 ‘역전하는 법(원제:Die with Zero)’에서는 죽을 때까지 미루지 말고 다 쓰고 가고, 유산도 몰아 남기지 말고 자녀가 돈이 필요한 젊은 시절에 조금씩 나눠주라 말한다.
우리 집 이야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우리 삼 남매는 아버지의 이름을 딴 ‘한낙원과학소설상’을 제정해 지금까지 12번 시상식을 해왔다. 독립운동을 했던 할아버지와 한국 SF 소설의 개척자로서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과학자의 꿈을 심어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신진 SF 작가들을 후원하며 그들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있다. 아버지 탄생 100주년(2024년)에는 한국아동청소년학회에서 기념 학회까지 열어줬다. 큰돈을 물려주지는 못했지만 100년 뒤에도 기억해주는 이들이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정신적 유산이 아닐까.
남기고 싶은 것
금전적 유산은 세대를 넘기기 어렵지만, 그 안에 담긴 정신과 사랑은 훨씬 오래 기억되고 이어진다. 우리가 진짜 남겨야 할 것은 통장의 잔고가 아니라 함께 보낸 시간 동안 쌓인 사랑과 추억, 그리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갈 자녀일 것이다. 구체적인 상속 준비는 세무사와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유언장 한 장 준비하는 오늘의 작은 걸음이 남은 이들에게 가장 크고 아름다운 나무 한 그루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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